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DAY2025-01-04 11:35:10
시빌 워 : 분열의 시대 | 늦은 개봉일이 야속할 경고문
<시빌 워 : 분열의 시대> 리뷰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극심한 사회적 갈등이 지속된 끝에 역사상 두 번째로 내전 상태에 돌입한 미국. 연방에서 독립한 주들의 시민군과 연방군이 치열한 전투를 지속하는 가운데, 기자 ‘리(커스틴 던스트)’와 ‘조엘(와그너 모라)’, ‘새미(스티븐 핸더슨)’, 그리고 ‘제시(케일리 스페이니)’는 연방 정부의 수도 워싱턴 D.C.로 향한다. 내전 발발 후 일방적인 기자회견 외에는 속내를 밝힌 적 없는 '대통령'(닉 오퍼먼)을 인터뷰하기 위해서.
현실에 역사와 상상을 더한 경고문
2021년 1월 6일,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의회 인증일. 폭도들이 미국 국회의사당을 무력 점거했다. 대선 패배 후 부정선거 음모론을 제기한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을 지지하며 선거 결과를 바꾸려고. 폭동은 이내 진압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미국 의회가 1983년 미 의회의 상원 회의장에 폭탄 테러가 자행된 이후 40여 년만에, 그것도 자국민에 의해 피해를 입었다는 오명을 남겼다.
무엇보다도 이는 민주주의 선도자로 자처하고, 다양성과 포용성의 국가라고 내세우던 미국의 실상이 고스란히 드러난 사건이라서 특히 충격적이었다. 부정선거 음모론과 대통령 선거 불복 선언, 그리고 QAnon발 딥 스테이트 음모론과 같은 낭설에 의해 파괴된 미국 민주주의 시스템을 목격했으니까. 극심한 양극화로 인해 미국 사회가 상상도 못 했던 디스토피아에 가까워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시빌 워: 분열의 시대>(이하 <시빌 워>)는 이처럼 극심해지는 사회적 양극화에 역사적 맥락과 약간의 상상력을 덧붙였다. 종군기자의 시점에서 일부러 거리를 둔 채 미국의 두 번째 내전을 관찰하며 현실을 바꾸지 않으면 발생가능한 미래를 경고한다. 하지만 <시빌 워>의 야심과 의도는 기대에 비해 날카롭게 느껴지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영화보다 영화적인 현실이 <시빌 워>의 역할과 메시지를 이미 대신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전쟁
시작은 야심에 걸맞는다. TV에서는 미국 대통령이 비상계엄이라도 선포하는 듯이 결연하게 승전 발표를 진행한다. 중계를 지켜보는 리의 방 밖, 도시 한복판에서는 폭발음이 들리며 내전에 휩싸인 미국의 현실이 보인다. 뒤이어 내전에 휩싸인 미국이라는 상상력에 부합하는 이미지도 연달아 펼쳐진다. 뉴욕에서는 난민들이 구호물자에 의존하고, 구호물품을 배부할 때 또 한 번 폭탄 테러가 발생하는 식이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그 이후로 <시빌 워>는 중반부까지 내전 상황임을 알 수 있는 묘사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특히 정보가 부족하다. 내전의 구체적인 원인과 양상은 등장인물들의 대사를 듣고 알아서 짜 맞춰야 한다. 일례로 새미가 대통령 인터뷰를 위해 준비한 질문을 본 뒤 권위주의 대통령이 이끄는 미국 연방정부가 미국 연방수사국을 해체하고, 반정부 시위대를 공습하는 등 폭정을 저질렀음을 유추해야 한다.
이민자와 인종 문제가 내전의 주요 원인 중 하나라는 암시도 마찬가지다. 워싱턴 D.C. 인근에서 제시는 흑인들을 집단 살해 중이던 군인에게 붙잡힌다. 이때 군인들은 그녀의 동행 중 홍콩 출신 기자만 골라 살해하고, 다른 이들은 반항하지 않는 한 위협만 한다. "포틀랜드의 마오주의자"라는 대사와 연결시키면 비로소 인종 차별과 이민자 문제, 미중 대립 등이 내전을 격화시켰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이에 더해 주인공 일행의 여정을 따라가면 캘리포니아 주와 텍사스 주를 주축으로 한 '서부군', 동남부 지역 19주가 뭉친 '플로리다 동맹'이 분리 독립해 연방군과 내전 중이라는 현황도 제한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다. 즉, <시빌 워>는 전쟁 영화처럼 보이지만 정작 마지막까지 전쟁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애쓴다. 자연히 초중반부까지는 내용에 몰입하기가 쉽지 않다.
몰입을 방해하는 여정
흥미롭게도 <시빌 워>는 전쟁이 아닌 로드 트립에 나서면서 본색을 드러낸다. 종군 기자인 네 주인공은 백악관으로 향한다. 내전 발발 이후 대통령과의 첫 인터뷰를 하기 위해서. 하지만 서부군이 먼저 워싱턴 D.C.와 백악관에 당도한 나머지 그들은 계획한 인터뷰를 진행하지 못한다. 이는 여정의 목적을 맥거핀으로 이용하고, 그 대신 여정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로드 무비 작법에 정확히 들어맞는 전개다.
리, 새미, 조엘, 제시의 여정은 그 자체로 두 가지 메시지를 전달한다. 우선 내전의 참혹함을 강조한다. 언제 어디서나 시체가 등장하고, 민병대와 군인이 전투를 펼치며, 무고한 시민 사이에서 폭탄이 터지는 불안정한 상황이 끊이지 않는다. 휴지조각이 되어버린 미국 달러 대신 캐나다 달러로만 물건을 살 수 있고, 그저 고향이 홍콩이거나 피부색이 검은색이라는 이유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그와 동시에 내전으로부터 거리를 두도록 유도한다. 제시는 베테랑 사진 기자이자 롤모델인 리로부터 전쟁 지역에서 취재하는 법을 배운다. 총격적인 중인 군인들과 동행하면서 가장 생생하고 정확한 현장의 순간을 포착하려 한다. 그런데 묘한 연출 때문에 이 과정은 내전이라는 맥락과 동떨어져 있는 듯하다. 치열한 총격전에 우스꽝스러운 힙합 음악을 더해서 전투 중인 양 진영 어느 쪽에도 동조하지 않도록 만든다.
그렇다고 해서 아담 맥케이 감독의 <돈 룩 업> 같은 블랙 코미디를 의도하지도 않는다. 마지막까지 주요 장면 대부분은 퓰리처상을 수상해야 할 것 같은 흑백 보도사진 구도로 구성된다. 진중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관객을 철저히 관찰자 시점에 머물게 한다. 강렬한 음향 효과 덕분에 살 떨리는 현장감이 강조되고, 갈수록 전쟁 분위기가 짙어지는 후반부에서야 주인공들에게 몰입할 여지가 생겨난다.
영화라는 사진전
그러다 보니 <시빌 워>를 보다 보면 질문 하나가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왜 하필 사진 기자 시점에서 내전을 다룰까?'라는 의문이다. 애초에 내전이라는 스펙터클 속에 관객을 빠트리고자 했다면, 극 중 등장한 인물 중 더 적합해 보이는 이들이 많다. 대통령이나 각 진영에 속한 군인들만 내세워도 내전을 충분히 극적으로 묘사할 수 있다. 전투 현장을 구체적으로 묘사할수록 내전의 참혹함도 더 직관적으로 전해질 수 있다.
