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2025-03-20 08:08:44
여성국극을 이어가겠다는 처연하도록 결연한 의지
영화 〈여성국극 끊어질듯 이어지고 사라질듯 영원하다〉
여성국극을 이어가겠다는 두 예술가의 처연할 정도로 강렬한 의지가 일렁이는 이 영화에서, 전반부의 한 장면과 후반부의 한 장면은 데칼코마니처럼 포개진다. 3세대 여성국극인 박수빈과 황지영은 여러 곳을 다니며 여성국극을 비롯해 판소리 등을 공연한다. 시설을 갖춘 공연장뿐 아니라 민속촌, 복지관, 지역 축제 등 무대는 다양하다. 종종 민망한 순간이 생긴다. 뭔가 볼거리가 있나 싶어 스윽 들어왔다가 이내 발길을 돌리는 관광객이나 축제 참여자들은 공연자를 머쓱하게 만든다. 무대를 준비하는 자와 관람하는 자 사이에 열정의 불균형이 심각하다는 것은 두 사람의 예술 활동이 그리 녹록치 않다는 의미일 터다.
두 사람의 공연장은 일본 여성가극단의 공연장과 극적인 대비를 이룬다. 2층으로 된 전용 무대를 가진 일본 여성가극단은 탄탄하게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데, 이 무대를 관람한 두 사람은 무언가를 이어나가는 양국 예술가 사이의 커다란 격차에 부러움을 느낀다.
영화의 후반부는 일본 여성가극단 공연장과 비슷한 규모의 무대에 두 사람이 1세대, 2세대 여성국극 레전드를 모아 함께 공연을 올리기까지의 여정을 담아낸다. 어느 해 저무는 바닷가에 앉은 박수빈, 황지영의 모습에 더해지는 박수빈의 내레이션처럼, 사라질 위기의 여성국극을 ‘3년만 더 해보자’는 다짐을 더 길게 연장하기 위한, 또 다른 시작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한 공연이었다.
두 사람이 연출자를 섭외하고, 여성국극 레전드 선배들을 만나고, 그들의 서로 다른 의견과 작품 해석을 어렵게 조율하고, 관객과 후원자를 모집하기 위해 접대하는 모습은 처연할 정도로 결연하다. 노래방에서 자신보다 한 세대 높은 (대부분은 남성인) 어른들과 술을 주고받고 노래를 부르며 어떻게든 공연을 성황리에 꾸리려 노력하는 박수빈의 모습이 특히 그렇다. 이 모습은 우리가 ‘예술가’를 상상할 때 쉬이 떠올리는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모든 예술에는 무대 위의 아우라를 가능케 하기 위한 질척거리는 현실이 있기 마련이다. 불콰한 얼굴로 맞은편의 사람들에게 호소하고 설득해내려는 박수빈의 모습이 강렬하게 강인시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기어이 그토록 부러워하던 일본 여성가극단의 공연장을 한국에서 여성국극으로 재연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한다. 93세 배우와 93년생 배우가 함께 무대에 올라 여성국극의 명맥이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라는 두 사람의 의지를 선배, 관객들과 함께 증명해 보이는 것이다. 두 사람이 운영하는 여성국극 단체가 한 지역 예술의전당에 상주 단체로 자리 잡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이 영화의 결말 역시 이 연장에 있다.
1950년대 전성기를 누린 여성국극은 여성들만으로 무대를 꾸린 무대 예술로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전쟁 이후 가부장적 젠더 질서가 훼손된 틈새에서 피어난 예술로 ‘남자 같은 여자’들이 연기한 남역이 특히 인기를 끌었다(영화가 보여주듯이, 오늘날 예술의전당 여성국극 오디션에서도 지원자들은 대부분 남역을 원한다). 이를테면, 2세대 레전드 이옥천이 짧은 머리로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고 중성적인 목소리로 이 영화에 처음 등장할 때 뿜어내는 젠더 위계를 위반하는 미학을 예술 장르로 만들어낸 것이 바로 여성국극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성국극은 1960년대가 되며 빠르게 인기를 잃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여성국극을 연구한 몇몇 논문이 말하듯이, '가부장적 자본주의 국가' ‘초남성주의적 발전주의 국가’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여성국극 배우들과 그 팬들이 형성한 젠더 역동성이 더 이상 사회적으로 용인되기 어려워졌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다시 남성이 주체가 되어 근대와 미래를 열어가려는 사회, 여성에게 ‘본연’의 역할로 회귀하기를 요구하는 사회에서 여성국극이 설 자리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성국극이 처음 나온 지 80여 년이 훌쩍 넘은 지금, 그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젠더 질서가 재편되고 있는 지금이 어쩌면 여성국극의 새로운 계기가 되어줄 수도 있지 않을까. ‘전통도 꿈꾸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는 박수빈의 포부가 새로이 펼쳐질 계기 말이다. 〈정년이〉 등으로 다시금 환기된 여성국극에 대한 관심이 박수빈, 황지영의 간절함과 만나 '끊어질 듯 이어지고 사라질 듯 영원한 것'보다는 조금 더 힘 있는 방식으로 여성국극을 이어갈 계기가 되길 바란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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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셋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쿵푸팬더4> 100만 돌파!
