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DAY2025-01-28 12:27:10
로히림의 전쟁 | '반지의 제왕'이라서 눈감는 안일함
<반지의 제왕: 로히림의 전쟁> 리뷰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공주로서의 삶을 답답해하며 전사가 되고 싶어 하는 로한의 공주 '헤라'(가이아 와이즈). 어느 날, 그녀는 소꿈친구이자 웨스트마크 영주 '프레카'(숀 둘리)의 아들 '울프'(루크 파스콸리노)의 구혼을 받는다. 그러나 곤도르와 혼약을 맺은 로한의 왕 '헬름'(브라이언 콕스)도, 연심이 없었던 헤라도 구혼을 일언지하로 거절한다. 헬름이 자신을 무시한다고 느낀 프레카는 결투를 청하고, 헬름은 결투 중 예기치 못하게 프레카를 죽이고 만다.
이에 격분하며 복수를 다짐하며 자취를 감췄던 울프. 그는 수년 뒤 로한의 적인 던랜드인을 이끌고 나타나 로한의 수도 에도라스를 습격한다. 헬름과 두 아들 ‘할레스’(벤자민 웨인라이트)와 ‘하마’(야즈단 카푸리)는 기마대 로히림과 함께 전투에 나서지만, 내부의 배신이 겹치면서 대패한다. 두 왕자를 모두 잃은 헬름과 헤라는 울프의 군세에 밀려 나팔 산성에 그대로 고립되고, 전세를 단번에 역전시킬 방도를 찾기 시작한다.
높고도 험한 <반지의 제왕>이라는 벽
영화팬들 사이에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떠도는 말이 있다. 20년 전 <반지의 제왕> 포스터가 과장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팩트였더라. 아직까지도 '21세기 최고의 판타지 영화'라는 마케팅 문구는 <반지의 제왕> 몫이기 때문. 피터 잭슨 본인이 만든 <호빗> 삼부작도, 아마존 프라임이 심혈을 기울인 <힘의 반지> 드라마도 10억 달러 흥행과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을 동시에 달성한 <반지의 제왕> 트릴로지에는 비견되지 못했다.
그렇기에 판타지 영화 팬들은 <반지의 제왕>을 늘 그리워한다. 이 시리즈를 처음 본 전율을 언제 다시 느껴볼까 궁금해하면서. 이는 <반지의 제왕: 로히림의 전쟁>(이하 <로히림의 전쟁>)이 낯선 외양에도 불구하고 특히 궁금한 이유였다. '반지 전쟁' 250여 년 전 로한의 왕 헬름과 그의 딸 헤라의 이야기를 다룬 이 작품은 피터 잭슨과 앤디 서키스가 제작할 영화 <반지의 제왕: 골룸 사냥>에 앞서서 팬들을 가운데땅으로 초청했다.
미국과 일본에 비해 약 한 달 늦게 공개된 결과물은 다소 실망스럽다. 원작에서는 이름조차 없었던 주인공 '헤라'의 서사는 평범하고, 그녀의 활약상을 보각한 각색은 부자연스럽다. 카미야마 켄지가 맡은 애니메이션 작화도 만족스럽지만은 않다. 그러나 판타지와 <반지의 제왕>을 사랑하는 관객이라면 <로히림의 전쟁>을 싫어할 수 없다. 곳곳에 삽입된 <반지의 제왕>과의 연결고리를 찾다 보면 아쉬움이 절로 잊히기 때문이다.
에오윈을 넘지 못한 헤라
<로히림의 전쟁>의 성패는 헤라에게 달려 있었다. 애초에 원작에 없는 인물의 재조명이 기획 의도니까. 그런데 정작 헤라는 새로울 게 없다. 그녀는 공주로서의 삶을 답답해하며 전사가 되길 꿈꾼다. 공주로 태어났기에 다른 왕족과의 혼인을 해야 하는 의무가 있지만, 헤라는 모든 구혼을 거절한다. 대신 그저 말을 달리며 모험을 떠나는 삶을 꿈꾼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도 자주 접한 말괄량이 공주가 바로 헤라다.
문제는 헤라와 똑같은 캐릭터가 이미 20년 전 <반지의 제왕> 시리즈에 등장했다는 것. 로한 제2왕조의 마지막 왕인 세오덴의 조카딸이자, 제3왕조의 첫 번째 왕 에오메르의 동생인 '에오윈'(미란다 오토)이 주인공이다. <로히림의 전쟁>에서 내레이션도 맡은 그녀는 전투에 나선 남자들을 기다리기만 하는 처지를 답답해하며 남몰래 무술을 연마했다. 심지어 왕명을 어긴 채 '펠레노르 평원의 전투'에 나서서 마술사왕까지 죽였다.
그런데 두 캐릭터가 겹쳐 보일수록 헤라는 에오윈에 비해 매력이 부족하다. 에오윈과 달리 헤라는 완성형 캐릭터이기 때문. 에오윈은 공주에서 전사로 변모해 가는 인물이었고, 관객도 그녀의 좌절과 성장을 함께 겪으면서 유대감을 형성할 수 있었다. 그에 반해 헤라는 이미 완성된 전사다. 그러다 보니 관객은 그녀의 감정선에 이입하기 어렵고, 그저 활약상을 구경할 수밖에 없다. 헤라에게서 에오윈의 그림자가 지워지지 않는 이유다.
