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2025-01-22 07:36:55
〈타인의 삶〉에서 이어지는 한 방울의 눈물
영화 〈카라바조의 그림자〉

〈타인의 삶〉(2007)에서, 동독의 비밀경찰 비즐러는 극작가와 배우 커플을 도청하며 감시하다 어느새 그들의 예술에 감화되어 남몰래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두 사람이 위기에서 탈출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 영화에서, 비즐러가 흘린 한 방울의 눈물은 시대의 지배적 담론과 그에 부착된 권력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결코 인간 내면을 완전히 잠식할 수는 없다는 점을 보여주는 가장 결정적인 근거로 제시된다. 비즐러가 반체제 인사를 감시하는, 사상이 투철한 인물이라는 점은 그 눈물 한 방울의 가치를 더욱 극화한다. 어둡고 칙칙한 공간에서 도청하던 그가 홀로 전율하며 흐르는 한 방울의 눈물은 체제에 속한 사람의 내면에조차 잠식당하지 않은 공간이 있음을 폭로하고, 우리가 ‘인간다움’이라 부를 만한 것이 바로 그 공간에서 시작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카라바조의 그림자〉는 비즐러의 눈물을 16세기의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조에게 헌사한다. 교황의 명령을 받은 한 남자가 있다. ‘그림자’로 불리는 그는 카라바조가 일으킨 파문을 객관적으로 조사할 임무를 명받는다. 난폭한 성격의 카라바조는 살인죄를 저지르고 도피하다 사면을 기다리는 중이다. 한편에서는 신성을 모독하고 실정법을 위반한 카라바조를 빨리 처형하라는 요구가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카라바조의 재능을 알아본 몇몇 귀족, 심지어 추기경까지 교황에게 카라바조의 사면을 청하고 있다. 그림자는 이 상황에서 카라바조 사건을 면밀히 추적한다. ‘객관적’ 진실에 가 닿가 위해서다.


카라바조는 고통받는 자들에게서 예술을 길어왔다. 수감자, 가난하고 병든 자, 창녀를 종교화의 모델로 썼다. 그의 모델이 된 ‘비천한’ 사람들은 자신도 신성할 수 있는 존재라는 가능성에 고무되고 여기에 자부심을 느낀다. 동시에 카라바조는 난폭하고 ‘저속’하다. 향락에 젖은 파티를 일삼고 소년과 남색을 벌인다는 혐의도 받는다. 반대자들은 카라바조를 ‘악마’라고 부르고, 그를 지지하는 추기경이 ‘타락’했다며 비난한다.
‘객관적’ 조사를 명받기는 했으나, 그림자는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인물이다. 가톨릭교회의 권위가 지엄해야 한다고 믿고, 도덕적 정결이 그 권위를 지탱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짐작 가능하듯, 그림자는 카라바조의 삶과 예술에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메스꺼움과 매혹을 동시에 느낀다. 메스꺼움은 카라바조가 예술로 묶어낸 ‘빈자들의 교회’라는 집단 감각이 로마 교회를 위협할지 모른다는 본능적 위기감에서 나온다. 카라바조가 기존의 미술 학교, 아카데미 소속 인물과 그들의 화풍에 반기를 드는 것도 카라바조의 반체제성에 대한 그림자의 의혹을 돋운다. 반면 매혹은 자기 신념과 반대될지라도 도저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예술적 재능과 그 재능이 그림자의 마음을 파고드는 과정에서 나온다.
모든 조사를 마친 그림자는 카라바조와 대면한 최후의 장면에서, 자신의 신념과 마음을 저울질한 후 나름의 결단을 내리고, 이후 눈물 한 방울을 흘린다. 후회의 눈물일까? 감동의 눈물일까? 그림자는 비즐러와 같은 것을 느꼈으나 다른 선택을 내렸다. 이렇게 예술과 체제, 권력과 인간의 딜레마에 관한 그럴듯한 드라마가 완성된다.

다른 한편, 카라바조가 예술가로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건 21세기가 아니라 16세기에 태어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가 예술가의 인품, 생활을 작품성과 깊이 연계하는 오늘날을 살았다면 어땠을까? 그를 둘러싼 스캔들은 더 뜨겁고 격렬했거나 아니면 애초에 예술가로서 자격을 상실해 점화조차 되지 않았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느낀 장면은 대개 난폭한 난동꾼인 그가 밑바닥 사람들과 애정 어린 관계를 맺고, 그들에게 깃든 성령을 포착한 후, 모델로 세우기까지의 몇몇 과정에 대한 묘사였다. 바로 이런 과정이 있었기에 카라바조의 작품이 여전히 빛나는 것일 터다. 그래서 더더욱 헷갈렸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과거의 인물을 재단하고 평가하는 일은 지양되어야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에 그와 같은 인물이 다시 등장한다면 어디에 초점을 두고 그를 평가할 것인지에 관해서 말이다. 수 세기 전 그림자가 마주한 고민은 다른 방식으로 계승되어 우리에게 나름의 답변을 요구하고 있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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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애 감정과 양말 한 짝은 잃어버리는 것
첫 번째 키스 스틸컷. ⓒ 네이버 영화
결혼에도 해피엔딩이 있을까. 사랑해서 한 결혼은 늘 각기 다른 이유로 장애물에 부딪힌다. TV 프로그램 속 이혼을 고민하는 부부들을 볼 때면 저들은 저렇게 안 맞는데, 어떻게 함께 살게 됐을까 궁금해진다. 같이 사는 것이 그토록 괴롭다면 일찌감치 갈라서는 게 낫다라는 미혼다운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첫 번째 키스>에는 대화가 없는 부부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서로에게 궁금한 것이 없고 숨 막히도록 무미건조한 부부. 그런데 이혼 서류를 들고 나간 날 남편이 갑작스러운 사고로 인해 생을 마감하고 만다. 남편 카게루를 하루아침에 잃은 아내 칸나는 혼자가 된 채 자신의 삶에 집중해 나간다. 그리고 그러던 어느 날 이상한 터널을 지나게 되고, 거짓말처럼 15년 전 남편을 처음 만났던 시절에 당도한다.
