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2024-11-21 14:37:20
강동원 씨, 껍데기가 참 무겁죠?
넷플릭스 [전, 란] 리뷰
이 글은 넷플릭스 작품 [전, 란]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떤 작품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넷플릭스가 버릇 나빠졌다는 우스갯소리가 돌기 시작했다. K콘텐츠로 쏠쏠하게 재미를 본 것은 인정하지만. 그 뒤로 넷플릭스를 뒷배 삼아 제작된 한국 작품들의 수준이 그다지 높지도, 그렇다고 참신하지도 않았기 때문.
게다가 최근 작품들에서 그다지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배우가 주연진에 들어차고 있다면, 배우의 이름값으로 인해 반가우면서도 작품 자체에 대한 우려감을 지울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OTT시청자들에게야 작품 하나는 그저 수많은 선택지 중 하나일 뿐이다. 작품이 별로라면 손쉽게 종료 버튼 한 번으로 물려버릴 수도. 좋았다 하더라도 또 다른 좋은 것들에 파묻히기 좋을 작품들 중 하나로 남아 버릴 테니.
그러나 넷플릭스에게도. 그리고 출연진들에게도. 작품 [전, 란]은 매우 상징적인 작품이 될 위치에 있었을 것이다. 떠도는 소문(?)에 대한 억울함도. 그동안의 치욕도. 함께 벗어던질 수 있을 만큼의 "나쁘지 않은" 작품이라는 소리를 반드시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특히 시청자의 입장인 내게는 몇몇 출연자들에게 이번 작품이 갖는 의미가 매우 크게 느껴졌다. 배우 차승원의 경우 선조 역할임에도 불구하고 수라간에서 더 많이 마주칠 것만 같았고. 천하의 연진이도 입 닫게 만든 말솜씨의 나이스한 강아지 이미지를 과연 정성일 배우가 벗을 수 있을지도 궁금했다. 그러나 사실 가장 큰 궁금증이자 의문은 배우 강동원에게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개인적으로 그에게는 배우로서의 꽤 많은 단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쩔 수 없이 매번 배어 나오는 사투리. 언제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얕은 호흡과 그로 인해 더 처참한 대사 전달력. 그리고 자신을 이 자리까지 올려준데 절대 무시할 수 없을 만큼의 공을 세웠겠지만 그와 동시에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그가 등장하는 모든 장면에 벚꽃을 뿌려준 것만 같은 그놈의 용안(?)까지.
그 후광효과를 깨고 진정한 배우로 인정받기까지 무던한 노력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언제나, 특히 최근 작품들에서는, 아쉽다기보다 절망에 가까웠다. 그에게 단단히 결속되어 벗겨지지 않는 이 껍데기를 과연. 이번에야말로 주연 배우의 위치에서 벗어던질 수 있을지는 사실 미지수였다.

그러나 작품 바깥에서의 상황은 작품 속 인물들이 맞이한 상황과 묘하게 맞아떨어진다.
자신의 것이 아닌 영광을 가진 종려(박정민;AKA 짜증계의 신예)와 거적때기에 불과하지만 청의검신으로 불리게 해 준 옷과 검을 걸친 천영(강동원)의 모습이 그러하다. 만인지상이라는 왕이라는 칭호를 갖고 있지만. 붉은 옷과 그 한 글자를 제외하면 그저 생떼 쓰는 수염 난 늙은 아이에 불과한 선조(차승원)까지도.
등장인물들은 껍데기가 없다면 살아남을 수 없거나, 자신의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기도 한다. 좋든 싫든 영화 속 인물들은 상황에 맞게 자신이 지녀야 하는 그 껍데기를 꾸깃꾸깃 눌러쓰고 삶을 연장한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배역과 배우로서의 껍데기를 가장 먼저 벗어던진 사람은 놀랍게도 정성일이다. 그리고 나는 이 장면이 켜켜이 쌓인 껍데기 논란(?)에 가장 맞닿은 통쾌한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청의검신을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겐신은 자신의 신분을 은닉하기 위해 꾹꾹 눌러썼던 갓을 홱 내팽개치고 말에 박차를 가한다. 앙다문 입 사이로 그의 숙적을 향한 결의가 비치는 순간은 짧았지만. 하도영의 남은 그림자를 완벽히 날려버리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 정성일 배우는 자신의 숙적과의 결투를 고대한 장수인 겐신 그 자체였다.
