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5-02-24 14:54:30
2월 넷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아쉬운 성적, 그러나 순위 유지는 성공한 새로운 캡틴 아메리카!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가 국내 누적 관객 수131만 명, 북미 누적 수익 약 1억 4,000만 달러를 벌어들이며
국내와 북미 모두 2주 연속 1위를 차지했습니다. 순위는 유지하였으나, 북미 박스오피스에서 지난주와와 비교하여 수익이
약 68%가 하락해 우려를 모으고 있습니다. 이번 작품은 약 1억 8천만 달러의 제작비가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북미 박스오피스 2위를 차지한 <더 몽키>는 <기생충>, <아노라>를 배급했던 네온의 역사상 두 번째로 큰 작품으로,
<롱레그스>로 연출력을 인정받은 오즈 퍼킨스 감독의 신작입니다.
스티븐 킹의 1980년대 단편소설을 각색한 작품으로, 쌍둥이와 그들의 어린 시절 장난감인 원숭이가 사람들에게
죽음을 초래하는 이야기를 다룬다고 합니다. 작품의 원작자인 스티븐 킹은 다른 그의 작품과는 확실히 다르다고 강조하며
"미친 듯이 독창적"이라고 평하기도 했습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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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어떻게 살다 갈 것인가
왜 우리는 살면서 잔인한 기억을 한 번쯤 겪게 될까요? 월요일에 들었던 질문이 머릿속을 떠돌았다. 금새 나는 한 가지의 끔찍한 순간이 떠올랐다. 그래서 이번 주의 내가 그 시간에 고통받았냐? 아니다. 지금의 나는 19과 20에 겪은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다. 너무 멀리 돌아왔다는 생각을 한 300번째 한 후, 내가 겪었던 고통은 과연 무엇인가?라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사실 별 것 아니다. 별 것 아니었다는 결론에 달한 것이 나의 트라우마 극복의 전부다. 이겨냈기 때문에 이런 말을 머릿속에 새기는 것일 거다. 근데 이것과 별개로 내가 무언가에 휘둘려 살았던 기억은 나의 행동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대체 왜 그랬지. 이 트라우마가 만든 창피한 경험은 역설적이게도 그 사건과 아무 상관이 없다. 난 누군가를 생각하는 법 자체를 몰랐다. 사랑받는 법도 주는 것도 몰랐기 때문에 방황했던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했다. 내가 미쳤지. 미쳐도 단단히 미쳤지. 바보 같은 순간이 머릿속에 스쳐가는 오늘이다. 그때의 시간은 어리다는 말로 전부 수식할 수 없으니 오늘 밤도 이불을 뻥뻥 차게 생겼다.
다행인 점은 있다. 내가 미쳤지 싶었던 때에서 얻은 건 있으니 말이다. 이 얻은 것은 두 가지다. 사랑받는 인생은 무엇이고, 그걸 주는 삶이란 또 어떤 것인가? 에 관한 것이다. 이건 살면서 굉장히 중요했다. 내 정신연령이 죽을 때까지 10대에 머무를 순 없잖아? 세상의 모든 애정이 이성 간의 사랑과 그것이 아닌 무언가로 나뉜다면 삶이 퍽퍽해질 것이다. 물론 선을 넘는 건 나 역시 부담스럽겠지만 나는 누군가가 나에게 보내는 따뜻한 무언가를 잘 보듬으려고 한다. 살다 보니 정말 사랑이 전부였다. 내가 무언가를 위해 노력할 때는 보통 내가 좋아하는 타인에게 더 당당해지기 위함이었다. 또 언제는 그가 한 말 한마디가 내 동기부여의 전부가 되기도 했다. 이런 시간들을 보내고 나니 이성 간의 무언가가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누구에게 진심인 편이 된다는 건 굉장히 어렵다는 걸 알았다. 진정성은 사소한 것에서 왔었다. 내가 지키는 소소한 것에서 섬세함이 생기고 그 사람의 말에 설득력이 만들어진다. 그러면 상대방은 보통 '이 사람이 진정성을 갖고 행동하는구나'라고 느껴 나를 좋아해 준다. 보통 그런 지레짐작은 맞는 말이다. 난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기 때문이다. 진정성이 없이 나 스스로의 이미지를 속이는 것처럼 행동하는 건 싫다. 진실된 사람이라는 말에 유달리 집착했던 나는 앞과 뒤가 다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이 태도에는 단점이 있다. 마음이 깊어진다는 것이다. 짝사랑을 심하게 한다는 게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것에 취해있으면 그 사람에게 맞춰진다. 그러면 하나라도 더 해주고 싶어 진다. 사랑받기 위해서다. 정서적인 무언가를 받기 위해 계속해서 어떤 행동들을 하는 것이다. 언젠가 끝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이러다가 크게 다칠 거라는 걸 알면서도 점점 뒤가 없어진다. 모 아니면 도인 내 방식이 가끔 질린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마음을 막을 수 있느냐. 글쎄. 아마 아닐 것이다. 지극히 하고 싶은 말만 하는 나는 진정성을 위해 내 언어로만 행동하고 말한다. 그리고 두려워한다. 이 사람이 언젠가 날 떠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다.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날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떠나간 후의 기분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것이다. 잃고 나서 난 이런 것들을 배웠다고 자위하는 건 이제 질렸다. 점점 나이가 들수록 무서운 게 많아지는 셈이다. 차라리 누군가를 아껴주지 않는다면 다칠 일도 없을 텐데. 난 오늘도 일어나지 않은 일을 무서워한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필연을 운명에 빗댄 영화다. 내가 영화를 좋아하게 된 계기가 된 작품이기도 하다. 이 이유에는 인생에 대한 절묘한 비유가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영화는 좀 심각하게 극단적이다. 아버지에게 알맞은 애정을 받지 못한 채로 자란 마츠코. 시크한 아버지가 웃음을 주지 않은 것에 마음이 답답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마츠코는 일찍 취업에 성공해 선생님이 된다.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기 위해서다. 교사로서의 일과 도중, 마츠코가 재직하던 중학교 제자가 누군가의 돈을 훔치는 사건이 벌어진다. 마츠코는 이 사건으로 인해 억울하게 학교를 떠나게 되고 작가 지망생인 남자와 동거를 하게 된다.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지도 못했고 믿었던 학교에서까지 배신당한 마츠코. 이번에는 정말 날 사랑해주는 곳을 찾은 것 같았다. 근데 그건 잠깐 뿐이었다. 다자이 오사무의 재림이라는 말과 함께 미래가 밝았던 첫 번째 남자 친구는 예술가의 지나친 우울함 때문인지 자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두 번째 남자 친구는 첫 번째 남자 친구에게 열등감이 가득했던 인물이었다. 마츠코를 얻음으로써 이 열등감을 해소하려 했었다는 이유로 결별을 선언한다. 자기 내적의 무언가 때문에 마츠코를 이용한 것이다. 연이은 이별 후 직장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마츠코. 새로운 일터는 마사지방이었다. 업계 톱으로 잘 나갔던 그녀지만 이내 회사가 무너지게 되고 다시 위기에 봉착한다. 이 시기에 원래 살던 집으로 들어가 아버지의 일기를 읽고 '마츠코 연락 없음'이란 글을 읽게 된다. 아버지의 애정을 재확인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다시 홀로 집을 나와 독립을 시작하고 세 번째 남자 오노 데라를 만나게 된다. 이 남자의 정체는 사기꾼이었다. 후에 마츠코를 배신하자 결국 살인을 저지르게 되고 네 번째 남자를 만나 삶을 살던 도중 경찰에 잡혀가게 된다. 8년형을 선고받고 만기출소로 나온 마츠코. 다른 남자를 만나게 되는데 그 남자는 교사 시절 도둑 누명을 쓰게 만든 제자였다. 제자 류와의 사랑에 빠지는 데는 성공하지만 정작 끝은 좋지 못했다. 범죄자가 되어 감옥에 갔다 온 후 마츠코를 돌보기를커녕 주먹 한대 쳐버리고 류는 도망친다. 결국 버림받게 되는 마츠코. 히키코모리처럼 집에서 은둔하며 TV만 보다가 우연히 본 아이돌에게 빠지게 된다. 하는 거라곤 그 아이돌에게 편지 보내는 것 빼곤 아무것도 없던 마츠코. 감옥 동기가 재기할 수 있을 거라며 건넨 명함에 행복 회로를 돌리다 후반부에 허무하게 객사하게 된다. 그게 영화의 끝이다.
