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2025-05-14 12:20:13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가
<케이 넘버>(2025, 조세영) 리뷰
K-컬쳐를 논하기 전, 부끄럽게도 우리는 사람 앞에 K-number를 붙여 한국에서 해외로 입양을 보내왔다. 여기서 K-number는 입양된 한국 아이들의 고유한 번호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기록에서 출발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조작된 서류와 감춰진 기록들이다.
기록하는 미오카
“나는 생모에게 버림받은 기억이 없다.”
미오카의 서류를 따라가며 영화가 흘러간다. 기록을 따라 도착한 곳에는 진짜 김미옥은 없다. 미옥 씨는 그럼에도 그 곳의 한 곳 한 곳을 카메라로 촬영한다. 이것이 미오카의 진정한 기록일 것이다. 기록물을 믿기보다 기록하는 주체를 믿어야만 하는 현실. 미오카의 머리 기장과 입양인들의 기억에서 비롯하여 뿌리를 찾아간다. 이것이 조세영 감독이 담고자 하는 기록이다.
입양된 아이들의 삶
그들이 자신의 뿌리를 찾고자 하는 것은 당연하다. 어디에서 어떻게 왔는지, 나의 부모는 어떤 사람인지. 나는 버림받은 기억이 없는데 혹여나 여직 나의 부모가 날 찾고 있을까봐 의무감에서라도 움직인다고 한다. 과거를 모른 채 입양된 아이들은 평생을 ‘정체성’을 찾는 데 많은 시간을 허비한다.
조작되고 감춰진 50년의 기록
아이들을 화물처럼 모아 입양을 보냈던 기록. 정부와 입양기관의 만행이 속속들이 밝혀지며, 관객석에선 비통의 탄성만이 흘러나온다. 이들은 여직 자신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며 발뺌한다. 그렇다면 약 2만 명이 되는 아이들의 삶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가? 입양인 커뮤니티 뿐만 아니라,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이다.
*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하여 작성한 리뷰입니다.
Relative contents
-
- <스프링 블라썸> 사랑이 피어나고, 소녀는 성인이 된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참석한 영화 <스프링 블라썸>의 시사회 관람 후기입니다.
반복되는 일상에 싫증이 난 '수잔(수잔 랭동)'. 맘껏 재잘거리는 친구들 사이에 있음에도 그녀의 세상은 조용하고 무료하다. 어느 날 그런 그녀에게 우연한 만남이 찾아오고, 수잔은 극장 앞에서 연극배우 '라파엘(아르노 발로아)'을 만난다. 수잔은 라파엘도 자신 못지 않게 권태로운 삶에 지쳐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라파엘 역시 수잔의 고요한 일상에 깃든 공허함을 눈치 챈다. 서로를 엮어주는 공통점은 동질감으로, 더 나아가 호감과 사랑으로 이어지며 수잔과 라파엘은 연인이 된다. 그러나 우연히 찾아왔던 사랑은 이내 위기를 맞이하며 강한 애착으로 엮였던 두 사람의 관계는 시험대에 오른다.
수잔 랭동 감독의 데뷔작인 <스프링 블라썸>은 16살의 수잔이 35살의 라파엘을 만나 사랑의 싹을 틔우는 과정을 담은 영화로, ‘16살의 봄’이라는 뜻의 원제인 ‘Seize Printemps’에 충실한 작품이다. 사실 작중 수잔과 라파엘의 관계처럼 나이 차이가 큰 연애와 사랑은 편견 가득한 시선을 받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연인 중 한 명은 성인이고 다른 한 명이 미성년자라면, 순수한 사랑의 감정보다는 그 이면에 있을지도 모를 추악한 흑심이 더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스프링 블라썸> 속 사랑이 관객에게 소구력이 있으려면 영화는 불편한 사회적 시선이라는 장애물을 영리하게 피해 갈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수잔 랭동은 사랑의 시작과 그 감정선을 영리한 기교로 풀어내며 미션을 훌륭히 완수해낸다.
우선 영화는 수잔과 라파엘의 공통점을 부각하며 그들의 관계를 철저히 순수하고 낭만적인 사랑의 영역에 국한시키는 데 성공한다. 수잔과 라파엘은 권태에 빠진 이들이다. 수잔은 여자 친구들, 남자 친구들, 선생님, 자기 자신에게도 어떠한 흥미를 느끼지 못한 채 지쳐있고, 무료하고 같은 일상을 반복한다. 라파엘도 마찬가지다. 오랜 기간 같은 연극을 반복해서 하고 있고, 나무 역할을 연기해야 되는 날도 있는 그도 일상에 지쳐 있다. 당장 연극이 행복한지, 연극을 즐기고 있는지 묻는 수잔에게 연기하는 법을 잊는 것은 아닐까 두렵다고 말할 정도로.
또한 수잔과 라파엘은 신이 속해있는 곳에서 소속감에 들려고 하지 않는 아웃사이더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수잔은 남자애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파티에서 춤추자고 권유하는 친구들과 좀처럼 어울리지 못한다. 친구들이 먼저 손을 내밀어도 그 손을 뿌리치기 일수이며, 그러다 보니 그녀는 자신이 속한 곳에 뿌리내리지 못한다. 라파엘도 마찬가지다. 그는 연극 후 회식 자리에서 도망치기 바쁘고, 동료들과 함께 밥을 먹을 때도 대화에 쉽게 끼지 못한 채 묘하게 겉을 맴돈다. 무대가 끝난 뒤 커튼콜을 할 때도, 인사를 하거나 퇴장하는 타이밍을 한 박자씩 맞추지 못한 채 따로 행동한다. 이렇게 라파엘 역시 자신이 속한 곳에서 잎을 피우지 못한다.
이처럼 수잔과 라파엘이 각자 자신의 나이대에 맞는 사람이나 주변인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것은 두 주인공의 사랑을 순수한 감정의 영역에서 접근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스무 살가량 차이 나는 이들의 로맨스에서 현실적인 맥락을 제거할 수 있는 수단이 된다. 두 인물의 공통으로 갖는 마음의 상처와 아픔을 부각하면서 그들을 여성과 남성, 미성년자와 성인 이전에 한 명 한 명의 개인으로 정의하기 때문이다. 공통의 공허함은 빨간 석류 에이드를 함께 나눠 마시고, 아침을 같이 먹으며, 좋아하는 책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감으로 이어진다. 이는 동질감에서 비롯된 연대감으로 나아가고, 두 개인 사이에서 피어난 연대감은 마침내 사랑이라는 방점을 찍는다. 이렇게 영화는 남자와 여자가 아니라 오직 '나' 같은 '너'와 '너' 같은 '나'가 만나는 그 순간에만 주목하도록 유도하고, 뿌리내릴 곳 없던 두 사람이 함께 뿌리내리고 사랑의 꽃잎을 피우는 과정만 스크린 위에 띄우는 데 성공한다.
실제로 영화는 공감과 동질감이 낳은 연대가 사랑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묘사함에 있어서 그들을 둘러싼 여러 구체적이고 자질구레한 이야기들을 펼쳐놓지 않는다. 사랑이 위험에 빠지고 두 사람이 이별하더라도 그 이유나 사연을 설명하기보다는 과감하게 생략한다. 그저 그 사랑의 궤적을 쫓으며 그 순간순간마다 두 연인이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표현하는 데에 집중한다.
