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4-11-13 19:36:22
11월 3주 차, 최신 씨네 뉴스
고레에다 히로카즈 연출, 넷플릭스 시리즈 <아수라처럼> 포스터 공개

국내 제작사 '스튜디오 드래곤'이 제작 참여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넷플릭스 시리즈 <아수라처럼>의 포스터와 예고편이 공개되었습니다. 본 시리즈는 2025년 1월 9일에 공개 예정이며, 7부작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아수라처럼>은 이전에 방영되었던 일본 공영방송 NHK에서 1979년에 방영된 가족 드라마 시리즈의 현대판으로, 무코다 구니코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습니다. 해당 소설은 지난 2003년 장편 영화로 각색되기도 했습니다.
한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아수라처럼>에는 미야자와 리에, 오노 마치고, 아오이 유우, 히로세 스즈가 출연하며 19979년 도쿄, 서로 다른 삶을 사는 네 자매가 노년인 아버지의 불륜을 알게 된 후 겪게 되는 사건들을 그립니다.
데이지 리들리, <스타워즈> 시리즈 복귀 예정

데이지 리들리가 새로운 스타워즈 시리즈에 복귀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향후 제작될 스타워즈 시리즈 중, 에피소드 X, XI, XII로 구성 예정인 사이먼 킨버그의 3부작과 샤민 오바이드 차노이가 연출하는 프로젝트에 핵심적인 역할로 등장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THR은 루카스필름이 레이를 “프랜차이즈의 다음 단계를 위한 중요한 요소”로 간주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사이먼 킨버그와 샤르민 오바이드-치노이의 프로젝트 외에도, 루카스필름은 제임스 맨골드, 데이브 필로니, 도널드 글로버, 타이카 와이티티, 라이언 존슨, 션 레비, 패티 젠킨스 감독이 참여하는 최소 7편의 스타워즈 영화를 개발 중입니다.
제50회 서울독립영화제 상영 시간표 공개

제50회 서울독립영화제가 상영 시간표 공개 일정을 알렸습니다.
영화제 공식 홈페이지에서 오는 15일 금요일 18시에 상영 시간표가 공개됩니다.
올해 50주년을 맞은 서울독립영화제는 풍성한 라인업을 자랑합니다. 부산국제영화상 4관왕을 휩쓴 이란희 감독의 <3학년 2학기>, 다큐멘터리 관객상을 차지한 조세영 감독의 <K-Number> 등 현재 주목받는 감독의 영화들이 상영됩니다. 또한 16mm 프린트가 유실되어 필름 디지털화 포맷으로 상영하지 못하고 있던 변영주 감독의 <낮은 목소리 -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가 디지털화 버전으로 최초 공개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영화 상영뿐만 아니라 홍경, 오경화, 노재원 등 이제는 대중들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는 배우들이 거쳐 간 ‘배우프로젝트’, 독립영화 감독과 배급사를 연결해 주는 ‘넥스트 링크’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미션 임파서블 8> 첫 예고편 공개
미션 임파서블 8의 첫 번째 예고편이 공개되었습니다. 이번 신작의 제목은 <Mission: Impossible — The Final Reckoning>으로 2025년 5월 23일에 북미 개봉 예정입니다.
18개월간의 긴 제작 기간과 여러 차례 지연되어 제작비가 4억 달러에 가까워졌다는 소식으로 시리즈의 위기가 거론되었던 가운데, 마지막 ‘무비 스타’라고 불리는 톰 크루즈가 과연 이번에도 큰 성공을 거둘 것인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습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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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MFF 데일리] 제주 바다, 여전히 아름다운지
짧은 상영시간 안에 함축적으로 메시지를 담아내는 단편 영화는 일반 상영관에서는 쉽게 만나볼 수 없어 더 특별합니다. 때로는 짧기에 더 강렬한 공명을 자아내기도 하죠. 제20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 이름을 올린 <돌고래와 헤엄치는 법>도 그런 단편 영화 중 하나입니다. 고향집을 처분하기 위해 제주를 찾은 ‘영남’과 제주에서 오염수 방류 중단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유림’의 이야기를 그리죠. 20분 내외의 짧은 영화 속에 담긴 제주 바다는 어떤 모습일까요?
돌고래와 헤엄치는 법
How to Dive with Dolphins
Summary
오염수 방류가 시작되고 시간이 흘렀다. ‘영남’은 고향집을 정리하기 위해 제주에 내려간다. 그곳에서 동료들과 함께 해양 쓰레기를 청소하는 옛 ‘유림’을 재회한다. (출처: 제천국제음악영화제)
Cast
감독: 서윤수
출연: 우영남, 정은선
큰 문제 앞의 너무 작은 우리들
사회의 문제들은 언제나 겹겹이 쌓인 이해관계에 의해 그 몸집을 불려 갑니다. 거대한 문제 앞에서 개인은 너무 작은 존재에 불과하죠. 가치가 돈으로 결정된다는 논리가 구조적으로 작동하는 세상에서, 당장의 금전적인 이익이 없는 무언가를 지키려는 개인의 노력이 제대로 작동할 리 만무합니다.
어민들은 오염수 방류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습니다. 요즘 세상에서는 생존을 위한 필수 노동을 경시하는 씁쓸한 경향이 있습니다. 오염수 방류는 환경을 등한시한 결정일뿐만 아니라, 1차 산업 노동자들을 무시한 행태이기도 하지요. 제주 사람 '유림'은 그들을 지키고자 오염수 방류 중단 시위를 벌이지만, 외려 제주를 찾는 관광객이 혐오할 수 있으니 그만해 달라는 어민들의 부탁을 받습니다. 역설적인 상황에 마음이 아프지만, '유림'은 대신 해양 쓰레기를 주우면서 소셜 미디어에 상황을 알리는 것에 힘쓰기로 합니다. 자신의 노력을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고 생각하면서도 말이죠.
해녀들이 바다에서 수확한 해산물을 잠시 넣어두는 바구니를 '테왁'이라고 합니다. 그곳에 해산물 대신 해양 쓰레기를 넣는 장면은 실로 인상적입니다. 해산물을 수확해도 시간이 지나면 그 자리에는 전복이나 소라가 다시 붙기 마련인데요. 영화 속 플로빙 장면을 보면, 쓰레기를 수거한 자리를 채우는 것은 분명 또 다른 쓰레기일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자연의 힘은 강하고 그 속의 인간은 한낱 미물일 뿐이라는데, 인간의 간섭과 횡포가 얼마나 강력하고 악하길래 자연을 거스르기만 하는지 부끄러움이 차오릅니다.
거대한 자연보다도 더 거대한 문제들 앞에 선 너무 작은 우리들. 인간이 초래한 결과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이 시대의 인간으로서 존재하며 돌고래와 함께 헤엄치는 방법이 있는 걸까요?
화자와 청자, 나는 누구인가
극 중에서 '유림'은 계속해서 메시지를 내뱉는 화자입니다. 작지만 행동을 멈추지 않고, 그러면서도 돌고래에게 미안함을 감추지 못합니다. 반면 '영남'은 청자입니다. 그는 자연이나 환경보다는 '유림'을 향한 관심으로 플로빙에 뛰어듭니다. 그리고 그 관심이 점점 '유림'이 있는 바다로 옮겨 가지요.
영화가 끝날 무렵, 바다를 가만 응시하는 '영남'의 표정은 참으로 묘합니다.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하기도 하고, 일견 허탈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 얼굴을 단독 숏으로 잡아 보여주는데요. 화자는 유림인데, 청자의 얼굴을 자꾸 비추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영남'은 행동하지도 발화하지도 않는 수많은 사람을 상징합니다. 뉴스 기사에서 보이지 않으면 쉽게 관심을 저버리는 사람들, 자신 앞에 닥친 현실을 견디느라 사회의 문제를 무시하는 사람들. 우리는 삶의 작은 괴로움 하나만으로도 사회의 거대한 문제를 쉽게 제쳐 버립니다. 그래서 사회의 문제들은 언제나 거대하지만 희미하죠. 관객은 20분 내외의 상영 시간 동안 개인의 문제에 밀려 희미해져 버리고 만 사회의 문제를 마주합니다. 알고 있었으나 모른 척했던 것들, 그러나 모른 척하기엔 너무 거대했던 문제를 말입니다.
