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Hyun2024-06-03 22:58:58
잘못 설계해서 대참사가 났네
영화 '설계자' 리뷰
'설계자'에서 빛나는 건 강동원의 '비주얼'이다. 이 말은 즉슨, 영화의 매력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설계부터 잘못해서 결국 대참사가 난 꼴이다.
'설계자'는 의뢰받은 청부 살인을 사고사로 조작하는 설계자 영일(강동원)이 예기치 못한 사건에 휘말리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요즘 개봉한 영화들에 비해 비교적 짧은 러닝타임(99분)인데 배우 라인업은 꽤나 화려하다. 강동원을 비롯해 이미숙, 이무생, 이현욱, 김신록, 탕준상, 이동휘 등 연기로는 날고 긴다는 배우들이 대거 출연한다.
탄탄한 배우진이지만, 이 영화의 서사와 소재가 문제다. 팀플레이를 예상하긴 했지만, '선수 입장' 급의 구성으로 '영화 제작 시 하지 말아야 할 요소'를 저지르고 말았다. 소재도 마찬가지다. 부패한 공직자, 영혼을 판 기자, 비자금 논란 등 다른 작품에서 숱하게 다뤘던 소재이기에 기시감이 강하다. 그래도 살인 청부업자로 등장하는 강동원은 그나마 신선하긴 했다.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스릴러 장르의 생명인 긴장감이 점점 느슨해지고 지루함이 짙어진다. 의뢰받은 건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같은 패턴이 계속 반복되는 데다, 받아들여야 하는 정보값이 지나치게 많기 때문. 그래서인지 대사도 투머치하고, 어느 시점부턴 극 중 유튜버들이 전기수처럼 전달한다. 심지어 이들은 비중 있는 것처럼 등장했지만, 막상 기능적 역할에 불과했다.
고증(?) 면에서도 허점이 많다. 초반에 제법 그럴싸하게 설계했던 살인과 달리 뒤에 벌어지는 일들은 우연이 일어나야만 성립되는 허술함이 드러난다. 그래서 반전을 주어도 크게 터지지 못하고, 결말 또한 허망하다. 이걸 보려고 99분이라는 시간을 할애했나 싶을 정도로 현타를 느낀다.
서사가 부실하니 캐릭터들도 크게 도드라지지 않는다. 쏟아지는 정보값에 비해 인물 간 관계성 또한 매력적으로 비치지 않는 속 빈 '깡통' 케미를 그릴뿐이다. 여러 질문과 의문점을 남기려 애쓰지만, 관객들에게 크게 와닿진 못한다.
'설계자'를 이끌어 갈 주연 배우 강동원의 장악력 또한 아쉽다. 영화 장르나 설정상 주인공에게 몰입해 그가 보고 믿는 것들을 따라가게 만들어야 했으나, 영화 속 영일의 생각과 반응을 따라가기엔 쉽지 않다. 맞지 않은 옷을 입어서인지 좀처럼 몰입할 수 없다. 그나마 이무생, 김신록만 눈에 띄었을 뿐, 다른 배우들도 존재감을 피력하진 못했다.
결국 '설계자'는 설계를 잘못한 바람에 부실한 공사로 인해 와르르 무너지는 대참사를 일으켰다. 게다가 음모론만 잔뜩 늘어놓고는 극을 마무리해 갑론을박만 일으켰다. 여기서 '갑론을박'은 좋은 의미가 아니다.
★★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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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FF 데일리] 엄마의 눈으로 본 세상
어쩌다 활동가/Warm Welcome
Korea/2023/77min/한국경쟁
1968년생. 50대 중반의 여성 이윤정. 그녀에게는 두 가지 직업이 있다. 첫째는 가정주부. 대학에서 아동학을 전공하고 졸업과 동시에 번듯한 유치원의 선생님 자리를 제안받았지만 이윤정은 직장 대신 결혼을 선택했고, 두 딸을 낳은 후 주부로 살았다. 두 번째는 활동가. 윤정은 2014년 세월호가 침몰했을 때 오랫동안 다니며 봉사하던 교회에 나가기를 중단했다. 세월호 참사를 슬퍼하는 그녀에게 누군가 ‘언제까지 세월호를 이야기할 것이냐’라고 말한 것이 계기였다.
지금 그녀는 미등록 이주자를 돕는 이주민 인권운동 단체에서 반상근자로 일한다. 엑셀, 영어, 우체국 등기 등 평생 그녀가 가까이 하지 않았던 것들을 매일같이 해내는 과정이 쉽지는 않다. 하지만 그만둘 수는 없다.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벼랑끝으로 내몰린 수많은 이주 노동자/미등록 이주자/난민의 얼굴과 목소리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인생의 중반에 들어서야 두 번째 직업을 가진 그녀의 일상은 당연히 순탄하지 않다. 남편은 ‘제자리’로 돌아오라며 그녀의 활동에 불만을 표하고, 엄마의 활동에 대체로 공감하는 딸 역시 엄마가 공사 구분 없는 삶에서 조금씩 소진돼가는 게 불만이다.
〈어쩌다 활동가〉에는 수많은 쟁점이 있다. 성별 분업, 가사노동의 비가시화, 이주자 인권, 활동가의 헌신과 지속 가능성의 문제, ‘교회’와 ‘사회’의 의미……. 이 모든 주제가 모녀 관계의 내러티브 위에서 펼쳐진다는 점에 주목해보자. 딸은 활동가로 사는 엄마가 궁금했다. 그리고 엄마의 활동을 들여다보는 과정에서 세계의 확장을 경험했다. 엄마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자 지금껏 알지 못했던 세계가 보였고, 딸은 더 이상 예전과 같을 수 없었다. 이렇게 활동가/엄마, 가족/딸 사이에 존재하던 긴장은 점차 녹아내린다. 두 범주는 어느새 경계를 명확히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포개진다.