이 영화는 많이 비극적이다. 선생님이란 좋은 직업으로 시작해서 결과적으로 누구에게도 사랑을 받지 못한 여자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과할 정도로 사랑을 찾는다. 2021년의 우리가 보기엔 '굳이 저럴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다. 영화의 주인공이 보여준 행보와 같은 질문을 우리의 삶에 던질 수 있다. 과연 사랑이 그렇게나 중요할까? 주인공의 자존심까지 다 팔아가며 받고 싶을 만큼 관심과 애정이 우리 삶에서 중요할까? 정말 중요한 질문은 이거 말고 하나 더 있다. 그거 받는다고 해서 우리 삶이 극적으로 나아진다는 보장이 있는가? 어차피 누군가는 어떤 인물의 삶에서 떠나갈 수밖에 없다. 겉보기엔 오해로 멀어지는 경우는 부지기수다. 누군가는 세상을 떠나기도 한다. 당연하다. 모든 영화에는 엔딩이 있는 것처럼 우리는 필연적인 끝을 향해 달려갈 수밖에 없다. 불륜이든 풋풋한 첫사랑이든 우리는 끝이 어떤 결말로 이뤄질지 뻔히 아는데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 연인이 아니고 친구관계이거나 형이나 누나로 불려지는 사이여도 마찬가지다. 단 한 가지의 예외라도 허용되지 않는다. 우리는 마지막을 향하고 있다.
잘 알면서도 우리는 운명을 잊어버리며 살아간다. 우리 주변의 누군가를 생각해보자. 이 사람을 좋아하게 된 이유가 단지 섹슈얼한 무언가가 아니라 존경과 우정, 공감의 의미여도 마찬가지다. 사실 이 감정이야 말로 우리 인생의 전부다. 내가 느끼기엔 -내 기준- 이성 간의 사랑보다 이 감사함의 표시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내가 어려울 때 도와준 형들이 멋있다고 생각해서 난 게이가 아닌 것처럼 세상은 다양한 감정들로 이뤄져 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울 때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쓸 수도 있을 것이다. 존경이라는 말이 식상해질 때 누군가에 대해 '내가 어떤 존재가 되어봐야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순수한 동기부여는 이런 것들이다. 나를 믿어주는 존재가 있다면, 내가 무슨 짓을 하든 내 모습을 사랑해줄 인간이 있다면 그제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가족이 소중한 이유가 이거 아닐까? 거의 대다수에게 가족이란 어떤 일을 겪어도 내 편인 존재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자기 가족들에게 잘하는 것일 테지. 나 역시 예외는 아닐 것이다. 근데 난 이기적 이게도 이들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사랑받고 싶다. 가족이 주는 무언가는 항상 고마운데. 나는 그 외에서도 쓸모를 찾고 싶다. 난 개 같던 20대의 일상 속에서도 끊임없이 누군가를 찾았던 것 같다. 그 뭐 같던 순간에서 제일 찌질한건 나였단 걸 깨달은 후에도 다른 뭔가를 찾았던 것 같다. 이런 인간관계의 결말? 항상 같았다. 난 정말 나밖에 모른다. 친해지는 걸 못해 별것 아닌 것에도 이상한 사람 취급당했던 기억이 생생하고, 또 정신상태가 무너져 있을 때 본능적으로 사랑을 갈구하던 모습이 선하기 때문이다. 알고 있다. 이 모든 비극의 시작은 나란 걸. 남 탓 열심히 해도 어차피 원인은 나에게도 있다. 정말 타인이 100% 잘못해서 무언가 발생한 경우가 없다고 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그 경우가 절대다수라고 하면 그건 추한 남 탓이 될 것이다. 과연 나에게만 국한되는 이야기인가.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외부에서 우리의 쓸모를 증명받고자 한다. 우리 엄마나 아빠만 해도 자기 직업에 진심인 사람이다. 심지어 아빠는 방송에도 여러 번 나왔고 몇 박사들의 책에도 참여한 바 있다. 단순히 엄마 아빠가 돈을 벌기 위해서 이런 걸 하는 건 아닐 것 같다. 대학생 때 보이는 학생회, 대외활동 뭐 이런 것들도 그 예시다. 무언가를 갈구하고 있는 것이다. 학생회 활동과 여의도 중앙정치는 사실 (물리적으로만) 거리가 멀고, 대외활동과 같이 외부의 일은 끝이 다 정해져 있다. 해단식 하면 자주 못 본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 활동을 한다고 해서 취업문이 활짝 열리지는 않는다. 이렇게 시시하고 재미없게도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정해져 있는 결말로 향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이 모든 걸 벌였고 또 넘어지며 좌절한다. 같은 행동을 두 번 세 번 반복하게 되고 비슷한 순간을 마주한다. 씨발. 왜 나는 이거밖에 안 되는 인간이지. 나의 출생만으로도 세상에게 사과할 이유가 생기는 것 같다. 아무도 모르게 잠수 타다 죽을 때가 되면 내 머리를 방망이로 쳐줬으면 좋겠다. 그렇게 세상을 떠나고 싶다.
근데 우리 거의 대부분은 이 미련을 잊어버린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엔 다를 것이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걸 부정한다는 게 아니라 이제 그런 필연이 중요해지지 않아 진다는 뜻이다. 왜? 그게 행복하기 때문이다. 자주 못 보는 사람이더라도, 애초에 표현하면 부담스러워할 것 같아도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사람들을 위해 산다.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 기약하며 말이다. <중경삼림>과 <노매드 랜드>를 봤던 이유도 마찬가지다. 난 항상 이들을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살았던 것 같다. 아름다웠던 순간을 다시 돌이키는 것만큼 인생에서 즐거운 건 없다. 토익 공부를 해도, 유럽에 가도, 사고 싶었던걸 사도 항상 무언갈 상상하고 있었다. 현실은 아니었다. 어떤 선택지를 골라서 내 결과 중 아무것이 바뀌었다 하더라도 난 지금과 크게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마음 한편으론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다. 한발 더 나아가자. 영원한 건 없다. 뭔 선택지를 골라도 나는 아팠을 것이다. 인간이기 때문에 사랑받을 줄 몰랐고 하는 것도 서툴렀다. 이 문제의 해결책은 간단하다. 영원히 혼자 사는 것이다. 그럼 외롭기만 하지 사람에게 상처 받는 일은 없어 좋을 것이다.
이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이 당연한 정답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건넨다. 과연 그게 맞아?라고 말이다. 아니다. 당연히 아니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한심한 순간을 반복한다. 나만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홍상수나 윤종신을 좋아하는 이유 역시 우리 인생에서 이것에 공감하는 지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차피 끝이 정해져 있는 생인데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갈 것인가. 우리는 실패했기 때문에 스스로를 미워하는 경향이 있다. 퍼주지 말걸. 비극적인 사건에 놓인 우리를 위로하기보단 학대한다. 영화는 이런 우리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넨다. 극도로 비극적인 인물 설정? 현실적이지 않은 게 맞다. 근데 현실적이지 않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우리는 이것에 공감한다. 상처 투성이에 그 아무도 찾지 않는 모습이야 말로 우리의 현실이다. 사람에게 상처 받아 사과받으면 그게 다 없던 일이 되나? 또 그 사람들이 사과를 과연 몇 번이나 했나? 또, 뮤지컬을 중심으로 영화를 전개한 이유? 비비드한 색감? 우리에게 이 마츠코의 삶을 비극이라고 재단할 권리가 있을까? 그 때 만큼은 행복했을텐데. '왜 굳이 3자 주인공이 나왔는가'나 '뮤지컬+색감배치'의 이유는 우리의 인생을 대변한다. 우리는 원래 이 모양 이 꼴로 살 수밖에 없다. 근데 이런 영화와 현실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베풀면서 살아야 한다. 왜? 인간의 가치는 무얼 받느냐가 아니라 무얼 주느냐에 따라 달려있기 때문이다. 비록 비극적인 사건이 연이어 겹쳐 좌절하는 삶일지라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극단적인 비극을 보여준다. 근데 어떻게 전개하나? 도 중요하다. 바로 주인공을 따로 설정해 그 인물로 하여금 마츠코의 일대기를 좇게 만든 것이다. 이럼 뭐가 되냐? 어느 정도 객관화가 된다. 극한의 비극적인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면 마츠코가 어떤 인물인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너무 타인의존적인 측면도 있었던 건 맞지만 당연히 좋은 부분도 많이 볼 것이다. 이 사람은 누군가를 품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 원인이 사랑의 결핍이더라도 괜찮다. 마음의 구멍 한 구석을 인정하게 되는 것도 다 좋으니까, 무서워서 숨지는 말자. 그게 우리가 인생을 사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한동안 병의 마수에 빠져 방황하고 나서 얻은 결론도 이와 비슷하다. 어차피 결론이 똑같다면 한 번쯤 또 한 명에게 모든 사랑을 다 가져다주어도 괜찮지 않을까. 나 자신이 인기가 없더라도 누군가의 인생이 옳다는 증명이 된다면 그 나름대로 성공한 삶일 것이다. 난 나에게 이 말을 해준 사람의 이 문장을 이루기 위해 그 20대를 보내왔고, 한 번도 진정성이 없었던 적 없었으며 나름대로 행복했다. 그래서 난 내가 한 말에 당당하다고 생각한다. 내 인생이 혐오스럽게 느껴지더라도 한 번쯤은 필연에 부딪히는 시도가 필요하다. 그게 우리가 삶을 살아가며 겪는 난제를 돌파하는 방식일 것이다. 영원한건 없다 하더라도 그 순간 만큼은 나를 믿고 앞으로 나아가자. 마음이 괴롭다면 병원에라도 꼭 가자. 그것이야 말로 구멍이 난 사람에게 좋은 터닝 포인트가 될 것이라고 400% 확신한다. 우리는 알고 있다. 모름지기 이 영화가 말해주는 바와 같이, 인간의 가치는 무얼 받느냐가 아니라 뭘 해주느냐에 따라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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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영화를 보고 리뷰를 안 쓰면 그건 범죄지
