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usmesentez2025-05-01 17:10:19
사랑하니까 떠난다는 개소리
사랑의 귀납적 정리
사랑은 무엇일까. 사랑은...
사랑은 전칭명제로 규정할 수 없다. 그것은 언제나 개별적인 사례로(만) 존재한다. 그래서 '사랑은 무엇이다'라고 말하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며, 다만 '무엇도 사랑이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신형철 - <정확한 사랑의 실험> 中
절대적이지 않으며 항상 개별적으로 존재한다. 귀납적으로 증명할 수 밖에 없다. '이것도 진정 사랑일까?'라는 당신의 고뇌에 절절한 사랑을 했던 로미오와 줄리엣도, 시대의 사랑꾼으로 여겨지는 최수종 씨도 정답을 줄 수 없다. 자신의 감정이 사랑을 설명하는 가장 강력한 근거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사랑이라고 느끼면, 누가 뭐래도 그것은 사랑이 된다.) 천 만명이 사랑을 한다면, 천 만 가지의 사랑이 있다. 사랑을 노래하는 작품이 넘쳐나는 이유는 이러한 사랑의 귀납성과 맞닿아있을 것이다. 창작의 출발은 독창성이기에, 아무래도 사랑은 창작의 재료로써 제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정의하려는 시도는 늘 존재해왔다. 현대 통용되고 있는 사랑의 보편적 속성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타자(Otherness) - 사랑은 나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향한다. 타인을 목적 그 자체로 존중한다.
초월(Transcendence) - 사랑은 개인적 이익, 자기보존을 넘어선다.
배타(Exclusivity) - 사랑은 특정 대상을 향해 독점적으로 집중한다.
욕망(Desire) - 사랑은 갈망을 내포한다. 단순한 소유가 아닌, 존재 자체에 대한 갈망.
시간(Temporality) - 사랑은 순간적 열정(eros)일수도, 지속적 신뢰(agape)일 수도 있다.
윤리(Ethicality) - 사랑은 타인의 존엄을 지키고자 하는 윤리적 긴장을 동반한다.
취약(Vulnerability) - 사랑은 스스로를 드러내고 다치기 쉬운 상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여러 속성 중에서도 다수가 이견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배타성일 것이다. 사랑의 가장 중요한 전제는 '두 사람 사이에서 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다자 간의 사랑은 박애라고 칭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넌 내 꺼야.
배타성의 위반은 사랑에 중대한 위기를 초래한다. 배타성은 사랑의 속성 중 그 어떤 것보다 엄격하게 도덕적 판단을 받는 경향이 있다(불륜은 관계의 근간을 뒤흔드는 신뢰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사랑이라는 복잡한 개념 속에서, 유일하게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는 부분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간통이라는 죄목의 법적제재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그 중요성이 더욱 명백해진다.
<헤어질 결심>은 배타성을 어긴 두 사람의 사랑을 다뤘다는 점에서 관객평이 극단으로 나뉘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불륜 vs 절제를 통한 품겨있는 사랑'
한국에서는 결혼했다고 좋아하기를 중단합니까?
영화 속 해준과 서래는 배우자가 있는 상태에서 서로에게 끌렸다. 배신자의 비겁함을 애틋하게 포장해 미화한다는 입장과 선을 지키면서 감정에 솔직한 인간적인 이야기라는 입장의 충돌이다. 무엇이 옳다고 말할 수 없다. 도덕적 판단과는 별개로 분명한 것은, 해준과 서래는 서로에게 사랑을 느꼈다는 점이다. 두 인물의 행태를 절대적으로 비난하거나 옹호하는 것은 사랑을 명제화하는 어리석은 일이다. 다만, '그것도 사랑이었겠거니' 라며 이해해볼 뿐이다.

서래는 위 대사를 통해 사랑의 배타성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해지지만 논리적으로는 타당하게 들린다. 결혼은 사랑의 종착점으로 여겨진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평생을 함께한다는 숭고한 서약이다. 그렇다면 결혼한 사람의 삶에 더 이상 새로운 사랑은 없는 걸까? 설렘을 주는 새로운 사랑이 찾아올 수 있다. 사랑은 감정의 한 갈래이며, 감정은 늘 죽 끓듯 변덕스러운 속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결혼 후에는 새로운 사랑이 '없어야 한다'는 당위에 더 가깝다고 말해야겠다. 마음이 피어나는 것을 사람의 의지로 막을 수는 없으므로. 그러나 약속을 충실히 이행하기 위해 노력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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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래는 해준과 헤어질 결심을 하려고 쓰레기같은 남자만 골라 결혼을 했다. 물리적으로라도 떼어내야 충동을 막을 수 있을 테니까. 그게 더 우아한 방식이니까. 해준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일테니까. 해준은 깨끗한 사람이라서 늘 선을 지킨다. 사랑한다는 말 대신 잠복을 하고 창 너머로 살펴보고 중식 볶음밥을 해준다. 그것이 해준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이다.
살인과 피가 있어야 행복한 해준에게 서래는 영원히 피의자여야 한다. 그래야 깨끗하게 사랑할 수 있다. 해준은 서래를 끊임없이 의심해야한다. 그러면서도 붕괴되지 않기 위해 진실을 좇아야 한다. 서래는 끊임없이 무고를 증명해야한다. 감방에 들어가면 해준을 아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사건이 종결되지 않기 위해 고의적으로 해결을 지연시켜야 한다. 두 사람은 다른 목적을 가지고 사건이 해결되기를 바란다. 해준은 붕괴되지 않기 위해서, 서래는 감방에 들어가지 않기 위해서. 두 사람은 같은 목적을 가지고 사건이 미결되기를 바란다. 깨끗하게 사랑하기 위해서.
기도수 살인사건이 해결되고 해준은 붕괴했다. 왜. 사건이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또, 사건이 잘못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사건이 해결되므로써 해준은 서래를 만날 수 없게 되었다. 서래가 사무쳐서 해준은 괴롭다. 사건이 잘못 해결되므로써 해준은 품위를 잃었다. 여자에 미쳐서 직업윤리를 잊었기 때문이다. 왜 그런 쓰레기 같은 남자를 만나서 고생했을까. 경찰에 신고를 하면 되었을 것을. 왜 경찰을 믿지 못해서 직접 사람을 죽이고 이 지경까지 왔는가. 해준은 여기서 멈춘다. 서래의 과오가 담긴 휴대전화를 바다 깊은 곳에 던지라고 말한다. 그래도 서래의 안녕을 바랐기 때문일까. 죄책감과 수치심에 몸부림치면서 지난날을 부정한다. 서래는 우리 일을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이야기 한다. 서래는 아직 '우리'의 일을 바다에 봉인할 생각이 없다.
서래는 해준 앞에 다시 나타났다. 새로운 쓰레기 남자와 함께. 그리고 그 남자를 또 죽인다(죽게 만든다). 해준은 서래에게 다그친다. 이러려고 이포에 왔느냐고. 해준은 복잡해진다. 왜 또 쓰레기같은 남자를 만났을까. 그 쓰레기 남자는 왜 또 내 관할구역에서 죽었을까. 나를 또 무너뜨리려고 이러는 걸까. 내가 보고 싶어서 온 걸까. 서래는 비슷한 방식으로 무고를 증명한다. 해준은 더 엄격한 방식으로 서래를 의심한다. 이번에는 해준이 승리한다. 사건이 제대로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서래는 명백한 살인범이 됐다.
핸드폰 두 개가 해준에게 돌아온다. 하나는 서래의 과오가 담긴 것, 다른 하나는 해준의 사랑이 담긴 것. 해준은 서래를 지키기 위해 과오가 담긴 휴대전화를 바다 깊은 곳에 버리라고 했다. 서래는 해준을 지키기 위해 사랑이 담긴 휴대전화를 바다 깊은 곳에 버리라고 했다. 바다 깊은 곳에 빠져 아무도 찾지 못하면 우리 둘 만 아는, 영원한 사랑이 될 테니까. 그리고 서래는 제 자신을 바다 깊은 곳에 묻는다. 자신이 몰고 온 모든 사건을 미결로 남기기 위해서. 해준에게 영원한 피의자로 남기 위해서. 더 이상 헤어질 결심을 할 필요가 없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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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준이 사랑한다고 말할 때 그 사랑은 끝이 났고, 해준의 사랑이 끝났을 때 서래의 사랑이 시작됐다. 해준은 붕괴하면서 사랑을 남겼고, 서래는 그 붕괴를 단서삼아 사랑을 틔웠다. 다시 서래는 해준을 재건하고자 소멸을 택했고, 해준은 안개 속 영원한 사랑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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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랑은 영원하다. 어떤 사랑은 채 5분이 걸리지 않고, 어떤 사랑은 이어지지 않아서 아름답다.
사랑할 결심을 하는 것은 죄가 되지 않지만, 사랑을 완결하는 것은 죄가 된다. 결심은 미완이다. 아직 행해지지 않았으므로. 마음을 먹었다고 해서 행동을 보장하지는 않으니까.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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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기가 아니라 선택이라 불러도 좋을까
<콩트가 시작된다>라는 작품을 처음 만난 건 3년 전이었다. 이른 나이에 꿈을 이룬 자들의 이야기가 범람할 때, 이 작품은 누군가 보기에 ‘실패자’라고 불릴 법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당시 내 삶도 ‘실패자’의 삶에 가까웠다. 괜찮은 대학을 나와 주변인들이 대기업에 취업했다는 소식이 왕왕 들릴 때,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며 그 일에 미친 듯이 매달렸다. 실제로 목표에 도달할 뻔한 순간들이 쌓이며, ’조금만 더‘라는 마음을 버리지 못했다. 어쩌면 그 시간에 이 작품을 만난 건 운명적인 일이었다.