미우나 고우나 남편이었기에 칸나는 싱숭생숭한 와중에도 어떻게 해야 미래의 카게루를 살릴 수 있을지 고민한다. 몇 번씩 터널을 오가면서 서로의 첫 만남을 리셋하고 감정을 쌓아간다. 온갖 방법을 동원해 그가 사고를 당하지 않게 하려고 애쓴다. 갖은 수를 써도 소용이 없자 칸나는 자신과의 인연 자체가 시작되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에 이른다. 그래서 15년이나 어린, 과거 속 남편에게 모진 말을 쏟아내지만 결국 카게루는 칸나가 미래에서 왔고 둘이 불행한 결혼 생활을 했음을 알게 된다.
결혼은 희생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카케루와 칸나 사이에 대화가 끊기기 시작한 것은 그가 꿈을 포기하고 아내와의 안정적인 삶을 이루기 위해 현실과 타협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이러한 경위를 깨달은 칸나는 더더욱 그가 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좀 달랐을까라고 삶을 돌아본다.
가까울수록 정작 필요한 대화가 오가지 않는 경우가 많다. 말하지 않아도 알 거라고 생각하거나, 모든 건 다 우리를 위한 거라 치부하며 참고 견디는 나날의 연속이다. 쌓이는 오해와 깊어지는 감정의 골은 시간이 지날수록 손쓸 겨를이 없다. 서로가 너무 달라서 도통 이해하지 못하는 구석만 발견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대다수의 부부는 왜 수건을 구겨서 걸어 놓을까, 치약을 왜 중간에서부터 짤까 등 사소한 단점을 발견하며 살아간다.
사랑하면 눈이 먼다는 말이 있다. 영화 속 칸나의 말처럼 결혼하면 해상도가 올라간다. 콩깍지는 벗겨지고 4K로 안 좋은 점을 보게 된다. 카게루는 둘의 결혼생활이 행복하지 않았고,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 역시 알게 되지만 두 선택지 모두 동일하게 택한다. 달라진 것은 오직 하나, 칸나와의 결혼 생활이다. 대화 없이 차가운 공기만 오가던 부부가 아니라 각각 빵과 밥 다른 메뉴를 먹으면서도 시답잖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웃고 떠든다.
그렇게 영화의 엔딩에서는 건조함 대신 사람 냄새 나는 밝은 분위기가 가득한 집안이 스크린을 채운다. 다시 살아볼 수 있는 기회를 톡톡히 잘 활용해 낸 것이다. 이따금 지나간 연인이 그립고 놓친 기회에 애달파하며 밤을 지새울 때가 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처럼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그건 과연 득이 될까, 독이 될까 스스로 가늠해 본다. 그렇게 혼자 내린 결론은 이렇다. 다시 사는 것이 너무 힘이 드는 일이라 원하지 않는다 싶다가도 놓친 인연, 설렜던 감정을 되찾을 수 있다면 속는 셈치고 한번쯤 뛰어들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반했던 순간은 생각보다 더 강력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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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이야기를, 내가 짊어온 삶을, 들어준다면
보호자 대신 보호 시설 안팎에서 하루하루 살아내기 급급한 아이들의 불안정한 입지. 이곳, 벨기에 사람으로서 사업을 영위하는 어른은 겪을 일 없는 처지다. 아이러니하게도 거주할 권리를 증명받지 못한 '로키타'와 체류권은 있어도 한낱 꼬마에 불과한 '토리'는 여전히 벨기에 시민에 속하지 못하기에 이 어른들의 이해타산과 딱 맞는다. 마약 거래상으로 뒷돈을 챙기는 일은 의심받기 쉬울뿐더러 시민인 이상 허락되지 않는 일이기에.
푼돈에 급급한 아이들은 군말 없다. 하물며 자신들이 수고스럽게 받아온 돈 뭉탱이에서 50유로 한 장을 받는다 하더라도. 기대나 실망이 담길 틈 없는 눈빛. 그러나 공허하진 않다. 토리와 로키타에겐 서로가 있기에. 지켜야 할 존재가 있다는 건 사람을 가장 강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가장 유약하게 만든다.
다 자라지 못한 어른들의 세상에 편입된 이미 다 커버린 아이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주요 줄거리 스포일러는 없습니다.
