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요 soyo 2025-02-23 15:30:55
[영화 ‘세인트빈센트’를 보고] 그럴 수 있지, 모든 행동에는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다
영화 <세인트비센트>
나는 영화 초반 ‘세인트(Saint)란 호칭과 어울리지 않는 여든이 넘은 할아버지 ‘빈센트(Vincent)’를 마냥 좋은 사람이라고 느끼지 않았다. 빈털터리면서 도박과 유흥을 즐기고 상대방 기분을 생각하지 않으며 말하는 빈센트였기에 그를 싫어하는 영화 속 사람들처럼 나 역시 그를 고약한 할아버지라고 생각하며 그를 싫어했다. 그러나 한부모 가정인 초등학생 ‘올리버(Oliver)’와 엄마 ‘메기(Megi)가 그의 옆집에 이사오기 시작하면서 빈센트의 진짜 내면과 사정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메기 대신 올리버를 돌봐주기 빈센트는 왕따를 당한 올리버에게 자신을 지켜내는 방법은 물론 ‘미움은 사랑을 이길 수 없다’는 교훈을 알려주며 누구보다 온전한 인생의 가치를 알려줬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을 묵묵히 곁에서 지켜내고 자신은 정어리를 먹더라도 반려묘에겐 고급 사료를 먹이는 그의 행동에서 그는 그저 표현이 딱딱할 뿐 따뜻한 내면으로 주변의 모든 존재들을 밝게 채워준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내 인생 좌우명이며 동시에 남을 이해하거나 인생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마법의 말이 있다. 바로 “그럴 수 있지" 라는 말이다. 무심한 듯 다정하고 가벼운 듯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이 말은 상대를 한 걸음 뒤에서 바라보게 만들고 나와 다른 성격을 가진 사람은 틀린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를 뿐이라는 걸 깨닫게 해준다. 나 또한 그저 나와 성격이 다른 빈센트가 올리버에게 나쁜 영향을 줄 것 같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것이 내 오해였음을 금방 알게 됐다. 나는 그저 빈센트의 성격 일부분만 보고 그의 모든 것을 본 것처럼 생각했던 것이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아는 게 아니다. 하나를 보면 단지 하나를 안 것 뿐이다. 어쩌면 타인의 인생에 대한 섣부른 편견이 우리가 더이상 인간관계를 발전시키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모든 이들에겐 무엇이든 배울 점이 있을 것이고 그렇기에 우리 모두는 그만한 존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 그러니 모든 사람들을 ‘세인트’로 바라보며 한 걸음 뒤에서 이해해보려고 노력해보자.
Relative contents
-
- 장르, 나라 모두 다양하게 있는! 넷플릭스 6월 공개 예정 영화
여러분들께 5월 공개 예정 영화를 소개해드린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어느새 5월이 끝나가네요! :)
5월에 공개된 영화, 시리즈 작품 재밌게 보셨나요? 잭 스나이더 감독의 <아미 오브 더 데드>, 도노반 마시 감독의 <내가 그 소녀들이다>가 현재 넷플릭스 영화 순위권에 들면서,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기 전, 그 영화에 대한 정보를 알고 보면 더 재밌지 않나요?
다양한 장르로 만나보는 넷플릭스 6월 공개 예정 영화. 함께 보러 가시죠!
1. 카니발 Carnaval (2021) - 레안드로 네리
6월 2일 공개
▶러닝타임 : 94분
▶장르 : 코미디"주인공들은 달라도 너무 다르지만 서로를 보완해 주는 친구들이다. 어느 날, SNS 인플루언서인 니나는 남자친구가 바람피우는 영상이 인터넷을 휘젓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별의 아픔을 달래기 위해 친구 셋과 함께 여행을 떠나는 니나. 인맥을 활용한 덕에 사우바도르에서 카니발을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머지않아 이 경험을 통해 새 팔로워 이상으로 훨씬 더 값진 우정의 가치를 재발견하게 된다."
<카니발> synopsis
브라질 영화 시장에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제작사 중 하나인 '카미자 리스트라다'에서 제작한 영화 <카니발>은 포스터부터 브라질 특유의 자유로움이 느껴지는데요. 흔하지만 흥미로운 소재. 'SNS'를 통해 깊은 우정을 보여주는 영화 <카니발>은 오는 6월 2일 공개 예정입니다.
2. 새콤달콤 Sweet & Sour (2021) - 이계벽
6월 4일 공개
▶러닝타임 : 94분
▶장르 : 코미디"매번 해도 어려운 연애. 하지만 그 새콤달콤한 연애의 맛에 제대로 빠져버린 달콤한 연인 장혁과 다은. 그리고 새콤한 매력의 보영까지.
세 남녀가 그리는 찐 현실 로맨스 "
<새콤달콤> synopsis
<럭키>,<힘을 내요 미스터 리>로 이름을 알린 이계벽 감독이 연출을 맡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새콤달콤>은 장기용, 채수빈, 크리스탈이 주연을 맡아 화제가 된 영화입니다. 배우 장기용, 채수빈, 크리스탈이 주연을 맡아 ‘청춘’들의 찐 현실 로맨스가 잘 드러날 것 같습니다. 가볍게 보기 좋을 영화 <새콤달콤>은 넷플릭스에서 6월 4일 공개 예정입니다.
3. 어웨이크 Awake (2021) - 마크 라소
6월 9일 공개
▶러닝타임 : 96분
▶장르 : SF, 액션, 스릴러" 기이한 현상이 전 세계를 휩쓴다. 잠드는 능력을 빼앗긴 인류. 불면으로 인한 광기와 혼돈. 그래도 상처투성이 과거를 간직한 전직 군인은 싸움을 포기하지 않는다. 소중한 가족을 지키기 위해"
<어웨이크> synopsis‘불면으로 인한 광기와 혼돈’을 다룬 영화 <어웨이크>는 불면으로 인한 광기’라는신선한 소재를 다룬 재난 영화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공개된 <어웨이크> 예고편을 본 후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버드 박스>를 떠올리는데요. 과연 <버드 박스>처럼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영화가 될지! <어웨이크>는 오는 6월 9일 넷플릭스 공개 예정입니다.
4. 비탄의 정글 Tragic Jungle (2020) - 율레네 올라이졸라
6월 9일 공개
▶러닝타임 : 96분
▶장르 : 드라마"고대 마야 왕국의 전설이 살아있는 멕시코의 정글 속 고무 농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우연히 신비스러운 여성을 구출하게 된다. 아그네스는 백인 농장주와의 결혼을 피해 도망쳤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를 바라보는 노동자들의 눈에는 열기와 욕망이 차오르고, 무법지대 정글 속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구원이 아닌 약탈일 뿐이다. 여성 감독 율리네 올라이졸라의 네 번째 장편 극영화 <비탄의 정글>에서 싱싱한 초록 식물로 뒤덮인 정글은 순식간에 복수극의 무대로 탈바꿈한다."
<비탄의 정글> synopsis2020년 하반기 최대의 화제작 중 하나인 <비탄의 정글>은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를 오가며 활약 중인 율레네 올라이 졸라가 연출을 맡았습니다. 영화 <비탄의정글>은 베니스 영화제와 바르샤바 영화제의 출품되어 각종 상을 휩쓸었는데요. 이미 작품성을 인정받은 영화 비탄의 정글은 원주민 출신의 비전문 배우를 출연시켜 더욱 영화에 몰입할 수 있습니다.