하지만 사진 기자의 본질을 따져 본다면 <시빌 워>의 독특한 구성과 형식, 연출과 편집은 비로소 하나의 의도를 보여준다. 사진 기자는 언제나 카메라 렌즈를 통해서 세상을 본다. 어떤 순간은 사진으로 남기고 어떤 순간은 흘려보낼지 필터링을 하는 게 그들의 업이다. 사건과 현장에 일부러 몰입도, 공감도 하지 않는다. 그 대신 누구보다 냉정하게 가치를 평가하고, 사진만으로 사건의 의미를 극대화하는 게 그들의 일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시빌 워>는 일종의 사진전 같다. 내전에 관해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것만 보더라도 최소한의 설명만 붙는 보도 사진과 유사하다. 즉, 관객들이 미국의 두 번째 내전을 일종의 스펙터클로 즐기는 것은 애초에 목적이 아니다. 꼭 미국의 상황이 아니더라도, 내전으로 표출될 정도로 양극화된 사회적 갈등을 한 발짝 떨어져서 관찰하면서 그 위험성을 곱씹게 만드는 게 본 의도인 셈이다.
이는 후반부 링컨 기념관 공방전, 워싱턴 D.C. 시가전, 백악관 공성전, 백악관 내부 전투를 <시카리오>나 <제로 다크 서티>처럼 영웅적 묘사 없이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이유와도 맞닿아 있다. 내전이라는 혼란상을 장르 영화로서 영위하는 대신 가까운 미래에 대한 경고로 활용한다. 언제 내전이 발생해도 이상하지 않을 사회적 갈등의 개인적, 공동체적 책임과 의무를 한 번쯤은 성찰하게 만드는 현실의 거울이나 다름없다.
사진전에 깃든 기자의 삶
제시와 리의 관계성은 사진전이라는 의도를 한 번 더 강조한다. 제시는 이제 막 현장에 발을 내디딘 사진기자다. 그녀는 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열정 하나를 앞세워 워싱턴 D.C.행 여정에 동행한다. 하지만 그녀가 마주한 현실은 상상을 뛰어넘었다. 주유소 장면이 대표적이다. 주유소 주인은 피범벅이 된 남성 둘을 매달아 놓고 그들을 죽일지 말지 제시에게 묻는다. 예상 못한 상황에 제시는 그대로 주유소 주인 앞에서 얼어붙는다.
베테랑 사진기자 리는 다르다. 주유소 주인을 두 남자 사이에 세운 후 차분히 사진을 찍는다. 스스로를 자책하는 제시에게 냉정히 종군기자의 덕목을 일러준다. 기자는 기록하는 사람이라고. 총알이 빗발치고 폭발이 난무한 전장이더라도 관찰자로서의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고. 못하겠으면 지금이라도 그만두라고. 이 충고에는 뼈가 있다. 기자라는 직업을 선택한 것 자체가 실수라는 말은 리의 실수 혹은 회한을 암시한다.
열정만 넘치는 제시와 냉정한 베테랑 리의 관계는 마지막 순간 다시 부각된다. 백악관 내부에서 총격전이 벌어지는 가운데 무리해서 사진 찍을 자세를 취한 제시. 그 순간 리는 몸을 던져 제시 대신 총알을 맞고, 제시는 쓰러지는 리를 연신 카메라에 담는다. 그녀의 희생 덕분에 제시는 대통령이 사살되는 역사적인 순간을 포착한 사진기자가 된다.
이는 리의 조언에 담긴 회한을 유추할 수 있는 힌트다. 리 역시 한 순간의 실수로 인해 선배를 잃었고, 그 순간을 후회하지만, 직업적 사명감 때문에 계속 사진을 찍지 않았을까. 그래서 본인을 닮은 제시를 만류하면서도 도와주고, 끝내 그녀를 위해 희생한 게 아닐까. 지친 자신을 대신해 제시에게 사명을 넘긴 것처럼도 보인다. 기자로서의 삶은 결코 평탄하지 않지만, <시빌 워>라는 사진전에 사용될 사진을 누군가는 찍어야 하니까.
영화보다 발 빠른 현실
안타깝게도 <시빌 워>는 영화 외적인 이슈로 인한 평가절하를 피할 수 없다. 우선 흥행을 고려한 선택이겠지만, 로드 무비를 블록버스터 전쟁 영화로 포장한 포스터와 예고편이 아쉽다. 겉포장을 보고 커진 기대를 영화 본편이 충족하지 못하면 실망감은 배가되니까. 예고편과는 전혀 다른 전개와 결말 때문에 혹평을 피하지 못했던 <조커: 폴리 아 되>처럼. <시빌 워>가 그 다음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더라도 놀랍지는 않다.
무엇보다도 4월 개봉한 미국과 달리 12월을 선택한 국내 개봉일이 특히 불운하다. <시빌 워>는 정치적, 사회적 양극화의 폐해와 그로 인한 부정적인 미래를 묘사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현직 대통령의 내란이라는 모습으로 최악의 미래가 이미 현실에 당도해 버렸다. 경고문이 너무 늦게 도착한 셈이다. 그 결과 1달 전이었으면 폐부를 찔렀을 메시지의 위력은, 진중하게 쌓아 올린 완성도가 무색하게도, 현실의 벽 앞에서 반감되고 만다.
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포장지와 타이밍이 야속할 냉철한 사진전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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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우주 신파극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2029년, 대한민국의 달 탐사선 '우리호'가 달로 향한다. 5년 전 발사 직후 폭발한 '나래호'와 달리 무사히 달 궤도로 향하는 듯 보였던 우리호. 그러나 이내 태양 흑점 폭발로 인한 태양풍이 우리호를 덮치고, 이 사고로 인해 3명의 우주비행사 중 ‘황선우’(도경수) 대원 혼자 생존한다.
달 착륙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는 대신 유일한 생존자를 귀환시키로 결정한 정부는 5년 전 나래호 사고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전임 센터장 ‘김재국’(설경구)을 프로젝트에 재합류시킨다. 하지만 태양풍에 이어 유성우가 달에 떨어지기 시작하자 재국은 혼자 귀환 작전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다. 이에 그는 NASA 유인 달 궤도선 메인 디렉터이자 전 아내인 ‘윤문영’(김희애)에게까지 도움을 청하며 모든 것을 건 작전에 나선다.
한국의 마이클 베이?
김용화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보다 보면 떠오르는 감독이 있다. 마이클 베이다. 두 감독은 많은 공통점을 지녔다. 상업적인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김용화 감독은 5명밖에 없는 쌍 천만 한국 감독이다. 마이클 베이도 <트랜스포머> 시리즈를 비롯해 <아마겟돈>과 <진주만> 등으로 세계적인 흥행을 일궈냈다.