<반지의 제왕 2> 다시 보기
그 결과 <로히림의 전쟁>에서는 프리퀄 겸 스핀오프만의 매력이 돋보이지 않는다. 사실 영화가 다루는 사건 자체의 한계가 명확하다. 사건의 전개나 세부적인 전투 양상이 <반지의 제왕: 두 개의 탑>(이하 <반지의 제왕 2>을 반복하기 때문. 아이센가드의 적, 수적 열세 상황에서 최후의 돌격을 감행하는 주인공, 그 순간 헬름 협곡 위에서 등장하는 로히림 등. 겨울을 배경으로 하고 적군이 오크가 아닌 인간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헤라는 이처럼 <반지의 제왕 2>의 반복에 불과한 이야기에 변수를 창출할 수 있는 존재였다. 원작 소설은 그녀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으니까. 그저 헬름에게 딸이 있었고, 그녀를 향한 울프의 구혼을 거절했다는 내용만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헤라를 어떤 캐릭터로 묘사하고 그녀에게 어떤 이야기를 붙여주느냐에 따라 <로히림의 전쟁>은 다양한 모습으로 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극 중 헤라는 기존 캐릭터들의 조각모음에 불과하다. 그녀는 그저 세오덴처럼 농성하고, 아라고른처럼 최후의 돌격을 결심하고, 레골라스처럼 숱한 적군을 무찌르고, 간달프처럼 지원군을 끌고 온다. 기존에 못 본 역할을 선보이는 게 아니라, 여러 캐릭터가 맡았던 역할을 혼자 해낼 뿐이다. 결국 <로히림의 전쟁>이 들려주는 옛이야기는 <반지의 제왕 2>를 일본풍 애니메이션으로 그린 것에 불과해 보인다.
실수는 반복된다
오히려 헤라의 존재가 스토리텔링에 있어서 장애물이 되는 구간도 적지 않다. 기존 서사에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헤라의 활약상을 부각하려다가 전개가 꼬이기 시작한다. 단 한 마디도 언급되지 않은 헤라의 활약상을 덧댄 흔적이 가려지지 않은 셈이다. 이는 <호빗> 3부작에서 소설에 없던 오리지널 캐릭터, '타우리엘'이 중심이 된 로맨스가 등장할 때마다 영화의 흐름이 끊겼던 문제점과도 유사하다.
특히 헤라가 등장할 때마다 전투 시퀀스의 흐름이 꼬이는 경우가 잦다. 아이센 여울목에서 펼쳐진 전투와 수도 에도라스의 함락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 시퀀스에서는 크게 세 주체가 등장한다. 헬름과 군대는 전투를 펼치고, 울프와 그의 본대는 헬름의 군을 우회해 수도 에도라스로 진격하고, 헤라는 울프의 공격으로부터 사람들을 대피시키며 수도를 방어한다.
그런데 전투가 진행될수록, 특히 헤라의 활약상이 돋보이는 시점부터 세 주체의 행적은 꼬이기 시작한다. 분명 여울목에서 부왕 옆에서 전투 중이었던 헬라스가 에도라스로 먼저 진군한 울프를 갑자기 앞지르는 식이다. 본편에서 엘프인 레골라스가 간신히 대적한 무마킬을 헤라가 혼자 죽이는 과장된 묘사도 시리즈의 일관성을 저해한다. 헬름 협곡에서 헤라와 그녀의 시녀 올윈이 숱한 적군을 대적하는 전개도 같은 맥락에서 의아하다.
프리퀄을 지탱하는 각색과 작화
안일하게 전편의 영광에 기댄 것 같은 헤라 캐릭터의 만듦새는 군데군데 몰입도를 높인 장점과 대조되기에 더욱 아쉽다. 각색한 울프의 서사가 대표적이다. 원작에서 그는 아버지를 죽인 헬름을 향한 복수심 때문에 로한을 침략한다. 반면에 영화는 울프의 동기를 더 구체화한다. 그가 헤라에게 품은 연심이 집착으로 변하는 과정을 묘사한다. 그 덕분에 승전하기 직전 그가 헤라를 놓지 못해서 패배하는 전개도 그저 허망하지는 않다.
헬름의 아들 하마의 최후를 변경한 각색도 인상적이다. 원작에 그는 나팔 산성 앞에 주둔한 울프의 군대를 기습하다가 사망한 반면, 영화에서는 울프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헬름이 보는 앞에서 처형당한다. 이는 헬름의 좌절감, 광증, 복수심을 강조하며, 더 나아가 헬름 협곡이라는 지명이 생겨난 이유를 알려주는 장면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이처럼 <로히림의 전쟁>은 원작이 간략히 다룬 감성적인 측면을 깊이 파고든다.
각색 외에는 작화가 놀랍다. 카미야마 켄지가 본래 배경을 그리는 미술 스태프 출신이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원경에서 보여주는 가운데땅 풍경은 그림인지 실사인지 헷갈릴 정도로 정밀하다. 일례로 오프닝의 경우 평원에서 말을 타는 헤라와 그 위를 날아가는 독수리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순간적으로 실사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착시를 유발한다. 나팔 산성의 전경을 비추는 순간도 실사 영화 부럽지 않은 장엄함이 느껴진다.
다만 전투 시퀀스는 그에 미치지 못한다. '로히림의 전쟁'이라는 부제만 보면 실사영화 속 로한의 기병대의 웅장한 돌격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림만으로 실사영화 수준의 장대한 전투 시퀀스를 보여주기에는 그 한계가 명확하다. 그나마 보름달을 배경으로 프레알라프가 이끌고 온 지원군이 울프의 군대를 공격하는 장면만큼은 명장면으로 뽑기에 손색없다.
가운데땅은 여전히 반갑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히림의 전쟁>에는 <반지의 제왕> 팬이라면 아쉬운 대목이 눈에 밟혀도 모른 척 넘어가 줄 수밖에 없는 포인트가 적지 않다. 사루만의 재등장 때는 작고한 크리스토퍼 리가 <호빗> 촬영 당시 더빙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헤라가 반지만 찾는 모르도르의 오크들을 만나고, 그 순간을 궁금해하는 간달프와 헤라가 연락을 취하는 대목 또한 '반지 전쟁'과의 연결고리를 암시하기에 흥미롭다.