엔딩 이후의 '영남'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무렇지 않은 듯 현실로 돌아가 개인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갈까요, 아니면 '유림'처럼 화자로 변모할까요? 문득 제 자신도 돌아보게 됩니다. 그간 단 한 번이라도 화자인 적이 있었는지, 청자에만 안주해 있지는 않았는지.
제주 바다, 아름답지요. 하지만 아름다움 뒤에 곪아 있는 상처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청자의 자리로 돌아가려고 하는 인간의 이기적인 관성을 이겨내고 싶어지는 영화, <돌고래와 헤엄치는 법>이었습니다.
One-Liner
돌고래와 헤엄치는 법을 정말 몰랐던 건지, 아는데 모르는 척했던 건지, 그저 미안할 뿐이다.
Schedule in JIMFF
2024.09.09(월) 세명대 블랙박스 실험극장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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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있어, 뜨겁고 치열하게
- 살아있어, 뜨겁고 치열하게"액트 업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학술회로 추정되는 무대에서 누군가가 발표를 하고 있다. 그리고 한 단체가 무대 뒤에서 좁은 틈을 통해 분위기를 살피고 있다. 발표자가 바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이 확성기 소리와 함께 무대에 들이닥친다. 이들은 '액트 업 파리(ACT UP PARIS)'다. 이어서 영화의 타이틀이 뜬 후, 영화는 곧장 관객을 이들의 회의 현장으로 데려간다. 관객은 주인공 '나톤'이 액트 업 파리의 신입 회원으로 들어가 회의에 참여하는 것을 보며 영화의 시작부터 간접적으로 액트 업 파리의 구성원이 된다. 빈 강의실에서 진행되는 이들의 회의는 이 영화의 핵심이 집결되는 곳이다. 회의실은 치열한 토론의 현장이다. 그들은 이곳에서 단체의 활동 방향에 대해 토론하며 다양한 의견을 나누고, 계획한 활동을 실행한 후에는 그 결과에 대해 문제점과 개선 방안을 다시 토론하며 찾아낸다. 회의실은 다양한 의견이 공유되는 공간인만큼 그만큼의 갈등이 발생하는 공간이다. 이들은 서로의 의견이 불일치할 때, 때로는 서로를 공격하는 것을 서슴지 않으며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다. 당장의 갈등보다도 자신의, 모두의 생사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회의실은 에이즈(AIDS) 교육의 현장이다. 이들은 에이즈와 관련된 새로운 정보가 생길 때마다 회의실에서 발표하는 형태로 그 내용을 함께 공유한다.영화의 회의 장면들이 사실감 있게 구성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영화를 연출한 로빈 캉필로 감독이 실제 ‘액트 업 파리’의 회원이었다는 사실이 있다. 실제로 로빈 캉필로 감독은 인터뷰에서 "액트 업 파리 운동을 하고 나서 25년이 지났는데도 에이즈 HIV 감염에 대한 문제의식이 그때와 별반 다를 것이 없어서 자신이 예전에 활동했던 걸 영화로 만들어서 문제의식을 부각하고 이야기를 해볼 수 있는 장을 만들고자 이 영화를 연출하게 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 영화는 '액트 업 파리'라는 단체의 성공담을 담아낸 영화가 아니라는 점이다. 영화의 종반부에 다다르면 액트 업 파리는 결과로 보자면 사실상 실패한 단체였음을 어렴풋이 짐작해볼 수 있다. 그렇다. 액트 업 파리의 승패는 이 영화에서 중요한 사안이 아니다. 오히려 영화는 다가오는 실패의 결과를 보이길 두려워하지 않으며 그에 대해 덤덤한 태도를 취한다. 또한 이 영화는 거창한 계몽을 위해 만들어진 영화가 아니다. 에이즈나 액트 업 파리에 대한 다수의 정보를 담고 있는 영화이지만 영화는 그것을 통해 관객을 깨우치려는데 주목적을 두지 않는다. 교육적인 측면이 강한 영화인 것은 분명하나 그것이 이 영화의 가장 큰 목적은 아니다. 영화는 정보의 전달보다도 그 내부 구성원 한 명 한 명의 모습과 그들이 열정적으로 투쟁하고 연대하는 모습을 담아내는데 주력한다."살아있어, 이렇게 뜨겁게"영화의 제목 '120BPM'은 여러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우선 사전적 의미를 보자면, 120BPM은 1980~90년대 당시 유럽에서 유행했던 하우스 뮤직의 사운드 리듬을 의미한다. 실제로 80~90년대 유럽 클럽, 그중에서도 게이 클럽에서 주로 틀던 음악의 대부분이 120BPM 하우스 음악이었다. 영화에 사용된 음악 또한 마찬가지로 모두 같은 120BPM의 곡들로 구성되어 있다. 120BPM은 또한 사람의 심장이 뛰는 속도, 심장박동수를 의미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장면들처럼 춤을 출 때나 섹스를 할 때의 빠른 심장 박동 말이다. 그래서일까, 영화의 음악을 듣다 보면 그 박자가 사람의 심장 박동처럼 들리는 순간이 여럿 존재한다. 특히나 영화의 시작점에서부터 들리던 느린 박자의 비트는 마지막 장면에서 다시금 선명하게 들릴 때 그렇게 느껴진다. 사람의 심장 박동 소리로 시작되던 영화가 다시 사람의 심장 박동 소리를 내며 끝나는 것이다. 이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의 수미상관은 이 영화의 교차편집 시퀀스들, 그중에서도 가장 마지막 교차편집 시퀀스와 그 의미가 정확히 일치한다.영화에는 액트 업 활동과 춤이 병치되는 시퀀스가 네 차례 등장한다. 첫 번째 시퀀스에서는 멜톤 제약 연구실에 쳐들어가 결과를 촉구하는 시위를 한 후 돌아오는 장면에서 클럽에서 춤을 추는 장면으로 이어지고, 두 번째에서는 어느 학교에서 에이즈 예방법을 설명하는 장면에서, 세 번째에서는 미테랑에 대한 시위행진을 하는 장면에서, 그리고 영화의 가장 마지막이자 네 번째에서는 보험업자들에게 션의 재를 뿌리며 정치 장례를 하는 장면에서 춤을 추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첫 번째 시퀀스에서 클럽의 부유하는 먼지는 곧장 에이즈 바이러스로 변해 그것이 어떻게 체내 세포를 공격하는지를 시각화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두 번째 시퀀스에서는 춤을 추는 장면 뒤에 나톤과 션이 섹스를 하는 장면이 곧장 이어지고, 세 번째 시퀀스에서는 춤을 추는 장면과 나톤이 허공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기는 장면에 이어 병상에 누워있는 션의 모습이 비춰진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교차편집 시퀀스이다. 마지막의 교차편집 시퀀스는 두 장면을 병치해 만든 앞선 세 교차편집 시퀀스와 그 형식이 다르다. 션의 정치 장례와 액트 업 구성원들의 춤, 나톤과 티보의 섹스. 이 세 장면이 빠르고 촘촘하게 이어지며 반복된다. 마지막 교차편집 시퀀스는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라 할만한 부분이며, 사실상 앞선 세 교차편집 시퀀스를 압축해 보여주는 시퀀스다.다시 앞선 세 시퀀스를 생각해보자. 첫 번째 교차편집 시퀀스는 에이즈가 인간의 몸을 공격하는 방식 즉, '죽음(死)'으로 끝나며, 두 번째 교차편집은 나톤과 션의 섹스 즉,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것, 세 번째 교차편집은 병상 위에서 힘겹게 숨 쉬고 있는 션 즉, '생(生)'으로 끝난다. 이제 마지막 교차편집 시퀀스를 들여다보자. 션의 죽음 이후 액트 업 구성원들은 그의 평소 바람대로 정치 장례를 준비한다. 그들은 파티에 가 보험업자들에게 션의 재를 뿌린다. 모두가 함께 재를 뿌리는 순간에 그들이 춤을 추는 모습과 나톤과 티보의 섹스 장면이 교차편집된다. 마지막 시퀀스의 빠른 교차편집 안에서 삶과 죽음 그리고 그 안에서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들의 모습이 빠르게 병치된다. 그들은 자신들은 죽지 않았음을, 여전히 뜨겁게 살아있음을 춤을 추고 섹스를 하며 세상을 향해 증명한다. 바로 이 순간, 영화의 첫 장면에서 들었던 박자의 비트가 다시 들리기 시작한다. 그들은 같은 박자에 여전히 춤을 추고 있다. 이윽고 비트가 멈추고, 화면이 완전히 암전 되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시작한다. 이때의 고요한 침묵은 관객이 액트 업의 구호 "Silence = Mort(Death)"를 떠올리게끔 만든다. 아니, 거기까지 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영화를 보던 관객은 적어도 그 순간 사유할 시간을 갖는다. <120BPM>은 관객에게 엄청난 수준의 계몽을 요구하지 않는다. 시작점부터 이 영화의 목적은 그것이 아니다. 대신 영화는 1980년대 당시를 살아내던 소수자들의 열정과 투쟁, 그리고 그 안의 연대를 멜로 드라마의 형태로 그려낸다. 그 속에서 그들은 열렬히 사랑하며 무엇보다 소중한 1분 1초의 순간을 살아내기 위해 끝까지 투쟁한다. 이들의 절박하고도 아름다운 열정의 몸부림은 현시점에도 여전히 세상을 향해 외치고 있다. 우리는 살아있다고. 뜨겁게, 그리고 치열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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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스트 도터> 리뷰
우연히 영화 시사회에 갈 기회가 생겼다.
