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5-04-11 17:49:02
역사에 길이 남을 롱테이크 장면
인디와이어 선정, 영화 역사상 최고의 롱테이크 10선

다들 한 번쯤은 ‘롱테이크’에 대해 들어본 적 있으시죠.
롱테이크는 말 그대로 한 개의 숏이 여러 분 동안 지속되는 장면을 의미하며,
때로는 한 장면 전체를, 심지어 여러 장면을 하나의 숏으로 담아내기도 합니다.
최근 롱테이크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넷플릭스 시리즈 <소년의 시간>과 애플 티비의 <더 스튜디오>가
큰 사랑을 받고 있는 가운데, 인디와이어가 선정한 ‘영화 역사상 최고의 롱테이크 10선’을 공개했습니다.
인디와이어는 롱테이크는 본질적으로 ‘속임수의 부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연출하기 어려운 기법이며,
종종 필요성보다는 과시적인 목적에서 사용되기도 하지만, 적절하게 활용되고 완벽하게 구현될 경우,
스크린에서 가장 짜릿한 경험을 선사할 수 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인디와이어 선정 목록]
① <어톤먼트>, 조 라이트
② <로프>, 알프레드 히치콕
③ <검은함정>, 오손 웰즈
④ <소이 쿠바>, 미하일 칼라토조프
⑤ <좋은 친구들>, 마틴 스콜세지
⑥ <올드보이>, 박찬욱
⑦ <플레이어>, 로버트 알트만
⑧ <주윤발의 첩혈속집>, 오우삼
⑨ <러시아 방주>, 알렉산더 소쿠로프
①⓪ <칠드런 오브 맨>, 알폰소 쿠아론
*영화 순서와 순위는 무관합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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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른같은 8살 소녀의 이별 이야기<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영화 리뷰
일본의 고즈넉한 풍경 중에서도 우리에게 각인되어 있는 이미지는 바로 시민들이 지나다니는 거리 사이에 놓인 기찻길 건널목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환상의 빛>과 이와이 슈운지의 <러브 레터>를 비롯해 수많은 일본의 고요하고 따스한 영화들이 일본 고유의 이 풍경을 활용하곤 했다. 조금은 다르지만 기차역을 배경으로 한 <철도원>과 같은 영화들도 일본의 기찻길을 떠오르게 만들며 최근에는 <가족의 색깔>이나 한국영화 <윤희에게> 또한 일본 철도가 주는 소박하고 포근한 풍경에 꽤나 빚을 졌다.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 또한 기차 건널목에서 시작하는 영화다. 여덟 살의 소녀 사야카(니쓰 지세)는 그곳을 지나가다 문득 반년 전의 기억을 생각한다. 반려견이었던 루와 함께 이곳을 걸었던 사야카. 조금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1년 전에 사야카는 작은 동물들을 분양하는 펫샵 앞에서도 거의 버려지다시피 한 강아지 루를 발견했다. 데려가는 사람이 없으면 가게 사장이 이 아이를 곧 내쫓을 거라는 이야기를 들은 사야카는 부모님을 졸라 루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오는 데 성공한다. 사야카는 학교에서는 친구 없이 은근한 따돌림을 당하지만, 루와 함께면 어디든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어 전혀 외롭지 않다.
어느 날, 함께 동네를 걷던 도중 갑자기 루가 조그만 구멍 틈으로 넘어가고, 루를 따라 힘겹게 몸을 구기고 구멍을 통과한 사야카는 그곳에서 아무도 없이 푸른 들판이 펼쳐진 세상과 만난다. 그들은 매일 이곳에 놀러와 자신들만의 세계를 꾸린다. 소풍 온 듯 맛있는 걸 먹기도 하고, 달리기를 하기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만끽한다. 어느 날, 킁킁거리며 땅을 파던 루를 따라 사야카 또한 들판의 아래쪽을 캐다 보니 단단한 기찻길을 발견하게 된다. 과연 이곳은 어떤 곳이었을까?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는 나오키상을 수상한 소설가 이주인 시즈카의 소설이 원작이다. 반려동물과 소녀의 우정을 그리면서 삶과 죽음, 관계라는 것을 따뜻하게 탐구하는 영화로, 사야카 외에도 사야카의 할아버지, 그리고 카페를 운영하는 후세 아저씨(오이다 요시)의 역할을 더해 사야카가 점차 인생의 진실을 깨닫고 성장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한다.
루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고 이 사실을 믿지 못하는 사야카는 주변의 사려깊은 조언과 판타지와 같은 순간들을 경험하면서 인생의 의미를 어렴풋이 깨달악나다. 동물과 인간의 유대감을 그린 영화는 아주 많았지만,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는 일본 특유의 단촐하고 소박한 감성을 통해, 그리고 소녀의 시선을 통해 동물과 인간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인생의 진실을 포착한다.