가족이 먹을 저녁을 차려놓고 스터디를 가는 엄마, 아내를 완전히 이해하진 못하더라도 차로 아내를 데리러가는 남편, 엄마와 자신 사이에 존재하던 거리를 질문하다가 새로운 세계를 목격한 딸. 가족을 돌보던 엄마가 사회를 돌보게 된 과정과 이 낯선 과정에 동참하게 된 가족의 이야기. 달걀도 아닌 메추리알로 바위를 치는 엄마 곁에서 자신이 또 하나의 메추리알이 되겠다는 딸의 선언은 가장 일상적인 관계가 품은 가능성의 크기를 가늠케 해준다.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 초청으로 제24회전주국제영화제에 기자로 참석해 작성한 글입니다.
★이 영화의 상영시간은 제 24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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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탑건 2> 만큼 재미있고 <헤어질 결심>처럼 진하게
"작가님, 수고하셨습니다!" 유명 아나운서가 나에게 인사를 한다. "작가님 준비 많이 해오셨어요? 1시간 녹화가 20분이 걸렸네요? 늘 느끼는 거지만 진짜 영잘알이세요." 내가 대답한다. "아, 아닙니다. 그냥 무식하게 시간만 보냈던 것뿐인데요." 대답하자 휴대전화에 카톡 몇 개가 온다. 어느 날에 어떤 영화가 개봉한다는 누군가의 말이다. 어? '어느 날'에 개봉한다고? 구체적으로 정해진 게 아니라? 별 것 아니겠거니 싶어서 그냥 넘어간다. 습관적으로 휴대전화를 켜 조회수를 확인해본다. 정말 감사하게도 2만이 찍힌다. 언제부턴가 바라왔던 순간이 현실로 이뤄지고 있었다. 다만 그게 몇 개월째 내내 반복되고 있다는 건 너무나도 감사한 일이다. 프로그램 담당 작가가 나에게 말을 했다. "작가님! 출연료는 다음 주에 입금될 거예요. 금액은 얼마입니다!" 엥? 출연료가 '얼마'라고? 무슨 소리야? 내가 대답한다. "그 얼마가 어느 정도 될까요?" 작가가 대답한다. "그 금액은..."
라는 꿈을 꾸었다. 그럴 리가 없지. 가끔 언제까지 이 글을 쓰는 일에 재미를 붙일 수 있을까 생각한다. 내가 멋있다고 생각하는 몇몇 분들의 의견에 편승해서 쓰는 글이 아닌, 내 생각을 오롯이 내 마음대로 표현하는 그런 일이다. 나 자신이 '이 정도면 그래도 글 쓰는 사람이라 부를 수 있지' 싶은 것들은 이미 얻었지만 내가 원하는 건 저 멀리 있었다. 이 영화를 보고 자서 그런 꿈을 꿨던 걸까? 어느 멀티버스 중 하나에는 내가 작가로 명성을 많이 얻은 세계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게 이름이 알려지면 내 안에 있는 어떤 문제들은 해결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런 나(우리)에게 알파버스의 웨이먼드가 느닷없이 나타나 "아니야"라고 답한다. 준비물은 없다. 단지 모든 것을 모든 곳에서 받아들일 태도만 있으면 된다. 올해 개봉작 중 또 다른 마스터피스가 등장했다. 에블린과 함께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라는 멀티버스 속으로 떠나보자.
빈 세탁기처럼 돌아가는 일상
분명히 해야 할 일이 벌어야 할 돈 말고 뭐가 있었는데 말이다. 미국으로 이민 와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는 에블린은 일상에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홍콩에서 태어난 에블린. 첫사랑이었던 웨이먼드의 설득에 넘어가 타지 생활 중이었다. 잘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쉽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실패만 지속했던 그녀. 어느새 정신 차려보니 지금 현재다. 짜증이 나는 오늘. 남편 웨이먼드는 착할지 몰라도 무능력한 사람이었다. 딸 조이는 틱틱대는 일이 많았다. 아버지 공공은 아무도 돌볼 사람이 없어서 에블린과 함께 살고 있다. 쌓여가는 빨래물처럼 풀지 못했던 마음속 응어리가 점점 더 높아져간다. 이런 에블린의 일상은 점점 더 그녀를 괴롭하는 중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어느 날. 평소처럼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는데 남편 웨이먼드는 타향살이를 시작한 보람도 없이 갑자기 이혼 서류를 들이밀었다. 딸 조이는 여자친구를 데려와 가족들에게 인정받으려고 하고 있었다. 정말 진절머리가 나는 일상이다. 그런데 세상이 이런 에블린을 딱히 봐주지는 않았다. 국세청은 에블린의 세탁소에 세무조사를 예고했다. 영수증 속에 쌓여있는 에블린. 영업정지와 생계유지의 한가운데 있기 때문에 신경이 예민하다. 이 빈 차를 타고 국세청이 아니라 다른 우주로 날아가면 좋으련만. 세상은 야속하게도 에블린의 일상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다.