<로스트 도터>에 대해 사전에 알고 있던 내용은
윤여정 배우님께서 존경하시는 올리비아 콜맨 주연 영화라는 것과
《나의 눈부신 친구》를 쓴 엘레나 페란테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는 것뿐이었다.
귀여우신 여정 쌤과 올리비아 콜먼 - <뜻밖의 여정> 5회
최근 엘레나 페란테 소설에 푹 빠져
《나의 눈부신 친구》 드라마까지 섭렵한 친구가 있어서 옆에서 간간이 봤었다.
영화도 그 드라마 같은 느낌일까? 하는 정도만 기대하고서 시사회에 참여했다.
CGV 용산아이파크몰 <로스트 도터> 시사회 티켓 배부 부스.
저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참석하였습니다!
실은, 하필이면 시사회 날 당일에 하루 종일 폭우가 내려서
이 비를 뚫고 먼 용산까지 가서 볼만한 영화일까
기대보다 우려가 훨씬 더 큰 상태로 관람을 했었다.
결론은 그런 핑계로 이 영화를 보지 않았더라면 정말 후회했을 것!
종일 기분이 가라앉은 날이었는데
이 영화 덕분에 의미 있는 하루가 될 수 있었다.
영화 <로스트 도터>는 2022 아카데미
각색상, 여우주연상,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르고
2021 베니스국제영화제 각본상을 받은 작품으로,
<다크나이트>의 레이첼로 유명한 배우 매기 질렌할의 감독 데뷔작이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던 배우 올리비아 콜맨과 다코타 존슨, 제시 버클리 등
할리우드 연기파 배우들이 출연해 완벽한 앙상블을 선보이고
전 세계 37개 부문 103개 후보에 오르며 극찬을 받았다.
영화의 주제는 포스터에 적혀있듯
'아름답지 않고 희생하지 않는 엄마'에 대한 내용이다.
인지도 있고 사랑받는 스타인 배우들이 한데 모여
이런 이야기에 목소리를 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감격스럽다.
용기 있는 여성들의 업적이 아닌가
자식들이란 끔찍한 부담이에요.
<로스트 도터> 中
부끄럽지만, 오래전부터 '만약 내가 임신을 하게 된다면'을 상상해왔다.
막 태어난 조카를 보고 귀엽다고 말하면 주위 어른들은
"애 낳을 때 됐네", "네 아이 낳으면 더 귀여울걸?" 하곤 했다.
그렇지만 난 내 아이를 낳아도 훌륭한 모성애를 보이지 못할 테고
나보다 내 아이를 더 사랑할 자신이 없어 절대 아이를 갖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해왔다.
이는 책임감 없이 반려동물을 들이지 않겠다는 다짐과 유사하다.
'임신거부증'은 원치 않는 임신으로 고통을 느끼는 여성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임신 사실 자체를 부정하고 임신하지 않았다고 여기는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아이도 엄마의 이런 마음을 알아채고선
살기 위해 본인의 존재를 숨기고 몰래몰래 자란다고 한다.
임신 중에도 태동도 없고, 입덧도 없고, 배도 나오지 않고, 월경도 정상적으로 한다.
너무 두렵지 않나? 그 사실을 안 후로 난 내가 혹여나 임신을 한다면
뱃속의 내 아이가 100% 그럴 것 같아서 미안하고 끔찍하고 두렵기만 하다.
이게 나라는 사람의 개인적인 문제라고만 생각했고 올바르지 않은 사고라 여겼는데
그런 마음이 드는 게 당연하다고, 나만 그런 게 아니란 걸
이 영화를 통해 위로받을 수 있었다.
물론 이 영화의 인물들은 원치 않는 임신으로 아이를 낳은 건 아니지만,
출산 이후 여성에게 당연시되고 신성화되는 모성애에 대해
통렬한 시각을 제공한다.
좋은 영화는 관객이 극장에 들어가기 전과 후가
다른 사람이 되어 나오게 한다던데, 딱 그러지 않았나.
아름답지 않은 모성애가 실존함을 보여줌으로써
여성들에겐 위안을 주고 그런 신화를 믿는 모든 이에게 충격을 주는
좋은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어쩌다 보니 어두운 얘기만 계속하게 됐지만
사실 이 영화에서 가장 매력을 느낀 부분은
세 주연 배우의 연기력과 미모와... 이모저모
호소력 짙고 기품 있는 올리비아 콜맨과
고혹적인 다코타 존슨과 미소가 매력적인 제시 버클리,
이 셋이 한 영화에 나오는데 안 볼 이유가 있을까?
솔직히 제시 버클리 때문에 한 번 더 보고 싶다ㅎ
이 영화를 통해 처음 알게 된 배우지만
필모 도장 깨기 하고 싶어질 정도로 빠져들었다.
연출도 좋았다.
올리비아 콜먼이 연기한 '레다'는 아름답고 고즈넉한 그리스로 휴가를 간다.
묵게 된 숙소에는 풍성한 과일 바구니가 준비되어 있고
해변의 관리인은 친절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하지만 행복감에 젖어들 때면 늘 불편한 상황들이 레다를 간섭해온다.
기분은 나빠져도 크게 문제 있는 요소들은 아니어서
레다를 예민한 여자 정도로 생각하게 한다.
여자의 활력과 생기를 상징하는 과일의 이면을 보여준다던가
고즈넉한 해변에 시끌벅적한 대가족이 파티를 하러 온다던가 하는 정도.
그런 요소들이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두 여성이 계속해서 시선을 주고받는 장면도 인상 깊다.