씨네랩 에디터 Hez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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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편적이지만, 그래서 특별한 K 엄마의 독립선언!
살고 있는 집이 내 집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적 있나? <다섯 번째 방>의 주인공인 김효정씨는 그렇다고 말한다. 3대가 사는 집에서 겪은 30년간의 시댁살이, 여기에 남편과 아이들을 돌봐야 하는 삶 속에 놓인 그녀는 안타깝게도 자기만의 공간이 없다. 이 부재는 눈덩이처럼 커져 본인 자체가 내 집이라는 개념을 부정한다. 알게 모르게 김효정씨와 비슷한 삶을 산 엄마들은 이 부분에 고개를 끄덕일 듯. 이같은 보편적인 이야기를 다룬 이 다큐멘터리는 보통의 K 엄마의 특별한 독립 과정을 카메라에 담는다. 그것도 딴 사람이 아닌 실제 딸이.
김효정씨가 사는 집은 시부모 소유의 2층 양옥집이다. 여기서 30년 동안 시부모, 남편, 그리고 3명의 아이와 함께 살았다. 살고 있으니 내 집이라 생각하며 살아왔던 그녀지만, 이게 바보 같은 자기 합리화라는 걸 뒤늦게 깨닫는다. 계기는 남편의 소파 사업이 실패하고, 전문 상담가로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 역할을 하면서다. 일을 하면서 자신만의 업무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절실하게 필요한 그녀는 자신만의 방이 필요했고, 힘든 설득 후 2층에 그 공간을 마련한다. 하지만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남편은 불쑥불쑥 그곳을 침범하는 일이 잦아지고, 급기야 실소유주인 시어머니가 자신의 딸에게 집 지분을 상속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는다. 그녀는 가장임에도 자신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은 이 집과 가족에게 서운함을 느낀다. 그리고 비로소 독립을 선언한다.
날 돌봐주는 사람은 이 집에 아무도 없어.
김효정씨의 이 말 한마디가 다큐의 시작이었다. 엄마의 뼈 있는 말을 듣는 순간 카메라를 든 전찬영 감독은 지난 2018년부터 2022년까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너무나 몰랐던 엄마를 카메라에 담았다. 단편 <바보 아빠> <집 속의 집 속의 집> 등 아빠의 이야기를 담은 전작들과 달리, 감독은 이 집에서 위기에 처한 엄마를 보여준다. 보통의 엄마, 가족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보이지 않았던 가족간의 미세한 균열이 보이고, 그 틈 사이로 보이는 진짜 엄마, 아니 자신이 아닌 가족을 위해 자신의 이름을 버렸던 김효정이란 여성을 마주한다.
김효정씨가 자아를 찾는 방법은 ‘방’이다. 이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다섯 번째 방’은 비로소 엄마가 찾은 자기만의 공간을 뜻한다. 시댁살이를 하면서 타의로 방을 3번 옮겼고, 자의의 노력으로 2층 방을 사무 및 휴식 공간으로 만든 그녀이지만, 결국 자기만의 공간이 되지 못한다. 사랑하지만 너무나 가까워서 그 공간을 엄마의 방이라 인지하지 못하는 가족들의 침범은 이 공간과 공간의 주인인 그녀를 가만 놔두지 않는다.
아이러니 한 건 엄마가 가장이 되어 가정을 이끄는 주체가 되었음에도 가족들은 이를 인식하거나 인지했어도 그렇게 행동하기를 꺼린다는 것에 있다. 가부장적 체계에 익숙해져 있는 구성원들에게 엄마는 돈을 버는 가장인 동시에 집안의 살림살이를 도맡아 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엄마가 차려준 밥을 먹고, 설거지도 안 하는 가족들의 모습, 노동을 하고 와서도 집안일을 해야 하는 엄마의 모습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 엄마의 독립은 자기 공간을 갖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살기 위한 몸부림으로도 보인다. 자신의 욕망을 잠재우고 가족을 위해 헌신했지만, 알아주는 이 하나 없이 가장의 역할까지 부담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그녀의 울분은 후반부로 갈수록 이내 폭발한다. 시어머니에게 집 처분에 대한 울분을 토하고, 친정아버지 장례식에서 술 마시고 소란을 핀 남편에게 그동안 쌓였던 불만을 퍼붓는다. 감정의 파고를 넘나드는 후반부를 보면 전반부는 태풍의 눈 안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
모든 집에서 비일비재한 사건처럼 보이는 작품 속 이야기지만, 이 다큐가 조금 특별하게 다가오는 건 뒤늦게라도 가부장적 제도에 용기 내 목소리를 낸 엄마와 이를 카메라로 독려하며 연대의 손을 내민 딸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심리상담사이자 가정폭력 예방 강사인 김효정씨는 많은 이들 앞에서 얘기하는 바를 비로소 실천한다. 견고하게 쌓인 가부장적 제도에 맞서 내는 작지만 강단 있는 목소리는 여성인 딸의 카메라에 가감없이 담긴다. 화려한 카메라 워킹이나 편집 없이 사실적으로 보여지는 엄마의 모습은 그 자체로 큰 울림을 준다. 피하지 않고 부딪히고, 어떻게든 소통하며 합일점을 찾는 그 과정을 결혼 후 30년 만에 처음한 그녀는 비로소 자유를 찾고, 자기 공간을 찾는 동력을 얻는다. 한 명이 희생하면 가족 모두가 편하니까 딸이자 여성임에도 엄마의 책임과 힘듦을 묵인했다 말한 감독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듯 딸로서, 여성으로서 그 누구보다 강한 엄마와 김효정씨의 모습을 오롯이 담는다.