전반적으로는 <호빗: 다섯 군대 전투>와 유사하다. <반지의 제왕>에 못 미치는 완성도가 아쉽지만, 아라고른과 레골라스의 우정을 암시하는 대목이나 노년의 빌보 배긴스를 연기한 이안 홈이 출연한 순간에 결국 미소 짓지 않을 수 없는 것과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사실 영화 시작과 동시에 뉴라인 시네마 로고가 등장하고 로한의 테마 음악이 흘러나올 때부터 예견된 수순일지도 모른다.
Acceptable 무난함
'반지의 제왕' 향이 소량 첨가된 판타지 애니메이션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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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할 할리우드를 추앙하라!
8★/10★
1926년. 할리우드 인근의 고즈넉한 저택에서 비밀스러운 파티가 열린다. 파티의 분위기는 저택이 풍기는 느낌과는 정반대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가장 화려하고 소란스러우며 원초적 쾌락을 탐닉하는 광란의 유흥이 펼쳐진다. 그리고 세 명의 손님. 첫 번째는 잭 콘래드. 그는 할리우드 무성영화의 영웅으로, 별 볼 일 없는 배우라는 직업을 모두가 동경하는 스타의 지위로 끌어올린 인물이다. 두 번째는 넬리 라로이. 그녀는 아직 본격적인 커리어를 시작하지는 못했지만, 스스로가 ‘스타’로 태어났다고 확신하며 기회를 모색한다. 마지막은 멕시코 출신의 제임스 맥케이. 그는 영화 일을 하고 싶으나 지금은 영화계 거물이 주최한 파티에서 서빙을 할 뿐이다. 정상에 있는 인물 하나, 영화판에서 상승하고자 하는 인물 둘. 서로 다른 욕망과 위치를 가지고 할리우드에 걸친 세 사람이 시끌벅적한 파티에서 조우하고, 이제 이야기는 시작된다.
당시 할리우드는 지금과는 많은 것이 달랐다. 그 무엇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였고, 어떻게든 해내는 사람만이 업계에서 살아남았다. 파티에서 우연히 잭의 눈에 들어 그의 로드 매니저가 된 매니가 마주한 도전을 보자. 매니는 임금 투쟁을 벌이는 엑스트라 출연자들의 무리와 전쟁 장면을 촬영하다 실제 사람이 죽어나가는 현장에 넋이 나간다. 설상가상으로 촬영 중 카메라가 망가져 해가 지기 전까지 새로운 카메라를 구해오라는 임무도 떠맡는다. 그러나 매니는 우격다짐으로 이 모든 일을 ‘해결’한다. 과정은 필요 없다. 결과만 좋으면 만사가 오케이다. 그것이 1920년대의 할리우드였다. 매니는 빠르게 잭의 신임을 얻고, 영화판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져나간다.
넬리 역시 기회를 얻는다. 한 영화에서 엑스트라로 출연할 예정이었던 여성이 마약 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지자 넬리가 얼결에 기회를 얻는다. 자신이 타고난 스타라는 넬리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집, 가족, 과거를 생각하기만 하면 눈물이 주르륵 흐르는 그녀는 촬영장에 투입되자마자 놀라운 감정연기로 두각을 나타내고, 감독의 눈에 들어 여러 영화에 연달아 출연한다. 매니가 그러하듯, 넬리 역시 빠르게 자신이 동경하던 자리인 ‘스타’에 도달한다.
매니와 넬리만 치열한 것은 아니다. 이미 스타인 잭 역시 자신의 미래를 고민한다. 영화가 수많은 대중에게 위안을 주는 장르라는 데, 자신이 그런 영화를 일으켰다는 데 자부심을 가진 잭은 영화가 새로운 예술적 실험으로 나날이 진일보하기를 바란다. 나아가 그 과정에서 영화와 자신의 관계가 변함없이 유지되기를 바란다. 즉, 그는 영화의 변환기에서 스타 배우로서의 자기 입지가 여전히 탄탄하기를 소망한다.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의 전환은 셋 모두를 휩쓸며 소용돌이친다. 한 장르의 거대한 흐름이 바뀔 때는 많은 변화가 생긴다. 익숙한 방식으로 작업하던 수많은 사람이 나가떨어지지만, 새로운 장르에 적합한 수많은 사람이 금세 그 자리를 메운다. 새로 치고 올라온 자들이 뿜어대는 빛은 낙오된 자들을 잠시나마 추모하는 일조차 사치라 여겨질 정도로 밝고 환하다. 그리고 〈바빌론〉은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들어 드라마적 요소를 만들어낸다.
〈바빌론〉은 영화판의 변화에 휩쓸려 시대의 뒤안길로 물러나지 않기 위한 세 인물의 투쟁을 스펙터클하고 격정적인 드라마로 펼쳐낸다. 그리하여 끝내 도달한 자리는 어디인가? 〈바빌론〉은 단호하고도 냉정하게 말한다. 영화라는 장르는 개개인의 흥망성쇠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 만큼 크고 위대하다고. 영화계를 쥐락펴락하던 평론가는 고작 ‘가십 칼럼니스트’라는 부고만을 남기고, 어렵게 기회를 얻은 흑인 뮤지션은 좌절한 후 다시 밴드로 돌아온다. 넋이 나갈 정도로 치열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려는 잭, 매니, 넬리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영화가 곧 나’라는 자칫 오만해 보이는 자부심을 현실로 살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그들이지만, 영화는 스러진 개인이 아무리 위대할지라도 영원히 이어진다. 심지어 위대하게. ‘네가 아무리 영화를 사랑하고 헌신했더라도, 영화는 너 같은 것 하나 없어진다고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영화는 이토록 '비윤리적'이다. 영화를 사랑한다고 말하려면, 이 엄혹한 진실 역시 사랑해야만 한다.
