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2025-03-27 12:45:09
사제간에 그려낸 서로의 초상화.
영화 [승부] 리뷰
이 글은 영화 [승부]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때 그려진 초상화를 보면. 드라마 촬영 후 후보정까지 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보기에는 적나라하다는 표현 밖에는 붙여줄 수가 없는 작품이 많다. 하지만 초상화를 남기는 것은 어명의 영역이었기에 그 어떤 숨김도 거짓도 없어야만 한다는 설명을 듣고 나면. 당연하다는 생각에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한 폭의 그림에 담기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았을 땐. 마냥 어명이라 하더라도 신이 나지는 않았을 것만 같다. 애써 숨기고 싶었던 곰보 자국이 그림 안에서 살게 될 자신의 뺨 위에서도 지워지지 않을 것이고. 미처 발견하지 못했거나 알지 못했던 단점마저도 초상화에 들어있을 수도 있었을 테니까.
사진출처:다음 영화
제자인 창호(유아인)가 그린 자신의 초상화를 발견했을 때. 조훈현(이병헌)은 아마도 처음으로 자신의 곰보자국들을 들여다봤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도 알고 있었던 익숙한 흉터뿐만 아니라. 미처 알지 못했던 자신의 기풍에 있는 부스럼까지 발견했을 때의 그 무력감은. 아마도 바둑의 신(神)과 겨루어도 질 것 같지 않았던 그 당시 그의 자존감의 크기만큼이나 크고 깊었을 것이다.
처음엔 제자의 초상화를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들여다보니 보인 것일 뿐이라 믿고 싶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자신을 결승전에서 앞에 두고 스승의 초상화를 또 한 번 묵묵히 그려내는 제자의 모습을 보며. 훈현은 자신의 장점도 단점도. 승패를 가린다는 어길 수 없는 어명 같은 하나의 목적 앞에서는 그 어떤 것도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을 것이다.
창호가 그린 초상화가 자신과 똑 닮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는 몸을 일으켜 애써 그 초상화 앞에서. 그리고 그 초상화의 주인 앞에서 멀어져야만 했다. 더 들여다보았다가는 정말로 제자에게, 혹은 제자가 그린 자신의 초상화에 잡아먹힐 것만 같았으니까.
사진 출처:다음 영화
스승과 승부는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데 훈현은 꽤 오랜 세월을 바쳐야 했다. 그동안 결승마다 만난 자신의 제자 앞에서 수도 없이 패배와 친해져야 했다. 무관왕이라는 타이틀 아닌 타이틀도 어느새 그의 옆에서 입김이 느껴질 위치에서 머물곤 했다.
자신의 제자는 물과 같아서. 칼처럼 예리한 자신은 베어낼 수도. 손에 쥘 수도 없었다. 그는 속절없이 차디찬 물에 떠밀려 허우적거리기만 할 뿐. 아무리 자신을 휘둘러도 창호의 눈썹 하나조차 움직이게 할 수 없었다. 이대로 이 깊이를 알 수 없는 물에 빠져 죽는 것 외에 남은 선택지는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전신(戰神) 조훈현에게 후퇴한다는 말까지 수식어가 될 수는 없었다. 그는 분명 제자에게 스승과 승부는 다른 것이라 가르쳤으며. 자신이야 말로 이 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칼로 제자를 베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달궈진 자신을 식혀서 단단하게 연마해 주는 것이 제자의 존재라는 것을 인지하게 된 순간부터. 조훈현의 손에는 제자의 모습. 아니 자신의 라이벌의 모습을 담은 초상화가 완성되기 시작했다.
사진 출처:다음 영화
다시 만난 제자는 자신에겐 패배를 배우게 한 스승이 되어 있었고, 승리를 알려준 스승을 만난 제자는 훈현의 손에 들려 있는 자신의 초상화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이 기묘한 사제관계의 라이벌은, 다시 한번 치열하다 못해 피가 마르는 신선놀음을 시작해야만 했다.
그 신선놀음의 끝에는 분명히 승자와 패자가 존재하지만. 영화의 말미에 가서는 더 이상 그 결과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물론 제삼자의 입장이라 그랬을지도.)
자신의 스승과 대국을 할 수 있다는 자체가. 자신의 곰보자국을 인정하며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스승과 제자, 라이벌 사이를 오가는 이 대국은. 단순한 승부라는 말을 넘어서서 서로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과정이기도 했으니까.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더 높은 경지에 이르게 하는 바둑판 위에서 펼쳐진 그들의 대결은 승패를 가르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더 나은 자신을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그들이 남긴 서로의 초상화가 단순한 기보가 아닌. 인생의 기보로 남았기에 나 역시도 이런 영화를 보며 그들의 흉터에서 느껴지는 아픔마저도 느낄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마치면서;책임지지 못한 돌에 대하여
사진출처:다음 영화
영화 [시네마 천국]에서 토토는 할아버지에게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오지도 말고. 이곳을 잊어버리라는 말을 듣는다. 완벽하게 이해할 수야 없었겠지만. 그만큼 토토의 성공을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는 것쯤은 어린 토토라도 이해했을 것이다. 어린 창호의 왼손에 채워진 시계는 그런 걱정과 염려를 담뿍 담은 채 굳건히 채워졌다.
물론 영화에서도. 현실에서도(?) 이창호는 변하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할 것들을 묵묵히 해내며 앞으로 정진했다. 스승인 조 국수에게 배운 것처럼 바둑돌 하나하나에도 책임을 다 했고 그 결과 정상의 자리를 15년가량이나 지키며 남에게도. 스승과 라이벌에게도. 그리고 자신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이 역할을 연기한 배우 유아인의 경우는 그렇지 못했다. 분명 매우 좋은 영화이며 큰 만족감으로 마음을 가득 채우고 나올 수 있었던 영화였으나. 그는 초심을 잃은 토토가 되어 영화 속에서만 강렬한 연기를 보일 뿐이다.
조훈현의 시점만이 아닌 이창호의 시점으로도 영화를 해석하고 싶은 마음이 강했으나. 커버린 토토가 할 것은 참회밖에 없기에. 이 영화의 영광과 대단함이 한 풀 꺾이는 것만 같은 아쉬움을 지울 수는 없었다.
조훈현은 이창호에게 승리와 패배를 동시에 가르친 참된 스승이었다. 배우 유아인에게도 그런 스승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안타까움도 동시에 드는 영화였다.
[이 글의 TMI]
1. 영화관에서 팝콘 안 먹기 2회 성공
2. 오늘 점심 회식인데 도망가고 싶다.
3. 이 비를 통해서 불이 반드시 꺼졌으면 좋겠다.