제24회 부산독립영화제 관객심사단상, 제20회 EBS국제다큐영화제 시청자&관객상을 받는 등 <다섯 번째 방>은 보편성의 힘이 강한 작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이야기를 공감케 하는 인물은 악역을 자처하는 아버지 덕분이다. 그의 행동은 자연스럽게 이 집의 문제를 들여다보게 하는 계기가 된다. 엄마, 아빠를 객관화하기 어려웠다는 감독은 최대한 부모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이들을 대하는데, 이 노력으로 아버지는 단순히 문제의 온상으로만 비치지 않는다. 후반부로 가서는 좀 더 입체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이는 이 다큐가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으로 그치지 않고, 우리의 가족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보편성을 확보하게 만든다.
영화를 보면 애정과 애증의 눈빛으로 이들을 바라보는 자기 자신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김효정씨의 인생이자 전찬영 감독의 가정사이며, 우리가 모두 공감하는 삶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사진제공: 씨네소파
평점: 3.5 /5.0
한줄평: 보편적이지만, 그래서 특별한 K 엄마의 독립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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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불허전 리들리 스콧, 세련되었지만 아쉽다
'라쇼몽 효과', <라스트 듀얼>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1950년 영화인 <라쇼몽>은 새로운 영화 기법을 만들어냈습니다. 이른바 라쇼몽 효과라고 불리는 기법은 하나의 사건을 두고 여러 시선으로 바라보는 군상극을 기본 골자로 하여 사용됩니다. 통일되지 않은 여러 관점으로 사건을 각각 바라보고 있기에 각 관점별로 그 사건을 설명하고 묘사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왜곡이 발생하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동일한 사건을 여러 화자가 각자의 왜곡된 시선으로 여러 번 반복하여 보여줌으로써 관객들이 점차 그 사건의 진상과 사실에 다가갑니다. 동일한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려주기에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이야기가 반복될수록 밝혀지는 진상과 예상치 못했던 요소 또는 반전의 등장 등 분명히 동일한 이야기임에도 매번 새롭게 느껴집니다. 이 기법의 의미를 알고 있거나, 혹은 <라쇼몽>을 감상한 상태이면 <라스트 듀얼> 또한 라쇼몽 효과를 사용한 군상극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라스트 듀얼>의 그것은 원작과는 조금 다르게 활용되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카루주, 르 그리, 그리고 마르그리트가 전하는 진실이란 제목으로 크게 세 장으로 나뉜 <라스트 듀얼> 역시 결투 재판을 진행하게 된, 세 등장인물 사이에서 벌어진 한 사건을 각자의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때 카루주와 르 그리가 술자일 때에는 라쇼몽 효과에 따른 각자의 관점의 차이를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축하연에 참석한 두 친구가 화해를 하는 시퀀스에서 카루주가 술자일 때에는 본인이 먼저 손을 내밀면서 화해의 말을 건네고 르 그리가 이를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르 그리가 술자일 때에는 반대로 르 그리가 먼저 화해의 말을 건네고 카루주가 이를 받아들입니다. 그 외에도 르 그리와 마르그리트 간의 입맞춤을 두고, 1장에서는 화해의 의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행위로 묘사하는 데 그칩니다. 하지만 2장에서는 르 그리의 마르그리트에 대한 연모를 중점적으로 묘사하는 등 연출에서도 둘의 차이를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두 장 간에 존재하는 차이들로 인해 관객들은 사실을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관객들은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기 위해 직접 추리를 벌이게 되고, 그 과정에서 서스펜스도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영화에 몰입하게 됩니다.
군상극과 라쇼몽 효과, 그리고 <라스트 듀얼>
1장과 2장까지는 정석과 같이 흘러가고 있다.
