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tto2024-12-12 01:33:55
사소하지 않은
<이처럼 사소한 것들> 리뷰
스크린 밖의 상황과 안의 상황이 겹쳐 보이면서 영화가 성큼 다가올 때가 있다.
간밤에 아주 짧은 잠을 자고 모인 극장에서도,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공감하고 용기를 준다.
‘사소한 것들’이 무엇인지 알려 주지 않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이미 ‘사소한 것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개인을 지탱하는 과거와 기억, 읽은 책, 받았던 선물, 충격과 후회가 바로 그것이다. 정의롭고 용기있는 행동은 어떤 대의나 대단한 정치적 신념이 아니라 이런 것들이 모여서 가능하다는 것을, 목격하고 나서 모른 척 하지 않고 행동하게 되는 이유는 전혀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말해 준다. 주변 사람들은 행동을 만류한다. 소동을 일으키지 말고, 현재의 평화를 유지하자고 말한다. 하지만 개인을 구성하는 ‘사소한 것들’ 중 하나인, 밤에 잠 못들게 하는 질문 사이에는 결코 외면할 수 없는 고통이 끼어든다. 그리고 나서 내린 결정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한 사람의 세상을 완전히 뒤집어 놓을 만큼 커다란 정의로 거듭난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 결코 사소하지 않은 용기를 다룬 작품이라는 안내는 관객들을 기꺼이 극장으로 불러 모았다. 클레어 키건이 써내려간 강력한 이야기, 주인공의 충돌하는 내면과 혼란을 스크린 위에서 보는 경험은 그녀의 글을 두번, 세번 읽는 것 만큼이나 큰 울림을 준다. 관객을 붙들어 두는 이런 힘은 문학과 영화가 연결될 때 발생하는 신비한 효과이기도 하다. 극장을 나서며 더 많은 사람들이 결코 사소하지 않은 이 용기를 전해 받기를 원하게 된다.
*본 리뷰는 하이스트레인저 씨네랩에서 초대받은 시사회 참석 후 작성되었습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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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징어 게임>, 이기기 위해 필요한 진짜 능력
2021년 가장 큰 화제를 일으킨 넷플릭스 오리지널 한국 드라마 <오징어 게임>.
무엇하나 내세울 것 없는, 지질함의 극치 '성기훈'은 오징어 게임의 최후 1인이 된다.
오징어 게임 최후 1인 승자가 되는 '성기훈'(이정재 역)
바닥 중의 바닥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여 서로의 목숨을 내걸고 참여하는 '오징어 게임'.
그 잔혹한 서바이벌 현장에는 '사회에서 잘 먹히는' 특별함을 장착한 인물들도 꽤 모여 있었다. (싸움을 잘하거나, 특수 기술이 있거나..)
사회에서 잘하는 것 하나 없는 성기훈은 어떻게 최종 우승자가 되었을까.
잘 보이지 않았던 그만의 무기, 그만의 특별함은 무엇이었나.
그가 '지질하고, 능력 없고, 못났고, 사회적 약자이고, 바닥인생'인 것은, '가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기훈이 사는 세상,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떠한 세상인가.
어떠한 서사가 지배하는 세상인가.
나는 소유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내가 더 많이 소유할수록 나는 더한 존재가 된다.
'내가 소유한 것'이 곧 '내'가 되는 세상에서,
가진 것이 없는 자들의 정체성은 곧바로 '찌질이, 실패자, 낙오자'가 되어 버린다.
수많은 찌질이, 실패자, 낙오자 가운데, 기훈이 특별한 이유는 무엇인가.
기훈이 오징어 게임 참가자로서 증명사진 찍는 모습
우리가 놓여 있는 이 판은, '소유하는 자가 곧 승자'가 된다는 강력한 룰이 지배하고 있다.
그 판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다만, 그 판 위에서 '장기판의 말처럼 도구'가 되어 살아갈 것인가, '존재하는 나'로서 살아갈 것인가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
기훈은 비록 '가진 것이 없는 자'로서 장기판의 '말'과 같은 존재로 취급을 받지만,
중요한 순간순간마다 '말'이 아니라 '나'로서 살아가는 선택을 내린다.
#. 뒷 꿍꿍이가 없는, 관계 속 계산기를 두드리지 않는 사람
상우를 만나 반가운 기훈
기훈(이정재 역)은 오징어 게임에 참가하게 되면서 어릴 적부터 알던 동생 상우(박해수 역)를 만나게 된다.
상우는 기훈과 달리 똑똑하고 사회에서 크게 성공했던 인재였다.
그러나 자신의 똑똑함이 독이 되어 상우 역시 오징어 게임 참가 자격을 얻게 된다.
상우는 쉽게 기훈에게 다가가지 못한다. 뒷 꿍꿍이가 있기 때문이다. 머릿속으로 계속 계산을 하는 중이다.
이 사람은 나에게 도움이 될 것인가, 아니면 내 발목을 잡을 사람인가.
그러나 기훈은 너무나 '반갑게', 빙구미를 발산하며 상우에게 다가간다.
뒷 꿍꿍이가 없다. 그냥 얼굴을 보니 반가운 것이다. 아는 동생을 만나니 든든한 것이다.
기훈은 사람을 대하면서, 계산기를 두드리지 않는다.
상대방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지 않는다. 대가를 먼저 따지고 다가가지 않는다.
그냥 마음이 먼저 간다. 대가와 상관없이.
기훈과 서로 조건없이 도움을 주고받는 오징어 게임 참가자들
그래서 기훈은, 자신을 먼저 도와준 알리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자신의 돈을 소매치기했던 새벽이 위기에 몰리자 새벽을 끝까지 도와주고,
오징어 게임 참가자 가운데 가장 최약체인 노인(오일남)을 유일하게 챙겨준다.
<오징어 게임> 속, 두 주축인 기훈(이정재 역)과 상우(박해수 역)가 사회에서 각각 '멍청함'과 '똑똑함'을 대변하는 '대립성'을 갖는다는 것은 중요한 설정이다. 상우는 늘 '계산'을 하고, 기훈은 '계산'을 할 줄 모른다.
'똑똑한 상우'는,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관계와 그렇지 않은 관계를 철저히 구분하면서, 기존 판의 룰을 철저히 따른다.
반면, '멍청한 기훈'은, 기존 판의 룰에 의해 철저히 '도구'로서 살아갈 것을 강요받지만, 기존 판의 룰을 깨며 '존재하는 나'로서 살고자 한다.
얼마나 멍청한지, 그는 자신이 모든 상금을 다 차지하기 바로 직전, 게임을 중단하고, '생명'을 살리기를 선택한다. (물론 그의 선택은 끝까지 기존 판의 룰을 따르고자 한 상우에 의해 뒤집히게 되지만...)
기훈은 삶의 기반을 진정성, 생동성, 경험의 질에 둔다.
소유에 두지 않는다.소유와 존재를 동일시하게 되면, 우리는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가를 기준으로 자신의 타당성을 입증하고자 한다. 내가 소유한 것으로 나의 정체성을 규정한다.
기훈은 '소유' 보다는 '생명'이 더 중요한 가치라는 것을 끝까지 놓치지 않은 사람이다.
중요한 순간마다 기훈이 한 선택들이 모여 기훈의 정체성을 만든다.
그가 소유한 것이 곧 그의 정체성이 되지 않는다.
그의 정체성은 그의 선택으로 만들어진다.
<오징어 게임> 마지막 판에서 맞대결을 하게 되는 기훈과 상우.
과연 누가 이길 것인가.
판의 룰을 철저히 따른 '똑똑한' 상우가 아니라,
판의 룰을 깨고자 했던 '멍청한' 기훈이 승리해서, 안심이 된다.
모두가 쉽게 장기 판 위의 말처럼, 도구가 되어 살아가기 쉬운 세상에서,
스스로 도구화가 되기를 거부하고, 존재로서 살아가는 자가 이길 수 있는 세상에 대한 가능성,
내가 소유한 것이 곧 내가 되지 않는 세상에 대한 가능성.
기존 판의 룰을 잘 지키는 똑똑함이 아니라, 기존 판의 룰을 깰 수 있는 멍청함이, 계산하지 않는 그 멍청함이 '진짜로 이길 수 있는' 힘이 되는, 그런 세상에 대한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기훈이 가지고 있는, 오징어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 필요했던 진짜 능력이, 지금 우리에겐 꼭 필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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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유한 자들은 사기를 당한다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영화 <시크릿 세탁소>(2019)는 '오션스' 시리즈를 비롯해 <로건 럭키>(2018) 등 그의 필모그래피 연장선에 아주 자연스럽게 포함될 만한 작품이다. 국내에서는 그렇게 큰 이슈가 되지는 않았지만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파나마 페이퍼즈' 사건을 기반으로 한 이야기. <시크릿 세탁소>는 유사한 소재와 제작 방식의 영화라 할 수 있고 실화 바탕이라는 공통점도 있는 <빅 쇼트>(2015)를 얼핏 떠올리게 한다. 보이지 않는 벽을 깨고 나와 등장인물이 관객에게 직접 상황을 설명하거나 말을 거는 기법이 쓰인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씁쓸한 결말로 향하는 일종의 고발적 영화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영화 '시크릿 세탁소' 스틸컷
게리 올드만과 안토니오 반데라스가 연기한 두 명의 변호사 '모사크'와 '폰쉬카'는 '모사크 & 폰쉬카'라는 이름의 로펌 대표다. 서류상 본거지를 파나마 제도에 둔 이 회사는 주로 상류층 혹은 범죄자들이 자금이나 자산을 세탁하기 위해 외국에 페이퍼 컴퍼니를 설립하도록 돕는 일을 하는데, <시크릿 세탁소>의 도입은 그 세부로 들어가기 앞서 화폐의 기원을 짚는다. "신용이란 대단한 발견입니다. (무겁게) 뭘 들고 다닐 필요가 없잖아요!"라며 물물 교환 경제로부터 돈의 발명까지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갑자기 친절한 경제 교육?'이라는 생각을 할 즈음 두 사람은 '파생 상품'과 같은 갖가지 금융 상품과 용어들을 무미하게 나열하며 지금 자신들이 말하는 돈 이야기가 화폐의 기원과는 거리가 먼 것임을 내비친다.
