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DAY2025-03-11 20:42:24
콘클라베 | 의심으로써 바로 세운 신비함과 믿음
<콘클라베> 리뷰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예기치 못한 교황 사망 이후 추기경단 단장 '토마스 로렌스'(랄프 파인즈) 추기경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새로운 수장을 선출하는 선거, '콘클라베'를 총괄한다. 로렌스는 무사히 선거를 관리한 뒤 다음 교황이 뽑히는 대로 교황청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교황청에서 일하는 동안 오히려 신앙심이 약해진 것 같았기 때문.
하지만 콘클라베는 그의 기대와는 달리 혼란스러워진다. 후보 간의 정치 공세가 시작되면서 유력 후보인 '알도 벨리니'(스탠리 투치), '트랑블레'(존 리스고), '아데예미'(루시언 음사마티), '베니테스'(카를로스 디에스), '테데스코'(세르조 카스텔리토) 추기경과 관련된 추문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것. 이에 로렌스는 추문의 진상을 밝혀내는 데 집중한다. 그러는 사이 갑작스레 유력 교황 후보로 떠오른 그는 새로운 시험대에 오른다.
의심 위에 지어진 교회
예수의 열두 사도 중 토마스는 기독교 신자들 사이에서도 자주 회자되는 사도는 아니다. 초대 교황 베드로, 배신자 유다, 복음서 저자인 요한 등에 비하면 성경 속 활약이 부족하기 때문. 12 사도에 포함되지 않는 사도 바오로보다도 알려진 행적이 부족할 정도다. 그나마 부각되는 이미지도 부정적이다. 예수의 손과 허리에 난 상처에 손가락을 넣어 보지 않는 한 그의 부활을 믿을 수 없다고 고집을 부린 제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학적 관점에서 사도 토마스는 누구보다도 중요한 인물이다. 그의 의심은 가장 강력하고 명확한 신앙고백을 낳았기 때문이다. 그는 예수의 신성을 의심한 것에 대한 회개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환희를 담아 예수가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Dominus meus et Deus meus)”이라고 고백했다.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 그 자체임을 밝힌 토마스의 고백은 기독교의 근간인 삼위일체론의 근거가 된다.
즉, 토마스는 흔히 간과하는 신앙의 핵심 중 하나, 의심을 상징하는 사도라고 할 수 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는 척하거나, 자신의 확신에 사로잡혀서 새로운 앎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신까지도 의심하는 사람의 믿음이 더 건강하다는 것. 실제로 토마스를 혼내는 대신 제자의 의혹을 풀어주고 확신으로 가득 채워준 예수의 모습에서도 맹신보다 의심을 강조하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확인할 수 있다.
사도 토마스의 가르침은 에드워드 버거 감독이 로버트 해리스의 동명 소설을 영상화한 <콘클라베>를 통해 스크린 위로도 펼쳐진다. 또 한 명의 토마스, '토마스 로렌스' 추기경이 새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를 관장하면서 깨달은 의심의 중요성이 정치 스릴러의 형식으로 드러나기 때문. 특히 그의 깨달음이 개인적, 종교적 차원에 국한되지 않고, 정치적, 사회적 함의로도 확장되기에 <콘클라베>는 더욱 흥미롭고, 의미심장하다.
의심하는 '토마스'
'토마스' 로렌스 추기경은 영화 시작부터 끝까지 끊임없이 의심한다. 그의 의심은 크게 세 가지다. 우선 전임 교황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의심한다. 추기경단 단장으로서 교황의 최측근인 그조차도 교황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기 때문. 그는 교황의 사인이 무엇인지, 선종 전에 이상한 낌새는 없었는지를 캐묻는다. 더 나아가 교황이 마지막으로 접견한 사람과 처리한 업무는 무엇인지도 조사한다.
콘클라베 중에는 교황 후보로 거론된 추기경들을 의심한다. 특히 그들의 추문을 조사한다. 수녀와 관계를 맺어 아이를 낳았다는 소문. 자신의 추기경직 파면 소실을 감추고 추기경들을 매수했다는 소문. 교황직을 수행하지 못할 정도로 건강이 안 좋거나, 라틴어 미사 부활 및 성소수자 차별과 같이 시대를 역행하는 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소문까지. 로렌스는 새 교황이 결정되는 순간까지도 모든 추문의 진상을 확인하려 애쓴다.
마지막으로 그는 자기 자신을 의심한다. 유력 후보들의 추문이 하나 둘 사실로 밝혀지자 콘클라베 결과는 예측불가능해진다. 그 과정에서 로렌스는 자기 의사와 무관하게 유력 후보로 떠오른다. 진심을 담은 그의 강론이 결정적이었다. 콘클라베 전 미사에서 그는 십자가에 매달릴 때까지 신을 의심한 예수처럼 의심하는 교황을 달라고 기도했다. 그는 의심 없는 확신이 통합의 적이고, 다양성이 곧 교회의 힘이라 믿었으니까.
그의 강론은 교회의 변화와 개혁을 촉구하는 진보 성향 추기경들의 지지를 받았고, 그를 차기 교황 후보로 만들었다. 하지만 로렌스는 기뻐하거나 욕심내지 않는다. 과거보다 신앙이 약해졌다고 느끼는 그는 자신이 과연 교황직에 적합한지 의심한다. 더 나아가 다른 추치경들의 추문을 조사한 것이 교황이 되고 싶은 욕심 때문인지, 아니면 관리자의 업무에 충실한 것인지도 자문한다. 이처럼 끊임없이 의심하는 그는 실로 '토마스'답다.
의심으로써 쌓아 올린 스릴러
삼중의 의심 덕분에 <콘클라베>는 정치 스릴러로서의 쾌감과 종교 영화로서의 메시지,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아낸다. 우선 로렌스가 모든 소문을 하나씩 확인해 나가는 과정은 탁월한 서스펜스를 조성한다. 로렌스도, 관객도 진실을 모르는 입장이다 보니 마지막 진상이 밝혀지기 전까지의 불안감과 긴장감을 지속적으로 유도할 수 있기 때문.
랄프 파인즈의 연기도 한 몫한다. <해리 포터> 시리즈, <007> 시리즈, <타이탄>과 같은 블록버스터 영화에서 볼트모트, M, 하데스 등의 역할을 맡은 배우이지만, <콘클라베>는 그를 다시 볼 수 있는 기회다. 모든 이야기와 의도, 장르적 쾌감까지도 토마스 로렌스의 의심에서 비롯되는데, 랄프 파인즈는 냉정한 듯 흔들리는 눈빛으로 추기경이라는 지위 뒤에 숨은 인간적인 연약함을 표현해 냈기 때문이다.