5. 위시 드래곤 Wish Dragon (2021) - 크리스 애펄핸즈
6월 11일 공개
▶러닝타임 : 98분
▶장르 : 애니메이션, 코미디, 판타지"요술램프 속 지니? 아니! 이 몸은 찻주전자 속의 위시 드래곤이란 말씀. 근데 천년만에 만난 주인이 이렇게 순박한 너라니. 한 가지 소원은 아까 들어줬고.. 빨리 다음 소원이나 말해봐"
<위시 드래곤> synopsis
미국과 중국의 합작 애니메이션 <위시 드래곤>은 극장 개봉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로 인하여 넷플릭스에서 공개되는 작품입니다. 중국판 램프의 지니라고도 불리는 이 영화는 소원을 들어주는 드래곤과 한 소년의 이야기를 그렸습니다. 성룡, 존 조가 주연을 맡아 더욱 화제가 된 영화 <위시 드래곤>은 오는 6월 11일 공개 예정입니다.
씨네랩 에디터 Ria
-
- 공감이라는 무기가 세상을 바꾸는 순간
누구나 가지고 있는 능력은 다르다. 그래서 다양한 직업이 생기고, 세상은 각자의 방식으로 만들어지고 운영되어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는 자꾸만 정해진 방식대로만 살아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회사에서는 매뉴얼대로, 학교에서는 성적대로, 사회에서는 통념대로 살아가는 것을 은근히 강요받는다. 그런 길이 틀리다고 할수 없다. 그 통념은 역사와 경험을 통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찾은 것일 테니까. 하지만, 과연 그게 유일한 길일까. 몇 가지의 통념만이 옳은 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애니메이션 원작을 실사화한 영화 <드래곤 길들이기>는 그 통념에서 벗어난 소년 히컵(메이슨 테임즈)의 이야기다. 모두가 드래곤을 물리치기 위해 전쟁을 벌이는 마을에서, 히컵은 싸우지 않고 드래곤과 친구가 된다. 다리를 다쳐 더는 날 수 없게 된 드래곤 투슬리스를 도우며, 히컵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바꾸기 시작한다. 영화는 히컵과 투슬리스를 통해 묻는다. 서로 대립하지 않고 살수 있는 길은 정말 있는 것인지, 만약 있다면 그걸 이끌 수있는 리더는 무엇을 가지고 있어야하는지. 영화 <드래곤 길들이기>는 히컵의 감정 변화를 이용해 그 답을 하고 있다.
[첫번째 감정] 히컵의 무기력
히컵은 바이킹 마을의 족장인 스토이크(제라드 버틀러)의 아들이다. 하지만 아버지로부터도, 마을 사람들로부터도 능력을 인정받지 못한다. 전투 실력은 없고, 무기를 다루는 능력도 부족하다. 겁이 많고, 엉뚱한 발상만 내세우니 마을 사람들은 히컵을 골칫덩이 취급한다. 아버지는 그를 전투에 참여시키지 않고, 대장장이 보조로만 남겨둔다. 마치 '넌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거기만 있어'라는 메시지를 주고 있는 것이다. 스토이크는 자신의 아들이 자신과 같이 전투적인 리더가 되었으면 하지만, 매번 사고만 치는 모습에 실망한다.
이런 상황에서 히컵이 느끼는 감정은 무력함이다. 자신이 아무 쓸모없는 존재 같고, 도움이 되기보단 민폐만 끼치는 사람 같다고 느낀다. 그는 외롭고 작아지고 점점 말이 없어지고, 심지어 마을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까지 든다. 영화 초반, 드래곤과의 전투 장면에서 히컵은 자신이 개발한 신무기를 들고 나가지만 다른 사람의 전투에 피해를 주고, 드래곤 사냥에도 실패한다. 이는 모두에게 실망만 안겨주게 된다. 그 순간 관객은 히컵의 무기력과 부끄러움을 고스란히 느끼게 된다. 히컵 역시 힘없는 모습으로 구석으로 향할 뿐이다.
이 감정은 단지 캐릭터의 문제만이 아니다. 많은 자녀들이 부모에게서 '너는 왜 이것밖에 못 하니'라는 실망을 느끼고, 스스로를 쓸모없다고 여기며 위축된다. 히컵의 모습은 그런 아이들의 감정과 맞닿아 있다. '나는 여기서 뭘 할 수 있을까'라고 스스로에게 묻는 히컵의 눈빛은, 우리가 청소년 시절에 느꼈던 외로움과 무기력의 흔적과 닮아 있다. 영화는 많은 기대를 받는 청소년들이 느끼는 무기력함을 히컵의 모습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두번째 감정] 히컵의 공감력
히컵은 사실 드래곤과의 전투에서 자신이 개발한 무기로 드래곤 한 마리를 잡아냈다. 뒤늦게 뒷산에서 한 마리의 부상을 입은 드래곤을 발견했고 그게 바로 전설의 드래곤 투슬리스였다. 마을 사람들처럼 그를 죽일 수도 있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상처 입은 투슬리스를 도와주고, 스스로 만든 꼬리지느러미 장치를 달아준다. 히컵이 드래곤에게 드러내는 감정은 공감이다. 적이라 여겨지던 존재에게도 마음을 열고, 이해하려는 마음을 보여줌으로써 다른 사람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그의 공감력은 관찰력과 만나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그는 투슬리스를 도와주는 과정에서 다른 드래곤들의 특성을 알아가고, 드래곤들이 단순히 적대심을 가지고 있는 적이 아님을 알게 된다. 이는 단순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의 다른 구성원이 미처 보지 못한 것을 알아채고, 배척당한 존재와 함께하는 능력이 바로 히컵이 가진 잠재력이었다. 히컵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공감에 그치지 않고, 인간과 비인간 존재 사이의 공감까지 확장시킨다. 그가 만든 변화는 단순한 화해가 아니라, 하나의 역사적 전환점이다.
히컵은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 법을 고민한다. 전면전에 나서는 대신, 대화하고 이해하며 협력의 가능성을 본다. 마을 사람들은 이를 처음엔 이해하지 못하지만, 히컵의 방식이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차츰 깨닫게 된다. 영화는 말한다. 진짜 리더가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능력 중 하나는, 바로 이 공감력이라고.
[세번째 감정] 히컵의 지도력
히컵은 카리스마 넘치는 전형적인 리더는 아니다. 호통을 치거나 강하게 끌고 가는 리더도 아니다. 오히려 조금 자신감 없이 보이기도 하고, 강력해보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는 공감과 신뢰를 바탕으로 주변을 조금씩 변화시킨다. 드래곤들과의 공존을 통해, 마을은 더 이상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오히려 더 강한 공동체로 성장하게 된다. 혼자만이아니라 주변 모두에게 그 방법을 공유함으로서 평화의 영역은 더욱 넓어지게 된다.
히컵의 지도력은 현대적이고 감정적인 방식의 리더십이다. 현실에서 말하자면, 누구보다 강하게 지시하는 정치인보다, 의견을 듣고 조율하고 이해하며 함께 가려는 사람과 더 가깝다. 히컵은 자신의 약함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 오히려 그 약함을 통해 모두를 하나로 묶는 힘을 가진다. 강한 리더보다 더 큰 울림을 주는 인물이다.