겐신으로 재탄생한 정성일 배우와 가장 많은 대립을 보여주는 것은 바로 천영이다. 그리고 다행히 배우 강동원은 자신이 가진 거의 모든 약점을 이 작품을 통해 어느 정도 극복했다. 이 정도면 "스울 사람"이라고 봐도 될 법한 수준의 언어 구사. 염소 같은 목소리의 소리침이 아닌. 그래도 제법 포효의 느낌이 나는 호통과 절규.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답게 스턴트 장면을 해낸다는 장점까지 십분 살려, 두 사람의 대결 장면은 꽤 긴장감 넘치는 "대등한"승부를 보여준다. 내가 키운 것도 아닌데 괜스레 코끝이 찡해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작품 전체로 보았을 때는 연기자들의 호연이 안타깝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 책임은 오롯이 이야기의 흐름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어떤 개연성도 마음에 날아와 박히지 않고. 종려와 천영사이의 오해가 빚어내는 과정도 매끄럽지 못하다. 꽤 많은 장면들이 그저 다음 장면을 위한 흐름에 쓰일 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기 쉽지 않다. 그로 인해 극 중 존재하는 모든 갈등이 깊어지기보다 퍼지기만 해서 극의 후반부에 도착해도 시원함이 느껴지는 순간은 찾아오지 않는다.
또한 극 중 인물들의 전형적인 모습이 너무 극대화되어. 캐릭터로서의 매력이 그다지 크지는 않다. 어느 작품에나 악역이나 천덕꾸러기가 있기 마련이지만. 애초에 "그럴 인간"으로 보이기 때문에 긴장감이 형성되기 쉽지 않다. 분명 장면들은 아름다운데. 그 안에서 뛰어노는 인물들에서 심장박동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은 그다지 많지 않다.
결국 극 중 거의 모든 배우들의 선입견을 날려버릴 만큼 애쓴 영화임에는 확실한 이 작품은. 볼만한 장면들이 분명 많음에도 불구하고 봐줄 만한 작품이 되지는 못했다.
[이 글의 TMI]
1. 어제 상체 PT 받고 버스 손잡이도 못 잡는 휴먼이 됨.
2. 아보카도랑 눈치싸움 드럽게 힘드네.
3. 2025년 다이어리 구매 완료
4. 왜 아직 월급날 아니지?
#리뷰 #영화리뷰 #munalogi #넷플릭스 #전란 #박정민 #강동원 #정성일 #진선규 #김신록 #리뷰어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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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랙스완>, <위플래쉬>? 형만 한 아우 없네
스포츠 스릴러를 표방하는 영화 〈더 노비스〉는 〈블랙스완〉, 〈위플래시〉와 닮은 구석이 있다. 성취 대상을 향해 집요하게 달려드는 인물의 심리를 스릴러 장르와 접목했다는 점이 그렇다. 주인공은 경쟁과 강박이 몸에 새겨진 듯 보이는 알렉스다. 학업‧조정을 병행하며 두 영역 모두에서 성과를 내고자 하는 그녀의 열정은 놀랍다. 그러나 ‘과도한 열정’은 광기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항상 자신에게 여유를 허락하지 않고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알렉스. 처음에는 그녀의 열정과 노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던 주변 사람들도 언젠가부터 그녀와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알렉스는 자그마한 부분에서라도 지는 걸 견디지 못하고, 그럴 때마다 온몸으로 불쾌함‧열등감을 표출하여 주변을 불안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조정은 팀 스포츠다. 동료들과 팀이 되지 못하면 제대로 성과를 낼 수 없다는 소리다. 알렉스가 목표에 몰두할수록 오히려 그로부터 멀어지는 역설이 발생하는 건 이 때문이다. 이는 영화가 스릴러의 긴장감을 자아내고자 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노력과 반비례하는 결과물을 마주하는 알렉스의 괴로운 심리를 비춤으로써 경쟁사회를 살아가는 관객에게 어떤 공감‧몰입의 순간을 마련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블랙스완〉, 〈위플래시〉보다 이 영화가 더 새롭고 강렬하냐 묻는다면 아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우선 도대체 알렉스가 왜 이토록 학업‧조정에 미친 듯이 몰입하여 경쟁하는지를 모르겠다는 게 첫 번째 문제다. 두 선배 영화가 이를 영화 전반에 자연스레 녹여냈다면, 〈더 노비스〉는 다소 뜬금없는 대사만으로 캐릭터에 서사를 부여하려 든다. 때문에 알렉스는 팀원뿐만 아니라 관객과도 점차 멀어진다. 아무도 동참하지 않는 광기 어린 질주는 긴장이 아닌 아리송함을 자아낼 뿐이다.
빈약한 서사‧개연성 말고도 이 영화의 흠은 더 있다. 일정하지 않은 호흡이 한 예다. 긴장감이 고조되어야 할 순간에 갑자기 이완시켜버리는 엇박자 연출이 반복되어 완급조절에 실패해버린 것이다. 스릴을 배가하기 위해 공들여 선택한 듯 보이는 OST도 엇박자만 내며 어떻게든 끌어 모은 긴장감을 깨기 일쑤다.