튀르키예 여행길
아빠. 아빠가 어렸을 때 원했던 건 뭐야? 튀르키예 여행길에 오른 부녀. 부녀는 영상을 기록하려고 한다. 딸 소피는 이 캠코더를 들고 아버지 앞에 섰다. 듬직한 아버지라고 해서 모든 것을 다 아는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미소가 떠나가지 않았던 아버지. 다른 아빠들처럼 딸에게 한없이 다정하다.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는 이유는 사실 따로 있다. 딸과 아이의 어머니는 함께 사는 것 같지만 정작 부부끼리는 이혼한 듯하다. 그래도 아버지와 딸 사이에 크게 문제가 있지는 않다. 아빠가 평소에 딸에게 많은 신경을 써주지 않는 것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지금 앞에 있는 것에만 집중하자. 평소에 부녀관의 관계가 어쨌든 간에 둘에게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니 말이다. 아빠와 함께라는 것이 즐거운 소피. 생글생글한 표정을 지으며 아버지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한다. 환하게 웃으며 답하는 아버지 캘럼. 그런데 뭐랄까 아버지의 눈빛이 뭔가 다른 것 같다. 너무 즐거워서 그런 걸까? 어린 소피가 뭔가 어두워 보이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기에는 나이가 11살이다. 그래도 이런 소피에게 왠지 캘럼의 그림자가 느껴진다. 왠지 불안해 보이는 아버지. 아버지도 누군가와, 특히 소피와 함께하는 것을 그리워했던 듯하다. 아버지의 외로움이 느껴졌던 어린 소피였기에 이 여행이 성인이 된 후에도 오래 기억에 남지 않았을까. 살짝 어두웠던 아버지를 봤던 그녀의 기억이, 소피의 낡은 캠코더에서 환하게 재생된다.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
이 영화는 어른인 소피가 유년시절 겪었던 아버지와의 여행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전체적으로 과거 시점을 바탕으로 한 영화. 이 과거를 떠올리는 데 있어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역시 캠코더다. 캠코더를 보고 과거 기억을 떠올라는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왜 과거 기억을 떠올리는 영화가 됐을까? 소피라는 인물에게 아버지와의 여행이 당연히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는 살짝 덜 임팩트 있었던 기억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이 기억을 떠올리는 이유(샬롯 웰스 감독이 이 영화의 소재로 자전적인 키워드를 고른 이유)는 간단하다. 가장 아름다운 기억이고, 그만큼 아쉬운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에 대해 왜 아름다운 만큼 아쉬운 부분도 있는지를 묘사한다. 우선 왜 아름다운가? 에 대한 내용이다. 영화에 뭔가 임팩트가 쾅 찍히는 사건은 없다. 갑자기 아버지가 크게 아프다거나, 딸 소피가 위험에 처한다거나 하는 내용은 없다.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튀르키예 여행이 전부다. 뭔가 심심한 영화의 형식. 어떤 분들은 '그래서 어쩌라는 것인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렇게 영화를 이렇게 극적으로 연출하지 않았다는 것이 사실 이 영화의 핵심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여행기로 끝나야 아버지 캘럼의 내면 묘사가 성공적으로 이뤄질 수 있다. 또 영화에서 아버지만큼이나 중요한 인물이 딸 소피다. 딸 소피의 리액션이 현재 시점과의 대조를 이뤄서 '이 사람이 어떻게 변했는가'를 조명할 수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이 기억들이 왜 특별할 수밖에 없는지에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이 문장의 의미는 간단하다. 영화 전체적으로 담겨있는 것은 소피의 회한이다. 이 회한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일상적인 제스처도 알아채지 못했다'라는 아쉬움이 담겨야 한다. 이렇기 위해서 극적인 사건을 넣으면 후반부에 강조되는 영화의 내적 정서에 금이 갈 것이다. 영화 전체적으로 이 극적인 사건보다, 현재와 과거의 대비를 강조한 티가 난다. 다 보고 나서 '영화의 하이라이트가 뭐야?'라고 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 바로 아버지가 딸에게 어떤 대사를 하는 신인데, 이 대사에 방점이 찍힌 것도 형식에서 오는 강점이라고 볼 수 있겠다.
쉽게 볼 수 없던 것에 대하여
이 영화가 가지는 비범함 중 하나는 창의성이다. 이 창의성은 기획력과도 관련이 있다. 영화의 핵심 소재는 사실 좀 아이러니하다고 볼 수 있다. 바로 '아버지에게서 그때 보지 못한 것'에 대해서다. 보지 못한 것을 본다는 것은 좀 이질적으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영화에서 굉장히 간단하게 이를 보여줬다.
우선 첫 번째 '볼 수 없던 것'은 아버지의 외로움이다. 영화가 어떻게 아버지의 외로움을 묘사했을까. 바로 캠코더라는 소재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캠코더는 기록에 관한 도구다. 딸 소피는 아버지와 여행하며 사소한 것도 기록에 남긴다. 영화가 만들어져서 우리 모두가 볼 수 있지만 작품 내적으로 소피는 '나 혼자만 볼 거'라서 이 영상을 찍는다. 이 영상은 종종 소피의 질문들로 이루어져 있다. 뭐 아무 생각 없이 내뱉는 질문도 있지만 어떤 질문은 왜 아버지 캘럼이 그런 기분에 있는가? 와도 닿아있다. 그리고 또 어쩔 때는 아버지 캘럼이 이 캠코더에 어떤 코멘트를 한다. 이 답을 잘 생각해 보면 우리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쉽게 투영할 수 있다. 이 코멘트는 왜 이 지점에서 아버지의 내면을 묘사하는 장치로 느껴진다. 그리고 캠코더라는 소재가 등장하지 않은 장면이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하다. 영화 도처에 깔려있는 외로움을 묘사할 때, 주위에 캠코더가 없는 캘럼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가 작품에서 밑줄 쳐져 있기 때문이다. 소피가 든 캠코더 앞에서 행복해 보이는 캘럼과 대비되는 이미지가 있기 때문에, 이 부분이 연출적으로 더 강조되어 있는 듯하다.
또 이 보이지 않는 것을 우리에게 표현하기 위해서 쓴 방법 중 하나는 상상력이다. 영화에서 좀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할 법한 요소들에 인물들의 내면이 서려있는 지점을 잘 묘사했다. 이는 이 요소들을 우리가 찾을 때 과연 어떤 모습이었나? 와도 닿아 있는 부분이다. 글쓴이가 생각하는 영화의 최고 강점이다.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영화에서 가장 큰 장점으로 뽑을 수 있는 부분은 역시 미술이다. <노매드랜드>처럼 자연 풍광을 아름답게 묘사하거나, <아바타 : 물의 길>처럼 그래픽을 바탕으로 한 미장센을 구현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애프터썬>에서 보여주는 미술은 익숙하면서도 다르다. 글쓴이는 이 <애프터썬>이 시각적으로 영화를 보여주기 위해 취한 형식을 지금 팝 음악 아티스트들이 하는 방식이라고 말하고 싶다. 왠지 모르게 검정치마와 저스틴 비버가 음악을 만들며 낸 뮤직비디오에서 본 듯한 느낌을 영화 러닝타임 동안 내내 끌고 간다. 이런 감성이 최근에도 유행으로 통하는 것 같다. 얼마 전에 '뉴진스'라는 팀이 'ditto'라는 곡을 발표했다. 이 노래를 발표하면서 낸 뮤직비디오가 이런 느낌이었다. 물론 이 외에도 영화의 때깔이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부분이 많다. 여러분이 지금 네이버에 들어가서 '애프터썬'이라 검색하며 나오는 스틸샷들이 있다. 이 스틸샷이 글쓴이 개인적으로는 튀르키예라는 지역 특성이 전부 다 들어간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 대신 주인공 부녀가 동화 같은 여행지 한 곳을 방문한 것처럼 보인다. 이를 구현하기 위해 살짝 탁하지만 채도가 진한 색감이 등장했다. 또 영화를 보면서 안정적이라고 느낄 수 있었던 건 비슷한 색을 효과적으로 화면 안에 반복했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구체적으로 이 영화 제목이라고 볼 수 있는 '애프터 썬'의 장면이 있다. 어떤 행동을 딸에게 하는 아버지의 모습인데, 이는 가족 간의 유대가 끈끈한 두 사람의 내면을 묘사하는 한 가지의 방법이다. 또 후반부에 아버지의 어떤 행동이 더 두드러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조명의 좋은 활용이 돋보였다.
