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2025-01-22 07:36:55
〈타인의 삶〉에서 이어지는 한 방울의 눈물
영화 〈카라바조의 그림자〉

〈타인의 삶〉(2007)에서, 동독의 비밀경찰 비즐러는 극작가와 배우 커플을 도청하며 감시하다 어느새 그들의 예술에 감화되어 남몰래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두 사람이 위기에서 탈출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 영화에서, 비즐러가 흘린 한 방울의 눈물은 시대의 지배적 담론과 그에 부착된 권력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결코 인간 내면을 완전히 잠식할 수는 없다는 점을 보여주는 가장 결정적인 근거로 제시된다. 비즐러가 반체제 인사를 감시하는, 사상이 투철한 인물이라는 점은 그 눈물 한 방울의 가치를 더욱 극화한다. 어둡고 칙칙한 공간에서 도청하던 그가 홀로 전율하며 흐르는 한 방울의 눈물은 체제에 속한 사람의 내면에조차 잠식당하지 않은 공간이 있음을 폭로하고, 우리가 ‘인간다움’이라 부를 만한 것이 바로 그 공간에서 시작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카라바조의 그림자〉는 비즐러의 눈물을 16세기의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조에게 헌사한다. 교황의 명령을 받은 한 남자가 있다. ‘그림자’로 불리는 그는 카라바조가 일으킨 파문을 객관적으로 조사할 임무를 명받는다. 난폭한 성격의 카라바조는 살인죄를 저지르고 도피하다 사면을 기다리는 중이다. 한편에서는 신성을 모독하고 실정법을 위반한 카라바조를 빨리 처형하라는 요구가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카라바조의 재능을 알아본 몇몇 귀족, 심지어 추기경까지 교황에게 카라바조의 사면을 청하고 있다. 그림자는 이 상황에서 카라바조 사건을 면밀히 추적한다. ‘객관적’ 진실에 가 닿가 위해서다.


카라바조는 고통받는 자들에게서 예술을 길어왔다. 수감자, 가난하고 병든 자, 창녀를 종교화의 모델로 썼다. 그의 모델이 된 ‘비천한’ 사람들은 자신도 신성할 수 있는 존재라는 가능성에 고무되고 여기에 자부심을 느낀다. 동시에 카라바조는 난폭하고 ‘저속’하다. 향락에 젖은 파티를 일삼고 소년과 남색을 벌인다는 혐의도 받는다. 반대자들은 카라바조를 ‘악마’라고 부르고, 그를 지지하는 추기경이 ‘타락’했다며 비난한다.
‘객관적’ 조사를 명받기는 했으나, 그림자는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인물이다. 가톨릭교회의 권위가 지엄해야 한다고 믿고, 도덕적 정결이 그 권위를 지탱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짐작 가능하듯, 그림자는 카라바조의 삶과 예술에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메스꺼움과 매혹을 동시에 느낀다. 메스꺼움은 카라바조가 예술로 묶어낸 ‘빈자들의 교회’라는 집단 감각이 로마 교회를 위협할지 모른다는 본능적 위기감에서 나온다. 카라바조가 기존의 미술 학교, 아카데미 소속 인물과 그들의 화풍에 반기를 드는 것도 카라바조의 반체제성에 대한 그림자의 의혹을 돋운다. 반면 매혹은 자기 신념과 반대될지라도 도저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예술적 재능과 그 재능이 그림자의 마음을 파고드는 과정에서 나온다.
모든 조사를 마친 그림자는 카라바조와 대면한 최후의 장면에서, 자신의 신념과 마음을 저울질한 후 나름의 결단을 내리고, 이후 눈물 한 방울을 흘린다. 후회의 눈물일까? 감동의 눈물일까? 그림자는 비즐러와 같은 것을 느꼈으나 다른 선택을 내렸다. 이렇게 예술과 체제, 권력과 인간의 딜레마에 관한 그럴듯한 드라마가 완성된다.

다른 한편, 카라바조가 예술가로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건 21세기가 아니라 16세기에 태어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가 예술가의 인품, 생활을 작품성과 깊이 연계하는 오늘날을 살았다면 어땠을까? 그를 둘러싼 스캔들은 더 뜨겁고 격렬했거나 아니면 애초에 예술가로서 자격을 상실해 점화조차 되지 않았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느낀 장면은 대개 난폭한 난동꾼인 그가 밑바닥 사람들과 애정 어린 관계를 맺고, 그들에게 깃든 성령을 포착한 후, 모델로 세우기까지의 몇몇 과정에 대한 묘사였다. 바로 이런 과정이 있었기에 카라바조의 작품이 여전히 빛나는 것일 터다. 그래서 더더욱 헷갈렸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과거의 인물을 재단하고 평가하는 일은 지양되어야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에 그와 같은 인물이 다시 등장한다면 어디에 초점을 두고 그를 평가할 것인지에 관해서 말이다. 수 세기 전 그림자가 마주한 고민은 다른 방식으로 계승되어 우리에게 나름의 답변을 요구하고 있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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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주>, 지난한 합일의 과정
<동주>, 지난한 합일의 과정
윤동주가 원래 계획했던 첫 시집의 제목은 ‘병원’이었다. 실제 윤동주의 작품 제목이기도 한 이 시에서 화자는 병원 뒤뜰에 누운 한 여자의 슬픔에 다가가기 위해 그녀가 누웠던 자리에 똑같이 누워본다. 두 명의 인물과 하나의 자리, 그리고 동일한 행위. 이는 독립된 두 인물이 단일한 상태와 감정으로 합일되는 초월적인 과정을 의미한다. 윤동주가 보기에 인간이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는 최선의 길은 사력을 다해 타인의 마음에 가닿으려 노력하는 것이다.
