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4-08-14 11:36:08
공드리 감독의 세상만사 솔루션 4
<공드리의 솔루션북> 개봉!
공드리 감독이 제시하는 세상만사 솔루션을 소개합니다.
기발한 상상력으로세계가 인정한 천재 감독과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감독을 동시에 해내는 주인공 ‘마크’를 통해
미셸 공드리의 창작 노트를 엿볼 수 있는 작품
<공드리의 솔루션북>이 오늘 개봉했습니다
극장에서 만나요!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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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퍼석한 사막 위에 찍어낸, 묵직한 첫 발자국
듄 (DUNE, 2021)
개봉일 : 2021.10.20. (한국 기준)
감독 : 드니 빌뇌브
출연 : 티모시 샬라메, 레베카 퍼거슨, 오스카 아이삭, 제이슨 모모아, 조슈 브롤린, 하비에르 바르뎀, 젠데이아 콜먼, 스텔란 스카스가드
퍼석한 사막 위에 찍어낸, 묵직한 첫 발자국
<듄>이 개봉하기 전, 이런 카피가 정말 많이 보였다. “반지의 제왕을 이을 시리즈의 탄생”이라고. <반지의 제왕>을 이을 작품? 대체 어떤 세계관을 갖고, 어떤 영화를 만들어냈길래 이렇게 야심만만한 카피를 내놓을 수 있는 걸까?
애정 하는 배우 티모시 샬라메의 출연과 드니 빌뇌브 감독이 작품을 연출한다는 소식, 그리고 영화의 원작 소설 <듄>이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SF의 오래된 뿌리이자 대작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와 동시에 티모시 샬라메의 해변 스틸컷 한 장을 보는 순간 이 영화를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어떤 비주얼의 영화가 나올지 쉽게 상상 되지 않았다.
<듄>이 개봉 전부터 폭발적인 관심을 끌며, 용광로처럼 펄펄 끓는 티켓 파워를 보여주는 바람에 아이맥스로 예매하기도 참 어려웠다. 꼭 큰 화면, 아이맥스로 보라는 말에 “이 영화의 1회차는 무조건 아이맥스다!”하고 뛰어들었는데 모두가 같은 생각이었나 보다. 이 영화는 아이맥스 또는 돌비관에서 봐야 한다고 말이다.
여차여차 아주 어렵게 개봉 당일에 만난 <듄>은 말 그대로 나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었다. 방대한 원작의 세계관의 아주 일부에 해당하는 분량이었지만 그럼에도 그토록 압도적일 수가 없었다.
이번에 개봉한 Part1에서는 묵직한 사건과 반전 같은 것 없이 꽤나 친절하게 세계관을 설명하고, 이제 막 주인공이 새로운 길을 찾으려는 찰나의 순간을 담아냈다. 오프닝을 이렇게 엄청나게 찍어버리면 다음 편은 어떤 영화가 될지, 벌써부터 심장이 떨린다.
긴 호흡으로 나뉘는 호불호
SF 시리즈라는 타이틀 때문인지 <스타워즈> 시리즈와 비슷한 느낌을 기대할 수 있으나 두 작품은 결이 조금 다르다. 우선 주 배경이 되는 환경이 드넓은 우주와 삭막한 사막 행성으로 다소 차이가 있고, 스타워즈가 화려한 색감을 뽐내는 우주 활극이 주가 되는 느낌이라면, 듄은 삭막한 우주 행성에서 살아가는 인간들 사이에 여전히 존재하는 위계질서와 지배욕. 그리고 두려움에 맞서 길을 찾는 주인공의 성장 담을 지켜보는 게 주가 되는 느낌이다. 물론 <듄>이라는 영화도 시각적으로도 상당히 훌륭한 영화긴 하지만 말이다.
재빠르고 역동적인 SF를 선호하거나, <듄>에 그것을 기대했다면 영화가 주는 러닝타임의 압박감과 느긋함에 쉽게 눌려버릴지도 모르겠다. 이 부분에서 호불호가 좀 많이 나뉘는 것 같다.
드니 빌뇌브 감독님의 전작을 보며 그의 영화는 호흡이 다소 긴 편이라고 느꼈던 순간들이 있는데, <듄> 또한 드니 빌뇌브 감독 특유의 긴 호흡이 제대로 담긴 영화라는 느낌을 받았다.
개인적으론 지루할 틈 없이 본, 마음을 뒤흔드는 대작이라고 생각했지만! 드니 빌뇌브 감독의 호흡이 취향에 맞지 않거나, 하나의 사건을 중심으로 1편이 깔끔히 마무리되는 걸 원했던 관객이라면 충분히 지루하다, 진행된 것 없이 이야기가 끊긴다. 같은 불호평을 이야기할만하다고 생각한다.
웅장한 세계관의 시작
하지만 이 이야기는 제목처럼 Part.1. 챠니의 대사처럼 이야기는 “이제 시작일뿐”이다. 영화를 통해 이 웅장한 세계관을 어떻게 담아낼지 기대된다.
연료로 쓰이는 귀한 재료 스파이스와 명예, 부. 그리고 아라키스 행성을 두고 이어지는 아트레이데스, 하코덴 가문. 프레멘들의 대립 속에서 가문과 자신을 위해 두려움에 맞서야 하는 소년 폴의 성장과, 복잡한 이해관계로 얽힌 세계관을 어떻게 풀어갈 것인지. 그리고 폴은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이며 그가 정말 운명을 바꿀 선택받은 자인지. 이 세계를 관통하는 답이 과연 존재하는 것인지. Part.1을 보고 궁금한 것이 정말 많아졌다.
사실 <듄> Part.1이 개봉하기 전, 원작을 꼭 읽어보리라 다짐했는데 1편의 두께에 압도되는 바람에 개봉 전에 원작을 읽는데 실패했다. 하지만 Part.1을 보고 나니 꼭 원작을 완독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편이 나오기 전에 꼭 원작을 완독하리라!
드니 빌뇌브 감독님은 2편에선 더 발전된 액션들이 많이 나올 것이라 언급했는데, Part.1에서 다소 아쉽게 느껴졌던 ‘액션의 부재’가 보완된, 시작 그 이상의 작품이라니. 기대감에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이런 영화는 최소 2-3편까지 찍어놓고 순차 개봉해야 하는, 그런 법이라도 만들어야 하는 게 아닐지.
작품 속 세계, 새로운 행성에 빠져들다.
퍼석한 사막의 모래와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내 날카롭게 식어버리는 공기. 휘몰아치는 모래의 입체적인 질감과 모든 장면들에 역동적인 숨을 불어넣는 한스짐머의 음악들. <듄>은 시각과 청각을 완벽히 빼앗으며 영화 속 인물들이 서있는 10191년, 아라키스 행성으로 관객들을 이끈다. 극장에서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경험, 새로운 세계와의 황홀한 만남이 이 영화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 시리즈는 드니 빌뇌브 감독의 역작이 될 것이며 티모시 샬라메의 <콜미 바이 유어 네임>을 이길 대표작이 될것이라 믿어의심치 않는다. 마치 다니엘 레드클리프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해리포터를 가장 먼저 떠올리듯, 시즌 2,3을 거친 후 티모시 샬라메하면 듄이 먼저 떠오를 때가 올 거라 생각한다.
SF 대작인 <스타워즈> 시리즈를 처음부터 제날짜에 맞춰 극장에서 관람한 세대들을 부러워했었는데, 나도 이제 같이 나이 먹어갈 SF 시리즈가 생겼다는 것에 벅찰 만큼 기쁜 순간이다. 나중에 “나는 듄 1편부터 개봉 당일 아이맥스로 봤다 이거야~” 하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순간이 오겠지?