이런 빈티지 감성을 사실 볼 만큼 봤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애프터썬>의 빈티지는 이번에도 통했다. 역시 영화는 잘 만들어야 최고다. 그런데 이 시각적으로 아날로그틱한 감성이 단순히 보기 좋으라고만 사용된 건 아닌 듯하다. 영화의 주제적인 측면과 어울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영화를 이끄는 두 가지 원동력은 기억과 기록이다. 글쓴이는 전자 기억을 이렇게 빈티지하게 연출한 것이 기억과 병치시키기 위함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기억 혹은 기록이 더 사실적인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기억 덕에 기록을 꺼내고, 기록 덕에 기억이 되살아나는 인물의 내면을 형상화한 것이다. 후반부 과거와 현재시점이 엇갈리는 연출이 그런 측면을 반영한 것 같다. 또 이 빈티지한 색감만큼이나 영화의 화면이 살짝 모호하다는 느낌이 든다. 이 모호한 느낌은 영화에서 비중이 그렇게 크지는 않지만 이 덕에 극의 긴장감을 형성하고 있다. 이 특정 대사들이 보여주는 축축함이 과연 우리에게 시각적인 상상력을 어떻게 작용하는지 생각하시고 본다면 영화의 감상이 넓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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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해전야 / New Year Blues, 2020
지금도 회자되는 <러브 액츄얼리2003>,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2009>, 그리고 <발렌타인 데이2010>의 특징이 있습니다.
한데 모이기 어려운 배우들이 한 영화에 나오는 것과 특정 시즌을 노렸으며, 하나같이 "옴니버스"영화라는 점입니다.
그런 점에서 영화 <새해전야>도 크게 다르지가 않는데, 제목에서 어디선가 본듯한 느낌도 들 겁니다.
그도 그럴 것이 <결혼전야2013>를 만들었던 "홍지영"감독을 비롯하여 "이연희"와 "김강우"분도 이번 영화에서 그대로 나오거든요.
속편에 대한 걱정은 잠시, 미뤄두고 영화 <새해전야>는 개봉부터 힘들었습니다.
제목처럼 2020년 12월 30일에 개봉해 "새해"를 맞이하는 것이 계획이었겠지만, "코로나19"로 그러지 못했습니다.
양력으로는 이미, 새해를 맞이한 지 2달이나 흘렀지만 아직 음력으로는 아직이니 부득이하게 "설 연휴"에 맞춰 개봉했는데요.
무엇보다 <소울>과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까지 국내 극장가에서 국내 영화 찾기도 힘들어 내심 이런 영화를 기대했기도 했고요.
'그렇게, 관람한 느낌은 어땠는지?' - 영화 <새해전야>에 대한 감상을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영화는 어느덧, 새해를 앞둔 연말을 보여줍니다.
강력반에서 민원실로 좌천된 '지호'는 이혼 소송 중 '신변보호'를 요구하는 "효영", 일방적인 남자 친구의 이별 통보에 홧김에 아르헨티나까지 오게 된 "진아"는 그곳에서 와인 배달원 "재헌"을 만납니다.
그리고 결혼을 앞둔 패럼릭픽 국가대표 "래환"과 "오월", 국제 커플 "용찬"과 "야오린", 그리고 "용찬"의 누나이자 시누이 "용미"까지 이들은 모두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1. 소재만 바꾸면 쓰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새해전야2021>는 <결혼전야2013>를 만들었던 "홍지영"감독을 비롯해 "이연희"와 "김강우"분이 그대로 나오는데요.
그렇기에 전편을 챙겨봐야 하는 걱정도 잠시 일렁이나 배역들이 이어지는 영화는 아니기에 관객들에게 이런 숙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편을 챙겨본 관객들로서는 영화의 유사함은 지워지지 않을 겁니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국제결혼과 위기가 존재하는 커플도 있으니 <새해전야>로서는 이야기가 이어지지도 않는 <결혼전야>와의 비교는 피할 수가 없습니다.
영화도 이런 유사성을 알기에 "시누이" 캐릭터를 새로이 추가하거나 이별이 아닌 "이혼"이라는 소재들을 바꾸는 등 시도들이 보입니다.
물론, 이렇다고 해서 <새해전야>만의 온전한 그림들을 나오지는 않지만 가장 아쉬운 점은 "옴니버스" 즉, 이야기입니다.
국내에서 "옴니버스"는 흥행이 잘 안되는 장르이면서도 어려운 장르입니다.
그나마, 흥행에 성공한 영화가 "장진"의 <굿모닝 프레지던트2009>가 기록한 255만명임과 동시에 네이버 평점 6.70으로 좋지도 않습니다.
왜, 이런 이유가 있는 것일까요?
2. 이야기의 구조가 같다고 복붙을?
이런 이유에는 "옴니버스"라는 장르의 특수성을 살펴봐야 합니다.
많은 배우들이 출연하는 것만 본다면, "멀티캐스팅"과 유사하나 "옴니버스"는 각 캐릭터들의 이야기가 개별적으로 전개되는데요.
이야기의 연결도 되지 않아 캐릭터별로 이야기를 봐야 하는 관객들의 피로는 다른 영화에 비해 배가 됩니다.
그렇기에 이야기의 러닝타임은 길어지고, 캐릭터들의 설명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단면적으로 소개되는데 그칠 뿐입니다.
그리고 이런 단점들이 <새해전야>에서도 그대로, 노출되고 반복됩니다.
각자의 이야기들을 살펴보면, 관계에서의 위기를 보여주는데 이에 대한 과정이 좋게 말하면 시원시원하고 나쁘게 말하면 정말 급합니다.
'지호 - 효영'의 경우. 두 캐릭터가 이혼을 겪는 캐릭터들인데 '지호'는 이후 전처에게 전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의외로 전처는 이에 '잘 사귀어 보라'라는 응원을 받지만, '효영'은 전 남편에게 위협을 당하는 엇갈린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만해도 길게 풀어갈 수 있지만, 영화는 이를 그냥 과감하게 뛰어넘기며 맺어주는 장면으로 마무리합니다.
이런 모습이 "래환 - 오월"에게도 그대로 반복되고, "용찬 - 야오린"에게도 적용되니 동어반복에 관객들은 지쳐가는데요.
그래서인지 "꼭 있어야 했나?'싶은 캐릭터 출연의 당위성까지 흔들립니다.
3. 익숙함이 주는 포근함?
그렇기에 "옴니버스"에게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각 캐릭터들의 동선을 겹치는 우발적인 장면들 넣는데요.
스크린 너머 관객들은 알지만, 극 중 캐릭터들을 모르는 정보의 비대칭으로 만들어지는 재미는 "옴니버스"를 즐기는 요소 중 하나입니다.
<새해전야>에서도 이런 장면들이 보이는데, 극 중 "용찬"이 "지호"에게 사건을 의뢰하거나 "래환"의 재활 트레이너가 "효영"이라든지 "오월"과 "용찬"의 누나 "용미"가 서로 아는 사이라든지 말이죠.
하지만 이런 관계들이 별개의 이야기가 아니라 같이 화면에 나온다는 것에 그치며, "옴니버스"라서 더 아쉬운 시도에 그칩니다.
영화 <새해전야>의 원제 'New Year Blues'에서 'Blues'는 가벼운 우울증으로 해석됩니다.
극 중에서도 이를 "새해병"으로 "월요병"과 비슷하게 말하는데, 이를 빗대어 본다면 극장에서 본 게 아쉽다고 해석되기도 하는데요.
그럼에도 영화 <새해전야>는 무리 없이 즐기는 영화임은 분명합니다.
앞서 언급한 <러브 액츄얼리2003>,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2009>, 그리고 <발렌타인 데이2010>처럼 한없이 가벼우며, "로맨틱 코미디"이라면 무릇 나와주어야 하는 장면들과 상황까지 모든 것이 예상 가능한 영화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본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는 맛이라 냄비에 물부터 올리는 과정처럼 <새해전야>는 신작인데도 익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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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 가이> 세상 모든 NPC에게 전하는 희망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라이언 레이놀즈 주연의 <프리 가이>는 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들로 가득하다. 상상하는 모든 것이 가능해지고 폭력이 난무하는 게임, '프리 시티'의 모습은 포트나이트와 GTA 시리즈를 닮았다. 주인공 '가이(라이언 레이놀즈)'가 자신의 현실이 진짜가 아니었다는 걸 깨닫는 스토리 라인, 주어진 각본에서 벗어나려는 주인공과 그를 보며 당황해하는 주변 사람들의 모습에서는 <트루먼쇼>가 보인다.