한 소문에 관한 상반된 정보가 투표 전후로 제공되거나, 얼마 간의 텀을 두고서 소문의 진실을 확인하는 식의 완급조절도 인상적이다. 특정 캐릭터를 악역으로 단정하지 않으면서 정치극으로서의 스릴을 끌어올리기 때문. 관객이 캐릭터가 전혀 다른 추기경 중 호감 가는 인물을 응원하도록 유도한 뒤, 자신이 선택한 캐릭터의 진실과 그의 최후를 지켜보고 확인하는 과정의 긴장감과 묘미가 상당하다.
이에 더해 일반적이지 않은 배경도 정치극의 스릴을 강화한다. 카메라는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콘클라베를 세밀하게 포착한다. 교황 사망 시 반지에 표식을 남기는 것, 하얀 연기와 검은 연기를 만드는 방법, 투표 순서 및 방법 등. 이러한 디테일은 콘클라베의 신비함을 벗기고 속살을 들여다보는 관음증적 쾌감을 충족시키며, 정쟁의 서스펜스도 증폭시킨다. 관음증적 욕망과 권력욕이라는 인간적 욕망이 만나 서로 공명하기 때문이다.
스릴러로 벗겨 낸 신성함
이 대목에서 삼중의 의심은 종교적 메시지도 전해준다. 교황 선거를 정치 스릴러로서 풀어낸 <콘클라베>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신성함도 한 꺼풀 벗겨낸다. 실제로 카메라는 전통에 스며든 현대적 흔적을 포착한다. 최신식 호텔을 연상시키는 교황청 숙소, 어벤져스 기지처럼 자동적으로 닫혀서 외부와의 소통을 막는 창문, 투표지뿐만 아니라 염소산칼륨을 함께 태워서 만드는 하얀 연기와 검은 연기가 대표적이다.
현대적 이미지는 교회와 현실의 갈등, 전통과 미래의 모순을 시각화한다. 콘클라베의 속살을 보여줌과 동시에 가톨릭 교회의 속살도 함께 드러내는 셈이다. 실제로 극 중 추기경들을 둘러싼 추문은 사실 낯설지 않다. 이미 수차레 지적받고 공론화된 가톨릭 교회의 오래된 문제들이기 때문. 일례로 신부들의 성 추문과 교회의 조직적 은폐 시도는 <스포트라이트>나 <신의 은총으로> 같은 영화가 여러 차례 다룬 바 있다.
추치경들의 부패도 심심찮게 비판받고 있다. 당장 프란치스코 교황도 2020년에 죠반니 안젤로 베추 추기경을 시성성 장관에서 전격 경질한 바 있다. 베드로 성금으로 부동산에 투자하고 교회 기금을 사적으로 활용했다는 문제제기가 경질 이유였다. 이에 더해 교회의 방향성 역시 뜨거운 감자다. 성소수자 및 이혼자, 타 종교인에 대한 처우와 관련해서는 교회 내에서도 좀처럼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즉, <콘클라베>는 전통과 관습을 고수하는 교회가 현대 사회에 발맞추지 못한 세태를 비판하며 변화를 촉구하는 영화다. 그렇기에 콘클라베가 열리는 시스티나 성당이 무너지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로마 시내에서 발생한 테러로 인해 성당의 창문 한쪽이 파손되고, 추기경들은 부상당한다. 이 이미지는 교회와 세속을 가르는 강고한 경계의 붕괴와 현대 사회의 변화에 적응 못한 교회의 퇴락을 동시에 상징하는 듯하다.
문을 열어야 보이는 진리
흥미롭게도 <콘클라베>는 폭탄 테러가 발생한 순간의 연출을 통해 교회와 사회의 방향성을 제시한다. 로렌스는 삼중의 의심 끝에 자기 이름을 투표지에 적는다. 그가 투표함의 문을 열고, 표를 넣으며 함의 문을 닫으려는 바로 그 순간, 시스티나 성당은 폭탄 테러로 인해 먼지로 뒤덮이고 콘클라베는 중단된다. 사건이 수습된 뒤 콘클라베는 파손된 시스티나 성당의 창문이 여전히 열려 있는 상태로 재개된다.
이때 핵심은 '문'이다. 문은 로렌스의 의심을 상징하는 오브제이기 때문. 로렌스에게 문은 '판도라의 피토스'나 다름없다. 피토스 안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한 판도라처럼 로렌스는 문 뒤에 숨은 진상을 찾을지, 아니면 문을 외면할지 고민을 거듭한다. 일례로 그는 행방불명된 보고서를 찾기 위해 봉인된 전임 교황의 방문을 열어야 할지 고민한다. 추문에 휩싸인 추기경들을 조사하기 위해 그들의 숙소 문을 열어야 할 지도 고뇌한다.
하지만 의심 끝에 문을 열면 그는 고통스러울지언정 진실에 한 발짝씩 가까워진다. 즉, 문은 의심을 멈추지 않을 때 비로소 진실과 진리가 보인다는 메시지의 상징이다. 테러 이후 성당 창문이 열린 채로 콘클라베가 재개된 이유이기도 하다. 반대로 그가 의심을 멈추고 투표함의 문을 닫으려는 순간, 콘클라베는 엉망이 된다. 마찬가지로 의심 없이 자신이 믿는 신과 교리에 대한 확신으로 무장한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리스트에 의해서.
의심으로 빚은 <콘클라베>의 진의
테러 이후 다른 종교에 더 강경하게 대응하자고 주장하는 보수파 추기경들의 모습을 보면 언제나 그 누구든 의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가 더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최근에는 보수파 추기경들처럼 특정 이념에 경도되거나, 특정 사상을 확신하는 극단주의자들로 인해 갈등이 재생산되는 악순환이 커지는 중이기 때문. 이는 <콘클라베>의 메시지에 종교적 차원을 넘어서는 정치적, 사회적 의미가 깃들어 있다고 느껴지는 이유다.
새로 뽑힌 교황도 의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을 비롯해 교회 내에서 비주류 지역으로 여겨지는 분쟁 지역에서만 활동했고, 인터섹스이지만 스스로를 남성으로 규정하는 인물이다. 그의 활동과 정체성은 가톨릭 교회가 현대 사회과 교회 사이의 문제와 모순에 대해 관습과 전통에 의존하는 대신 새롭게 대응해야 함을 상징한다. 이는 그가 순결을 뜻하는 '인노첸시오'를 새 교황의 이름으로 정한 이유이기도 하다.
<콘클라베>의 모든 플롯을 뒷받침하는 로렌스의 서사도 새 교황의 선출로 완결된다. 이는 콘클라베 시작 미사에서 의심하는 교황이 필요하다던 로렌스의 강론에 맞는 응답이 신으로부터 전해진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자신에게 아직 신앙이 있는지, 다시 기도할 수 있을지 의심하던 그는 콘클라베로써 답을 찾은 셈이다. 그렇기에 콘클라베 기간 동안 닫혀 있던 창문이 열림과 동시에 영화가 끝나는 결말은 인상적일 수밖에 없다.