'대체로 유명인의 얼굴이 새겨진' 돈은 그 자체로는 쓸모 없는 종이일 뿐이지만 그것에 적힌 '100 달러'와 같은 숫자는 명목상의 단위를 넘어 보이지 않는 약속이 된다. "이 종이는 100달러만큼의 가치를 지니고 있음이 합의된 물건입니다."라고 조폐 기관에서 보증하고 사회적 약속이 이루어졌다는 것. 여기서 좀 더 중요한 개념은 돈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지니는 추상적인 단위의 신용이다. 그것을 기반으로 한 신탁과 같은 '실체 없는' 서류상, 명목상의 존재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신랄하게 파헤치기 위한 영화 내용의 전제 조건으로 작용한다.
영화 '시크릿 세탁소' 스틸컷
크게 다섯 개의 작은 장으로 구성된 <시크릿 세탁소> 1장의 제목이 곧 이 글의 제목이다. '온유한 자들은 사기를 당한다'(The Meek Are Screwed). 남편과 여행을 떠났다가 배가 침몰하는 사고로 졸지에 남편을 잃은 '엘렌'(메릴 스트립)은 보험사로부터 황당한 소식을 듣는다. 배를 운영하는 회사가 든 보험이 또 다른 보험회사에 의해 '재보험'(Re-Insurance) 되어 있는데 몇 가지 이유로 생각한 것보다 훨씬 적은 합의금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남편과의 추억이 있는 라스베이거스의 한 콘도를 찾았다가, 자신이 아닌 생면부지의 누군가가 자신이 지불한 것보다 거액의 현금을 내고 그 콘도를 구입했다는 소식을 부동산 중개인으로부터 접한다. 콘도 매입자는 외국인이며 자산의 근거지 역시 외국에 있다는 이야기가 뒤따르는데 공교롭게도 자신이 사고를 당한 배와 마찬가지로 같은 보험회사에 의한 '재보험'에 그 콘도를 산 사람도 속해 있다. '엘렌'은 변호인을 통해 각종 문서를 기반으로 '서류상 보험'의 실체를 찾아 나선다.
'파나마 페이퍼즈' 사건은 파나마 제도, 영국령 버진 아일랜드 등 이른바 '조세 피난처'로 알려진 지역에 유령 회사를 설립한 여러 나라의 정치인, 범죄자, 연예인, 기업인 등의 명단과 앞서 언급한 '모사크 & 폰세카'의 내부 문서들이 공개된 사건이다. 엄밀히 말해 외국에 회사를 세우는 일 자체가 위법은 아니며 따라서 '파나마 페이퍼즈'의 명단에 들어간 인물들 모두가 비윤리적 행위를 저지르거나 자금을 세탁한 인물이라고 판단할 수는 없다. 가령 신분이 노출된 유명인의 경우 자신의 사생활과 자산을 보호하기 위해 서류를 활용하기도 한다. 문제는 법 테두리 안에서 어떤 사람이 이익을 보고 또 어떤 사람이 손해를 보며, 어떤 사람이 삶의 기반을 송두리째 잃는 동안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하는 것일 테다.
<시크릿 세탁소>는 '모사크 & 폰세카'의 운영 주체인 두 사람의 시점에서 사건들의 배후와 내막을 풍자적으로 소개하면서 '엘렌'을 비롯한 당사자들의 사연도 상세하게 다룬다. 각각 다른 인물들이 중심이 되는 1장부터 5장까지의 구성이 아주 유기적으로 느껴지지는 않고, 각각의 비중을 할애하는 과정에서 균형 감각도 이전까지의 소더버그 영화들과는 조금 이질적이다. 그러나 인간 세상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각종 제도와 법 장치들이 과연 모두에게 더 나은 삶을 가져다 주었는지, 누군가가 웃는 만큼 한쪽에서 다른 누군가는 울고 있지 않을는지 생각하게 만든다. 이런 영화를 이미 극장에서도 본 적이 있었다. 아담 맥케이의 <바이스>(2018)가 그것이었는데, 마찬가지로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난 (나와는 상관 없다고 여길 만한) 일들이 어떻게 '뉴스'가 되었는지 돌아보게 하는 영화가 <시크릿 세탁소>다. '파나마 페이퍼즈' 폭로 이후 수감되었던 '모사크'와 '폰세카'는 3개월 만에 풀려났다고 한다.
* 본 콘텐츠는 브런치 김동진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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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나 아렌트가 자랑스럽게 생각할 '존 오브 인터레스트'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강력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독일인 부부 루돌프 회스(크리스티안 프리에델)와 헤트비히 헤스(산드라 휠러)다. 세계 2차 대전 중이다. 일에 충실하는 루돌프 회스. 아예 집 옆에 일터가 있을 정도로 일에 진심이다. 조용한 일상. 아내와 귀여운 아이들과 함께 사니 두려울 것이 없다. 다만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것이 있을 뿐이다. 사는 집 옆에 있는 것이 아우슈비츠 수용소고, 루돌프는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임무를 받았다는 것이다.
우선 이 영화를 보고 가장 먼저 생각난 건 가까스로 다 읽은 한나 아렌트의 책 두 권이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 보면 한나 아렌트가 제시한 개념 ‘악의 평범성’에 대해 손쉽게 접할 수 있다. ‘악의 평범성’은 평범한 사람에게도 누구나 악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기도 하지만 더 본질적인 함의를 품고 있다. 바로 누구나 악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가 중요한데, 생각하거나 관심 갖지 않고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다 보면 악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 그녀가 제시한 ‘악의 평범성’이다. 한나 아렌트는 이 성격을 설명하기 위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에서 한 남자를 조명한다. 바로 아돌프 아이히만이다. 아이히만은 재판 중에서 당당하게 “나는 조직이 시키는 일을 했을 뿐”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 남자의 궤변에 격분한다. 하지만 서서히 관찰하면 관찰할수록 아이히만이 우리 평범한 사람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닫는다. 발상의 전환이 일어난 한나 아렌트. 한나 아렌트는 이 아이히만의 모습을 포착하며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타인의 입장에 대한 무사유(Thougtlessness) 하나만으로도 평범한 직장인이 역사에 남는 전쟁범죄자가 된 것이다.
이 ‘악의 평범성’을 제시한 것은 후대에 엄청난 파급력을 낳는다. 당연하다. 원래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잖아? 이긴 자들은 승자의 입장에서 상대방, 그러니까 악의 근원을 “이 집단이 이래서 문제야!”로 퉁칠 수 있다. 아니면 인간이란 원래 그런 존재라고 규정하면 쉽다. 잔다르크가 마녀로 지목당해 화형 당하는 과정을 생각해 보면 종교라는 잣대가 명확하다. 또 서양의 기독교나 동양의 맹자가 인간에겐 원죄/악한 본성이 있다고 해석한 것도 악이라는 개념이 특정한 상황 하에 만들어진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그리고 그게 되게 대단한 거라고 생각할 수 있다. 우리 인류 역사상 히틀러 같은 존재는 흔하지 않다. 이런 측면을 고려해 보면 악은 특정한 무언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한나 아렌트는 이를 전적으로 거부한다. 특정한 무언가가 있기에 대단하다던가 굉장히 특이한 게 아니다. 그냥 전적으로 평범한 사람일 뿐, 생각 없이 산 것의 총합체라고 정의한 것이다. 물론 한나 아렌트 이전의 역사가들이 악에 대해 이렇게 규명한 것은 나름대로 합리적인 것처럼 보인다. 이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도 그 악의 형태가 구현되고 있다. 가령 영화에서 온갖 비명소리가 들리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는 회스 부부의 모습은 분명한 악이다. 아니면 유대인의 코트를 빼앗아 입는 헤트비히의 모습 역시 분명한 악이다. 하지만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한나 아렌트가 제시한 ‘무사유’의 과정을 두 측면에서 보여준다. 어떻게?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아이히만이 보여주듯, 조직에 흘러가는 남자(루돌프)와 타인에게 무관심한 여자(헤르비히)를 통해서. 또 <인간의 조건>에서 한나 아렌트가 역설하듯 인간과 인간사이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을 강조한 방식을 그대로 계승하면서다.
가장 먼저 탐구해야 할 인물은 루돌프 회스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루돌프 회스가 조직 내에 꽉 박혀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영화 연출을 통해 보여준다. 이 연출은 꼭 필요했다. 왜? 루돌프 회스가 실존인물이기 때문에. 한나 아렌트가 제시한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역사적인 상황과 결부시켜 강조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래야 이 영화가 비판하고자 하는 악의 속성이 더 설득력을 얻는다. 영화는 이를 위해 건조하게 그의 직장인으로서의 일상을 보여준다. 가령 외부 협력업체가 와서 회스에게 뭔가를 설명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 장면 속 두 남자는 그냥 대표자들끼리의 대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 장면을 기점으로 영화는 그가 직장인으로 얼마나 자기 하는 일에 투신하는지를 묘사한다. 좀 필요 없어 보이는 전화 장면이 여러 번 들어간 이유는 여기에 있다. 여기에 특별한 설정이 영화에서 빛을 발한다. 아우슈비츠 옆에 사무실이 있고 거기서 산다는 특징은 가정적이면서도 열심히 일하는 루돌프 회스의 모습을 보여주기 쉽다. 열심히 일하고 난 다음 아이들에게 동화를 읽어주는 아버지 회스의 모습은 지극히 평범한 악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루돌프라는 인물에게 가장 첫 번째로 수행해야 하는 과제는 직장인으로서의 업무나 가정의 안녕이 아니다. 나치라는 조직이다. 나치의 일원으로서 소속됐다는 한 가지 사실이 이 사람 인생에서 제일 중요하다. 왜? 초반부터 영화가 이 인물의 내면을 이미지로 강조하고 있다. 루돌프 회스가 누군가에게 축하받는다. 그런데 그 축하를 해주는 사람들이 나치 조직원들이다. 얼핏 보면 회색 옷 입은 사람이 떼거지로 몰려들어 누가 누구인지 구분이 안 된다(심지어 배경도 회색 저택이다). 영화가 고의적으로 카메라를 멀리 떨어트려서 누가 루돌프 회스인지 알 수 없게끔 묘사하는 것이다. 축하받는 사람과 하는 대상이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 이것은 명백하게 수신자와 발신자가 정해진 행동을 흐려놓겠다는 감독의 의도를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개인보다 조직을 강조한 것이다.
