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5-05-23 10:58:16
지금 봐도 뻔하지 않은 초능력 영화 5선
<델마>부터 <캐리>까지

슈퍼 히어로, 초능력 영화가 이젠 너무 익숙해진 요즘이죠.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영화들이 지겨울 여러분을 위해 지금 봐도 뻔하지 않은 초능력 영화 5편을 준비했습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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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결의 사랑에 기대어
SYNOPSIS.
뉴욕 맨해튼에서 홀로 외롭게 살던 ‘도그’는 TV를 보다 홀린 듯 반려 로봇을 주문하고 그와 둘도 없는 단짝이 되어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해수욕장에 놀러 간 ‘도그’와 ‘로봇’은 예기치 못한 상황에 휩쓸려 이별을 맞이하게 되는데··· “기다려, 내가 꼭 다시 데리러 올게!”
POINT.
✔️ 대사 없는 애니메이션인데, 대사 공백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촘촘한 연출력!
✔️ 색감도 아름답고 음악도 귀에 딱 붙는 명작
✔️ 도그와 로봇의 관계가 정말 귀엽고 사랑스럽고 따뜻하고 몽글몽글... 이건, 사랑입니다
✔️ 스페인 애니 낯설다고? 배경은 뉴욕 맨해튼! 감독 오피셜, 뉴욕에게 보내는 러브레터이자 뉴욕 오마주라고 해요. 그리고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정서가 펼쳐져요.
✔️ 칸영화제 특별 상영에서 최초 공개되어, 지금은 아카데미 장편 애니메이션 후보로 노미네이트! 쟁쟁한 기술력의 작품들 사이에서 해맑게 웃고 있는 작품을 만나 보세요
이 영화의 시놉시스를 읽는 순간, 보기도 전에 마음이 퐁당 녹았다. 따뜻한 관계와 갑작스러운 이별... 그 애틋함을 사랑하지 않는 방법 같은 건 모르니까. 뚜껑을 열어 보니, <로봇 드림>은 그런 기대를 기분 좋게 충족시키는 영화인 동시에, 뜻밖의 면면으로 기대를 기분 좋게 배반하는 영화이기도 했다.
어떤 사랑은 눈 마주치는 순간 시작된다
도그를 비롯해 이 영화의 등장인물은 모두 동물로 표현되고 있지만,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우리는 어렵지 않게 도그에게 감정 이입을 할 수 있다. 차갑고 어두운 도시의 밤, 2인용 게임도 혼자 해야 하는 도그는 외로움을 감출 수 없는 캐릭터다. 창문으로 보이는 이웃집 가족의 단란한 시간을 부러워 하기도 하고, 레토르트 식품을 혼자 데워 먹기도 하면서, 그는 외로운 생활을 채워 가고 있다.
그러다 문득 텔레비전 광고 속에서 보게 된 한 마디. "외로우십니까?" 그리고 마치 홀린 듯이 '반려 로봇'을 주문한다. 그냥 지나치려면 지나칠 수도 있었을 광고를 보게 된 것, 그런 순간도 어쩌면 운명적 순간이라 할 수 있을까? 답은 광고 이후의 관계에 달렸을 것이다. 두 존재가 특별하게 맞닿는다면, 그 시작점이 어떻게 운명이 아닐 수 있겠어.
'친구'를 의미하는 스페인어 Amigo/Amiga를 연상케 하는 (이탈리아어로 친구가 Amico/Amica이기도 하다) 로봇이 배달되고, 도그는 조립을 시작한다. 마침내 두 존재가 서로 눈을 마주쳤을 때, 둘에게는 편안한 미소가 떠오른다. 어떤 사랑은 그렇게 눈 마주치는 순간 시작된다. 당연한 것처럼, 더없이 자연스럽게.
둘은 더없이 행복하다. Earth, Wind & Fire의 명곡 <September>는 곧 둘의 주제가가 된다. 서로 사랑하는 이들은 도시의 주인공이다. 더이상 도그에게 어둡고 차가운 밤은 없다. "우리가 밤에 춤을 출 때 별들이 어두운 밤을 걷어가던 걸 기억하나요?" 노래 가사처럼 이제 그의 일상은 반짝거리고 사랑으로 가득하다.
그리움은 사랑의 그림자
그러나 둘의 관계는 신나게 해변을 찾았던 어느 날, 갑작스러운 이별로 귀결된다. 이후 둘이 서로를 그리워하는 시간이 시작된다. 장면 하나하나가 정서를 어찌나 고스란히 담아내는지, 내가 연애하다가 헤어진 기분이 들 정도로 도그와 로봇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꿈결에도 서로를 그리워하는 시간. 어쩌면 꿈처럼 기묘하게 정직한 것이 또 있을까? 트라우마처럼 남은 꿈에도, 무지개와 꽃으로 아름다운 꿈에도, 서로가 어른거린다. 그리움은 사랑의 해질녘 그림자가 아닐까. 사랑이 긴 만큼 더 길고 검게 늘어져, 둘을 놓아주지 않는다.
어쩌면 사랑은 돌봄의 방법을 아는 것
로봇과 도그는 서로의 유일무이한 친구로서 우정을 주고 받았을 수도, 아니면 독점적인 사랑을 주고 받는 연인 같은 관계였을 수도 있다. 둘 중 어느 쪽으로 받아들여도 이상하지 않거니와, 관계를 무엇이라고 명명하는지가 중요하지도 않다. 중요한 건 둘이 서로 함께 있는 시간을 온전히 기쁘게 즐겼고, 헤어지고서는 깊이 그리워했다는 것. 웬만한 로맨스 영화보다 깊게 그 기쁨과 슬픔을 전달한 영화는 이내 결말로 우리를 데려간다.