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끝없는 의심의 다른 이름, 진리와 진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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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 신중하고 확실한 디즈니의 변화
인간과 드래곤이 평화롭게 공존하던 신비의 땅, 쿠만드라 왕국. 어느 날 살아있는 모든 생명을 삼키는 악의 세력 '드룬'이 모습을 드러내자 드래곤들은 인간과 세상을 구하기 위해 자신들의 힘을 하나의 보석에 남긴 채 스스로를 희생한다. 그러나 드래곤들이 사라진 세상에서 인간들은 각자 살 길을 찾아 드래곤의 보석을 차지하기 위해 분열하기 시작한다. 그로부터 500년 후 보석의 수호자인 '벤자(대니얼 대 킴)' 족장은 분열된 쿠만드라를 하나로 통합하려 하지만 '비라나(산드라 오)'를 비롯한 다른 족장들에게 배신당하고, 부활한 드룬은 또다시 세상을 공포에 빠뜨린다. 이에 보석의 마지막 수호자인 '라야(켈리 마리 트란)'는 라이벌 '나마리(젬만 찬)'의 방해를 뚫고 쿠만드라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전설 속 마지막 드래곤 '시수(아코피나)'를 찾기 위한 여정에 나선다.
동남아시아를 배경으로 한 디즈니의 새로운 애니메이션,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을 향한 우려의 시선은 결코 적지 않았다. 이유는 두 가지다. <로빈슨 가족>을 시작으로 <겨울왕국 2>에 이르기까지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전성기를 이끈 총괄 제작자 존 라세터가 성추행 사건으로 스튜디오를 떠난 뒤 제작된 첫 작품이라는 점은 완성도에 대한 의구심을 유발하기 충분했다. 또한 비록 애니메이션 작품은 아니지만 작년에 공개된 <뮬란> 실사영화가 숱한 논란을 낳으며 중국을 비롯한 동양 문화의 몰이해와 정치적 올바름을 대하는 디즈니의 위선을 드러냈던 기억은 동남아시아 문화를 어떻게 풀어낼 것인지에 대한 걱정을 부추겼다. 그러나 <겨울왕국> 시리즈의 감독인 제니퍼 리의 총지휘 아래서 제작된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은 모든 의심과 걱정이 기우였음을 확인해 주었다.
우선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은 다소 보수적인 자세로 총책임자가 교체된 여파를 최소화한다. 그러다 보니 이 작품으로부터 <주토피아> 같은 새롭고 재기 발랄한 이야기나 전개를 기대했다면 그 기대는 이내 실망으로 바뀔 가능성이 높다. 첫 순간부터 마지막까지 영화는 예상한 그대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실제로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은 주인공이 모종의 이유로 집을 떠나 새로운 친구와 동료들을 만나고, 가슴 아픈 이별 안에서 절망하지만, 그 과정에서 세상을 바꾸거나 구할 깨달음을 얻고 한 단계 성숙해지는 영웅 서사, 영웅 신화의 구조를 그대로 취한다. 그래서 라야의 여정이 세상을 향한 신뢰와 희망의 가치와 필요성을 증명하는 과정이라는 사실은 그리 놀랍지 않다.
이에 더해 마찬가지로 안전한 볼거리와 캐릭터도 검증된 서사 구조를 지탱하기 위해 동원된다. 예를 들어 라야와 그 일행들이 새로운 문제를 맞닥뜨릴 때마다 귀여움과 웃음을 유발하며 문제를 해결해주는 원숭이들의 역할은 <신비한 동물사전> 시리즈에서 예상치 못한 활약을 펼치는 보우트러클과 니플러의 역할과 같다. 라야와 그녀의 친구들이 서로에 대한 진정한 신뢰를 회복하는 장면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에서 주인공들이 한 팀으로 거듭나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 해당 장면의 배경이 전체적으로 보랏빛을 띤다는 점도 한몫한다. 캐릭터들의 경우 <겨울왕국> 속 등장인물들의 의상만 동남아시아 풍으로 바꾼 것과 다르지 않다. 어릴 적 친했다가 모종의 사건으로 어색해지는 안나와 엘사의 관계는 라야와 미나라의 관계에서 반복되며, 유머를 선사하는 라야 일행의 뒤에는 한스와 크리스토퍼, 올라프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반면에 동남아시아 문화를 재해석하는 데 있어서는 진일보한 모습을 보인다. 사실 중국, 한국, 일본의 문화를 한 데 뭉뚱그려 동아시아 문화라고 말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처럼, 동남아시아를 한 범주로 묶는 작업은 상당한 노력을 필요로 한다. 당장 베트남의 경우 중국에 맞서 약 천 년간 독립과 굴복을 반복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자 및 유교 문화권 안에 녹아들었지만, 그 인접 국가인 캄보디아, 라오스, 태국만 하더라도 힌두교나 불교 문화권에 속하는 것이 그 예시다. 심지어 섬나라인 인도네시아는 인구의 절대다수가 무슬림이고, 필리핀은 스페인 식민지의 영향으로 가톨릭 문화권에 속한다.
하지만 영화는 두 가지 방식으로 난제를 해결한다. 하나는 공간적 배경의 설정이다. 작중 주 무대가 되는 가상의 대륙 쿠만드라는 드래곤 모양의 길고 거대한 강이 중심부를 관통하고 있는데, 이는 메콩 강이 관통하고 있는 인도차이나 반도의 지형적 특성을 변형시킨 형태다. 다섯 국가가 강을 둘러싸고 위치한 것 역시 메콩 강 유역이 미얀마, 라오스, 태국, 베트남, 캄보디아에 걸쳐 퍼져 있는 것과 같다. 그렇기에 서로 다른 지역 특색을 동남아시아 혹은 쿠만드라라는 한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은 한결 자연스럽다. 더 나아가 현실을 닮은 공간의 구체적인 특성은 보편적인 서사 구조의 무색무취함에 특색을 더한다. 이는 작중 등장하는 계단식 논, 수중 가옥, 볶음밥이나 쌀국수, 동남아시아 지역 특유의 검이나 무기인 올리시(olisi) 등을 이용한 액션 등이 단순한 수박 겉핥기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다.