〈오펀: 천사의 비밀〉에서 인상적인 연기로 눈도장을 찍은 이사벨 퍼만이 〈더 노비스〉에서도 호연을 펼쳐 강렬한 캐릭터를 완성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더 커진다. 강렬한 캐릭터만으로 진부함, 엉성함을 돌파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블랙스완〉, 〈위플래시〉와 닮은꼴 영화를 표방해 마케팅 포인트로 잡았다면, 최소한 그들만큼의 완성도는 보여줬어야 한다. 괜한 비교로 관객의 기대만 성급히 키워 실망을 만들어낸 것 같아 안타깝다. 적어도 이번에는, ‘형만 한 아우 없다’는 말이 맞았다.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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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셋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북미에서도 저예산으로 흥행을 터트린 <프레디의피자가게>가 한국에서도 1위에 올라서며 흥행저력을
입증했습니다. <더 마블스>는 누적관객수 100만명을 넘기지 못하고 있으며, 주말관객수 또한 9만명에
그쳤는데요.
또 지난 1일에 개봉한 한국영화 <소년들>은 총 관객수 50만명을 넘기지 못하며 한국 영화와
극장에 찬바람이 불고 있는데요. 이 상황을 극복해 낼 수 있을까요?
[국내 박스오피스]
호러명가 블룸하우스에서 제작한 <프레디의 피자가게>가 34만명을 기록하면서 국내 박스오피스 1위에
올라섰습니다. <더 마블스>는 9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2위를 했고 박서준의 할리우드 진출작으로 많은
관심을 모았지만 적은 분량으로 실망한 관객들과, 마블이 예전같지 않은 영화들을 선보이며 좀처럼 기운을
못내고 있습니다.
[북미 박스오피스]
국내에서는 큰 주목을 받지 못한 <헝거게임: 노래하는 새와 뱀의 발라드>가 북미 박스오피스 정상에
올랐습니다. 17~19일 4400만 달러를 벌어들여 북미 주말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으며, 이전 시리즈들은
총수익 3조를 넘긴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편 전 세계 13개국 박스오피스 1위를 석권한 <트롤: 밴드
투게더>가 2위에 올랐고 국내엔 레드벨벳 웬디, 라이즈 은석이 캐스팅되어 12월 20일 극장을 찾아온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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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도 가짜고 이 세상도 가짜라고? 영화 <프리 가이>
영화 <프리가이> 포스터
프리 가이(Free Guy, 2021)
장르 : 미국, 액션
감독 : 숀 레비 │ 각본 : 맷 리버맨, 자크 펜
출연 : 라이언 레이놀즈(가이), 조디 코머(밀리), 타이카 와이 티티(앙투안) 외
등급 : 12세 관람가 │ 러닝타임 : 115분
안녕 난 ‘가이’라고 해, 사실 난 가짜야.
그런 생각을 자주 했었다. 화려하고 멋진 이들로 넘쳐나는 이 시대에 어쩌면 나는 조연이 아닐까 하는. 아니 어쩌면 단역, 혹은 엑스트라는 아닐까. 예쁘고 멋있고 운동 잘하고 돈도 잘 버는, 누가 봐도 주인공 같은 사람들 밑을 잔잔하게 깔아주는 그런 존재.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할 수 있는 것도 못하게 되는 소심함의 굴레에 빠지게 되고 만다.
영화 <프리가이> 스틸컷
영화 <프리 가이>는 게임 속 가상 세계에 살고 있는 게임 캐릭터 ‘가이’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다. 실재하는 사람도 아니고 게임 속 캐릭터가 주인공이라니. 황당하지만 그가 살고 있는 게임 속 세상 ‘프리 시티’는 더 가관이다. 플레이어가 자유롭게 가상 세계를 돌아다닐 수 있는 오픈월드 게임 ‘프리 시티’에서는, 플레이어가 절도나 화재 등 범죄를 통해 레벨업을 하기 때문에 늘 사건 사고 투성이다. 이웃을 밀치고, 은행강도가 빈번히 발생하고, 건물은 붕괴되며, 누구나 총을 들고 돌아다닌다. 물론 자기가 게임 캐릭터인 줄도 모르는 ‘가이’는 자신이 발붙인 이 험한 세상이 가상 세계라는 것 역시 모르지만.
내가 배경이라고? 누구 맘대로?