또 이 인물이 직장인으로서의 활동반경과 쉴 수 있는 집의 바운더리가 그렇게 선명하지 않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옆에 산다는 것도 이상한데 거기서 일을 한다는 건 더 기괴하다. 자연인으로서의 모습이 조직에 잡아먹힌 루돌프의 모습을 보여주는 설정이 되는 것이다. 영화 후반부에 루돌프가 전출을 가니 마니 하는 설정이 들어간 것도 흥미롭다. 사실 이 에피소드 자체가 굳이 영화에서 중요하지 않다. 어쨌든 안 간 거라서 굳이 알 필요도 없고, 갈등이 격정적이지도 않다. 영화의 기-승-전-결이 이 전출 여부를 두고 쌓아 올린, 소위 ‘빌드업’ 한 것도 아니라 맥 빠지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 일이 이 가족에게 끼친 영향이 중요하다. 조직이 루돌프 회스의 가족공동체를 해체시킬 정도로 주인공(회스)에게 절대적이었다는 의미다. 나치와 히틀러의 말이라면 뭐든 다 줄 수 있는 사람이다. 엔딩신에서 헛구역질이 날 정도로 내면의 무언가를 갖고 있지만 결국 어둠 속으로 걸어가는 그의 모습 역시 인물의 이런 부분을 설명하고 있다. 그의 무의식이 영화의 플롯에 그대로 나타난 것이다. 이렇게 루돌프의 내면을 보여주는 연출은 후반부에서 다시 반복된다. 초반 루돌프가 축하받는 장면과 후반부 나치 조직원들끼리 회의하는 장면은 수미상관처럼 반복된 것 같다. 왜? 회의를 주체하는 장면을 가장 첫 신에선 보여주지 않는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는 부감 숏으로 화자를 숨긴 것이다. 이다음 장면을 보면 영화 안의 회의 주제에는 회스가 제시한 근거가 중요하게 설정되어 있다. 다음 장면은 회스가 자기 의견을 역설하는 장면을 넣으면서 회의의 끝을 분명하게 보여주지도 않는다. 루돌프 회스가 회의에서 중요하다는 것만 묘사하고 그 안의 내용을 보여주지 않는 것이다. 루돌프 회스가 이 당시 나치라는 조직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기 때문에도 근거를 찾을 수 있으나, 영화 초반부를 생각해 보면 수미상관처럼 조직 안의 루돌프 회스를 강조하기 위함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단지 사운드의 힘만 믿은 게 아닌 비주얼의 힘이 조직에 휩쓸리는 루돌프의 모습을 보여줬다. 악의 평범성을 드러내는 연출인 것이다.
두 번째로 이야기할 수 있는 인물은 루돌프의 아내 헤트비히 회스다. 이 인물이 이 영화에 차지하는 물리적 비중은 굉장히 많다. 하지만 그 비중치고 영화 안에서 유효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인물은 아니다. 오히려 이 인물은 플롯 전면이 아닌 영화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이야기를 담당한 캐릭터처럼 보인다. 근거는 간단하다. “내가 이 집을 가지려고 17년 동안 고민해 왔다!”라는 대사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강조하고 싶은 것. 이 인물의 동선이다. 이 인물은 집 밖에 멀리 나가지 않는다. 루돌프가 타 지역으로 나가거나 헤트비히 어머니가 그녀의 집으로 도착한 것과는 대비된다. 전업 가정주부인 것으로 보이는 헤트비히. 남편 루돌프에게 ‘아우슈비츠의 여왕’이라는 말을 듣는다. 후반부 루돌프와의 갈등에서도 이 사람은 집 밖에 나가기 싫다. 남편을 속여서라도, 유대인들 고용해서라도 만든 집이니 만큼 애착이 강한 것이다. 이렇게 집에 박혀있는 헤트비히. ‘아우슈비츠의 여왕’이면 자기 집 안에 일어나는 것들에 대해 능통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이 영화가 이 인물을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인물은 집안사정에 그렇게 밝은 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관심이 짧은 것처럼 느껴진다. 첫 번째 근거. 이 사람이 집 안에 일어나는 상황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증거는 대놓고 드러난다. 이 영화의 사운드 지분 중 크다고 볼 수 있는 아기의 울음소리도 그 예시 중 하나다. 그냥 ‘왜 이렇게 울까?’ 한 마디면 엄마로서의 역할이 끝나나? 후반부에 남자 형제들끼리 비닐하우스 같은 곳에서 다투다 형이 동생을 장난으로 가두는 상황이 벌어진다. 여기서 동생이 울고불고 소리 지르지만 어머니 헤트비히는 알아채지 못한다. 중후반부 폴란드 소녀가 사과를 수용소 근처에 묻는 장면이 있다. 그때도 이 헤트비히는 인기척을 느끼지만 구체적으로 알려고 하지 않는다. 강가에 재가 떠다니는 것도 헤트비히가 아이들을 씻는 장면은 있지만 원인을 예방한 다 던가 하는 진단이 없다. 어머니로서의 역할에 취해있기만 하지 실질적으로 ‘일 잘한다’라는 말을 듣기엔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영화 후반부에 묘사되는 루돌프 회스의 불륜은 이 인물(헤트비히)의 무능력함을 암시하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어디 다른 곳에서 바람을 피우는 것이 아니다. 루돌프의 집 근처에 있는 사무실에서 불륜이 이어진다. 루돌프의 아이가 “아빠 땀 냄새나!”라고 말할 정도로 이 남자의 불륜은 이 가정과 분리된 것이 아니다. 철저하게 남편이 속였기 때문에 불륜을 저지른 것 아니냐?라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루돌프 회스는 실제로도 가정적이지 않은 인간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헤트비히 의 대사 “오래전에 (전출이) 결정 난 것으로 보이는데 왜 말하지 않았냐”라는 말은 과연 그녀가 남편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생각하게 만든다. 이 집안이 화기애애하다는 시각적인 만족감에 도취되어 가정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자각하지 못한다는 건 그녀의 분명한 패착이다. 마치 나치 독일과 히틀러가 집권하고 난 다음의 모습이 1차 대전 전후의 독일을 재건하고 있다고 믿었을 독일인들처럼 말이다. 글쓴이가 헤트비히가 2차 대전 당시의 독일인들을 비유하고 있다는 건 여기에서 온다. 나의 행동이 독일의 재건을 위해서라는 자기기만, 가정에 착실한 어머니라는 자기기만이 나치당의 지지자들과 헤트비히에 중요하게 작동하는 것이다. 이 비유에 의미를 부여하니 영화 안의 두 대사가 더 와닿는다. 유대인 학살이 기본적으로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은 채, “너희들(유대인)은 나 덕에 편하게 사는 거야”라며 남편이 널 재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고 폭언을 하는 것. 그녀가 가진 모순을 이 영화가 폭넓게 묘사하는 것이다. 또 후반부에 루돌프가 헤르비히에게 “우리의 성과”라는 식으로 “우리”를 강조하는 것이 흥미롭다. 당연하다. 자국민들을 속인 나치의 군인들도 당연히 문제가 있지만, 심정적 동조자로서 학살에 ‘무관심’과 ‘자기기만’으로 참여한 당시 독일인들도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그냥 단지 일상만 보여주는 줄 알았는데 그 이면에 담긴 의미가 무시무시한 좋은 각본의 힘이다.
두 캐릭터 말고 이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 중요한 것은 카메라와 사운드다. 우선 카메라. 이 영화가 카메라로 일상을 담는 방식이 특별하다. 그냥 일상적인 걸 담으면 모르겠는데 어디에서 훔쳐보는 것처럼 화면을 담았다. 실제로 검색해 보면 어렵지 않게 이 영화의 촬영 기법을 찾을 수 있다. 세트장을 만들고 카메라를 많이 설치한다. 대신 카메라가 어디에 있는지 말해주지 않는다. 이건 중요하다. 억지로 드라마를 배격했기 때문이다. 카메라가 대놓고 있다. 그럼 그건 대놓고 영화다. 배우들이 서로 얼굴 보면서 연기한다. 감정의 이입을 유발하고 곡진한 무언가를 탐구한다는 것. 이건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에 대치되는 부분이다. 관심을 떼는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의 응집성을 위해서라도 감정이입을 유발하면 하고 싶은 걸 보여주기 어렵다. ‘얘 나쁘지?’가 되는 순간, 인물의 표정이 보이는 순간 비명의 의미가 옅어진다. 영화가 그은 선을 스스로 넘는 것이다. 촬영 구도만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명확하게 만드는 연출이었다.
