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평2025-02-10 13:19:55
지금 청춘은 어디에 있는가
단편영화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비평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영화의 제목이자 핵심인 문장이다. 우리는 어디에 있을까. 또는 대체 우리는 누구일까. 약 6분 내외의 단편영화지만, 그 짧은 시간에 많은 의미들이 영상 속에서 부유하고 있다.
단편영화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는 단 두 명의 인물로만 흐름을 전개한다. 단편영화의 특성이나 한계가 명확하기에 적은 인원을 사용하지는 않았을까, 생각할 수 있다. 평론을 하는 입장에서 그것을 정확히 파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겠지만 그 부분이 사실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주목해야 하는 것은 단편영화가 가지는 그 한계점을 '적은 인원으로도 관객에게 충분히 소구 가능한' 이야기로 타파해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와 식물들의 관계에는 무엇이 있는가
비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과거가 있다. 그것도 아름다우면서도 슬픈 사랑의 과거가 있다. 청춘에 사랑이 빠질 수 있으랴. 우리는 한 아파트의 야외에서 우산을 펼치고 비를 맞으며 쪼그려 앉아 있는다. 첫 카메라 앵글에서 우리는 정말 비를 맞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이내 미래가 뿌리는 '가짜 비'라는 것을 관객은 알게 된다. 우리는 왜 비를 맞고 있나.
러닝타임 내내 영화 곳곳에서 식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종류는 다양하다. 토마토, 딸기 모종, 몬스테라. 미래는 우리에게 토마토를 준 적이 있고, 우리는 토마토를 기른 적이 있다. 토마토는 햇빛과 물만 있으면 쉽게 자란다. 우리도 그걸 알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애써 그 사실을 부정한다. 그 토마토 화분을 버린 적도, 그렇다고 기르지 않은 적도 없지만 열매가 맺는 것은 우리와 다른 상황에 놓여있는 것이 된다. 우리는 아직 비를 맞고 싹을 틔우지 못한 상황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 슬픈 사랑의 과거가 자기 자신의 성장을 저해하는 요인이 될 수밖에 없다. 싹도, 햇빛도 들지 못한 마음에 열매를 맺은 토마토를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을까.
미래는 그런 우리에게 희망을 심는다. 지금 마음이 어떨지 몰라도 심고 기르다 보면 마음이 편해진다고. 우리의 마음에 볕을 들게 하라는 듯이 말을 건넨다. 미래의 할머니가 미래에게 전한 말이기도 하다. 우리의 시간보다 곱절은 더 많은 시간을 보냈을 할머니의 말을 잘못됐다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 말을 듣고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미래가 기르는 몬스테라는 방 안에서 길러지고 있다. 인공조명의 도움으로 빛을 받고 자란다. 어쩌면 우리와 비슷한 모습으로 보인다. 우리는 스스로 물을 받아내지 못해 위층에서 미래가 물을 뿌려주어야만 하고, 스스로 마음에 빛을 들이지 못해 미래에게서 위로되는 말들과 조언을 들어야만 한다. '답답하지 않을까'. 우리가 몬스테라를 보고 처음으로 꺼낸 말이다. 일은 일사천리로 이루어진다. 우리와 미래는 몬스테라 화분을 방에서 끄집어내고, 계단을 통해 내려보내고, 끌차로 끌어 햇빛을 보게 하려 한다.
급한 마음에 사고가 잇따르는 것은 필연일까, 우연일까. 그 과정에서 몬스테라가 심어져 있는 화분이 떨어져 깨지고 만다. 깨진 화분을 들고 갈 수는 없다. 끌차에 올려 끌고 갈 수도 없다. 몬스테라를 심었던 그 흙들은 이미 모두 깨진 화분의 틈새로 새어 나와 주워 담을 수 없게 된다. 우리와 미래는 결단해야 한다.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결국 몬스테라를 봉지에 담아 바깥에 아주 심기로 택한다. 인공조명과 미래가 주는 물로 애써 생명을 이어가던 몬스테라는 이제 자유로이 빛을 받고 물을 머금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우리가 있다. 우리가 몬스테라에게 그 기회를 주었고, 직접 몬스테라를 이고 가 심어준다.
우리에게도 그럴 기회가 있어야 할 것이다. 직접 빛을 받아야 할 것이고, 직접 물을 머금을 기회를 가져야 한다. 그 누구도 인공적으로 도움을 준대도, 직접 하지 않으면 그 어느 것도 온전히 자기 자신의 양분이 되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미래에게 의존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도 우리의 힘으로 자유롭게 방향과 양분을 찾아야 한다.
과거는 오래 간직해도 좋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 그 위에도 결국 다시 싹이 튼다고 한다. 어떤 과거에도 새로 싹은 트고, 삶은 다시 한번 새롭게 트여 계속해서 돋아날 것이다.
단순히 작 중의 우리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지금의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들, 즉 '우리'에게도 통하는 말이다. 사랑과 이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모든 시도에는 실패가 따르기 마련이고 좌절이 있기 마련이다. 주변에서 건네는 위로와 조언들이 많겠지만 언제까지나 그 인공적인 것들에 의존하며 살 수는 없다. 우리의 삶이 우리만의 것이듯, '우리'의 삶도 '우리'의 것이니까.
많은 좌절과 실패 끝에는 자기혐오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 또한 필연적인 것이다. 불행한 운명이라면 운명이라 하겠지만, 현시대의 인간이라는 존재는 계속해서 그 틀을 깨고 부숴 나아가야 한다. 어떤 형태의 과거이든 간에 그 위에 새로이 싹을 틔우고 돋아나게 해야 한다. 그렇게 나아간다.
