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oHa2024-09-23 22:19:04
아빠의 31살은 어땠을까, 나의 31살은 어떨까 - 영화<애프터썬>
영화<애프터썬> 리뷰
아주 아껴두던 영화를 보았다
사실은 너무 미루다가 그만 귀찮아져서, 이제서야 본 게 맞겠다.
영화를 보고 난 후에 조용히 베개를 휴지삼아 뚝뚝 흐르는 눈물을 닦느라 여념이 없었고 영화를 깨나 봤어도, 울어본 적은 정말 손에 꼽기도 하고 나조차도 놀랄정도로 많이 울어버렸기에 대체 이 영화의 무엇이 그렇게 날 슬프게 했는지 알고 싶었다.
필자는 상실의 아픔을 아직 제대로 알지 못한다. 정말 사랑하는 이를 잃어본 경험이 있냐하면, 아직은 없다가 맞다. 물론, 정말 마음 쓰고 좋아했던 사람을 계속 보고, 전처럼 따뜻하게 연락을 주고 받을 수 없게 되버렸던 경험은 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건 사실 사랑도, 상실도 아니었다. 한때는 이에 대한 기준이 너무 높지 않나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적어도 필자가 생각하는 사랑은 그런게 아니다. 그리고 이 생각을 증명하는 순간들이 눈에 보일 때, 다시 말해서 필자가 사랑하고 애정하는 그를 , 또 그녀를 볼 때 마음 속에 드는 마음과 감정을 밖으로 꺼내서 살펴본다면 이건 그다지 믿기 어려운 말도 아닐거다.
영화를 보면서 그런 의문이 들었다.
캘럼은 이번이 소피와의 마지막 시간이라는 마음을 먹고 온걸까, 아니면 겨우내 여행을 하면서 서버린 결심인 것일까? 장면 곳곳에서 캘럼의 고통스러운 몸부림이 그대로 느껴졌다. 소피와 대화를 하며 양치를 하다 거울에 양칫물을 툭하고 뱉는 장면부터, 화장실에서 혼자 깁스를 풀며 소피와 대화하는 씬 등 우울은 그 근원을 찾을 수도 없게끔 나를 잠식시키고 명상과 태극권, 그 어떤 방법을 통해 안정을 찾으려해도 결국 그걸 이겨내지 못하는 스스로를 발견하는 게 더 절망적임을 말이다.
자신을 우울에서 꺼내기 위해서 스스로가 해야하는 일은 대체 무엇일까? 할 수 있는 일이 있긴 할까?
어쩌면 영화<애프터썬>은 사랑하는 존재를 잃는 것이 현재로 하여금 얼마나 고통스럽고, 또 그 존재와의 과거 수많은 순간 속에서 후회만을 떠오르게 하는지. 그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이해하고 싶어도, 결국 지금의 나는 다 알 수 없고 그저 그리울 뿐이라는 것을 말하는 영화 아닐까.
필자가 영화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나조차도 명확히 정의내리지 못했던 그 모호한 감정과 생각들을
영화 속 여러 인물들의 서사를 통해 제3자로서 보기 시작해서, 결국엔 온전히 내 안에서 찾게 된다는 점인 것 같다
영화 속 소피와 캘럼의 모습에서 필자는 스스로의 어떤 모습을 본걸까?
사실 어쩌면 알 것 같기도 하다.
돌고돌아 결국 하고 싶었던 말은 애프터썬은 참 좋은 영화라는 거다. 지금의 필자에게 애프터썬이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 그냥 한 번 남겨보고 싶었다.
또 메스칼이 얼마나 대단한 배우인지도 말이다. 노멀피플때도 느꼈지만 그의 담백하면서도 섬세한 감정이 좋다. 그렇게 꾸밈없고 서글서글한 사람이 좋다. 겉으로 하는 치장보다 단단한 내실, 건강한 몸과 마음을 가꾸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뼈저리게 느끼는 요즘이기 때문이다.
메스칼이 연기하는 유약하지만 불안한 청춘이, 결국 그 모든 감정을 겪는 것이 건강한 젊음이라는 것을,
필자는 그의 연기를 통해, 그의 눈을 통해 다시금 깨닫는다.
31살의 소피는 31살에서 멈춰버린 아빠 칼럼을 다시 한 번 꼭 껴안고자 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필자도 마찬가지였다. 칼럼을 안아주고 싶었고, 또 나의 아빠를 안아주고 싶었다.
이미 지나버린 아빠의 31살은 어땠을까, 아직 오지 않은 나의 31살은 어떨까.
31살이 되면, 그때의 아빠를 이해할 수 있을까?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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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종졸업영화제 #한국영화아카데미졸업영화제 #단편영화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직접 인사 드리는 영화등대입니다. 오늘은 정말 오랜만에, 제 근황과 제가 다녀왔던 영화제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영화리뷰를 기대하셨던분들에게는 조금 죄송스럽지만, 근래에 제가 영화들을 보며, 영화제를 다녀오며 느껴진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이건 순전히 저 개인적인 생각이고, 저는 영화관계자가 아닌, 오로지 팬의 입장에서 느껴졌던 감정을 이야기해볼테니, 제가 하는 말을 전적으로 믿어달라는것도 객관적이다는것도 아니다는 점 말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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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이 가장 빛나는 시
영화 <패터슨>은 단조롭다면 단조롭고, 풍성하다면 풍성한 일주일을 담았다.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버스를 운전하고, 집에 돌아오면 아내가 그 날 분량의 창작 혼을 발휘해 무언가를 리폼하고 있고, 저녁에는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을 나가면서 동네 바에 들러 맥주를 한 잔 들이켜는 삶. 본인의 이름과 같은 패터슨이라는 도시에서 그렇게 매일 비슷하지만 다르게 살아가고 있는 패터슨의 일주일이다.
작은 진폭으로 일상은 매일 다르게 변주된다. 어떤 날은 아내가 컵케이크를 굽고, 어떤 날은 기타를 사고 싶다고 한다. 어떤 날은 버스를 운전하면서 허세를 부리는 남성들의 대화를 듣게 되고, 어떤 날은 이 마을에 유일한 아나키스트 십대 커플의 대화가 들려온다. 그리고 그 내내 패터슨은 끊임없이, 부지런히, 쉬지 않고 시를 캐낸다. 버스를 출발하기 전에, 점심시간에, 작은 노트를 들고 앉아서 계속 쓴다. 직장 동료가 아침마다 "물어본 김에 말이야" 하면서 매일 다르게 변주되는 일상에서 자질구레한 불평을 셀 때, 패터슨은 매일 다르게 반짝이는 무언가를 적확한 단어로 붙잡아 엮으며 시를 쓴다.
가끔 나도 시를 쓴다. 휴대폰 메모장에 [작은 시]라는 폴더가 있다. 다듬다 만 시, 언젠가 빚어내고 싶은 시어, 만족스럽게 완성한 시, 다시 읽다가 반쯤 지운 시, 같은 것들이 섞여 있다. 그것들을 모아 언젠가 공모전에 시를 내보려고 한 적이 있다. 최소 편수에 맞추기 위해 그동안 썼던 모든 시를 다 끌어모으다가 도저히 부족해 중2병 시절 썼던 노트까지 뒤진 적이 있었다. 그 시를 모두 인쇄해 침대 위에 펼쳐놓고, 이렇게도 저렇게도 묶어 보면서 순서를 배열하는 내내 나라는 인간의 지난 십여 년 변천사를, 어쩌면 나의 내장 같은 것을 펼쳐놓고 있는 기분이었다. 십수 년의 장구한 시간이 불과 몇십 장 되지 않는 종이로 흩어져 있었다.
그래서 매일 다른 시구를 적는 패터슨이 굉장히 다작(多作)한다는,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패터슨 자신에게는 그런 의식이 없다. 그는 공모전 같은 곳에 내기 위해 시를 정리하고 묶는 일도 하지 않았다. 아내는 그의 시를 자랑스러워하면서, 세상에 내놓자고 계속해서 그를 설득한다. 아내는 자기가 좋아하는 색깔과 패턴을 과감하게 집안 곳곳에 드러내고, 자신 있게 컵케이크를 만들어 마켓에 내놓으면서 두근두근 기대하는 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사람이다. 새로이 가슴 뛰는 일이 생기면 남편을 졸라 기타를 사고, 혼자 뚱겨 보면서 이미 포크 아티스트가 된 것처럼 행복해하는 사람이다.
남편의 시를 마음 다해 자랑스러워하고,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아내의 마음은 분명 아름답고 다정하다. 그리고 글은 분명 읽는 사람에게 닿아야 하니 사실 그의 말이 맞다. 패터슨이 그토록 좋아하는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 또한 그의 시를 소리쳐 드러냈기에 지금 패터슨의 손에 시집이 놓여있는 거니까.
그리고 그런 마음은 글을 쓰고 싶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 같다. 게다가 옛날과 달리 꼭 등단을 하거나 학력이 높거나 특이한 경험을 한 사람이 아니어도 책을 낼 수 있는 세상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등단보다 셀럽이 되는 쪽이 책을 내기엔 훨씬 빠르고 쉬울지도 모른다. 우후죽순처럼 책이, 작가가 솟아나는 세상. 그곳에서 우직하게 얼굴을 붉히며, 아직은 드러내지 않을 시를 쓰는 사람은 확실히 섬 같은 구석이 있다.
시집 한 권 내지 않았어도, 늘 자신을 버스 운전기사라고 소개해도 패터슨에게는 그런 섬 같은 시인의 면모가 보인다. 먼 훗 날 패터슨 시의 누군가가 (예를 들면 엄마와 언니를 기다리며 시를 쓰던 여자아이 같은 누군가가) 패터슨의 초기 시집을 들고 걸어 다닐 것만 같은, 지금 이 모습은 그 시대의 프리퀄 같다는 예감에 휩싸인다. 좋은 시는, 시인은 시간을 초월하므로 과거는 먼 미래를 닮아있는 것이다.
나는 그렇지 못해서, 조바심이 난다. 더 좋은 문장을, 더 좋은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은 가끔 길을 잃는다. 글을 향한 짝사랑은 그렇게 갈지자걸음을 걷는다. 정말 좋은 문장으로, 좋은 이야기로 누군가의 마음을 따뜻하게 데우고 싶어 하다가도, 어떨 때는 그냥 내 이름자 박힌 책과 작가라는 타이틀과 거기서 나오는 지적 허영심만 쏙쏙 취하고 싶은 것 같다. 세상에 인정받는 글을 보며 부러워한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것 같아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진다. 이 마음이 비단 시와 글에 대한 마음만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정답을 모르고 시험지를 받아 든 학생의 태도로 사는 게 문제라는 걸. 고쳐야지 마음 먹지만 그것조차 하나의 과제로만 부여하곤 하는 스스로를 잘 안다.
그러나 영화 말미에 일본인이 던진 말처럼, 때로는 여백이 상상의 여지를 주기도 하는 것이다. 어쩌면 패터슨이 일상 속에서 오롯이 자신의 시를 쓸 수 있는 지금, 아직 등단 전이고 원고 청탁이나 강연 요청이 들어오지 않고 그에 대한 비평이 들려오지 않는 지금이 그에게 가장 빛나는 시를 쓸 수 있는 때인지 모른다. 정말 그의 정수가 흘러나오는 건 지금일 것이다. 누군가의 초기 작품이란 가장 거친 날것으로 그가 드러나는 방식이니까. 가장 그다운 것들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는 시간이니까.
그 사실이 기묘하게 나에게 위안을 준다. 지금은 아직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시간이 아니라, 가장 나다운 것들을 이루어가는 시간이라는 점이. 패터슨이 긴 다리를 성큼성큼 옮기며, 그냥 좋은 사람 소리 듣는 평범한 이웃처럼 웃으며, 그런 날들을 담담하게 사는 모습을 바라보면 지금이 그의 가장 빛나는 시라는 생각이 드니까.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어느새 조바심을 내려놓고, 여백이 주는 여지를 즐길 수 있다.
