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usmesentez2025-04-01 15:31:25
챗지피티로 내맘대로 지브리 이미지를… 그런데 저작권은?
지금 SNS에선 지브리 이미지 열풍
지난 25일, OpenAI는 대화형 인공지능 서비스 ChatGPT에서 이미지를 생성할 수 있는 'ChatGPT-4o'를 새롭게 발표했습니다. 기본 다중 모델을 활용해 정확하고 사실적인 출력이 가능해져 '역대급 이미지 제작 능력'을 보일 것으로 기대를 모았는데요. 특히 일본 애니메이션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스튜디오 지브리 스타일의 이미지를 완벽하게 출력한다는 소식이 퍼지며 SNS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스튜디오 지브리의 반응은?
OpenAI의 CEO 샘 알트먼 또한 자신의 X 계정 프로필 사진을 지브리 스타일의 이미지로 변경하며 이 유행에 동참했는데요. ChatGPT로 생성한 수많은 지브리 이미지가 무분별하게 이용되면서 자연스레 스튜디오 지브리에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지브리는 공식 입장을 밝히지 않았으나, 창립자 미야자키 하야오는 지난 2016년 방송 'NHK스페셜: 미야자키 하야오 - 끝을 모르는 남자'에서 AI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밝힌 바 있습니다. "정말 역겹다. AI 기술은 생명에 대한 모독이라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라고 말하며 AI 기술을 자신의 작업에 접목하지 않을 것임을 시사했습니다. 현재 서버가 마비될 정도로 열풍이 불고 있는 가운데, 저작권 관련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근데… 괜찮은 거 맞아?
인공지능의 태동 이래로, AI가 예술 작품을 모방하는 것에 대한 문제는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습니다. 이번 사례에서는 AI 모델이 스튜디오 지브리의 작품으로부터 훈련을 받았는지, 그렇다면 지브리로부터 라이선스 동의를 받았는지가 주요 쟁점입니다. OpenAI는 특정 아티스트의 스타일 모방은 거부하나, 지브리와 같은 '스튜디오' 스타일은 폭넓게 허용할 수 있다는 입장인데요. 미술가 칼라 오티즈는 "예술가의 생계를 고려하지 않는 예"라고 밝히며 "이는 지브리의 브랜딩과 명성을 이용해 제품을 광고하는 착취"라며 강도 높게 비판했습니다. 모두에게 공정한 기술이 되기 위해서는 AI 기술을 대하는 개발자와 이용자들의 비판적 인식 함양이 필요해 보입니다.
사진:X@sama, @_julianlevy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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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점 위에 선 존재들의 번뇌
질문으로부터 시작되는 삶
원치 않은 탄생의 원죄는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가. <프랑켄슈타인 아버지>는 의대 시절 정자를 불법 기증한 도치성(강길우)과 그로부터 태어난 소년 신영재(이찬유)의 의도된 만남을 시작으로 그 질문에 신중하게 답을 내린다.
삶은 알 것 같다가도 손 뻗으면 금세 사라져 버리는 신기루와도 같은 존재다. 명확한 답이랄 게 없어 생각들을 충돌시키고 갈등 빚게끔 한다. 정치도 그런 이유로부터 시작한 것임이 분명하다. 각자가 지향하는 바가 다르니 서로 그 이상을 찾기 위해 설득하고 부딪혀야만 하는 것일 테다. 그런 삶의 일시적 성격은 방황에서 극대화한다. 방황하는 시기의 단골 소재인 존재 이유를 찾는 철학적 번뇌로부터 우리는 그 알 듯 말 듯 간질거리는 마음을 느낀다. 그렇기에 영재의 나이를 방황하기에 적격인 청소년기로 설정한 것은 다른 여지 없이 적절했다.
검증하고, 입증하라
영재는 육상에 흥미와 재능을 느끼고 가까이하고자 했으나, 그 꿈은 영재의 심장병으로 금세 좌절된다. 병으로 인한 방황에서 영재는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고 치성을 만나기로 한다. 영재는 치성의 집에 찾아가 대뜸 손해배상금을 요구한다. 꿈이 좌절될 위기에 처했으니, 자신의 생물학적 아버지로서 병이 유전되었을 수 있다는 근거 때문이다. 설득력 있는 행위임은 틀림없다.
치성은 영재가 확실한 친자임을 확인하고 그 심장병의 근원이 자신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치성이라는 인물이 자신의 삶을 엄격한 루틴 속에서 통제한다는 특징이 이 과정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엄격과 통제를 상징하는 것으로 봐도 무방한 인물이 유일한 실수이자 방심이었던 정자 기증을 그 ‘검증 과정’으로 다시 지우려는 것이다. 이는 나름 합리적인 선택으로 보인다. 치성은 스스로 세운 기준선에서 삶을 관성 속에 두는 것을 우선으로 한다. 그렇기에 갑작스레 자신만의 규율을 깨뜨린 영재의 앞에서는 자신의 삶에 오점이란 것이 없었음을, 특히 영재의 생물학적 아버지로서 가치가 분명히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이 치성에게는 중요한 행위이었을 것이다. 심지어는 그 정자 기증을 정당화해 삶의 오점이라는 꼬리표를 떼는 것을 목표로 했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이 영화는 영재가 느낀 자신의 오점을 생물학적 아버지인 치성으로부터 검증하려는 과정과 치성이 자신의 존재와 삶에는 오점이 없었음을 입증하려는 자체 검증 과정이 병존하는 서사임이 드러난다.
그 검증 과정에서 영재의 법적 아버지인 신동석(양흥주)의 등장은 자연스레 얽혀든다. 동석은 심장병으로 인해 육상을 하기 어려워진 영재가 더는 그 꿈을 오기 하나로 짊어지기를 원치 않는 인물로 그려진다. 목표에 닿기 위한 노력의 과정부터가 난항임이 예상되는 것을 아버지로서는 가만히 두고 보기는 어려운 일이다.
<프랑켄슈타인 아버지>는 그런 동석의 타자로 향하는 통제적 성격을 은근하게 치성의 스스로를 향한 통제적 성격과 유사하게 보이도록 서술한다. 치성은 자신을 통제함으로써 자신의 삶에 생겨난 허점이라는 구멍을 메우려 하지만 동석은 그 허점을 영재에게 가하는 통제를 통해 채우려 하는 것이다. 자기 유전자가 섞이지 않았기에 그 ‘유전자’로 일어난 일들로 향하는 관심의 방향을 돌려야만 한다. 그래야만 동석은 영재가 출생의 비밀에 관심 두지 않게 할 수 있고, 영재는 자신의 뿌리에 관한 관심을 거둠으로써 심장병과 생물학적 아버지에 관한 원망이라는 찝찝한 구덩이에서 벗어나 살 수 있을 것이다.