하지만 전주에 비해 주말 관객수가 감소했는데요.
차주 <범죄도시4>의 개봉으로 박스오피스 순위는 큰 변동이 있을것으로 보입니다
<쿵푸팬더4>가 주말 박스오피스 1위를 지켜냈습니다. 하지만 1주 차 보다 관객 수가 크게 감소하며 간신히 정상을 지켜낸 것으로 보입니다. 2위는 1,178만 명을 달성한 <파묘>가 차지하였고, <남은 인생 10년>이 범상치 않은 흥행세를 보이며 3위를 기록했습니다. 마동석 주연의 <범죄도시4>가 개봉하는 오는 24일부터 박스오피스가 크게 변동될 것으로 전망됩니다.
A24 작품 중 최고 오프닝 스코어를 기록한 <시빌 워>가 2주 차에도 1위를 지켜냈습니다. 납치된 ‘발레리나 뱀파이어 소녀’의 저택 탈출 호러를 그린 <애비게일>이 2위, <고질라 X 콩: 뉴 엠파이어>가 누적 수익 1억 7천만 달러를 기록하며 3위로 내려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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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답지만 무심하게 잔인하고 강력한 자연에게 바치는 한편의 시이자 애찬
아르타바즈드 펠레시안 감독의 이름을 들어본적 있는가, 들어본적 있다면 당신은 상당한 수준의 씨네필일 것이다.
사실 모른다고 해도 섭섭해할 필요는 없는것이, 예전부터 영화를 봐온 씨네필이 아닌 이상 잘 모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번에 이야기할 영화, <대자연>은 아르타바즈드 펠레시안 감독의 무려 27년만의 신작이기 때문이다.
이전 작품인 <생명>, <끝>, <우리 세기> 같은 작품들은 90년대, 80년대 작품인데다가 흔히 보기 힘든 단편이며, 시대가 시대인지라 한국에 초청된 것도 벌써 한자리대의 전주국제영화제이다.
그러나 "간격 몽타쥬 Distance Montage"의 창시자로 불리는 의미있는 거장이며 장 뤽 고다르 감독이 "영화의 신"이라 칭할 정도로 존경을 표할 정도의 반드시 알아야 할 거장 감독이다.
이번에 정말, 아주 오랜만의 복귀작인 대자연을 통해 그의 이름을 다시 이야기하고자 한다.
대자연은 잔잔하고 고요한 자연의 순간에서 시작하여, 강력한 자연의 힘에 저항없이 무너지는 인류의 문명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렇게 인간을 무릎꿇게 만든 자연은, 내가 언제 그랬냐는듯이 다시 잠잠해지고, 여명이 밝아오며 이러한 자연의 연속성을 알 수 있다.
본 영화는 대사가 단 하나도 없이, 흑백의 기록영상들과 음악으로만 이루어져있다.
다만 단순 나열에 그치는 것이 아닌, 마치 자연을 위해 만들어진 음악들과 그에 맞춰진 자연의 모습은 정말 놀라운 조화를 일으킨다.
필자는 사실 이번 기회에 본 감독의 작품을 처음 접한터라 그가 창시한 "디스턴스 몽타주"라는 게 뭔지 잘 몰랐는데 영화를 보고 나니 어떤 느낌인지 알게되었다.
하지만 솔직히말하자면, 1시간 내내 계속 이렇게 진행되다보니 중반부부터 체력적 힘듦은 느낄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스스로 말한 "영화적 언어"에 대한 위대함과 강력한 힘을 느낄 수 있었던 62분이었다.
장 마리 스트라우브 감독의 영화 중 "아르테미스의 무릎", 레우코와의 대화 중 한 대사를 이야기하며 마무리를 짓고 싶다.
자연에 대한 예찬이자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 같아서이다.