다른 하나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스토리의 중심 소재이자 주체인 드래곤의 존재다. 주목해야 할 점은 시수를 비롯한 드래곤이 흔한 할리우드 판타지 영화에서 볼 수 있는 드래곤에 비해 뱀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으며, 비를 내리거나 안개를 만들어 내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작중 드래곤이 주로 강에서 서식하며 모습을 바꾸거나 비를 내린다고 알려진 '나가'를 바탕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나가는 힌두교의 대표 경전인 '라마야나'와 '마하바라타'를 비롯한 다양한 경전에서 등장하는 뱀신이며, 불교에서는 석가모니의 수호신으로도 등장한다. 메콩 강에서 나가가 불을 뿜으면 수면 위로 불이 솟아오른다는 설화가 남아있을 정도로 캄보디아와 태국을 비롯한 동남아시아의 여러 국가에서 뱀신으로 숭배받는 존재이기도 하다. 따라서 나가를 닮은 드래곤이 인도차이나 반도와 메콩 강과 비슷한 땅을 구한다는 전개는 적절한 대표성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동남아시아 공통의 지형적 특성과 신화적 상상력이라는 문화적 인자를 변용한 결과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은 종교와 문화적 차이도 거뜬히 뛰어넘는다.
이때 메콩 강과 나가를 변용한 선택이 동남아시아의 현재와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은 평범한 듯 보이는 애니메이션에 깊이를 더해준다. 드룬과 처절하게 싸우던 드래곤은 자신들의 힘을 담은 보석 만을 남기고 사라진다. 그러나 드래곤 덕분에 생존할 수 있었던 인간들은 공생하거나 쿠만드라를 보호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라야와 나마리처럼 하나 남은 드래곤의 보석을 독점하려는 이기심과 불신에 사로잡힌 채 메말라 가는 땅에서 드룬에 의해 죽어간다. 자신들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드래곤들의 선택도 그들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그렇게 그들은 "가뭄은 지구의 죽음이다"라고 쓴 영국의 시인 T.S. 엘리엇의 표현을 충실히 따라간다.
이러한 드래곤과 강의 소멸은 하류 지역의 풍족한 토양과 수백 종의 어종을 통해 수천만 명의 생명줄이었던 메콩 강이 메말라 가는 현실과 다르지 않다. 201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메콩 강을 둘러싸고 앞서 이야기한 다섯 국가와 중국은 물 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중국이 메콩 강 상류에 샤오완 댐 등을 건설하자 유량이 크게 줄고, 그 결과 농업용수와 생활용수가 줄어들며 농업과 어업 등에 영향을 미치는 등 피해가 가시화되었기 때문이다. 문제 해결을 위해 중국과 메콩 강 유역 국가들은 정상회의를 열어 왔으나 양측의 이해관계 차이로 인해 아직까지 뚜렷한 해결책이 나오지 않고 있다. 이러한 현실 덕분에 신뢰와 배려심을 강조하는 영화의 새로울 것 없는 메시지는 각 족장이 모인 자리에서 각기 용의 보석을 탐낼 뿐 공생할 길을 찾지 않는 초반부 장면으로부터 예상치 못한 무게감을 갖는다.
비록 코로나 시국이라고 해도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유달리 조명받지 못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개봉일이 하루 빨랐던 <미나리>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모두 빼앗겼고, 북미에서도 전주에 개봉한 <톰과 제리>보다 적은 첫 주말 흥행 성적을 기록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리스크를 관리하기 위해 성공한 작품을 벤치마킹한 결과 독창성이 부족하다는 인상을 준 것도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의 의의를 고려할 때 온당치 못한 대우로 보인다. 단지 주인공, 조력자, 악역 등 주요한 캐릭터가 모두 여성이어서가 아니다. 이 작품은 다양한 문화를 이해하고 재해석하기 위한 치열한 고민의 흔적이 남은 영화이고, 정치적 올바름을 이야기하는 한층 성숙해진 태도를 볼 수 있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은 왜 여전히 디즈니라는 이름에 주목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납득시킨다.
A(Acceptable, 무난함)
무색무취의 스토리를 아름답게 색칠하는 다양성을 향한 디즈니의 진지한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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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상호 감독의 진짜 얼굴!
연상호 감독이 돌아왔다. 염세적인 세상을 그리는 연상호 감독이 돌아왔다. <얼굴>을 보면 감독의 초기 애니메이션 작품인 <돼지의 왕> <사이비>가 생각날 정도로 지옥 같은 한국 사회와 그 안에서 양심과 도덕성을 버리고 오로지 살아남으려는 인간의 민낯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부산행> 이후 종종 거대한 이야기를 보여주면서 정작 놓쳤던 감독의 날카로운 시선이 다시 살아온 듯한 느낌이랄까. 제작비도 2억원이 들었다고 하니 여러모로 기적 같은 영화다!
시각 장애인이자 국가가 인정한 전각 장인 임영규(권해효). 태어날 때부터 앞이 보이지않았던 그는 세상을 본 적 없지만, 아름다운 글씨를 새긴 도장을 만든다. 더 대단한 건 40년 전 아내가 사라진 후, 홀로 아들 동환(박정민)을 키웠다는 것. 그 인생도 참 예술이다. 그를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 촬영이 있었던 어느 날, 동환은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사라진 엄마 영희(신현빈)의 유골이 발견되었다는 것. 그 자체로 놀라운데, 살해 가능성이 있다는 경찰의 말에 머리가 복잡해진다. 이 일을 알게 된 다큐 PD 수진(한지현)은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알아봐 주겠다며, 동환과 함께 과거를 추적해 나간다.
<얼굴>은 제목 그대로 얼굴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는 차례대로 진행되는 인터뷰 형식을 빌려 영희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리는데, 진행될수록 관객들은 영희의 얼굴을 궁금해한다. 신현빈이 연기를 했지만, 정작 얼굴이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는 점에서 감독은 관객과 밀당 아닌 밀당을 하는데, 그럴수록 그녀의 얼굴이 궁금해진다.
인터뷰를 통해 만난 사람들 모두 하나같이 ‘못생겼다’고 말한다. 장례식장에 찾아온 일가친척은 물론, 청계천 방직 공장에서 일했던 동료들 모두 그녀를 못생겼다고 입을 모은다. 공장 사람들은 ‘똥걸레’라는 그녀의 악의적인 별명까지 전한다. 그들의 이야기가 진실이라면 영희는 정말 못생긴 사람이다. 근데 시간이 지날수록 궁금증이 생긴다. 과연 영희는 정말 못생긴 사람일까?
아름다움에 환호를 보내고 추함을 혐오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고 자유라고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라도 남을 평가한다는 것 자체는 잘못된 것이다. 이를 보여주듯 영화는 시간이 흐를수록 영화는 영희를 추하다고 말하는 이들의 얼굴을 비춘다. 예상은 했겠지만 그들이 더 추하다. 이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바로 진실과 옳은 것을 말하는 영희와 대척점에 선 인물들이라는 것이다.