저작권 제국인 디즈니의 힘을 빌린 크리스 에반스의 카메오 출연 및 캡틴 아메리카 방패, 헐크의 팔, 스타워즈 광선검 같은 이스터에그의 등장은 스티븐 스필버그의 <레디 플레이어 원>을 연상케 한다. 코나미를 비튼 게 분명해 보이는 게임회사 수나미의 존재 역시 <레디 플레이어 원>만큼이나 일본 대중문화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려준다. 작중 게임과 현실을 넘나드는 가이의 존재감 또한 영화와 현실 사이 '제4의 벽'을 넘나들던 라이언 레이놀즈의 인생 부캐, 데드풀에 비견될 만하다.
그러나 <프리 가이>를 단순히 수많은 레퍼런스가 집합한 오락 영화로 치부하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 앞서 언급한 작품들과 달리 주인공을 게임 속 NPC로 설정한 결과, <프리 가이>는 현실에서 NPC와도 같은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위로는 물론, 그 이상의 희망을 주는 영화로 거듭나기 때문이다.
날강도와 피 튀기는 총격전이 공존하는 버라이어티한 도시, 프리 시티에서 평범한 은행원의 삶을 살아가던 '가이'는 거리에서 우연히 '몰로토프 걸(조너 코디)'과 마주치고, 한눈에 그녀에게 반해버린다. 그런 그에게 그녀는 자신의 이름이 사실 '밀리'이고, 가이가 보는 자신의 모습은 그저 게임 속 플레이어일 뿐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알려준다. 또한 자신과 자신의 동업자 '키즈(조 키어리)'에게 가이는 자신들이 개발한 게임을 프리 시티의 개발자 '앙투안(타이카 와이티티)'이 무단으로 도용한 증거를 찾을 때 도움이 되는 npc에 불과하다고도 말한다. 이에 그녀를 만나 마침내 삶의 의미를 찾았다고 믿었던 가이는 큰 좌절과 혼란 속으로 빠져든다.
그러나 으레 그렇듯 <프리 가이> 역시 주인공을 절망의 구렁텅이에 남겨두지 않는다. 진실을 깨달은 가이는 절친이자 은행 경비원인 '버디(랄렐 호워리)'를 찾아가 이 세상이 사실 가짜이고 계획된 시나리오대로 진행되는 것에 불과하다면 너는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묻는다. 그러자 버디는 이렇게 답한다. 세상이 진실이든 아니든 지금 내가 마주하고 있는 이 찰나의 순간과 현실을 어떻게 살아가는지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라고. 이러한 버디의 말을 들으면서 가이는 자신만의 인생을 살아갈 동력을 얻고, 그는 자신의 세계인 프리 시티를 구하기로 결심한다.
사실 <프리 가이>의 중심 플롯을 뒷받침하는 메시지, 곧 지금 마주하는 찰나의 순간에 집중하고 그 순간을 온전히 느끼면서 살자는 격려는 낯설지 않다. 일례로 이는 작년에 큰 반향을 일으킨 픽사의 애니메이션 <소울>과 일맥상통하는 측면이 있기도 하다. 개개인을 마모시키고 파편화하는 사회에서 무작정 목표만을 쫓기보다는 마음의 짐을 잠시 내려두고 지금 이 세상을 즐기자는 <소울>의 메시지도 재즈 음악을 만나 현대인들의 지친 마음을 따스하게 어루만진 바 있다.
하지만 익숙함과 별개로 <소울>의 위로에는 야누스의 두 얼굴 같은 일장일단이 있기도 하다. 당장의 삶이 고달픈 이들에게는 따뜻한 위로이지만, 그러한 개인들로 구성된 사회 전체의 맥락에서 보면 그 위로는 언제든 마약처럼 사람들로 하여금 구조적 모순과 현실의 문제를 잊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프리 가이>는 <소울>의 따뜻함 이면에 숨어 있는 이 함정을 영리하게 피해 간다. 그 중심에는 가이가 NPC라는 설정이 위치한다. 이 설정을 통해 <프리 가이>는 현대인들의 삶을 가이의 삶에 일치시키고, 자칫 평범할 수 있었던 위로를 실천적인 희망의 메시지로 탈바꿈시킨다.
작중 NPC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하면 종속성을 꼽을 수 있다. NPC는 자기 결정권을 지니는 일반 플레이어와 달리 게임이라는 세상 안에서 미리 결정된 방식대로 움직여야만 한다. 그들은 주어진 시나리오에 갇혀 있으며, 심지어 규칙에서 어긋나는 것을 불편해하며 스스로를 그 시나리오에 가두려고 한다. 버디는 가이로부터 불편한 진실을 들은 후에도 애써 이를 무시하려 한다. 카페 사장은 늘 마시던 커피가 아닌 카푸치노를 달라는 가이를 이상한 사람 취급하며, 매일마다 강도를 만나는 행인은 항복의 의미로 들어 올린 두 손을 좀처럼 내리지 못한다. 밀리를 만나기 전까지는 가이도 같은 일상을 반복한다.
이때 NPC들이 스스로를 게임의 규칙 속에 가두는 모습은 관객들로 하여금 이 작품에 정서적으로 강한 유대감을 느끼게 한다. 미셸 푸코에 따르면 게임 밖 현실을 사는 현대인들도 NPC처럼 일정한 규칙에 순응하게끔 스스로를 통제하기 때문이다. <감시와 처벌: 감옥의 탄생>에서 근대적 감옥이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고찰한 결과, 푸코는 감옥 체계가 공장, 학교, 병원 등과 같은 감옥 밖의 현상과 밀접한 상호 관련성을 지닌다고 지적한다. 판옵티콘을 닮은 사회 안에서 현대인들은 전반적으로 규율과 규범에 길들여져 있다는 것이다. 당장 교사가 학생을 감시할 수 있는 교실 구조, 불법 인터넷 사이트에 뜨는 유해정보 차단 알림 화면, 도로 구석구석 깔려 있는 cctv 등은 현대인들이 자기 자신을 감시, 감독하도록 만든다.* 이처럼 스스로를 통제하고 규칙에 종속시킨다는 공통점 덕분에 그저 한 NPC의 판타지였던 <프리 가이>는 이제 현대인들의 일기나 다름없어진다.
흥미로운 것은 푸코가 감시 사회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제안한 내용을 가이가 실천에 옮긴다는 사실로, 바로 이 대목에서 <프리 가이>는 동병상련의 위로를 넘어서는 실제적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다. 푸코는 사회가 우리에게 부과한 한계를 분석하고, 그 한계를 위반할 가능성을 모색해야 하며, 가능한 경우 변형을 시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구체적으로는 사회가 제시한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자신만의 규칙에 맞는 삶을 살아야 억압적인 사회와 권력관계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작중 가이는 이 모든 일을 해낸다. 그는 밀리의 도움과 자신의 노력을 통해 프리 시티라는 게임, 곧 사회의 오류를 발견한다. 이후 자신에게 부과되었고 본인이 이유도 모른 채 유지시켜 온 라이프 스타일을 거부한다. 매일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커피를 마시며 은행에 출근해서 똑같이 은행 강도를 만나야 했던 그는 의식주를 바꾸는 것은 물론 직접 은행 강도를 때려눕히기까지 한다.
심지어 영화는 가이의 이타심과 연대라는 키워드를 통해 한 발짝 더 나아간다. 이는 주인공 '가이(guy)'의 이름이 남녀 상관없이 일반적인 모든 사람들을 뜻하는 단어이고, 그에게 깨달음을 주는 친구의 이름이 문자 그대로 친구라는 의미인 '버디(buddy)'인 이유이기도 하다. 가이는 자신이 깨달은 진실을 주변인들에게도 전파한다. NPC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게임 플레이어들만의 세상을 발견한 후에는 새로운 세상의 재미를 버디와도 함께 나누려고 한다. 프리 시티가 게임 개발자에 의해 만들어진 허구의 것이라는 진실을 알게 된 후에도 마찬가지다. 그는 게임 속 모든 NPC들을 불러 모아서 불편한 진실을 전하고, 모든 순간순간을 가치 있게 살겠다는 자신의 다짐도 공유한다.