영화의 종반부에서 재미있는 구도를 보여준다. 바로 우리가 카메라에 직접 물을 뿌려 주는 것. 우리는 몬스테라에게 물을 줬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왜 그 모습을 보는 '우리'에게 주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우리가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는 감정을 느끼는 몬스테라에 물을 뿌려주는 것처럼, 결국 '우리'도 '우리'에게, 정말 '우리' 스스로가 아니더라도 동일시할 수 있는 것들에 힘을 주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안에 있는가 바깥에 있는가. 안에 있다면 바깥으로 가야 하는가. 바깥에 있다면 안으로 가야 하는가. 그 어느 곳에도 정답은 없지만, 안에 있다가 보면 바깥으로 나가야만 하는 순간이 오고, 바깥에 있다 보면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순간이 온다. 마치 작 중에 등장하는 몬스테라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몬스테라이고, 몬스테라는 우리다. 몬스테라는 바깥에 없다. 바깥에 없다는 것은 직접 무언가를 쟁취할 수 없다는 것이 된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 된다. 우리의 마음도 바깥에 없다.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는 그 속에서 변화할 기회를 모두 놓친다. 우리 또한 몬스테라처럼 그렇게 야외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그 메시지는 영화의 끝에서 몬스테라가 심어지게 되는 그곳, 자유롭게 햇빛을 쬐고 물을 머금을 수 있는 그곳이지 않을까. 실내에서만 지내던 몬스테라가 야외에서 어떻게 잘 살아갈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영화에서조차 그 이후의 이야기는 다루지 않는다. 그래도 우리는 몬스테라에게 물을 준다. 우리 자기 자신도 미래도 서로를 그렇게 믿고 방치해야만 한다. 사랑이 오면 떠나가야 하는 순간이 온대도, 모든 시도에 실패와 좌절이 따를 수밖에 없대도 직접 뿌리내리고 고개를 치켜들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게 진정한 삶이고, '우리'를 향한 애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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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일대학교 사진영상학부 학생들의 단편영화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는 유튜브에서 관람할 수 있습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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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를 기다리는 동안, 영화 <시간을 달리는 소녀>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결정하지 않는 것도 결정이라니. '무의사결정'이란 말 참 매력적이다. 처음 들었을 때 인생의 진리를 한 마디로 정리한 기분같았다. 결정하지 않는게 대체로 No를 뜻하는 경우가 많겠지만. 결정하지 않는 것에도 책임감과 무게감을 부여하고 있다. 좀 더 쉽게 접근하자면 의사결정을 확률에 맡기는 것도 비슷한 종류일 것이다. 확률에 내면의 자신감과 책임감 문제를 맡길 수 있다. 앞면의 이순신이냐, 뒷면의 숫자가 나오냐에 따라 결정이 달라진다. 이파리를 하나씩 뜯어서 기다 아니다를 정한다. 요즘엔 기계가 대신 결정해주기도 한다더라. 여긴 아예 있던 일도 없던 일로 만드는 시공간초월 무의사결정이 있다. 바로 영화 < 시간을 달리는 소녀 >에서.
취향의 문제겠지만 수많은 일본 애니메이션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영화다. 무려 최근에 본 눈이 부신 <너의 이름은>을 보고도 아직은 그렇다.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명언 때문덕이기도 하다. 시간을 되돌리고 싶던 순간이 많아서 탐이 났다. 대리만족도 됐고 시간을 바꿔봐야 어차피 별로 대단하게 바뀌지 않는 걸 보고 안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늘 눈에 아른거리는 건 마코토의 모습이었다. 바보같고, 오지랖 넓고, 당당한 마코토.
우연히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을 얻었을 때 마코토는 바보같았다. 대단한 걸 바꾼게 아니었다. 동생이 대신 먹은 푸딩, 엊그제 먹은 철판구이 고기, 노래방 계속 가기. 갑자기 닥쳐온 쪽지시험은 그렇다 치자. 절친인 치아키와의 캐치볼 공의 노선을 다 알아서 잡는 용도로 쓴다. 세상에, 그 능력을 그렇게 쓰는데도 마코토니까 이해가 간다. 그렇게 평범하게 써서 좋았다. 용돈은 다시 타서 쓰게 시간을 되돌리지만 복권당첨번호를 써먹으려고 쓰진 않는다. 주가조작도 안했고 누구 돈을 뺏지도 않았다.
물론 그 중엔 정말 바보같은 결정도 있었다. 그녀는 갑자기 치아키가 고백한 게 두려워서 없던 일로 만들었다. 한두번도 아니고 몇 번이나. 어떻게 말할지 잘 생각하고 돌린 것 같지도 않다. 맨날 할말 없으면 뜬금없이 동생 얘기를 해버리니까. 그래놓고 고백받은 기억 때문에 어색해서 치아키를 피해다녔다. 몰랐던 것이다. 때로는 같이 용기내 문을 열지 않으면 다시는 열리지 않는 문이 있다. 코 앞에서 영영 닫혀버리는 것이다. 상대는 기억하지 못하는 그 순간으로 내 마음은 이미 살금살금 문이 열려버렸는데 덫에 걸려버린 것이다. 거절하지도 승낙하지도, 듣도 보도 못한 고백은 이제 그녀의 기억에만 존재한다. 치아키는 아프지도 않게 차였고 마코토는 아무한테 말도 못하고 혼자 끙끙 앓아야 한다. 잔인하다.
자신이 치게 될 사고를 남이 치게 만들고 나니 엄한 사람들이 다쳤다. 자신에겐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 변수처럼 일어났다. 괴롭힘 당하던 친구는 억눌린 화풀이를 했고 그 결과 친한 친구 유리가 다치고 말았다. 유리는 다치긴 했지만 그 일로 좋아하던 치아키가 남자친구가 되었다. 마코토는 가장 시간을 되돌리고 싶을 이 순간에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시간을 돌리는 이 축복같던 무의사결정에 기뻐했던 자신에게 주는 벌일지도 모른다. 이미 그녀는 그 고백도, 치아키도 놓쳤고 유리와 같은 반 친구에게 없어도 될 상처를 주었다. 많은 여주인공이 무너져버릴 순간, 그녀는 울지 않는다.
마코토는 이 상황에서 오지랖이 넓다. 변화가 있다면 그녀 자신을 위해서 쓰던 타임 리프가 이제 소중한 다른 이들을 위해서라는 것이다. 상황을 회피하기 위해서였던 무의사결정 대신 시간을 돌려 능동적으로 의사결정을 한다. 친한 친구 고스케의 여자친구 만들어주기에 남은 기회를 거의 다 써버렸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다시 바보같았다. 치아키의 타임리프 질문에 얼어버려서 다시 회피용으로 시간을 되돌려 버렸다. 결과는 참혹했다. 소중한 고스케를 잃는 것이 분명해졌다. 더 이상 멈출 수 없는 시간 앞에서 그녀는 주저 앉아 미친 사람마냥 시간을 멈춰달라며 절규했고 그 소원을 들어주면서 치아키는 마코토와 이별해야 했다. 하고픈 말도 하지 못하고 괜한 소리만 하면서 마코토는 멋없이 치아키를 보내야 했다.
다시 한번 시간을 돌릴 기회가 생겼을 때 마코토는 이상하고도 멋진 결정을 한다. 숨이 차오를 때까지 열심히 달려가서 이 모든 것의 시작으로 돌아가 끝낸다. 이번엔 회피하지도 않고 치아키와도, 모든 사실과도 당당하게 마주한다. 그녀가 치아키를 좋아한다는 것마저도. 모든 상황을 치아키에게 털어놓고 그를 그가 있던 미래로 보내는 것. 굳이 그를 돌려보내는 건 대체 왜일지 생각해봤다. 여러번 볼 때마다 미래에서 기다리겠다는 치아키의 멋진 말에만 심취해서 그 뒤로 당당해진 마코토는 잘 생각하지 못했다. 치아키는 미래에서 시간을 되돌아왔고 이미 일찍 떠났어야 하지만 떠나지 않고 여기 시간의 흐름에 맡겨버렸다. 그조차도 무의사결정을 한 건 마찬가지다. 그 먼 시간을 지나 보고 싶었던 소중한 그림도 보지 못했고, 마코토도 좋고, 그에겐 과거이지만 여기선 현재인 이 시간이 좋아서라는 멋진 핑계가 있을 뿐.
