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블러2025-03-23 16:32:49
부드러운 거부로서의 애도,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
디지털 유령들과 공존하기
2015년 퓰리처 희곡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른 『Marjorie Prime』은 유족의 기억을 통해 망자의 정체성을 재현하는 인공지능 홀로그램, ‘프라임’을 중심으로 디지털 시대 죽음과 애도의 의미를 날카롭게 질문하는 작품이다. 동명의 희곡을 각색한 영화,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 Marjorie Prime> 또한 기억이라는 삶의 요소가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과 맞물려 다양한 애도의 방식으로 분화되는지 다룬다.
그러나 '디지털 부활'은 더이상 픽션의 영역이 아니다. 2016년, 러시아 기자였던 Eugenia Kuyda는 사랑하던 연인을 잃고 그와 나눈 메시지를 모두 모아 구글 기반의 신경 네트워크(neural network)를 활용하여 그를 챗봇으로 부활시켰다. 챗봇 버전의 연인은 정말 사람 같아서 Kuyda는 챗봇과 과거와 미래에 관한 얘기를 나누며 연인을 잃은 슬픔을 해소했고, 더 나아가 모든 사람이 쓸 수 있는 대화형 챗봇, ‘Replika’를 만들었다. 한국에서도 2020년부터 매년 사망한 가족을 딥페이크, VR, 인공지능 등의 기술을 활용하여 ‘부활’시키는 <VR휴먼다큐멘터리-너를 만났다> 프로그램이 방영되었다. 2025년 현재, 구글 플레이 스토어 기준 ‘Replika’의 다운로드 수는 천만 회를 넘어섰고, <너를 만났다> 프로그램 시즌 1 유튜브 클립 영상 조회 수는 3천 6백만 회를 기록하는 등, 디지털 부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인공지능을 활용하여 망자를 시청각적으로 재현하는 '디지털 부활'이 점점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고인이 된 이후에도 사랑하는 사람과 닿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디지털 기술을 통한 부활을 가속화하고 있다. 조형래는 “망자를 기리는 첨단의 기술적 방식이 막대한 규모의 사회적 정동의 재구성을 초래하고, 죽음에 대한 사회적 태도 및 문화적 관행 전반에 영향을 초래할 것임이 분명”하다면서, “이러한 초혼(招魂)의 테크놀로지가 프로이트적 의미의 애도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더 나아가 유족들에게 끊임없는 추모의 고통을 유발”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반면 디지털 시대 죽음의 의미를 연구하는 심리학자인 일레인 카스켓은 디지털 기술을 통한 애도가 지속적 결속(continuing bonds)의 한 종류라고 주장하면서, 고인과 유대 관계를 끊지 못하는 이들을 우울증 환자로 취급하는 경향을 문제시한다. 카스켓에 따르면, 고인과 유대 관계를 유지하려는 사람들은 사랑하던 고인과 맺은 심리적, 정서적 유대를 소중히 하거나 심지어 더 강화하고자 하는 오래된 충동에 따르는 것뿐이다.
영화는 마조리가 월터 프라임, 그러니까 15년 전 사망한 자신의 남편을 홀로그램으로 재현한 인공지능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월터 프라임은 자신이 청혼하던 날 함께 봤던 영화,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 얘기를 꺼내고, 치매에 걸린 마조리는 이를 기억하지 못한다. 중요한 기억을 잊어버린 자신을 원망하던 마조리는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 대신 “<카사 블랑카>를 보고 돌아온 날 청혼했다면?”이라고 묻고, “다음에 우리가 (청혼) 얘기를 나눌 때는 이게 사실이 되는 거야.”라고 말한다. 어차피 거짓된 기억을 말해도 치매로 인해 사실 여부를 제대로 판단할 수 없는 마조리는 이후로도 종종 월터 프라임에게 왜곡된 기억을 요청함으로써 망상적 위안을 얻는다.
생의 끝자락, 기억을 왜곡해서라도 숨기고 싶은 과거는 월터 프라임이 예전에 키우던 강아 지인 토니 얘기를 꺼내면서 분명해진다. 월터 프라임은 마조리에게 ‘자식이 없던 한 연인이 토니라는 이름의 검은색 푸들을 키웠는데, 토니가 죽고 나서 낳은 딸-테스-도 검은색 푸들을 골랐다’라는 이야기를 해준다. 마조리가 두 번째 푸들에게 ‘토니 2세’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설명하자, 월터 프라임은 두 번째 푸들도 금방 ‘토니’라고 불렸다며, 두 강아지가 완전히 똑같지는 않았음에도 나중에는 토니와 토니 2세를 구분하는 의미가 없어졌다고 말한다. 여기서 토니는 -2막에서 등장하는 앵무새와 마찬가지로-망자와 망자를 재현한 프라임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첫 번째 토니를 죽이고 자살한 마조리의 아들, 데미안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월터 프라임이 토니의 죽음을 설명할 때 마조리가 흘리는 눈물은, 키우던 강아지에 대한 그리움이라기보다는 아들의 자살이라는 트라우마를 대면한 자의 눈물로 해석할 수 있다.
프로이트는 「애도(슬픔)와 우울 Trauer und Melancholie」에서 애도를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에 대한 반응”으로 규정하고, 여기에는 “사랑하던 사람을 대신할 새로운 사랑의 대상을 찾지 못하는 것, 그리고 사랑하던 이를 생각나게 하는 어떤 행동도 금하는 것, 등이 포함된다”라고 설명한다. 달리 말해, 상실을 경험한 사람은 ‘자아의 억제’를 통해 상실 그 자체 외에 다른 곳에는 관심을 둘 수 없는 상태가 된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슬픔(애도)이 “사랑하던 대상이 더는 존재하지 않음을 인식하고 그 대상에 부과되었던 리비도를 철회”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반발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러한 반발이 너무 강하게 되면 상실을 경험한 사람이 아예 “현실에 등을 돌리는 일이 일어나게 되고, 환각적인 소원 성취의 정신병을 매개로 예전의 그 대상에 집착”하게 된다. 프로이트는 이렇듯 정상적 애도에 실패한다면 상실이 자아를 잠식하고 이것이 자기 혐오적 우울증으로 이어진다고 설명하지만, 대상의 상실이 극단적인 트라우마인 마조리의 경우, 자기 혐오적 우울보다는 오히려 그 대상을 무의식적으로 격리하려는 억압(repression)에 가까운 행동을 보인다.
“정신적 트라우마 현상의 핵심은 기억(표상)과 정동”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트라우마를 유발한 사건에 대한 강한 정동적 반응이 있었는지다. 달리 말해, 외상적 사건이 유발한 정동을 언어, 또는 행동으로 수행하지 않으면 정동의 잔여가 정신적 트라우마를 유발하는 것이다. 따라서 히스테리 환자들은 주로 트라우마적 사건의 상기(회고)로 인해 고통을 겪는다. 데미안의 죽음이 마조리에게 트라우마를 유발한다면, 이는 데미안에 대한 애도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데미안이 사랑했고, 데미안이 죽인 토니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마조리는 강한 정동을 경험한다. 이러한 반복적인 표상(기억)의 회고는 마조리에게 고통을 줄 뿐이다. 그래서 마조리는 데미안을 충분히 애도하는 대신, 데미안의 죽음이라는 표상의 억압을 택한다.
마조리는 지난 50년 동안 데미안의 이름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고, 그와 관련된 모든 사진을 집에서 치운 채 살아왔다. 하지만 치매에 걸린 마조리는 데미안이 죽었다는 사실을 잊고 테스에게 “데미안은 지금 자?”라고 묻는다. 마조리가 치매를 앓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아무렇지도 않게 데미안의 행방을 물은 직후 월터와 공원 벤치에 앉아 사프란 색의 깃발을 바라보던 기억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마조리의 모습은 모순적이다. “(벤치에서) 일어나기 싫었어. 남은 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으니까”라는 마조리의 대사는 데미안의 죽음 이후에도 삶을 이어나가야 하는 마조리의 처참한 심정을 대변한다. 이것은 데미안의 죽음이라는 표상 (기억)이 사라진 이후에도 지속되는 정동의 잔여를 의미한다.
존은 마조리가 해준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월터 프라임에게 마조리가 사프란 깃발을 바라봤던 날의 추억을 전해주지만, 영화는 플래시백 장면을 통해 마조리가 사실 공원 벤치가 아닌, 거실 소파에 앉아 TV에 나온 장면을 봤던 것임을 밝힌다. 테스의 주장처럼, 마조리는 “원래의 모습이 아니라 마지막 기억을 기억하는 것이며” 따라서 기억은 “되풀이될수록 희미해지는 복사본”과 같은 것이 된다. 결국 프라임에게 주입되는 기억은 “실제 기억이라기보다는 마조리가 기억하거나, 기억하고 싶은 과거”이다. 이렇듯 마조리와 월터 프라임을 통해 재구성되는 기억은 특정 시선에 의해 오염된 기억이며, 따라서 데미안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을 방해한다.마조리에게 데미안의 죽음은 너무도 고통스러운 기억이기 때문에 마조리는 본능적으로 이를 억압하려 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억압이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 확연한 간극이 생길 때 발생”한다며, “억압의 본질은 자아를 위협하는 본능(충동)을 의식으로 진입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억압의 동기와 목적은 본능이 만들어낸 “불쾌를 피하는 것”이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트라우마가 해소되기 위해선 “억압의 극복과정을 통한 기억의 회복”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아들의 자살이라는 트라우마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치매에 걸린 마조리는 월터 프라임의 외형을 아들이 자살하기 전인 젊은 시절로 설정하면서 아들 죽음 이전의 과거로 회귀하고자 하는 충동을 보인다. 아들을 충분히 애도하지 못하고 오히려 아들의 죽음을 잊고자 하는 마조리의 태도는 현실 도피적 성향을 띤다는 점에서 월터 프라임이 제공하는 망상적 위안을 통해 유지된다.