우리는 관계에서 배운다. 처음 로봇이 도그의 손을 너무 꽉 잡아 아팠지만, 이내 적절한 세기로 손을 잡을 수 있게 된 것처럼. 만남을 통해서도, 만남이 지속되는 시간을 통해서도, 헤어짐을 통해서도, 헤어짐 이후의 시간을 통해서도 우리는 배운다. 도그와 로봇이 주고받는 마음과 달라지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이내 사랑의 기쁨과 슬픔 사이에 하나를 슬며시 추가하고 싶어진다. 그건 돌봄이다. 서로를 어떻게 돌보아야 하는지 아는 것. 돌봄 없는 사랑은 모래 위에 지은 성 같다.
2시간 넘는 영화가 남발하는 세상에, 100여분의 산뜻한 러닝타임 안에서 영화는 그 모든 감정들을 고스란히 쏟아내고, 별사탕을 가득 받은 사람 같은 기분이 되어 기분좋게 영화관을 떠나게 만든다.
그런데 모두가 별사탕처럼 사랑스러운 것들만 끌어안고 있는 가운데, 나는 어쩐지 도그와 로봇에게서 자꾸 인간과 반려동물의 관계를 읽어내게 된다. 동물이 숱하게 유기되고 학대 당하는 사회에 살기 때문이겠지만, 서로를 기억하고 주고받는 감정은 분명 대등함에도 불구하고 한쪽이 한쪽을 구매하는 형태로 이 관계가 시작되었다는 점이 어쩐지 마음에 자꾸 남는다.
하긴, 반려동물과 주고받는 감정은 우정과 사랑 모두를 아우르는 커다란 마음이니, 그렇다고 해도 꼭 이상하지는 않겠다. 내게도 몇 년째 꿈결에 그리워하는 동물 얼굴들이 있으니까.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얼굴들을 생각하면, 로봇과 도그의 마음이 더욱 애틋하게 느껴진다. 헤어지지 말자. 이 위험한 도시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일상의 낭만과 행복을 들이마시자. 우리만의 노래를 틀자. 그리고 혹시 헤어진다면, 꼭 다시 행복해지자.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초청받아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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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들의 천국은
자유와 번영의 나라가 반듯하게 서 있는 곳. 이곳은 불과 몇 백 년 전까지 황량한 땅이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온 이들 바로 뒤에는 경제적 자유를 찾아온 이들이 있었다. 미국은 그렇게 태어났다. 다른 모든 건국처럼 이 건국에도 명과 암이 있었다.
자유와 금을 향한 거침없는 행보는 명암 모두 강렬했다. 역사책뿐 아니라 영화사에도 깊은 흔적을 남겼다. 서부의 휑한 땅에 있는 마을, 주로 보안관으로 묘사되는 총잡이 히어로, 문제를 일으키는 무법자, 풀이 굴러가는 벌판에서의 결투,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여유롭게 휘파람을 불거나 술잔을 들이키거나 석양 너머로 떠나는 히어로…
역사는 흘러가고 영화도 그렇다. 카우보이나 보안관이 총을 쥐고 나서는 서부극은 이미 클리셰가 되다 못해 비틀고 뒤집는 것조차 유형화되었다. 서부극에서 새로운 것이 더 나올 수 있을까 싶지만, 서부극의 영향은 여전히 어딘가에서 점점이, 새로이 흐르고 있다. 서부극의 장르적 재미를 영화사에서 제할 수는 없지만, 서부 개척시대 자체에 대해서는 생각이 많아지는 이들의 눈에는 반가운 흐름이다. <노매드랜드>나 <미나리>에서 서부극의 냄새를 (기존 서부극에서라면 절대 등장하지 못했을 이들의 얼굴이기에 더욱) 신선하게 맡을 수 있다. 그리고 여기, 서부극이라는 장르에 부드러운 우유를 붓는 <퍼스트 카우>를 만난다.
영화는 서부 개척시대를 정면으로 마주본다. 하지만 여기에 낭만의 색깔은 한 겹 사라져 있다. 서부 개척시대는 황금과 총으로 거침없이 나아간 이들만 존재한 시대가 아니다. 광야에 가까운 땅을 밟는 이들의 신발 밑창이 진흙탕뿐 아니라 어떤 이들의 삶까지 짓밟는 시대였다. 기존 서부극에서는 진흙탕보다 크지 않은 존재감으로 그려지던 이들의 삶.
<퍼스트 카우>의 두 주인공 쿠키와 킹 루도 어쩌면 그런 존재들이다. 쿠키는 사냥꾼들과 함께 다니며 식사 담당을 맡고 있는데, 사냥에도 그들이 퍼붓는 폭력에도 익숙하지 않은 것 같다. 덫을 놓아 동물을 사냥하기보다는 숲 속을 걸으며 버섯을 딸 때 전심으로 집중한 모습이고, 그때마다 아름다운 음악이 흘러나온다. 러시아 강도들에게 쫓기던 초면의 킹 루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도와줄 만큼 따뜻한 사람이다.
킹 루는 서부극에서는 드문 황인종의 얼굴을 하고 있다. 거기에도 중국인이 사냐는 질문에 "모두가 살지", 사실상 "아무나 다 살지"에 가까운 현답을 덤덤하게 던진다. 인종적으로도 홀로인데다 쫓기는 신세지만, 기회를 보아 영민하게 움직일 줄 알고 강단 있는 성격이다.
쿠키와 킹 루는 어느 마을에서 우연히 다시 만난다. 킹 루는 생명의 은인이 된 쿠키를 자기 집으로 초대한다. 술을 나눠 마시고 묵묵히 집안일을 함께 돌보던 두 사람은 어느새 같이 지내게 된다. 그때 마을의 유지 팩터 대장은 제대로 된 티 타임을 갖겠다고 암소를 데려오고, 쿠키와 킹 루는 거기서 돈 벌 기회를 모색한다. 우유가 없는 마을에서 유일하게 우유를 넣은 케이크라면 떼돈을 벌 수 있겠지. 두 사람은 밤에 몰래 우유를 짜 와서 반죽에 넣고 튀겨 튀김빵 같은 케이크를 만들어 판다. 꼬리가 길어져도 밟히지 않을 수 있을까?