<콩트가 시작된다>는 ’맥베스‘라는 이름으로 콩트 트리오 활동을 하는 세 남자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다룬다. 10년을 활동해도 무명을 벗어나지 못한 이들. ’딱 10년만 해보자‘라는 약속에 따라, 정해진 이별의 수순을 밟는 것이 작품의 주요 내용이다. 콩트에 대한 사랑과 미련은 이들의 발목을 붙잡지만, 현실을 마주하며 콩트를 관둔다. 결국 이 작품은 예견된 ’실패‘의 서사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동시에 꿈과의 이별이 단순한 실패가 아니라는 것, 무언가를 충분히 사랑했다면 그 시간은 빛나는 시간이었다는 것을 설득시키는 작품이다.
2022년 매회 웃음과 눈물을 가져다 준 첫 감상의 기억이 생생하다. 작품을 온전히 소화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에 금세 두 번째 감상을 했던 기억 또한 남아있다. 이들의 시간은 작품 속에 완결되어 남았지만, 나의 시간은 계속 흐르기만 했다.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실패‘와 ’방황‘의 고통들을 마주하며, 이 작품에게 위로를 받고 싶었다. 그러나 작품을 다시 찾자 더이상 서비스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조차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작품과도 ‘이별’을 해야 하는 시간이 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마치 갓 서른이 된 나를 반기는 것처럼 다시 찾아왔다. 그 시절의 꿈과 이별 아닌 이별을 하고, 또다른 선택의 분기점에 놓인 나에게 다시 돌아온 <콩트가 시작된다>. 또다시 무심결에 재생 버튼을 눌렀고, 순식간에 재감상을 마쳤다.
감동은 여전했으나, 3년이 지난 지금의 감상은 조금은 달라졌다. 사랑이 만드는 미련으로 인한 갈등에도 맥베스는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기를, 연습을 멈추지 않는다. 슌타는 말한다. ”앞으로는 맥베스 졸업을 향하는 헤어짐이 슬프지만 찬란한 나날이 기다리고 있다”. 예견된 이별에도 이들은 끝까지 최선을 다한다.
해산을 앞두고 팬이 된 나카하마의 모습도 조금은 달리보였다. 이전에도 작품에서 가장 기억에 남은 대사는 나카하마의 대사였다. 전 직장에서 큰 상처를 받은 나카하마는 이렇게 말한다. “솔직히 지금도 열심히 하는게 무서워서 대충 할 수 있는 건 대충 하고 있어요. 열심히 하다가 상처받는 게 무서워서 ... 그래도 쓸쓸해요. 무언가를 열심히 하려는 마음을 억누르는 날이 올 거라곤 생각도 못 했고, 열심히 하지 않아도 되는 쪽을 선택한 적도 없었으니까”. 작품의 가장 핵심 인물인 하루토는 나카하마가 먼저 취업을 했다는 이유로 그녀를 선배라고 부른다. 그러나 어쩌면 나카하마는 열정과 이별을 먼저 경험한 선배가 아니었을까. 그녀의 모습을 보며 나의 작년이 겹쳐 보였다. 탈락의 고배를 마시며 조금은 다른 길을 선택했고, 마냥 무력한 시간을 보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럼에도 이들은 앞으로 나아가기를 선택한다. 이것은 등장인물들이 홀로 선택한 것은 아니다. 하루토는 은연 중에 자신을 ‘실패자’라고 여기는 인물이다. 준페이처럼 물려받을 가게가 있는 것도, 슌타처럼 과거의 성공의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닌 그는 끝없이 방황한다. 콩트로서 성공하지 못한 자신을 낮추기도 한다. 그러나 슌타는 콩트로 성공하지는 못했더라도, 우리를 응원해주는 이들이 남아있다면 우리는 성공한 것이 아닐까라고 반문한다. 나카하마도 마찬가지다. 갓 팬이 되어 맥베스의 해산의 순간까지를 함께 한 나카하마는 그들의 콩트를 통해 다시금 나아갈 힘을 얻는다. 그리고 그 마음을 표현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작품의 말미에 이르러 하루토는 나카하마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한 사람이 진심으로 우리를 지켜봐 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 같은 사람들은 힘을 낼 수 있어”. 이들은 절대 실패한 것이 아니다. 어떤 것을 온 마음 바쳐 사랑해본 사람은 무엇이든 해낼 수 있으며, 이들은 맥베스로서의 활동은 졸업했으나 그 시간은 사라지지 않는다.
서른이 된 나는 많은 것을 포기했다. 어쩌면 포기라고 부르기도 부끄러울지 모른다. 맥베스처럼 미치도록 사랑한 것도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 시간을 살아내며, 내가 진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우습게도 주변인들은 모두 알고 있었던 것을 나는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그래서 새로운 선택을 해보려 한다. 과거에 선택했던 꿈도 그렇다. 나는 포기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더 사랑하는 것을 찾았기에, 나는 포기가 아니라 선택을 하는 것이다. 이 꿈이 어떤 결말에 이를지는 모른다. 그러나 여전히 꿈을 꾸는 나의 삶은 반짝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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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탈룰라
탈룰라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가 섬세하고 짜임새 있으며 대화의 중심이 남성이 아닌, 여성의 시각으로 쓰였다는 점에서, 여성 감독의 연출이 돋보인다. 관객은 이 영화가 해피엔딩일 거라고 어느 정도 알고 본다. 최소한 싸이코, 스릴러, 범죄, 호러 영화는 아니라는 건 분명하다.
낡은 밴을 끌고 다니며 전국을 떠도는 젊은 연인 루(탈룰라)와 니코는 소소한 도둑질도 하고, 마음 내키는대로, 발길 닿는대로 떠돈다. 그렇게 약 2년을 떠돌다보니 니코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루에게 함께 자기 집으로 가자고, 결혼도 하고, 취업도 하고, 제대로 된 삶을 살아보자고 말한다.
하지만 루는 한심하다는 듯 니코를 바라보고, 지금처럼 사는 게 얼마나 좋은데, 그런 미친 짓을 하느냐며 타박한다. 밴을 끌고 전국을 다니며 사는 것이 자유롭게 보이고, 니코가 훔쳐온 엄마의 신용카드로 기본 생활은 영위하고 있으니, 이들이 밥을 굶는 경우는 없었고, 최소한의 생활을 유지하며 마음 편하게 지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니코는 뉴욕에서 루를 만나 불쑥 집을 떠난 것처럼,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이 생겼고, 루가 꿈에서 무중력 상태에 있다가 놀라서 깨던 날, 니코는 말 없이 루를 떠나 집으로 돌아간다.
혼자 남게 된 루는 낡은 밴을 몰아 니코의 집이자 니코의 부모가 살고 있는 뉴욕으로 간다. 가장 먼저 니코의 엄마 마고를 만나지만, 마고는 루를 의심한다. 마고도 남편과 이혼 수속 중이어서 마음이 복잡하다. 루는 거리를 떠돌다 호텔에 몰래 들어가 객실 문앞에 놓인 음식 찌꺼기를 훔쳐 먹다 한 여성에게 들킨다. 이 여성, 캐롤린은 루를 호텔 직원으로 착각하고, 외출할테니 아기를 봐달라며 팁을 100달러나 준다. 캐롤린은 아기가 싫고, 아기를 보는 것이 너무 힘들고 괴롭다고 불평을 털어 놓는다.
그렇게 하룻밤 아기를 봐주고, 새벽에 돌아온 캐롤린은 술에 취해 정신을 잃고 잠을 자고, 아침에 호텔을 나가려는 루는 아기가 너무 애처럽게 울어 하는 수 없이 아기를 데리고 나온다. 루는 아기를 데리고 다시 마고의 집으로 가고, 아기를 니코의 아이라고 거짓말한다. 마고는 어쩔 수 없이 아기와 루를 집으로 들이고, 세 사람은 함께 생활한다.
잠에서 깬 캐롤린은 아기와 루가 사라진 것을 보고, 루가 아기를 납치했다고 생각하고, 호텔과 경찰에 알린다. 경찰이 등장하고, 이제 아기 납치 사건이 된 상황에서 캐롤린은 이 일이 너무 크게 알려지지 않기를 바라지만, 호텔 직원의 제보로 언론에 보도되고, TV 뉴스에도 아기 납치 사건이 보도된다.
캐롤린은 부자인 남편과 결혼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자기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는 남편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아기를 낳으면 남편의 관심을 받을까 생각해 임신, 출산의 과정을 겪지만, 아이에게 모성애를 느끼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하면서도 처량하다. 아기는 보모가 대신 키워주고 있었다.