이러한 의도는 여러 기술적인 요소에서 엿보인다. 음악과 댄스가 대표적이다. <스프링 블라썸>은 두 연인이 춤추는 장면을 거듭 보여준다. 이때 평범한 서사에서 춤 장면으로 넘어가는 과정은 상당히 어색하다. 두 사람의 감정이 깊어지고 있고 서로가 서로를 더 잘 이해하며 교감하고 있다는 게 느껴지려는 찰나에 직접적인 스킨십이나 대사 대신 음악이 흘러나오고, 그들은 춤을 춘다. 그래서 카페 테이블에 앉아서, 연극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두 사람의 춤은 서로가 깊게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는 상상 속 교감에 가까워 보인다. 또 그렇기에 이 댄스신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깊은 인상을 남긴다. 합을 잘 맞춘 몸짓은 아니지만, 그 약간의 빗겨나감에서는 역으로 두 사람의 관계가 얼마나 단단해지고 깊어지고 있는지가 자연스레 묻어난다. 수잔 랭동이 무용에 연극적인 요소를 결합한 ‘탄츠 테아트르’(Tanztheater, Dance Theatre) 형식의 퍼포먼스를 주로 선보이는 세계적 무용가 ‘피나 바우쉬’(Pina Baush)의 열렬한 팬이었다는 사실이 새감 실감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또한 <스프링 블라썸>에서 특히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은 이제 거의 몸의 일부처럼 느껴지는 스마트폰이나 소셜 미디어가 일절 등장하지 않으며, 그렇기에 작중 시대적 배경이 언제인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그 빈자리는 종이 책과 휴대용 CD 플레이어가 대신하며, 이는 영화 전반적으로 아날로그적인 감성을 불어넣는다. 달리 말하자면 시대를 막론하고 10대 시절을 겪었다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감성이 77분의 러닝타임 안에 가득한 것이며, 수잔을 보다 보면 <라붐>(1980)과 <귀여운 반항아>가 떠오르는 이유다. 이 역시 두 사람을 둘러싼 다양한 맥락 대신 그들의 감정 자체에만 집중하게 만드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사랑의 판타지 속으로 마냥 젖어드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수잔과 라파엘의 차이점, 성인과 그렇지 않은 이의 간극도 분명하게 또 반복해서 잡아주고 있다. 두 사람이 상점에 들어가서 물건을 사는 장면만 보더라도, 라파엘은 자신의 담배를 사면서 동시에 수잔에게는 사탕을 선물해준다. 10대와 30대의 사랑과 그 간극이 동시에 느껴지는 순간인 것이다. 사탕과 담배 외에도 10대와 30대의 거리감이 느껴지는 소재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석류 에이드와 맥주다. 맥주는 아직 수잔이 먹기에는 어린 나이에 해당되고 보통 어른들이 주로 마시므로 성인에 해당되고, 석류 에이드는 그에 반대인 의미를 나타내는 것 같아 10대와 30대 간의 간극이 잘 보이는 순간이다. 또한 자연스럽게 스쿠터를 타고 수잔 집 앞에 간 라파엘과 그런 그에게 스쿠터가 무섭다며 타지 않겠다고 말하는 수잔의 모습에서도 석류 에이드와 맥주의 차이점이 엿보인다.
그리고 이 간극 덕분에 <스프링 블라썸>은 단순히 사랑이 시작되는 간질거림을 간직하는 데서 그치는 대신, 10대가 바라본 사랑의 경험과 그로부터의 성장, 곧 성인으로의 발돋움을 그려내는 듯 보인다. 식음료의 차이는 수잔과 라파엘의 권태가 겉으로는 비슷해 보일지언정 속사정이 꽤 다름을 보여주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수잔이 겪는 일상의 무료함은 평균적인 또래 집단과 수잔 본인의 수준이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오프닝 시퀀스에서부터 그는 여자 친구들과의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고, 파티에서 어울리지 못하며, 수업 시간 중 수준 낮은 질문을 하는 친구에게 큰 애정을 베풀지 않는다. 반면에 라파엘이 겪는 권태로움은 보다 인생의 무게감이 느껴진다. 같은 배역이 반복됨으로써 작품을 계속하고픈 열정이 희미해진 시간만이 지속되고 있다. 그는 약간의 번아웃 속에서도 여전히 가슴을 뛰게 하는 오페라 아리아 곡과 같은 작은 요소에 기대어 일상을 이어나간다.
이러한 차이에 주목하면, 수잔과 라파엘의 동질감에 주목할 때 보였던 로맨스는 수잔의 성장영화로 바뀌어 보인다. 후반부에 들어서 수잔은 라파엘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고, 또 그에 대한 관심이 식어가는 것을 느끼며 이별을 고한다. 사실 구체적인 설명을 곁들이지 않은 이 대목의 전개는 전체적인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듯 느껴지기도 하며, 의문을 자아내기도 한다. 그러나 수잔의 권태로움이 라파엘의 그것과 미묘하게 달랐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는 소녀가 여자가 되는 과정을 그린 것으로 볼 수 있다. 또래들이 시시해 어른스러운 고뇌에 가득 찬 남자에 끌리는 수잔이 그려낸 사랑과 이별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한 템포 더 어른이 된 그녀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스프링 블라썸>은 한 편의 성인식 같기도 하다. 오프닝 장면에서 친구들의 수다가 지겨운 수잔은 자신이 마시던 빨간 레모네이드를 빨대로 휴지에 뱉으며 하얀 휴지를 빨갛게 물들이는데, 이 장면이 마치 여성들의 초경을 암시하는 듯 보이는 것이다. 더 나아가 영화 내내 빨간색의 색감이 두드러지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수잔이 늘 가지고 다니는 프랑스 작가 ‘보리스 비앙’(Boris Vian)의 소설 [너희들 무덤에 침을 뱉으마]의 표지, ‘라파엘’이 타고 다니는 스쿠터와 카페에 가면 늘 먹는 딸기잼이 발라진 빵 등 <스프링 블라썸>에는 빨간색이 포인트 색상으로 꾸준히 등장한다. 이는 사랑을 통해 성인이 되는 한 소녀의 성인식을 시각적으로 비유한 것과 같은 인상을 준다.
사실 <스프링 블라썸>은 앞서 보았듯이 초점이 두 인물의 감정선을 따라가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으므로, 시작 지점부터 빠져드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 호불호가 강하게 나뉠 수밖에 없다. 또 뭔가를 설명하기보다는 그저 두 남녀의 일상과 그 일상의 찰나가 어떻게 특별해질 수 있는지를 따라가야 하므로 더욱 그렇기도 하다. 사랑이라는 보편적 감정이 지닌 힘에 기대 지적될 수 있는 난점들을 가리려는 듯 느껴지기도 한다. 다만 우연을 가장한 운명적인, 혹은 그 반대인 사랑을 꽃피우고, 하나 되는 경험을 하고, 그 결과 그 사랑의 끝이 어찌 되든 한 단계 성장하는 경험을 누구나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수잔 랭동의 초대를 받아 넘실거리는 감정선에 한 껏 빠지는 경험은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
A(Acceptable, 무난함)
막 시작되는 사랑의 순간순간을 담아낸 장면들의 모음집
-
- 돌아온 분질 패밀리의 화려한 액션
삶에서 믿을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나는 일은 쉽지 않다. 누구나 처음 태어나서 가장 믿어야 하는 존재는 부모다. 대부분의 부모는 아이를 정성껏 보호하고 키워낸다. 그 아이가 조금씩 성장하여 성인이 되는 과정에서 부모 이외에 믿을 수 있는 존재들을 하나둘씩 만나게 된다. 형제자매나 친지부터 시작해서 여러 분야에서 만나는 친구들은 모두 그 신뢰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같이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면 신뢰에 금이 가는 상황도 생긴다. 가족이라고 할지라도 사이가 멀어져 서로 등을 지고 심지어는 다툼을 벌이기도 한다.