이야기의 결말부에서, 히컵은 마을의 새로운 리더가 된다. 그는 전쟁 대신 공존을 택했고, 그 선택은 모두를 지켜낸다. 지도자의 힘은 카리스마가 아니라, 모두가 함께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내는 데 있다는 걸 히컵은 보여준다. 그건 오늘날 우리가 가장 갈망하는 리더의 모습이기도 하다. 특히나 엄청난 위기가 다가왔을 때, 절대 악처럼 보이는 존재가 등장했을 때, 인간과 드래곤의 장점을 합쳐서 이겨내게 만드는 것이 바로 히컵의 지도력이었다.
가장 성공적인 실사영화
<드래곤 길들이기>는 2010년 드림웍스 애니메이션으로 첫 선을 보였던 이야기를, 원작 감독 딘 데블로이스가 그대로 실사화한 작품이다. 원작의 감성과 메시지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현실감과 생동감을 더했다. 특히 드래곤이 날아다니는 장면의 입체감은 4DX나 IMAX로 볼 때 훨씬 더 극대화된다. 투슬리스의 생생한 표정과 움직임은 고양이와 강아지의 특성을 결합해 구현됐는데, 반려동물을 키워본 사람이라면 더 깊게 몰입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히컵과 투슬리스의 관계를 통해 말하는 메시지인 '낯선 존재를 향한 두려움을 넘어서는 용기, 그리고 함께 살아가는 방식의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시대를 초월한 감동을 준다. 실사화의 함정인 어색한 연기나 어설픈 CG를 완벽히 비켜간 작품이다. 디즈니식 PC주의가 살짝 묻어나긴 하지만, 이야기의 흐름을 해치지 않고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간다. 자세히 신경쓰지 않으면 그냥 스쳐지나갈 수 있게 설정되어 있다. 여러 인종이 공존하는 이유를 설정상 설득력 있게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간 디즈니의 실사화는 원작의 정서를 훼손하거나,서사 구조를 무리하게 바꾸면서 팬들의 비판을 받은 경우가 많았다. 특히 정치적 메시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거나, 캐릭터의 성격이나 외모를 과하게 변경하면서 이야기의 감정선이 무너진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드래곤 길들이기>는 다르다. 원작의 구조와 감정을 충실히 따라가면서도, 실사화로 옮길 때 필요한 감각적인 변화는 세심하게 조율했다. 그래서 실사화라는 형식이 기존 애니 원작이 가진 이야기의 밀도를 좀 더 증폭시킨다는 느낌이다. 어색한 변형 없이도 현대적인 감각을 담아낸다는 점에서, 디즈니 실사화보다 더 균형감 있고, 감정적으로도 더 진실한 작품이다.
결국 <드래곤 길들이기>는 ‘실사화는 왜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가장 설득력 있게 답하는 영화다. 이야기의 본질은 그대로 두되, 감각은 훨씬 확장시키고, 감정은 더욱 깊어지게 만든다. 아이와 함께 보기에도 좋고, 어른들이 혼자 보기에도 충분히 울림이 있는 작품이다. 꼭 특별관에서, 바람이 불고 소리가 터지는 그 감각으로, 히컵과 투슬리스의 비행을 함께하길 바란다.
-
- 라이트이어의 이름만 남은 영화
버즈 라이트이어 (Lightyear , 2022)
"라이트이어의 이름만 남은 영화"
개봉일 : 2022.06.15.
등급 : 전체 관람가
장르 : 애니메이션, 액션, 모험
러닝타임 : 105분
감독 : 앤거스 맥클레인
출연 : 크리스 에반스, 타이카 와이티티, 피터 손
개인적인 평점 : 3.5/5
쿠키영상 : 3개
버즈 라이트이어 줄거리
우주 저 너머 운명을 건 미션, 무한한 모험이 시작된다!
미션 #1
나, 버즈 라이트이어.
인류 구원에 필요한 자원을 감지하고 현재 수많은 과학자들과 미지의 행성으로 향하고 있다.
이번 미션은 인류의 역사를 새롭게 쓸 것이라 확신한다.
미션 #2
잘못된 신호였다.
이곳은 삭막하고 거대한 외계 생물만이 살고 있는 폐허의 땅이다.
나의 실수로 모두가 이곳에 고립되고 말았다.
모두를 구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제자리에 돌려놔야 한다.
미션 #3
실수를 바로잡기 위한 탈출 미션을 위해 1년의 준비를 마쳤다.
어쩌다 한 팀이 된 정예 부대와 이 미션을 수행할 예정이다.
우주를 집어삼킬 ‘저그’와 대규모 로봇 군사의 위협이 계속되지만
나는 절대 포기할 수 없다.
그런데… 여긴 또 어디지? 시간 속에 갇힌 건가?
To Infinity and Beyond!
용감히 우주를 누비는 우주탐사 대원 버즈 라이트이어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버즈 라이트이어>가 개봉했다. <토이스토리> 시리즈를 좋아하는 어른이로서, 그중에서도 버즈 라이트이어를 가장 좋아하는 덕후로서, 그리고 캡틴 아메리카를 통해 마블에 처음 입문했던 덕후로서! 크리스 에반스가 연기하는 버즈 라이트이어를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토이스토리>에서 어느 정도 손때가 탄 앤디의 장난감들 사이에 새롭게 등장한 버즈 라이트이어는 멋진 최신식 장난감이었고, 오래된 카우보이 인형 우디의 가장 좋은 파트너였으며 책임감과 용기가 넘치는 친구였다. 앤디는 버즈를 좋아했고, 나 또한 버즈를 정말 좋아했다. 지금은 공간 확보를 위해 장난감을 많이 정리했지만, 1-2년 전까지만 해도 색색깔의 버즈 피규어가 책장 한층을 모두 차지하고 있었을 만큼.
영화 <버즈 라이트이어>는 장난감 버즈 라이트이어의 이야기가 아닌 앤디가 본, 앤디가 좋아하는 캐릭터 버즈 라이트이어의 이야기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토이스토리> 속 버즈를 기대하고 영화를 본다면 약간 실망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정의롭고 책임감 있는 버즈의 모습이 닮긴 했지만, 당연하게도 토이스토리 시리즈와의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다.
영화의 장점
<버즈 라이트이어>의 장점은 대략 버즈가 나온다는 것, 크리스 에반스가 버즈를 연기한다는 것, 시각적인 재미가 있다는 것 정도가 있겠다.
