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DAY2025-01-04 11:35:10
시빌 워 : 분열의 시대 | 늦은 개봉일이 야속할 경고문
<시빌 워 : 분열의 시대> 리뷰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극심한 사회적 갈등이 지속된 끝에 역사상 두 번째로 내전 상태에 돌입한 미국. 연방에서 독립한 주들의 시민군과 연방군이 치열한 전투를 지속하는 가운데, 기자 ‘리(커스틴 던스트)’와 ‘조엘(와그너 모라)’, ‘새미(스티븐 핸더슨)’, 그리고 ‘제시(케일리 스페이니)’는 연방 정부의 수도 워싱턴 D.C.로 향한다. 내전 발발 후 일방적인 기자회견 외에는 속내를 밝힌 적 없는 '대통령'(닉 오퍼먼)을 인터뷰하기 위해서.
현실에 역사와 상상을 더한 경고문
2021년 1월 6일,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의회 인증일. 폭도들이 미국 국회의사당을 무력 점거했다. 대선 패배 후 부정선거 음모론을 제기한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을 지지하며 선거 결과를 바꾸려고. 폭동은 이내 진압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미국 의회가 1983년 미 의회의 상원 회의장에 폭탄 테러가 자행된 이후 40여 년만에, 그것도 자국민에 의해 피해를 입었다는 오명을 남겼다.
무엇보다도 이는 민주주의 선도자로 자처하고, 다양성과 포용성의 국가라고 내세우던 미국의 실상이 고스란히 드러난 사건이라서 특히 충격적이었다. 부정선거 음모론과 대통령 선거 불복 선언, 그리고 QAnon발 딥 스테이트 음모론과 같은 낭설에 의해 파괴된 미국 민주주의 시스템을 목격했으니까. 극심한 양극화로 인해 미국 사회가 상상도 못 했던 디스토피아에 가까워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시빌 워: 분열의 시대>(이하 <시빌 워>)는 이처럼 극심해지는 사회적 양극화에 역사적 맥락과 약간의 상상력을 덧붙였다. 종군기자의 시점에서 일부러 거리를 둔 채 미국의 두 번째 내전을 관찰하며 현실을 바꾸지 않으면 발생가능한 미래를 경고한다. 하지만 <시빌 워>의 야심과 의도는 기대에 비해 날카롭게 느껴지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영화보다 영화적인 현실이 <시빌 워>의 역할과 메시지를 이미 대신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전쟁
시작은 야심에 걸맞는다. TV에서는 미국 대통령이 비상계엄이라도 선포하는 듯이 결연하게 승전 발표를 진행한다. 중계를 지켜보는 리의 방 밖, 도시 한복판에서는 폭발음이 들리며 내전에 휩싸인 미국의 현실이 보인다. 뒤이어 내전에 휩싸인 미국이라는 상상력에 부합하는 이미지도 연달아 펼쳐진다. 뉴욕에서는 난민들이 구호물자에 의존하고, 구호물품을 배부할 때 또 한 번 폭탄 테러가 발생하는 식이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그 이후로 <시빌 워>는 중반부까지 내전 상황임을 알 수 있는 묘사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특히 정보가 부족하다. 내전의 구체적인 원인과 양상은 등장인물들의 대사를 듣고 알아서 짜 맞춰야 한다. 일례로 새미가 대통령 인터뷰를 위해 준비한 질문을 본 뒤 권위주의 대통령이 이끄는 미국 연방정부가 미국 연방수사국을 해체하고, 반정부 시위대를 공습하는 등 폭정을 저질렀음을 유추해야 한다.
이민자와 인종 문제가 내전의 주요 원인 중 하나라는 암시도 마찬가지다. 워싱턴 D.C. 인근에서 제시는 흑인들을 집단 살해 중이던 군인에게 붙잡힌다. 이때 군인들은 그녀의 동행 중 홍콩 출신 기자만 골라 살해하고, 다른 이들은 반항하지 않는 한 위협만 한다. "포틀랜드의 마오주의자"라는 대사와 연결시키면 비로소 인종 차별과 이민자 문제, 미중 대립 등이 내전을 격화시켰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이에 더해 주인공 일행의 여정을 따라가면 캘리포니아 주와 텍사스 주를 주축으로 한 '서부군', 동남부 지역 19주가 뭉친 '플로리다 동맹'이 분리 독립해 연방군과 내전 중이라는 현황도 제한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다. 즉, <시빌 워>는 전쟁 영화처럼 보이지만 정작 마지막까지 전쟁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애쓴다. 자연히 초중반부까지는 내용에 몰입하기가 쉽지 않다.
몰입을 방해하는 여정
흥미롭게도 <시빌 워>는 전쟁이 아닌 로드 트립에 나서면서 본색을 드러낸다. 종군 기자인 네 주인공은 백악관으로 향한다. 내전 발발 이후 대통령과의 첫 인터뷰를 하기 위해서. 하지만 서부군이 먼저 워싱턴 D.C.와 백악관에 당도한 나머지 그들은 계획한 인터뷰를 진행하지 못한다. 이는 여정의 목적을 맥거핀으로 이용하고, 그 대신 여정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로드 무비 작법에 정확히 들어맞는 전개다.
리, 새미, 조엘, 제시의 여정은 그 자체로 두 가지 메시지를 전달한다. 우선 내전의 참혹함을 강조한다. 언제 어디서나 시체가 등장하고, 민병대와 군인이 전투를 펼치며, 무고한 시민 사이에서 폭탄이 터지는 불안정한 상황이 끊이지 않는다. 휴지조각이 되어버린 미국 달러 대신 캐나다 달러로만 물건을 살 수 있고, 그저 고향이 홍콩이거나 피부색이 검은색이라는 이유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그와 동시에 내전으로부터 거리를 두도록 유도한다. 제시는 베테랑 사진 기자이자 롤모델인 리로부터 전쟁 지역에서 취재하는 법을 배운다. 총격적인 중인 군인들과 동행하면서 가장 생생하고 정확한 현장의 순간을 포착하려 한다. 그런데 묘한 연출 때문에 이 과정은 내전이라는 맥락과 동떨어져 있는 듯하다. 치열한 총격전에 우스꽝스러운 힙합 음악을 더해서 전투 중인 양 진영 어느 쪽에도 동조하지 않도록 만든다.
그렇다고 해서 아담 맥케이 감독의 <돈 룩 업> 같은 블랙 코미디를 의도하지도 않는다. 마지막까지 주요 장면 대부분은 퓰리처상을 수상해야 할 것 같은 흑백 보도사진 구도로 구성된다. 진중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관객을 철저히 관찰자 시점에 머물게 한다. 강렬한 음향 효과 덕분에 살 떨리는 현장감이 강조되고, 갈수록 전쟁 분위기가 짙어지는 후반부에서야 주인공들에게 몰입할 여지가 생겨난다.
영화라는 사진전
그러다 보니 <시빌 워>를 보다 보면 질문 하나가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왜 하필 사진 기자 시점에서 내전을 다룰까?'라는 의문이다. 애초에 내전이라는 스펙터클 속에 관객을 빠트리고자 했다면, 극 중 등장한 인물 중 더 적합해 보이는 이들이 많다. 대통령이나 각 진영에 속한 군인들만 내세워도 내전을 충분히 극적으로 묘사할 수 있다. 전투 현장을 구체적으로 묘사할수록 내전의 참혹함도 더 직관적으로 전해질 수 있다.
하지만 사진 기자의 본질을 따져 본다면 <시빌 워>의 독특한 구성과 형식, 연출과 편집은 비로소 하나의 의도를 보여준다. 사진 기자는 언제나 카메라 렌즈를 통해서 세상을 본다. 어떤 순간은 사진으로 남기고 어떤 순간은 흘려보낼지 필터링을 하는 게 그들의 업이다. 사건과 현장에 일부러 몰입도, 공감도 하지 않는다. 그 대신 누구보다 냉정하게 가치를 평가하고, 사진만으로 사건의 의미를 극대화하는 게 그들의 일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시빌 워>는 일종의 사진전 같다. 내전에 관해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것만 보더라도 최소한의 설명만 붙는 보도 사진과 유사하다. 즉, 관객들이 미국의 두 번째 내전을 일종의 스펙터클로 즐기는 것은 애초에 목적이 아니다. 꼭 미국의 상황이 아니더라도, 내전으로 표출될 정도로 양극화된 사회적 갈등을 한 발짝 떨어져서 관찰하면서 그 위험성을 곱씹게 만드는 게 본 의도인 셈이다.
이는 후반부 링컨 기념관 공방전, 워싱턴 D.C. 시가전, 백악관 공성전, 백악관 내부 전투를 <시카리오>나 <제로 다크 서티>처럼 영웅적 묘사 없이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이유와도 맞닿아 있다. 내전이라는 혼란상을 장르 영화로서 영위하는 대신 가까운 미래에 대한 경고로 활용한다. 언제 내전이 발생해도 이상하지 않을 사회적 갈등의 개인적, 공동체적 책임과 의무를 한 번쯤은 성찰하게 만드는 현실의 거울이나 다름없다.
사진전에 깃든 기자의 삶
제시와 리의 관계성은 사진전이라는 의도를 한 번 더 강조한다. 제시는 이제 막 현장에 발을 내디딘 사진기자다. 그녀는 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열정 하나를 앞세워 워싱턴 D.C.행 여정에 동행한다. 하지만 그녀가 마주한 현실은 상상을 뛰어넘었다. 주유소 장면이 대표적이다. 주유소 주인은 피범벅이 된 남성 둘을 매달아 놓고 그들을 죽일지 말지 제시에게 묻는다. 예상 못한 상황에 제시는 그대로 주유소 주인 앞에서 얼어붙는다.