작품 내적인 특징도 비슷하다. 시각적으로 화려하다. 김용화 감독의 기술적 성취는 두 말할 필요가 없다. 그가 설립한 텍스터 스튜디오는 <신과 함께> 시리즈를 비롯해 <백두산> 등에서 뛰어난 기술력을 선보였다. 마이클 베이도 사실적인 촬영과 CG를 결합해 2시간 넘도록 스크린에 집중할 수 있는 영상을 만든다.
단점도 같다. 내실이 부족하다. 김용화 감독의 작품은 늘 한국 특유의 신파극이라는 비판을 피하지 못했다. 마이블 베이 역시 각본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 액션과 스펙터클을 막무가내로 보여준다. 난장판을 뜻하는 단어 'Mayhem'과 그의 이름 'Bay'를 합친 'Bayhem'이라는 별명이 생길 정도다.
투입된 제작비만 280억 원에 달하는 김용화 감독의 신작 <더 문>은 그가 왜 '한국의 마이클 베이'인지를 증명한다. 한국 영화 최초로 달 탐사를 소재로 삼은 이 작품은 제작비 대비 놀라운 시각 효과를 보여주면서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다. 하지만 익숙하면서도 어색한 신파로 점철된 이야기는 이내 관객의 시선을 놓치고 만다.
눈을 사로잡는 한국 최초 달 탐사
촬영 전 프리 프로덕션 기간만 7개월가량 걸렸다는 말대로 <더 문>의 볼거리는 분명히 인상적이다. 김용화 감독의 장점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누리호가 폭발하는 첫 장면을 제외하면 어색한 장면이 거의 없다. 칼날 같은 선이 느껴질 정도로 정교한 질감도 눈에 띈다. 생존이 최우선인 절박한 분위기, 아무도 없는 우주 속 공포와 두려움을 강조하는데 최적화되어 있다.
사실 위기감을 고조하는 과정은 매끄럽지 않다. 편의적인 전개가 이어진다. 하필이면 유성우가 쏟아질 타이밍에 탐사선을 띄우고, 굳이 주인공을 우주선 가운데에 결박시켜서 상황 대응을 어렵게 만드는 식이다. 하지만 일단 위기가 생기면, 기술력을 앞세워 그 상황에 몰입하게 하는 힘은 좋다. <트랜스포머> 시리즈에서 스토리는 어색해도 변신 로봇의 액션을 보며 눈이 즐거워하듯이. 유성우를 피해 달아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그러다 보니 비슷한 영화가 떠오르기는 해도 과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물론 시퀀스 하나하나를 뜯어보면 기시감이 느껴진다. 재난의 시작은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그래비티>를, 유성우를 피하는 장면은 브래드 피트 주연의 <애드 아스트라>를 닮았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마션>도 마지막 탈출 시퀀스에서 스쳐 지나간다. 다만 '첫 시도'이기에 이해할 수 있는 레퍼런스처럼 보이기는 한다. 각 시퀀스의 구성은 좋기 때문이다. 상황 자체에 빠져들면 이 영화들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신파가 아니라 방법이 문제다
하지만 <더 문>은 김용화 감독의 예상가능한 단점도 고스란히 지녔다. 우주를 배경으로 한 탈출극이 아니라 SF 탈출극을 배경 삼아 신파극을 찍은 듯한 인상이다. 물론 약간의 변주는 있다. 익숙한 방식과 새로운 방식을 섞었다. 문제는 둘 다 부자연스럽다는 것. 신파를 활용하는 맥락은 여전히 억지스럽다. 즉, 신파를 넣은 게 문제가 아니라, 신파를 제대로 못 써서 문제다.
우선 <더 문>은 또 한 번 '가족애'라는 카드를 꺼내든다. 황선우의 아버지, '황규태'(이성민)를 중심으로 두 주인공을 엮는다. 5년 전 나로호 폭발 사고 이후 자살한 황규태. 죽음의 이유를 두고 황선우와 김재국은 서로 다른 진실을 숨기고 있다. 영화는 이처럼 애절한 부자 관계와 죄책감 가득한 우정을 충돌시키며 관객을 울리려 한다. 실제로 5년 간 감춘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 눈물을 안 흘리기도 쉽지 않다.
문제는 감동을 주기 위해 굳이 이해할 수 없는 전개를 선택한다는 점이다. 작중 진상은 이렇다. 나래호 프로젝트에는 결함이 있었다. 이에 황규태는 재국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하지만 재국은 나래호 발사를 강행했다. 달 착륙 프로젝트가 연기될까 봐 두렵다는 이유로. 그 결과 로켓은 폭발했고 둘은 각자의 방식으로 책임을 졌다. 한 명은 죽음으로. 다른 한 명은 잠적으로.
이러한 전개는 지나치게 편의적이다. 챌린저호 폭발 사고처럼 작은 결함 하나가 로켓 발사 실패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은 이미 대중적으로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당장 5월에는 누리호 3차 발사도 연기된 바 있다. 발사 예정일 당일에 발견된 소프트웨어 결함 때문에. 즉, 눈물이라는 목표 때문에 충분히 고려할 수 있는 현실적인 맥락을 일부러 외면한 셈이다. 그 결과 가슴 절절해야 할 가족애와 우정은 억지로 돌변하고 만다.
인류애라는 무리수
<더 문>의 또 다른 카드는 가족애와 우정을 넘어서는 '인류애'다. 황선우가 조난당했을 때, 미국 정부는 쉽사리 도움 요청에 응답하지 않는다. 우주 개발을 둘러싼 국가 간의 이해관계와 NASA 내부의 알력 싸움 때문에. 이에 영화는 황선우를 구해 달라고 인류애의 가치에 호소한다. 의도는 좋다. 발상과 아이디어도 그럴싸하다. 우주 개발 역사를 보면 경쟁 관계였던 미국과 러시아가 서로 협력한 사례도 여럿 찾을 수 있다.
이 또한 풀어내는 방식이 문제다. 인류애라는 감정에 호소하려면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근거를 내세워야 한다. 하지만 <더 문>은 지나치게 특수한 근거만 내세운다. NASA에서 유인 달 궤도선 '루나 게이트웨이'를 책임지는 메인 디렉터, 윤문영이 대표적이다. 그녀는 루나 게이트웨이에서 임무 수행 중인 우주 비행사에게 황선우를 구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들 모두 지구인이 아니라 우주인이라면서.
하지만 그녀의 말은 캐릭터의 배경 때문에 설득력이 부족하다. 그녀는 한국계 혹은 한국 국적이고, 김재국과 이혼한 전력이 있다. 그런 그녀가 NASA와 미국 정부의 지시를 무시한 채 한국인 우주 비행사를 구해달라고 호소한다. 말과 달리 혈연과 정에 기댄다는 생각을 안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보편적인 감성에 호소하는 스토리텔링에서 정작 한국이라는 특수성을 빼지 않은 셈이다.
설득을 하는 대상도 인류애라는 키워드에 적합한지 의문이 남는다. 윤문영도, 한국 정부도 한국의 우방국이자 철저히 제1세계에 속한 국가에게만 도움을 요청한다. 루나 게이트웨이에 있는 우주 비행사도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출신이다. 중국, 러시아, 일본 등이 우주 개발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하면, 인류애를 강조하려는 시도라기에는 다소 얄팍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첫 술에 배부르겠냐만은...