의기투합한 두 사람의 이야기는 얼핏 야심차 보인다. 그러나 백인 남성들이 총 들고 싸우던 배경에서, 케이크를 만들어 파는 비주류 인종의 두 사람이니, (영화에 직접 드러나지는 않지만, 쿠키의 성은 '피고위츠'로 감독은 인터뷰에서 쿠키가 유대인임을 밝혔다.) 사실 그렇게 대단히 야심찬 이야기도 아니다. 게다가 이야기는 잔잔한 우정의 빛깔을 하고 풍광에 스며든다.
“새에게는 둥지, 거미에게는 거미줄, 인간에게는 우정”이라는, 영화 시작 시 나온 윌리엄 블레이크의 구절은 이들의 행동 곳곳에서 묻어난다. 인간에게는 우정이야말로 집이 되어준다는 포근한 구절은 쿠키와 킹 루의 관계뿐 아니라, 쿠키와 젖소 사이에도 존재한다. 사람에게 말을 걸듯 소에게도 다정하게 안부를 묻고 감정을 전하는 쿠키의 다정한 눈은 소의 그것과 닮아 있다.
게다가 영화 중간중간 비춰지는 '인디언' 원주민들의 모습은 착취나 왜곡 없이 잔잔하기만 하다. 말간 눈으로 카메라를 바라보는 어린아이부터 덩치 큰 팩터 대장의 집사까지, 다양한 인물들이 '존재한다'. 이야기 진행을 위한 도구가 아닌, 그 땅의 거주자로.
“런던의 맛”과 “파리의 유행”에 곁눈질하며 몸만 여기 있는 ‘나으리’들의 모습과 대비된다. 이들이 사람을 보는 시선은 딱 두 가지다. 상위의 사람이라면 정치의 상대고, 하위의 사람이라면 그저 당연히 착취할 수 있는 노동력이다. 모두 제 배를 불리기 위한 수단으로만 바라보는 것이다.
돈을 추구하는 것은 킹 루나 쿠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타인의 자리까지 빼앗으며 돈을 추구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나으리’들은 총과 칼로 황야를 “개척”하고 그 자리에 당연하다는 듯이 군림한다. 팩터 대장의 집이라는 작은 공간에서도 이들이 상위를 차지하고 앉은 계층도가 층층 드러난다.
소를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다. 런던에서처럼 티 타임을 즐기고 싶다는 생각에, 우유 맛이 그리워서 소를 들여왔지만 팩터 대장에게 그 소는 혈통의 산물이다. 무슨 혈통과 무슨 혈통을 교배한, 우수한 소. 소의 본질은 바라보고 있지 않다. 킹 루나 쿠키, 잠깐씩 등장한 인디언들처럼 자연스럽게 있는 그대로 상대를 바라보는 눈은 이들에게 없다.
무법자outlaw만이 악당은 아니다. 치안이 불안한 서부극의 세계에서 법망을 어그러뜨리고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자들만이 악당은 아니다. 때로 악당은 가장 견고한 치안의 얼굴, 가장 단정한 법망의 얼굴을 하고 올 수도 있다. 이분법적으로 선악을 분류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서부극의 세계에서 배제되던 인물들이 둥실 떠올라 있는 이 영화를 보다 보면 현실의 서부세계에서 과오를 저지른 얼굴들이 떠오른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 토해냈던 마음처럼, 어디선가는 토해져야 할 마음이 여전히 있다는 것을.
이 마음을 그저 서부 백인 남성들의 것만으로 치부하고 마음 편하게 다리 뻗을 수 있을까.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 되어버린, 동물을 혈통으로 이름 붙이는 데 익숙해진 현대인으로서, 19세기 서부극에서 동시대의 무언가를 본다. 이들이 총과 칼로 이룬 “당신들의 천국” 한구석에 나도 살고 있다. 어쩌면 이 당신들의 천국은, 누군가가 바람처럼 가만히 존재하던 자리를 짓누르고 들어왔는지도 모른다. 꿈꾸던 이들이 잠자는 위에 쌓아 올린 것인지 모른다. 발끝을 내려다 본다. 내 디딘 발 아래에는 무엇이 묻혀 있는가.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에서 시사회에 초대받아 감상하고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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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물>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오마이뉴스에서 [영화 속 감정 읽기] 라는 연재를 합니다. 영화리뷰안에 각 인물이 대표하는 감정을 적고 그에 대한 여러 생각들을 소개할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이 리뷰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을 바라볼 때, 그 안의 모든 것을 다 고려해서 판단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건 불가능할 것이다. 물론 어떤 다툼이나 논쟁이 벌어졌을 때, 제3자의 입장에서 양쪽의 이야기를 모두 듣긴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판단을 한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그리고 지시도 한다. 너는 어떤 식으로 해야 하고 또 너는 다른 식으로 해야 한다는 식의 조언들. 하지만 아무리 모든 것을 이해하고 판단했다고 생각한다고 해도 우리의 판단에는 빠지는 부분이 생길 수밖에 없다.
어쩌면 그 자체가 삶의 한 부분일지도 모른다. 어떤 일이 일어나면 내면에 일어나는 모든 전후 사정을 다 알 수는 없다. 오직 그 안에 들어가 있던 당사자만이 그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제3자적 입장에서는 아무리 애를 쓰고 노력해도 정확히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런 한계가 우리가 흔히 오해라고 부르는 판단을 낳는다. 그렇게 만들어진 오해는 눈덩이 같이 커져 누군가를 괴물로 만들기도 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괴물>은 이 영화를 보는 모든 관객들에게 세 번에 걸쳐 묻는다. 과연 누가 괴물인가?