“당신은 이런 이를 본 적이 있나요? 하나의 존재 안에 수많은 것들을 품고 있는 그런 여인을. 그리하여 그녀의 모든 몸짓과 그녀를 향한 모든 생각이, 당신의 대지와 하늘, 말과 기억들, 당신도 모르게 스쳐 지나가는 나날들, 미래들, 확실한 것들, 그리고 결코 당신의 것이 될 수 없을 대지와 하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들을 무한히 품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그런 이를 본 적이 있나요?”
*이 글은 원글없이 새로 작성된 글이며, 출처란에는 작성자의 인스타그램 주소를 기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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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 늦게 켜진 강하늘의 원맨쇼!
너무 늦게 왔다. SNS와 스트리밍 채널의 폐해를 소재로 한 <스트리밍>은 사이버렉카 등 이제는 만연되어 흘러넘치는 현실에서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영화가 가진 사회적 문제 고찰이나 날선 시선은 그 자체로 중요성을 갖지만, 그 칼날이 무딘 느낌이랄까. 영화보다 현실이 더 심각한 상황이 된 세상에서 <스트리밍>은 본의 아니게 특색을 잃는다.
사회이든 스트리밍 세상이든 1등이 최고다. 승자독식 플랫폼 ‘왜그’에서 범죄 채널 1위 자리를 고수하는 우상(강하늘)은 살인을 저지르고 피해자 옷의 일부분을 잘라가는 ‘옷자락 살인마’의 연쇄살인사건을 쫓는다. 자신만의 추리력을 토대로 같은 스트리머 마틸다(하서윤)와 함께 사건을 추적하는 라이브 방송을 하지만, 본인보다 더 전문가다운 마틸다에게 한 방 먹는다. 이후 우상의 채널 순위는 떨어진다. 구독자들의 성화에 전화를 받지 않는 마틸다의 집으로 간 우상. 근데, 그녀는 사라지고, 누군가에게 납치된 영상을 보게 된다.
<스트리밍>은 한 미스터리 사건을 파헤치려는 한 유튜버를 통해 스트리밍 플랫폼이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는 작품이다. 우상이 이 사건에 집착하고 마틸다의 행방을 찾는 건 정의를 위해서라기 보다는 왜그라는 플랫폼에서 1위를 고수하기 위한 목적이 크다. 다시 말해 후원금.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 더 크다. 구독자들의 클릭을 유발하고, 후원금을 보낼 정도의 어그로는 기본, 무논리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말발도 갖춰야 한다. 타고난 것인지 아니면 우연으로 그렇게 된 것인지 몰라도 우상은 자신의 이름처럼 이 플랫폼에서 ‘우상’이 된다.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기에 이 스트리밍 판을 자신의 무대로 여기며, 이 추적극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자신이 프로파일러가 된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으로 추리하고, 관련된 이들을 심문하고, 장소를 알아내는 등 누군가에게는 추리 영화처럼, 누군가에게는 주작처럼, 누군가에게는 장난처럼 자신만의 콘텐츠를 만든다. 왜? 그눔의 1위 때문이다.
영화는 이런 그의 욕망을 꺼내듯 마틸다와의 합방 이후 떨어진 순위를 보여주고, 실종사건 라이브 방송으로 다시 1위 탈환을 하려는 그의 고군분투를 보여준다. 목적이야 어떻든 관객은 또 한 명의 구독자가 된 것 같은 느낌으로 우상의 방송을 지켜보는데, 이는 <서치> 이후 유사 소재 영화의 기본값이 되어버린 스크린 라이브 기법의 힘이 크다. 너무 많이 활용되어 특이점은 사라졌지만 극 중에서는 지속적으로 몰입도를 유지시킨다. 한 번 접속하면 나가기 버튼을 누를 생각조차 하지 못하도록 영화는 92분이라는 러닝타임을 꽉꽉 채운 빠른 전개를 밀고 나간다.
물론, 중반 이후부터 극 중 댓글 창에 계속 언급되는 ‘주작’이라는 단어처럼, 마틸다 사건 자체가 우상의 주작이 아니냐는 의문을 들게 한다. 속도감 있는 사건 해결을 위한 몇몇 설정들의 개연성 상실로 인해 집중력도 떨어지는 게 사실. 모든 스트리머의 본색이 광기로 가득 차있 다는 설정과 이를 표현하는 방식 또한 상투적이라 보는 재미는 떨어진다. 더욱이 영화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가 우상과 그 주변 인물들의 문제를 넘어 승자독식 플랫폼의 문제와 이를 조장하는 사회적 분위기로 그 영역을 확장하지 못하는 건 아쉬운 부분이다.