부적절한 신파 활용은 또 다른 문제를 낳는다. 신파의 비중이 크다 보니 달에서 고생하는 황선우보다 김재국과 윤문영의 이야기의 비중과 분량이 더 크다. 영화의 초점이 달이 아닌 지구에 맞춰져 있다. 그런데 정작 신파는 공감대가 약하다. 설득력도 없다. 그러다 보니 영화의 초점은 불명확해진다. 달에서의 위기가 지구의 상황과 겹쳐질 때 오히려 영화적 긴장감은 사라진다. 결국 <더 문>이라는 제목 자체가 어색해진다.
신파 때문에 희생당한 지점도 있다. 더 파고들 여지가 있는 대목을 전형적인 한국 영화답게 단순한 유머로 짚고 넘어가는 식이다. 비전문가 장관과 전문가 차관 및 센터장의 대립, 그로 인한 혼란과 오류 등은 충분히 드라마에 깊이를 더할 수 있는 갈등이다. 하지만 <더 문>은 조한철 배우의 이미지에 기대 손쉽게 해당 문제를 다루고 넘어간다.
이러한 완성도는 <더 문>의 흥행이 물음표인 이유이기도 하다. 팬데믹 이전을 기준으로 놓고 보면 사실 <더 문>은 무조건 흥행해야 하는 영화다. 제작비, 개봉 규모, 감독과 배우의 이름값, 배급사(CJ) 파워를 고려했을 때 실패할 수 없는 작품에 가깝다. 한국 최초의 달 착륙이라는 소재도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근래 한국 관객은 일정한 완성도를 보여주지 못하면, 영화값에 상응하는 재미를 보장하지 못하면 과감하게 영화를 포기하는 경향을 보인다. <한산: 용의 출현>과 <헌트>만 생존한 작년 여름 시장이 이를 방증한다. 안타깝지만 영화 자체의 완성도와 10만 명이 채 되지 않는 첫날 관객 수를 보면 <더 문>이 2023년 여름 시장의 첫 희생자가 되어도 이상하지는 않아 보인다.
Poor 형편없음
언제까지 첫 발자국이라고 박수쳐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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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잊을 수 없는 상실과 잃을 수 없는 그리움
* 본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클로즈> Close 2022
벨기에 / 드라마 / 104분
감독: 루카스 돈트
잊을 수 없는 상실과 잃을 수 없는 그리움으로 <클로즈>
레오는 생각이 멈추지 않아 잠을 자지 못하는 레미에게 작게 속삭인다. "상상해 봐 넌 방금 알에서 나온 아기 오리야, 난생처음으로 눈을 뜬 거야. 넌 다른 오리보다 훨씬 아름다워, 특별해." 계속 뒤척이던 레미는 레오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레오는 아기 오리가 도마뱀을 만났다며 이야기를 이어간다. "넌 도마뱀이 무섭지 않아, 사실 처음 봐서 잘 몰라, 하지만 넌 걔가 좋아. 너처럼 특별하거든. 아기 오리와 도마뱀은 같이 길을 떠나 그리고 함께 트램펄린을 뛰어." 레미는 그제야 깊은 보조개를 보이며 눈을 감는다.
레오가 언급하고 레미가 집중한 특별함에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피부로 느낀 특별함은 한때 내가 느꼈던 얼룩덜룩한 색깔이다. 우리 역시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특별하다고 믿었던 때가 있었으니까. 어두컴컴하고 외롭고 공허한 감정을 숨기고, 타인들 틈에 섞이고 싶지 않은 마음을 애써 좋게 표현하기 위해 '특별'로 나를 포장했던 기억. 지극히 개인적이라 내밀했고, 따라서 언제든 각자의 안전지대가 있었던 순간들…. 모두가 인정할 것이다, 나만의 기준을 처음 정립하고 보낸 유년 시절의 기억은 잊을 수는 있어도 결코 잃을 수는 없다는걸.
<클로즈>가 두 아이를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이 특별함에서 시작한다. 우린 이미 이 특수한 특별함의 결말을 알고 있다. 감당할 수 없는 마음으로 벼랑 끝에 섰던 그 시절의 나, 내가 반드시 앓아야만 했고 그리하여 놓쳐버렸던 관계, 하나를 잃는 순간 전부를 잃은 것만 같았던 순간. <클로즈>는 삼분의 일도 채우지 못한 '나'의 나이테를 스스로 도려내면서까지 제 세상을 지키려고 한 두 소년의 이야기를 담았다.
출처: 영화 <클로즈> 스틸(다음)
다른 아이, 틀린 사람, 특별한 존재, 그리하여 쉽게 외톨이가 되는 나. 두렵고 무서운 세상을 견디는 데 필요한 건 나와 똑 닮은 이방인이다. 딱 한 명이면 된다. 세상의 편협한 기준에 맞춰 사는 게 어렵고 힘든 '특별한' 내가 '특별한 나'를 운명적으로 만나 제삼자들의 노골적인 힐난에서 안전하게 벗어나는 것이다. 중요한 건, 탈출하는 순간 특별이란 단어엔 조금의 부정도 남아있지 않아야 한다. 레오와 레미가 직접 울타리를 세워 강한 연대를 형성한 것처럼 말이다. 두 사람 사이엔 공유하지 않는 감정도, 나눌 수 없는 이야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가능성과 모든 불가능성을 어떠한 기준 없이 전달하고 전달받는다. 일방적인 것 같지만, 엄연히 그들이 정한 룰이며 합의된 사랑이자 우정이다. 이 절대적인 포용과 충만한 상호교류는 레오와 레미의 세계를 같은 도형으로 찍어내는 것도 모자라 원래 하나였던 것처럼 단일 세계로 보이게 하는 착각을 일으킨다. 이 세상이 존재했을 때부터 너와 나는 함께였다는 믿음, 그 결과 견고한 울타리는 보이지 않는 경계로 완벽하게 변모한다.
수년간 함께 같은 계절을 지나왔던 레오와 레미는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뒤로 서로 다른 곳에서 혹독한 계절을 맞이한다. 단단하고 강력했던, 그래서 조금의 이질감도 느낄 수 없었던 울타리를 먼저 넘어 도망친 건 레오였다.
출처: 영화 <클로즈> 스틸(다음)
"너희 둘이 사귀니? 친구라기보단 너무 가까워 보여서."
장난기 섞인 농담 반 진담 반, 레오는 쫓기듯 부정했고 레미는 침묵했다. 말하는 자와 듣는 자가 동일한 언어를 쓰는 일은 희박하다. 각자가 정의한 단어를 조합해 서로의 의견을 파악하고 이해해 받아들일 뿐이다.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고, 엄청난 노력이 요구되며 어떤 결과든 받아들이는 면역력도 갖고 있어야 한다. 반 이상이 어긋나기를 택하기 때문이다. 중학교에 들어간 레오와 레미는 이제 막 작은 사회에 던져졌다. 어른도 갖지 못한 능력이 있을 리 만무하다. 고로 그들에겐 농담 반 진담 반은 있을 수 없다, 오로지 날카롭게 파고드는 냉혹한 악담뿐이지.
