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DAY2024-11-14 15:11:20
청설 | 공감과 청량으로 빚은 계절감 충만 로맨스
<청설> 리뷰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대학 졸업장은 손에 쥐었지만,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없이 부모님 도시락 가게에서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던 ‘용준’(홍경). 어느 날, 그는 배달 중 들린 수영장에서 완벽한 이상형 ‘여름’(노윤서)을 만난다. 청각장애인 수영 선수인 동생 ‘가을’(김민주)의 훈련을 돕던 여름에게 첫눈에 반한 그는 서툴지만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다가가고, 행운까지 따른 덕분에 용준과 여름은 친구가 된다.
입이 아닌 손으로만 말하는 여름과 더 가까워지고, 소중한 사이가 되고자 노력하는 용준. 하지만 충분하다고 생각한 순간에 용준의 고백은 거절당한다. 미래와 꿈을 이야기하는 용준과의 만남이 청각장애인 동생과 부모님만을 생각하고 살아온 여름에게는 충격이자 부담이었기 때문. 하지만 용준은 희망을 놓지 않았고, 초여름이 깊어지면서 여름도 서서히 그에게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한다.
20대라는 계절
어른들이 20대 중후반에 접어든 이들을 위로할 때 흔히 쓰는 표현이 있다. 바로 인생을 시계에 비유하는 것. 100세 인생 중 20대 중후반이면 이제 1/4 정도 지났을 뿐이니, 시계에서는 새벽 6시 언저리이고, 막 해가 뜨거나 뜨기 직전의 새벽일 뿐이라고. 그러니 설령 남들보다 뒤처지는 것 같아서 좌절스럽더라도 무너질 필요는 없다고. 간 호흡으로 인생을 보면서 내실을 다지고, 다음 기회를 노려도 충분하다고.
이 비유는 다양하게 변형될 수 있다. 마라톤 같은 달리기 경주로 바꿔도 말이 된다.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미사여구를 더해도 된다. <다크 나이트> 중 하비 덴트의 대사처럼, 인생의 새벽인 20대는 해가 뜨기 직전이라서 더 어두운 것이라고. 계절로 대신할 수도 있다. 20대는 사계절 중 이제 막 초여름이 시작되려는 시기일 뿐이니 아직 열매를 수확할 가을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고, 1년을 마무리할 연말은 까마득하다고.
대만의 동명 원작 영화를 리메이크한 <청설>은 인생의 초여름, 20대 중반을 마주한 청춘들의 로맨스를 보여준다. 정확히는 로맨스를 곁들였다. '우리의 여름을 들어달라'(Hear Me: Our Summer)는 의미의 부제만 봐도 알 수 있다. 로맨스를 위한 로맨스가 아니라 세 주인공이 각자의 여름을 받아들이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
여름과 가을 사이에서
원작과 리메이크 사이에서 가장 눈에 띄는 차이는 바로 이름이다. 특히 두 자매의 이름이 독특하다. 한국판 <청설>은 자매의 이름을 계절감 가득한 '여름'과 '가을'로 변경했다. 흥미롭게도 이 이름 덕분에 세 주인공이 마주하는 인생의 초여름은 더욱 의미심장해진다. 여름과 가을 자매의 이야기에 메시지가 압축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인생의 여름과 가을에 대해서도 곱씹어 보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여름의 인생은 철저히 가을이에게 맞춰져 있다. 동생이 올림픽 대표 선발전을 뚫고, 함께 올림픽에 가는 게 그녀의 유일한 목표다. 그래서 여름은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가을이의 훈련비로 투자하고, 시간을 쪼개서 국제 수화를 배우러 다닌다. 영준과 썸을 타고, 연인 관계로 발전을 하려는 순간마다 그 관계를 망설이거나 끊어내는 이유이기도 하다. 가을이와의 목표를 위해 자기 자신을 오히려 다그치는 것.
여름이에게 영준과의 만남은 터닝 포인트다. 영준은 대학 졸업 후 하고 싶은 일이나 진로를 아직 찾지 못한 평범한 20대다. 그는 도시락 배달을 갔다가 만난 여름에게 첫눈에 반하고, 그녀에게 같이 인생의 목표를 찾아보자고 제안한다. 그런데 정작 여름은 충격에 빠진다. 올림픽 출전이 가을이의 목표일 뿐 자기 목표가 아니라는 사실 처음 깨닫고, 청각장애인인 부모님이나 동생과는 다른 인생의 가능성을 비로소 발견하기 때문.
여름의 깨달음은 메타적이다. 그녀는 자기에게 주어진 열매라고 생각했던 가을이의 올림픽 출전이 자신의 '가을'이 아니라는 사실을 배웠으니까. 그렇게 여름이는 여름이 코 앞에 다가온 후에야 비로소 자기만의 가을, 새로운 인생을 그려나가기 시작한다. 그렇기에 영준과 여름의 로맨스는 단순한 로맨스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보다는 여름을 마주하고는 각자의 가을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건네는 격려와 위로에 가깝다.
착한데, 착하기만 한 로맨스
물론 <청설>에는 대만 로맨스 영화에 기대하는 순간도 나온다. 사랑이 시작되는 풋풋함, 착한 풋사랑이 끝나는 아픔 등. 특히 청각 장애라는 소재를 활용한 전자가 인상적이다. 예를 들어 영준이 여름에게 고백하는 순간은 유독 살랑거린다. 수영장에서 번호를 따거나 커피를 같이 마실 때 말을 하는 대신 전부 수화만 사용하다 보니 설렘과 떨림이 손짓과 몸짓만큼 크게 보이니까.
여름이 영준에게 빠져드는 과정도 흥미롭다. 호감은 느끼지만 그를 친구로만 생각하던 여름. 하지만 기분 전환 차 놀러 간 클럽에서 그녀는 시나브로 그에게 스며든다. 영준이 이끄는 대로 손을 스피커에 대고, 음악을 듣는 대신 느끼면서 비로소 그의 모습을 한 세상에 마음의 문을 연다. 수영장에서 영준의 말이 아니라 그가 보낸 물결을 느낀 후에야 그의 고백을 받아들이는 장면처럼 비슷한 순간이 반복되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다만 착하고 순수한 로맨스가 빛이 바래는 순간도 있다. 여름과 영준의 관계를 위기에 빠트리는 전개가 부자연스럽기 때문. 특히 여름과 가을의 자취방에 불이 나는 시점부터의 진행은 다소 갑작스럽다. 물론 세 주연의 관계에 전환점을 마련하고, 그들의 성장을 강조하기 위해 필요한 장치인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사고처럼 작위적인 전개와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영화의 분위기는 끝내 불협화음을 내고 만다.
소재의 무거움과 가벼움 사이에서
유독 부각되는 단점도 있다. 바로 영화가 청각 장애라는 소재를 대하는 태도와 방식이다. <청설>은 청각 장애인의 로맨스를 다루기에 독특한 작품이다. 소재를 강조하려는 노력은 곳곳에서 엿볼 수 있다. 상술했듯이 청각 장애인들도 음악을 즐길 수 있는 사람들로 묘사하면서 고정관념을 빗겨 나간다. 또 템포가 늘어진다고 느껴지더라도 수화로 이뤄지는 대화를 가능한 끊지 않고 보여주려는 시도도 인상적이다.
그러나 한계도 명확하다. 여름이가 비장애인이었다는 사실을 마지막까지 숨긴 반전이 특히 문제다. 영화적 재미는 더할지는 몰라도, 여름과 영준의 감정선을 어색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주제와도 맞지 않는다. 결국 모든 게 비장애인의 로맨스였다는 점에서 청각 장애는 그저 도구로만 소비된 셈이다. 이는 사회적 소수자나 비주류 집단 배우나 캐릭터를 보여주기식으로만 활용하는 ‘토크니즘’으로부터도 자유롭지 않다.