어른의 삶은 산다는 건 어떤 것인가. 정의할 말은 여럿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타인을 간단히 가늠하는 것 아닐까. 생판 처음 보는 타인이 어떤 사람인지 가늠해 가며 적합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해 내며 인간 사회의 규모가 점점 더 커졌으니까. 안타까운 건 사람의 말을 들으면서도 그 사람이 누구인지엔 집중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진위여부를 가리기에 급급하니 말이다. 이 말이 진짜인지, 거짓이 섞인 건 아닌지, 과장한 거라면 어느 정도가 진짜일지.
로키타가 거쳐온 인터뷰도 비슷한 양상일 테다. 어른들은 로키타가 살아온 보육원에 대해 질문하고, 토리와 만나게 된 경위를 묻는다. 하지만 로키타의 답변엔 관심이 없다. 그가 진짜를 말하고 있는지, 우리 어른이 듣기에 납득할 만한 타당한 사실인지를 확실히 가리고자 질문에 질문을 거듭한다. 취조 현장과 다를 바 없다. 잘못해서 불려 온 것도 아닌데.
마치 사건의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사실을 논리를 갖춘 구조로, 빈틈없이, 하나의 매끄러운 발표문처럼 말해야 하는 현실과 겹쳐진다. 일평생 더불어 살아온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 소개하기도 어려운데, 그런 내가 겪은 한 사건의 특정 시점을 얼마나 명료하게 말할 수 있을까. 질문하는 이가 만약 질문받는 입장이 느낄 당혹스러움과 혼란을 느껴봤다면, 결코 꼬투리 잡듯 묻지 못했을 거다. 결코 상대의 처지에 놓이리라는 생각을 못했기에 뾰족하게 콕콕 찌를 수 있을 테지.
한편으로는 질문을 건네는 쪽의 최선이기도 하다. 비스름한 상황에서 엇비슷한 진술을 하는 수천수만 명을 상대로 어떻게 진솔한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진짜를 말하는 것인지 가늠하는 게 가장 빠르고 손쉽다. 증거의 적확함을 토대로 판결을 내리는 법이 그러하듯.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근간을 따라 모든 판단은 기출문제처럼 유형이 정해졌다. 그 형식에 능한 사람은 조금 더 유리한 판정을 얻어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순서가 뒤로 밀린다.
로키타는 후자에 속했다. 쉽게 당황하고, 말주변이 없고, 금세 패닉에 빠진다. 어찌 보면 그는 유약할 수밖에 없다. 온갖 궂은일을 제가 다 처리해 가며 동생인 토리를 지켜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동생과 함께 일하지만 직접 마약을 건네고 고객을 상대하는 건 로키타가 전담한다. 와중에 토리가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돕기까지 하며.
다소 강박에 가까운 애씀. 이 책임감은 엄마의 불신을 회복하고 싶은 마음과 뒤섞인 걸지도 모르겠다. 그와 동생이 하루하루 모은 돈은 엄마와 다른 동생들이 있는 쪽으로 보낸다. 아니, 정확하게는 보내려고 했다. 브로커들이 낚아채지만 않았더라면. 로키타가 엄마에게 이 사실을 전하는 과정은 또다시 진술의 형태를 띤다. 피해 사실의 보고. 그리고 역시나 타당성을 인정받지 못한다.
순식간에 일어난 그 일을 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가 느끼는 억울함과 분노, 슬픔을 어떻게 전달해야 할까? 그가 증거품목이라고 내밀 수 있는 건 오로지 그의 머릿속, 그의 마음속에 있기에 무엇도 증명할 수 없다.
로키타는 자신이 겪은 세계로부터 토리를 보호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진실을 증명해야 하고, 거짓을 말했다는 누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다시 증명해야 하고, 그럼에도 반복해서 일을 하고 돈을 벌어야 하는 이 나날에서. 이미 자신은 세상의 진흙탕에 굴러 너무 더러워졌다.
하지만 로키타가 토리를 신경 쓰는 만큼 토리 또한 로키타를 아끼고 챙기려 든다. 보호받는 동시에 보호하고자 한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로키타보다 토리가 유리하다. 남자 어른은 여자 아이를 건들 생각만 하지, 남자아이에겐 새로운 일감을 주니까.
욕구와 요구만이 가득한 주변에서 그나마 잠시 반짝이는 빛이 그들에게도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 빛에 기대지 않는다. 우리를 믿을 사람은 우리밖에 없으니까. 도움은 측은지심에서 일어난 순간적인 반응이다.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위협이 되거나 낯선 느낌이 들면 내민 손을 금세 거둬들인다. 신기루에 이끌려 어느 하루를 버틸 생각보다는 서로에게 기대어 제 발로 이 땅을 디디고 서는 게 안정적이다.
살아가고자 하는 절박함과 간절함은 구린내가 나는가 보다. 생존 자체가 목적인 모습이 그들과 동등한 사람이라기보단 길들이고 사육할 동물로 보이는 것인지. 몇 마디의 협박과 위협적인 소음을 만드는 것을 생각하면 애석하게도 이 예상은 틀리지 않은 것 같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기죽지 않는다. 자신이 한 노동의 대가는 비합리적일지라도 필요한 게 있다면 필요한 것을 정확히 언급한다. 음식점의 남는 빵, 손님들을 위해 불러준 공연의 값, 하다못해 깨끗한 침대보라도. 최후의 보루였는지 모른다. 당신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사람임을 증명받기 위한.