카페 사장은 늘 만들던 커피가 아니라 카푸치노 같은 새로운 메뉴들을 만들어 내고, 매일 강도를 만나 손을 번쩍 올려야 하던 남성은 그 손으로 주먹을 쥐어서 강도를 때리려고 노력한다. 플레이어들에게 퀘스트가 되어주는 대신 NPC끼리 한 데 모여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고 파업하기도 한다. 이렇게 가이와 친구들이 진정한 자유로 가득한 도시, 프리 시티를 일구어내는 모습을 보면 이미 NPC들과 한 마음인 관객 역시 일상 속 작은 변화를 통해 현실의 큰 변혁을 이끌어낼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그렇게 <프리 가이>는 단순한 개인적 차원의 위로가 아니라 보다 실천적인 희망으로 이해될 공간을 남겨둔다.
다만 <프리 가이>를 현대인이라는 NPC에게 각성의 희망을 건네는 영화로 이해할 때, 이 작품의 결말은 유난히 짙은 아쉬움을 선사한다. <프리 가이>는 애매한 비중을 차지하던 남녀 주인공의 로맨스를 급진전시키면서 마무리된다. 이때 로맨스가 부자연스럽게 부각되는 것은 그 자체로도 문제이지만, 무엇보다도 자아를 찾고 자신만의 세상을 일구어낸 가이의 의미를 다시금 제한한다는 점에서 더 큰 문제다. 로맨스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가이를 마치 게임 개발자의 아바타처럼 묘사하면서 대담한 전개에 스스로 제동을 거는 것이다.
이러한 아쉬움은 <프리 가이> 속 다른 단점들마저 가려버린다. 게임 속 이야기에 비해 게임 밖에서 밀리와 키즈가 앙트완과 대립하는 플롯의 몰입도가 부족한 것과 게임회사의 모든 작업이 엔터 키 하나로 처리되는 편리한 전개 등은 결말이 남기는 물음표에 압도된다. 개개인이 자신에게 부과된 한계를 극복하기를 바라는 영화가 정작 본인에게 부여된 상업영화라는 한계는 이겨내지 못한 상황이 펼쳐진 셈이다. 이렇게 <프리 가이>는 짜리한 해방감만큼이나 짙은 미련을 안기며 결승선 코앞에서 발을 헛디딘 채 마무리된다.
A(Acceptable, 무난함)
세상 모든 사람이 진정한 프리 시티를 만들 날을 희망하는 영화
* <괴물과 함께 살기>, 정성훈, 미지북스, p.155-157
** 같은 책, p.162-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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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포의 이반
공포의 이반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1984년 4월, 미국 클리블랜드 세븐힐즈 마을에서 포드 공장에서 오래 일하고 퇴직한 한 백인 노동자가 경찰에 체포된다. 그의 이름은 존 뎀얀유크.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나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으로 이민 온 사람이었다.
그의 혐의는 나치 부역자이면서 전쟁범죄자, 유대인 수용소에서 학살을 실행한 살인자였다. 평온하고 조용한 마을에서 평화롭게 살던 이웃 주민들은 충격에 휩싸인다. 사람 좋고 이웃들과 잘 지내고, 공장에서도 동료들 사이의 평판이 좋고, 가족들에게도 존경받는 아버지이자 할아버지였던 사람이 입에도 담기 어려운 잔인무도한 유대인 학살자라니.
1940년대 폴란드에는 독일이 만든 유대인 수용소가 여러 곳이 있었고, 이곳에서 무려 170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당한다. 그리고 뎀얀유크가 있었던 소비보르 수용소와 트레블링카 수용소에서만 65만 명 이상의 유대인이 학살당했다.
미국 사법부는 존 뎀얀유크의 전쟁범죄 가담에 대한 재판을 통해 유죄를 선고하고, 미국 추방령을 내린다. 미국 내부에서는 나치 전쟁범죄를 재판할 수 있는 법률이 없었기 때문에 추방령과 동시에 이스라엘에서 뎀얀유크를 전쟁범죄자로 체포했다.
이스라엘에서 재판을 받게 된 뎀얀유크는 트레블링카 수용소의 생존자들의 증언을 통해 그가 확실한 '공포의 이반'이라고 주장했다. 생존자들이 말하는 '공포의 이반'은 유대인을 가스실로 보내는 정도가 아니라 그가 칼과 몽둥이로 유대인을 찔러죽이고, 때려죽이고, 온갖 악행을 자행했다는 것이다.
'공포의 이반'으로 지목된 존 뎀얀유크는 모든 혐의를 부인한다. 자신은 '공포의 이반'이 아니며, 잘못된 정보로 억울하게 잡혀온 피해자라고 말한다. 이스라엘에서 존 뎀얀유크를 변호해 줄 변호사를 구하기 어려웠는데, 그 가운데 변호를 자처한 이스라엘 변호사 요람 셰프텔이 있었다.
존 뎀얀유크 사건은 1961년 같은 이스라엘 법정에서 열린 아돌프 아이히만 재판과 비교할 수 있다. 한나 아렌트의 재판 참관과 그 결과를 책으로 엮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펴내면서 '악의 평범성'을 설파한 것으로 유명한 '아이히만 재판'은 확실한 증거 자료를 바탕으로 아이히만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1962년 5월 31일, 사형집행으로 전쟁범죄자를 처형했다.
한나 아렌트는 유대인으로, 자신이 직접 나치 전범 재판을 참관하고 싶다고 '뉴요커'에 요청했고, '뉴요커'가 받아들여 특파원 자격으로 이스라엘에서 머물며 재판을 참관하고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제목으로 재판 과정을 책으로 펴냈으며, 그 내용에 '악의 평범성'을 주장하는 내용이 있다. 즉, 아이히만은 독재, 관료주의 체제에서 상부의 명령을 충실하게 따르는 관료로서의 역할을 했을 뿐, 아이히만이라는 '개인'은 지극히 평범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악행을 저지르는 인간은 특별한 인간이 아니라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한나 아렌트는 아돌프 아이히만의 정체를 몰랐거나, 속았을 확률이 매우 높다. 아이히만은 결코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다는 것이 나중에 다양한 증거 자료로 확인되고 있다. 즉, 아이히만은 히틀러 독재, 전체주의 체제에서 단순히 주어진 명령에 충실한 관료가 아니라, 그 자신이 유대인 말살에 확신을 갖고 실행한 확신범이라는 것, 아리안족의 우수성을 믿었고, 유대인과 공산주의자를 절멸해야 한다는 명제에 동의했으며, 자발적, 능동적으로 학살을 지휘했다는 증거가 나타난다. 이동기 교수는 학살자의 태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전략)전체주의 체제든 아니든 독재와 억압은 단순히 지배 이데올로기나 관료제 또는 위로부터의 명령에 의해서만 유지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 인식 전제다. 그것에는 지배 구조의 억압에 동참하는 행위자들의 능동적인 집단적 자기 형성의 과정이 항시 존재한다. 억압과 폭력의 가해자들 또는 가해 가담자들은 위로부터의 명령이나 관료제적 구조하에서 ‘선이냐 악이냐’ 식의 실존적 결단을 요구받는 고립된 개인이 아니다. 지배는 익명의 체제나 관료제적 기제로만 작동되는 것이 아니다. 지배는 항상 집단적 실천을 전제하고 폭력은 항상 구체적 가해자를 필요로 한다. 그 실천과 가해 행위는 대개 명령과 지시를 수동적으로 집행하는 이들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넘어 점차 자신의 일을 정확히 인지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심지어 관료제나 위로부터의 명령을 초월하고 경계를 뛰어넘는 행위자들에 의해 더욱 광폭하게 이루어진다.(후략)
즉, 능동적이고 자발적으로 학살 행위를 하는 인간이 반드시 존재하며, 나치 학살자들이 바로 그런 신념을 가진 자들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존 뎀얀유크도 아이히만과 같은 인물이다. 존 뎀얀유크는 우크라이나 출신이지만, 그는 독일군 부대에 들어가 유대인을 학살하는 방법을 체계적으로 배운 인물이다.
트레블링카 수용소의 생존자들은 존 뎀얀유크가 '공포의 이반'이라고 모두 같은 증언을 했고, 재판 과정에서 존 뎀얀유크의 나치 당시 사진과 나이 들어서의 사진을 분석한 전문가의 견해, 쏘련에서 나온 2차 세계대전 당시 존 뎀얀유크의 신분증 원본, 미국 이민국에서 작성한 존 뎀얀유크의 인터뷰 내용 등 존 뎀얀유크가 '공포의 이반'이라는 증거는 충분했다.
하지만 존 뎀얀유크의 변호사 요람 셰프텔은 생존자 로젠베르크의 증언을 뒤집는 문서를 제출한다. 로젠베르크는 '공포의 이반'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으며, 그가 저지른 만행을 고발했고, 그의 눈을 보고 그가 '공포의 이반'이라고 지목한 사람이었는데, 1947년에 작성한 문서에서 1943년 트레블링카 수용소에서 폭동이 발생했고, 그 과정에서 '공포의 이반'이 살해당했다고 자필로 쓴 내용이 나온 것이다.