〈바빌론〉은 영화의 위기에 대한 하나의 응답이기도 하다. 대중이 매체를 소비하는 방식이 바뀔 때마다 기존 매체는 '위기'라는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영화는 수많은 위기를 넘어 지금도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쇼트 콘텐츠의 유행, OTT 플랫폼의 대중화라는 동시대의 경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바빌론〉에는 자극적인 콘텐츠와 이를 소비하는 방식을 다소 적나라하게 비난하는 장면(폭력배 맥케이의 동굴)이 나온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이 장면은 어딘가 튀는 느낌을 자아내 영화의 질감을 해친다. 그러나 '영화 예찬'이라는 맥락에서 이 장면은 필요하다. 영화가 그 어떤 도전과 위기에도 결코 무너지지 않을 거라는 감독의 확신이 담겨 있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영화를 버리고 떠난다 해도, 영화는 영원히 이어진다.' 그러니 망할 할리우드를 추앙하라.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뻔뻔스럽지만 거부할 수 없는 〈바빌론〉을 외면할 수 없을 것이다.
*덧. 1952년작 〈사랑은 비를 타고〉를 함께 보면 〈바빌론〉을 더 재미있게 볼 수 있다. 캐릭터 설정부터 오마주, 영화의 시대적 배경과 영화인들이 마주한 도전까지, 〈바빌론〉에는 〈사랑은 비를 타고〉에서 많은 것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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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작은새와 돼지씨(2021)> 리뷰
다큐멘터리 영화 <작은새와 돼지씨>라는 제목과 간략한 소개문을 보았을 때, 나는 영화 <내 사랑(2016)>을 가장 먼저 떠올렸다. 시놉시스에 짤막하게 적힌 '예술적 영감'이라는 문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를 모두 감상한 후, 나는 자연스레 에드워드 양의 <하나 그리고 둘(2000)>을 연상하게 되었다. 예술은 ‘작은새’ 김춘나와 ‘돼지씨’ 김종석이 살아온 곧은 삶의 부분이지, 삶 전체가 아니므로. 언제나 그렇듯 삶을 모조리 잡아 삼킬 수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 스포일러 주의
재현
영화는 감독 자신의 어린 시절 비디오로 출발한다. 어린이집에서 찍은 영상인 듯한데 주인공은 감독이 아니라는 점이 범상치 않다. 그렇다, 이 영화는 ‘돼지씨’ 김종석의 흥겨운 춤과 ‘작은새’ 김춘나의 자그마한 노래로 시작하는 두 사람의 역사이지 감독의 자전적 에세이가 아니다.
곧바로 문학 작품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은 연애편지를 주고받던 젊은 남녀는 어느새 30여 년을 함께한 부부가 되었다. 언뜻 보면 많은 게 바뀐 듯하다. 알콩달콩한 연애편지를 주고받지 않는 것은 물론이요 두 아이를 키우고, 슈퍼를 운영해 보기도 했던 굴곡진 나날이 당장의 일상에 침범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나 두 사람을 면밀히 살피자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인생을 어떻게 시기별로 뚝뚝 분지를 수 있단 말인가. 연애편지를 쓸 때 문학 작품을 떠올렸다던 김종석, 슈퍼를 운영할 때 담뱃갑을 활용해 시를 썼던 김종석은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며 폐지 뒤편에 여전히 글을 쓴다. 슈퍼를 운영할 당시 답답한 마음에 문화센터에서 그림과 서예를 배우기 시작했다던 김춘나는 이제 수준급의 실력을 자랑한다.
새 오리털 파카가 잘 어울린다는 칭찬과 아직도 마누라를 이겨먹으려고 한다는 불평처럼 시시콜콜한 일상을 파고들었며 두 사람을 소개한 영화의 초입은 <작은새와 돼지씨>가 미시적인 개개인의 역사를 조명하려는 시도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작은새와 돼지씨'는 몇 개의 레이어가 쌓인 제목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단순히 작은새와 돼지씨의 지나간 세월을 말하는 것뿐만 아니라, 같은 제목을 가진 전시회를 열기까지의 과정이기도 했으므로. 그러하니 이것은 총체적인 역사와 현재 기록되어가는 순간의 역사가 합쳐진 하나의 다큐멘터리 영화라 할 수 있을 터다.
그러하니 관객은 두 사람의 행적을 쫓아가며, 감독이 딸로서 기획하는 전시에도 함께 동행하게 된다. 더없이 피로할 수 있는 여정임에도 그렇지 않았다. 그 까닭은 영화에 소박하고 따뜻한 시각이 내재되어 있으며, 감독이 두 사람의 모습을 과한 미사여구를 동원하며 포장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덕분에 우리는 압축된 두 사람의 삶을 빠르게, 부담 없이 훑었을 뿐인데도 하나의 시구, 한 번의 붓질을 위해선 하나의 긴긴 인생이 필요할 수 있음을 배우게 된다. 설령 내가 이 다큐멘터리를 본 후, 작은새 김춘나의 그림을 따라 그리거나, 돼지씨 김종석의 시를 모방한다 해도 큰 의미가 없으리라는 것을 이토록 먹먹하게 인지했던 적은 없었다. 정말이지, 일상을 인공적으로 재배열하면서도 진정성을 유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텐데 감독 김새봄은 <작은새와 돼지씨>를 통해 그것이 가능함을 증명한다.
시대
영화는 김춘나와 김종석의 연애시절 이야기로 시작하고, 3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서로의 예술적 면모를 존경한다는 따스한 이야기를 전하는 등 미시적인 측면에 몰두한다. 하지만 <작은새와 돼지씨>가 두 사람의 구체적 삶을 쓰다듬는 과정을 포함하다 보니, 공적인 시대상이 자연스레 흘러나올 때가 있었다. 예컨대 김종석이 초등학교에서 아이들과 공을 마주 할 때 예전에는 그곳이 '국민학교'로 불렸다는 것도 있겠지만, 결혼을 하며 더 이상 직장을 다닐 수 없었던 김춘나의 사정 역시 있다. 또한 2021년에 이르러, 한국 사회에서 '대기업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요지의 대화가 식사자리에서 이루어진 이면엔 가족이 운영했던 슈퍼가 있을 테니 개인의 미시사와 거시사는 분리될 수 없는 게 당연하다.