하지만 영화의 또 다른 관점 포인트이자 기대 포인트인 강하늘의 연기는 관객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꽤 단정해 보이는 옷차림과 헤어 스타일, 그리고 살짝 보이는 문신 등으로 비주얼을 잡고 방송 9단과도 같은 멘트를 작렬시키는 그의 스트리밍 화면 속 모습은 그 자체로 스트리머로 보인다. 극 중 라이브로 비치는 그의 민낯이 벗겨지는 순간이나 과열하는 양상을 보이는 부분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에너지는 그만의 원맨쇼의 중요 동력. 강하늘에게 한 영화를 끌고 가기에 충분한 능력이 있다는 걸 다시금 깨닫게 한다. 트렌드가 살짝 지난 이야기에 실망해도 강하늘의 연기는 만족할만 하다. 물론 그의 원맨쇼 만으로 영화의 단점을 상쇄하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관심이 많아지면 집착이 된다”라는 극 중 대사처럼, 지나친 관심은 곧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는 요소로 발현될 수 있다. 이런 점을 알고 있음에도 더 많은 관심을 끌고 촉구하는 이들의 무분별한 어그로는 그들이 의도와 상관없이 집착으로 점철된 악마를 잉태시킨다. 화면을 사이에 두고 일방적인 관심을 요구하는 스트리머, 일방적인 관심을 보내는 구독자 모두 이 아사리판을 만든 주동자인 셈. 늦게 도착했고, 만듦새가 성기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되는 건 마지막 우상의 방송 때문이다. 만약 영화를 본다면 그의 마지막 얼굴과 궤변을 잊지 말기 바란다.
사진 제공: 롯데엔터테인먼트
평점: 2.5 / 5.0
관람평: 너무 늦게 켜진 강하늘의 원맨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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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이야기는 내가 직접 만들어주지
여기.
잠들지 못하고, 밤마다 뺏벌을 걸어다니는
한 여인이 있다.
그녀의 이름은 박인순.
뺏벌이라 불리는 미군 기지촌에서 양공주로 살았으며, 그 이후에도 죽은 동료들과 함께 기지촌에 남아 살아가고 있다. 그녀는 그 누구보다 죽음을 많이 보았으며, 늘 죽음 가까이에 있었지만, 정작 자신은 죽지 않고 살아남아 튼튼한 두 다리로 이 세상에 굳건히 서 있다.
밤새 뺏뻘을 돌아다니는 인순을 보며, 저승사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죽어야 잠들 수 있겠군”
그러나 평생을 비가시적(서류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이중으로 은폐된) 존재로 살아온 인순에게는 저승으로 가는 길도 그리 간단치 못하다. 이승에서의 호적은 거짓으로 꾸며진 것이기에 저승 명부에도 그녀의 이름이 없으며, 저승길에 필요한 ‘그녀만의 이야기’ 또한 부재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이야기는 과거 여러 차례 문서와 미디어를 통해 기록되고 재현되어왔지만, 그 이야기들은 그녀의 진짜 이야기가 아니다. 모두 오래된 편견으로 만들어진 진부한 이야기일 뿐이다.
이제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만들고자 한다.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 메인 포스터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넘나드는 다큐멘터리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는 김동령 감독과 박경태 감독이 기지촌 여성인 박인순과 함께 작업한 작품이다. 두 감독은 이미 각자 작업한 <나의 부엉이(2003, 박경태)>, <아메리칸 엘리(2008, 김동령)>와 공동연출한 <거미의 땅>(2016)을 통해 박인순의 이야기를 담아온 바 있으며, 이 같은 작업을 통해 미군 기지촌 위안부 여성들을 보여주고 들려주는 방식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왔다.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 또한 이러한 고민의 연장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감독들의 앞선 작업들과 분명한 차별점을 지니는데, 그것은 바로 ‘이야기’에 대한 관심이다. 감독들이 이전까지는 ‘기지촌이란 무엇이며 기지촌 여성들은 누구인가?’에 대해 탐구하였다면,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에서는 ‘기지촌 여성의 이야기는 왜 살아남지 못했는가?’를 탐구한다. 그런 의미에서 김동령 감독은 이 영화가 “기지촌에 관한 것이라기보다, 기지촌에 관한 이야기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누가 만들고 그러나 어떻게 사라지는가에 관해 탐구하는 프로젝트”라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픽션과 논픽션, 그리고 가상 캐릭터와 실존 인물들이 어지럽게 뒤엉켜 재현되는 이미지들 속에서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지를 판명하는 일은 무의미한 행위일 것이다(심지어 이러한 판단은 가능하지도 않다). 오히려 우리는 그 와해되고 중첩된 영화적 공간 속에서 ‘이야기가 되지 못한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이 영화는 ‘이야기’에 관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밤마다 뺏벌을 돌아다니는 '인순'(논픽션/실제인물)과 뺏벌의 유령들을 저승으로 데려가려는 '저승사자들'(픽션/허구의 캐릭터)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는 박인순이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만드는 과정을 중심으로 하지만, 그녀가 재현하는 이야기만을 담고 있지는 않다. 영화의 중반부까지는 오히려 타인의 목소리를 통해 그녀의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첫 시작부터 영화는 전지적 시점에서 서술되는 나레이션이 삽입된다. 그리고 구술 채록을 위해 인순을 찾아온 교수와 뺏벌을 자신의 작품 소재로 사용하고자 하는 대학원생이 등장하여, 그녀들의 삶이 어떻게 타인에 의해 이야기로 만들어지는지를 보여준다. 살해된 기지촌 여성의 기사 사진과 인순의 과거 인터뷰 장면을 통해 그녀들의 삶을 기술하는 미디어의 방식을 폭로하기도 한다. 여기에는 감독 자신이 (아마도 과거에) 핸디 카메라로 촬영하였던 다큐 영상들도 포함된다. 이러한 재현들은 모두 4:3의 답답한 화면비로 삽입되어, 인순을 비롯한 그녀들의 이야기를 어떠한 프레임 속에 가두고 있음을 은유한다.