#승부 #김형주 #이병헌 #고창석 #유아인 #한국영화 #실화바탕영화 #영화추천 #최신영화 #영화리뷰어 #영화해석 #결말해석 #영화감상평 #개봉영화 #영화보고글쓰기 #Munalogi #브런치작가 #네이버영화인플루언서 #내일은파란안경 #메가박스 #영화꼰대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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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크린 너머 세계 속으로… 스웨덴] 잔 아래의 세계
계급도를 그릴 때 피라미드형이 가장 자주 쓰이는 것처럼, <슬픔의 삼각형>에서도 계급이 있는 곳에 삼각형이 있다. 삼각형은 물질적이고 직관적인 이미지로 등장해 추상적이고 의식적인 단계까지 진화한다. 삼각형, 즉 계급이 등장할 때 항상 배경에 반복되거나, 불쾌한 소리가 낮게 깔린다.
칼과 야야가 차 안에서 다툴 때, 차의 와이퍼가 계속 움직이며 괴상한 소리를 낸다. 이때 둘의 대화를 클로즈업 쇼트로 연달아 보여주는 것이 아닌, 탁구공이 핑퐁하는 것처럼 둥글게 움직이며 둘의 사이에 있는 와이퍼까지 훑고 지나간다. 영화 속에서 카메라는 주로 작품과 현실의 경계를 이어주는 도구로 작용하지 카메라 자체가 인격적인 의미를 가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위 장면은 마치 둘 사이 가운데에 있는 사람이 둘을 번갈아 쳐다보는 듯한 효과를 준다. 칼과 야야 그리고 그들을 지켜보는 카메라까지 삼각형의 구도가 완성되며 칼과 야야 사이의 계급을 표시한다.
칼과 야야가 크루즈 갑판에 누워서 직원을 볼 때, 야야의 앞에서 직원이 웃통을 벗는 걸 질투한다. 칼과 직원 사이에 있는 위계가 드러나는 장면이며 칼의 특권 의식에서 출발한 질투가 강해질 때 날아다니던 파리는 한 마리에서 두 마리로 늘어난다. 이후 치프에게 직원의 행동을 이야기하러 들어올 때 파리 하나가 같이 따라 들어온다. 이후 파리는 사라지고 야야를 위한 약혼반지를 고를 때 태엽이 돌아가는 듯한 소리가 작게 들려온다.
일반적인 피라미드형의 계급도에서 최상층이 권력을 상징한다면 <슬픔의 삼각형>에서는 전경이다. 야야와 칼이 식당에서 사장을 처음 만났을 때, 부자 둘이 한 앵글에 잡히고 남은 꼭짓점은 후경의 직원이 채운다. 꼭짓점의 한 축을 담당하던 직원이 사라지자 바로 다른 직원이 나타나 그 축을 채운다. 이는 권력의 삼각형이 완성될 수 있던 건 직원과도 같은 피라미드의 아래에 위치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임을 암시한다.
크루즈에서 직원과 부자가 동등한 위치에 서 있던 한 씬이 있는데, 직원이 수영하도록 종용하던 장면이다. 언뜻 보면 둘이 동등한 위치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운데의 접힌 파라솔 여전히 권력이 작용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부자의 종용으로 모든 직원들이 미끄럼틀을 타게 된다. <슬픔의 삼각형>은 곳곳의 물건들로도 삼각형을 표현해 내는데, 여기서 가장 직접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게 미끄럼틀과 와인잔이다. 일단 미끄럼틀을 타기 위해서는 최상층으로 올라가야 한다. 그리고 미끄러져 내려오는 것까지가 미끄럼틀의 완성이다. 삼각형의 꼭대기로 올라가 휴식할 수 있었지만, 그걸 가능케한 것도 최상층의 사람이고, 이 휴식은 일시적으로 그들은 다시 선장과의 저녁파티 준비를 위해 미끄럼틀을 미끄려져 내려와야 한다.
미끄럼틀을 통해 내려오게 된 것은 직원들 뿐만이 아닌데, 이후 이어진 선장과의 저녁에서 기체가 심하게 흔들리며 저녁파티에 간 상류층들은 구토와 똥물에 빠지게 된다. 그들의 허세와 권력은 가장 더러운 곳으로 떨어지며 권력의 삼각형은 깨진 것처럼 보인다. 이때 그들의 권력은 아직도 공고함을 보여주는 것이 와인잔이다.
상류층들이 싸지른 토사물들을 치우는 건 직원들이다. 이때 한 직원이 깨진 와인잔을 치우는데 와인잔은 영화의 거의 초반부터 계속 등장해왔다. 와인잔은 끝으로 갈수록 좁아지며, 물을 채우면 물을 채운 부분이 삼각형처럼 보인다. 또한 와인 자체로도 부의 속성을 가진다. 이 장면에서 와인잔은 완전히 박살나 깨진 것이 아닌, 잔을 잡는 목부분만 깨져있으며 안에 담긴 와인은 멀쩡하다. 직원을 자신이 잘라놓고 그 사실을 회피하고, 청소할 수 없는 돛을 가지고 트집잡으며 토사물과 인분에 뒹구는 더럽고 바보같은 권력자들임에도 권력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토와 똥으로도 뒤집히지 않았던 삼각형이 뒤집히는 건 섬에서부터다. 무인도에 표류한 상황에서 최우선되는 건 생존으로, 유일하게 생존에 필요한 능력을 갖춘 아비게일이 권력을 쥐게 된다. 권력 구조가 재설정됨에 따라 기존의 ‘부’라는 권력 구조에 속하던 명품 시계들은 가치가 없어보인다. 그러나 이후 아비게일의 팔에는 부자들의 소유였던 명품 시계들이 매여져 있다. 무인도라는 공간으로 배경이 바뀌고, 권력 구조가 재설정되었음에도 무인도인줄 알았던 리조트의 뒤편처럼 여전히 생존은 부라는 권력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쉽게 뒤집혀버린다.
마지막 장면, 리조트의 엘리베이터를 본 아비게일은 영원한 권력을 위해 야야를 향해 돌을 치켜든다. 생존의 가치가 사라진 순간 다시 부의 권력에 편입되어 삼각형 밑바닥에 자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 카메라는 아비게일과 야야 대신 어딘가 급하게 뛰어가는 칼을 비춘다. 칼의 목적지나 이유가 나오지는 않지만, 관객은 자연스럽게 칼. 아비게일과 야야의 삼각관계를 떠올리게 된다.