이마저 통하지 않자, 둘은 그들이 함께 살아갈 새로운 방향을 찾아낸다. 머리가 지끈할 만큼 무모한 선택이다. 하지만 무어라 나무랄 수 있을까. 그 길은 막혔으니 다른 길로 가라고, 가리킬 대안이 없다. 최선의 선택은 최고의 선택이지 않다. 때로는 최선이기에 최악이다.
서로를 부르는 음성과 깊은 포옹. 그리고 목적지가 있을 수 없는 달음박질. 두 사람의 목소리가 한데 어우러진 노랫말이 자꾸 귀에 맴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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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ow close
<클로즈(Close)>(2022, 루카스 돈트)
* 작품의 장면과 결말 포함
<걸>이 그러했듯 <클로즈>는, ‘다름’을 재단하는 시선 자체보다는 ‘남다르다’, ‘예민하다’고 여겨지는 영혼들이 그것에 영향을 받는 모양에 집중한다. 다만 <클로즈>의 카메라는 <걸>만큼 집요하지 않았고, 보다 인물의 공간을 존중하며 참을성 있게 움직였다.
감독 본인이 짚기도 했듯, ‘close’는 두 가지 의미로 쓰인다. 먼저 ‘closeness가까움’의 그것이다. 레미와 레오는 서로의 배를 베개 삼아 눕고, 서로의 어깨에 기대고, 나란히 달리거나 자전거를 타고, 한 침대에서 잠들곤 한다. 때로 레미의 엄마 소피까지 합류하기도 하는 몸의 맞닿음은 친밀감과 편안함에서 비롯되는 자연스러운 움직임이다. 그렇다면 어떤 행동까지는 우정으로 분류되고, 어디서부터는 로맨스인가. 어느 정도 가까워야 ‘정상’이고, 어느 정도를 넘어서면 ‘이상’한가. 관계에 물음표를 던질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레오와 레미. 기성의 언어로 규정되지 않는 그들의 유대에 타인의 불필요한 시선이 섞여들며, ‘close’의 두 번째 쓰임이 등장한다.
이 ‘close’는 ‘closing닫음’과 ‘closet클로짓’의 그것, 타인과 연결을 끊거나,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벽장에 가두는 행위다. <걸>의 카메라가 호의를 가장한 폭력을 감당하던 라라의 얼굴을 관찰했듯, <클로즈>의 카메라는 ‘사소한’ ‘의심’이나 ‘장난’을 감각하는 레오의 얼굴을 관찰한다. 어쩌면 별 악의조차 없을 듯한 말들이 어떻게 레오에게, 이어 레미에게 침범하는지를. 이성애규범적 관습이 촘촘히 스며든 집단 사회가 무의식적으로 그들의 ‘다름’을 삭제하는 과정을. 감수성이 예민할 시기, 남들보다 섬세한 -혹은 서로 덕에 그 섬세함을 보존해 온- 두 소년의 세계는 평범하게 무신경한 외부의 자극으로 인해 깨진다. 레오는 제 일부를 닫고 레미와 단절되고, 레미는 내면으로 파고들다 끝내 욕실 문을 닫아 건다.
영화는 말로 표현되지 않는 ‘괜찮지 않음’의 조각들을 포착한다. 레미의 조각은 레오의 눈동자가, 레오의 조각은 카메라가 담는다. 레오는 설명하기 힘든 심리적 압박을 받으며 외부의 기대에 스스로를 맞추려 하고, 레미는 기대 자체보다는 그에 대한 레오의 반응에 반응한다. 레오는 레미를 밀어내고, 레미는 거리를 알아채고 속상해한다. 레오는 상대방의 아픔을 감지하고 자신도 아파하지만, 벌려 놓은 거리를 좀처럼 다시 좁히지 못하고 바라보기만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레미가 죽는다. 레오는 제대로 슬퍼하지 못한다. 침대를 적시고, 죽음의 순간을 상상한다. 레미의 집을 찾아가지만 도망쳐 나온다. 마음의 상처가 손목의 부상과 함께 물리적으로 드러나고, 그는 애도를 가로막았던 죄책감을 털어놓게 된다.
레미의 마음 속에서 일어났던 일을 짐작해 보았지만, 결국 알 수 없는 것으로 남겨두어야 했다. 관객은 레오가 느끼는 만큼만 알 수 있으므로 그가 레미를 저도 모르게 벼랑으로 몰아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허나 적었듯, 그건 레오가 느끼는 바다. 레미는 생각이 밀려와 잠을 이루지 못하곤 했다. 그가 욕실 문을 잠그면 소피는 불안해했다. 레오는 곁에서 그의 불면을 감각하고 수면을 돕거나 함께 뜬눈으로 밤을 보내는 이, 레미를 세상에 붙잡아 두는 존재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연결이 끊기지 않았다면 무언가 달라졌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렇다 해도 ‘역할’을 인지하고 감당하기에 레오는 너무 어렸다. ‘레미의 죽음은 레오의 탓이 아니다.’ 그의 자책을 듣고 소피는 그렇게 답했어야 했지만, ‘내리라’고 했다 하여 아이를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를 탓할 수도 없었다. 레오는 뒤늦게 고백했고, 소피는 뒤늦게 그를 쫓아갔다. 그들은 엉엉 울며 너무 늦지 않게, 서로를 끌어안는다.