30여 년 전 시집에 실어도 될 것 같은 편지를 썼던 김종석은 멀리서 연인을 보기 위해 한달음에 달려왔던 김춘나와 결혼했지만 늘그막에 인간 김춘나를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전까지는 여자가 하는 일이 무엇인진 알았다지만 새벽에 퇴근하고, 같은 날 새벽에 또다시 출근을 반복해야 했으니 도무지 아내를 알 수 없었다고 했다. 그래도 그는 그 빼곡한 삶을 살아냈다. 원체 타고난 흥이 많아 지금으로 치면 레크리에이션 강사와 비슷한 직업군을 몇 번 제안받았음에도 가족을 생각하며 거절했다고도 한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김종석의 태도에선 슬픔이나 분노를 찾기 어렵다.
그의 글에 반해 지금까지 함께 살고 있으니 김종석이야말로 예술가이지 않겠냐고 말하는 김춘나는 흔히 그렇듯 10대 시절엔 회사원을 꿈꾸었다고 했다. 하지만 결혼을 하며 일을 그만두어야 했고, 늦게라도 대학에 진학해보고 싶었으나 그런 큰 결정은 쉬이 할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그럼에도 딸 둘을 키우는 것만큼은 행복했다고 할 때 눈물을 내비치지만 그림을 그리고 서예를 할 때 김춘나의 눈에는 생기가 맴돈다. 화폭에 자신이 감각한 현실을 섬세하게 풀어내고, 여러 아이디어를 적용하기도 한다. 스스로를 프로라고 칭하지는 않지만, 그는 현대 예술 안에서 자유를 분명 획득한 것으로 보인다.
베벌리 클락은 책 『실패에 대하여』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실패할 수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잘 살아낼 수 있다'라고. 삶은 검은 숲을 지도 없이, 어쩌면 고장 났을지도 모르는 나침반 하나에만 의지해 걸어 나가는 과정이다. 그러니 자신이 최초에 설정한 꿈이나 목표, 방향성에서 한참 벗어나 도착할지 모른다. 그것을 만일 실패라 한다면 나를 비롯해 많은 이들의 삶엔 실패라는 이름표가 붙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부류의 '실패'가 항상 참담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어디에서든 잘 살아갈 수 있다, 끝끝내.
은희경이 소설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에 적었듯 ‘살아볼수록 인생은 상투적’인 것 같고, 나이를 먹을수록 인생이 퍽 명료해져 더 이상의 신비가 없는 것 같다는 착각이 쉽게 들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생각한다. 우리 언어의 빈곤이 인생을 밋밋한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 뿐, 실은 모든 인생이 찬란하며, 그 인생을 살아낸 사람이야말로 누구보다 특별하다고.
★★★
* 본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참석하여 감상한 후, 주관적 견해에 따라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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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애가 가득한 영화 <레슬리에게>
*스포일러 유의
아내와 함께 용산 CGV에서 영화 <레슬리에게>의 시사회에 참석했다. 마이클 모리스 감독의 영화 <레슬리에게>는 인간 생에 존재하는 모든 감정을 롤러코스트의 드라마틱한 움직임처럼 보여준다. 로또 당첨으로 세상을 모두 가진듯한 희열, 알코올 중독으로 파멸을 겪은 아픔과 후회, 버린 어린 아들이 성장하여 엄마를 멀리하는 현실에 대한 고통,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에서 오는 자책.....
돈벼락으로 인생의 황금기를 맞이한 레슬리. 지역방송과 인터뷰에서 아들 제임스와 함께 나와 마음껏 기쁨을 표현했다.
“이 돈으로 무엇을 하고 싶으신가요?”
“아들이 가지고 싶어 하는 기타도 사주고, 식당도 차리고....”
6년 후, 술에 빠져 수억의 복권 당첨금을 몽땅 탕진한 레슬리. 올데 갈 데가 없어 장성한 아들 집을 찾는다. 하지만 알코올중독을 뿌리칠 수 없어 술을 멀리하겠다는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 아들 제임스(오웬 티그역)는 룸메이트의 돈을 훔쳐 술을 마셨다는 사실에 분노하여 엄마를 멀리한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하고 실수를 반복하기도 한다. 영화는 자신의 그릇된 행동으로 나락에 떨어진 사람이 변화하여 일어서는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담고 있다. 주인공 레슬리의 알코올 중독과 함께 모텔의 젊은 주인 로열도 마약중독자이다. 중독은 삶을 파괴하고 관계를 무너뜨린다. 중독은 또한 의존을 불러온다. 알코올에 중독이 되면 알코올 의존을 벗어나기 힘들고, 마약에 중독되면 마약에 손을 떼기 어렵다.
의지를 가지고 중독에서 벗어나려고 해도 엄청난 고통의 금단현상이 따라온다. 로열이 마약이 생각나면 밤중에 괴성을 지르고 밖으로 뛰어나가 옷을 벗고 춤을 추며 마약에 대한 생각을 돌리려고 몸부림치는 이유다. 레슬리는 오로지 아들에게 괜찮은 엄마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통스러운 술의 유혹을 뿌리친다.
나락에 떨어진 인생에도 눈을 들어 보면 분명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 줄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다. 그들의 존재와 호의가 망한 인생에 온기를 돌게하고 변화를 가져오게 한다.
호텔 관리인 스위니(마크 마론역)의 관심과 사랑은 중독된 두 사람을 치유하고 중독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구원자가 된다. 잘못된 과거에서 벗어나 새 삶을 사는 영혼을 따뜻한 시선으로 담은 이 영화는 비평가협회상을 받아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촬영은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촬영감독 라킨 세이플이 맡아 영화를 더욱 빛냈다. 레슬리의 역을 맡은 안드레아 라이즈보로의 연기는 빛났다. 영화의 깊이를 더한 그녀의 연기는 아카데미에서도 인정하여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렸다.