마고의 집에서 함께 생활하는 루와 아기는 조금씩 가까워지고, 루는 아파트 앞에서 레모네이드 장사를 해 돈도 조금 번다. 하지만 마고는 이런 루의 모습이 마땅치 않다. 마고는 지식인이고, 살면서 어려움을 겪은 적이 없는 중산층 엘리트로, 자존심과 자부심이 강한 여성이다. 마고는 거의 웃지 않으며, 모든 사람에게 차갑고 쌀쌀 맞게 대한다. 그렇다고 그의 내면까지 나쁜 인성의 인물은 아니다.
오히려 마고는 자기를 잘 도와주고, 볼 때마다 친절하게 대하는 아파트 수위 마누엘에게 호감을 갖고, 마누엘을 집으로 초대해 와인을 마시자고 제안한다. 물론, 이때 마고는 남편과의 이혼 스트레스, 게이로 커밍아웃한 남편에 대한 복수심 같은 것들이 있었겠지만, 마누엘에게 호감을 느낀 것도 사실이다.
마고의 남편이자 니코의 아빠인 스티븐이 마고와 루를 초대해 점심을 같이 먹는다. 스티븐은 몇 년 전에 커밍아웃을 했고, 다른 게이와 함께 살고 있다. 이 게이 커플은 아이를 입양할 생각을 하고 있는데, 미국에서는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캄보디아의 고아를 입양하는 방법을 알아보고 있다고 말한다. 캄보디아는 돈만 주면 쉽게 아이를 입양할 수 있으며, 심지어 고아가 아닌 아이도 입양할 수 있다고 말한다.
마고는 스티븐에게 거의 20년 동안이나 자기를 속였다고 비난한다. 즉, 성정체성이 다른 것을 말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기와 결혼했으며, 결혼 기간 내내 자신(스티븐)의 성정체성을 고백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마고의 비난에 스티븐은, 자기가 게이라는 걸 마고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고 반박한다. 20년 전, 마고는 대학원에서 박사 논문을 쓰고 있었고, 스티븐은 돈이 많은 사람이었던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마고 역시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지만, 자기의 삶 - 학문 - 에 충실하다보니 좋은 엄마가 되지 못했다고 후회한다.
이쯤에서, 관객은 루와 니코가 왜 집을 뛰쳐나와 집시처럼 살아가고 있는지 이해하게 된다. 처음에는 그저 철없는 어린 집시인줄 알았던 두 사람에게 깊고 큰 마음의 상처가 있었고, 그것은 모두 부모로 인해 생긴 것임을 알게 된다.
니코는 아버지가 게이라고 커밍아웃하는 걸 보면서 크게 충격 받았을 것이고, 오랜 동안 엄마와 아버지가 서로에게 무관심하고 냉정하게 대하는 모습을 보면서 정서적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루 역시 어렸을 때 엄마가 자기를 버리고 도망갔다는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 있어서, 늘 버림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크게 마음에 남아 있다. 이 두 청년이 그나마 잘 견디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건, 이들이 마약을 하거나, 마약중독자가 아니라는 것, 니코의 경우 언제든 돌아갈 집(엄마)이 있다는 것이 최후의 보루로 남아 있었기에 범죄자나 마약중독자가 되지 않았다고 보여지고, 그보다 더 직접적 원인으로는 이 청년들이 아직은 순수함을 지닌 사람이라는 점이다.
캐롤린은 호텔에서 나와 집으로 가는 길에 택시에서 우연히 거리에 있는 루와 아기, 마고를 발견한다. 막 지하철을 타려는 그들을 쫓아가지만 놓치고, 집에 돌아온 캐롤린은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남편과 경찰, 아동보호국 직원 앞에서 남편의 비난을 들으며 괴로워한다.
캐롤린이 본 장면을 통해 정보를 얻은 경찰은 곧바로 루와 아기를 추적하고, 이때 마침 경찰에게 신원을 알 수 없는, 그러나 관객은 다 아는, 제보가 들어온다.
루는 아기와 둘이 처음 니코를 만났던 뉴욕의 부둣가에 앉아 생각에 잠긴다. 그때 니코가 다가왔고, 두 사람은 아기를 안고 병원으로 간다. 아기가 아프다고 생각한 루는 병원에서 아기를 치료하려 하지만, 의료보험도 없고, 신원도 명확하지 않아 치료를 거부당하는데, 마고의 집으로 갔던 경찰은 루와 아기가 병원에 있다는 정보를 듣고 병원으로 달려간다.
마고와 캐롤린은 영화 거의 마지막에 만난다. 마고의 주방 테이블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 캐롤린은 자기가 얼마나 형편 없는 여자인지, 아이에게 몹쓸 짓을 한 엄마인지 처음 본 마고에게 솔직하게 말한다. 아기를 낳고도 남편이 자기에게 관심을 두지 않자, 아기가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아기가 미웠다고 말한다.
마고는 캐롤린의 처지를 충분히 공감하면서, 자기도 아들 니코가 아기였을 때를 떠올리며 죄책감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마고가 임신한 것은 대학원 때, 박사 논문을 쓰던 당시였고, 마고는 모성애를 느낄 여유도 없이 출산하고, 논문에 매달려야 했다. 그 와중에 아이와 충분한 교감을 나누지 못했고, 아이를 거의 방치하다시피 키웠다.
병원에 있던 아기와 루와 니코는 달려온 경찰에 체포되고, 아기는 캐롤린의 품으로 돌아간다. 이제 캐롤린은 아기가 얼마나 소중한지, 자기가 아기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깨닫는다. 그렇게 루는 경찰에 체포당하고, 마고는 걱정말라고 다독인다. 루는 경찰차에 실려가면서, 마음에서 우러나는 뿌듯한 기쁨을 느끼며 혼자 슬며시 웃는다. 루는 자기가 세상에 혼자 버려진 외로운 아이가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마고 역시, 혼자 공원을 산책하다 문득 중력이 사라지며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고, 본능적으로 나뭇가지를 붙잡는다.
마고는 나뭇가지를 붙잡고 다시 지상(과거의 현실)으로 내려올 것인가, 아니면 나뭇가지를 놓고 중력이 없는-새로운 세상-삶을 살아갈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서 있음을 느낀다.
영화는 여성의 시각, 여성의 입장에서 모성애, 부부 관계,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들여다 본다. 여성은 무조건 모성애를 가져야 하고, 모성애를 느끼지 못하거나, 모성애가 없으면 비난받아야 하는가. 캐롤린의 경우, 남자(남편)에게 종속된 수동적 삶을 살아간다. 남편에게 관심을 끌어야 하고, 성적 매력을 잃지 않도록 외모를 꾸며야 하고, 다이어트를 해서 날씬한 몸을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자기가 낳았지만, 아기는 보모가 키우고, 자기는 그 시간에 몸매 관리, 피부 관리를 해야 하고, 남편에게 잘 보이는 것이 지상 목표가 되어 살아왔다. 그럼에도 남편은 자기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아기의 육아에도 전혀 관심을 두지 않으며, 아이를 돌보지 않는다고 아내 캐롤린을 비난한다.
대부분의 남성(남편)이 비슷하다. 육아는 아내(여성)가 전적으로 하는 것이며, 남편이 조금 도와주는 것만으로도 꽤 가정적인 남편이라고 생각한다. 캐롤린은 산후우울증을 겪고 있었지만, 자기가 산후우울증을 겪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출산과 육아에 무지하다. 산후우울증이 심하면 산모는 아기도 살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한다.
캐롤린이 삶의 의미, 자기 존재의 가치를 남편의 사랑에 두었다면, 마고는 자기의 학문적 성취에 두었다. 둘은 형식적으로는 다르지만, 본질에서는 같다. 즉, 아이를 출산하고, 아이와 정서적 결합을 해야 할 시기에 아이보다 자기의 욕망에 더 충실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건 자신의 입장에서는 당연할 수 있지만, 아이의 입장에서는 정서적 방임이자 아동학대다.
여기에 남성(남편)이 육아에 적극 개입하지 않는 것도 정서적 방임과 아동학대의 책임을 물어야 하며, 마고의 남편은 게이로 커밍아웃하면서 자기의 성정체성, 자기의 삶을 당당하게 드러내지만, 정작 아내 마고와 아들 니코의 삶에 대한 배려는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성소수자는 항상 사회적으로 약자이므로 보호받아야 하는가의 딜레마가 있다. 니코의 아빠는 마고와 니코에게는 약자가 아닌, 강자로 군림하는 존재다. 그는 많은 재산을 가진 사람이고, 남성이며, 사회적 기득권에 속하는 백인이다. 그가 단지 게이라는, 성소수자라는 이유만으로 여성인 마고와 소년인 니코보다 더 보호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루, 마고, 캐롤린은 여성이라는 존재만으로 이미 사회적 약자다. 감독은 세 명의 여성을 각각 사회적 범주의 대표적 캐릭터로 설정한다. 루는 부모의 학대와 방임 속에서 버림받은 여성으로, 마고는 지식인이고 지성인이지만 남성권력 - 가부장제, 남성우월주의 사회 -의 사회에서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는 여성으로, 캐롤린은 미인이어서 남성에게 인기가 많지만, 돈 많은 남성과 결혼해 남성(남편)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종속된 삶을 살아가는 여성을 대표한다.