더 나아가 평면적인 청각 장애인 묘사도 구시대적으로 보일 때가 있다. <청설>은 모든 청각 장애인을 착한 사람, 배려받아야 할 사람, 약자들로만 묘사한다. 마찬가지로 청각 장애인 가족의 이야기를 다뤄서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코다>가 장애인들이 사업체를 소유하거나 지역 어업 공동체를 이끄는 식으로 그려낸 것과 비교하면 <청설>은 깊이가 얕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배우라는 눈속임
그런데 <청설>은 최소한 보는 동안에는 위의 단점이 생각나지 않게 하는 매력이 있다. 바로 영화의 감성을 온전히 살린 배우들의 힘이다. 우선 홍경이 연기한 영준의 경우 사실 깊은 인상을 남길 수 있는 인물은 아니다. 일반적이고 평이하니까. 하지만 그 인물을 숨 쉬는 듯 자연스럽게 표현한 홍경의 연기는 그가 주목받는 신예인 이유를 증명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자기 잘못과 마음을 무심하게 고백하는 수영장 씬만 봐도 느낄 수 있다.
여름을 연기한 노윤서는 기시감이 없지 않다. <일타 스캔들> 등에서 비슷한 결의 캐릭터를 맡았기 때문. 그러나 익숙하고 편안하게 캐릭터를 관찰할 수 있다 보니 사소한 동작 하나 놓치지 않는 표현력이 더 돋보이는 측면이 있다. 일례로 그녀는 수화를 할 때 마치 말을 하는 것 같은 입모양을 만들 때가 있다. 이러한 디테일은 여름이 사실 청각 장애인이 아니라는 반전의 복선으로 이어지면서 몰입감을 극대화한다.
마지막으로 김민주는 아이돌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뗄 수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가을이라는 캐릭터는 오로지 수화와 표정, 제스처만으로 감정을 표현해야 한다. 그런데 대사가 단 한 마디도 없는 제한적인 환경이 오히려 도움이 되지 않았나 싶다. 혹시 모를 발성에서의 불안감은 느껴지지 않고, 아이돌다운 표정 연기와 제스처가 뛰어난 전달력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언니에게 부담감과 불안함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움 한 가지는 가려지지 않는다. 바로 개봉일이다. 물론 부산국제영화제를 기점으로 마케팅을 펼치고, 수능 특수를 노린 선택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주제와 분위기를 고려하면 최선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청소년 관객을 매료하기에는 생각보다 진중하니까. 또 계절감이 충만한 영화인 만큼 초여름 분위기를 강조할 수 있는 개봉시기가 더 적절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Poor 형편없음
배우와 감성, 분위기만 빛나는 초여름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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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빌 펄롱을 통해 모두에게, <이처럼 사소한 것들>
*이 글엔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Small Things Like These), 2024
감독, 팀 밀란츠
빌 펄롱을 통해 모두에게, <이처럼 사소한 것들>
하루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마을 전경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고요하면서도 쉽사리 떨쳐낼 수 없는 서늘함이 느껴지는 이곳은 수녀원을 중심으로 한 1985년 아일랜드의 한 소도시. 아일랜드 정부와 가톨릭교회가 보호, 참회, 갱생을 빌미로 젊은 여성들을 감금하고 노동착취를 일삼았던 역사(막달레나 세탁소)와 이를 고스란히 담아낸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이미 접한 관객이라면, 첫 장면에 얼마나 중요한 정보가 담겼는지 알아차릴 것이다. 마을이 구석구석 소개될 때, 고집스럽게 화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자신들의 사회적 위치와 정신적 영향력을 관객에게까지 과시하는 수녀원을 과연 누가 못 본척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껴지는 어두침침한 마을을, 관객들이 단순히 '풍경'으로 인식하길 바란다. 시끄럽게 울리는 사무실 전화벨을 대수롭지 않게 흘리고 석탄 배달을 가는 빌처럼 말이다. 그의 트럭을 따라 평범하기 그지없는 소시민의 일상을, 암울한 사회 배경보다 먼저 마음에 담길 원한다. 잔혹한 역사를 고발하고 비판하는 상황보다 비극 속에서 살아가는 인물을 더 주요하게 여겨서고, 본래 역사는 희극이든 비극이든 상관없이 인물로 설명되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영화가 원작의 내용을 조금의 덧붙임 없이 충실하게 스크린에 담아낸 이유와도 연결된다. 영화의 주제 의식과 소설의 지향점은 같다. 오직 인물만이 이 비극적 역사를 풀어낼 수 있고, 그중에서도 오직 빌 펄롱만이 어둠 속에서도 한 줄기 빛을 밝힐 수 있다는 점.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빌을 통해 쓰인 작품이다. 우린 빌에게 집중하면 할수록 그의 상황을 깊이 이해하게 되고, 그가 사는 세상을 경험하게 되면서 비로소 영화가 말하는 진정한 가치, 따뜻한 희망을 발견하게 된다.
출처: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 스틸컷
해가 아직 뜨지 않은 새벽, 빌이 트럭에 석탄을 담는다. 석탄 배달로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는 그에겐 사랑하는 아내와 다섯 명의 딸이 있다. 삶은 안정적이고 규칙적이다. 새벽에 출근해 석탄을 배달하고 퇴근 후 집에 오면 화장실에서 온몸에 묻은 석탄 가루를 씻어낸다. 식탁에 옹기종기 모인 귀여운 딸들의 수다를 반찬 삼아 저녁을 먹고, 아내와 이런저런 얘길 하다 잠에 든다. 자주 잠을 설치지만 새벽이 되면, 어김없이 석탄을 배달한다. 소소한 만큼 무료하기도 하지만 가족의 평안이란 확실한 대가가 충족되는 하루, 모두에게 이상적인 삶은 특별한 계기나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 한 계속될 참이었다. 그가 부모에 의해 수녀원에 강제로 입소하는 소녀를 보지 않았다면 말이다.
석탄 창고 안에서 소녀의 울부짖음에도 숨죽였던 그때, 빌은 중요한 사실을 깨닫는다. 그동안 자신을 괴롭혔던 불안이 실은 시한폭탄이었고, 소녀가 수녀원에 갇힌 순간 폭탄 작동 버튼도 함께 눌렸음을 말이다. 사실 빌은 남들처럼 소소하고 평범하게 사는 게 불편했다. 정확히는 모두가 가끔은 불행하지만 대체로 행복하다고 말할 때, 본인도 그렇다고 자신 있게 표현할 수 없었다. 그에게 평안의 다른 말은 불안이었고 이는 따뜻함과 혼란함이 공존했던, 그리하여 너무나도 혹독했던 유년기에서부터 축적된 결과였다.
소녀를 처음 본 이후 영화는 석탄 배달 같은 반복적인 장면은 빠르게 넘기고, 빌이 혼자인 순간엔 시간을 충분히 투자해, 어딘가 외롭고 공허해 보이는 그를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클로즈업 샷으로 그가 느끼는 고통을 더 집중적으로 느끼도록 유도하고, 대체 어떤 사건이 빌의 내면에 불안을 심었으며, 목에 걸린 음울은 왜 계속 토해내지도, 삼키지도 못하는지 궁금하게 한다. 그의 불안을 역추적하는 일에 모든 힘을 소진하는 것인데, 이는 빌이 아내는 물론 동료, 이웃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출처: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 스틸컷
빌의 어머니는 갱생의 대상, 미혼모였다. 부잣집 가정부인 그녀 또한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꼼짝없이 수녀원에 갇힐 처지였다. 그러나 집주인 윌슨 부인의 도움으로 빌을 낳고 길렀다. 아버지는 없었지만, 부인의 아들이 삼촌으로 곁에 있었고 갑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그들의 보살핌은 계속됐다. 수녀원 창고 안에서 볼록한 배를 감싸고 두려움에 떠는 소녀를 보며, 빌이 어머니를 떠올린 건 당연했다.