그렇게 꽤 긴 시간 동안 여러 과정을 통해 진정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을 곁에 둔다. 일종의 가족으로도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은 진짜 가족처럼 자주 만나고 교류하면서 서로 도움을 준다. 서로 다투는 상황이 생기더라도 정말 서로에게 소중하고 신뢰할 수 있는 존재라면 다시 관계는 회복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관계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지속되고 마치 새로운 가족처럼 변해간다. 특히 근래 들어 전통적인 가족 개념이 조금씩 옅어지고 마음에 맞는 사람들과 함께 살거나 일하는 것 같은 상황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해 볼 수 있다. 철저히 개인화되고 있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이렇게 유사 가족 형태가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은 결국 상대방에 대한 신뢰 때문이다.
도미닉과 주변 인물들이 만드는 분노 패밀리의 이야기, <분노의 질주>
영화 <분노의 질주: 더 얼티메이트>는 기본적으로 도미닉(빈 디젤)을 중심으로 혈연관계에 있는 가족을 비롯하여 그 주변의 친구들이 일종의 유사 가족화 되어가는 이야기다. 2001년 롭 코헨 감독이 연출한 <분노의 질주> 1편은 도미닉과 여동생 미아(조나다 브루스터), 브라이언(폴 워커)의 이야기는 액션이라기보다는 범죄 스릴러에 가까운 이야기였다. 자동차 레이스 장면으로 유명해진 영화는 저스틴 린 감독이 연출한 3편 (분노의 질주: 도쿄 드리프트>로 완전히 시리즈가 끝난 것으로 보였지만, <분노의 질주: 디 오리지널>이 2009년에 개봉하였고 흥행성적도 괜찮았기 때문에 시리즈가 이어질 수 있는 동력을 얻었다. 이후 이어지는 <분노의 질주> 시리즈는 점점 더 스케일이 커져 완전한 액션 블럭버스터로 탈바꿈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야기의 시작은 도미닉 토레도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앞선 시리즈는 사실 도미닉과 브라이언이 추축이었으나, 브라이언을 연기한 배우 폴 워커의 사망으로 더욱 도미닉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다. 또한 시리즈가 일종의 팀업을 통해 사건을 해결하고 조사하는 식으로 진행되면서 팀을 이루는 사람들은 시리즈 내에서 가장 믿을만한 인물들로 구성되어야 했고 그래서 이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면서 이들은 일종의 도미닉 패밀리가 되어갔다. 이렇게 시리즈가 팀업을 통한 작전을 보여주기 시작한 건 시리즈 5편인 <분노의 질주: 언리미티드> 때부터다. 하이스트 형식으로 진행된 영화는 각기 맡은 역할에 맞춰 불가능해 보이는 금고를 탈취하는 과정을 보여줬었다. 그리고 그때 형성된 그 형식은 시리즈 최신작까지 그대로 이어진다.
<분노의 질주> 시리즈의 서사가 특이한 건, 죽었던 인물들을 다시 살려 돌아오게 한다거나 직전 시리즈에서 악당이었던 인물이 다음에는 도미닉 패밀리를 돕는 인물로 설정한다는 것이다. 이번 새로운 영화에 등장하는 악당은 도미닉의 친동생 제이콥(존 시나)이다. 그는 또 다른 악당 사이퍼(샤를리스 테론)와 함께 세계 어느 곳이든 공격할 수 있는 무기를 탈취해 가져가려고 한다. 이들을 막기 위해 나서는 것은 도미닉과 그의 동료들이다. 이번 영화에서 서사를 책임지는 것은 도미닉과 제이콥의 과거사로 인해 발생한 서로에 대한 오해와 증오다. 어찌 보면 도미닉 패밀리가 새로운 등장인물과 대립하고 결국에는 그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 <분노의 질주: 더 얼티메이트>의 중심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영화 안에서도 대척점의 인물들은 철저히 대립하고 싸우다가도 어느 순간 화해를 해내고 만다. 이것이 시리즈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정서이고, 이것이 영화의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이번 영화에서는 과거 시리즈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설정되었던 한(성강)도 다시 출연한다. 시리즈 3편의 주인공이었던 숀(루카스 블랙)도 다시 등장하고, 그 외에 시리즈에서 한 번이라도 등장했던 로만(타이레스 깁슨), 램지(나탈리 엠마뉴엘), 레티(미셀 로드리게즈)와 스핀오프 시리즈인 <홉스 앤 쇼>에 등장했던 막달레나(헬렌 미렌) 도 다시 등장하여 이야기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시리즈의 팬이라면 이들이 재등장하여 자동차 추격신을 벌이고 각자 역할에 맞춰 활약하는 모습에 열광하게 될 것이다.
각 인물들의 관계가 동력이 되어 만들어내는 긴장감과 화려한 액션
이 시리즈가 보여주는 서사에서 가족은 각 인물들을 움직이는 동력으로 작동한다. 가족이나 아끼는 사람을 잃은 이후 그 슬픔과 분노를 표출하게 되는 캐릭터는 그 인물이 악당이든 아니든 굉장한 힘을 보여준다. 마치 그 감정을 보여주는 것처럼 액션 장면에는 큰 자동차 엔진음이 포함되어 있고, 현실에서는 절대 볼 수 없을 조금은 황당한 액션 장면들이 포함되어 있다. 금고를 털고, 탱크나 핵잠수함과 대결을 벌이는 시리즈는 이번엔 자석을 이용해 사물을 움직이고, 심지어 우주까지 간다.
액션이 중심이 되는 <분노의 질주> 시리즈는 아무래도 서사가 약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대부분 인물들의 감정을 고양시키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인물들의 감정이 최고조로 이를 때, 이야기의 액션으로 이어져 그것을 보는 관객들의 마음마저 조마조마하게 만든다. 블럭버스터 액션 영화로 변화된 이 시리즈가 내세우는 전략은 영화의 작품성이나 완성도에서 서사에 대한 평가 비중을 줄이고 단순히 액션과 감정으로만 영화를 평가하게 만든다. 어찌 보면 꽤 영리한 방법을 쓰고 있는 이 영화의 전략은 시리즈 9편까지는 어느 정도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저스틴 린 감독은 3편부터 6편까지 시리즈의 연출을 맡았었고, 7편은 제임스 완, 8편은 F게리 그레이 감독이 연출했었다. 그리고 이번 9편은 다시 저스틴 린 감독이 연출을 맡고 있다. 저스틴 린 감독은 시리즈 전체의 등장인물에 대한 감정을 끌어올리는데 능하고 자동차를 이용해 팀업을 구성하여 펼쳐지는 액션 장면을 연출하는데 일가견이 있는 감독이다. 그래서 그가 연출한 <분노의 질주> 시리즈에는 모든 캐릭터를 더욱 돋보이게 하고, 그것을 액션까지 연결하여 예상을 뛰어넘는 박진감을 선사한다. <분노의 질주: 더 얼티메이트>에도 여러 가지 박진감 넘치는 액션 장면이 등장하고 마지막에는 찡한 감동까지 전달한다.