이들은 각자 자기가 생각하는대로 억압된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자각을 하게 된다. 그 시도는 성공할 수도, 그렇지 못할 수도 있지만, 여성이 현재의 사회 구조인 남성우월주의, 가부장제를 바탕으로 하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늘 소수자, 약자로 존재해서는 안된다는 자각이 생기고, 그런 여성들이 연대해 사회의 조직으로 발전하고, 힘을 갖게 된다면, 여성의 삶은 물론, 모든 인간의 삶이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보여준다.
영화에서, 세 명의 여성이 지향하는 삶을 중심으로 보여주었다면, 여성과 가족이라는 두번째 주제도 눈여겨 볼 내용이다. 영화에서 '정상적인 가족'은 없다. 여기서 '정상'이라는 말은, 기존의 사회질서, 기득권을 가진 자들이 말하고, 교육하는 '가족'의 의미를 뜻한다. 즉, 이성애를 가진 남자와 여자가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가족 단위를 말한다.
루는 어려서 가족이 해체되었고, 엄마가 자기를 버렸으며, 가족이라는 이름을 가진 경험이 없다. 그래서 니코가 '정상적인 삶'을 살자고, 결혼도 하고, 직장도 다니고..했을 때, 진심으로 짜증을 낸다. 루에게 가족은 트라우마다. 자기가 아이 때 버림받은 것처럼, 자기가 가정을 꾸리고, 가족이 생기면, 또 그런 일이 발생할 것 같은 트라우마가 있는 것이다.
마고에게 가족은 불행하다. 남편은 커밍아웃하고 떠나가고, 아들 역시 갑자기 집을 나갔다. 그는 이혼하자는 남편의 요구에 몇년째 합의하지 않고 있다.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가족이 해체되는 것이 불안하고 두렵기 때문이다.
캐롤린은 다른 사람이 보면 행복한 가족이었지만, 그는 자존심도, 자기애도 없어서 한 가족을 이끄는 '엄마'의 역할을 알아서 포기한다. 즉, 결혼해서 한 남자의 아내가 되었고, 아이를 낳아 엄마가 되었지만, 그의 정신적 단계는 아직 어리고 미숙한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마고는 루가 아이를 데리고 오자, 그렇게 함께 살면서 한 가족을 이루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한다. 루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마고는 루와 아이를 사랑한다. 루는 돌발적으로 캐롤린의 아이를 호텔에서 데리고 나왔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기가 아기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기를 키우는 게 얼마나 행복하고 기쁜 일인지 깨닫는다. 루는 결혼도 하지 않았고, 임신, 출산도 하지 않았지만, 아기를 키우는 마음은 진짜 엄마만큼이나 애틋하다.
캐롤린은 아이를 잃어버리고 나서부터 진짜 엄마가 된다. 그는 남편에게 버림받을 걸 알고 있지만, 그런 결말과 관계 없이,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모성이 살아나고, 자신을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인간으로 살아갈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한다. 남편에게 이혼당하면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겠지만, 오히려 독립적이고 자존감 있는 삶을 살게 될 거라는 자신감이 생긴다.
세 명의 여성은 아기를 중심으로 만나게 되었고, 어쩌면 이들은 세 명의 엄마와 한 아기가 가족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가족의 형태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마고의 남편이 다른 게이를 만나 가족을 이루고, 가정을 꾸린 것처럼, 인간 집단의 최소 단위인 가족은 지금보다 훨씬 다양한 형태를 띄게 될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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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곳에 뿌리내리려는 한 가족의 이야기
먼 이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많은 사람들이 해외 이민의 길을 떠난다. 고국에서의 미래가 보이지 않거나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선택한 이민의 길은 사실 쉽지 않다. 완전히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언어를 배워가면서 조건이 좋지 않은 일부터 시작해야 새로움의 삶을 천천히 익숙한 삶으로 바꿀 수 있다. 그렇게 일을 해나가면서 조금씩 나은 일을 찾고 가족들과 삶을 이어나간다. 새로운 시작을 선택한 가족들은 서로를 의지하면서 그 힘든 이민의 삶을 받아들이고 점점 그곳의 일부분이 되어간다. 어떤 나라에서든 이민자들의 삶은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여전히 그런 과정을 거친다.
사실 새로운 삶에 도전하는 것이 꼭 이민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살면서 전혀 새로운 곳에 이사 가게 되어 살게 되거나 다른 환경으로 가게 될 때 우리는 그런 경험들을 한 번쯤은 겪게 된다.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일을 찾아 다시 삶을 만들어 나가는 장면들을 우리는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그렇게 새로운 환경에서 앞으로 나아가려 노력할 때, 그 쉽지 않은 현실을 앞에 두고 가족들은 때론 서로 의견 대립을 하고 싸운다. 그러다가도 어느 순간 다시 손을 잡고 서로를 의지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새로운 곳에 온전히 뿌리내리기 위해 의지할 곳은 바로바로 옆에 있는 가족뿐이다.
영화 <미나리>는 새로운 환경에서 삶의 뿌리를 내리려고 하는 한 가족의 이야기다. 제이콥(스티븐 연), 모니카(한예리), 딸 앤(노엘 케이트 조), 아들 데이빗(앨런 김) 가족이 알칸소의 새 집에 오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미국 이민자의 삶을 살고 있는 제이콥과 모니카의 가족이 다시 새로운 지역 알칸소로 이주해 새로운 삶에 도전하는 이야기를 담는다. 제이콥은 바퀴가 달린 집과 그 주변의 땅에 농장을 만들어 생계를 이어나가려고 한다. 모니카는 병아리 감별하는 일을 하며 같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다. 미국 대도시의 삶에 잘 적응하지 못한 듯한 이들은 새로운 곳으로 옮겨 좀 더 나은 삶을 꿈꾼다. 거주 환경과 주변을 본 모니카가 실망감을 토로하지만 여기서 새롭게 시작하자는 남편 제이콥의 말에 일단 그곳에서의 삶을 준비한다.
제이콥이 준비하는 농장은 그의 가족이 좀 더 안정적으로 생활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제이콥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집 주변의 땅에서 물을 찾는 일이다. 물길을 찾는 외부인을 불러와 살펴보거나 자신이 직접 땅을 파서 땅속의 물을 찾아 농사에 활용한다. 제이콥이 늘 물에 신경 쓰는 것처럼, 영화 속에서 물은 꽤 중요하다. 물만 잘 공급된다면 농사를 짓기 수월하고 이들 가족이 큰 불편함 없이 뿌리내려 사는데 도움이 된다. 물이 원활하게 공급되었을 때는 문제가 없지만 물이 끊겼을 때 가족을 압박하는 것은 생활의 불편함 뿐 아니라 경제적인 압박도 포함된다. 그들이 목이 타는 것과 같이 마음속도 타들어가고 부부는 의견 대립으로 충돌한다.
제이콥은 자신의 농장에서 작물을 성공적으로 수확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그는 그것이 자신의 가족들을 위한 마지막 기회라고 믿고 부단히 매달린다. 반면 모니카는 실패할 수도 있는 농장에 투자하는 것보다는 좀 더 안정적인 병아리 감별을 지속적으로 하길 원한다. 그리고 조금은 더 큰 도시로 이주하여 경제적으로 어렵더라도 가족과 함께하며 문제를 해결해나가기를 원한다. 두 사람 모두 가족을 위하지만 서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조금 다르다. 제이콥은 농장의 성공이 가족에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부단히 매달린다. 당장은 경제적으로 쪼들리고, 환경이 좋지 않더라도 자신이 그리는 안정적인 상황이 그의 눈앞에 보인다. 그래서 그는 그 농장을 포기할 수 없다. 그 농장의 성공이 바로 가족의 안정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반면 모니카는 적은 돈을 벌더라도 바로 지금 안정적으로 좋은 환경에서 생활하는 것을 원한다. 그래서 당장 성공할지 실패할지 모르는 농장일에 매달리는 제이콥과 의견 대립을 하게 된다.
그런 작은 대립에도 불구하고 모니카와 제이콥은 서로의 그 마음을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모니카는 제이콥이 할 수 있는 환경을 은연중에 만들어준다. 비록 제이콥의 의견에 모두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가 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말리지는 않는다. 또한 자신의 엄마인 순자(윤여정)를 미국으로 불러와 자신과 남편이 일하는 동안 아이를 돌볼 수 있게 한다. 순자는 이 가족이 좀 더 안정적으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윤활유이자 물 같은 존재다. 그리고 가장 한국적인 사람이기도 하다. 그가 미국으로 올 때 가져온 고춧가루, 멸치 등은 밥상에 올라올 음식이 되어 가족들에게 고국의 맛을 선사하고, 그가 가져온 화투는 아이들에게 한국의 놀이가 가진 재미를 알려준다. 비록 아이들은 처음 만나는 외할머니와 데면데면해 하지만 아이들은 곧 그것에 익숙해진다. 그렇게 조금씩 외할머니는 이 가족의 한 구성원이 되어간다.