마르그리트의 '진실', 장르적 재미는 반감되지만 괜히 거장이 아닌
하지만, 3장 마르그리트가 전하는 진실에 이르고 나면 이전과 분위기가 상당히 달라집니다. 앞선 두 장과 달리 3장이 시작할 때 '진실'이란 단어만이 화면에 오래 남아있음으로써 3장의 이야기가 진실, 혹은 진실을 넘어선 사실임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라쇼몽 효과를 활용할 때 어떤 사건이 가지고 있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그 사실이 명확히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습니다. 그 대신 사실을 확정 지을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들을 각 화자들이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본 사건의 곳곳에 메타포로 숨겨놓고 있습니다. 관객들은 이러한 단서들을 찾아내고 추리함으로써 군상극이란 장르가 가지고 있는 장점과 재미를 적극 활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라스트 듀얼>은 3장의 이야기가 진실임을 밝혀버림으로써, 두 장에 걸친 추리와 추측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립니다. 즉 장르적 재미를 감소시키고 클라이맥스는 허무해집니다.
다만 3장의 방향을 이렇게 설정한 데에는 어느 정도 참작의 여지가 있습니다. 현대에는 아직 약자의 위치에 존재하고 있는 여성들은 여전히 수난을 겪고 있으며, 그에 대한 해방의 일환으로 소위 '미투'로 일컬어지는 운동이 있습니다. 이러한 수난이 명백히 존재하고 가장 극심하던 시기인 야만적인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하여 그들의 투쟁기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강인하고 진취적인 여성상의 등장인물을 자신의 영화에 자주 등장시킨 리들리 스콧의 특성상 이러한 급작스럽게 노선을 변경하는 듯한 전개는 노골적으로 보일 수는 있을지라도 놀랍지는 않습니다. 그보다 더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이렇게 노골적이고 명백한 주제의식을 관객들에게 전파하고 있지만 그 속에는 여전히 <라쇼몽>과 같이 진실이란 존재에 관해 다루고 있습니다. 마르그리트가 주장하는 진실이 사실로 받아들여졌지만, 이는 본인이 쟁취해 낸 게 아닌 결투 재판을 통해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더군다나 마르그리트가 주장하고 있는 진실 또한 본인의 관점이 적용되었기에 남성들에 비해서는 사실에 더 가깝긴 하겠지만 왜곡이 존재하고 있음에는 틀림없습니다. 즉, 진실이란 무엇인지·진실이 어떻게 성립되는지에 관해서도 다루고 있는 점을 통해, 괜히 리들리 스콧에게 거장이란 명칭이 붙여진 게 아니란 생각을 가지게 합니다. 물론, 3장의 시작에서 '진실'이란 단어를 오래 노출시키는 노골적인 연출로 주제의식을 관객들에게 주입시키는 행위는 더 훌륭하고 완벽해질 수 있었던 <라스트 듀얼>의 만듦새를 제 손으로 깎아먹은 행태라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페미니즘이란 주제로 급 드리프트 시킨 3장, 그럼에도 진실이란 존재에 대해 섬세하게 다루고 있는 감독의 능력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꼭 페미니즘을 썼어야 했나?
비주얼리스트, 그리고 섬세하고 미묘한 차이를 완벽하게 구현해낸 배우들
리들리 스콧 감독의 장기를 논할 때,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능력이 하나 있습니다. 극의 상황별로 적절하고 어울리는 아름다운 비주얼 활용 능력, 다시 말해 리들리 스콧은 비주얼리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능력의 일환으로, 리들리 스콧의 사극 영화 중에서 극한에 가깝게 고증을 따라가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라스트 듀얼> 또한 철저한 고증으로 이뤄진 영화입니다. 판타지 풍이 아닌 실제 중세 시대의 복식을 비롯해, 화살은 갑옷을 종잇장처럼 관통하지 않으며 튕겨나갈 때에는 언제든지 튕겨나갑니다. 그리고 전쟁에서 체인 메일을 손에 휘감아 적의 얼굴을 향해 수없이 내려치는 장면이라든지, 이 영화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두 기사의 결투 또한 아름답게 그려내지 않고 목숨을 걸고 진행하는 만큼 처절하고 묵직하고 차갑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때 <라스트 듀얼>은 진실에 관해 다루고 있는 만큼 철저한 고증을 통해 감독이 진실에 관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뒷받침하고 있는 요소 중에 하나가 아닌가 하는 재밌는 생각도 듭니다.