듄 시놉시스
10191년, 아트레이데스 가문의 후계자인 폴(티모시 샬라메)은 시공을 초월한 존재이자 전 우주를 구원할 예지된 자의 운명을 타고났다. 그리고 어떤 계시처럼 매일 꿈에서 아라키스 행성에 있는 한 여인을 만난다. 모래언덕을 뜻하는 '듄'이라 불리는 아라키스는 물 한 방울 없는 사막이지만 우주에서 가장 비싼 물질인 신성한 환각제 스파이스의 유일한 생산지로 이를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 치열하다. 황제의 명령으로 폴과 아트레이데스 가문은 죽음이 기다리는 아라키스로 향하는데… 위대한 자는 부름에 응답한다, 두려움에 맞서라, 이것은 위대한 시작이다.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아트레이데스 가문과 하코덴 가문
아라키스 행성을 오래 지배하던 하코덴 가문은 모래 위 스파이스를 쓸어 담으며 아라키스의 원주민인 프레멘들을 억압한다. 프레멘들은 그들을 잔혹한 외지인이라 칭했으며, 하코덴 가문은 아라키스 행성이 가진 스파이스에 눈이 멀어 배려와 양심 따위는 멀리 집어던지고 탐욕스레 스파이스를 긁어낸다.
그러던 어느 날, 계략을 세운 황제가 아트레이데스 가문에게 아라키스의 관리를 맡기게 된다. 소식을 들은 하코덴 가문은 우리가 다 일궈 논, 우리의 행성이라며 이를 갈다 제국과 협력해 아트레이데스 가문을 공격한다.
아트레이데스와 하코덴은 사촌 사이지만 지향하는 바가 좀 다르다. 하코덴은 아라키스 행성을 완전히 지배하는 것이 목적이고, 아트레이데스는 프레멘들과 협력해 그들의 힘을 빌리는 것이 목적이다. 결국 자신의 이익을 위한 선택인 것은 맞지만, 이익을 위해 협력을 부탁하는 것과 무조건적인 지배를 원하는 건 꽤 큰 차이가 있다.
하코덴 가문과 달리 아트레이데스 가문은 프레멘과의 소통을 시도하고, 스파이스 수확기 안의 인부를 구하려 보호막 장치를 내버리는 결단을 내린다. 던컨은 프레멘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그들을 뛰어난 전사라 칭하기도 한다.
아트레이데스 가문은 제국과 하코덴 가문이 원했던 지배와 피지배층의 관계가 아닌 서로를 존중하는, 평등한 위치의 관계를 지향한다. 폴은 이러한 아버지의 뜻을 따라 프레멘들의 힘을 빌리기 위해 그들의 마을로 합류한다.
Part1.에선 프레멘, 제국+하코넨 , 아트레이데스의 삼각구도였다면, 다음 시리즈는 프레멘+아트레이데스, 제국+하코넨(추가적인 대가문들?)의 구도가 되지 않을까?
레토 공작이 남긴 것
새로운 체계를 정비해 가던 중, 첩자와 하코덴 가문의 습격을 받은 아트레이데스 가문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만다. 레토 공작은 하코덴 남작을 앞에 두고 비장하게 죽음을 맞이하며 말한다.
“나 여기 있노라. 여기 남겠노라.”
그는 아트레이데스의 인장 반지를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우여곡절 끝에 사막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한 폴과 어머니 제시카는 레토 공작이 남긴 반지를 보며 그의 죽음을 알게 된다. 기세를 몰아 하코덴 가문은 다시 아라키스를 점령하기 시작했고, 이제 하코덴 가문에게서 이 행성을 구할 희망은 이 두 사람뿐이다.
폴은 실제 전투 경험이 전무한 상태다. 그는 기초적인 군사훈련을 받았고, 필름을 통해 익힌 풍부한 생존 지식을 갖고 있지만, 아직 한 번도 사람을 찔러본 적 없으며, 미지의 세계에 대한 궁금증과 두려움을 동시에 안고 있는 어린 소년이다.
하지만 폴은 아버지의 죽음과 동시에 아트레이데스 가문과 아라키스 행성의 운명을 짊어지게 된다. “내가 과연 선택받은 자일까?” 반문하고 있을 틈이 없다. 폴은 두려움에 맞서 아버지가 원했던 바른길을 찾고, 자신이 힘없는 어린애가 아님을 증명해야 한다. 아주 작은 사막 쥐 한 마리도 자신만의 길을 찾아 이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고 있는데, 이 소년이라고 못할 것이 있겠는가.
“두려움은 소멸을 가져오는 작은 죽음이다.
두려움이 지나가면 마음의 눈으로 그 길을 보리라.
그 길을 지나면 나만 남으리.”
프레멘 마을을 찾아 떠나는 길, 폴은 폭풍을 피하지 않고, 비행체의 방향을 바꿔 폭풍 속으로 들어간다. 두려움을 피하기보단 직접 부딪히고 경험해야 두려움을 이겨내고 진정한 나를 찾을 수 있다는 제시카의 오래된 가르침을 직접 행하는 첫 순간이다.
“제 길은 사막에 있어요.”
폴은 가문의 반지를 끼고, 아버지가 원했던 이 행성의 힘을 찾기 위해 사막에 남기로 결정한다. 길이라곤 보이지 않고, 날카로운 모래폭풍만이 불어오고 있지만 그 사이 어딘가엔 아버지가, 우리가 바라던 답이 있을 것이라 믿으면서.
과연 폴은 하코덴 가문과 제국의 검은 속내를 쓸어내고, 닥쳐올 전쟁을 막을 수 있을까? 나의 편의와 이득을 위해 싸우고, 지배하고. 끝없는 이기심을 뿜어내는 존재들을 이겨내고 말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예리하게 변하는 폴의 눈빛에서 짙은 결연함이 느껴진다. 이 소년의 이야기는 이제 시작일뿐이다. “내가 선택받은 자가 맞을까?” 두려워하고 고민할 시간이 없다. 두려움에 사로잡히기 전에 두려움과 그것을 만들어내는 존재들에 맞서 싸워야 한다. 두려움에 묻혀버린 진짜 나의 길과 답을 찾기 위해서.
친절히 세계관을 설명하는데 꽤나 긴 시간을 할애한 파트다 보니 영화 자체의 긴장감이나 속도감이 강하게 느껴지진 않았지만, 나에겐 충분히 차고 넘치는 영화였다. 오래 기다린 보람이 있다. 진심으로.. 다음 편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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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비우스 / Morbius, 2020
영화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의 흥행은 말하지 않아도 다들 아실 테니, 해당 작품이 '어떤 청사진을 펼쳤는지?'를 말해보겠습니다.
결과부터 말하면, "멀티버스(다중우주)"를 인정하며 3명의 스파이더맨을 비롯해 악당들까지 종합선물세트로 내놓은 결과물은 제작진과 관객들 모두 만족스러웠습니다.
이제는 관객들의 바램과 제작진들의 의도가 '얼마나 일치하는지와 상충되는지?'에 걱정과 기대가 공존하는데요.
그런 점에서 첫 타자로 나서는 <모비우스>는 어땠는지? - 영화의 감상을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희귀 질환을 앓고 있던 "모비우스"는 자신을 비롯해 똑같은 질환에 걸린 이들의 치료제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흡혈박쥐와 인간의 DNA 결합에 성공하고 자신을 대상으로 실험에 나서는데요.
결과는 성공하나 이 과정에서 끊임없는 사람의 피를 갈구하는 것을 알게 되는데...왜, 박쥐 중에서 "배트맨"만 있는 줄 알아?
1. 면접관의 느낌이 이런 건가?
솔직히, 영화 <모비우스>는 본 작품보다는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를 비롯한 "SSU(소니 스파이더맨 유니버스)"를 구성하는 하나의 퍼즐로 더 관심이 갔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하나의 영화로 끝나지 않을게 관객들이나 제작진 모두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모비우스>를 어디에 초점을 두고서 봐야 우리는 좀 더 재밌고 만족스럽게 극장을 나갈 수 있을까요?그래서, 니 이름이 뭐니?
영화 <모비우스>는 104분의 분량의 상당 부분을 자기소개에 할애합니다.
"박쥐"라는 점에서 경쟁사의 "배트맨"이 연상되나 <모비우스>는 처음이라 관객들과는 처음이라서 이런 부분이 꼭꼭 필요한데요.
하지만, 아쉽게도 이미 다름 영화들이 해왔기에 관객들에게는 호기심보다는 피로함부터 앞서니 나름의 차별화는 보여줘야만 합니다.
그렇게, 선보이는 "으스스한 분위기"에서 보여주는 폭주한 상태에서의 액션은 나름 시선을 이끄는데 충분했습니다.2. 여러 갈래로 퍼지는 이야기들
하지만, 이후 각 캐릭터들의 동기에 있어 살짝의 아쉬움이 엿보입니다.