개인적으론 이 영화에 나오는 버즈를 통해 지구에 머물고 있는 장난감 버즈 라이트이어가 우주에선 어떤 일들을 해왔는지, 저그와 버즈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알 수 있어서 좋았다. 항상 상상만 해오던 우주인 버즈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고 할까. <토이스토리 4> 이후로 왠지 다신 버즈를 만날 수 없을 것 같아 아쉬웠는데 그 아쉬움이 조금이나마 풀린 것 같다. 영화의 오프닝에 '앤디가 본 영화’라는 문구가 나오는데, <토이스토리 1>이 개봉한 당시(1995년)에 앤디가 본 영화라기엔 조금 괴리감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버즈니까!…
두 번째 장점은 크리스 에반스가 버즈를 연기한다는 것이다. 크리스 에반스의 연기력을 의심했던 건 아니지만 크리스가 얼마나 버즈와 어울릴지 궁금증 반, 의심 반…이었다고 할까? 하지만 처음으로 크리스의 목소리가 들어간 영상을 보고 그를 믿게 되었고, 캐릭터를 계속 보다 보니 크리스와 버즈가 서로 너무 닮아있어서 슬쩍 웃기기도 했다. 더빙은 정말 기대 이상으로 자연스럽고 훌륭했고, 이전 작품들에선 크게 느끼지 못했던 크리스 에반스의 목소리의 매력을 흠뻑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시각적인 재미! 는 애니메이션의 명가로 불리는 픽사답게 볼거리가 많다. '우주’라는 무한한 소재를 100% 활용했다고 말하기엔 슬쩍 아쉬운 부분들이 있었지만 작화의 디테일은 전혀 떨어지지 않는다. 우주복과 삭스의 질감, 우주복 유리에 비치는 얼굴, 광활하게 펼쳐진 우주와 빛나는 별. 첫 관람을 커다란 스크린(용아맥)에서 했기 때문에 더 극적으로 느낀 걸 지도 모르겠지만, 눈이 지루할 틈은 없었다. 참고로 <버즈 라이트이어>는 확장비로 상영되는 화면(1.43:1)의 비율이 꽤 높으니 기회가 된다면 꼭 아이맥스관에서, 아니면 밝고 커다란 화면에서 보시길 추천한다.
아, 그리고 이를 제외하고 <버즈 라이트이어>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새로운 버즈의 파트너 삭스가 나온다는 점이다. 가장 귀엽고 가장 유능한 신스틸러… 이 영화를 보고 삭스에게 빠지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기대했던 픽사 영화와의 거리감
픽사와 디즈니가 합병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팬들이 픽사 영화가 예전 같지 않다는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다. 팬들은 픽사의 대표작 <토이스토리>와 <업>, <코코>, <인사이드 아웃>과 같은 영화가 거의 나오지 않고 있다며 픽사에 대해 실망을 하면서도, 또 픽사라는 이름에 다시 기대를 걸며 픽사의 신작을 기다려왔다. 그래도 작년에 공개되었던 <루카> 같은 경우엔 꽤 괜찮은 픽사 영화라는 평을 많이 봤는데, <버즈 라이트이어>는 평이 영 좋지 않다. 물론 <버즈 라이트이어>가 훌륭한 퀄리티의 애니메이션 영화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이 영화엔 우리가 '픽사’라는 이름에 기대하는, 마음을 건드리는 무언가가 없다.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명확하게 보이지만 그 과정이 다소 답답하기도 하고 너무 노골적이기도 하다. 이 부분은 전체 관람가라는 관람 등급을 감안해도 어딘가 아쉽다. 이 정도면 이제 이전의 픽사를 기대하기보단, 팬들이 스스로 '픽사’라는 이름에 기대하는 이미지를 바꿔야 할 차례가 아닐까 싶다.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미지의 행성에서 찾아가는 적절한 무게의 책임감
영화의 주인공 버즈는 인류 구원에 필요한 자원을 찾기 위해 새로운 행성으로 향한다. 그는 유능한 탐사대원으로 뛰어난 능력과 무거운 책임감을 갖고 있다. 항상 자신의 능력을 믿고 최선을 다하던 버즈는 임무를 완료하기 위해 확신을 갖고 비행을 감행하지만 예상치 못한 사고가 생기고, 버즈를 포함한 탐사 대원과 동료들은 삭막해 보이는 행성에 고립된다. 버즈는 모든 것을 되돌려놓고 임무를 완수하겠다는 욕심과 책임감으로 시험 비행을 반복하고, 그의 동료들은 행성에 남아 새로운 삶을 꾸린다.
아무것도 없었던 삭막한 행성에 하나 둘, 건물과 기지가 만들어지고 동료들은 그곳에 적응하고 있지만 버즈는 여전히 나 혼자 짊어져야 할 과거의 실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버즈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탐사 대원이지만 본인은 그 사실을 모르고 단 한 번의 실수를 되돌리기 위해 시험 비행을 반복한다.
60여 년의 시간이 흐르고 드디어 임무를 완수하나 싶었는데, 저그의 등장으로 버즈의 계획은 또 한 번 틀어지고 만다. 방어벽 밖에서 함께 싸울 인력이라곤 앨리샤의 손녀인 이지와 훈련도 제대로 받아본 적 없는 모, 집행유예 중인 다비뿐이다. 어리바리한 신입의 실수 하나도 용납하지 않았던 깐깐한 버즈인데, 신입조차도 안 되는 팀원들과 함께하는 임무라니. 한숨이 푹푹 나온다.
버즈와 다르게 작전 경험도 없고, 전투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이지, 모, 다비는 얼렁뚱땅 어떻게든 버즈와 함께 발걸음을 맞춘다. 이들은 이마를 탁 짚게 만드는 실수를 하고, 일을 더 크게 벌리기도 하고, 타이밍을 잘 못 맞추는 부족한 팀원이지만 그 대신 버즈에게 작은 여유를 선물한다. 혼자서 임무를 완수하고, 모두를 구해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에 시달리던 버즈는 팀원들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고, 영화의 후반부에 들어선 직접 도움을 청하며 팀원들에게 의지하게 된다.
누구든 실수할 수 있다
우리는 이름값이라는 단어를 자주 쓴다. 특정 이름에 쌓인 이름값은 직접 쌓아온 명성일 수도 있고, 누군가의 가족이라는, 가족이 쌓은 명성일 수도 있다. <버즈 라이트이어>에는 두 개의 유명한 이름이 있는데, 그건 바로 주인공 '라이트이어’와 '호손’이라는 이름(성)이다.
버즈는 라이트이어라는 이름에 유능한 탐사대원이라는 명성을 쌓았고, 앨리사는 호손이라는 이름에 훌륭한 사령관이라는 명성이 쌓았다. 버즈는 라이트이어 답게 실수 없이 임무를 완수하고 싶어 하고, 이지는 호손 답게 멋지게 적들과 맞서고 싶어 한다. 두 사람은 실수 하나에도 크게 절망하며 이 이름을 쓸 자격이 없다는 듯 우주복에 붙은 이름표를 뗀다. 하지만 누구든 실수를 할 수 있다. 업계의 저명한 인사여도, 전설로 남은 인물이라 해도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
실수를 인정하고 흘려보내는 방법을 모르는 채로 명예와 지나간 실수에만 집착하다 보면 자신을 깎아먹을 뿐,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실수 한번 한적 없는 완벽한 명예를 바라던 나이 든 버즈(저그)가 잘못된 길로 들어선 것처럼 말이다. 실험 비행을 성공한 시점에서 이지와 모, 다비를 만나지 못한 저그는 팀원과 함께 위기를 헤쳐나갈 기회도, 위로를 받을 기회도 없었기에 실수에만 집착하다 결국 이기적인 빌런이 되어버린 게 아닐까.