직접적으로 대화를 나누진 않지만 무심코 서로에게 눈이 가고,
엄마들만이 나눌 수 있는 감정을 눈빛으로 주고받는 섬세한 표현이었다.
많은 여성들, 나아가 여성이 아닌 모두가
이런 영화를 보는 기회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훨씬 더 많은 여성들이 용기를 내서
다양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세상이 오길 바란다.
<로스트 도터>는 다가오는 7월 14일부터 극장에서 상영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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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평점: 10/10점
2) 한줄평: 나를 용인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해준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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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징어 게임 2 | 제 꾀에 제가 넘어간 위선자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오징어 게임 우승자가 되어 456억 원이라는 거액을 손에 넣었지만, 게임에서 죽은 친구와 동료를 잊지 못하는 '성기훈'(이정재). 그는 사람들이 돈을 위해 서로를 죽이는 이 게임을 중단시키기로 결심하고, 게임 진행의 총책임자인 '프론트맨'(이병헌)을 쫓는다. 그 출발점으로 기훈은 2년간 서울 지하철을 뒤진 끝에 게임 참가자 모집책인 '딱지남'(공유)을 찾아낸다.
딱지남으로부터 초대장을 받은 기훈은 마침내 프론트맨을 만나만, 곧바로 그의 계략에 당한 나머지 다시 한번 오징어 게임에 끌려간다. 경험을 살려 경마장 친구 '박정배'(이서환)를 포함해 모든 참가자를 살리고, 게임을 멈추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기훈. 그러나 '타노스'(최승현) 등 상금에 눈이 먼 참가자들은 그의 말을 부정하며 혼란을 초래하고, 그 사이 가명으로 게임에 참여한 프론트맨은 기훈과 그의 계획을 더 자세히 파헤친다.
1승을 더한 속편의 저주
<오징어 게임>이 쌓아 올린 금자탑은 화려했다. 넷플릭스 역사상 가장 흥행한 작품 중 하나였고, 제74회 에미상에서도 남우주연상과 작품상을 비롯해 여섯 부문을 석권했다. 자연히 시즌 2에 시선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겉모습은 기대를 충족시키기도 남았다. 주연 이정재는 <스타워즈>에도 출연하면서 더 중요한 배우로 성장했고, 임시완, 강하늘, 이진욱 등 각각 드라마 한 편의 주연을 맡을 수 있는 배우들도 결집했으니까.
하지만 막상 공개된 <오징어 게임 2>는 전 세계적인 흥행력과는 별개로 실망스럽다. 시작은 좋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힘이 부족하다. 여러 이유가 있다. 다음 시즌을 위한 징검다리라는 점이 명확하다 보니 극의 완성도가 부실하다. 지난 시즌에 비해 캐릭터들의 매력도 명확하지 않다. 새롭게 등장한 게임들도 지난 시즌에 비해 충격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문제는 메시지다. <오징어 게임>은 잔혹하고 원초적인 자극을 통해 적자생존, 계급사회, 승자독식 같은 자본주의의 병폐를 고발했다. 3년 만의 속편은 주제의식을 계승하고, 확장시키려는 듯하다. 그러나 속편의 완성도와 존재 자체가 작품과 브랜드 간의 갈등을 극대화한 결과, <오징어 게임 2>는 위선자라는 오명을 피하지 못했다.
<오징어 게임>과 경제적 합리성
자본주의 질서는 한 가지를 전제한다. 모든 사람이 경제적 합리성을 갖췄다는 가정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에게 돌아올 효용이 극대화되는 선택지를 자율적으로 고른다. 이익이 되는 행동을 선택하고, 피해를 주는 선택은 포기한다. 3년 전, <오징어 게임>은 경제적 합리성이 극단적으로 발현된 상황을 보여줬다.
'상우'(박해수), '일남'(오영수)과 기훈의 대립이 그 예시다. 상우는 456억 원을 얻기 위해서 우정, 연민처럼 인간적인 가치를 기꺼이 포기한다. 일남은 기훈과 마지막까지 내기를 한다. 눈 오는 밤에 얼어 죽기 직전인 노숙자를 아무도 돕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이는 인간의 선악에 대한 판단이 아니다. 인간이 경제적으로 합리적이라는 명제에 대한 판단이다. 일남이 보기에 남을 도와서 얻는 정서적 만족은 경제적으로 무의미하다.
기훈은 둘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어떤 이유로도 타인을 수단화하거나 타인의 존엄성을 침해할 수 없다면서 상우를 끝까지 설득한다. 우승 상금도 다른 참가자의 목숨값이라 여기며 쓰지 않는다. 일남과 달리 사람들이 아직 경제적인 효용보다 중요시하는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사람은 경제적 가치 외에 인간성, 신뢰 같은 의미도 같이 고려한다는 것. 기훈은 극단화된 현실의 구조와 논리에 이상적으로 맞서는 인물인 셈이다.
그렇기에 오징어 게임 속 놀이들은 기훈의 이상과도 같았다. 언제나 아름답고, 소중했다. 하지만 어릴 적 추억은 막대한 상금 앞에서 피로 물들었다. 참가자들은 자기 효용을 극대화하기 위해 타인을 속이고 죽이며 인간성을 내버렸다. 경제적 합리성이 극에 달한 오징어 게임이라는 시공간에서 기훈의 믿음은 추억의 놀이처럼 변색되고 타락했다. 이 간극은 다른 데스 게임보다 오징어 게임이 특히 잔혹하고, 충격적인 이유였다.
무승부로 끝난 러시안룰렛
<오징어 게임>이 기훈의 신념을 외적으로 무너뜨리는 이야기였다면, <오징어 게임 2>는 그 반대다. 기훈 스스로 자기 믿음의 모순에 빠지는 이야기를 보여주고자 한다. 이는 두 번째 시즌의 첫 화가 특히 인상적인 이유와 맞닿아 있다. 딱지남이 노숙자들에게 빵과 복권 중 하나를 고르게 하는 대목, 그리고 기훈과 딱지남이 러시안룰렛을 하는 장면에 에피소드 7개가 전부 집약되어 있기 때문이다.
빵과 복권 중 합리적인 선택지는 빵이다. 복권에 당첨될 확률은 극히 낮으니까. 그러나 노숙자 대부분은 복권을 고른다. 딱지남은 그런 그들 앞에서 남은 빵을 짓밟는다. 일종의 세리머니다. 게임 요원이었던 그는 게임에 참가했던 아버지를 직접 죽인 후 조직에서 인정받아 승진을 거듭했다. 즉, 그는 일종의 신자유주의적 삶의 방식을 체화했다. 따라서 그가 보기에 낮은 확률에 인생을 거는 게임 참가자들은 도태된 쓰레기일 수밖에 없다.
오징어 게임을 내재화한 딱지남과 기훈의 러시안룰렛은 향후 펼쳐질 싸움의 함의를 암시한다. 그가 보기에 기훈의 대의는 모순 범벅이다. 뺨을 맞는 대가로 돈을 받을 때 그는 이미 인간으로서의 자존심, 존엄성을 포기했다. 인간적 가치 대신 물질적 효용을 선택했고, 그 끝에서는 우승 상금도 획득했다. 모든 이득을 챙긴 후에야 게임을 파괴하겠다고 날뛴다. 딱지남의 시점에서는 기훈의 정의가 내로남불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러시안룰렛으로써 기훈의 모순을 드러내려 한다. 기훈이 먼저 게임의 규칙을 어기도록 유도한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기훈은 규칙을 깨지 않았다. 이에 딱지남은 규칙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먼저 규칙을 어기는 것은 기훈의 모순을 인정한다는 의미일 뿐만 아니라 자기 인생까지도 부정한다는 말이니까. 다르게 보면 기훈도, 딱지남도 승리하거나 패배하지 못한 셈이다.