패터슨이라는 캐릭터뿐 아니라 이 영화 자체가 나를 그렇게 가르친다. 개가 납치당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협박처럼 들리는 젊은이들의 경고 이후에도 패터슨은 여전히 개를 바 밖에 묶어놓는다. 조금 머뭇거리다 개에게 "납치당하지 마."라고 말해두는 게 전부다. 당연히 납치 예방에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 말을 들은 이후로 부부가 개를 잃어버리게 될까 계속 불안했다. 1장에서 총이 등장했다면 2장이나 3장에서는 반드시 쏴야 한다며? 어디서 체호프의 총 얘기는 주워듣는 바람에. 그러나 그건 나만의 불안이었다. 단편적인 지식은 나름의 쓸모가 있지만, '그래야 한다'라고 사람을 옭아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너무 많은 순간 누군가의 정의를 기다린다. 시란? 시는 이런 거야. 시는 어떤 순서로 묶어야 하지? 이런 규칙에 따라 묶어야 하는 거야. 누군가 그렇게 말해주기를 기다리는 바보짓을 자꾸만 반복한다. 이런 건 문예창작과에 갔으면 배웠으려나? 안 되면 조상 탓이라고, 툭하면 전공을 돌아보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해도 되나? 이렇게 하는 게 맞나? 누군가 맞다고, 혹은 그게 아니라 이렇게 해야 한다고 말해주길 기다린다.
시는 그런 마음 바깥에 있다. 그리고 거기에 시만 있는 것은 아니겠지.
어떻게 하면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평안한 마음으로 살 수 있을까. 모른다. 다만 지금 쓰는 대로, 나의 시들은 내가 묶고 싶은 대로, 그 느낌과 그 속도가 맞다. 잘 되지 않으면 잘 되지 않는 대로 담담하게 흘려보내는 것이 맞다. 마음이 또 불안해지거든 눈을 들어 패터슨을 보자. 그리고 조용히 작은 노트를 펴자. 다시 지금의 빛이 눈에 들어올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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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준호 다운 캐릭터가 조화를 이루다
봉준호 감독은 언제나 우리에게 묵직한 사회적 함의를 던지는 이야기꾼이다. <살인의 추억>에서는 당시 수사 시스템의 허점을 통해 실체 없는 공포와 무력함을 그려냈고, <마더>에서는 극단적 모성애로 인한 폭주를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특히 <기생충>에서는 계층 간 격차를 촘촘한 미장센과 인물 구도를 통해 묘사함으로써, 사회학을 전공한 감독 특유의 비판적 시선을 매섭게 드러냈다. 그 연장선 위에서 탄생한 신작 <미키17>은 우주라는 새로운 무대를 빌려, 우리의 현실 속 ‘계급’과 ‘정치’, 그리고 그 이면에 감춰진 인간의 본능을 극적으로 펼쳐 보인다.
영화는 우주 이주 프로그램에 참여한 미키(로버트 패틴슨)를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그는 자신이 죽을 때마다 기억과 인격을 복제해 다시 깨어나는 ‘익스펜더블 프로그램’의 담당자로 설정되어 있다. 처음에는 단순히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이 위험천만한 프로젝트에 지원했을 뿐이지만, 반복된 죽음과 새로운 깨달음을 통해 결국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의미를 찾아나가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것은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미키의 여정, 그의 연약함을 감싸는 나샤(나오미 애키)의 ‘사랑’, 그리고 이 모든 시스템을 악용하는 정치인 마셜(마크 러팔로)의 ‘욕심’이다.
[첫번째 감정] 미키의 두려움
첫 번째로 주목해야 할 감정은 미키가 품고 있는 ‘두려움’이다. 지구에서 엄청난 빚을 지고 사채업자에게 쫓기던 그는, 결국 우주로 도망치듯 떠나는 결정을 내린다. 죽임을 당할지 모른다는 공포감이 그를 몰아세웠고, 이런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실험체나 다름없는 ‘익스펜더블 프로그램’에 덜컥 지원한다. 이때 미키가 제대로 설명도 듣지 않고 서류에 사인을 하는 장면은, 그가 얼마나 궁지에 몰려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죽음이 두려워 도피한 곳이 하필이면 죽음을 반복적으로 경험해야 하는 구역이라는 점이 참 아이러니하다.
하지만 미키는 이내 ‘복제’를 통해 계속해서 부활하는 상황에 익숙해져 간다. 바이러스 테스트나 우주방사선 노출 실험처럼 잔인한 방식으로 소모되는 모습에서도, 그는 겉으로는 무감각해 보인다. 몸이 망가져 죽으면 또 다른 미키가 깨어나 동일한 기억을 잇기 때문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거의 사라진 것처럼 보이던 미키에게, ‘살아있음’ 자체는 더 이상 특별하지 않은 듯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이 영화가 던지는 핵심 질문이기도 하다. “기억이 이어진다고 해서, 그것이 곧 나의 존재 자체를 의미하는가?”
진짜 문제는 미키17이 ‘미키18’을 마주한 순간부터 시작된다. 미키18은 기억과 외형은 비슷하지만, 분명히 성향과 태도가 조금 달라 보이는 존재다. 그제야 미키17은 깨닫는다. 죽는 순간 자신이 ‘영원히 소멸’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복제 기술이 완벽하다 생각했으나, 결국 매번 다른 개체가 나타날 뿐 ‘이전의 나’와 100% 동일할 수는 없다는 걸 체감한다. “죽는 건 어떤 기분이야?”라는 질문을 영화 속 다른 인물들이 던질 때, 그것은 미키가 가진 두려움을 일깨우는 말이기도 하다. 살아있는 동안 답을 찾기 힘든 이 근원적 공포가, <미키17>에서 인간성을 탐색하는 중요한 장치로 작동한다.
[두번째 감정] 나샤의 사랑
두 번째 감정은 미키를 헌신적으로 지켜보는 나샤의 ‘사랑’이다. 여러 차례 죽고 깨어나는 사이에서, 미키의 곁을 지키는 건 오직 나샤뿐이다. 그녀는 “죽었을 때 어떤 기분이었냐”처럼 끔찍한 질문을 미키에게 묻지 않는다. 죽음의 상처를 굳이 후벼팔 필요 없음을, 이미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공감 능력은 미키가 가진 두려움을 일시적으로나마 잊게 만들어주고, 시종일관 곁에서 그를 안심시킨다. 영화 초반에는 이러한 관계가 단순히 ‘연약한 남성을 돌보는 강인한 여성’ 구도로 보일 수 있지만, 곧 나샤의 매력이 훨씬 깊고 다층적임이 드러난다.
특히 나샤는 ‘미키17’과 ‘미키18’이 동시에 존재하게 된 상황에서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다. 둘 다 같은 미키임에도, 성향은 조금씩 다른 두 사람을 동등하게 받아들이고 사랑을 나눈다. 이중적 존재가 생겨난 불안한 상태에서도, “네가 누구든 사랑하고 지켜주겠다”는 태도를 취하는 그녀의 모습은 감동적이다. 이는 단지 연애 감정의 차원을 넘어, 이주 행성이라는 미지의 세계에서 생겨난 새로운 ‘존재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한 일종의 실마리를 제시한다. 자신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존재를 배척하지 않고 소통으로 품어내는, 그런 태도가 이 영화에서 중요한 테마로 자리한다.
나샤가 특히 돋보이는 지점은, 이주 행성에서 만난 ‘벌레’ 같은 생명체를 지키려는 결심을 보여줄 때다. 우주정복이나 개척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자원을 갈취하려 드는 정치인 마셜 집단과 달리, 나샤는 ‘이 생명체들도 우리와 동등하게 존중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녀의 시선은 결국 ‘사랑’과 ‘공감’의 확장판이다. 미키를 받아들이듯, 우주 생명체와도 대화하며 공존하려 애쓰는 나샤의 모습에서 우리는 봉준호 감독 특유의 사회비판적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정치적·경제적 이익을 위해 무차별적으로 타인(혹은 타종)을 소모하는 행태’에 대한 날 선 비판인 셈이다.
[세번째 감정] 정치인 마셜의 욕심
세 번째 감정은 마셜(마크 러팔로)이 상징하는 ‘욕심’이다. 그는 지구에서 정치적 입지가 별로였기에, 우주 이주 프로젝트를 주도하면서 스스로 권력의 중심에 올라선다. 본질적으로 무능력하기에, 늘 아내(토니 콜렛)에게 모든 결정을 위임하는 모습이 반복해서 비춰진다. 사업가이자 정치인으로서 그는 한편으론 교묘하게 대중을 현혹하고, 다른 한편으론 미키 같은 존재를 마음껏 써먹으려 든다. 익스펜더블 프로그램은 이주 중 만날 수 있는 위험에서 유용하게 소모될, ‘하나쯤 없어져도 괜찮은 인력’이라는 발상으로 만들어진 제도다.
흥미로운 건, 마셜이라는 캐릭터를 보면 자연스레 한국의 정치 현실이 떠오른다는 점이다. 지지층을 어떻게든 확보하고, ‘뭔가를 해내는 척’ 무대만 만들어 놓은 뒤, 실제로는 구체적인 청사진이나 능력은 전혀 보여주지 못하는 지도자의 모습과 오버랩된다. 권위자에게 줄을 서고 충성을 다하는 이들은 마셜의 비위를 맞춰주며, 그의 온갖 추한 면을 뒤처리한다. 그러나 막상 이주한 행성에서 어떠한 미래를 그리고 있는지는 불투명하다. 듣기 좋은 연설만 반복하면서, 실제로는 자기 몫의 이득 챙기기에만 급급한 셈이다.
결국 미키와 그 곁을 지키는 나샤, 그리고 우연히 교류하게 된 외계 생명체가 보여주는 ‘공존과 연대’야말로 마셜의 몰락을 재촉하는 결정적인 힘이 된다. 봉준호 감독은 “작은 존재가 모여 더 큰 변화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여러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보여줬다. <기생충>이 그렇고 <설국열차>도 그랬다. 이번에도 무심코 버려졌던 미키와 외계의 작은 벌레들이 한데 어우러지는 ‘조화’가 정치적 거인의 한계를 드러낸다. 이는 우리 사회 속 ‘무능한 리더십’이 불러올 참담한 결과를 예고하는 현실 풍자처럼 보인다.
<미키17>이 담은 봉준호 월드
한편, 마셜과 미키17의 대립을 ‘권력자와 청년 노동자’의 대립으로 해석해볼 수도 있다. 마셜은 지구라는 기존 체제에서 기득권을 꽉 잡고 있던 권력자가 우주로 무대를 옮겨 권위를 재차 행사하는 인물이다. 반면, 빚 때문에 스스로 ‘소모품’ 역할을 떠맡은 미키17은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생존을 위해 기꺼이 위험한 임무를 감수하는 청년 노동자에 가깝다. 그들은 한 배를 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마셜에게 미키17은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부품’이다. 여기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착취 구조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고용시장과 권력자-피고용인의 위계 질서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 갈등이 극단으로 치달았을 때, 봉준호 감독은 어김없이 약자들의 연대와 소통을 통해 부조리를 깨부수는 희망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미키17>은 반복되는 죽음과 복제라는 소재를 통해, “나는 누구인가?”라는 존재론적 물음을 던진다. 이 질문은 동시대의 다양한 사회문제와 절묘하게 맞물린다. 흥미로운 건, 지구에서 이 우주로 떠난 이들은 대부분 생존의 위협이나 경제적 압박, 혹은 정치적 이유로 도피해 온 인물들이라는 점이다. 지구를 버리고 떠나온 자들의 새로운 세계에서, 과연 ‘더 나은 삶’을 꿈꿀 수 있을까? 결국 인간이란, 어디에서건 같은 고민과 탐욕, 그리고 소외 문제를 반복한다는 사실을 영화가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봉준호 감독은 결코 비관론으로 끝맺지 않는다. 미키와 나샤, 그리고 벌레라 불리는 생명체가 맺어가는 조화로운 관계는 ‘어울림의 가능성’을 분명하게 제시한다. 즉, 서로 다른 존재를 존중하고 대화를 시도하는 태도가 바로 진정한 해답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건넨다. 마셜처럼 권력을 쥔 자들이 제시하는 허황된 미래가 아닌, 작고 연약해 보이는 주체들이 서로를 받아들이고 협력함으로써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수 있음을 암시한다.