반복되어 제시된 삼각형이 관객에게 구도나 물건을 통해 삼각형을 찾는 것부터 시작해 인물의 삼각관계를 통해 삼각형을 떠올릴 수 있게 만들기까지가 영화의 완성이다. 아비게일이 야야를 죽이더라도, 칼이 어딘가에서 도망치거나 무언가를 쫓더라도 그들이 삼각관계 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또한 우리 머릿속에 공고히 자리잡은 삼각형에서 벗어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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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가 되기 위한 세 번째 조건
작가란 누구일까? 작가가 되려면 우선 글을 써야 한다. 작가란 글로 무언가를 짓는(作) 사람이다. 작가의 첫 번째 조건에 따르면 우리 모두는 작가가 될 수 있다. 그냥 글을 쓰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수많은 사람이 글을 씀에도 그들이 모두 작가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누군가를 작가로 인정하려면, 그에게 독자가 있어야 한다. 독자는 작가의 두 번째 조건이다. 우리는 혼자만 읽는 글을 쓰는 사람을 작가라 부르지 않는다. 많든 적든 그 글을 읽어주는 사람이 있을 때, 글쓴이는 비로소 작가라는 호칭에 어울리는 사람일 수 있다. 영화 〈마이 뉴욕 다이어리〉는 여기에 하나를 더한다. 영화가 말하는 작가의 세 번째 조건은 바로 독자와의 상호성이다.
〈마이 뉴욕 다이어리〉는 조안나 래코프의 책 《My Salinger Year》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원제에서 알 수 있듯,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하게 등장하는 작가는 《호밀밭의 파수꾼》을 쓴 J. D. 샐린저(J. D. Salinger)다. 샐린저는 지독할 정도로 대중 앞에 서는 걸 꺼린 것으로 유명한 작가다. 명성에 비해 발표한 작품의 숫자도 적은데 그마저도 철저하고 까다로운 저작권 관리를 받아 접하기가 쉽지 않다.
영화는 작가 에이전시에 취직해 샐린저를 담당하게 된 조안나의 시선으로 전개된다. 그녀는 은둔자적 삶을 이어가는 샐린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에 관해 철저히 교육받는다. 제일 중요한 업무는 샐린저에게 온 독자 편지에 응대하는 일인데, 샐린저가 독자의 편지를 받아보기를 원하지 않았으므로 조안나가 적당한 형식에 맞춰 답을 써야 했다. 샐린저에게 오는 편지는 이미 에이전시가 유형화해놓았을 정도로 다양하다. 소설에 감동했다는 독자, 자기 문제에 조언을 요청하는 독자, 인터뷰를 요청하는 언론 등등. 조안나는 샐린저에게 온 수많은 편지를 분류하고 매뉴얼대로 답장해나간다.
그런데 점점 의문이 생긴다. 《호밀밭의 파수꾼》이 수많은 독자의 내면을 강렬히 사로잡았기에 샐린저에게 온 편지도 대부분 절절한 이야기다. 그들은 모두 갈급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공인 홀튼 콜필드를 창조해낸 샐린저에게 자기 내면의 혼란을 털어놓으며 교감을 추구한다. 조안나의 고민은 여기서 생긴다. 진정성 가득한 편지에 기계적으로 답변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인지에 의문을 품기 시작한 것이다.
흥미로운 건 샐린저의 태도가 적절한지를 고민하는 조안나 역시 샐린저와 똑같이 행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조안나가 뉴욕으로 온 후, 고향에 있는 그의 남자친구는 연락 없는 그녀에게 계속 편지를 보낸다. 하지만 조안나는 이를 읽지 않고, 읽지 않았으므로 당연히 답장도 하지 않는다. 연락이 끊긴 채 멀어져버린 연인에게 쓴 편지의 애절함이 샐린저에게 쏟아진 편지에 담긴 감정에 뒤처질 리 없다. 조안나는 샐린저의 처신에 안타까움을 느끼면서도 정작 자기 역시 똑같이 행동하고 있다는 걸 나중에야 깨닫는다.
사실 조안나는 작가 지망생이다. ‘지망생’이란 표현이 적절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이미 《파리 리뷰》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안나는 그 이후 별 다른 작품 활동을 하지 않았고, 스스로를 ‘작가’라 생각하지도 않는다. 작가 에이전시에 취업한 것도 이 일이 그녀의 꿈을 본격적으로 펼치는 데 보탬이 될 거라는 막연한 기대에서였다.
영화의 마지막, 조안나는 결국 작가가 되기 위한 자신만의 길을 찾아 나선다. 샐린저를 품고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고, 연락을 끊었던 남자친구와도 만나 솔직한 감정을 털어놓는다. 물론 샐린저는 위대한 작가다. 조안나는 그의 작품에 진정으로 감탄하며, 작가로 살아가는 태도와 방법에 관한 그의 조언에 감동한다. 그러나 조안나는 샐린저가 아니다. 샐린저가 독자와 엮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데 반해, 조안나는 고향의 남자친구가 편지 서문에 자신의 애칭을 부른 것만으로도 과거 기억이 떠올라 편지를 읽지 못할 정도로 섬세한 감성을 가진 사람이다. 직장 상사가 상업적이고 딱딱한 태도로 작가를 대하는 걸 보며 마음 아파하는 장면도 조안나의 여린 감수성을 잘 보여준다.
때문에 그녀가 스스로 작가라는 이름을 당당하게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그는 분명 샐린저와는 다른 작가가 될 것이다. 독자의 반응 하나하나에 설레거나 상처받으며, 이를 소중히 품은 채 다음 작품에 그들이 남긴 흔적을 반영할 것이다. 외골수처럼 자기만의 주제를 파고드는 작가도 좋지만, 독자와 함께 호흡하며 작가 주체성‧정체성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작가도 좋다. 〈마이 뉴욕 다이어리〉는 복잡한 문학이론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작가의 의미를 질문한다는 점에서 꽤 흥미로운 영화다.