그 외에도, <라스트 듀얼>이 지닌 강점 중의 하나로, 배우들의 섬세하고 뛰어난 연기를 들 수 있습니다. 이 영화는 동일한 사건을 반복하여 보여주지만 그 사건의 화자가 모두 다르기에 모든 상황이 동일하게 비칠 수는 없으며, 동일하게 비친다면 결코 좋은 영화라고 할 수 없습니다. 물론, <라스트 듀얼>의 배우들 모두 그러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는, 아주 훌륭한 연기를 선보였습니다. 대표적으로 르 그리가 마르그리트를 무작정 찾아와 강간하는 씬에서, 2장과 3장의 배우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미묘하게 유사하면서도 명백히 다르게 그려냈습니다. 2장에서 르 그리의 고백은 아름답고 우아하며, 마르그리트는 형식적으로 저항하며 그녀도 즐기는 듯이 묘사되었습니다. 하지만 3장에서 진행되는 대사는 2장과 다를 바가 없지만 상황은 정반대입니다. 르 그리의 고백에서 아름다움은 온데간데없이 뜬금없고 어색함 가득한 고백이었으며, 마르그리트는 진심으로 저항하며 처절하게 절규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눈에 띄게 변화를 확인할 수 있는 씬 외에도 1장과 2장이 시작하는, 강을 건너 적을 향해 달려가는 시퀀스가 있습니다. 둘은 동일한 상황을 비추고 있지만 미묘하게 차이를 보이는 아담 드라이버의 표정은 1장과 2장에 큰 차이가 있으리라고 누구나 예측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로서 아주 훌륭했습니다. 이처럼 미묘한 차이를 섬세하게 묘사해 낸, 배우들의 명연기를 아낌없이 칭찬하고 싶습니다. 번외로, 조디 코머는 <프리 가이>와 동일한 배우가 맞는지 눈을 의심할 정도로, 이 영화에서 정말 아름답게 등장했습니다.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는 단연코 <라스트 듀얼>의 백미. 그리고 비주얼리스트 리들리 스콧의 아름다운 비주얼 활용 능력, 철저한 고증은 영화의 주제와도 연관되어 있는 건 아닐지?
1장과 2장을 거치면서, 영화가 빌드 업해 나가는 양상은 정말 좋았고 더할 나위 없었습니다. 하지만 3장의 도입부가 쌓아올린 빌드 업을 스스로 무너뜨린 느낌입니다. 분명히 진실을 말하고 있음에도 김이 팍 새 버렸고, 흥미 또한 떨어졌습니다. <라스트 듀얼>은 좋은 영화이면서 동시에 아쉬운 영화입니다. 아무리 포장을 하려고 노력했지만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치명적인 그 부분을 제외하고 나머지 부분들은 모두 좋았기에, 아쉬움을 뒤로하고 이 영화의 감상을 추천합니다 :)
본인 결정은 본인이 해야죠.
결과도 본인이 책임지는 거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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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나귀 EO'의 삶은 우리의 삶과 다르지 않다.
어렵다. 쉽지 않은 영화다.
동물의 삶을 이해 한다는 게 쉬울 리가 없다는 것은 짐작했지만, 당나귀 EO의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되는 극은 불친절 하기 그지 없다. 큰 설명없이 함축적인 장면을 보여주고 다음 에피소드로 넘어가는 일이 빈번하다. 게다가 EO가 계속해서 만나는 상황들 또한 마음 편하게 보고만 있을 수 없는 영화다. 몇몇 장면은 몸서리 치도록 슬펐고, EO의 여정들은 오랫동안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나는 생각이 많아 졌다.
<당나귀 EO>는 단 한 순간도 순수함을 잃지 않는 회색 당나귀 EO 의 인간 세상 여행기다. 세상의 전부였던 서커스단으로부터 구조된 뒤 폴란드와 이탈리아를 가로지르는 긴 여정에서 평화로운 농장, 훌리건으로 가득한 축구장 공포의 소시지 공장, 쇠락 직전의 저택. 다양한 공간으로 이어지는 여정에 관한 이야기다.
유럽 영화계를 대표하는 거장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의 19 번째 장편영화 <당나귀 EO>는 영화 역사상 최고의 감독 중 한 명인 로베르 브레송의 걸작 <당나귀 발타자르>를 현대식으로 재해석한 작품으로 거장다운 면모가 돋보이는 감각적이고 실험적인 비주얼과 사운드, 그리고 환경과 동물권 문제에 대한 날카롭고 진중한 메시지로 제75회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과 사운드트랙상을 수상했으며. 이후 제 70 회 멜버른국제영화제, 제 46 회 홍콩국제영화제, 제 47 회 토론토국제영화제, 제 66 회 BFI 런던영화제, 제 60 회 뉴욕영화제 등 내로라하는 영화제에서 무려 21 관왕 및 55 회 노미네이션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또한 뉴욕타임스, 카이에 뒤 시네마, BBC, 타임, 사이트 앤 사운드, 인디와이어 등 저명한 매체로부터 연달아 올해의 영화로 선정되어 “잊을 수 없을 기이한 대서사시”(NPR), “미래에 고전으로 기록될 작품”(Cinemacy), “84 세 거장 감독의 최고작”(Ty Burr's Watch List) 등 극찬을 받으며 단숨에 놓쳐서는 안 될 걸작의 반열에 올랐다.