배우들의 연기 역시 주목할 만하다. 로버트 패틴슨은 겁에 질려 우주로 피난 온 미키의 불안하고 나약한 면을 능숙하게 표현하면서도, 복제체를 마주하는 장면에서는 절묘한 차이를 두어 미키17과 미키18을 입체적으로 연기한다. 나오미 애키의 나샤는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한 인물을 섬세하게 그려내, 영화 후반부 ‘복수의 미키’를 모두 감싸 안는 장면에서는 강렬한 감동을 이끌어낸다. 마크 러팔로와 토니 콜렛 커플의 괴이하고 익살스러운 정치 드라마 역시 봉준호 특유의 블랙코미디 감각을 살려내며, 관객들에게 씁쓸한 웃음을 선사한다.
연출 면에서 봉준호 감독은 우주라는 넓은 무대 안에 좁은 계급적 공간을 다시 구축해냈다. 탁월한 미장센과 대사, 그리고 캐릭터 간의 긴장감으로 <설국열차>와 비슷한 계급 구조를 만들면서도, 이번에는 스스로 우주로 나아가는 세계관을 선보인다. 행성 밖 생명체와의 교류라는 설정이 상징하는 것은, 결국 인류가 고집해왔던 ‘자기중심성’을 깨부수라는 요청처럼 보인다.
결국 <미키17>은 관객들에게 명쾌한 답을 내리기보다, 각자의 위치에서 질문을 던지도록 만든다. 나 자신의 존재 의미는 무엇인가?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과연 ‘죽음’ 자체인가, 아니면 ‘나라는 존재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실존적 공포인가? 그리고 사랑을 통해 우리는 서로를 어디까지 받아들일 수 있을까? 권력을 쥔 자들의 배신과 무능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이 모든 물음은 비단 우주 이주라는 극단적 상황에서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한국 사회의 현 주소이기도 하다.
이 영화를 추천하고 싶은 이유는 분명하다. 봉준호 감독 특유의 사회적 메시지,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 그리고 ‘우주판 기생충’이라 불릴 만한 신선한 분위기가 어우러져, 흥미로운 볼거리와 생각거리를 동시에 제공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행성에서 벌어지는 계급·정치·사랑의 스토리가 궁금하다면, 그리고 죽음과 복제라는 철학적 소재가 어떻게 감각적인 장르 영화로 변주되었는지 알고 싶다면, <미키17>을 꼭 극장에서 만나보길 바란다.
분명 그 안에서, 우리 모두가 ‘인간’으로서 마주해야 할 근원적 질문들이 당신을 사로잡을 것이다. 그리고 잠시나마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꿈꿔보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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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셋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안녕하세요, 씨네픽입니다! :)
6월 셋째 주도 잘 보내셨나요?요즘 많은 기대작들이 개봉을 하면서 영화관이 활기를 찾고 있는 것 같습니다.또한, 그만큼 치열한 경쟁이 될 것 같은데요.씨네픽과 함께하는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과 한 주 동안 진행했던 씨네픽 예측 이벤트인'주말 박스오피스 순위 예측'도 같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그럼 시작해 볼까요?...국내 주말 박스오피스
▶ 개봉과 동시에 1위를 차지한 <마녀 Part2>. 기존 한국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액션과 개성 넘치는 캐릭터로 인기를
끌었던 <마녀>의 후속작인만큼 많은 관람객이 찾은 것 같습니다.
주말 동안 (6월 17일~6월 19일) 관객 수 100만 9,280명을 동원했으며, 총 누적 관객 수는 145만 8,094명을 돌파하였습니다.| 줄거리
자윤’이 사라진 뒤, 정체불명의 집단의 무차별 습격으로 마녀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는 ‘아크’가 초토화된다.
그곳에서 홀로 살아남은 ‘소녀’는 생애 처음 세상 밖으로 발을 내딛고 우연히 만난 ‘경희’의 도움으로 농장에서 지내며 따뜻한 일상에 적응해간다.
한편, ‘소녀’가 망실되자 행방을 쫓는 책임자 ‘장’과 마녀 프로젝트의 창시자 ‘백총괄’의 지령을 받고 제거에 나선 본사 요원 ‘조현’,‘경희’의 농장 소유권을 노리는 조직의 보스 ‘용두’와 상해에서 온 의문의 4인방까지 각기 다른 목적을 지닌 세력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소녀’ 안에 숨겨진 본성이 깨어나는데…
2. <범죄도시2> (▼1)▶ <마녀 2>가 개봉하면서 한 단계 떨어진 <범죄도시2>. 다만, 주말 관객 수는 6월 둘째 주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19일 기준, <범죄도시2>의 예매율이 10.8%로 3위를 차지하면서, 6월 넷째 주도 <범죄도시2>가 여전히 순위를 유지할 것으로 보입니다.
주말 동안 (6월 17일~6월 19일) 관객 수 55만 977명을 동원했으며, 총 누적 관객 수는 1146만 303명을 돌파하였습니다.
3. <버즈 라이트이어> (NEW)▶ <토이스토리> 시리즈의 첫 번째 스핀 오프 작품이자, 크리스 에반스가 보이스로 참여하면서 화제를 모은 <버즈 라이트이어>.
전세계에 수많은 팬을 보유한 <토이 스토리> 시리즈의 버즈가 주인공인만큼 많은 관객이 관람한 것 같습니다.
주말 동안 (6월 17일~6월 19일) 관객 수 15만 8,731명을 동원했으며, 총 누적 관객 수는 20만 5,758명을 돌파하였습니다.
| 줄거리
미지의 행성에 고립된 인류를 탈출 시키기 위한 ‘버즈’와 그의 정예 부대 요원들의 운명을 건 미션 수행을 그린 작품
▶ 씨네픽의 이번 주 105회 예측 이벤트는 6월 3주 차 박스오피스(순위) 예측입니다. 한 주동안 많은 분들이 참여해주셨는데요.
씨네픽 참가자분들이 예측해주신 6월 3주 차 박스오피스 순위의 결과는 어땠는지 다 같이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씨네픽 유저 예측 결과
정답자 비율(%)
▶ 한 주 동안 많은 씨네픽 유저분들이 박스오피스 순위를 예측해 주셨는데요. 박스오피스 1위 순위를 가장 많은 분들이 맞혀주셨고,
그다음으로 2위, 3위 순으로 많이 맞춰주셨습니다. 67%의 사람이 <마녀 Part 2>의 1위를 예측 성공하였는데요. 2위와 3위의 경우 조금은 헷갈리는 분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참여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씨네픽은 다음 주에 더 재밌고 유익한 제107회 씨네픽 이벤트로 인사드리겠습니다! :)
4. <브로커> (▼2)▶ <브로커>의 경우 화려한 라인업과 거장 감독의 만남으로 화제를 모은 것에 비해 조금은 아쉬운 성적이 나오고 있는데요.
기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와 조금은 다른 결의 영화를 보여줘, 기존 감독의 영화를 기대했던 사람들에겐 아쉬운 영화가 된 것 같습니다.
주말 동안 (6월 17일~6월 19일) 관객 수 15만 8,429명을 동원했으며, 총 누적 관객 수는 110만 7,465명을 돌파하였습니다.
5. <쥬라기 월드: 도미니언> (▼2)▶ 기대작들의 개봉으로 두 단계 떨어진 <쥬라기 월드: 도미니언>.
이번 주에 <탑건: 매버릭>이 개봉하기에 6월 넷째 주에는 TOP 5 안에 진입하지 못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주말 동안 (6월 17일~6월 19일) 관객 수 8만 1,074명을 동원했으며, 총 누적 관객 수는 276만 7,627명을 돌파하였습니다.
북미 주말 박스 오피스
▶ 북미 박스오피스 1위는 6월 둘째 주와 동일하게 <Jurassic World Dominion>이 차지했습니다.
6월 셋째 주 박스오피스 역시 지난 번 박스오피스 TOP 5 순위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는데요.
<Lightyear>가 개봉하면서 <Jurassic World Dominion>를 제외한 모든 영화의 순위가 한 단계씩 하락했습니다.
주말 동안(6월 17일~6월 19일) <Jurassic World Dominion>의 매출액은 58,660,000 (한화 약 759억)의매출액을 달성했으며, 총 누적 매출액은 249,796,690 (한화 약 3,234억)입니다.<북미 박스오피스 TOP 5> (2022년 6월 17일 ~ 2022년 6월 19일)1. <쥬라기 월드: 도미니언> 5,866만 달러 (누적 2억 4,979만 달러)2. <버즈 라이트이어> 5,100만 달러 (누적 5,100만 달러)3. <탑건: 매버릭> 4,400만 달러 (누적 4억 6,616만 달러)4.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 420만 달러 (누적 4억 508만 달러)5. <밥스버거: 더 무비> 110만 달러 (누적 2,976만 달러)...씨네픽의 6월 셋째 주 박스오피스 분석 콘텐츠는 여기까지입니다.이번 주도 건강한 한 주가 되기를 바라며씨네픽은 다음 주 월요일, 이 시간에 또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로 찾아뵙겠습니다.감사합니다!-!씨네랩 에디터 Hiz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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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을 빼앗긴 두 남자의 벌거벗은 몸
*이 글은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쓴 글입니다.
얼마 전 한국토지주택공사 LH의 직원 비리로 온 나라가 시끄러웠다. 그들이 업무 과정에서 취득한 정보를 활용해 투기놀음에 나섰고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는 뉴스 때문이었다. ‘내 집 마련’이 중산층임을 입증하는 표지가 되어 모두가 목숨 거는 시대에, 정작 이 꿈을 실현시켜줘야 할 공공기관의 직원이 자기 잇속을 챙기고 있었다는 데 모두가 분노한 사건이었다.
영화 〈사상〉은 이제는 사람들이 더 이상 '분노하지 않는' LH의 또 다른 문제를 다룬다. 〈사상〉에서, LH는 원주민의 주거권·생존권을 위협하는 폭력의 주체다. 부산 사상에 벤처타워가 들어오게 되었다. 보상을 받고 마을을 떠난 사람도 있지만 삶의 공간을 빼앗길 수 없다며 버티는 사람도 있다. 〈사상〉은 각각 자본과 공권력을 대표하는 건설회사·LH와 맞서 오래도록 이어지다 끝내 패배해 버리고만 싸움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영화다.
영화 〈사상〉 스틸컷
주인공은 두 명의 중장년 남성이다. 먼저 박성희. 그는 감독의 아버지다. 새로 살 집을 알아보러 다니는 그의 삶은 고단해 보인다. 산업 재해로 검지를 잃은 왼손, 보호대 착용이 필요한 허리, 육체노동으로 거칠어진 발. 그리고 우울. "이 나이 되도록 집 하나 못 산 건 내 팔자려니 싶다",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나 생각하니 눈물이 팍 쏟아졌다"는 그의 말은 LH가 늙고 약해진 남성을 집이라는 안식처로부터 몰아내는 무던함과 대비되어 무력감을 자아낸다. 또 다른 주인공 최수영은 굴삭기 기사이자 운동가·활동가다. 그는 사상에서의 싸움을 강제이주의 역사 속에 맥락화한다. 그럼으로써 집·주거권을 체계적으로 박탈해 온 국가·자본의 폭력을 고발한다.