레오는 달라진다. 레미와 거리를 두고 적성에 맞지도 않는 아이스하키를 배우고 새로 사귄 친구들 틈에 섞여 주파수가 다른 웃음 코드에 반응한다. 특히 아이스하키를 배우는 레오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데, 이는 레오가 아이스하키를 자신의 남성성 표출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물론 그는 자신의 남성성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상태다. 무엇이 남자다움이며 어떤 시각이 다른 아이들이 원하는 시각인지 모른다. 목적 없고 보이지 않은 불안에 발이 걸린 채, 자기 확신과 의지를 버리고 형태조차 잡히지 않은 세계에 들어가려 애쓸 뿐이다. 레오가 타인의 잣대로 인해 자기 자신을 잃는 건 찰나였고, 레미는 이를 막을 힘도 명분도 없었다. 그들의 울타리는 이미 망가진 후였다. 누구나 때가 되면 자기만의 세상에서 나와 더 큰 세상을 맞닥뜨려야 한다지만 이를 제삼자가 무차별적으로 관여한다니, 참 애석한 일이다. 더 기분 상하는 건 그게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라는 걸 전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점점 더 노골적으로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레오에 레미는 혼란스러워한다. 레오에게 자신만의 속도와 방식으로 다가가 돌변한 이유를 묻지만, 돌아오는 건 대답을 품은 침묵이다. 레오는 레미에게 냉랭한 태도를 유지한다. 동시에 레미가 현재 자신의 상황을 헤아려주길 바란다. 레미라면, 나와 같은 세계에 사는 나라면 당연히 자신을 이해해 줄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레미는 레오와 다른 사람이다. 두 사람의 세계가 같은 모양으로 빚어졌을 뿐이다. 늘 같이했던 놀이도 나눴던 대화도 사라진 지 오래다. 끝내 레미는 처참히 부서진 울타리 앞에서 자신의 형체를 영원히 지우기로 한다. '나와 나'가 아닌 '나' 홀로 남은 세계에서 탈주하는 건 레미에겐 불가능한 일이었다. 레오에게 자기 존재를 부정당한 것만큼 슬픈 일이었다.
출처: 영화 <클로즈> 스틸(다음)
레미의 죽음으로 학교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심리상담을 진행한다. 레오는 더욱더 많은 친구를 사귀고, 공동체 안에 무난히 섞이기 위해 학교생활에 더 몰두한다. 악착같이 레미를 생각하지 않기 위해 아이스하키를 하고 새로운 친구 집에 놀러 가 잠도 자고, 부모님 화훼농장 일을 돕기도 한다. 가족은 온 마음을 다해 반쪽을 잃은 레오를 살피고 위로한다. 그러나 레오는 계속 고통에 몸부림친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레미가 부서진 울타리 앞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으며, 레미에게 마지막으로 건넸던 자신의 침묵이 사실은 엄청난 폭언이었다는 것을. 그는 레미에게 한 대답을 자신에게 똑같이, 수백 번 되풀이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혹독한 벌을 주기 위해 아이스하키를 했던 거고, 레미 엄마와의 대화를 피하면서도 모든 시선 끝엔 그녀를 담았으며 매일 고통을 삼켰다.
죄책감, 슬픔, 분노, 자책, 공포, 두려움. 처음 느끼는 복합적인 감정과 원치 않는 상황들.
마침내 팔을 다쳐 더 이상 아이스하키를 못하게 되자 레오는 레미의 부서진 화장실 문과 형언할 수 없는 슬픔, 그리고 죄책감에서 자신이 평생 벗어나 수 없을 거란 진실을 받아들인다. 레미를 향한 참을 수 없는 그리움 때문이었다. 그것은 그때 그 시절 우리가 반드시 마주해야만 했던 현실이었고, 온전한 내 편과 나였던 너를 다신 볼 수 없는 미래였다. 이전과 다르지 않게 흐르는 시간과 표면적으로만 바뀌는 계절 속에서, 괜찮아질 거란 믿음과 이별과 작별하는 이상적이고 획기적인 방법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아기 오리와 도마뱀이 함께 여행을 떠나는 아름다운 동화는 두 아이의 밤을 포근하게 해줄 수는 있어도 책임져주진 않으니까. 레미 엄마를 향한 레오의 고백이 유독 고통스럽고 가슴 아프게 다가오는 이유다.
출처: 영화 <클로즈> 스틸(다음)
레오와 레미의 특별함에서 시작했던 <클로즈>는 레오가 비로소 혼자가 되자 속도를 올려 우리 모두가 걸어야 했던 순간들을 빠르게 지나친다. 카메라는 더 가깝게 레오를 향하고, 이야기는 더 담담하게 레오를 통과한다. 이를 가슴 아픈 성장이라 말할 수 있을 때까지 레오의 모든 반응을 세밀하고 집요하게 관찰한다. 무엇보다 ‘지나간다’, ‘흘러간다’, ‘멈추지 않는다’에 몰두한다. <클로즈>의 초점은 상실한 레오가 아니라 상실한 레오의 뜀박질에 맞춰있기 때문이다. 충분히 감각적이고 심미적이지만 그 이상 선을 넘지 않는다. 동시다발적으로 솟구치는, 도저히 정의할 수 없는 감정들이 레오를 집어삼키는 걸 손 놓고 지켜보면서, 가장 소중한 사람을 잃은 아이에게 계속 상황을 안겨준다. 아이스하키도 심리상담도 꽃밭을 트랙터로 밀고 다시 그 땅에 모종을 심는 화훼농장 일도, 레오의 사랑하는 가족도 모두 레오의 이야기를 끊기지 않게 한다, 하루를 살게 한다. 덕분에 레오는 멈추지 않고 달린다.
무뎌짐이 당연한 세상 속에서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할 방법은 뒤가 아니라 앞에 있다.
둘이 뛰었던 농장을 혼자 뛰는 레오가 잠깐 멈칫거려도 더는 마냥 불안하지 않듯이.
잊을 수 없는 상실과 잃을 수 없는 그리움이 그날의 나를 아주 가까이서 이끌었음을 부정하지 않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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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찾는 여정, <걸후드>
인생은 끊임없이 나를 찾아가는 여정과도 같다. 우리는 살면서 보고 겪는 모든 존재들을 통해 우리 자신을 성장시킨다. <걸후드>는 셀린 시아마 감독이 보여주는 십 대 여성 청소년의 성장기이고, 그 단면을 통해 영화를 감상하는 관객에게 물음을 던진다. 관객은 스스로 돌이키게 된다. 당신은 얼마나 스스로에 대해 알고, 찾았는가?
영화는 생계를 이끄는 모친을 대신하여 동생들을 돌보며 사는 여성 십 대 청소년인 `마리엠`의 이야기를 그린다. 이 영화에서 마리엠이 남성이 아닌 여성이라는 점의 극의 주제를 관통하고 있는 부분이기에 관객은 이를 간과할 수가 없다. 여성의 삶이라는 타이틀로도 고될 수 있는 주제는 십 대 청소년이라는 소재가 더해지며 더욱 주인공을 조인다. 평화로워 보이는 많은 청소년의 삶 중 특별히 흑인인 십 대의 여성 청소년을 그린 이유를 분명하게 인식하며 영화를 관람할 수밖에 없다.