월터 프라임을 비교적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마조리조차도 망자와 망자를 재현한 인공지능 사이의 간극이 촉발하는 ‘두려운 낯섦’을 겪는다. 두려운 낯섦은 “공포감(또는 기이한 불안)의 일종으로,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오래전부터 친숙했던 것에서 출발하는 감정”이다. 이정환은 프로이트가 말한 ‘두려운 낯섦’이라는 개념이 로봇 공학과 관련된 논의에서 흔히 들을수 있는 “불쾌한 골짜기”와 연관이 있다고 설명한다. 두려운 낯섦에 대한 프로이트의 주장 처럼, 불쾌한 골짜기에 대한 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비인간에 대한 인간의 무의식적 두려움”이 명백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프라임이라는 ‘기술’에 호의적이든, 그렇지 않든,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신이 사랑 하는 사람을 재현한 프라임과 마주했을 때, 프라임이 자신이 생각했던 망상적 위안을 충분히 제공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왜곡된 기억을 그대로 흡수하고, 젊었을 적 외형이 데미안의 죽음 이전을 상기하는 월터 프라임을 통해 데미안의 죽음이라는 트라우마적 사건을 억압 하는 마조리조차도, 월터 프라임이 월터 그 자체가 아니라는 사실에 불쾌감을 느낀다. 자신이 생각한 실재의 이미지를 프라임이 충분히 재현하지 못할 때, 프라임은 망자의 말을 의미 없이 반복하는 앵무새에 불과한 존재가 된다.
이정환은 대상의 기억을 주입하면, 프라임을 통해 그 사람의 존재가 영원히 지속될 수 있지 만, 이 기억은 살아 있는 자의 욕망이 투영되어 있다는 점에서 실재 망자와는 다른 결핍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생전에 사랑했던, 친숙한 망자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망자와는 다른 프라임의 모습은 유령과도 같은 두려운 낯섦을 유발한다. 허구의 작품뿐만 아니라 현실속 디지털 부활 또한 두려운 낯섦을 유발하는 건 매한가지다. 조형래는 디지털 기술을 통한 망자의 재현은 늘 “고인에 대한 추모와 의미 부여를 둘러싼 다양한 상호작용을 거스르는 미묘한 위화감을 수반한다”라고 설명한다. 이렇듯 작품 안팎에 무관하게, 기술적 한계는 감각적인 측면에서도, 인지적인 측면에서도 대상을 완벽히 재현해낼 수 없다는 점에서 늘 기이한 불안, 두려운 낯섦, 즉 불쾌감을 유발한다.
테스에게도 데미안의 죽음은 평생의 트라우마이다. 마조리는 평생 데미안의 이름 한 번 꺼낸 적 없지만, 테스는 늘 데미안의 죽음으로 인해 마조리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정신적 외상은 테스의 자아에도 영향을 미쳐 영화 내내 테스는 “예민하고 성마른 성격의 소유자이자, 매사에 부정적인” 사람으로 묘사된다. 테스는 월터 프라임에게 질투를 느낄 정도로 프라임에 대해 부정적이지만, 결국 마조리가 사망하자 치유의 도구로서 마조리 프라임을 소환한다.
마조리 프라임은 테스에게 ‘토니 데리고 해변에 갔던 거 기억하니?’라고 묻는다. 테스는 기억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존이 개를 키우자고 제안했다면서, ‘카타훌라’를 고려하고 있다고 말한다. 생전 마조리는 ‘카타훌라’가 무엇인지 몰랐으므로, 마조리 프라임 또한 테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그러자 테스는 마조리에게 “‘카타훌라’를 검색해 보라”고 요청한다. 이는 프라임이 진정한 ‘대상’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의 환상이 필수적임을 의미한다. 달리 말해, 이것은 프라임의 ‘이용자’가 프라임이 환상에 불과함을 인지하고 있는 한, 프라임과의 대화가 어떠한 치유 효과도 산출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프라임이 환상에 불과하다면, 프라임과의 모든 상호작용 또한 결국 허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마조리 프라임은 테스의 요청에 따라 카타훌라 하운드의 사전적 지식을 로봇처럼 읊고, 테스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며 ‘(마조리 프라임이 이미지에 불과하다는 사실, 즉 진짜 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 모른 척을 더는 못하겠다’라고 말한다. 테스는 이어 ‘(마조리 프라임이) 정말 엄마 같다가도, 어떨 때는 (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이) 너무도 확연하다’라고 말한다. 이미 지와 실재의 간극은 이렇듯 과거가 아닌 현재의 기억으로 인해 명확해지며, 테스로 하여금 ‘엄마처럼 친숙하지만, 엄마가 아닌’ 두려운 낯섦을 느끼게 한다. 이어지는 장면은 이 두려운 낯섦으로 인해 프라임이 어떻게 치유의 실패로 이어지는지 묘사한다.
표면적으로 테스는 엄마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했다는 콤플렉스를 갖고 있지만, 그의 근원적인 트라우마는 마조리와 마찬가지로 데미안의 죽음이 원인이다. 마조리 프라임은 ‘진짜 엄마 같지 않다는’ 테스의 불만에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더 해달라고 말하고, 이는 자연스럽게 테스가 엄마의 기억을 회고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마조리 프라임은 테스에게 결정적인 질문을 던진다. 마조리 프라임이 ‘테스 말고 다른 자식이 있었냐’고 묻자, 테스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없었다’라고 대답한다. 생전 마조리가 평생 데미안을 언급하지 않았던 것처럼, 테스 또한 데미안에 대한 기억을 숨기면서 자신의 트라우마를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반드시 생생한 정동적 경험을 포함하여, 망각된 외상적 사건을 기억해 정확히 말로 표현”할 때야 비로소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트라우마의 심리적 치유를 위해선 단순한 외상적 사건의 재현을 넘어선 생생한 재경험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프라임은 얼마든지 남아있는 자들에 의해 왜곡된 기억만을 선별적으로 저장할수 있으므로, 치유의 ‘도구’로서 프라임은 제 기능을 다 할 수 없다. 기억의 선별과 왜곡된 기억이 유발하는 이미지와 실재의 간극, 즉 두려운 낯섦은 심리적 치유를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라깡은 “욕망의 중심에 놓여있는 결여”를 ‘'대상 a'’라고 지칭하면서, 상상계적 질서 속에서 이 대상은 어떤 욕구도 충족시키지 못한다고 설명한다. 테스는 마조리 프라임을 형성하기 이전부터 자신이 원하는 어떤 환상을 프라임에게 투사한다. 이 환상은 데미안의 죽음을 기억하지 못하는, 그래서 자신에게 늘 다정하고 충분한 사랑을 주는 엄마이다. 그러나 마조리 프라임이 정말 테스에게 인자하게 미소 지으며 다정한 말을 건네자, 테스는 ‘덜 웃어야 엄마 같아 보인다’라고 충고한다. 테스의 '대상 a'-엄마의 사랑이라는 욕망의 결여-를 충족하기 위해서 마조리 프라임은 테스에게 생전에 주지 못했던 사랑과 다정함을 주어야 하지만, 동시에 사랑을 주면 줄수록 ‘진짜’ 마조리와는 멀어진다는 점에서 테스의 환상은 결코 충족될 수 없다.
애증의 대상이자 환상 속 '대상 a'인 엄마의 상실은 테스를 우울로 이끈다. 프로이트는 우울과 슬픔의 차이를 ‘자애심의 추락’으로 설명한다. “우울증 환자는 대상과 관련된 상실감으로 고통을 겪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말을 들으면 그것이 자아와 관련된 상실감이라는 것이다.” 테스는 계속해서 마조리와 존의 입을 빌려 자기 자신을 ‘무너졌다’거나, ‘엄마를 사랑하게 만들 수 없었다’고 표현한다. 마조리에게 향해 있던 애증의 리비도가 마조리의 죽음 이후 갈 곳을 잃고 테스의 자아를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눈치라도 챈 듯 마조리 프라임은 테스에게 ‘자기 자신에게 너무 가혹하게 굴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나 마조리 프라임과 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애도의 실패-우울증은 결국 테스를 자살이라는 파괴 충동으로 이끈다.
프로이트가 정상적인 애도, 달리 말해 상실을 극복하고 애도를 마무리하는 ‘작업’을 중시했던 까닭은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이 자아를 좀먹고 파괴 충동으로 이끄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데리다는 정상적인 애도와 비정상적 애도를 구분하는 프로이트의 애도 이론을 비판하면서, 죽음이 타자를 잊는 여정의 시작이 아니라, 타자를 기억하는 여정의 시작이라고 주장한다. “데리다가 보기에 프로이트의 정상적인 애도가 갖는 문제는 타자의 타자성을 말살하려 한다는 데 있다. 성공적인 애도 작업을 통해 내면화가 가능해지면, 타자는 나의 일부가 되는데, 그렇게 되면 타자는 더는 타자가 아닌 것이 되기 때문이다.”
마조리에 대한 테스의 정동-상실감으로 인한 우울, 사랑, 증오-은 너무 강력해서 테스는 자신의 편협한 시선에서 기억하는 마조리의 모습-약간 허영심이 있고, 까칠하며, 자신에게 한번도 사랑한다고 해준 적이 없을 만큼 데미안을 사랑한-만을 회고한다. 마조리 프라임은 이렇듯 테스의 내면화된 타자를 온전히 재현할 수 없다는 점에서 테스에게 두려운 낯섦을 유발하고, 프로이트식의 ‘정상적인 애도’를 완수할 수 없게 만든다. 그러나 애도의 실패가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애도는 “가능성과 불가능성, 성공과 실패의 반복적 진동 속에서 수행 적으로 이루어지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테스의 자살 이후, 존 또한 테스 프라임 앞에서 두려운 낯섦을 느낀다. 평소에도 프라임에 호의적이었던 존은 테스 프라임을 더 진짜 테스처럼 만들기 위해 적어두었던 테스의 특징들을 테스 프라임에게 읊어준다. 하지만 존 또한 이내 ‘(프라임은) 반사판 (Backboard)에 불과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나는 지금) 혼잣말을 하고 있다’라고 말하며, 테스 프라임과의 대화에 회의를 느낀다. 그러나 데리다에 따르면, 이러한 ‘좌절된 내면화’는 “타자를 타자로서 존중하는 것, 즉 부드러운 거부의 자세”를 의미한다. 프라임에게 아무리 왜곡된 기억을 주입한다고 해도, 프라임이 환상 속 ‘대상 a’를 완벽하게 충족하는 것은 아니다. 남아있는 자는 필연적으로 이미지와 재현의 간극으로 인한 두려운 낯섦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려운 낯섦이 초래하는 애도의 실패는 동시에 ‘타자를 타자로서 받아들이는’ 애도의 시작이 된다.