먼저, "모비우스"는 능력을 얻고 치료가 되지만 이후 일정 시간마다 피를 마셔야 하는 부작용에 부득이한 피해에 고민을 합니다.
이에 관객들도 납득할 수 있는 데에는 자신과 비슷한 질환을 가진 아이들을 치료하는 이야기를 사전에 제공했기에 그런 그의 고민에 이해할 수 있는 것이죠.
하지만, 그의 친구 "마일로"에는 "모비우스"와는 다르게 생략된 설명이 많아 보였습니다.그래도, 악당이고 친구인데...
극중. "마일로" 역시, 똑같은 질환을 앓고 있는 인물이나 "모비우스"가 만든 혈청을 맞으며 그와 똑같은 능력을 얻게 되는 캐릭터로 대척점에 서있습니다.
그렇다면, "마일로"는 '왜 이를 뽐내는지?'를 설명해야 하는데요. (앞에서 '자신과 비슷한 질환을 가진 아이들을 치료하는 이야기'처럼 말이죠)
그러나, 영화를 보면 그의 행동에는 납득이 가지 않는 설명만을 합니다. - 아버지와 같은 "니콜스 박사"에게는 "차별적 사랑"에 이야기하지만, 전혀 모르는 바입니다.
여렸을 적 에피소드를 살펴보면, 편지를 다른 아이들에게 빼앗겨 얻어맞는 이야기의 주인공은 "모비우스"입니다. (이를 "마일로"로만 바꿨어도...)
그러면서, "모비우스"와의 힘을 합치자는 이야기와 그의 연인 "밴 크로포드 박사"와의 사랑까지 중구난방으로 뻗치는 느낌이죠.3. 결국, 쿠키 2개에 마음이 녹는다.
이렇게, "마일로"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에는 이를 맡은 "맷 스미스"의 연기가 주인공 "모비우스"를 연기한 "자레드 레토"도 만들지 못한 스팟을 만들거든요.
바로, <유주얼 서스펙트, 1995>의 "카이저 소제"가 점점 똑바로 걸어나가는 장면을 그대로 보여주거든요.
물론, 앞서 말한 해당 능력에 따른 부작용까지의 설명이 된 상태라서 다른 의미로의 섬뜩함마저 불러오니 더더욱 설명에 아쉬움이 생깁니다.
이렇게, 본다면 영화 <모비우스>는 아쉬움 투성의 영화로 남겨지겠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나쁘지만은 않습니다.이래서, 화날 때 쿠키가 좋다는 거야!
이번 영화를 연출한 '다니엘 에스피노사' 감독의 이름만을 들어봐선 모르겠지만, 그가 연출해온 <세이프 하우스, 2012>와 <라이프, 2017>를 봤다면 그의 스타일이 뭔지는 잘 아실 겁니다.
특출난 작품보다는 공식대로 무난하게 만드는 연출자입니다.
그런 점에서 <모비우스>는 특별히, 모나지도 않는 작품으로 충분히 바라볼만한 작품입니다.
다만, 전작이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인 만큼 그 모나지도 않는 평범함이 살짝 아쉽게 다가오지만요.※ 쿠키 영상은 2개로 "엔딩 크레딧"이 나오기 전에 다 나옵니다.
※ 앞서 말한 "SSU(소니 스파이더맨 유니버스)"의 "스파이더맨"이 "꼭, 톰 홀랜드만은 아니겠다"는 예측이 됩니다. (아니면,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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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영화의 '존'이 다른 '직쏘' 보다 더 마음에 들어
생명 연장의 꿈
이 영화의 주인공은 ‘직쏘’ 존 크레이머(토빈 벨)이다. 1편에서의 살인극이 있고 시간이 좀 지났다. 존에게 문제가 생겼다. 바로 몸 상태다. 사실 존은 며칠 전에 암 진단을 받았다. 흔들리는 존. 병세를 치료할 길이 없다는 생각에 좌절한다. 좌절은 곧 분노로 바뀐다. 항암 치료를 받던 도중 환자들의 물건을 훔치는 간호사를 목격한 존. 이 간호사를 납치해 살인 게임에 초대할까 싶었지만 간호사가 물건을 다시 돌려놓자 ‘하지 말아야지’ 싶었다. 이런 존에게 뜻밖의 행운이 찾아든다. 바로 존의 암을 치료할 수 있는 의사가 있다는 것이다. ‘페데르손 프로젝트’? 홀린 듯 프로젝트로 향하는 존. 실제로 암을 치유한 사람이 있다는 말을 믿었다. 돈을 보내는 존. 입금은 곧 초대장을 부른다. 항암치료에 나선 존. 하지만 이 치료는 뭔가 이상하다. 이내 존의 분노가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다.
불필요한 것들을 최소화
이 영화의 강점이라고 볼 수 있는 것 중 첫 번째는 불필요한 것들은 최소화했다는 점이다. 가장 먼저 이 영화의 플롯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쏘우’ 시리즈는 오랫동안 혹평을 들어왔다. 이유는 간단하다. 영화 내적인 것을 신경 쓰는 게 아닌 잔혹한 살인 쇼에 집중해 왔기 때문이다. 시리즈의 팬이 아닌 관객들은 영화의 의미를 찾기 어려운 것이다. 아무래도 잔혹한 모습을 즐기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 하지만 <쏘우 X>는 시리즈가 가진 전형성을 탈피하기 위해 인물들의 복잡한 관계는 다 쳐냈다. 대신 직쏘를 중심으로 인물들이 행동하게끔 서사를 간편하게 재구성했다. 이 덕분에 명분 없는 살인 게임을 굳이 보지 않아도 된다. 또 이 영화에 등장하는 직쏘의 상대역은 시리즈가 변화구를 던질 수 있는 토대를 맞이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억지로 직쏘의 인간관계를 서서히 넓히는 것에서 시리즈의 한계를 정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쏘우’ 시리즈의 전통을 잃은 것은 아니다. 본작에서도 역시 눈 똑바로 뜨고 보기엔 어려운 장면들이 몇 있다. 이런 고어 묘사를 보기 어려워하는 분들은 눈 꽉 감고 극장에 가시길 바란다. 이렇게 <쏘우 X>는 전작들의 핵심은 바꿨지만 시리즈를 좋아하는 이유는 어느 정도 남겼다.
공간 활용
이 영화의 강점으로 뽑을 수 있는 부분은 공간이다. 대표적으로 2부에서의 공간 구성이 흥미롭다. 원래 호러라는 장르 자체가 공간을 잘 활용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를 이행한 것이 <쏘우> 1편이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이끌고, 그 사이에 누워있는 인물 셋의 모습이 영화를 상징하는 구도 중 하나다. <쏘우 X> 본 작은 이를 성실하게 구현한다. 어떤 점에서? 바로 인물의 리액션에 집중한 것이 큰 효과가 있었다. 서로의 상황을 각자 볼 수밖에 없다는 점을 활용해서 장르적인 쾌감을 높였다. 그리고 방 안에 있는 온갖 지형지물들을 활용한 흔적도 보인다. 이게 시리즈가 10편씩이나 나왔기 때문에 이제 살인 트랩이 진부해질 때도 됐다. 영화는 이것을 의식한 듯 인물의 밀도로 호러 분위기를 조성한다. 이는 올해 9월 개봉했던 <잠>과는 대조되는 측면이 있다. <잠>은 집이라는 공간 특성을 활용했다. 윗집과 아랫집의 대비, 이 방과 저 방에 살고 있는 캐릭터들을 영화 안으로 가져온 것이다. 하지만 <쏘우 X>는 이런 ‘여러 군데 공간 활용하기’라는 방식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딱 한 곳만 메인 무대로 삼았다. 발상의 전환으로 다른 호러 영화와의 차이점을 둔 것이다.