필자는 태어나서부터 출가를 선언한 27살 이전까지 의정부에서 살아왔다. 그 때문에 뺏벌이라는 공간의 지리적 위치 정보가 등장하기 전부터 스크린을 가득 채우고 있는 저곳이 의정부임을 금새 알아차렸다. 남들보다 먼저 알아보았음을 자랑하기 위해 나의 출신을 언급하는 것은 아니고, 나 또한 영화 속 대학원생과 같은 마음, 즉 그녀들의 이야기를 이용해보려는 마음이 순간적으로 일어났음을 고백하려 함이다.
앞서 언급한 영화 속 대학원생 아해는 인순을 인터뷰하러 온 교수를 따라 뺏벌에 오게 되었다. 인터뷰 과정에서 인순과 뺏벌에 흥미를 갖게 된 아해는 홀로 인순을 찾아왔다가 인순이 집에 없자 폐허가 된 기지촌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작품 소재를 수집하기 시작한다. 기지촌의 여러 공간을 카메라로 담아내기도 하고, 기지촌 내 클럽에서 술잔과 벽에 붙은 기지촌 여성들의 사진을 몇 장 챙겨가기도 한다. 이러한 수집행위와 더불어 아해는 “이번 전시는 기억과 공간에 관한 작품으로 기획하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른 작가가 이곳을 발견하기 전에 빨리 작업을 시작해야겠다”고 덧붙인다.
기지촌에서 작품의 소재를 물색하는 '아해'와 클럽 안에 산재한 '그녀들의 흔적'
여기서 필자의 탄식이 새어나왔다. ‘아니, 나는 의정부에 30여년간 살면서 왜 저곳을 직접 들어가볼 생각은 하지 못했는가... 내가 먼저 발견했으면 나는 지금쯤 엄청난 작가가 되어있었을 텐데...’라고. (참고로 필자는 의정부에 살 때까지만 해도 영화를 만드는 창작자의 삶을 산 바 있다. 지금은 아님.) 그리고 영화의 후반부에 다다라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를 깨달았을 때, 잠시 저런 생각을 했던 내 자신이 몹시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부끄러움을 넘어, 나 또한 그녀들의 이야기를 함부로 만들고, 변형시키고, 제거하는 행위에 동참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았다. 영화를 보는 모든 이들이 나와 같은 부끄러움과 성찰의 순간을 경험하기를 바란다. 이것이 박인순이 우리에게 보내는, 그리고 멋대로 자신의 이야기를 떠들어대었던 세상을 향한 통쾌한 복수극일테니.
* 해당 리뷰는 씨네 랩(CINE LAB) 크리에이터 시사회 참석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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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킬레스건에 발목 잡힌 무색무취 지옥도
과거 조직 2인자였던 한 남자가 동생의 복수를 하기 위해 다시 조직의 중심부까지 들어간다는 먼치킨 액션. 동명 웹툰을 시리즈화한 <광장>은 이 한 줄만으로도 기대감을 갖게 한다. 소지섭이 주인공 기준 역을 맡았다는 점에서 화제를 모았는데, <영화는 영화다> <회사원>에서 보여준 그의 액션과 카리스마가 극 중 캐릭터와 오버랩되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지섭 홀로 멱살 잡고 끌고가기엔 이 시리즈는 그 자체로 무겁고 버겁다.