1970년대 산업화가 가속화가 되는 시점에서 방직 공장 사장에게 착취당하고, 그의 권력에 무릎 꿇은 이들은 영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문제만 일으키는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가 좋을 리 없기 때문이다. 마치 국가를 위한다는 명목하에 인권이 말살됐던 그 시절을 보여주듯 영희는 잘못된 인간의 욕망과 순간적으로 표출되는 사람들의 얼굴을 오롯이 담는다. 그리고 인간이 가진 수치심과 공포가 어떤 결과를 낳는지도 보여준다. 물론, 시대의 어두운 단면을 끌어와 풀기에는 영화가 너무 작아 표현하는데 한계는 있지만, 인간의 본성은 무엇일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충분하다.
복잡하지 않게 스트레이트로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이 주는 흡입력이 대단한데, 배우들의 연기가 계속해서 관객을 끌어 당긴다. 1인 2역을 맡은 박정민은 마치 인간이 가진 선과 악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신현빈은 목소리와 움직임만으로 캐릭터의 감정을 너무나 잘 표현한다. 후반부 권해효가 말아주는 연기 내공, 여기에 자신들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한지현과 임성재의 연기도 강한 인상을 남긴다.
그렇다면 영희의 얼굴은 아름다웠을까? 아니면 사람들이 말했던 것처럼 추했을까? 그 궁금증을 해소하기 전 관객은 이 물음에 가닿을 것이다. 왜 우리는 얼굴, 그것도 아름다운 얼굴에 집착하는가? 그리고 나의 얼굴은 아름다운 것인가? 극장을 나오면 자연스럽게 거울을 보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덧붙이는 말: 한 사람의 인생을 새기는 전각(영규), 한 사람의 인생을 담는 카메라(주상, 수진), 한 사람의 인생을 기억하는 경험(그 외 사람들). 이 모든 게 그 대상이 아닌 자의적인 판단에 의해 나오는 자기 결과물이라는 아이러니함을 꼭 기억하기 바란다. 어쩌면 아름다운 얼굴은 우리가 판단할 수 없는 것은 아닐까!
사진출처: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평점: 3.5/ 5.0
한줄평: 우리의 얼굴을 돌아보게 하는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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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벽추구미 과작 감독 모음
안녕하세요 씨네픽 입니다.
오늘의 큐레이션은 1,2년에 한편씩 영화를 선보이는 다작 감독이 있는 반면
5년 넘게 한작품도 나오지 않은 과작 감독도 있는데요. 그중에서도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영화감독들을 모셔왔습니다. 아마 여러분 마음속에 한 작품은 마음에 드실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수년간의 공백을 깨고 마침 개봉을 한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의 <존 오브 인터레스트>,
김태용 감독의 <원더랜드>와 과작 감독님을 만나보아요.
*다큐,단편, 옴니버스영화 제외 과작 시기 위주의 영화들을 선정했습니다.
김태용 감독
20년이 훨씬 넘는 감독 인생에 비해 내놓은 작품은 단편영화를 제외하고 3편밖에 안됩니다.
거의 7년에 한번 꼴로 영화를 내놓는 셈.
나홍진 감독
단 세편 만으로도 굵직한 족적을 남긴 감독이지만 비슷한 작가주의 감독들이 2,3년 마다
꾸준히 신작을 만드는 것과 달리 텀이 깁니다. 감독 본인의 완벽주의 성향이 점차 강해지는듯
영화를 내놓기까지 공백이 점점 더 길어지고 있습니다.
이창동 감독
초록물고기부터 오아시스때 까지는 과작이 아니었으나 5년여의 공백을 거친 뒤 밀양을 내게 되었고, 시 이후 버닝까지 8년, 버닝 이후로도 현재까지 5년 이상 차기작 소식이 없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충무로 3대 거짓말'이라는 농담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는데 이창동이
'나 시나리오 다 썼다'라고 말하면 거짓말이라고.
베넷 밀러 감독
2005년작 카포티를 선보이며 장편 영화에 입봉했지만 아직까지 장편 연출작이 3편 밖에 없습니다. 머니볼과 폭스캐처의 작품 텀은 3년으로 평범한 편이지만 마지막 작품인 폭스캐처 이후로
10년 넘게 신작 소식이 없습니다.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
뮤직비디오 감독으로 명성을 올리며 섹시비스트로 영화 감독에 데뷔한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
섹시비스트와 탄생은 공백 기간이 4년이라 평범한 편이였지만 그 이후 20여 년 동안 언더 더 스킨, 존 오브 인터레스트 두 작품만 연출했습니다.
레오스 카락스 감독
퐁네프의 연인들이 망한 이후 빚쟁이들에게 쫓기며 폴라 X를 빼면 창작활동을 못하고 있다가
13년만에 홀리 모터스로 복귀, 이후 8년만에 아네트로 복귀했습니다.
로이 앤더슨 감독
1967년부터 시작하여 57년의 커리어 동안 장편 영화를 6편 내놓은 과작 감독입니다. 2000년에 <2층에서 들려오는 노래>를 내놓기까지 무려 25년이 걸렸습니다.
스파이크 존즈 감독
공백 사이사이 연기에 도전하고 있는 스파이크 존즈 감독
독특한 영상미와 심리를 강하게 파고드는 연출로 유명하지만 영화의 텀이 매우 긴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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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포와 마블의 결합, 그 결과는?
꽤나 진입장벽이 높은 영화로 개봉 전부터 소개되었던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 : 대혼돈의 멀티버스>. 아주 다행이게도 유튜버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약 30분 전 완다 비전에 대한 압축 설명을 듣고 영화를 봐서 그런지 영화를 따라가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었지만 만약 어떠한 사전 정보가 없었다면 이해하기 힘들었을 작품이었다.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 : 대혼돈의 멀티버스> 시놉시스
지금껏 본 적 없는 마블의 극한 상상력! 광기의 멀티버스가 깨어난다. 끝없이 균열되는 차원과 뒤엉킨 시공간의 멀티버스가 열리며 오랜 동료들, 그리고 차원을 넘어 들어온 새로운 존재들을 맞닥뜨리게 된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 속, 그는 예상치 못한 극한의 적과 맞서 싸워야만 한다.
*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 : 대혼돈의 멀티버스>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
멀티버스,, 그렇구나!
사람이 여럿 죽어나간다. 멀티버스에 존재하는 우리가 알고 있는 영웅들이 아주 무참히 죽어나간다. 뭔가 실세계였다면 그 영웅들이 죽어나가는 데 있어서 그 서사가 필요했겠지만 멀티버스라는 세계관에서는 필요가 없었다. 강력한 완다에 의해서 휘리릭 날아가고 몸이 잘리고, 이렇게 허망하게 죽을 수가 없다. 아마 본세계에서느 그대로 존재하는 캐릭터이기에 혹은 이미 죽은 캐릭터기에 쉽게 캐릭터를 죽일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간의 마블 연대기를 따라와던 관객이라면 아마 죽었던 자비에 교수의 등장에 엄청난 반가움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마블의 전체 흐름을 파악하지 않고 있었던 나로써는 그저 캐릭터를 소비하는 느낌으로밖에 다가오지 않아서 이 부분은 조금 아쉬웠다.