<걸후드>는 마리엠이 성장하면서, 스스로가 그린 삶의 궤적을 더듬어가며 새 발자국을 남기는 과정을 세밀하게 보여주기 위해 세밀한 장치들을 마련해두었다. 친구, 가족, 주변인으로 뻗어나가며 겪는 감정 변화와 그에 따른 연기는, 우리가 이 영화를 감상하며 그 인물의 삶을 사는 것처럼 느끼고 생각하게 만든다.
영화에서의 성장은 마냥 고되거나 우울하지만은 않다. 성장은 삶의 일부 과정이기에 마리엠은 보통의 나날처럼 웃고, 울고, 화내며 살아간다. 누군가는 마리엠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고 또 누군가는 그의 삶에 흔적조차 남길 수 없는 미미한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그에 따라 마리엠은 한 그룹의 주요 인물이었다가 있는 듯 없는 듯 한 존재가 되기도 하며, 자신을 완전히 다잡은 사람이었다가 맥없이 무너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 과정은 마냥 초조하지만은 않다. 삶의 일부이며 관객인 우리 자신이 그랬듯 마리엠이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거나 답을 찾아낼 것이라는 기대를 하기 때문이다. 마리엠을 어떻게 살아갈지 갈피를 잡지 못하면서도 온몸을 내던져 세상을 경험한다. 자신과도 타인과도 수없이 부딪혀가며 빛을 내며 단단해진다. 영화 속 다이아몬드 장면이 떠오른다. 러닝타임 내내 몸과 행동으로 외쳐오던 마리엠은 끝끝내 그런 인생을 싫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내며 자신의 새 방향을 찾아낸다. 그 방향이 어디인지 관객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우리는 마리엠이 제자리걸음을 멈춰 나아가리라는 것만은 확실하게 알 수 있다. 그리고 결국 마리엠은 찾아낼 것이다. <걸후드>는 그렇게 믿게 하는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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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포를 예열하는 탐정 느와르로 귀환하다
드디어 로버트 패티슨을 영화관에서 봤다. 사실 그의 작품을 해리포터 조연을 제외하고, 그가 주연으로 나온 작품을 단 한 개도 보지 않았다. 그래서 영화 <더 배트맨>에서 그가 연기하는 배트맨이 기대가 됐고, 그 기대는 옳았다. 배트맨 2년차의 브루스 웨인을 연기하는 그의 모습은 정말 찰떡이었다.
영화 <더 배트맨> 시놉시스
영웅이 될 것인가 악당이 될 것인가, 운명을 결정할 선택만이 남았다
지난 2년간 고담시의 어둠 속에서 범법자들을 응징하며 배트맨으로 살아온 브루스 웨인. 알프레드와 제임스 고든 경위의 도움 아래, 도시의 부패한 공직자들과 고위 관료들 사이에서 복수의 화신으로 활약한다. 고담의 시장 선거를 앞두고 고담의 엘리트 집단을 목표로 잔악한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수수께끼 킬러 리들러가 나타나자, 최고의 탐정 브루스 웨인이 수사에 나서고 남겨진 단서를 풀어가며 캣우먼, 펭귄, 카마인 팔코네, 리들러를 차례대로 만난다. 사이코 범인의 미스터리를 수사하면서 그 모든 증거가 자신을 향한 의도적인 메시지였음을 깨닫고, 리들러에게 농락 당한 배트맨은 광기에 사로잡힌다. 범인의 무자비한 계획을 막고 오랫동안 고담시를 썩게 만든 권력 부패의 고리를 끊어야 하지만, 부모님의 죽음에 얽힌 진실이 밝혀지자 복수와 정의 사이에서 갈등한다.
* 해당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더 배트맨>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빛이 어디 있나요?
영화 <더 배트맨>을 다 보고 나서 영화관을 나오며 느낀 것은 ‘역시 빛은 좋은 것이다’, ‘사람은 빛 속에서 살아야 한다’였다. 영화 <더 배트맨>을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정말 형광등이든 자연광이든 빛 아래에 있는 씬이 거의 없다. 거의 모든 신이 밤거리에서 진행이 되기 때문에 어둠 그 자체의 모숨을 보여준다. 환경적으로도 거리의 어둠을 보여주면서 배트매느이 어두운 내면과 고담시의 어두운 환경이 합쳐지니 역대급으로 우울하고 침전하는 듯한 영화가 탄생했다. 어벤져스처럼 스펙타클하고 화려한 느낌을 기대한다면 그건 잘못 기대를 한 것이다. 덩말 우울, 침울의 끝판왕을 만나볼 수 있다.
특히 나는 우울한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그럼에도 3시간 가량되는 이 영화를 다 볼 수 있었던 이유는 bgm이 한 몫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 무거운 느낌이 강하게 들면서도 사람의 심장을 쪼이는 듯한 긴장감을 텐션감 높게 풀어내서 극도의 우울한 분위기 속에서도 영화에 집중할 수 있도록 잘 풀어낸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
공포를 예열하도록 하지...!
아직도 생각난다. 배트맨이 등장할 때마다 나오는 그 사운드. 둥두둥둥 둥두둥둥~ 의성어로 쓰니까 굉장히 하찮아 보이는데,,, 그렇지 않다. 영화 <더 배트맨>은 빠르지 않다. 배트맨이 배트카를 몰고 추격을 할 때도 빠른 박진감이라기 보다는 무거운 위압감이 더 잘 느껴지는 영화라고 볼 수 있다. 빠르게 적을 공격한다는 느낌보다는 적에게 공포감을 최대한 실어주고 그 공포가 극한에 달했을 때 두둥~ 하고 나타나서 처단하는 타입이다.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bgm만 흘러나오는 그 공포, 그리고 저벅저벅 발자국 소리는 들리는데 주변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 암흑에 대한 두려움을 너무나도 잘 활용한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 그래서 대사에도 나온다. “공포는 도구다.” 이 대사가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데 그 말을 너무나도 잘 이용하고, 두려움과 공포를 이용해서 무법자들을 처단하는 배트맨의 정의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것은 왜일까?
암흑 속에 있는 배트맨의 감정을 나 혼자만 잘 구분을 못한 것일 수도 있다. 사실 영화 보다가 없던 야맹증 생기는 줄 알았다. 스크린이 아주 온통 시꺼멓다,,, 영화 <더 배트맨> 속 브루스 웨인은 우울과 부노 이 두 가지 감정만을 가진 사람처럼 비춰졌다. 평상시와 범죄자들을 처단할 때는 우울하면서도 침착한 상태로, 자신의 가문에 대한 비밀이 폭로될 때에는 분노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가문에 대한 비밀을 알고 좌절하면 무너지는 장면에서 조금 더 감정의 베리에이션을 줬더라면 왜 배트맨이 마지막에 스스로를 리벤저(복수)라고 일컫지 않고 세상을 구원하는 것은 희망이라고 말햇는지 더 설명이 잘 되지 안핬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복수가 곧 정의라고 믿으며 내가 바로 복수다라고 외쳤던 시그니처를 도시를 범죄로 물들인 자경단의 이비에서 똑같은 말을 듣자 나의 길이 잘못됐다는 허망함에 무너져서 정말 마지막 장면에서 누전되는 전깃줄을 자르면서 배트맨이 자살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벌떡 일어나서 조명탄을 터뜨리더니 사람들을 구하러 가는 모습을 보고,, 음,,? 나의 해석이 잘못된 것인가,, 다음 편에서 조금 더 감정의 변화와 그 폭이 다채로운 배트맨을 만날 수 있길 바란다. 우울에도 그 종류는 다채로우니 말이다.