서사의 절정, 오점의 대면
세 명의 얽힌 가족 관계가 서사의 절정을 마주하는 시점은 당연하게도 삼자대면하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 순간은 두 아버지가 각자의 오점을 마주하게 되는 때가 된다. 비로소 치성은 동석을 마주함으로써 숨겨두었던 자신의 유년 시절과 자신의 오점이었던 아버지의 존재를 깨닫게 된다. 동석은 기증자인 치성을 만남으로써 영재가 자신의 유전자를 통해 생겨난 자식이 아님을 재인하게 된다. 이야기는 자연스레 절정을 향하고, 치성과 동석은 각자 지니던 통제의 성격을 극대화하기에 이른다. 치성은 동석을 자신의 아버지에 비추어봄으로써 영재가 그에게 돌아가지 못하게 만들려 하고, 동석은 영재가 치성을 만나지 못하게 할뿐더러 그의 일상을 점점 옥죄기 시작한다.
그렇게 <프랑켄슈타인 아버지>는 타인의 의도로 삶이 쥐어진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과도 같았던 영재의 질문으로부터 시작한 이야기가 두 아버지가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이 되듯 맞물리는 과정으로 변하기에 이른다. 영화는 자연스레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결국은 영재뿐 아니라 치성과 동석도 각자의 아버지로부터 삶이 쥐어진 프랑켄슈타인이 아니겠는가. ‘두 아버지(치성과 동석)와 하나의 아들(영재)’이 ‘하나의 아버지(동석)와 두 아들(치성과 영재)’, 그리고 ‘세 아들(치성과 동석, 영재)’의 이야기가 되어간다.
질문은 날카로웠지만, 결말은 흐릿했다
앞서 이야기했듯 삶을 통해 얻게 되는 질문은 모두 다르다. ‘왜 나는 이러한 삶을 사는가.’, ‘나는 왜 자식에게 이 정도밖에 해 주지 못했는가.’…. 저마다 느끼는 삶의 오점과 그 오점의 근원을 찾아가는 시도는 끝없이 벌어진다. 다만 그 삶의 근원을 단 한 세대 위, 즉 부모에게서 찾는 것은 흐릿한 외곽선조차도 얻기 힘든 일이 된다. 모든 질문이 끝없이, 무한히 반복되고 전유된다. 그렇기에 배역들조차도, 관객들조차도 분명히 답을 내릴 수 없게 된다. 그만큼 수많은 딜레마를 유발하는 철학적 고민을 <프랑켄슈타인 아버지>가 담아낸다.
어쩌면 그 고민을 담아내고자 한 시도가 대단하지만 어려운 선택이었음을 영화의 엔딩이 보여주는 것일까. 복잡한 ‘살아가는 것’에 관한 철학적 고민과 그를 향한 치밀한 플롯의 진행과는 다르게 그 마무리가 가지는 힘은 매우 미약하다. 영화가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바다와 요트의 이미지가 뿌옇게 드러날 뿐이다. 유쾌하면서도 슬픔이 묻어나는 세 명의 추격전을 비한다면 그 무게의 가벼움이 더욱 다가온다. 그 가벼운 끝이 <프랑켄슈타인 아버지>의 몇 안 되는 오점이 된 것은 아닐까.
<프랑켄슈타인 아버지>에는 최재영 감독의 노력이 느껴진다. 독립영화가 가지는 예산의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서사를 뒤받치는 공간적 배경이나 조형적 요소들이 나름의 설득력이 있다. 인물에 관한 연구와 그에 맞는 조형적 요소들을 갖추려 했던 시도들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그 섬세한 노력은 특히 <프랑켄슈타인 아버지>의 플롯의 구조에서 돋보인다. 플롯의 세부적인 점에서 관객을 향하는 그 설득력의 기복이 존재한다는 지적이 있지만, 다소 영화를 무겁게 만들 수 있는 소재를 가지고서 적당한 무게와 속도를 유지해 냈다는 것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자 한다. 서사의 전개 과정에서 적절하게 관객의 웃음을 자아낼 수 있는 장면들을 섞어 넣었다는 것에서도 <프랑켄슈타인 아버지>의 긍정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최근 국내 영화산업의 침체와 더불어 독립영화에 관한 우려 섞인 목소리들이 이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작년 약진을 보였던 <장손>, <한국이 싫어서>와 같은 작품에 뒤이어 <프랑켄슈타인 아버지>와 같은 작품이 스크린에 모습을 보인 것은 우리가 기대를 모아볼 수 있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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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협화음이 간간히 들린 채로 광폭하게 '파묘'
LA에 사는 '그냥 부자'
이 영화의 주인공은 무당 화림(김고은)이다. 비행기 안. 화림은 누구에게 향하고 있다. 누구? 바로 클라이언트다. 화림에게 일을 의뢰한 사람이 현재 미국에 살고 있기 때문에 직접 만나러 간다. 외국인으로 바글바글한 비행기. 지금 당장 '내가 어디 사람인가요?'라고 물으면 사람들 다 대답 못할 것 같았다. 아무튼 의뢰인의 집에 도착한 화림. 고객은 미국에 사는 한국계 남자 박지용(김재철)이었다. 박지용이 가진 문제는 간단했다. 아이가 아픈데 원인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이유가 뭘까. 찾아보는 화림. 화림은 몇 번 아이를 들여다보더니 '묫자리가 잘못됐다'라는 결론을 내린다. "한국에 묫자리 있죠? 그 묫자리에 들어가 있는 분 중 하나가 자기 너무 힘들다고 꺼내달라는 거예요. 그거 옮기죠."라고 말하는 화림. 고객 박지용은 당황한다. 하지만 곧 "그렇게 하기로 하죠"라며 가족과 이야기한다. 파묘를 결정한 박지용. 그렇다고 해서 뭐 OK가 나와도 혼자서 이 일을 할 수는 없다. 아는 아저씨 둘을 부르는 화림. 그 아저씨 둘은 한국 최고의 장의사 중 하나 영근(유해진)과 업계의 베테랑 풍수지리사 상덕(최민식)이다. 친구이자 동료인 봉길(이도현)과 함께 네 명은 지용의 가족과 관련이 있는 비밀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하지만 주인공 4명과 지용은 몰랐다. 파헤쳐서 나온 것이 보지 말았어야 했던 험한 것이라는 걸.