호불호가 갈릴 듯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갈 것 같은 요소는 주인공 직쏘의 설정이다. 원래 직쏘는 궤변을 늘어놓는 캐릭터였다. 왜? 직쏘는 시리즈 내내 ‘너희들은 삶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며 사람들을 처형한다. 문제는 이 세계관에 등장하는 그 어떤 사람도 직쏘에게 살인 게임을 시킨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심지어 직쏘가 이상한 논리로 민간인을 죽였던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7편에서 이에 대해 비판하는 여론이 대다수였다. 영화가 ‘게임과 별 상관없는 사람은 죽이지 않는다’는 기본 룰을 어긴 것이다. 이 이유로 직쏘라는 인물의 감정선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 단점은 치명적이다. ‘쏘우’ 시리즈가 무엇인가. 바로 직쏘가 벌이는 살인 게임이 핵심인 시리즈 아니었나? 관객이 직쏘에게 감정이입을 못하게 되면 영화 자체에 흥미가 떨어진다. 지금 스크린 앞에서 보이는 신체절단 대환장 살인파티가 아무 의미 없다면 이 끔찍한 광경을 굳이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평단의 혹평이 당연한 것이다.
이 영화는 시리즈물의 공식화를 피하기 위해 과감한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인다. 바로 직쏘에게 인간적인 면모를 부여한 것이다. 시놉시스에서도 읽을 수 있는 부분인데, 직쏘가 무려 사기를 당했다. 영화는 이에 따라 직쏘 입장에서 여러 감정선을 추가했다. 이 감정선에 쉽게 따라갈 수 있기 때문에 살인 게임에 당위성이 생긴다. 영화가 친절하게 이야기에 몰입까지 시켜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영화 후반부에서도 빛을 발한다. 원래 이 ‘쏘우’ 시리즈 공통점 중 하나는 강박적인 반전이었다. ‘알고 보니 누가 누구 제자였대!’식의 플롯 전복하기가 ‘쏘우’ 시리즈에서 전통처럼 이어진 것이다. 본작 <쏘우 X>에서는 다행히 ‘누가 누구 제자였대’ 식의 전개가 나오지 않는다. 전작들에 비해 전적으로 현실적인 전개가 이어지는데, 인물에게 깊은 감정선을 넣은 선택이 이야기에 개성을 부여한 좋은 선택이 된 것이다.
하지만 영화의 이 승부수 때문에 주인공 직쏘의 캐릭터에 대해 아쉽다고 느낄 관객 분들도 적지 않아 보인다. <쏘우 X>은 시리즈물이다. 전작의 전통을 승계하지 않으면 사실 시리즈의 팬 입장에서 차기작을 기다린 보람이 없다. 직쏘가 정의의 사도인 척을 하는 거지 실제로 그런 인물은 아니기 때문에 거리감을 느낄 관객도 있을 법하다. 어떤 관객들은 이를 단점으로 느끼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사람 죽이는 것 말고 이야기 내적인 것 집중한 탓에 우리가 아는 ‘쏘우’ 시리즈의 쾌감과는 좀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한 이질감도 느껴진다. 이 부분은 직쏘의 조수 캐릭터에게 특히 더 강하다. 하지만 글쓴이는 이 두 인물을 이렇게 설정해서 한 편의 이야기를 만들었다는 점이 이 영화의 미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두 인물에게 이런 면모가 없었더라면 진부한 살인 게임을 또 보는 꼴이기 때문이다.
여전한 것들
시리즈에서 승부수를 둔 영화다 하더라도 분명히 단점은 있다. 우선 후반부 전개다. 사실 이야기의 흐름 자체가 이 후반부를 위해 종속됐다고 해도 봐도 무방하다. 대표적으로 직쏘가 초반부에 만나는 사람들은 후반부를 대놓고 암시한다. 직쏘의 관점에서 이 인물들이 어떤 의미인지를 더 설득시켰다면, 감정선이 깊었더라면 후반부의 전개가 더 입체적이지 않았을까 싶다. 또 이 인물의 서사를 아주 조금만 더 줘도 큰 문제가 없었다. 서사가 부족하니까 이 사람의 존재가 이야기 내내 에 전제조건처럼 깔리는 것이 체감이 잘 된다. ‘이렇게 쉽게?’ 싶은 것이다. 또 후반부로 넘어가서 이 인물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도 간단하다. 소위 말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적인 측면이 어느 정도는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면 앞에서 쓴 바와 마찬가지로 이 인물의 내면을 보여주는 몇 장면이 있어도 큰 문제는 없었을 듯싶다. 애매하게 ‘예상 못한 반전’을 추구하는 것보다 빌런의 악함을 강조해서 두 인물의 대결구도를 강조했어도 재밌었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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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미니즘의 시선으로 바라본 한 여성의 성장기
* <바비>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바비 (2023)
감독: 그레타 거윅
출연: 마고 로비, 라이언 고슬링, 아메리카 페레라, 케이트 맥키넌, 엠마 맥키, 시우 리무 등
장르: 드라마, 판타지, 코미디
상영시간: 114분
개봉일: 2023.07.19
전 세계 여자아이들의 클래식 장난감, '바비 인형'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설령 어릴 적 바비 인형을 갖고 논 적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그 이름을 모를 수는 없다. 우리는 여전히 날씬하고, 수려한 외모를 가진 여성을 두고 만들어진지 60년도 넘은 이 오래된 인형의 이름을 붙이고 있으니까. 모두가 바비 인형의 존재를 알고 있다고는 하지만, 바비에 어떤 이야기가 담겼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그저 마르고 예쁜 백인 금발 여성을 모델로 한 스테레오타입 인형 정도로만 여겨져 왔을 뿐 '바비'로 어떤 이야기를 쓸 수 있을지 궁금함을 가진 사람은 아마 많지 않았을 것이다. 미디어 속 '바비'는 언제나 예쁘기만 하면 되는, 그런 존재로만 비쳤으니까.
<레이디 버드>와 <작은 아씨들>의 성공으로 할리우드 차세대 여성 감독으로 자리매김한 '그레타 거윅' 감독. 그는 예쁜 인형의 전형으로 소비된 '바비'에 생명력을 불어넣기로 결정했다. 주연과 제작을 함께 맡은 배우 '마고 로비'와 함께 '바비 프로젝트'를 이끌며 내세운 캐치프레이즈는 'Barbie is everything'. 사실 '바비인형'은 다양한 직업을 가진 젊은 여성을 모델 삼아 수많은 종류의 인형을 생산해 전 세계 여자아이들의 꿈과 희망이 되어주었던 존재다. 여기서 아이디어를 착안한 '그레타 거윅' 감독은 기상천외한 상상력을 불어넣어 핑크빛 낭만으로 가득 찬 '바비랜드'를 구현했다. 유년 시절의 추억이 깃든 바비의 드림 하우스를 현실 공간에 완벽하게 재현했다는 것만으로 작품에 대한 기대감을 불러일으키긴 충분했다.
'바비랜드'를 소개하는 극의 초반부는 아기자기하고 황홀한 핑크빛 세상 그 자체다. 주인공 '바비(마고 로비)'를 비롯해 극에 등장한 수많은 '바비'와 '켄'들은 어딘가 핀트가 조금 나간 듯한 행동들로 놀이 속에 등장하는 장난감들처럼 그려지고, 실체 없는 모션만으로 이뤄진 행동들은 이곳이 현실과 분리된 판타지적 공간임을 인식하게 만든다. 처음부터 본격적인 이야기를 풀어내기보다는 '바비랜드'의 곳곳을 스크린에 최대한 예쁘게 펼쳐 놓아 시각적인 재미를 주는 정도에 그친다. 그럼에도 지루하거나 껍데기뿐인 장면이라는 감상을 유발하진 않는다. '바비'들의 흥겨운 댄스파티 같은 장면들은 세상이 평화롭고 완벽할 것이라고 여기는 이들의 단편적이고 순수한 가치관을 보여주기에 아주 적절했다. 매일 그런 바비들처럼 산다면... 아마 '전형적 바비'처럼 죽음을 생각하게 되는 일은 절대 없을 터이다.