시리즈는 한 편의 영화가 끝날 때 늘 등장인물들을 모아놓고 일종의 가족 모임을 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빈 디젤이 연기한 도미닉과 팀업을 이루었던 모든 팀원들이 한 식탁에 앉아 있는 모습은 마치 대가족과 같은 모습이다. <분노의 질주> 시리즈가 그 마지막 식탁에서의 모습처럼 유사 가족이 되어가는 이야기라는 것은 그래서 더욱 분명해진다. 마치 현대 가족 개념이 변화해나가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영화가 내세우는 가족은 완전히 타인이지만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 모인 것이 바로 가족이라는 것을 계속 강조한다.
2편을 제외하고 전 시리즈에 등장하고 있는 배우 빈 디젤은 이 프랜차이즈의 진정한 스타다. 그가 연기와 제작까지 맡고 있는 이 시리즈는 공식적으로 두 편이 남았으며 드웨인 존슨과 제이슨 스타뎀이 등장하는 스핀오프 시리즈도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빈 디젤을 중심으로 모인 배우들도 유사 가족이 되어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개봉 후 5일 동안 100만 관객을 넘어선 <분노의 질주> 시리즈는 코로나가 강타한 극장가를 살릴 수 있는 첫 블럭버스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간단한 리뷰가 포함된 movielog를 제 유튜브 채널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주로 말 위주로 전달되기 때문에 라디오처럼 들어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유튜브 Rabbitgumi 채널 구독과 좋아요도 부탁드립니다!
<분노의 질주: 더 얼티메이트 리뷰>
-
- 다시 찾아온 토네이도와 함께 옛 기억을 쫓다
다시 찾아온 손님
이 영화의 주인공은 기상청 직원 케이트(데이지 에드가 존스)다. 평범한 직장인인 케이트. 하지만 이런 케이트에게는 거대한 상처가 있다. 어렸을 때 케이트의 꿈은 토네이도를 공부하는 일이었다.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 믿었던 케이트. 하지만 토네이도에 친구들을 잃고 나서 케이트의 마음에는 거대한 폭풍이 있었다. 하지만 애써 눈 감는다고 해서 뉴스를 안 볼 수가 있나? 여기저기에 들이닥치는 토네이도들.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과 함께 케이트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케이트에게 손님이 찾아왔다. 손님은 친구 하비(앤서니 라모스)다. 토네이도에 대해 이야기하는 케이트. 하비에겐 빵빵한 팀이 있다. 본인과 함께 토네이도를 연구하자고 제의하는 하비. 케이트의 마음이 흔들리고 오클라호마로 향한다. 거기서 만난 토네이도 인플루언서 타일러(글렌 파월)와 함께 사소하게 부딪히는 케이트 일행. 이런 세 사람에게 초거대한 토네이도가 주인공 일행을 습격했다. 토네이도 전문가 세 사람과 각 팀원들은 이 자연재해에 맞서기 시작한다.
반복과 차이
이 영화는 훌륭한 재난물이면서 따뜻한 내면을 다룬 휴먼드라마이기도 하다. 우선 첫째. 영화 자체가 과거라는 모티브를 다뤘다는 점에 있다. 우선 케이트. 케이트는 과거의 트라우마에 휘둘리는 인물이다. 이 설정은 누구나 납득할 수 있다. 어렸을 때 친구들을 토네이도에 의해 잃었으니까. 그럼 극복하고 싶은 내지는 여전히 큰 상처로 남은 과거가 있다. 우리는 영화를 보고 있으니 이걸 극복해야겠지? 그런데 영화는 판에 박힌 듯 공식을 따르지 않았다. 성장물로서의 장르적인 특성을 잘 살리기 위해 영화는 여러 요소를 덧붙였다. 이 성장서사가 1차원적이었으면 영화의 몰입감이 분산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 뻔하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을 재난이라는 배경 하에 섬세하게 붙여놓았다. 글쓴이는 인간관계를 서로 엇갈리게 묘사한 것이 인상 깊었는데, 토네이도를 다루면서 인간 내면에 있어서도 탄탄한 근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영화의 온기가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이 인간 관계성 묘사는 <미나리>가 연상되는 부분이기도 한데 불의 이미지를 가족 간의 연대와 병치시킨다는 점에서 극이 문학적으로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했다.
둘째. 이 영화는 인간관계성을 묘사하는 것에서 머무르지 않는다. 여러 가지를 덧붙여 관객을 격려한다. 어떻게? 이 영화는 현재의 나를 통해 과거의 나를 극복하는 영화다. 한 마디로 성장서사다. 이 성장서사가 굳이 이런 플롯으로 이어져야 할 필요가 있을까? 이 영화와 다른 예시인 <데드풀과 울버린>도 일종의 성장영화다. 둘은 과거와 유사점이 없는 사건을 마주하고 진짜 슈퍼히어로가 된다(MCU에 편입한다). 이 <트위스터스>는 <데드풀과 울버린>과 다르다. 오클라호마로 돌아온다는 공간적 설정, 케이트가 과거에 했던 시도, 케이트-타일러의 관계, 다시 찾아온 친구 하비, 어머니의 대사들까지 과거와 묘하게 다른 차이를 반복으로 받아들이는 내용이 인물의 핵심이다. 그러니까 과거를 현재로 돌아와 다시 겪는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지점은 정말 중요하다. 왜? 데이비드 흄이 말했듯 필연적으로 과거의 일이 맞는다는 보장이 없다. 영화는 이 간단한 명제를 관객에게 보여주기 위해 토네이도도 휘몰아치고 두 남자도 등장시키고 하비를 핵심인물로 내세우며 과거의 일과 현재의 일 사이의 상관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사실 토네이도도 이런 우리의 모습과 별 다르지 않다. 토네이도가 인류에 등장한 지 굉장히 오래됐을 것이다. 그 원인을 몇 백 년 동안 조사해 온 인류라면 그걸 막고도 남았어야 했다. 하지만 그런 건 없다. 자연재해에 피해를 입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다. 이런 토네이도의 속성은 글쓴이가 앞에 쓴 영화의 핵심과도 닿아있다. 과거에 겪어 다 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오늘은 다르다는 것이다.
보고 듣고 느낀 것
이 영화를 보며 느낀 것은 정이삭 감독의 덕업일치가 느껴진다는 점이다. 어렸을 때 보고 듣고 느낀 것이 이야기 외 내적으로 핵심이 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첫째. 외적인 부분. 어떤 영화 든 간에 연출자가 지닌 과제는 그 이야기를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라는 점이다. 글쓴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어떻게’다. 이 영화는 전체적으로 고전적인 향취가 느껴진다. 대표적으로 재난을 보여주는 카메라가 그렇다. 영화 중후반부에 숙박업소에서 일어나는 일이 있다. 이 장면은 스필버그의 <쥐라기 공원>과 <죠스>에서 봤던 연출법이다. 뭔가 기괴한 이미지를 보여준다던가 사운드로 관객들을 휘어잡기도 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클래식한 이미지들이다. 무언가를 꽉 잡고 있는 두 남녀의 모습을 <타이타닉>에서 봤던 기억이 있는데 이런 이미지를 2024년에 구현했다. 그리고 영화의 두 주인공 중 하나인 타일러를 묘사하는 방식도 고전적인 섹시가이(?)다. 이 고전적인 섹시가이가 무슨 말이냐. 뭔가 비주얼이 깔끔하지 않다(대표적으로 수염자국). 성격도 잘난 체가 덕지덕지 붙어있다. 나르시시스트다. 하지만 그 내면을 보면 여주인공을 단단하게 사로잡으며 스트레이트로 직진한다. 겉으로 단단한 내면을 그대로 노출하며 직진하는 서양 사나이들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글쓴이는 <매그놀리아>, <탑건>에서 톰 크루즈나 <델마와 루이스>에서의 브래드 피트를 떠올렸다. 두 영화를 참고한 것 같지는 않아 보이지만 당시 시대상을 대표하는 이미지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감독이 과거의 것들을 가져온 근거가 된다.