오컬트 외길인생
이 영화는 개봉 전부터 굉장한 관심을 받았다. 그 이유는 이 영화를 만든 장재현 감독이 오컬트라는 장르를 깊게 팠기 때문이다. 한국은 오컬트 불모지와도 같기 때문에 이런 외길 인생은 높게 평가받을 만 하다. 장재현 감독이 이 장르를 깊게 팠다는 의미는 이 오컬트 영화에서 중요한 것들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의미기도 하다. 장재현 감독은 전작 <사바하>에서 이 승부수들을 나름 잘 갖췄다. 장르에 대한 이해도를 보여준 것이다. 가령 영화에서 박 목사(이정재)가 추적하는 사이비 종교의 실체를 좇아갈 때 그 과정을 철저하게 만들어 놓은 장재현 감독의 주도면밀함은 <사바하>의 강점이다. 이 주도면밀함이 오컬트/호러라는 장르영화로의 특성으로만 이뤄지지 않았다. <사바하>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있는데, 이 핵심과도 이어지면서 영화가 던지는 질문이 와닿지 않을 수는 있어도 이야기가 날림으로 만들었다고는 보기 어렵다. 이 <파묘>에서도 같은 강점이 그대로 이어진다. 이 영화에서 ‘묘를 파헤친다’라는 디테일과 오컬트라는 장르적인 특성은 안성맞춤이다. 혹시 이 글을 읽는 여러분 중에 ‘묘를 파헤친다’라는 경험이 있는 사람? 글쓴이는 20여 년을 살면서 처음 본다. 이 자체가 일반적으로 볼 수 없어 기괴하다. 죽은 사람을 파헤친다? 이는 곧 유령, 귀신과 친구가 될 수도 있다는 의미다. 소재가 오컬트 향을 풍기기에 충분한 것이다. 근데 이 오컬트라는 장르적인 특성과도 가까이 있나? 그거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 <파묘>는 무덤을 파헤친다라는 모티브를 영화 곳곳에 새겨놓는다. 영화 내내 강조되는 질문이 파묘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염두하고 본다면 이야기의 팽팽함을 느끼실 수 있을 것 같다.
강력한 디테일
윗 문단의 연장선상에서 <파묘>가 유지한 디테일이 흥미롭다. 이 영화는 세 가지 직업이 핵심이다. 첫째는 풍수지리사, 둘째는 무당, 셋째는 장의사다. 이 캐릭터의 직업적인 특징이 이야기를 이끄는 하나의 원동력이 된다. 풍수지리사 상덕은 우리 현대인으로 치면 퇴임 5분 전의 인물이다. 그만큼 이력이 많이 쌓이면 그 나름의 경험이 있겠지? 영화 곳곳에서 이 경험치를 바탕으로 사건을 해석하는 상덕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무당 화림은 직업인으로서 가진 특징을 영화 안에서 모두 활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신선한 방식으로 표현된다. 당연히 무당은 하나의 인간이다. 이 무당의 인간미를 어떻게 표현할까? 아마 장재현 감독은 주변 지인의 이미지를 그대로 가져온 것 같다. 솔직히 무당이 아니라 마트 캐셔라고 해도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은 묘사였고 그 점이 신선했다. 장의사 영길 역시 인물 개인의 입체적인 특성이 풍수사 상덕과의 연대와도 이어진다. 앞에서 서술한 바를 종합하면 '<파묘>는 직업인의 영화?'라고 읽을 수 있다. 이것도 당연하지만 이 디테일은 다른 측면으로도 작동한다. 무엇으로? 바로 이 이야기의 핵심과도 이어진다. 파묘는 묘를 파헤친다는 의미이다. 왜 파해칠까? 이를 구체적으로 뭐다!라고 말하면 바로 스포일러와 직결되기 때문에 감상에 김이 새겠지? 다만 쓸 수 있는 건 영화의 첫 장면부터 이 영화는 모티브를 새겨 놓았다는 점이다.
이 외에도 장르적인 디테일도 눈에 들어온다. 글쓴이가 이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건 촬영과 조명, 그리고 시각화다. 우선 촬영에서 화면비를 일반적인 영화와는 다르게 설정했다. 이는 이 영화가 다루고자 하는 핵심 모티브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촬영의 형태로 구현한 듯하다. 가령 후반부 상덕과 관련된 장면들은 이를 그대로 반영한 연출이다. 또 영화가 조명을 이용해서 빛과 어둠을 통해 대상을 형상화한 방식도 흥미롭다. 전작 <사바하>가 진짜 있을 법한 소재들을 갖고 와서 장르적인 몰입감을 높인 것의 연장선상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장재현 감독이 진짜 힘을 줬을 것 같은 건 시각화다. 영화에서 시각화는 중요하다. 핵심으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시각화를 짠하고 보여줘야 이야기에 몰입도가 커진다. 보통 이런 오컬트물이나 판타지요소가 들어간 영화에서 CG의 이질감이 영화의 몰입도를 깨는 경우가 종종 있다(작년 추석 빅 4가 생각난다). 장재현 감독이 여기에 분명히 힘을 준 것 같은데, 아마 할리우드의 일부 감독들이 만드는 방식을 가져온 것 같다. 디테일한 묘사가 영화의 원동력이 된 좋은 사례를 <파묘>에서 찾을 수 있다.
장르 이어 붙이기
이 <파묘>가 흥미로운 점은 이야기의 흐름이다. 이 영화를 호의적으로 해석한다면 이 이야기는 영화의 핵심을 플롯에 녹였다고 볼 수 있는 지점이 있다. 분명히 이 영화는 오컬트와 호러의 노선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장재현 감독의 영화에서 확연하게 다르게 느껴진다. 이 부분이 영화의 호/불호를 가를 구분선이 될 것 같다. 글쓴이는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장재현 감독이 왜 <파묘>로 전성기를 갱신했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쪽이지만 영화를 조금 좋아하시는 분들은 다 내 의견에 반대할 것 같다. 솔직히 이 불호평에 대해 어느 정도는 납득하는 부분도 있다. 왜 그럴까? <파묘>의 후반부를 좋다고 생각하는 글쓴이 마저도 이 영화의 흐름이 그렇게 깔끔하지 못하다고 보는 쪽이기 때문에 비판을 들어도 수긍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영화가 우리가 살아오며 경험한 여러 가지를 다룬다. 고등학교를 거쳐오며, 또 우리 일상생활을 둘러싸인 어떤 것에 대해 다룬다. <파묘>는 이야기의 모든 순간에서 '이 것'에 대해 코멘트한다. 무엇인지 어렴풋이라도 쓰는 것은 강력한 스포일러가 되기 때문에 구체적인 묘사가 어렵다. 하지만 쓸 수 있는 것은 이것을 위해 이 영화가 구사해야 했던 준비물들이다. 바로 인물들이다. 이 영화 <파묘>는 마치 최동훈 감독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인물 간의 동기가 굉장히 중요하다. 이 영화가 세계관으로 보여주는 것을 인물의 동기로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저러한 일들을 이 인물이 이런 걸 원하니까 가능하네!'라고 이해시키는 것이다. 이 <파묘>의 약점은 여기에서 온다. 이 영화의 플롯은 인물들과 관련한 상황만 보여주지 감정이입할 틈을 잘 주는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가령 이야기에서 주인공들간의 관계는 굉장히 중요하다. 하지만 이 부분이 뭔가 빈약하다. 다른 측면에서 이 충돌하는 영화의 장르들을 억지로 잇고 메꾼 탓에 감독의 과욕이 느껴지는 장면도 일부 있다. 이 두 부분을 '원래 그런 것 아닌가?'라고 받아들인다면 이 영화의 기획의도를 납득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관객들은 구멍이 숭숭 나 있는 감정선에 동의하지 않을 가능성도 농후하다.