한편 〈마이 뉴욕 다이어리〉는 작가론을 다루는 영화인 동시에 꿈꾸는 사람들을 응원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내가 그랬듯, 많은 사람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조안나의 모습에 위로 받을 것이다. 샐린저의 궤적을 존중하면서도 자신만의 미래를 꿈꾸는 조안나가 만들어갈 미래를 상상하는 게 퍽 즐거웠다. 내가 나아가고자 하는 미래와 그녀가 선택한 미래를 비교해보는 일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막 어떤 목표를 정하고 본격적으로 매진하려는 초심자에게, 〈마이 뉴욕 다이어리〉가 잔잔한 위로와 재미로 다가갈 것을 확신한다.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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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리호> 도전적인 밑그림을 덮은 무미건조한 채색
2092년, 지구의 환경오염에 시달리던 사람들은 '설리반(리처드 아미티지)이 우주 위성궤도에 만든 새로운 보금자리 UTS로 향한다. 그러나 UTS에 정착할 수 있는 사람의 수가 한정적인 관계로 돈이 부족한 많은 이들은 지구에 그대로 남거나 우주를 떠돌며 힘겹게 살아간다. 우주 쓰레기 청소선 승리호의 선원인 ‘태호’(송중기), ‘장선장’(김태리), ‘타이거 박’(진선규), ‘업동이’(유해진)도 가족과 동료들을 잃은 파란만장했던 과거는 뒤로 한 채 돈 되는 일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며 살아간다. 어느 날, ‘승리호’는 사고 우주정에서 대량살상무기로 알려진 인간형 로봇 ‘도로시(박예린)’를 발견하고, 그녀와 관련된 음모를 깨달은 뒤 새로운 모험에 나선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승리호>는 보는 재미가 확실하다. 우주선 내부나 우주 도시의 거리, 클럽, 도박장, 우주선 수리장처럼 다양한 공간을 만들어낸 세트 미술은 미래의 세계관에 자연히 빠져들게 만든다. <스타워즈>나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와 비교해도 크게 어색하지 않은 우주선들의 추격전과 액션은 <신과 함께> 이후 한국의 CG 기술력이 한 단계 더 성장했다는 방증처럼 보인다. 전작인 탐정 홍길동처럼 본래 만화와 현실을 오가는 과장된 영상미를 보여주던 조성희 감독이기에 UTS의 마을이나 설리반의 사무실처럼 CG가 살짝 어색한 장면도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이러한 비주얼 측면의 성과는 영화가 극장에 걸리지 못한 현실이 야속할 정도다.
하지만 시각 효과를 잠시 제쳐둔 채 "<승리호>가 최초의 한국형 스페이스 오페라로서 성공적인가?"라고 묻는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절반의 성공, 혹은 절반의 실패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승리호>는 스페이스 오페라라는 장르를 새로운 관점으로 재해석하는 데는 성공했다. 다만 그 재해석을 보여줄 때 할리우드의 기존 문법에 지나치게 의존한다는 문제를 노출한다.
스페이스 오페라(space opera) 영화는 우주에서 펼쳐지는 모험과 전쟁을 주요 소재로 삼는다. 사실 영화 장르로서 스페이스 오페라는 국내에서 인기가 없다. 가장 흥행에 성공한 작품인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가 320만 관객을 간신히 넘겼고, 그 이후 시리즈는 100만 명을 넘기지 못했다. MCU에 속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2>도 270만 명을 동원하는 데 그쳤으며 <스타트렉> 시리즈도 100만을 간신히 넘는다. 이처럼 스페이스 오페라에 대한 반응이 좋지 않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특히 스페이스 오페라 영화가 할리우드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서부극의 전통을 이어받은, 미국적인 영화의 대명사로 볼 수 있다는 점도 하나의 이유가 된다. 실제로 스페이스 오페라라는 용어는 1941년 SF 작가이자 평론가인 윌슨 티거가 최초로 사용했는데, 이는 서부극을 뜻하는 호스 오페라(horse opera)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의미였다.
서부극을 구성하는 이른바 '미국적' 토대는 두 가지로 파악할 수 있다. 하나는 개인주의이며 다른 하나는 개척주의 혹은 팽창주의다. 우선 서부극의 주인공은 대게 독선적이고 개인적인 반-영웅이다. 기존의 규범과 규율에 복종하기보다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행해 사람들을 구하는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다. <스타워즈>의 주인공들은 이 전통을 그대로 계승한다. 루크 스카이워커, 아나킨 스카이워커, 한 솔로, 레이 등은 하나 같이 선대의 가르침, 제다이의 규율을 무시하고 자신의 직감이나 판단을 쫓는 경우가 많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팀원들도 스타로드가 순간적인 충동으로 타노스를 때린 것처럼 개인적인 돌발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스타트렉>의 커크 선장도 마찬가지다.
또한 서부를 개척하고, 혼돈과 질서가 없다고 여겨진 땅을 문명화하는 이야기를 보여줬던 서부극은 흔히 미국인의 정신이라고 표현되는 서부로의 개척주의, 팽창주의가 영화에 투영된 결과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스페이스 오페라는 말이 우주선으로, 미국 서부의 평야나 사막이 우주와 행성들로, 미국의 원주민을 외계인으로 바꾼 것에 불과하다. 1960년대에 케네디 대통령이 '뉴 프런티어(new fronier)'를 외치며 미국 서부를 전 세계, 심지어 달로 확장시킨 것처럼 동시대에 제작된 <스타트렉>에서도 미국(U.S.)을 상징하는 U.S.S. 엔터프라이즈 호는 우주 각지를 탐험한다. 이러한 미국 중심의 개척주의, 팽창주의의 전통은 <스타워즈>나 <스타트렉>에서 백인, 흑인, 황인 가리지 않고, 또한 지구인과 외계인을 가리지 않고 전부 영어를 사용하는 것에서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식민지의 피지배자로 근현대 시기를 보냈던 한국인에게 본질적으로 미국의 역사적 경험을 토대로 만들어진 스페이스 오페라 영화는 그다지 매력적인 선택지가 아닐 수밖에 없다.
이는 한국형 스페이스 오페라 영화를 만들려는 시도가 단순히 화면에 태극기를 보여주거나 '승리호'라는 우주선 이름을 한글로 보여주는 것을 넘어서 미국적 기반에 토대를 두지 않는 새로운 세계관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승리호>는 이 미션을 성공적으로 수행한다. 우선 미국 중심의 개척주의, 팽창주의에서 탈피한 세계관을 선보인다. 주인공들이 기본적으로 통역기를 사용하며 한국어, 프랑스어, 영어, 스페인어, 러시아어, 나이지리아 피진어 등에 이르는 다양한 언어가 등장하는 것이 단적인 예시다. 그 외에도 미국의 개척, 팽창주의에 대한 반기는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주인공들이 우주 쓰레기 처리선을 타고 다니는 장면, 거대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부유층만 사는 우주도시와 황폐화된 지구를 오가는 초반부 장면은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극단에 다다른 풍경에 대한 상상화를 그려내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 질서의 폐해를 비판한다.
이는 생태주의적 접근과도 궤를 같이 한다. 서부 개척을 화성 개척과 등치시키며, 자연을 개발하고 소비한 뒤 새로운 개발 대상을 찾아 나서는 세태를 비판하는 것이다. 한국의 경제 성장을 상징하는 63 빌딩이 미세먼지로 뒤덮인 가운데 더 높은 빌딩들이 서 있는 서울을 보여주는 오프닝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는 영화의 주된 갈등이 도로시를 죽이려는 설리반과 지키려는 승리호의 대립에서 비롯되는 가운데, 이 갈등이 지구를 파괴하고 화성으로 이주하는 설리반과 지구들 되살리기 위해 나무를 심는 주인공들의 대조를 이루는 선택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이유다. 또한 어린아이로 등장하는 도로시 캐릭터 자체가 미래 세대를 위한 희망을 담은 존재이기 때문에 태호가 과거에 딸을 잃은 기억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전개는 나름의 설득력을 갖추기도 한다.