쳇바퀴처럼 굴러가던 게임 속 세상에서, 어느 날 ‘가이’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다. 자신의 이상형에 부합하는 여성 ‘밀리’를 마주친 것이다. ‘밀리’에 홀려버린 ‘가이’는 끈질기게 그녀를 따라 다니지만 그녀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전한다.
영화 <프리가이> 스틸컷
알고 보니 그녀는 현실에도 존재하는 실제 플레이어이며, ‘가이’는 가상 세계에 접속한 플레이어들을 위해 그저 사물처럼 존재하는 NPC(Non-Player Character), 즉 배경 캐릭터라는 것이다. 자신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라고 생각했던 가이는, 사실 자신이 사는 세상이 가짜인 데다, 심지어 자신도 플레이어가 아닌 프로그래밍 된 배경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충격에 휩싸인다. 그러나 문제는 더 있다. 이 게임을 만든 회사의 대표가 곧 이 게임 서버를 폐쇄할 거라는 사실이다. 그 말은 곧, ‘가이’의 세상이 사라짐을 의미했다.
난 히어로가 될 거야, 내 의지로.
사실 ‘가이’에게 이 충격적 사실을 전해준 플레이어 ‘밀리’는 최초에 이 게임의 모태를 만든 사람이었다. 그녀는 동업자와 함께 만든 게임의 소스를 도용당했고, 그 실마리를 찾기 위해 ‘프리 시티’ 게임에 접속해왔던 것. 그러나 그 과정에서 NPC에 불과했던 캐릭터 ‘가이’가 프로그래밍을 벗어나 스스로 학습하여 인공지능으로 발달하는 놀라운 과정을 지켜보게 된 것이었다.
영화 <프리가이> 스틸컷
그러나 그 경이로움도 잠시, 어쨌거나 곧 게임 ‘프리 시티’는 폐쇄될 예정이다. ‘프리 시티’에는 ‘가이’ 뿐 아니라 수많은 NPC들이 성실하고 착하게 살아가고 있다. 이들이 사라지는 걸 볼 수 없었던 ‘밀리’는 ‘가이’를 일깨우고, 그렇게 ‘가이’는 결심한다. 수동적인 캐릭터에서 벗어나, 사라질 ‘프리 시티’를 구하는 히어로가 되기로!
사실 우린 어디든 갈 수 있는 걸요
게임 속 화려한 세상을 구현하던 초반부에서는 사실 이 영화의 매력을 느끼지 못했었다. 현란한 장면들에 쉽게 피로를 느끼는 탓이다. 그러나 ‘가이’가 자신이 살던 세상을 지키고 선량한 배경 캐릭터들을 구하기로 결심하면서부터 그 따뜻함에 완전히 매료되어버렸다. 철저히 프로그래밍 되어 주어진 일상만을 반복하는 NPC들에게 ‘가이’는 활기를 불어넣는다. 그렇게 수동적으로 살지 않아도 된다고, 늘 아메리카노를 주문했지만 카푸치노를 주문해도 되고, 저 바다 너머에 뭐가 있는지 궁금해해도 되고, 주어진 현실을 벗어나 하고 싶은 건 뭐든 해도 될 권리가 당신들에게 있다고 말이다.
영화 <프리가이> 스틸컷
영화는 게임 속 세상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이는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도 얼마든지 우리는 수동적인 존재가 되기 쉬우니까. 잘하는 사람에 치여서, 예쁘고 멋진 이들에 기가 눌려서, 아니면 주변에서 자꾸만 나의 평범함을 각인시켜서 등등, 우리도 아주 많은 이유로 기꺼이 NPC가 되어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가이’는, 스스로의 가능성을 더 멀리 보지 못하고 의기소침해지려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건지도 모른다. “아니 날 때부터 주인공이 어딨어! 우리 모두는 특별해! 그러니까 너의 삶을 성장시키고 확장해!”
여기는 누구나 주인공인 프리 라이프
마침내 ‘가이’가 수많은 배경 캐릭터들을 이끌고 새로운 세상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서 그들은 더 이상 플레이어들을 위한 배경으로 활용되지 않았다. 그들은 가고 싶은 곳에 갔고, 먹고 싶은 것을 먹었고, 학습하고 성장하고 확장하여 스스로를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 새로운 게임 세상은 훗날, 그 캐릭터들의 성장을 유저들이 지켜보는 형태의 게임 ‘프리 라이프’로 재탄생된다.