하지만 동화는 딱 거기까지다. '바비랜드'를 벗어나 현실 세계로 넘어온 '바비'는 세상이 마냥 아름답지 않은 곳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자신만의 단꿈 속에서 비로소 깨어난다. '바비'가 마주한 인간 세상의 첫인상은 무언가 뒤틀린 듯 거꾸로 돌아가고 있는 곳이나 마찬가지였다. '바비랜드'에서 여성은 말 그대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존재. 대통령도, 대법관도, 물리학자도, 의사도 모두 여성인 '바비'였고, 남성인 '켄'은 그저 '켄'일뿐이었다. 현실 세계 역시 '바비'가 살고 있는 이상향과 크게 다를 바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그는 눈앞에 펼쳐진 낯선 광경에 당황을 금치 못한다. 여성차별을 해결하고, 페미니즘을 완벽하게 실현하는데 자신이 일조했다는 착각 속에 살았던 '바비'는 친구라 여겼던 여학생들에게 잔인한(?) 팩트 폭격을 맞고 충격에 휩싸이기까지 한다.
'바비'의 각성을 기점으로 극의 템포와 장르는 급격히 뒤바뀐다. 앞서 '바비'와 '켄'을 통해 남녀의 전복된 성 역할을 보여준 '바비랜드' 시퀀스만으로 본작이 페미니즘 성향을 띤 영화라는 걸 예감하긴 어렵지 않다. 주체적인 여성들과 그들에게 눈길조차 못 받는 엑스트라 남자들로 이뤄진 세계를 배경으로 한 작품은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보편성을 탈피한 영화이니까. 하지만 '바비'가 현실 세계로 넘어온 직후부터 <바비>는 페미니즘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이며 페미니즘 자체가 스토리의 핵심임을 또렷이 각인시킨다. 모든 여성들이 편견으로부터 자유롭게 살고, 자신의 꿈을 맘껏 펼칠 수 있던 '바비랜드'와 달리 현실은 '바비'를 성적 대상화하는 남성들의 시선이 가득하고, 그들은 숨 쉬듯 추파를 던지며 당연하다는 듯 존중 없는 태도를 보인다. '바비랜드'에서 여성들이 차지했던 직업군들은 모두 남성들의 손아귀에 있고, 하물며 '바비인형'을 만든 마텔사의 임원들도 온통 남자뿐이다. 하지만 이들이 여성보다 뛰어나다는 이유로 고위직을 하나씩 차지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특히 마텔 사의 임원들은 도망친 '바비' 한 명을 붙잡지 못할 정도로 무능하고 멍청하게 그려지기까지 한다.
흥미로운 건 '켄'의 태도 변화다. 언제나 '바비' 옆에서 조역에 머무를 것만 같았던 그는 현실 세계에서 처음으로 접한 가부장제에 신선한 매력을 느끼고, 주인공이 되려는 욕망을 표출한다. 급기야 그는 '바비랜드'를 마초적 정신과 구시대적 성차별이 만연한 '켄덤'으로 바꿔버리기까지 한다. 앞서 주체적인 여성들의 표상으로 여겨졌던 '바비'들이 덜떨어진 '켄'의 옆에서 커피를 타거나 치어리딩이나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개탄스러움에 이마를 퍽 짚게 된다. 특히 가부장제에 취한 '켄'들의 모습은 한심스럽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같잖은 이유로 서열 싸움을 벌이는 뮤지컬 신은 실소를 유발할 정도다. 이에 맞서는 '바비'들의 활약은 남성 중심 사회에 가려진 여성들의 기지와 단결을 보여주는 대목이며 대립이 아닌 화합으로 뭉친 여성들은 영리한 전략으로 '바비랜드'를 원상복구시키는 데 성공한다. 결국 '바비'는 시대착오적인 가부장제에 사로잡힌 남성들을 비판하는 동시에 허울뿐인 남성 중심 사회의 비효용성, 그리고 스스로가 성차별주의자가 아니라고 착각하는 이들을 적나라하게 풍자한다. 특히 후반부 '글로리아(아메리카 페레라)'의 긴 독백 신은 페미니즘 교과서라 느껴질 정도로 극의 메시지를 강하게 주입하는 장면이었다.
그렇다면 '바비'는 남성은 원래 멍청하고, 여성은 우월하며 뛰어난 여성들이 이끄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주장하는 영화일까. 각본상 그렇게 보일 만한 지점이 있긴 하지만 본작이 '성별 갈라치기'나 '여성우월주의'를 주장하는 작품이라는 데 동의하지는 않는다. '켄'의 허점이 남성을 비판하는 요소로 활용되었지만, '바비' 역시 마냥 완벽한 존재로 그려지지 않는다. '켄'이 '바비'에 대한 존중을 잊은 채 '켄덤'을 건설하려 했던 것처럼 과거 '바비'들 역시 '켄'의 기분 따위는 생각하지 않았다. 또한 완벽하고 단단해 보였던 '바비'들의 논리는 '켄'의 허점 투성이인 가부장제가 들어서자마자 쉽게 무너졌고, '전형적 바비'는 누군가 구하러 올 때까지 가만히 주저앉아 있겠다는 말을 할 정도로 수동적인 면을 지녔기도 하다. 특히 한 나라 안에서 권력 신장을 위해 성별 다툼을 벌이는 모습은 왠지 모르게 한국의 현 사회와도 많이 닮았다. 급진적인 전개이긴 하지만 '바비'와 '켄'은 결국 화해를 한다. 투표를 통해 '바비랜드'로 다시 복구한 대신 '켄'의 역할도 존중할 것이라는 게 결론. 이를 통해 <바비>는 여성이 세계를 지배해야 한다는 극단적인 페미니즘을 주장하는 게 아닌 여성을 억압하고, 괴롭혀 온 사회의 편견을 무너뜨리고, 모두가 화합하며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가자는 이야기를 주창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마지막으로 '마고 로비'가 연기한 '전형적 바비'의 서사를 살펴보면, 이는 곧 여성들의 성장 과정을 상징하는 듯하다. 아무런 변화 없이 평화로운 나날들이 매일 같이 반복되기만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극 초반부의 '바비'는 아직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시선을 가진 어린 여자아이의 모습 같다. 현실 세계에 나와 비로소 세상은 온갖 위험과 문제들, 불합리와 불평등이 숨 쉬듯 벌어지는 곳이란 걸 깨달은 '바비'는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조금씩 알아가는 십 대들을 닮았다. 그리고 '바비'의 발명가 '루스 핸들러'를 만나 자아에 대한 성찰과 고민을 토로하는 장면은 마치 사회에 막 진출하려는 성인들의 내적 혼란을 대변하는 듯하다. 인간으로 살 것인지, 인형으로 살 것인지 깊은 고민과 함께 불안을 느끼는 '바비', '내가 그래도 될까'라며 확신을 못 가지는 '바비'. 그런 '바비'에게 마음 가는 대로 하라며 용기를 북돋아 주는 '루스'. 캐릭터에 갇혀 주어진 역할대로만 살려고 했던 '바비'는 끝내 여성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줄 수 있는 주체적인 인물로 성장했다. '바비'들이 '바비랜드'를 '켄'으로부터 되찾는 과정보다 '전형적 바비'로 보여준 한 여성의 성장기가 더 깊은 울림을 남겼다.