그 익숙해진다는 것이 곧 친숙해진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이들이 새로운 사람을 만나 완전히 마음을 열기까지는 꽤 긴 시간이 걸린다. 이 영화 속 데이빗과 앤 도 마찬가지다. 대화조차 잘 통하지 않는 외할머니에게 그들이 친숙함을 금방 느끼기는 어렵다. 처음 외할머니를 만난 데이빗은 연신 할머니 같지 않다며 혼자 중얼거리는데, 한국의 할머니를 처음 만났고 기대하던 할머니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부모님이 일하러 간 시간, 어쩔 수 없이 외할머니와 같이 시간을 보내는 동안 데이빗과 앤은 외할머니와 함께 집에서 조금 떨어진 냇가에 산책을 나간다. 특히 데이빗은 그 산책의 시간을 보내며 순자와 교감하고 그리고 그가 가지고 있던 질병도 서서히 회복해나간다. 그렇게 모든 가족의 마음속에 익숙함이 자리해나갈 때 비로소 그들이 그곳에 정착할 수 있는 기운이 만들어진다.
<미나리> 속 특별한 장면들은 대부분 외할머니 순자와 데이빗이 만들어낸다. 서로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두 사람은 짧은 한국어와 영어를 통해 이야기하는데 냇가 옆에서 데이빗과 부르는 원더풀 미나리 송에서도 정감이 느껴지고 티격태격 장난치는 듯한 두 사람의 행동도 웃음을 짓게 한다. 또한 순자는 데이빗이 눈에 보이는 위험을 보이는 곳에 놓고 관리하게 만드는데 이것은 심장병이 있어 늘 뛰기를 두려워하는 데이빗에게 그 위험을 직면하며 관리할 수 있게 만들기도 한다.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데이빗은 마음도 몸도 서서히 치유가 되어간다 이 영화가 사랑스럽게 느껴졌다면 외할머니와 손주가 만들어낸 이런 앙상블 때문일 것이다.
순자는 고국에서 가져온 미나리 씨를 냇가에 뿌려 미나리를 키운다. 물만 있으면 잘 자라는 미나리는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모니카와 데이빗 가족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가족에게 물만 있으면 농장을 성공적으로 운영할 수 있고 큰 문제없이 정착할 기회가 만들어진다. 영화 후반 군집을 이루어 아주 잘 자라는 미나리의 모습은 어쩌면 이 가족의 미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영화 속에서는 이들 가족이 잘 정착하여 살게 되는지, 농장 운영은 성공하는지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이 그곳에 정착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어떤 마음인지는 잘 보여준다. 결국 다섯 명의 가족이 결코 떨어질 수는 없고 앞으로도 같이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존재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영화의 마지막 타오르는 농장에 뛰어든 제이콥과 모니카의 모습은 인상적이다. 그들은 싸운 직후였고, 이별의 결심까지 한 후였다. 하지만 남편이 노력하여 얻은 결과물이 타오르자 그것의 일부라도 구하고자 이리저리 물건을 불 밖으로 빼는 모니카의 모습에서 남편의 노력에 대한 안타까움이 느껴지고 그들이 결국 같이 그것을 해결해 나갈 것임을 보여준다.
가족의 고난사를 보여주는 것 같지만 전반적으로 영화 <미나리>는 긍정적인 영화다. 잠깐씩 모습을 비추는 알칸소의 이웃과 교회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그들에게 호의적이다. 유일한 동양인이라는 점 때문에 다르게 받아들여지지만 조금은 신기하게 바라보고 친해지려 다가선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폴(윌 패튼)은 특이한 행동을 하는 이웃으로 등장하지만 결코 나쁜 인물이 아니다. 이해 못할 행동을 하지만 그는 진심으로 제이콥의 농사가 잘되길 빌면서 일손을 돕는다. 악의 없이 이 가족이 그 땅에 정착할 수 있게 도움을 준다. 어쩌면 영화 속 그의 주술이 실제로 가족의 마음이 안정되도록 심리적인 도움을 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덕분에 농작물 수확도 잘할 수 있었고, 집안에 나쁜 일들도 좋은 방향으로 마무리가 되었으니까. 이민자들 주변에 있었던 좋은 이웃들의 모습을 폴이라는 인물이 대표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폴이 이민자인 그들을 이상하게 취급하지 않은 것처럼 가족도 폴을 하나의 이웃으로 대한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각기 다른 포인트에서 공감하며 관람할 것 같다. 어떤 사람은 부부의 이야기, 어떤 사람은 외할머니와 손주들의 이야기 그리고 본인이 이민자라면 이민자 자체의 이야기에 더욱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분명 이민자들의 경험이 담겨 있지만 아주 보편적인 가족의 정서를 담고 있어 널리 공감될 수 있는 영화인 것 같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간단한 리뷰가 포함된 movielog를 제 유튜브 채널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주로 말 위주로 전달되기 때문에 라디오처럼 들어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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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리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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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실패한 아들'의 분노
7★/10★
갈비, 잡채, 각종 전, 김치…… 정성스레 요리한 맛깔스러운 요리가 하나둘 식탁에 오른다. 창래와 누나가 종일 요리한 음식이다. 가족들이 격식 있는 옷을 갖춰 입고 식탁에 앉아 있고, 마지막으로 엄마가 창래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온다. 한 해 마지막 날의 저녁 식사, 그리고 어쩌면 영영 마지막일지 모를 가족의 저녁 식사가 시작된다. 엄마는 감동한 표정으로 음식을 둘러보고는 창래가 가위로 잘게 자른 갈비를 입에 넣는다. 그러나 바로 뱉어낸다. 위암 투병과 항암 치료로 몸이 극도로 허약해진 엄마는 자식들이 준비한 음식을 넘기지 못한다. 창래는 자책한다. 갈비를 이렇게 달게 요리해서는 안 됐다고, 이건 실패한 요리라고. 엄마가 그런 창래를 나무란다. 그렇지 않다고, 정말 잘 만든 요리라고. 그러나 엄마는 끝내 아무것도 삼키지 못한다. 창래가 옳다. 그의 요리는 철저하게 실패했다.
죽임이 임박한, 극도의 고통을 겪는 엄마 곁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엄마와의 마지막 식사를 위해 어떤 요리를 할 수 있을까. 창래는 간병을 위해 뉴욕의 번듯한 직장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온다. ‘라면 하나 끓이지 못하는’ 아버지를 대신해 엄마를 위해 요리하고, 병간호하고, 청소하고, 갈라지고 떨어진 거실의 내벽을 새로 칠한다. 창래는 어린 시절 엄마가 수없이 해줬던 요리를 떠올린다. 부엌에서 어깨너머로 배우고, 엄마가 종종 차근히 설명해주었던 레시피를 천천히 복기한다.
엄마는 한국에서 실력 있는 농구선수였다. 아빠를 만나 결혼한 후에는 그를 따라 미국으로 왔다. 창래가 엄마의 삶이 있는데 왜 그런 선택을 했느냐고 묻자 엄마는 부드럽고 단호한 표정으로 말한다. 자신에게는 가족이 더 중요하다고. 그러나 쉽지만은 않았다. 아빠와 달리 엄마의 영어는 서툴다. 영어가 그녀의 모국어가 아님이 단번에 드러나는 발음이다. 그래서 엄마는 종종 창래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이를테면 카드사에 전화해 대금이 잘못 청구되었다고 묻는 일 같은 것들. 창래는 엄마가 이 문제를 회피한다고 생각한다. 영어를 더 연습하면 되는데 그러지 않는다고, 어쩌면 게으름의 문제일지도 모른다고. 엄마는 그 말에 북받친 듯 눈물을 보이고, 창래는 뒤돌아선 엄마에게 용서를 구한다.
같은 이민자지만 엄마와 아빠/누나/창래의 세계는 다르다. 학자인 아빠는 엄마가 겪는 문제를 겪지 않는다. 창래와 그의 누나 역시 엄마의 집요한 노력으로 아빠의 세계에 진입했다. 엄마는 자식들이 자신의 세계에 머무르지 않고 ‘상승’한 데에 크게 만족한다. 그러나 동시에 양가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내가 이렇게 죽을 걸 알았어도 아들을 기숙 학교에 보냈을까? 그 시기가 아들과 함께할 마지막 시간임을 알았더라도? 창래를 향한 엄마의 모순적 애착이 창래를 집으로 돌아오게 한다. 아빠의 세계에 진입했으나 엄마와 그녀의 세계가 소외되는 것을 견딜 수 없는 창래는 집으로 돌아와 엄마에 대한 아빠의 무지로부터 그녀를 옹호한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 창래의 귀환은 실패했다. 어머니는 그가 요리한 음식을 먹지 못하고, 창래는 엄마의 세계로 회귀하지 못한다. 실패는 ‘집으로 돌아오는 것(coming home again)’이 ‘엄마에게 돌아오는 것’과 같은 의미라는 데서부터 예정되어 있었다. 창래에게 엄마/집은 그가 마음만 먹으면 돌아갈 수 있는 고정된 장소다. 그러나 실재하는 엄마/집은 창래의 기대와는 다르다. 엄마와 그녀가 꾸리는 공간인 집은 그녀의 상황과 욕망에 따라 매 순간 재구성되는, 생동하는 무언가다. 창래의 성공을 기뻐하는 동시에 그와 더 오랜 시간을 보내지 못한 데 아쉬움을 느끼는 엄마의 모순적 애착이 보여주듯, 엄마의 욕망과 기대는 창래(그리고 다른 가족 구성원)와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변이되어왔다. 그녀의 욕망과 기대가 투영된 집도 마찬가지다. 요컨대, 창래가 돌아가고자 하는 장소의 좌표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창래가 자꾸 미끄러지는 이유다. 그는 자신이 기억하는 엄마 요리의 맛과 자신이 직접 요리한 음식의 맛이 다르다는 데 분노하며 책상을 내리친다. 저녁 식사를 망친 후 새해 카운트다운을 하고 나서는 엄마를 꽉 끌어안는데, 엄마의 건강 상태를 고려하지 않은 창래의 거친 포옹은 엄마에게 고통만 준다. 창래의 괴로움은 진짜다. 엄마를 향한 그의 마음도 진짜다. 문제는 창래의 진심이 젠더화된 가족의 의미망을 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엄마가 자기 말은 안 들어도 네 말은 듣지 않느냐는 누나의 말이 알려주듯, 창래는 가부장적 가족주의의 수혜자다. 창래와 엄마가 오랫동안 기대온 이 관계망의 문법이 창래의 진심을 가로막는다. ‘엄마-아들’의 기존 관계망에서 아들은 엄마를 돌볼 수 ‘없기’ 때문이다. 엄마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시도가 실패할 때 발생하는 분노를 폭력적으로 표현하는 창래에게서, 가부장적 가족주의가 개인에게 새기는 비참함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창래는 엄마에게 받은 사랑을 되돌려주려는 ‘좋은 아들’이지만, 가부장적 가족주의 앞에서 번번이 가로막히는 ‘무능한 아들’이기도 하다.