영화의 러닝타임 대부분을 인간사의 어두운 내용들이 펼쳐져, 보는 내내 마음이 아프고 힘들었다. 2시간 러닝타임이 3시간 정도로 느껴졌다. 다행히 영화가 해피엔딩으로 끝나 카타르시스가 되었다. 옆에 앉은 여성관객도 억눌린 감정이 한꺼번에 터져서인지 참지 못하고 소리 내며 훌쩍이며 엔딩에 감동했다. 2시간 내내 인간사에 등장하는 모든 감정이 파도치는 보기드문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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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의 마지막 모습
"우리가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사랑의 마지막 모습 "
AMOUR 아무르
음악가 출신의 부부 조르주와 안느는 평화롭고 우아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 두 사람은 머리가 하얗게 새었어도 서로에게 변치 않는 애정을 보내는 금슬 좋은 부부다. 제자의 공연을 보고 온 다음 날 아침, 안느는 식사를 하던 중 고장 난 인형처럼 멈춰버린다. 심각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수술을 받지만, 간단한 경동맥 수술에 실패해 반신불수가 된다.
조르주는 그런 안느를 최선을 다해 보살핀다. 하지만 안느의 상태는 날이 갈수록 악화되는데......
피할 수 없는 이별
문을 부수고 들어온 소방관들은 집에서 진동하는 악취에 코를 막는다. 시체가 부패하는 죽음의 냄새는 필멸의 존재인 우리에게 언제나 불쾌할 수밖에 없다. 지독한 악취와 대조적으로 곱게 누워있는 늙은 여성의 시체 다음에 영화의 제목 'AMOUR(사랑)'가 조용히 떠오른다. 첫 시퀀스에서 감독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인생은 아름답고 유려하지만 그와 동시에 지독한 냄새가 나기도 한다는 것, 삶도 사랑도 죽음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조금 불편하겠지만 똑바로 담담하게 담아보겠다는 감독의 태도가 엿보인다.
태엽이 전부 돌아가버린 인형처럼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던 것이 시작이었다. 안느의 마비는 오른쪽에서부터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걷는 것은 물론이고 시간이 지날수록 용변을 해결하는 것과 먹고 마시는 것조차 어려워진다. 안느는 가장 기본적인 생활조차 타인의 손을 빌려야만 한다.
몸이 잠깐 멈추는 것, 의식이 잠깐 사라진다는 것은 죽음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신호다. 의식과 육체의 정지가 반복되다 이내 완전히 멈추어 버리면 그것이 죽음이다. 안느는 몸에 대한 통제권을 잃어갈수록 수치심과 분노를 느끼고, 가장 사랑하는 이를 힘들게 해야 하는 상황에 차라리 죽고 싶다고 말하기도 한다.
조르주는 그런 안느를 어떻게든 살려두고자 하지만 이 역시 힘겨운 상황이다. 조르주가 안느와 한 마지막 약속은 절대 병원에 입원시키지 않는 것이다. 조르주는 이 약속을 지키고자 한다. 안느도 조르주도 이 힘겨운 상황이 끝나기만을 바라지만 여기서 안느가 건강하게 살아나는 선택지는 있을 수 없다.
영화에서 우리는 인생에서 앞으로 겪게 될 어떤 장면들을 미리 마주하게 된다. 나이 듦과 병듦 그리고 죽음은 우리 모두가 안고 있는 과제이지만 절대 풀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해결 방법을 찾는 게 아니라 받아들여야 하는 태도의 문제다. 우리는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삶과 죽음을 담는 그릇, 집
부부는 음악가지만 영화에서 음악의 사용은 절제되어 있다. 안느의 제자가 치는 피아노 연주와 CD에서 나오는 음악이 전부다. 고요함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두 사람이 만들어내는 소리에 집중하도록 만든다. 이를테면 극 초반에 안느의 이상을 느낀 조르주가 안방으로 들어갔을 때 신경 쓰일 정도로 크게 들리던 싱크대의 물소리 같은 것이다. 카메라는 안방에서 조르주를 비추고 있지만 주방에서 들려오는 물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하게 된다. 한 화면에 있지 않아도 두 사람과 집안 전체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극 초반에 제자 알렉상드르의 공연을 보고 돌아오는 신을 제외하면, 영화의 공간적 배경은 집을 벗어나지 않는다. 카메라는 집 안에서 두 사람을 담고 있다가 누군가 외출을 나서면 이후 외출에서 돌아오는 인물로 바로 이어진다. 병원을 갔다 온 안느와 장례식에 다녀온 조르주를 카메라는 집에서 함께 맞이한다. 조르주가 문 밖으로 나가는 장면조차 꿈으로만 그려진다.
조르주는 안느에게 죽음을 고하고, 그제야 부부는 함께 집을 나선다. 그들이 두고 온 안느의 차가운 육신만이 집이라는 관 속에 고이 남겨져 있다. 집에는 이들의 모든 것이 담겨있다. 사랑과 추억, 고통과 죽음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조르주와 안느의 삶과 사랑과 죽음이 오롯이 담겨 있다.
어디까지가 사랑인가
사랑하는 사람의 생이 꺼져갈 때 우리는 무얼 할 수 있을까. 편하게 해주어야 할지 고통스러운 삶을 지속시키는 것이 옳은지 혼란스러워진다. 당사자가 아닌 이상 쉽게 판단해서는 안되지만 어떤 선택이든 자신의 욕심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카메라는 인물과 감정을 깊숙이 파고들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곁에서 담담하게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죽어가는 사람을 그저 지켜보는 영화의 관음적인 속성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기도 한다. 안느의 고통과 시들어 가는 모습은 현실적이며
조르주가 내린 결정은 사랑과 책임감을 결과이지만 그럼에도 폭력적이다. 사랑하기에 끝까지 책임지고자 하는 남자와 자신과 남편의 고통이 끝나기를 바라는 여자의 마지막은 결국 그런 것인가 생각하게 된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선택이지만, 선뜻 비난할 수는 없다.