다른 부분. 글쓴이는 이 영화가 자연에 대해서도 어떤 걸 말하고 싶었던 작품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이 영화에서는 정이삭 감독이 어렸을 때 경험했던 두 가지가 그대로 핵심이 된다. 첫째는 어렸을 때 구경했던 토네이도다. 이 문장에서 중요한 건 ‘어렸을 때 구경했던’이라는 뜻이다. 좀 찾아보면 정이삭 감독이 어렸을 적 미국에서 유년시절을 보낼 때 토네이도를 구경했던 기억이 선명하기도 했고 어느 정도는 동경했다고 전해진다. 이 관점이 영화 안에 그대로 들어가 있다. 토네이도에 도전하는 인간들이라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자연재해의 공간적 배경인 오클라호마가 <미나리>의 일부 공간과 겹쳐진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리고 그 토네이도에 대한 경외감은 엔딩 하이라이트 신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토네이도가 이 공간을 공격하고 이 영화를 만든 사람이 영화감독이라는 점은 창작자가 ‘이곳’과 토네이도를 동일시시킨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둘은 하나가 되어 <트위스터스>를 보고 있는 관객에게 도착했기 때문에.
토네이도가 뭐게
이 영화에서 글쓴이가 가장 좋았던 부분은 장르적인 재미다. 기본적으로 이 영화는 재난영화다. 그럼 그 재난을 묘사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그 몫을 철저하게 해낸다. 이게 토네이도를 실제로 만들었을 리는 없다. 그건 크리스토퍼 놀런 할아버지가 와도 불가능하다. 그럼 VFX로 구현했다는 의미인데. 이 자세한 부분들을 어떻게 구현했는지는 관객들이 다 다른 장점을 말할 것 같다. 정말 잘 만들어서 토론의 여지가 다분한 토네이도였다는 뜻이다. 글쓴이가 생각하는 장점은 물건이나 사람이 날아가는 방향이다. 이게 터무니 없으면 맥없이 날아갈 것 같은데 빠른 속도와 정확한 방향으로 설정되어 있어 아주 생생하다. 이 토네이도가 인물들의 절체절명의 위기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재난 외적인 이야기도 잘 만들었지만 내적인 이야기도 잡았으니 장르물로서 제 역할을 다한다.
하지만 이 장르적인 재미로서의 토네이도는 후반부에 이르러 어떤 변화를 표현한다. 글쓴이가 생각했을 때 이 영화에서의 토네이도는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를 암시하고 있다. 어리면 잘 모른다. 저거 할 수 있겠는데? 객기 부린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상처가 늘어나고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감이 잘 잡히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은 사람에게 치유받는다고 했던가. 과거에도 ‘이 것’이었고 지금 현재도 ‘이 것’을 만났지만, 또 둘 중 뭐가 더 가치 있는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이번에는 다를 것 같다. 이 모든 것이 토네이도처럼 피할 수 없이 사람에게 다가오고 강력한 상처를 만든다. 미래를 예측하는 건 당연히 불가능하다. 영화를 다 본 글쓴이의 입장에서는 토네이도와 ‘그 어떤 것’ 역시 위의 문장에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영화 엔딩에서 특히 이것을 강조하고 있기도 하고. 이 연출이 이물감이 없이 자연스럽다는 점은 재난영화로서의 특징과 변화구를 둔 영화의 선택 둘 다 빛내는 좋은 선택이었다. 흐뭇한 웃음이 저절로 지어진다.
아는 것 그 자체
글쓴이가 생각하는 이 영화의 단점은 타일러 일행 묘사다. 구체적으로 영화가 이 인물의 설정을 잘 살린 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타일러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고 있는 크리에이터이면서 섹시가이다. 그럼 뭐가 필요할까? 비전문가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전문성 중 하나인 경험이 부각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영상을 라이브로 송출하는 준비단계에 대한 부분이 더 들어갔어야 했다. 만약 글쓴이가 이 영화의 각본을 썼다면 카메라 장비에 관한 부분을 더 보여주면서 타일러의 과거 서사를 더 넣었을 것 같다. 영화가 불필요한 걸 다 잘라내고 간단한 플롯으로, 고전적인 영웅서사로 질주하기 때문에 이 선택은 당연하게 따라오는 단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글쓴이는 이런 초거대한 자연재해에도 의외로 무덤덤한 타일러의 행보가 의아하기도 했다. 또 섹시하다는 이미지도 정이삭 감독이 자기 것이 아닌 걸 만들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만약 글쓴이라면 영화에서 타일러의 피지컬적인 능력이나 리더십을 더 부각하는 장면을 넣었을 것 같다. 인물의 개성이 납작하기 때문에 초반부가 진부해진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후반부의 장르 변주가 이 인물의 다양한 내면에서 온다는 점을 생각해 봐서도 그렇다.
영화 잘하시네
<트위스터스>에 대한 글쓴이의 총평은 좋은 장르영화라는 것이다. 초반부가 납작해서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영화 전부를 보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미나리>처럼 소담한 이야기를 바란 관객이 있을 수도 있다. 글쓴이는 이 영화가 <미나리>와 비슷하면서 아예 다른 점이 재미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미나리>를 넘은 정이삭 감독의 연출력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만족스러웠다. 8월 14일 4편의 영화가 대규모로 개봉하며 빅매치가 예고된다. 이 빅매치에서 의외의 복병이 되기 충분한 <트위스터스>다.
-
- [절찬 상영중] 보헤미안 랩소디
인류의 역사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악기들이 존재한다. 그 악기들을 다루는 사람은 저마다 자신이 그리는 연주가의 청사진을 안고 잠이 들었거나, 들 것이다. 무수한 가수들이 저마다 고유한 음색으로 세상을 칠하고자 성대(聲帶)의 고난을 견뎠거나, 견딜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 모든 '꿈'이 그러하듯이 뮤지션이라는 꿈의 표면도 미끄덩하다. 꿈의 토대 위에 바로 서고자 아무리 치열하게 노력해도 번번이 넘어지기 일쑤다. 이카루스의 날개는 녹아내리기 십상이다. 마침내 누구나 인정할만한, 혹은 최소한 해당 분야 종사자들은 엄지를 치켜세울 결과물을 얻었다고 해도 세속적 성공이 보장되는 건 아니다. 예술성과 대중성이 모두 뛰어난 뮤지션은 그만큼 희귀한 보석이다. 하물며 자신의 유산에 안주하지 않고, 자기 복제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며, 꾸준히 음악적 실험을 추구하는 뮤지션이라면? '인피니트 스톤'이라고 할만하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는 밴드 퀸(Queen)과 밴드의 리드 싱어였던 프레디 머큐리의 일대기를 '재현(representation)'한다. 음악영화이자 전기영화인 셈이다. 음악영화로서 <보헤미안 랩소디>는 오리지널리티(독창성)를 추구했던 퀸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냉소적인 영국식 유머를 주고받고, 때로는 음악적 견해의 차이 때문에 티격태격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엔 늘 '퀸'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작품을 만들어내는 멤버들의 모습이 웃음과 희열을 선사한다.