<동주>는 언뜻 보기에 모든 영역에서 대척점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두 인물―윤동주와 송몽규의 전기를 대조적으로 다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두 인물이 하나로 포개지는 합일의 과정을 드러내는 쪽에 가깝다. 이러한 방식은 인물 설정에만 국한되지 않고 영화 전반의 형식과 결부되어 나타난다. 예컨대, 내레이션과 이미지가 결합하는 방식, 그리고 현재와 과거가 교차하는 화법은 두 가지 개별적 요소가 하나의 형식으로 모이는 양태를 띤다. 말하자면 영화가, <병원>에서 여자의 자리에 다가가 그녀와 하나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윤동주 특유의 공감의 방식에 철저히 복무하도록 구조화되어 있는 것이다. 요컨대 <동주>는 윤동주의 인간관계론을 영화라는 예술 매체를 통해 직접 이행하려는 시도다.
내레이션과 플래시백의 쓸모
윤동주와 송몽규에게 닥친 가장 큰 시련 중 하나는 창씨개명을 하는 것이다. 윤동주가 자신의 이름이 ‘히라누마 도주’로 바뀌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그에 대한 참담한 심경을 담은 시 ‘참회록’이 내레이션으로 흘러나온다. 이때 흥미로운 것은 윤동주가 자기 내면을 반성하며 깊은 부끄러움을 고백하는 사이 화면에서는 윤동주와 같은 지분으로 송몽규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두 인물이 일본으로 가는 길을 담고 있는 참회록 장면에서 화자는 윤동주임에도 불구하고 송몽규는 그의 곁에서 떨어질 줄을 모른다. 심지어 송몽규에게 윤동주와 똑같이 단독 쇼트가 배분되기까지 한다. 이는 윤동주가 자신의 치욕스러운 내면뿐 아니라 송몽규의 혼곤한 내면까지 대리적으로 전달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영화적 전술의 극단은 동주가 자신의 첫 번째 시집의 일본어 번역을 마쳤다는 쿠미의 전화를 받는 사이 송몽규가 혁명을 위해 친구들과 회의를 하러 집을 떠나는 장면에서 벌어진다. 이때 윤동주는 송몽규의 부름을 받지 못해 홀로 집에 남게 되고, 그 심란한 마음을 대변하듯 ‘쉽게 쓰여진 시’를 쓰기 시작한다. 내레이션으로 시가 낭독되는 사이, 화면에서는 시를 쓰는 윤동주의 모습과 혁명을 도모하는 송몽규의 모습이 교차된다. 조국을 사랑하는 두 사람의 마음을 동일시하는 작업이 이뤄지는 것이다. 여기에 또 한 번의 합일의 과정이 더해진다. 송몽규가 일본 경찰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어 윤동주에게 같이 떠나자고 제안할 때, 윤동주는 쿠미가 번역한 시집을 받기 위해 그 제안을 한시적으로 거절한다. 그때 쓸쓸히 길거리를 걷다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는 송몽규의 모습과 윤동주의 처절한 자기 고백에 해당하는 ‘자화상’의 낭독이 아름답게 결부된다. 이때 내레이션으로 들려오는 자화상의 주체는 오히려 윤동주보다 더 많은 시간 화면에 등장하는 송몽규처럼 보인다. 이 대목부터 윤동주와 송몽규는 더 이상 구분하기 어려운 하나의 인물처럼 비친다.
윤동주와 송몽규 사이의 동일시 작업은 과거 회상의 서사가 현재의 신문 장면으로 모일 때 비로소 완성된다. 여기서 윤동주와 송몽규는 ‘병원’에서 화자와 여자의 관계처럼 서로 같은 공간, 같은 위치에서 동일한 인물에게 신문을 받는 처지에 놓인다. 그러니까 영화는 그 지난한 합일의 과정을 통과하며 마침내 신문 장면에 이르러 두 인물을 하나의 인물로 포개어 놓는 것이다. 윤동주의 저항시를 사랑한 송몽규와 일제에 맞선 송몽규의 용맹한 행동력을 존경한 윤동주의 마음은 이 장면에서 확실히 겹쳐진다. 그렇게 두 인물은 정반대의 맥락에서 조국을 걱정하는 애국자라는 동일한 정체성으로 수렴된다. 어쩌면 둘은 애초에 하나의 인물에 잠재된 두 가지 자아를 표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본다면 윤동주의 것으로 독점된 듯 보였던 과거 회상 장면들이 실제 윤동주의 것인지 모호해진다. 이 모호함은 영화 전반에 걸친 과거 회상 장면들이 특정인의 시점으로 전개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욱 강화된다. 여기에는 윤동주의 경험과 그가 경험하지 못한 것이 혼재되어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윤동주만의 경험과 송몽규만의 경험이 뒤섞여 있다. 이를 두고 윤동주가 송몽규에 대한 부재한 기억을 상상을 통해 보충했다고 볼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이 의문은 위에 언급한 바 있는, 같은 공간에서 두 인물이 신문 당하는 현재 장면에 이르러 해소된다. 영화는 윤동주의 기억처럼 보였던 과거 회상 장면이 비단 그만의 것이 아니라 같은 곳에서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송몽규의 것이기도 하다는 점을 넌지시 암시한다. 그러니까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서사 구조는 윤동주와 송몽규 각자의 기억을 하나의 유연한 서사로 통합시키며 그들의 합일을 기리는 영화적 장치인 셈이다. 한마디로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 윤동주와 송몽규는 같은 자리에서 같은 심정으로 같은 기억을 떠올리며 일제에 저항하는 유사 동일인이라고.