첫 번째 감정 - 엄마의 걱정
미나토(쿠로카와 소야)의 엄마 사오리(안도 사쿠라)는 싱글맘이다. 남편의 사고사 이후 혼자 아이를 키우는 그는 아들을 잘 키우기 위해 무척 애쓴다. 초반에 등장하는 엄마와 아들의 모습은 큰 문제없이 평범해 보인다. 맨 첫 장면에서 멀리 떨어진 한 건물에서 불타는 것을 같이 바라보는 사오리와 미나토의 모습에서 어떤 걱정이나 불안을 느낄 수 없다. 하지만 그 장면 이후, 미나토의 이해하지 못할 행동들이 이어진다. 신발 한 짝을 잃어버리거나, 머리카락을 자르는 행동은 엄마 사오리의 걱정을 조금씩 끌어올린다.
사오리의 물음에도 미나토는 특별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 그냥 조용히 씻거나 앉아 있을 뿐이다. 사오리는 더 캐묻지 못하고 마음속의 걱정을 그냥 쌓아둔다. 그러다 어느 날 사오리는 미나토의 학교에 상담차 방문하게 되고 조금은 이상한 학교 교장선생님과 주변 선생님들의 반응에 걱정이 더욱 커진다. 이런 사오리의 걱정은 그 상황을 선생님들, 그중에서도 미나토의 담임 선생님인 호리(나가야마 에이타)를 의심하게 만든다.
사오리는 왜 이렇게 걱정을 내려놓지 못할까. 혼자 아이를 키우지만 본인의 아이를 잘 알지 못한다는 조바심이 그 걱정을 더욱 크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오리의 걱정이 폭발하는 장면이 있다. 미나토가 다쳐 병원 갔던 날, 병원을 나서면서 아무렇지 않은 듯 아들을 대하지만, 아들이 별 반응이 없자 갑자기 폭발하듯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영화 속에서 사오리의 감정이 가장 폭발하는 장면이자 그가 가지고 있던 마음속의 걱정이 겉으로 온전히 드러나는 장면이다. 사오리는 아들에게 직접 답을 찾지 못하자 학교 선생님에게서 그 답을 찾는다. 그 답은 걱정이라는 감정에서 나온 것이고, 엄마 사오리의 관점에서는 가장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여기서 영화는 첫 번째로 묻는다. 선생님은 괴물이 맞을까?
두 번째 감정 - 선생님의 답답함
미나토의 담임인 호리는 미나토의 학교에 새로 부임한 선생님이다. 그의 시점에서도 시작은 화재가 난 건물 근처다. 그는 꽤 좋은 마음을 가진 선생님이다. 아이들에게 다정하고 최대한 이해해 보려 노력하는 모습이 그의 이야기에 담겨있다. 자신의 반 아이들을 모두 세심하게 챙기지만, 그중에서도 미나토와 요리(히이라기 히나타)가 자꾸 그의 눈에 들어온다. 때론 미나토가 물건을 집어던지기도 하고, 요리는 화장실에 갇히기도 한다. 그걸 이해해보려 하지만 아이들은 특별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호리의 시점에서 그는 잘못한 것이 없다. 하지만 미나토와 의도하지 않은 충돌로 그의 엄마 사오리를 만나게 되면서 그는 조금씩 억울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자꾸만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 같은 미나토를 유심히 관찰하고 주변 아이들에게도 물어보지만 그의 답답함을 풀어줄 학생을 만나지 못한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폭력적이고 편향적인 선생님이라는 판단을 받고 학교에서 잠시 떠나는 일이다. 그런 답답한 상황 속에서 그를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은 곱지 못하고, 여자친구도 그를 떠난다.
아마도 이 영화에서 가장 답답하게 느껴지는 파트가 선생님 호리의 이야기일 것이다. 그는 이 이야기 속에서 걸스바에 다니는 선생님이라는 나쁜 소문의 주인공이 되고도, 특별한 변명조차 할 기회가 없다. 미나토의 엄마 사오리에게도, 교장선생님에게도 이야기를 해보았지만 그의 답답함은 풀리지 않는다. 괜히 미나토나 다른 아이를 다그쳐보지만 아이들은 입을 꾹 닫고 있다. 답답한 그가 학교 건물 옥상에 올라가는 모습에서 그의 답답한 마음이 무척이나 측은하게 느껴진다. 그의 허탈하고 답답한 표정을 짓는 장면을 보여주면서 영화는 두 번째로 묻는다. 호리를 억울하게 만든 학생 미나토는 괴물이 맞을까?
세 번째 감정 - 아이들의 사랑
마지막 파트의 이야기는 두 아이의 이야기다. 미나토와 요리의 감정이 영화의 후반부를 꽉 채우고 있다. 사오리와 호리의 시점에서는 이 두 아이들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이 영화를 연출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의도적으로 감췄던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일상을 살면서 단편적인 정보만을 가지고 무언가를 판단할 수밖에 없다. 사오리는 아들에 대한 걱정으로 제대로 된 사실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잃었고, 호리 역시 자신의 답답함 때문에 진짜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영화 속 인물들처럼 우리도 진실이 무엇인지 보단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 생각을 바탕으로 사안을 볼 수밖에 없다.
이야기 속에서 요리는 여자 아이들과는 잘 지내지만, 남자아이들에게는 놀림의 대상이 된다. 자신을 조금 다르다고 생각하는 요리는 집에서도 아버지에게 나쁜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요리는 특별히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평온해 보이는 그의 표정이 더욱 미나토의 호기심을 자극했는지도 모르겠다. 미나토는 어느 순간부터 요리에게 마음이 가기 시작하고 그 주변에서 맴돌다가 결국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버린다. 두 사람이 같이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그들의 마음엔 친구로서 좋아하는 것 이상의 감정이 시작된다. 그건 미나토에게 엄청난 혼란을 가져온다.