한숨이 가득한 얼굴. 에블린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남편 웨이먼드와 같이 있었던 에블린. 멍하니 있던 와중이었다. 갑자기 남편 웨이먼드의 눈빛이 변한다. "여보. 잘 들어. 지금 당신은 위험해. 난 다른 우주에서 왔어. 이유는 묻지 말고 내가 적어 준 쪽지대로 해." 뭔 뚱딴지 같은 소리야? 안 그래도 나사가 좀 빠져 있는 것 같은 웨이먼드. 마침내 미쳐버린 것인가? 에블린은 어리둥절한다. 금세 에블린의 귀에 이어폰을 꽂아주는 웨이먼드. 갑자기 영혼이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다양한 우주 속의 에블린. 에블린은 당황한다. 웨이먼드는 이내 자기를 소개한다. 자기는 다른 우주에서 온 알파 웨이먼드이며, 지금 세계가 굉장히 위험하다는 말을 전한다. 마냥 헛소리로 치부하기엔 이어폰을 꽂고 겪었던 경험 때문에 안 믿기도 어렵다. 이 색다른 경험 덕에 국세청 직원 디어드리 앞에서도 멍 때리는 시간이 많아지는 에블린. 에블린은 디어드리 앞에서 웨이먼드가 전한 지시사항을 수행한다. 지시사항은 그냥 헛소리가 아니었다. 다른 차원으로 넘어간 에블린. 그 다른 차원에서 에블린과 웨이먼드는 조우한다. 알파 웨이먼드는 에블린에게 세상이 왜 위기에 처했는지를 말한다. 그것은 바로 조부 투파키가 멀티버스를 싸돌아다니며 세계를 파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모든 운명의 조부 투파키는 온갖 세계의 에블린을 살해하고 있었다. 꿈꾸는 소리가 아니다. 에블린 눈앞에 벌어진 상황은 전부 다 사실이었다. 그녀는 조부 투파키를 제지해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
강력하고 빠르게
이 영화,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엄청 정신없다. 일단 핵심 키워드가 너무 많다. 가장 우선은 코미디. 두 번째는 액션. 세 번째는 가족 드라마. 네 번째는 오마주. 다섯 번째는 멀티버스 구현이다. 키워드만 다섯 가지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후반부까지 영화를 보다 보면 이 영화가 운명에 관한 작품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영화는 이런 키워드를 1분 1초가 아까울 정도로 사정없이 다 때려 박는다. 이렇기 때문에 아마 이 영화를 본 많은 분들이 ‘정신없다’라는 것에 동의하실 것이다. 단기간에 많은 정보를 쑤셔놓는 것은 도박이다. 일례로 <프렌치 디스패치>를 많은 분들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이 영화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대사가 쉴 틈 없이 쏟아지지만 감독 웨스 앤더슨은 이런저런 설정을 무리 없이 이해한다. 특유의 섬세한 미장센을 중심으로 대사를 받아들여도 이야기 전개에 큰 무리가 없기 때문이다. 반대의 측면도 있다. 바로 <외계+인> 1부다. 현재의 MCU는 많은 영화들로 이뤄져 있다. 글쓴이는 다른 글에서 최동훈 감독이 마블의 영화들이 쌓아놓은 빌드업을 너무 쉽게 바라본 것이 아닌가라는 의견을 냈다. 이를 보여주듯 너무 많은 떡밥이 있는 <외계+인>. 산만한 줄거리 때문에 호평보단 혹평을 많이 받았다.
이 영화는 확실히 전자다. 이 영화가 이해가 어려운 영화는 아니다. 이 영화의 많은 요소들은 단적으로만 휙 쓰이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경우는 영화를 이해시키기 위해서도 쓰이고, 또 주제적인 측면과도 이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정보가 산발적으로 와다다 쏟아지긴 해도 영화를 보는데 큰 무리가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 대신 중반부로 흘러가는 이야기를 집중할 필요는 있다. 영화에서 원형의 이미지는 굉장히 중요하다. 이 원형의 에너지가 어떤 이유로 중요한가?라는 것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소재 중 하나일 것이다. 이때 설명이 후반부에 반복되긴 하지만 대충 보면 중반부에서 이를 놓치기 쉬울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글쓴이는 이 영화를 보지 않은 관객분들이 무언가를 마시지 않은 채로 보는 것을 추천한다. 영화 중간에 화장실을 간다? 그럼 영화의 재미가 급전직하하는 단점이 느껴질 수도 있다. <프렌치 디스패치>가 섬세한 방식으로 영화의 이해를 도운 것과 유사하게 이 영화는 광기의 에너지로 관객을 밀어붙이는 것이다.
가장 강력한 강점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영화는 다방면으로 강점을 가진 영화다. 일단 기본적으로 시각적인 쾌감이 엄청나다. 이 쾌감 중 하나는 액션이다. 전체적으로 액션의 비중이 가장 높은 인물은 주연 양자경이다. 우선 양자경이 그동안의 필모그래피에서 액션 연기를 펼치는 역할을 많이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과거의 상영작들을 찾아봤을 때 여러모로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영화도 있다. 바로 <와호장룡>이다. 장첸, 주윤발, 장쯔이, 양자경이 출연한 이 영화. 웅장한 맨몸액션이 많은 이들에 기억에 남았다. 영화는 이 시절의 홍콩영화를 재현하듯 화려한 맨몸액션을 선보인다. 일단 양자경의 액션 연기는 정말 대단하다. 극에서 일대 다수의 연기를 펼치는 부분이 있다. 템포가 굉장히 빠르고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수직적 운동능력을 선명하게 잘 드러낸다. 이는 연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 에블린의 액션 신에서 싸움을 잘하는 에블린이 되는 계기가 있다. 영화는 이 에블린이 왜 쿵후의 달인이 될 수밖에 없는지 잠깐 보여주고 이를 편집술로 보여준다. 이는 편집 능력과 시너지가 있어서 관객으로 하여금 보는 재미를 선사한다. 구체적으로 상대방과의 액션 주고받기와 이 능력이 구현되기 위한 전제가 엇나가듯이 편집되며 시각적 쾌감을 선사하는 것이다. 이는 멀티버스라는 키워드를 관객들에게 설득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우리가 아는 지식 안에서 멀티버스란 것은 없다. 심지어 이 멀티버스의 묘사가 이 영화처럼 이뤄진다면 좀 허무맹랑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글쓴이는 이를 관객들에게 경제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액션을 삽입했다고 생각한다. 상황 자체를 많이 만들어서 그 룰대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만든 것이다. 그럼 이야기에 통일성이 생긴다. 이런 토대의 튼튼함은 영화의 설득력으로 이어진다. ‘아. 그래서 그렇구나’라는 이해가 용이해지는 것이다. 이렇게 에블린의 액션은 단적으로 시각적인 쾌감만을 전하려고 제시되지 않았다.