스스로 아킬레스건을 자르고 조직을 떠났던 기준(소지섭)은 동생 기석(이준혁)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누가 죽였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기준은 다시 조직 세계를 파헤치며 그 진실을 찾아 나선다. 한편, 이 소식을 들은 두 조직 보스 주은(허준호)과 봉산(안길강)은 기석의 죽음과 기준의 등장으로 혼란에 빠지고, 이 사건에 연관된 이들 또한 점점 조여오는 기준의 공포를 두려워하면서 어떻게든 벗어나려 한다.
<광장>은 사람들을 작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두 가지를 준비한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액션이다. (원작을 보지 않았다는 걸 먼저 알린다.) 아마 원작의 팬들도 이 작품에서 보고 싶어했던 건 묵직한 액션이었을 것이다. 이에 화답하듯 스스로 아킬레스건을 자른 기석은 오로지 파워 주먹으로 승부를 본다. 스피드 보다 무게감에 방점을 둔 작품의 액션은 역시나 파워다. 극 중 기준의 주먹 한 방으로 나가떨어지는 범죄자들을 보면 판타지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기준이 이 세계에서 절대자라는 걸 확실하게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 회를 거듭할수록 그와 목숨을 건 대결을 벌이는 빌런들은 기준 보다 더 힘이 세거나 스피드가 빠르거나 발차기를 날리거나 칼을 휘두르는 이들로 구성된다. 물론, 그래봤자 기준의 주먹에 무릎을 꿇지만 말이다. 시리즈는 대비되는 상대와의 액션은 물론, 화려한 카메라 워킹과 테크닉으로 다변화를 꾀하면서 변주를 준다. 하지만 회를 거듭할수록 액션의 쾌감은 무뎌진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좀처럼 기준에게 감정이입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동생의 복수라는 큰 동력은 있지만, 그 이후 직진하는 액션과 분노를 느끼게 하는 접점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감정을 표출하기 보다는 꾹꾹 누르는 캐릭터 성향 때문에 더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물론, 약간의 플래시백이나 대사로서 이를 전달하기는 하지만 미미하다.
어쩌면 이런 부분은 먼치킨 복수가 영화를 이끄는 동력이 아니기 때문으로도 읽힌다. 기석의 죽음은 휴전이란 균형을 맞췄던 광장이란 세계의 균열점일뿐이다. 정작 이 시리즈가 보여주고 싶은 건 ‘아킬레스건’이다. 원작에서 대대적인 각색을 가한 이 시리즈는 기석은 물론, 주운, 봉산 등 주요 인물들이 가진 아킬레스건을 부각한다. 기석은 동생 기준이었고, 주운과 봉산은 각각 아들 금손(추영우), 준모(공명)다. 이들은 각자의 아킬레스건을 지키고자 피를 부르는 행동을 벌이는데, 이는 이 광장 세계를 조율하는 김선생(차승원)의 등장으로 확장된다.
광장이란 세계에서 유일하게 없는 건 ‘자유’다. 자유로운 삶을 꿈꾸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건 서로가 각자의 아킬레스건이자 약점, 흠집을 알고 있기 때문인데, 극 중 김선생은 이를 무기로 이 세계를 뒤에서 쥐락펴락한다. 기준은 일찍이 이 세계의 민낯을 알고 벗어나고 싶었기에 스스로 아킬레스건을 자르고 탈출했다는 건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그럼에도 한 번 담근 이 세계에서 탈출하지 못하는 그의 인생을 애처로워 보이기도 한다.
시리즈 특성상 긴 이야기를 구축할 든든한 소재가 필요했을 터. 감독은 각색을 통해 아킬레스건을 부각시키고, 이에 관련된 이들의 지옥도를 보여준다. 감독은 기준을 통해 이 지옥 안에서의 권력 또한 부질없고 허망하다는 것도 소개한다. 하지만 너무 이 소재에 집중한 나머지 작품 본연의 재미, 즉, 먼치킨 액션 스타일의 매력이 떨어진다. 마치 아킬레스건에 발목 잡혀 무색무취 지옥도를 보는 듯한 재미랄까. 벌써부터 원작팬들의 냉대를 받고 있는 상황은 아쉬움을 남긴다.
극 강 액션을 보여주기 위한 소지섭의 노력은 화면 밖으로 튀어 나올 정도다. 다양한 공간 안에서 펼치는 액션의 매력은 덜하지만, 이를 멱살잡고 끌고 간 그의 노력에는 박수를 보낸다. 그 외 스테레오타입의 주요 인물들의 활용성은 아쉽다. 그나마 금손 역을 맡은 추영우의 연기가 새로웠는데, 왜 그가 최근 감독들의 러브콜을 받는지 몸소 보여준다.