레미와 레오의 놀이터였던 꽃밭은 레오의 일터가 되었다가, 둘 다가 된다. 실물의 꽃을 키우는 일은 내면의 연약한 꽃을 지키는 일과 닮았다. 영화는 ‘꽃을 재배하는 소년’과 ‘꽃밭에서 뛰노는 소년’ 모두를 레오에게 드리운다. 레오가 하키 수트를 입고 레미와의 거리를 벌리며 누르려 했던, ‘남자답지 않은’ 남성성이 거기 있다. “아빠는 태어났을 때부터 남자였을까?” <걸>에서 라라의 아빠가 딸에게 위로를 건네며 했던 대사다. 두 영화의 중심에는 물음이 자리한다, 우리가 강요된 답을 학습하고 수행해 왔기에 물을 수 있다는 것조차 몰랐던. <걸>의 물음이 ‘WHAT is a Girl?’ 이었다면, <클로즈>의 물음은 ‘How close two boys can be?(두 소년은 얼만큼/어떤 식으로 가까울 수 있는가?)’다. <클로즈>에는 또 하나의-그리고 앞선 것들과 이어지는, ‘남자됨’의 정체에 관한 물음(‘How boys should behave?’)이 있다. (그러므로 레오가 겪은 상실을 ‘소년이 남자가 될 때’, ‘성장통’ 따위로 수식하겠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면, 아무리 영화에는 다양한 감상이 따른다 해도- 틀렸다,고 말해야겠다.)
엔딩, 레미와 함께 달리던 꽃밭을 레오는 홀로 달린다. 뒤돌아 카메라를 응시하는 그는 활짝 핀 꽃 한가운데에 있다. ‘꽃밭을 달리는 소년’의 남성성, ‘함께 꽃밭을 달리는 두 소년’의 관계. 영화는 그 규정불가한 아름다움을 담는다. 그동안 수많은 소년들의 내면에서 닫혀 버린 것들을 애도하고, 남아 있는 것들이 지켜지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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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화를 통한 멋진 이륙, 밋밋한 착륙!
‘이 영화는 실화입니다!’ 점차 새로운 이야기가 고갈되고 있는 영화계에서 실화만큼 든든한 지원군은 없다. 관객에게 어필하기 딱 좋은 마케팅 요소로도 적합하다. 문제는 영화보다 영화 같은 이야기를 어떻게 각색하고 풀어내느냐가 관건. <하이재킹>은 실화의 힘으로 멋진 이륙을 해내지만, 결국 밋밋하게 착륙하고야 만다.
때는 1971년 겨울, 속초공항에서 김포행 비행기 한 대가 이륙한다. 이날 여객기 조종은 태인(하정우)와 규식(성동일)이 맡는다. 사고 없이 이륙한 비행기는 곧 아수라장이 된다. 여객기를 통째로 납치하려는 용대(여진구)의 사제 폭탄 때문. 폭발로 인해 베테랑 기장인 규식은 눈을 다치고, 부기장인 태인이 조종간을 잡아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순식간에 하이재킹에 성공한 용대는 북으로 향하라고 소리친다. 승객의 목숨을 담보로 한 용대의 협박에 무엇보다 사람의 목숨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태인은 일단 비행기를 북으로 돌린다. 그 사이 기내에 있는 승무원 옥순(채수빈)과의 공조를 통해 이 위기를 헤쳐 나가기 위해 노력한다.
<하이재킹>은 1971년 대한항공 F27기 납북 미수 사건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실화를 기조로 각색을 더 해 재탄생한 영화가 가장 먼저 비추는 건 공군 전투기 조종사인 태인의 눈을 통해 본 납북 민항기다. 휴전선을 넘기 전 민항기를 공격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어긴 태인은 사람들은 살렸지만(물론, 납북된 사람들이 모두 송환되지 못했다.), 군복은 벗어야 했다. 그만큼 영화는 당시 한국전쟁 이후 서로 다른 이념이 첨예한 대립을 하던 시대적 상황을 먼저 짚고 넘어간다. 그리고 이 대립이 비행기 안에서 벌어지는 가운데, 감독은 태인에게 60명의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 또 한 번 휴머니즘을 발휘할 것인가를 되묻는다.
어쩌면 영화는 그 물음에 답하는 것처럼 승객을 위해 몸을 던지고 헌신한 이들의 이야기를 펼쳐낸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기지를 발휘해 벌이는 조종사와 승무원, 그리고 승객들의 공조는 각색을 감안해도 당시 급박했던 상황을 유추할 수 있게끔 한다. 좀 더 상황에 몰입할 수 있는 건 다수의 재난영화에서 볼 수 있는 각양각색 인간들의 모습과 이야기, 그리고 자치 신파로 빠질 수 있는 드라마 요소를 애써 가져가려 하지 않으려는 영화적 성격이 한몫한다. 물론, 승객들의 이야기가 아예 다뤄지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극 중 태인과 용대의 대립을 견고하게 해주는 요소로만 작용한다. 신파를 걷어내고 담백하게 사건을 재조명하려는 감독의 노력이 여기에 비친다.