퀸의 수많은 히트곡 중 하필 '보헤미안 랩소디'가 이 영화의 제목으로 채택된 이유는 '보헤미안 랩소디'가 다른 어떤 노래보다도 당대의 조류를 거슬렀기 때문일 것이다. 라디오를 활용한 곡 프로모션이 성공의 절대 반지였던 당시에 누구도 쉽게 도전하지 않았던 6분짜리 대곡, '보헤미안 랩소디'. 영화에도 나오듯이 이 곡은 발매 초기 평론가들의 뭇매를 맞았다. 하지만 대중의 평가는 사뭇 달랐다. "프레디 머큐리가 작사/작곡한 이 곡은 아카펠라, 발라드, 오페라, 하드 록 등 전혀 다른 장르들을 조합한 실험적 구성에도 불구하고 대중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퀸이 세계적인 밴드의 반열에 오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위키백과 'Bohemian Rhapsody' 항목에서 인용)
전기영화로서 <보헤미안 랩소디>가 묘사한 퀸과 프레디 머큐리의 이야기는 실제와 완벽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영화 자체의 기승전결을 위해 허구의 사건과 인물을 추가하고, 실제 일어난 사건의 시간적 순서를 영화적 흐름에 맞게 재구성하기도 했다. '재현'은 있는 그대로의 '복제'가 아니므로 과하지 않은 수준의 각색이라면 납득할만하다.
특정 인물의 전기영화는 주연배우가 실존 인물의 외양과 행동을 얼마나 잘 따라 했는지로 주목받는 경우가 많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에서 프레디 머큐리 역을 맡은 레미 말렉만 소위 '싱크로율 대박'인 것이 아니다. 퀸의 메인 기타리스트 브라이언 메이로 착각할 정도로 비슷한 귈림 리, 드러머였던 로저 테일러로 분한 벤 하디, 그리고 베이시스트 존 디콘(디키)을 연기한 조셉 마젤로 등 모든 주연 배우들이 퀸을 충실히 재현했다.
이 영화는 결말부에 등장하는 'LIVE AID' 공연의 벅찬 감동을 위해 수미상관의 구조를 채택했다. 긴장한 채 'LIVE AID' 무대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프레디 머큐리의 모습으로 시작된 영화는 'LIVE AID' 공연이 끝나는 동시에 마무리된다. 'LIVE AID' 무대에 오르는 순간을 맞이하기까지 퀸의 멤버들이, 특히 프레디 머큐리가 공연장 안과 밖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몰랐다면 마지막 공연의 감흥은 훨씬 덜했을 것이다.
악기가 특정한 음(音)을 내기 위해서는 그만큼 진동해야 한다. 인산인해를 이룬 관객들을 바라보는 동안 프레디 머큐리의 눈동자는 얼마나 많이 떨렸을까. 그런 그의 눈동자는 또 다른 악기가 되어 지금 이 순간까지도 전 세계를 울리고 있다. <보헤미안 랩소디>는 퀸의 대표곡 '라디오 가가(Radio Ga Ga)'의 가사 "Radio, someone still loves you"가 아니라 "Everyone still loves you, Freddie fxxxing Mercury."라고 노래한다.
'프레디, 태양에서 가장 가까운 수성(Mercury)'처럼 뜨겁게 살다 간 한 뮤지션을 위한 열렬한 헌사다.
* 본 콘텐츠는 브런치 김태혁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 예술가로 산다는 것은 생각보다 재미없을지도
예술가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제프 맥페트리지는 그래픽 디자인 계에서 아주 유명한 작가이지만
일반인들은 그의 이름은 모를 수도 있다.
배우들도 그런 사람들이 있지 않나. 그 배우의 이름 석 자보다 작품 속 역할로 대표되는 사람.
그가 그런 사람이다. 그의 이름 석 자보다 그의 작품으로 더 유명한 사람.
솔직히 나도 그의 작품들은 살면서 여러번 마주친 적이 있었으나 그가 어떤 작가인지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 시사회에 초대되어 정말 유익했다.
뭐랄까 예술가들이 살아야 하는 삶의 가장 정석적인 모습을 훔쳐본 것 같았다.
예술의 영감은 우연이 아니다.
그의 작품은 꽤나 일상적이고 그의 작품은 그의 일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
형태는 단순하지만 색감은 다양하다. 작품을 통해 전달하고 싶은 핵심 메시지는 형태로, 전달하고 싶은 감정은 색깔로 표현하는 것 같다.
그의 지인들의 말처럼, 그는 그림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사람인 듯 하다.
예술을 정의하는 수많은 미사여구들 중에서 모호함으로 승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는 명확한 의도가 보이는 그림을 선보인다. 그래서 대중은 그를 좋아하는 것 같다.
예술가들에게 영감이란 없어선 안 될 것이지만 언제나 찾아와 주지도 않는 것이라
예술가들에게 다작이란 맘처럼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제프 맥페트리지는 다작으로 유명한 작가인데,
그의 다작 비결을 이야기할 때 정말 깊은 공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상을 잘 유지하라는 것, 루틴을 만들라는 것
예술가의 삶을 살고 있지 않은 나에게도 이 지점은 아주 큰 관심사이기도 하다.
자신을 잘 지켜낼 것, 그래야 영감이든 이벤트든 뭐든 새로운 것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 같다.
기회가 왔는데 내가 받을 준비가 안되어 있다면 그건 소멸되는 기회이기에
언제나 나만의 취향, 나만의 루틴, 나만의 생각을 매일매일 잘 가꾸어야 쳇바퀴 같은 삶 속에서 새로운 무언가가 찾아왔을 때
그것이 기회이든 불운이든 잘 대응할 수 있는 것 같다.
뭐든 움직이면서, 무계획 속에서도 끊임없이 고민할 것
그의 삶을 보면서 느끼는 바가 있었는데 그는 그 과정을 방황이라고 했지만
내 눈에는 그는 굉장히 상황 변화에 유연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일단 들어온 기회를 해보고 안되면 다른 길로 가 보는 그 모습이 굉장히 유연해보였다.
해볼까 말까 하다가 기회를 놓치는 것 아닐까 항상 고민하는 나에게
그냥 해보고 안되면 관두고 이런 모습이 상황변화에 민감하게 움직이는 사람이구나 싶었다.
사실 포기가 빠르다라고도 할 수 있는데, 나는 하나의 것에 미련하리만큼 붙잡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은 순간들도 있어서
오히려 저렇게 빠르게 새로운 기회를 찾아보는 능력이 나에게는 필요하다고 느끼는 지금 이런 다큐를 보게 되어 정말 반가웠다.
우선 미술 작가인만큼 그의 작품들을 볼 수 있어서 마침 미술전시를 보러 가고 싶었던 나에게 1차적 만족을 주었고
그의 삶을 훔쳐보며 나도 저렇게 하고 싶은 일을 찾고 싶다는 욕구가 샘솟았다.
조금 더 시간가는 줄 모르고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싶어졌다. 그것이 일이든 취미이든 나의 삶의 동력이 될 수 있다면 그 어떤 형태든 상관없다.