또 웨이먼드 역을 맡은 조너던 키 콴의 액션 연기도 굉장하다. 이 웨이먼드 캐릭터가 맡은 역할의 액션 신은 비교적 초반부에 나온다. 어떤 행동을 하고 전투를 시작하는 웨이먼드. 이때 매고 있던 가방을 휘리릭 흔들며 전투태세에 돌입한다. 엥? 이거 어디서 봤는데? 갑자기 성룡이 생각난다. 역시 이 웨이먼드의 액션신에서 무언가를 오마주하고 있다. 바로 성룡의 쌍절곤 액션이다. 이는 그냥 얻어걸린 효과가 아닌 듯하다. 배우 조너던 키 쿠안이 성룡을 닮기도 했다. 또 원래 주인공을 양자경이 아닌 성룡을 계획했다는 걸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아무튼 이 액션은 영화의 가장 첫 번째 액션 시퀀스이기도 하다. 가방 끈을 쌍절곤 쓰듯이 두들겨 패는 웨이먼드. 극초반부에 유약한 모습만 제시됐던 이 캐릭터이기 때문에 이런 액션 신이 대비되는 느낌이 있다. 이는 앞에서 쓴 문단과 비슷한 맥락에서 좋은 효과를 낸다. 이 역시 멀티버스에 대한 설명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반대 측면에서도 기능한다. 영화를 끝까지 보다 보면 이런 멀티버스를 통한 액션신이 웨이먼드라는 인물의 통일성을 보여주고 있다고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영화의 연출이 멀티버스라는 모티브를 단순히 설정으로만 쓴 게 아니라 주제적인 측면과도 이어지게 설정했다. 똑똑한 연출의 힘이었다. 아, 이 두 주인공을 빼고 다른 액션 연기를 보여주는 인물들도 있다. 이 인물들의 액션도 잘 뽑았다. 그리고 영화를 보고 나서 강렬하게 기억에 남을 것이라 생각한다. 진짜 웃긴다. 이런 생각을 하는게 정말 또라이같다.
타율 높은 코미디
또 이 영화는 정말 웃긴 코미디 영화이기도 하다. 이 영화가 코미디로서 사용했던 소재는 두 가지다. 멀티버스를 통해 다중우주를 보여줬던 시각화와 영화의 핵심 아이디어다. 우선 이 영화가 장르적인 특성이 아닌 선에서 뽑을 수 있는 강점은 설득력이라고 생각한다. 에블린이 각각의 우주 속에 한 명씩은 있을 테니 각자가 온갖 직업을 다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럼 이 직업인으로서의 광경 묘사에 있어서 구체적이지 않은 부분이 없다. 이 꼼꼼함 묘사가 ‘각종 직업의 에블린’에서 굉장히 강력한 코미디가 작동한다. (영화에 나오지는 않지만) 만약 글을 쓰는 에블린이 있다고 해보자. 그럼 글을 쓰는 특징 중 하나를 뽑아 영화에서 어떤 원동력으로 사용한다. 또 그림을 그리는 에블린이 있다고 해보자. 그럼 그림을 그릴 때 자기의 내면세계를 섬세하게 그려야 하기 때문에 감성적으로 풍부한 사람이 유리할 것이다. 영화는 탄탄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왜 멀티버스의 에블린이 필요한지를 빼먹지 않았다. 영화의 설정을 단단히 하는 연출이 코미디 소스로도 작용하는 것이다. 이렇게 직업인으로서의 에블린을 가지고 코미디를 만들 때 절대 잊히지 않는 시퀀스가 있다. 바로 어떤 영화를 차용하는 것이다. 이 영화가 어떤 작품이고, 어떤 식으로 차용했는지를 쓰면 강력한 스포일러가 될 것이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서술할 수는 없다. 그러나 본 영화의 리뷰를 하는 것을 하는 사람이 이 부분을 언급하지 않으면 왠지 직무유기처럼 느껴진다; 또 어떤 멀티버스 중에서 우리가 아는 인간의 물리법칙 외의 것도 있다. 이 부분 역시 골 때리게 잘 설정했다. 쓸데없이 상상력이 고퀄리티라서 놀랐다.