대신 이야기를 빨아들이는 흡입력 하나는 근래에 봤던 영화 중 하나 중 압도적이다. 왜? 이야기가 쉽다. 이 영화 <파묘>는 모든 인물들의 동기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는 1차원적으로 내레이션 깔고 전개하는 느낌이 아니라 두 인물의 입장을 서로 엇갈리면서 '여러 이야기를 통해 결정했다'는 식이다. '이럴 수도 있는가'를 차단하는 듯한 플롯이다(간혹 장르적 유사성 때문에 <곡성>과 비교할 수 있는데, 글쓴이는 이 '다 설명하는 간단한 플롯'이라는 점에서 비교하고 싶지 않다). 이렇게 플롯을 쉽게 가져가면 영화에 뭐가 좋을까? 주제를 명확하게 전달할 수 있다. 일거양득이 된 것이다. 이야기도 쉽게 전달하고, 하고자 하는 주제를 명확하게 구현했다.
4인 4색
이 영화의 중심을 이끄는 최민식, 김고은 배우는 단연 뛰어난 연기를 펼쳤다. 최민식 배우는 직업적으로 가지각색의 연기를 해왔다. 뭐 조폭 보스의 오른팔부터 복수를 꿈꾸는 남자, 탈북민 출신의 수학자, 부패 경찰관 등 우리 머릿속에 떠오르는 여러 직업들이 있다. 풍수사라는 직업은 최민식의 필모그래피에서 단연 돋보이는데, 이 돋보이는 것을 섬세한 디테일까지 살리는 연기로 멋지게 소화한다. 글쓴이는 중후반부에 이 영화의 약점을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를 관객이 몰입할 수 있는 테크닉으로 소화하는 힘은 역시 한국 국가대표급 명배우의 힘이 십분 발휘됐다고 볼 수 있다(다만 살은 좀 빼셔야 할 것 같다). 또 김고은 배우는 이 영화의 플롯을 사실상 함축하는 연기를 보여준다. 이 <파묘>가 화림이라는 인물이 카리스마를 내뿜기에도 좋은 판이고 이야기의 핵심 사건을 이끄는 데 있어 중심이 된다. 화림이 이 영화에 갖는 이 두 특성 덕에 이 입체적인 인물에 관객이 이입하기 좋을 것이다. 상덕과 화림 옆에서 두 주인공을 이끄는 유해진,이도현 배우 역시 훌륭하다. 유해진 배우는 예고나 포스터만 보면 우리가 아는 유해진일 것 같지만 반대로 후반부에서 엇나갈 수도 있는 이야기의 흐름을 꽉 잡는 멋진 연기를 보여준다. 이도현 배우는 이 영화가 가진 미스터리를 꽉 쥔 채 관객들을 이끄는데, <더 글로리>의 주여정 역이 정말 추구해야 했던 지점이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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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로운 노동에 영화라는 즐거움을 잊을 수 없어서
※영화 〈내일의 기억〉, 〈더 파더〉, 〈노매드랜드〉,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의 일부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존 스타인벡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글쓰기는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노동이라고. 하지만 달리 보자면 또 그만큼 즐거운 외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 플랫폼에 적을 둔 사람들은 진정으로 고독을 즐길 줄 알기에 오늘도 어김없이 글을 쓰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할 일이 많다는 핑계로 생각만 쌓아 둔 채 글쓰기를 제쳐두었다. 그게 본심이 아니라면 나는 단지 외로운 노동을 애써 외면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누가 뭐라고 한 적 없어도 글을 쓰기 위해 앉아있는 거라면, 분명 나는 그 즐겁고도 외로운 감정이 그리웠던 것이다. 본 영화는 늘어만 가고 쓰고 싶은 글은 산더미다. 특히 아카데미 시상식이 코앞으로 다가온지라 마음만 급하다. 이건 그간 봤던 영화들을 짧게 정리한, 말하자면 습작이나 초고와 비슷한 글이다. 아마 여기서 곧 발전할 글들이 생기리라 확신한다.
1. 내일의 기억 Recalled | 2021 | 서유민 | 99분
기시감, 흔히 ‘데자뷔 Déjà Vu’ 로 불리는 이 현상은 프랑스어로 "이미 본” 이란 뜻으로 최초의 경험을 마치 이전에 봤다고 느끼는 착각을 말한다. 처음 온 장소가 과거에 와 본 것처럼 익숙하고 방금 한 행동이 예전의 기억과 어렴풋이 일치하는 순간은 누구의 일상이든 찾아온다. 하지만 생사를 넘나든 큰 사고를 당해 이제야 의식을 찾은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면 누구든 그 진위부터 의심할 수밖에 없다. 영화는 기억을 잃은 수진이 단란한 가정에서 겪는 기이한 데자뷔로부터 진실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이 영화의 미덕이라면 관객을 집중시키는 스릴러의 장르적 쾌감과 조각난 기억을 함께 맞춰가는 추리의 맛이랄까. 이미 여러 영화에서 써먹은 소재와 구상에도 이 정도 재미를 뽑아내는 감독의 역량은 눈길을 끈다.
그런데도 플롯을 영화가 쫓아가지 못한다는 기분을 받는다. 실마리를 풀어가는 흥미로운 아이디어와 무의식의 깊이를 구현한 수직적 이미지가 툭툭 끊기는 영화의 편집을 만난다면 관객은 수진과 함께 혼란에 빠지고 만다. 모든 감독은 비장한 각오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영화로 구현한다. 물론 그게 영화의 만듦새와 함께 가는 경우는 드물다. 이제는 ‘한국적 신파’에 치가 떨린다는 사람들을 보면 그간의 경험에 크게 덴 나머지 나름의 인장으로 넘길 수 있는 장면도 과민 반응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결말의 신파적 요소가 굳이 거슬린다면 〈해운대〉의 신파를 되새겨보며 이 정도면 영화적 기능으로 인정해 줬으면 한다. 만약 누군가가 등장 배우의 논란으로 영화도 보지 않은 채 덮어놓고 비판을 하고 싶다면 성인 수준의 상식에 미치지 못한 판단으로 드라마 전체를 망가뜨린 인물과, 이를 덮을 만큼 가십과 의혹만으로도 매장의 위기를 받는 인물 중 누가 현재의 가시적 해악에 더 가까운가를 생각해 보자.