얼렁뚱땅 굴러가는 완벽하지 않은 팀이지만 버즈는 이 팀 안에서 안정감을 느끼고 새로운 행성에 적응하는 데 성공한다. 실수를 만회하겠다며 무한한 우주를 붕붕 떠다니는 대신 마침내 땅에 발을 붙이는 방법을 알게 된 것이다.
쿠키 영상을 보면 아마도 이 얼렁뚱땅 우주 탐험대의 뒷 이야기가 더 있는 듯한데, 후속편이 진짜 제작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만일 제작된다면 버즈에 대한 의리로 한 번쯤은 더 볼 것 같다. 버즈니까.
-
- 붉은 거북
붉은 거북
미카엘 두독 두빗 감독 장편 애니메이션. 두빗 감독은 이 장편 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전에 몇 편의 단편을 발표했다. '청소부 톰', '수도승과 물고기', '아버지와 딸', '차의 향기'가 그것인데, 이 작품들은 모두 유튜브에서 볼 수 있다.
두빗 감독의 공통점은 모든 작품에 대사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작품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을 뿐 아니라, 그의 작품에서 '대사'는 오히려 작품을 이해하는데 방해 요소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는 걸 알 수 있다.
대사가 필요한 작품이 있고, 대사 없이 인물의 행동과 반응만으로 작품을 해석할 수 있는 영화가 있다. 과거 무성 영화에서 소리 없이 서사를 이어나갈 수 있었던 것도, 대사보다는 인물의 행동과 반응이 더 직관적이거나 상징적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대사 없는 영화는 상징과 은유가 강하다. 대사로 전달할 수 없는 서사와 감정을 드러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을 압축하고 인물과 자연의 변화를 동기화한다. 단편 '아버지와 딸'은 이 영화 '붉은 거북'과 깊은 연관을 갖는다. 두 작품은 단편과 장편의 길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같은 주제를 담고 있으며, 매우 깊은 상징과 은유를 내재하고 있다.
'아버지와 딸'에서 아버지는 어린 딸을 두고 떠난다. 그가 배를 타고 떠나는 장면은 무수한 신화의 변주다. 기독교에서는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라는 노래도 있는데, 이때 요단강은 죽음의 강을 뜻하고, 요단강을 건넌다는 건 곧 죽음을 의미한다.
아버지는 어린 딸을 두고 떠나는 것이 몹시 안타깝지만, 죽음을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임을 알 수 있다. 딸은 너무 어렸고, 자신을 두고 떠난 아버지가 언젠가 돌아오리라 믿으며 날마다 강가로 나온다.
딸은 자라고, 친구들을 사귀고, 연인을 만나며,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함께 아버지가 떠난 강가를 찾는다. 더 시간이 흘러 남편도 죽고, 아이들은 모두 자기의 삶을 찾아 떠나고, 딸은 다시 혼자 아버지가 떠난 자리를 찾아온다.
노인이 되어 허리가 굽은 딸은 아버지가 떠난 강이 이제는 물이 말라 모래톱이 드러난 곳을 걸어들어간다. 한참을 걸어간 딸이 발견한 건 아버지가 타고 떠났던 작은 배였다. 딸은 모래에 반쯤 잠긴 작은 배에 누워 조용히 눈을 감는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고, 걸을 때마다 조금씩 젊어지면서 평생을 그리던 아버지를 만난다.
작품에서 보이는대로 이야기를 구성할 수 있지만, 작품 전체가 하나의 메타포이며, 신화라고 보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아버지와 딸의 이야기는 어린 딸이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 아마도 어머니는 더 먼저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 혼자 세상을 힘겹게 살아가면서 늘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았다고 해석할 수 있지만, 그보다 근본적으로는 신과 인간의 관계를 의미하고 있기도 하다.
아버지는 '신'으로 해석할 수 있다. '신'은 서양 종교에서 남성으로 현현한다. 또한 많은 경우 '아버지'로 불리며, '아버지'와 '신'은 동격으로 받아들여진다. 어린 딸은 어리석은 인간이다. 아버지 즉 신의 보살핌 없는 인간은 세상에서 늘 힘들고 괴롭고, 고달픈 삶을 살아가게 되고, 그렇기에 더욱 아버지(신)를 그리워한다.
하지만 어리석은 인간이 아버지(신)를 만날 수 있는 건 그가 살아 있을 때는 가능하지 않다. 그가 요단강을 건널 때, 즉 아버지가 계신 저 강(바다) 너머로 향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딸이 노인이 되어 죽음을 맞이할 때, 그는 멀리 떠난 줄 알았던 아버지(신)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붉은 거북'의 해석도 상징과 은유를 바탕으로 풀어나가는 것이 마땅하다. 이 작품은 장편이지만 서사는 매우 단순하기 때문에 해석의 여지가 거의 없다. 따라서 서사를 이해하고 풀어나가기 위해서라도 상징과 은유의 수단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남자는 바다에서 표류하다 작은 무인도에 닿는다. 남자는 곧 '인간' 또는 '인류'다. 바다는 현실의 세계가 아닌, 신화와 은유의 세계다. 또는 원초의 세계, 원시의 상징이다. 바다에서 무인도에 도착한 남자는, 현실의 세계에 발을 딛는다. 남자는 '신'의 자식이지만 '신'은 아니며, '신'이 창조한 피조물이다. 남자는 원초의 바다에서 빠져나와 현실의 세상에 발을 딛지만, 현실은 고통스럽고, 외롭고, 괴롭다. 남자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고, 사방은 망망한 바다만 놓여 있을 뿐이다.
남자는 무인도에 자라고 있는 대나무를 모아 뗏목을 만든다. 그는 저 무한의 바다를 건너 자신이 처음 있던 곳이라고 생각하는 '이상향'을 찾아가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바다에 뗏목을 띄우고 나아가지만, 멀리 가지 못하고 뗏목은 부서진다.
다시, 조금 더 큰 뗏목을 만들어 바다로 나가는 남자. 두번째도 뗏목이 부서진다. 저절로 부서지는 것이 아니라, 물밑에서 무언가 의도적으로 뗏목을 부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남자는, 아주 큰 뗏목을 만든다. 크고 튼튼한 뗏목은 쉽게 부서지지 않을 것으로 여기고 다시 바다로 나간다.
여기서 '뗏목'은 이동수단이지만, 남자가 그리는 '이상향'으로 가는 사상의 도구이기도 하다. 그 뗏목이 부서지는 건, 남자의 신념, 사상, 정신이 아직은 부족하다는 의미다. 뗏목은 폭풍을 만나 부서지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알 수 없는 물체가 뗏목을 일부러 부수기 때문인 걸 알 수 있는데, 부서진 뗏목 주변에서 만난 동물이 '붉은 거북'이다.
붉은 거북은 무얼까. 남자가 다시 무인도로 돌아와 외롭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을 때, 그는 도달할 수 없는 세계 - 바다 - 로 나가려 몇 번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한 뒤로 분노에 찬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 바다에서 섬으로 올라오는 붉은 거북.
많은 거북 종류는 해변의 모래밭에 알을 낳아 묻는다. 알에서 깨어난 새끼 거북은 모래를 헤집고 올라와 바다를 향해 기어간다. 이 붉은 거북도 해변에 알을 낳기 위해 올라온 것은 아닐까. 이 현실적 해석은 이어지는 상징과 은유와 섞이면서 환상으로 환유한다.