그리고 아마 영화에서 정말 중요한 아이디어가 됐을 키워드 ‘전환’이다. 영화의 메인 세계관은 주인공 에블린이 이끄는 시간대다. 그럼 다중우주 사이를 연결하는 매개체가 있어야 한다. 여기서 코미디 요소를 하나씩 추가한다. 제일 첫 번째 전환 방식은 적당히 상식 선에서 상황에 안 맞는다. 그런데 이 이후부터의 이야기는 생각하는 수위를 전부 뛰어넘는다. 단 하나 빼고 전부 예상외로 흘러갔다(그리고 이 ‘예상대로 간 코미디’도 정말 웃긴다). 당연히 이렇게 전형성을 탈피한 방식에 대해 구체적으로 다 말하면 재미가 없어진다. 이런 이유로 구체적인 소재가 뭐였는지는 쓰기 어렵다. 단지 분명한 것은 하나하나 다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전개하기 때문에 관객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을 것이다. 난 배우들이 제일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얼마나 웃겼을까? 자기들도 엄청 웃었을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저비용 고효율의 코미디 요소로 사용하는 전환이지만 이것도 단지 웃기려고만 넣은 것은 아니다. 후술하겠지만 이 작품에서 전환이라는 키워드는 영화의 다양성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지점이 있다. 우리는 (글쓴이 포함) 보통 세상 사람들을 판단하는 게 쉽다. 왜 저 사람은 저러고 있을까? 에 대해서 각자의 답을 내놓는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세상에만 살고 있기 때문에 단면적인 모습만 볼 수밖에 없다. 영화는 이 판단의 오류를 꼬집는다.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색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에 신선하다고 느낄 관객 분들이 많을 것 같다.
다양성에 관해
영화에서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설정이 있다. 바로 딸 조이의 퀴어 설정이다. 다양성은 우리 문화예술 매체에서 참 피곤한 소재다. 이른바 PC라고 불리는 이 것은 들어가기만 하면 왓챠피디아에서 투기장이 열린다. 피곤하다. 혹자는 ‘PC 묻었네’라고 영화나 드라마의 가치를 깎아내리기도 한다. 억지로 이런 코드를 집어넣었기 때문에 극의 흐름을 깨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음 한 편으로는 그런 생각을 해 본다. 멀티버스 안의 수많은 세상이 있다고 해보자. 거기에는 아시아 인이라는 인종이 아예 없다. 무조건 백인만 있는 우주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화양연화>를 볼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헤어질 결심> 역시 마찬가지다. <공조 : 인터내셔날>에서 사람들이 행복하게 웃는 모습을 볼 수 있었을까? 아닐 것이다. 이는 문화예술매체의 다양성에만 국한 짓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 영화에서 웨이먼드 역을 맡은 키 호이 콴이라는 배우는 경력이 중간에 끊겼었다. 유년시절 아역으로 이름을 날리던 이 사람은 아시아인 역 빼고는 아무것도 맡을 수 없다는 제약 때문에 배우로서의 커리어가 끊겼었다. 할리우드라는 큰 판에 단지 인종이라는 이유로 주류에 끼지 못한다는 것, 아니 낄 기회조차 없다는 것은 많이 불공평한 일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 ‘PC’라는 것이 무조건 예술을 해친다고 볼 수 있을까? 글쓴이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다. 단지 레즈비언이란 이유로 가족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과연 어떤 문제가 있어서 그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 걸까? 그 사람도 인간일 뿐인데. 역시 이런 측면에서도 이 사람들이 이런 대우를 받으라는 법은 없는 셈이다. 이 지점에서 이 PC라는 ‘정치적 올바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또 우리가 소수자들에게 좀 더 친절하고 따뜻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윽박지르는 선 끝난다면 우리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알고 보면 그 사람의 우주를 전부 들여다봐야 하는 일인데도 말이다.
당신의 운명을 사랑할 수 있나요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살아온 인생에 관해 생각하는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글을 더 많이 써왔으면 어땠을까. 공부를 열심히 해 좋은 학교에 들어가면 어땠을까. 막연한 질문은 끝이 없다. 이 질문은 나에게 또 다른 세상을 연다. 삶의 관문에서 막힐 때마다 이 지점으로 돌아와 나 자신에게 묻는다. 그때 왜 그렇게 하지 않았어? 되묻는다. 세상에. 내 운명이란 왜 이따위란 말인가. 지긋지긋한 멍청함 덕에 나 자신을 향해 한숨을 내뱉는다. 이 한숨은 다른 사람에게 향한다. 왠지 잔소리를 하고 싶어 진다. 에블린처럼.
하지만 그런 이들에게 잊히고 있는 부분이 있다. 바로 지금 현재의 우리도 각자가 생각했던 어느 순간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비단 글쓴이만 해도 그렇다. 지금 여기서 글을 쓰고 있는 순간도 어렸을 때의 내가 바라왔던 모습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아직도 미련이 남는 지점이 있다. ‘그러면 안 됐는데’라는 생각으로 긴 시간 동안 후회하며 보냈다. 막상 이 글을 쓴다고 해서 그런 미련이 완벽하게 사라질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런데 이미 알고 있다. 그 선택을 했던 평행세계의 나도 맞이해야 할 필연적인 사건이 있다는 것을. 단지 그 일을 그렇게 보냈다고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리는 없다. 가능성이란 그런 것이다. 더 이상 꿈꿀 수 있는 무언가가 있는 것. 어떤 선택을 하든 ‘통계적인 필연성’에 앞서 지금 없는 것에 가능성을 갖고 무언가를 바라는 것이 삶의 의미일지도 모른다. 영화는 이 가능성과 희망에 대해서 말한다. 아무 의미 없는 인형 눈알도, 세탁소에 찌들어 보내는 일상도, 밝게 웃는 딸의 웃음도 우리가 어떤 것을 꿈꿀 수 있는 개연성이 된다는 말과 함께 전한다. 모든 것을 모든 곳에서 경험할 수 있다고 하면 지금의 내가 느끼는 즐거움이 없었을 것이다. 인생은 그렇게 풀어야 하는 미스터리의 연속인 걸 너무 잘 아니까 우리는 영화를 보는 것 아니겠어?