로젠베르크는 딜레마에 빠졌다. 증언대에서는 분명 존 뎀얀유크가 '공포의 이반'이라고 지목했으나, 그가 1947년에 자필로 쓴 진술서에는 '공포의 이반'이 폭동의 와중에 살해당했다고 썼으니 말이다. 로젠베르크는 그 진술은 자신이 직접 목격한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쓴 것이며, '공포의 이반'이 살해되었기를 바라는 희망을 담은 것이었다고 진술한다.
결국 1988년 4월 18일, 이스라엘 법원은 존 뎀얀유크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존 뎀얀유크와 변호사들은 즉각 항소하고, 그 사이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다. 이 역사적 사건으로 쏘련 KGB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저지른 유대인 학살과 관련한 비밀문서를 공개하는데, 존 뎀얀유크의 변호사 요람 셰프텔은 모스크바와 키에프를 다니며 KGB 담당자를 만나 트레블링카 수용소와 관련한 비밀문서를 받아낸다.
요람 셰프텔이 받은 비밀문서에는 트레블링카에서 유대인 학살에 부역했던 부역자들이 남긴 진술서가 많았는데, 그 진술서에 '공포의 이반'에 관한 정보가 들어 있었다. 그들의 진술에 의하면 '공포의 이반'과 존 뎀얀유크는 닮지 않았다. 요람 셰프텔은 이 문서를 증거자료로 법원에 제출했고, 1993년 7월, 항소법원은 존 뎀얀유크와 그의 변호사 주장을 받아들여 존 뎀얀유크를 석방한다.
이 항소심 재판의 문제점은, 검사 쪽에서 제출한 수많은 증거자료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존 뎀얀유크의 변호사가 제출한 나치 부역자들이 남긴 진술서를 증거로 받아들인 것이다. 즉, 나치 협력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이면서 생존한 유대인의 증언을 배척했다는 점에서 항소심 재판부가 매우 무능했거나, '미국시민'을 사형시키는 것에 크게 부담을 느꼈다고 볼 수 있다.
무려 8년을 끈 이 역사적 재판에서 존 뎀얀유크는 전쟁범죄 가담 여부와 상관 없이 그가 '공포의 이반'이라 볼 수 없다는 판단으로 풀려난다. 이 재판에서 가장 큰 이익을 본 사람은 존 뎀얀유크의 변호사 요람 셰프텔이었다. 그는 이스라엘 국민의 비난을 정면으로 받으면서 유대인 학살자로 지목된 돈 뎀얀유크의 변호를 자처했고, 항소심에서 결국 무죄를 받으면서 크게 성공한다. 그는 변호사 수임료를 정확히 말하지 않았지만 대략 50만달러 이상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하며, 이 재판과 관련한 책을 써서 베스트셀러가 되어 큰 돈을 번다.
존 뎀얀유크는 미국으로 돌아와 평온한 일상을 보내지만, 미국 법무부는 그가 '공포의 이반'은 아닐지 모르지만, 독일 전쟁범죄, 유대인 학살에 가담한 증거는 확실하므로, 이번에는 이스라엘이 아닌, 독일 법정에 세울 계획을 세운다.
1999년 미국법무부와 이민국은 증거자료를 통해 존 뎀얀유크가 전쟁범죄 혐의가 있다고 판단해 독일로 추방한다. 그리고 2009년 독일 뮌헨 법정에서 전쟁범죄, 유대인 학살에 단순가담 혐의로 징역 5년형을 선고 받는다. 존 뎀얀유크의 변호사는 항소를 결정하고, 존 뎀얀유크는 감옥에 가지 않고 법정에서 풀려난다.
그리고 2012년, 항소심이 열리기 전에 독일에서 사망한다. 항소심 판결이 나지 않았으므로 존 뎀얀유크는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무죄인 상태로 죽은 것이다.
미국에 전쟁범죄자가 얼마나 많이 살고 있는가를 알 수 있는 서류가 1973년에 드러났는데, 미국 이민국은 나치, 나치부역자, 유대인 학살에 가담한 자들이 미국으로 이민오는 것에 대해 아무런 문제도 삼지 않았음이 드러났다. 즉, 미국 정부가 독일의 전쟁범죄를 눈감아 준 것이다.
나치는 '반공주의자'라는 이유에서 미국 정부는 오히려 공산주의자와 투철하게 싸울 수 있다는 이유로 나치와 전쟁범죄자들의 이민을 묵인하고 허용했다. 존 뎀얀유크도 이민국 서류를 작성할 때, 자신이 소비보르에서 거주했다는 사실을 기록했고, 자기의 이름이 존 뎀얀유크이기도 하지만, 전쟁 당시에 '이반 마르첸코'라는 이름을 썼다고 자필로 기록하기도 했다. '이반 마르첸코'는 나치 협력자들이 모두 동일하게 진술한 기록에 '공포의 이반'이라는 자의 본명이었다. 즉, 존 뎀얀유크와 이반 마르첸코는 같은 인물인 것이다.
존 뎀얀유크는 확실하게 '이반 마르첸코'이며 '공포의 이반'이었다. 그의 가족들은 그가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 좋은 할아버지였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이 존 뎀얀유크의 반인륜범죄를 부인하는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사건은 결국 결론이 나지 않은 채 역사에 묻히게 되었다.
이 다큐멘터리에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수용소에서 희생당한 유대인의 처참한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그 참혹한 장면은 그러나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다. 인간이 같은 인간을 어떻게 저렇게 참혹하게 학살할 수 있을까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유대인'을 절멸하겠다는 발상도 비현실적이지만, 그것을 실제 행동으로 옮긴 나치의 만행은 문명사회라는 20세기를 순식간에 야만의 시대로 만들었다.
유대인이 독일 나치에 의해 학살당한 역사적 사실은 분명하며, 세계 역사에서 뼈아프게 기록해야 할 중대한 사건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유대인이 '이스라엘'을 세워 독립하면서 그들이 팔레스타인과 그 주변 국가에게 저지른 만행은 유대인의 고통에 연민과 동정을 갖던 마음을 사라지게 만든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더 참혹하게 학살하고 있으며, 자신들이 힘을 갖게 되자, 약자를 짓밟는 만행을 서슴없이 저지르고 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피해자였던 유대인이 가해자로 탈바꿈하고, 자신들이 당했던 탄압과 학살을 그대로 팔레스타인에게 저지르는 착란적, 도착적 상태에 빠진 것이 마치 광기에 빠진 정신병자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엽기적인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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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표 없는 마음의 계절
현재에 없는 걸 그리워하는 미련함일까. 아니면 어려움을 이겨내고자 하는 의지일까. 어느 쪽인지 모르겠지만 청개구리 같은 마음은 계절마다 계절에 반하는 상념들을 끌어오고는 한다.
여름에는 녹아 버릴 것 같은 온도, 숨이 턱턱 막히는 습도, 줄줄 흐르는 불쾌한 땀, 살을 콕콕 찌르는 뜨거운 햇볕... 같은 것들로 괴로워하면서, 회상 속에서는 여름의 청량한 감각만을 그린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유리잔의 얼음 잘그락거리는 소리, 빨간 수박을 가득 베어 물 때의 감각, 매미 소리 들으며 올려 본 나무 사이 햇살.
반대로 겨울은 늘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눈 덮인 풍경마저 어쩐지 포근해 보인다. 어쩐지 마음을 따끈하게 데워 주는 겨울 영화들도 찾게 된다. <러브레터>, <러브 액츄얼리>, <캐롤>, <윤희에게>... 그러나 이 영화들이 불러일으키는 겨울의 감각은 어쩐지 현재보다 과거를 닮았다. 내 마음속 따뜻한 겨울 또한 올해 혹은 작년의 겨울이라기보다 기억 속 겨울의 집합체 같은 느낌이다.
올해는 조금 다르다. 현재에 단단히 서 있는, 추억이 아니라 오늘 내가 걸어 다니는 골목 같은 겨울 영화를 만났다. 포근하게 덮인 설경도 없고 마음을 데워 주는 편지 한 장도 없이 마음 어딘가에 스며드는, 어느 새 다가와 있는 계절을 닮은 영화 <창밖은 겨울>을 들여다본다.
겨울 해의 그림자는 낮고 길다
영화 <창밖은 겨울>은 서울이 아닌, 지방 소도시를 배경으로 한다. 보다 보면 창원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지만 사실 대한민국 웬만한 소도시는 다 비슷한 무드를 갖고 있다. 버스에 오른 사람들은 대부분 같은 곳에서 우르르 내리고, 젊은 사람은 점차 줄어들고, 밤이 되면 골목은 조용해진다. 상념을 품고 있는 젊은이에게는 한없이 외로운 곳이 될 수도 있는, 눈도 오지 않는 긴 겨울밤.