그래서 마코토는 치아키를 위해 결정한다. 자신이 울어버릴 일인데도. 이제 시간을 되돌리는 게 얼마나 본인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잔인하고 아플 수 있는 일인지 마코토는 알고 있다. 어쩌면 치아키의 그 고백, 마코토 모르게 치아키도 꽤 여러번 고백했다가 없었던 일로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소중한 친구 고스케가 이미 여러 번 죽을 운명이었던 것을 구해주었던 것을 마코토가 몰랐듯이. 아무도 모르는데 나만 감당해야하는 괴로움을 알기에 마코토는 좋아하는 치아키가 더 이상 시간을 오가게 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는 현재이자 마코토에게는 미래인 그 시간에서 치아키가 행복하길 바라기에, 그가 좋아하는 그림이 온전히 전해질 수 있게 여기 남아 그가 그의 시간에서 행복할 수 있게 하는 것. 그리고 더 멋진 사람이 되어 치아키를 찾아가는 게 그녀가 내린 결론일 것이다. 그렇게 치아키는 미래에서 마코토를 기다리고 마코토는 현재에서 치아키에게 달려간다.
기다린다, 달려간다, 문이 열린다. 나도 모르게 < 시간을 달리는 소녀 >와 연결짓고 있던게 황지우 시인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이라는 것을 글의 끝자락에서야 깨달았다. 글의 방향을 정하지 않고 쓴 무의사결정적 글이라니 부끄럽지만. <너를 기다리는 동안>은 어쩌면 내겐 생애 첫 시다. 언니의 책상에서 어릴 적부터 의미도 모르고 읽었던 시였다. 애기 때는 의미가 잘 와닿지 않아서 이 시가 어디가 좋아서 언니가 책상 안에 끼워넣었을까 했었다. 그런데 읽으면 읽을수록, 가만히 있다가 생각나곤 하는 시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도 마찬가지다. 영화의 엔딩이 혹시나 아쉬웠거나 뒷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나는 치아키와 마코토의 모습을 보여줄 시로 이 시를 꼽겠다. 영화가 끝날 때쯤이면 마코토는 달라져있다. 여전히 덜렁대고 바보같지만 당당하다. 여전히 무의사결정을 생의 곳곳 틈틈히 쓸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치아키와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는 아닐 것이다. 아주 어렵고도 쉬운 결정을 했다. 마코토는 시간을 달리지 않으면서 시간을 달리고 있다. 타임 리프도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닌 온전히 자신의 능력으로. 먼 곳에서 오지 않는 치아키에게, 아주 먼데서 오는 치아키에게 가고 있다. 달려가고 있다. 치아키가 그러하듯이.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쾅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황지우 <너를 기다리는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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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짧은 만남 - 밀회
짧은 만남 - 밀회
데이비드 린 감독 작품. 1945년 작품. 원작 희곡인 Still Life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 영어 제목은 Brief Encounter로 '짧은 만남'이라는 뜻이지만, 한국에서 개봉할 때는 '밀회'라는 제목이었다. 희곡 제목인 '스틸 라이프'나 영어 제목인 '짧은 만남'은 담백하고 중립적인 느낌인데, '밀회'는 불륜을 연상케 하는 자극적 제목이라는 점에서, 배급사에서 흥행을 노리고 지은 제목임을 알 수 있다.
이 영화는 1946년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으니, 당시 유럽 관객이나 평론가들이 영화의 완성도를 인정했음을 알 수 있다. 시나리오는 감독 데이비드 린과 원작 희곡 작가인 노엘 코워드가 함께 썼는데, 그래서 시나리오의 완성도가 훌륭하다. 현재의 시각으로 보면 너무 점잖고, 결말도 윤리적, 도덕적 선을 넘지 않는 일탈에 불과하지만, 당시의 관객이 볼 때는 남녀 주인공의 애절한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지는 영화였다.
스토리는 단순하다. 평범한 가정주부 로라(셀리아 존슨)은 매주 목요일이면 혼자 외출해서 쇼핑도 하고, 영화도 보고, 차도 마시며 하루를 보낸다. 어느 날, 기차역 대합실에서 한 남성을 보게 되고, 역 플랫폼에 나갔다가 눈에 티끌이 들어가서 괴로워한다. 이때 그 남성이 다가와 자신을 의사라고 소개하고, 로라의 눈에 들어간 티끌을 닦아준다. 이 일을 계기로 두 사람은 함께 차를 마시고, 서로 인사를 나눈다.
로라가 나들이를 하는 목요일이면 두 사람은 편하게 만나 차를 마시거나 영화를 보거나 산책을 한다. 그렇게 친구처럼 만나면서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끌린다. 하지만 로라는 남편이 아닌 외갓남성에게 끌리는 자기의 마음에 죄의식을 갖고, 남편을 둔 아내로서, 아이들의 엄마로서, 가정주부가 가져야 할 현숙함에 대해 갈등한다. 머리로는 당연히 가정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이미 의사 알렉(트레버 하워드)에게 깊이 빠져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알렉 역시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이 있음에도 로라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한다는 마음을 확인하지만, 마지막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갈등과 번민을 계속한다. 그러다 알렉이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떠난다고 말하고, 로라는 처음 알렉을 만났던 기차역 대합실에서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떠나보낸다.
로라의 나레이션으로 이어지는 영화는 처음과 끝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면서 영화의 극적 반전을 보여준다. 짧은 만남, 긴 여운, 식지 않은 사랑의 감정과 이별의 아픔, 가정이 있는 유부남, 유부녀의 불륜의 경계에서 팽팽한 긴장을 느끼는 날카로운 감정 등 이 영화는 '불륜영화(?)'의 클래식으로 불릴만 하다.
1984년에 개봉한 영화 '폴링 인 러브' 역시 많은 부분에서 '밀회'와 비슷하다. 무대는 뉴욕, 메릴 스트립과 로버트 드 니로가 연기한 이 영화는 마치 '밀회'를 리메이크한 느낌이다. 두 사람이 만나는 과정은 크리스마스 선물이 바뀐 것이 계기인데, 기차에서 다시 만나게 되면서 서로에게 호감을 갖는다.