또 하나의 영화가 가진 차별화 포인트는 용대라는 인물이다. 허구로 만들어진 그는 단순히 북으로 가기 위해 하이재킹을 시도한 빌런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형이 북으로 넘어간 이후 ‘빨갱이’라 낙인찍힌 그는 시대의 희생양으로 묘사된다. 갖은 수모에 따른 분노와 더불어 북에서 사람답게 살기 위해 이 일을 선택한 용대의 절절한 전사는 관객에게 그의 행동에 당위성을 부여한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항공기 납치 영화로서의 재미를 전하기 위해 노력하는 <하이재킹>은 예상하지 못한 지점에서 난기류를 만난다. 바로 실화가 가진 무게감과 이념 대립의 이야기에 집중한 나머지 장르적 재미는 반감된다는 것. 항공기 납치 사건이 벌어지지만 좁고 한정된 공간 안에서 다루다 보니 서스펜스 전달의 한계는 노출된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내부에서는 폭발, 외부에서는 국군 전투기의 고공 장면이 진행되지만, 일회성으로 그쳐 연쇄적 감흥은 떨어진다. 더불어 빌런의 능력치가 기존 장르 영화에 비해 떨어져, 시간이 갈수록 태인과의 대결 구도에서 빗어지는 긴장감은 하강한다.
그럼에도 영화가 중심 고도를 잡고 밋밋하지만 안전하게 착륙할 수 있었던 건 어떻게든 살고자 했던 실존 인물들의 모습이 아른거리기 때문이다. 하정우, 성동일, 채수빈 등 승객을 위해 몸을 던진 이들의 연기는 당시 실존 인물들이 느꼈을 두려움과 공포, 그럼에도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느끼게 한다. 이전 작품들보다 배우들의 연기가 돋보인다고 할 수 없지만, 각자 자신이 맡은 임무를 수행하듯 실화에 위배되지 않는 선에서 당시 영웅들의 감정을 오롯이 전하기 위해 노력한다. 가상의 인물이며 빌런으로 나오는 여진구의 연기도 한몫한다.
<하이재킹>을 보고 실화에 더 관심이 생긴다면 지난 2022년 9월에 방송된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46회 '필사의 51분, 1971 공중지옥' 편을 추천한다. 어쩌면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실화가 <하이재킹>이 못다 한 멋진 착륙을 도와줄 수 있을 것 같다.사진 제공: (주)키다리스튜디오
평점: 3.0 / 5.0
한줄평: 실화를 통한 멋진 이륙, 밋밋한 착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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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제된 감정 표현의 프랑스 영화 《이리스: 사라진 그녀》
넷플릭스 오리지널 작품으로 스릴러 장르에서 소개되어 있어서 기대를 하고 봤던 영화 《이리스: 사라진 그녀》. 그런데 내가 생각했던 스릴러와 프랑스의 스릴러의 개념을 조금,,, 아니 많이 달랐던 듯 싶다. 사라진 그녀가 부제인만큼 사라진 대상을 추적하면서 그 스릴을 느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개인적으로는 그런 스릴은 느낄 수 없었다.
영화 《이리스: 사라진 그녀》 시놉시스
영화 《이리스: 사라진 그녀》는 한 부유한 은행가의 부인이 갑자기 실종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밖에서 기다리겠다던 부인은 사라지고 남편은 부인을 찾아 헤매지만 결국 납치되었다는 연락을 받게 된다. 하지만 이는 부인의 자작극이라는 사실을 영화는 처음부터 밝히고 시작한다.
납치범과 부인이 한 통속이 되어 남편을 속이려는 계획을 세우지만 납치범이 아지트로 돌아왔을 때는 부인은 이미 누군가에게 살해되어 있었다. 졸지에 납치살인범이 되어버린 그는 이를 무마하기 위해 암매장을 시도한다.
불안감에 떨던 그는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남편을 미행하기 시작하고 그 과정 속에서 자신에게 접근한 부인이 실제 은행장의 부인인 이리스가 아니라 은행장의 내연녀임을 알게되며 자신이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들에게 복수를 결심한다.
자작극이라는 설정은 좋긴 한데,,, 스릴은?
처음에 영화가 진행될 때 아내가 납치되는 것이 자작극임을 밝히고 들어가서 굉장히 스릴 넘치겠다는 기대감이 생겼다. 이 자작극이 어떻게 끝이 날지, 또 자작극을 해서라도 얼마나 남편에게서 벗어나고 싶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하지만 굉장히 지루했다. 납치 과정을 추적하고 자작극의 이유를 찾아가야 하는데 굉장히 부산스럽다. 납치와 자작극이라는 서사 아래 너무나도 자질구레한 각 캐릭터별 서사가 갑자기 군데군데 들어와서 몰입에 굉장히 방해가 됐다.
납치된 이리스를 찾는 과정에서 동료 경찰들이 서로 원나잇한 이야기하며 비서의 맥락에서 벗어내 대사하며 부분 부분의 요소들이 전체 서사에서 너무 튀어서 도대체 저 이야기를 왜 하는 걸까? 하는 감정이 들었다.
프랑스 영화는 이런 것일까?