엄마가 죽은 뒤, 창래는 그녀가 쓰던 물건을 무심하고 거칠게 쓰레기통에 담는다. 그는 여전히 분노한 상태다. 창래는 왜 엄마/집으로 돌아오려는 자신의 시도가 실패했는지에 대한 답을 아직 찾지 못했다. 그래서 엄마의 죽음조차 제대로 애도하지 못한다.
우리는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건 진심이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절반만 맞는 말이다. 아무리 애절한 진심이라도 그 진심이 전달되는 구조적 통로에 문제가 있다면 상대에게 가 닿지 못한다. 창래의 의도하지 않은 무능은 ‘효도’와 ‘돌봄’ 어딘가에 내재한 공허함을 보인다. 이 공허함을 직시하지 않고 ‘진심’만을 강조하는 한, 우리는 끝없이 실패할 것이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커밍 홈 어게인〉은 한국계 미국 작가인 이창래가 《뉴요커》에 기고한 동명의 에세이를 원작으로 합니다. 아래는 에세이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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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CFF 데일리] 독립 사건을 독립 사건으로
SYNOPSIS.
여동생과 함께 산 정상으로 소를 몰아야 하는 소년. 아름다운 자연과 동물들, 귀여운 남매가 어우러진 모험이야기
PROGRAM NOTE.
부모님이 마을에 간 사이 에브라힘과 그의 여동생 일마는 산에서 소들을 돌본다. 에브라힘이 다리를 다쳐 바위벽 위로 올라올 수 없게 되자 일마는 혼자서 모든것을 해결해야 한다. 그녀는 씩씩하게 임무를 수행하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일마는 점점 불안해진다.
고요하고 아름다운 풍경 속 어린 남매의 이야기지만 그 안에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이 가득하다. 더구나 남매가 심각한 상황에 빠질수록 남매의 대화는 코믹하게 흘러간다. 팽팽한 긴장감과 무해한 웃음을 오가며 보는 이를 쥐락펴락하는 연출과 남매의 생동감 넘치는 연기가 매력적이다. 귀여운 남매의 일화에 소박한 가족의 애정과 신뢰가 깊이 스며있는 영화. 가족관객에게 추천하고 싶다. (함유선)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그 말을 증명하듯, 이 영화는 헬리캠으로 찍은 원경에서 시작한다. 아이들이 사는 세상, 초원과 염소 소리, 황금빛 햇살까지 담아내면서. 그 안에 아이들은 그림의 일부처럼 존재한다. 엄마와 아들, 딸과 아빠, 뛰고 손을 씻고 아빠의 입맞춤을 받고, 풍경의 일부로.
가족이 사는 방식은 더없이 검박하고 단출하여 아름답다. 일상을 영위하기 위한 노동을 아이들도 자연스럽게 나누어 한다. 모처럼 마을로 나가는 부모님의 '쇼핑 리스트'도 네 식구가 나란히 앉아 적는다. 이제 막 철자를 배우고 있는 듯한 막둥이, 딸 일마(Ilma)가 알쏭달쏭 헷갈려 하며 글자를 써 가면서. 얼핏 퉁명스러운 것 같아도 아이들이 원하는 건 또 하나씩 다 사주는, 화목한 가정이다. 남매도 적당히 남매답게 투닥투닥하며 사이가 좋은 것이 귀엽기만 하다.
부모님이 마을로 먼 길을 떠난 날, 에브라힘(Ebrahim)과 일마 두 사람은 부모님이 남겨주신 미션을 차곡차곡 수행한다. 양을 돌볼 것, 도토리를 말려둘 생각이니 양이 먹지 않도록 주의할 것, 피스타치오 열매를 좀 따둘 것. 동생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투덜거리는 오빠 에브라힘에게는 "일마도 이제 다 커서 알 건 다 안다"는 말도 남겨둔다. 두 아이는 제법 능숙한 솜씨로 양을 친다. 둘러멘 가방 속 라디오에서는 '이란 국민 여러분' 어쩌고 하는 말이 흘러나오지만, 이들은 어느 나라의 국민보다는 그냥 이 땅의 일부로 사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그러다 일마가 벌을 발견하면서 사건이 시작된다. 벌이 있다는 건 꿀도 있다는 뜻. 아빠가 분명 가지 말라고 했던 절벽 가에 매달려 꿀을 확인한 에브라힘은, 갑자기 등이 간지러워 손을 놓치면서 벼랑 아래로 떨어진다. 발목을 다쳐 올라올 수 없는 에브라힘과, 그 위에서 엉엉 울기 시작한 일마, 두 사람의 하루는 뜻밖의 점입가경으로 갈수록 고달파진다. 이 영화는 두 남매가 절벽에서 보낸 하루를 꼬박 담은 영화다.
#전통, 기대거나 혹은 반하거나
두 아이는 일단 재난영화의 법칙을 어겼다. 가지 말라는 금기가 있는 곳에는 가지 말아야 했다. 그러나 이미 가버린 이상, 일이 벌어진 이상 두 아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이었을까? 어린 시절 각자가 배운 내용을 들추어 보자.
나는 엄마에게 "길을 잃어버리면 반드시 그 자리에 가만히 있을 것"이라고 배웠다. 그리고 혹시라도 (예를 들어 낯선 사람이 쫓아와 유괴의 위험이 있다던가 하는) 위험 상황에 처하면 아무 가게나 들어가 도움을 요청하라고 배웠다. 어느 가게를 들어가도 가게 주인과 부모님이 다 알음알음 아는 사이일 법한 작은 지역 사회였고, 20년쯤 전이니 지금과는 다른 가르침일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아이들이 했어야 하는 제1의 행동은, 에브라힘으로서는 가만히 있는 것, 일마가 달려가서 어른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두 아이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는다. 지금이라도 달려가서 어른들을 불러오겠다는 일마를, 에브라힘이 말린다. 사유는 여자 혼자 다니다가 낯선 사람을 마주쳤을 때 실추될 "명예". 10살도 채 되지 않은 일마, 가축을 돌볼 때는 너무 어려서 돌보기 귀찮은 동생으로 여겨지는 일마가 바깥에 나가면 여자로 인식되어야 하는 현실을 말한다.
그밖에도 두 아이가 내린 선택 중에는 전통에 기대느라 '오... 저러면 안 될 것 같은데' 싶은 것들이 더 많이 있었다. 일마의 머리를 가리는 데 쓰는 스카프가 벼랑 아래로 내려가 에브라힘의 부어오른 발목을 감았다가, '혹시라도 낯선 사람을 마주칠 가능성' 때문에 다시 벼랑 위로 올려보내는 순간도 그렇고. 자칼이 다가왔을 때 여차하면 도망칠 수 있게 신발을 단단히 신는 대신 혹시나 하는 미신을 따르기 위해 신발을 거꾸로 신는 일마의 선택도 그렇고.
그러나 두 아이가 마음 기대는 곳 또한 전통이다. 불사조 깃털을 태우면 불사조가 도와주러 온다는 설화를 생각하며 불사조 깃털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설화 속 인물이 태우지 않은 깃털이 지금 어디에 있을까 궁금해 하는 오색찬란한 상상력은 아이들이 그 하루를 버틸 힘이 되어준다. 상태가 좋지 않아 나오다 끊겼다 하며 사건의 긴장감을 더하던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서른 마리 새' 시무르 설화 또한 그렇다. 잠깐이지만 두 아이를 미소짓게 한 일마의 노래 또한 입에서 입으로 배운 방식일 것이다.
불사조의 깃털은 전설 속에서 사람을 구해준다고 하지만, 사실 에브라힘의 등을 간질인 것부터가 깃털이었다. 전통과 관습은 절대 일면만 가질 수 없다. 사람을 따스하게 감싸고 기댈 곳이 되어주는 면과 갑갑하게 옥죄는 면은 야누스의 얼굴처럼 병존할 수 있다.