데리다는 “기억을 통한 내면화”가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자아를 잠식하는 멜랑콜리아를 긍정하는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멜랑콜리아는 타자를 버려두고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일종의 나르시시즘적 퇴행 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데리다는 “애도의 가능성과 불가 능성이 만나는 지점, 애도의 성공과 실패가 같아지는 지점, 애도와 멜랑콜리아가 중첩되는 공간”에 주목한다. 즉, “애도는 타인의 세계가 끝날 때, 타인을 위해 그 끝을 내 안에 담는 것이며, 동시에 관념화, 내면화, 그리고 식민화에 저항”해야 한다. “타자를 관념화하는 내사 (introjection)가 망각의 시작 지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멜랑콜리아는 극복해야 할 질병이 아닌, 내사에 저항하는 힘이 된다.
존이 테스 프라임에게 느끼는 두려운 낯섦은 이러한 멜랑콜리아를, 자기혐오의 감정을 유발한다. 그러나 이 두려운 낯섦이야말로 테스 프라임을 ‘존의’ 테스로 만들려는 시도를 무화하고, “살아남은 자인 존에게 허락된 삶 자체”를 끊임없이 인식하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존의 삶 속에 공거(cohabitation)하는 테스 프라임은 “우리 안에 사는 ‘목격자’”이다. 존은 마조리처럼 죽음을 망각하는 망상적 위안에 의존하지도, 테스처럼 멜랑콜리아를 견디다 못해 자살에 이르지도 않는다. 대신, 그는 자신의 시선에서 바라본 테스를 내면화하고, 테스와의 기억을 회고하며, 동시에 프라임의 본질적인 두려운 낯섦을 인식하고 절망하기를 반복하면서 테스의 죽음을 애도한다.
데리다는 “타자가 타자성을 유지하면서 우리와 대화 관계에 있는 ‘생각하는 기억’을 애도의 본질”로 보았다. 따라서 데리다는 멜랑콜리아와 애도가 분리된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인식할 수 없는 것은 인식하려는 애도, 달리 말해 애도 가능성과 애도 불가능성 사이의 진동이 애도하는 텍스트의 직물을 짜고, 애도의 성공과 실패 사이의 아포리아가 길을 여는” 멜랑콜리한 애도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애도라고 주장한다. 인류 탄생 이래, 현실적으로 망자의 발언이 가능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최근 디지털 기술의 발전은 망자의 발언을, 망자의 부활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데리다가 만약 살아 있다면, 망자의 동의 없는 기계적인 디지털 부활을 경계했으리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한 디지털 부활은 오직 남아있는 자의 나르시시즘적 멜랑콜리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만 제작되고, 이용된다는 점에서, 기계적 디지털 부활은 너무도 쉽게 프로이트적 애도 작업의 완수를 위한 도구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앞서 프라임이 어떻게 “멜랑콜리아를 ‘극복’하는” 애도의 실패를 전제하는지 살펴보았다. 특히, 프라임은 남아있는 자가 주입한 ‘기억’과 새롭게 형성된 ‘지식’, 그러니까 다른 프라임과 대화하거나 인터넷에 검색함으로써 얻어낸 지식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애도의 실패와 성공을 오간다는 점에서, 데리다적 멜랑콜리한 애도를 체현한다. 존이 손녀를 테스 프라임에게 소개하는 장면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멜랑콜리한 애도를 예증하는 장면이다. 존이 테스 프라임에게 ‘손녀가 분류학을 공부하고 있다’라고 설명하자, 테스 프라임은 ‘이분법(Dichotomous)을 이용하지’라고 대답한다. 자연스럽게 분류학에 관한 대화를 이어 나가는 테스 프라임과 달리, 존은 테스 프라임이 분류학에 관한 지식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존의 시선에서 바라본 테스의 기억과 테스 프라임이 새롭게 얻은 지식의 혼합은 이전 에는 ‘말할 수 없던 것’, 즉 손녀와의 예측할 수 없는 상호작용을 존이 인식하게 한다. 존은 마치 어린아이 다루듯 테스 프라임에게 ‘입양이 무슨 뜻인지 알지?’라고 묻다가도, 이분법을 말하는 테스 프라임에게 놀라면서 애도의 성공과 실패를 경험한다. 테스 프라임은 그런 의미에서, 존의 내면에 식민화될 수 없는 테스의 이미지를 새기고, 테스의 죽음을 인식함과 동시에 존의 내면에 의해 식민화되지 않은 테스 그 자체를 기억하고, 애도하도록 돕는다.
데리다의 관점에서 프라임의 가장 큰 의미는 ‘내면화되지 않는 지속적 기억’에 있다. 프라임은 남겨진 자들의 기억에 의존하지만, 동시에 그 기억은 인간과 달리, 프라임의 내면에 잡아 먹히지 않고 영원히 그 상태를 유지한다. 인간의 기억은 꺼내면 꺼낼수록 희미해지거나 왜곡되지만, 프라임의 기억은 처음 상태 그대로 지속되며, 프라임 자신의 내면에 의해 오염될 가능성도 없다. 인간이 되고 싶은 욕구를 드러내긴 하지만, 프라임에게 인간과 같은 완전한 자아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러한 프라임의 기억을 영화에서 다양하게 변주되고 반복되는 ‘물’의 이미지를 통해 시각화한다.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은 희곡인 원작의 특성을 반영하여, 한정된 인물과 배경을 활용한, 절제된 미쟝센을 사용한다.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프라임 외에 다른 기술적인 특징은 눈에 띄지 않으며, 심지어는 기본적인 가구 이외의 소품조차 얼마 등장하지 않는 미니멀리즘적 미쟝센은 프라임과 인물들의 관계에 집중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미니멀리 즘적 집 내부와 대조적인 과잉 생산되는 물의 이미지는 영화의 주제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메타포다.
월터와 마조리의 집이자 테스와 존의 집인 영화의 주된 배경은 바닷가에 위치한다. 그래서 영화는 해변가를 걷는 테스와 존의 모습이라든가, 인물 없이 파도치는 장면이 종종 삽입하거나, 계단 옆에 걸린 파도 그림을 클로즈업하기도 한다. 토니가 해변가 달리기를 좋아했다는 마조리의 대사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데미안을 상징하는 토니가 사랑했던 바다는 영화 내내 ‘죽음’, 또는 일종의 상실을 상징한다. 마조리, 테스, 존이 사망한 이후 파도-또는 파도를 그린 그림-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죽음을 재현한 이미지인 프라임이 등장할 때는-집이 바닷가에 위치함에도- 어둡고 꽉 막힌 실내나, 또는 커튼 뒤로 희미하게 비치는 나무만이 등장한다. 하지만 세 프라임이 모인 마지막 장면에서는 거실 밖 커튼이 활짝 젖혀있 으며, 잔잔한 바닷가의 모습이 포커싱되도록 인물을 모두 같은 방향에서 촬영된 것을 알 수있다. 이는 궁극적인 영화의 주제인 죽음과 애도를 인간이 모두 사망한 뒤에도 프라임이 이어가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한 연출로 해석할 수 있다.
두 번째로 중요한 메타포는 ‘비’인데, 영화에서 딱 두 번 등장하는 폭우는 영화의 두 번째 주요 키워드인 ‘인간의 기억’과 연관성이 있다. 희미해지는 인간의 기억처럼, 비는 끊임없이 흐르고, 또 쉽게 휘발되고 만다는 점에서 인간의 기억을 상징한다. 따라서 프라임 뒤에 켜켜이 쌓이는 포근한 눈의 이미지는 인간의 기억처럼 흘러가지 않고 차갑게 냉동되어 켜켜이 쌓이는 프라임의 기억을 시각화한 것이다. 이는 영화 속 첫 번째 폭우 장면에서 존과 테스가 기에 대해 나눈 이야기와도 일맥상통한다. “되풀이될수록 희미해지는 복사본”같은 인간의 기억과 달리, 프라임의 기억은 “뇌 안의 퇴적층”처럼, 모든 기억을 원본 그대로 냉동시켜 저장 한다는 점에서 눈과 닮았다.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에서 얼마가 흘렀는지조차 알 수 없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월터, 마조리, 테스 프라임은 한자리에 모여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그들 뒤 넓은 창에는 눈 내리는 바닷가의 풍경이 있다. 켜켜이 쌓이는 눈과 파도치는 바닷가가 보이는 통창 앞에서 프라임은 데미안의 죽음을 끄집어 낸다. 유일하게 데미안에 대한 기억을 들은 월터 프라임이 데미안의 죽음을 언급하고, 데미안에 대해 알지 못했던 테스와 마조리 프라임도 월터 프라임과의 대화를 통해 데미안을 추억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특히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니 얼마나 좋아’라는 마조리 프라임의 마지막 대사는 수 세기가 지난 뒤에도 바래지 않고 타자를 기억하는 애도의 자세를 체현한다. 그러므로 세 프라임 뒤로 펼쳐진 ‘눈 내리는 바닷가’는 테스, 월터, 마조리뿐만 아니라 데미안과 존까지 프라임이 모든 ‘타자’의 죽음을 인간과는 다른 방식으로 영원히 기억하고 있음을, 서정적인 이미지로 형상화한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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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볼 줄 모르네
지난 2019년에 개봉한 영화 <나이브스 아웃>은 제작비 대비 7배에 달할 만큼 큰 성공을 거뒀다.
수상까지 이어지지 않았지만, "아카데미 각본상"을 비롯하여 주요 부문에 이름들을 올려 평단의 선택도 다르지 않음을 보여줘 속편 제작을 결정했지만, 극장이 아닌 "넷플릭스"가 되었다. - 2편과 3편의 판권만으로 4억 5천만 달러를 투자했다!
'과연, 투자한 만큼 성과도 나왔는지?' - 2편 <글래스 어니언>의 감상을 정리해 보도록 하자!어느 날, 소포로 온 수수께끼의 상자를 풀어보는 사람들은 하나의 초대장임을 알게 된다.