몰리(메릴 스트립)은 디자이너지만 병을 앓고 있는 아버지를 돌보기 위해 일을 쉬고 있는 가정주부로, 남편은 의사지만 부부의 애정은 깊지 않다. 프랭크(로버트 드 니로)는 건축기사로 아내와 아이들을 사랑하는 좋은 남편이자 아빠다. 몰리는 프랭크를 만나면서 남편에게서 느끼지 못한 감정을 느낀다. 두 사람은 기차에서 만나 서로의 애정을 확인하지만, 몰리의 아버지가 사망하고, 몰리가 더 이상 기차를 탈 기회가 없어지면서 두 사람은 다시 남남으로 돌아가게 되지만, 몰리는 애정 없는 결혼생활, 아버지의 죽음 등으로 마음이 변하고, 프랭크 역시 몰리를 만난 이후 결혼생활이 흔들리게 된다. 서로 만나지 못할 것 같은 두 사람은 1년 뒤 크리스마스에 운명적으로 다시 만난다. 이미 서로의 배우자에게 새로 만나는 이성이 있다고 밝힌 뒤여서 두 사람이 결합할 가능성을 보이며 영화는 끝난다.
1995년 개봉한 영화 '매디스 카운티의 다리'도 비슷하다. 같은 제목의 소설이 베스트셀러였고, 이 소설을 바탕으로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 영화로 만들었다. 주인공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메릴 스트립. 프리랜서 사진작가인 로버트(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매디슨 카운티에 도착해 로즈만과 할리웰 다리를 찍으러 돌아다니다 길을 잃는다. 그러다 우연히 한 농가주택에 멈춰 길을 묻는데, 나온 사람이 프란체스카(메릴 스트립)이었다. 우연히도 프란체스카의 남편과 아이들은 일리노이주 박람회 구경을 하느라 나흘 동안 프란체스카 혼자 있게 된 것이다. 길을 알려주게 된 인연으로 두 사람은 나흘의 시간을 함께 보낸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로버트가 비가 오는 날, 차를 몰고 다시 프란체스카의 집에 도착해 함께 떠나자고 했을 때, 차의 문을 열려는 떨리는 손과 남편과 아이를 떠나서는 안 된다는 이성 사이에서의 갈등으로 흐느끼는 프란체스카의 모습을 보면서, 관객들은 불륜이지만 아름답다는 말을 할 정도였다.
창작은 많은 경우 작가의 상상을 구체화하는 과정이다. 예술 분야마다 창작의 결과물이 다르게 드러나지만, 작가의 상상력이 물질화, 구체화, 현재화한다는 것은 같다. 소설은 문자를 통해, 영화는 영상을 통해 창작자의 상상을 구체화한다. 이때 창작과 현실은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지만, 개연성은 충분하다. 추상 작품의 난해함을 해석하는 방식이 저마다 다른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듯, 문학이나 영화에서 창작을 해석하는 방식 역시 그것을 받아들이는 독자, 관객마다 다른 것은 당연하다.
창작에서 불륜을 소재로 작품을 만드는 건, 현실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겪는 도덕적, 윤리적 딜레마를 의도적으로 건드리는 행위다. 이런 작품을 보면서 누군가는 몹시 불편한 마음이 되고, 누군가는 주인공의 처지를 안타까와 하며, 누군가는 주인공들을 비난한다. 같은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도 저마다 윤리, 도덕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이런 소재의 창작을 바라보는 시각 또한 다르게 드러나는 것이다.
어느 시대를 불문하고 모든 창작물은 시대의 경계를 걷는다. 예술과 외설, 도덕과 비도덕, 윤리와 비윤리의 경계를 드러내는 것이 창작자의 역할이기도 하다. 사람들의 윤리의식이 시대에 따라 달라지듯, 창작물도 시대의 인식보다 한 걸음 앞서 나간다. 소설 '롤리타'나 '차탈레이 부인의 사랑' 같은 작품은 당대에 사회적 논란을 일으킨 작품으로, 지금도 문제 작품으로 이름을 남긴 작품이다.
윤리나 도덕적 기준을 넘나드는 작품은 자칫 선정적, 포르노적 이미지로 남기도 하는데, 예술작품과 외설의 경계 역시 미학의 경계에서 어느 쪽으로 기우느냐에 따라 판가름난다. 당대의 윤리를 뛰어넘는 작품이라도 미학적으로 완성도가 높은 작품은 '예술'의 영역으로 들어온다. 그렇다면 미학적 기준은 변하지 않는 걸까. 당연히 변하지만, 인류의 문명이 본격 시작된 2천여 년 전부터 지금까지, 인류의 가치관, 철학적 질문, 세계관, 사상의 흐름은 본질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며, 외부의 영향에 쉽게 흔들리고, 자신의 생각 조차도 일관성을 유지하기 어려운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면서 지극히 개별적 존재이며, 선함과 악함을 동시에 지닌 양면적 존재이고, 프로이트와 융의 해석처럼 개인의 무의식과 집단 무의식을 동시에 지닌 존재이기도 하다. 이런 인간들이 동물적 충동과 이성적 판단을 동시에 해야 하는 딜레마에 놓이는 것은 당연하고, 동시에 두 사람 이상을 사랑하거나, 사랑하는 감정과 증오하는 감정을 동시에 갖게 되는 것 역시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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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픈 가족을 품고 사는 이들의 슬픔과 희망!
서서히 죽어가는 가족을 바라보는 것보다 더 슬프고 힘든 건 없다. 옆에서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무력감은 물론, 언제까지 이 지난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그 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디즈니 플러스 영화 <썬코스트>는 이런 양가적인 감정을 안고 사는 한 가족의 이야기로 삶의 한계에 다다른 이들의 민낯을 보여준다. 미안함, 죄책감, 답답함 등으로 얼버무려져 있는 이들의 복잡한 심경 사이로 명확히 보이는 건 슬픔, 현실, 그리고 작은 희망이다.
꿈도 많고 하고 싶은 게 많은 10대 소녀 도리스(니코 파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뇌종양으로 투병 중인 오빠를 돌봐야 하고, 아들을 고통을 마주한지 오래되어 매사 신경이 곤두서있는 엄마(로라 리니)의 눈치도 봐야 한다. 호스피스 병원 ‘썬코스트’로 오빠를 옮긴 이후에도 팍팍한 삶은 나아지지 않는다. 그나마 숨통이 트이는 건 파티가 일상인 학교 친구들, 썬코스트에서 만난 아저씨 폴(우디 해럴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오빠와의 이별의 시간은 다가온다.