요컨대 〈사상〉의 두 남성 주인공은 모두 무언가를 ‘잃은’ 존재다. 집, 주거권, 삶 그리고 마을 공동체. 이들이 상실한 것이 과연 그리 아름답기만 한 것이었을지에 관한 의문은 잠시 제쳐놓고, 영화가 자본·공권력이라는 체계적 폭력을 재현하는 방식을 살펴보자.
영화 〈사상〉 스틸컷
〈사상〉은 자본과 공권력의 얼굴을 명료하게 그리지 않는다/못한다. 자본·공권력의 악행을 가능케 하는 메커니즘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않는다는 소리다. 자본과 공권력은 그저 ‘나쁜 대상’으로 말해지고 보여질 뿐이다. 체제로서의 폭력이 작동하는 방식을 이토록 느슨하게 조명한 〈사상〉의 연출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거대한 폭력에 대한 적확한 분석을 결여한 채 그저 끝없이 괴로워할 뿐인 감독을 냉소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고민이 필요할까? 그럼으로써 우리는 어떻게 감독이 세상을 느끼고 바라보는 방식에 비판적으로 개입하여 함께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고민이 필요하다.
첫 번째는 감독이 ‘남성’이라는 점에 주목해 보는 것이다. 자본·공권력이 휘두르는 권력을 비판하는 그는 정작 두 주인공과 자기 자신이 기대고 있는 젠더 권력에는 다소 둔감해 보인다. 〈사상〉을 보는 내내 성차별적인 장면, 발화가 불쑥 튀어나오진 않을까 불안했다. 영화가 '남성적 방식'으로 재현되는 '남성 서사'였기 때문이었다. 박성희의 가족이 모여 제사를 지낼 때 정작 제사 음식을 준비한 여성(그녀가 박성희 가족과 어떤 관계인지는 알 수 없다)은 함께 절하지 않는 장면에서 알 수 있듯, 영화가 낭만적 공동체로 재현하는 '사상에서의 삶'은 자본·공권력과는 다른 또 다른 권력(가부장제)이 작동하는 공간이었을 수도 있다.
감독이 내레이션으로 ‘봉분 같은 아파트’와 ‘밀양 할매들과 함께한 식사’를 대비시킬 때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차갑고 무뚝뚝한 건축물을 따뜻하고 정겨운 할매의 품이라는 젠더화된 비유와 대비시킨다. 삭막한 과학/문명과 여성이 제공하는 포근함의 대비는 오랜 역사를 지닌 성차별적 구도다. 현실의 척박함을 고발하기 위해 밀양 할매들을 호명하는 〈사상〉의 발화는 조금 더 섬세했어야 했다.
영화 〈사상〉 스틸컷
하지만 젠더 권력에 대한 감독의 무관심, 둔감함만으로 〈사상〉을 평가할 순 없다. 〈사상〉이 자본·공권력을 치밀하게 묘파하지 ‘않음으로써/못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중요한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사상〉의 '결점'은 영화가 어떤 계보에서 작업되어 왔는지를 살펴봄으로써 만회될 수 있다. 감독의 내레이션이 말해 주듯, 〈사상〉은 4대강 사업, 밀양 송전탑을 기록한 작업의 연장이다. 또한 최수영이 말하듯, 사상에서의 싸움은 1970년대의 강제이주에 대한 저항의 계보에 놓여 있기도 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자본·공권력에 대한 〈사상〉의 두루뭉술한 묘사는 구체적 경험의 지위를 획득한다. 감독과 사상의 주민에게 자본·공권력이 폭력임은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가 없는 너무도 자명한 경험적 사실이다. 즉, 자본·공권력에 대한 〈사상〉의 느슨한 묘사는 영화의 결함이 아닌 영화의 핵심 메시지다. 왜 ‘우리’에게 자명한 것이 ‘당신’들에겐 그렇지 않느냐는 성찰적 물음으로써 권력에 대한 허술한 묘사가 기능하는 것이다.
〈사상〉은 그 어떤 다른 해석도 허락하지 않은 채, 완고한 태도로 자본과 공권력을 불신한다. 공사장에서 발생한 진동으로 무너진 집, 기울어진 벽을 지탱하는 나무 받침대, 밝은 표정의 정치인의 달콤한 약속과 그 약속에서 배제된 자들 등등. 〈사상〉의 이미지들은 마치 자신이 그 자체로 폭력의 증거이기에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다는 듯 스스로를 쓸쓸히 전시한다.
영화 〈사상〉 스틸컷
그리고 두 남자의 벌거벗은 몸. 영화는 박성희와 최수영이 벌거벗은 채로 씻는 모습을 꽤 오랫동안 비춘다. 질병, 장애로 인해 느리게 움직이는 이들의 취약한 몸은 자본·공권력 앞에서 벌거벗겨진 생명의 표상일 수 있다. 또는 시종일관 진지한 남성의 목소리로 자본·공권력을 비난하던 영화가 남성의 몸을 취약성과 연결짓는 이 급작스러운 균열로부터, 고난 속에서도 여전히 살아 숨쉬는 삶의 리듬이 새겨진 장소로써 벌거벗은 몸을 독해할 수도 있다.
용산참사 이후 10여 년. 이제 아무도 강제철거, 원주민을 내쫓는 재개발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투쟁’이라는 말에 빨간딱지가 붙었던 때는 차라리 나았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빨갱이’의 목소리는 시끄럽게 '들리기'라도 하니 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변화에 너무 빠르게 적응했다. 우리를 분노케 했던 문제의식은 몰아치는 신자유주의 앞에서 증발해 버렸고, 여전히 ‘투쟁’을 외치는 사람은 낡은 구닥다리가 되었다.
이토록 빠르게 도달한 파국 앞에서 벌거벗은 두 남자의 몸*은 우리의 기억을 일깨워 〈사상〉의 문제의식에 동참케 할 수 있을까? 4대강, 밀양, 사상으로 이어지는 투쟁은 사라지지 않고 자본·공권력을 비판하는 동력으로 남을 수 있을까? “원주민을 내쫓고 세워진 미래”에 빼앗긴 자들의 삶을 다시 기입할 수 있을까? 그리하여 우리는 과잉 남성 자의식으로 자본·공권력에 대한 ‘피해의식’에 빠져 세상을 삐딱하게 바라보는 〈사상〉의 감독과 연대할 수 있을까? 〈사상〉은 해소되지 않은 여러 질문을 남기는 영화다.
*영화의 음악이 흥미롭다. 영화에는 중간중간 분절되고 끊어지며 뒤로 감는 듯한 독특한 음악이 나온다. 자본과 결탁한 국가폭력에 짓눌려 어긋나 버린 두 남자의 삶 리듬을 형상화한 것일 수도 있고, 우리 사회를 변주할 새로운 리듬일 수도 있는 이 음악은 '벌거벗은 두 남자의 몸'과 같은 이중적 질문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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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캐'를 가진 헐리웃 스타들
2주 연속 극장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영화가 있다고 하죠? 그 영화는 바로, <블랙 위도우> 인데요. 영화 <블랙 위도우>의 히로인이자, '어벤저스'를 10년간 지켜온 '나타샤 로마노프'의 본체가 실제로도 스파이만큼 많은 직업을 갖고 있다는 사실! 알고 계신가요??
스칼렛 요한슨뿐만 아니라, 실제 많은 배우들이 다양한 '부캐'를 갖고 있다고 하는데요. 그렇다면, 이색 취미를 갖고 있는 배우들 또는 생각지도 못한 부업을 하고 있다는 배우들을 지금부터 한 번 만나볼까요?
잇츠 CINE PICK!!스칼렛 요한슨
인생의 반 이상을 '연기자'로 살아온 배우이자, 출연작이 50편도 넘을 정도로 연기 활동을 열심히 한 배우, '스칼렛 요한슨'은 사실 취미 부자로도 유명한데요. 2009년, "Falling Down"이라는 솔로곡을 발표한 요한슨은 2015년, Este haim 등과 함께 "The Singles"라는 5인조 밴드를 결성한 가수이기도 합니다. 괜히 영화 <씽>에서 고슴도치 록스타 '애쉬' 역을 맡은 게 아니었는데요. 게다가, 그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간식, '팝콘'을 소개하기 위해 프랑스 파리에 Yummy Pop 이라는 팝콘 가게를 차리기도 했습니다. (아쉽게도, 지금은 폐점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2021년, 디즈니 테마파크 놀이기구 영화화 프로젝트 중 <타워 오브 테러>를 소재로 한 영화에 제작자로 나설 예정이라고 하니, '마블' 영화에서 보지 못하더라도 열.일.중인 그녀를 많은 곳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드웨인 존슨
7월 28일 디즈니의 <정글 크루즈>를 통해 스크린에 컴백하는 배우 '드웨인 존슨'은 사실 배우가 '부캐'였던 WWE 대표 프로레슬러였는데요. 6년간의 레슬러 생활 이후 '배우'를 본캐로 갖게 된 그는 특유의 피지컬과 목소리 등을 통해 단숨에 차세대 액션 스타로 거듭날 수 있었고, 약 20년이 지난 지금 헐리웃에서 가장 많은 수입을 올린 배우 1위를 3년 연속 차지할 정도의 대표 배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수입이 '배우'로서 벌어들인 금액만으로 이루어진 건 아닌데요! 그는 <분노의 질주> 스핀오프 작품을 포함한 다양한 작품의 제작자로서 천문학적인 금액을 쓸어 담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죠! 평소 데킬라의 팬이라 말하던 그는, 2019년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직접 데킬라 사업에 뛰어든 사실을 알리기도 했는데요. 하지만, 많은 이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건 역시, 그가 차기 대선 후보에 오를 수 있을 것인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과연 그는 '레이건'에 이은 두 번째 배우 출신 대통령이 될 수 있을까요?
제시카 알바
2000년대 초, 헐리웃을 강타했던 대표 미녀 배우 '제시카 알바'가 어느 순간 스크린에서 보이지 않아 궁금했던 분들이 많으실 거라 짐작됩니다. '제임스 카메론'의 TV시리즈 <다크 엔젤>부터 <씬 시티>, 그리고 <판타스틱 포>까지 성공시키며, 헐리웃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엄청난 인기를 누렸던 배우인데요. 그런 그녀가 지금은 대기업의 CEO라는 사실, 혹시 알고 계신가요? 2011년, 친환경 생활용품 기업 "디 어니스트 컴퍼니"를 설립하여, 독성물질이 없는 유아용품을 출시해 큰 화제를 모았는데요. 그녀의 꾸준한 노력은 1조 규모의 기업 가치를 만들어냈다고 하니, 끈기 인정합니다.
쿠엔틴 타란티노
배우는 아니지만, 국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헐리웃 감독인 '쿠엔틴 타란티노'는 친한파 감독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요. 그런 그가 2002년, 그의 한국인 친구와 함께 뉴욕에 k-레스토랑을 오픈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K-BBQ는 물론, 비빔밥부터 떡볶이까지 다양한 한식 메뉴를 선보인 레스토랑 '도화'는 직접 만든 김치까지 제공하는 찐 한식당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역시 지금은 폐점한 상태라고 하는데요. 타란티노 팬들에게는 오히려 좋은 소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까지, 배우의 BTS (Behind The Scene)를 알아보았는데요.