한편 <승리호>는 연대와 협력의 메시지를 강조하며 개인주의적인 영웅 서사를 거부한다. 실제로 빌런과 승리호 일행이 대면하는 구도는 언제나 일 대 다의 구도 속에서 이루어진다. 설리반이 승리호 내부로 들어와 그들을 직접 제압하는 장면이나, 카밀라가 우주 공장 내부에서 승리호 일행과 격투를 벌이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초반부만 해도 서로가 서로에게 비난을 퍼붓던 서로 다른 국적의 우주 쓰레기선 승무원들, 서로 믿지 못하던 검은 여우단과 승리호 선원들이 힘을 모아 설리반의 음모를 막는 데서도 영화가 중점을 둔 대목을 눈치챌 수 있다. 이때 상술한 통역기는 연대와 협력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측면에서도 중요한 영화적 장치다. 따라서 <승리호>의 세계관, 큰 그림, 밑그림은 분명 기존에 볼 수 있었던 스페이스 오페라 영화들과는 차별화된 한국형 스페이스 오페라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문제는 <승리호>가 기존의 할리우드 문법을 사용해 세계관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특히 <승리호>의 장면들을 디테일하게 뜯어보면 기시감을 피할 수는 없다. 액션의 경우, 업동이가 우주선을 오가며 파괴하는 장면에서는 <토르: 라그나로크>, 행성을 파괴할 수 있는 무기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무기 안에 잠입하는 전개는 <스타워즈>의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한다. 절체절명의 순간 우주 쓰레기 혹은 운석 지대와 같은 장애물 지대로 들어가는 것 역시 수십 년간 애용된 클리셰다. 미래의 우주를 그려낸 디테일한 설정도 마찬가지다. UTS의 설정이나 모양새는 <엘리시움>의 설정이나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에서 등장한 스카리프 행성과의 비교를 피할 수 없다. "매끈하고 날렵한 할리우드 영화의 우주선"과 다르다는 일각의 평가 역시 <스타워즈>에 등장하는 전투기의 만듦새를 고려하면 설득력이 없다.
캐릭터의 설정과 관계도 마찬가지다. 능글맞은 파일럿, 강력한 여전사, 신체적 능력과 별개로 순박한 인물, 유머와 위기 탈출을 책임지는 인간이 아닌 존재라는 조합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그림자를 지우지 못한다. 이는 전작에서 보인 배우들의 이미지를 고스란히 차용한 것이기도 하다. 제각각 다른 과거를 지닌 이들이 승리호라는 우주선에서 하나의 가족으로 묶이고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며 보듬아 준다는 전개 또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와 일치한다. 주인공 일행을 매번 위기에 빠뜨리는 여성 서브 악역의 존재, 인간성을 말살한 소년병을 양성해 UTS 기동대로 활용했다는 설정은 <스타워즈> 시퀄 시리즈 속 스톰트루퍼를 연상시킨다. 결국 미장센이나 디테일한 연출의 측면에서 사실적인 영상을 구현한 기술력과 별개로 뭔가 독창적이나 새로운 것을 보여줬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할리우드 영화의 작법을 빌린 것과 별개로 설득력이 떨어지는 대목들도 있다. 무엇보다도 악의 축으로 그려지는 설리반의 서사가 부족한 결과 순이를 지키는 이와 대 죽이려는 이의 가시적인 대립 이면의 메시지가 전달되지 않는다. 그의 혈관이 갑자기 부풀고 감정이 폭주하는 것, 로봇처럼 검사를 받는 모습 등 스치듯 지나가는 묘사만으로 인간을 혐오하고 지구를 파괴하려고 하는 그의 동기가 충분히 제시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사실 장선장이나 태호가 설리반과 함께 일했다는 과거사를 보여줄 경우 그들의 철학적 대립이나 사회경제적 문제에 대해 깊이 있는 비판이 가능했다는 점에서 악역에 대한 묘사가 부족한 것은 아쉬움이 짙다. 그 외에도 도로시가 극 중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활용되는 것과 같은 편의적인 전개가 종종 눈에 띈다.
물론 한국 영화 시장에서 스페이스 오페라 영화가 대부분 흥행에 실패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비교적 익숙한 전개, 캐릭터, 볼거리를 선택한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다. 240억 원의 제작비와 580만 명가량의 손익분기점은 메이저 배급사가 아닌 '메리 크리스마스'의 입장에서 실패를 무릅쓰기 어려운 부담이기 때문이다. 다만 세부적인 장면 구도, 연출 등에서 흥행을 위해 자신의 가능성을 지레짐작해서 제한한 듯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장르적인 측면에서 차별화된 재해석을 선보였고, 수준 높은 볼거리도 제공했으며, 주제의식과 메시지도 사회 현실을 적절히 반영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그래서 <승리호>가 거둔 절반의 성공과 절반의 실패는 그 기쁨과 즐거움 못지않게 큰 아쉬움과 미련을 남긴다.
A(Acceptable, 무난함)
최초의 시도가 주는 뿌듯함과 스스로의 가능성을 믿지 못한 안타까움의 공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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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이애나의 ‘외로움’을 가득 담은 영화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사람이 살면서 평생 안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외로움은 찾아오고 긍정적인 일들이 주변에 많이 일어나도 어느 순간이 되면 갑자기 찾아온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이라는 감정에 그렇게 매달리는 것인지 모른다. 사랑을 주고 또 받을 사람을 찾고, 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결혼이라는 문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고 해서 그 외로움이 찾아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그 사랑에도 익숙해질 즈음에 그 외로움은 또 찾아온다. 주변 가족이나 친구들과 만나며 그것을 해결하기도 하고, 그저 태어난 아이를 키우는데 더 집중하면서 그 외로움일 이겨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 외로움이라는 것은 그렇게 평생 우리 곁에 있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해결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우리가 방송 프로그램이나 영화 같은 화면을 통해 접하는 연예인들도 외로움과 고독감을 느낀다. 화면 속 화려함과 팬들의 동경은 그들을 스타로 만들어주지만 개인의 삶 속에서 느끼는 외로움도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그래서 누군가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연예계에서 멀리 떨어지기도 한다. 그러니까 아무리 화려한 인기 속에 살고 있더라도 외로움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친구가 많아도 외로움은 찾아오고 각자만의 방식으로 달래가야만 한다. 어쩌면 그건 인간으로 태어나 평생 해결해야 할 숙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이애나 황태자비의 외로움을 담은 영화
영화 <스펜서>에는 외로움과 고독한 감정이 가득 담겨있는 영화다. 유명을 달리한 다이애나 황태자비(크리스틴 스튜어트)의 감정을 담는 영화는 그가 이혼하기 전 왕실에 있던 1990년대 초반 즈음의 크리스마스 3일을 다룬다. 실제 사건을 재구성했다기보다는 다이애나라는 인물의 감정을 압축해서 영상으로 옮겼다는 설명이 더 적합할 것 같다. 처음 별장에 가족들과 일하는 직원들이 모이는 모습을 보여주는 초반에 다이애나는 혼자 오픈 카를 운전하여 별장으로 향하고 있다. 그는 보조해주는 운전사도 없이 혼자 운전을 하는데 길을 잃고 제시간에 도착하지도 못하지만 계속 왕실의 사람들과 거리를 두려고 무척 애쓴다.