베테랑 사진기자 리는 다르다. 주유소 주인을 두 남자 사이에 세운 후 차분히 사진을 찍는다. 스스로를 자책하는 제시에게 냉정히 종군기자의 덕목을 일러준다. 기자는 기록하는 사람이라고. 총알이 빗발치고 폭발이 난무한 전장이더라도 관찰자로서의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고. 못하겠으면 지금이라도 그만두라고. 이 충고에는 뼈가 있다. 기자라는 직업을 선택한 것 자체가 실수라는 말은 리의 실수 혹은 회한을 암시한다.
열정만 넘치는 제시와 냉정한 베테랑 리의 관계는 마지막 순간 다시 부각된다. 백악관 내부에서 총격전이 벌어지는 가운데 무리해서 사진 찍을 자세를 취한 제시. 그 순간 리는 몸을 던져 제시 대신 총알을 맞고, 제시는 쓰러지는 리를 연신 카메라에 담는다. 그녀의 희생 덕분에 제시는 대통령이 사살되는 역사적인 순간을 포착한 사진기자가 된다.
이는 리의 조언에 담긴 회한을 유추할 수 있는 힌트다. 리 역시 한 순간의 실수로 인해 선배를 잃었고, 그 순간을 후회하지만, 직업적 사명감 때문에 계속 사진을 찍지 않았을까. 그래서 본인을 닮은 제시를 만류하면서도 도와주고, 끝내 그녀를 위해 희생한 게 아닐까. 지친 자신을 대신해 제시에게 사명을 넘긴 것처럼도 보인다. 기자로서의 삶은 결코 평탄하지 않지만, <시빌 워>라는 사진전에 사용될 사진을 누군가는 찍어야 하니까.
영화보다 발 빠른 현실
안타깝게도 <시빌 워>는 영화 외적인 이슈로 인한 평가절하를 피할 수 없다. 우선 흥행을 고려한 선택이겠지만, 로드 무비를 블록버스터 전쟁 영화로 포장한 포스터와 예고편이 아쉽다. 겉포장을 보고 커진 기대를 영화 본편이 충족하지 못하면 실망감은 배가되니까. 예고편과는 전혀 다른 전개와 결말 때문에 혹평을 피하지 못했던 <조커: 폴리 아 되>처럼. <시빌 워>가 그 다음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더라도 놀랍지는 않다.
무엇보다도 4월 개봉한 미국과 달리 12월을 선택한 국내 개봉일이 특히 불운하다. <시빌 워>는 정치적, 사회적 양극화의 폐해와 그로 인한 부정적인 미래를 묘사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현직 대통령의 내란이라는 모습으로 최악의 미래가 이미 현실에 당도해 버렸다. 경고문이 너무 늦게 도착한 셈이다. 그 결과 1달 전이었으면 폐부를 찔렀을 메시지의 위력은, 진중하게 쌓아 올린 완성도가 무색하게도, 현실의 벽 앞에서 반감되고 만다.
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포장지와 타이밍이 야속할 냉철한 사진전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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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적지 잃은 배는 멈출 수밖에.
이 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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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골머리를 싸매면서 쓰지만 이제는 살짝 포기한 서문과 맞바꿀 정도로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전하는 말.
최근 영화관 관크(다른 관객들이 작품을 관람하는 데 있어 방해하는 모든 행위 및 행위자자들을 일컫는 말)가 많아지고 있다. 그것이 코로나로 인해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다 보니 집에서 해도 되는 행동과 사회에서 허락되는 행동의 범위가 모호해져서 그렇든, 개인의 성향이 둔감한 편이든 상관없이. 종종 뉴스거리로도 나올 정도의 불쾌한 행동이 많아지는 추세임은 감출 수 없다.
일주일에 최소 한 번은 영화관을 찾는 본인 역시 꽤 많은 관크를 당했다고 자부하는(?) 데도 불구하고. 이번에 소개할 영화인 [늑대 사냥]을 관람할 때는 불법 촬영하는 사람을 만나는 관크를 당했다.
비록 남루하고 초라한 문장을 리뷰랍시고 나열하는 삶을, 곁다리 삶 중 하나로 영위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것”에 애착을 느끼는 사람이기에. 다른 사람의 것도 최소한의 존중은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분노를 느끼며 영화의 초반부에 소리를 지르며 그 행동을 제지해야만 했다.
영화 관람 후 스스로의 평가에 따라 작품이 정말로 “돈값”을 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평가를 할 수는 있겠으나. 그 어떤 작품이라 해도 불법으로 보아야 할 운명을 지닌 채 태어나지는 않는다. 애초에 그런 운명 외에 허락되지 않는 작품이라면. 만들어진 의도부터가 불순한 영상물에 불과하며 그것을 관람 및 유포한 사람들은 모두 법의 심판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부디 다음번에는 경찰서로 간 다음에야 반성했다며 질질 짜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그 알량한 반성은 경찰서를 나오는 순간 안도의 한숨으로 바뀔 것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유튜브 영상 조회수 올릴 때나 쓰는 말인 줄 알았던 “역대급” 관크 덕분에 나 역시 영화의 초반부 15분가량을 관람하지 못하는 불상사가 생겼다. 덕분에 영화 초반부의 이야기에 대한 것은 제외 후에 리뷰를 작성해야 하는 어려움까지 얻은 채로 말이다. 참 여러모로 도움되지 않는 관크임에는 틀림이 없다.
사진출처:다음 영화
영화의 전반부는 승리에 취한 범죄자들을 비춘다. 배를 “접수”하기까지 벌어지는 폭력의 향연은 경찰들을 향한 응축된 분노만큼이나 잔인하고 집요하다. 그들은 상대방을 향한 그 어떤 배려도 하지 않은 채.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둔기, 칼)을 이용해 반복적인 타격으로 상대방의 숨을 끊어놓는다.
또한 망망대해 위의 배라는 설정상. 도망칠 곳이 한정되어 있다는 두려움은. 이 무자비한 범죄자들에 의해 점점 수세에 몰려 너나 할 것 없이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경찰들의 두려움과 살육자들의 잔인함을 동시에 배가시킨다.
범죄자들의 행보는 거침이 없고. 그로 인해 영화의 속도는 두려움도 앞지를 만큼 빠르고 급박하다. 피가 묻은 얼굴에서 떠오르는 미소는 이제 더 이상 상대를 가리지 않는 순수한 악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짧은 초반부의 영광도 잠시. 영화는 알파(Alpha, 최귀화)의 운송이 숨겨온 진짜 목적임을 드러내는 순간부터 급속도로 빛을 잃는다.
이 초월적 알파라는 존재가 영화를 누비며 벌이는 실수들은. 영화 [마녀 2]에서 언급한 문제와 거의 동일하다. 밸런스가 붕괴된 밸런스 게임인 셈이다.
영화는 초반 시퀀스에 매우 공을 들여 종두(서인국)를 구축점으로 만들어 놓았지만. 이마저도 알파 앞에서 힘없이 무너뜨리는 선택을 해버렸다. 그것도 스스로. 이로 인해 관객들은 애초에 알파에게는 그 누구도 상대가 되지 않음을 느낌과 동시에.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 그 어떤 긴장감도 없을 것임을 짐작으로나마 느낄 수 있다.
사진출처:다음 영화
알파는 종두로도 모자라 도망갈 곳 없는 배.라는 밀실에 가까운 장치도 무너뜨린다. 그 어떤 곳에 있어도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선택임은 알지만. 문제는 알파가 후반부 거의 대부분의 장면에서 피로할 정도로 모습을 내비친다는데 있다.
이로 인해 남은 시간들은 그저 알파가 가동하는 살육의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덜덜 떨고 있는 사람들을 순서대로 처단하는 장면의 나열에 지나지 않는다. 잔인함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그 어떤 감흥도 두려움도 주지 못한다. 그저 심하다.라는 생각만 들게 할 뿐.
[늑대사냥]은 또 다른 영화인 [랑종]이 범했던 실수를 떠올리게 한다. 곡성의 후속작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내걸었던 표제어(중심 단어)는 “무서움”이었다. [늑대사냥]의 경우는 메인이 되는 단어가 “수위를 넘는”과 “(클리셰를 포함한) 모든 것을 부순다”정도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런 영화가 가지는 통상적인 흐름이 어떤지 유추해 보았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주인공은 결국 (가장 오래) 살아남는다. 일 것이다.
그렇게 치면 과연 이 영화의 주인공은 누구일지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영화는 초반에는 경찰(박호산, 정소민;왜 캐릭터 이름이 공식 페이지에 조차 없나요?) 쪽이 주인공인 것처럼 비추다가 나중에는 결국 도일(장동윤)의 생존으로 영화를 마무리한다.
이는 도일 및 개조 인간들의 존재를 반전으로(라도) 볼 수 있지 않느냐의 문제와도 맞물리는데. 안타깝게도 반전으로 보기에는 깔아놓은 밑밥의 수준과 정도가 빈약하며. 애초에 이 부분을 억지로 반전으로 만들기 위해 포커싱을 의도적으로 잘못했다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사진출처:다음 영화
초반부의 도일은 종두와의 크고 작은 마찰을 겪으면서도. 그다지 큰 무리 없이 죽음의 그림자를 피해 가는 맑은 눈의 광인에 불과하다. 뚜렷한 능력을 보여주는 장면은 거의 없다.(꼭 하나 집어 말한다면 누군가를 죽이려 하는 도일의 손을 저지하는 장면 정도.)
도일이 숨겨진 주인공임을 알게 되는 지점은, 더 이상 알파의 무자비한 행동으로 죽여댈 인물이 거의 없을 때가 등장하는 성동일과, 파편처럼 등장하는 과거의 그림자가 합쳐지는 거의 극 후반부쯤이다.