- 씨네랩 크리에이터 popofil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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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니, 태어난 이상 너희들은 다 '가여운 것들'
<가여운 것들>의 강력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벨라 벡스터(엠마 스톤)이다. 한 여자가 벼랑 끝에 서 있다. 아니 배 위에 있다. 삶의 희망을 잃은 여자. 그 배 아래로 뛰어내린다. 여자를 다시 살린 건 독거노인 과학자 갓윈 백스터(윌렘 대포)다. 얼굴이 기괴한 과학자 갓윈. 외모를 보고 성격을 판단하면 안 된다. 하지만 갓윈 박사는 어림없다. 성격마저 괴팍한 갓윈. 그에게 같이 사는 여자가 있다고 하면 누가 믿을까? 하지만 그건 진실이다. 다시 태어난 여자 벨라 벡스터는 뭔가 특별하다.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벨라. 벨라는 마치 남자 어린아이처럼 행동하고 있다. 그건 죽어가는 여자의 뇌에 그녀가 임신 중이었던 아이의 뇌를 이식해서 살려냈기 때문이다. 벨라는 아이의 뇌로 다시 태어났다. 이 말은 즉슨 벨라가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왕성하다는 의미와 통한다. 이런 벨라에게 남자 한 명이 접근한다. 남자는 갓윈의 제자 맥스(레미 유세프)다. 벨라를 짝사랑하는 남자 맥스. 소심하게 고백하지만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게 된다. 바로 소심하게 청혼을 건넸던 벨라와 바람둥이 변호사 던컨(마크 러팔로)이 여행을 떠난다는 소식이었다. 눈 뜨고 코 베인 맥스. 카메라는 벨라와 함께 리스본 찍고 여기저기 모험담을 펼친다.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기괴함이라는 정서에 있어 도가 튼 아티스트다. 스타일적으로 '뭔가 있어 보이기 위해'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 위해 일반적으로 '란티모스'하면 떠오르는 장면부터 이야기해 보자. 굳이 마이너 한 예술영화의 세계까지 파지 않더라도 <킬링 디어>에서 배리 키오건이 파스타를 먹는 장면 정도는 오며 가며 사람들이 봤을 클립이다. 키오건이 훌륭한 연기자라는 사실에는 여지가 없다. 연기를 잘하니까 임팩트를 남기는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할리우드를 주의 깊게 본 영화팬들이라면 '란티모스에게 이 장면만 있지 않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기괴함의 정점은 란티모스가 국제적으로 처음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영화 <송곳니>에서 확인할 수 있다. <송곳니>를 보면 신체 노출부터 시작해서 폭력묘사까지 이 세상 기괴함은 다 가져다 놨다. 갑자기 이 감독에서 봤던 그로테스크한 장면들이 더 떠오른다. <더 랍스터>에서 갑자기 총을 쏴서 직원을 죽이는 장면, <킬링 디어>에서 초반 심장 수술 장면, 니콜 키드먼이 맡은 안나가 길쭉하게 뻗어있는 모습이 그렇다. 이렇게 시각적으로 임팩트를 주는 방법을 아는 감독이기 때문에 그의 영화가 더 강렬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이면에 깔려있는 무언가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파스타를 징그럽게 먹는 것이나 <송곳니>에서의 가족에 대한 비유 같은 것들은 일상적인 것에서 조금 비틀어서 '인위적인 것'을 만든다는 것에 있다. 우리가 쉽게 다들 알고 있는 '불쾌한 골짜기'를 영화의 동력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최고작이라고 볼 수 있는 <킬링 디어>와 <더 랍스터>에서 영화 이야기의 형식과도 이어진다. <킬링 디어>에서 영화는 어떤 대상을 관객에게 이해시키려는 생각 자체가 없는 듯하다. 그냥 알고도 당하라는, 전지적인 목적을 가지고 인물들과 관객들을 괴롭힌다. 실제로 카메라는 마치 누군가를 위에서 지켜보는 것처럼 부감 숏(천장에서 바닥으로) 찍는 것 같고 사운드는 관객을 내내 불편하게 만든다. 그냥 일반적인 카메라와 사운드로도 이 영화가 가진 인간의 굴레를 묘사할 수 있는데 내내 이야기를 인위적으로 비튼다. <더 랍스터>도 사랑에 실패하면 동물이 된다는 설정은 곧 '사랑이 억지로 되는 일인가'라는 의구심을 들게 만든다. 이것 역시 인위적으로 이야기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영화가 인간이 어떻게 사랑에 빠질까?를 보여주기 위한 설정이다. '억지로' '근거를 들어서'사랑에 빠지지 않는 인간의 단면을 잘라서 제시하는 것이다. 이렇게 란티모스의 필모그래피를 종합해 보면 그는 인위적이라는 속성을 시각적으로, 또 플롯의 핵심으로, 장면 연출로 소화하는 아티스트라고 볼 수 있다. 이 <가여운 것들>은 그 모든 것들이 고농도로 함유되어 있는 영화다.
가령 이 영화의 미술에 대한 부분이 그렇다. 이 영화의 세트장과 조명, 의상 같은 시각적 요소들은 란티모스가 인위적으로 만든 것들이다. 영화는 란티모스가 구축한 거푸집 아래에 이야기를 전개한다. 영화의 핵심을 전달하기 위해 응당 당연하게 골라야만 했던 선택지다. 그럼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무엇일까 따지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글쓴이는 이 영화가 다루고 싶어 하는 핵심을 '시스템'이라고 본다. 영화는 벨라와 그녀를 둘러싼 세상을 다룬 것이다. 기득권이 지배하는 세상을 다루고 싶어 하는 영화가 그 안의 세상을 통제하지 못하면 나사가 빠졌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반대측면에서 질서를 깨는 인물들의 모습을 스크린 안으로 갖고 오기에도 용이할 것이다. 이 인위성에 대한 부분은 배우들이 연기하는 방식과도 이어진다. 글쓴이는 영화를 보면서 후반부를 제외하고 다들 인형의 집처럼 뚝딱거린다고 느꼈다. 이것은 전적으로 의도가 있다. 누군가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세상을 비판하는데 배우들이 자연스럽게 일상적인 문법으로 연기한다면 그 고지식함과 완고함이 체감이 안 될 수도 있다. 세계에 대한 인물의 대응을 자연스러움으로 표현해서 이질감을 키우는 선택지를 둔 것이다. 공간의 측면에서도 이 영화가 기괴한 동화로 연출한 이유가 분명하다. 왜 이 영화는 일종의 성에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을까? 영화가 이 영화의 세계를 좌지우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요르고스 란티모스가 연기의 톤으로 이 영화의 세계를 좌지우지한다는 걸 보여준 것처럼 공간과 미술로도 이 영화의 핵심을 드러낸 것이다. 이렇게 '세상을 움직이는 절대자의 속성이 전적으로 드러난다'는 측면에서 '뇌'가 직접적으로 등장하고, 섹스신이 적나라한 것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인간의 실존을 드러내는 두 소재라는 것 역시 중요하지만 굳이 보여주지 않아도 되는 것들을 인위적으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영화의 핵심에 닿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뇌와 섹스라는 소재는 이야기를 전개하는 데 있어 큰 차이가 느껴지는 부분이 아니다. 왜? '뇌'를 이식한 인간의 실험을 통해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은 새로운 생명체다. 매춘 그러니까 성관계를 통해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은 역시 생명체다. 마찬가지로 갓윈 박사의 실험체는 그 나름의 시스템을 만드는데 일조한다. 새로운 생명의 잉태는 내가 어떤 세상에 태어날지 고를 수 없다는 점에서 시스템에 일조하는 역할이 될 수도 있다. 두 소재가 이야기의 맥락에서 공통점을 가지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이 영화의 벨라는 두 인위적인 행위를 직접 겪는 개체이기도 하다. 영화도 이 구분선을 일부러 흐린 것이다.
영화의 기술적인 부분에서도 시스템에 대해 표현한 부분이 보인다. 이 영화의 사운드 중 몇 음악은 거의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시그니처라고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이런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서 광각렌즈를 활용한 촬영방식도 이 영화의 기괴하고 독특한 에너지만을 강조시키기 위한 것은 아니다. 시스템에 대항하는 영화가 기존의 영화 만들기 관습에 편승해서 제작된다면 뭔가 모순된 것이 아닐까? 하지만 촬영이나 사운드보다 이 영화에서 더 중요하게 시스템을 강조하는 것은 편집인 것 같다. 이 영화에서 섹스신이 들어가는 방식은 뭔가 이상하다. 구체적으로 흑백에서 컬러로 넘어갈 때 맥스가 "나는 벨라가 무사하길 바란다"라고 말하는 장면 바로 다음으로 덩컨과 벨라의 성관계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은 영화 나름대로 블랙코미디를 구사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다른 장면들과 비교했을 때 위 두 가지 사운드와 촬영을 활용한 것과 공통점이 있다고 봤다. 전형적인 연출 방식을 거부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후 전개에서 영화는 편집을 통해 섹스신을 느닷없이 보여주거나, "뜨거운 뜀박질"이 대사에 전면으로 나오더라도 보여주지 않는다. 기억나는 장면이 벨라가 어디 잠깐 나갔다가 들어온 후의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벨라가 덩컨에게 "우리 뜨거운 뜀박질을 해요!"라고 말한다. 그럼 이 <가여운 것들>이 이전에 수도 없는 섹스신을 보여줬기 때문에 이번에도 나오지 않을까? 싶지만 영화는 벨라가 신체를 노출하는 모습만 보여주고 이 부분을 생략해 버린다(편집에 대한 부분은 아니지만 이후 벨라가 매춘을 하는 장면에서도 벨라가 노숙자에게 "갑자기 들어가면 안 된다"식의 대사를 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 이것은 영화가 이야기의 리듬을 섹스신을 활용해 변화를 준 것으로 읽을 수 있다. 기존 영화들이 유지해 온 흐름을 사운드와 편집, 촬영으로 부정한 것이다.