이 작품은 공포영화다
사실 마블과 호러가 결합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영웅 서사를 취하는 마블과 그로테스크한 공포라니. 그런데 이번 작품에서는 꽤나 성공적인 조합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 공포의 소재를 활용하기 위해서 아마 그토록 많은 캐릭터들을 출연시키고, 소비한 것이 아닐까 싶다. 닥터 스트레인지2에서는 완다가 최강의 빌런으로 등장하면서 완다를 막기 위한 비샨티의 책을 찾으러 가기 위해 멀티버스를 이동하며 가까스로 그 책의 행방을 알아낸다. 그런데 완다는 자신을 막으려는 닥터 스트레인지를 다크 홀드를 통해 집요하게 쫓아가 방해한다. 이렇게 집요하게 쫓아오는데 거의 무슨 살인마가 쫓아오는 줄 알았다. 마버사다 보니 여기저기서 막 등장하고, 다크홀드를 쓰다보니 종잡을 수 없는 등장 시점 덕분에 심장이 아주 고생을 했다. 아마 이것은 샘 레이미 감독의 고어한 성향이 잘 반영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영화 <이블데드>를 셀프 오마주한 장면들도 많이 보이고, 좀비 스트레인지도 등장을 하질 않나 그와중에 B급 코미디도 군데군데 흩뿌려 놓아져 있어서 나름 재밌게 보았던 작품이었다. 이러한 부분들이 과하다기 보다는 마블도 이렇게 공포라는 장르와 잘 어울릴 수 있다는 것을 잘 증명해낸 것 같아서 개인적으로 만족스러웠다. 이 공포라는 소재 때문에 위에서 언급했던 캐릭터의 소비문제도 이해가 갔으니 말이다.
앞으로의 마블은 어떨까?
영화 <블랙위도우> 이후부터 개봉한 마블들을 순차적으로 봤던 사람으로서, 그리고 그 전 작품들은 아직 따라잡지 못한 사람으로서 작년까지만 해도 영화를 보는 데 있어서 시간을 들여 공부를 할 필요성이 없어서 좋았었다. 하지만 이번 닥스2가 나오면서 여실히 느낀 것은 이제 마블은 새로운 관객층을 유입한다기 보다는 이미 마블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더 확장된 세계관을 선보인다는 느낌이 강했다. 전작에 비해 너무나도 진입장벽이 높아졌다. 이번 작품을 위해 최소한 닥스1과 완디비전 9부작을 알고 있어야 이 영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친절한 유튜버 선생님들이 지속적으로 요약을 해주시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이번 작품 <닥터 스트레인지 : 대혼돈의 멀티버스>가 달라진 마블의 모습을 잘 보여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영화를 위한 사전지식이 필요함을 알려줌과 동시에 마블페이즈4를 이끌 닥터 스트레인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어서 앞으로의 마블이 기대되긴 했던 것 같다. 그전에 일단 그간의 이야기를 빨리 따라잡아야 한다는 숙제가 있긴 하지만,, 이렇게 영화를 공부하면서 봐야한다는 것이 참으로 새롭다.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 : 대혼돈의 멀티버스>는 새로웠던 공포 장르와의 결합과 앞으로의 마블에 대한 기대감을 잘 풀어낸 나름 괜찮은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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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파우더 밀크셰이크> 확고한 주제를 망친 우스운 작법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혈혈단신으로 조직의 보스인 '네이선(폴 지아마티)'이 주는 살인 미션을 수행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킬러 '샘(카렌 길런)'. 나날이 살인에 무뎌져 가는 와중에도 그녀는 15년 전 홀연히 모습을 숨긴 엄마 '스칼렛(레나 헤디)'을 비난하면서도 그리워한다. 그러던 어느 날 사라진 돈가방을 회수하라는 미션을 실패한 그녀 앞에 자신이 죽인 한 남성의 딸 '에밀리(클로이 콜먼)'가 나타나고, 샘은 오랜만에 느낀 죄책감을 달래기 위해 에밀리를 보호해주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이내 돈을 잃어 분노한 네이선과 과거 샘에게 아들을 잃은 범죄조직의 수장 '매컬리스터(랠프 이네슨)'가 그들을 쫓기 시작하고, 샘은 도서관 사서로 위장한 세 명의 조력자의 도움을 받아 결전을 준비한다.
악역의 완성도는 액션이나 히어로 영화의 완성도를 결정짓는 요소 중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강렬한 카리스마와 위압감, 그리고 탄탄한 철학적 논리로 무장한 악역이 있을 때 주인공이 겪는 역경과 성장, 그의 최종적인 승리는 그 어느 때보다 크고 값진 쾌감을 선사한다. <다크 나이트>의 조커, <어벤져스: 인피티니 워>의 타노스, <007 스카이폴>의 실바가 없었다면 배트맨, 어벤져스, 제임스 본드의 고난은 고통스럽지 않았을 것이고, 그들의 승리 혹은 패배도 심드렁했을지 모른다. 최근 큰 화제가 되었던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의 예고편에서 가장 큰 환호를 자아낸 장면 역시 과거의 악역인 닥터 옥토퍼스의 재등장이었다.
해외에서는 7월에 넷플릭스로 공개되었고 국내에서는 지난 8일에 극장에서 개봉한 <건파우더 밀크셰이크>는 악역의 중요성을 다시금 일깨워주는 영화다. 악역이야말로 강경한 여성 서사를 바탕으로 한 액션 영화인 <건파우더 밀크셰이크>의 완성도가 무너진 결정적 대목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가부장제라고 하는 오래되고 거대한 악을 처단하기 위한 여성들의 사투를 담고 있는데, 정작 거악을 묘사하는 방식이 목적과 어울리지 않게 우습다 보니 가부장제를 처단한 여성들의 성취는 뜻대로 빛나지 못한다.
<건파우더 밀크셰이크>가 그려내고자 한 여성들의 사투는 제목을 구성한 두 가지 상징에 깃들어 있다. 우선 영화는 '밀크셰이크'라는 소재 안에 여성들 간의 연대감과 그 연대가 확장되는 모습을 담는다. 작중 밀크셰이크는 샘이 엄마와 이별하기 직전에 나눠마신 음료다. 그녀는 떨어져 지내면서도 엄마와 이별했던 그 식당에서 항상 밀크셰이크를 주문하며, 설사 혼자 있더라도 항상 두 개의 빨대를 꽂아 놓는다. 따라서 밀크셰이크는 그녀가 비록 겉으로는 엄마에게 분노와 실망을 쏟아내지만, 내심 유일한 가족인 어머니와의 추억을 간직하면서 마음 한쪽에 위치한 애정의 끈을 놓지 않았음을 암시하는 장치다. 이처럼 끈끈한 여성, 모녀간의 관계는 긴 시간을 함께 했는데도 돈가방 하나에 와해되는 샘과 네이선의 유사 부녀 관계와 강력한 대조를 이룬다.