프랑스 영화를 간혹가다가 보는 편이기도 하고, 또 그렇게 챙겨보는 스타일은 아니라서 영화 《이리스: 사라진 그녀》를 보고 일반화한 것일 수도 있지만 내가 본 프랑스 영화 작품들은 대체로 배우들의 감정이 굉장히 절제된 연기를 선보이고 있었다.영화 《이리스: 사라진 그녀》에서 부인이 납치되었다는 것 역시 남편과 내연녀의 자작극이었지만 그래도 어쨌든 비서도 있고 경찰도 있으니 납치를 당한 피해자로서의 감정 연기를 해야되는데 나는 무슨 버스 놓쳐서 지각한 사람이 ‘아,,, 안타깝다’하는 식의 감정으로 밖에 다가오지 않아서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주로 보는 한국영화나 영국 미국 영화의 경우에는 인물의 표정 변화나 억양이 드라마틱하게 변해서 오히려 과장이 좀 심하다는 느낌이 드는 편인데 영화 《이리스: 사라진 그녀》 에서는 어쩜 저렇게도 절제를 할까?하는 생각이 들드보니 영화의 스릴을 크게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반전을 조금 더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부인의 자작극인 줄 알았지만 납치범 막스가 알고 있던 부인은 은행장의 부인 이리스가 아닌 내연녀였다. 은행장과 내연녀가 자신을 이용한 자작극이라는 것을 막스가 알게 되는 장면이 이 작품의 흐름이 크게 변화하는 지점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밖에 표현하지 못했을까? 퇴폐적인 클럽에서 죽은 줄 알았던 내연녀가 춤추고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 반전의 요소를 줄 수 있는 방법이 굉장히 많았을텐데 하다 못해 청각 효과라도 조금 넣어주지,,, 솔직히 처음에는 몰랐다. 인식 자체가 되지 않았었다.
배우들의 연기도 절제되어 있는 상태에서 이것이 반전이다~하고 알려주는 장치도 따로 마련이 되어 있지 않고, 온전히 스토리 전개를 통해 파악을 해야되는 상황에서 그렇다고 그 스토리가 완벽하게 자작극에 맞춰진게 아니라 쓸데없는 캐릭터들의 TMI가 널러있는 상황이다보니 반전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아 아쉬웠다.
절제된 감정선의 프랑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모르겠지만 스펙타클에 익숙해진 나에게는 그닥 좋지 않았던 영화 《이리스: 사라진 그녀》. 프랑스 영화는 아무래도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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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게 있어 / 月老, 2021
2012년에 개봉한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2018년 <몬몬몬 몬스터>까지 작품들의 텀은 길어도, 완성도를 생각하면 납득하게 만드는 "구파도"감독이 신작을 가지고 왔습니다.
앞서 6년이었던 텀을 이번 영화에서도 그대로 가져왔지만, 그 사이에 "각본"에 참여한 작품들도 있어 마냥 작업을 안한 건 아닙니다.
그저, 연출까지 도맡는 그의 온전한 작품을 기다려온 팬으로서 이번 <만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게 있어>에 거는 기대감은 컸습니다. - 그도 그럴 것이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의 개봉에 앞서 '대만 박스오피스 3주 연속 1위'를 하는 등의 반응이 나쁘지 않았는데요.
그렇게, 보게 된 이번 작품은 어떠했는지? - 영화 <만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게 있어>의 감상을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잠시, 비를 피하려던 남자는 벼락을 맞고 그만 죽고 맙니다.
이내 자신이 지옥에 떨어진 것을 알고서, 저승사자는 자신의 일을 도와주면 "인간"으로 환생을 약속하는데요.
그렇게, 몇 가지 시험을 통과한 남자는 사람들의 인연을 맺어주는 "월하노인"의 일을 하던 가운데 한 여자를 보고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그리고 남자는 잊고 있던 생전의 기억들을 떠올리게 되는데...만년이 지나도 재밌을 영화가...?
1. 성공적인 큰 그림 스케치
앞서 영화 <만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게 있어>에 기대치는 컸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작품의 감독과 각본을 맡은 "구파도"감독의 신작이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의 "가진동"과 함께 했으니 그만한 "로맨스"도 나올 거라는 기대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줄거리에서도 보듯이 저를 비롯한 많은 관객들의 기대치에 부합되는 장면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점에서 영화 <만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게 있어>의 초반 전개는 만족스러웠다고 생각합니다.정신없는 건 여전하네?
줄거리에서 "지옥"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듯이 '사후세계"라는 판타지를 적용한 작품이라 영화는 그 어느 때보다 설명이 중요한 작품입니다. - 추후 이야기의 개연성을 갖추기 위해서라도 말이죠.
문제는 설명만 한다면, 이야기가 늘어지거나 지루해질 수 있어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에 고민을 했을 겁니다.
그래서, 영화는 애니메이션과 함께 신나는 음악, 그리고 교차편집까지 속도감 있게 보여줘 이를 타개하는데요.
정신이 없다면, 한없이 어지럽지만 늘어지거나 지루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 소기의 목적은 해냈다고 생각합니다.2. 이것도 보여주고 싶고, 저것도 보여주고 싶고
이렇게, 세계관을 소개하는데 마친 해당 작품은 저를 비롯한 관객들이 기대했고 간절히 원했던 "로맨스"를 꺼내듭니다.
그렇게, 캐릭터들은 울지만 정작 관객들은 덤덤한데요.