모순 끝에 패배한 2라운드
러시안룰렛이 1라운드였다면, 오징어 게임은 2라운드라고 할 수 있다. 프론트맨은 기훈의 바로 옆에서 게임에 참가하며 그의 신념과 믿음을 시험한다. 지난 게임 속 일남과 기훈을 연상시키는 언행을 보여며 기훈을 혼란에 빠트린다. 더 나아가 기훈을 자기모순 속에 가두고자 한다. 그 중심에는 새로운 규칙인 투표가 있다. 한 게임이 끝날 때마다 참가자들이 진행 여부를 결정한다. 그때마다 기훈은 딜레마를 마주한다.
거액의 상금보다 생명과 도덕성 등이 더 중요한 가치라고 믿는 기훈의 이상은 투표 때마다 부정당한다. 그의 선의와 이상은 게임에 찬성하는 사람들의 합리성에 앞에서 무력하다. 지금까지 번 상금으로는 게임장 밖의 삶을 바꿀 수 없다는 논리는 기훈의 친구와 동료도 설득될 정도로 강력하다. 기훈이 핏대를 높일수록 "세상이 바뀌지 않는 한, 게임은 중단되지 않는다"던 프론트맨의 말만 거듭 증명될 뿐이다.
결국 기훈은 1라운드와 달리 2라운드에서는 패배한다. 현실의 벽 앞에서 힘없는 이상주의가 얼마나 무용했는지를 증명하고 만다. 딱지남 앞에서와 달리 기훈은 자기 규칙과 소신을 저버린다. 인명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던 그가 게임의 중단이라는 '대'를 위해 일부 참가자라는 '소'를 희생한다. 밤 사이 참가자 간에 솎아내기가 자행될 때, 기훈은 싸움에 휘말린 참가자들을 돕는 대신 사망자로 위장해 진행 요원을 공격할 기회만 엿본다.
따라서 <오징어 게임 2>의 클리프행어는 시작과 동시에 예정된 결말에 가깝다. 자신의 영웅 행세가 위선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기훈은 모순 없이 딱지남과 프론트맨의 논리를 진정으로 파훼할 방법을 비로소 깨달을 수 있을 테니까.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와 <스타워즈: 제국의 역습>에서 신념을 고수한 캡틴 아메리카와 루크 스카이워커도 한 번 패배한 후에야 타노스와 다스 베이더를 꺾을 수 있었던 것처럼.
난 데 없는 클리프행어
문제는 만듦새다. 설령 서사적으로 필요했더라도, 허술한 전개와 불완전한 내용 때문에 클리프행어는 작위적이다. 기훈의 위선을 드러내는 쿠데타만 해도 설득력이 없다. 그의 쿠데타 시도 자체는 자연스럽다. 기훈은 애초에 오징어 게임을 파괴할 작정이었으므로. 그러나 게임 중단을 원한 참가자들이 쿠데타에 순순히 가담하는 전개는 부자연스럽다. 지금까지 챙긴 상금만으로도 그들은 빚을 갚고 수술비를 낼 수 있기 때문.
즉, 기훈과 프론트맨이 대면하는 엔딩을 위해 이야기가 작위적으로 설계된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같은 맥락에서 <오징어 게임 2>는 전반적으로 산만하다. 시즌 3을 위해 포석을 두는 데만 열중한 나머지 서사를 깔끔하게 갈무리하는 인물도, 눈에 띄는 새 캐릭터도 없다. 극을 주도한 딱지남과 프론트맨은 기존 캐릭터이고, 그 외의 인물들은 조상우나 '장덕수'(허성태)만큼의 생동감을 갖추지 못했다.
그나마 성전환 수술 비용을 벌기 위해 게임에 참가한 특전사 군인, '조현주'(박성훈)가 눈에 띈다. 희생정신과 의리, 정의감과 풍부한 전투 경험을 다 갖춘 그녀는 트랜스젠더라는 선입견과 편견을 파괴하면서 유의미한 서사와 분량을 챙기는 데 성공했다. 탈북자 문제, 전세 사기 피해, 미혼모와 낙태 이슈, 청년층의 영끌 투자 열풍 등 여러 사회적 문제를 투영하려 한 시도 중 유일하게 성공한 사례이기도 하다.
시즌 2라는 구색을 맞추기 위해 억지로 분량을 늘린 듯한 구성도 발목을 잡는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기훈과 준호가 섬으로 돌아가는 과정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게임이 시작되자마자 준호의 섬 탐색은 곁가지로 밀려난다. 시즌 2에서 아무런 활약도 보여주지 못할 캐릭터를 위해 에피소드 하나를 날린 셈이다. 그 결과 클리프행어를 마주했을 때, <오징어 게임 2>가 다음을 위한 7시간짜리 티저처럼 느껴지는 실망감을 지울 길이 없다.
긴장감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오징어 게임 2>가 시청자의 기대를 온전히 충족시킨 것도 아니다. 기훈과 프론트맨의 대립각을 강조하기 위해서 장르적 쾌감을 일부 포기한 대가다. 물론 게임 자체가 재미없지는 않다. 새로운 게임을 활용해 긴장감을 조성하는 시도는 나름대로 유효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직후에 제기차기, 공기놀이, 비사치기, 팽이 돌리기 등과 같이 지난 시즌에 없었던 게임을 배치해 예상을 빗겨 나간 구성이 대표적이다.
짝짓기 게임을 전환점으로 활용한 선택도 영리했다. 게임과 투표를 진행하면서 참가자들은 나름대로 서로 의지할 팀을 만든다. 그런데 짝짓기 게임을 기점으로 참여자들의 본성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로 인해 불신의 씨앗이 커지고, 참가자들의 관계는 변곡점을 맞이한다. 짝짓기 게임이 일반적으로 단합을 위한 레크리에이션 활동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현실과 정반대 되는 양상은 더욱 흥미롭다.
하지만 두 번째 시즌이라는 예상된 함정을 피하지는 못했다. 동화 같은 세트와 동요가 배경으로 깔린 살육 장면은 본질적으로 지난 시즌이 보여준 폭력적인 스펙터클과 다르지 않기에 상대적으로 더 지루하다. 한국 한정으로는 캐스팅이 이 문제를 심화한다. 지난 시즌과 달리 각자 드라마 주연을 맡아도 될 배우들이 대거 합류한 결과 누가 살고 죽을지 모르는 스릴을 거의 느낄 수 없다.
게임이 끝날 때마다 치러진 투표도 역효과를 낸다. 투표는 일종의 사회적 비유라고 할 수 있다. 대화와 협상, 토론과 설득이 잘 통하지 않을 정도로 양극화된 한국 정치 지형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듯하다. 아슬아슬하게 갈린 투표 결과에 불복하는 모습 등도 낯설지 않다. 그러나 이 투표도 세 번째에 이르면 긴장감보다는 지루함의 비율이 높아진다. 투표가 어떻게 진행되든 간에 게임이 계속 진행될 거라는 사실이 뻔히 보이기 때문.
위선자의 상술
결과적으로 <오징어 게임 2>는 속편의 존재 자체가 내재한 모순점을 노출하고 만다. <오징어 게임>의 메시지는 상술했듯이 명확했다. 탐욕으로 인해 극한으로 나아간 자본주의의 끝에 위치한 경제적 양극화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였다. 가난한 이들이 생존하기 위해 서로를 죽일 때, 그 과정마저도 상업화하고 즐기는 현대 사회의 구조와 폭력에 저항해야 한다고 외쳤다.
그런데 <오징어 게임 2>는 본말이 전도됐다. 날카로운 풍자는 잊고, 어린 시절 놀이를 잔인하게 만들면 성공한다는 데에만 초점을 맞췄다. 즉, 철저히 돈벌이를 위한 작품으로 변했다. 매텔, 크록스, 조니 워커를 비롯해 콜라보 대열에 합류한 수많은 브랜드는 그 방증이다. 황동혁 감독도 시즌 1의 금전적 보상이 충분하지 못한 나머지 계획에도 없던 작품을 제작했다고 밝혔으니 예견된 상황일지도 모른다.