하지만 이 카메라를 활용한 연출 중에 정말 중요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시각적인 것으로 사방이 막힌 이미지를 강조한 것이다. 모든 샷에서 벽이 강조되는 건 아니다. 그런데 벽이 필요하지 않은 장면에서 굳이 벽을 보여준다는 게 핵심이다. 중후반부에 어떤 남자가 벽 너머의 풀숲에 어떤 것을 뿌리는 장면이 있다. 일반적인 카메라워킹이라면 벽을 등지고 찍는 게 맞다. 그런데 굳이 이 장면에서 벽과 남자, 풀숲이 같이 등장한다. 벽을 보여주고 싶었던 감독의 의도가 읽힌다. 더 나아가 청각적인 요소는 벽과 충돌하며 영화에 균열을 낸다. 남자가 숲에 무언가를 뿌리는 장면에서 들리는 소리. 어떤 남자가 비명인지 절규인지 질문인지 모를 소리를 지른다. 곧바로 총성이 들린다. 카메라는 여기서 총에 맞는 사람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벽만 보여준다. 마치 소리가 벽에 부딪힌 것처럼. 그 대신 관객들은 상상력이라는 게 있어서 벽과 소리만 보여줘도 이 상황이 어떤 일인지 대충 예상할 수 있다. 굳이 이렇게까지 사운드를 강조하는 이유? 아니 그 이전에 사운드를 어떻게 강조했을까? 벽의 이미지를 강하게 보여줘서 이 영화 안에 쳐져있는 벽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실 이 영화를 본 사람에게 벽의 의미는 간단하다. 무관심이라는 벽이다. 계속해서 안에 있는 야채니 꽃이니 라일락이니 수영장이니 하는 것들을 보여주지만 무관심이라는 벽이 인물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벽의 의미는 앞에서 언급한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닿고 있다. 악의 평범성을 이 영화가 사운드와 카메라의 존재로 보여준 것이다. 이 벽의 존재 덕에 카메라는 무엇을 찍을지에 대한 고민도 끝냈다. 분명한 악에 대해서는 카메라로 찍고 희생자들은 사운드를 통해 표현한다. 이 영화의 인물들은 악에 익숙한 악인이 되는 셈이다. 이 맥락에서 열 카메라로 표현한 소녀를 설명할 수 있다. 악이 아닌 무언가의 존재, 그러니까 유대인에게 사과를 주는 따뜻한 마음이 이 영화의 카메라에 담기지 못한 선의가 된다. 사운드만 부각되는 것이 아닌 촬영에 의한 연출이 영화의 주제를 강조했다.
이 영화의 사운드는 영화의 핵심을 담는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단란한 가족들의 일상 속 비명이 틈입한다. 이 비명이 가지는 임팩트는 영화를 본 모든 사람이 다 같은 의견을 말할 것 같다. 비명도 비명 나름이다. 어떻게 기괴한 소리만 다 골라서 삽입했는지 이런 요소들도 다 감독의 감각이 크게 주요한 것으로 보인다. 전작 <언더 더 스킨>에서 외계인(스칼렛 요한슨)이 지구인들과의 교감을 표현하는 방식이 이 영화에서 사운드로 치환된 셈이다. 이 선택은 아주 좋았다. 학살의 진상을 원초적인 방식으로 다가가게 한다. 원초적인 기억으로 남았다? 우리 일상 속에서 비슷한 것만 보면 생각난다는 의미다. 이 의미는 중요하다. <헤어질 결심>에서 감정적인 임팩트로 관객에게 큰 효과를 낸 것과는 다르게 신기한 방식으로 관객에게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청각을 아주 잘 활용했다. 이 영화 예술의 근본에는 무성영화라는 게 있다. 이 말은 즉슨 영화라는 예술 자체가 시각적인 걸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인지심리학에서 인류는 시각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연구도 있다. 이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영화라는 예술이 가진 두 특징을 과감하게 무시하며 청각적인 요소를 강조한다.
하지만 영화가 청각적인 것을 활용하는 방식의 화룡점정은 오프닝과 엔딩에 있다. 이 영화의 청각적인 요소에는 뭐가 담겨 있을까? 비명이다. 유대인들의 절규가 담겨있다. 오프닝을 본다. 오프닝은 검은색 화면인 채로 음악을 크게 틀어놓는다. 첫 장면부터 청각적인 것이 중요하다고 힘을 꽉 주는 것이다. 이 기점으로 영화의 청각적인 것에 대해 연이어 생각해 보면 이후에 비명소리가 들린다. 대신 시각적인 부분이 청각적인 장면과 먼저 시작하지 않는다. 그럼 비명소리가 이 이야기의 이전에 깔려있다는 의미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리고 영화의 엔딩으로 날아간다. 루돌프가 헛구역질을 한다. 현대의 박물관 노동자가 건물을 닦는다. 닦는 소리가 부스럭거린다. 그리고 다시 영화의 시점으로 돌아와 루돌프 회스가 어둠으로 걸어간다. 시점이 세계 2차 대전 한가운데로 돌아간 것이다. 그다음이 엔딩이다. 이 영화의 엔딩은 오프닝처럼 청각적인 요소만 부각한다. 영화 후반과 초반이 비명소리로 이루어져 있고 그 중간이 직선으로 흘러가는 일상이다. 이 영화는 일종의 타임라인인 것이다. 영화의 과거와 미래, 오프닝과 엔딩이 청각적인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영화 안에서 비명소리가 청각적인 요소로 강조된다는 것. 그렇다면 영화의 과거와 미래를 이 감독이 어떻게 해석했는지에 대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홀로코스트는 곧 비명과도 같았다는 의미처럼 들렸다. 악인들이 시선을 돌리지 않아 만든 비극이 홀로코스트라고 말한 셈이다.
괴물 같은 영화다. 음향, 촬영, 각본, 연출 모든 부분에서 한 부분의 극점에 다다른 능력을 보여줬다. 심지어 산드라 휠러를 위시로 한 배우들의 연기도 굉장히 뛰어나기까지 하니 무결점의 영화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굳이 꼽자면 극의 재미를 부각한 영화가 아니라서 누군가는 지루하다고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위험부담(?)에도 글쓴이가 장점으로 확신하는 것이 있다. 정말 필요한 인간의 조건이 무엇인지 묻는 것이라는 점이다. 사실 이 영화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만큼 징글징글하고 강박적으로 관객에게 질문한다. 사실 이 사람들이 왜 인간 근처도 가지 못하는지는 영화가 쉽게 설명하고 있다. 이 설명하는 부분은 곧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과도 이어진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이라는 책에서 인간의 관계성에 대해 언급했다. 정치적인 행위부터 시작해 불멸하게 남는 여러 기록까지, 또 공/사적인 공간의 필요성까지 이 세상을 이루는 모든 것들이 다 함께 살아가는 것에서 온다고 역설했다. 이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이 <인간의 조건>에 대한 깊은 통찰을 아주 속 깊게 우려낸 사골국처럼 느껴진다. 이 영화에서 대화하는 사소한 것들, 공간들, 하녀의 움직임부터 루돌프 회스의 동선과 공간까지 이 모든 것이 <인간의 조건>의 목차처럼 느껴진다. 충격적인 영화다. <액트 오브 킬링>과 함께 과거의 비극이 단지 과거에만 국한될 것이 아닌, 날카롭고 깊은 인사이트를 보여주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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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욱한 안갯속을 부유하는 눅진한 에로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구소산 정상에서 추락한 남성의 사망 사건을 담당한 형사 '해준(박해일)'은 사망자의 아내인 '서래(탕웨이)'를 만난 후 그녀에게 특별한 관심을 갖는다. 중국인이라서 말이 서툴기는 하나, "마침내 죽을까 봐" 걱정했다고 말하는 등 서래가 남편의 사망 소식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단순한 유가족이 아닌 살인 사건의 용의자가 된 서래. 그러나 해준은 사건 당일 서래의 알리바이를 파악하고, 잠복수사를 통해 그녀에게 익숙해지기 시작하며, 그녀가 살인자가 아니라고 잠정적으로 판단한 후 그녀에게 더욱 빠져든다. 반면에 해준의 관심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서래는 그를 이용하는지 그와 사랑에 빠진 것인지 좀처럼 속을 알려 주지 않는다. 이렇게 진심과 의심 사이를 오가는 두 남녀의 관계는 조금씩 불이 붙는다. 서래와 그들의 관계에 대한 진실을 마주하기 전까지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보통 직선적이고 직설적이라는 인상을 남기곤 했다. 그의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감정인 복수심은 직관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감정이기 때문이었다. 복수가 주제가 아니어도 다르지 않았다. 가장 최근의 장편 작품인 <아가씨>는 그녀들의 사랑을 가슴에 날아와 꽂히듯 강렬하게 제시한 바 있다. 그렇지만 그에게 칸 영화제 감독상을 선사한 영화 <헤어질 결심>은 다르다. '헤어질 결심'이란 제목만 봐도 그렇다. 제목만 놓고 보면 도통 헤어지겠다는 것이지, 헤어진 것인지, 헤어지는 중인 전지 그 의미를 쉽사리 파악할 수 없다. 영화의 내용도 마찬가지다. 녹색인지 파란색인지 알 수 없는 드레스만큼이나, 바다에 핸드폰을 던지는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사진만큼이나, 영화는 눅진하고 갑갑한 안갯속을 헤매는 듯 보인다. 하지만 그렇기에 박찬욱 감독의 불륜 멜로는 해준과 서래 사이의 에로스를 맞춰나가는 묘미로 가득하다.
<헤어질 결심>은 모호하다. 영화의 장르와 구조부터 그렇다. 얼핏 보기에는 스릴러 혹은 범죄 영화이나, 정작 서래의 신분이 유가족이 아닌 용의자로 바뀌는 순간부터 영화의 분위기는 진한 멜로로 급변한다. 팜므파탈이 등장하는 누아르 영화와 진한 멜로드라마 사이에서 줄을 타며 긴장감을 자아낸다. 실제로 해준과 서래의 대화는 취조이면서 동시에 소개팅처럼도 보인다. 서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대해 정보를 알려주고, 서로에게 한 발짝씩 더 나아간다.
서래를 감시하는 해준의 시선도 그렇다. 그는 그녀가 남편을 살해했을 가능성을 찾기 위해서 그녀를 감시한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한다. 그러나 정작 그가 지켜보는 것은 범죄 용의점이 아니다. 그는 그녀가 슬퍼하거나 밥 대신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끼니를 해결하는 모습을 걱정하고, 홀로 드라마를 보다가 잠드는 상황을 동정하며, 그녀가 간병인으로서 할머니를 극진히 간병하는 모습에 빠져들어간다. 어떻게 보면 관음적인 시선이고, 또 한편으로는 에로스가 사랑의 화살을 겨누는 듯 보이기도 한다. 서래 역시 범죄 용의자를 현장에서 체포하는 해준을 보면서 그가 자신을 보호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조금씩 마음을 연다. 취조실에서 고급 초밥을 함께 나눠먹는 둘의 모습에서는 형사와 용의자 간의 관계성을 찾아보기 어렵다.