영화 <프리가이> 스틸컷
얼마나 멋진가! 누구도 백그라운드가 아닌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게임 세상이라니. (그렇다면 나는 하루에 하나씩 케이크를 먹는 소박한 스토리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
게임은 1도 모르지만 이 영화 재밌쩡
나는 사실 게임을 좋아하지 않아 한 번도 제대로 게임을 즐겨본 적이 없는지라, NPC니 오픈월드니 하는 용어에 대해 매우 취약했다. 그리고 아마도 큰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계속해서 게임과 담을 쌓고 살 가능성이 높겠다. 하지만 게임 속 세상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우리 현실과 연결이 가능한 따뜻한 이야기, 누구나 자신이 속한 세상에서 제한 없이 스스로를 성장시킬 수 있다고 천명하는 이 이야기는 너무도 각별하게 느껴진다.
특히나 ‘가이’가 들려준 따스한 메시지는, 오래오래 간직했다가 쭈글해질 때마다 필히 꺼내보아야지 싶다. “너는 너라서 특별한 거야, 하고 싶은 거 다 해”
글쓰는 우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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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그램 @woodu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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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어로써 영화, 감독의 목소리
현재 활동하는 전 세계 영화감독 목록을 뒤져봐도 홍상수만큼 다작하는 감독을 찾기 어렵다. 그는 매년 1, 2편의 영화를 시장에 내놓는다. 그가 15년 동안 성실히 쌓아둔 필모그라피 중 <강변호텔>(2019)이 유독 내 눈길을 끄는 이유는 늙은 예술가로서 홍상수의 목소리가 담겨있다는 심증 때문이다.
홍상수는 배우에게 화면과 상황을 비교적 자유롭게 열어주는 감독이다. 그의 카메라는 역동적으로 움직이거나 화려한 기교 대신 우두커니 서서 인물들을 응시한다. 그래서 홍상수의 영화가 성립하는 지점은 '통제'가 아니라 '전복'에 가깝다. 그리고 인과가 전복(혹은 반복)하는 그곳에 자신의 목소리를 담아내곤 한다.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2016)에서 개연성 없는 자기부정이나,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의 2막 구조 등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강변호텔>에도 전복되는 두 상황이 있다. 하나는 같은 공간에서도 서로를 찾지 못하는 아버지와 두 아들. 다른 하나는 벽 너머 영환(기주봉)의 죽음을 느끼고 눈물을 흘리는 두 여인의 얼굴이다.
강변호텔에 거주하는 늙은 시인 영환은 자신의 죽음을 느끼고 두 아들을 호텔로 부른다. 호텔로 찾아온 두 아들은 로비에 앉아 있던 자신의 아버지를 발견하지 못한 채 꽤 오랜 시간 아버지와 같은 장소에서 서로를 기다린다. 배경이 된 호텔의 규모를 고려했을 때 그들이 서로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 다소 아이러니하다. 더욱이 작은아들인 병수(유준상)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 영환을 찾지 못해 호텔 이곳저곳을 맴돌고, 함께 저녁을 먹은 식당에서도 두 아들은 아직 식당 근처에 남아 있던 아버지와 만나지 못하고 따로 호텔에 돌아온다. 그렇게 아버지와 두 아들은 같은 공간에서도 서로의 이름을 부르기만 할 뿐 조금씩 어긋난다.
그들의 대화 역시 결정적인 한 걸음을 내딛지 못한다. 큰아들인 경수(권해효)는 이혼한 사실을 고백하지 않고, 병수는 영환을 찾아 호텔을 헤맸었다는 사실을 숨긴다. 영환 역시 두 아들에게 방으로 돌아간다고 말하지 않아 병수를 찾아 헤매게 하고, 식당에서 나와 혼자 호텔로 돌아간다는 거짓말로 두 아들을 먼저 호텔로 보낸다. 대화의 결여와 오인은 소통의 실패로 이어진다.