#현명하고 다정하고 용감하게
따뜻한 면과 갑갑한 면을 동시에 품은, 전통과 관습이라는 세계. 그 안에서 아이들은 자라왔다. 그래서 현명하고, 그래서 다정하며, 그래서 용감하다. 동시에 이따금씩, 그래서 비합리적이고, 그래서 무정해 보이고, 그래서 겁을 낸다.
그러나 전통이 가진 엄정한 면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충분히 현명하고 다정하고 용감하다. 에브라힘은 하늘의 기색과 양들의 행동을 바탕으로 날씨를 예측하고, 일마에게 적절한 대처 방법을 일러준다. 떨어지면서 입은 부상에 아프고 당황스럽지만, 일마가 너무 겁 먹지 않도록 소리도 지르지 않고, 선의의 거짓말도 적당히 섞는다. 일마 또한 오빠가 시킨 일을 충실히 하고, 시키지 않은 다정한 일까지 고사리 손으로 바지런히 한다. 자기들이 지쳐가는 와중에도 새끼 염소가 지쳐가고 있다며 불쌍히 여기고, 심지어 자칼까지도 안쓰러워한다.
하지만 아이들이 가진 현명하고 다정하고 용감한 면이 가장 빛난 장면으라면, 나는 극악의 상황에서 일마를 달래던 에브라힘의 대사를 꼽고 싶다. 아빠 말대로 일마도 알 건 다 알 만큼 컸기에, 이 파국을 시간 순으로 배열한다면 가장 앞쪽에는 자신이 벌을 보고 오빠를 부른 일이 놓일 거라는 걸 안다. 아직 어린 일마에게 받아들이기 너무 어려운, 패닉이 몇 번이나 찾아오는 상황 속에서도 일마는 엉엉 울면서 오빠에게 미안해 한다. 자기가 신에게 죄를 지어서 그런 것 같다는 말도 한다.
그런 일마를 에브라힘은 부드럽게 달랜다. "사랑해, 일마. 네가 뭘 잘못했어?" 더불어, 벌과 꿀을 발견한 것은 잘못이 아님을 명확히 한다. 일마가 가장 듣고 싶어하는 말과 함께. "마을 세 개를 다 합쳐도 네가 가장 용감해."
두 아이의 나이를 합쳐도 스물이 되지 않을 것 같은데, 서른이 넘은 내가 너무 배우고 싶어하지만 잘 되지 않는 것을, 에브라힘은 이미 알고 있다. 그건 바로 독립 사건을 독립 사건으로 보는 능력이다.
시간 상 앞에 놓였다고 해서 반드시 인과 관계인 것은 아니다. 그 합리적 사고 방식을, 에브라힘은 알고 있다. 전통이 이따금 그들에게 묻힌 비합리적이고 무정해 보이고 겁 나는 마음과 태도 속에서도, 아이들은 자기만의 힘으로 현명하고 다정하고 용감한 것이다.
#Somewhere between the rocks
영화를 보면서 '아동 보호'라는 말을 많이 떠올리긴 했다. 안온한 보호가 부재한 상황을 통해 아동 보호의 필요성을 느끼게 하는 영화이기도 했으므로. 불사조의 깃털도 튼튼한 밧줄도 없는 아이들에게 목소리 높여 부를 호칭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묘하게 안심하게 하는, 그런 안전망이 모든 아이들에게 있길 바라게 만드는 영화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 안전망은 어른들이기 이전에 아이들 자체라는 생각도 들었다. 에브라힘을 절벽에서 끌어올려 줄, 그래서 에브라힘에게 내일을 선사할 힘은 어른들에게 있겠지만, 아이들의 미래는 에브라힘과 함께 이 바위 틈 어딘가에 걸려 있다는 생각.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은 'Somewhere between the rocks 바위 사이 어딘가'인데, 거기야말로 불사조의 깃털 같은 미래가 깃들어 있다는 생각 말이다.
이유는 현명하고 다정하고 용감한 아이들의 면면 그 자체. 자기 나름대로 사투를 벌인 하루가 꼬박 지나고 나서야, 에브라힘은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를 부르고 일마는 멀리서 어른들을 모시고 달려온다. 비로소 문제의 해결점으로 나아갈 수 있는 합리적인 방법이 등장한 것이다. 하루만큼 더 현명하고 다정하고 용감해진 아이들이, 이렇게 세상을 안전히 살아갈 방법을 또 하나 배운 아이들이 자라난다.
독립 사건을 독립 사건으로 볼 줄 아는 아이들의 시각으로 전통과 관습을 해석해 간다면, 전통와 관습이 사람을 옥죄는 면보다 따뜻하게 감싸주는 면이 더 강력하게 기능하지 않을까? 사실 여성이 머리카락을 스카프로 가리는 것과 여성(을 비롯한 가족)의 "명예 실추"는 각각 별도의 독립 사건이다. 여성이 혼자 걷다가 낯선 사람을 마주치는 것과, 그에게 해코지를 당하는 것 또한 논리적인 인과 관계가 없다. 범죄가 일어난다면 범죄와 인과 관계를 맺는 것은 가해자의 행위뿐일 테니까.
그러므로 에브라힘의, 그리고 그 에브라힘의 애정 어린 말로 위로를 받은 일마의 성장으로, 바위 틈 어딘가에 매달려 있는 미래는 점차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이란에서 머리카락을 자유롭게 드러낼 수 있는 미래 또한. 모든 독립 사건이 독립 사건으로 존재하는, 지금보다 가뿐하고 산뜻한 미래를 꿈꿔 본다.
9월 15일 13:30-14:52 롯데시네마 은평 7관
9월 16일 10:00-11:22 롯데시네마 은평 3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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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스트휴머니즘 시각 차이
포스트휴머니즘 시각 차이
: <블레이드 러너>와 <블레이드 러너 2049>
1. 들어가며
SF 영화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1982)와 후속작 <블레이드 러너 2049(Blade Runner 2049)>(2017)는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관계를 그려낸다. 약 40년 전 개봉한 <블레이드 러너>나, 개봉한 지 몇 년 되지 않은 후속작에서 다루는 소재는 모두 현대적 관점으로 보아도 여전히 유효한 담론을 생성하는 데 도움을 준다. 본격적으로 영화를 논하기 전에 포스트휴머니즘에 관해 잠시 살펴보기로 하자. 17-18세기의 근대 혁명은 근대적인 개인과 사회를 탄생시켰고, 이로 인해 개인의 주체성을 중시하는 인본주의 사상인 휴머니즘이 태동한다.[1] 포스트휴머니즘은 역사적으로 휴머니즘 이후에 등장한 사상적 조류이고 휴머니즘의 핵심 전제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검토하거나 수정하거나 폐기하고 대안을 모색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2]
<블레이드 러너> 시리즈의 21세기도, 현재 인간이 몸담은 2020년에도 모두 포스트휴머니즘 담론을 무시해서는 안 될 상황에 놓여 있다. 인간과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들의 탈경계화는 다방면으로 빠르게 전개되는 양상을 보인다. 특히나 인간과 기계로 대표되는 인간-비인간의 관계가 그러하다. 현대 사회는 포스트휴먼과 관련한 사안들이 대두되는 사상적 전환기이자 과도기에 직면해 있다. 포스트휴먼은 말 그대로 인간 이후 등장하게 된 존재이다. 생물학적으로 정립된 전통적 개념의 인간이 아닌, 기존 인간을 대체하게 될 존재이고 인공지능이나 유전적 변이를 통해 새로운 성질을 갖게 되는 미래적 인류인 셈이다.[3]
두 편의 영화에는 ‘레플리컨트(Replicant)’가 등장한다. 이들은 단순한 로봇이 아닌, 유전적 기반이 인간과 동일한 복제 인간이다. 이 글에서 다룰 두 영화는 이 레플리컨트와 인간 사이의 갈등을 통해 드러나는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지만, 그것을 풀어내는 데는 다른 접근 양상을 보인다. 두 영화의 서사적 설정은 모두 비인간이 인간의 영역을 대신하여 또 다른 인간적 면모를 생산하게 한다는 점에서, 데카르트로부터 촉발된 근대적 인간 중심 사고를 기반으로 한다. 이때 <블레이드 러너>는 인간 중심 사고에서 탈피하려는 해체적인 면모를 보여주지만,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인간을 최우선으로 하여 휴머니즘을 재생산하는 양상을 드러낸다. 결국, 이 글은 유사한 소재와 주제 의식을 공통적으로 내포한 두 영화가 어떤 지점에서 어떻게 다른 시각으로 그것을 풀어내는지 확인하는 작업이다.
2. 포스트휴머니즘 시각
2.1 <블레이드 러너>: 인간 중심 사고에서의 탈피
<블레이드 러너> 시리즈의 복제 인간 레플리컨트는 <터미네이터(The Terminator)>(1984), <엑스 마키나(Ex Machina)>(2014), <조(Zoe)>(2018) 등 많은 영화에서 다뤄왔던 인간형 로봇으로 단정 지을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다. 외연은 인간과 같거나 비슷하지만 신체 내부를 기계로 채운 로봇들과 다르게, <블레이드 러너>의 레플리컨트는 DNA 염기 서열 구조를 기반으로 하며 인간처럼 혈액과 근육 등을 지닌 유기체이다. 레플리컨트는 포스트휴먼으로서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이들의 행위를 통해 관객은 ‘인간다움’에 관해 고찰할 수 있고, 인간이라는 관념을 재정립하는 기회를 얻는다.