또한 밀크셰이크는 혈연관계로 묶여 있는 어머니와 딸의 관계를 보다 넓은 의미로 확장시킨다. 미션 중에 무고한 이를 죽였다는 죄책감을 씻기 위해 샘은 희생자의 딸인 에밀리의 목숨을 책임지기로 결정한다. 이렇게 샘을 만난 이후로 에밀리의 앞에는 항상 밀크셰이크가 놓여 있다. 샘이 그녀를 은신처로 데리고 갔을 때도, 에밀리의 안전을 걸고 매컬리스터와 협상을 벌일 때도 에밀리 앞에는 밀크셰이크가 있다. 이때 밀크셰이크로 맺어진 연대가 피해자로서의 여성 간에 형성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에밀리 입장에서 샘은 아버지를 죽인 킬러다. 그러나 그녀는 샘이 그러한 선택을 내리게 된 뒷배경을 알게 된 후 동병상련의 입장에서 이에는 이로 복수하는 대신 손을 맞잡고 연대하는 길을 택한다. 이러한 주제의식은 <블랙 위도우>에서 나타샤 로마노프가 마지막 순간 빌런인 태스크마스터를 제압하는 대신 설득하고 회유한 것과 맞닿아 있다.
한편 제목의 나머지 반절을 구성하는 건파우더는 여성 연대의 지향점을 암시한다. 샘은 도움을 요청하러 간 도서관에서 새로운 총을 받는데, 그 총들은 제인 오스틴, 샬롯 브론테, 버지니아 울프 등 주요 여성 작가들의 저서 사이에 숨겨져 있다. 그래서 건파우더라는 상징은 자연히 밀크셰이크로 맺어진 여성 연대가 악으로 상정된 남성, 특히 가부장제라는 시스템을 공격해야 한다는 방향성으로 이어진다. 딸들과 달리 아들을 이해하는 것은 그가 태어나고 성장하는 모든 순간마다 말이 따로 필요 없을 정도라는 빌런의 대사도 전혀 접점이 없는 두 단어가 하나의 제목에 뭉쳐야 하는 데 당위성을 더해준다.
다만 영화가 처단해야 할 악으로 설정된 인물이나 집단을 묘사하는 방식은 어설프고, 작위적이다. 우선 남성 캐릭터들은 무능력하다. 샘과 치열하게 부딪히는 네이선의 세 부하만 해도 지능이 부족하고, 눈치도 없으며, 판단력과 격투 실력이 극도로 부족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다 보니 볼링장이나 병원에서 샘이 이들과 한바탕 싸움을 펼칠 때 이 싸움은 전혀 긴장이 되지 않고, 이런 이들의 상사인 네이선과 그의 조직 역시 주인공 일행을 코너로 몰만한 위압감을 보여주지 못한다.
다른 남성들도 다르지 않다. 영화의 메인 빌런을 맡은 매컬리스터와 그의 조직은 돈 이외의 것은 신경 쓰지 않는 속물인 네이선마저 한 수 접고 들어갈 정도로 강력한 범죄조직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정작 첫 등장부터 끝까지 그들은 단 한 번도 진정으로 샘의 일행을 위기에 빠뜨리지 못한다. 예를 들어 운전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핸들과 페달을 각각 나누어 맡아 위기를 모면하는 샘과 에밀리에 비해 그들을 쫓는 남성들은 카 체이싱 장면에서 하나의 팀으로서 움직이지 못한다. 도서관에서 펼쳐지는 액션씬에서도 악역들은 숫자만 많을 뿐 샘과 스칼렛, 그리고 세 명의 사서들을 압도하지 못한다. 이처럼 작중 어떤 위기에도 불구하고 연대의 힘으로 승리를 쟁취하는 여성과 항상 배신을 일삼고 무력하게 무너지는 남성들이라는 이분법은 확고하다. 그 결과, 지루한 확신만이 남아 여성들의 이야기에 몰입하는 것도 쉽지 않고, 결국 영화는 최소한의 서스펜스를 유지하는 것마저 버거워 보인다.
이에 더해 한 편의 액션 영화, 범죄 영화로서도 <건파우더 밀크셰이크>에서는 다른 작품들과 차별화되는 측면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가장 힘을 준 것으로 보이는 식당에서의 원테이크 학살극마저 <올드보이>부터 <킹스맨>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은 영화들이 오마주한 바로 그 액션 시퀀스의 또 다른 변형 사례를 더하는 데 그친다. 그나마 앞서 언급한 카 체이싱 장면이 여성 간의 연대라는 영화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잘 보여주고, 모든 사람이 팔다리를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상황에서 펼쳐지는 병원 난투극이 비교적 참신해 보일 따름이다.
또한 당장 액션 영화인데도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와 <어벤져스>에서 네뷸라를 연기한 카렌 길런, <300>에서 고르고 왕비 역을 맡은 레나 헤디, 최근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에서 건재함을 보여준 양자경에 이르기까지 카리스마 넘치는 여전사들의 역량이 살아나는 장면이 없다. 당장 샘의 액션만 봐도 액션 연출이 효과적으로 뒷받침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비교적 긴 리듬으로 배우들의 액션을 보여주다 보니 오히려 박력이 다소 부족하고 어설픈 움직임이 여과 없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에게 맥없이 당하는 악역들의 어설픔은 배가되며, 그들을 해치우는 샘의 모습도 시원하거나 짜릿한 쾌감을 안기지 않는다.이에 더해 영화의 여러 세부 내용이 이전까지의 범죄 액션 영화들, 특히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키아누 리브스의 <존 윅> 시리즈와 유사하다는 점도 아쉬움을 남긴다. 도서관에 위치하여 두꺼운 책으로 위장한 무기 보관함이나 범죄자들이 드나드는 병원과 식당이라는 설정들이 대표적이다. 영화 속 세계관도 마찬가지인데, 하나의 기업으로 위장한 범죄조직이 여러 사업들에 손을 뻗은 것이나 범죄조직들이 어떤 범죄를 저질러도 빠져나갈 정도로 사회를 장악한 모습 등은 비슷한 장르의 작품들과 큰 차이가 없다. 이는 같은 메시지를 공유하는 <블랙 위도우>가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의 주요 인물들의 성별을 여성으로 바꾼 데 그친다는 비판을 받은 것과도 유사한 성격의 단점이다.