그런데 줄곧 소통에 실패하던 두 아들과는 다르게 <강변호텔>에 등장하는 두 여인은 벽 너머에서도 영환의 죽음을 느낀다. 그 직전 장면에서 영환은 두 여인 앞에서 자신이 쓴 시 한 편을 낭독하는데, 영환의 목소리 뒤로 시의 화자로 추측되는 제3의 인물이 등장한다. 앞서 두 아들과의 대화에서 삽입된 두 번의 몽타주컷에서 영환이 호텔 주위를 거니는 모습이 등장한 것과는 대비를 이룬다. 두 아들과의 대화에서 등장한 몽타주컷에선 영환이 존재하지만 두 아들은 그 시점에 존재하지 않았다. 즉, 이 몽타주컷은 영환의 기억이지 두 아들과 함께 공유하는 기억이 아니다. 반면 마지막 몽타주컷은 영환과 두 여인 모두 그 시점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장면은 영환과 두 여인이 공유하는 기억이 아니라 영환 역시 두 여인과 같은 목격자이다. 같은 장면을 상상한 그들은 교감에 성공한다. 두 아들과의 소통이 실패로 돌아갔던 걸 고려해봤을 때, 말이 아닌 예술(시)로써 이뤄지는 소통의 가능성을 암시하는 장면으로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늙은 시인 영환은 대중인 우리가 알고 있는 인간 홍상수와 여러모로 겹쳐 보인다. 전 부인을 버리고 새로운 여자와 사랑에 빠졌고, 그런 자신을 전 부인이 죽도록 원망한다는 설정이 그렇다. 이런 점에서 나는 감독이 늙은 시인의 몸을 빌려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다. 그래서 내겐 <강변호텔>이 자신의 목소리가 오인될 '말'이 아닌 자신이 늘 하던 대로 '예술'로써 발언하겠다는 홍상수의 영화적 선언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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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로움을 사랑이라고 착각하지 않기를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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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도시에서 대도시로, 더 큰 도시로 거처를 옮겨다녔다. 서울에는 고향을 떠나 온 수많은 '레이디 버드'들이 있다. 이들이 고향을 떠난 이유는 아마도 소도시에는 일자리가 많지 않아서이고, 일자리가 있다 하더라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 이유는 고향에 갔을 때 느끼는 갑갑함 때문일 테다. 나는 직장을 다니지 않지만 아마 다시 귀향하지는 않을 것 같다.
소도시 사람들은 건너건너 다 아는 사이이다. 내가 고등학교 때 야자를 째고 놀고 있는 모습을 누군가가 보고 우리 엄마한테 일러바쳤다는 걸 나는 몇 년 전에 알았다. 그러니까, 딴짓을 하지 못한다는 거다. 다른 사람들이랑 똑같이 살지 않으면 너무 튀어서 온 동네에 소문이 쫙 퍼진다는 거다.
아마 내가 고향에 있었으면 이런 소리를 들었을 게 뻔하다.
"그집 딸은 대학 나왔으면서 취직도 안 하고 시집도 안 가고 어쩌고 저쩌고."
그렇기에 수많은 아이들이 고향을 떠나 서울에 몰린다. 그 돈이면 고향에 집을 살(이제는 아니지만) 만큼의 돈을 내고 콩만한 방에서 해로운 음식을 먹으며 낯선 곳에서 살아간다. 돈을 벌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떠나고 싶어서이기도 하다.
이따금은 가정을 벗어나기 위해 결혼을 택하는 여자 아이들도 있다. 내 가까운 친척도 그리하였다. 나는 같은 여자로서 그 아이의 삶이 너무 아깝고 아쉬웠는데, 그 생각 또한 근시안적이고 자기중심적이라는 걸 최근에야 알았다.
<위대한 개츠비>의 화자인 닉의 아버지의 말처럼,
"누군가를 비판하고 싶을 때는 이 점을 기억해두는 게 좋을 거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너처럼 유리한 입장에 서 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기억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무튼 우리는 떠난다. 더 나아지고 싶기 때문이다. 내 고향사람들의 눈에 비친 내가 아니고 싶기 때문이다. 나의 할머니, 엄마, 이모, 고모, 숙모, 옆집 아주머니와는 다른 인생을 살아보고 싶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 존재들은 외로움에 직면한다. 가족도, 친구도 없는 곳에서 휘몰아치는 존재의 고독을 고작 이십대 초중반의 우리가 어찌 견뎌내겠는가. 그리하여 우리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하여 몇 가지 선택을 하게 되는데, 가장 쉽고 빠른 돌파구가 연애가 되겠으며 나와 몇몇 사람들처럼 술을 비롯한 중독에 빠지기도 쉽다. 한편으로는 연애도 중독이라 볼 수 있겠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연애에 중독된 예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사랑이 문제가 아니라 옆에 누가 없으면 못살겠어서, 혼자서 자기 자신을 직면하는 것이 두려워서, 못난 나를 바라보는 게 불편해서. 아주 쉽게 자존감을 채워주는 사람, 응당 나에 대해서 좋은 말을 해주고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같이 있어 주는 사람을 찾아 온 거리를 헤매는 것이다.
나는 그쪽보다는 감정과 생각을 마비시키는 편이 더 좋았으므로 술을 선택했겠지만 그것 역시 연애중독자들과 비슷한 맥락이다. 못난 나를 바라보고 나에 대해서 생각하고 싶지 않으니까.
<브루클린>의 주인공 에일리스 역시 아일랜드의 소도시에서 미국 브루클린으로 돈을 벌러 떠난 이십대 초반의 여성이다.
에일리스는 언니 로즈가 아는 신부님의 도움으로 미국에 간다. 아일랜드에서는 소매점에서 일주일에 두 시간 정도 아르바이트를 할 자리밖에 없다. 하지만 때는 1950년대, 기회의 땅 미국에는 일자리가 차고 넘친다.