영화의 다른 장치들도 둘의 관계를 확실하게 매듭짓지 않는다. 언어를 활용하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중국인인 서래는 기본적인 한국어만 구사하기에 일상어가 아닌 '유일한'과 같은 어휘는 '단일한'이라고 말하며, '붕괴'처럼 자연스럽게 사용되지 않는 단어로 의사표현을 하기도 한다. 그녀는 결정적인 순간에 늘 중국어로 말하고, 그들은 진정으로 소통이 필요할 때 스마트폰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여성 화자인 서래의 말이 번역기를 거치면 부자연스러운 남성의 목소리로 변환되듯, 그들의 소통도 언제나 조금씩 어긋난다.
마찬가지로 취조실 안에서 카메라는 그들을 서로 다른 공간에 가둔다. 서로 마주 보는 장면이라 해도 꼭 한 명을 창문에 반사시키거나 모니터 안의 모습으로 등장시키면서 둘 사이의 연속성을 깬다. 이러한 어긋남은 서래가 범죄 혐의를 벗기 위해 해준을 이용하는지 아니면 진정으로 그를 사랑하는지, 또 후자라면 그들의 사랑이 잘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두고 의심을 거듭하게 만든다.
이러한 모호함은 1막 이후 2막에서도 유지된다. 녹색과 파란색을 오가는 서래의 드레스와 도시를 감싼 안개는 여전히 사랑하는지, 이별한 건지, 단념한 건지 알 수 없는 두 남녀의 관계를 연상시킨다. 정훈희의 노래 '안개'도 분위기를 고조한다. "돌아서면 가로막는 낮은 목소리/바람이여 안개를 걷어가다오"라는 가사는 상대방에게서 벗어나고 싶지만, 또 막상 벗어나자니 그렇게 할 수 없는 모호한 감정을 안개에 빗대고 있다. 덕분에 안개가 자욱한 도시에서 펼쳐지는 형사와 용의자이자 동시에 남자와 여자인 둘의 눅진한 이야기는 좀처럼 쉽게 결론이 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어질 결심>이 멜로드라마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특히 해준과 서래의 관계를 헷갈리게 만들면서도 박찬욱 감독다운 방식으로 관객을 그들의 눅진한 멜로 속에 초대한다는 점이 독특하다. 그 중심에는 에로스가 있다. 사실 폭력성 외에 박찬욱 감독을 대표하는 특징이라면 전작인 <아가씨>에서 보듯이 섹슈얼리티를 꼽을 수 있을 텐데, <헤어질 결심>에서는 성애적 요소가 명시적으로 두드러지지는 않는다. 다만 이상하게도 야하게 보이는 대목들은 적잖이 있다. 서래의 DNA를 채취하는 장면부터 그녀가 양치하고 흡연하고 손에 붙 밴드를 입으로 부는 장면들에 이르기까지. 영화는 계속해서 서래의 입에 주목한다. 프로이트적 관점에서 보면 입과 관련된 성은 성애의 첫 단계(구강기)를 의미한다. 이를 고려하면 해준과 서래가 에로스적 관계로 얽혀 들어가고 있음은 분명하다.
에로스적 욕동은 다른 방식으로도 표출된다. 해준과 서래가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서로에게 부족한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모습에서도 입은 중요한 매개체가 된다. 서래의 집을 감시하는 해준은 그녀가 좀처럼 밥을 먹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매 저녁을 아이스크림으로 대신하는 그녀를 걱정하는 해준. 이에 그는 취조실에서 비싼 초밥을 사주고, 중국식 볶음밥을 요리하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대신한다. 한편 해준은 잠이 안 와서 잠복근무를 한다고 말할 정도로 수면 부족에 시달린다. 그렇지만 서래를 감시할 때 그는 승용차 안에 누워 있더라도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하게 잠을 잔다. 또 관계가 진전되어가면서 서래는 해준의 수면을 도와주며, 해준이 잠들 때까지 자신과 호흡을 일치시키면서 심신을 편안하게 만들어 준다. 이때 영화는 아이스크림과 초밥을 먹는 서래의 입, 그리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두 사람의 입에 포커스를 맞춘다.
이러한 두 사람의 에로스적 관계는 왜 이들이 제각기 붕괴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이유이기도 하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에로스적 욕동이 가족을 이루고 사회와 문명을 이루는 기반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사회적 질서가 지나치게 강해지면 오히려 인간을 억압할 수 있고, 개개인도 에로스를 탐닉하면 본인이 문명과 질서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면에서 에로스적 욕동은 인간에게 내재된 자기 파괴적인 욕망인 타나토스(죽음)적 욕동과 쌍을 이루기도 한다. 해준은 서래가 남편 사체 사진을 보겠다고 말할 때 동질감을 품고, 그래서 그녀에 대한 수사는 유리하게 진행된다. 이는 죽은 자(남편)의 시선으로 망자의 아내와 사랑에 빠질 이를 응시하는 카메라 시점이 독특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는 해준과 서래의 사랑이 그들을 의무로 규정된 사회적 관계로부터 벗어나는 창구이자, 동시에 깊어질수록 그들을 파괴하는 부메랑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해준은 부부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아내와 의무적으로 섹스를 하던 중 서래를 떠올린다. 애정 없는 관계에 갇혀 있는 자신을 구해낼 방법을 찾는 데 성공한다. 또 그녀의 도움을 받아 오랜 기간 추적하던 범인을 잡는 데 성공하면서 경찰이라는 사회적 책무를 다하는 데도 성공한다. 한편 서래에게도 해준과의 사랑이 진전되는 것은 자신의 이니셜을 그녀에게 새겨놓을 정도로 소유욕이 강했던 남편과의 강압적인 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다.
그러나 그들의 욕구는 커질수록 그들에게 또 다른 압력을 강한다. 프시케를 곤경에 빠뜨리려다가 오히려 자신의 화살에 찔려버린 에로스와 같은 상황에 처한다. 서래를 사랑한 해준은 경찰로서 하면 안 될 실수를 범하고, 성실한 경찰인 자신의 정체성이 붕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범죄자인 그녀의 죄를 밝히면 안 되는 딜레마에 빠진다. 서래도 마찬가지다. 해준이 자신을 포기하려 하자 오히려 더 사랑에 빠져버린 그녀는 자신의 모든 삶을 걸고 그를 쫓을 정도로, 경찰인 그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삶을 포기할 정도로 그에게 빠져든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헤어질 결심>은 내용이나 연출적 특징에 비해 상당히 보수적인 영화이고, 그래서 여운이 짙은 작품이기도 하다. 서래의 범죄는 용서받지 못하며, 범죄와 얽힌 에로스적 관계는 해준과 서래 모두를 마지막까지 위협해 온다. 그러자 그들은 자의와 타의가 혼재된 채로 불륜이라는 범주 안에 머무르기를 택하고, 나름의 방식으로 자신들의 삶과 사회적 관계를 보호하며, 결국 이는 강렬한 신파로 향한다. 많은 사랑 이야기가 그렇듯이 사랑의 타이밍은 언제나 엇갈리기 마련이고, 상대를 소유하려 하기보다는 놓아줄 때 진정으로 사랑이 완성된다는 것이다. 이는 “당신이 나를 사랑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당신을 떠났고 이제 내가 당신을 사랑하려 하니 당신이 나를 떠나네”라는 대사에 온전히 담겨 있다.
심지어 <헤어질 결심>의 신파는 뻔하지만 식상하지 않다. 1부와 2부, 산과 바다로 나뉘는 영화의 구성 덕분이다. 영화는 두 개로 쪼개져서 해준의 서래에 대한 사랑과 서래의 해준에 대한 사랑을 각기 맛보게 하는데, 이러한 구성은 사랑의 엇갈림마저도 하나의 영화적 장치로 활용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앞부분에서는 서래의 살인사건을 미결로 놔두어야 하는 해준의 사랑을, 뒷부분에서는 자신의 살인 사건을 미결로 만들어야 하는 서래의 사랑을 풀어낸다. 두 개의 미결 사건은 하나의 영화가 되어 그들의 관계를, 엇갈리고 빗나간 사랑까지도 서사적 완결한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대조적인 장소나 소재는 영화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준다. 구소산 정상에서는 남편을 떠밀어 살해하지만 호미산에서는 해준을 뒤에서 안아주는 서래. 서래가 살인 사건의 진범이라는 증거를 담은 핸드폰을 건네는 해준과 그 핸드폰 대신 본인을 바다에 던져 증거를 인멸하는 서래. 그래서 <헤어질 결심>의 신파는 오히려 매력적이다.
단지 138분이라는 적지 않은 러닝타임에서 기인한 느슨함이 한 가지 아쉬운 점이다. 영화는 1막과 2막으로 나누어지는데, 사실 분기점에서 영화는 이미 절정에 다다르는 듯 느껴진다. 자신의 본심과 진실을 깨달은 해준이 '사랑한다'는 말만 하지 않았을 뿐 그 어떤 말보다 격렬한 사랑 고백을 한 순간 영화는 거의 끝에 도달한 듯 보인다. 1막에 꽤나 긴 분량이 주어졌기에 더욱 그렇다. 그 결과 산을 테마로 한 1막이 끝나고 바다를 테마로 하는 2막이 다시 시작될 때, 후일담처럼 느껴지는 2막에서 이야기가 다시 한번 절정에 이르기 전까지 영화의 템포는 다소 느슨해지는 인상이 남는다.