그러나 그 지점까지 이르는 동안. 도일은 그 어떤 임팩트 있는 행동도 하지 않는다. 그저 한 대 맞고 어딘가 널브러져 있다 정신을 차린 듯한 몽롱한 얼굴로 슬그머니 생존 신고를 할 뿐이다. 이 장면을 보며 누가 도일이 진짜 주인공임을 알고 환호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개조 인간들과 도일이 벌이는 결투마저도 진짜 주인공의 신고식이나 자기소개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도 조잡하다 못해 빼버려도 부족하다 느끼지 않을.
영화는 자신들이 넘고 싶었던 수위와 클리셰를 없앴다는 허황된 꿈에 젖어 정작 설명해야 할 것들과 엮었어야 했을 모든 것들을 건너뛴다. 그러니 애초에 보려고 한 영화가 아닌 다른 영화를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드는 관객들이 느끼는 심정은 “속았다”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
이쯤 되니 제목에 대한 생각도 떨칠 수 없다.
과연 누가 늑대인가.라고 물어보았을 때 제대로 된 대답을 하기 힘들어진다. 영화는 늑대"를"사냥하는 것에 집중하기보다 늑대"가" 사냥하는 모습에 초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애초에 늑대라 불릴 정도로 대단한 그 무언가가 존재했는지도 잘 모르겠다.
두 시간 남짓의 항해 동안 그 어떤 명확한 목적도 없이 안으로 곪아가는 것만 선택한 배의 최후는. 침몰밖에는 없는 것이겠지.
마치면서
한두 명을 제외한 거의 모든 연기자들의 연기가 아까울 지경이었다.
특히 서인국과 성동일 배우의 연기는 섬뜩함을 넘어서서 초월적인 존재인 알파 보다도 더 두려움을 자아내는 연기를 보여줬기에 더 아까운 마음이 들었다.
새로운 시도임에는 분명했으나, 영화가 마치 두 조각난 배처럼 완벽하게 나뉘어서 융합하는 장면은 단 한 번도 마주하지 못했다는 점이 아쉽다. 연기로는 그 어떤 흠도 잡을 수 없는 배우들을 그저 소모품으로 써버린데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 것도.
잔인한 영화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단어 외에 뒤에 붙을 말이 없다는 사실은 영화를 평가하는 데 있어 좋지 못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잔인한데도 불구하고 잘 만들어진 영화들의 예가 많기 때문에.([악마를 보았다] 라던가. [킬빌] 이라던가)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영화가 가져갈 수 있는 수식어는 그 외에는 없다.
[이 글의 TMI]
1. 이제 추워서 긴 팔을 입어도 아무렇지 않다.
2. 이럴 때 걸어 다니는 거 좋아서 괜히 출근할 때도 빙 둘러가는 중.
3. 아 물론 회사 가기 싫어서 그런 것도 있음.
4. 커피를 끊어볼까 하고 깝죽거리다가 지옥 같은 일주일을 보냈다.
5. 앞으론 그냥 안 까불고 하루 한 잔만 먹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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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P.> - '갈 곳 없는 청춘을 쫓다.'
D.P. (D.P.,2021)
개봉일 : 2021.08.27 (넷플릭스 공개)
감독 : 한준희
출연 : 정해인, 구교환, 김성균, 손석구, 이준영, 신승호, 조현철
‘갈 곳 없는 청춘을 쫓다.’
웹툰 <D.P 개의 날>을 원작으로 한 넷플릭스 시리즈 <D.P.>가 2021년 8월 27일, 높은 기대치와 많은 관심 속에 공개되었다. 주인공 안준호 이병과 한호열 상병 역을 맡은 정해인, 구교환 배우의 신선한 조합에 대한 기대와 궁금증이 높은 작품이었는데, 정반대의 이미지를 가진 두 배우가 각자에게 꼭 알맞은 옷을 입고 내뿜는 케미가 상당해 이야기를 제외하고도 두 캐릭터의 파트너십을 지켜보는 재미도 있었다. 정해인, 구교환 배우를 좋아하지 않았던 사람이라도 이 시리즈를 보다 보면 두 배우가 흘리는 매력에 금세 빠져버릴지도 모르겠다. (난 이미 그전부터 허우적대고 있던지라 더 할 말이 없다...)
<D.P.>는 어려운 가정 사정을 뒤로한 채 입대한 후, 헌병대로 차출돼 특유의 눈썰미와 센스로 탈영한 군인을 쫓는 군인. 'D.P'가 된 안준호 이병과 그의 파트너 한호열 상병의 이야기다. '군인을 쫓는 군인'의 이야기라 하여 추격극이 주가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D.P.>는 단순한 추격, 액션극이 아니었다.
20살 초반, 갓 성인이 된 우리나라 남자들은 좋든 싫든, 어떻게든 국방의 의무란 것을 지게 된다. 특별한 사유가 없다면 대부분의 남자들은 국방부의 시계에 맞춰 청춘의 일부를 헌납하게 되는데, 이 의무에 대해선 항상 논란이 많다. 말도 안 되게 적은 월급, 계급제 아래 잔혹하게 이어지는 가혹행위, 군사 비리, 인권문제, 병사의 현실은 고려하지 않는 불합리한 판단 등등.. 군대란 것이 공개적이기보단 폐쇄적인 집단이다 보니 모두가 알면서도 쉬쉬하고 넘어가는 문제들이 너무도 많다. <D.P.>는 이 문제들을 준호, 호열이 쫓는 탈영병들을 통해 비춰낸다. 그리고 준호와 호열이 가진 트라우마들과 그를 조금씩 극복하는 모습, 타인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보여주며 안준호 이병과 한호열 상병이라는 인물에게 인간성과 입체감을 부여하며 몰입력을 끌어낸다.
탈영병들은 말한다. “더 이상 쫓아오지 마.” “내가 뭘 잘못했어.”
20대 초반의 남자들에겐 국방의 의무가 주어진다. 그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부대 밖으로 뛰쳐나가는 건 엄연한 군법 위반이다. 탈영병에겐 탈영이라는 죄가 있다. 하지만 탈영병에게만 죄가 있는 걸까?
호열은 이렇게 말한다.
“탈영병 잡아오면 뭐해. 안에서 이러는데 탈영을 안 하고 배겨?”
모두가 쉬쉬하는 가혹행위와 근절되지 않는 군사 비리, 병사들을 가족이라기보단 진급 수단의 하나로 보는 간부. 바뀌지 않는 현실들. 탈영병은 이 문제들에 떠밀려 벼랑 끝에 선, 연약하고 어린 청춘이다. 탈영병을 다시 군대로 끌어다 놓아도 가해자들은 처벌을 받지 않고 다른 곳으로 전입될 뿐이고, 탈영병에겐 상처 위에 ’탈영병‘이라는 딱지가 붙을 뿐, 아무도 그의 상처를 보듬어주지 않는다. 탈영의 결말은 탈영을 하게 만든 문제의 해결이 아닌, 탈영병이란 낙인과 영창뿐이다.
군인이라는 신분에 발 묶인 채로 흔들림을 견디지 못해 탈영병이 된 이들. D.P가 된 준호와 파트너 호열은 탈영병들의 이야기를 파헤쳐 가며 문제를 통감하고 그들의 마음에 공감하며 성장한다. 반듯하고 거침없지만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숨기고 사는 인물 준호와 속옷 고무줄을 퉁-튕기며 극의 분위기를 띄우다가도 곧 색다른 얼굴로 돌변해 입체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인물 호열. 전혀 다른 이미지를 가진 두 인물은 하나의 목표를 바라보며 달린다. '도망간 군인을 잡는다.'
처음엔 '설렁설렁하다 만약 못잡으면? 또 나와서 잡으면 돼-'(해당 보직을 비하하거나 무시하려는 의도는 아닙니다.) 같은 느낌으로 가볍게 시작된 탈영병 체포는 극이 진행될수록 죄책감, 책임감 같은 감정과 새로운 문제와 무게감이 더해지며 시즌 1의 마지막쯤엔 상당히 묵직한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어떤 일을 해도, 어떤 사고를 쳐도 결국 변하는 건 없는 시스템 속에서 끝까지 내몰린 청춘에 공감하며 눈물짓는 건 그들과 똑같이 아픈 청춘뿐이다. 예상보다 훨씬 무겁고 아픈 이야기였다. 이렇게 내쫓긴 탈영병들의 청춘을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
매화 반복되는 오프닝 영상을 보면서 생각했다. 울음을 토해내는 갓난 아이가 나오고, 아이가 자라나는 순간들이 지나간다. 그리고 어린 시절을 지나 성인이 된 아이(준호)가 입대하는 모습이 나온다. 그는 화면 너머에 앉아있는 우리를 바라보듯 뒤를 돌아 어딘가로 시선을 던진다. 그와 시선을 맞추고 있는 당신은 탈영병들과 같은 아픔을 가진 청춘인가,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 묵인하거나 그들을 괴롭힌 방관자 또는 가해자인가. 준호의 시선은 <D.P.>를 보고 있는 시청자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여러분들은 오늘부터 군인입니다.”
술만 마시면 어머니를 폭행하는 아버지와 아버지에게 맞으면서도 가정을 지키는 어머니. 불안한 가정환경 속에서 자란 준호는 무거운 삶의 무게를 지고 있다. 어머니와 동생을 사랑하고 동정하지만 이 가족을 떠나고 싶었기에 더 이상 거리를 좁힐 수 없었던 준호는 가족들을 두고 홀로 연병장으로 향한다.
2014년 선진 병영이 도입되기 전, 지금보다 폭행과 가혹행위가 더욱 심했던 시절. 준호는 군인이 된다. 민간인이 아닌 군인. 민간인에게 'Touch My Body'가 즐거운 노래 가사라면 내무반에서 'Touch My Body'는 말 그대로 폭행 또는 몸을 더듬는 성추행을 의미한다.