에일리스를 태운 배는 몹시 흔들릴 예정이지만, 에일리스는 배를 타고 미국으로 가본 적이 없으니 아무것도 모른 채로 혼자서 저녁식사를 한다. 결과적으로는 속에 든 걸 다 게워내고 배에 탄 그 누구보다 심하게 멀미를 한다. 그때, 에일리스와 같은 호실을 쓰는 여자는 에일리스를 돌봐주고, 미국에 입국할 때의 자세를 알려주고, 옷차림을 고쳐준다.
에일리스는 아일랜드 여자들이 모여 사는 하숙집에서 살면서 미국 백화점에서 일하게 된다. 에일리스는 낯가림이 무척 심한데, 별안간 친절하고 다정한 점원이 된다. 이탈리아 출신 남자 토니와 연애를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남자는 몇 번 만나지도 않았는데 에일리스를 가족에게 소개시키고 싶어 하고, 가족을 소개하자 마자 결혼하고 싶어하고, 롱아일랜드에 땅을 사서 집을 짓고 같이 살고 싶어 한다. 공교롭게도 롱아일랜드는 <위대한 개츠비>의 배경이다.
에일리스는 백화점 점원보다는 언니 로즈처럼 회계를 공부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낮에는 백화점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간대학에 다니며 경리 자격증을 딴다. 모든 것이 완벽한 이때, 언니 로즈가 갑자기 죽는다. 영화에서는 병을 앓고 있었다고 하지만, 글쎄, 언니가 스스로 선택했을 가능성도 열어두어야 할 것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읜 한 집안의 장녀가 살아온 삶을 상상해보자. 열심히 돈 벌어서, 둘째 에일리스에게는 결혼하라고 여기저기 남자들과 연결하고 일부러 자리 만드는 동안 로즈의 애인에 대한 소식인 전혀 들리지 않는다. 자기가 미국에 가서 아메리칸드림을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동생을 보내고, 자기는 어머니를 봉양하는 삶. 어쩐지 기시감이 든다.
여러모로 아일랜드와 한국은 비슷한 궤를 가졌다. 섬나라의 식민지로 수탈을 당한 것도 그렇고, 독립 후 경제성장도 그렇고, 상황이 그렇다 보니 국민성도 비슷하다고 한다. 아직 아일랜드 사람을 만나보지 못해서 모르겠지만, K-장녀로서 I-장녀를 이해하는 게 어려울 것도 없다.
아무튼, 언니가 죽고 에일리스는 잠시 아일랜드로 돌아오는데, 아일랜드로 간다고 하니 토니가 자기랑 결혼을 하고 가란다. 혼인신고까지 마치고 가라는데, 에일리스는 또 그렇게 하겠단다.
아일랜드에 갔더니 가장 친한 친구가 남자 하나를 붙여준다. 부잣집 아들에다 외모도 미국 토니보다 훨씬 나은 상황에서 에일리스는 고민하는 눈치다. 게다가 언니의 후임으로 회계 일을 할 자리도 얻었다.
여기서, 예의 아르바이트하던 소매점 주인이 어디에서 건너건너 아는 사람으로부터 그녀가 미국에서 이탈리아계 성을 가진 남자랑 혼인신고 했다는 걸 안다고 약간의 협박을 한다. 그렇다. 그것이 작은 마을의 특징이다. 건너건너 건너면 바다 건너 소식까지 다 아는 것이다.
잠시 고향의 안락함에 젖었던 에일리스는 당장 짐을 싸서 미국으로 건너간다. 에일리스가 그랬던 것처럼 뉴욕으로 가는 배에는 갓 미국행 배를 타고 설레하는 어린 여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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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일리스가 토니와 사랑에 빠진 것이 과연 진짜 사랑이었을까. 에일리스는 미국으로 건너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토니를 만난 것도 겨우 몇 번에 불과하다. 혈혈단신으로 뉴욕에 와 보니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필요해진 것. 토니 역시 에일리스를 정말 사랑한다면 아일랜드에 갔다 올 때까지 기다려주면 되는 거였다. 굳이 혼인신고까지 해서 여자를 밧줄에 묶어둔 채로 보내준다는 생각은 너무나도 전근대적이다.
그러나 에일리스가 아일랜드 남자와 아일랜드에 정착하게 되면 에일리스의 삶은 어머니의, 할머니의, 옆집 아줌마의 삶과 똑같아진다. 이 세상이 전부인 줄로만 알고 살아가는 것. 에일리스는 더 큰 세상이 있다는 것을 이미 확인했다. 새로운 세상에서 에일리스는 자신만의 삶을 이끌어나갈 것이다.