덧붙이는말: 총 7부작인 <광장>은 빨리감기 유혹에 쉽게 빠질 시리즈다. 그럼에도 1부, 4부, 7부는 되도록 정속으로 보길 바란다. 뭐 선택은 자유지만.
사진 출처: 넷플릭스
평점: 2.5 / 5.0
관람평: 아킬레스건에 발목 잡힌 무색무취 지옥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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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카데미에 올라갔어야만 했다
봄에 피어나는 벚꽃만큼이나 극장을 자주 드나드는 관객들에게 이 시기는 대작들이 개봉하는 여름 극장가 부럽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에는 "아카데미"에 이름이 올라간 영화들 때문입니다.
대개, 시상식에 이름이 올라간 이유에는 그만한 기준에 충족했기에 올라간 것이라는데 관객들은 이 영화들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관객들은 "왜, 이 영화가 올라갔지?"에 대한 궁금증을 안고서 극장으로 가 봄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나오게 됩니다. 이런 진부한 패턴이 영화 <모리타니안>이라고 다르지 않았습니다. 작년이라면, 이미 "아카데미 시상식"의 후보는커녕 결과까지 나왔지만 이번에는 "코로나19"로 모든 일정들이 연기되며 이제서야 "골든글로브"가 끝났습니다.
아시다시피, <미나리>의 작품상 후보 지명 불발이 가장 큰 논란이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미나리>의 "윤여정"분의 후보 지명 불발도 화제였습니다. 다른 시상식에서는 다 휩쓰는데, 후보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으니까요. 그러면서, 관객들에게는 자연스레 "윤여정"분이 빠진 "여우조연상"을 받을지에 관심이 쏠렸고 이는 오늘 소개할 <모리타니안>의 "조디 포스터"분이 수상했습니다. 이에 일부 팬들은 "호랑이가 없는 곳에 늑대가 왕이다"라고 하지만, 이미 <피고인1989>과 <양들의 침묵1992>로 여우주연상만 2번 받은 분이라 늑대로 칭하기에는 무리가 있죠. (특히, 이를 30대 이전에 다 받으신 거라...)
이외에도 여기에 출연하는 "타히르 라힘"은 "남우주연상"에 이름을 올려 무슨 영화인지는 몰라도 연기 보는 맛은 쏠쏠하거라 생각했습니다.
'과연, <모리타니안>은 어떤 영화이었는지?' - 감상을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때는 9·11테러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
갑작스레, 집안에 경찰이 오자 "슬라히"는 어머니에게 '잠깐만 다녀오겠다'라는 말로 진정시킨 후 집을 나섭니다. 그리고 인권 변호사 "낸시"는 지난 3년간 재판도 없이 "콴타나모 수용소"에 구금된 "슬라히"에게 관심이 생깁니다. 아무리 중한 범죄라고 해도 재판 없이 감옥에 수감된 것에 궁금한 "낸시"는 그의 변호를 맡게 되고, 숨겨져 있던 사실에 충격을 받는데...
낯선 영화에 익숙한 배우들이 나온 이유는?
1. 클리셰를 깨버리는 이 과감함, 뭐지?
영화 <모리타니안>은 제목만 봐서는 어떤 영화인지 좀체 감이 잡히지가 않습니다.
출연하는 배우들에 "베네딕트 컴버배치", "조디 포스터", "쉐일린 우들리", 그리고 <샤잠!>의 "제커리 레비"를 보아도 역시, 감이 안 잡히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포스터에도 있듯이 "재판"이라는 단어로 낯선 영화에게 "법정극"이라는 갈피가 잡히는데요. 근데, 영화 <모리타니안>에게 법정에서 주고받는 증언에 증언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영화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곳은 "법정"이 아니거든요.
이렇게 해도 되나요?
앞에서도 말했듯이 "재판"이라는 단어로 "법정극"이라는 갈피가 잡힌 <모리타니안>의 초반 전개는 이와 비슷하게 흘러나갑니다. 마치 변호하는 "낸시"는 선역, 그에게 사형을 내리려는 "스투"는 악역으로 보이는 <모리타니안>의 시작은 뻔하게 흘러갑니다. 근데, 영화는 여기서 하나의 변곡점을 제시하는데 그게 "플래시백"입니다. 대개, "플래시백"은 직접 짜 맞추는 것과 다르게 해당 캐릭터의 시점에서 흘러가 설명보다는 감정을 먼저 제시합니다. 특히, "법정극"이라는 장르가 논리와 논리의 상충이 주되기에 이런 방법은 가급적 피해야 하는데요. 근데, 영화는 "클리셰"와 같은 규칙을 깸으로 오히려 관객들의 관심을 이끌어냅니다.