빌은 현재와 과거가 끊임없이 반복되고 중첩되는 소용돌이에서 쉽사리 빠져나오지 못한다. 계속 과거의 나와 어머니를 떠올리고, 이름도 모르는 아버지를 찾고, 어머니를 생각하는 걸로도 모자라 현실로 불러와 성인이 된 본인과 마주하게 한다. 소녀는 어머니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윌슨 부인과 삼촌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고, 빌은 그들의 따뜻한 사랑을 단 한 순간도 잊은 적 없었다. 그때 부인이 그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다면, 지금의 빌은 없었을 테니까. 더구나 작고 허름해도 온기 가득한 집에서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사는 삶은 아내의 말처럼 운이 좋아 얻은 결과물이 아니었다. 윌슨 부인이 어린 빌에게 준 사랑은 많은 돈과 우연이 결합해 발생한 운 좋은 얘깃거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빌이 윌슨 부인에게 진정한 사랑을 배웠음을, 어린 빌과 부인의 추억을 수없이 반복적으로 꺼내 증명한다. 그녀의 사랑은 그를 진정 따뜻한 어른으로 만들었다. 나를 아끼듯 타인을 생각하고, 나를 위로하듯 남을 돌보고, 나를 사랑하듯 그를 돕는 삶. 아내와 다른 이들이 바라는 수녀원의 차가운 입김이 닿지 않는 삶과는 확실히 정반대였다.
출처: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 스틸컷
소녀를 돕지 않는 본인을 향한 혐오와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 사이, 빌은 결국 가장으로 살아온 시간을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침묵이 곧 순리임을 돈과 권력으로 강요하는 수녀원장의 입김에 고갤 숙인다. 지금껏 지켜온 모두의 삶을 위태롭게 하지 말라는 단골 가게 사장의 말에도 이를 악물며 참는다. 소녀가 생각나 부끄러움이 밀려오자, 아내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고 자괴감이 휘몰아치자, 이를 잘라내기 위해 이발소에 들어간다. 늘 그래왔듯 하루 더 버티면 되는 일이었다. 그가 사는 이곳은 누군가를 가여워하거나 안쓰러워하거나, 돕는 게 불가능하고, 이를 의심조차 하지 않는 세상이니까. 수녀원에 끌려간 이들에게 연민을 느끼고, 무관심으로 인한 양심의 가책에 힘들어할 시간도 없다고 여기는 사는 사람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이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빌을 무조건 추앙하지도 않는다. 그저 끝까지 빌을 보여줄 뿐이다.
오래된 침묵만 감도는 이발소 안, 빌은 거울에 비친 어린 자신과 아빠의 빈자리를 채워주던 삼촌을 발견하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뛰쳐나간다. 그 뒷모습을 끝으로, 영화는 그를 지독하게 괴롭혔던 반복과 집중을 단번에 없애고 이야기 끝자락을 수놓는 빌을 조용히 따라간다. 빌이 외면했던 사람은 소녀만이 아니었다. 어머니와 윌슨 부인, 삼촌이었으며 자기 자신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결정과는 별개로 자신이 받은 사랑이 무참히 소멸하는걸, 당연하게 여기는 세상에서 도저히 살 수 없었다. 빌에겐 그 희망이 전부였고, 여전히 삶의 기둥으로 자리하고 있으니까. 그의 처절하면서도 간절한 선택은 모두가 안 된다고 할 때 홀로 된다고 말하는 결연한 용기와는 다르다. 빌은 자기를 버릴 수 없었기에 용기를 냈다. 다만 그의 용기에 조건 없는 사랑이 깃들어 있었고, 그가 베풀고자 하는 사랑 안엔 가족이 있었으며, 더 나아가 모두가 존재했을 뿐이다. 그 결과 수녀원 창고에서 소녀를 데리고 나와 집으로 향하는 빌의 모습은 알코올 중독자인 친구 아들에게 잔돈을 줬던 그날처럼, 평범한 하루로부터 퇴근하는 소소한 일상으로 비치는 동시에 우리의 마음을 한없이 울컥하게 한다.
출처: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 스틸컷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빌 펄롱을 통해 모두에게 전한다, 삭막한 곳에도 희망은 피어나고, 희망이 핀 곳엔 사실 희망이 이미 뿌리내려져 있었단 사실을. “이제 아무 걱정하지 마.” 빌이 소녀에게 그리고 모두에게 건넨 마지막 말이다. 빌이 괴로움에 몸부림치지 않았다면, ‘막달레나 세탁소’는 여전히 수녀원장이 준 크리스마스카드 안에 감춰져 있었겠지. 그의 손에 접착제처럼 붙어있던 석탄 가루가 말끔히 씻겨 사라지는 일도 끝내 없었을 테고, 가족이 있는 시끌벅적한 부엌으로 들어가는 빌과 소녀의 모습 같은, 이처럼 사소한 것도 영영 못 봤을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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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 나 음악할래'라는 말
6★/10★
〈둠둠〉은 메시지가 넘치는 영화다. 그러다 보니 흩어진 메시지를 한데 모으는 결말이 다소 작위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단점보다 장점이 많다. 여성과 꿈, 모녀 관계의 어떤 순간을 탁월하게 담아낸 장면이 특히 그렇다.
주인공 이나는 테크노 음악으로 디제잉을 하던 촉망받는 유망주였으나 이제는 음악을 그만둔 지 수 년째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이나와 만나던 남자가 출산 후 해외로 가버린 사건이 첫 번째고, 교회 집사인 엄마가 체면 문제로 미혼모 딸과 손녀 그리고 딸의 디제잉을 용납하지 않으려 든다는 것이 두 번째다. 그래서 이나는 엄마의 바람대로 음악을 그만두고, 콜센터에서 일하며, 딸은 위탁가정에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래전 함께 음악을 했던 동료에게서 디제잉 오디션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는다. 선발되면 베를린 클럽에서 2년간 일할 기회가 주어지는 큰 오디션이다. 회사에서 헤드폰으로 고객 상담을 진행하던 이나는 깨닫는다. 헤드폰에서 강렬한 비트의 음악이 나올 때, 자신이 행복했음을.
그러나 엄마와 딸이 발목을 잡는다. 엄마는 아빠가 죽은 후부터 불안 증세를 보였다. 사소한 자극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고 늘 사고가 날까 두려워한다. 집안에 재난 대비용 벙커를 짓고 비상식량을 챙겨둘 정도다.* 엄마의 그 날카로운 신경은 주로 이나에게 향한다. 영화에는 엄마에게 걸려 온 전화를 받지 않고 계속 진동이 울리도록 두는 이나의 모습이 많이 나온다. 핸드폰 진동이 전하는 압박감은 이나가 디제잉하는 음악의 자유로움과 대비를 이루어 꿈을 향한 이나의 갈망을 더욱 증폭시킨다.
이나는 멋진 디제이가 되고 싶고, 딸을 다시 데려와 (자기 엄마와는 다른)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다. 그러려면 엄마와의 화해가 필요하다. 이나의 모순은 여기에 있다. 능력 있는 디제이가 되기 위해 노력할수록 엄마가 이나에게 느끼는 분노와 소외감은 커지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처럼 해방과 절망이라는 양극단의 세계를 동시에 살아가는 이나의 삶을 굉장히 섬세하고 감각적인 연출로 담아낸다. 이나가 만드는 음악이 익숙지 않은 관객이라도 서사, 연출, 연기가 조화를 이루어 만들어내는 몰입감을 충분히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나가 살아가는 서로 다른 (그러나 얽혀 있는) 두 세계의 긴장을 훌륭히 담아낸 영화가 결말에서 이를 너무 성급히 봉합해버린 것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다. 이나가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고 이를 음악에도 담아낸다는 설정 자체는 문제 될 것이 없다. 하지만 중후반부까지 안정적으로 이어지던 영화의 밸런스가 다소 빠르게 봉합되어 영화의 전체 리듬이 망가지는 것이 문제다. 여성의 꿈을 이야기하는 영화가 엄마를 타자로 남겨둘 수 없다는 점에서 성급한 결말을 이해해줄 수도 있지만, 어쨌든 맥이 풀려버린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불안증에 시달리며 딸을 압박하는 엄마 역의 윤유선 배우의 연기는 정말 인상적이다. 윤유선 배우가 주로 선한 중년 여성 배역을 맡았던 것으로 기억한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렇다.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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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vie] 언젠틀 오퍼레이션 리뷰
* 본 글은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참석해 관람 후 작성했습니다.