나의 친구들, 친분은 없지만 내가 친구라고 생각하는 수많은 청년들이 자기만의 삶을 위해 집을 떠났다. 안락하고 평화롭고 안정적인 고향을 두고 머나먼 타지로 올라와 서러운 삶을 견딘다. 우리의 서러움은 반드시 외로움을 동반한다. 분명 사랑은 사람을 구원하지만, 사랑으로 구원받으려고 하지 말자. 정확히는 사랑도 아니면서 사랑인 척하는 것들을 경계하자.
끝내 에일리스가 토니와 혼인신고를 하지 않고, 성공한 커리어우먼으로 뉴욕을 활보하는 모습은 볼 수 없었지만, 영화 너머에 시골에서 뉴욕으로, 지방에서 서울로 상경한 젊은이가 꿈을 이루면서 멋지게 살고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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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전자가 세상을 지배하다. 가타카 (1977)
<13층> 이후로 '어떻게 저런 생각을 저 시대에 했을까?'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작품이다. 실제로 지금도 꾸준히 논란이 되고 있는 '맞춤형 아기'에 대한 생각을 몇십 년이나 앞서 중심에 둔다. 유전자 조작은 윤리적으로 아주 민감한 문제이며, 특히 그 대상이 인간일 때 더욱더 조심해야 하는 주제이다. 그러나 가타카에서는, 아주 빈번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며 이로 인해 만들어진 우성인자를 가진 사람들만 우주 비행사가 될 자격이 주어진다. 유전자의 우월함이 계급이 되는 세상, 그곳이 곧 미래이자 현실이다.
빈센트는 자연분만으로 인해 열성에 가까운 유전자를 타고난 채 태어난다. 심장질환이 있어 조금만 뛰어도 금세 숨이 차고, 그다지 큰 키도 아니지만 우주비행사가 되겠다는 일념 하나로 모든 것을 바꾸려 한다. 하지만 몸 안에 내재해 있는 유전자는 자신의 정체성이자 지울 수 없는 표식이므로, 우성인자를 가졌지만 사고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제롬의 몸을 빌리기로 한다. 만약 빈센트가 자신의 타고난 천성에 만족하고 살아갔다면 청소부 일을 하면서 가끔 하늘을 올려다보는 게 전부이겠지만, 이에 일종의 반항심을 가지고 끊임없이 노력한다.
항상 동생과의 수영 내기에서 졌던 그가 마침내 그를 이기고 지친 동생을 오히려 끌고 나오면서부터 저력은 발휘된다. '다시 돌아갈 힘을 남기지 않아서 너를 이길 수 있었던 거야.'라고 말을 하는 그는 흔치 않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끈기와 인내', 이것이 빈센트만이 가진 일종의 특장점이자 우월한 유전자인 셈이다. 우성인자를 가진 사람들은 이미 자신의 타고난 능력만을 믿고 더 나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다는 말이 있듯이, 항상 남들보다 많은 시도를 한 그를 이길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는 그 사람의 잠재력과 가능성보다 주어진 환경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 사회를 비판하고, 이게 과연 미래를 위해 좋은 일인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그가 목표 달성에 다다르는 시점에서, 또 하나의 윤리적 문제가 생긴다. 사회의 기대와는 반대로, 우성인자인 제롬은 자신의 꿈 없이 그저 빈센트에게 필요한 DNA를 주는 일종의 도구로 전락해 버린다. 유전자 조작으로 인해 인간의 존엄성과 자연스러움이 배제되고, 일종의 기계 같은 사람이 된 것이다. 결국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지자 극단적 선택을 하는 그는 실제로 곧 시행될지도 모르는 유전자 선택에 대해 경고의 메시지를 보낸다.
있는 그 자체를 존중하고,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결점을 받아들이는 것이 인간을 대하는 최선의 방식임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다. 물론 미래에는 유전학적으로 더 발달한 사회가 되겠지만, 너무 완벽함을 추구하다 보면 결국 인간 또한 통제불능인 상황이 올까 두려워진다.
* 본 콘텐츠는 브런치 JW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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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지식과 너의 물고기 지식을 바꾸자"
‘창대’가 혼자 글 공부를 하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정약전’은
서로의 지식을 거래하자고 제안하고
거래라는 말에 ‘창대’는 못 이기는 척 받아들인다.
둘은 티격태격하면서도 점차 서로의 스승이자 벗이 되어 간다.
"너 공부해서 출세하고 싶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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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픈 귀신들을 위한 귀신절에
갑자기 출몰한 강시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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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투를 벌이는 퇴사마 ‘하오’는
이 사태에 무시무시한 음모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밝혀내는데…
역대급 퇴마 호러액션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