이제 <블레이드 러너>를 본격적으로 살펴보자. 앞서 나는 <블레이드 러너>가 인간 중심의 사고를 탈피하려는 영화라고 말했다. 이 주장은 영화가 제작될 당시의 시대적 배경에서 출발하여 극중 주요 인물인 데커드(해리슨 포드)를 통해 구체화된다. 우리는 <블레이드 러너>와 당대 유행하는 SF 영화들의 차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SF 영화는 기본적으로 인간과 기계 등의 미래 기술과의 대립을 주 소재로 삼는다. 이때 ‘비인간적 존재가 구현하는 인간다움의 궁극적 승리’라는 아이러니로 수렴시키는 전략[4]을 사용하여 인간 중심적 가치를 강조하는 방식이 선호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블레이드 러너>는 인간과 비인간의 갈등을 드러내지만, 두 세계를 동시에 점유하는 데커드가 극을 이끌어 가는 영화다. 즉, 대립 구도의 강화보다는 그 경계를 불분명하게 만드는 작업을 기반으로 하는 작품이다.
데커드는 그 존재를 규정지을 수 없는 모호한 인물이다. 데커드는 불법으로 지구에 들어와 있는 레플리컨트를 처단하는 일종의 형사 같은 존재(블레이드 러너)다. 그가 만약 자신이 인간인 줄 알고 있는 레플리컨트라면 동족을 살해하는 존재인 셈이고, 인간이라면 맡은 바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존재라고 볼 수 있다. 영화는 데커드를 끊임없이 인간과 레플리컨트의 두 영역을 동시에 점유하도록 유도한다. 데커드는 레플리컨트와 싸울 때 대등하게 겨루지 못하고 인간처럼 연약해 보일 때도 있지만, 화면 속 단서를 찾을 때는 인간의 영역을 뛰어넘는 능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처럼 이중적으로 표현되는 데커드의 모습을 통해 관객은 인간과 비인간을 나누는 척도와 기준을 재검토하고 인간 중심적인 편향된 사고에서 벗어날 기회를 얻는다. 전통적인 인간-비인간의 관계를 해체하는 포스트휴먼으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데커드는 포스트휴머니즘 시각으로 볼 때 중요 임무를 맡은 존재라고 볼 수 있다.
<블레이드 러너>의 데커드
2.2. <블레이드 러너 2049>: 인간 중심 주의의 재생산
<블레이드 러너 2049>는 <블레이드 러너>와는 다소 다른 접근을 보여준다. <블레이드 러너>로부터 30년이 지난 세계에서는 인간과 레플리컨트가 표면적으로는 공존하고 있지만, 실상은 보이지 않는 벽으로 구분되어 있지 않은가. 이 세계의 블레이드 러너 레플리컨트 K(라이언 고슬링)는 각성을 통해 새롭게 자아를 확립하는 주체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그런데 K는 전작의 데커드나 베티(룻거 하우어)와 다소 다른 속성을 내포한 존재이다.
전작의 베티는 수명이 다 되어 뒤틀리는 손에 주변에 있던 대못을 꽂아 발작을 진정시킨다. 이후 스스로의 죽음을 온전히 수용하는 그의 모습과 비둘기와 같은 상징적 요소들까지 종합하여 고려한다면 영화에서 그는 마치 예수처럼 묘사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은 새로운 접근이 아니라 기존 담론에서 충분히 도출되어 온 텍스트이다. 비인간인 베티를 예수로 읽어낸다는 말은, 기독교 교리로 점철된 서구 문명의 근간을 뒤흔드는 시도이다. 초월적 존재가 포스트휴먼 격인 베티에 의해 대체되지 않는가. 데커드는 포스트휴먼으로서 인간의 존재적 정체성을 뒤흔드는 존재로 그려지고, 베티는 서구권의 인간 중심 사고와 그 근간을 파고드는 표상으로 자리매김한다.
K는 사실 지극히 평범한 신모델 레플리컨트였으나, 우연한 계기로 인간-비인간으로 이분화된 세계의 경계를 허무는 존재가 된다. 그는 결정적인 순간에 마치 베티와 같은 주체적인 모습을 보여주는데, 사실 데커드를 살리고 그의 딸을 지켜내는 K의 행동은 이분화된 세계의 논리에 균열을 내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해야만 한다. 그는 단지 본인이 생각했을 때 더 인간적인 방식이 적합할 것이라고 여겨 실천에 옮긴 것이 아닌가. 오히려 K의 행동이 불러온 결과는 가족성의 회복과 인간을 최상층의 존재로 전제하는 휴머니즘의 재생산이다. 데커드와 레이첼(숀 영)의 딸인 스텔린(카를라 유리)은 레플리컨트에게서 태어났다. 스텔린은 인간-비인간의 대립 상황에서 비인간의 지위를 새롭게 재정립하는 존재이다. 생식이 가능한 레플리컨트를 통해 생명의 탄생까지 이어지는 과정은 인간이 보유한 근본적인 시스템과 동일하다. 즉, 비인간이 인간의 메커니즘을 완벽히 대체할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포스트휴머니즘을 비인간이 인간화를 겪은 뒤 전개되는 새로운 인간 중심의 근간을 재생산하는 과정에 기초하여 바라본다. 레플리컨트 K의 각성은 두 세계를 동시에 꿰뚫는 질문을 던지는 대신, 기존의 논리 속에서 확장 및 변주를 통한 휴머니즘의 새로운 재생산을 유도한다.
<블레이드 러너>의 베티
<블레이드 러너 2049>의 K
<블레이드 러너 2049>의 스텔린
3. 나가며
이 글은 두 편의 SF 영화 <블레이드 러너>, <블레이드 러너 2049>가 다루는 소재나 설정, 주제의식과 관련하여 포스트휴머니즘적 관점에서 두 영화를 비교하는 방식으로 전개됐다. 두 영화는 동일한 세계관과 인물 설정에서 비롯된 공통적인 주제 의식을 담고 있지만 영화 속 텍스트를 포스트휴머니즘적 시선으로 파고들었을 때는 차이를 드러내는 지점이 명확하게 포착된다. 그 차이를 이 글에서는 <블레이드 러너>의 데커드, 베티와 <블레이드 러너 2049>의 K, 스텔린의 사례를 통해 구체화했다.
<블레이드 러너>의 데커드나 베티는 포스트휴머니즘적으로 보면 기존 질서를 부정하고 배제하려는 존재로 묘사된다. 이들을 통해 도출할 수 있는 영화의 서사적 방향성은 포스트휴머니즘 시대를 맞이한 현실 속 인류에게 일종의 판단적 준거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전작과는 다른 양상을 보였다. 이 작품에서 묘사된 것처럼 문화적, 정치적, 윤리적 행위의 원동력을 비인간도 인간과 동일한 수태(受胎) 능력을 갖게 된다는 데서 찾는 서사적 가정은 포스트휴머니즘의 관점에서 보면 자못 퇴행적으로 보인다.[5] 결국, 전작과 다르게 이 작품은 기존의 인간 중심적 관념 체계를 해체하려는 시도보다는 인간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고를 유지한 채로, 여전히 인간의 지위를 우선하여 담론을 형성해내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영화 속 레플리컨트는 포스트휴먼으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존재이다. 이들을 통해 인간은 휴머니즘의 구조화된 틀 속에 머물 것인지 벗어날 것인지 고민에 직면하게 된다. 포스트휴머니즘과 관련하여, 21세기에 들어서는 관련 논의들이 가속화되고 있으며, <블레이드 러너> 시리즈는 이러한 변화의 동향과 더불어 심도 있게 고찰할 필요가 있는 영향력 있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참고문헌
[1] 강미정 외 『인공지능과 포스트휴머니즘』, 이중원 엮음, ㈜이학사, 2020, p.5.
[2] HORIZON, https://horizon.kias.re.kr/12989/ (검색일자: 2020년 12월 18일)
[3] 강미정 외, op. cit., p.133.
[4] 김소연, 「포스트휴머니즘 영화에서 (탈)육체성과 기술-환상의 문제설정: <블레이드 러너 2049>를 중심으로」, 『씨네포럼』 제33호, 동국대학교 영상미디어센터, 2019, p.18.
[5] Ibid.
이미지 출처: IMDb
* 본 콘텐츠는 브런치 드플레 작가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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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글몽글 심야영화’ Ep.02 당신의 겨울에 감성 이불을 덮어줄 영화 5편
크리스마스도, 2017년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겨울에, 어두운 방에서 이불 덮고 귤 까먹으며 보면 좋을 영화 5편을 소개해드립니다.
렛미인 / 룸 / 브리짓존스의 일기 / 캐롤 / 러브레터
** 강한 스포일러는 없으나, 콘텐츠 특성상 일부 내용이 스포일러가 될 수 있다는 점 알려드립니다.
** 소개 순서는 영화의 선호도와 무관합니다.
** '몽글몽글 심야영화'는 모두가 하루를 마무리할 때 영화를 켜는 '환몽씨네'의 상명이가, 심야에 들려주는 영화 이야기입니다. 자기 전, 혹은 적적한 밤과 새벽에 한번씩 꺼내 먹는 조그마한 야식처럼 들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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