우선 그러기 위해서는 나의 취향을 조금 더 섬세하게 가꾸어나가고, 하루 루틴을 꼭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침에 꼭 하는 루틴, 점심에 꼭 하는 루틴, 저녁에 꼭 하는 루틴 이런식으로라도 말이다.
지금처럼 흐르면 흐르는대로, 멈추면 멈춰서 고통스러워하는 대로 끌려다니는 듯한 이대로의 삶보다는 한 템포 더 멀리 갈 수는 있겠지.
사회적 성공이 되어주면 더 땡큐이지만 지금은 그것을 고민할 단계가 아니기에 우선 나의 하루부터 organize 해보겠다.
저 멀리 미국에서 활동하는 작가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다니, 참 컨텐츠는 여러모로 다양한 생각을 하도록 생각을 확장시켜 준다는 점에서
영원히 사랑하게 될 것 같다.
그의 작품들은 일상에 많이 숨어있으니 많이들 찾아보시길 바란다. 제프 맥페트리지, 생각보다 멋있는 사람이더라. 전시를 가고 싶었던 욕구는 일부 충족할 수 있어 좋았다.
해당 리뷰는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초대되어 작성되었습니다.
-
-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2022)> 리뷰
- 다니엘 콴 & 다니엘 쉐이너트 감독의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2022)>에 대해 어떻게 말해야 할까? 없는 시간을 쥐어짜며 두 차례나 볼 만큼 좋았고, 처음 울었던 것과 똑같은 부분에서 눈물을 흘린 영화인데도 주변 사람들에게 제대로 추천하지 못했다. 물론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 곳곳에 등장한 매니악한 개그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이 엄청난 영화를 고작 몇 마디의 말로 응축시키는 것이 참으로 어려웠기 때문이다(더글라스 애덤스 식으로 요약하자면 '42'에 대한 영화라고 하겠지만.). 플롯을 설명하려 시도할 때마다 나는 항상 대단한 벽에 부딪혔다. 이 영화는 선형적이지도, 순환적이지도 않으며, 오히려 끝나지 않는 하나의 그물망과 같은 영화이므로. 설명하자니 고난 그 자체이지만, 도무지 이야기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나는 오늘 감히 불가능한 일을 시도한다.영화의 주인공인 에블린 콴(양자경)은 일상에 지친 중년 여성이다. 남편 웨이먼드 콴(키 호이 콴)은 다정다감하고 좋은 사람이지만 현실감각은 영 떨어지고, 하나뿐인 딸 조이(스테파니 수)는 대학교를 중퇴한 후 동성 연인 베키(탤리 메델)와 함께 집을 나가 산다. 에블린의 아버지(제임스 홍)는 자신을 떠나 미국에 정착한 에블린을 조금쯤 못마땅하게 여기는 듯 보이는데, 콴 부부는 부유하고 여유롭게 살며 능력을 증명하긴커녕 세무조사로 인해 운영하는 코인세탁소마저 가압류 명령을 받을지도 모를 만큼 위태롭다. 설령 실망으로 가득하다 하더라도 에블린 자신이 거듭 선택하고 판단한 삶이었다. 그렇기 때문일까. 녹록지 않은 일상 속에서 피어날 듯 말 듯 한 상상력조차 에블린은 스스로 차단하며 삶에 책임을 지고자 한다. 그런데 갑자기 듣도 보도 못한 기회가 찾아왔다. 바로 다른 우주를 살던 알파 웨이먼드가 나타나 이렇게 속삭인 것이다. 거대한 악, 조부 투파키를 막아야만 해. 오직 당신만이 할 수 있어.이미지 출처: IMDb가까운 사이가 친밀한 사이와 동의어가 아니라는 건 이미 영화 <레이디 버드(2017)>가 짚었더랬다. 사랑하지만 좋아한다고 말하기엔 어색한 모녀, 그저 딸이 최고의 모습으로 살길 바라는 엄마 마리온(로리 멧칼프)을 떠올려보자.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의 에블린 역시 비슷한(그리고 한국인에게 너무도 익숙한) 캐릭터다. 메인 우주 속 에블린은 딸의 동성 연인을 할아버지에게 제대로 소개하지 않고, 이미 상처 입어 뛰쳐나가는 딸에게 살쪘다는 말을 거침없이 꺼내는 부류의 엄마다. 그렇다면 에블린이 성공한 과학자였던 알파 우주에선 어땠을까? 그는 다중 우주를 넘나들 방법을 개발하던 도중 딸 조이의 정신을 산산이 조각낸다. 엄마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던 딸은 그렇게 모든 장소에, 모든 것을 경험하며,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초월적 존재 ‘조부 투파키’가 되었다. 그러니 사건의 진원지는 알파 우주가 틀림없다. 그런데 영화는 에블린이 성공한 과학자였던 알파 우주를 주요 무대로 삼지도 않고, 조부 투파키의 역사를 구구절절 풀지도 않는다. 알파 우주는 순전히 뒷전이다. 이유는 명확하다. 누군가의 파멸을 낱낱이 보여주는 게 이 영화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는 파멸처럼 보이는 순간이라 하더라도 기실 완전한 끝은 아니라는 가능성을 모색한다. 이 세계의 조이를 조부 투파키가 깃들 수 있는 그릇으로 보지 않고 제 딸로만 바라보는 에블린이 있는 한 낙관적인 희망은 유효하다. 지금까지 에블린이 딸을 사랑한 방식이 지극히도 좁은 범위 안에서 이루어져 조이를 계속 상처입혔을지라도.흥미로운 건 알파 웨이먼드가 묘사한 조부 투파키와 실제 조부 투파키 사이엔 적지 않은 간극이 있다는 사실이다. 알파 웨이먼드는 조부가 목적도 욕망도 없이 모든 것을 파괴하려 한다고 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조부 투파키가 행하고자 한 건 세계를 멸망시키겠다는 악의에 가득 찬 시도가 아니었다. 조부 투파키는 영화 속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자신을 이해해줄 에블린을 찾고 있다고. 그렇다. 다중 우주라는 특수한 무대가 설정되어 있지만 에블린과 조이는 지상에 발붙인 다른 흔한 모녀와 같이, 정체성이 분리되지 않은 채 하나의 흉터에서 발을 구르는 퍽 평범한 사람들이었다.정체성을 공유한다고 표현하기야 했다지만, 에블린과 조이는 매우 다른 사람들이다. 세대는 물론이요, 사용하는 모국어나 성장한 문화적 환경 역시 판이하지 않은가. 그러나 동시에, 에블린과 조이는 분리된 존재가 아니다. 두 사람은 부모 앞에서 실패한 딸이라는 속성을 공유하고, 이 씨앗은 두 사람의 심연에 항시 똬리를 틀고 있다. 생각해보자. 알파 우주에서 조이가 분열된 까닭은 에블린이 진행한 실험 때문이기도 했지만, 본질적으로는 어머니에게서의 인정욕구를 간절히 바랐던 조이의 욕망에 기인하지 않았나. 하지만 두 사람의 욕망이 충돌하는 순간 알파 에블린은 목숨을 잃고 알파 조이는 조부 투파키로 각성하는 최악의 결과를 맞이했을 뿐 모녀 사이의 교착상태는 조금도 해결되지 않았다. 여러 우주를 전전하지만 조부는 엄마와 딸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 실패한다. 