준호가 머무는 내무반의 고참 황장수와 류이강은 가까운 기수 몇 명을 제외한 후임들을 심하게 괴롭히는 선임이다. 준호의 가장 가까운 선임 조석봉 일병은 황장수, 류이강과 다르게 후임인 준호를 챙기며 “우린 나중에 애들한테 잘해주자.”고 다짐한다. 하지만 계속되는 가혹행위와 성폭력은 봉디(석봉+간디)라는 별명을 가진 착한 청년마저 미치게 만든다.
모두 알고 있지만 쉬쉬하고 있는 가혹행위들. 석봉과 탈영병들은 이와 같은 이유로 점점 망가지고 끝내 넘어선 안될 선을 넘어 도주한다. 하지만 이들은 잡히면 안 되기에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지옥 같은 군대로 돌아갈 수도 없다. 대부분의 탈영병들은 집이 아닌 길거리 어딘가를 헤매다 다시 군대로 돌아간다. 무슨 짓을 해도 바뀌지 않을 지옥 같은 그곳으로.
언제 잡혀갈지 모르는 불안감 속에 덜컹거리는 지하철에 앉아있으면서도 “여기가 편하다”고, “갈 곳이 없네요”라고 말하는 탈영병의 한마디에 그간 그가 겪었을 아픔과 고통이 묻어난다. 준호와 호열은 탈영병들을 잡으며 그들의 아픔에 함께 젖어든다. 하지만 준호와 호열은 현실을 바꿀 힘이 없다. 탈영병을 다시 부대로 인도하는 순간, 이들의 영향력은 끝이 나고 윗선에서는 진급에 영향이 간다는 이유로 가혹행위를 최대한 쉬쉬하고 덮으려고만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들의 이기심과 잔혹함은 석봉이 탈영한 후 더욱 여과 없이 드러난다. 같이 밥을 먹고 잠을 자던 전우를 가차 없이 쏘라 명령하는 부대장 앞에서 박범구 중사와 임지섭 대위는 서로에 대한 경쟁심을 내려놓고 석봉을 살리려고 노력하지만 이들의 노력은 결국 실패로 끝나고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뭐라도 바꾸려면 뭐라도 해야지.”
좁고 폐쇄적인 군대라는 사회에서 하루 종일 같이 지내는 사람이 나에게 선을 넘는 행동과 가혹행위를 반복한다면, 계급제라 반항 한 번 할 수 없다면, 윗 사람들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 방관하고 있다면. 이런 상황에서 병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목숨을 끊는 것 또는 이 지옥 같은 곳에서 탈출하는 것밖에 없다. 뭐라도 바꾸기 위해, 벗어나기 위해 탈영을 결심한 탈영병 신우석, 허기영, 허치도, 조석봉. 이들의 필사적인 탈출과 죽음은 과연 무엇을 바꿔놓을 수 있을까?
가혹 행위로 탈영을 했던 허기영 일병의 어머니가 답답해하며 묻는다. “어떻게 책임지는 사람이 없냐”고. 피해자는 고통에 몸부림치고 가해자도 분명한데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시스템. 그리고 수많은 피해자를 봐왔음에도 사라지지 않는 썩은 부분들. 총을 든 석봉 앞에서 “우리가 바꾸면 되지”라고 말하던 호열의 대사가 무색할 만큼 이 문제들은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석봉은 수통마저도 6.25 때 쓰던 것인데 어떻게 바뀌냐며, 뭐라도 해야 한다는 말을 남기고 자살을 선택한다. 착한 선생님이었던 석봉, 친하고 마음이 잘 맞는 친구였던 석봉, 누군가의 귀한 아들이었던 석봉, 준호에겐 가장 의지가 되던 선임이었던 석봉이란 청년은 이제 없다. 그는 '선임을 납치한 뒤 자살 시도한 탈영병'으로 뉴스에 오르내릴 뿐이다. 사람 때리는 걸 못해서 유망주로 주목받던 유도마저 관뒀다는 선한 마음씨의 석봉이 칼을 휘두르고 미친 듯이 뛰어가는 모습과 자살을 감행하는 모습을 보며 그가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모르겠다. 칼과 총을 든 탈영병이기 이전에 그저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어린 청년이었을 뿐인데.
석봉의 자살시도와 함께 6화가 끝난 후 나오는 부가 영상은 이 먹먹한 마음을 더 무겁게 만든다. 석봉의 친구가 석봉처럼 “뭐라도 바꾸려면 뭐라도 해야지”라고 말하며 자신을 괴롭히는 선임들을 향해 총기를 난사하는 장면에서 선임들과 변하지 않는 시스템에 대한 분노, 원망이 가득 느껴진다. 결국 총기를 난사한 병사가 되고 자살한 탈영병이 되는 건 피해자들뿐이다. 가해자들은 무사 전역을 하거나 심해야 영창과 전입, 며칠간의 반성. 그게 죗값의 전부다. 돌아갈 곳 없는 지친 청년들의 마지막 선택지 탈영. 그리고 그를 쫓는 또 다른 청춘. 탈영과 일들은 벌어졌는데 책임지는 사람은 없고 피해자의 눈물과 죽음 앞에서 책임감을 느끼는 건 또 다른 청춘(준호,호열)이 유일하다는 사실이 씁쓸하다.
조금 날카롭게 말하자면 <D.P.>를 보는 시청자들 중에서도 분명 황장수와 류이강처럼 군 시절 누군가에게 가혹행위를 하거나 폭력을 휘두른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들은 오프닝 영상에서 시청자 쪽을 바라보는 준호의 눈빛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황장수처럼 자신의 죄를 전혀 알지 못하고 똑바로 시선을 마주하고 있겠지?
전체적인 스토리에 대한 이야기는 이렇게 줄이고, 이번엔 주인공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다.
<D.P.>의 주인공 안준호와 한호열은 겉으론 강하거나 유머러스해 보이지만 각자의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
준호는 대체적으로 ‘죄책감’과 연관된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 그는 영창 근무를 서는 날, 영창 안에 갇힌 죄책감들과 마주한다. 첫 근무 날 구하지 못했던 탈영병 신우석의 환영, 아버지에게 맞고 있는 어머니가 “왜 도와주지 않냐”며 묻는 환영과 같은 것들 말이다.
준호는 술 먹고 가정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가 있는 가난한 가정에서 자랐고, 그런 아버지 밑에서 도망치지 못하고 돈을 빼앗기는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한다. 어머니를 미워하는 건 아니지만 그녀를 돕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갖고 있고 그래서인지 가정을 떠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떠나지 못한다.
준호는 3화에서 탈영병 정현민을 검거하며 만난 자신의 어머니와 비슷한 여자 ‘영옥’을 보며 어머니를 떠올리고 그녀를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술 먹고 폭력을 일삼는 남자에게 갖고 있는 모든 걸 다 팔아가며 돈을 바치는 영옥과 어머니. 준호는 영옥을 도우며 어머니를 돕지 못한 죄책감의 일부를 극복하고 뒤이어 ‘밥은 먹었냐’는 시답잖지만 따뜻한 인사를 담은 전화를 한다.
또 하나의 죄책감은 ‘탈영병을 구하지 못했다는 것’인데 이 죄책감은 차후에 ‘구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변한다. 준호는 석봉을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끈질기게 석봉의 뒤를 쫓지만 석봉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느끼고 자살한다. 석봉의 죽음 앞에서 가장 크게 비명과 울음을 토해내던 준호의 모습이 마음에 깊이 박힌다. 그는 석봉의 죽음 이후 첫 근무 당시 구하지 못했던 탈영병 우석의 납골당으로 향한다. 그리고 “앞으로는 이런 일 없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그의 누나를 보며 쓰린 표정을 짓는다. 열을 맞춰 걸어가는 병사들과 반대로 걸어가는 준호의 뒷모습엔 이 말도 안 되는 시스템 속에서 죽어간 청춘들에 대한 죄책감과 책임감이 무겁게 느껴진다.
호열은 준호의 파트너이자 D.P 조장이다. 꽤 오래 D.P 생활을 한듯한 그는 내무반과 크게 엮이지 않으면서도 나름의 영향력을 챙겨온 꽤 센스 있는 인물로 보인다. 국군 병원에서 흡연을 하는 다른 아저씨들에게 페브리즈를 팔며(?) PX 냉동을 뜯어내는 그의 능청스러운 장사 솜씨와 복귀가 결정되자마자 “얘네 담배 피웠어요”라며 모든 걸 폭로해버리는 한마디에서 그의 성격이 단박에 드러난다.
능청스럽고, 유연하면서도 선을 알고 내 몫은 확실하게 챙기는 인물. 굳어있는 준호에게 “네가 내 아들이구나?(아들 군번)”라고 물으며 자연스레 다가가는 모습과 황장수가 후임들을 말도 안 되게 갈구는 걸 발견했을 때, 중간에서 준호를 채간 후 황장수가 만든 상황을 빠르게 정리하는 모습을 보며 그의 따뜻하고 영리한 면을 볼 수 있었다.
호열이 가진 트라우마는 이전 활동에서 만난 칼을 휘두른 탈영병에 대한 공포, 그리고 자세히 나오진 않았지만 무심한 부모님에 대한 원망이 있겠다. 정현민을 잡으러 갈 때 호열은 준호에게 “칼침 놓는 탈영병도 있다”며 가볍게 말을 던지는데, 이후에 마주친 호열의 동기 ‘김규’를 통해 우리는 이 말이 호열의 경험담임을 알게 된다. 호열은 이런 트라우마를 겉으로 전혀 티 내지 않고 준호와 D.P 활동을 하고 있지만, 영화관에서 마주한 칼을 든 석봉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만다. 호열은 시리즈의 초반부에 ‘과호흡과 불안한 상태’ 때문에 병원에 검사를 하러 갔었다고 말하는데, 어쩌면 이 불안감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호열의 다른 트라우마는 ‘무심한 부모님’이다. 자세한 설명은 나오지 않지만 호열은 꽤 잘 사는 집안의 외동아들로 보인다. (정현민을 잡을 때 쓴 김규의 300만 원을 바로 이체해 주는 걸 보면) 하지만 호열이 부모님과 통화를 하거나 부모님 이야기를 하는 장면은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는다. 호열과 준호가 함께 포상 휴가를 나왔을 때, 호열의 집엔 아무도 없었고 전화 한 통 걸려오지 않는다. 라면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던 호열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게, 부모는 왜 나를 낳았을까?”