합일의 불가능성
‘병원’에서 윤동주는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것을 완벽하게 성취했는지에 대해선 쓰지 않았다. 과연 온전한 합일이란 가능한 걸까. 사실상 하나의 인물로 비치는 윤동주와 송몽규는 신문 장면의 막바지에 결정적인 차이를 남긴다. 둘은 독립운동에 개입한 사실을 인정하라는 일본 경찰의 요구를 두고 해당 서류에 서명해야 하는 처지에 직면한다. 이때 윤동주는 행동하는 독립운동가가 아니라 시인이 되고자 한 과거가 부끄러워 서명하지 않고, 송몽규는 독립 투쟁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지 못한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서류에 서명한다. 상영 시간의 대부분을 두 인물 사이의 합일 과정을 묘사하는 데 힘썼던 영화는 이 대목에 이르러 완벽한 합일이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다만, 이 불가능이 그저 합일의 비극적 해체에 머물지 않고 유독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타인의 고통에 온전히 공감할 수 없는 인간 본연의 무력감 앞에서 그 고통에 가닿기 위해 영화가 최선의 노력을 해왔기 때문이다. 요컨대 <동주>의 아름다움은 단순히 흑백 화면의 정교함과 절절한 시의 낭독, 배우들의 호연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합일의 불가능을 알고서도 기어이 그것에 도달하고자 했던 영화의 숭고함에서 비롯된다. <동주>는 아름다운 실패를 통해 인간 정신의 긍정적 가치를 역설하는 숭고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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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수유천이 도망친 레베카에게 뭐라고 하니
<그 자연>에서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은 스크린 뒤쪽의 힘이다. 이 영화에서 동화의 아버지와 오령의 어머니는 대화 속에서 언급되기만 할 뿐 등장하지 않는다. 동화는 아버지로부터 독립해 살고 있으며 그로부터 어떠한 도움도 받기 싫어한다. 동화가 화를 내는 부분도 능희가 ‘뒤에 아버지가 있다’는 말을 반복해서 할 때이다. 오령의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다. 하지만 오령은 동화와 달리 공간을 통해 어머니를 계속해서 기억하고자 한다. 그는 집 뒤편에 어머니의 무덤도 만들어두었고 직접 가꾼 흙길을 걸으며 매일 어머니 생각을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특히 오령의 어머니는 영화 전반에 걸쳐 흥미로운 방식으로 영향을 끼치는데, 그 방식은 히치콕의 <레베카>나 PTA의 <팬텀 스레드>와 같은 영화들을 연상시킨다. 말하자면 오령의 집은 죽은 어머니의 기운이 서려있는 공간이다. 그런데 이러한 <레베카>적 설정을 떠올렸을 때 이 영화에서 어머니의 힘이 주인공에게 작용되는 방식은 조금 특이하다. <레베카>적 설정이 적용된 영화들에서 통상적인 경우라면 주인공은 집에 서린 죽은 어머니의 기운에 불안함을 느낄 것이지만, 이 영화에서 동화는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동화는 어머니에 대한 오령의 효심에 감복하며 무덤에 절을 올리기까지 한다. 대신 그 불안은 집안의 다른 인물들로부터 발현된다. 우선 능희. 영화 초반 준희가 쭈뼛거리며 제공하는 그녀에 대한 설명, 멀리서 들리는 가야금 소리와 같은 정보들은 어딘가 께름칙한 분위기를 풍긴다. 능희가 등장한 뒤에도 그녀가 등장하는 장면에서의 대화들은 언젠가 터질 듯 위태롭고, 결국 실제로 능희는 후반부 저녁 식사 장면에서 갈등을 촉발하기도 하다. 다음으로, 영화의 첫 숏에 등장하는 선희는 이후 한동안 등장하지 않다가 저녁 식사 장면이 되어서야 비로소 다시 얼굴을 비추는 인물이다. 그동안 오령은 전화를 통해 꾸준히 그녀의 복귀를 예고하는데, 말하자면 어머니의 복귀 불가능함을 선희가 대신 채우게끔 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사실 선희로부터 야기되는 불안은 더 은밀하다. 동화를 자극하는 말을 뱉으면서도 그것은 악의가 아니라 어느 정도는 순수한 호기심에서 기인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능희와 달리, 저녁 술자리에서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지만 이후 오령과의 대화를 통해 동화에 대한 부정적인 말을 직접적으로 뱉는 인물은 바로 선희이다. <레베카>의 집에 없는 어머니로부터 오는 불안은 이 영화에서 집에 상주하나 늦게 도착하곤 하는 다른 여자들로부터의 불안으로 분산, 변주되는 양상이다. 홍상수의 자연에 대한 매혹은 하루이틀 일이 아니다. 홍상수가 자연의 아득함에 매혹되는 순간들은 이전에 비해 소박해지고 감성적으로 변한 2020년대 영화에서는 말할 것도 없이 빈번하게 등장하고(특히 영화의 마지막에서), 사실 2008년작인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서도 마지막 장면을 주인공이 아득히 바라보는 바다를 비추며 마무리했다(<도망친 여자>의 마지막에서 감희가 보는 영화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마지막 장면이다). 이번 영화에서는 제목에서부터 자연이라는 단어를 전면에 언급했다. 제목부터 범상치 않은 인상을 풍기는 이 영화에서는 아니나 다를까 주인공이 자연에 매혹되는 순간들이 자주 등장하곤 한다. 그런데 이 영화가 자연을 담아내는 데에 있어서 특이한 점은 자연에 매혹되는 주체가 영화 자체가 아니라 철저하게 주인공 동화라는 점이다. 영화는 종종 아웃포커싱된 저화질의 화면을 가득 채우는 밝은 녹음, 보여주지 않을 줄 알았던 붉게 저무는 노을까지 카메라에 정말 아름답게 담아내지만 그 자연을 철저하게 매혹의 피사체가 아니라 배경으로서만 다룬다(이를테면 <인트로덕션>과 <물안에서>의 마지막 장면과 같은 순간이 이 영화에는 없다. 또 이 영화에서는 나무나 풀, 혹은 풍경에 줌인을 가하는 순간이 없다). 그런데 이 자연은 단지 배경으로서만 치부하기엔 비중이 꽤 커서, 혹은 그 자연에 대한 동화의 반응이 너무나도 커서 종종 장면 전체를 장악하곤 한다. 배경의 위치에 있으나 그 힘이 튀어나와 스크린을 지배하는 이 영화의 자연은 자연스럽게 지금 이곳에 없으나 공간과 상황에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대상들, 즉 오령의 어머니와 동화의 아버지의 존재를 환기한다. 그렇다면 <그 자연>의 뒤쪽에서 감지되는 불안의 근원은 무엇인가? 