* 스포 주의 !!
어릴적 금요일 밤만 되면 EBS의 <명화극장>을 틀던 아빠 덕분에, 그리고 아빠 옆에서 몰래 영화들을 훔쳐본 덕분에, 이상하게 클래식한 스토리의 전쟁영화를 보면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그리고 씨네랩의 초청으로 보게된 <언젠틀 오퍼레이션>은 나를 어린 시절로 데려다준 영화였다. 근데 이제 나이를 곁들인.. <언젠틀 오퍼레이션>은 처음부터 끝까지 흠 잡을 데 없는 매끄러운 전개로 관람객을 몰입시키는 영화였다. 바로 다음 내용이 예상이 가면서도, 인간이 가진 상상력을 이용해 '설마.. 아니겠지?'의 생각을 유도하면서도, 코미디적 요소까지 챙긴 영화였다.
한 마디로 '클린 앤 깔끔' 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영화 소개
개봉 - 2025. 03. 19
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장르 - 액션, 코미디
국가 - 영국
러닝타임 - 120분
배급 - 메가박스중앙(주)
감독 - 가이 리치
독일의 비밀 병기 잠수함을 막아라! 나치에 대항할 미친 녀석들이 온다! 제2차 세계대전, 나치의 살상 무기 유보트를 막기 위해 ‘처칠’의 지휘 아래 최초의 비밀 특수 부대가 탄생한다. 통제 불능의 미친개, 지옥에서 돌아온 근육질 군인, 냉철한 폭발물 전문가, 암살이 주특기인 미인계 특수 요원까지··· 대장인 ‘거스 마치’를 필두로 막 나가는 그들이 뭉쳤다! 영국군에 잡히면 감옥에, 나치에게 잡히면 죽음뿐! 유보트를 막기 위한 거스 마치 일행의 ‘언젠틀’한 작전이 시작된다!
<언젠틀 오퍼레이션>은 처칠의 일기장에 담겨있던 실제 이야기를 기반으로 전개되는 영화다. 독일의 비밀 병기 잠수함 'U보트'에 물자를 공급하는 '공작부인'호를 폭파하기 위해 처칠의 비밀 주도 하에 모인 5명의 요원들과 1명의 조력자가 작전을 수행해 나간다.
전형적인 첩보 영화의 흐름
이 영화는 전형적인 스파이 영화의 틀을 가지고 시작한다. 국가의 위기상황, 국가를 살리려는 충신, 그리고 충신에게 비밀리에 제안을 받아 위기 상황 돌파구를 만들어나가는 범죄자. 클리셰 같지만 이런 구조는 언제나 설레고, 관객들을 같이 위기 상황으로 몰입하게 한다.
영화의 초반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사건의 구성도 가장 보통의 상업 영화 틀을 지니고 있었다. 아마 상업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대부분의 사건 흐름이 예상 가능할 정도로.. 그럼에도 이 영화가 재미있게 느껴졌던 이유는 '실화'라는 단어의 힘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전형적인 첩보 영화 속 등장인물
최근 한국의 첩보 영화는 조금 다른 흐름을 가지고 있는 듯 하지만.. 내가 기억하던 옛날의 첩보 영화는 항상 '꽤 잘생기고 능력치가 천상계'인 남자 주인공들과, '미인계로 적장을 유혹하는 초미녀' 여자 주인공들이 등장했다. 사실 이런 인물 설정들은 홍길동전, 논개 등 몇백년 전 우리나라 역사 속에서도 자주 등장하던 설정이기 때문에 비현실적이라고 할 순 없다.
근 몇년간 한국 영화만 봐서 그런지, 이런 고전적인 특색을 가진 인물들이 정말 반가웠다. 자신이 죽인 적군의 심장을 파내는 요원, 바다를 헤엄쳐서 적군의 모터에 장치를 달고 오는 요원, 그리고 유대인이지만 미국인인 척 독일인을 꼬시는 연기를 하는 요원까지. 영화를 보다 보면 '조금 말이 안 되는데?' 싶기도 하지만.. 애초에 이 요원들이 직면한 임무와 상황 자체가 말이 안 되기 때문에.. '이 정도 능력은 있어줘야 헤쳐나가지~' 생각도 같이 든다.
다소 무난한 전개
영화는 앞서 언급했듯이 '클린 앤 깔끔'하게, 전형적으로 진행된다.
다만, 조금 아쉬웠던 점은 '진짜 큰 절정 속 위기'가 없었던 것이었다. 영화를 보다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요원들이 처한 사건이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사건이 생기면 요원들은 머리를 맞대어 잘 풀어나가고, 조력자의 도움을 받아 수월하게 진행한다. 이런 부분들에서 '조금만 더 요원들을 고생시켰다면..' 하는 생각도 든다. 역시, 영화는 주인공이 고생하면 고생할수록 재미있다. (물론, 해피엔딩이라는 전제 하에서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통쾌하다
전형적인 이야기 흐름이더라도, 다소 무난한 전개라도,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은 '유쾌상쾌통쾌~!' 하다는 것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화려한 액션과 실제 역사 속으로 들어가서 엿보는 듯한 배경에 다른 생각이 들 수가 없었다. 그리고 무난한 전개더라도, 첩보 액션 영화의 특성상 화려한 움직임과 연기로 전개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120분 내내 영화 자체에 충분히 몰입할 수 있었고, 중간 중간의 코미디적 요소들은 전개 속 지루함을 달래주기 충분했었다.
이야기가 굉장히 클리셰적으로 연출되기에, '이토록 화려한 연출에 조금만 더 색다른 첩보 이야기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언젠틀 오퍼레이션>의 가장 큰 특징은 '전형적이게 화려하고 깔끔해서 최소한의 영화에 대한 기대는 다 만족시켜주는'것 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야기가 조금만 더 꼬였다면.. 이 영화의 장점이 사라지지 않았을까 싶다.
이토록 복잡하고 어지러운 시대에, 이런 쌈박한 영화 하나쯤 보면서 머리 식히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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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도와 해석이 빚어낸 광기의 끝
3년의 기다림이 헛되지 않았다. 작품 전체가 휘청이는 위기도 있었지만, 연상호 감독은 이를 극복하고 혼돈에 휩싸인 아수라장(阿修羅場)을 완벽하게 재현하는 데 성공했다.
시즌 2로 돌아온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은 정체불명의 '사자(使)'들이 갑자기 등장하면서 한순간에 혼란에 빠진 세계관을 그렸던 시즌 1에서 8년 뒤 시점을 주요 배경으로 삼고 있다. 시즌 1 말미를 장식했던 시연에서 살아남은 배영재(박정민)-송소현(원진아) 부부의 딸, 새진리회 1대 의장 정진수(유아인→김성철)의 시연, 부활한 '죄인' 박정자(김신록)로 포문을 연다.
예고 없이 찾아오는 고지(告知)-시연(試演), 이 재앙으로 인한 혼란과 갈등을 시즌 1 6부작을 통해 설명했다면, '지옥' 시즌 2는 재앙이 만연화된 사회의 주요 구성원인 새진리회, 화살촉, 소도 등 여러 단체들이 각자의 상징을 내세워 주도권을 잡으려고 대립각을 세우는 모습이 주류를 이룬다. 그 사이에 희생되는 개인의 서사까지 조명하며 디스토피아 세계관의 정점을 찍는다.
재밌는 건, 한 배를 탔던 새진리회와 화살촉이 고지-시연에 대해 서로 엇갈리는 견해를 드러낸다는 점이다. 여기에 부활자 2인(박정자, 정진수)의 존재가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세상은 사자들이 처음 등장했던 8년 전과 비슷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부활 또한 고지-시연과 마찬가지로 원인 모를 불가해한 현상인데, 저마다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의도'를 찾고 '해석'을 가져다 붙이려고 급급하다. 심지어 정진수마저 같은 부활자인 박정자를 통해 자신에게 던져진 질문을 찾으려고 했으니 말이다.