다이애나가 도착한 왕실의 별장은 그가 태어나고 자란 생가 근처에 있다. 영화 속 다이애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의 생가에 가려고 하거나 과거 아버지가 농사지었던 땅의 허수아비를 찾아간다. 영화 속 '현재'에 다이애나는 고립되어 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자신의 진짜 모습이 있던 ‘과거’의 장소로 회귀하려는 시도를 계속 반복한다. 얼굴엔 외로움이 가득하고 쓸쓸함이 느껴진다. 왕실에서 제공하는 음식을 먹은 그는 곧 그 음식을 다 비워낸다. 마치 왕실의 모든 것에 거부감을 느끼듯 속에 들어온 많은 것을 뱉어내려 애쓴다. 그의 주변에 그를 돕기 위해 파견된 도우미들이나 파티를 주관하여 총괄 관리하는 그레고리 소령(티모시 스폴)은 계속 그를 파티와 행사에 밀어 넣지만, 다이애나는 그걸 계속 밀어낸다. 그래서 가족 모임으로 다이애나를 끌어들이려는 그들이 영화 속에서 악당처럼 느껴지는 건 영화가 다이애나의 감정을 무척 잘 표현해냈기 때문에 가능했다. 다이애나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구성원들의 행위는 모두 적대감이 느껴진다.
다이애나가 마음을 열고 있는 왕실 사람은 두 아들과 의상 담당자 매기(셀리 호킨스)뿐이다. 두 아들은 그가 낳은 친족이기 때문에 좀 더 편하게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매기는 일하는 직원일 뿐이다. 그럼에도 매기는 다이애나의 이야기를 잘 들어준다. 답답하고 꽉 막힌 왕실 가족의 분위기에서 유일하게 다이애나가 편하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이야기할 수 있는 인물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생각해 보면, 매기라는 인물은 다이애나를 사랑했던 소수의 주변 인물과 일반 대중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매기의 말처럼 다이애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았다. 그 사실은 실제로 그가 불운한 죽음을 맞이한 이후에 추모의 분위기로 알 수 있다.
다이애나의 자유에 대한 의지
다이애나가 자신의 생가에 어렵게 방문하여 보게 되는 과거의 환영들에서 그는 자유로움을 느끼고 삶의 의지를 확인한다. 그 환영을 본 후 다시 별장에 돌아와 매기와 만나며 시간을 보내고 두 아들을 시외로 데리고 나가는 장면에서 다이애나의 모습은 숨 막히는 왕실의 압박과 분위기에서 벗어나 조금은 자유로운 얼굴을 보여준다.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을 ‘스펜서’라는 결혼 전 자신의 성으로 주문하고, 길거리에서 먹는 모습 두 아들과 다이애나의 뒷모습에는 영화 속 어떤 모습보다 자유롭게 보인다.
영화 <스펜서>에는 다이애나의 고독과 외로움이 가득 담겨있다. 무엇보다 다이애나 역을 맡은 배우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외모부터 실제 다이애나 황태자비와 비슷해 보인다. 거기에 목소리 톤까지 그에 맞추면서 더욱 실제 다이애나가 눈앞에 서있는 듯한 착각을 준다. 그리고 과거 다이애나가 겪었을 감정적 외로움과 고독이 배우의 얼굴로 세세하게 표현한다. 거대한 왠지 위압적인 별장의 모습과 그에 비해 너무나 작아 보이는 다이애나의 모습이 잘 대비된다. 또한 연신 음식을 토해내는 모습은 그가 가진 왕실에 대한 거부감이 그대로 드러난다.
<스펜서>는 실제 사건을 요약하여 제시하는 영화라기보단 그 당시의 인물이 가졌던 감정을 함축적으로 제시하는 영화다. 그런 의미에서 과거 영화 <스티브 잡스>를 떠올리게 한다. <스티브 잡스>는 실제 사건을 다룬다기보다 무대 뒤에서 스티브 잡스(마이클 패스벤더)가 만나는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그가 가졌던 사람들과의 관계의 문제점이나 감정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진행된 영화다. 그러니까 주인공의 감정이나 있었던 일에 대한 반응을 이야기에 함축하고 배우의 표정으로 표현해낸다는 측면에서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는 영화라고 볼 수 있다.
영화를 연출한 파블로 라라인 감독은 과거에도 퍼스트레이디인 재클린 케네디의 이야기를 다룬 <재키>나 칠레의 민중 영웅 파블로 네루다의 이야기를 다룬 <네루다>를 연출한 경험에 있다. 이번 <스펜서>에서도 실존인물인 다이애나 황태자비가 가졌던 감정을 두 시간의 영상으로 함축하여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다이애나는 영화가 담긴 시기 이후 이혼을 하고 독립적인 생활을 한다. 어쩌면 이혼 후의 시간에서는 영화를 가득 채웠던 외로움과 고독감을 조금은 덜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늘 억압되고 고독했던 다이애나를 이제 대중들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그런 다이애나의 외로움에 담긴 영화 <스펜서>는 정적인 스타일의 영화지만 다이애나의 표정을 통해 보는 사람의 감정을 크게 움직이는 영화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간단한 리뷰가 포함된 movielog를 제 유튜브 채널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주로 말 위주로 전달되기 때문에 라디오처럼 들어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유튜브 Rabbitgumi 채널 구독과 좋아요도 부탁드립니다!
<스펜서>
https://www.youtube.com/watch?v=O2fcOhrE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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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협에 구애받지 않는 아름다운 그녀들의 동행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이을 뜨거운 사랑 이야기가 개봉한다는 소식은 폭염에 지친 몸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필리포 메네게티 감독의 데뷔작 <우리, 둘>은 등장과 함께 46회 세자르영화제에서 총 4개 부문 후보에 올라 데뷔 작품상을 수상했다. 이후 93회 아카데미 시상식 국제장편영화상 부문에 출품되면서 영화계의 뜨거운 관심을 받게 된다. 영화계의 이목이 집중된 화제작 <우리, 둘>에 대한 소식은 확인하기 위해 용산 아이파크몰을 찾았다.