이런 이유에는 앞서, 번잡하게 뻗혀진 이야기와 이들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방식에도 있습니다.
전작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만 보더라도, 이들에게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것도 있지만 쌓아가는 이야기의 설명 순서도 있었거든요.보여줄게 많구나?
영화 <만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게 있어>의 "사후세계"를 살펴보면, 남자 "샤오륜"과 그의 파트너 "핑키"를 먼저,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들이 맡는 "월하노인"외에도 "염라"와 그를 보좌하는 부하, 그리고 "악귀"와 같은 여러 군상들을 보여줘 이야기의 스케일을 가늠케 합니다.
그렇기에 해당 작품의 중심을 잡아줘야 하는 "샤오륜"과 연인 "샤오미"의 이야기는 설명은커녕 꺼내보기도 힘든데요.
결국, 기억이 떠오르고 나서야 뒤늦게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이마저도 이들에게 몰입하기는 어려웠습니다.3. 벌려두기만 하면 뭐 하나?
영화는 "샤오륜"과 "샤오미"의 이야기를 "플래시백"으로 말하지만, 이게 몰입하기가 어렵습니다.
똑같은 시점과 시간으로 이야기를 진행한다면 몰라도, <만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게 있어>의 이 방식은 뭔가 그때마다 넣어주는 "땜질"같은 느낌이거든요.
그렇다 보니 이를 받아들이는 관객들의 입장에서는 "애절함"보다는 "없는 게 없네"와 같은 만물상 같은 느낌으로 이야기의 긴장감을 전혀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이죠.
여기에 자유 갈래로 뻗어나간 이야기도 제대로 활용되지 못한 느낌도 강합니다.앞서 설정은 뭣 때문에 말씀하셨나요?
이야기에서 "샤오륜"과 그의 파트너 "핑키"가 착용한 팔찌는 인연을 맺어주는 실을 만드는 능력이 주로 나오지만, 이는 환생을 결정짓는 도구이기도 합니다.
남아있는 하얀 구슬로 "환생 대상"을 정하기도 하지만, 전부 까매진다면 곧장 지옥으로 떨어져 환생의 기회조차 박탈됩니다.
어찌 보면, 이야기의 후반부를 쫀득쫀득하게 만들 장치로 예상되나 <만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게 있어>는 이를 전혀 활용하지 않습니다.
이보다 "악귀"의 행패를 "윤회"를 통해서 진정시키는 이야기로 바꿔 후반부를 보여줍니다.4. 신령님, 진정하세요.
전생애에 걸쳐 쌓인 업보, 그리고 은혜 등으로 이야기를 선보이는데 이마저도 앞서 언급한 "샤오륜"과 "샤오미"처럼 "플래시백"으로 말합니다.
지적되는 문제가 새로운 이야기에도 동어반복적으로 되감아지니 128분이라는 긴 러닝 타임임에도 그 부족함을 지울 수가 없으며, 피곤하기까지 하네요.
많은 것들을 보여주려는 그 마음은 이해하겠지만, 저희가 보고 싶었던 건 절절한 로맨스뿐인 나무꾼의 심경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쿠키 영상 1개가 있습니다.
본 원고는 씨네랩으로부터 초첨받아 참석해 주관적인 평가를 바탕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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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오브 인터레스트] 끝장리뷰 | 벽, 담벼락, 담장(wall) 상징 | 결말해석 | 헨젤과 그레텔 분석 | 사운드와 이미지, 옆모습(측면 숏), 열화상카메라 의미
[존 오브 인터레스트](2024)에 대한 헐거운 리뷰
Chapter 1 벽, 담벼락(wall), 결말해석
Chapter 2 사운드와 이미지, 옆모습(측면 숏), 헨젤과 그레텔
00:00 존오브인터레스트
01:07 닮은 영화들
03:01 wall
06:43 결말해석
07:50 사운드, 이미지, 옆모습
08:59 핸젤과 그레텔
10:52 별점 및 한 줄 평
11:15 다음 리뷰 예고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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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실 : 인연의 시작> 런칭 예고편
열두 살에 만난 첫사랑 '렌'과 '아오이'
한눈에 서로의 상처를 알아보고 보듬어주며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된다.
함께 있어 즐거웠던 시간도 잠시 '아오이' 가족이 쫓기듯 떠나면서 헤어지고 만다.
"운명의 실"이 있다고 생각해"
'아오이'가 준 소원팔찌를 8년 동안 간직한 '렌'
어느 날 소원팔찌가 끊어지고 두 사람은 운명처럼 재회한다.
그 후 우연한 만남과 헤어짐이 반복되지만 그때마다 서로의 곁에 이미 다른 사람이 있어 엇갈리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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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하우스 오브 스네일스> 메인 예고편
소설 작가 안토니오는 조용히 고독을 즐기면서 다음 소설에 대한 영감을 얻으려 말라가 산맥의 한 작은 마을로 향한다. 마을에 들어서면서 처음 느낀 산뜻하고 따듯한 분위기와 달리 마을 사람들은 어쩐지 경계심이 가득하다. 그런 그들의 이야기를 글로 써내려 가던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무언가에 홀린 듯 이상한 현상들을 겪는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마을 사람들이 충격적인 전설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안토니오는 곧 자신을 둘러싼 현실이 전설보다 더 잔혹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