이 말과 사진 한 장으로 속단할 순 없지만 교복을 입은 호열과 부모님의 사진에선 왠지 어색한 분위기가 흐른다. 이런 모습을 봐서일까, 호열이 연락을 받지 않는 준호의 집에 찾아가 준호의 어머니, 동생과 함께 삼겹살 파티를 하는 장면에선 왠지 호열이 ‘이런 분위기를 그리워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만일 시즌 2가 제작된다면 한호열 상병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
원작 웹툰을 보지 않고 바로 감상했는데, 시리즈에 대한 만족도가 높아 자연스레 원작도 한번 읽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원작을 먼저 보고 시리즈를 감상한 시청자들의 의견은 어떨지 궁금해지는 시리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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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셜미디어의 불편한 진실을 파헤친 영화 '소셜 딜레마'
무심코 휴대전화를 꺼낸다. 시간도 때울 겸 평소 즐겨 쓰는 소셜 미디어 앱으로 들어간다. 인스타그램, 유튜브, 브런치 등 형식이나 종류도 다양하다. 화려한 문구와 이미지가 시선을 자극한다. 마음에 드는 영상이 없다면 화면을 당겨서 쉽고 간단하게 새로고침 한다. 새로운 콘텐츠가 알고리즘에 의해 끊임없이 등장한다. 끌리는 콘텐츠를 클릭한다. ‘이것까지만 봐야지.’라고 생각했는데 어느덧 시간이 훌쩍 지난다. 영화 ‘소셜 딜레마’는 누구나 해봤을 경험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영화 ‘소셜 딜레마’
영화 ‘소셜 딜레마’는 소셜미디어의 문제점을 다룬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이다. 유튜브,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에서 일했던 실리콘벨리 전문가들의 솔직한 인터뷰를 담았다. 구글 디자이너였던 디자인 사상가 ‘트리스탄 해리스(Tristan Harris)’의 경험으로 시작한 영화는 그가 ‘Gmail’에서 했던 업무와 소셜 미디어에 중독된다고 느낀 상황을 설명한다. 이어서 광고로 대표되는 수익 창출 구조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결과적으로 소셜미디어가 10대 청소년이나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다룬다.
사람을 설득하기 위해 영리하게 계획된 다큐멘터리
줄거리만 보면 전문가들이 지루한 인터뷰를 늘어놓는 영화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제작진은 무서울 만큼 영리하게 소셜미디어의 위험성을 시청자에게 설득한다. 앞서 언급한 ‘트리스탄 해리스’의 경험을 다룰 때는 애니메이션으로 재연했고 그래프 하나를 표현해도 메시지가 극대화되도록 연출했다.
마지막 필살기로 미국의 한 가정을 묘사한 드라마 장르를 추가했다. 부모님과 삼 남매로 이루어진 가족은 스마트폰 사용으로 갈등을 겪는다. 엄마와 첫째 ‘카산드라(카라 헤이워드)’는 가족들의 잦은 스마트폰을 걱정하는 반면 둘째 '벤(스카일러 지손도)’과 셋째 ‘아일라(소피아 해몬소)’ 는 별일 아닌 걸로 강압적인 태도를 보인다며 반발한다.
더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아일라’는 10대 여성을 대표한 인물이다. 어린 나이부터 소셜미디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평가에 민감하고 자신의 외모에 만족하지 못한다. 영화는 ‘벤'을 통해 소셜미디어가 사용자를 유혹하는 방식을 SF영화처럼 보여준다. 그리고 인터넷에서 접하는 정보가 객관적이지 않다는 점과 음모론 같은 가짜 뉴스를 믿게 되는 과정을 상세하게 그려낸다.
‘소셜 딜레마’ 속 드라마는 현실을 극적으로 표현해서 사람들의 감정에 호소한다. 동시에 드라마가 완벽한 허구는 아님을 증명하듯 ‘#pizzagate’, ‘미얀마 로힝야족 사태’의 실제 뉴스 보도와 각종 연구자료로 추가적인 설명을 덧붙인다. 이처럼 인터뷰, 드라마, 실제 뉴스 보도를 넘나드는 구성은 당겨진 고무줄처럼 팽팽한 긴장감을 만든다.
소셜미디어는 정말 나쁘기만 할까?
대부분의 기술과 소프트웨어가 그러했듯 개발자들은 ‘세상을 더 나아지게 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 끝에 소셜미디어를 만들었다. 그래서 영화 속 전문가들은 소셜미디어의 기술 자체를 비난하지 않는다. 대신 사회의 어두운 면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폭발적으로 퍼지면서 발생할 악영향을 지적한다. 인터뷰의 한 가지 예시로 페이스북의 ‘좋아요’ 기능이 있다.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마음과 자신감을 주기 위해 해당 기능을 만들었지만, 역으로 ‘좋아요’를 받지 못해서 좌절하는 상황이 생겼다는 것이다.
기술의 끝은 결국 사람이어야 한다. 모든 사람이 공감할 한 문장이 소셜미디어를 향한 비평과 자성의 목소리가 필요한 이유이다. 전문가들은 관련 법이 뒤쳐져 있다고 주장하며 기존 미디어나 통신망에서 이루어지는 규제가 디지털 프라이버시에 똑같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들은 소셜미디어의 막대한 데이터 수집과 처리에 비용을 부과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한다. 또한 기업이 광고 위주의 수익 구조를 바꾸기 위해서 사용자가 권리를 강력하게 드러내야 한다고 강조한다.
물론 개인도 소셜미디어와 자신 간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 알림 설정을 꺼두거나 콘텐츠를 알고리즘의 추천 대신 직접 선택하는 습관을 가질 수도 있다. 한 전문가는 추천 목록을 제어하는 크롬 프로그램을 설치하길 제안한다. 마지막으로 인터넷에서 마주하는 정보를 의심해야 한다. 이 글은 ‘소셜 딜레마’를 거짓 없이 설명했을까? 당신을 편향된 시선으로 이끄는 건 아닐까? 검증이 필요하다면 넷플릭스 오리지널 ‘소셜 딜레마’를 통해 확인해보자.
영화 ‘소셜 딜레마’와 관련해서 참고할만한 다양한 의견을 첨부합니다.
(*아래 제목을 클릭하시면 해당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조재길 특파원, 한국경제, ‘"삼성전자도 타깃"…美 이어 EU도 빅테크에 '칼' 꺼냈다’
김승현 기자, 조선일보, ‘“넷플릭스 적당히 해라” 페이스북 'SNS 중독’ 다큐에 발끈’
* 본 콘텐츠는 브런치 jadeinx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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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퀸스 갬빗
퀸스 갬빗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즌1 1-7화. 한꺼번에 몰아서 다 봤다.
앤 마가렛을 닮은 베시 하먼은 8살 무렵, 교통사고로 엄마가 사망하면서 고아가 된다. 시즌1에서 베시의 개인사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아주 짧게 보여주는 플래시백으로 추측하면, 베시의 엄마는 정상적으로 결혼한 부부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교통사고가 났을 때, 베시의 아빠는 등장하지 않고, 연락할 사람도 없다고 했다. 베시는 두 가지 강렬한 장면을 기억하고 있는데, 그가 어릴 때 한 남자가 찾아와 엄마에게 애원하는 장면, 엄마가 베시를 데리고 어딘가로 가서 어떤 남자에게 애원하는 장면이다. 이때 두 남자는 같은 인물이며, 베시의 아버지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베시의 엄마는 마주오는 트럭과 정면 충돌하면서 사망하는데, 이는 엄마의 자살이었고, 이 사고에서 베시는 천행으로 살아남는다. 사고가 발생하기 직전, 베시 엄마는 베시에게 눈을 감으라고 말한다. 베시 엄마는 베시와 함께 자살할 생각을 했고, 실행에 옮겼으나 베시는 살아남았다. 이 트라우마는 베시의 삶을 지배하게 된다.
이 드라마는 베시의 성장 드라마이면서, 서양 장기인 '체스' 이야기이자, 1960년대 동서냉전 시대와 미국 문화를 잘 드러내고 있다. 베시가 체스 천재라는 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베시의 엄마 앨리스 하먼은 코넬 대학에서 '단항식 표현과 대칭 표현'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수학 명문대학인 코넬에서 박사학위를 받을 정도라면 촉망받는 젊은 수학자였을텐데, 그가 자살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하다. 시즌1에서 베시의 엄마 앨리스의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시즌1을 보고 알게 되는 사실이지만, 이 드라마에는 나쁜 사람이 나오지 않는다. 즉 베시 주변 인물은 지극히 평범하며, 상식적 인물이고, 친절하고 어려운 사람을 돕는 사람들이다. 보통은, 주인공의 서사를 완성하기 위해 고난에 해당하는 사건과 악역을 등장시키는데, 이 드라마에서는 악역을 맡는 특별한 인물이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인물 사이의 갈등이 날카롭게 대립하는 장면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악역이나 인물들 사이의 갈등을 첨예하게 드러내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베시가 체스를 두기 때문으로 보인다. 체스 자체가 두 사람이 만나서 대립하는 것이고, 날카로운 두뇌 싸움이며, 상대방과 자신과의 심리전이어서 따로 악역이나 사람 사이의 갈등을 설정하지 않아도 좋고, 오히려 그런 장치가 체스 경기를 치르는 베스에게 방해로 작용할 수 있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졸지에 고아가 된 베시는 고아원에 입소하고, 그곳에서 약 5년 정도 생활한다.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 초의 미국 고아원 풍경은 어떤 면에서 부럽고, 어떤 면에서 끔찍하다. 영국 작가 찰스 디킨스의 작품에도 고아원이 나오는데, 19세기 영국고아원은 끔찍하다.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좋은 환경이지만, 베시가 생활하는 고아원 역시 따뜻하고 아늑한 가정집과는 거리가 멀다.