그럼 그걸 보는 관객들은 말할 수 있다. 미나토는 괴물이 아니다. 요리도 괴물이 아니다. 같은 남자인 두 사람은 그저 서로를 사랑한 것뿐이다. 그것이 비정상이라는,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는 미나토에게 강력한 반발심과 혼란을 가져다준다. 그것은 미나토의 학교 생활과 가정생활에 영향을 주었고, 그것에서 파생된 감정이 바로 엄마 사오리의 걱정과 선생님 호리의 답답함이다. 그 모든 소용돌이 안에서 미나토는 그 모든 감정(걱정, 답답함, 혼란 그리고 사랑)을 홀로 감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는 마지막으로 묻는다. 그럼 진짜 괴물은 누구인가?
훌륭한 이야기 구조가 만들어내는 강력한 울림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영화가 묻는 질문에 답을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쉽게 대답할 수 없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미나토와 요리가 밝은 햇살 아래에서 웃고 뛰어가는 장면이다. 그것이 행복한 결말인지 아니면 그들의 상상 속에서만 있는 일인지는 보는 관객들의 판단에 달렸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모든 이야기를 보고 나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정확히 알게 되었다. 그리고 두 아이들의 마음과 사오리의 마음, 호리의 마음을 모두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 자체가 행복한 결말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총 세 개의 파트로 구성된 이 이야기를 그대로 따라가는 것은, 관객이 각 인물을 오해하게 만드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도 건물의 화재에 대한 소문이나, 선생님 호리에 대한 소문 등 확인되지 않은 정보들이 돌아다니는 모습이 종종 나온다. 결국 누구도 그 당사자의 상황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면 쉽게 오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영화 <괴물>은 실제로 관객에게 주는 정보를 이야기에서 조금씩 빼면서, 그런 오해와 잘못된 정보로 인해 발생하는 여러 가지 나쁜 감정에 대한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다운로드하였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https://www.notion.so/Rabbitgumi-s-links-abbcc49e7c484d2aa727b6f4ccdb9e03?pvs=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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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든페이스 | 에로스 뒤에 숨은 소유욕을 파헤치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상 편지만 남겨두고 갑자기 자취를 감춘 첼리스트 '수연'(조여정). 수연의 약혼남이자 그녀가 속한 오케스트라 지휘자인 '성진'(송승헌)은 그녀 자리를 비워둔 채로 고통 속에서 기다린다. 하지만 수연의 잠적이 길어지자 그는 그녀의 후배 첼리스트 '미주'(박지현)를 대체자로 뽑는다. 매일 같은 연습 중 서로에게 강한 끌림을 느낀 성진과 미주는 비 오는 밤, 성진과 수연의 신혼집에서 서로의 욕망에 휩쓸린다.
에로스의 두 얼굴, 성애와 소유욕
그리스 신화를 수놓은 신 중에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있다. 바로 사랑의 신, 에로스(큐피드)다. 비록 12주신에 포함되지는 않지만, 그를 간과할 수는 없다. 에로스의 황금 화살이 아니었다면 파리스와 헬레네가 사랑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고, 트로이 전쟁도 없었을 테니. 그의 기원은 여러 전승이 전해진다. 일반적으로는 아프로디테와 아레스 사이의 아들로 알려졌지만, 때로는 카오스만큼 오래된 고대의 신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플라톤의 '향연'은 또 다른 기원을 소개한다. 그에 따르면 에로스는 풍요의 남신 포로스와 결핍의 여신 페니아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머니를 닮아 늘 결핍을 느끼기에 아버지의 풍요로움을 갈구했다. 즉, 자기 자신의 풍요로움을 위해 상대를 동경하는 것이 사랑의 본질인 셈이다. 그런데 이는 사랑과 탐욕이 한 몸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특히 자기 자신을 위해 사랑에 빠지는 순간, 상대를 가지려는 소유욕은 뒤따라오기 마련이니까.
<인간중독> 이후 10년 만에 공개된 김대우 감독의 신작 <히든 페이스>는 에로스의 또 다른 얼굴, 소유욕을 유심히 들여다본다. 세 주인공의 욕망이라는 관점에서 수연의 잠적을 조명하며 그들의 위계가 전복되는 과정을 긴장감 가득하게 풀어낸다. 그 과정에서 에로스가 소유욕에 의해 추동된다는 사실도 감각적으로 드러난다. 그렇기에 <히든페이스>의 관능미는 퍽 인상적이다. 마지막 순간 매력을 일부 잃었는데도 불구하고.
탁월한 에로스
<히든페이스>는 크게 세 시점으로 나뉜다. 수연이 성진을 떠나겠다는 영상만 남기고 잠적한 현재 시점에서 진행되는 이야기가 하나다. 이 내용은 성진의 시점에서 전개된다. 3개월 전 시점도 있다. 수연과 성진이 독일에서 한국으로 입국한 순간부터의 이야기가 수연의 관점에서 진행된다. 마지막으로는 모든 사건의 시발점이 되는 7개월 전의 이야기가 있고, 수연의 결혼 소식을 들은 미주의 시점에서 펼쳐진다.
현재 시점의 내용만 놓고 보면 <히든페이스>는 평범하고 에로틱한 불륜 이야기일 뿐이다. 수연은 갑자기 잠적하고, 성진은 그녀를 대신할 오케스트라 단원 미주에게 매력을 느끼고 그녀에게 조금씩 빠져든다. 수많은 우연을 핑계 삼아서. 미주의 차가 고장 났다며, 비가 았다며, 술에 취했다며, 대리 기사가 늦었다며. 여러 공통점도 발견한다. 알고 보니 둘 다 자수성가했고, 와인 맛도 커피 맛도 모르고, 넓은 집이 불편하다고.
김대우 감독의 절묘한 연출 덕분에 성진의 일탈에서는 불륜 이외의 함의가 느껴지지 않는다. 성진과 미주의 눈이 맞는 순간이 대표적이다. 성진이 미주의 연주 녹음을 듣는 순간, 그전까지는 고정된 구도를 유지하던 카메라가 갑자기 흔들린다. 마치 미주라는 돌멩이 하나가 성진의 마음에 떨어져서 파동이 퍼져나가듯이.