사실 '지옥' 시리즈에서 고지와 시연, 부활이 의미하는 바, 혹은 상징성을 찾아내는 건 무의미하다. 천세형(임성재)의 극 중 대사처럼 아무 의미도 없는 것에 광적으로 의미를 부여해 인간들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참혹한 '지옥'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연상호 감독의 진짜 목적인 셈. 시즌 2 6부작이 끝난 뒤에도 말끔히 해소되지 않은 떡밥이 남았다고 생각드는 것도 어찌보면 드라마 속 인물들 같이 의도와 해석에 집착하는 게 아닐까.
이러한 유형의 작품 특성상, 출연 배우들의 밀도 높은 감정 연기가 필수이며 시즌 2에 새롭게 합류한 배우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특히 마약류 투약 혐의 건으로 하차한 유아인을 대신해 정진수 역을 맡은 김성철이 모두의 관심이 받았다. 누가 더 우위라고 비교하여 판정 내릴 순 없으나, 최소 실점 위기를 훌륭히 틀어막은 구원투수 역할은 톡톡히 해냈다. 좌중을 휘어잡는 아우라와 더불어 본연의 감정에 깊게 빠진 정진수를 자신만의 스타일로 훌륭하게 표현해냈다.
화살촉의 교리에 경도되어 세력의 리더격으로 활약한 햇살반 선생님 오지원 역의 문근영의 파격 변신은 매우 강렬했다. 배우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모두 가린 괴기한 분장과 괴성에 가까운 소리, 급격한 변화와 혼란을 겪는 과정 등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문근영이 아닌 새로운 얼굴을 선보이며 충격을 선사했다.
그 외 '무빙', '최악의 악' 등에서 비릿한 악역으로 눈도장받았던 임성재의 절절한 감정 연기와 새진리회, 소도, 화살촉을 주무르며 잇속을 챙기려는 정무수석 이수경 역의 문소리의 영악함도 인상깊었다.
다만, 시즌 1에서 강한 임팩트를 심어줬던 사자들의 CG나 광기로 폭주하는 화살촉 집단의 분장은 기대치에 못 미친 게 아쉽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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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왓츠 인 더 무비] ‘아이스크림’ 인 더 무비
- [왓츠 인 더 무비 What’s In the Movie]:영화가 시작되고 들려오는 첫 사운드부터 엔딩 크레딧이 나오기 직전까지, 당신의 귀와 눈을 자극하며 들어오는 모든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영화를 만든 이들의 의도와 관계없이 그것들은 모두 영화 속에서 저마다의 의미를 갖는다. 지나가는 행인 7의 신발색부터 ‘인셉션’의 팽이까지, 영화 속 요소가 얼마나 사소한지, 혹은 얼마나 극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각각의 대상에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고 이를 토대로 작품을 바라볼 건지는 전적으로 영화를 보는 우리에게 달렸다. [왓츠 인 더 무비]는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대상들을 생각해 보고, 의미를 느껴본다.4월의 오락가락한 날씨 속 느껴지는 뜨거움, 벌써부터 올 한 해도 유독 뜨거운 여름일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흔히 우리는 ‘여름을 이겨낸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만, 사실 여름이 이겨내고 극복해야만 하는 대상인 것은 결코 아니다. 해수욕장과 계곡에서의 물놀이부터, 야구와 축구 등 다양한 스포츠 대회들까지 여름은 즐길 것 천지다. 물론 삼계탕과 냉면, 수박 등 과일들까지 다양한 여름 먹거리도 빠질 수 없는데, 이러한 여름의 먹거리들을 제쳐두고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단연 ‘아이스크림’이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단 한 입만으로 여름의 더위를 가시게 하는 아이스크림. 아이스크림은 우리 일상뿐 아니라 다양한 영화에도 특별한 의미와 함께 등장한다. 등장인물들의 심리와 극의 상황을 이 차갑고 달콤한 아이스크림이 대신 나타낸다는 것이다. 이번 [왓츠 인 더 무비]에서는 아이스크림이 가지는 의미를 중심으로 작품들을 소개한다. 지금 아이스크림 하나를 입에 물고, 아이스크림처럼 차갑지만, 달콤한 영화의 세계에 빠져보자.<로마의 휴일>“함께였기에 더욱 자유로웠던”감독 : 윌리엄 와일러출연진 : 그레고리 펙, 오드리 헵번. 에디 알버트, 마가렛 로우링스아이스크림과 영화, 이 두 가지의 단어를 놓고 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화는 단연 ‘로마의 휴일’이다. 특히 극 중에서 ‘앤’ 공주 역할을 한 ‘오드리 헵번’이 스페인 광장에서 젤라토를 먹는 장면은 아이스크림과 관련된 영화 장면 중에서 제일 유명할 뿐만 아니라, 장면 자체도 영화사적으로 의미 있는 장면이다. 물론 엄밀히 따지면 오드리 헵번이 먹는 젤라토는 아이스크림이 아니지만 말이다.‘앤’ 공주는 유럽의 여러 국가를 순방하게 된다. 그러나 공주로서의 너무나 가혹한 스케줄로 그녀는 결국 일탈을 시도한다. 숙소를 몰래 빠져나간 앤 공주는 그날 밤 ‘조 브래들리’(그레고리 펙)를 만나게 되는데, 처음에 그는 그녀의 신분이 공주인 줄 몰랐기에 그녀를 잠깐 재워주고 보내주려 한다. 그러나 기자였던 조 브래들리는 신문에 나온 사진으로 앤이 공주인 것을 알게 된다. 조 브래들리는 앤을 통해 특종을 잡기로 하고, 집에 있던 앤과 작별 인사를 하고 보내주는 척을 한 후 그녀를 미행한다. 작별 인사를 마친 앤 공주는 대사관으로 바로 가지 않고 로마의 일상을 즐기는데, 그러던 중 신발을 사고 머리도 자른 뒤 스페인 광장에서 젤라토를 먹게 된다. 젤라토를 먹는 앤을 보고 타이밍을 잡 은 조 브래들리는 우연을 가장해 다시 그녀 앞에 나타난다.“잊지 못할 달콤함은 녹아버리고”이 장면에서 바로 앤 공주가 조 브래들리 곁에서 젤라토를 먹는 그 유명한 장면이 등장한다. 극 중에서 젤라토는 기본적으로 주인공의 주체성을 상징한다. 앤은 한 나라의 공주로 극진한 대접을 받지만, 실상은 누구보다 완벽한 모습을 강요받는 새장 안에 갇힌 새와 같은 신분이다. 그러나 그녀는 오히려 본인을 잘 알아보지 못하는 타국에서 자유로운 행동을 할 수 있게 된다. 사소해 보이지만 공주로서가 아닌 한 손님으로서 자신이 직접 값을 지불하고, 사람들 많은 광장에서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젤라토를 먹는다는 것은 그녀의 처음이자 다시 오지 못할 자유이다. 많은 동화와 연극에서 그러하듯 해당 작품에서도 앤 공주와 조 브래들리의 사랑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한다. 그러나 그녀에게 한여름 밤의 꿈처럼 잊지 못할 평생의 추억을 선사한 조 브래들리와의 만남은 쉽게 설명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가치 있다. 그들의 만남이 더욱 달콤하게 느껴졌던 것은 어쩌면 앤의 입안에 아직 남아있던 달콤한 젤라토 때문은 아니었을까 생각을 해본다.<포레스트 검프>“목적 없이 아름다운”감독 : 로버트 저메키스출연진 : 톰 행크스, 로빈 라이트, 게리 시니스, 마이클티 윌리엄스남들보다 낮은 지능으로 태어난 포레스트 검프 (톰 행크스). 그는 남들보다 몇 배는 어려운 자신의 환경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누구보다 긍정적으로 살아간다. 그러한 과정에서 미국 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을 겪음과 동시에 자신과 함께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는 흔히 미국인들의 애국심을 고취하거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영화로 흔히 알려져 있다. 베트남 전쟁과 ‘핑퐁외교’, ‘엘비스 프레슬리’와 애플 컴퓨터를 소재로 다루기도 하는 등 미국의 문화를 알기에 좋은 영화로 많이 소개되곤 한다. 하지만 단순히 미국인들의 국민 영화로 치부되기에는 포레스트 검프가 갖는 의미는 넘쳐난다.어느덧 대학을 졸업하게 된 포레스트 검프는 졸업식 때 모병관이 준 지원서에 순진하게 지원하게 되면서 베트남 전쟁까지 참전하게 된다. 전쟁 중에, 검프는 언젠가 함께 새우잡이 배를 하기로 약속한 절친한 친구 ‘버바’를 잃게 된다. 검프는 친구를 잃었지만, 엉덩이에 총까지 맞으며 자신의 상관인 ‘댄 중위’를 구하게 되고, 댄 중위와 그는 군 병원에 함께 입원한다. 군 병원에 검프와 댄 중위를 비롯한 군인들은 원하는 대로 아이스크림을 제공받게 되는데, 검프는 이에 굉장히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인다. 