위에서 이 영화는 스크린 뒤쪽에서 작용하는 힘의 영화라고 말한 바 있다. 이 힘의 근원을 프레임 안의 후경이나 서사의 뒤편을 넘어서 말 그대로 스크린 너머에서 찾아보자면, 홍상수의 다른 영화들, 그중 특히 <도망친 여자>를 떠올려 볼 수 있다. <그 자연>은 산을 배경으로 찍었다. 평화롭고 목가적인 이 산에서 오령은 산길을 가꾸고 닭도 키운다. 상상력을 조금 발휘해보면 이 영화는 마치 창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도망친 여자>의 저편에서 일어난 영화인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 영화는 극중에서도, 엔딩크레딧에서도 경기도 여주를 배경으로 한 것으로 나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는 <도망친 여자>의 각 챕터가 시작할 때 느린 줌아웃으로 비춰지는 창밖의 산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만 같다. 그리고 서울 북촌과 여주 산속에서 벌어지는 두 이야기는 닭으로 매개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 서울 북촌에서 창문 너머 여주 산속으로까지 힘을 뻗치고 있는 존재는 무엇인가? <도망친 여자>에는 있고 <그 자연>에는 없는 것, 바로 김민희다. 김민희는 서울 북촌의 어딘가를 떠돌고 있으므로 여주 산속에 있을 수 없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부터 이번 영화까지 세면 홍상수는 총 17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그중 12편의 영화에 김민희가 주연으로든 조연으로든 등장한다. 김민희가 영화에 어떤 방식으로든 등장하지 않은 영화는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 <당신얼굴 앞에서>, <탑>, <여행자의 필요>, <그 자연이 네게 뭐라고 하니>까지 총 5편으로 생각보다 꽤 있는 편이고, 그러므로 김민희 없는 홍상수 영화를 보는 것이 사실 그리 낯선 일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도 <그 자연>에서는 유독 김민희의 부재가 크게 느껴진다. 이 영화에서 김민희의 부재가 드러나는 지점들은 특수하고도 흥미로운데, 우선 첫 번째로는 다른 영화들과 달리 이 영화에서는 김민희가 있었더라면 맡았을 배역이 꽤 명확하게 보인다는 점이다. 이 영화에서 박미소가 연기한 능희는 평소 홍상수 영화에서 김민희가 맡던 역할의 이미지를 상기시킨다. 시종일관 은은한 불안감을 풍기는 이 능희라는 인물은 술자리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히스테리와 약간의 표독스러움으로 영화 전체에 지속되던 평화를 깨는 인물이다. <풀잎들>이나 <밤의 해변에서 혼자>같은 영화들에서 김민희가 연기한 인물을 떠올려보면 <그 자연>에서 이 점은 꽤 분명하게 보인다. 다음으로 김민희의 부재가 드러나는 지점은 결말인데, 결말은 이 영화에서 가장 특이한 부분이기도 하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그 자연’은 동화에게 상처만 남길 뿐 뭐라고도 하지 않는다. 고장나버린 낡은 차 안에서 쓸쓸히 담배연기를 뿜는 동화의 모습으로 영화는 끝난다. 자의식에 가득찬 채 낡은 차를 마냥 찬미하는 동화의 태도는 말하자면 자연에 대한 태도와 동일시되므로 거창해보이는 이 영화의 제목은 사실 자조 섞인 맥거핀인 것이다. 위에서 언급했듯 <인트로덕션>, <물안에서> 같은 영화들의 결말과는 확실히 이질적이다. 이 점에서 <그 자연>은 최근작인 <수유천>과 궤를 같이 한다. <수유천>의 마지막에서 전임은 수유천의 발원을 찾겠다며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 프레임에서 사라지지만 곧이어 환한 미소를 띤 채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며 프레임 안으로 복귀한다. 그리고 전임의, 혹은 김민희의 그 해맑은 미소에서 일시정지하며 영화는 끝난다. <그 자연>의 결말을 <수유천>의 결말과 비교해보면 이 영화에 감도는 불안감의 근원이 사실은 후경으로서의 자연, 혹은 극중에서 부재한 인물을 넘어 영화 자체의 바깥에 있다는 것과 그것의 정체가 김민희의 부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수유천>의 개봉 이후 홍상수 영화 속 김민희의 존재에 대해서 흥미로운 담론들이 오갔다. 그의 영화에서 김민희는 점점 정물화되어가고 있고 <수유천>은 그 흐름에서 정점을 찍었다는 것이다. <그 자연>은 홍상수 필모그래피 안에서 <도망친 여자>, <수유천>과 이을 수 있는데, 자연에 대한 태도와 김민희의 존재 여부라는 두 축을 세 영화를 동시에 관통하며 또 각 영화들이 갈라지는 지점으로 삼아볼 수 있다. <도망친 여자>는 자연을 긍정하면서 영화 표면에 항상 존재하는 김민희에 의해 작동되었고, <수유천>은 자연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면서도 정물로서의 김민희는 무한 긍정했다. 이번 <그 자연>은 자연에 대해서도 회의적이고 김민희마저도 없는 상태를 찍은 것이다. 그리고 그 상태는 텅 빈 자연, 분산된 불안, 한숨 쉬는 남자라는 증상으로 발현된다. 그래서 <도망친 여자>와 <수유천> 이후 <그 자연>은 정물화에서 블랙코미디로의 회귀, 몇몇 부분은 탈속에서 세속으로의 회귀이고, 역설적으로 김민희 없는 김민희에 대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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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과 흑인의 성장을 그리다
작년, 대학원 수업을 들으며 알게된 영화 <컬러 퍼플>. 여성해방운동과 흑인해방운동이 펼쳐지고 있었던 1980년대 후반 만들어진 작품에서 과연 이들의 운동을 어떻게 그려나갈지 기대가 됐던 작품이었다.
영화 <컬러퍼플> 시놉시스천성적으로 바보스러우리만치 착하기만 하고 오직 복종 밖에는 할 줄 모르는 셀리(후피 골드버그 분)는 14살 때 의붓 아버지에게 몸을 빼앗겨 아이를 둘이나 낳는다. 그러나 의붓 아버지는 그 아이들을 낳자마자 새뮤얼 목사와 코린 부부에게 갖다 줘 버린다. 셀리는 여전히 타인의 삶과 같은 삶을 살아가고 오직 낙이 있다면 두 살 아래인 여동생 네티와 서로 의지하며 다정하게 살아가는 것뿐이다. 그러나 의붓아버지는 이제 어린 네티마저 건드리려 하고, 그러는 중에 40대 초반의 미스터라는 남자가 네티를 자기 아내로 줄 것을 요청하나 의붓 아버지는 네티는 너무 어리다며 대신 셀리를 데려가라고 한다. 이에 미스터는 어린 셀리를 아내로 맞아 데려간다.