전작인 <인간중독>과 겹치는 연출도 야릇한 분위기를 정점으로 이끈다. 성진이 차 뒷좌석에 앉아 대리 기사를 기다리면서 미주를 바라볼 때, 그가 오케스트라 연습 중 미주에게 반한 순간이 교차된다. 이 부분은 <인간중독>에서 회의 중인 김진평(송승헌)이 종가흔(임지연)과의 밀회를 떠올리는 장면을 똑 닮았다.
에로스라는 가면을 벗다
하지만 수연의 이야기가 펼쳐지면서 <히든페이스>의 에로스는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그녀의 소유욕이 밝혀질 때, 다른 두 주인공이 감추고 있던 욕망도 비로소 구체화되기 때문. 수연은 미주와 성진 모두를 갖고자 한다. 수연과 미주는 고등학생이던 시절부터 연인이었다. 다만 서열은 분명했다. 미주는 수연의 노예였다. 첼로 레슨 선생님 집에 숨겨진 창고에서 미주가 자기 발목에 스스로 족쇄를 채운 뒤 수연에게 열쇠를 맡길 정도로.
그와 동시에 수연은 성진도 온전히 손아귀에 넣으려고 한다. 한국에 입국한 뒤 성진의 애정이 식었다고 느껴지자, 자기가 실종된 것처럼 상황을 꾸며서 성진을 시험하려고 한다. 예전 선생님 집을 리모델링해서 신혼집을 꾸민 점에 착안했다. 미주와 밀회를 나누던 창고에 숨은 뒤 성진의 반응을 지켜보려는 것. 흥미롭게도, 수연의 욕망이 가시화되자 성진과 미주의 행동 역시 소유욕이라는 관점에서 다시 읽힌다.
일례로 성진은 지휘자이지만, 오케스트라 단장이 예비 장모인 관계로 그의 음악 취향과 선호도는 무시당하고, 오케스트라도 온전히 자기 뜻대로 이끌지 못한다. 신혼집도, 결혼 생활도 온전히 그의 소유는 아니다. 신혼집은 수연의 것이고, 집안 사정의 차이 때문에 그는 예비 장모 앞에서 당당할 수 없으니까. 반면에 미주는 그 누구보다, 무엇보다도 성진이 손쉽게 소유할 수 있는 대상이다. 자기 오케스트라 단원일 뿐만 아니라 고아니까.
소유와 지배의 역전
하지만 7개월 전 미주의 시점에서 보면 성진과 미주의 관계, 더 나아가 미주와 수연의 관계는 다시 한번 전복된다. 수연은 미주에게 일방적으로 성진과의 결혼을 알린다. 수연의 새 집 리모델링 공사도 맡아서 도와주던 미주는 이에 복수를 다짐한다. 그 일환으로써 미주는 성진을 포함해 수연이 소유한 모든 것을 빼앗으려 든다. 즉, 성진이 미주를 가진 것이 아니라, 실상은 미주가 성진을 소유한 셈이다.
특히 미주는 성진을 차지하는 모습을 일부러 밀실에 갇힌 수연에게 보여준다. 그 순간 그들의 주종관계는 완벽히 역전된다. <히든페이스>에서 밀실은 소유당하는 사람의 공간이다. 안방 거울 뒤에서 그저 밖의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고,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외부인의 호의에 기대야만 하니까. <히든페이스>는 밀실의 주인이 계속 바뀌는 스릴을 통해 에로스의 숨은 모습을 드러내고, 단순히 야한 영화라는 편견도 깨버린다.
예상 못한 씁쓸함
수연과 미주가 성소수자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세 주인공의 에로스는 씁쓸한 지점도 있다. 밀실은 지배당하는 사람, 소유의 대상이 된 사람의 공간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여전히 용인받지 못하는 동성애 그 자체를 상징하기 때문. 단적으로, 수연과 미주는 교수님의 시야 밖이라고 생각했던 창고에서 사랑을 나눠야 했던 것만 보더라도 그 함의를 알 수 있다.
미주와 성진에 대한 소유욕도 수연이 레즈비언이었기 때문에 문제가 됐다. 수연은 미주에게 결혼 사실을 알리면서 성진과의 결혼을 '진짜 삶'이라고 표현한다. 성진을 진정으로 사랑하지는 않지만, 그와의 결혼은 사회에서 용인하는 정상적인 형태의 가정을 완성시킬 수 있다는 것. 미주와의 관계와 달리. 만약 동성애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회였다면 수연의 독단적인 결단도, 그로 인한 미주의 복수도 불필요했을지 모른다.
그러다 보니 수연이 성진과의 결혼 생활도 유지하고, 미주도 지배하며 그들 간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결말은 씁쓸하다. 정상화한 듯 보이는 그 상태가 애초에 정상이 아니기 때문. 동성애를 이성애와 같은 사랑의 한 형태로 대할 수 없고, 동성애인이라는 관계가 사회적 지위와 평판을 파괴하지 못하도록 밀실에 가둬야 한다는 의미니까. 이는 아직도 관용적이지 못한 사회상을 곱씹을 수 있는, 예상외의 깊이가 느껴지는 지점이기도 하다.
스스로 갑옷을 벗다
사실 <히든 페이스>는 다소 양식적인 영화다. 수연과 성진의 신혼집의 구조나 밀실의 존재 등은 사랑의 틀을 쓴 소유욕의 위계를 보여주려고 애초에 설계한 공간이다. 뒤집어 말해 <히든 페이스>는 영화적 허용에 기대는 작품이다. 특정한 의도를 지니고 특정한 소재를 다루려는 작품이기에 설령 몇몇 현실적이지 않거나 개연성이 부족한 지점이 있더라도 능구렁이처럼 넘어가 달라고 말하는 영화인 셈이다.