작중에서 검프가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은대로 먹을 수 있던 점이 엉덩이에 총을 맞아 좋았던 점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러한 순진무구한 검프와 별개로 검프의 옆자리에 있던 댄 중위는 검프가 준 아이스크림을 바로 변기에 버려버린다. 그 이유는 그의 두 다리가 절단되었기 때문이다.“달진 않지만, 마냥 쓰지도 않은”이처럼 포레스트 검프에서 아이스크림은 검프의 순수함, 그에 대조되는 댄 중위의 비참한 현실을 보여주는 메타포로 사용된다. 친구를 잃고 자신도 부상당한 비참한 상황에서 도 아이스크림 하나로도 즐거워하는 모습은 현실적인 댄 중위와의 극명한 차이를 이룬다. 그러나 동시에 아이스크림으로 대표되는 검프의 따뜻함이 결국 댄 중위의 마음을 녹이게 된다는 것도 의미한다. 위로를 위해 검프가 댄 중위에게 아이스크림을 주었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이는 위로의 정서로 작용해 댄 중위의 마음을 움직였다. 당시에 댄 중위가 아이스크림을 먹지 않고 버리긴 해도 댄 중위는 매춘부들이 검프를 괴롭힐 때 검프의 편을 드는가 하면 나중에는 검프를 믿고 새우잡이배 사업에 참여하기도 한다. 마침내 댄 중위는 세상과 화해한다. 비극적 상황에서 건넨 검프의 달콤한 아이스크림이 결국 못 먹을 정도로 썼던 누군가의 농도를 조금이나마 희석해 준 것이다.<헤어질 결심>“온전히 끌려가기에 사랑인가?”감독 : 박찬욱출연진 : 박해일, 탕웨이, 이정현, 박용우부산에서 모범적 형사로 근무 중인 해준 (박해일)은 남편의 살해 용의자로 수사선상에 오른 서래 (탕웨이)를 만난다. 해준은 서래에게 용의자에게는 느낄 수도, 느껴서도 안 되는 감정을 갖게 된다. 서래 또한 그러한 해준의 태도를 이용하는가 하면, 그녀 역시 해준 에게 특별한 감정을 갖는다. 서래에게만 유독 관대한 태도의 해준은 그녀의 알리바이와 증언을 받아들이며 그녀에 대한 의심을 없애게 된다. 그와 동시에 해준은 며칠동안 서래의 집을 몰래 보며 그녀를 관찰한다. 그러던 중 서래가 아이스크림으로 끼니를 때우는 것을 알게 된다. 해준은 본인만이 서래를 관찰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서래 역시 해준을 관찰하고 있으며 자신이 해준에게 관찰당하고 있다는 상황 또한 알고 있다.“맛보면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마침내”작중에서 아이스크림의 의미는 해준을 향한 서래의 유혹이다. 서래는 해준이 자신에게 이끌리고 있으며, 사랑의 정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녀 역시 품위있는 그에게 이끌리고 있다. 그러한 해준을 끌어들이기 위해 서래는 해준의 욕망을 자극한다. 천천히 아이스크림을 먹는 서래의 모습은 검거를 마치고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해준과 대치된다. 그와 동시에 서래의 입이 천천히 부각된다. 이는 해준을 적극적으로 유혹하는 서래의 태도와 그녀에게 해준이 빠져들게 됨을 보여준다. 해준은 부인 정안 (이정현)과 성관계를 하는 장면에 있어서 어딘가 애매모호한 표정을 지으며 소극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관심과 사랑의 대상인 서래를 대하는 태도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인 것이다.서래의 아이스크림은 유혹의 상징으로 사용될 뿐 아니라 동정심을 얻기 위한 도구로 사용된다. 한 끼 한 끼 먹는 것에 있어서 진심인 해준과 달리 매번 아이스크림으로 식사를 마치고 담배마저 태우는 서래의 모습은 그녀에 대한 해준의 동정심을 끌어낸다. 또한 해준과 서래는 서로의 부족한 점을 보완해준다. 잠을 못 자는 해준에게는 서래가 잠을, 제대로 된 식사를 못 하는 서래에게는 해준이 식사를 제공한다. 이처럼 서래가 자신이 필요한 것과, 또 자신이 줄 수 있는 것을 모두 드러내는 이유는 그녀가 해준을 필요로 하고 해준 역시 그녀가 필요할 것을 알고 있어서이다.서래의 아이스크림은 녹아있다. 서래는 녹아버린 아이스크림을 굳이 치우지 않고 방치한다. 차갑고 딱딱한 아이스크림이 흐물흐물한 액체가 되어 뚝뚝 흐르는 장면은 고고하고 품위 있던 형사 해준이 그녀에게 완전히 빠져버려 흔들린다는 것을 암시한다. 서래의 대사에 나오는 ‘아무 생각도 못 하고 바다 밑으로 점점 내려가는 해파리’처럼 말이다. 결국 헤어지기 위해 결심까지 필요했던 그들의 사랑은 붕괴된다. 미제사건처럼 영원히 남자의 기억 속에 남고 싶다던 여자의 말은 아마 이루어질 것이다. 이미 녹아버린 아이스크림은 다시 얼려보아도 원래의 형태로 돌아갈 수 없기에.<플로리다 프로젝트>“디즈니월드 반대편 또 다른 천국”감독 : 션 베이커출연진 : 윌렘 데포, 브루클린 피니스, 브리아 비나이테, 발레리아 코토천진난만한 미소의 세 아이 뒤에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은 그림처럼 아름답다. 그들이 사는 곳은 플로리다주의 올란도이다. 6살의 무니 (브루클린 피니스)는 매직캐슬이라는 이름의 모텔에서 엄마 핼리 (브리아 비나이테)와 살고 있다. 매직캐슬이라는 이름도 근처 올란도 디즈니월드에서 따왔을 정도로 꿈과 희망의 나라 디즈니월드와 그들의 집은 가깝다. 그러나 언제나 아름답고 환상적인 디즈니월드의 반대쪽에 거주하는 그들은 매주 방세를 내며 간간히 살아간다. 핼리 역시 미혼모로 향수를 팔거나 성매매로 돈을 벌어 무니와 살고 있다. 무니는 그런 환경 속에서도 항상 쾌활하고 즐겁다. 모텔의 전기를 끊어 버리거나 집에 불을 내기도 하고, 때때로는 관광객들에게 구걸해 아이스크림을 사먹기 도 한다.“하나의 아이스크림도 행복을”영화 속 아이스크림은 아이들의 순수함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친구들과 함께 하니 무엇이든 즐거운지, 구걸로 번 돈으로 산 아이스크림콘을 세명이서 나눠먹는 아들의 모습은 아름다움을 넘어선 무언가마저 느껴진다. 그러나 ‘어른들이 울 것 같으면 자신은 바로 안다’는 무니의 말은 아이들의 순수해 보이는 모습이 결코 아무것도 몰라서가 아니라 는 것을 의미한다. 아이들도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현실을 이겨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의 모습은 어른스럽다라는 말 자체를 부끄럽게 한다. 더운 날씨 탓에 금방 녹은 아이스크림은 빨리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우리와 달리, 뛰어다니며 한입씩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는 그들의 모습은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어느 순간 녹아버려 사라지는 아이스크림처럼 불안정하고 위태로워 보이는 그들의 삶은 어쩌면 작지만 황홀한 한 입처럼 누군가와는 비교도 못할 정도로 즐겁고 가치 있을 것이다.플로리다 프로젝트에 악역은 없다. 성매매를 하며 싸구려 향수를 판다고, 무책임하고 불법적으로 보이는 헬리는 조금 자유로울 뿐,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무니와 함께 살아간다. 무니 역시 가족, 친구와 함께 너무나 행복해 보인다. 영화의 마지막에 무니를 보호하기 위해 위탁 가정에 보내려는 아동 보호국이 오히려 악역으로 보일 정도이다. 이처럼 1967년 디즈니 월드의 건설 초기 프로젝트를 의미하던 ‘플로리다 프로젝트’든, 집 없는 이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하는 사업을 말하는 ‘플로리다 프로젝트’든 어떤 대상도 누군가에게 모두 나름의 가치가 있고 의미를 갖는다. 필요 없게 여겨지는 작은 동전 하나 하나가 모여 최고의 아이스크림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8월의 크리스마스>“여름보다 뜨거웠던 사진의 온기”감독 : 허진호출연진 : 한석규, 심은하, 신구, 이한위무더운 여름날 정원 (한석규)는 땀을 흘리며 사진관으로 들어온다. 사진관에서 기다리는 주차단속원 다림 (심은하)은 그런 정원에게 사진을 뽑아달라 닦달한다. 정원은 병원에서 시한부 판정을 듣고 장례식장에 다녀온 직후였다. 다음에 오라고 정원은 약간은 짜증을 내지만, 그러한 짜증이 못내 미안했는지 다림에게 아이스크림 하나를 건낸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말투의 정원에게 다림은 호감을 느끼게 되고 그들은 가까워진다. 정원과 다림은 다른 연인들처럼 대놓고 애정 표현을 하지도, 사랑을 입으로 말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고, 달리기를 하고, 산책하면서 그들의 말과 표정은 사랑을 전한다.