그러나 셀리의 삶은 미스터의 전처 쇼생 아이들 등살과 미스터의 난폭한 성격때문에 노예보다 더 참혹한 생활을 하지만 착한 성품으로 오히려 모든 사람들을 따뜻하게 감싸 안아 준다. 그러던 어느날 네티는 의붓 아버지의 손을 피해 셀리네 집에 와서 살며 학교도 다니고 배운 걸 셀리에게도 가르쳐 주며 행복하게 살아가나 네티에게 흑심을 품고 있던 미스터에게 겁탈 당할 뻔했다가 위기를 모변하지만 화가 난 미스터에게 쫓겨나고 그 후 미스터는 네티한테서 온 셀리의 모든 편지를 다 압수해 버린다.
미스터는 어릴 때부터 서로 연모하던 목사의 딸이자 떠돌이 가수 셕이 공연을 왔다가 병으로 쓰러지자 집으로 데리고 와서 간호해 주며 함께 잠자리도 같이하나 셀리는 오히려 그러한 셕을 사랑으로 따뜻이 보살펴 준다. 이에 감동한 셕은 셀리에게 새로운 삶에 대한 눈을 뜨게 만들어 주고 미스터가 없는 틈을 타 집안을 뒤져 네티한테서 온 편지를 찾아낸다. 그 편지에서 셀리는 자기 아이들이 다 살아 있고 네티와 함께 아프리카 선교지에서 자라고 있으며 곧 미국으로 오겠다는 내용을 읽고 그 모든 소식을 수십년간이나 차단한 미스터에 대한 증오는 분노로 바뀌어 순하디 순하던 성품이 적극적으로 바뀌어 셕 부부와 함께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난다.
셀리가 집을 나가고 오랜 세월 혼자 사는 데 지친 미스터는 차츰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셕은 자신의 방탕한 생활을 미워했던 목사인 아버지께 돌아가 눈물겨운 화해를 한다. 그리고 마침내 미스터의 주선으로 아프리카에 가 있던 네티와 셀리의 아들 아담 그리고 딸 올리비아는 미국으로 와 수십년만에 눈물겨운 가족 상봉을 한다.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컬러 퍼플>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셀리의 주체성 회복
영화 <컬러 퍼플>은 정말 간단히 얘기를 해보자면 셀리가 주체성을 회복해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물론, 그 과정이 스스로가 아닌 셀리보다 조금 더 주체적이라고 볼 수 있는 여성 캐릭터들을 통해서 이뤄진다. 그래도 좋았던 부분은 셀리가 착하디 착하고 가부장제를 온몸으로 체화했을 때에는 다른 여성캐릭터 네티나 셕과 함께 등장할 때 같이 등장한다기 보다는 그림자로 등장한다는 설정이 인상적이었다.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지 않고 그저 사람의 형성을 띤 그림자로 셀리를 표현함으로써 아직은 개성을 표현하지 않은 여성을 잘 표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점차 개성을 드러내고 주체성을 회복하면서 온전한 인물로 표현된다.
너무나도 안타까웠던 소피아
다양한 캐릭터들이 등장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안타깝게 느껴지고 시선을 따라갔던 인물은 소피아였다. 미스터에게 당당하게 아들을 내어달라 얘기하는 여장부의 모습이었던 소피아가 시장 아내에게 '이런 젠장'이라는 아주 순하디 순한 욕을 했다는 이유로, 흑인이 백인에게 욕을 했다는 이유로, 결과적으로 감옥을 가게된다. 그 후 8년의 시간 동안 자신을 버리고 시장의 부인 집사로 들어가 노예와 다름 없는 생활을 하게 된다. 그렇게 당당했던 인물이 사회의 벽에 부딪히고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하지만 결말은 왜 그럴까?
시대의 한계가 느껴진 결말이었다. 뭔가 여성들이나 흑인들이 받는 핍박을 잘 보여준 작품이긴 했지만 그 여성이나 흑인들이 자리를 잡고 성장해 나갈 때는 그 개연성이 뚝뚝 떨어지는 느낌이어서 갑자기?? 이런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옷수선 가게를 차린 셀리와 유산상속을 받고 굉장히 자유로운 여성으로 성장하는 갑작스러운 전개에게 개인적으로는 자연스럽지 않게 다가왔던 것 같다.
영화 <컬러 퍼플>은 인종차별과 여성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굉장히 잔잔하게 잘 풀어낸 작품이었다. 시대의 한계 덕분에 아쉬웠던 점은 있었지만 그래도 캐릭터에 감정이입이 잘 됐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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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 고발 영화에서 중립적 자세가 가능한가? 혹은 필요한가
<마이클무어 화씨9/11>
마이클무어 감독의 <화씨 9/11>은 미국 2001년 9월 11일 911테러와 그 당시 미국 행정부인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정권 비판을 담은 내용이다. <화씨 9/11>은 자극적인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정치 이야기로 가득하다. 초반에 영상을 볼 때는 음모론처럼 느껴질 정도로 편파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점점 다큐멘터리가 진행되면서 그가 내세운 이야기들에 공감을 하는 ‘나’를 보게 됐다. 그리고 비단 미국의 상황만이 아닌 우리 나라의 모습도 떠올랐다.
국가라는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이 다큐에서는 국민들이 왜 그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 고민해볼 수 있었다. 국민은 국가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다. 국민들 대표해서 우리 모두 잘 살기 위해서 뽑은 대통령이지만, 국민보다는 자본에 의해 움직이게 되었다. 자본으로 움직이게 된 국가는 테러와 전쟁을 일으킨다. 그로 인해 희생된 사람들은 수없이 많다. 그러나 그들은 명확한 실체를 향해 고민해보지 못한다.