<썬코스트>는 실제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난 오빠를 향한 로라 친 감독의 뒤늦은 연서이자, 자신의 성장담이다. 감독은 과거 10대 시절 가졌던 마음을 도리스에게 투영시켜, 오빠를 향한 슬픔과 미안함, 평범한 10대의 삶을 살고 싶었던 양가적인 마음을 드러낸다. 영화는 전자보단 후자에 무게 중심을 두는데, 그도 그럴 것이 도리스는 오빠로 인해 삶이 저당잡혔기 때문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TV 프로그램도 시청 못 할 정도로 엄마의 압박에 시달리고, 언제나 아픈 오빠가 먼저고, 자신은 뒷전인 상황은 못마땅하다. 아픈 오빠를 위한 희생은 인지하고 있지만, 이를 당연시하는 엄마와 세상은 감옥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도리스의 딜레마는 썬코스트에 입원한 ‘테리 샤이보’ 사건으로 이어진다. 2005년 실제 있었던 이 일은 15년간 식물인간 상태로 있던 테리 샤이보라는 여성이 영양 공급 튜브를 제거하라는 법원의 판결에 따라 숨지게 된 사건이다. 테리 샤이보의 부모는 물론, 당시 존엄사를 반대한 이들과 달리, 법원은 그녀가 정상이었을 때 이런 식의 생명 유지는 원치 않는다는 말했었다며 영양 공급 튜브 제거를 청원한 남편의 손을 들어줬다. 윤리적 관점이나 남편의 좋지 않은 행실은 제외하고라도 이 사건은 아픈 가족을 품고 사는 이들이 겪는 현실적 고민과 다른 입장을 표방하는 사회의 목소리가 충돌한 계기로 비친다. 아마 도리스는 남편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했을 터.
그 마음을 대변하듯 영화는 윤리적, 도덕적 갈등을 떠나 이 비통한 상황을 아는 이는 가족이나 동일한 아픔을 가졌던 사람만이 알 수 있다고 말한다. 극 중 썬코스트 앞에서 테리 샤이보의 생존권을 주장하는 이들이나 학교에서 존엄사의 비윤리적 문제에 대해 논하는 선생님의 이야기보다 비록 테리 샤이보의 생존권 운동에 동참한 강성 생명윤리주의자이나 자신과 같은 아픔을 가진 폴에게 도리스가 마음의 문을 여는 건 이 때문이다.
영화의 한 축을 담당하는 건 성장이다. 감독은 외형이 아닌 내적 성장에 초점을 맞추며, 학교 졸업 파티가 아닌 유명을 달리한 오빠에게 진심을 전하는 그 순간에 집중한다. 뒤늦은 고백이자 마음이지만,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낼 때 다음 발걸음을 뗄 수 있다고 덧붙인다. 더불어 아들의 가느다란 실과 같은 생명줄을 부여잡고 놓지 않으려는 엄마 또한 자식을 떠난 보낸 후 비로서 자신과 딸을 바라보며 또 다른 삶의 목적을 향해 나아간다.
이렇듯 <썬코스트>는 죽음을 앞둔 가족을 두고 모녀 간의 복잡한 관계와 성장 과정에 집중하지만, 그 깊이가 얕은 건 아쉬운 지점이다. 그동안 응어리졌던 모녀간 관계 해결 부분이 약하다 보니 관계 개선이 급작스럽게 되는 부분 등 작품이 지닌 단점을 메우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영화가 빛을 발하는 건 신예 니코 파커, 베테랑 로라 리니와 우디 해럴슨의 연기다. 니코 파커는 여느 10대 소녀의 말간 모습을 보여주는데, 연기 원숙도를 떠나 작품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로라 리니, 우디 해럴슨은 베테랑으로서 감정의 진폭을 조율하며 극의 분위기를 살리는데 일조한다. 특히 니코 파커는 이 영화로 제40회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미국 드라마) 신인 연기상을 수상했다.
사진 제공: IMDB
평점: 2.5 / 5.0
한줄평: 걸출한 성장 서사는 아니지만 마음에 가닿는 상실의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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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 인생의 친구가 나에게 절교를 선언했다
절교는 아니지
한적한 아일랜드의 어느 동네. 파우릭은 시골에 살고 있는 촌뜨기 아저씨다. 파우릭이 즐기는 인생의 재미 중 하나는 절친 콜름과 수다를 떠는 일이다. 아무 목적이 없는 대화가 원래 가장 재미있는 법이다. 결혼도 안 하고 직업이 엄청나게 좋은 편은 아닌 파우릭. 가족이라고는 여동생 한 명, 반려동물 당나귀 제니와 함께 살고 있다. 그야말로 콜름이 유일한 인생의 낙인 셈이다. 오늘도 일과를 마치고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콜름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오늘은 무슨 이야기를 하지? 위이잉 돌아가는 행복회로가 오늘도 그를 기쁘게 만든다.
콜름의 집에 도착했다. 뾰로통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파우릭. 늘 하던 것처럼 창문을 쾅쾅 두드린다. 반갑게 웃어보는 파우릭. 본 척도 안 한다. 뭐지?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든다. 문제가 생긴 걸까? 파우릭의 근황이 궁금하다. 찜찜한 콜름. 비단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아무 의미 없는 수다를 떨었는데 냉담한 태도가 신경 쓰인다. 자주 갔던 술집에 가는 파우릭. 콜름 없이 혼자 온 지금 이 순간이 낯설기만 하다. 그렇게 그냥 가만히 앉아 있는데 파우릭이 들어온다. 따져 묻는 듯, 말을 거는 콜름. 몇 마디 대화가 온 끝에 돌아온 대답은 냉정하고 아프다. “난 이제 네가 싫어졌어.” 그 순간, 두 사람의 사이에 갑자기 불이 붓기 시작한다.
싸우면서 크는 거야
이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온갖 장소에 깔려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누구와 누군가가 싸우는 일은 필연적이다. 이런 일들을 내가 통제할 수 있을 거라 믿지만 사실 어림없다. 그렇게 내가 생각하는 것 이외의 요소에서 사람들끼리 멀어지기 마련이다. 이 이후에 쨘하고 일어나는 결과. 이 세상 사람들은 '진짜 극혐인 사람'과 '좀 미안한 감이 있는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 좋은 기억으로 이별한다는 것이 참 어려운 일임을 깨닫는 것이다.