메버릭의 박력을 멀티버스로
이렇게 다양한 키워드와 래퍼런스를 때려박은 이 영화. 앞에서도 썼듯 '이걸 다 머릿속에 주워 담아야 영화가 이해되는 거지?'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아니다. 영화는 이야기를 끌고 가는 인력이 어마어마하다. 일단 초반부 세탁소 시퀀스부터 BGM이 들어간다. 빠른 템포로 전개되는 이야기. 알파 웨이먼드가 에블린을 만나 이어폰을 꽂아주기까지 긴 설명을 하지 않는다. 바로 액션 삽입하고. 액션 중간에 코미디 요소도 있다. 다 짬뽕처럼 다 넣는다. 그 대신 이야기 전반적으로 멀티버스의 인물들마다 갖는 공통점이 무엇인가?를 중심으로 전개하기 때문에 이야기는 사실 간단하다. 후반부에 주인공 중 어떤 인물이 구체적으로 언급하기도 한다. 올해 5월에 <탑건 : 메버릭>이 개봉했다. 800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이때 많은 분들이 이 영화를 좋아했던 이유가 톰 크루즈를 위시로 한 힘찬 에너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비행기로 활주로를 활공하는 듯한 갈등 구성이 영화가 다이내믹하게 느껴졌던 주요 연출 방식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탑건 : 메버릭>만큼의 박력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이미지가 나오면, 바로 그다음 정반대의 무언가가 나온다. 또 그 정반대를 대칭 찍고 완벽히 반대 측면에 있는 무언가가 나온다. 또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화장법이나 의상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어디서 본 적 없는 헤어스타일을 따라와서 보여준다. 그런 이상한 코디법을 받쳐주는 미장센까지 영화는 소재 하나하나가 신선하기 때문에 딸려오는 힘찬 에너지로 2시간 20분 내로 질주한다. 이 영화가 상영관을 얼마만큼 받을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이 영화가 <탑건 : 메버릭>보다 훌륭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후반부의 하이라이트 신에서 볼 수 있는 뭉클함, 코미디 요소로만 국한 짓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탑건 : 메버릭>이 이뤘던 성취를 더 크게 돌며 이뤘다고 생각한다. 색다른 경험이다. 분명 스포일러를 없이 쓰는 것 같은데 쓸 내용이 계속해서 나오기 때문이다. 올해 말 <아바타 : 물의 길>이 개봉을 앞두고 있다. 극장가의 허리케인이 되어 많은 관객을 흡수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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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 픽션보다 약간의 현실이 섞인 픽션이 더 재밌는 법
댓글부대 (Troll Factory, 2024)
100% 픽션보다 약간의 현실이 섞인 픽션이 더 재밌는 법
개봉일 : 2024.03.27.
관람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장르 : 범죄, 드라마, 스릴러, 블랙코미디
러닝타임 : 109분
감독 : 안국진
출연 : 손석구, 김성철, 김동휘, 홍경
개인적인 평점 : 3.5 / 5
쿠키 영상 : 없음
*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 짚고 갈 것은 <댓글부대>는 실화가 아니다. 영화의 도입부에 이건 실화고, 사실 적시 명예훼손을 피하기 위해 익명화했다는 상진의 나레이션이 나오는데, 이는 영화가 상진의 글과 생각을 중심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나오는 나레이션일 뿐이다. 영화의 크레딧을 보면 이는 허구라는 안내문이 추가로 나온다.
1980년대 중반, 개인 이용자 간 통신이 가능해진 일명 ‘PC 통신의 시기’가 시작된 이후 약 40년. 통신 기술은 나날이 발전하여 현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편하게 인터넷을 이용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 사이 같은 취미,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끼리 모이는 온라인 커뮤니티 기능은 폭발적으로 확장됐다. 온라인 커뮤니티는 ‘나와 뜻이 비슷한 사람들’을 한곳으로 모으거나 함께 소통하고, 어떠한 사회적 문제가 생겼을 때 함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힘이 되기도 하는 등의 순기능을 갖고 있지만 이것이 갖고 있는 단점 또한 무시할 수 없을 만큼 크다. 대표적인 단점으로는 익명화(본인 인증 후 가입을 한다 해도 실제 내 이름으로 활동하진 않으니까), 사실 확인이 불가능한 이야기의 확산(루머), 쉽게 형성되는 군중심리 등이 있다.
온라인상에 수많은 정보와 이야기가 범람하고 있는 시대. 항상 앞서 말한 것들을 경계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어봤을 것이다. 영화 <댓글부대>는 이 자주 들어봤을, 살짝 삐끗하면 뻔해질 위험이 큰 주제를 지루하지 않은 방식으로 풀어낸다.
동명의 소설 [댓글 부대]를 원작으로 한 영화 <댓글부대>는 한때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가끔은 조롱거리가 되기도 하는 ‘여론 조작 댓글 알바’의 세계를 깊이 파내려 가는 이야기다. 그냥 ‘이 회사 제품 좋아요~', ‘제가 써보니 좋아요~’ 하는 식의 속이 빤히 보이는 댓글 알 바가 아니라 군중 심리를 이용해 여론을 움직이는 댓글부대 청년 3명과 사회부 기자 임상진의 이야기다.