물론 넷플릭스 입장에서는 이러한 비판이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이미 <오징어 게임 2>가 갖가지 기록을 써 내려가고 있으니까. 넷플릭스 드라마 최초로 서비스 중인 모든 국가(93개국)에서 동시 1위를 달성했고, 첫 주에만 6,800만 시청수를 기록하며 넷플릭스 드라마 역대 첫 주 최다 시청수도 경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징어 게임 2>는 빚 좋은 개살구에 불과해 보인다. 시즌 1에 비해 덜 흥미롭고, 짜임새도 부족한 어린 시절 놀이만으로는 노골적인 상업성과 지독한 돈 냄새가 다 가려지지 않기 때문. <오징어 게임>이라는 브랜드가 <오징어 게임>이라는 작품의 메시지를 지운 셈이고, 제 꾀에 제가 넘어간 꼴이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시즌 3의 전개에 따라 시즌 2가 재평가될 여지가 있다' 정도가 아닐까.
Poor 형편없음
돈에 미친 개가 돈 냄새 묻은 개를 나무라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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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지 밀러의 '3000년의 기다림'
본 글은 씨네랩을 통한 시사회 관람 후 리뷰를 요청받아 쓴 글입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야기의 역사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정답을 아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궁금하다. 왜 하필 3000년 전부터 이야기를 시작한 것일까. 원작 소설이 있기에 조지 밀러가 아니라 소설의 작가에게 물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왜 하필 3000년 전 시바 여왕으로부터 시작했는가. 더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지 않았는가. 추측건대 시바 여왕의 시대는 정확한 역사적 기록물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적 기록이 없던 그 시기에 내려오는 “이야기”는 사실을 기반으로 한 이야기일 수도 있고, 혹은 누군가가 사실을 바탕으로 지어낸 이야기거나, 아니면 허구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이야기라는 사실이다.
영화는 복잡해 보이지만 아주 단순하다. 두 장소에서 일어난다. 터키와 런던. 전반부는 터키, 후반부는 알리테아가 런던으로 돌아와서 펼쳐지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 두 이야기는 겹쳐진다. 누군가 만약 이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냐고 묻는다면 난 주저 없이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할 것이다. 누군가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사랑 그 자체가 아니라 이야기에 대한 사랑일 것이다. 천일야화 같은 이야기, 혹은 어른들의 알라딘 같은 이야기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어찌 되었건 이야기다.
다만 이 단순한 이야기에서 신기한 것은 영화가 시작될 때의 내레이션이다. 이 내레이션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보다 먼 미래에서 서술되고 있다. 그렇기에 이 이야기는 아주 오랜 뒤에 전달되고 있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조지 밀러 감독은 이 이야기를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확장시킨다. 이야기는 남는다는 것일까.
알리테아는 인류의 모든 이야기에 공통된 점을 찾으려고 하는 서사 학자다. 그녀는 강연을 위해 터키로 향한다. 그녀는 충분히 행복하고 외롭다. 하지만 그녀는 욕망이 존재하지 않는다. 혹은 욕망을 부정한다. 지니가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였을 때 자신은 갈망하는 것이 없다고 대답하거나 혹은 소원을 비는 이야기는 전부 교훈적인 이야기이며 해피엔딩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런 그녀가 공항에서 이상한 남자를 만난다.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남자. 이 남자는 강연에까지 찾아와서 그녀의 주장에 반박한다. 그녀의 주장은 이제 모든 이야기는 은유로 환원된다는 것이다. 그는 그녀의 갈망이다. 즉, 그녀는 이야기가 은유로 환원되는 사실에 거부감이 있다. 조지 밀러의 <3000년의 기다림>은 이야기가 온전히 이야기로서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녀는 남자의 반박을 듣자마자 쓰러진다. 그러고 난 다음 그녀는 병원으로 향하지 않고 골동품 가게로 향한다. 그곳에서 마치 “이야기”를 찾는 것처럼 호리병 하나를 구매한다. 그리고 호리병에서 지니가 빠져나온다. 여기서 지니는 그녀의 환상도 아니고 그렇다고 실재도 아니다. 지니는 이야기 자체다. 이 이야기인 지니는 알리테아에게 세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고 말한다. 하지만 알리테아가 소원을 빌지 않자 자신이 호리병에 갇힌 이야기들을 늘어놓는다. 첫 번째는 시바 여왕의 이야기. 두 번째는 오스만 제국, 세 번째는 르네상스 시기이다. 그리고 지니는 세 번 호리병에 갇혔다고 이야기하지만 정확히는 네 번 갇힌다. 이 숫자는 중요하다. 이 숫자가 중요한 까닭은 런던에서 페이드아웃 기법이 네 번 사용되기 때문이다.
시바 여왕의 이야기에서 지니가 호리병에 갇힌 까닭은 시바 여왕을 욕망한 벌이다. 솔로몬의 여자를 욕망한 벌. 두 번째는 노예 소녀가 죽기 직전 소원을 빌지 않아 갇힌 이야기, 세 번째는 오스만 제국의 왕가를 쫓다가 뚱뚱한 여인에게 발각되었지만 다시 갇힌 이야기, 네 번째는 자신이 시바 여왕보다도 더 사랑했던 소녀의 히스테리로 인해 갇힌 이야기다. 이 네 번의 갇힌 이야기에서 지니가 세 번이라고 이야기한 까닭은 뚱뚱한 여인에게 발각되어 갇힌 이야기는 셈에 포함시키지 않은 것 같다. 여하간 이 갇힌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알리테아는 지니에게 소원을 빈다. “나를 사랑해 줘”
그녀가 왜 그런 소원을 빌게 되었을까. 그녀의 갈망이 깨어난 순간은 언제일까. 그건 아마도 네 번째 갇힌 이야기를 들으면서 소녀의 지식을 향한 갈망을 지니가 채워준 이야기를 하면서 갈망이 서서히 깨어났을 것이다. 시바 여왕이 솔로몬의 연주를 들을 때 그녀는 침을 꼴깍 삼킨다. 그리고 조지 밀러는 정확하게 그걸 찍었다. 그리고 네 번째 갇힌 이야기를 할 때, 특히 소녀의 지식을 향한 갈망을 충족시키는 이야기의 순간에서 알리테아는 침을 꼴깍 삼킨다. 그리고 솔로몬이 시바 여왕에게 여자들이 갈망하는 공통된 것을 들려주었을 때 그녀의 얼굴에는 화색이 돈다. 알리테아는 성공한 지식인 여성이다. 르네상스 시기 여자들에게 수없이 많은 억압이 있었던 그 시기의 소녀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녀는 그녀 자신이 갈망하던 첫 번째 것을 느꼈을 지도 모른다. 역시 주체성. 잠시 샛길로 빠져서 이야기하자면 최근 현대 여성 영화는 계속해서 주체성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도 그랬고, <코르사주>도 그랬다.
그다음은 역시 “사랑”이었을 것이다. 지니와 사랑을 나눈 후 조지 밀러 감독은 이상하게 촬영했다. 알리테아의 호텔방에 마치 지니가 사라진 것처럼 묘사한다. 그리고 공항에서도 마찬가지다. 지니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일까? 여하간 여기서부터 이제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구분 짓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때 지니는 다시 나타난다. 그리고 옆집 할머니들과의 언쟁을 하는 알리테아와의 장면에서 지니는 잠시 사라진다.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알리테아의 욕망이 불러낸 환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나타난 지니는 세상의 시끄러운 모든 소음을 흡수한다. 알리테아는 그가 그 짜증스러운 소리들을 흡수하는 순간 흐느낀다. 이건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지 않았던가.
