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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남2025-05-23 16:51:34

모든 길은 에테르로 통한다

<릴리 슈슈의 모든 것>

 <릴리 슈슈의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아오야마 신지의 <유레카>나 에드워드 양의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을 끌어들이는 것은 너무나 피상적인 접근일까. 아닌 게 아니라, <릴리 슈슈의 모든 것>에는 두 영화를 은근히 연상시키는 장면들이 있다. 우선 영화의 초반부, 유이치의 부모님이 보는 TV 뉴스에는 청소년들이 버스를 납치한 사건이 보도되고 있다. 이 대목에서 <유레카>를 떠올리는 일이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공교롭게도 <유레카>와 <릴리 슈슈의 모든 것> 사이에 니시테츠 고속버스 탈취 사건이라는 실제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의 범인은 이지메로부터 비롯된 정신질환을 앓던 17세 청소년이다). 다음, 유이치가 호시노를 죽이는 장면은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에서 샤오쓰가 밍을 죽이는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물론 그것을 찍은 방식은 에드워드 양의 방식과는 정반대이지만 살인이 일어나는 맥락과 상황이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과 꽤 유사하다. 사실 에드워드 양은 <릴리 슈슈의 모든 것>과 정말로 관련이 있는 감독이다. 에드워드 양이 1990년대에 관금붕과 함께 기획했던 ‘Y2K 프로젝트’가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그러니 이 영화에서 <유레카>나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을 떠올리는 것이 마냥 억지는 아닌 셈이다.  

릴리슈슈의 모든 것] :: 이와이 슌지 감독은 왜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이라는 영화 제목을 지었을까? : 네이버 블로그

 

 <유레카>와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시대적 맥락 위에서 존립하는 영화들이다. <유레카>라는 영화가 놓인, 그리고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이 배경으로 삼은 시대의 서사를 무시한다면 두 영화는 반쪽짜리다. 왜냐하면 두 영화에서 인물들의 서사는 그것이 놓인 시대의 서사와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힘을 원동력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영화에서 서사적 힘의 방향은 시대에서 개인으로의 방향이다. <유레카>는 명백한 포스트 사린 테러 영화로서 초반부 버스 납치 사건 이후 생존자들의 삶을 다루고,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시대적, 정치적 카오스가 개인의 삶 속으로 조용히 스며드는 과정을 다룬다. 두 영화 속에서 언젠가 개인의 서사가 시대의 서사에 영향을 미치는 순간에도 그 순환의 시작은 시대의 서사다. 개인의 일탈 행위가 시대의 어두움을 만들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유레카(ユリイカ, 2000) : 네이버 블로그

 

 

 그렇다면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은 어떠한가? 개인과 시대의 서사라는 관점에서 이 영화는 <유레카>,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의 계보 아래에 있는가?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을 좋아하는 이유는 이 영화가 그런 것에는 일체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의도적으로 시대성과 거리를 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목적이 거기에 없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이 영화가 시대적 서사에 관심이 있었다면 초반 버스 납치 사건을 더 비중 있는 서브플롯으로 다뤘을 것이다. 혹은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은 하나의 사회실험과 같은 영화가 될 수도 있었다. ‘릴리 슈슈’라는 가상의 가수와 그 게시판 홈페이지를 만들고, 게시판의 글을 바탕으로 소설을 집필한 뒤 그 소설을 원작 삼아 영화를 제작하였다는 유명한 제작 비화는 영화 속에 반영될 여지가 많았다. 이를테면 릴리 슈슈의 콘서트 시퀀스는 유이치와 호시노가 겪는 온라인 세계와 오프라인 공간 사이의 괴리를 사회적 문제로 확장할 수 있었던 장면이다. 그래서 이 장면은 일본의 오타쿠 문화를 비판하거나 사회적 문제로서의 이지메를 조명하는 장면으로, 더 나아가서는 그 둘을 이으며 개인과 시대 간 비극의 순환을 묻는 장면으로 만들 수도 있었다. 실제로 유이치가 스크린 속의 릴리 슈슈를 가만히 바라보는 장면, 릴리의 등장을 외친 이후 모인 수많은 인파 속에서 호시노를 죽이는 장면은 관객에 따라서 당시 일본 사회에 대한 은유로 읽을 수도 있는 장면이다. 그러나 이와이 슌지는 그 장면 이전에도, 이후에도 시대적 서사에 전혀 관심을 주지 않는다. 언급한 장면에서 시대적 서사에 대한 함의가 느껴지는 것은 감독이 의도하지 않은 우연에 불과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낯선 운명 이야기

 

 이와이 슌지가 관심 있는 것은 오로지 ‘에테르’다. 좋게 말하면 어떻게 하면 에테르를 영화적으로 구현할 수 있을 것인지, 나쁘게 말하면 어떻게 하면 영화적 겉멋을 에테르라는 단어로 환원시킬 수 있는 것인지에만 관심이 있다. 어느 쪽이든 이 영화는 완전히 개인적인 영화다. 일단 그 전제에 동의하면 이 영화가 개인적인 고통을 표현하는 방식을 윤리적으로 비판할 수는 있다. 또 이 영화의 스타일에 대해 겉멋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개인적으로 이 비판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동의한다. 자연광이나 풀밭을 담은 몇몇 장면과 릴리 슈슈의 음악이 경탄스러운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에테르의 비가시성을 인상주의 음악의 대표격인 드뷔시와 연결짓는 시도는 너무나도 얄팍하다). 그러나 그 비판을 받아들이더라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은 그 형식이 적어도 일관되게 나쁘다는 점이다. 이와이 슌지가 상정한 전제 아래서 고통의 근원을 시대적인 것에서 찾는다면 그것은 핑계대는 것이다. 왕가위와 비교하자면 둘은 스타일리쉬함을 공유하지만 시대적일수록 좋았던 왕가위 영화와는 달리 이 영화는 개인적일수록 좋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며 <유레카>나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을 끌어들이는 것은 피상적인 접근은 아닐지라도 조금은 현학적인 접근일 수도 있다. <릴리 슈슈의 모든 것>에 대한 판단은 거기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영화의 그 일관된 개인성이 더없이 좋다.

작성자 . 윤동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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