자신이 갈 수 있는 ‘모든 곳’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시도했음에도 상대는 변하지 않고 자신은 거부당한다는 결과패만 바라보게 된다. 실망은 축적되고 절망은 베이글을 통한 자기 파멸로 체현된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상실을 경험했음에도, 그러나, 조부는 여전히 에블린에게로 향한다. 어째서일까.이미지 출처: NY Times여기서 잠시 조부가 구현해낸 새카만 베이글에 관해 이야기 해 보자. 사실 베이글이 아니라 도넛이었어도 상관없다. 그 형태가 어떻든 조부가 말하고자 하는 건 변함없을 테니. 모든 것을 올려놓자 새카맣게 타버렸다는 베이글은 새하얗게 스러진 공허를 둘러싼 검은 한계이다. 조부가 외치는 것은 에블린과 함께 자신이 존속함으로써 계속되는 무의미한 세계를 멈추자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자신의 기대, 새카맣게 타버린 가능성이자 한계를 없애달라는 절박한 요청이었을 것이다.박종천(2020)은 논문을 통해 현상적 불화의 한계에 갇힌 개인이 비가시적인 사랑과 배려를 통해 구원받는 영화적 양상에 관해 이야기한 바 있는데,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의 조이-에블린의 관계가 제법 유사해 보인다. 방금 언급한 조부의 베이글은 영화 속에서 몇 차례, 마치 거대한 눈동자처럼 연출되는데, 이는 알파 우주의 조이가 조부 투파키가 되던 순간 잃어버린 눈을 대체하는 듯하다. 하지만 제대로 시야를 확보하고 거리를 가늠하기 위해선 두 개의 눈이 필요하다는 것을 떠올려보면, 조이의 여정은 자신이 잃어버린 남은 눈을 찾아 다니는 것일 테다. 영화는 조이가 잃어버린 다른 하나의 눈을 제시한다. 바로 에블린이 이마에 붙인 인형 눈이 그 해답이다. 에블린이 갖게 된 제3의 눈은 새로운 가능성을 상징하므로.알파 웨이먼드는 여러 우주를 넘나들고, 이 우주의 에블린을 각성시키는 데에 큰 도움을 준 유능한 남자지만 조이를 이해하는 데엔 철저히 실패했었다. 하지만 여러 실망과 실패가 이끌었다는 우주의 웨이먼드는 조이를 아낌없이 포용한다. 그는 에블린에게 말한다. Be Kind. 유약해 보였던 웨이먼드의 굳건한 강령은 에블린에게 새로운 가능성이 된다. 우주를 넘나드는 싸움을 통해서 해결할 수 없던 교착상태는 웨이먼드 식의 다정함으로 무너진다(사실 이 영화가 불교적 연기론을 상당수 차용한 듯 보이기에 웨이먼드의 대사는 자비를 보이라는 말에 가까우리라 보인다). 갈등이 커지기 직전 역지사지의 자세를 갖추자 세무관인 디어드리 보베어드라(제이미 리 커티스)를 포함한 많은 문제가 싱거우리만큼 부드럽게 해결된다.게다가 Be Kind라는 강령은 비단 타인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충분히 적용된다. 무수한 우주를 유영한 에블린은 비로소 자기 자비를 실천하여 스스로를 구원한다–이는 너무도 어린 청년인 조이에겐 허락되지 않았던, 시간이 남긴 자산이다-. 자신이 열망한 이상향에선 오히려 세탁소를 운영하며 징그러울만큼 아등바등한 삶을 꿈꾸기도 하고, 시력을 잃는 끔찍한 사고는 성공의 발판이 되기도 하는 등, 삶과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해 에블린의 시야가 확장되자 그가 평생 품고 살았던 한계가 순식간에 사라진다. 이윽고 확장된 ‘모든 곳의 에블린이 가진 모든 것’이 ‘단 한 순간’으로 집중된다. 놀라우리만큼 파괴적인 가능성을 찰나에 집중시키자 에블린이 발견하는 건 단 한 가지다. 가장 순수한 감정. 그러하므로, 한 줌의 시간일지라도 그 시간을 소중히 여길 거라는 에블린의 고백은 시간을 초월하며,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는, 이런 제목으로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너와 여기서, 언제나.이미지 출처: Daily Sabah브라이언 헤어 & 버네사 우즈가 집필한 책 제목,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처럼, 친절은 우주를 막론하고 강력한 힘이다. 그런데 이 말을 꺼낸 건 우주를 한 번도 건넌 적 없는 웨이먼드였다. 그러니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가 얼마나 낙관적인 영화인지 새삼스럽게 감탄하게 된다. 각자가 가진 단일한 정체성을 유동적인 정체성으로 변환하는 힘, 피를 나눈 모녀관계라 한들 완벽과 거리가 먼 미완의 관계로 남을 수 있음을 성숙한 자세로 선언하는 힘, 전 우주를 구하는 힘은 버스 점프를 익히지 못한 당신 역시 실천이 가능한 '친절, 다정, 자비, 그리고 공감'이란 테제다. 설령 우스꽝스러운 환경에 처해 있다 해도(핫도그 손을 가진 인류 진화 단계에 들어선 건 아닐 테니!) 얼마든지 실천할 수 있는 가치이지 않은가. 아주, 아주 약간의 따뜻함만 있다면, 문제투성이인 삶조차 충분히 긍정함으로써 모두는 우주를 나를 그리고 당신을 구할 수 있다.<참고문헌>박종천 "불화와 화해의 영화적 변주곡" 국학연구 41 pp.493-535 (2020) : 493.양대종 "허무주의를 대하는 마음의 자세 - 니체 철학을 중심으로" 철학탐구 35 pp.131-161 (2014) : 131.
-
- 영화 블라인드 후기
영화직관하는 남자 영직남의 “블라인드”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은 없어요~#로맨스, #멜로, #블라인드, #유럽영화
-
- 「듄」 이 영상을 보셔야 예고편 이해가 100% 됩니다ㅣEBSㅣDUNEㅣ티모시 샬라메ㅣ듄 예고편ㅣ워너브라더스ㅣ드니 빌뇌브
? '듄(DUNE)' 영화 예고편 분석 및 원작소설 / 스토리 요약정리
- 영화 정보
장르: 스페이스 오페라
감독: 드니 빌뇌브
각본: 에릭 로스, 존 스페이츠, 드니 빌뇌브
원작: 프랭크 허버트의 듄(1965)
제작: 드니 빌뇌브, 케일 보이터. 메리 페어런트,조 카라치올로 주니어
주연: 티모시 샬라메, 제이슨 모모아 외
촬영: 그레이그 프레이저
음악: 한스 짐머
촬영 기간: 2019년 3월 18일 ~ 2019년 7월 26일
제작사: 레전더리 엔터테인먼트,워너브라더스
수입사: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개봉일: 2020년 12월 18일#듄 #듄영화예고편 #듄예고편
-
- 영화 <벨파스트> 메인 예고편
가족과 이웃, 음악이 있어 행복했던 사랑스러운 한 가족의 찬란한 이야기 #벨파스트 3월 23일 만나요✨
-
- 영화 <와일드 구스 레이크> 예고편
오토바이 갱단 리더 저우 저농은 실수로 경찰관을 살해한 뒤 현상금이 붙어 경찰과 폭력배 모두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그는 자신을 돕기 위해 왔다는 여성을 만난 뒤 휴양지 와일드 구스 레이크에 몸을 숨기고, 쫓기는 두 사람은 목숨을 건 위험한 도박을 하게 되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