남자는 해변으로 올라온 붉은 거북을 보고 분노가 폭발한다. 그 붉은 거북이 자기가 만든 뗏목을 부순 바로 '그' 붉은 거북이라고 확신한 것이다. 하지만 그 붉은 거북이 남자의 뗏목을 부순 거북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남자는 거북의 머리를 대나무로 내려치고, 거북을 뒤집어 놓는다. 복수한 것이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남자는 자신이 한 짓을 후회한다. 붉은 거북을 살리려 바닷물을 떠 끼얹기도 하지만, 붉은 거북이 회생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붉은 거북이 죽었다고 여긴 남자는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는데, 갈라진 거북의 껍질 안에 젊은 여성이 누워 있었다. 남자는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지만, 붉은 머리의 여성은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실제의 존재였다. 남자는 여자를 살리려고 그늘을 만들어주고, 숲에 있는 작은 연못에서 물을 떠와 여자에게 물을 먹여주고 지극하게 보살핀다. 비가 내리는 날, 여자는 긴 잠에서 깨어난다.
여자는 자기를 감싸고 있던 거북 껍질을 바다로 돌려보낸다. 그 모습을 본 남자는 만들고 있던 뗏목을 바다로 떠나 보낸다. 여자는 더 이상 바다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의지를 거북 껍질을 바다로 돌려보내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고, 남자는 그 여자와 함께 살기 위해 자신도 더 이상 바다로 나가, 자신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붉은 거북이자 붉은 머리의 여성은 남자의 또 다른 자아이면서 욕망의 현현이다. 남자(인류)는 진화를 통해 점차 문명을 갖게 되고, 지금의 현실에 만족하며 적응해 살고 있는 존재다. 그는 늘 마음 속 깊은 곳에 원초의 고향 - 자연 - 으로 돌아가고픈 본능을 지니며 살아간다. 회귀 본능은 사라질 수 없으며 다만 현실의 욕망이 더 클 때, 본능을 누르며 현실 속에서 자신의 삶을 영위하게 된다.
남자와 여자는 함께 살아간다. 세월이 흐르고, 아이가 태어난다. 아이가 자라고, 세 사람의 삶은 변함 없이 평온하고 따뜻하다. 소소하지만 중요한 사건들, 아이가 바다에 빠졌지만, 본능적으로 수영을 할 수 있다는 걸 발견하는 순간, 그리고 알 수 없는 문명의 물건이 해변에 떠내려 온 것을 발견하는 소년.
아이는 자라서 소년이 되고, 청년이 된다. 남자와 여자는 나이 들어가고, 아무 변화가 없을 것 같았던 그들의 삶이 파괴되는 재해가 일어난다. 바다에서 해일이 몰려오고, 그들이 살던 숲이 거의 다 파괴되고 세 사람은 죽음의 고비를 넘긴다.
성장한 아들은 좁고 답답한 섬에 머물러 있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는 멈춰 선 파도에 올라 아득히 먼 곳에 있는 새로운 문명 사회를 발견한다. 아들은 부모를 설득해 바다 건너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겠노라고 말하고, 부모는 성장한 아들을 막지 못한다. 아들은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섬을 떠나고, 섬에는 다시 두 사람만 남는다.
세월이 더 많이 흐르고, 두 사람은 이제 백발 노인이 된다. 삶은 변함 없지만, 시간(역사)은 남자를 죽음으로 이끈다. 남자가 숨을 거두자 여자는 남자의 손등을 어루만지며 서서히 붉은 거북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느리게 몸을 돌려 바다로 나간다.
붉은 거북은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는 바다로 나갔다. 남자(인류)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또는 붙들린 삶을 살았고, 육체가 소멸하자 욕망은 다시 원초의 바다, 이상향으로 돌아간다. 현실에서 자신의 존재를 살아움직이도록 추동하는 힘은 '욕망'이었다. 그것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며, 잘못된 것도 아니었다. 인간은 욕망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는 존재이면서도 그로 인해 행복하고, 가치 있는 삶을 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현실에서의 삶이 끝나면, 인간의 욕망도 자연스럽게 원초의 세계로 돌아간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매우 불교적이다. 죽은 남자의 손등을 어루만지던 여자가 다시 붉은 거북으로 변해 바다로 돌아가는 장면은 이 작품에서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이며 주제를 극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긴 시간이 조금도 아깝거나 지루하지 않을 만큼 아름답다. 부드러운 선과 파스텔톤의 가라앉은 채색, 간결한 선과 최소한의 움직임, 작은 섬과 망망대해, 바람, 대나무 숲, 모래톱, 일렁이는 파도와 포말, 하늘을 나는 새, 붉게 물드는 노을, 어느 것 하나 소홀하지 않은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자연의 풍경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세 사람의 삶은 인류의 초기, 원시적 삶을 살았던 힘들지만 순수했던 시기를 떠올린다.
좁게는 개인의 인생을 그린 것으로 해석할 수 있고, 넓게는 인류, 신화를 상징하는 작품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 이 작품은 단 한 마디의 대사도 없지만, 말보다 더 많은 감정을 느낄 수 있고, 더 근본적인 질문과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이런 작품은 많은 사람이 보고 함께 이야기 하길 바라는 몇 안 되는 명작이다.
-
- [Netflix 영화] 그녀의 조각들 / Pieces of a Woman, 2020 - 맞춰야만 비로소, 완성되는 '나'라는 그림
영화 <그녀의 조각들>의 포스터
영화 <그녀의 조각들>은 주연 배우들의 이름만으로도 관심이 생기는 영화입니다.
이제는 어엿한 연기파 배우이지만, 아직도 관객들에게는 <트랜스포머>시리즈의 주인공 "샤이아 라보프"와 국내에서 <분노의 질주: 홉스&쇼>와 <미션 임파서블: 폴아웃>이라는 액션 프랜차이즈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보여준 "바네사 커비"가 출연하는 이 영화 <그녀의 조각들>은 이들의 필모를 생각하면, 맞지 않는 영화 같습니다.
그러나 영화는 "바네사 커비"에게 '제77회 베니스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안겨주며 우리의 선입견을 깨버렸는데요.
그런 점에서 "넷플릭스"에서 공개되는 <그녀의 조각들>은 당연히, 기대할 수밖에 없는 영화가 되었습니다.
'과연, 영화 <그녀의 조각들>은 어떤 내용을 보여줄지?' - 영화의 감상을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영화 <그녀의 조각들>의 장면
영화는 출산을 코앞에 둔 "마사"와 "숀"부부를 보여줍니다.
다리를 건설하는 노동자 "숀"은 앞으로 태어날 딸과 걷기 위해서 놀고 있는 다른 동료들을 채근하고, 자동차도 픽업트럭이 아닌 "SUV"로 바꾸는 등 "마사"만큼이나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요.
그렇게, 집에서 출산을 결정한 "마사"에게 뜻하지 않는 변수가 생깁니다.
이전까지 봐주던 조산사가 아닌 다른 사람이 찾아왔고, 힘들게 태어난 아기는 곧장 호흡에 이상이 생기는데…
“
맞춰야만 비로소, 완성되는 '나'라는 그림
1. 모든 것을 쏟아부은 초반 30분!
영화 <그녀의 조각들>은 126분의 영화로 적은 분량을 가진 영화는 아닙니다.