“한 순간의 달콤했던”“지난 20년간 한국 멜로는 결국 허진호였다”라는 ‘이동진’ 평론가의 말처럼 오글거리는 사랑 노래 없이도 뛰어난 연출 덕에 영화의 정서는 온전히 느껴진다. 이러한 정서를 나타내기 위해 영화에는 다양한 소재들이 등장한다. 그렇지만 영화 내내 정원과 다림 곁에 함께 등장한 것은 바로 아이스크림이었다. 바 아이스크림, 컵 아이스크림, 콘 아이스크림까지 다양한 아이스크림들이 영화 속에서 역할을 한다. 시한부라는 비참한 삶과 현실에도 사소한 말 한마디에 상처받을 수 있었던 다림을 먼저 신경 쓴 정원, 그가 건넨 미안함과 선함이 담긴 아이스크림 바 하나는 얼마 남지 않은 그에게 삶의 활력을 불러일으킨다. 준비한 아이스크림을 쑥스럽게 건넨 정원과 그의 사과를 흔쾌히 받아주는 다림. 그렇게 둘의 아름다운 사랑을 시작된다.존대하던 사이에서 반말을 하고 함께 스쿠터를 탈 정도로 가까워진 그들은 어느 순간 또 하나의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장남이었었던 정원과 오 남매였던 다림은 가족 이야기를 하며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하나의 아이스크림을 퍼먹는다. 이 장면은 서로가 서로를 온전히 사랑함을 보여줄 뿐 아니라 둘의 더욱 가까워진 사이를 암시한다. 다림과 정원은 다림이 퇴근한 후 술을 마시기로 하는데, 왠지 모르게 그날 다림은 오지 않는다. 그리고 며칠 후 화장을 한 다림은 정원의 사진관에 찾아오는데 이번엔 정원의 아이스크림도 거절하고 함께 술을 마신다. 사소한 대화를 나누던 중 다림은 ‘서울랜드’에서 일하는 친구 덕분에 언제든지 가면 공짜 표를 받을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데, 그녀의 마음은 눈치챈 정원은 웃는다.서울랜드에 놀러 가 벤치에 앉은 그들은 다시 아이스크림을 먹게 된다. 딱 붙어서 아이스크림을 먹었던 저번과 달리 둘의 거리는 마치 한 사람의 자리만큼 벌어져 있다. 이러한 거리를 의식한 터일지 다림은 먼저 다가가 거리를 좁히는데, 정원은 그저 웃음만 보인다. 마지막 아이스크림은 그들이 함께 보내는 마지막 날에 먹은 아이스크림이다. 정원의 상황을 모르기에 다가가는 다림과 먼저 다가가지 못하는 정원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가슴 아픈 장면이다.놀이공원 데이트를 마치고 목욕탕에 갔다가 산책까지 하면서 알차게 하루는 끝나지만, 결국 정원이 쓰러지고 입원하면서 그 둘은 더 이상 만나지 못한다. 영화는 정원의 웃는 영정사진과, 자신의 사진이 걸린 사진관을 보며 웃는 다림의 모습으로 끝이 난다. 결국 녹아버리는 아이스크림처럼 한순간이었던 다림과 정원의 사랑은 끝이 났지만 너무나 달콤했던 여름날의 사랑은 그들에게 남아있을 것이다.“영화와 아이스크림”차갑지만 따뜻하며, 딱딱하지만 부드러웠던, 녹아서 사라지기에 더욱 달콤한 아이스크림과 영화의 가치는 공유된다. 자유부터 사랑까지, 손안에 들어오는 작은 아이스크림 하나가 주는 남다른 의미는 어떤 대상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들이다. 지금까지 아이스크림의 의미를 중심으로 다섯 가지 영화를 함께 살펴보았다. 이러한 의미를 조금은 생각해보며, 아이스크림을 먹어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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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MFF 인터뷰] 음원은 없지만 영화는 있는 밴드, ‘듣는 건 너의 책임’
‘듣는 건 너의 책임’. 도발적인 밴드 이름이다. 우리는 좋아하는 음악을 할 테니 들을지 말지는 당신이 결정하라는 이들. 각자의 일상을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데 좋아하는 음악에서만큼은 그런 책임감에서 자유로워보자는 취지가 담긴 이름이라 한다. 내내 아름다운 통영의 풍경과 어우러지는 노래, 그리고 그 노래에 얽힌 각자의 사연은 서로의 깊이를 더하며 켜켜이 쌓여간다. 제천국제음악영화제 한국장편 경쟁 부문 선정작 ‘듣는 건 너의 책임’ 유최늘샘 감독에게서는 설렘과 기쁨, 수줍음이 함께 묻어났다.
‘듣는 건 너의 책임’ 영화가 한국경쟁 장편 후보작에 선정되었습니다.
영화를 만들 때부터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 꼭 상영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제천처럼 통영 인구도 13만 명인데, 한반도 제일 남쪽의 바다마을 이야기를 충북 제천에서 처음 공개하게 되어서 너무 영광입니다. 저희 밴드 멤버, 스태프들과 함께 눈물을 흘릴 정도로 뛸 듯이 기뻐했어요. (웃음)
감독님께서는 통영 출신이라고 들었습니다.
통영에 있는 미륵섬에서 태어났어요. 20대 때부터는 서울에서 단편 영화를 만들었고요. 영화라는 꿈을 좇으며 내가 할 수 있는 얘기를 해보자 싶었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다큐 쪽으로 오게 됐고요. 편의점에서 일할 땐 편의점 영화를, 육체노동 현장에서는 그분들 이야기를, 여행할 때는 여행 이야기를 했어요. 지금은 제가 통영에 사니까 통영을 배경으로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었습니다.