영화감독의 꿈을 막 시작하려던 석우(곽민규)는 어떤 이유인지 고향에 돌아와 버스 운전을 하고 있다. 운전을 마치면 늘 아버지 삼촌뻘 기사들과 같은 식당에서 같은 밥을 먹고, 그들이 치는 탁구 심판을 보면서 말도 없이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와서는 불 꺼진 방에서 무료하게 탁구공을 벽에 툭툭 던진다. 대회를 나가겠다며 의기투합하는 기사들과 달리 그의 탁구공은 자신과 자신 사이에서 튀어 오를 뿐이다.
단조로운 일상에 생긴 아주 작은 변화는 대합실에서 우연히 누군가 분실한 MP3를 줍는 데서 시작된다. 유실물 보관소를 담당하는 영애(한선화)에게서 당일 가져가지 않는 물건들은 사실 잃어버린 게 아니라 버린 게 아닐까 하는 이야기를 듣고도 그는 MP3 주인의 흔적을 찾아 헤맨다. 요즘은 찾아보기도 힘든 MP3에 석우가 보이는 기묘한 집착을 보며 영애도 호기심을 품고, MP3를 둘러싼 두 사람의 대화는 탁구처럼 이어져 간다. 이 영화의 어떤 면을 아주 거칠게 요약하자면 두 사람이 서서히 가까워져 가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의 연결점을 톡톡 찍어, 한 여자와 한 남자가 서로 알아가고 애정을 품고 서로를 연인이라 명명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몇 개의 연결점을 비틀비틀 가로지르는 단선적인 이야기라기에는, 이 영화에서 창문 넘어 들어오는 겨울 오후 햇빛이 너무나 다정하고 포근하다. 유실물을 보관하던 공간으로, 과거에 두고 온 꿈을 봉인해 둔 방으로, 낮은 대신 길고 묵직하게 들어선다. 이들 각자의 삶을, 지금 마주한 서로의 면뿐 아니라 그 뒤로 양감 있게 펼쳐져 왔을 시간 모두 따스하게 끌어안을 만큼.
영화에서 겨울은 대화의 소재조차 되지 않지만, 낮은 각도로 기울어져 창문으로 들어오는 겨울 햇살은 '창밖은 겨울'이 꼭 그렇게 차갑고 비정한 계절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실제로 영화는 후반으로 갈수록 서로를 마주하는 이야기인 동시에, 각자의 뒤를 바라보는 이야기가 되어 간다.
계절을 이루는 작은 조각들
두 사람이 과거를 안고 오늘을 살아가는 곳, 지방 도시의 시간은 서울의 시간과 기묘하게 다른 속도로 흐른다. 서울에선 자취를 감춘 물건들이 일상에 속속 등장하고, 서울에선 사용하지 않는 말들도 툭툭 튀어나온다. 귤을 담아 놓는 빨간 바구니, 옛날식 등유 난로, 자판기 커피... 소도시의 겨울을 이루는 작은 조각들이 이 영화에는 소중하게 담겨 있다.
이 잔잔한 일상의 배경은 인물들의 잔잔한 감정과 함께 유유히 흐른다. 거친 강물보다는 잔잔한 호수의 윤슬처럼 반짝반짝. '우리는 오늘부터 연인!' 식으로 관계를 규정하고 선포하는 말도 없이, 밀고 당기는 게임 같은 티키타카 말장난도 없이. 영화를 보는 관객의 눈에도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두 사람이 각자의 어제를, 오늘을, 내일을 어떻게 마주하며 일상을 툭툭 살아나가는지가 중요할 뿐이다.
눈도 내리지 않는 찬 겨울을 걸어 다니는 두 사람의 모습이 그다지 추워 보이지만은 않는 것은 그래서가 아닐까. 아름답게 그려진 소도시의 골목을 차분하게 걷고, 자전거를 타고... 골목을 헤매다 보석 같은 장소를 발견하기도 하고. 두 사람이 가까워가는 과정은 연애만을 위해 비현실적으로 세팅된 공간이 아닌, 각자의 일상에 발붙인 자리에서 일어나기에 더욱 맑게 빛난다. 그 담백하게 맑은 기운이 이 영화의 힘이다.
그 마음은 어쩐지 순정을 닮았다. 가끔 '2000년대 초반 한국 영화'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클래식>을 필두로 하는 당시 로맨스 영화는 상당수가 수채화 같은 느낌의 순정을 담고 있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20년 가량 흐른 세월까지 입어 더욱 유리알처럼 영롱하게 느껴진다. 이 영화는 그 빛을 닮았다. 온통 자극적인 '빨간 맛'이 범람하는 시대, 사랑도 속전속결 '사이다'로 해야 하는 시대에는 맞지 않는 결이다. 그러나 이 감성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어딘가 창밖의 풍경처럼 점점이 박혀 있음을 알고 있다.
닫아 두어도 반쯤 열리는 문처럼
그 안에서 석우와 영애는 서로 가까워져 가는 동시에, 각자 자신과도 가까워진다. 자판기 커피처럼 따뜻한 관계가 이 영화의 한 축이라면, 다른 한 축은 자신의 시간을 버스 노선처럼 휘휘 돌며 이루어진다. 멜로 영화와 성장 영화라고 요약할 수 있을 그 마음을 어쩐지 이 영화에서만큼은 따로 이름표 붙이고 싶지 않다. 단어로 딱 잘라 말하기보다 그냥 이 영화 속 겨울 햇살처럼 은은하게 내리쬐는 마음을 느끼고 싶다.
그래서일까. 보고 있노라면 영화가 괜찮다고 다독다독, 어깨를 두드려 오는 기분이 든다. 과거를 돌아봐도 괜찮다고. 뜯기듯 갑작스럽게 잃은 시간에 대한 미련이어도, 후련하게 떠나온 시간이더라도. 아무튼 다시 톺아 보아도 괜찮다고. 그러기 위해서 좀 헤매도 되고, 찾아 헤맨 것이 잘 나오지 않아도 되고... 그 길을 같이 걸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더 기쁘겠지만, 그런 사람을 위해서라면 한 번쯤 버스가 철길을 가로지르는 달밤처럼 기적 같은 장면을 만들어낼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괜찮다고.
석우가 과거의 '영화'를 담아 둔 방문이 자꾸만 다시 빼꼼 열리는 것처럼, 마음 한구석에 자꾸만 빼꼼 열리는 어떤 문이 있다면 어쩐지 용기를 내볼 수 있을 것만 같다. 노란 귤을 까먹으면서, 믹스커피를 훌훌 타 마시면서, 찌개에 밥을 씩씩하게 먹고 오늘의 일을 하면서, 틈틈이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고 싶어진다. 씩씩한 오늘을 걷는 영화를 보고 나와 버스를 타고 집에 들어가는 길, 몽글몽글 차오르는 감정들에 이름표는 붙이지 않기로 한다. 다만 이 마음들이 담긴 계절의 감각을 코끝으로 기억해 두기로 한다.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 초청으로 시사회에 참석하여 영화를 감상하고 작성하였습니다. 영화 개봉일은 2022년 11월 24일입니다. 개봉 일자가 영화의 무드와 가장 잘 어울리는 계절 같아요. 딱 지금 영화관에서 즐기시기를 추천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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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염?되면 과장 부장 사장과 직급 떼고 붙을 수 있는 바이러스?가 있다고?? '메이헴'
흥해라 이 영화
메이헴 (2017)
- 좀비처럼 일만하던 직장인으로 가득한 회사에 분노 바이러스가 퍼지고 상사의 무시와 부당한 요구에도 꾹 참던 직원들이 분노를 폭발시키기 시작하는데...Walking Dead 아니고 Working Dead
좀비 바이러스보다 더 치명적인 바이러스의 침투로 시작된 사내배틀로얄무비 이 영화 흥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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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배트맨」 예고편에 조커가 등장을 했다고?? 지금까지 공개된 5가지 정보들 | 스포일러? | 배트맨 영화리뷰 |
? "더 배트맨(2022)" 1차, 2차 예고편 분석 및 캐릭터 설명(스포가능성?)
* LA시사회 편집본 반응을 주로 담았고 스포성이 있을 수 있습니다
** 조커 부분은 추측일 뿐, 확실하지 않습니다
- "더 배트맨" 영화정보
감독: 맷 리브스
제작: 맷 리브스, 딜런 클라크, 월터 하마다 (기획)
각본: 맷 리브스, 피터 크레이그
원작: DC 코믹스 밥 케인, 빌 핑거
출연: 로버트 패틴슨, 조이 크래비츠, 폴 다노 외
장르: 슈퍼히어로 영화, 추리물, 스릴러, 느와르, 범죄, 드라마, 액션
촬영: 그레이그 프레이저
음악: 마이클 지아키노
촬영 기간: 2020년 1월 28일 ~ 2021년 3월 13일
제작사: DC Films logo
배급사: 미국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개봉일: 미국 2022년 3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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