노년 은퇴 계획을 구상하며 한 껏 즐거워하는 니나(바바라 수코바)와 마도(마틴 슈발리에). 로마에서 여생을 보내기 전 마도는 가족들에게 니나와의 연애 사실을 밝히기로 결심한다. 생일날 마음속 깊이 묻혀있던 진실을 고백하려 노력하는 마도. 하지만 끝내 자신의 진심을 이야기하진 못한다. 자신과 약속을 지키지 못한 마도에게 서운함을 느낀 니나는 결국 심한 말을 하기에 이른다. 그날 밤 알 수 없는 이유로 병원에 실려간 마도, 다행히 생명에 이상은 없었지만 뇌졸중 판정을 받고 말을 잃은 채 집으로 돌아온다. 아픈 어머니를 위해 가족이 고용한 가정부로 사랑하는 연인에게 다가갈 수 없던 니나는 조급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마도의 집 문을 열어젖히고 만다.
“일반적이지 않다”, <우리, 둘>은 시작부터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숨바꼭질을 하던 중 사라진 친구를 찾던 소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까마귀 소리, 대칭의 구도에 대한 집착은 예감을 확신으로 만들어갔다. 첫 데뷔작부터 필리포 메네게티 감독은 일반적임을 거부하며, 미래 거장의 실력을 유감없이 뽐내고 있다.
두 노년 여성의 사랑이란 독특한 설정의 <우리, 둘>은 일련의 사건으로 자신을 찾아가며 서서히 완성되는 전형적인 영화의 문법과 거리를 둔다. 이 영화에서 니나와 마도는 이미 완성된 인물들로 등장한다. 동성애자로서 확고한 정체성을 지니고 살아가지만 온전한 사랑을 위해 사회의 편견이란 최후의 벽을 넘어 인정받기 위한 과정을 그리고 있다. 하지만 생각보다 사회는 편견으로 가득했고 결국 그들은 진정한 삶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을 시작하기에 이른다. 몸이 불편한 마도를 대신해 투쟁의 최전선에 선 니나는 사랑을 위해 잔인한 일면을 보이기도 하며, 영화는 뜨거움과 서늘함 사이를 오간다. 극적인 온도차를 표현하기 위해 색채와 사운드를 적재적소에 배치해 효과적으로 장르의 변화를 도모한다. 특히 색채를 활용한 인물의 감정 변화에선 감독의 독특한 재치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우리, 둘>을 관람한 후 쉽게 인상에서 지워지지 않는 색채를 집어보고 이야기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이후의 내용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어 영화를 관람 후 읽어보길 추천한다.어떤 색에도 쉽게 물들 수 있는 색, 마도의 하양
이야기 시작과 함께 등장하는 두 소녀는 각각 검은색과 하얀색 옷을 입고 있다. 뒤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검은색이 명백한 니나의 색이라면 하양은 마도의 색이다. 마도는 환경에 쉽게 변화하는 모습을 자주 보인다. 확고한 정체성을 지닌 니나와 반대로 마도는 결혼을 하고 아이들까지 낳았다. 이후 집을 팔기로 결정했다가 아들로 인해 번복하는 모습까지 보이면서 상황에 따라 어느 쪽으로든 변할 수 있는 모습을 보인다. 특정색과 혼합되는 순간 본연의 색을 잃어버리는 하양의 특성을 통해 마도의 성격을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불안과 열정 사이, 검정과 빨강의 니나
독특하게도 니나는 변함없는 검정과 불꽃처럼 화려하게 빛나는 빨강, 두 가지 색으로 표현되고 있다. 확고한 정체성을 지니고 있는 니나는 주변의 어떤 영향에도 자유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동시에 영화 곳곳에서 등장하는 까마귀의 모습을 통해 근거 없이 동성애를 불행이라 폄하하는 사회의 시선에 니나가 불안을 느끼게 만드는 장치로도 활용된다. 불안을 느끼는 니나는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이는 마치 하얀(마도) 담배를 검정(니나)이란 자신의 색으로 물들이고 싶어 하는 그녀의 조바심을 드려내는 듯하다. 갑작스러운 마도의 병이 니나의 조바심을 폭발시키고 얼마 남지 않는 순간이나마 화려하게 보내기 위해 그녀는 정열적인 붉은 옷을 입고 연인의 앞에 서기에 이른다. 이는 타들어가는 순간 돌이킬 순 없지만 짧은 순간이나마 누구보다 화려하게 빛나고 싶은 니나의 열정을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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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켄 로치가 말하는 '민족'
켄 로치의 영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이 보여주듯, 민족은 단결의 이름이자 분열‧적대의 이름이다. 먼저 단결이다. ‘민족’은 아일랜드인들이 독립이라는 공동의 꿈을 가졌음을 표지하는 범주다. 아일랜드인은 민족이라는 이름 아래서 독립을 꿈꾸며 ‘하나’가 된다. 하지만 민족은 아일랜드인 사이의 차이를 보이지 않게 만들기도 한다. 아일랜드인에게는 독립 이후에 대한 다양한 꿈이 있었다. 누군가는 사회주의에 가까운, 누군가는 전통적 권위에 기댄 사회를 꿈꿨다. 그러나 민족의 독립이라는 ‘같은 꿈’을 꾸는 동안 이 차이는 논의되지 않는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는 치열하게 조정‧경합되었어야 할 차이들이 민족이란 이름 아래 억눌린 채 쌓여 있다가 끝내 폭발해 버리고 마는 과정이 담겼다. 우리와 비슷한 아일랜드의 역사를 살펴봄으로써 ‘민족’이 무엇을 가능케 했고 또 무엇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는지를 숙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난민, 이주민 혐오의 시대에 굉장히 시급한(혹은 이미 늦은) 작업이다.
1920년대 아일랜드의 한 마을. 영국 군인이 불시에 들이닥친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 하키를 치는 게 집회를 금지한 조치에 위반한다는 이유에서다. 이 과정에서 17살 청년 미하일이 영국군에게 반항하다가 맞아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미하일의 죽음은 마을 사람들로 하여금 공통의 비애를 느끼게 한다. 모두의 슬픔 속에서 주인공 데미엔의 고민은 깊어진다. 데미엔은 의사 자격증을 딴 시골 마을의 드문 엘리트인데, 이제 막 런던에서 일할 기회를 얻어 곧 마을을 떠날 참이었기 때문이다.