이 영화는 동물권에 관한 이야기인 것 같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영화. 동물보호단체의 시위로 서커스단의 동물은 자유를 찾는 것 같지만, 곧 다른 인간의 보호 혹은 쓸모로 옮겨질 뿐이다. 가학적인 ‘서커스단’에서 유일하게 EO에게 애정어린 손길을 건넸던 ‘카산드라’와의 헤어짐 이 후, 모델로 활동하며 아름답게 꾸미고 보살핌을 받는 말들 사이에서 짐을 실어 나르는 역할을 해야하는 당나귀는 차별 받는 대상이 된다. EO는 곧 우당당탕 사고를 치고 또 ‘누군가’에 의해 옮겨지며 호감을 가졌던 말과 또 다시 헤어지게 된다. 이 후 옮겨가게 된 농장에서는 EO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사육장안에서 밖만 보고 서 있다. 감정을 주고 받는 누군가와의 헤어짐으로 상실감을 느끼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준다.
EO의 생일 날 밤, 작은 당근머핀에 초를 붙여 “네 모든 꿈이 이러지길 바라. 행복해야 해.” 하고 말하며 찾아온 카산드라가 떠나가는 순간. EO는 서글픈 울음을 길게 내 뱉고, 마침내 농장문을 박차고 스스로 나아간다. 인간의 세상에 홀로 걸어 나와 EO가 만나는 세상은 잔혹하다.
숲에서 늑대가 총에 맞아 죽고, 물고기들은 어항에 갇혀 있다. 여우는 모피를 위해 작은 케이지에 갇혀 있다가 죽임을 당한다. EO를 살라미용이라며 차에 실어 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축구팀의 마스코트가 되어 원치 않은 추앙을 받기도 하고, 반대편에 의해 울분을 토해 낼 도구로 쓰여 폭력을 당하기도 한다. 저렇게 힘든데 안락사를 하는게 낫지 않냐는 사람과 치료하는 곳이니 치료를 할 뿐이라는 수의사도 있다.
스스로 울타리를 넘어 세상을 나온 EO는 동물이기에 그냥 당하고만 있어야 하는 일과, 동물이니까 저질러 버릴 수 있는 행동의 작은 간극 사이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하며 나아간다. EO의 행동과 그리하여 마침내 결정하는 선택의 과정은 처연하고 슬프다. EO가 내내 찾아 헤매고 있는 것은 '사랑'이 아니었을까?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진정한 사랑' 마음을 기댈 곳이 없는 EO는 살아갈 의미를 어디서 찾아야 할 지 몰랐던 것은 아닐까.
내가 옳다고 하는 행동이 누군가에게는 큰 시련을 줄 수 있고, 사랑을 준다고 하는 행동이 사랑을 받는 상대에겐 폭력이 될 수도 있음을 EO의 삶을 보며 생각한다. 타인에 의해 주어진 삶에서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하며 나아가는 삶으로 변화해 가는 과정속에서 누군가에 의해 착취 당한다고 말하는 그 삶엔 안온함과 사랑이 있고, 자유로워진 삶에는 불특정다수에 의한 폭력과 불안과 외로움만 있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것이 맞다 단정 지어 말할 수 있을까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동물과 자신의 삶은 관계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모두 보았으면 좋겠다. 당나귀 EO의 삶은 우리의 삶과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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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FF 데일리] 성스럽지만 종교적이지 않은 죽음
막달라|Magdala
다미앙 매니블|Damien MANIVEL
France | 2022|78 min|DCP|Color|Fiction|15|Asian Premiere
시놉시스
예수의 죽음 이후 마리아 막달레나는 세상에서 자취를 감춘다. 마리아는 머리가 허옇게 센다. 열매를 따 먹고, 빗물을 마시고, 나무 사이에 누워 잠을 청한다. 그리고 숲 한가운데서 잃어버린 사랑을 떠올린다. 마리아는 그를 찾을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한다.