그래서 박찬욱 감독이 밝힌 대로, 그리고 전작인 <아가씨>처럼 1막을 '산', 2막을 '바다'라고 자막으로 표시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쉬이 가시지 않는다. 다만 영화 자체가 안개에 싸인 듯 조심스럽고 섬세하게 짜인 모호한 멜로드라마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 아쉬움조차도 <헤어질 결심>의 질감과 감정선을 더 완벽하게 만드는 듯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내로남불이라는 명제에 담긴 감정을 완벽에 가깝게 영화적으로 풀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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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 미제라블> 누가 그들을 불쌍한 사람들로 만드는가
1. 몽페르메유로 전근 온 경감 '스테판(다미엔 보나드)'은 '크리스(알렉시스 마넨티)', '그와다(제브릴 종가)'와 같은 순찰팀에 배정된다. 처음으로 순찰에 나선 스테판은 경찰과 공권력에 대한 증오와 불신이 가득한 시민들, 그리고 그럴수록 시민들에게 더 거칠어지는 동료들을 마주하며 적잖은 충격을 받는다. 그렇게 새로운 임무에 발을 들이민 스테판에게 첫 사건이 주어진다. 바로 집시 서커스단의 아기 사자를 훔쳐 간 도둑을 붙잡는 것. SNS를 살피던 스테판과 그의 팀은 이민자 청소년인 '이사(이사 페리카)'가 범인임을 파악하고 체포에 나서지만 강한 저항을 마주하고, 그 와중에 이사가 그와다가 쏜 총에 부상당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된다.
사회적 약자의 봉기를 다루는 영화들은 흔히 약자들을 선으로, 그들을 탄압하는 이들을 악으로 상정하고 이야기를 풀어간다. 관객들의 공감과 분노를 빠르게 유도할 수 있고, 그들의 폭력이 갖는 정당성도 손쉽게 납득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래드 리 감독의 첫 장편 영화이자 2005년 파리 교외지역에서 발생한 이민자 청소년들과 경찰 간의 충돌과 연쇄적인 차량 방화 사건을 모티브로 삼은 <레 미제라블>도 언뜻 보기에는 다르지 않다.
작중 인종, 종교, 빈부격차 등으로 인한 갈등과 상실감에 빠진 시민들에게 경찰은 악인이다. 그들은 무슬림 여성들을 심문하며 희롱하고, 아이들에게 거침없이 폭력을 행사하며, 영장 없이 가정집을 수색한다. 영화 시작부터 거듭되는 시민과 경찰의 충들은 안전핀이 제거된 수류탄을 손에 쥔 것 같은 일촉즉발의 긴장감을 유발하며, 이러한 긴장감은 이민자 청소년들을 선, 경찰들을 악으로 인식하게끔 만든다. 이렇게 영화는 제목만 봐도 예상할 수 있는 결말, '불쌍한 사람들(Les Misérables)'의 분노가 거침없이 분출될 피날레를 향해 달려 나가는 뻔한 재현에 머무르는 듯 보인다.
2. 하지만 <레 미제라블>은 이내 평면적인 선악의 이분법을 탈피해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게 된 이 비극의 원인을 살펴보려는 본래 의도를 드러낸다. 특히 이사에게 총을 쏜 경찰 중 하나인 스테판이 주인공이라는 점, 그리고 영화가 그의 시점에서 진행된다는 점에서 의도는 더욱 명확해진다. 막 몽페르메유로 전근 온 스테판은 본질적으로 도시의 상황을 제 3자의 입장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는 관찰자다. 따라서 그의 시점과 일치된 관객들은 영화가 시종일관 긴장되는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의 끓어오르는 분노를 조명하는 것과 별개로 스테판처럼 그들의 분노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근본 원인을 되짚어 볼 수 있다.
영화의 관찰자적인 태도는 이사가 총에 맞는 장면에서도 알 수 있다. 이 장면은 사실 선악 구도로 인물들을 나누기에 최적인 순간이다. 하지만 래드 리 감독은 해당 장면을 경찰, 이사, 이사의 친구들 중 그 누구의 시점으로도 보지 않는다. 대신 카메라는 공중에서 총을 쏜 경찰, 총에 맞은 이사, 경찰들을 공격하는 이사의 친구들을 모두 내려다보며 정비되지 않아 더러워진 도시의 품 안에 그들의 갈등을 위치시킨다. 이처럼 첨예한 대립이 극에 달하는 찰나에 도리어 한 발짝 물러서는 연출은 경찰이 쏜 총에 아이가 맞았다는 사건의 충격만 부각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사연과 상황을 모두 살펴보고 진정한 가해자와 피해자를 찾게 만든다.
그와다는 아이들이 자신들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폭력적으로 대응하자 총을 꺼내 들었다. 아이들의 입장에서 이미 지나치게 강압적인 태도를 지속적으로 견지했던 경찰의 명령을 신뢰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그와다와 크리스는 서커스단 집시들이 보여주었듯 대화보다 주먹이 우선시되는 사회적 분위기, 또한 총격 사건을 정치적 입지를 다지는 기회로 삼으려는 정치인들 때문에 강압적인 수단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올라가다 보면 결국 다양한 요인에서 비롯된 갈등과 차별을 제도적으로 봉합하지 못한 프랑스 사회의 시스템이 모든 사태의 근원이라는 결론에 다다를 수밖에 없다.
3. 이에 더해 <레 미제라블>은 관찰자인 스테판의 눈을 빌려 이민자뿐만 아니라 그들이 적대시하는 경찰도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점을 환기시킨다. 스테판은 총을 쏜 당사자인 그와다와 밤중에 대화를 나눈다. 그와다는 몽페르메유에서 긴 시간을 지낸 경험으로 비추어 볼 때 이 도시에서 폭력을 쓰지 않을 수 없다고 항변하고, 스테판은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테판은 그와다에게 이사를 쏘는 장면이 담긴 sd 카드를 넘겨준다. 그와다가 도덕적으로, 또 윤리적으로 옳지 않은 일을 한 것은 맞다. 하지만 이미 증오와 분노가 또 다른 증오와 분노를 낳고, 폭력이 폭력을 부르는 악순환의 굴레 안에 들어온 이상 그에게만 책임을 지울 수는 없으며, 관찰자인 스테판도 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이다.
이민자들과는 또 다른 맥락 안에서 피해자가 되어버린 경찰들의 딜레마는 스테판 본인의 서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비록 이사에게 총을 쏜 팀원 중 하나이지만, 그는 팀원들에게 절차를 지키라고 항의하고, 총에 맞은 이사를 치료해주는 등 경찰로서 자신의 권한과 범위 내에서 사회 시스템을 유지하는 데 충실한 상식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그런데도 그는 성난 이민자들의 공격을 피하지 못한다. 이처럼 그저 사회적으로 주어진 일에 충실했던 사람마저도 가해자가 되어버리는 스테판의 서사는 자연스럽게 과연 경찰들을 악이라는 프레임 안에 고정시키고, 이 모든 비극의 책임을 그들에게 돌리는 것이 정당한지 의문을 낳는다.
이는 크리스, 스테판, 그와다가 퇴근 후 집에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며 하루 동안 감내해야 했던 부정적인 감정을 털어내는 장면이 긴장감이 팽배한 영화에서 유일하게 숨을 고를 수 있는 대목인 이유다. 영화는 감정 이입이 용이한 이민자들 대신 악인으로 인식하기 쉬운 경찰들의 개인사를 일부 흘리면서 그들이 가해자이자 피해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에 감정적으로도 공감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그들의 저녁을 장식하는 평화로운 석양은 분노와 불신, 갈등의 골이 나날이 깊어지는 악순환이 경찰들의 일상을 잠식했으며, 그들은 그저 자신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발버둥 칠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4. 한편 <레 미제라블>은 스테판 외에도 축구라는 상징을 통해 프랑스 경찰과 이민자들이 모두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사실, 간과되기 쉬운 진실이자 프랑스 사회의 치부를 드러낸다. 1998년 월드컵에서 알제리 이민자 2세인 지네딘 지단을 중심으로 우승을 차지한 이래 프랑스 남자 축구 대표팀은 프랑스 사회의 통합을 상징해 왔다. 2010년 월드컵 당시 팀에 내분이 발생해 조별리그 탈락을 맛보자 청문회가 열렸을 정도다. 그러다 보니 2018년 러시아 월드컵 결승전에서 프랑스가 20년 만에 승리하자 파리 주피터 광장을 가득 메우고 환호하는 인파를 담은 영화의 오프닝은 마치 온전히 하나 된 프랑스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화의 결말은 프랑스 사람들의 환호를 비명과 괴성으로 바꾸어 놓으면서 축구라는 상징에 담긴 하나 된 프랑스라는 공허한 허상을 파괴한다. 그 중심에는 닭과 사자가 있다. 영화는 세 번에 걸쳐서 닭과 사자를 한 공간에 놓는다. 우선 집시들의 아기 사자를 훔친 이사는 사자 앞에 수탉 한 마리를 던져준다. 이후 집시들의 항의에 굴복한 공권력에 의해 총을 맞고, 집시들에게 끌려간 이사는 자신이 던졌던 닭 마냥 사자 우리에 잠시 갇히는 벌을 받는다. 마지막으로 클라이맥스에서 이사는 한 마리의 사자가 되어 닭을 보듯 시장과 경찰들을 습격한다.