영화 <더 배트맨>은 3시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배트맨의 우울함에 함께 허우적대면서도 단 순간도 집중하지 않을 수 없었던 작품이었다. 중간중간 번역이 왜 저렇게 됐을까? 늬앙스를 잘 살리지 못한 장면들이 곳곳에 있어서 안타까웠지만 그래도 충분히 역작이었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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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를 다시 보듬어보는 소중한 순간
쁘띠마망 (Petite Maman, 2021)
개봉일 : 2021.10.07 (한국 기준)
감독 : 셀린 시아마
출연 : 조세핀 산스, 가브리엘 산스
우리를 다시 보듬어보는 소중한 순간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성공적인 개봉 이후, <워터 릴리스>, <톰보이>, <걸후드>까지. 일명 성장 3부작을 통해 따스하고 섬세한 감성을 가진 감독으로 인정받은 셀린 시아마 감독의 새로운 영화 <쁘띠마망>.
다양성과 성장을 중심으로 한 이전 작품들보다 한층 더 깊어진 감성을 담은 <쁘띠마망>은 어린아이의 작은 손처럼 아주 부드럽고 순수하게 보는 이의 마음을 토닥인다.
영화의 주인공은 맑은 눈을 가진 어린 소녀 녤리다. 녤리는 엄마 아빠와 함께 외할머니의 유품을 정리하기 위해 엄마와 외할머니의 추억이 담긴 시골집에 가게된다. 그리고 엄마의 소중한 오두막과 추억이 남아있는 숲에서 엄마와 이름이 같은 소녀 ‘마리옹’을 만난다.
녤리와 마리옹은 자연스럽게 서로의 뒤를 따르고, 손을 잡고 함께 오두막을 쌓아간다. 눈을 맞추자마자 느껴졌던 친밀감과 애정. 이 마법 같은 만남과 며칠간의 시간은 녤리와 마리옹의 마음을 조심스레 감싸 안는다.
아이들의 맑은 웃음소리가 울리고, 녤리와 마리옹이 서로의 이름을 나지막하게 부르는 순간, 나의 마음도 자연스레 활짝 열려버렸다. 이름을 부르는 것, 사랑을 속삭이는 것, 서로의 고민을 말하는 것이, 괜찮다고 조용히 안아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새삼스레 다시 느끼게 되는 순간이었다.
아픈 마음을 숨기고 살아가는 엄마 마리옹과 엄마의 마음을 토닥여주지 못해 속상해했던 딸 넬리. 그리고 녤리의 고민을 들어주는 친구 마리옹.
녤리와 마리옹의 우정과 세 사람 사이에 숨겨진 비밀이 어떤 것인지 궁금하다면, 마음속에 담아둔 소중한 사람을 향한 사랑에서 피어난 아픔을 위로받고 싶다면 <쁘띠마망>을 꼭 보라고 말하고 싶다. 이 작은 위로가 꽁꽁 숨겨둔 고민을 해결해 줄 수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하고 싶어 고민했던 위로를 전할 용기를 줄지도 모르니까.
쁘띠마망 시놉시스
외할머니의 유품을 정리하기 위해, 엄마 ‘마리옹’과 함께 시골집으로 내려온 ‘넬리’.
어린 시절 엄마의 추억이 깃든 그곳에서 ‘넬리’는 엄마와 이름이 같은 동갑내기 ‘마리옹’을 만나게 된다.
단숨에 서로에게 친밀함을 느끼는 ‘넬리’와 ‘마리옹’! 하지만 ‘넬리’는 이 우연한 만남 속에서 반짝이는 비밀을 알게 되는데…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마음이 아픈 엄마 마리옹
녤리의 엄마 마리옹은 마음이 아픈 사람이다. 어린 나이에 마리옹을 낳아 사랑으로 키워온 엄마. 엄마로서의 책임감으로도 벅찰 텐데, 사랑하는 엄마(외할머니)까지 마리옹의 곁을 떠난다. 언젠가 이별할거란 걸 알고 있었겠지만, 이별을 예감했다고 해서 아프지 않은 건 아니니까.
녤리는 마리옹이 많이 아파하고 있다는 걸 안다. 외할머니의 집으로 향하는 차 안, 녤리는 마리옹에게 과자와 음료를 건네고, 이어서 목을 감싸 안는다. 마리옹은 녤리 덕분에 잠시나마 웃음을 짓는다. 엄마의 아픈 마음을 위로하고 싶어 하는 아이의 작은 행동이 안타깝고 사랑스럽다.
엄마의 추억이 담긴 곳에서 만난, 궁금했던 시절의 엄마
외할머니와 엄마는 이 집에서 어떤 추억을 쌓았을까, 엄마는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을까? 녤리는 엄마와 할머니의 사이가 어땠을지, 나와 같은 나이의 엄마는 무얼 했는지 궁금해한다. 하지만 마리옹은 오두막에 대한 단편적인 이야기만 해줄 뿐, 추억을 자세히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마리옹은 아픈 마음도, 아프지 않았던 순간들도 모두 보이지 않는 깊은 곳에 숨긴 채 넬리에게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녤리는 마리옹이 어릴 때 만들었다고 했던 오두막이, 추억이 그 자리에 남아있을지 궁금해지기라도 한 건지 마리옹이 담아준 시리얼을 비우고 혼자 숲으로 향한다. 그리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오두막 앞에서 엄마와 이름이 같은 소녀 마리옹을, 자신과 같은 나이의 엄마를 만난다.
궁금해하기만 했던 그 시절의 엄마 마리옹. 녤리는 마리옹의 뒤를 따라 외할머니와 마리옹이 함께 살았던, 지금은 비어버린 외할머니의 집으로 향한다. 흰색으로 칠해진 벽이 아닌 연녹색의 벽이 그대로 남아있는, 외할머니가 앉아 있는 따뜻한 집으로.
말할 곳이 없었던 비밀
녤리는 마리옹의 마음이 아픈 이유가 궁금했지만 답해주지 않는 마리옹을 바라보며 그저 묵묵히 기다린다. 그리고 어린 마리옹을 만났을 때,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었던 마음을 털어놓는다.
“가끔은 나 때문에 엄마가 슬픈 게 아닐까 해.”라고.
가만히 녤리를 쳐다보던 마리옹은 답한다. “너 때문에 슬픈 건 아냐.”라고.
녤리는 어린 마리옹을 만나 홀로 고민했던 마리옹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위로받고, 어린 마리옹이 털어놓은 꿈과 미래를 알게 된다. 마지막 날 아침, 서로 마음을 나눈 두 아이가 팔을 활짝 벌려 모습이 찡하게 다가온다. 언제든 엄마가 떠나지 않을까, 내가 엄마를 힘들게 하는 원인이 아닐까 걱정하고 있던 녤리의 마음이 스르르 풀리는 순간이다.