2. 더 파더 The Father | 2020 | 플로리앙 젤러 | 97분
〈리어왕〉에서는 권력의 소용돌이에 비극적 선택의 첨병이 된 아버지로, 〈두 교황〉에서는 종교적 상징이자 시대와 평화의 ‘아버지’로 자신의 존재를 질문하고 토론하며 결국 내게 주어진 자리의 무게를 깨닫는 인물이 된다. 심지어 〈토르〉에서는 세상을 다스리는 신의 기원이자 두 슈퍼히어로의 아버지로 등장하는 ‘안소니 홉킨스’에게 〈더 파더〉만큼 노골적으로 현대의 아버지를 연기하는 것이란 어쩌면 심심한 작업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탄탄한 각본을 여전히 놀라운 연기로 끌어가는 80대의 배우가 보여주는 진가는 그 모든 아버지의 모습이 혼란스러운 정신 상태에서 조금씩 드러나도록 완급조절을 한다는 사실이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아버지 ‘안소니’의 눈에 이 세상은 부조리하고 이해할 수 없다. 시공간의 왜곡과 변주는 원작인 연극을 보지는 못했지만 영화였기에 가능했던 탁월한 지점이다. 내 눈앞의 무엇인가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내가 알던 세계가 의심받는 상황만큼 공포를 자아내는 것도 없다. 돌이킬 수 없어 더 안타까운 진실에 이해하려 애쓰는 안소니의 모습은 숙연하며 시종일관 놀랍다. 극적인 감정의 파고를 홀로 묘사하는 장면은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영화의 제목이 ‘나 자신’이 아니라 ‘아버지’인 이유는, 그를 지켜보는 딸 ‘앤’이 바라보는 시선이 못지않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날마다 달라지는 아버지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딸을 연기한 ‘올리비아 콜먼’의 연기 또한 눈을 뗄 수 없다. 어떤 감정이든 금세 관객이 이해하도록 만드는 능력은 미묘한 표정과 눈빛이 대답해주고 있다. 결국 모두의 삶을 위해 내리는 어떤 선택의 장면에 보이는 처연함과 머뭇거림, 슬픔과 확신이 뒤섞인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인간의 뇌와 우주는 놀랄 만큼 비슷한 구조와 패턴을 보여준다고 한다. 달리 ‘소우주’라고 불리는 게 아니다. 우주 宇宙라는 단어에는 ‘집’이 두 번이나 들어간다. 영화 속 인물만큼이나 중요한 주인공인 안소니의 집은 사라지는 인간의 기억이라는 집과 실제 물리적 공간인 집이 교차하고 어긋나며 공포와 혼란을 극대화한다. 뇌라는 우주가 사라지는 동안 나를 지탱하고 보호했던 집 역시 희미해져만 간다. 그렇게 하나의 세계가 사라지는 막막함이란 우주 공간에 홀로 남겨진 안소니를 두고 떠나야만 하는 불가역적 소멸의 정서와 조응한다.
3. 노매드랜드 Nomadland | 2020 | 클로이 자오 | 108분
올해 보았던 영화 중 최고를 꼽자면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다. 금융위기 이후 집과 일터, 사랑하는 가족을 모두 잃은 ‘펀’은 밴 하나에 몸을 싣고 미국 전역을 유랑한다. 동명의 원작이 사회 현상을 포착하고 기록한 르포라면 영화는 책에 담긴 여러 인물을 펀이라는 가상의 인물에 대입해 미국의 역사와 사회를 헤쳐가는 유목민들, 더 나아가 인간의 실존과 삶, 영화의 근원에 관해 화두를 던진다. ‘인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근원적 질문에 클로이 자오 감독은 집을 소거한 삶의 공백에 우리가 놓거나 놓지 않는 것들을 찾아가는 한 인간으로 대답한다. 제작에 참여한 프란시스 맥도먼드가 직접 출연한 영화 속 그는 모든 것을 잃고 떠도는 인물의 고독과 치열한 생의 모습을 마치 실존 인물처럼 연기한다. 사회 영화를 연상시키는 끊임없는 노동의 이미지는 배우라는 존재가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는 가치와 능력을 한껏 발휘한다. 해답을 바라는 구도자의 순례는 결국 출발했던 곳에서 다시 시작한다. 하지만 과거의 그와 지금은 다르다. 기억으로 가득 찬 집과 사막을 뒤로한 채 다시 떠나는 밴의 뒷모습은 영화의 완벽한 엔딩이다.
배우가 아닌 실존 인물을 그대로 영화에 녹여내 가상의 상황을 연기한 등장인물들은 현실감을 더욱 높여준다. 연출과 실제를 넘나드는 영화의 연출은 가상 인물인 펀에게도 유효하다. 사실 펀을 연기한 프란시스 맥도먼드도 영화의 절반까지는 ‘펀’보다는 프란시스 자신처럼 보인다. 유목민 선배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드넓은 자연을 바라보는 펀의 모습은 영화의 인물이 아닌 다큐멘터리의 호스트로도 보인다. 그래서 〈노매드랜드〉는 중반까지는 미국의 사회 현실을 포착한 다큐멘터리에서, 그 이후 펀의 속마음이 드러나는 순간 그의 서사로 채워진다. 펀과 맥도먼드라는 두 인물이라는 정체성이 동화되고 중첩되는 과정은 영화라는 예술이 왜 인간에게 유효한가를 잘 드러낸다. 사회의 단면을 들여다보며 결국 커다란 서사가 자신의 이야기로 수렴하는 것이 곧 영화가 존재하는 이유임을 깨닫는다.
흔히 미국은 자동차의 나라라고 불린다. 거대한 쇳덩어리가 한 나라의 정체성과 상징을 드러낸다는 점은 인상적이다. 단단한 금속에 몸을 실은 유약한 인간은 그 넓은 땅덩어리를 쉼 없이 움직이며 지금의 미국을 만들었다. 유목민은 미국이 어떻게 건국하였고 여기까지 오게 된 그 정당성을 알려준다. 하지만 거창한 의미 안에는 피와 눈물로 맺힌 비운의 삶이 녹아있다. 노매드 nomad는 새로운 공간으로 이주 transfer 하기 위해 돌아다니지만 이는 곧 밀려난 이들의 피난처 shelter를 전제한다. 필그림과 아메리카 선주민, 개척시대에 희망을 찾아온 이들, 그리고 부동산과 경제위기가 몰아낸 차 안의 노매드들. 상징으로 추앙받는 한가한 말들에는 나라는 존재가 부유하는 미국인의 역사가 담겨있다. 그들은 여전히 떠돌아다니며 외면받는 존재이지만 바퀴 자국으로 미국이라는 땅에 궤적을 남긴다. 영화 속 미국이라는 땅에 잠든 오랜 역사가 새겨진 돌과 화석은 그래서 노매드를 닮았다. 단단한 돌에 새겨진 바람구멍은 국가와 사회를 구성하는 연약한 인간의 발자취, 더 깊이 들여다보면 단단하게 남아 있는 미국의 수많은 자동차에 담긴 인간의 삶과 기억을 나타낸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인간은 더는 그 자리에 없다. 하지만 기억하는 것이 살아있는 것이라고 말했던 빌처럼 우리는 누군가를 기억하고 있는 한 화석처럼 영원히 살아남아 흔적을 남기고 말 것이다.