베시는 고아원 입소 첫날부터 '비타민'을 의무적으로 받아 먹는다. 모든 원생은 '비타민'을 먹는데, 두 개의 알약 가운데 하나가 '진정제'였다는 건 나중에 밝혀진다. 고아원 운영자와 관리자들은 진짜 비타민과 함께 진정제를 먹이는 것에 어떤 죄의식도 갖지 않는다.
이는 마치 19세기 영국 고아원에서 아기들에게 럼주 한 방울을 떨어뜨리는 유모의 마음과 같았을 것이다. 아이들이 칭얼대거나 울지 않고 긴밤을 깊고, 오래 잠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에, 오로지 '관리'의 편의성을 위해 발견한 방법이었으므로, 영아들은 치명적인 알콜중독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베시가 머문 고아원 역시 그 정도는 약했지만 어린 여자아이들 가운데 약물중독에 이르는 경우가 나타났고, 베시도 그런 아이였다. 베시의 고아원 생활은 짧고 건조하게 묘사되고 있다. 베시는 고아원에서 두 명을 만나는데, 첫날 알게 된 '졸린'과 건물관리인 '샤이벌'이 그들이다.
두 사람은 베시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인물들이지만 시즌1에서는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심지어 '샤이벌'은 시즌 끝부분에서 사망한다.
베시는 두 사람을 만나면서 자기에게도 '가족'이 생겼다는 걸 어렴풋하게 인식하기 시작한다. 멀리 떨어져 있긴 해도, 마음을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정신적으로 큰 위안이 된다는 걸 베시는 느낀다.
수업시간에 수학문제를 가장 먼저 풀고 조용히 앉아 있던 베시에게 선생님은 칠판지우개를 털고 오라고 말한다. 그렇게 베시는 샤이벌을 만나게 되고, 샤이벌이 혼자 체스를 두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체스가 마음으로 들어온다. 나중에 베시가 밝히지만, 8살 베시의 마음은 황폐하고 마음 둘 곳 없는 외로움으로 괴로운 상태였다.
그때 흑백의 체스판이 눈에 들어왔고,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체스에 마음을 빼앗긴다. 무언가 몰두하고 집중할 수 있는 계기가 필요했던 베시에게 체스는 유일한 대상이었던 것이다.
베시는 당돌하게 할아버지 샤이벌에게 체스를 배우고 싶다고 말하고, 샤이벌은 무뚝뚝하면서도 살갑게 베시에게 체스를 가르쳐준다.
두 사람은 체스를 두면서 가까워지고, 서로에게 위로와 위안의 대상이 된다. 샤이벌은 노인이고, 고아원의 건물관리자로 일하면서 시간이 조금 빌 때마다 지하에 내려와 혼자 체스를 두는 노인이다. 샤이벌에게는 가족이 없을까. 처음부터 가족이 없었거나, 있어도 인연을 끊은 채 살고 있는 듯하다. 그의 장례식에 가족이 참석하지 않았으니.
베시 자신도 체스에 천재적 재능이 있다는 걸 전혀 모르고 있었다. 베시가 체스에 끌린건 우연이 아니라, 필연적 선택이었다. 베시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프로 체스선수가 되는데, 베시가 대학에 진학해 수학을 전공했다면 엄마처럼 수학자로 성장했을 가능성도 크다.
짧은 시간에 샤이벌을 이긴 베시는 샤이벌의 도움으로 근처 고등학교 체스선수들과 시합을 갖고 그들을 모두 이긴다. 자신의 재능을 발견한 베시는 과거의 불행하고 외로운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체스에 있다고 믿는다.
영웅신화에서 영웅의 탄생에는 반드시 고난과 멘토가 존재한다. 베시는 어려서 부모를 잃는다는 설정은 고전에서 이미 수없이 다룬 클리셰다. 콩쥐도, 장화와 홍련도, 심청도 어머니를 어려서 잃는다. 이들이 '여성'이라는 건 우연이 아니다. 이 드라마를 페미니즘 영화로 보는 건 지나치지만, 역사적 존재로서의 '여성'이 겪는 고난은 거의 모든 집단과 국가에서 남성우월주의, 가부장사회에서 억압당하는 여성의 존재와 깊은 관련이 있다.
어린 베시가 고아가 되고, '대체 가족'으로 만나게 되는 사람이 '졸린'과 '샤이벌'인데, 이들은 각각 엄마와 아빠의 역할을 상징한다. 졸린은 같은 여성으로, 몇 살 많은 언니지만, 일찍 고아원에 들어와 베시에게 고아원 멘토가 되고, 친구처럼 지내며, 때론 엄마처럼 베시를 돌봐준다. 샤이벌은 할아버지면서, 아버지다. 무뚝뚝하지만 속정이 깊은 샤이벌은 베시의 재능을 드러내도록 돕고, 베시가 더 넓은 세상에 나갈 수 있는 기본을 갖추도록 돕는 역할이다. 즉, 고아원 안에서는 졸린이, 바깥에서는 샤이벌이 베시의 세계를 구축하는 조력자가 되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 베시가 체스로 성공하고, 졸린을 만나서 샤이벌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둘이 샤이벌의 장례식에 참석해 베시가 샤이벌이 머물고, 자신이 체스를 배웠던 그 지하실에서 샤이벌이 스크랩한 자기의 신문기사를 보면서 오열하는 장면은, 누가 진짜 아버지인가를 보여주는 감동적인 장면이다.
베시는 열 세살에 입양된다. 베시의 부모는 평범한 사람이고, 다른 아이는 없어서 베시가 유일한 자식인데, 청소년 고아를 입양한 이유는 관객이 자연스럽게 알아차릴 수 있도록 설정했다. 베시의 양아버지는 어떤 일을 하는지 모르지만 매우 바쁜 사람이고, 처음부터 입양을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은 인물이다. 베시를 입양한 사람은 양엄마인데, 우울증으로 고생하고 있어서, 아이를 입양해 돌보거나 대화를 나누면 우울증 치료에 도움이 될까 하는 기대가 있다. 그녀는 훌륭한 피아니스트였으나 무대공포증이 있어 무대에 서지 못한 좌절감으로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이 양부모의 역할은 베시가 고아원에서 나와 독립할 수 있을 때까지의 기간 동안 보호자가 되는 것이다. 베시는 학교에 다니며 스스로의 힘으로 체스 대회에 나가기 시작하고, 체스를 잘 두면 돈을 벌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양엄마를 설득해 학교를 나가지 않으면서 양엄마와 둘이 체스대회를 다니며 돈을 번다. 이때는 이미 양아버지는 먼 곳으로 떠나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확인한 이후여서, 베시와 양엄마는 경제적인 문제도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베시가 체스대회에서 돈을 벌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양엄마는 적극적으로 베시의 매니저가 되어 텍사스주 뿐아니라 다른 주까지 옮겨다니며 각종 대회에 출전해 상금을 쟁취하며 승승장구, 잘 나가는 체스 챔피언과 매니저로 활동한다.
그러다 베시의 양엄마는 어느날 갑자기 호텔에서 사망하는데, 이 부분은 드라마의 진행에서 개연성이 떨어진다. 아마 양엄마의 역할이 끝났기 때문에 갑자기 사라지도록 만든 것인데, 어색한 부분인 건 분명하다. 양엄마의 퇴장은 베시가 이제 독립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고, 개척할 수 있게 되었음을 뜻한다.
베시의 성공은 빠르게 그려진다. 고아원 생활, 입양은 스케치로만 보이고, 베시가 체스로 승승장구하면서 미국챔피언십, US오픈 같은 큰 대회를 치르며 전국적 인물로 등장하고, 마침내 체스세계 챔피언인 러시아의 보르고프와의 대전을 향해 질주한다.
이 시기의 세계 체스는 러시아가 단연 최고 수준이고, 러시아를 제외한 유럽이 그 뒤를 따르고 있으며, 미국은 변방이었다. 바둑으로 치자면 한국과 중국이 최고 수준이고 일본이 그 아래, 그리고 다른 모든 나라가 변방인 것과 같은 상황이다.
그런 체스의 변방에서 어느 이름도 없던 한 여성이 혜성처럼 나타나 세계챔피언을 꺾고 새로운 챔피언이 되는 건, 새로운 영웅의 탄생이며, 불우하게 성장한 소녀가 스타가 되는 헐리우드식 '스타 탄생'의 줄거리와 같다.
시즌1의 줄거리만 보면, 스타 탄생과 영웅 신화의 클리셰가 분명하게 보이는데, 이렇게 뻔한 이야기를 시즌1에서 보인 것은, 이후 전개되는 이야기가 뻔하지 않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겠다. 시즌1의 후반에서 고아원 친구이자 언니인 졸린이 나타나고, 베스는 챔피언이 되어 정점에 이른다.
이 영화가 재미있는 요소는 주인공 베시가 고난과 역경을 딛고 성공하는 '스타 탄생'의 줄거리로 관객의 대리만족을 충족시키고, 주인공인 배우 안야 테일러조이의 매력이 결합했기 때문이다. 악한과 악당이 나오지 않으면서도 주인공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으로 충분히 재미있는 드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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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미드 90' 리뷰
형제가 있는 집에서 pc는 결코 개인적이지 못하다. 연령대가 엇비슷할수록 더 그렇다. 게임을 하더라도 언제나 순번을 정해야 했고 시간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서 싸움이 나는 건 다반사였다. 초등학교에 가기 전까지는 좋으나 싫으나 죽어라고 서로 놀았어야 했다. 그러다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면서 많은 것들이 변했다. 우선은 모르면 어울릴 수가 없는 것들이 생겼다. 그 나이대 애들이 그렇다. 사랑해서 좋아하기보다는 어울리기 위해 좋아하게 된다. 조금씩 아는 게 늘어나면 기존의 자신과 구분 짓기 시작한다. 자신을 버린다. 멋있어지려는 노력은 좋아했던 것들에서 멀어지려는 노력이었다. 애들에게 멋이란 건 인정 욕구니까.