이 인위적으로 무언가를 거부하는 형태는 곧 영화의 플롯과도 이어진다. 영화는 일부러 두 명의 흑인 캐릭터를 등장시켰다. 왜? 이야기에서 벨라의 내적 성장을 이끄는 인물들이기도 하지만 이 인물들이 보여주는 행보도 영화에서 어떤 것들을 반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첫째. 흑인 남자는 옆에 앉아있는 백인 아줌마에게 "섹스를 안 한 지 20년 됐다니 딱하네요"라고 대놓고 면박을 준다. 글쓴이는 이 대사가 가스라이팅이라고 느꼈다. 하지만 이후 이 흑인 남성 캐릭터가 하는 대사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코멘트를 보고 이 영화가 다루고 싶어 하는 틀이 넓다는 걸 느꼈다. 영화가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처럼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다루며 정체성에 대해 다루지만 사실 이 틀을 이루는 것이 얼마나 허상인가를 보여주는 건지를 암시하는 설정이라고 봤다. 이것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서 인물과 인물이 영화 안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가? 와도 관련이 있다. 영화를 보면서 생각난 건 '니체'에 대한 짧은 지식이었다. 니체가 인간의 몸을 조명했고 영화가 섹스를 다룸에도 이유가 있다. 하지만 가장 궁극적인 이유는 벨라 / 세상을 구분 짓는 구분선이 니체의 개체론이 연상됐기 때문이다. 이 세상을 구성하는 데 있어 정말 중요한 건 그 세계를 이루는 요소들이 내가 알고 있는 니체의 개체론이다. '신은 죽었다'라는 문장이 여기서 근거하지 않나? 다시 영화로 돌아와서 이 <가여운 것들>이 다루는 흑인 남성 캐릭터는 사실상 벨라의 세계를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타락에 대해 비판하면서 '섹스 20년 동안 못한 여성을 비웃는'것이 인간이고 이 세상인 것이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흑인 여성 캐릭터도 이 니체의 사상 하에 있는 캐릭터라고 생각했다. 흑인 여성 캐릭터는 벨라에게 공감한다. 바로 정서적인 유대를 나누는 듯하다. 하지만 이 인물 역시 벨라에게 성적 행동을 한다. 단순히 이 흑인 여성 캐릭터가 무슨 목적으로 벨라에게 접근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덩컨이나 매춘 노숙자들도 벨라와 성관계를 맺었다는 점에서 흑인 여성과 노숙자는 동격에 놓이는 듯하고, 이 흑인 여성 캐릭터 역시 이 영화의 세상을 이룬다고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흑인 남성 캐릭터가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같은 거시적인 개념을 건드렸다면 반대로 여성 캐릭터는 인간과 인간사이의 유대감과 기본적인 인간관계를 다룬 것이다. 이렇게 영화는 개체를 가지고 사회 시스템에 대해 다루는 과감한 시도를 보여줬다.
영화가 몇 소재를 인위성이라는 모티브와 함께 다뤘다는 것은 영화의 맥락과도 이어진다. 이 영화는 인위적으로 벨라의 분신을 만들어 여성 서사로서의 이야기도 포함하고 있다. 이 영화에는 벨라의 분신들이 여럿 등장한다. 동물과 동물을 이어 붙인 형태에 대한 부분이다. 개랑 닭을 이어 붙인 모습이나, 학과 얼룩말이 연결되어 있는 모습이 여러 장면에 등장했다. 이것은 벨라부터가 여성의 몸에 남자의 뇌를 결합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이런 분신들 중에 가장 중요한 건 펠리시티(마가렛 퀄리)다. 이 펠리시티가 이야기에서 큰 역할을 한다고 보긴 어렵다. 하지만 이 펠리시티는 영화의 핵심인 '시스템'을 보여주기 위해 중요하게 작동한다. 우선 돌연변이 동물들이나 펠리시티나 누가 만들었을까? 의 측면에서 그 근원을 따져야 한다. 이들을 만든 인물은 아마 갓윈으로 보인다. 갓윈은 영화 안에서 대놓고 '창조주'라 불리며 이 시스템을 만든 인물로 묘사된다. 남성 캐릭터가 세계관에서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었는데 그 생명체가 주인공이다라는 점은 이 영화가 '페미니즘 영화'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충분한 근거를 갖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 영화는 여성 영화이기도 하다. 벨라는 세상이 규정한 여성의 정의를 온몸으로 부수며 질주하는 캐릭터라는 점은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가여운 것들>이 인위성을 여성 영화로서의 맥락을 갖추기 위해서만 사용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이 영화에서 생명체를 만든 인물은 갓윈이고 남성이다. 그리고 영화에서 벨라는'상위 계층이 지켜야 할 윤리'에 전면으로 부딪히는 인물이다. 그럼 여성 해방 서사로 읽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성매매업자와 펠리시티, 그 옆의 하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성매매업자는 여성이다. 이 캐릭터는 벨라에게 "누구와 성매매를 할지 넌 고를 수 없다"라고 말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펠리시티와 하녀는 벨라에게 "몸 파는 여자"라며 극언을 입 밖에 낸다. 심지어 하녀는 벨라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성 안의 사람들에게 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상 이 둘은 여성의 주체성을 방해하는 인물인 것이다. 여성의 자유를 방해하는 3의 시선을 공고히 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내가 영화를 연출하는 사람이다. 여성을 둘러싼 고압적인 시스템을 묘사하고 싶다. 그렇다면 이런 요소들을 영화에 넣지 않을 것 같다.
이 페미니즘 영화의 틀을 반쯤 탈피한 것은 엔딩에서 더 크게 강조된다. 엔딩을 보면 블레싱턴 장군의 몸에 동물의 뇌가 이식된다. 뭐 여성에게 고압적이었던 인물이 응당 맞이해야 할 벌을 받았다고도 볼 수 있겠으나 글쓴이는 살짝 다르게 봤다. 사실상 블레싱턴 장군과 벨라는 동격이 된 것이다. 벨라가 빅토리아일 때의 이야기를 영화가 보여주지 않아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알 수 없어 벨라가 훨-씬 아까운 사람이다. 하지만 이 자체만을 보면 '다른 개체의 뇌'가 이식됐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여기에 더 나아가 벨라가 유사 아버지였던 갓윈의 직업을 물려받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벨라는 새로운 생명체를 재창조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갓윈처럼 세계의 기득권이 될 수 있다. 또 다른 버전의 <가여운 것들>이 블레싱턴을 주인공 삼아 만들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점에 비추어 볼 때 이 영화가 단순히 1차원적인 페미니즘 영화라고 볼 수 있을까? 글쓴이는 아니라고 본다. 영화가 남근주의적인 시대상만 조롱하는 것이 아닌 인류의 역사를 거슬러올라가 '기득권에 서는 것'이 얼마나 따분한 짓인지를 강조한 것이다. 이렇게 두 종류의 인간(남/녀)의 구분선을 흐린 선택은 벨라의 가장 기본적인 속성을 따져봐도 다시 읽을 수 있는 맥락이다. 벨라는 자신의 몸을 팔았던 것, 그러니까 욕망에 직설적이었던 사실을 전혀 부정하지 않는다. 인물에서 더 나아가 영화도 이런 벨라를 부정하지 않는다. 벨라가 빅토리아일 때 어떤 인물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연출부터 빅토리아보다 벨라의 편을 든 것이다. 이 연출에는 여성의 몸에 남성의 뇌가 이식된다 한들 이 사회를 이루는 시스템은 여전할 거라는 조소가 담겨있는 듯하다. 이는 가족이라는 소재로 당시 그리스의 기득권을 비판한 <송곳니>에서도 느껴졌던 서늘한 조롱이었고, '란티모스의 영화다!'라고 느낀 부분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영화에 단점처럼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다. 이 모든 이야기가 친절하지 않다는 점이다. 본인이 쓴 모든 글의 내용에 대해 '영화는 그런 게 아냐!'라고 비판하는 평자가 있다면 그 나름대로 맞는 말이다. 무슨 말이냐고? 홍상수의 영화들은 이 <가여운 것들>과 저 멀리 반대편에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자연스러운 것'을 우선순위로 두는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죄다 인위적인 것투성이다. 그리고 영화가 전면에 성적인 소재를 등장시키고 있어서 어떤 관점에 있어서는 '여성해방이 곧 모험이고 섹스냐'라는 비판도 합리적일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원작을 안 읽어서 이 문장에 확신을 담을 수는 없겠지만 후반부의 각색에 대해서는 원작 팬들이 할 말이 있을 것 같다. 이 광범위한 이야기를 펼친 것에 비해 후반부 문제를 해결하는 규모가 좀 작은 느낌이 있다.