4.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 Judas and the Black Messiah | 2021 | 샤카 킹 | 126분
흑인 민권 운동사에 빠질 수 없는 1968년, 마틴 루서 킹 주니어 목사의 서거로 혼란스러웠던 미국에는 극좌파 민권 운동단체 ‘흑표당’이 세력을 결집하고 있었다. 당의 두 창립자 휴이 뉴턴과 바비 실은 각자 국가권력에 의해 자행된 폭압적인 재판을 받고 있었다. 흑인 민권 지도자의 잇따른 부재로 구심점을 잃기를 바랐던 미국 정부와는 달리 위대한 혁명가는 어디서든 뿌리를 내리기 마련이다. 흑표당 일리노이주 지부장으로서 투쟁을 이끌었던 20살의 대학생 프레드 햄프턴은 뛰어난 언변과 협상력으로 대중을 선동하며 후일을 도모하고 있었다. 이에 FBI는 그를 반체제 인사로 규정, 그를 감시하기 위해 비밀 정보원을 투입한다. 차량 절도와 FBI 사칭으로 구속 위기에 놓인 윌리엄 오닐에게 이 은밀한 제안은 거부할 수 없었다. 흑표당에 들어간 오닐은 그를 감시하는 동시에 점차 미국 사회의 불평등을 직면하고 헴프턴에 동화된다.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는 오로지 민중을 위한 혁명을 외친 ‘블랙 메시아’와 그를 감시한 ‘유다’의 삶으로 오늘날 여전히 유효한 미국의 역사를 보여준다.
BLM 운동과 트럼피즘의 후폭풍, 코로나 19의 확산으로 어느 때보다 소수자의 입지가 좁아 든 작금의 시기에 영화는 60년 전으로 돌아가 혁명과 변혁, 진보의 길에 둘러친 억압과 폭력을 드러낸다. 제목처럼 영화는 ‘유다’의 시선으로 ‘메시아’를 들여다본다. 전체주의와 국가주의의 광풍에 ‘유다’ 윌의 배신이란 너무도 평범한 시민이 사회와 상황 앞에서 생존이라는 목표에 움직이게 되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오닐 역의 ‘라키스 스탠필드’는 고뇌와 갈등 앞에 선 불안한 심리를 생동감 있게 표현한다. 이분법적 사고에 매몰된 사회에서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오닐의 피폐한 모습은 인간성과 도덕을 상실한 파시즘의 권력에 신념을 강요받는 무력한 인간을 묘사한다.
공포의 시대에 어쩌면 당연해 보이는 생리에 헴프턴은 단호히 부정한다. 직설적이지만 정확히 핵심과 구조를 꿰뚫는 화술을 지닌 그는 권력이라는 적에 대응하기 위해 연대와 사랑을 내세운다. 뛰어난 선동가이자 정치가인 그는 누구와도 손을 잡을 배포로 무지개 연합을 만들어 세력을 규합한다. 맹방기가 걸린 백인 빈민 교회에 당당히 들어가 고통의 역사를 직시하면서도 결국 그들을 설득해 당당히 남부의 깃발 앞 연단에서 백인들을 설득시키는 모습은 경이로우면서도 현대 정치의 본질과 역할에 대해 사유하도록 만든다. 위대한 인물을 연기하기에 상당한 부담이 되었을 ‘다니엘 칼루야’는 그의 삶을 되새기며 뛰어난 연기를 펼친다. 클로즈업으로 잡아낸 연설 장면에서도 머뭇거림 없이 카메라의 시선을 이겨내는 칼루야의 모습은 리얼리티를 극대화하는 데 일조한다.
이념의 특성상 여성의 권익에 적극적이었던 흑표당과 국가의 대립에 한 축을 담당하는 뛰어난 여성 인물들의 존재감은 상당하다. 헴프턴의 연인이자 운동가인 데보라 존슨은 그의 마음을 다잡으면서 새로운 세대에게 지금의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대해 지적한다. 인간적이면서 강인한 여성으로 모든 상황이 종결된 마지막 장면에 잡히는 그의 감정은 많은 생각을 들게 만든다. 헴프턴의 동료 주디 하몬은 영화 내내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진보적인 조직의 면모를 보이며 신념 앞에 불굴의 의지를 드러내는 역할을 소화한 ‘도미니크 손’의 커리어가 기대되지 않을 수 없다. 시대의 영웅과 비극적 최후, 그리고 배신과 선택은 범죄 영화 〈무간도〉를 떠올리면서도 탁월한 정치 영화로서 그 매력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특히 소수자를 결합하는 연대의 유산은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깊은 울림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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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가 선사하는 삶의 파노라마
올해로 개봉 35주년을 맞은 쥬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명작 <시네마 천국>은 단순히 한 소년의 성장담을 넘어, 영화와 인생, 그리고 진정한 우정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깊은 울림을 선사한다.
영화에 미쳐 살던 어린 토토가 영사기사 알프레도를 만나 평생의 스승이자 친구로 삼으며 펼쳐지는 이야기는, 필름처럼 이어지는 삶의 순간들을 아름답게 그려낸다.
영화 속 극장이 토토에게 환상의 공간이었다면, 스크린 밖 현실은 전쟁 직후의 폐허와도 같다. 아버지의 부재, 홀로 자식을 키워야 하는 어머니의 서러움, 그리고 예상치 못한 비극적 사건들은 어린 토토의 삶을 짓눌린다. 영화는 이러한 잔혹한 현실 속에서도 멈추지 않고 흘러가는 인생의 런닝 타임을 비극적이지만 담담하게 그려냅니다. 토토는 사랑과 이별을 겪으며 청년으로 성장하고, 그 과정에서 영화가 인생의 고통을 잊게 해주는 유일한 안식처이자 동시에 또 다른 삶의 교훈을 얻는 공간이었음을 깨닫는다.
영화의 핵심은 알프레도와 토토의 관계에 있다. 알프레도는 토토의 재능을 일찍이 알아보고, 그가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 꿈을 펼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뒤돌아보지 말고,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는 그의 냉정한 말은, 토토의 성공을 위한 알프레도의 지극한 사랑과 희생의 표현이었다. 고향을 떠나 성공한 영화감독이 된 토토가 알프레도의 부고를 듣고 비로소 돌아왔을 때, 모든 것이 변해버린 고향과 사라진 극장은 그에게 낯선 동시에 지울 수 없는 기억들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폐허가 되어 폭파되는 극장은 단순한 공간의 소멸을 넘어, 지나간 시간과 추억의 일단을 정리하는 듯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영화의 마지막, 토토가 알프레도가 남긴 고전 영화 키스신 모음 필름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의 정점이다. 이는 알프레도의 토토를 향한 그리움과 사랑, 그리고 토토가 진정한 사랑을 찾기를 바라는 염원이 담긴 유산으로 해석된다. 극장에서만큼은 현실의 가혹함과 비극을 잊고 영화라는 환상에 빠져들었던 토토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안쓰러움과 함께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시네마 천국>은 영화가 가진 근원적인 힘에 대한 예찬이다. 어둠 속에서 수많은 사람이 함께 웃고 울며 같은 감정을 공유하는 극장이라는 공간의 경험은, 디지털 시대에도 여전히 대체 불가능한 가치를 지닌다. 오늘날 관객들이 극장을 외면하는 현실을 마주하며 이 영화를 다시 본다는 것은 씁쓸하면서도, 동시에 극장의 존재 이유를 되묻게 한다. 무성에서 유성으로, 흑백에서 컬러로 진화하며 늘 발전해 온 영화의 기술과 극장의 변화 속에서도 변치 않는 것은, 스크린이 선사하는 마법 같은 순간이 우리에게 주는 위로와 감동일 것이다. <시네마 천국>을 극장에서 다시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은, 이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에 더욱 깊은 의미를 부여하며 극장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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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글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좋은 글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영화 <지니어스> 리뷰
얼마 전, 원작 『맥스 퍼킨스 : 천재의 편집자(Max Perkins, Editor of Genius)』를 바탕으로 한 영화 <지니어스>를 다시 보았다. 사실 이 영화를 꺼내 보게 건 서점에서 우연히 집어 든 책 한 권 때문이었다. 추천인은 오랜 세월 편집자로 일해온 사람이었고, 글을 업으로 삼고 싶은 내게 그의 권유는 다른 누구의 말보다 특별하게 다가왔다. 특히 영화를 보며 예전 영화학도 시절에는 보이지 않던 부분들이 새삼스럽게 보이기 시작했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글쓰는 일을 업으로 삼는 캐릭터들의 고민이 이제야 현실적인 질문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영화를 글쟁이들에게 권하고 싶다. 글이 어떻게 태어나고 다듬어지는지, 그 지난한 과정을 드물게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그랬듯 아마도 누군가에게는 반드시 좋은 자양분이 될 것이라.