스크린에서도, 그 이외의 공간에서도 열.일 하는 그들이 있어
오늘도 우리는 영화로운 하루를 보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씨네랩 에디터 Camm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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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심(利己心)
사람들은 자신이 이기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까? 이기심이란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꾀하는 마음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름대로의 관용을 베풀며 그럭저럭 선을 지키며 산다고 생각한다. 즉 자신이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믿기 싫어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기적이다.’ 라는 말은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치명적인 단점이 된다. 마주치고 싶지 않은 본능, 이기심이 주제인 <라쇼몽>은 갖가지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당신은 이기적인 사람입니다.’를 보여준다.
먼저 이야기 전달 방식을 살펴보면, 액자식 구성으로 액자 밖의 이야기는 라쇼몽에서 자신들(나무꾼과 스님)이 관아에서 겪은 이야기를 나그네에게 이야기해준다. 그리고 액자 안의 이야기는 하나의 살인 사건에 대해 각기 다른 등장인물들의 관점으로 이야기를 하는 구성을 취한다. 그리고 영화는 역순행으로 진행되며, 액자 밖의 이야기는 현재 시간, 액자 안의 이야기는 과거를 말한다.
현재 시간에서 등장인물은 나무꾼, 스님, 나그네이다. 처음 나무꾼과 스님은 라쇼몽 계단에서 허무한 표정을 짓고 있다. 비를 피하기 위해 잠시 들린 나그네는 그 둘이 말하는 “관아에서 겪은 일이 제일 무섭다.” 소리를 듣고 그 이야기에 흥미가 생긴다. 여기서 나무꾼의 얼굴이 클로즈업 되면서 이야기는 과거로 가게 된다.
액자 안의 이야기는 관아에서 시작된다. 처음 나무꾼은 시체를 발견한 최초 목격자로서 관아로 불려와 말하기를, 나무를 하러 산에 가는 길에 여자 모자와 사무라이 모자, 새끼줄을 보았다고 언급한다. 화면이 전환되고 스님이 얼굴이 클로즈업 되면서 스님은 오후에 말을 타는 여자와 말을 이끄는 남편을 보았다고 말한다. 그 뒤 도적 다조마루가 붙잡혀 온다. 다조마루는 죽은 남편의 물건을 가지고 있었는데 수상함을 느낀 형사는 다조마루를 체포해 관아로 데리고 온 것이다.
말에서 달리다 떨어진 다조마루를 붙잡았다고 말하자 다조마루는 크게 웃으며 천하의 다조마루가 말에 떨어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계곡물을 잘못 먹어 복통이 나서 쓰러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다조마루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사흘 전 오후 지나가던 부부의 모습을 보는데 다조마루는 부인에게 첫 눈에 반하고 만다. 그는 여인을 뺏기 위해 남편을 속여 딴 곳으로 보낸 뒤, 여인을 꼬셔 함께 남편이 있는 곳으로 가는 도중 여자의 모자가 풀에 걸려 떨어지게 된다. 남편이 있는 곳까지 도착 했지만 남편이 보이지 않았고, 여인은 속았다는 것을 깨달은 뒤 격렬하게 저항한다. 하지만 다조마루는 여자를 차지하게 된다. 그때까지만 해도 다조마루는 남편을 죽일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갑자기 여인이 ‘둘 중 살아남은 사람을 따라가겠다.’라고 말하자 남편과 도적은 치열한 접전을 벌이며 싸우게 된다.
결국 다조마루가 승리하자 여인은 도망가고 자신 또한 달아난 것이라 말한다. 다음 증인으로 여인이 등장한다. 여인의 진술과 다조마루의 진술은 일치하지 않았다. 여인은 대 도적 다조마루 앞에서 저항조차 할 수 없었고 그저 남편이 보는 앞에서 겁탈을 당할 수 밖에 없었다며 슬피 운다. 다조마루가 여인을 떠나고 난 뒤 아내는 남편에게 서러움을 토로하지만 남편은 자신을 매정한 눈으로 쳐다 볼 뿐이었다. 그 눈빛에 두려움과 죄책감을 느낀 여자는 정신을 잃고, 다시 깨어나 보니 남편이 단도에 찔려 죽어있었다고 말한다. 남편의 시체에서 도망치면서 강물에 몸을 던지면서 자살을 기도했지만 빈번히 실패하였다고 슬피 울며 관아에 고한다.
다음 증인은 빙의 된 남편이 진술을 시작한다. 남편은 아내가 겁탈을 당하고 아내는 다조마루와 도망가려는 순간 다조마루에게 남편을 죽여달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들은 다조마루는 여인에게 정이 떨어져 여인을 밀어내고, 남편에게 ‘저 여인을 내가 죽일까 아니면 당신이 죽이겠냐’고 물어왔다. 그 말을 들은 남편은 도적을 용서했지만 여인은 이미 도망갔고 다조마루는 남편을 풀어준 뒤 사라진다. 한순간에 아내를 잃게된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져 자살을 했다고 진술한다.
마지막 목격자의 진술은 다조마루는 무릎을 꿇으면서 여인에게 같이 살자고 빌었지만 여인은 아무말 없이 남편의 새끼줄을 끊는다. 그 의미를 깨달은 다조마루는 남편과 싸우려고 하는데 남편이 저런 정조없는 여자는 필요없다며 쓰레기만도 못하다고 비난한다. 그 말을 들은 다조마루도 여인을 버리려고 하는데 갑자기 여인은 광기에 휩싸여 남자면 남자답게 칼로 싸워서 여자를 쟁취해야지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냐며 남자들을 조롱한다.
그 말을 들은 다조마루와 남편은 어쩔 수 없이 싸움을 시작하는데, 싸움이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울 정도로 허우적대대며 속된 말로 개싸움을 보여 준다. 나름대로 치열한 싸움 끝에 남편을 찔러 죽인 다조마루는 여인에게 다가가지만 여인은 도망친다. 힘이 풀린 다조마루는 여인을 잡지도 못하고 겨우 자신의 몸만 추스리고 도망친다.
이것이 이 이야기의 진실이다. 아내는 지조를 버리고 남편을 죽이려고 한 이기심을 숨기고 싶어했고, 도적 다조마루는 기세등등한 도적인척 굴었지만 여인에게 굴복하고 싸움도 약한 잔챙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싶어했다. 그리고 남편은 아내를 잃고 싸움에도 진 자신을 숨기기 위해 거짓말한다.
<라쇼몽>은 앞서 말했듯이 역순행 구성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각기 다른 진술로 빠르게 전환되는 이야기는 무엇이 진실인지 판단하기 어렵게 만든다. 이런 이야기 구조를 취함으로써 사람이 자신이 이기적인 본성을 숨기려는 메카니즘을 보여주는 장치로 작용된다.
다조마루는 자신이 최고의 도적이라는 권위를 지키고 싶어 했다. 여인은 가련하고 연약한 여성으로 보이기를 원했다. 남편은 요망한 아내에게 당하지만 남자 대 남자로서 정정당당하게 겨루고, 여인을 용서하는을 무사로 보이기를 원했다. 허나 이 모든 것은 거짓이었다.
사람은 자신이 못나게 비춰지는 걸 원하지 않는다. 당연하다. 사람들의 이기적인 모습을 보면서 자신은 이기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나무꾼이나, 스님처럼 세상은 아직 살만하다며, 이기적인 사람들도 교화가능하다고 말하는 인물들조차 결국은 이기적인 사람임을 영화는 보여준다. 나그네 또한 힘든 상황 속 아기의 보자기를 훔쳐가는 행동은 인간의 이기적 본성을 잘 드러낸다.
사람은 이기적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같은 사람을 믿지 못한다. 영화 마지막 갓난아기를 발견한 나무꾼은 사람이 사람을 믿을 수 없는 세상이지만 그는 무언가 결심한듯 아기를 데리고 집으로 간다. 이기적인 세상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렇지만 조금이라도 나은 세상이 되길 바라며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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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윅 4 - 시리즈 최고기록 경신한 어나더 레벨 액션영화의 복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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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영상은 영화홍보사의 VIP 셀럽 시사회를 초대받아 다녀온뒤 제작된 영상입니다.
죽을 위기에서 살아난 ‘존 윅’은 ‘최고 회의’를 쓰러트릴 방법을 찾아낸다. 비로소 완전한 자유의 희망을 보지만, NEW 빌런 ‘그라몽 후작’과 전 세계의 최강 연합은 ‘존 윅’의 오랜 친구까지 적으로 만들어 버리고, 새로운 위기에 놓인 ‘존 윅’은 최후의 반격을 준비하는데,, 레전드 액션 블록버스터 [존 윅]의 새로운 챕터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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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곳의 영화제를 다녀오며 느낀 점
#한예종졸업영화제 #한국영화아카데미졸업영화제 #단편영화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직접 인사 드리는 영화등대입니다. 오늘은 정말 오랜만에, 제 근황과 제가 다녀왔던 영화제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영화리뷰를 기대하셨던분들에게는 조금 죄송스럽지만, 근래에 제가 영화들을 보며, 영화제를 다녀오며 느껴진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이건 순전히 저 개인적인 생각이고, 저는 영화관계자가 아닌, 오로지 팬의 입장에서 느껴졌던 감정을 이야기해볼테니, 제가 하는 말을 전적으로 믿어달라는것도 객관적이다는것도 아니다는 점 말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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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새벽의 모든> 메인 예고편
"이 밤에 너를 만나게 되어 다행이야" 어두운 밤 서로의 빛이 되어준 그들 마츠무라 호쿠토 x 카미시라이시 모네 주연 [새벽의 모든] 메인 예고편 공개! 9월 18일 극장 대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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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독전 2> 메인 예고편
조진웅 X 차승원 X 한효주 X 오승훈 이 선생을 향한 독한 자들의 전쟁 승자는 누가 될 것 인가! 넷플릭스 영화 《독전 2》 11월 17일, 오직 넷플릭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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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이 가장 빛나는 시
영화 <패터슨>은 단조롭다면 단조롭고, 풍성하다면 풍성한 일주일을 담았다.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버스를 운전하고, 집에 돌아오면 아내가 그 날 분량의 창작 혼을 발휘해 무언가를 리폼하고 있고, 저녁에는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을 나가면서 동네 바에 들러 맥주를 한 잔 들이켜는 삶. 본인의 이름과 같은 패터슨이라는 도시에서 그렇게 매일 비슷하지만 다르게 살아가고 있는 패터슨의 일주일이다.
작은 진폭으로 일상은 매일 다르게 변주된다. 어떤 날은 아내가 컵케이크를 굽고, 어떤 날은 기타를 사고 싶다고 한다. 어떤 날은 버스를 운전하면서 허세를 부리는 남성들의 대화를 듣게 되고, 어떤 날은 이 마을에 유일한 아나키스트 십대 커플의 대화가 들려온다. 그리고 그 내내 패터슨은 끊임없이, 부지런히, 쉬지 않고 시를 캐낸다. 버스를 출발하기 전에, 점심시간에, 작은 노트를 들고 앉아서 계속 쓴다. 직장 동료가 아침마다 "물어본 김에 말이야" 하면서 매일 다르게 변주되는 일상에서 자질구레한 불평을 셀 때, 패터슨은 매일 다르게 반짝이는 무언가를 적확한 단어로 붙잡아 엮으며 시를 쓴다.
가끔 나도 시를 쓴다. 휴대폰 메모장에 [작은 시]라는 폴더가 있다. 다듬다 만 시, 언젠가 빚어내고 싶은 시어, 만족스럽게 완성한 시, 다시 읽다가 반쯤 지운 시, 같은 것들이 섞여 있다. 그것들을 모아 언젠가 공모전에 시를 내보려고 한 적이 있다. 최소 편수에 맞추기 위해 그동안 썼던 모든 시를 다 끌어모으다가 도저히 부족해 중2병 시절 썼던 노트까지 뒤진 적이 있었다. 그 시를 모두 인쇄해 침대 위에 펼쳐놓고, 이렇게도 저렇게도 묶어 보면서 순서를 배열하는 내내 나라는 인간의 지난 십여 년 변천사를, 어쩌면 나의 내장 같은 것을 펼쳐놓고 있는 기분이었다. 십수 년의 장구한 시간이 불과 몇십 장 되지 않는 종이로 흩어져 있었다.