영화는 이 두 가지 인간관계를 전부 보여준다. 첫째. '진짜 극혐'인 사람으로 남는 이유를 보여준다. 영화가 인물 간의 밸런스를 잘 잡았다는 말과도 통한다. 상대방이 어떤 태도를 취할 때 멋이 없다고 느낄까? 여러분들마다 생각이 다를 것이다. 그러나 모두의 의견이 통하는 지점이 하나 있을 텐데, 영화는 그 부분에 대해 구체적으로 아주 개연성 있게 묘사했다. 왜 콜름이 파우릭을 싫어하게 됐을까? 합리적이다. 이 말을 한 후에 콜름은 왜 그렇게 행동할까? 타우릭은 또 왜 그럴까? 합리적이다. 이 두 사람을 둘러싼 주변인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현실감이 있다. 원작자 겸 각본가인 마틴 맥도나가 창조한 이야기다. 당연히 인공적인 무언가가 들어갈 수밖에 없는데 인물의 생동감을 살렸다는 점은 아주 좋은 강점으로 뽑을 수 있다. 진짜 눈치 더럽게 없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저 사람 편을 들기는 뭐 한, 우리 실생활에서나 볼 수 있는 거리감을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또 영화를 보면서 좋았다고 느끼는 부분은 통찰력이다. 마틴 맥도나라는 감독이 원래 이런 쪽에 능통하신 분이기도 하지만 이 영화에서 특히 더 그런 특징이 잘 발휘된 듯하다. 우선 전작 <킬러들의 도시>는 말 그대로 킬러들이 중심이 되는 이야기였다. 킬러라고 하면 사람을 죽이는 것이 업인 사람들이다. 그런데 어떤 킬러는 무려 죄책감도 느낀다. 이 감정이 그냥 들어간 것이 아니다. 죄책감이라는 감정을 두고 인간사에서 최소한으로 적용되어야 할 윤리는 무엇인가? 에 대해 묻는 <킬러들의 도시>. 이번 작품인 <이니셰린의 벤시>에서는 마지막 끝마무리에 대해 묻는 것이다. 마지막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받아들이고 난 다음은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 묻는 것이다. 또 글쓴이는 이 질문을 펼치는 과정에서 묘한 위로를 받았다. 영화가 제시하는 두 사람 간의 일에는 딱히 이유가 없다. 이 이유가 없는 것을 이렇게 색다른 방식으로, 마틴 맥도나의 화법으로 보여주니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는,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가 신선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아일랜드 내전
영화에서 중요하게 작동하는 소재 중 하나는 전쟁이다. 영화의 어떤 장면마다 전쟁이라는 키워드가 몇 개 나온다. 사실 마틴 맥도나 감독은 시간을 구체적으로 설정하는 감독은 아니었다. <킬러들의 도시>나 <쓰리 빌보드>가 대략적인 시간을 명시하긴 했지만 다른 년도로 바꾸어도 이야기에 큰 지장은 없다. 그러나 본 작은 몇몇 대사와 상황이 내전이 아니라면 아예 나올 수가 없다는 점에서 특이점을 갖는다. 이렇게 설정한 이유는 뭘까? 당연히 아무 이유 없이 극에서 시간을 이 시점으로 설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아일랜드 내전이 묘하게 이야기와 어울리는 듯한 느낌이 있다. 실제 아일랜드 내전에 대해 영화를 보고 나서 구체적으로 찾아보시길 바란다. 묘하게 이 영화와 어울리는 느낌이 있다.
무관은 서운해
지난 3월 13일 제95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있었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기록적인 7관왕을 달성하며 성과를 올렸다. 사실 영화가 개봉한 후에 아카데미가 열리는 건 비일비재하다. 이 덕에 이 영화를 늦게 봤다. 이 작품을 보고 나서 아카데미의 선택에 살짝 의문점이 들었다.
우선 배우들의 연기가 굉장히 좋았다. 이 배우의 주요 인물 4명 모두 다 아카데미의 픽을 받았다. 도미닉 역을 맡은 베리 키오건은 자기가 맡았던 배역에서 살짝 다른 롤을 맡았다. 미친놈 연기로는 폴 다노만큼이나 선 굵은 퍼포먼스를 보여줬던 배리 키오건. 밑도 끝도 없는 광기에서 착하지만 많이 모자란 연기까지 이제까지 했던 연기와는 살짝 다르다. 이 배역은 파우릭의 서사에서 중요한 위치에 놓인다. 이 파우릭 서사에서 이야기의 발화점이 되는 역할이 되는 것뿐만 아니라 캐릭터의 입체적인 측면까지 두드려졌던 이유는 베리 키오건의 연기력 덕분이다. 시오반 역의 케리 론돈과 연기 앙상블이 빛나는 부분과 후반부에 발생하는 사건은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라고 봐도 무방하다. 미묘한 차이로 관객에게 큰 인상을 주는 키오건의 섬세함이 두드러진다. 여동생 시오반 역을 맡은 캐리 론돈은 입체적인 배역을 맡았다. 각본이 괜히 맛집이 아니다. 마틴 맥도나가 촘촘히 설계한 그림 그 자체로 움직이는 이 영화. 시오반은 이런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고, 그 모습을 사람들 앞에 감추는 연기를 해야 한다. 짧은 순간 인물들에게 갖는 어떤 감정을 얼굴로 소화했다. 그리고 시오반은 파우릭을 정말 의지하고, 둘도 없는 친구 겸 오빠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 역할을 정말 잘 이해하듯 따뜻함과 까칠함 사이의 내면을 훌륭하게 묘사한다.
두 주인공 콜름과 파우릭을 맡은 콜린 파렐과 브랜든 글리슨도 굉장히 뛰어난 연기를 보여준다. 이번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시상 레이스에서 브랜든 프레이저, 오스틴 버틀러와 함께 강력한 후보였던 콜린 파렐. 찐 시골뜨기로 시작해서 살기 어린 눈빛, 혼자가 됐다는 괴로움, 뭔가를 결심한 마음가짐까지 영화를 이끄는 주연으로서 맡은 큰 배역을 무리 없이 소화한다. 콜린 파렐의 연기는 스카이 콩콩 같은 퍼포먼스였다고 볼 수 있다. 뛰어오른 만큼 관성처럼 반응해야 하고, 이 리액션이 영화의 핵심이 되기 때문이다. 얼굴 표정으로 많은 걸 설명했다. 콜름 역을 맡은 브랜든 글리슨은 관객이 정을 주기 아까운 캐릭터다. 이 이야기의 시작이 콜름의 갑작스러운 절교 선언이기 때문이다. 또 콜름은 이 관계에 주도권을 쥔 사람으로서 주요한 터닝포인트마다 방점을 찍는 연기를 보여줘야 한다. 이 입체적인 감정변화를 소화하는 베테랑의 경험치가 돋보였다.