천재를 알아보는 법
출처 : 네이버 영화 <지니어스> 스틸컷
1929년, 비 내리는 뉴욕. 찰스 스크리브너 선스 출판사 앞.
담배를 문 한 남자가 빗속에 서 있다. 굵어지는 빗줄기에도 미동조차 없는 그의 모습은 누군가를 묵묵히 기다리는 듯하다. 잠시 후, 카메라는 출판사 안으로 전환된다. 소란스러운 빗소리와 달리, 안에서는 연필이 원고를 긋는 소리만이 적막을 채운다. 그런 그의 앞에 새 원고 뭉치 하나가 던져진다. 이미 수많은 출판사에서 외면당한 방대한 원고. 그것이 종이 더미로 버려질지, 아니면 새로운 문학의 시작이 될지는 오직 편집장 맥스 퍼킨스의 눈에 달려 있었다.
집으로 향하는 열차에 오른 맥스는 원고를 펼쳐 든다. 그러나 끝이 보이지 않는 분량에, 출근길 열차 안에서도 계속 원고를 읽는다. 하루 가까운 시간을 통째로 바쳐서라도 붙잡게 된 글.
형편없는 글이었다면 과연 그럴 수 있었을까. ‘오, 잊혀진 것들’이라는 원고는 단번에 출판사를 사로잡은 글은 아니었지만, 문체는 아름답고 독창적이었다. 다만 지나치게 길고 산만한 단락들은 읽는 맥스를 지치게 했다.
그러나 그는 그 속에서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의 빛을 알아본다. 피츠제럴드와 헤밍웨이를 발견했던 그의 눈은, 이번에도 새로운 천재를 정확히 포착한다. 토마스 울프. 그의 운명이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사여, 고향을 보라』
토마스의 재능을 알아본 맥스 퍼킨스는 그를 출판사로 불러들인다. 두 사람의 첫 만남에서 토마스 울프는 자신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는 자신의 글처럼 수려한 말솜씨를 가진, 자신만의 세계가 뚜렷한 인물이다.
세상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더라도 글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신념이 그의 태도에서 묻어난다.
“울프 씨, 당신의 책을 출판하고 싶습니다.”
맥스의 그 한마디로, 영화는 다음 챕터로 넘어간다. 극의 전개와 편집은 너무 빠르지도,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은 정제된 템포로,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차근차근 리듬을 타고 나아가는 듯하다. 드디어 자신의 책을 출판하게 된 무명 작가 토마스 울프. 당장 그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임무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자신의 원고를 교열(편집)하는 일이었다.
울프는 분명 뛰어난 작가였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도 많았다. 그렇기에 교열은 불가피했다. 수천, 수만 문장에 달하는 글을 다듬어내는 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몇 년간 매달렸던 문장들을 지워야 하는 순간마다
안타까움을 토로했고, 때로는 분노와 불만을 쏟아내기도 했다. 하지만 맥스는 알고 있었다. 좋은 원고가 좋은 책으로 태어나려면 군더더기를 쳐내고 핵심만을 남겨야 한다는 것을. 그는 울프 곁에서 묵묵히 조력자의 역할을 하며,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이 빛나는 보석으로 세상에 나올 수 있도록 도왔다. 마침내 그렇게 다듬어진 첫 작품 『천사여, 고향을 보라』는 출간과 동시에 단숨에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하루아침에 무명에서 스타 작가로 떠오른 토마스 울프의 삶은 어떻게 변하게 될까. 화려한 명성과 부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영화는 이 시점에서 관객에게 중요한 사실 하나를 드러낸다. 울프의 연인 알린 번스타인이 사실은 얼굴도 알지 못하는 번스타인 씨의 아내였다는 것을. 울프는 처음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이 장면을 통해 관객은 처음으로 그들의 관계가 불륜이라는 사실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 복잡한 사생활과 엇갈린 감정 속에서, 울프는 새로운 원고 뭉치를 들고 다시 맥스의 편집실 문을 두드린다.
『때와 흐름에 관하여』
토마스는 다시 원고 뭉치를 들고 맥스의 편집실을 찾았다. 이번에도 원고의 분량은 방대했다. 5천 페이지에 달하는 글을 다듬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고, 그 과정에서 그들은 가까운 사람들과도 점차 멀어졌다. 맥스는 가족과의 여름 휴가를 포기해야 했고, 아내와의 갈등은 깊어졌다. 톰의 연인이었던 알린 번스타인 역시 점차 그에게서 외면받는 듯한 외로움 속에 불안감을 키워갔다. 톰과 알린의 관계는 어쩌면 시작부터 균열을 내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불륜으로 시작된 사랑은, 설 얼은 강바닥에 번지는 금처럼 보이지 않게 신뢰를 깨트리고 있었다. 바깥의 잡음이 요란했음에도, 맥스와 토마스는 오로지 글을 다듬는 데만 몰두했다.
“우리 편집자들은 밤잠을 못이뤄. 우리가 정말 글을 좋게 바꾸고 있나? 그저 변형시키는 것인가?”
맥스의 이 고백은 글을 쓰는 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고민이다. 글을 다듬는 일이 본질을 더욱 빛내는 과정인지, 아니면 오히려 훼손하는 일인지 늘 자문하게 된다. 정답은 없다. 그렇기에 어렵지만, 동시에 반드시 마주해야 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지난한 작업 끝에 세상에 나온 신작 『때와 흐름에 관하여』는 뉴욕타임스를 비롯해 수많은 언론으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토마스 울프는 연이어 3편의 베스트셀러를 내며 출판계의 스타로 우뚝 선다. 그러나 영광의 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는 급성 뇌질환으로 쓰러져, 너무도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다.
예민하고 히스테릭했지만 자유로운 감수성을 지녔던 그는, 그 삶마저 예측불허했다. 그런 성정이 그의 글을 특별하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그의 삶을 불안정하게도 했다. 세상을 바라보는 날카로운 눈, 글로 길어 올린 독창적인 문체와 시적 통찰은 수많은 독자를 사로잡았으나, 정작 그가 쓰러질 무렵 그의 곁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작가이자 예술가로서 가장 뜨겁게 타올랐지만, 인간으로서는 누구보다 고독했던 순간이었다.