임상진은 모두가 피하는 대기업 ‘만전’의 비리 폭로 기사를 쓰지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로 오보 판명이 나며 정직을 당한다. 말이 정직이지 사실상 그 업계에서 매장된 거나 마찬가지고 비리를 제보한 피해자인 중소기업 사장은 죽은 상황. 사장의 장례식장을 찾아간 상진은 직원의 ‘경쟁사의 기술은 우리와 다른 것이며 사장님은 피해의식이 심했다’는 말을 듣고 오보 판정에 이어 두 번째 충격을 받는다. 갈 곳도, 할 일도 없어진 상진은 쇼파에 누워 자신에게 온 욕 메시지들을 천천히 넘겨본다. 그러다 “기자님 기사 오보 아니에요.”라고 말하는 한 언론학 교수의 메시지를 발견하고 그와 만나기로 한다. 하지만 상진의 앞에 나타난 건 나이 지긋한 언론학 교수가 아닌 자신이 온라인 여론 조작을 하는 댓글부대라 주장하는 한 청년이었다. 과연, 이 청년의 말은 진실일까, 거짓일까?
현실과 픽션의 적절한 조합, 흥미로운 주제와 높은 몰입도
김성철, 김동휘, 홍경. 젊은 세 배우의 훌륭한 합
극 중에서 이런 대사가 나온다.
"100% 진실보다 거짓이 섞인 진실이 더 진실 같다.”
100%의 진실, 100%의 거짓보다 약간의 거짓이 섞인 진실이 더 믿을만하고 재밌게 느껴지는 것처럼 이야기도 100%의 픽션, 100%의 현실보다 약간의 진실이 섞인 픽션이 더 재밌게 느껴지는 법이다. <댓글부대>가 딱 그런 영화다. 너무 비현실적이지도 너무 현실적이지도 않은. 픽션에 약간의 현실을 섞어놓은 느낌을 주는 영화다. <댓글부대>는 2017년에 있었던 촛불 시위, 대기업의 중소기업 기술 도둑질, 온라인에서 벌어지는 무분별한 마녀사냥과 신상 털이, 댓글 부대 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구성하고, 흔히 볼 수 있는 온라인 커뮤니티 속 글, 밈, 갑자기 터진 의문스러운 마약 스캔들, SNS 등을 하나의 장치로 사용하며 이야기의 현실감을 높인다.
그리고 그 현실감 위에 손석구, 김성철, 김동휘, 홍경 배우의 연기력이 얹히니 영화 자체의 몰입도가 훨씬 올라간다. 손석구 배우의 우직한 연기력이야 이제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 같고, 이번 영화에서 강조해서 언급하고 싶은 건 김성철, 김동휘, 홍경 배우다. 어울릴 거라 생각해 본 적 없는 이미지의 배우들인데, 셋 사이의 합이 정말 기대 이상으로 훌륭했고 각자 연기력도 딱히 흠잡을 곳이 없다고 느꼈다. 이 중에서도 특히 홍경 배우의 연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감정을 막 내뿜는 게 아닌 딱 적절한 수준까지만 끌어왔다 다시 꾹 눌러 담는 표현 방식이 정말 좋았다. <악귀>를 통해 홍경 배우의 연기를 처음 봤을 때, “이 사람.. 곧 내 마음에 들어오겠다..”싶었는데 <댓글부대>를 통해 확실해졌다.
소설 원작과의 차이점
불쾌감은 줄이고 약간의 대중성을 더하다.
소설 [댓글 부대]는 국정원 여론조작 의혹 사건을 모티프로 시작되고, 영화 <댓글 부대>는 한 기업의 여론 조작 사건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영화 속 인물들은 소설에 비해 한결 부드럽게 정리되었고 여론 조작의 결과에 죄책감을 느끼고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소설에 나왔던 불쾌감을 주거나 논란이 될만한 부분들은 대부분 쳐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소설엔 숨길 수 없는 불쾌감이 둥둥 떠다니는데 영화에는 불쾌감이 아닌 의심과 경계심을 그 자리를 대신한다.
엔딩에 대한 호불호
직선이 아닌 돌고 돌아가는 이야기. 흥미롭지만 지루한 느낌도
<댓글 부대>는 진실과 거짓의 경계가 모호한 영화다. 어떤 게 진실이고 어떤 게 거짓인지 명확히 제시되지 않으며 사건을 직선적으로 풀어가기보단 사건의 조각들을 천천히 모으며 돌고 돌아가는 느낌이 강하다. 이러한 특징은 영화의 긴장감과 흥미를 유발하기도 하지만 약간의 지루함을 유발하기도 한다. 나는 영화 속 사건들과 비슷한 현실 속 사건들을 떠올리며 영화를 봤기에 개인적으론 크게 지루함을 느끼지 못했지만 빠르고 정확한 전개를 선호한다면 이 영화의 진행 속도가 다소 아쉽게 느껴질 수 있겠다.