여기 스티비도 크게 다르진 않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형이랑은 또래처럼 놀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스티비는 계속 외로웠고, 우연히 가게 앞에서 스케이트 보드 트릭을 연습하는 동네 형들을 마주친다. 콘크리트 바닥을 밀고 나아가는 바퀴의 둔탁한 파열음, 공중에서 머무는 몇 초, 그 모든 과정이 멋있었다. 어떻게 멋있는 줄 아냐면 간단하다. 뭐든 주변에 또래 무리가 있으면 멋있는 일이 된다. 그런 이유로 어쨌거나 스티비는 보드가 필요했다. 절대로 거래하고 싶지 않았던 사람에게 손을 내밀게 될 정도로 원했던 물건이었다. 설령 한참 써서 낡아빠진 보드여도 상관없었다. 그걸로 입장권은 끊은 셈이었다.
물론 그 정도 수준으로 부족했던 건 사실이었고 그 무리에 끼고 싶어서 스티비는 나름의 일탈을 저지른다.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서 해야 하는 행동들에는 항상 결과가 따랐다. 무리에 끼려면 인정이 필요했다. '할 수 있다'는 인정이 아니라 '해냈다'는 데서 오는 인정. 무리에 어울리기 위해서는 테스트가 필요했다. 인정할 수 있는 사람만 받아들였다. 별명을 얻고 나서 스티비는 도전했고 받아들여진다. 그냥 같이 노는 친구에서 더 나아가서 온전히 받아들여진다. 아이의 시선에서 미지의 영역에 있는 건 대부분 일탈의 경계다. 스티비는 땡볕이라는 별명을 얻으면서 무리에 깊게 들어간다.
화면은 금기나 경계의 물건, 사람을 따라 움직인다. 하지만 그 시선이 손쉽게 평가하거나 재단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고정된 카메라는 선을 넘나드는 소년들의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배운 바가 있고 그 시절을 지나온 이들은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카메라는 그렇게 향수를 되살려낸다. 90년대를 지나온 아이들의 피부에 각인된 경험들. 끊임없이 무언가에 도전하고 부딪혀 깨졌던 추억이다. 개중에는 일탈의 경험도 있다. '4학년' 형이 만들었던 홈비디오는 그런 조각난 과정을 한 편의 영상으로 멋지게 다듬어낸다. 보드를 타고 자유롭게 선을 타고 넘었던 시간을 그들의 시선에서 보여준다.
스티비와 아이들은 하나같이 매력적인 캐릭터들이었다. 소년스러움이 드러나는 모습부터 슬픔을 간직하고 어른이 되어가는 기로에 서있는 모습까지 모두다 기억에 남는다. 있을 법한 인물들을 무리에 집어넣고 자연스럽게 다듬어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별명으로 호명되는 애들, 특정한 역할을 하는 애들, 개개의 가정사까지 그 환경이 무척 핍진했다. 보드를 타면서 친구들은 다 같이 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동선을 가로막는 건 어른의 시선이었다. 아이들 사이에는 위-아래가 없었고 모두들 좌우가 아니라 전후로 움직였다. 실은 아이들이 자라나는 방향도 그들의 눈높이에서는 그렇지 않을까? 멈춰 서거나 나아가는 쪽으로.
모든 걸 구독하는 현대인의 삶과 다르게 90년대의 미덕은 소유에 있었다. 세상은 가질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손쉽게 나뉘었다. 그때의 아이들이 모두 그 값어치를 이해했던 건 아니었다. 그 물건들은 그냥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사랑하게 된다. 또래들이 전부 가지고 있어서 사야 했던 물건들이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는 디지바이스 다마고치가 그랬고, 4학년 때는 BB탄총으로 넘어갔다. 조르고 졸라서 샀던 물건이 몇 번 쓰지도 못해 고장 났을 때는 정말 아찔했다. 그 총을 쓰지 못한다는 아쉬움보다도 이렇게 빨리 고장 냈느냐고 혼날까 봐 전전긍긍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무리에 끼고 싶어서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버렸을 때 비로소 사춘기의 초입에 들어섰던 것 같다.
사진 출처 : 다음 영화 '미드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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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행선인 줄 알았던 교차선
평행선인 줄 알았던 교차선, <해피엔드> 리뷰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참석했습니다.
네오 소라 감독의 해피엔드, 부산국제영화제 당시 반응 좋았기에 기대감이 컸다. 그래서 시놉시스 외에 어떤 것도 알아보지 않고 영화를 보러 갔다. 영화 시작, 영화 끝. 시작부터 심장은 뛰었고, 끝까지 눈을 뗄 수 없었다. 함께 간 친구와 영화관을 나오며 한 말은 "미쳤다."뿐이었다. 그 정도로 취향인 영화였고, 조금 더 심층적으로 보고 싶었기에 시사회 감상 후 개봉일인 4월 30일 영화를 한차례 또 보았다.
훌륭한 음향과 연출이 기억에 남지만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이야기였다. 해피엔드는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AI로 사람을 인식하고, 감시하는 시대. 주인공들의 장난을 '테러'로 규정한 교장은 학교에 AI 감시 체제를 학교에 도입한다. 대지진 예고로 혼란스러운 사회와 AI 감시 체제로 억압된 학교에서 코우와 유타, 아타, 밍, 톰 그리고 학생들은 어떤 변화를 맞이한다. 해피엔드는 청춘을 이야기한다. 청춘 속 한번은 겪을 만한, 뗄 수 없는 정치와 우정의 이야기이다.
영화를 더 재밌게 보고 싶다면 주목할 포인트
1. 지진의 타이밍
2. 반복되는 대사
3. 유사한 인물
본 리뷰는 다음 글부터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아주 정치적인 설정,
현실과 영화, 사회와 학교의 거울 구조
거울 1. 현실과 영화
SF와 청춘이라는 장르로 무엇을 보여줄까 기대했다. 흔한 청춘물이면 어찌할지 생각하면서도 SF와 함께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 모르기에 궁금했다. SF라는 장르는 화려하고, 거대한 스케일의 장면을 연출한다. 또 다른 부분으로는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시점을 가진 장르이기도 하다. 기술이 발전해도 현실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모습을 그려낸다. 오히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은 것 같다. 욕심으로 인한 독점, 본인의 안정을 위한 공격 등, 사회에 근본적 문제를 짚어내기 위해 SF 배경이 쓰인다. 해피엔드는 듄과 같은 화려한 스케일보다는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기 위해 SF를 활용했다. 해피엔드 속 일본 사회는 일본에서 벌어진 상황과 비슷하며, 전 세계적인 흐름과도 유사하다.
거울 2. 사회와 학교
영화는 현실을 비추고, 해피엔드 속 학교는 영화 속 사회를 비춘다. 코우와 유타가 세워둔 교장의 스포츠카. 교장은 그것을 보고는 "테러인가"라고 말한다. 부하 교사는 "네?"라고 답하며 관객의 반응을 대신한다. 과연 스포츠카를 세워둔 것이 학교를 향한 테러일까? 아니다. 그저 교장을 향한 공격일 뿐 학교를 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교장은 이것을 테러로 규정하고, AI 체제를 도입하는 이유로 말한다. 아이들은 AI 감시 체제로 시도 때도 없이 감시당한다. 웃긴 점은 이 AI 감시가 아주 허술하다는 것이다. 유타가 당당히 교무실에서 열쇠를 가져가는 것은 벌점이 없다. 야구부 주장이 길에 버려진 담배꽁초를 집으면 흡연으로 벌점을 부여한다. 외에도 영화 속에서 허술한 점들이 많다. 그와 동시에 학교엔 혐오가 심해진다. 귀화하지 않은 학생들을 분류하고, 그들이 규정한 일본인만을 위한 수업이 진행된다. 교장은 코우의 국적을 이야기하며 그런 출신이지 않는냐며 혐오가 가득한 말을 학생들 앞에서 내뱉고, 자기 잘못은 변명한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까지도 '일본식' 예절을 말하며 같은 학생이 차별 발언을 하는 걸 볼 수 있다.
이런 모습은 영화 속 사회와 같다. 대지진이라는 것을 명분으로 불안을 조장하고, 권력을 잡는 총리의 소식은 뉴스로 알 수 있다.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권력을 강화하겠다는 말은 익숙함에 움찔하게 만든다. 총리는 지진이 일어나면 외국인 범죄가 늘어난다는 말도 안 되는 파시즘적 발언을 내뱉다가 도시락을 맞기도 한다. 학교의 AI 감시는 사회 속 경찰과 같다. 코우는 여러 번 검문당한다. 얼굴을 인식하고, 소지 의무가 없는 서류를 요구받는다. 클럽에 들어간 것은 코우의 잘못이라 해도,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붙잡힐 이유는 없다. 두 번째 검문에서 우퍼를 튼 것은 유타였음에도 코우가 서류를 요구받는다. 경찰은 딱히 중요치 않다. 마치 AI 감시체계가 허술하고, 멍청한 것처럼 경찰도 똑같다. 지진 경보 타이밍에 맞춰 시위를 탄압하기도 한다.