토마스가 떠난 뒤 맥스의 곁에 남아 준 것은 결국 가족이었다. 언제나 같은 자리에 있던 아내와 딸들, 변함없는 안온한 보금자리였다. 그리고 그가 다시 안정을 찾아갈 무렵, 스크리브너 선스 출판사로 편지 한 통이 날아든다. 수신인은 맥스 퍼킨스. 그것은 토마스가 생전에 남긴 마지막 편지였다.
죽음이 두렵지는 않지만 여전히 살고 싶다는 간절함
맥스와 다투며 그에게 상처준 일에 대한 후회
아직 완성하지 못한 이야기들에 대한 미련, 그리고 병을 이겨내 다시 살아가고 싶다는 나약한 희망
그는 마지막 순간, 모든 심경을 글에 담았다. 도시의 풍경을 함께 바라보던 어느 11월의 기억까지, 토마스는 잊지 않았다.
비운의 천재, 토마스 울프. 그는 마지막 순간마저 글로써 친구에게 작별을 고했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지니어스> 스틸컷
영화<지니어스>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지만, 연출은 결코 과장되지 않는다. 오히려 담백하고 슴슴하게 흘러간다. 그러나 바로 그 담백함 속에서 글을 둘러싼 치열한 고민이 오롯이 드러나는 영화임이 틀림없다. 만약 토마스 울프가 이 영화를 보았다면, 연극을 싫어했던 그의 성향에 딱이라며 만족했을지도 모른다. 나 역시 오랜만에 진심으로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을 만나게 되어 반가웠다.
글쓰기를 업으로 삼고자 하는 지금의 나에게 더없이 좋은 자극이자 깊은 여운을 남겼다. 잔잔하고 평범해 보이는 영화도 결국 누가, 어떤 마음으로 보느냐에 따라 인생 영화가 될 수 있다. <지니어스>는 내게 글에 대한 권태가 찾아올 때마다 다시 꺼내들 수 있는 작품이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를 내 취향대로 채워가는 일이란, 늘 가슴이 충만해지는 기쁨이자 희열 넘치는 행위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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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하는 사람의 세계를 이해하게 된다는 것
이 리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둘째가 태어나고 일년쯤 지났을까? 다정한 누나였던 첫째 아이가 말했다. “엄마, 동생이 없었으면 좋겠어.” 순간 나는 얼어버렸다. 내 뱃속에서 태어난 아이가 다른 아이의 존재를 부정한다는 것은 둘째의 임신이후 각오한 일이었지만, 생각보다 타격이 컸다. 게다가 둘째의 탄생이 후 첫째가 꼬물꼬물 움직이는 동생을 꽤나 예뻐하고 잘 돌본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어느날 툭 내던진 한마디에 나는 머리를 망치로 맞은 것처럼 멍해지고 말았다.
내가 어떻게 행동 해야 하는 걸까?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걸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울 것 같은 마음이 되었다. 이 작은 아이는 일년이 넘는 동안 어떤 감정으로 동생을 대해 왔던 걸까? 나는 우선 말없이 꼬옥 안아주었다.
영화 클레오의 세계를 보며, 내가 자주 눈물이 났던 것은, 클레오의 모습에서 나의 첫째아이를 보았기 때문일 것 이다.
클레오는 프랑스 파리에 살고 있는 여섯살 여자아이다. 엄마가 아장아장 걸을 때쯤 세상을 떠나 아빠와 살고 있는 클레오는 서아프리카 카보베르데에서 온 보모 글로리아의 보살핌과 돌봄을 받고 있다. 엄마의 부재를 모두 채워주고 있는 사람. 클레오가 유치원에서 나와, 다른 학부모들 사이에서 글로리아를 보고 활짝 웃으며 글로리아를 반긴다. 둘은 다른 엄마와 딸처럼 함께 병원을 가고, 밥을 먹고, 웃고, 떠들고, 목욕을 한다. 클레오에겐 아마도 글로리아가 엄마같은 존재일 것이다. 온 세상의 전부.
어느 날, 글로리아에게 카보베르데에 계신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화가 오고, 안전하고 따듯해 보였던 둘만의 세계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슬픔의 감정을 꾹꾹 눌러 담아, 아이를 챙기는 글로리아의 모습에서 글로리아의 세상의 많은 부분에도 클레오가 차지 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글로리아는 클레오가 모르는 글로리아의 세상 카보베르데로 돌아가야 하고, 클레오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글로리아가 떠나는 날 , 인사 대신 숨어서 지켜 보며 우는 클레오를 보며, 내가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서로를 위해 슬픔의 감정을 눌러 담은 클레오와 글로리아.
글로리아가 고향으로 돌아간 이후 클레오는 마음이 텅 비어 보인다. 그리고 마침내 글로리아가 클레오의 아빠에게 부탁한 대로 카보베르데로 가게 된다. 하지만 그 곳은 클레오가 몰랐던 글로리아의 세계가 있다. 임신중인 딸 페르난다와 프랑스에서 클레오를 돌보는 동안 할머니 손에 자란 아들 세자르가 있다.
클레오가 도착한 순간 위태롭게 클레오를 지켜 보는 글로리아의 아들 세자르, 클레오는 상관없이 글로리아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싶어하지만, 페르난다가 출산을 하여 갓난아이가 태어나 글로리아가 손주를 돌보는 일에 마음을 쓰자, 클레오는 또 다른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아기가 죽었으면 좋겠어요.”
클레오의 세계는 조금씩 무너지고, 클레오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마도) 성장하고 있을 것이다. 집밖으로 내 달려 절벽의 바다로 뛰어든 순간 , 클레오는 어쩌면 다른 세계로 알을 깨고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클레오가 ‘아기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장면을 보며, 나는 이상하게도 안도감을 느꼈다. 영화의 처음 창문 밖으로 숨어 울던 클레오에게, 질투와 분노 부정적인 감정들 까지 표현하게 되어서, 더 꽉 안아 줄 수 있구나.
이제 둘은 깊이 사랑하는 마음과 별개로 새롭게 쌓고 있는 서로의 세계를 인정하고 한발 물러서 지켜봐주어야 하는 때 임을 알아간다. 공항에서 클레오를 떠나 보내며 우는 글로리아를 보며, 이 영화는 클레오의 성장기이며, 글로리아의 성장기이며, 이는 돌봄을 하는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원히 품에 안고 있을 수 없는 사람이지만, 영원처럼 사랑했고 또 멀리 스스로 설 수 있게 떠나보내야 하는 그런 관계는 보모와 아이뿐만 아니라 엄마와 아이도 마찬가지니까. 두 아이를 육아하며, 이리 저리 흔들거리는 나에게 돌봄을 하는 사람이란, 그렇게 한 사람의 세계를 이루어 만들도록 돕고 지켜보며 또 응원해야 한다고 말해주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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