보낸 이는 억만장자 '마일스 브론'으로 세계적인 탐정 "브누아 블랑"을 포함해 하나 공통점들이 없는 이들을 그리스 섬의 호화로운 사유지에 초대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의 살인 게임을 예고하는데...1. 사람들은 모았으니 한 번 풀어볼까?
먼저, 전작 <나이브스 아웃>의 장점으로 꼽는 건 화려한 캐스팅이다.
끝내 악역으로 밝혀지는 "크리스 에번스"를 비롯해 "아나 데 아르마스 - 제이미 리 커티스 - 마이클 섀넌" 등. 하나의 작품에 모두 만날 수가 있다는 것부터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들었다.
이번 속편 <글래스 어니언>도 이에 못지않은 라인업을 구성했다.
"에드워드 노튼"을 비롯해 "바티스타 - 자넬 모네 - 캐서린 한" 등. 최근 작품들에서 얼굴을 비추는 배우들이 나온다. - 이외에도 "카메오"로 "휴 그랜트 - 에단 호크"가 나온다!이처럼 구색은 맞춰졌으니 준비할 건 "추리"다.
결국, <나이브스 아웃>이 시리즈로 이어나가는 데에는 "크리스 에반스" 혹은 "캡틴 아메리카"가 '비열한 양아치를 맡았다'라는 전복된 이미지가 아닌 쫀쫀하게 구성된 추리에 있다!
그런 점에서 이번 <글래스 어니언>의 추리는 어땠을까?결론부터 말하면, 전작과는 결이 달라져 약간의 아쉬움이 생긴다.
일단, 필자가 생각하는 "추리"는 입증하는 것으로 보여주거나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이에 영화는 "브누아 블랑"의 시점에 관객들을 동참시켜 단서들을 수집하고, 퍼즐을 맞춰나가기 시작한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예상하고 그렸던 <나이브스 아웃>이 맞지만, 이후 일련의 과정에서 변화되고 만다.2. 내가 몰랐던 걸까?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자세하게 말할 수 없지만, 영화는 "브누아 블랑"과 또 하나의 캐릭터의 시점을 추가해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다르게 읽히게 만든다.
어찌 보면, "박찬욱"의 <아가씨, 2016>와 <헤어질 결심, 2022>에서 각 캐릭터들의 시점으로 해석한 것처럼 말이다.
분명히, 매력적인 문체이나 "추리"라는 것을 생각하면 아쉬운 선택지안이다.앞서 말했듯이 필자가 생각하는 "추리"는 입증하는 것으로 보여주거나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결국, "플래시백"의 형태를 띠는 이야기는 보여주는 것이 되어 장황한 설명으로 이어지고 만다.
무엇보다 동기를 설명하다 보니 이성적인 추론보다 감정이 앞서나가 호불호를 낳게 만든다.물론, 해당 영화의 원제 "글래스 어니언(Glass Onion)"의 비유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직관성은 예상되었을지도 모른다.
<안티포르노, 2017>에서 유리병 입구에 갇혀 나오지 못하는 도마뱀처럼 필자 역시, 이번 <나이브스 아웃>을 과하게 보려던 것이 아닐까?
어찌 보면, 영화는 시작부터 '어떻게 봐야 하는지?'를 수수께끼 상자를 때려 부수는 "카산드라"의 모습으로 알려주었지도 모른다? 아니, 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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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MFF 데일리] 꿈은 예술에서 만난다
숲과 숲 사이 넓은 공터에서 콘서트 장면을 상상한다. 물이 발목까지 찰랑거리고, 핑크 플로이드는 저 쯤에 서고, 둥근 보름달과 별이 가득한 밤, 아마존에서 하는 콘서트. 상상만으로도 좋은지 그는 혼자 웃으며 공터를 둘러본다. 상상하는 사람 눈에만 보이는 것이 있지.
이 사람, 크리스토퍼 클락스(이하 크리스)는 진지하다. 그는 사람들이 유람선으로 쓰다 버리고 간 호화로운 배를 들여다보며 숙소로서의 가능성을 가늠하고, 로저 워터스에게 연락할 계획도 세워 본다. 아마존 시골 한구석에서 핑크 플로이드가 콘서트를? 이런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하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는 이 지역에 대안 공동체를 만든 환경운동가라고 소개되는데, 실상 영화의 절반까지 그는 그냥 여기 사는 적극적인 지역 주민처럼 보인다. 다만 학교를 세우고 보건소를 세울 수 있게끔, 관광객들을 통해 예산을 끌어오기도 하는, 외부에서 온 적극적인 주민일 뿐이다. 기술과 자연 사이에서 적당한 조화를 이루며 산다. 그건 우리 전통과도 별반 다르지 않은, 사는 곳의 지형에 기대어 사는 삶이다. 그 삶에서 그는 주민들이 직접 주체적으로 환경 변화에도 대응하고 보다 조합을 만들어가는 대안 공동체를 꿈꾸고, 그런 공동체를 기다려주지 않고 빠르게 사라져 가는 아마존을 위해 핑크 플로이드 콘서트를 꿈꾼다.
아름다운 꿈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환경적으로 취약한 지역 주민들의 삶은 스스로가 결정할 수 있는 여지보다 외부 효과가 더욱 크다. 특히 부정적 외부 효과가. 타이틀이 뜨기도 전에 이미 스쳐 지나가는 화재 장면은 이미 수없이 아마존에서 반복되고 있는 괴로운 일이다. 동물을 보호하는 생추어리도, 나무를 심고 보호하려는 사람들도, 주민들의 공동체조차도 여기서 자유롭지 못하다.
크리스가 한가롭게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어느 오후에도 화재가 일어난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들이 기인한다. 아마존 주민들의 실화나 화전부터, 밀렵과 벌채, 기후변화로 인해 너무 건조해진 날씨, 이어지는 가뭄, 개발을 우선하겠다는 정책 결정… 작게는 아마존 주민들의 생계부터 크게는 온 세계의 물욕까지, 인간의 행동 하나하나가 불쏘시개가 된다. 그 결과 아마존 주변에 사는 사람들의 숨통이 먼저 틀어 막히고 있으며, 이 행위가 계속된다면 우리 모두의 숨통이 틀어 막힐 것이다. 아마존이 지구의 허파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까. 지구상의 산소 4분의 1이 아마존에서 나온다.
크리스에게 이건 문화도 아니고 음악도 아니다. 아마존이고, 지구다. 우리의 생존이다. 아마존이 계속 아마존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과업이다. 이걸 마치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그런 과업. 그는 입바른 소리를 하는 게 아니라 당장 그가 기대어 먹고 사는 곳을 우려한다. 게다가 그게 그뿐 아니라 온 지구가 기대어 먹고 사는 곳임을 알고 있을 뿐이다.
영화는 크리스가 핑크 플로이드 콘서트를 위해 쏟아붓는 백방의 노력과 함께, 아마존 한가운데서 계속되는 그의 노력을 두루두루 보여준다. 크리스가 얼마나 사람을, 사람이 사는 이 곳을 사랑하는지를 담담히 느끼게 한다. 그리고 인간을 향한 사랑은 결국 인간을 향한 꿈이며, 인간 소외에 대해 노래한 핑크 플로이드의 음악과도 맞닿는 지점으로 느껴진다. 85분의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어느새 우리는 크리스의 꿈에 공명하게 된다.
80년대에 런던에서 데이비드 길모어를 만났다고 하면서 가능성을 타진해 보지만, 크리스와 데이비드 길모어의 상관관계는 사실상 핑크 플로이드 음악 안에서 대체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노랫말이, 노랫말에 담긴 그들의 사상이, 연결점이 되었을 것이다. 모든 예술가는 어딘가에 연결되기를 희구하며 자기만의 표현을 갈고 닦는 거니까. 크리스 또한 별반 다르지 않다. 그는 자기 삶에서 꿈꾸는 바를 예술에 담아 표현하고 싶어한다. 그는 정부에게, 대중에게, 세상에게 마땅히 들어야 할 말을 하고자 애쓴다. 그 또한 일종의 예술가처럼 보인다.
결국 꿈꾸는 자가 예술에 가 닿는다. 예술의 양면에 연결된다. 음악이나 영화는 사실 기기만 있으면 시공간을 넘어서도 재생이 가능한 요소이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닿지 않은 시공간에서 서로가 닿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 매개체는 꿈이다. 결이 비슷한 꿈은 같은 예술에서 만난다. 우리가 크리스의 꿈을, 핑크 플로이드의 음악을, 이 영화에서 만난 것처럼.
[제 20회 제천국제영화제 상영시간표]
9월 7일(토) 10:00 세명대 태양아트홀
9월 9일(월) 13:00 세명대 블랙박스 실험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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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 끝나지 않은 카산드라의 비극
주연인 캐리 멀리건이 보이지 않는 씬이 거의 없을 만큼 <프라미싱 영 우먼>은 매우 직설적인 작품이다. 딱히 다른 길로 새지 않는 영화는 가슴 깊이 사무친 한을 풀어내려는 한 여성의 처절한 복수극을 집중적으로 비춘다. 촉망받는 의대생이었던 '카산드라(캐리 멀리건)'는 가족이나 다름없는 친구 니나가 같은 과 학생들에게 성폭행당한 후 자살하자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아간다. 사건이 일어난 지 7년이 지났지만 마음속 응어리를 털어내지 못한 그녀는 밤마다 클럽을 전전하며 술 취한 여성과 섹스하려는 남자들을 응징한다. 어느 날, 학부생 시절 호감을 표했던 '라이언(보 번햄)'을 우연히 만난 캐시(카산드라의 애칭)는 그로부터 니나의 가해자에 대한 결정적인 정보를 얻고, 치밀하고 무자비한 복수에 나선다.
<프라미싱 영 우먼>이 관객을 사로잡는 방법은 다양하다. 영화 장르의 차원에서 복수자가 복수에 성공할지, 실패할지, 혹은 반전을 선사할지 여부는 예측을 적중하기도 하고 빗겨나가기도 하면서 상당한 긴장감을 안긴다. 오프닝부터 엔딩까지 빼곡히 삽입된 'Boyz', '2 Become 1', 'It’s Raining Men'과 'Angel of the Morning'과 같은 노래의 가사를 귀 기울여 들으며 카산드라의 감정선을 따라가는 것도 좋다. <데드풀>처럼 갑작스럽게 장면을 전환시키거나 <킹스맨>의 머리 폭발신을 연상케 하는 잔인함과 유머가 뒤섞인 연출과 편집을 음미하는 것도 감상 포인트 중 하나다. 하지만 <프라미싱 영 우먼>이 가장 눈과 귀를 사로잡는 대목은 따로 있다. 바로 캐리 멀리건이 연기하는 주인공의 이름, '카산드라'다.