이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던 영화라고 언급한 만큼 그 소재가 대중적이지 않다는 선입견이 있을 겁니다.
여기에 영화는 시작과 동시에 30분간 "원테이크"처럼 출산 장면을 거리낌 없이 보여주니 이를 보는 관객들이 느끼는 부담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눈을 뗄 수가 없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것은 이를 연기하는 배우들과 연기를 더 살려주는 연출입니다.
“
쿵 하면, 짝하는 호흡!
흔히, 관객들에게 "다큐멘터리"는 "진짜"라는 인식이 있지만 이 역시 "편집"이라는 과정이 거치는 거짓의 산물입니다.
물론, 보이는 영상 말고도 읽는 글에도 이런 과정이 들어가니 창작자의 의도에 맞게 움직이는 것이죠.
그런데도 관객들은 진실을 요구하고, 이를 진짜로 보이게 만들어야겠죠.
그렇기에 화면을 끊이지 않고 연속적으로 방과 방을 보여주는 "원테이크"는 관객들에게 출산 상황을 진짜로 인식하게 만드는데요.
여기에 이를 보여주는 배우들의 연기도 확실하니 부담이 크더라도 <그녀의 조각들>이 어떤 영화인지를 관객들에게 첫인상을 확실하게 찍어내는데 성공합니다.
영화 <그녀의 조각들>의 장면
2. 30분이 끝나고, 영화도 지쳤나 보다.
초반에 힘을 몰아붙인 이유 때문일까요?
영화 <그녀의 조각들>은 이후 늘어지는 전개로 좀체 관객들을 집중시키지 못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후 영화가 보여주는 주된 내용이 "마사"와 "숀"부부의 불화로 이어지는 에피소드들이 이어지는데요.
여기에 영화는 "조산사"와의 법적 다툼도 다루지만 이를 유기적으로 연결하지 못하며 별개의 이야기, 단편적으로 쓰이는데요.
그러면서, 각기 다른 이야기로 인한 피로감과 개연성에 많은 부분들이 부딪히는데요.
이야기적으로 "숀"의 외도가 이해가 되면서도 마무리를 그렇게 지었어야만 하는 끝맺음처럼 "마사"의 법정에서 보여주는 마지막 장면이 뜬금없이 보이고 맙니다.
이처럼 영화 <그녀의 조각들>은 전반전과 후반전이 완벽하게 다른 영화가 돼버립니다.
“
다 이유가 있었을까요?
이런 이유에는 영화 <그녀의 조각들>이 "마사"라는 인물에 벗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이야기에 있어 다양한 인물들과의 관계를 가져오지 않기에 발생하는 에피소드의 가짓수가 적을 수밖에 없는데요.
그래서, 남편인 "숀"과의 에피소드는 반드시 필요한데 이마저도 앞에서 언급했듯이 마무리가 아쉬우니 126분이라는 시간은 더더욱 길게만 느껴집니다.
그렇다면, 영화가 보여주는 "마사"의 심리는 완벽했을까요?
이에 대해서도 영화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과 비교한다면, 만족감보다는 아쉬움이 더 짙은 부분들이 많았습니다.
일단, 해당 영화를 소개하자면 시한부인 주인공이 하루를 살아가는데 특정 기억을 하나씩 지운다는 내용입니다.
이에 대해서도 영화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과 비교한다면, 만족감보다는 아쉬움이 더 짙은 부분들이 많았습니다.
일단, 해당 영화를 소개하자면 시한부인 주인공이 하루를 살아가는데 특정 기억을 하나씩 지운다는 내용입니다.
영화 <그녀의 조각들>의 장면
3. 연기력에 비해 한없이 아쉽다?
영화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에서는 이를 "시계"에 비유해 자그마한 부품이라도 없다면 시계로서의 제 역할을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데요.
여기에 비선형적으로 보여주는 단편적인 기억들까지 더하며, 영화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 또한 지금의 나 자신이 존재하는 구성요소임을 말합니다.
이처럼 영화 <그녀의 조각들>도 "마사"의 심경 변화를 "사진"으로 보여주는데요.
냉장고에 있는 "숀"과의 사진을 정리한 "마사"와 딸과의 사진을 받는 "마사"의 모습으로 어떤 변화가 있는지를 말합니다.
이전에는 이를 부정하고 거부했다면, 끝내 이를 받아들임으로 비로소 오늘날의 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죠.
“
얼어붙은 강에도 다리는 이어진다.
영화 <그녀의 조각들>은 특이하게도 날짜와 "숀"이 진행하던 다리 공사의 진행도를 이야기의 챕터로 보여주는데요.
단순한 장면으로 보일 수 있지만, 꽁꽁 얼어붙은 강으로 모든 것이 정체된 것으로 사건 이후 이들의 상황을 간접적으로 말합니다.
특히, "마사"가 입에 무는 "사과"는 갈색으로 변해 썩어 버리며 점차 악화되는 상황을 말하나 이런 상황과 다르게, 다리는 점점 가까워지는 모습은 점차 개선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점에서 "마사"는 사과씨를 발아하는 장면은 이에 딱 맞는 장면입니다.
생명을 잉태하는 과정에서 좌절을 겪은 "마사"가 비록, 사과이지만 이를 밟음으로 점차 회복되고 있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죠.
물론, 이후 나무에 가려진 장면은 사족으로 느껴질 만큼 아쉬움이 생겼지만 배우들이 보여주는 연기에 비해 이야기가 아쉽다는 인상을 지우기는 어렵네요.
* 본 콘텐츠는 블로거 파천황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 <우주전쟁>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
<우주전쟁>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
하류층 반영웅
참 이상한 결말이다. 외계인의 습격을 받은 듯 잔해와 낙엽만이 가득한 보스턴 거리에 레이가 딸을 안은 채 쓸쓸히 걷고 있다. 그런데 그의 처량한 모습과는 달리 그가 그토록 찾았던 전처는 집에서 평안히 걸어 나온다. 외계인과 싸우겠다며 달려나가 화염 속에 자취를 감춘 아들 로비도 그곳에서 별안간 튀어나온다. 외계인과 정신이 나가버린 사람들 사이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레이의 처절한 생존기는 그들의 알 수 없는 평안 앞에서 참으로 허망하고 우스운 일이 돼버린다. 말하자면 스필버그는 이 대목에서 영화의 근간을 형성하던 사실성을 느닷없이 전복시킨다. 여기엔 어떠한 현실적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이를 강하게 뒷받침하는 것은 조도다. 스필버그는 사물의 하이라이트가 하얗게 떠서 없어질 정도로 과다한 광량을 사용함으로써 이것이 현실이 아니라는 신호를 보낸다. 그렇다면 이 비현실적 장면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이 장면의 주인공이며 영화 전체의 주인공인 레이의 비극적 상상 혹은 악몽을 의미하는 걸까. 만일 그렇다면 무엇이 그에게 비극적 상상과 악몽을 떠올리게 한 걸까.