2. 이러니까, 아카데미에 이름을 올라가겠지.
앞서 말했듯이 영화 <모리타니안>은 이야기의 중간마다 "플래시백"을 삽입함으로 해당 캐릭터의 감정에 이입해 이야기를 몰입하게 만듭니다. 이외에도 부족한 설명을 채워주는 역할도 하지만 가장 큰 역할은 이야기에 몰입하게 하는 것이죠. 근데, 영화는 굳이 이런 몰입을 깨버립니다.
관객들에게 이야기를 전달하는 가장 좋은 "물아일체"의 상태를 깨기까지 한 영화의 이유에는 여러 가지 있습니다. 첫 번째는 감정에 치우치면 본질이 흐려지는 것도 있지만, 두 번째 <모리타니안>이 법정극이라는 끈을 놓지 않았다는 것을 야심이 엿보이기도 합니다.
이를 영화는 '반전'이라는 카드로 위장하여 보여주기도 하고요.
옳고 그름을 떠나...
아무리, "플래시백"을 경계한다고 해도 관객들에게 "슬라히"는 속내를 모르는 대상이 아닌 그저, 불쌍한 대상으로 보입니다. 근데, 텍스트로 적혀진 보고서에는 이런 설명들을 부정하니 관객들에게 인지부조화가 일으키게 되는 것이죠. '진짜 틀린가?'라는 마음으로 1차적인 반전을 일으켰다면, 영화는 곧장 2차적인 반전을 연쇄적으로 보여주려 합니다. 잠시, 영화를 떠나 글을 쓰는데 가장 쉬운 방법은 객관적인 자료로 주관적인 감정으로 끝을 짓는 것입니다. 근데, 순서를 바꿔 주관적인 감정을 객관적인 표현으로 정리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데요.
비슷한 재료인데도 순서가 틀리면, 완전히 달라지는 영화 <모리타니안>은 1차 반전으로 '전자', 2차 반전은 '후자'로 보여주여 더 깊게 빠지게 만듭니다.
3. 방법은 틀린 것이 없다. 쓰는 이에 달라질 뿐.
보통 "피해"를 입은 캐릭터를 소개하는데, 가장 기피해야 하는 것은 이를 그대로 재현하는 것입니다.
그 장면 자체만으로도 "고문 포르노"와 별반, 다르지가 않거든요. 그렇기에 <아이 캔 스피크2017>에서는 이를 재현하기보다는 연설하는 장면에서 자신의 몸에 새겨진 낙서와 같은 문신으로 이를 관객들의 상상에 맡겼습니다. 그런 점에서 영화 <모리타니안>은 세련된 방법은 아닌데도 이에 대한 충격을 받은 이유에는 이를 쌓아올린 누적된 설명들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여주느냐에 구식과 클래식이 나눠진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낸시"는 선역, "스투"는 악역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낸시"가 "테리"에게 "슬라히"의 감정에 휩쓸리지 말라는 말을 남겼듯이 "스투"에게도 이런 모습이 보입니다. 영화는 "낸시"에게 "슬라히"의 편지를 읽음으로 그의 감정을 관객들에게 전달한다면, "스투"는 관객들에게 그가 어떤 곳에 있었는지를 직접 가서 확인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낸시"가 주관적인 감정이라면, "스투"는 객관적인 관찰인데, 서로 상충되는 부분이나 영화는 이를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는데요. 그리고 극과 극에 서있던 "낸시"와 "스투"가 "슬라히"가 보여주는 재연으로 합쳐지니 "고문 포르노"였던 방법은 "현실 고발"이라는 있어 보이는 방법으로 탈바꿈하게 되는 것이죠.
4. 옳고 그름이 아닌 모두를 아우르는 메시지
결론적으로 말하면, 영화 <모리타니안>은 "옳고 그름"을 따지는 영화는 아닙니다. 예상했던 "법정극"으로 생각하기에는 대상자의 감정에 좌지우지하는 전개는 장르를 제외하더라도 그리 좋지만은 않고요.
그럼에도 <모리타니안>은 앞서 말한 "아카데미 영화"를 보는 삼단 논법의 마지막 단계, 고개를 끄덕이며 나오는 결과에는 문제없이 도출되는 영화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말하려는 '법은 상황에 맞게 짜 맞춰지는 것이 아니라 적용되어야만 한다'라는 메시지는 극히, 이성적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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