이라크 전쟁에서 자신의 가족을 하루 걸러 장례를 치루면서도 알라신에게 복수해달라고 외칠 수 밖에 없었던 이라크 국민들이 있다. 그리고 빈곤한 마을에서 태어나 군대에 입대하면 더 많은 세계를 경험해 볼수 있다는 말에 입대를 하여 사람들을 죽이고 괴롭히며, 자신 또한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공포에 사로 잡혀 살고 있는 미군이 있다.
그리고 희생당한 사람들의 가족들은 끊임 없는 고통 속에 살아간다. 이 실체를 부시 행정부에 포커스를 맞춘 마이클 무어는 끊임없이 부시의 모습을 보여주며 그의 정권이 잘못 되었다고 말한다.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 전쟁을 일으키고 많은 국민들에게 잘못된 이야기를 하며 전쟁을 일으킨 이유를 우리는 알아야한다.
<김일란, 이혁상 공동정범 >
김일란, 이혁상 감독의 <공동정범>은 용산 참사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참사 후의 이야기를 담았다. 인간의 도덕성, 신뢰, 믿음, 분노 등의 다양한 감정들을 느낄 수 있었고 트라우마를 어떻게 수용하며 살아가는 지에 대한 모습도 확인해볼 수 있다.
용산 참사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모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인생에서 가장 아프고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하며 왜 화재가 났는가? 그리고 왜 그들은 사망했는가에 대한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대화를 시도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쉽게 진실을 판명할 수 없다. 솔직히 진실을 판명할 수 없는 상황이기도 하다. 이미 망루는 사라졌고, 남은 것은 화재 속 어둡고 혼란스러운 상황 속 화재의 불빛 속 기억들로만 조각난 기억을 맞추고 있다. 이것으로는 진실을 규명하긴 어렵다. 그렇기에 그들이 더 고통스러운 것일 수도 있다.
그들이 망루로 향해야만 했던 이유는 남들이 보면 테러범들이자 폭동들이지만 그들은 그것이 자신들의 신념이자 살아남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들이 다른 선택을 했었다면? 이라는 가정은 없다. 철거민들과 그의 연대는 화염병을 모으며 망루를 만들고 그 속에서 버틸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부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보다 없애는 데 초점을 맞췄다.
그들을 물대포를 쏘고 억지로 끄집어 내기 보다는 그들의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들어줬으면 상황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라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정부는 무관용의 원칙으로 망루를 향해 물대포를 쐈으며 그 속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가 일어나고 사망자가 발생하고 살아남은 자들은 공동정범으로 징역형에 처했다.
<두 다큐의 차별성과 공통점>
국가는 국민을 보호하고 이끄는 역할을 하지만, 때로는 특정한 목적을 위해 개인의 신념을 조작하거나 이용하기도 한다. 마이클 무어의 <화씨 9/11>과 김일란·이혁상의 <공동정범>을 통해서 본다면 각기 다른 사회적·정치적 배경 속에서 국가가 개인의 믿음을 조작하고, 때로는 이를 이용하여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과정을 보여 준다. 하지만 이러한 신념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환경과 경험에 따라 변화한다.
두 작품은 미디어와 법을 통해 어떻게 국민을 통제하는 지 보여 준다. <화씨 9/11>에서 마이클 무어는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9·11 테러 이후 미국 국민의 애국심을 자극하고, 이를 이라크 전쟁 정당화에 이용하는 과정을 조명한다. 미디어를 통해 공포를 조성하고, 이를 통해 전쟁에 대한 지지를 끌어내는 방식은 전형적인 국가 권력의 선전 전략이다. 정부는 미디어를 장악하고 애국심을 강조함으로써 국민들이 비판적 사고 없이 국가의 결정을 받아들이도록 유도한다.
반면, <공동정범>은 한국 사회에서 국가가 법과 공권력을 이용하여 국민을 통제하는 방식을 보여 준다. 용산 참사 사건에서 철거민과 연대인들은 강제 퇴거 과정에서 여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하지만 국가 권력은 이 사건을 ‘폭력적인 시위’로 규정하며, 생존자들을 범죄자로 몰아갔다. 이처럼 한국에서는 법과 제도를 활용해 사회적 약자들을 배제하고, 이를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많다.
두 사례를 비교하면, 미국은 패권국가로서 전쟁을 정당화하는 방식을, 한국은 소수자들의 사회적 갈등을 국가가 해결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약자를 탄압하는 방식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공통적으로 국가 권력은 개인의 신념을 특정한 방향으로 유도하고, 이를 통해 국민을 통제하려 한다는 점에서 유사성을 가진다.
<화씨 9/11>에서 미군들은 애국심을 이유로 이라크 전쟁에 참전한다. 하지만 전쟁의 실상을 경험한 후 신념이 흔들린다. 이는 신념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경험과 새로운 정보에 의해 변화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국가가 조작한 정보만을 접할 때 신념은 쉽게 형성되지만, 시간이 지나고 다른 현실을 접할수록 개인은 자신의 믿음을 다시 검토하게 된다.
<공동정범> 또한 용산 참사 생존자들은 처음에는 국가의 폭력에 저항했지만, 법적 처벌을 받고 사회적으로 고립되면서 서로를 의심하고 갈등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사건을 회고하고, 과거의 진실을 마주하게 되면서 신념이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 준다. 특히, 이 다큐멘터리는 단순히 사건을 기록하는 것을 넘어서, 인물들이 자신의 신념을 되돌아보고 재구성하는 과정 자체를 담아낸다는 점에서 차별점을 가진다.
정치고발 영화에서 중립적인 자세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야기를 보면서 관객 스스로가 판단하고 정립해나가야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 이야기가 정말로 맞는가, 아닌가, 찾아보고 고민해보면서 가꿔나가야할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여러가지 다양한 정보를 접하면서 자기 검열을 해나가야 한다고 느낀다.
이 두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참 정치인들은 취약 계층의 말은 들어주지도 않고 그저 무시하고 외면한다고 느꼈다. 그리고 이는 미국이나 한국이나 또는 다른 나라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국가는 국민을 위해 움직인다고 말하지만 정작 국가를 움직이게 하는 국민이란 매우 소수라고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국가 속에서 살아가야한다.