프로그램 노트
마리아 막달라는 예수의 죽음 후 동굴과 숲 속을 떠돌아다녔다고 한다. 이 영화는 은둔한 막달라의 마지막 순간을 감독의 상상력으로 재연했다. 연기자의 움직임을 담는 데 뛰어난 재능을 가진 다미앙 매니블 감독은 전작에서도 협업했던 배우이자 댄서인 엘사(Elsa Wolliaston)에게 인간 사회를 버리고 자연 속에서 홀로 된 막달라의 마음을 따라가게 했다. 영화는 어떤 극적인 이야기나 절망을 나타내기보다 매우 단순하게 막달라의 걸음을 함께하며 연기자가 진실되게 느끼는 공간의 에너지와 자연의 반응을 충실히 묘사한다. 유행을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빚는 젊은 작가 감독 다미앙 매니블은 이 영화로 다시 한번 자신의 재능을 입증한다. (문성경)
성녀(聖女) 막달라 이야기
마리아 막달라(막달레나). 그녀는 호칭이 많다. 예수의 제자. 기독교의 성인(聖人). 예수가 부활했을 때 빈 무덤을 처음으로 목격하고 다른 제자에게 알린 인물. 오해도 많다. 예수에게 향유를 부은 죄지은 여인. 회개한 창녀. 47년 간 광야에서 지낸 이집트의 성녀 마리아와 혼동되기도 했다. 필립보, 토마스, 마리아 복음서 등 몇몇 위경 내용에 근거해 그녀가 예수의 연인이었다는 근거 없는 주장도 널리 퍼졌다.
다미앙 매니블 감독의 <막달라>도 비슷하다. 위의 이미지가 전부 혼재한다. 막달라는 숲에서 고행 생활을 이어간다. 직접 만든 십자가를 놓지 않는 그녀는 환상 속에서 예수를 만난다. 십자가에 매달린 그의 발밑에서 우는 막달라. 예수와 몸을 섞는 막달라. 비가 오는 날 예수의 얼굴을 그리며 그리워하는 막달라. 스크린에 비친 그녀는 예수의 제자이자 연인이고 성녀(聖女)다.
인간 막달라의 죽음을 체험하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막달라의 외관이다. 일반적으로 막달라는 어리고, 환희에 찬 백인 여성이다. 교회가 만든 그림이나 조각 속 그녀는 같은 이미지에 갇혀 있다. 영화 속 막달라는 다르다. 그녀는 노년의 흑인 여성이다. 죽음이 임박한 걸 느낄 수 있을 정도다. 그래서일까? 영화는 통념에서 벗어난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이 든 막달라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살았는지를 전달한다.
물론 <막달라>는 자기 의도를 쉽게 보여주지 않는다. 영화는 느리다. 그녀가 이슬 한 방울을 마시는 순간을 10초가 넘도록 보여준다. 클로즈업도 극단적이다. 러닝타임 절반은 그녀 얼굴로 가득하다. 움직임도 거의 없다. 막달라가 한 걸음을 내딛기도 어려울 정도로 늙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덕분에 <막달라>는 전통적인 성녀 막달라의 이미지를 깰 수 있다. 답답할 정도로 정적인 영화는 관음적이다. 주인공 삶의 단편을 훔쳐본다는 영화의 본분에 충실하다. 실제로 관객은 의식주를 해결하는 막달라의 삶을 그저 따라갈 수밖에 없다. 그녀가 얼마나 예수를 그리워하고 사랑하는지 온전히 느낄 수 있다.
이 과정을 거치고 나면 막달라는 성녀가 아니다. 마지막 시퀀스가 대표적이다. 막달라는 동굴에 누워 죽음을 기다린다. 천사는 촛불을 든 채 그녀가 죽기를 기다린다. 카메라는 막달라, 천사, 촛불을 천천히 오간다. 초가 녹을수록 막달라의 숨은 약해진다. 긴 시간 동안 연인을 그리워하며 고행을 이어간 한 여성의 삶을 요약하듯이. 마지막 숨을 뱉은 그녀의 손에는 작은 십자가가 있다. 막달라는 사랑과 믿음을 지키기 위해 발버둥 친 인간일 뿐이다.
성스럽지만 종교적이지 않은 죽음
그래서 <막달라>는 이율배반적이다. 몇몇 요소는 '이 영화에 새로운 게 있나?' 싶은 의문을 자아낸다. 환상 속에 나타난 예수는 익숙하다. 다른 영화, 드라마, 그림 등에서 재현한 유대인 남성 그대로다. 임종을 지켜보는 천사도 마찬가지다. 기독교 전통에 충실하다. 순진한 얼굴을 가진 백인 소년. 성경 속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을 때 기대할 수 있는 모습대로다.
하지만 종교적인 인물을 묘사하되 결코 종교적이지 않다. 가톨릭 교회가 숨기려 하는 대목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신비주의적 묘사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예수와 행복한 한때를 보내는 젊은 막달라의 모습이 대표적이다. 그녀 얼굴은 희열로 가득하다. 그런데 신실한 성녀보다는 성적으로 흥분한 여성에 가깝다. 조각가 베르니니의 작품 "성녀 테레사의 법열(Ecstasy of St. Teresa)"처럼. 성적 오르가슴을 통해 종교적 신비경을 표현한다. 우연이 아니다. 신비주의적 전통에 따르면 신과 하나 되는 기쁨은 성적인 황홀경을 맛보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산 정상에 선 막달라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자기 심장을 도려내 하늘에 바치는 막달라. 예수가 죽은 뒤 한때 행복했던 기억만 간직한 채 숲 속을 헤매던 여성은 심장을 도려내는 고행 끝에 옛 연인을 만난다. 실제로 막달라는 죽은 뒤에야 예수를 만나러 승천할 수 있다. 즉, 영화는 한 번의 황홀경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한다. 신과 하나 되는 '합일' 경험을 다시 경험하려면 고통으로 가득한 수행을 견뎌야 하니까. 틀에서 벗어난 막달라의 죽음이 성스럽지만 종교적이지는 않은 이유다.