고민을 품은 채 런던행 기차를 기다리던 기차역에서, 데미엔은 영국군에게 두드려 맞는 아일랜드인 기관사를 본다. 그리고 미하일과 기관사, 자신 사이에 끊을 수 없는 연결고리가 있음을 깨닫는다. 아일랜드가 자유를 얻지 못하는 이상, 아일랜드인은 어디서든 구타당할 수 있다. 이 깨달음이 데미엔의 인생 경로를 바꾼다. 데미엔은 보장된 미래를 버리고 아일랜드인의 ‘공통의 비애’를 극복하는 일에 자신을 투신하기로 한다. 마을 청년들과 함께 아일랜드 독립전쟁에 뛰어든 데미엔은 게릴라 부대를 꾸려 영국과 치열하게 싸운다.
영화가 의미심장해지는 건 이 공통의 비애가 위기에 빠지기 시작하면서다. 첫 번째 사건은 어릴 때 함께 자란 동네 꼬마 크리스를 밀고자란 이유로 처형한 일이다. 망설임‧괴로움 끝에 크리스를 총으로 쏜 데미엔은 이 사실을 직접 크리스의 어머니에게 전한다. 데미엔 일행에게 줄 음식을 만들고 있던 크리스의 어머니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다시는 너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어리숙하고 순박한 동네 소년이었던 크리스의 죽음은 모든 아일랜드인을 ‘민족’이란 이름으로 묶는 일이 그리 간단치 않음을 드러낸다. 크리스 총살과 그 어머니의 슬픈 눈빛은 모든 아일랜드인의 자유를 위한다는 데미엔의 정당성을 마구 뒤흔들어 놓는다.
두 번째는 고리대금업자와 가난한 노파의 대립이다. 둘은 모두 아일랜드인이다. 하지만 계급이 다르다. 마을 사람들은 고리대금업자가 노파를 착취하도록 둬서는 안 된다는 입장과 고리대금업자가 독립군에 무기 자금을 대는 사람이기에 그의 이익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으로 나뉘어 갈등한다. 데미엔과 그의 동지이자 친형인 테디의 갈등이 본격화되는 것도 이때부터다. 데미엔은 가난한 노파의 편에, 테디는 고리대금업자의 편에 선다. 아일랜드 독립이라는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이 ‘다른’ 사회적 조건에 놓여 있음을 보여주는 이 장면은 민족이라는 ‘동질적’ 집단이 무엇을 배제함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인지를 고민케 한다.
가장 결정적인 세 번째 사건은 아일랜드의 자유국 지위 확보 이후에 일어난다. 영국과 아일랜드는 평화 협정을 맺고 아일랜드의 자유국 지위에 합의했다. 아일랜드가 일정 정도의 자치를 보장받은 것이다. 평화협정 이후, 데미엔과 테디 그리고 아일랜드인들은 둘로 쪼개진다. 제한된 자유나마 수용하자는 사람과 완전한 자유를 위해 끝까지 싸우자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이 고조된다. 둘 사이의 대립은 격화되어 영국군이 아일랜드인을 핍박할 때와 다름없는 정도의 폭력이 오고 간다. 아일랜드인들은 절망한다. 어제까지 밥을 지어 주고 무기를 숨겨 주었던 자국의 군대가 둘로 나뉘어 자신에게 총을 겨누는 상황에 그들이 느낀 분노와 슬픔, 좌절의 크기가 얼마나 큰 것일지 가늠하기는 어렵지 않다.
급진적 자유를 갈망하던 데미엔은 결국 온건한/제한된 자유에 만족하자는 테디의 군대에 붙잡히고, 무기의 위치를 발설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총살당한다. 데미엔 총살 명령을 내리는 건 그의 친형 테디다. 영화는 테디가 죽은 데미엔을 끌어안고 오열하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같은 꿈'을 꾸던 형제가 정작 ‘내부’의 차이를 조율하지 못해 마주한 비극은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남긴다. 역사의 특정한 국면에서 민족은 분명 저항을 위한 가장 효율적인 정치적 범주가 된다. 민족이라는 이름 아래 사람들이 모이고, 경험‧감정을 공유하며, 투쟁할 동력을 얻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면이 전환되고 민족이 더 이상 저항의 범주로만 작동하지 않을 때, 문제는 시작된다. 동질성을 강조하는 민족 담론이 내부의 차이를 삭제하고 진압하는 폭력의 명분이 되는 것이다.
폭력을 극복하자는 명목하에 부상한 민족 범주가 폭력의 주체가 된다는 모순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장면이 있다. 테디와 데미엔의 갈등이 본격화되기 전, 데미엔은 연인 시네드가 영국군에게 고초를 당하는 모습을 목격한다. 데미엔은 시네드를 구하려 하지만 테디가 막는다. 위치가 노출될 경우 전 부대원의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데미엔은 결국 형 테디의 말을 따른다. 그리고 주저앉아 “느끼는 법을 잃었다”며 오열한다. 데미엔의 눈물은 위기에 빠진 연인을 향한 공감보다 ‘합리적 선택’을 우선하는 자신의 모습에 대한 좌절감의 표현이다.
앞서 언급했듯, 데미엔은 마을 청년 미하일의 죽음과 아일랜드인 기관사가 영국군에게 폭행당하는 모습을 보며 분노와 슬픔을 ‘느꼈고’ 이를 동력 삼아 아일랜드 독립전쟁에 뛰어들었다. 그런데 정작 투쟁의 과정에서 그는 느끼는 방법을 잃고 말았다. 이는 데미엔만의 문제가 아니다. 데미엔이 동네 청년 크리스를 총살한 후 괴로워했듯, 테디도 친동생 데미엔을 총살한 후 눈물을 흘린다. 분명하게만 보이던 자유의 길이 점차 어렵고 불투명해진다.
이 모든 비극과 혼란은 느낌에 기반한 열린 공동체가 민족이라는 이름의 닫힌 공동체로 전환될 때 일어난다. 느낌의 공동체는 포용적이다. 아일랜드인을 향한 영국의 제국주의적 폭력에 분노한다면, 영국인도 저항의 주체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민족 공동체는 이 분노한 영국인을 포용하지 못한다. 나아가 ‘민족적 대의’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않거나 동의하지 않는 내부 구성원들을 ‘적’으로 만든다. 이러한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는 민족 범주는 저항의 공동체로 출발한 스스로가 억압의 이름이 되는 모순을 피할 수 없다. 데미엔과 테디가 비극을 비껴가지 못한 건 모두 이 때문이다. 영화를 보며 슬펐던 건, 이들의 이야기가 너무도 익숙해서였다. 지금 우리의 민족 담론은 어디에 와 있는가? 우리나라 사람도 힘든데 무슨 난민이고 이주민이냐는 말이 횡행하는 지금, ‘한민족’의 서사에 이 슬프다는 ‘느낌’의 자리가 보장되길, 그럼으로써 열린 공동체로 거듭날 수 있기를 바라기에는 너무 늦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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