캐시(Casey, Cassie, Kasey)로도 변형되어 사용되며 게임, 소설 및 영화에서도 흔히 등장하는 카산드라(Cassandra, Kassandra)라는 이름의 기원은 아나톨리아의 한 도시 국가, 트로이에서 찾을 수 있다. 프리아모스 왕의 딸이자 아킬레우스에게 살해된 헥토르의 누이인 카산드라는 뛰어난 미모로 예언, 광명, 의술의 신인 아폴론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녀는 아폴론에게 예언 능력을 주면 그의 사랑을 받아주겠다고 약속하지만, 예언 능력을 얻은 후 그가 자신을 떠날 미래를 보고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이에 아폴론은 그녀의 예언에서 설득력을 빼앗아 가고, 그녀의 예언은 평생 무시당할 것이라는 저주를 내린다.
이후 전해진 그녀의 삶은 문자 그대로 기구했다. 파리스가 헬레네를 납치해 트로이에 전쟁을 몰고 올 것이라는 미래와 트로이 목마가 도시를 파괴하게 될 미래를 내다보았지만 사람들은 그녀의 예언을 듣지 않았다. 고국의 멸망을 알면서도 막지 못하고 지켜봐야만 했던 그녀는 이후 그리스 군의 총지휘관인 아가멤논의 포로가 되어 미케네로 끌려갔다. 그곳에서도 카산드라는 아가멤논이 아내의 배신으로 인해 참혹하게 살해당하고 자신도 함께 죽게 될 미래를 내다보았고, 그 미래는 현실이 되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카산드라는 신화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비련의 여성 중 하나로 보인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부분은 따로 있다. 바로 그녀가 인생의 마지막을 맞이하는 순간이다. 아이스킬로스의 비극 <오레스테이아> 3부작 중 1부인 <아가멤논>에서 카산드라는 아가멤논이 아들인 오레스테스에 의해 죽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지만, 아가멤논을 포함한 그 누구도 그 예언을 주의 깊게 듣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죽음이 손으로 만질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온 순간, 그녀는 "이미 일리온의 도시(트로이)가 그토록 비참한 종말을 고하는 것을 보았고, 또 그 도시를 함락한 자들도 신들의 심판에 의해 이렇게 죽어가는 것을 보았으니, 가서 나도 용감하게 죽음을 감수하겠어요"라고 노래한다.
자신의 예언이 모두 무시당하는 일이 반복되면서 비극의 구렁텅이에 빠진 그녀는 마지막 순간에 스스로 자신의 예언을 긍정한다. 모두가 예언의 불길함을 무시하려고 할 때 그것을 긍정하고 담담히 받아들인다. 물론 이는 정해진 운명을 받아들인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리스 신화와 비극이 언제나 신의 뜻이나 운명에 도전한 인간의 파멸로 이루어졌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녀의 마지막 선택은 그녀가 아폴론을 거부했듯이 신의 저주에 (소극적으로나마) 저항하려는 의지의 표현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신화와 비극 속 카산드라의 최후를 살피다 보면 <프라미싱 영 우먼> 속 주인공이 카산드라인 것은 필연처럼 보인다. 평생에 걸쳐 자신의 모든 예언이 무시당한 그녀처럼, 캐시는 니나가 성폭행을 당한 순간부터 자신들의 말이 철저히 무시되고, 왜곡되고, 사실이 아닌 주장에 머무르는 삶을 살았다. 실제로 영화는 복수의 대상을 명확히 설정하지 못한 채 그저 클럽에서 만난 남자들에게 무작위로 분풀이를 하는 캐시를 비추는 오프닝에서 복수의 결과를 보는 이의 상상에 맡긴다. 대신 몸을 만지지 말고 바지를 내리지 말라는 캐시의 말을 남자들이 무시하는 것이나 알고 보니 술에 취하지 않은 캐시의 응징에 경악하는 남성들의 모습 그 자체를 포커스를 맞추며 그녀가 견뎌야만 했던 삶의 어둠을 역설적으로 강조한다. 이는 그녀가 처음으로 자신의 말을 들어주며 소통을 하는 라이언과 사랑을 키워 나가고, 그에게 특히 실망하고 분노한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영화 속 카산드라는 신화 속 카산드라가 걸어간 길의 뒤를 따르되, 답습하지는 않는다. 최후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결국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인물로 남아버린 과거의 카산드라는 끝내 자신의 말을 더 높은 지위에 있는 권력자들에게 관철시키지 못했다. 현재의 카산드라는 다르다. 그녀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이들, 피해자스러움을 강요하는 이들, 무조건적으로 과거를 잊고 미래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이들에게 쉼 없이 고함치고 자신의 이야기를 관철시킨다. 과거와 달리 더욱 적극적으로, 그리고 더 절박하게 행동한다.
또 과거의 카산드라처럼 예상할 수 있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지만, 현재의 카산드라는 자신의 죽음마저 확성기 삼아 니나의 복수를 완성시키는 도구로 이용한다. 의술의 신인 아폴론에게 예언의 재능을 받았지만 그것을 써보지도 못했던 과거의 자신과 달리 그녀는 의대에서 배운 기술을 활용해 자신의 복수에 써먹는다. 비극 속 카산드라가 보여준 저항정신을 이어받아 오래된 신화의 구조와 그 안에 고정된 여성상에 변화를 준다. 이렇게 영화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제목대로 미래가 창창했던 여성(Promising Young Woman)의 목소리가 묵살당했던 현실을 날카롭게 후벼 팜과 동시에 이제는 옛날과 다르다는 희망 섞인 기대를 드러낸다. 그렇기에 카산드라의 복수극은 단지 한 여성의 복수를 넘어서 오랜 기간 쌓여온 수많은 여성들의 한이 한 데 담긴 일격처럼 느껴진다.
더 나아가 <프라미싱 영 우먼>은 여성이라는 젠더의 정체성 밖에서 살아 있는 고정관념도 파괴한다. 피해자에게 피해자스러움을 강요하지 않는 연출을 선보이며, 그렇기에 메시지의 진정성은 더욱 강해진다. 니나가 당한 성폭행당하는 상황을 직접적으로 제시하지 않으면서도 그 장면의 잔혹함을 충분히 암시하면서 영화의 윤리 안에서 적정한 선을 지킨다. 과거는 접어두고 미래를 살자며 다그치는 카산드라의 어머니와 달리 카산드라의 아버지는 그녀가 온전히 자기 자신을 되찾을 수 있도록 공간을 내어준다.
하지만 카산드라의 복수를 완전한 성공이라 할 수 있을지, 트로이의 카산드라처럼 목소리를 내지 못한 채 사라지던 여성이 더 이상 등장하지 않을지에 대해서 영화는 확신을 주지 못한다. 캐시의 복수가 철저히 과거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과거의 잘못을 되돌리고 자신들의 고통을 가능한 한 많이 가해자들에게 되돌려주는 데만 몰두할 뿐, 새로운 미래를 위한 비전까지 보여주지는 못한다. 이는 애초에 단추를 잘못 끼운 그녀에게 기대할 수 없는, 그녀가 꿀 수 없는 꿈이었을지 모른다.
이러한 한계, 아쉬움, 과제와 숙제는 카산드라의 또 다른 이름, 그녀의 성인 '토마스'에 담겨 있다. 요한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의 12제자 중 한 명인 사도 토마스는 예수가 부활했다는 소식을 전한 동료들에게 "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어보고 또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라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 부활한 예수를 접한 후에는 그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신앙을 고백한다. 이 에피소드는 특정 사건에 대해 양쪽의 말을 동등하게 듣고 판단을 내릴 때 비로소 문제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음을 알려준다. 즉, <프라미싱 영 우먼>은 아직도 성폭력 피해자들의 말이 무시되고 명백히 전달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기에 갈 길이 멀다는 사실을 토마스 사도의 이름을 빌려 비판한다.
이처럼 <프라미싱 영 우먼>은 카산드라 토마스라는 그녀의 이름에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영리하게 담아낸다. 이는 이 작품이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 감독, 각본, 여우주연, 편집상 후보에 올랐을 뿐만 아니라, 에머랄드 펜넬 감독이 크리틱스 초이스와 미국 작가 조합상에서 각본상을 수상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다. 더 나아가 주연인 캐리 멀리건이 올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의 강력한 수상 후보인 이유도 납득시킨다. 이름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환상적인 연기를 보여준 그녀의 눈물과 미소에는 과거의 카산드라와 현재의 카산드라가 공유한 응어리는 물론, 미래의 카산드라가 살아갈 삶이 보다 밝고 따뜻하기를 바라는 희망과 기대가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반복되는 틀에 반복되지 않을 이야기를 담은 처절한 복수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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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궐의 암투를 목격한 맹인 침술사
그냥 일반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일반인들에게 정치는 조금은 멀게 느껴지는 일이다. 일단 자신과 가족의 안위와 배고픔을 먼저 해결해야 하고 여러 가지 상황이 조금 안정되었을 때 조금씩 정치라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누가 나라를 이끌고 있는지, 많은 정치인들이 그 안에서 어떤 암투를 벌이는지에 대해 한 번 눈이 트이면 좀 더 디테일한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 상황을 완전히 이해하기 전까지는 정치는 먼 이야기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정확히 알기 어렵다.