안느가 죽음을 맞이한 순간 실제로 그것을 원했는지 알 수 없다. 그저 살고자 하는 힘없는 버둥거림만 보였을 뿐이다. 영화는 마지막 조르주의 결단에 동의할 수 있게끔 그의 입장을 충분히 말해주었다. 그에게 느껴지는 연민은 우리의 미래에 건네는 자기변명과도 같다. 우리는 조르주와 안나 둘 중 누구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관객은 일련의 과정을 받아들여야 하는 상태에 놓인다. 카메라가 인물들에게 갖는 거리감은 죽음 앞에 무력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게 영화는 모든 것을 관객에게 남겨두고 등장인물들을 함께 퇴장시킨다. 부모님이 떠난 집에서 검은 옷차림으로 홀로 앉아 있는 딸 에바는 조르주와 안나의 삶과 사랑의 결실이다. 그리고 이들의 죽음을 감당해야 하는 남겨진 존재이다. 우리는 텅 빈 집에 홀로 앉아있는 에바처럼 적막함을 느끼며 두 사람을 생각한다. 이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생각하고, 나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그려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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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정도의 속도로 살고 있나요?
봄바람이 불어오면 삶의 속도를 생각한다. 지난겨울엔 걸음이 빨랐다. 옷깃을 여미고, 목도리를 꽁꽁 싸매고 어깨를 잔뜩 움츠려 내 몸에서 바람을 맞을 면적을 최대한 줄인 뒤, 종종걸음으로 걸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문득 불어오는 바람에 따뜻한 기운이 섞이기 시작하면, 늘 비추던 햇빛도 더 따사롭게 느껴져 어깨를 펼치고 조금 느긋하게 걷게 된다.
“목련이 피기 시작했네, 여기 산수유나무가 있었어?”
봄의 따듯한 공기는 차가운 것을 말랑말랑하게 만들고, 입김을 불며 목적지를 향해 돌진하던 겨울과 다르게 걸음을 늦추고, 천천히 변하는 계절을 즐길 준비를 하게 되는 것이다. 빠르게 앞만 보고 달려가던 내 일상의 속도가 확연히 달라지는 순간이다. 쌩쌩 부는 겨울바람의 속도와 벚꽃이 내리는 속도의 차이처럼 말이다.
영화 초속 5센티미터는 ‘벚꽃이야기’ ‘ 우주비행사’ ‘초속 5센티미터’ 세 가지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1부는 1994년 도쿄를 배경으로 1년 차이로 전학 온 타카키와 아카리의 이야기다. 둘 다 전학생이었던 지라, 학교에서 조금 겉돌지만 둘 다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으로 서로 친해진다. 하지만, 초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헤어지고, 둘만의 특별한 추억만 남은 채 시간이 흐른다. 반년이 지난 뒤 아카리는 타카키에게 편지를 보내고 다시 둘은 연락하게 되며 만남을 약속한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타카키가 아카리를 만나러 가는 그날, 폭설이 내린다. 열차는 계속 지연되어 약속시간을 훌쩍 넘겨 깊은 밤이 되어서야 도착한다. 하지만 아카리는 기다리고 있었고, 그리고 마침내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
2부는 시간이 지나 고등학생인 ‘타카키’ 이야기다. 보내지 못하는 메시지를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는 타카키는 여전히 아카리를 그리워하는 듯하다. 그런 타카키를 처음 만난 중2 때부터 지금 까지 몇 년을 혼자 짝사랑해 온 카나에. 진로도 정하지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도 하지 못하고 있지만, 하나씩 가능한 일부터 하자고 마음먹는다. 카나에가 서핑을 하는 여름바다와 우주선이 쏘아 올려지는 여름 밤하늘이 아름답다.
3부는 결혼을 앞두고 있는 아카리와
도쿄에서 시스템 엔지니어로 일하는 타카키의 30대를 보여준다.
“그냥 일상생활만 해도 슬픔은 여기저기에 쌓인다.”
타카키의 집은 엉망이고, 일상은 공허함과 무기력함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창문 밖엔 벚꽃이 흩날리는 봄의 계절이 시작되고 있다. 열세 살의 둘은 언젠가 다시 함께 벚꽃을 볼 수 있을 거라고 굳게 믿었었다. 하지만 지금은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어릴 적 소망처럼 함께 벚꽃을 보지는 못했지만, 어쩌면 벚꽃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사람으로 남을 두 사람. 영화는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지만, 더 나아가 관계와 삶의 속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영화는 무표정하게 ‘요 몇 년 동안, 앞으로 나아가고 싶고, 닿을 수 없는 것에 손을 대고 싶어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향하는 건지도 모르고 거의 협박 같은 마음이 어디서부터 끓어오르는지도 모르면서 나는 무작정 일을 했고 문득 나날이 탄력을 잃어 가는 내 마음이 몹시 괴롭게 느껴졌다.’ 고 독백하는 타카키의 얼굴에서 회사를 그만두고 자기만의 속도를 찾아 프리랜서로 일하며 책상에 내려앉은 벚꽃을 보고 산책을 가는 길에 입가에 살짝 지어진 미소로 바뀌는 미묘한 변화를 보여준다.