이때 닭과 사자는 단지 약자와 강자가 아니다. 그들은 이제 약자가 된 강자, 또는 강자가 된 약자다. 그들은 서로 분노하고 폭력을 휘두르며 누가 가해자이고 피해자인지조차 알 수 없는, 모두가 불쌍해진 프랑스 사회를 담아낸 우화 속 주인공이기도 하다. 특히 수탉이 프랑스 남자 축구 국가 대표팀의 상징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세 차례 반복되는 닭과 사자의 우화는 이민자들과 경찰을 대립항 대신 그들을 사회적 시스템의 피해자라는 동류항에 위치시킨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5. 영화는 총을 겨눈 스테판과 폭탄을 든 이사가 꽉 막힌 아파트 복도에서 서로 대치한 상태로 끝난다. 이 대치 상황은 연이은 분노와 증오, 폭력의 결과이자 누군가의 승리도 패배도 없으며 그 누구도 일방적인 가해자 혹은 피해자라고 말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이나 다름없다. 섣불리 그 끝을 보여주지 않는 결말은 러닝타임 내내 줄곧 던져왔던 질문, 이 상황이 과연 누구의 잘못이며 이 사태를 촉발시킨 본질적인 문제는 과연 무엇인지라는 의문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그 결과 <레 미제라블>은 시작부터 끝까지 특별하다. 뻔한 길을 가지 않으면서 당연하다면 당연할 수 있는 갈등 구도나 사연을 자신만의 관점으로 보여준다. 단지 눈에 보이는 사건과 현상을 다시 보여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외피가 숨기는 사회 구조적 모순, 개개인의 일상적인 삶에서 특정하기 어려운 거시적인 문제점을 직관적으로 느끼도록 한다. 이처럼 단지 세상을 재현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제시할 줄 아는 영화 <레 미제라블>은 색다르고 인상적이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꼬리를 무는 증오, 분노, 폭력이 파괴한 '하나 된 프랑스'라는 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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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밀히 내통하는 '데이빗 로워리'의 세계
은밀히 내통하는 ‘데이빗 로워리’의 세계
데이빗 로워리의 필모그래피를 훑다보면 당혹스럽다. 일련의 영화들은 하나의 카테고리로 범주화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편차도 꽤 있는 편이라 한 감독 밑에서 탄생했다고는 도무지 믿기 어렵다. 텍사스의 풍광을 중심으로 서사의 밀도보다 고독과 우울의 뉘앙스를 전면화한 멜로드라마 <에인트 뎀 바디스 세인츠>, 가족을 잃은 소년과 온순한 드래곤 사이의 가족애를 그린 디즈니 실사 애니메이션 <피터와 드래곤>, 아내 곁을 부유하는 한 유령의 절절함을 시적으로 형상화한 저예산 영화 <고스트 스토리>, 전대미문의 은행털이범을 범죄 코미디의 형식으로 느슨하게 전개한 <미스터 스마일>, 켜켜이 쌓아올린 상징의 구조와 초현실적 공간을 기반으로 신화적 모험담을 장엄하고 기이하게 풀어낸 <그린 나이트>에 이르기까지(심지어 그의 다음 작품은 <피터 팬>을 실사화한 디즈니 영화 <피터 팬&웬디>이다). 데이빗 로워리는 특별한 사조로 묶이거나 단일한 수사로 명명되길 거부하는 감독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작품들을 관통하는 내밀한 특징이 전무하다는 것은 아니다. 로워리만의 전략과 세계관은 서로 다른 외피로 포장된 필모그래피에 은밀히 내장돼 점차 확장되고 있다.
1.
로워리 영화의 도입부에는 서사의 기폭제 역할을 하는 순간이 등장한다. 그 순간은 항상 죽음의 얼룩으로 칠해져 있는데, 초기작의 경우 동료의 죽음(<에인트 뎀 바디스 세인츠>)이나 가족의 죽음(<피터와 드래곤)>을 위시한 2인칭 죽음에서 후기작으로 갈수록 자신의 죽음(<고스트 스토리>)과 낯선 존재의 죽음(<그린 나이트>)이라는 (각각) 1인칭, 3인칭 죽음으로 확장된다. 일차적으로 로워리의 영화를 추동케 하는 것은 자신 혹은 타인의 죽음, 그리고 그것이 지닌 매혹의 힘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이러한 죽음이 사건이 아니라 일종의 ‘가정’처럼 주어진다는 점이다. <에인트 뎀 바디스 세인츠>에서 로워리는 연인 관계인 밥과 루스가 어째서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고 있는지, 그들의 범행 계획은 어떻게 어그러졌으며 어떤 경위를 거쳐 경찰과 대치하게 되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그들의 동료 프레디의 죽음을 슬그머니 밀어 넣는다. 프레디의 죽음으로 절망에 빠진 밥은 경찰에게 체포되고 루스는 그와 떨어져 뱃속의 아이와 외로이 생을 보내야만 한다. 관객에게 제시되는 정보는 밥과 루스의 사랑이 꽤 깊다는 것뿐이다. 그렇게 영화는 연인 관계의 두 사람이 동료의 죽음으로 인해 물리적으로 분리된다면 그 이후의 생은 어떻게 될지 질문한다. <피터와 드래곤>은 더욱 극단적인데, 시작과 동시에 피터는 교통사고로 부모를 모두 잃고, 자취를 감추고 사는 드래곤과 조우하여 유사 가족을 이뤄 살게 된다. 의아한 것은 차가 전복되어 성인 두 명이 그 자리에서 즉사할 정도의 대형 사고였음에도 불구하고 유아기의 피터는 별다른 상처 없이 살아남아 심지어 멀쩡히 숲으로 걸어간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로워리에게 인물의 과거와 현재의 정보를 배합하려는 시도, 그러니까 인물에 현실성을 부여하는 일은 전혀 중요한 게 아니다. 그는 인물을 수식하는 최소한의 수사를 제시한 다음, 죽음이라는 가정법을 통해 죽음이 낳은 이후의 삶과 그 영향 하에 흘러가는 시간의 뉘앙스를 시각화하는 데 관심을 둘 뿐이다. <고스트 스토리>에서 C의 죽음 또한 교통사고라는 우연적 사건으로 덩그러니 제시되며, <그린 나이트>에서 상대에게 목 베임을 당하는 녹색 기사의 타살 퍼포먼스도 허무맹랑한 게임의 규칙으로 존재할 뿐 그 본질과 통하는 논리적 인과 관계는 부재하다. 그런 점에서 로워리의 영화를 ‘죽음의 가정법’이 추동하는 영화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로워리가 죽음의 가정법이라는 전략을 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로워리의 영화들을 보다 보면, 정황이나 뉘앙스가 우선된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다르게 말하면 그의 영화에는 캐릭터가 부재하다. 캐릭터라이징에 앞서 위에 기술한 가정법이 선제적으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관객에게 제공되는 것은 가정법의 성립을 위한 최소한의 정보뿐이다. 때문에 로워리의 인물들은 모호하고 추상적이다. <에인트 뎀 바디스 세인츠>에서 루스와 밥은 현실 세계의 연인처럼 보이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으면 곧 잊혀진다’(out of sight, out of mind)는 속담의 진위 여부를 판별하기 위해 직접 실험을 감행하는 수행자처럼 보이며, <피터와 드래곤>에서 피터는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접점에서 두 세계의 공존이 가능한지 확인하는 관찰자처럼 그려진다. 또한 <고스트 스토리>에서 C는 사랑하는 사람을 남겨놓고 떠난 자의 시간성을 가늠해보기 위한 영화적 존재처럼 기능하고, <그린 나이트>에서 가웨인은 위엄과 재생의 신비함으로 무장한 영화적 존재 ‘녹색 기사’의 경지에 도달해야 하는 비루한 현실적 존재로 형상화된다. 로워리에게 중요한 것은 인물의 성격이 아니라, 그들이 수행하는 탐구와 그에 대한 주관적 응답이다. 로워리는 이 성실한 수행자들을 통해 특정 명제나 세계, 혹은 추상적 개념을 시각화하고, 그것의 진실을 풀어내는 데 애쓴다.
2.
로워리는 영화와 현실 간의 역학을 탐구하고 그것들을 질료 삼아 서사를 구축하는 시네아스트다. <고스트 스토리>, <그린 나이트>에는 무엇보다 초현실적인 존재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영화 그 자체의 환유처럼 형상화된다. <고스트 스토리>에서 C는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뒤 고스트로 환생한다. 하얀 천을 머리에 두른 괴이한 형상은 추상적인 개념이나 자아를 체현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행할 수 있는 신체적 기능이 오직 응시뿐이라는 점이다. 그는 하얀 천에 뚫린 두 개의 구멍으로 시종일관 현실의 대상을 바라보고 또 바라본다. 때로 접시를 집어 던지고, 피아노 건반을 내리치는 등 현실의 물질적 조건에 영향을 주기도 하지만 그것은 순간적이며 소박하다. M이 바닥에 누워 C에게 선물 받았던 노래를 들으며 과거를 회상할 때 머리맡으로 뻗힌 손이 고스트의 하얀 천과 거의 접촉되는 듯 보이는 쇼트는 그래서 외설적이고 신비롭다.
더불어 고스트는 줄곧 남겨진 아내 M의 행동을 관찰하고, 그가 머무는 집의 구석구석을 탐방하며 시간의 흐름을 감각하게 만든다. 가령, M이 상실의 아픔을 극복하기 위해 이웃이 선물한 파이를 우걱우걱 입에 집어넣는 긴 쇼트에서 프레임 가장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는 정지된 형상의 고스트는, 화면 내 유일하게 운동하고 있는 M의 처연한 몸짓과 대비를 이루며 시간의 흐름을 역으로 체감하게 만든다. 응시와 시간성이라는 감각 기능을 탑재한 고스트는 마찬가지로 관객에게 응시의 기회를 부여하고 시간성을 체감하게 해주는 ‘영화’와 유독 닮아 있다.
사랑하는 아내를 남겨 놓고 세상을 떠난 남자의 영적 멜로드라마처럼 보였던 영화는 의아하게도 중반부가 되자 그 둘을 완전히 떼어놓는다. 고스트는 집을 떠나는 M을 멀리서 바라볼 뿐 그녀를 따라가지 않는다. 왜 고스트는 그 집에 남아야만 했을까. 답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그녀가 문설주 틈에 새겨 넣은 메시지, 그러니까 현실이 남긴 진실을 발견해야 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고스트 스토리>는 현실이 남긴 진실을 발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영화의 숙명에 관한 영화다. 다만, 그 메시지의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 마침내 고스트가 쪽지의 메시지를 확인하는 순간 그는 일순 하얀 천만 남기고 소멸된다. 현실의 진실을 알게 된 완전한 영화는 그 순간 영화가 아니며, 현실의 다른 버전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고스트 스토리>가 고스트로 분한 영화가 현실을 응시하며 그 물질적 조건에 대응하고 끝내 소멸하는 과정을 그린다면 <그린 나이트>는 비루한 기사 가웨인으로 대변되는 남루한 현실이 녹색 기사로 분한 성스러운 영화로 이행되는 과정을 그린다. 녹색 예배당으로 향하는 가웨인의 긴 여정은 현실이 영화로 이행되는 과정에 수반되어야 할 덕목들을 탐구하고 점검함으로써 종국에 영화가 현실과 분리되어 독자화되는 과정에 대한 거대한 은유이다.