그래서 매일 다른 시구를 적는 패터슨이 굉장히 다작(多作)한다는,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패터슨 자신에게는 그런 의식이 없다. 그는 공모전 같은 곳에 내기 위해 시를 정리하고 묶는 일도 하지 않았다. 아내는 그의 시를 자랑스러워하면서, 세상에 내놓자고 계속해서 그를 설득한다. 아내는 자기가 좋아하는 색깔과 패턴을 과감하게 집안 곳곳에 드러내고, 자신 있게 컵케이크를 만들어 마켓에 내놓으면서 두근두근 기대하는 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사람이다. 새로이 가슴 뛰는 일이 생기면 남편을 졸라 기타를 사고, 혼자 뚱겨 보면서 이미 포크 아티스트가 된 것처럼 행복해하는 사람이다.
남편의 시를 마음 다해 자랑스러워하고,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아내의 마음은 분명 아름답고 다정하다. 그리고 글은 분명 읽는 사람에게 닿아야 하니 사실 그의 말이 맞다. 패터슨이 그토록 좋아하는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 또한 그의 시를 소리쳐 드러냈기에 지금 패터슨의 손에 시집이 놓여있는 거니까.
그리고 그런 마음은 글을 쓰고 싶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 같다. 게다가 옛날과 달리 꼭 등단을 하거나 학력이 높거나 특이한 경험을 한 사람이 아니어도 책을 낼 수 있는 세상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등단보다 셀럽이 되는 쪽이 책을 내기엔 훨씬 빠르고 쉬울지도 모른다. 우후죽순처럼 책이, 작가가 솟아나는 세상. 그곳에서 우직하게 얼굴을 붉히며, 아직은 드러내지 않을 시를 쓰는 사람은 확실히 섬 같은 구석이 있다.
시집 한 권 내지 않았어도, 늘 자신을 버스 운전기사라고 소개해도 패터슨에게는 그런 섬 같은 시인의 면모가 보인다. 먼 훗 날 패터슨 시의 누군가가 (예를 들면 엄마와 언니를 기다리며 시를 쓰던 여자아이 같은 누군가가) 패터슨의 초기 시집을 들고 걸어 다닐 것만 같은, 지금 이 모습은 그 시대의 프리퀄 같다는 예감에 휩싸인다. 좋은 시는, 시인은 시간을 초월하므로 과거는 먼 미래를 닮아있는 것이다.
나는 그렇지 못해서, 조바심이 난다. 더 좋은 문장을, 더 좋은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은 가끔 길을 잃는다. 글을 향한 짝사랑은 그렇게 갈지자걸음을 걷는다. 정말 좋은 문장으로, 좋은 이야기로 누군가의 마음을 따뜻하게 데우고 싶어 하다가도, 어떨 때는 그냥 내 이름자 박힌 책과 작가라는 타이틀과 거기서 나오는 지적 허영심만 쏙쏙 취하고 싶은 것 같다. 세상에 인정받는 글을 보며 부러워한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것 같아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진다. 이 마음이 비단 시와 글에 대한 마음만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정답을 모르고 시험지를 받아 든 학생의 태도로 사는 게 문제라는 걸. 고쳐야지 마음 먹지만 그것조차 하나의 과제로만 부여하곤 하는 스스로를 잘 안다.
그러나 영화 말미에 일본인이 던진 말처럼, 때로는 여백이 상상의 여지를 주기도 하는 것이다. 어쩌면 패터슨이 일상 속에서 오롯이 자신의 시를 쓸 수 있는 지금, 아직 등단 전이고 원고 청탁이나 강연 요청이 들어오지 않고 그에 대한 비평이 들려오지 않는 지금이 그에게 가장 빛나는 시를 쓸 수 있는 때인지 모른다. 정말 그의 정수가 흘러나오는 건 지금일 것이다. 누군가의 초기 작품이란 가장 거친 날것으로 그가 드러나는 방식이니까. 가장 그다운 것들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는 시간이니까.
그 사실이 기묘하게 나에게 위안을 준다. 지금은 아직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시간이 아니라, 가장 나다운 것들을 이루어가는 시간이라는 점이. 패터슨이 긴 다리를 성큼성큼 옮기며, 그냥 좋은 사람 소리 듣는 평범한 이웃처럼 웃으며, 그런 날들을 담담하게 사는 모습을 바라보면 지금이 그의 가장 빛나는 시라는 생각이 드니까.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어느새 조바심을 내려놓고, 여백이 주는 여지를 즐길 수 있다.
패터슨이라는 캐릭터뿐 아니라 이 영화 자체가 나를 그렇게 가르친다. 개가 납치당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협박처럼 들리는 젊은이들의 경고 이후에도 패터슨은 여전히 개를 바 밖에 묶어놓는다. 조금 머뭇거리다 개에게 "납치당하지 마."라고 말해두는 게 전부다. 당연히 납치 예방에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 말을 들은 이후로 부부가 개를 잃어버리게 될까 계속 불안했다. 1장에서 총이 등장했다면 2장이나 3장에서는 반드시 쏴야 한다며? 어디서 체호프의 총 얘기는 주워듣는 바람에. 그러나 그건 나만의 불안이었다. 단편적인 지식은 나름의 쓸모가 있지만, '그래야 한다'라고 사람을 옭아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너무 많은 순간 누군가의 정의를 기다린다. 시란? 시는 이런 거야. 시는 어떤 순서로 묶어야 하지? 이런 규칙에 따라 묶어야 하는 거야. 누군가 그렇게 말해주기를 기다리는 바보짓을 자꾸만 반복한다. 이런 건 문예창작과에 갔으면 배웠으려나? 안 되면 조상 탓이라고, 툭하면 전공을 돌아보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해도 되나? 이렇게 하는 게 맞나? 누군가 맞다고, 혹은 그게 아니라 이렇게 해야 한다고 말해주길 기다린다.
시는 그런 마음 바깥에 있다. 그리고 거기에 시만 있는 것은 아니겠지.
어떻게 하면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평안한 마음으로 살 수 있을까. 모른다. 다만 지금 쓰는 대로, 나의 시들은 내가 묶고 싶은 대로, 그 느낌과 그 속도가 맞다. 잘 되지 않으면 잘 되지 않는 대로 담담하게 흘려보내는 것이 맞다. 마음이 또 불안해지거든 눈을 들어 패터슨을 보자. 그리고 조용히 작은 노트를 펴자. 다시 지금의 빛이 눈에 들어올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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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준호 다운 캐릭터가 조화를 이루다
봉준호 감독은 언제나 우리에게 묵직한 사회적 함의를 던지는 이야기꾼이다. <살인의 추억>에서는 당시 수사 시스템의 허점을 통해 실체 없는 공포와 무력함을 그려냈고, <마더>에서는 극단적 모성애로 인한 폭주를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특히 <기생충>에서는 계층 간 격차를 촘촘한 미장센과 인물 구도를 통해 묘사함으로써, 사회학을 전공한 감독 특유의 비판적 시선을 매섭게 드러냈다. 그 연장선 위에서 탄생한 신작 <미키17>은 우주라는 새로운 무대를 빌려, 우리의 현실 속 ‘계급’과 ‘정치’, 그리고 그 이면에 감춰진 인간의 본능을 극적으로 펼쳐 보인다.
영화는 우주 이주 프로그램에 참여한 미키(로버트 패틴슨)를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그는 자신이 죽을 때마다 기억과 인격을 복제해 다시 깨어나는 ‘익스펜더블 프로그램’의 담당자로 설정되어 있다. 처음에는 단순히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이 위험천만한 프로젝트에 지원했을 뿐이지만, 반복된 죽음과 새로운 깨달음을 통해 결국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의미를 찾아나가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것은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미키의 여정, 그의 연약함을 감싸는 나샤(나오미 애키)의 ‘사랑’, 그리고 이 모든 시스템을 악용하는 정치인 마셜(마크 러팔로)의 ‘욕심’이다.
[첫번째 감정] 미키의 두려움
첫 번째로 주목해야 할 감정은 미키가 품고 있는 ‘두려움’이다. 지구에서 엄청난 빚을 지고 사채업자에게 쫓기던 그는, 결국 우주로 도망치듯 떠나는 결정을 내린다. 죽임을 당할지 모른다는 공포감이 그를 몰아세웠고, 이런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실험체나 다름없는 ‘익스펜더블 프로그램’에 덜컥 지원한다. 이때 미키가 제대로 설명도 듣지 않고 서류에 사인을 하는 장면은, 그가 얼마나 궁지에 몰려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죽음이 두려워 도피한 곳이 하필이면 죽음을 반복적으로 경험해야 하는 구역이라는 점이 참 아이러니하다.
하지만 미키는 이내 ‘복제’를 통해 계속해서 부활하는 상황에 익숙해져 간다. 바이러스 테스트나 우주방사선 노출 실험처럼 잔인한 방식으로 소모되는 모습에서도, 그는 겉으로는 무감각해 보인다. 몸이 망가져 죽으면 또 다른 미키가 깨어나 동일한 기억을 잇기 때문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거의 사라진 것처럼 보이던 미키에게, ‘살아있음’ 자체는 더 이상 특별하지 않은 듯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이 영화가 던지는 핵심 질문이기도 하다. “기억이 이어진다고 해서, 그것이 곧 나의 존재 자체를 의미하는가?”
진짜 문제는 미키17이 ‘미키18’을 마주한 순간부터 시작된다. 미키18은 기억과 외형은 비슷하지만, 분명히 성향과 태도가 조금 달라 보이는 존재다. 그제야 미키17은 깨닫는다. 죽는 순간 자신이 ‘영원히 소멸’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복제 기술이 완벽하다 생각했으나, 결국 매번 다른 개체가 나타날 뿐 ‘이전의 나’와 100% 동일할 수는 없다는 걸 체감한다. “죽는 건 어떤 기분이야?”라는 질문을 영화 속 다른 인물들이 던질 때, 그것은 미키가 가진 두려움을 일깨우는 말이기도 하다. 살아있는 동안 답을 찾기 힘든 이 근원적 공포가, <미키17>에서 인간성을 탐색하는 중요한 장치로 작동한다.
[두번째 감정] 나샤의 사랑
두 번째 감정은 미키를 헌신적으로 지켜보는 나샤의 ‘사랑’이다. 여러 차례 죽고 깨어나는 사이에서, 미키의 곁을 지키는 건 오직 나샤뿐이다. 그녀는 “죽었을 때 어떤 기분이었냐”처럼 끔찍한 질문을 미키에게 묻지 않는다. 죽음의 상처를 굳이 후벼팔 필요 없음을, 이미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공감 능력은 미키가 가진 두려움을 일시적으로나마 잊게 만들어주고, 시종일관 곁에서 그를 안심시킨다. 영화 초반에는 이러한 관계가 단순히 ‘연약한 남성을 돌보는 강인한 여성’ 구도로 보일 수 있지만, 곧 나샤의 매력이 훨씬 깊고 다층적임이 드러난다.
특히 나샤는 ‘미키17’과 ‘미키18’이 동시에 존재하게 된 상황에서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다. 둘 다 같은 미키임에도, 성향은 조금씩 다른 두 사람을 동등하게 받아들이고 사랑을 나눈다. 이중적 존재가 생겨난 불안한 상태에서도, “네가 누구든 사랑하고 지켜주겠다”는 태도를 취하는 그녀의 모습은 감동적이다. 이는 단지 연애 감정의 차원을 넘어, 이주 행성이라는 미지의 세계에서 생겨난 새로운 ‘존재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한 일종의 실마리를 제시한다. 자신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존재를 배척하지 않고 소통으로 품어내는, 그런 태도가 이 영화에서 중요한 테마로 자리한다.