하지만 글쓴이는 재밌었다. 이렇게 다층적이면서 선명하게 주제를 강조한 란티모스의 역량은 현재 최고의 폼을 구가하는 예술가 다웠다. 휘황찬란한 미장센에 눈이 즐겁고 기괴한 사운드에 청각적인 쾌감까지 느끼는데 이야기가 깊기까지 하니 보는 동안 '이 아침에 극장에 오길 잘했다' 싶었다. <추락의 해부>가 청각과 시각이라는 인지체계를 활용한 각본으로 우리에게 재미를 주고 <오펜하이머>에서 핵폭탄을 플롯처럼 만든 것 그리고 <바튼 아카데미>가 이야기를 고전적으로 만든 것처럼 연출과 이야기가 딱 맞아떨어지는 섹시한 영화가 탄생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각색상은 <오펜하이머> 여우주연은 <플라워 킬링 문>의 릴리 글래드스턴, 작품상은 <오펜하이머>가 받을 것 같다. 아마 상 받아도 미술상이나 의상상이 가능성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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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옥이 배경이라고 하기엔 휴머니즘인
가끔 90년대 영화를 돌려볼 때가 있다. 특히 헐리웃 영화들.
그 중 하나의 영화를 짧게 리뷰해보고자 한다. '쇼생크 탈출'이다.
이 영화는 못 해도 열 번은 봤을 거다. 직접 찾아서 보기도 하고, 텔레비전 영화 채널에서 찾아서 보기도 하고, 하다보니 열 번을 채운 것 같다. 이 영화는 탈옥이 주제이지만 사실 그렇게 탈출이라는 흥미진진함을 강조하진 않는다. 사실 휴머니즘을 더 강조한 영화라고나 할까. 범죄자 미화라고 비판할만한 지점도 분명히 있긴 하다. 그런데 주인공이 애초에 누명을 썼다는 전제하에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이고, 범죄자도 오랜 수감생활로 인해 인생에 대한 회한과 후회를 할 수 있는, 교화가능한 인간이라는 지점에 입각해보면 비단 이해가 안갈 내용도 아니라서 그렇게 비판적으로 바라보지 않으려한다.
물론, 앤디가 탈옥을 성공해 자유를 만끽하는 신도 좋아하지만 제일 좋아하는 신은 레드가 처음에는 가석방을 받기 위해 심사관들에게 자신은 교화되었다고 적극적으로 어필하다가 막판에 심사관들을 아예 까면서 가석방 같은거 안줘도 되니까 나 좀 괴롭히지 말라고 비웃는 신이다. 그렇게 해달라고 할 땐 가석방이 허용되지 않다가 레드가 자신을 자책하는 듯, 심사관들을 비웃는 듯한 말투로 냉철하게 말하자 오히려 그에게 자유가 주어진다. 심사관들은 강력한 어필일수록 빈 수레가 요란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자신을 자책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체념해버리는 수순에 들어가야 진정으로 교화가 되었다고 느껴지게 되는 것 같다. 한 사람이 교화되기란 이리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 같기도 하다.
레드가 교화될 수 있었던 데에는 주인공 앤디의 역할이 컸던 듯하다. 그와 교류하며 자신이 범죄자가 아니었지만 다른 이를 위해 돕는 그를 보며 레드는 선함을 직접 마주한 것이 앤디가 생애 처음이었을까 싶었다.
레드의 인생은 가난했기 떄문에 그는 물건을 훔쳤고 그로 인해 감옥을 갔지만 그는 나이가 육십을 넘도록 자신이 불쌍하고 억울했던 것 같다. ' 내가 잘못한 것은 맞지만 어쩔 수 없었다'는 자기변명이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하지만 죄를 짓지 않고도 잘 버티며 싫은 소리 한 마디 안하는 앤디가 신기하면서도 존경스러웠던 것 같다. 사회가 규정한 규율을 어겼지만 사회가 만들어 놓은 규율 안에서만 살아와 그 이상을 꿈꿀 수 없던 레드에게 그 누구보다 사회에 협조적인 것 같지만 차분히 기회를 보며 자신이 처한 부당함을 타파하고 주체적으로 해결하는 앤디의 모습이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같기도 하다. 범죄를 저지른 자와 저지르지 않아 당당함의 차이가 다르다고 하기엔 둘은 정말 정반대의 인물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인이라는 낙인을 찍어 교화라는 명목 아래 자기를 부려먹었던 교도관들보다 앤디의 행동 하나하나가 그에게 귀감이 되었던 것이 아닐까 싶었다. 왠지 레드에게 앤디는 살아있는 예수같은 존재였던 것 같다. 죄많은 자신을 옳은 길로 안내하는 희생자 같은 포지션 말이다.
평생을 감옥에서만 살아온 수감자들에게 자유란 혼란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것도 인상적이었다. 감옥만 벗어나면 다 될 줄 알았는데, 감옥 밖의 세상은 규율이 없는 혼돈임을 브룩스의 죽음으로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사회는 범죄자들을 교화하겠답시고 모아놓고 규율로 그들을 통제해왔지만 미국처럼 수감 생활이 긴 나라에서의 범죄자가 다시 사회로 나왔을 때, 그들은 자율성이 상실되어 버린다. 그래서 사회로 나오면 그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외로이 살아가며 차라리 감옥이 나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누군가는 범죄자에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너무 안일한 것 아니냐 할 수 있겠지만 한 때 범죄자였지만 이젠 그냥 한 명의 노인이 되어버릴 정도로 감옥에서 오래 있었던 그냥 한 사람의 인간으로만 바라본다면 그냥 측은하지 않나. 그 정도의 자비는 보여줄 수 있는 것 아닐까.
이 영화는 나에게 있어 '나홀로 집에' 같은 영화다. 그 만큼 많이 보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 봐도봐도 내용을 아는데도 질리지가 않는다. 좋은 영화는 그런 거라고 생각한다. 가끔 잊고 있다가 다시 봐도 재밌는 그런 영화. 그런 의미에서 헐리웃의 영화는 80~90년대가 정말 황금기였다고 생각한다. 사실 나는 그 영화들이 개봉했던 것을 기억할 만한 세대가 아니지만 뒤늦게 보게 된 내가 봐도 요즘 시대에 클리셰라고 하는 서사들은 모두 이때 나온 것 같다. 그런데 이 '쇼생크탈출'은 수많은 감옥 탈출 서사가 많이 나왔지만 이런 서사는 아직도 나오지 못하는 것 같다. 그만큼 좋은 영화이니 한 번쯤 보시는 것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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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밥 말리: 원 러브> 티저 예고편
영원히 기억될 목소리 [밥 말리: 원 러브] ? 시대의 아이콘 #밥말리 가 2024년 극장으로 찾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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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해피 아워> 메인 예고편
30대 후반에 접어든 네 명의 친구 아키라, 사쿠라코, 준, 후미. 모든 것을 공유하며 서로를 가장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말할 수 없는 고민을 가지고 있다. 어느 날 준은 이혼 소송 중이라는 폭탄선언을 하고 갑자기 자취를 감춘다. 그러면서 이들은 "진짜 행복이란 게 무엇인지" 자신을 솔직히 들여다보며 인생을 되돌아보게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