두 번째 페이드아웃 장면은 옆집 할머니들에게 지니의 음식을 가져다주는 장면이다. 세 번째 페이드아웃 장면은 미움과 사랑에 대해 말하는 알리테아와 그에 대해 인간들은 모순 덩어리라고 말하는 지니의 장면이다. 네 번째 페이드아웃 장면은 사라져가는 지니에게 알리테아가 사랑은 선물이라고 말하면서 그것은 인간이 요구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는 장면이다. 그리고 알리테아는 지니에게 돌아가라고 말한다. 이 네 개의 페이드아웃 장면과 지니가 호리병에 갇히는 네 번의 이야기는 완벽하게 맞아떨어지지는 않지만 묘하게 대구를 이룬다.
조지 밀러의 <3000년의 기다림>은 지니, 즉 이야기가 우리에게 준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지니의 3000년의 역사와 런던에서의 짧은 기간의 이야기는 이야기가 우리에게 선물한 것이 무엇인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물론 갈망과 사랑이 담겨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지니)는 서사 학자 알리테아의 환상이 아니다. 환상이 아니라는 것은 옆집 할머니가 지니를 볼 수 있다는 점과 마지막 장면에서 아이들에게 축구공을 차주는 장면에서 알 수 있다. 이야기는 은유나 환유가 아니며 그 자체로 실재한다. 누군가는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실재하면 만질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그에 대한 대답은 이 영화를 보고 느끼는 것에 달릴 것이다.
2023년 1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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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시> | 지나치게 디즈니다워서 엉망인 100주년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소원을 이뤄주는 마법사 '매그니피코 왕'(크리스 파인)이 다스리는 왕국 '로사스'. 100살이 된 할아버지의 소원이 이뤄지길 고대하는 소녀 '아샤'(아리아나 드보즈)는 매그니피코를 도우러 간 자리에서 우연히 그가 숨겨 온 어두운 진면목을 발견하고 혼란에 빠진다.
그런 아샤 앞에 무한한 힘을 지닌 특별한 '별'이 하늘에서 내려오고, 별은 염소 '발렌티노'(앨런 튜딕)에게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준다. 별의 힘을 믿고 매그니피코의 음모를 막기로 결심한 아샤는 일곱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러나 그녀의 계획을 먼저 눈치챈 매그니피코는 야욕을 이루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폭주하기 시작하고, 아샤와 친구들은 예상 못한 난관에 부딪힌다.
'디즈니의 모든 것'이 문제다
할리우드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는 각자 고유한 특징을 갖는다. 예를 들어 픽사 애니메이션은 아동뿐만 아니라 성인 관객에게도 소구력이 있다. 예상 못한 뭉클함에 눈물 한 방울 흘리는 경험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도 마찬가지다. 특유의 이미지가 가장 공고한 제작사라고 볼 수도 있다. 디즈니만의 매력 두 가지는 백 년간 변하지 않았으니까. 바로 동화와 뮤지컬이다. 물론 디즈니도 <주토피아>, <모아나>, <겨울왕국>처럼 동화를 변주하기는 했다. 그러나 드림웍스처럼 동화를 파괴하고 재창조하지는 않았다. 또 설령 작품 평가가 부정적이어도, 디즈니의 음악만큼은 대체로 관객의 사랑을 받았다.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100주년 기념작 <위시>는 이러한 디즈니만의 이미지를 온전히 구현하려는 노력이 가득 담긴 선물 세트다. 지극히 동화적인 이야기에는 <백설공주>, <신데렐라>, <잠자는 숲속의 공주>, <피터 팬> 같은 전설적인 애니메이션 작품의 오마주가 가득하다. 귀를 즐겁게 하는 뮤지컬 음악 사이로는 디즈니 특유의 교훈과 새로운 사회에 발맞추려는 변화가 깃들어 있다.
하지만 너무나도 디즈니스러운 만듦새는 끝내 <위시>의 발목을 잡는다. 지난 100년 간 쌓아 올린 디즈니의 유산을 한 데 모아놓고 보니, 그들끼리 충돌하면서 여러 모순을 드러내고 만다. 그로 인해 <위시>는 자기만의 매력도 좀처럼 찾지 못한다. 결국 디즈니의 소문난 잔치에는 먹을 것도, 즐길 것도 없어지고 말았다.
평범해도 괜찮아. 어차피 동화니까.
<위시>의 이야기는 평범하다. 동화책을 읽어주는 내레이션으로 시작하고 끝나는 형식만큼이나 전형적이다. 늘 그렇듯이 악의를 지닌 악역과 그로부터 고통받는 공주가 등장한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씨를 지닌 공주는 여러 조력자의 도움을 받아 예상대로 빌런을 꺾는 데 성공한다. 권선징악이라는 환상은 뛰어난 기술력과 아름다운 목소리 덕분에 더 빛난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평범한 이야기를 비판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위시>가 디즈니 100주년 기념작임을 고려하면 오히려 초심을 찾으려는 시도에 가까워 보이기 때문이다. 상술했듯이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본래 맛깔나게 동화를 들려주는 할머니나 유모 같은 존재였다. 관객에게 순수한 즐거움과 희망을 주는 것이 디즈니 작품의 목적이었고, 디즈니의 매력이었다.
<위시>의 그래픽과 음악만 봐도 초심을 강조하려는 듯한 흔적이 역력하다. 우선 기존 작품에 비해 단순하고 직관적인 그래픽이 눈에 띈다. 동물 털까지 세밀하게 만들어낼 줄 아는 최신 기술력을 좀처럼 뽐내지 않는다. 외려 직접 그리거나 손으로 나무를 파내 만든 판화로 찍어낸 듯한 느낌이 강하다. OST도 마찬가지다. 그 유명한 디즈니의 오프닝 음악을 변주한 선율이 가득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위시>는 지극히 동화답기에 오히려 신선하다. 지난 몇 년간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항상 변화를 쫓느라 바빴다. 동화가 아닌 소재를 찾거나, 동화를 변주하려고 노력했다. 새로운 시도는 관객을 매료하기도 했지만, 디즈니만의 개성을 잃고 픽사 작품을 닮아간다는 비판을 낳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위시>의 지극히 원형적인 이야기가 역으로 인상적일 여지가 분명히 존재한다.
형식과 내용의 충돌
문제는 <위시>의 동화적인 형식이 정작 내용과 어우러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위시>는 제목대로 소원에 대한 동화다. 로사스 국민은 매그니피코 왕에게 진심에서 우러난 소원을 맡긴다. 왕은 매달 로사스를 위협하지 않는 소박한 소원 하나만을 이뤄준다. 그는 로사스 사람들은 자기가 맡긴 소원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저 왕에게 소원을 안전히 맡기는 데에 만족한 채로 살아간다.
아샤는 이 시스템에 의문을 제기한다. 소원을 이뤄주는 기준을 자의적으로 정하고, 공익을 위해 개인의 소원을 희생하며, 소원을 이루기 위해 노력할 자유와 가능성을 평생 뺏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그래서 아샤는 왕 대신 별에게 소원을 빈다. 로사스의 모든 사람들이 자기 소원을 되찾고, 소원을 이루기 위해 살도록 해달라고. 그러자 이 소원을 들은 별은 땅에 내려와 아샤와 함께 모든 소원을 되찾는 여정에 나선다.
<위시>는 이 과정을 통해 다음처럼 말한다. 소원을 이룰 개개인의 자유와 가능성은 별처럼 아름답고 소중하다고. 그 누구에게도 맡길 수 없고, 구속될 수 없는 존재니까. 이 대목이 발단이다. <위시>의 교훈은 형식만큼이나 동화적이다. 그런데 그 교훈이 발 딛고 있는 현실은 동화로 포장될 수 있을 만큼 만만하지 않다. 그 결과 <위시>는 동화와 현실, 형식과 내용 사이에서 길을 잃는다.