그리고 신념을 가지고 살아간다. ‘신념’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그 ‘신념’이 뭐길래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또 그것에 의해 살아가는 지에 대해 고민이 되었다. 언론에서 떠들어대는 정부의 말을 무조건 적으로 믿어서는 안되는것 같고, 그렇다고 모든 말을 무시하고 화염병을 만들고 망루를 세워서 폭력 시위를 하는 것도 안 될 것같다. 올바른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그리고 이 신념이 올바르다고 느끼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자기 검열이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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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FF 데일리] 세상의 모든 스텔라를 응원해
제목 ㅣ 사랑에 빠진 스텔라 Stella in Love
감독 ㅣ 실비 베레드
출연 ㅣ 플라비 들랑글, 마리나 포이스, 벤자민 비올레이
시놉시스
스텔라는 올해 마지막 학년이다. 하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 스텔라는 유명한 80년대 파리지앵 클럽과 그곳에서 펼쳐지는 열광적인 밤을 알게 된다. 스텔라의 친구들은 공부를 하고 있고, 스텔라의 아버지는 집을 나갔고, 어머니는 우울증에 빠져 있다. 이번 해를 어떻게 보내는지에 따라 스텔라의 인생 전체가 결정될 것이다. 스텔라는 생각하지 않는 척 한다.
프로그램 노트
2008년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소개되어 화제를 모았던 <스텔라>의 속편 격인 작품으로, <스텔라>가 초등학교의 마지막 해 이야기를 다룬 데 비해 6년 후인 고등학교 마지막 해의 이야기를 그렸다. 진로를 고민해야할 고등학교 졸업반인 스텔라지만, 그녀는 그것을 생각하지 않는 척 외면한다. 친구들은 공부만 하고, 아버지는 다른 여자와 함께 떠나고, 어머니는 우울증에 시달리는데 스텔라는 1980년대 파리의 전설적인 클럽인 레 뱅 두슈에서 춤꾼 앙드레의 현란한 춤을 목격하고 광란의 밤을 경험한다.
대학에서 무용을 공부하겠다는 꿈도 가져보지만, 돈을 벌어야 한다는 어머니의 반대에 부딪히는 스텔라. 과연 성인이 된 스텔라는 어떤 모습일까? <스텔라>에서 나타났던 가족 안에서의 외로움과 사회적으로 소외되어가는 문제들은 이 작품에서도 여전히 스텔라를 괴롭히며, 그녀의 성장기를 더욱 어렵게 만든다. 1980년대 초반 클럽의 모습과 헤어스타일, 의상 등 레트로 분위기를 물씬 자아내는 실비 베르에이드 감독의 연출도 볼거리이다.
세상의 모든 스텔라를 응원해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미래에 대한 고민, 내가 과연 뭘 잘하는지에 대한 의문, 어딘가 완벽하지만은 않은 가정사, 친구들과의 갈등, 영화 <사랑에 빠진 스텔라>는 국적과 문화도, 시대도 다르지만 어쩐지 낯설지 않은 소재다. 나도 아마 스텔라처럼 영화롭게는 아니지만 이 고등학생 때 분명 이 고민을 하고 갈등을 겪었던 시기가 있었다. 그래서 일까 영화를 보는 내내 스텔라를 조금씩 응원하고 있었다. 그 응원에 보답이라도 하듯, 마지막 장면 마지막 대사가 인상깊었다. 스텔라는 여러 갈등을 해소아닌 해소 한 뒤 "미래 걱정은 나중에" 라고 하고 영화는 끝난다. 그래, 미래 걱정은 나중에!
1980년대 초반 클럽 '레 벵 두슈' 간접 체험
스텔라가 스트레스를 풀러 가는 곳이자, [(앙드레와)사랑에 빠진 스텔라] 서사를 완성하기 위한 장소는 '클럽'이다. 사실 클럽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라 2023년의 클럽 분위기도 모르지만, 영화는 1980년대 초반 클럽의 모습을 꽤나 자주, 많이, 오래 보여주어서 간접 체험이 가능하다. 스텔라는 학생이지만 짙은 화장을 하고 입장을 하고 그 곳에서 '앙드레'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앙드레'는 춤과 노래, 음악 자체를 좋아하고 즐기고 스텔라는 아마 그런 모습에서 앙드레에게 매력을 느낀 듯 싶다. 앙드레에게 사랑을 빠졌다는걸 보여주자마자 스텔라를 응원하는 입장에서 "안돼! 누가봐도 나쁜 남자의 정석이잖아?" 싶은 마음이 많이 들었는데, 영화를 보고 나니 스텔라는 앙드레를 만났기 때문에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나름 마냥 나쁜남자도 아닌 것 같고.
여러모로 다양한 연출
영화는 다양한 연출을 보여준다. 사실 제목은 그렇게까지 와닿지 않아 많은 기대를 하지 않고 본 영화다. 영화에서는 '가사가 있는' 음악을 많이 들려준다. 그리고 <스타 이즈 본> 과같은 음악 영화에서 보여줄 법한 연출을 보여준다. 바로, 남주인공과 여주인공이 직접 작사작곡한 노래를 멜로 가득찬 눈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클럽에서 춤출때는 약간의 슬로우로도 보여주며 사랑에 빠진 스텔라의 마음을 연출을 통하여 보여주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약 두시간 가량의 러닝타임인데도 불구하고 지루하지 않았다.
영화는 <스텔라>의 속편이라고하는데, <사랑에 빠진 스텔라>를 보고 나니 스텔라가 어렸을 적 모습을 담았다는 <스텔라>도 궁금해졌다. 성장 영화 그리고 음악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를 추천한다.
영화 <사랑에 빠진 스텔라> 상영 시간표
씨네랩 에디터 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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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어남, 혈연, 죽음은 선택할 수 없다
유전을 다시 보게 되었다. 대낮에 졸린 상태인 다섯이서 좋지 않은 화질과 음질로 보긴 했지만, 두 시간 내내 긴장이 풀리지 않는 상태로 영화를 봤다.