이런 배우들의 연기도 연기지만 더 강점으로 작동하는 부분은 영화의 각본이다. 이 작품의 각본은 두 말할 것 없이 훌륭하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가 마틴 맥도나의 최고작이라고 생각하는 부분도 이 지점에 있다. 사실 시놉시스만 읽으면 ‘그냥 나이 든 남자 둘이 싸우는 영화라서 진부할 것 같은데?’ 싶은 부분이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냥 단지 싸우기만 하는 영화는 아니다. 이 영화의 각본이 품고 있는 가장 큰 핵심은 질문이다. 이 영화를 통해 인간관계에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선과 아름다운 마무리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우리에게 묻는 것이다. 직접적으로 때려박으면 뭔가 맛이 없을 영화의 모티브가 이 두 남자의 전쟁을 통해서 ‘난 이럴 거야’ 싶게 하는 것이 역시 21세기 셰익스피어 답다는 생각을 했다. 아직도 그 콜름이 파우릭에게 하는 행동이 기억에 남는다. 아무튼 이 영화가 특히 문학적으로 보인다는 의미에서 이 작품을 걸작으로 만든 맥도나의 능력이 돋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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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버 스케이트> 러시아의 낭만과 현실이 담긴 로맨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20세기를 바라보는 1899년 겨울.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꽁꽁 얼어붙은 운하 위로 '마트베이(표도르 페도토프)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스케이트를 신고 빵 배달을 하며 살아가던 중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해고당하고, 분노에 가득 찬 그는 공산주의에 심취한 '알렉스(유리 보리소프)'가 이끄는 소매치기 무리에 합류한다. 한편 상류층 귀족 영애 '알리사(소냐 프리스)'는 매우 보수적인 가풍으로 인해 과학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마음속으로만 간직한 채 마치 감옥에 갇힌 듯 답답하게 지낸다. 그러던 어느 날, 마트베이와 알리사는 우연한 만남을 갖고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다.
6월 16일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러시아 영화 <실버 스케이트>의 내용은 언뜻 보기에 평이하다. 근대 유럽에서 펼쳐지는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 이야기와 그 멜로드라마 저변에 은은히 깔려 있는 여성 인권 신장 운동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품고 있기 때문이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이나 화제의 드라마였던 넷플릭스 시리즈 <브리저튼>, 더 나아가 셜록 홈즈의 여동생이 주인공인 <에놀라 홈즈>와 같은 영화를 자연히 연상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실버 스케이트> 속 사랑은 손쉽게 예상할 수 있는 통속적이고 감정적인 로맨스와는 결이 다소 다르다. 그 중심에는 젠더 권력관계의 전환과 공간적 배경인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역사가 있다.
앞서 예시로 언급한 작품 속 로맨스는 대체로 상류층 남성과 평민 여성의 관계에서 이루어진다. 설령 남녀가 모두 귀족 집안의 자제라 하더라도 남성 측 가문이 혈통이나 전통, 권력의 측면에서 우위에 있는 상류층인 경우가 대다수다. <오만과 편견> 속 피츠윌리엄 다아시와 엘리자베스 베넷의 관계가 대표적이다. <브리저튼>에서도 나름 명문가라는 다프네의 가문이 자작 작위를 가진 것에 비해, 사이먼은 그보다 높은 공작과 백작 작위를 지니고 있다. 이때 여성이 남성의 신분이나 재력보다 그의 인품을 보고 결혼을 결심하는 전개는 결혼이 집안과 집안의 결합으로 여겨지던 당시 시대상과 뚜렷한 대립각을 이루며, 주도적이고 진취적인 여성상을 부각하는 데 효과적인 도구가 된다.
하지만 <실버 스케이트>는 이러한 관습적인 전개를 따르지 않는다. 남녀 주인공 간의 권력관계가 뒤집혀 있기 때문이다. 남자 주인공인 마트베이는 제정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배달일을 하며 입에 간신히 풀칠을 하는 한미한 집안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 역시 거리 가로등 관리자에 불과하다. 반면에 알리사는 그녀의 아버지가 경찰청장 혹은 행정안전부 장관에 가까운 고위직을 맡을 만큼 최고위층 귀족 가문 영애다. 이처럼 남녀 간의 권력관계가 명백히 뒤 바뀌어 있다 보니 사랑의 결실을 맺기 위해 알리사가 내리는 결단은 단순히 여성 권익 향상의 범주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대신 젠더 권력 너머의 기득권과 비기득권,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사회적 강자와 약자에 대한 담론으로 나아간다.
실제로 마트베이와 알리사는 서로에게 그간 알 수 없었던 각자의 세상을 보여주며 호감과 사랑이 될 동질감을 싹 틔운다. 대학에서 화학 공부를 하는 게 꿈이지만 보수적인 집안의 격렬한 반대에 시달리는 알리사. 그녀는 귀족 연회에서 도둑질 중이던 마트베이를 신고하지 않는 대신, 그를 남편으로 위장시켜 대학 입학 허가를 받아내려고 한다. 그러나 그녀의 야심 찬 계획은 끝내 실패로 돌아가고, 그런 그녀를 보면서 마트베이는 마냥 강자로 보이던 귀족 중에서도 탄압받고 제약당하며 자유가 없는 약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한편 마트베이는 운하 위에 열린 야시장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밤거리를 알리사에게 보여준다. 덕분에 그녀는 자신의 세상에서는 보이지 않던 이들, 그러나 자신 못지않게 혹은 그 이상으로 고통받아 온 상인과 노동자, 농노의 삶과 그들의 민낯을 생애 처음으로 마주한다. 그들의 데이트는 단순한 불장난이 아니라 자신 외의 약자를 인지하고,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인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마트베이와 알리사의 사랑, 그것의 씨앗이 되는 동질감이 다른 인물과의 관계에서도 발견된다는 사실이다. 이 묘한 연대감과 동질감은 소매치기단의 리더인 알렉스와 그의 동료들에게까지 확장된다. 마트베이가 알리사를 데리고 시내 구경을 시켜주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그들은 마트베이의 소매치기 동료들을 만나 술집으로 향하고, 그곳에서 알리사는 알렉스와 공산주의에 대한 짧은 토론을 벌인후 그로부터 <자본론>을 선물로 받는다. 그 이후 마트베이의 동료들이 술집에서 자신에게 큰 무례를 범하고 마트베이와 주먹다짐까지 펼쳤는데도, 또 알렉스가 경찰의 추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을 인질로 붙잡았는데도 그녀는 <자본론>을 탐독함과 동시에 <자본론>을 자신의 과학책들과 함께 소중히 보관한다.