근대화가 되기 전, 조선시대 같은 과거의 사회에서도 정치는 계속 이어졌다. 왕이라는 군주가 나라의 대표가 되고 그 밑에 신하들이 여러 의견을 내면서 앞으로 나아갈 결정을 해 나아갔다. 여기에 왕의 가족들까지 그 정치에 참여하거나 이용되면서 왕의 가족들은 본인의사와 상관없이 아주 어린 나이부터 그 정치의 한복판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다양한 왕가의 사람들 주변에는 여러 가지 수발을 드는 신하들이 있었다 요리를 하고, 건강을 챙기고, 잡일을 하는 이들은 궁궐 안에서 다양한 일들을 보고 듣는다. 그들이 정치에 직접 참여할 수는 없었지만 일반 백성에 비해서는 나라가 돌아가는 상황을 비교적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우연히 궁궐에 들어간 맹인 침술사의 이야기
영화 <올빼미>는 어느 순간 궁궐에 들어갈 기회를 잡은 맹인 침술사 경수(류준열)의 이야기를 담는 영화다. 경수는 앞을 못 보는 맹인이지만 좋은 침술 능력으로 아픈 동생의 약값을 벌고 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그는 어의가 되어 궁궐에 들어가면 동생의 약을 계속 구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길 것으로 생각하고 궁궐에 들어갈 기회를 엿본다. 그러다 궁궐의 어의 이형익(최무성)의 눈에 띄어 궁궐에서 일하게 된다. 그 안에서 좋은 침술 덕에 왕가 사람들을 치료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청나라에서 돌아온 소현세자(김성철)와도 만나게 된다.
영화는 경수와 소현세자가 친해지는 계기를 보여준 이후, 소현세자가 독살당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영화적 긴장을 높인다. 사실 경수는 밝은 곳에선 거의 볼 수 없지만 어두운 밤에는 희미하게나마 앞을 볼 수 있다. 그는 어두운 밤 소현세자를 누군가 독살하는 모습을 본 목격자다. 영화는 이렇게 그가 앞을 조금이나마 볼 수 있다는 특성을 잘 활용해 어의 이형익을 비롯한 왕실 사람들과 대면할 때 손에 땀을 쥐고 만든다.
이 영화에서 중심이 되는 또 다른 인물은 바로 인조(유해진)이다. 인조는 아들 소현세자가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기뻐하는 모습보다는 불안한 모습을 더 보인다. 그가 가진 불안감은 그의 몸을 조금씩 마비시키며 올바른 판단을 하고 있는지 의심하게 만든다. 아버지로서 자신의 아들조차 청나라에 포로로 보내야 했다는 불안함과 자신도 희생될 수 있다는 두려움은 그가 올바른 정치적 판단을 할 수 없는 환경을 만든다. 인조는 언뜻 나쁜 결정을 하지는 않을 듯 보이지만 그의 진짜 결정과 진짜 모습은 영화 후반부에 완전히 드러난다.
짜임새 있게 쌓아가는 영화적 긴장감
영화 속에서 침술사 경수는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왕실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암투를 제대로 목격한다. 그저 자신의 가족을 위해 어의가 되려고 했던 경수는 왕실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몰랐을 정치적인 일들의 한복판으로 들어가게 된다. 태어나면서부터 정치적 운명 속에서 살아가는 소현세자를 보고 소현세자의 아들의 고통까지 목격한 그는 스스로 정치적인 변화를 위해 본능적으로 움직이게 된다.
경수라는 인물과 영화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대부분은 상상에 불과하지만 평민이 우연히 왕실에 가게 되고 그곳에서 정치적인 상황 속으로 빠져드는 모습을 꽤 설득력이 있다. 영화의 후반부와 마지막은 너무 긍정적이고 편하게 결말을 맺고 있지만 주인공 경수가 서서히 암투 속으로 빨려 들어가 스스로 주도성을 가지게 되는 과정이 무척 흥미롭게 그려진다. 무엇보다 맹인이지만 밤에는 어느 정도 볼 수 있다는 설정을 잘 활용해 극적인 긴장감을 극대화시키고 있다.
인조 역할을 맡은 유해진은 굉장히 불안하고 유약해 보이지만, 어느 순간 아주 무서운 눈빛으로 변해 정치적 암투에서 이기려는 모습도 보여준다. 아버지로서, 한 인간으로서 동질감을 느끼게 하는 얼굴과 두려워서 피하고 싶어지는 얼굴을 번갈아가며 보여주게 되는데, 그 연기가 어색하지 않고 무척 실감 나게 표현되었다. 맹인 경수의 연기도 무척 좋다. 보일 때와 안 보일 때를 잘 구분해서 연기하고 있으며 특히나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보일 때, 남들 앞에서 안 보이는 것처럼 연기하는 모습이 무척 훌륭하다.
영화의 서사는 평민이 우연히 왕실에 들어가 정치적 상황에 참여하게 되는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인공 경수가 그 암투의 한복판으로 빠져들어가는 모습이 무척 긴장감 있게 보인다. 가지고 있는 재료들을 훌륭하게 활용하며 영화의 하이라이트에서 그 긴장감을 극대화시킨다. 다소 작위적으로 느껴지는 결말이 아쉽지만 영화가 앞부분에 만들어놓은 좋은 이야기는 그 단점을 만회하기에 충분하다. 영화의 좋은 완성도는 이번 영화가 첫 연출작인 안태진 감독의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만든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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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쿵푸팬더는 퀴어 영화인가?
여전히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등장으로 평가되는 1편, 매력적이고 유머러스한 빌런이나 주연들 간 깊어진 친밀감에 정들었던 2편. 그러나 많은 시리즈물이 그러하듯 <쿵푸팬더> 역시 편수가 늘수록 초기 영광을 따라잡지 못하는 듯하다.
생각해보면 쿵푸팬더 시리즈의 전략은 언제나 간단하고 명확했다. 주인공만큼이나 매력적인 빌런들에게 주인공이 해내지 못하는 걸 죄다 맡겨버리는 식으로 균형을 맞추는 것.
주인공 포에게 극단적으로 발랄한 성장 서사를 부여해 기존의 성장형/먼치킨 히어로 영화들과 사뭇 다른 분위기를 냈지만, 그 부작용으로 무거운 원숙미가 극단적으로 부족해진다. 포는 입양아라는 사실도 생각 외로 잘 받아들이고 새로 찾은 친아빠와도 1초 만에 친해지는, 사실상 대디 이슈가 없어 더 드문 남성형 히어로다. 포를 대신해 타이렁과 솅 공작의 애증 어리고 가슴 아픈 개인사가 그 무게를 짊어진다. ‘기’를 운운하며 이야기를 포의 뿌리가 되는 팬더 마을과 영계까지 끌고 간 3편부터 약간 길을 잃은 느낌이긴 했지만 그나마 우그웨이 대사부의 숙적인 카이를 등장시켜 ‘사연 많은 빌런’의 명맥을 이어갔다.
그러니 4편의 가장 큰 문제는 빌런의 존재감이 너무나 약하다는 점이란 데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카멜레온의 속성을 차용한 디자인까지는 기존의 맹수들과 달랐던 2편의 우아한 솅 공작을 떠올리게 해 기대가 컸지만, 구멍이 많아도 너무 많은 카멜레온의 백그라운드 탓에 관객은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카멜레온은 한미하고 천한 출신과 여자라는 점, 그리고 ‘작은 몸집’ 때문에 쿵푸 수련원들이 자신을 받아주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마스터 시푸와 오인방의 맨티스가 있는데 정말로 작은 몸집이 문제가 될 수 있는가? 타이그리스와 바이퍼가 있는데 (물론 성비는 또 당연하게 구색 맞추는 척만 했지만) 여성으로서 쿵푸에 도전하지 못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게다가 그가 영계에서 불러낸 전작의 빌런들 중에는 분명 의미없이 소진된 캐릭터들이 있다. 일찍이 제 입으로 “쿵푸 실력으론 대적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부족한 화력을 메꾸기 위해 제국주의 시작점의 상징인 대포를 택했던 솅 공작이나, 포와의 마지막 싸움으로 말미암아 영혼_삭제_진짜삭제_휴지통에서삭제 된 줄 알았던 카이가 ‘빌런 쿵푸 마스터’로 재등장하는 건 의아함만을 남긴다.
‘동아시아계’ 감독을 기용해 시리즈 자체의 전제가 내포한 오리엔탈리즘의 한계를 극복하려던 노력도 무화되고, 포의 새로운 여정은 마치 바이킹처럼 배를 타고 먼 이국으로 나아가는 침범의 궤적을 따른다. 심지어 항구에서의 출항이 가능할 것인지 아닌지를 두고 쉽게 납득되지 않을 정도로 긴 러닝타임을 할애하는데, 이 이야기 구조는 전형적인 호메로스식 오디세이의 전통을 따른다(아가멤논은 딸 이피게네이아를, 오디세우스는 젊음 20년을 바치고서야 ‘출항’할 수 있었다).
그간 할리우드에서 뒤늦게 주목받기 시작한 아시안 배우들이 대거 기용되어 주연 자리에 앉긴 했지만, 결국 4편의 전반적인 얼개는 앵글로 아메리칸 관객들에게 가장 익숙한 설화로 ‘회귀’한 것이다.
아쉽고 부족한 개연성을 채워주는 건 이 영화를 퀴어 애니메이션 영화로 읽어볼 수 있다는 상상이다. 어쩌면 1편부터 차근차근 전개되어 온 퀴어 코드는 4편에서 포의 두 아버지들 - 양부 국수 장인 거위 핑과 살찐 판다 친부 리 아저씨 -의 기이한 동행으로써 드디어 만개하는데, 이들의 ‘함께 함’에 대한 포의 자연스러운 수용은 어쩐지 게이 부부가 사랑으로 키운 아들의 반응을 연상시킨다.
생각해보면 쿵푸팬더엔 처음부터 애들 보는 영웅 애니메이션과 사뭇 다른 무언가가 존재했다. 시작점에선 나 역시 자각 없는 초등 꼬꼬마였기에 ‘여전사’ 타이그리스에 기이할 정도로 끌리고 동일시하려는 나 자신을 좀 민망하게 생각했던 것도 같지만. 16년 지나 추억의 애니메이션에서 ‘동족의 흔적‘을 비로소 발견했다고 느낀 퀴어 당사자로서 기쁘게 읽어낸 네 가지 증거들로 이 시리즈의 퀴어함을 논증해보고 싶다.
1. 쿵푸팬더에는 명시적 러브라인이 없다.