<그린 나이트>는 크리스마스 연회가 열리는 예배당에 이르러 비로소 제대로 시작된다. 이때 카메라에 붙잡힌 가웨인은 예배당 상층부에 뚫린 원형의 창에서 사선 아래 방향으로 내려오고 있는 푸르고 투명한 빛을 바라본다. 빛은 원탁의 중심부를 성스럽게 비추는데, 이 형상은 마치 스크린에 투영되는 영사기 렌즈의 광원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원탁의 중심부는 그 빛이 가닿아 무대화된 스크린이다. 그리고 머지않아 이 무대 위에 서는 녹색 기사는 스크린에서 퍼포먼스를 행하는 영화적 존재, 혹은 영화 그 자체이다.
사창가에서 유흥을 즐기는 게 일상인 부패한 기사 가웨인에게 왕은 “무용담 없이 왕위 계승은 꿈도 꾸지 말라.”는 일종의 압박이자 명령을 하사한다. 이로써 가웨인은 왕이 되기 위해 무용담이 필요한 현실적 자리에 머문다. 그는 방탕한 성적 유희로 얼룩져 있는 남자이고, 권력을 노리는 탐욕가이면서 한편으론 엄마와 여자 친구를 사랑하는, 남루하면서도 지극히 평범한 현실적 존재이다. 그런 그의 앞에, 즉 무대화된 스크린에 재생의 신비함으로 무장한 녹색 기사가 출연한다. 녹색 기사는 자신과 겨뤄 승리한 자에게 본인이 당한 만큼 다음 해 크리스마스에 똑같이 되갚아 준다는 황당무계한 목 베기 게임을 제안하고, 가웨인이 이에 동참하면서 남루한 현실이 성스러운 영화로 다가가는, 그 긴 이행의 과정이 시작된다.
녹색 예배당으로의 여정은 크게 네 개의 시퀀스로 구성되는데, 이는 곧 네 개의 시험대라고 말할 수 있다. 관문에서 요구되는 것들을 요약하자면 (피해자에 대한) 연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 상상력에 따른 생경함의 창조, 사랑의 윤리와 죽음의 두려움에 대한 극복이다. 각 시퀀스들은 매번 출제자처럼 보이는 인물 혹은 대상, 이를 테면 소년병, 성 위니프레드, 환각의 버섯, 성주와 성주부인을 내세워 문제를 출제하고, 가웨인이 그것들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짜여 있다. 정답과 오답을 오가며 마침내 녹색 기사 앞에 다다른 가웨인은 죽음 앞에서, 만약 지금 녹색 기사의 도끼를 피해 집으로 달아난다면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지 상상에 빠진다. 공교롭게도 상상 속 미래는 그간의 여정에서 끝내 체현하지 못한 덕목들, (전쟁 피해자에 대한) 연민, 사랑의 윤리, 죽음에 대한 두려움 등의 문제가 고스란히 발현되며 끔찍한 결과로 치닫는다. 그런 점에서 이 몽타주 시퀀스는 필수 덕목들을 놓친 현실이 영화로 이행되었을 때의 결과를 상상 속에서 미리 상연해 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마침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진실을 알게 된 가웨인(현실)은 죽음을 받아들이고 영화로 이행될 자격을 얻는다. 그렇게 현실은 소멸되고 영화는 독자화된다.
로워리의 세계에서 그것이 영화든 현실이든 서로에 가닿을 때 그중 하나는 필연적으로 소멸한다. 두 세계가 등가적 관계에 있다면 어느 쪽이든 하나는 무의미한 것이다. 따라서 본질은 불완전함에 있다. 두 세계는 불완전하기에 영원히 존속된다. <미스터 스마일>에서 전설적인 은행털이범 포레스트 터커는 자신이 어디서 무얼 하는지 확신이 없을 때, 꼬마였던 과거를 떠올리며 그 아이가 노년이 된 현재를 자랑스러워할지 상념에 잠긴다. 그리곤 다행히 매일 그 거리가 가까워지고 있다고 덧붙인다. 그러자 그의 연인 주얼이 답한다. “하지만 절대 완전히 다다를 순 없을 거예요, 그렇죠? 그건 죽어서나 가능하니까.” 영화와 현실의 관계를 바라보는 로워리의 시선은 이 대사로 명료히 설명된다.
3.
로워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사람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보이지 않는 것이 있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피터와 그래곤>은 이 믿음을 일차원적으로 표면화한 것이라 해도 무방하다. 숲에 사는 드래곤을 본 적 있다고 주장하는 미챔은 본인의 말을 믿지 않는 딸에게 “네가 못 봤다고 없는 건 아냐.”라고 단호히 말한다. 그리고는 그녀를 ‘눈앞의 것밖엔 못 보는’ 존재로 규정한다. <피터와 드래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믿으려는 자와 보이지 않지만 그것의 실존을 믿는 자들 사이의 대립과 화해를 그린 이야기다. 다만, <피터와 드래곤>에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문제는 그저 작중 인물들 사이에 국한된다. 관객은 도입부에서 작중 현실과 화면에 이질감 없이 동화되어 있는 드래곤의 형상을 이미 보았고, 실사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의 관습에 익히 훈련되어 있는 탓에 그 존재를 구태여 부정할 아무 이유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스트 스토리>에 이르면 얘기가 달라진다. 한때 화목했으나 잠시 아내 M과 사이가 냉랭해진 C는 돌연 교통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난 뒤, 하얀 천을 머리에 쓴 고스트의 형상으로 느닷없이 부활한다. 관객은 그간 한 번도 학습되지 않은 고스트의 부활 장면과 그 괴이한 형상을 직시하며, 심지어 그가 존재하지 않는 듯 행동하는 작중 인물들의 동선과 행동방식을 관찰하며, 이 황당무계한 존재의 실존을 믿어야 하는지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된다. 작중 인물 간의 문제를 관객의 차원으로까지 끌어올린 로워리는 이 구도를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의 실존 가능성을 암시하며, 그 존재가 추동하는 서사의 가능성을 선보인다. 그리고 <그린 나이트>에 이르러 이 믿음의 유무가 영화의 존재 혹은 영화 제작의 실현을 가능케 하는 필수 덕목이라고 설파한다. (위에서 언급했듯) 남루한 현실적 존재인 가웨인이 영화적 존재 녹색 기사에 가닿으려는 이행의 과정에서 가웨인과 성 위니프레드의 만남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의 문제를 분명히 드러낸다. 그녀는 멀쩡히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머리가 허상이라는 듯 연못에 빠진 자신의 머리를 건져와 달라고 부탁한다. 두 눈에 명백히 보이는 그녀의 머리를 두고 혼란에 빠진 가웨인은 묻는다. “아가씨, 당신은 사람인가요? 정령인가요?” 달리 표현하면, “보이는 것을 믿어야 하나요? 보이지 않는 것을 믿어야 하나요?” 가웨인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기로 결심하고, 연못에서 그녀의 머리를 꺼내줌으로써 잃어버렸던 녹색 기사의 도끼를 보상으로 돌려받는다. 그렇게 로워리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을 영화의 근간으로 삼으며 이에 대한 공감을 관객에게 요청하는 방식으로 독창적 우주를 구축해 나간다. <피터와 드래곤>의 미챔의 말을 빌리자면, 로워리는 관객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하는 것 같다. “그냥 마음의 눈을 열어보라고 말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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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워 오브 도그] 끝장리뷰(ENG) | 씻지 않는 형, 청결한 동생 | 말과 차 | 기타와 자동피아노 | 수색자 오마주 | 동성애자 형, 이성애자 동생 | 제목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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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 오브 도그](2021)에 대한 헐거운 리뷰
Chapter 1 과거 vs 현재(feat. 수색자)
Chapter 2 필의 동성애, 피터의 살인
00:00 은사자상 수상
02:02 대결 구도들
04:44 수색자 오마주
05:59 기타와 자동피아노
06:37 꽃을 태운 이유
07:44 필의 동성애
09:31 피터의 아버지 살해
12:19 별점 및 한 줄 평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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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보이저스> 메인 예고편
2063년, 극심한 지구 온난화로
미래 세대가 살아갈 새로운 행성을 개척하기 위해
‘인류 이주 프로젝트’를 계획한다.
완벽한 우성 인자로 태어나 철저하게 격리 훈련을 받은 ‘30명의 탐사대원들’과
이들을 이끌 대장 ‘리처드’는 ‘휴매니타스호’에 탑승해 우주로 향하게 된다.
한편, 일부 탐사대원들은 자신들의 임무에 대해 떨칠 수 없는 의문을 갖게 되고
그들의 생활 속에 밀접한 ‘블루’를 가장 먼저 의심하기 시작한다.
의심의 시작과 함께 비밀과 음모가 하나 둘 밝혀지게 되고
대원들은 곧 겉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지게 되는데…
인류를 위한 새로운 행성까지 앞으로 86년,
과연 이들은 ‘인류 이주 프로젝트’를 완수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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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주토피아 2> 티저 예고편
주토피아를 뒤흔든 새로운 사건?! 혹은 짜릿한 파티? 더 새롭게 돌아온 [주토피아 2] 티저 예고편 전격 공개 11월, 환상의 도시 '주토피아 시티'로 놀러와💙 [주토피아 2] 11월 극장 대개봉 #디즈니 #주토피아2 #Zootopia2 #11월극장대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