나샤가 특히 돋보이는 지점은, 이주 행성에서 만난 ‘벌레’ 같은 생명체를 지키려는 결심을 보여줄 때다. 우주정복이나 개척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자원을 갈취하려 드는 정치인 마셜 집단과 달리, 나샤는 ‘이 생명체들도 우리와 동등하게 존중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녀의 시선은 결국 ‘사랑’과 ‘공감’의 확장판이다. 미키를 받아들이듯, 우주 생명체와도 대화하며 공존하려 애쓰는 나샤의 모습에서 우리는 봉준호 감독 특유의 사회비판적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정치적·경제적 이익을 위해 무차별적으로 타인(혹은 타종)을 소모하는 행태’에 대한 날 선 비판인 셈이다.
[세번째 감정] 정치인 마셜의 욕심
세 번째 감정은 마셜(마크 러팔로)이 상징하는 ‘욕심’이다. 그는 지구에서 정치적 입지가 별로였기에, 우주 이주 프로젝트를 주도하면서 스스로 권력의 중심에 올라선다. 본질적으로 무능력하기에, 늘 아내(토니 콜렛)에게 모든 결정을 위임하는 모습이 반복해서 비춰진다. 사업가이자 정치인으로서 그는 한편으론 교묘하게 대중을 현혹하고, 다른 한편으론 미키 같은 존재를 마음껏 써먹으려 든다. 익스펜더블 프로그램은 이주 중 만날 수 있는 위험에서 유용하게 소모될, ‘하나쯤 없어져도 괜찮은 인력’이라는 발상으로 만들어진 제도다.
흥미로운 건, 마셜이라는 캐릭터를 보면 자연스레 한국의 정치 현실이 떠오른다는 점이다. 지지층을 어떻게든 확보하고, ‘뭔가를 해내는 척’ 무대만 만들어 놓은 뒤, 실제로는 구체적인 청사진이나 능력은 전혀 보여주지 못하는 지도자의 모습과 오버랩된다. 권위자에게 줄을 서고 충성을 다하는 이들은 마셜의 비위를 맞춰주며, 그의 온갖 추한 면을 뒤처리한다. 그러나 막상 이주한 행성에서 어떠한 미래를 그리고 있는지는 불투명하다. 듣기 좋은 연설만 반복하면서, 실제로는 자기 몫의 이득 챙기기에만 급급한 셈이다.
결국 미키와 그 곁을 지키는 나샤, 그리고 우연히 교류하게 된 외계 생명체가 보여주는 ‘공존과 연대’야말로 마셜의 몰락을 재촉하는 결정적인 힘이 된다. 봉준호 감독은 “작은 존재가 모여 더 큰 변화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여러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보여줬다. <기생충>이 그렇고 <설국열차>도 그랬다. 이번에도 무심코 버려졌던 미키와 외계의 작은 벌레들이 한데 어우러지는 ‘조화’가 정치적 거인의 한계를 드러낸다. 이는 우리 사회 속 ‘무능한 리더십’이 불러올 참담한 결과를 예고하는 현실 풍자처럼 보인다.
<미키17>이 담은 봉준호 월드
한편, 마셜과 미키17의 대립을 ‘권력자와 청년 노동자’의 대립으로 해석해볼 수도 있다. 마셜은 지구라는 기존 체제에서 기득권을 꽉 잡고 있던 권력자가 우주로 무대를 옮겨 권위를 재차 행사하는 인물이다. 반면, 빚 때문에 스스로 ‘소모품’ 역할을 떠맡은 미키17은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생존을 위해 기꺼이 위험한 임무를 감수하는 청년 노동자에 가깝다. 그들은 한 배를 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마셜에게 미키17은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부품’이다. 여기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착취 구조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고용시장과 권력자-피고용인의 위계 질서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 갈등이 극단으로 치달았을 때, 봉준호 감독은 어김없이 약자들의 연대와 소통을 통해 부조리를 깨부수는 희망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미키17>은 반복되는 죽음과 복제라는 소재를 통해, “나는 누구인가?”라는 존재론적 물음을 던진다. 이 질문은 동시대의 다양한 사회문제와 절묘하게 맞물린다. 흥미로운 건, 지구에서 이 우주로 떠난 이들은 대부분 생존의 위협이나 경제적 압박, 혹은 정치적 이유로 도피해 온 인물들이라는 점이다. 지구를 버리고 떠나온 자들의 새로운 세계에서, 과연 ‘더 나은 삶’을 꿈꿀 수 있을까? 결국 인간이란, 어디에서건 같은 고민과 탐욕, 그리고 소외 문제를 반복한다는 사실을 영화가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봉준호 감독은 결코 비관론으로 끝맺지 않는다. 미키와 나샤, 그리고 벌레라 불리는 생명체가 맺어가는 조화로운 관계는 ‘어울림의 가능성’을 분명하게 제시한다. 즉, 서로 다른 존재를 존중하고 대화를 시도하는 태도가 바로 진정한 해답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건넨다. 마셜처럼 권력을 쥔 자들이 제시하는 허황된 미래가 아닌, 작고 연약해 보이는 주체들이 서로를 받아들이고 협력함으로써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수 있음을 암시한다.
배우들의 연기 역시 주목할 만하다. 로버트 패틴슨은 겁에 질려 우주로 피난 온 미키의 불안하고 나약한 면을 능숙하게 표현하면서도, 복제체를 마주하는 장면에서는 절묘한 차이를 두어 미키17과 미키18을 입체적으로 연기한다. 나오미 애키의 나샤는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한 인물을 섬세하게 그려내, 영화 후반부 ‘복수의 미키’를 모두 감싸 안는 장면에서는 강렬한 감동을 이끌어낸다. 마크 러팔로와 토니 콜렛 커플의 괴이하고 익살스러운 정치 드라마 역시 봉준호 특유의 블랙코미디 감각을 살려내며, 관객들에게 씁쓸한 웃음을 선사한다.
연출 면에서 봉준호 감독은 우주라는 넓은 무대 안에 좁은 계급적 공간을 다시 구축해냈다. 탁월한 미장센과 대사, 그리고 캐릭터 간의 긴장감으로 <설국열차>와 비슷한 계급 구조를 만들면서도, 이번에는 스스로 우주로 나아가는 세계관을 선보인다. 행성 밖 생명체와의 교류라는 설정이 상징하는 것은, 결국 인류가 고집해왔던 ‘자기중심성’을 깨부수라는 요청처럼 보인다.
결국 <미키17>은 관객들에게 명쾌한 답을 내리기보다, 각자의 위치에서 질문을 던지도록 만든다. 나 자신의 존재 의미는 무엇인가?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과연 ‘죽음’ 자체인가, 아니면 ‘나라는 존재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실존적 공포인가? 그리고 사랑을 통해 우리는 서로를 어디까지 받아들일 수 있을까? 권력을 쥔 자들의 배신과 무능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이 모든 물음은 비단 우주 이주라는 극단적 상황에서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한국 사회의 현 주소이기도 하다.
이 영화를 추천하고 싶은 이유는 분명하다. 봉준호 감독 특유의 사회적 메시지,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 그리고 ‘우주판 기생충’이라 불릴 만한 신선한 분위기가 어우러져, 흥미로운 볼거리와 생각거리를 동시에 제공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행성에서 벌어지는 계급·정치·사랑의 스토리가 궁금하다면, 그리고 죽음과 복제라는 철학적 소재가 어떻게 감각적인 장르 영화로 변주되었는지 알고 싶다면, <미키17>을 꼭 극장에서 만나보길 바란다.
분명 그 안에서, 우리 모두가 ‘인간’으로서 마주해야 할 근원적 질문들이 당신을 사로잡을 것이다. 그리고 잠시나마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꿈꿔보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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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셋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안녕하세요, 씨네픽입니다! :)
6월 셋째 주도 잘 보내셨나요?요즘 많은 기대작들이 개봉을 하면서 영화관이 활기를 찾고 있는 것 같습니다.또한, 그만큼 치열한 경쟁이 될 것 같은데요.씨네픽과 함께하는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과 한 주 동안 진행했던 씨네픽 예측 이벤트인'주말 박스오피스 순위 예측'도 같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그럼 시작해 볼까요?...국내 주말 박스오피스
▶ 개봉과 동시에 1위를 차지한 <마녀 Part2>. 기존 한국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액션과 개성 넘치는 캐릭터로 인기를
끌었던 <마녀>의 후속작인만큼 많은 관람객이 찾은 것 같습니다.
주말 동안 (6월 17일~6월 19일) 관객 수 100만 9,280명을 동원했으며, 총 누적 관객 수는 145만 8,094명을 돌파하였습니다.| 줄거리
자윤’이 사라진 뒤, 정체불명의 집단의 무차별 습격으로 마녀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는 ‘아크’가 초토화된다.
그곳에서 홀로 살아남은 ‘소녀’는 생애 처음 세상 밖으로 발을 내딛고 우연히 만난 ‘경희’의 도움으로 농장에서 지내며 따뜻한 일상에 적응해간다.
한편, ‘소녀’가 망실되자 행방을 쫓는 책임자 ‘장’과 마녀 프로젝트의 창시자 ‘백총괄’의 지령을 받고 제거에 나선 본사 요원 ‘조현’,‘경희’의 농장 소유권을 노리는 조직의 보스 ‘용두’와 상해에서 온 의문의 4인방까지 각기 다른 목적을 지닌 세력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소녀’ 안에 숨겨진 본성이 깨어나는데…
2. <범죄도시2> (▼1)▶ <마녀 2>가 개봉하면서 한 단계 떨어진 <범죄도시2>. 다만, 주말 관객 수는 6월 둘째 주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19일 기준, <범죄도시2>의 예매율이 10.8%로 3위를 차지하면서, 6월 넷째 주도 <범죄도시2>가 여전히 순위를 유지할 것으로 보입니다.
주말 동안 (6월 17일~6월 19일) 관객 수 55만 977명을 동원했으며, 총 누적 관객 수는 1146만 303명을 돌파하였습니다.
3. <버즈 라이트이어> (NEW)▶ <토이스토리> 시리즈의 첫 번째 스핀 오프 작품이자, 크리스 에반스가 보이스로 참여하면서 화제를 모은 <버즈 라이트이어>.
전세계에 수많은 팬을 보유한 <토이 스토리> 시리즈의 버즈가 주인공인만큼 많은 관객이 관람한 것 같습니다.
주말 동안 (6월 17일~6월 19일) 관객 수 15만 8,731명을 동원했으며, 총 누적 관객 수는 20만 5,758명을 돌파하였습니다.
| 줄거리
미지의 행성에 고립된 인류를 탈출 시키기 위한 ‘버즈’와 그의 정예 부대 요원들의 운명을 건 미션 수행을 그린 작품
▶ 씨네픽의 이번 주 105회 예측 이벤트는 6월 3주 차 박스오피스(순위) 예측입니다. 한 주동안 많은 분들이 참여해주셨는데요.