아픔을 딛고 성장해 마을, 국가, 세계의 영웅으로 차츰 몸집을 불려나가는 영웅의 서사엔 언제나 그의 애인(들)이 있다. 순애보거나 아니거나의 차이만 존재할 뿐. 에반게리온에도 이누야샤에도 배트맨에도 있는 사근사근하지만 강단 있는 여성 애인과 결정적일 때 터프한 남성 영웅의 조합이 <쿵푸팬더>엔 없다. 오히려 시종일관 터프한 타이그리스와 순둥하고 멍청한 포의 역전적 조합이 있긴 하지만, 2편에서 크레인의 입을 떡 벌어지게 한 그 둘의 포옹을 ‘사랑의 시작점’으로 해석하기엔 무리가 있다. 이 포옹은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다고 오해되던 타이그리스가 ‘도무지 진지할 수 없’는 조증 같던 포의 성장과 우정을 그리기 위한 장치이기 때문이다. 포의 슬픔과 고뇌를 타이그리스가 진심을 담아 위로하며 서로의 영혼을 제대로 응시하기 시작한 장면이지, 안젤리나 졸리와 잭 블랙이 탈 쓰고 연기하는 동물들이 서로의 페로몬을 감지한 장면이 아니다.
게다가 ‘접촉’을 ‘독점적 연애’의 시작점으로 보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인 헤테로-모노아모리-이성애적 세계관이 <쿵푸팬더>의 길거리엔 부재한다.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부부는 가끔 목격되지만 그들 사이 손잡거나 입 맞추는 애정행각이 단 한 번도 없고, 젊은/미혼의 커플로 보이는 이들이 없고, 실수로 서로를 터치했다가 얼굴 붉히며 가까워지는 클리셰적 썸의 단계가 없단 뜻이다. 아주 친밀해 보이는 동종의 동물 주민들의 젠더는 대부분 판별되지 않는다. 일단 크기부터 그들이 어른인지 아이인지 구분할 수 없고 서넛 이상의 친구 혹은 파트너들이 군집을 이뤄 몰려다니는 경우도 많다. 이처럼 여러 ‘분류’를 위한 경계는 의도적으로 흐려져있다. 반대로 모든 성애적 관계가 너무 표백된 탓에 이 풍경을 거의 무성적/무성애적 마을이라고 멋대로 희망회로 돌려 해석해도 좋을 지경이다.
헤테로 이성애 외의 모든 것을 비가시화시키는 미국발 애니메이션의 전통에 빗대어보자면 1편부터 꾸준히 모든 성애를 비가시화시켜온 쿵푸팬더의 때이른 시도는 가히 혁명적이다. 2024년에 이르자 4편까지 나온 장수 시리즈는 도리어 ‘가장 PC한’ 그림을 ‘미리’ 준비해둔 선구안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만 같다.
2. ‘커플’의 부재에 비해, ‘아빠들’ 사이의 퀴어한 동거/동행은 점점 더 도드라진다.
거위 핑과 팬더 리의 관계는 3편 막바지의 화해를 이룰 때부터 조금 묘했고, 4편 등장부터 본격적으로 묘해지기 시작한다. 먼저 포는 양부와 친부를 통틀어 ’dads’라고 애정을 함뿍 담아 부르는데, 영미권 영상 콘텐츠에 익숙한 이라면 이 복수형 호칭이 그간 지칭해온 시트콤 속 나이 든 게이 커플을 즉각 세 쌍 이상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한번 흠칫하고 이들이 영위하는 일상이 좀 과하게 노부부 바이브라는 데에서 두 번 흠칫하게 된다. 핑은 여느 때처럼 국수를 만들어 팔고, 리는 이걸 조금 돕긴 돕는데 철없고 느려 큰 도움은 되지 못하는 듯하고. 핑은 리를 면박주고 불안해하며 포를 걱정하고, 리는 핑의 호들갑을 유들유들 달래며 별일 없을 거라 하고. 당연히 스킨십은 없지만, 왜인지 길거리의 토끼 혹은 돼지 커플이 훨씬 더 담백해 보일 정도로 핑과 리 사이 거리감이 박살나있다.
슬슬 대놓고 장르 전환을 시도하겠다는 건가 아니면 내가 이제 너무 썩어버린 동성애꾼인가 눈을 의심케 하는 평화로운 국수 가게 시퀀스가 지나고 나면 ‘아빠들’은 점점 더 의뭉스러운 결정을 내린다. 바로 다 큰 아들을 여전히 공동 걱정, 공동 양육, 공동 구원하기 위해 멀고 위험한 여정을 떠난다는 것. 길 위에서 그들은 서로를 구해주고 투닥대며 오롯이 둘만의 시간을 쌓아간다. 포에 대한 애정으로 결속된 대안 가족이지만 이제는 포 없이도 포를 생각하며 즐거운 2인 관계를 유지하는 아빠들. 항구 위 벼랑의 술집에서도, 주니퍼 랜드의 위험천만한 성벽 위에서도 아빠들은 아들만큼이나 서로를 챙기는데, 역시 최소 50년을 함께 한 파트너 같은 신뢰와 과감함으로 빚은 액션이 반복된다.
포와 젠만큼이나 핑과 리의 버디무비가 이번 영화의 주요한 플롯이고, 두 아빠에게 주어진 스포트라이트와 할애된 시간이 주인공 못지않다는 걸 생각하면, 혹시 이 둘의 (변화해가는) 관계성에 관객이 그만큼 주목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닐지?! ㅎㅎ(제발요)
3. 영화의 사제 관계는 언제나 사제 이상의 내밀함과 애틋함을 내포한다.
누구나 1편의 최고 명장면으로 꼽을 만한, 타이렁과 시푸의 벼락으로 시작해 마지막 일격으로 끝나는 비극적 재회. 그 시퀀스에서 타이렁은 몇십 년간 지하 감옥에 묶여 저주했다던 스승을 때리며 거의 눈으로 핥고 있고, 시푸는 갓난아기부터 먹이고 키운 ‘그 애’를 힘껏 사랑했던(하는) 기억을 떨칠 수 없어 치명타를 모조리 맞아주며 애달파한다. 쓰러진 시푸가 후회를 말하자 타이렁은 아주 크게 흔들리고, 바로 다음 순간 타자의 개입이 없었다면 시푸를 거의 용서할 뻔한다.
유서 깊은 중국 무협지들이 웬만한 BL 뺨을 후드려갈기는 남남 간의 우정 아닌 사랑 같은 우정을 얼마나 고전적으로 묘사했는지, 그 명맥을 이은 근현대 작가들 역시 예술적으로 섹슈얼하고 질척이는 동성의 나이차 많은 사제 관계를 놓지 않고 무협BL이란 혼종까지 만들어낸다. 그리스에 사제-스폰서-유사 부자 관계를 맺는 미소년과 중년 남성이 있었다면 중국에는 무협 게이가 있었던 셈인데, 쿵푸팬더의 요상하게 질척이는 사제/유사 부모 관계는 이 두 갈래 문화의 영향을 모두 받았기 때문일 거라고 혼자만의 사교적 해석을 해본다.
카멜레온과 젠, 젠과 한의 삼각관계 역시 만만치 않다. 스토리텔러의 역량이나 시간 배분에 조금 부족함이 있었을 뿐 두 스승 역시 ‘악한 짓을 영원히 같이 해줄 줄 알았던 너’에 대한 집착을 놓지 못하고 제자 젠에게 못마땅함을 표한다. 젠은 둘 다에게 죄책감을 포함한 복잡시러운 감정을 품고 있고 그래서 자주 머뭇거린다. 첫 편에서 시푸와 타이렁이 보여준 아주 끈적하고 집착적인 애증이 4편에선 카멜레온과 젠과 한을 통해 재연된 것이다.
특히 카멜레온과 젠을 통해, 몇천 년 간 남성 중심적이었던 무술 세계와 그에 대한 문헌/미디어 묘사에서 한 발자국 나아가, 또한 남남 간 호모섹슈얼한 우정의 배타성과 상투성에서 벗어나, 여성과 여성의 상호 협력/배신/질시와 애착을 다루려 했다는 점을 조금 더 높이 쳐주고 싶다. 16년 된 시리즈가 업데이트를 멈추지 않고 (남의 나라 거 죄다 베껴왔으니 응당 그래야겠지만) 최선을 다해 올바른 트렌디함까지 챙긴 모범 사례로 볼 수 있겠다.
4. 한이라는 젠더뉴트럴한 캐릭터가 등장한다.
<쿵푸팬더>의 주연급 동물들은 대체로 성별이 잘 구분되는 외모/목소리 지표를 가졌지만, 젠의 길거리 스승이자 좀도둑 소굴의 왕인 아르마딜로 한은 도통 성별을 패싱할 수 없는 외관이다. 때문에 목소리나 젠과 맺는 관계를 보고 여성 인물로 어림짐작했다. 이 캐릭터의 성우가 키호이콴이라는 사실을 읽기 전까지는… 영화 보는 동안엔 아주 잠깐의 혼란 끝에 그를 중년 여성으로 추측하곤 카멜레온-젠 다음 하나의 지렛대를 더 끼워 넣어 레즈비언 삼각관계;로 냠냠쩝쩝 해독할 결심에 신나 있었는데 이럴 수가… 하지만 결론적으론 키호이콴의 높고 짹짹대는 목소리가 한이라는 캐릭터의, 이 영화의 (조금은 허술한) 텍스트를 풍부히 하는 데에 무척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시리즈를 통틀어 가장 수수께끼 같은 젠더/섹슈얼리티의 소유자인 한은 1편부터 꾸준히 거슬렸던 몇몇 여성 캐릭터의 디자인에 대한 아쉬움을 어느 정도 상쇄해준다. 바이퍼의 속눈썹과 머리 꽃 장식, 케이트 허드슨이 연기한 3편 팬더 마을의 메이메이의 전형적인 꾸밈이나 ‘여성스러운’ 모션들, 이번 4편의 젠이 보여준 - 어느 정도 <주토피아>의 닉&주디를 반분해 섞은 듯한, 그러나 - 허리만은 잘록하다거나 역시 속눈썹은 길다든가 하는 전형적인 여성 신체 이미지의 재현. 더 나아간다면 루시 리우와 안젤리나 졸리라는 할리우드의 대표적 아이콘들이 그간 고수해온/기대받아온 이미지(그들이 이 시리즈에 0순위로 캐스팅된 이유기도 한)를 조심스럽게 파쇄하는 가능성으로 이 젠더플루이드적 존재를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 한의 종잡을 수 없는 매력적인 목소리는 아콰피나가 녹음한 젠의 허스키하고 낮은 목소리와 퍽 잘 어울리기도 한다.