거울 3. 총리와 교장
거울 2가 거울 구조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연출은 총리와 교장의 관계이다. 둘은 의도적으로 닮아있다. 특히 도시락 피습 사건과 교장실 점거 농성 장면은 완벽한 거울이다. 총리는 도시락 피습사건에서 도시락을 맞고 볼에 음식을 떼어내며 "아깝게시리"라고 말한다. 교장은 점거 농성에서 버려진 스시를 주우며 똑같이 말한다. "아깝게시리"라고. 그 외에도 불안을 조장해 권력을 잡는 점도, 혐오 발언을 내뱉는 것도 닮았다. 이 둘은 현실의 권력자와도 닮았다. 모든 나쁜 권력자들은 같은 모습을 한다.
또 하나 닮은 점은 이익을 좇는 것이다. 교장은 본인 차 테러 이전에 AI 감시 체제 도입을 고려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점거 농성 전 기사 인터뷰 내용을 보면 AI 감시 체제를 쓰고 교장의 지인(초반부 도지사 선물을 챙겨주던 사람)을 자주 봐야 해서 힘들다는 농담을 한다. 차가 세워지기 전에도 감시 체제와 관련된 인물과 함께했다는 점에서 차 사건이 명분으로 이용됐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아마도 본인의 이익을 위해 AI 감시를 가져온 게 아닐지 조심스레 생각한다. 총리도 결국 대지진의 불안을 이용해 많은 이익을 보았을 것이다. 권력뿐 아니라 내진설계 건축과 같이 분명 돈과 연결된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교장도 학교 내진 설계를 위해 도지사에게 로비했고, 제2의 아지트가 될 뻔한 클럽도 내진설계 빌딩 공사를 위해 없어졌다. 코우네 식당에서 건축회사 아저씨가 지진이 오면 건축회사가 잘 된다고 말한다.
아주 정치적인 설정,
각자의 방식으로
잘못된 권력은 비슷한 모습을 보이지만 대응하는 사람들은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상상력이 필요해”라고 한탄하며 말한 후미의 말에 대답하듯 영화는 각자의 방식으로 권력에 맞서는 모습을 보여준다. 정석적인 모습은 후미다. 시위에 참여하고, 확실하게 자신의 의견을 표한다. 저돌적으로 맞선다. 그리고 고민하는 코우, 코우는 후미처럼 맞서고 싶은 사람이다. 그러나 재일 한국인으로 겪었던 차별과 대학 장학금을 받아야 하는 상황으로 고민한다. 중요한 순간에도 그 고민으로 나서지 못하고, 결국 유타에게 마음의 빚을 진다. 그럼에도 코우는 시위에 참여하고, 화를 내고, 점거 농성을 서포트한다. 유타는 코우를 보며, 코우를 위해 저항한다. 코우의 벌까지 자신이 맡아 결국 권력이 무너질 가능성을 만든다. 이유 없이 검문당하던 코우를 보며, 혼자서 우퍼를 옮기며, 쫓겨나는 친구들을 보며 우타도 조금씩 변화했다. AI 감시에 반항하던 아타는 벌점으로 위축되는 모습을 보인다. 결국 어쩔 수 없다며 청소한다. 순응하는 것처럼 보인 아타는 졸업식 날 자신만의 방식으로 교장에게 한 방 먹인다. 그 외에도 우리에게 보이지 않았을 학생들의 저항이 있었을 것이다. 각자의 상황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저항할 수 있다. 모두가 같은 방식이 아니더라도 조금씩 움직인다.
한 번쯤 겪는 우정의 변화,갈림길에 서 있는 코우와 유타자랄수록 인간관계는 점점 넓어지고, 변화한다. 청소년기에 우정은 삶에서 어느 정도 크기를 차지할까? 특히, 어린 시절부터 이어온 우정은 변치 않을 것이라 여길 것이다. 그러다 소울메이트라 여기던 친구와 메울 수 없는 차이를 느낀다면 삶은 크게 흔들리게 된다. 영화에서 지진은 코우와 유타의 관계가 흔들릴 때 함께 발생한다. 가장 큰 흔들림이던 첫 번째 흔들림, 코우는 차별당한 순간과 불안감에 빠진다. 그러다 맞서 싸우는 후미를 발견하고 시선을 돌린다. 유타는 코우의 변화에 어색함을 느낀다. 두 번째 흔들림, 유타는 알바 면접을 보고 유타는 폭력 탄압이 발생한 시위 현장에 있었다. 유타는 시위에 나가며 싸우고, 억울함을 토해내는 코우를 보고는 옆자리에 앉지 않는다. 코우는 유타를 이해할 수 없고, 유타는 코우를 이해할 수 없다. 마지막 흔들림, 대학 장학금을 받은 코우와 퇴학당한 유타. 코우와 유타는 이전과는 또 다른 감정을 느끼고, 다른 관계가 되었다.코우와 유타는 소꿉친구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함께 해오던 친구이다. 유타는 우퍼를 옮기며 서로가 영원할 친구 관계임을 이야기한다. 싸우더라도 그럴 것이라고 말한다. 코우는 톰에게 우리가 유타를 대학교에서 만났더라면 친구가 될 수 있을지 물어본다. 코우는 유타가 변해서 자기와 앞으로도 함께했으면 하는 만큼 유타를 좋아한다. 그럼에도 안 맞는 부분을, 참을 수 없다. 우정이란 무엇일까? 관심사가 비슷한 사람끼리 만나는 것이 친구일까? 완전 똑같은 사람끼리만 친구가 되는 걸까? 멀어지지 않아야 하는 걸까? 영화를 보며 수많은 질문이 생각났다. 영화와 함께 개인적인 답을 해보자면, 우정은 복잡하다. 사람은 다양한 면을 가지고 있고, 아주 극히 일부 겹치는 때가 생긴다. 대부분 그 겹치는 때에 친해진다. 모든 부분이 같을 수 없다. 안 맞는 부분이 없을 수 없다. 그렇지만 서로를 이해하고, 겹치는 순간을 함께 즐길 수 있다면 친구이다. 또 우정은 가깝지 않더라도 이어지고, 끊기더라도 이어진다. 서로 다른 길을 가더라도 우정은 이어질 수 있다.코우와 유타의 흔들림은 사실 너무 친하고, 좋아했기에 생겼다. 같은 사람이었으면 한 것이다. 갈림길에서 누군가의 집에 따라가고 싶었던 마음처럼, 이 삶의 갈림길에서 같은 방향을 향했으면 했다. 둘은 싸우면서도 서로를 본다. 유타와 싸웠지만 가능한 곳까지 우퍼를 옮겨주는 코우, 코우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코우를 보호하고, 코우가 원하는 대로 될 수 있게 자신을 희생한 유타. 마지막 장면 둘은 결국 갈림길에서 다른 방향을 향한다. 이전과 다른 관계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둘은 앞으로도 서로 다른 길에서 우정을 이어갈 것으로 생각한다. 둘은 서로를 바라보고, 변화하고, 이해하고자 시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만나는 교차 선에서 어린 시절처럼 장난치며 웃을 것이다.한 번쯤 겪는 우정의 변화,너랑 나는 정말 다른 것 같아초반부 함께 음악을 즐기고, 몇 번의 가위바위보도 겹치는 소울메이트 코우와 유타는 이야기가 진행될 수도 서로의 다름을 느낀다. 소꿉친구, 초중고 친구들과 겪는 큰 변화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결국 좀 다른 사람이라는 걸 깨닫는 것. 자라면서 변화가 생긴다. 분명 어린 시절에는 잘 맞았지만, 자신도 모르게 변하는 취향, 성향이 생긴다. 그러다 보면 친구와 차이가 생긴다. 코우와 유타도 이런 타이밍이었다. 너무나 잘 맞는 둘이었기에 오히려 다름이 큰 흔들림이었다. 그래도 이 사건을 통해 서로를 이해할 기회가 만들어졌다. 코우는 유타를, 현실을 모르는 무개념이라 말했지만, 결국 자신을 구한 것이 유타였다. 코우가 생각한 것처럼 유타는 현실을 모르는 어린애도 아니고, 무력한 바보도 아니었다. 유타는 코우가 이해되지 않았다. 왜 말대답을 해서 싸우는지, 길에서 시위하는지 즐기지 못하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싸우지 않고 있던 유타는 동아리방을 빼앗기고, 클럽도 없어졌다. 우퍼를 옮겨주었던 친구도 빼앗겼다. 이런 상황들을 겪으며 아마도 유타와 코우는 다른 길을 가더라도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되었을 것이다.영화를 보고청소년 주인공을 다루는 청춘물은 가끔 많은 것들이 제외된다. 특히 정치적인 요소가 우정의 흔들림의 원인으로 나온 영화가 얼마나 있을까 싶다. 마치 학생이라고 정치적 의견이 없다고 여겨지는 것처럼 어리기에, 보호받는 존재기에 오히려 소외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해피엔드는 확실히 학생이, 청춘이 겪는 것을 색안경을 벗고 그려냈다는 점에서 좋다. 그래서 꼭 청소년이 아니더라도 모든 세대가 겪었을 일을, 현재의 일을 말하고 있다고 느껴졌다.기억력이 뛰어나지 않아서 영화를 한 번, 두 번 보고 심층 리뷰를 쓸 수 없는 타입이다. 언젠가 OTT에 들어온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분석하고 싶은 영화이다. 아직도 궁금한 점과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조금 더 준비해서 이야기해 보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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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빙 <마녀식당으로 오세요> 티저 예고편
[2021년 7월 16일, 티빙 공개]
대가가 담긴 소원을 파는 마녀식당에서 마녀 희라(송지효)와 동업자 진(남지현), 알바 길용(채종협)이 사연 가득한 손님들과 만들어가는 소울 충전 잔혹 판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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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이터널스> 30초 예고편
마블 스튜디오의 <이터널스>는 수 천년에 걸쳐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살아온 불멸의 히어로들이 <어벤져스: 엔드게임> 이후 인류의 가장 오래된 적 '데비안츠'에 맞서기 위해 다시 힘을 합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