씨네픽 참가자분들이 예측해주신 6월 3주 차 박스오피스 순위의 결과는 어땠는지 다 같이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씨네픽 유저 예측 결과
정답자 비율(%)
▶ 한 주 동안 많은 씨네픽 유저분들이 박스오피스 순위를 예측해 주셨는데요. 박스오피스 1위 순위를 가장 많은 분들이 맞혀주셨고,
그다음으로 2위, 3위 순으로 많이 맞춰주셨습니다. 67%의 사람이 <마녀 Part 2>의 1위를 예측 성공하였는데요. 2위와 3위의 경우 조금은 헷갈리는 분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참여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씨네픽은 다음 주에 더 재밌고 유익한 제107회 씨네픽 이벤트로 인사드리겠습니다! :)
4. <브로커> (▼2)▶ <브로커>의 경우 화려한 라인업과 거장 감독의 만남으로 화제를 모은 것에 비해 조금은 아쉬운 성적이 나오고 있는데요.
기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와 조금은 다른 결의 영화를 보여줘, 기존 감독의 영화를 기대했던 사람들에겐 아쉬운 영화가 된 것 같습니다.
주말 동안 (6월 17일~6월 19일) 관객 수 15만 8,429명을 동원했으며, 총 누적 관객 수는 110만 7,465명을 돌파하였습니다.
5. <쥬라기 월드: 도미니언> (▼2)▶ 기대작들의 개봉으로 두 단계 떨어진 <쥬라기 월드: 도미니언>.
이번 주에 <탑건: 매버릭>이 개봉하기에 6월 넷째 주에는 TOP 5 안에 진입하지 못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주말 동안 (6월 17일~6월 19일) 관객 수 8만 1,074명을 동원했으며, 총 누적 관객 수는 276만 7,627명을 돌파하였습니다.
북미 주말 박스 오피스
▶ 북미 박스오피스 1위는 6월 둘째 주와 동일하게 <Jurassic World Dominion>이 차지했습니다.
6월 셋째 주 박스오피스 역시 지난 번 박스오피스 TOP 5 순위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는데요.
<Lightyear>가 개봉하면서 <Jurassic World Dominion>를 제외한 모든 영화의 순위가 한 단계씩 하락했습니다.
주말 동안(6월 17일~6월 19일) <Jurassic World Dominion>의 매출액은 58,660,000 (한화 약 759억)의매출액을 달성했으며, 총 누적 매출액은 249,796,690 (한화 약 3,234억)입니다.<북미 박스오피스 TOP 5> (2022년 6월 17일 ~ 2022년 6월 19일)1. <쥬라기 월드: 도미니언> 5,866만 달러 (누적 2억 4,979만 달러)2. <버즈 라이트이어> 5,100만 달러 (누적 5,100만 달러)3. <탑건: 매버릭> 4,400만 달러 (누적 4억 6,616만 달러)4.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 420만 달러 (누적 4억 508만 달러)5. <밥스버거: 더 무비> 110만 달러 (누적 2,976만 달러)...씨네픽의 6월 셋째 주 박스오피스 분석 콘텐츠는 여기까지입니다.이번 주도 건강한 한 주가 되기를 바라며씨네픽은 다음 주 월요일, 이 시간에 또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로 찾아뵙겠습니다.감사합니다!-!씨네랩 에디터 Hiz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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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을 빼앗긴 두 남자의 벌거벗은 몸
*이 글은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쓴 글입니다.
얼마 전 한국토지주택공사 LH의 직원 비리로 온 나라가 시끄러웠다. 그들이 업무 과정에서 취득한 정보를 활용해 투기놀음에 나섰고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는 뉴스 때문이었다. ‘내 집 마련’이 중산층임을 입증하는 표지가 되어 모두가 목숨 거는 시대에, 정작 이 꿈을 실현시켜줘야 할 공공기관의 직원이 자기 잇속을 챙기고 있었다는 데 모두가 분노한 사건이었다.
영화 〈사상〉은 이제는 사람들이 더 이상 '분노하지 않는' LH의 또 다른 문제를 다룬다. 〈사상〉에서, LH는 원주민의 주거권·생존권을 위협하는 폭력의 주체다. 부산 사상에 벤처타워가 들어오게 되었다. 보상을 받고 마을을 떠난 사람도 있지만 삶의 공간을 빼앗길 수 없다며 버티는 사람도 있다. 〈사상〉은 각각 자본과 공권력을 대표하는 건설회사·LH와 맞서 오래도록 이어지다 끝내 패배해 버리고만 싸움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영화다.
영화 〈사상〉 스틸컷
주인공은 두 명의 중장년 남성이다. 먼저 박성희. 그는 감독의 아버지다. 새로 살 집을 알아보러 다니는 그의 삶은 고단해 보인다. 산업 재해로 검지를 잃은 왼손, 보호대 착용이 필요한 허리, 육체노동으로 거칠어진 발. 그리고 우울. "이 나이 되도록 집 하나 못 산 건 내 팔자려니 싶다",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나 생각하니 눈물이 팍 쏟아졌다"는 그의 말은 LH가 늙고 약해진 남성을 집이라는 안식처로부터 몰아내는 무던함과 대비되어 무력감을 자아낸다. 또 다른 주인공 최수영은 굴삭기 기사이자 운동가·활동가다. 그는 사상에서의 싸움을 강제이주의 역사 속에 맥락화한다. 그럼으로써 집·주거권을 체계적으로 박탈해 온 국가·자본의 폭력을 고발한다.
요컨대 〈사상〉의 두 남성 주인공은 모두 무언가를 ‘잃은’ 존재다. 집, 주거권, 삶 그리고 마을 공동체. 이들이 상실한 것이 과연 그리 아름답기만 한 것이었을지에 관한 의문은 잠시 제쳐놓고, 영화가 자본·공권력이라는 체계적 폭력을 재현하는 방식을 살펴보자.
영화 〈사상〉 스틸컷
〈사상〉은 자본과 공권력의 얼굴을 명료하게 그리지 않는다/못한다. 자본·공권력의 악행을 가능케 하는 메커니즘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않는다는 소리다. 자본과 공권력은 그저 ‘나쁜 대상’으로 말해지고 보여질 뿐이다. 체제로서의 폭력이 작동하는 방식을 이토록 느슨하게 조명한 〈사상〉의 연출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거대한 폭력에 대한 적확한 분석을 결여한 채 그저 끝없이 괴로워할 뿐인 감독을 냉소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고민이 필요할까? 그럼으로써 우리는 어떻게 감독이 세상을 느끼고 바라보는 방식에 비판적으로 개입하여 함께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고민이 필요하다.
첫 번째는 감독이 ‘남성’이라는 점에 주목해 보는 것이다. 자본·공권력이 휘두르는 권력을 비판하는 그는 정작 두 주인공과 자기 자신이 기대고 있는 젠더 권력에는 다소 둔감해 보인다. 〈사상〉을 보는 내내 성차별적인 장면, 발화가 불쑥 튀어나오진 않을까 불안했다. 영화가 '남성적 방식'으로 재현되는 '남성 서사'였기 때문이었다. 박성희의 가족이 모여 제사를 지낼 때 정작 제사 음식을 준비한 여성(그녀가 박성희 가족과 어떤 관계인지는 알 수 없다)은 함께 절하지 않는 장면에서 알 수 있듯, 영화가 낭만적 공동체로 재현하는 '사상에서의 삶'은 자본·공권력과는 다른 또 다른 권력(가부장제)이 작동하는 공간이었을 수도 있다.
감독이 내레이션으로 ‘봉분 같은 아파트’와 ‘밀양 할매들과 함께한 식사’를 대비시킬 때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차갑고 무뚝뚝한 건축물을 따뜻하고 정겨운 할매의 품이라는 젠더화된 비유와 대비시킨다. 삭막한 과학/문명과 여성이 제공하는 포근함의 대비는 오랜 역사를 지닌 성차별적 구도다. 현실의 척박함을 고발하기 위해 밀양 할매들을 호명하는 〈사상〉의 발화는 조금 더 섬세했어야 했다.
영화 〈사상〉 스틸컷
하지만 젠더 권력에 대한 감독의 무관심, 둔감함만으로 〈사상〉을 평가할 순 없다. 〈사상〉이 자본·공권력을 치밀하게 묘파하지 ‘않음으로써/못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중요한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사상〉의 '결점'은 영화가 어떤 계보에서 작업되어 왔는지를 살펴봄으로써 만회될 수 있다. 감독의 내레이션이 말해 주듯, 〈사상〉은 4대강 사업, 밀양 송전탑을 기록한 작업의 연장이다. 또한 최수영이 말하듯, 사상에서의 싸움은 1970년대의 강제이주에 대한 저항의 계보에 놓여 있기도 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자본·공권력에 대한 〈사상〉의 두루뭉술한 묘사는 구체적 경험의 지위를 획득한다. 감독과 사상의 주민에게 자본·공권력이 폭력임은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가 없는 너무도 자명한 경험적 사실이다. 즉, 자본·공권력에 대한 〈사상〉의 느슨한 묘사는 영화의 결함이 아닌 영화의 핵심 메시지다. 왜 ‘우리’에게 자명한 것이 ‘당신’들에겐 그렇지 않느냐는 성찰적 물음으로써 권력에 대한 허술한 묘사가 기능하는 것이다.
〈사상〉은 그 어떤 다른 해석도 허락하지 않은 채, 완고한 태도로 자본과 공권력을 불신한다. 공사장에서 발생한 진동으로 무너진 집, 기울어진 벽을 지탱하는 나무 받침대, 밝은 표정의 정치인의 달콤한 약속과 그 약속에서 배제된 자들 등등. 〈사상〉의 이미지들은 마치 자신이 그 자체로 폭력의 증거이기에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다는 듯 스스로를 쓸쓸히 전시한다.
영화 〈사상〉 스틸컷
그리고 두 남자의 벌거벗은 몸. 영화는 박성희와 최수영이 벌거벗은 채로 씻는 모습을 꽤 오랫동안 비춘다. 질병, 장애로 인해 느리게 움직이는 이들의 취약한 몸은 자본·공권력 앞에서 벌거벗겨진 생명의 표상일 수 있다. 또는 시종일관 진지한 남성의 목소리로 자본·공권력을 비난하던 영화가 남성의 몸을 취약성과 연결짓는 이 급작스러운 균열로부터, 고난 속에서도 여전히 살아 숨쉬는 삶의 리듬이 새겨진 장소로써 벌거벗은 몸을 독해할 수도 있다.
용산참사 이후 10여 년. 이제 아무도 강제철거, 원주민을 내쫓는 재개발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투쟁’이라는 말에 빨간딱지가 붙었던 때는 차라리 나았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빨갱이’의 목소리는 시끄럽게 '들리기'라도 하니 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변화에 너무 빠르게 적응했다. 우리를 분노케 했던 문제의식은 몰아치는 신자유주의 앞에서 증발해 버렸고, 여전히 ‘투쟁’을 외치는 사람은 낡은 구닥다리가 되었다.
이토록 빠르게 도달한 파국 앞에서 벌거벗은 두 남자의 몸*은 우리의 기억을 일깨워 〈사상〉의 문제의식에 동참케 할 수 있을까? 4대강, 밀양, 사상으로 이어지는 투쟁은 사라지지 않고 자본·공권력을 비판하는 동력으로 남을 수 있을까? “원주민을 내쫓고 세워진 미래”에 빼앗긴 자들의 삶을 다시 기입할 수 있을까? 그리하여 우리는 과잉 남성 자의식으로 자본·공권력에 대한 ‘피해의식’에 빠져 세상을 삐딱하게 바라보는 〈사상〉의 감독과 연대할 수 있을까? 〈사상〉은 해소되지 않은 여러 질문을 남기는 영화다.
*영화의 음악이 흥미롭다. 영화에는 중간중간 분절되고 끊어지며 뒤로 감는 듯한 독특한 음악이 나온다. 자본과 결탁한 국가폭력에 짓눌려 어긋나 버린 두 남자의 삶 리듬을 형상화한 것일 수도 있고, 우리 사회를 변주할 새로운 리듬일 수도 있는 이 음악은 '벌거벗은 두 남자의 몸'과 같은 이중적 질문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