"어느 정도의 속도로 살아가야 너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어쩌면, 너는 ‘나’ 일지도 모른다. 어느 정도의 속도로 살아가야 ‘나’를 만나고, 진짜 ‘나’로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초속 5센티미터로 생각해 보는 오늘이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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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MFF 인터뷰] 3년만에 세상 밖으로
3년만에 세상 밖으로, 이은정 감독의 '오랜만이다'
개막식부터 이어진 비소식과 더운 날씨에도 제천국제음악영화제를 찾아주는 관객들이 많다. 이은정 감독은 첫 장편영화이자 음악영화를 선보이며 기쁜 마음을 전했다. 2020년 팬데믹과 맞물려 오랜 기다림 끝에 세상에 나온 영화 '오랜만이다'의 이은정 감독과 ‘연경, 음악, 그리고 이은정 감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기소개와 함께 간단한 영화 소개 부탁드립니다.
영화 '오랜만이다'를 연출한 이은정입니다. 영화 '오랜만이다'는 오랫동안 가수의 꿈을 꾼 연경이 서른 초반이 될 때까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해 꿈을 포기할지 고민하는 시점에서 시작합니다. 어느 날, 고등학교 시절에 그토록 가지고 싶어 했던 기타 하나가 첫사랑 현수로부터 배달되며 다시금 떠오른 첫사랑, 꿈과 현실 사이 청춘들의 고민을 담은 영화입니다.
영화를 구상하는 과정에 생긴 에피소드가 있다고 들었어요.
영화 제작사 대표님이 ‘지하철에서 첫사랑을 만나 보내는 하루’를 음악 영화로 오랫동안 기획하셨는데요. 제가 연출을 맡았을 때 코로나19로 인해 촬영을 1년 정도 멈추었어요. 그때 절반가량의 시나리오도 다시 썼거든요. 처음에 작성한 시나리오와 완성된 영화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촬영을 중단한 1년의 기간이 감독님께는 더욱 깊이 있어진 시간이 되었을까요?
영화 속 연경이도 꿈을 향해 도전하지만, 자꾸만 벽에 가로막히고 좌절하고 어쩌면 이 길이 나의 길이 아닌가에 대해 고민합니다. 사실 촬영이 중단되니 연경과 감정이 동일시되기 시작했습니다. 다행히 바뀐 시나리오를 감독님과 배우님들께서 좋아하셔서 나머지 절반을 새로운 시나리오와 합쳐 완성했어요. 기존의 시나리오는 로맨틱 코미디 성향이 강했다면 완성작은 훨씬 차분하고 음악인으로서 연경의 성장담이 주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영화 속에서 가장 애정이 가는 인물이 있다면 누구인가요?
저에게는 이 영화 자체가 연경이 같습니다.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로 작업하는 가운데 촬영이 계속 중단되다 보니 “아냐 넌 할 수 있어, 될 수 있어”라고 해주고 싶은 마음이었거든요. 연경이가 마지막에 무대에서 노래 부르는데 울컥했습니다. 되든 안 되든 계속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그렇다면 감독님께서 좋아하는 곡 추천 부탁드립니다.
여고생 연경과 잘 어울리는 곡인 '천문학은 모르지만', 현대에서 부르는 '무지개'라는 곡을 추천드립니다. '무지개'를 들을 때 각자의 느낌이 다를지도 모르지만, 제가 영화를 통해 전하고 싶은 감성인 것 같아요.
제천국제음악영화제가 감독님께 어떤 의미인가요?
제천국제음악영화제는 처음입니다. 재미있다는 이야기를 익히 들었어요. 저 혼자 3년 가까이 영화 '오랜만이다'를 끌어안고 있었어요. 언제 세상에 나와 관객들을 만날 수 있을까, 이러다 영원히 안 되면 어쩌지 불안감도 생겼어요. 제천국제음악영화제가 저의 불안을 해소해 준 느낌이에요. 처음으로 극장에서 상영한 것을 보게 되어 의미가 있고 세상에 나왔다는 것에 감동이었습니다.
8월 12일, 이은정 감독은 배우들과 함께 영화 상영 후 곧바로 음악 공연을 하는 ‘히든트랙’에 참석했다. 당시 관객과 가까이에서 만나 영화와 음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이게 진짜 음악영화제’라 마음에 와닿았다고 전했다. 이은정 감독은 연경과 음악의 연장선에 서있다. 인터뷰를 마치며 이은정 감독은 영화 '오랜만이다' 음악들이 워낙 좋기 때문에 음원도 나오고 나중에 노래방에서 나오면 따라 부르고 싶다는 즐거운 꿈을 밝혔다.
글: 하이스트레인저 김미정
사진: 하이스트레인저 김시은
에디터 : 김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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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vielog #26] 주눅들어있는 평범한 가장의 본 모습, 노바디
존윅의 각본가가 존윅 시리즈를 기획한 사람들과 함께 새로운 영화로 돌아왔습니다.
바로 영화 노바디 입니다.
전반적으로 존윅과 비슷한 부분이 많아요. 집에 침투하는 적을 제압하는 액션 장면도 그렇고,
다양한 격투장면은 존윅을 떠오르게 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확실히 이 제작진의 인장이 확실히 들어가 있다고 볼 수 있어요.
조금 다른 점은 가족과 아빠의 가정 내 위치에서 소외당하는 모습을 넣어서 가족적인 감정도 느끼게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본래 모습을 찾고 가족에게도 그것을 보여주는 영화라고도 할 수 있죠.
다른 것 보다 액션이 좋습니다.
존윅 시리즈를 좋아하신다면 추천드려요. 하지만 아쉬운 점도 물론 있는 영화죠.
자세한 내용은 영상을 끝까지 봐주세요. :)Rabbitgumi 채널 구독과 좋아요도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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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지옥> 공식 예고편
넷플릭스 시리즈 《지옥》 세상이 지옥이 되었다 이것은 살인인가 천벌인가 《지옥》 11월 19일 공개, 오직 넷플릭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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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영웅> 1차 예고편
"나는 테러리스트가 아니다. 대한민국 독립군 대장이다." 대한민국의 진정한 #영웅 ‘안중근’ 이름 세 글자만 들어도 마음이 벅차오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