역시 다시 봐도 이 영화는 깜짝 놀라게 하는 영화가 아니고 영화 내내 이어지는 불쾌감과 긴장을 후반에 극대화시키는 영화인 것 같다. (이후 스포일러)
출처: 넷플릭스
영화를 보면서 나홍진 감독의 곡성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등장인물들이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현상에 직면해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지만 결국 파멸로 이어진다는 이야기의 흐름 때문이었다. 곡성에서는 '뭣이 중헌디'라는 대사로 대표되는 무지가 핵심이었다면 유전은 거부할 수 없는 운명 그 자체가 중심이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같은 오컬트 공포 영화인 랑종과 비교하면 유전은 초자연적인 부분보다는 악마 숭배자 조직과 관련된 반전, 가족은 선택할 수 없다는 주제의식이 더 강조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출처: 넷플릭스
정말 복선이 많고 모든 복선을 다 회수하려는 의지가 느껴지는 영화이기 때문에 혼자서 처음 봤을 때보다 이번에 봤을 때 보이는 것들이 많았고 대화하면서 새로 이해되는 부분도 많았다. 영화를 보고 포스터를 보면 정말 묘한 느낌이 드는데, 주인공인 애니와 딸인 찰리의 눈 색이 똑같은 것과 목이 잘린 듯한 장난감이 절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이 영화가 위에서 아래로 내려와 마지막 장면을 향해 달려가는 영화라는 것을 표현하는 것 같다.
출처: 넷플릭스
이 영화는 첫 장면과 끝 장면이 수미상관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 첫 장면은 마치 파이몬의 시선을 따라가는 것처럼 주인공 가족의 집이 디오라마로 보이고, 파이몬 강림 의식인 마지막 장면 역시 같은 시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자연은 인간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여긴다는 노자의 말처럼 인간들의 증오, 숭배, 사랑 등의 발버둥을 아무런 감정 없이 그냥 그 자체로 보고 있는 초자연적인 존재의 시선처럼 느껴져 소름이 돋았다.
출처: 넷플릭스
영화 유전의 줄거리를 정말 간단하게만 적어 보자면 악마 숭배자인 앨런이 아들에게 파이몬을 넣으려다 남편과 아들이 죽고, 남자로 태어나길 원했던 손녀 찰리에게 빙의시키는 것에 성공한 후 숭배자들의 계략으로 인해 결국 손자인 피터에게 찰리의 영혼이 옮겨감으로써 결국 파이몬이 남자의 몸으로 강림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줄거리만 봤을 때는 그냥저냥 재밌게 볼 수 있는 오컬트 영화라고 생각하게 되지만, 성인부터 아역까지 모든 배우들의 미친 연기와 흔한 점프 스퀘어 없이 많은 장면을 롱테이크로 찍어 관객의 멱살을 잡고 끌고 가는 것 때문에 줄거리를 아는 상태로 영화를 보더라도 정말 재밌게 볼 수 있는 영화이다.
출처: 넷플릭스
항상 영화를 보고 함께 영화의 각 장면에 대해 떠들 수 있는 영화를 좋아하는데, 유전은 그런 의미에서 최고의 공포영화인 것 같다. 당장 지금 생각나는 장면들만 적어도 몇 문단은 넘어갈 것 같아서 적지는 않지만, 이 영화를 아직 안 본 사람들이 있다면 미드소마까지 이어서 본 뒤 같이 떠들었으면 좋겠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면 이 영화에는 정말 너무 불쾌한 장면이 2~3개 나온다는 것 정도? 그래도 아직 보지 않았다면 당장 혼자서 보길 추천한다.
출처: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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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젠틀 오퍼레이션] 끝장리뷰 | 영국을 향한 상남자의 과격한 애정표현 | 코트 의미 | 가장무도회, 프랑켄슈타인, 유대인 해석
(영화 [언젠틀 오퍼레이션](2025)은 씨네랩 측에서 제공한 시사회권으로 감상하였습니다) [언젠틀 오퍼레이션](2025)에 대한 헐거운 리뷰 Chapter 1 두 개의 태도 Chapter 2 가장 무도회, 유대인 00:00 언젠틀 오퍼레이션 01:47 두가지 태도 02:37 코트 의미 04:57 가장무도회 05:50 프랑켄슈타인, 유대인 06:46 별점 및 한 줄 평 07:05 다음 리뷰 예고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젠틀오퍼레이션 #언젠틀오퍼레이션리뷰 #언젠틀오퍼레이션영화 #언젠틀오퍼레이션해석 #언젠틀오퍼레이션후기 #영화언젠틀오퍼레이션 #가이리치 #헨리카빌 #TheMinistryofUngentlemanlyWarfare #TheMinistryofUngentlemanlyWarfaremovie #TheMinistryofUngentlemanlyWarfarereview #GuyRitchie #henrycav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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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리뷰/결말포함]군필이라면 다 아는 그 영화 분대장 교육장에서 틀어주는 바로 그 영화
#군대영화#밀리터리영화#전쟁영화
영화 ' 위 워 솔저스 ' 2002년
구독은 여러분의 큰 힘입니다
https://www.youtube.com/channel/UCNqd...#무비워크 #영화리뷰 #영화추천 #최신영화 #영화#결말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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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로스트 시티> 메인 예고편
전설의 트레저를 차지하기 위해 재벌 페어팩스(다니엘 래드클리프)는 유일한 단서를 알고 있는 베스트셀러 작가 로레타(산드라 블록)를 납치하게 된다. 어쩔 수 없는 비지니스 관계로 사라진 그녀를 찾아야만 하는 책 커버모델 앨런(채닝 테이텀)은 의문의 파트너(브래드 피트)와 함께 위험한 섬에서 그녀를 구하고 무사히 탈출해야만 하는데…
적과 자연의 위험이 도사리는 일촉즉발 화산섬
대환장 케미의 그들이 생존하여 섬을 탈출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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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글래디에이터 2> 2차 예고편
권력, 음모 그리고 복수 위태로운 로마의 운명이 걸린 결투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