영화 <막달라> 상영시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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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구 한 바퀴를 도는 방법
나의 특별한 형제
줄거리
온 몸을 움직일 수도, 감각을 느낄 수도 없는 '세하'와, 늘 5살 아이지만 수영만큼은 수준급인 '동구'는 가족에게 버림받고 '책임의 집'에서 만나게 된다. 어느 날, 물에 빠진 세하를 동구가 구하면서 둘은 한 몸처럼 특별한 형제로 살아온다. 아이들이 자라고, 책임의 집을 운영하던 신부님이 돌아가시자, 다른 친구들과는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차마 떨어질 수 없었던 두 사람은 독립을 결심하지만, 수영대회 때문에 TV에 나온 동구를 보고 동구의 엄마가 찾아오면서 두 사람의 계획은 조금씩 틀어진다. 과연 두 사람은 무사히 독립을 할 수 있을까?
지구 한 바퀴를 도는 방법
숨은 의미 찾기
세하는 몸을 움직일 수 없다. 하지만 그게 혼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아니다.
동구는 수영장에서 도착지점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도착지점에서 기다린다던 엄마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들은 함께 살아갈 가족을 잃었고, 희망을 잃었다. 하지만 서로를 만나 부족한 부분을 채워가며 가족이 되었고, 그래서 다시 앞으로 나아갈 희망을 갖게 되었다. 세하는 동구가 밀어주는 휠체어가 아니면 어디도 갈 수 없다. 그건 전동휠체어로 바꿔도 마찬가지다. 뒤에 늘 동구가 있다는 믿음이 있기에, 어디로 갈 지 생각하고 나아갈 수 있다. 세하는 동구의 머리지만, 그 뇌를 움직이는 원동력은 동구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나온다.
동구도 마찬가지다. 혼자서 고개를 옆으로 돌리기도 힘든 세하가, 자신을 위해 수영장에 같이 와 주고 기다려주기 때문에 수영장에서 집까지 올 수 있는 것이다. 단순히 세하가 늘 방향을 알려줘서 기억하는 것이 아니다. 같이 있으면 즐겁고 행복하기 때문에, 늘 자신을 기다려주는 세하에 대한 믿음이 있기에, 도착지점으로 골인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나아가는 것도, 집에 도착하는 것도, 서로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살 수 있는 집을 찾아 헤매지만, 서로가 없으면 그 집은 의미없다. 가족이 없는 집에는 희망도 없으니까.
장애인이 아니라, 한 사람으로
감상평
아마 이 영화를 통해 제일 많이 듣는 말은, 배우들의 연기가 미쳤다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대단한 것은, 장애인을 바라보는 이 영화의 시선이다. 장애인도 그들과 똑같이 생각하고 느낀다는 것을 너무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극 중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은, 수영강사인 미현이 두 사람을 데리고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이었다. 이토록 평범한 일상을 그들도 누릴 수 있다는 걸 왜 인식하지 못했을까. 그들은 같이 모이면 공놀이를 하고, 수다를 떨기도 하고, 고기파티를 하기도 하고, 함께 게임을 하며 놀기도 한다. 누구나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들이 장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 늘 아파할 수만은 없지 않은가, 우리가 상처를 털어내고 살듯이 그들도 상처를 치유하고 즐거운 일상을 살아갈 자격이 있는 것이다. 이런 일상을 자연스럽게 녹여서 보여준 것이 영화의 가장 좋은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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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전이 가득한 범죄 액션 / 마약 브로커 야당 / 믿고보는 배우들 / 유해진, 강하늘, 박해준
화직관하는남자 홍큐의 "야당" 후기입니다.
*엔드크레딧 전 쿠키영상 하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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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빌리 홀리데이> 티저 예고편
팝 보컬의 예술을 영원히 바꿔 놓은 재즈의 초상 ‘빌리 홀리데이’
무대 위에선 모두의 박수를 받는 ‘레이디 데이’였지만
무대 아래에선 시대의 폭력과 광기에 끝없이 시달렸다.
도망칠 곳 없이 어둠으로 내몰린 삶 속에서도
그녀가 포기할 수 없었던 두 가지
세상을 위한 단 하나의 노래
그녀를 위한 단 하나의 사랑.
Stay tuned for LADY 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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