동화로 노래할 수 없는 현실
실제로 <위시>의 교훈은 익숙한 현실을 소환한다. 우리 모두 하나의 별이니 자존감을 갖고 전진하자는 말은 어디선가 많이 들은 이야기다. 이는 개개인에게 주어진 역량과 가능성을 살리고, 재능을 오롯이 발전시켜 최상의 결과를 만들자는 말과 다르지 않다. 지난 수십 년 간 우리 사회를 지배한 미국적이고, 신자유주의적이고, 더 나아가 능력주의적인 사고방식을 발현인 셈이다.
그런데 스크린 너머 관객의 현실에서 <위시>의 교훈은 이미 빛을 잃은 지 오래다. 제아무리 아름다운 소원을 지녀도 재능과 가능성을 찾을 수 없는 환경에 처했거나, 재능을 알더라도 계발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도 소원을 이루려고 노력하다가 실패한 사람들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는 데 인색하기도 하다.
심지어 마이클 샌델 교수의 지적대로 운이 따라 성공한 사람들에게 모든 과실이 쏠리고, 실패한 이들과의 차이가 벌어지고, 패자들이 멸시받는 일이 많아지기도 했다. 즉, 스크린 너머의 현실에서는 능력주의에 대한 회의감, 기회의 평등에 대한 의문, 신자유주의 체제애 대한 불신이 나날이 커졌다. 이런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소원을 이루자'는 <위시>의 교훈은 제목만큼이나 꿈같은 이야기에 불과하다.
자연히 <위시>의 메시지는 하늘에서 땅으로는 내려와도, 스크린 너머까지는 닿지 못한다. 오히려 현실을 동화적으로 이야기하려고 하는 순간 거부감을 키울 뿐이다. 동화로 포장할 수도 없고, 환상만으로 해결될 수도 없는 현실을 기만하는 것 같은 위선마저 느껴진다.
동화라서 보이는 구멍
물론 <위시>는 나름대로 형식과 내용, 메시지와 현실의 간극을 메우려고 애쓴다. 유머, 노래, 화려한 CG를 총동원한다. 하지만 끝내 동화라는 한계를 벗어나려 하지는 않으며, 결국 동화라는 이유로 생략된 수많은 현실은 수많은 구멍을 낳는다. 우선 동화라는 이유로 평범한 이야기를 옹호할 수 없다. 오히려 드라마는 너무 경직되어 있다고 느껴진다. <겨울왕국> 감독인 크리스벅이 각본과 연출을 맡은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캐릭터도 매력이 없다. 전형적인 동화의 주인공인 아샤와 그의 아버지는 흥미롭지 않다. 귀여움만 어필하는 염소도 <겨울왕국> 속 스벤에 비하면 존재감이 부족하다. 반전을 염두에 둔 '왕비'(안젤리크 카발)도 근래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자주 등장한 '주체적인 여성'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그나마 매그니피코가 강렬하다. 행적은 뻔하지만, 과하게 무게 잡는 대신 유머로 잔뜩 무장한 악역이라서 차라리 새로워 보이기 때문.
이런 상황에서는 디즈니의 야심 찬 변화도 설득력을 잃는다. 아샤에게는 일곱 난쟁이를 연상시키는, 다양한 성별과 인종으로 이뤄진 친구들이 있다. 하지만 다양성을 부각하려는 시도는 부메랑으로 되돌아온다. 인종별로 고정관념적인 외모를 활용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으니까. 당장 아샤의 가장 친한 친구 '달리아'(제니퍼 쿠미야마)만 해도 동아시아인임을 보여주기 위해 키가 작고, 통통하며, 안경을 쓴 여성으로 그려졌다.
이에 더해 동화의 근본적인 한계가 또 한 번 디즈니의 발목을 잡는다. 아무리 다양한 인종과 성별이 작품 내에 공존한다고 해도 다양성은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저 병풍에 불과하다. 동화는 특정한 주인공 한 명의 이야기이고, 필연적으로 그의 특징만 부각될 수밖에 없으므로. 이처럼 디즈니의 현재와 미래를 보여줘야 할 변화도 <위시>에서는 결국 모순으로 귀결된다.
엔딩 크레디트만 빛난다
그럴수록 <위시>에는 100주년을 기념하겠다는 강박만이 남는다. 물론 강박의 순기능도 있다. 모든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교집합 내지는 프리퀄 같은 오마주는 디즈니 작품을 보며 자란 관객에게 독특한 감동을 안긴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역사가 녹아 있는 엔딩 크레디트 역시 100주년에 걸맞은 인상적인 순간을 선사한다.
다만 이 모든 노력은 찰나의 기쁨일 뿐이다. 과거의 영광은 변화한 현실을 보지 못한다는 방증이기도 하니까. 할리우드에서도 꿈과 환상을 가장 오랫동안, 가장 잘 그려내기로 유명했던 디즈니의 100주년 기념작 치고는 중요한 미덕을 여럿 빼먹은 셈이다. 그러니 <위시>는 실망스럽지 않을 수 없다. 그 안에 담긴 디즈니의 현재와 미래가 마냥 화려해 보이지는 않으므로.
Poor 형편없음
동화와 현실,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표류 중인 디즈니의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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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년만에 평창국제평화영화제 다녀왔습니다 l 해물은 싫지만 이 짬뽕은 좋아요ㅣ선우정아님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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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랜만에 제 이야기겸... 영화제 이야기겸....
무엇보다... 현생에 지친 모두를 위해 제가 힐링 받았던 순간들을 공유해보려고 합니다...!
영상을 보시고 다들 조금이라도 마음에 여유를 느끼셨으면 좋겠군요ㅜ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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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아톤리뷰/소개]초원이는 커서 고니가 됩니다. 조승우의 지리는 연기력!
#말아톤#말아톤리뷰#영화말아톤
이 영상은 예고편이 아닌 본편을 활용해 제작했습니다. 모든 저작권 및 수익은 영화사,제작사,배우 등 원작자에게 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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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크루엘라> 화려한 반격 영상
처음부터 난 알았어. 내가 특별하단 걸
그게 불편한 인간들도 있겠지만 모두의 비위를 맞출 수는 없잖아?
그러다 보니 결국, 학교를 계속 다닐 수가 없었지
우여곡절 런던에 오게 된 나, 에스텔라는 재스퍼와 호레이스를 운명처럼 만났고
나의 뛰어난 패션 감각을 이용해 완벽한 변장과 빠른 손놀림으로 런던 거리를 싹쓸이 했어
도둑질이 지겹게 느껴질 때쯤, 꿈에 그리던 리버티 백화점에 낙하산(?)으로 들어가게 됐어
거리를 떠돌았지만 패션을 향한 나의 열정만큼은 언제나 진심이었거든
근데 이게 뭐야, 옷에는 손도 못 대보고 하루 종일 바닥 청소라니
인내심에 한계를 느끼고 있을 때, 런던 패션계를 꽉 쥐고 있는 남작 부인이 나타났어
천재는 천재를 알아보는 법! 난 남작 부인의 브랜드 디자이너로 들어가게 되었지
꿈을 이룰 것 같았던 순간도 잠시, 세상에 남작 부인이 ‘그런 사람’이었을 줄이야…
그래서 난 내가 누군지 보여주기로 했어
잘가, 에스텔라
난 이제 크루엘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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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나는 조선사람입니다> 메인 예고편
한반도 식민과 분단의 역사 속에서 차별받고 외면당한 #재일조선인 하지만 끊임없이 #나를찾아서 비로소 #두개의조국 을 가슴에 품고 오롯한 #조선사람 으로 살기 위해 분노하되 증오를 선택하지 않는 삶 #나는 조선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