이는 당시 러시아에서 약자였던 이들이 현실을 바꾸고자 하는 욕망이 있음을 서로 확인하고, 이러한 동질감을 토대로 연대할 기초가 만들어졌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악역인 듯 보이던 알렉스가 예상과 달리 끝내 마트베이를 동료로 인정하고 알리사를 살려준 것과 달리, 정작 알리사의 약혼자이자 러시아의 평범한 귀족 군인으로 기득권층의 핵심에 위치한 '아르카디(키릴 자이체프)'가 최종적인 악역으로 설정된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따라서 마트베이와 알리사의 사랑 중 계급을 뛰어넘은 빙상장 위에서의 만남이 러시아의 낭만이라면 마트베이의 말에 담긴, 농노의 삶은 비참하고 도시로 이주한 노동자는 기계처럼 다루어지는 사회상은 러시아 혁명이 발생한 이유이자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실버 스케이트>는 이러한 사회적 약자 간의 동료애와 연대감에 공간적 배경인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역사를 더해 더욱 강조한다. 러시아 제국의 수도였고 지금도 러시아 제2의 도시라 할 수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가 바로 그 약자들의 피와 뼈로 만들어진 도시이기에 가능한 연출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표토르 대제의 명령으로 1703년부터 만들어진 신도시로, 강 하구 쪽 둑 위의 습지를 매립해 만든 도시였다. 매립 작업을 위해서 표토르 대제는 9년 간 연 4만 명가량 농노를 비롯해 전쟁 포로들을 강제 노동에 투입했고, 그 결과 1712년에 러시아 제국의 새로운 수도이자 일명 '뼈 위에 세운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가 탄생할 수 있었다. 새하얀 눈이 덮인 러시아의 아름답고 낭만적인 풍경과 마찬가지로 하얀 뼈들이 토대를 이룬 현실이 영화의 공간에 이미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운하의 도시로 유명한 암스테르담을 모델로 삼아 건설된 역사는 스케이트가 영화의 주 소재로 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암스테르담 못지않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운하 덕분에 작중 대부분의 사건이 마트베이를 비롯해 스케이트를 타고 다니는 인물들로부터 발생하고, 피겨 스케이팅 기술을 적용시킨 듯 화려하고 독창적인 스케이트 액션신이 대거 등장하는 것 모두 자연스러운 것이다. 특히 도시의 상징성은 운하 위 스케이트 액션신에 새로운 의미도 불어넣기도 한다. 운하가 있어야 할 정도로 습한 땅에 노동자들이 피땀으로 제국의 수도를 건설했다는 역사는 그 자체로 사회적 불만이 가득한 스케이터 소매치기들의 활동이 단순한 도둑질이 아니라 제국에 불만을 품은 정치적 테러로 인식될 개연성이 되기 때문이다. 이는 운하 위를 수놓는 소매치기와 경찰 기동대 간의 치열하고 필사적인 추격전이 기대 이상의 몰입감을 선사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처럼 영화는 단지 배경으로 남을 뻔했던 공간적 배경에 생동감을 불어넣으면서 도시를 마치 한 명의 캐릭터처럼 활용한다.
이에 더해 <실버 스케이트>는 스토리 전개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는 공간들의 전경, 부감을 군데군데 삽입하면서 분명 해피엔딩인 두 남녀의 로맨스를 일견 아련하고 가슴 먹먹하게 만든다. 특히 예카테리나 2세 시절 건설되어 현재 에르미타주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겨울 궁전이라든가, 겨울 궁전 바로 앞에 위치한 궁전 광장과 알렉산더 원기둥이 유독 눈에 띈다. 왜냐하면 겨울 궁전은 문화적으로도 유럽 열강들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서유럽의 예술품 수집하던 러시아 제국의 노력이 깃든 장소이자, 러시아 혁명의 서막을 장식한 '피의 일요일' 사건이 발생한 현장이기 때문이다. 결국 다소 불필요한 듯 보이는 이 장면들을 역사를 알고 있는 입장에서 보면 1899년 겨울을 나는 인물들과 러시아의 모습에서는 그들의 씁쓸한 미래, 그 비극의 씨앗을 미리 맛볼 수 있다. 그렇기에 <실버 스케이트>는 단순한 로맨스 영화를 넘어서서 야누스의 두 얼굴처럼 결코 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는 러시아의 낭만과 현실을 모두 잡은, 러시아만의 아련함이 잔뜩 묻은 사랑 이야기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차갑게 뜨거운 낭만과 아파서 아름다운 현실을 모두 잡은 러시안 로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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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백을 채우면 나아질 것이라는 그릇된 '믿음'
※ '독전' 1, 2편 스포일러가 담겨 있으니 참고 바랍니다.
빈틈없이 꽉 채워나가는 플롯이 좋지만, 때로는 공백을 두는 게 오히려 나아 보일 때도 있다. 하지만 '독전' 제작사는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과욕을 부렸다. 1편에 남겨둔 스토리의 공백을 채우면 더 근사할 것이라는 믿음에 앞서 2편을 꺼내보였지만 안 하느니만 못한 그림이 되어버렸다.
'독전'은 아시아 최대 마약 조직의 보스이자 실체 없는 인물 '이선생'을 쫓는 형사 조원호(조진웅)와 이를 돕는 조직원 서영락(류준열)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독전'이 5년 전 개봉해 520여 만 명 관객을 동원했던 이유는 단순히 범죄조직을 소탕하는 게 아닌, 영어제목에 걸맞게 '믿음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하며 홀로 싸워나가는' 구성이 돋보였기 때문이다. 또 출연진들의 물 오른 연기력과 떼깔이 좋은 영상미, 음악 구성도 눈도장을 받았다.
이렇게 잘 마무리된 '독전'인데 2편으로 컴백했다. 이미 끝맺음을 맺었는데 새롭게 나올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으나, 제작사인 용필름은 1편 스토리 중 용산역에서 펼쳐진 지독한 혈투 이후 노르웨이에서 원호와 영락이 재회하기까지 30일 간 사이 이야기를 채우는 '미드퀄' 형식을 선택했다.
이 과정에서 변화도 생겼다. 1편에서 서영락과 보령 역으로 존재감을 뽐냈던 류준열, 진서연이 하차하게 됐고, 이 자리를 오승훈, 한효주가 채웠다. 오승훈은 서영락 역으로, 한효주는 새로운 빌런 섭소천 역을 맡게 됐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독전2'는 '독전'이 깔아 두었던 것들을 모조리 흩트려놨다. 2편으로 나오는 만큼, 전편과는 다른 차별점 혹은 개성이 있어야 하지만 시리즈로서 연속성을 이어가는 것 또한 중요하다. 하지만 '독전2'는 1편과는 동떨어진 느낌에 서사마저 따로 노는 느낌이 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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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할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 요즘 시대의 자만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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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을 공부하던 스물아홉 율리에는 자신이 진짜 원하는 걸 찾아 세상으로 나온다.
파티에서 만난 만화가 악셀과 사랑에 빠진 율리에,
하지만 삶의 다른 단계에서 만난 두 사람은 각자 다른 걸 원했고 조금씩 어긋난다.
“내 삶에서 조연 역할을 하는 것 같아…” 율리에는 인생의 다음 챕터로 달려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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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어] 끝장(p)리뷰 | *전용예매권 이벤트* | 여섯 가족 중 X맨은 ?! | Here 의미 | 세 개의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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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X맨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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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 로버트 저메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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