통영의 아름다운 풍경을 담아내고 싶었다
지역에서 예술하면 단점보다 장점이 많아
영화 전체가 통영 올 로케 뮤비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통영에는 섬이 되게 많아요. 그런 느낌을 많이 담고 싶었는데 마침 드론 촬영도 그때 시작해서 영화에도 담았어요. 중간에 멤버들과 같이 작은 섬에 가서 버스킹을 하면서요. 영화에 다양한 통영 모습을 담고 싶어서 버스킹 때도 다양한 배경을 선택해 촬영했고요.
감독님은 지역에 거주하는 청년 예술인이기도 하시죠.
통영의 자연은 너무 아름다워요. 그런데 현실적인 지역의 어려움이나 인구 소멸이나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와 닿는 부분들이 있어요. 멤버 중에도 통영을 떠났다가 돌아온 분도 있고, 어떻게 보면 낙향 같은 느낌도 있어요. 꿈을 이루고 돌아왔다기보다는 휴식처럼요. 제게도 그런 느낌이 있었고요. 그래도 위기 속에서도 분명히 존재하는 사람들, 서로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이 만나는 계기가 주어지기도 하잖아요. 저희 밴드처럼요. 이 영화가 지역의 활기나 커뮤니티에 보탬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지역에서 예술하는 일의 장단점은 뭔가요?
제대로 된 공연을 할 만한 공간이 전무해서 거리 공연을 할 수밖에 없어요. 통영에 어르신이 많다 보니까 노래를 하면 트로트를 불러달라고 많이 하시고요. (웃음) 그런데 홍대 같은 곳에는 실력 좋은 밴드가 수백 개 있어서 관심을 받기가 어렵잖아요. 반면에 통영에는 자작곡 밴드가 두세 개밖에 없거든요. 그러다 보니 지역에 작은 행사가 있으면 공연 초대도 받고, 지역 신문에서도 관심을 가져주세요. 대도시의 밴드가 삶의 퍽퍽함을 노래하는 경우가 많다면 통영의 밴드는 자연이나 로컬 라이프를 담아낼 수 있으니까 음악적 개성이 되겠단 생각도 들어요. 단점보다는 장점을 더 많이 느끼고 있어요. 에너지를 많이 받죠.
아마추어와 프로의 경계에서 성장해가는 중
무명 밴드이지만 자부심 느껴
영화에는 아마추어와 프로의 미묘한 경계에서 발생하는 긴장의 순간들도 나옵니다.
멤버 중 한 분은 이렇게 말했어요. 아무리 실력이 모자란 음악이라도 누군가는 좋아해줄 수 있으니까 활기차게 해보자고요. 프로가 아니면 입도 떼기 어려운 분위기에서 무언가를 하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고 말씀하신 분도 있고요. 그런데 공연에 초대받다 보면 더 책임감을 가지고 잘해야 되지 않나 싶은 고민도 있어요. 공연 섭외가 오면 그냥 하자는 쪽과 이번 공연은 넘기고 연습하면서 역량을 쌓자고 말하는 쪽이 있어요. 반반 정도인 듯해요. 그 부분에서 갈등이 있죠. 그 과정이 성장이지 않을까요?
밴드 활동을 담은 영화를 촬영한다 했을 때 멤버 반응은 어땠나요?
다들 긴가민가했어요. 아직 우리 음원도 없는데 영화까지 만들 수 있을까 싶었던 거죠. 그런데 영화가 완성된 후 함께 보면서는 많이 웃고 뿌듯해했어요. 자기 턱이 접혀서 나온다거나 뾰루지가 보인다거나 이런 불만은 있었지만요. (웃음) 영화제 상영 소식에 뛸 듯이 기뻐해주셨고 통영에서 버스 타고 차 타고 제천으로 오고 계세요. 쟁쟁한 음악인 사이에서 우리가 제일 무명 밴드 아닐까 하지만 자부심을 갖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웃음) 보는 분들도 저희처럼 웃고 즐겨주시면 좋겠습니다.
밴드 이름에 얽힌 사연도 궁금합니다.
처음 이름 정할 때는 부담스럽기도 하고 너무 대충 지은 거 아닌가, 너무 무책임한 거 아닌가 싶었어요. 적응하는 데 1년 정도 걸렸어요. 다들 각자의 자리에서 맡은 역할을 책임감 있게 해내고 있는데 음악 창작 활동에서만큼은 그런 책임감으로부터 자유롭게 해보자는 마음이 담긴 이름 같아요. 누군가는 밴드 이름을 듣고 싸가지 없다거나 ‘뭐야?’ 하실 수도 있지만요. (웃음) 그래도 많이들 새롭게, 힙하게, 도발적인 느낌으로 받아들여주시는 것 같아요.
밴드에 위기나 갈등의 순간이 없었는지 궁금합니다.
아직 밴드가 해체될 만한 위기는 없었어요. (웃음) 음원도 못 냈고 아직 하고 싶은 것도 많아서요. 그런데 공연의 질, 실력이나 연습량을 조율할 때 의견이 다른 경우가 있어요. 다들 성향이 다르다 보니까요. 선호하는 장르도 다르고요. 그러다 보니 공연 선곡을 하는 데 미묘한 신경전과 눈치도 있어요. (웃음) 그래서 한 번씩 허심탄회하게 터놓는 수다회를 열어요. 가능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려고 하죠. 음악 말고는 공통점이 없으니까 많은 대화가 필요해요.
통영의 다채로운 모습 영화에 담아내고파
애증의 관계인 멤버들과 오랫동안 잘 해나갔으면
‘우도마을 다이어리’(2021), ‘푸른 바다의 비밀’(2023) 등 통영의 풍경과 삶을 영화에 담아오셨습니다. 혹시 계획이나 구상 중인 다음 작품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우도마을 다이어리’는 이삼십 분 남짓 거주하는 섬인 우도 이야기고, ‘푸른 바다의 비밀’은 통영 바다 이야기예요. 통영이 바다가 땅보다 많은 지역이니 수산업이 중요한데 해양오염이 세계적으로 큰 문제잖아요. ‘듣는 건 너의 책임’을 포함해서 세 작품 촬영을 비슷한 시기에 진행했어요. 차기작은 ‘듣는 건 너의 책임’ 배급 상황에 따라서 연작이 나올 수도 있겠지만 구체적인 상상은 아직 못 해봤어요. 통영에 수산업이 많다 보니 이주민분들도 많이 계신데 그분들 인터뷰 작업도 진행한 적이 있고요. 지금은 중단했지만요. 이전에 여행 영화 작업을 했다보니 통영에서의 여행 이야기도 해보고 싶고요.
마지막으로 관객분들 그리고 밴드 멤버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제천국제음악영화제가 제 인생에서 참여한 제일 큰 영화제라 너무 감사한 마음입니다. 어제 개막식 마치고 오늘 오전에 다른 영화를 펑펑 울면서 봤어요. ‘테일러의 히든 트랙’이요. 시간 맞추느라고 급하게 뛰어서 들어갔는데 정말 펑펑 울었어요. 시민 분들이 엔딩 크레딧 올라갈 때 박수치고 할 때 너무 감동적이었어요. 그리고 멤버들에게는… 애증의 관계인데요. (웃음) 저희 좋아하는 분들 생기고 있으니 앞으로도 오랫동안 잘 해나가보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인터뷰 말미, 밴드 멤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유최늘샘 감독은 눈시울을 붉혔다. 좋아하는 일을 함께 해나가는 동료들에 대한 진정어린 신뢰와 감사의 마음이 엿보였다. 지역, 청년, 예술. 청량하면서도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영화 ‘듣는 건 너의 책임’에 담긴 키워드다. 모두 굵직굵직한 주제들이다. 그러나 ‘듣는 건 너의 책임’은 이 무거운 주제를 다룰 때 반드시 진중하고 음울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아름답고 생기 넘치는 방향으로 우리를 이끈다. 밴드 ‘듣는 건 너의 책임’과 유최늘샘 감독의 다음 발걸음이 궁금해진다.
글: 하이스트레인저 박해민
사진: 하이스트레인저 김소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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