엄마도 나도 누군가의 딸이니까
마리옹은 이른 나이에 녤리를 낳고, 어릴 적 꿈꿨던 배우의 삶이 아닌 엄마로서의 삶을 산다. 그녀에게 삶은 조금 벅찬 존재일지도 모른다. 엄마이면서 누군가의 딸이기도 해야 하는 삶. 마리옹은 자신의 고민을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않고 홀로 아파한다.
마리옹은 엄마(외할머니)와 이별하고 다시 엄마의 집을 마주할 수 없다며 집을 떠난다. 그리고 며칠의 시간이 지난 후, 다시 돌아온다. 마리옹은 내가 엄마를 잃은 슬픔을 겪는 것처럼, 내가 없다면 녤리 또한 그 슬픔을 겪게 된다는 걸 깨닫기라도 한 듯 녤리에게 “먼저 떠나서 미안하다”고 사과한다.
녤리는 “미안해하지 마.”라고 답한다. 녤리는 어린 마리옹을 만난 후, 마리옹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엄마도 힘들 수 있고, 엄마이기 이전에 누군가의 딸이자 엄마와의 이별 앞에서 큰 아픔을 겪고 있는 딸이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마리옹과 녤리는 서로의 이름을 부른다. 그리고 눈을 맞추며 서로의 눈빛 안에 담긴 마음을 확인한다. 조금 뜬금없을 지도 모르지만 어찌 됐든 엄마와 딸은 서로를 가장 잘 아는 소중한 친구라는 말이 떠오르는 엔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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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욕망은 빈부를 가리지 않는다
<미드 나잇 인 파리>의 주인공 길(오웬 윌슨 역 )은 낭만이 가득한 1920년대의 파리를 꿈꿨다. 그러나 그곳에서 만난 피카소의 뮤즈 아드리아나(마리옹 꼬띠아르)는 1920년에 만족하지 못했고. 그녀가 진정 원한 건 ‘벨 에포크’ 시대의 파리였다. ‘좋은 시대’라고 불리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해당하는 이 시기 파리는 전에 없던 풍요와 평화를 누렸다. 인상주의 화가들의 강렬한 색채와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물랭루주와 레스토랑 맥심으로 아름답게 물든 이 시대 거리에는 우아한 복장의 신사 숙녀들이 넘쳤다. 문화가 꽃피우고 화려하기만 한 시절. 영화 <어느 하녀의 일기>가 번지르르한 가면 뒤에 숨어 있던 화려함의 비밀을 폭로한다.
오디에른 지방 출신의 하녀 셀레스틴(레아 세이두 역). 불우한 어린 시절을 지나 하녀 일로 삶을 이어나가는 그녀는 매혹적인 외모와 도도한 언행으로 여자들에게는 질투의 대상이 남자들에게는 욕망이 대상이 된다. 수많은 집을 거치며 사람에 대한 불신과 염증을 느낀다.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던 그녀의 새 일터는 노르망디 시골에 사는 부유한 랑레르 부부의 집. 까다롭고 신경질적인 랑레르 부인과 시도 때도 없이 추파를 던지는 랑레르 씨. 저를 반기지 않는 여자 요리사 마리안과 속을 알 수 없는 마부 조제프까지. 조용한 시골에 찾아온 발칙한 셀레스틴의 일상이 시작된다.
영화의 원작 소설 <어느 하녀의 일기>는 ‘벨 에포크’ 시대 소설 장르의 변화를 이끈 옥타브 미르보의 작품. 권력 비판과 사회 참여에 앞섰던 지식인 옥타브 미르보는 <쥘 신부>, <세바스티앵 로크> 등의 작품을 통해 금기시되었던 전쟁과 종교에 대한 내용을 담아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예술 비평가로도 활동하면서 로댕, 고흐, 모네 등의 예술가들을 세상에 알리고 인간을 억압하는 제도에 맞서 싸워온 그의 대표작 <어느 하녀의 일기>는 당시 아름다운 겉모습과 달리 추악한 행위를 일삼았던 부르주아들의 실상을 하녀의 눈으로 드러냈다. 1946년에는 장 르느아르 감독을 통해, 1964년에는 루이스 브뉴엘 감독을 통해 이미 2번이나 리메이크되며 그 저력을 입증한 <어느 하녀의 일기>. 2015년 브누와 쟉꼬 감독의 손 끝에서 매력적인 레아 세이두로 다시 태어난 <어느 하녀의 일기>는 그들만의 색을 자랑한다.
기존 영화들이 보여주는 '하녀'의 이미지를 답습하는 <어느 하녀의 일기>. 어리고 예쁜 하녀와 그녀를 향한 성욕에 물든 부자 주인, 젊고 예쁜 하녀를 질투하는 안방마님까지 신선하지 않은 이미지들이 다르게 느껴지는 건 배우의 힘 덕분이다. 이미 <페어웰, 마이 퀸>에서 브누와 쟉꼬 감독과 호흡을 맞췄던 레아 세이두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시녀 역에 이어 이번에도 그녀만이 보여줄 수 있는 하녀로 거듭났다. 몸은 굽혀도 마음은 굽히지 않는 도도한 태도와 상대를 교묘하게 비꼬는 예리한 언행, 귀족들에게 지지 않는 세련된 패션 감각과 우아한 몸짓의 이 하녀는 그저 순종적인 다른 하녀들과 차원이 다른 마력을 내뿜으며 스크린 밖 관객들까지 유혹한다.
일기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원작 소설과 달리 영화는 그 어떤 내레이션도 없이 진행된다. 또한 원작 출판 당시 빈번한 플래시백과 과거 회상 형식으로 전통적 소설 장르에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부분 역시 재현되고는 있지만 다소 짧고 빠른감이 있어 아쉬움을 안긴다. 대신 레아 세이두의 표정과 혼잣말, 몸짓이 그녀의 속마음을 완벽히 대변하고. 쉴 틈 없이 지나가는 셀레스틴의 일상 속에서는 그녀가 느끼는 피곤과 그녀 주위에서 일어나는 알 수 없는 일들에 대한 호기심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19세기 고증에 정성을 기울인 것이 여실히 드러나는 <어느 하녀의 일기>. 그 시대의 화려한 옷과 장신구, 큰 저택과 안에 들어 있는 장식품들은 부유층이 누렸던 사치를 극대화하여 보여준다. 그러나 그 화려함 뒤에 가려진 추악함은 그 악취를 숨기지 못하고. 셀레스틴을 향한 마수들은 금욕적인 척하며 뒤로는 제 욕망을 채우기에 급급한 사람들의 모습을 지적하는데. 또다시 찾아온 평화의 시대. 과거 그 어느 시절보다 부유하고 다양화된 21세기에는 진짜 하녀들부터 기업과 국가의 노예가 된 사람들이 살고 있다. 눈부신 발전 속에 숨겨진 이면을 폭로할 수많은 하녀들의 이야기를 엿볼 날이 오길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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