<건파우더 밀크셰이크>가 말하려는 바는 간명하다. 영화의 제목부터 흐름과 캐릭터에 이르기까지 곳곳에서 다양한 여성주의, 페미니즘 사상이 공유하는 공통의 문제의식, 곧 가부장제의 타파라는 메시지가 강하게 발산된다. 이는 <블랙 위도우> 뿐만 아니라 다양한 능력과 생각을 지닌 여성들이 모여 팀을 이뤄 남성 범죄자를 처단하며, 주인공이 자신을 조종하는 조커와 같은 남자로부터 벗어나고, 자신의 뜻을 함께할 제자 혹은 후계자를 두는 <버즈 오브 프레이> 같은 작품과 궤를 같이 한다고 느껴지는 이유다.
그러나 <건파우더 밀크셰이크>는 위의 메시지가 갖는 힘과 설득력을 논하기 이전에 메시지 자체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데 실패했다. 여러모로 부족한 완성도는 악으로 상정한 대상을 충분히 악독하게 그려내지 못할 경우 선의 편에 서서 사투를 펼치는 주인공들의 모습에서 별 감흥이 느껴지지 않고, 관객들을 몰입시키지도 못한다는 실패 공식을 다시 한번 증명해준다. 이렇게 <건파우더 밀크셰이크>는 여성 영화이기 이전에 한 편의 영화로서 실망스러움을 숨기지 못한다.
P(Poor, 형편없음)
같은 파리지옥에 빠져버린 또 다른 파리 한 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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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WFF데일리] 파스타샤 강변에 사는 아이들
* 이 글은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참석한 리뷰입니다.
* 스포일러가 있으니 관람하지 않으신 분은 읽으실 때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영화리뷰
[포스터]
[감독] 이네스 알베스
[출연] 에콰도르와 페루의 국경지대인 파스타사강 변에서 살아가는 아추아 부족 아이들
[시놉시스] 아마존 우림에서 아이들이 자연과 더불어 살아간다. 파스타사강 줄기와 나무 꼭대기를 오가며생활하는 그들은 협동하며 자율적인 일상을 이어간다.
***
누군가의 삶을 엿본다는 것은 참으로 묘한 일이다. 다큐멘터리 같은 것을 볼 때면 나는 내 안의 관음증적인 욕망이 해갈되는 것을 느끼곤 한다. 다른 사람의 삶 그 자체를 살핀다는 것은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것과 다름 없기 때문이다. 파스타샤 강 유역에 사는 <워터 오브 파스타샤>의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동북아시아의 도시인들이 감히 상상하지 못하는 종류의 삶을 산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를 통해 새로운 종류의 영감, 감회, 혹은 사색을 즐기게 되는 것이다. 자, 이제 아마존의 열대우림으로 떠나보자. 에콰도르와 페루의 어느 국경지대, 강과 숲을 벗하며 살아가는 아추아부족의 아이들을 만나러.
***
우리는 열대우림에 있다. 거대한 파스타샤 강이 있고 그 옆에는 무성한 숲이 있다. 그 숲에는 많은 식물과 곤충, 날짐승과들짐승이 있으며, 그 사이로는 한 무리의 아이들이 지난다. 그들은 서슴없이 나무를 올라 열매를 따고, 겁도 없이 거대한칼을 휘둘러 그것을 깨먹는다. 어른의 도움도 없이 그릇을 빚고, 예쁜 목걸이를 만들고, 빨래를 하고 저녁을 짓는다. 그들의 부모가 너무 바쁜 까닭에 이 아이들은 저희들끼리, 제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삶의 양식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부모가 없는 것도 아닌데, 카메라는 고집스럽게 그들만을 조명한 것은 이러한 낯선 곳에서 허물없이 자라나는 아이들을 담아내고자 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도시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아이들이 쉴 새 없이 가사노동에 시달리고, 그 열악하기 짝이 없는 지저분한 옷과 진흙 위를 뒹굴고 있는 것은 어쩌면 아동 학대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그 거대한 정글칼을 겁도 없이 휘두르는 아이들을 보고있노라면 '저러다 다치면 어쩌나' 싶어 공연히 보는 나의 간담이 다 서늘해진다. 그러나 우선은, 그러한 우려와 편견을 잠시 미루어 두자. 판단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다.
거대한 숲은 아이들의 일터이기도 하지만 거대한 놀이터이기도 하다. 개구리와 풀벌레는 울고, 나무덩쿨과 개울은 각각그네와 수영장이 되어 그들을 맞이한다. 바나나 잎은 근사한 치마가 되고, 나무 열매는 팽이가 되는 세상. 강과 숲은 아이들에게 그러한 세상이기도 하다.
아이들은 때가 되면 배를 타고 학교로 향한다. 숲의 한복판에서 스마트폰을 사용하며 그것에서부터 흘러나온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는 아이들은 결코 문명에서 아주 동떨어진 이들이 아니다. 우리가 흔히들 착각하는 완전한 타인이 아니라는소리다. 수십 명의 아이들이 노트북 화면에 출력된 영미 영화를 본다. 각자의 교과서를 들여다보며 열심히 공부하는 아이들도 있다. 시간이 남으면 빗줄기를 뚫고서라도 공을 차고 논다. 그들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치열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파스타샤 강변을 감히 원더랜드라고 칭하지는 않겠다. 이것은 그들의 삶을 단순히 낭만적으로 미화하고 그들의 노동의가치를 폄훼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고통스럽고 '미개한' 삶을 살고 있노라 비하하지도 않겠다. 그런 오만함을 품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다만 이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지구 반대편에는 어떤 삶이 있는지 엿보았다. 그 어린 아이들의 세곱절은 살았는데도, 나로서는 감히 상상하지 못할 삶이었다.(우리의 삶의 터전이 다른 것에 기인한 것이다.)
나는 에리카, 눈크이, 지저스, 누피르, 위마스, 나이암, 로살리나, 베르톨메오, 라몬, 치아스, 차님, 슈와, 파멜라, 와인치, 니샤, 야지, 야기, 파트리샤, 사라, 셰리, 페인트, 그리고 그밖에 차마 내가 기록하지 못한 아이들에게 갈채를 보내고 싶다. 그들은 너무나 충실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그것을 긍정하면서. 어떤 고난이 닥치더라도 그것을 견뎌내면서. 그것이 삶이기 때문에. 나 또한 삶을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그들의 삶을 엿본 것은 대단히 기쁜 일이었다.
아직 파스타샤의 아이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이라도 그들을 만나러 가보는 것은 어떨까?
아마존에서의 삶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다.
'워터 오브 파스타샤', 22.08.30 | 서울국제여성영화제 08/25(목) - 09/01(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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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간 이어져 온 암호 연쇄 살인🔪🩸 상상을 초월하는 압도적 공포 [롱레그스] 메인 예고편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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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했다 죽었어" 궁극의 수프를 찾아 떠난 고로 씨, 무슨 일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