<우주 전쟁>에는 보통의 재난영화와 달리 영웅이 없다. 서사를 견인하는 주체인 레이는 스필버그 영화의 모든 주인공을 통틀어서 가장 마음을 주기 어려운 비호감 캐릭터다. 어린 소년처럼 자식을 이겨 먹으려고 하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그들에게 지나치게 무심하다. 그렇다고 천재 과학자라거나 고위 관직에 있는 상류층 인물도 아니라서 관객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지도 못한다. 이러한 반영웅적 면모와 하층민이라는 초라한 지위는 그가 외계인의 위협을 뚫고서라도 기필코 가닿고자 하는 전처의 세계, 즉 상류층의 세계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영화에서 레이와 전처가 같은 장면에 등장하는 대목은 마지막 장면을 제외하면 그녀가 레이의 집에 아이들을 데려다주는 장면뿐이다. 말하자면 상류층은 쉽게 하류층의 세계에 닿을 수 있지만, 하류층은 결코 상류층의 세계에 닿을 수 없다. 그 사이는 끔찍한 외계인과 그들이 타고 다니는 살상 기계, 그리고 정신 나간 사람들로 가득하다. 요컨대 <우주 전쟁>이 자아내는 실질적 위협은 외계인의 습격이 아니라 두 계층 사이의 끔찍한 불화다. 우리가 매력적이지 않은 비호감 캐릭터 레이에게 동정심을 느끼는 건 그의 계층적 무력감에 동화되었기 때문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계층적 무력감뿐만 아니라 아버지로서의 절망감이 표출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는 로비의 귀환을 통해 은밀히 암시된다. 그는 분명 외계인과 싸우겠다며 언덕을 뛰어가다 화염 속에 사라졌었다. 그런 그가 주검으로 발견되기는커녕 머나먼 보스턴 집에서 평온한 얼굴로 나타난다. 돌이켜보면 로비는 누구보다 레이를 혐오하여 줄곧 어머니와 살고 싶어 했던 인물이다. 그러니 느닷없는 로비의 귀환은 레이가 자기 대신 전처와 살려고 했던 로비의 바람을 끔찍한 상상을 통해 대리적으로 실현시켜주는 것이다. 조금 모자라긴 해도 레이는 작중 대사에서 언급되었듯 로비를 끔찍하게 사랑하는 아버지이다.
스펙타클의 윤리
레이는 하늘에 소용돌이가 생기고 같은 곳에 벼락이 계속 내려치는 광경을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아이처럼 해맑게 즐긴다. 문제의 심각성을 알아차리는 건 그 위력이 점차 강화되다 자신에게 위협이 될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이러한 구도는 교회 앞에서 트라이포드가 지반을 뚫고 올라올 때 다시 반복된다. 사람들은 생경한 미지의 기계가 산출하는 매혹 앞에서 넋을 잃는다. 그들은 일종의 황홀경을 경험하는 듯 무척 신이 나 있다. 그러다 잠시 후, 외계인이 조작하는 이 살상 기계가 그곳에 몰린 구경꾼들을 잔혹하게 죽이기 시작하면서 재난은 시작된다. 그러니까 이러한 공식이 성립된다. 스펙타클은 매혹적이지만 그것을 본 사람은 높은 확률로 죽는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보는 행위다.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숨어서 보거나, 눈을 가려야만 한다.
외계인이 타고 다니는 살상 기계 ‘트라이포드’는 그 명칭과 기능, 그리고 형태에서 유추할 수 있듯 삼각대와 카메라를 동시에 연상시킨다. 구분하자면 세 개짜리 다리는 삼각대를, 본체는 카메라를 떠올리게 한다. 또한, 트라이포드는 압도적인 매혹을 뽐내는 스펙타클 자체로서 기능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이 끔찍한 기계는 영화라는 매체의 은유이면서 동시에 그 자체로 스펙타클로 구동되는 복합 기계인 셈이다. 중요한 것은 이를 둘러싼 군중, 달리 말하면 관객이 트라이포드를 보는 순간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대개 보는 자는 권력을 쥔 자이고, 보이는 자는 그에 지배를 당하지만, <우주 전쟁>에서 이 시선의 권력 관계는 완전히 전복된다. 보는 자는 죽고, 보이는 자는 자신을 향한 시선을 파괴하며 시선의 독점권을 확보한다. 한마디로 스펙타클로서의 영화는 관객의 시선을 빼앗고 역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폭력의 주체가 된다.
스펙타클에 대한 위와 같은 경고는 조던 필이 <놉>에서 스펙타클을 다루는 방식과 같다. 그러나 영화가 개봉된 시기를 고려하면 <우주 전쟁>을 단순히 영화와 할리우드가 생산하는 스펙타클의 함정을 꼬집는 것으로 한정하기는 어렵다. 이것은 9‧11 테러 이후, 이 끔찍한 스펙타클을 보도하는 영상 매체에 대한 스필버그의 통렬한 성찰을 반영하는 것이다. 테러의 장면은 필연적으로 스펙타클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것의 매혹은 사람들의 시선을 불러일으키지만, 동시에 그들에게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심어 놓는다. 때문에 스필버그는 이 죽음에 대한 불안, 그리고 그것에 대한 전시를 보여주지 않는 방식으로 영화의 나머지 분량을 채운다. 그리고 그것을 볼 수 없도록 인물이 눈을 가리는 행위를 특정 대목마다 새겨넣는다. 딸이 강에 떠다니는 시체들을 보지 못하도록 레이가 그녀의 눈을 가리는 장면과 지하실에 은둔 중인 호전광을 살해하는 광경을 보지 못하도록 헝겊으로 딸의 눈을 가리는 장면이 그렇다. 이 논쟁에 관한 한 스필버그는 어느 때보다 단호하다. 테러라는 끔찍한 스펙타클을 보지 않는 것. 그것의 매혹을 참고 견디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첫 번째, 그리고 최선의 윤리적 행동이라는 것을 스필버그는 타협 없이 끝까지 관철시킨다. <우주 전쟁>은 스펙타클의 윤리학을 말할 때 끊임없이 소환될 수밖에 없는 영화다.
-
-
- [퀴어] 끝장리뷰 | 육체와 정신 | 종교적 해석 | 뱀, 죄수복, 권총, 야헤 상징
#drewstarkey #퀴어영화 #DanielCraig
[퀴어](2025)에 대한 헐거운 리뷰
Chapter 1 육체와 정신
Chapter 2 종교적 해석
00:00 CGV 단독개봉
02:05 육체와 정신
06:22 종교적 해석
11:17 별점 및 한 줄 평
11:36 다음 리뷰 예고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퀴어해석 #루카구아다니노퀴어 #퀴어리뷰 #영화퀴어 #퀴어영화 #루카구아다니노 #다니엘크레이그 #LucaGuadagnino #DanielCraig #드류스타키 #drewstarkey #윌리엄버로스 #WilliamBurroughs #queermovie #queerreview
-
- 영화 <승리호>
어느날, 사고 우주정을 수거한 ‘승리호’는 그 안에 숨어있던 대량살상무기로 알려진 인간형 로봇 ‘도로시’를 발견한다.
돈이 절실한 선원들은 ‘도로시’를 거액의 돈과 맞바꾸기 위한 위험한 거래를 계획하는데…
-
- 영화 <범죄도시4> 인터내셔널 예고편
전 세계가 괴물형사를 주목해 #범죄도시4 Coming Soon #마동석 #김무열 #박지환 #이동휘 #DonLEE #KimMooYul #ParkJiHwan #LeeDongHw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