후반부의 급전개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여지가 있다. 일례로 클라이맥스 직후에 성진과 미주의 태도는 급작스럽게 변한다. 성진과 예비 장모의 갈등, 경찰 수사 등도 유야무야 된다. 물론 이는 어느 정도 의도적인 생략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영화의 의도를 고려하면 소유관계를 시작점으로 복구하면서 스토리의 형식을 갖추고, 성소수자의 현실을 반영하는 메시지에 힘을 실어주기 위한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문제는 <히든페이스>가 스스로 영화적 허용을 깨는 것. 밀실의 기원에 관한 설명이 등장하는 순간, 그 설정의 부자연스러움은 더 강조된다. 그전까지는 흐린 눈을 하던 사건이나 관계에 대해서도 같은 수준의 설명이 필요해지니까. 이는 인물 간의 관계나 사건을 급히 마무리하고 그 과정을 건너뛸수록 후반부의 빈 공간이 더 크게 느껴지는 이유다. 결국 <히든페이스>는 판만 벌여놓고 정리를 회피하는 모양새로 끝나 버린다.
후반부의 맥 빠지는 전개는 다른 장점을 희석시키기에 더욱 아쉽다. <히든 페이스>는 청소년 관람 불가 작품답게 도발적인 설정과 소재를 인간 본성과 사회상에 대한 성찰까지 확장시키는 영화다. 여배우의 과감한 노출이나 높은 수위의 연출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를 충분히 납득할 수 있고, 야하게 보이지 않을 정도다. 이러한 장점이 묻히고, 평범한 관능애적 영화로 격하시키는 인상을 주고 말았기에 마무리는 더욱 아쉽다.
Acceptable 무난함
본능적이라서 공감하고 특수해서 안타까운 에로스의 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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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체들의 새벽 - 피와 살을 갈망하는 시체들과 돈과 물질을 갈망하는 우리는 뭐가 다를까
작년에 이 영화가 심의를 받았다는 사실을 듣고 놀랐다. 좀비 영화의 바이블이라 해도 될 이 영화가 정식 수입되다니! 그동안 한국에서는 개봉도 못하고 VHS랑 DVD로만 소개되었는데, VHS는 90년대 중반에 이블 헌터라는 듣도보도 못한 제목으로 수입되었고, DVD는 영화 길이가 업체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주어 사실상 제대로 소개된 것은 작년 개봉이 처음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 영화가 정식 개봉인지 꼼수 개봉인지 아는 과정까지도 우여곡절이 있었는데, 영화로운 일상을 위한 신작전 때 시체들의 새벽이 있었는데, 필자는 처음에는 그게 조지 A. 로메로의 영화를 말하는 줄 알았다. 근데 나중에 보니 아뿔싸. 속된말로 함정 카드에 걸린것 이었다. 제목도 원제는 "데이 오브 더 데드: 블러드라인"이라는 딴 판의 영화. 게다가 잘 만든 영화도 아닌 VOD로 적합한 수준 낮은 영화라니. 하지만 1월에 피터팬픽처스 측에서 조지 A. 로메로의 시체들의 새벽을 심의 받은 것이 있어 필자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기대는 헛된 기대가 아니었다. 꼼수 개봉도 아닌 일반적인 상영관에서 정식 개봉이라니! 좀비 매니아인 필자로선 기뻐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직접 보고나니, 부산행, 28일 후를 다 뛰어넘는 역대 최고의 좀비 영화를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이렇게 만족스러울 수가!
조지 A. 로메로의 시체 시리즈 중 두번째 작품인 시체들의 새벽은 전작인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보다 더 진보한 모습들을 보여주는데, 대표적으로 컬러로 넘어와 더 다양한 표현이 가능해졌다는 것이고, 더욱 깊어진 사회 비판과 풍자일 것이다. 이 영화를 단순한 좀비 영화, 공포 영화로 보는 것은 수박 겉핥기 식으로 본 것이다. 영화에서는 좀비와 인간을 동일시 하는 연출이나 대사가 많이 보인다. 대표적으로 좀비들이 계속 쇼핑몰로 들어올려고 하자 스티븐이 저것들이 왜 들어올려고 하는 거냐니까 피터가 이렇게 말한다. "저들이 노리는 건 우리가 아니다. 이 공간 자체다." 후에 폭주족들이 습격할 때도 말한다. "저들이 노리는 건 우리가 아니다. 이 공간이다." 그리고 이런 장면도 있다. 폭주족들이 귀금속으로 치창한 좀비에게 달려들어 귀금속과 치장품들을 떼가는 장면. 인상깊은 장면 중 하나인데, 피와 살을 탐하는 좀비들과 돈과 물질을 노리는 현대 사회의 우리들은 과연 뭐가 다른 것일까. 좀비들이 내장과 시체를 들고 걸어다니며 배회하는 장면은, 쇼핑몰에서 살 것들을 들고 걸어다니는 우리의 모습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우리는 이미 모두 시체다. 자본주의 사회의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는 시체. 살아있지만 죽은 존재들 말이다. 이 영화를 본다면 왜 평론가들이 고평가하지 않는 좀비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영화 역사상 명작에 들어가는 지 알 것이다. 일부러 안 보고 버티다가 스크린으로 이 영화를 처음 접했다는 것은 필자 스스로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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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떨어진 집중력을 뛰어넘게 만드는 "전종서의 핏빛 액션"
집중력. 요즘 영상을 보는 내게 커다란 주제다. 한참을 유튜브 숏츠와 인스타 릴스를 돌려보다보니 짧고 강렬한 영상에 익숙진 나는 집중력이 약해졌다. 하지만 집중력을 돕는 중요한 도구가 있는데 바로 음악이다. 시각으로만 화려하고 자극적인 영상에 노출되다가 지쳐버린 집중력이 생경한 음악을 만나게 되면 다시 정신차리게 된다.