물론 <쿵푸팬더> 시리즈가 대놓고 ‘퀴어를 긍정’한다거나 정치적으로 정교하고 선명한 의도를 가진 영화는 아니다. 다만 이 시리즈는 (마치 일틱이란 ‘칭찬’ 들으면 어쩔 도리 없이 안도하는 퀴어들처럼) 은은하게 또 자연스럽게, 퀴어를 퀴어같지 않게, 그냥 섞여든 존재로 보이게 만드는 데에 열심이라고 느꼈다. 정신 산만하게 만드는 말재주와 푸짐하게 스크린 반 이상을 채우는 비주얼이 장점인 포가 제공하는 화려한 액션에 넋놓다 보면, 달리는 포 옆에서 손잡고 걸어가다 깜짝 놀라는 선량한 돼지 주민 1&2가 둘 다 남자로 패싱되는 차림새든 말든, 내가 얼마나 잘해줬는데 네가 날 버렸녜 어쨌녜 서로 지지고 볶고 울고 짜는 젠더리스한 조연들이 연인보다 훨씬 점성 높은 애착을 주고받든 말든 별 상관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건 정말로 별일이 아니라는 아주 은근한 암시. 이 시리즈의 역할은 어쩌면 딱 거기까지인 것 같다. ‘쿵푸’와 ‘기’라는 중국사적으로도 소중하고 두께가 엄청나기도 한 문화적 정신적 유산을 그냥 할리우드식 ‘귀여운’ B급 성장형 히어로 클리셰 액션 뽕빨물로 한데 섞어버린 것처럼, 퀴어 역시 적절한 농도의 - 우정 그리고 (공동) 양육과 거의 구분할 수 없는 - 당연한 사랑과 애착으로 자리 잡고 ‘일반’과 함께 한데 섞여 있다.
혹은, 머나먼 이국에서의 문제/악당을 처리하고 ‘내 영토’로 돌아와 새로 찾은 완전한 이방인인 후계자에게 권좌를 물려준다는 4편의 작법을 고려한다면, 이 이야기의 퀴어함은 20세기 반역적 퀴어함 혹은 21세기 힙하고 소비적인 퀴어함보다는 그리스 신화 시기의 남성애에 여전히 더 가까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이건 내게는 다같이 끓여먹는 은은한 퀴어 단추수프(특: 뭐가 들어갔는지 넣은 사람도 모름)... 은은하게 주입하는 퀴어 조기교육처럼 느껴지는 애니메이션이었다. 그래서 허술하더라도 곱씹을수록 더 귀엽게 생각되는 면이 있었다. 쿵푸팬더 5는 제작이 불분명하다고 하고 아직까지 공식적으로나 희망적으로나 결정된 건 아무것도 없다고들 한다. 오래된 시리즈의 오래된 팬으로서 이제 여기서 그만해도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을 - 실은 3편부터 - 계속 품고 있기는 하지만. 만약에 이 모든 추측, 자기최면, 설득, 착즙이 단 5%라도 사실과 맞닿아있다면, 이 말썽쟁이 시리즈가 덜그럭덜그럭 순조롭게 진행돼서 속편을 가져와줬으면 좋겠기도 하다. 유소년기 퀴어에게 혁신이었고 어쩌면 자각의 출발점 중 하나였던 영화가 생명력을 쥐어짜내서 나아가는 ‘진짜 끝’을 좀 더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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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들만은 꼭 보자! 프랑스 영화 추천 Top 5 🎞💙
안녕하세요 YELM 입니다!
자타칭 프랑스 영화 덕후로서, 블로그에서 한번도 '프랑스 영화 추천' 글을 쓴 적이 없어 이렇게 포스팅하게 되었습니다!
단순 추천이다보니.. 하나하나 연출과 감상에 대해서 말할 수는 없어서, 간단하게 코멘트 정도 달아 놓았습니다.
더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시면 , 제 블로그에 올라와있는 리뷰글을 봐주세요!
(모든 영화들이 올라와있지는 않지만..)
순서가 순위는 아니라는 점 알아주세요!
네 멋대로 해라
À Bout De Souffle
첫 번째로 추천해드리는 작품은, 장 뤽 고다르 감독의 "네 멋대로 해라" 입니다.
프랑스 누벨바그 거장인 고다르 감독의 대표작 중 하나인 만큼, 프랑스 영화에 관심을 갖고 계신 분들이라면 꼭 한번 쯤 보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씬과 씬 사이를 건너뛰는 "점프컷"의 활용과 극중 벨몽도가 카메라를 바라보며 말을 하는 등 당시에는 획기적인 연출 기법들이 사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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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하실 때는 패트리샤의 말과 행동에 주목해서 보시는걸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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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_네이버
영화 속의 갱으로 등장하는 험프리 보가트를 선망하는 좀도둑 미셸 푸가드(Michel Poiccard alias Laszlo Kovacs: 쟝-뽈 벨몽도 분)는 차를 훔쳐 달리다가 무의식적으로 차안에 있던 총으로 경관을 죽이고 쫓기는 몸이 된다. 그러던 중 어느 모델의 지갑을 훔치다가 니스에서 만난 적이 있는 미국에서 유학 온 패트리샤(Patricia Franchini: 진 세버그 분)를 다시 보게 되고 함께 도망 갈 것을 제의한다.....
내 여자 친구의 남자 친구
L'Ami de mon amie
또다른 프랑스 영화계의 거장 에릭 로메르 감독의 작품 중 하나인 '내 여자 친구의 남자 친구' 입니다.
가장 일상적인 이야기들로 영화를 만드는 로메르 감독의 특징이 잘 드러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친구사이 엇갈린 사랑과 우정을 다룬 이야기..
흥미롭지 않으신가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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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는 로메르 감독의 영화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프랑스' 그 자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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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
파리 근방 소도시, 시청에서 일하는 블랑슈는
구내식당에서 새로운 친구 레아를 사귀게 된다.
취미 생활을 함께하며 빠른 속도로 친해진 두 사람.
어느새, 깊은 고민까지 나누는 사이가 되고
긴 연애 공백기로 외로워하는 블랑슈를 위해
레아는 자신의 남자친구의 친구와
자연스러운 만남을 주선하기로 마음먹는다.
야닉
Yannick
최근에 나온 프랑스 영화 중 당연 가장 획기적이고 인상깊은 영화라고 말할 수 있는 "야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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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식 유머의 총집합..
1시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은 감독이 관객들에게 메세지를 전달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연극에 진심인 남자, 이 시대의 몰리에르를 꿈꾼 남자 "야닉"이 궁금하시다면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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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
지루한 코미디 연극의 상연 도중, 야닉은 갑자기 일어나 연극을 중단하고 훼방을 놓기 시작한다.
미치광이 피에로
Pierrot le fou
고다르 감독의 또 다른 대표작 "미치광이 피에로"는 미쳐버린 사랑을 다루고있습니다.
고다르에 대해 더 알고 싶고, 어떤 프랑스 고전영화를 봐야할지 고민되실때 보시면 좋습니다.
고다르 영화답게 색감이 아름답고, 약간은 충동적인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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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
페르디낭은 부유한 이탈리아 여자와 함께 살고 있는 전직 스페인어 교사이다. 어느 날 딸의 베이비시터로 마리안이라는 아름다운 여자가 집으로 찾아오고, 둘 사이엔 미묘한 분위기가 흐른다. 부인과 함께 초대받은 리셉션에서 페르디낭은 사람들의 얼굴에 케이크를 던진 후, 마리안과 함께 모험의 길을 훌쩍 떠난다.
라빠르망
L'appartement
개인적으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재밌게봤던 영화라서 추천드립니다.
사르트르가 그랬죠, "인생은 B와 D사이의 C"
결국 Choice 선택이 우리의 인생을 결정합니다.
사랑을 위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막스가 하는 선택들에 집중해서 감상하시면 좋은 영화.
"라빠르망"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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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
“정말 특별한 여자를 만났어!” 구두 가게에서 일하는 평범한 청년 ‘막스’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연극 배우 ‘리자’를 처음 본 순간 운명적 사랑을 직감한다. 결국 연인 사이가 된 두 사람은 행복한 시간을 공유하지만 어느 날, 홀연히 사라져버린 리자 때문에 갑작스러운 이별을 맞이하게 된다. “왜 아무 말 없이 사라졌는지 궁금해. 리자는 왜 날 떠났을까?” 리자를 향한 그리움을 묻어둔 채 새로운 직장, 새로운 여자친구와 평범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막스. 우연히 들른 레스토랑에서 리자의 흔적을 발견하게 되면서, 막스의 일상은 다시 한번 흔들리기 시작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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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제 추천작 5가지를 소개해드렸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연출이나 감상에 대해 말을 할 수 없고, 스포일러때문에 영화 내용에 대해 상세하게 말씀드릴 수 없어서 설명이 약간 간소하지만,
그래도 제 추천작 코멘트 보시고 궁금한 작품 감상해주시면 너무 좋을 것 같아요!
다음에도 다른 추천작들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20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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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파이더맨 톰 홀랜드의 마블 스포일러 모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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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영상은 산돌구름에서 폰트를 지원 받았습니다”
2020. 04. 09 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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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콰이어트 플레이스 2' 관람 전 필히 숙지해야 할 리뷰
영화 흥신소 - 알고보면 쓸데없이 재밌는 영화리뷰
입도 뻥끗 못하는 가족들의 생존기 '콰이어트 플레이스'를 알아보자
'낮말도 괴물이 밤말도 괴물이 듣는다는 마을'
자그마한 소리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예민보스 덕분에
사는게 사는게 아니라는 가족과연 이들은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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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버즈 라이트이어> 메인 예고편
[토이스토리] 제작진이 선사하는 무한한 우주 저 너머 함께라면 두려울 것 없는 드림팀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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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헝거> 티저 예고편
만약에 ?손금을 바꾸면 우리도 바뀔까?? 내가 아닌 내가 되고 싶었던 우리의 성장통 [헝거] 티저 예고편 대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