영화 발레리나는 그런 영화다.
영화는 강렬하다. 액션도 음악도. 빠르다. 액션도 전개도. 익숙한 전개이며 서사인데도 집중력을 흐틀지지 않는다. 개연성이 아쉽기도 하고, 뜬금없는 등장인물들에 물음표도 던지지만 결국 배우 전종서 그리고 그를 돋보이게 만드는 감독의 연출 거기에 귀를 만족시켜주는 천지 프로듀서 GRAY. 삼위일체는 결국 넷플릭스 세계 2위까지(2023년10월13일 기준) 오르게 만들어 버렸다.
우선 첫 등장씬에서 부터 귓가를 반갑고 즐겁게 만드는 80-90년대 오락실에서나 나올듯한 BGM이 온 신경을 집중하게 만든다. 그레이의 천재성은 영화 내내 음악에서 발견할수 있다. 편의점을 터는 무자비한 강도들. 그들의 폭력가운데 조용히 덤덤하게 등장한 주인공 옥주. 그리고 시작되는 거침없고, 사정없는 액션. 마치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빌'의 '우마 서먼'이 보이는 모습은 이 영화가 어떻게 흘러갈것인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색감이 멋진 영화
자살로 마감한 친구가 남긴 소원. 그리고 그 소원을 자신이 꼭 해야할 일로 받아들인 옥주. 옥주(전종서)의 피의 복수는 거대한 조직과의 전면전으로 확대되고 최프로를 찾아가는 과정속에 진행되는 액션은 시원하다 못해 서늘해진다. 영화 <발레리나>는 색감이 뛰어난 영화다. 옥주와 동창인 발레리나 민희. 그둘은 서로의 무료함에 생기를 가져다 준다. 그리고 회상 장면마다 나오는 파스텔 톤의 색감과 카메라 워킹은 보는이로 하여금 고단한 액션의 속도감에 환기를 가져다 준다.
이와는 정반대의 색감이 나오는 것이 바로 최프로와의 액션씬이다. 소중한 친구를 죽음으로 몰아간 '최프로'(김지훈)를 찾아 붉은 빛이 감도는 호텔에서 핏빛 액션은 더욱 전종서를 전종서 답게, 최프로를 최프로 답게 몰고가는 황홀한 레드 액션이다.
건가타 액션을 즐겨보시길
또한 이 영화의 즐길거리는 바로 건 가타 액션신이다. 필자는 이퀼리브리엄턴을 좋아한다.
특히 주인공 존 프레스톤(크리스찬 베일)의 놀라운 건 카타 장면을 잊을수가 없다.
건 카타란?
커트 위머 감독의 영화 《이퀼리브리엄》에 등장하는 요원들인 그라마톤 클레릭들이 사용하는 가공의 총기 무술. 카타는 한자 形의 일본 한자음 독음으로, 본래는 일본 무술에서 태권도의 품새나 쿵푸의 투로 같은 개념으로써 무도의 기술을 규정된 형식에 맞추어 자습할 수 있도록 이어놓은 동작을 말한다. <나무위키 참고>
전종서의 건 카타를 떠오르게 만드는 액션씬은 이 영화에서 절대 놓치지 말아야할 장면이다. 특히 잠깐 등장하지만 분위기를 압도하는 조사장(김무열)의 너무나 통쾌한 죽음은 나에게 있어서 발레리나에서 주목해야할 부분이라 생각한다.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뜬금없이 등장하는 특별출연의 총포사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함께 몸담았던 조직의 문영언니 연기나 개연성이 아쉽기는 했지만 아무 생각없이 빠른 전개감에 집중력을 놓치지 않고 영화에 빠지고 싶던 내게 발레리나는 그 길로 인도해주었고, 나는 그곳에서 만족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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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물] 끝장리뷰 | 세 개의 챕터(3막 구조) 분석 | 물과 불 상징 | 천국과 지옥, 신발 의미 | 남성과 여성 | 두 어머니 | 결말해석
[괴물](2023)에 대한 헐거운 리뷰
Chapter 1 3개의 Chapter, 지옥과 신발
Chapter 2 미나토와 요리, 물과 불, 여성과 남성, 결말해석
00:00 고레에다 히로카즈
01:58 3막 구조
04:56 천국과 지옥, 신발
06:16 미나토와 호리
07:10 남성과 여성
10:17 물과 불
11:32 결말해석
13:03 별점 및 한 줄 평
13:21 다음 리뷰 예고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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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그 여름, 가장 차가웠던> 티저 예고편
예기치 못한 일로 자허의 어머니는 2년 전 살해됐다. 이 일로 자허와 그녀의 아버지는 인생의 중심을 잃는다. 레슬링팀에서 은퇴한 후 마땅한 직업을 찾지 못한 자허의 아버지는 도축장에서 육류 배달업자로 일하고 이로 인해 자허는 놀림을 받는다. 외롭고 무기력해진 그녀는 수치심과 불공정에 맞서기 위해 본인만의 도덕 규범을 형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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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척살소설가> 메인 예고편
6년 전 실종된 딸을 찾고 있는 관닝.
어느 날 그의 앞에 묘령의 여인 투링이 나타나
소설의 작가인 루쿵원을 죽이면 딸을 찾을 수 있게 도와준다는 거래를 제안한다.
이에 관닝은 그녀의 위험한 제안을 수락하고 루쿵원을 죽이기 위해 접근한다.
한편 루쿵원은 자신의 팬이라 밝힌 관닝을 그의 소설에 등장시키고
관닝은 곧 소설이 현실을 바꿀 수 있음을 깨닫게 되는데...
현실을 바꿔 딸을 구할 것인가? 소설을 바꿔 딸을 구할 것인가?
소설과 현실이 이어진 평행이론의 세계관!
펜 끝에서 창조되는 새로운 세계의 문이 지금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