그리고 <댓글 부대>의 큰 불호 포인트 중 하나, 엔딩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자면 .. 물론 나도 엔딩이 아쉽게 다가오긴 했다. 이런저런 조각들을 모아놓고 한순간에 파앗- 흩뿌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영화의 주제를 생각했을 때, 더 좋고 깔끔한 엔딩 아이디어로는 어떤 게 있겠냐고 묻는다면.. 그건 모르겠다. 이렇게 생각해 보니 이 영화의 엔딩은 꽤 괜찮은 편인 것 같다.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모이기 쉬운 만큼 흔들리기도 흩어지기도 쉬운 군중
인터넷 통신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우리는 예전에 비해 더욱 쉽고, 빠르고, 넓게 인터넷 통신과 그를 통한 소통을 이용하고 있다. 인터넷 통신이 활발하지 않았던 시절, 극중 인터넷 유료화 시위엔 큰 인원이 모이지 못했고 인터넷 통신이 활발해진 시대엔1600만 명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왔다. 이런 소통은 사회적 부당함을 무찌를 수 있게 사람들을 한곳에 모아주기도 하지만 반대로 한순간에 해체되거나 누군가를 해하기도 한다. 연예인 마녀사냥이나 일반인 신상 털이 사건, 스캔들이나 찌라시 글에 함께 달려들어 욕하다가도 "아니면 말고" 하며 뒤돌아서 흩어지는 익명의 아이디들. 이러한 것들을 생각해 보면 인터넷을 통한 소통과 여론 형성이 얼마나 중요하고 또 위험한 것인지 확 와닿을 것이다.
인터넷이라는 공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이다. 게다가 익명성까지 주어지니 이 안에 있을 동안 '나'를 내려놓는 사람들이 참 많다. 자극적인 것에 바로 반응하고 달려드는 사람들. 극 중 댓글부대인 팀알렙은 이들의 심리를 이용한다.
찻탓캇과 임상진이 1인 시위 사건을 이야기하는 장면, 찻탓캇은 1인 시위로 사실 적시 명예훼손죄 철폐를 주장하는 이용철의 시위를 막기 위해 그의 딸을 온라인 마녀사냥의 사냥감으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아버지가 사실 적시 명예훼손죄를 없애자고 주장하고 있는 한 그의 딸은 억울하게 욕을 먹는다 해도 명예훼손죄로 고소를 진행하지 못할 테니 아버지가 시위를 그만둘 것으로 예상했다고 말한다. 임상진은 '너희 사실 적시 명예훼손이랑 명예훼손이 다른 건 아냐'라고 묻는다. 찻탓캇은 당연히 알고 있다고 답한다. 그리고 뒤이어 '하지만 사람들은 사실적시인지 그냥 명예훼손인지 그런 거엔 관심이 없다.'라고 말한다. 찻탓캇의 이 말은 보통 이러한 자극적 여론 몰이에 달려드는 사람들은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중요한 게 무엇인지 딱히 고민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이들은 이런 사람들의 심리를 제대로 이용해 진실과 거짓을 섞어 여론을 조작한다.
가짜 이름의 믿을 수 없는 제보 / 사라진 루머의 유포자
"(제 이름은) 잊어버리기 쉬워요. 너무 평범해서."
찻탓캇은 상진과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지 않다가 마지막으로 신뢰의 한방을 날리듯 자신의 이름이 '이영준'이라고 말한다. 신분증같이 증명할 만한 것을 내밀진 않지만 지금껏 현실 같은 이야기를 들어온 상진은 영준의 말을 믿고 그의 이름과 번호를 휴대폰에 저장해둔다. 하지만 영준은 기사가 나온 뒤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웹 소설 카피 논란까지 생긴다. 이후, 이야기는 어떤 걸 믿어야 할지, 어디까지 진실이고 거짓인지 알 수 없는 혼란 속으로 말려들어간다.
인터넷에 떠도는 여러 글과 카더라들을 보면 대부분 최초 유포자를 찾기 어렵다. 누군가 피해를 보고 사회적인 파장이 일어나도 처음으로 그 글을 쓴 사람, 유포해선 안될 것을 유포한 사람을 찾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흔한 이름과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를 댓글부대에 제보만 남기고 사라진 찻탓캇은 하나의 카더라를 퍼트리고 사라진, 찾을 수 없는 최초 유포자와 비슷하게 느껴진다.
상진은 찻탓캇이 지어낸 그의 제보를 착실히 옮겼고, 그가 미리 써둔 대본(웹 소설)이 세상에 공개되자 순식간에 정의를 구현한 대기업 저격수가 아닌 망상증을 가진 기레기가 된다. 사람들은 상진이 쓴 글이 진실인지 거짓인지에 집중하지 않는다. 보이는 건 상진이 사라진 찻탓캇의 글을 카피했다는 것뿐이니까. 잊어버리기 쉬운 평범한 이름의 이영준(찻탓캇), 그는 잊어버리기 쉬운 자신의 이름 대신 더욱 강렬하게 각인될 카피라는 주제를 던져놓고 상진을 궁지에 몰아넣는다.
한 번에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진실
여러 개의 문, 복도가 있는 복잡한 댓글 부대 팀알렙의 집
찻탓캇이 처음 댓글부대에 대해 얘기하는 장면, 찻탓캇은 혼자 웹 소설을 쓰고 있고 다른 방에 있는 찡뻤킹과 팹택이 “빨리 와봐!” 하고 소리치며 다급하게 찻탓캇을 부른다. 찻탓캇은 책상에서 일어나 방을 통과하고 또 문을 열고, 긴 복도 같은 부엌을 지나 또 문을 연다. 댓글 부대의 집은 크기에 비해 꽤 복잡한 형태로 되어있고 찻탓캇을 부른 실체인 찡뻤킹과 팹택은 한 번에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댓글 부대>의 이야기 진행도 이런 형식이다. 사건에 숨겨진 실체와 진실은 한 번에 드러나지 않고 이야기는 돌고, 돌고, 또 돈다. 보는 이를 계속 헷갈리게 만들던 이야기는 결국 시원하게 결말을 제시하지 않는다.
어디까지가 진실, 어디까지가 거짓인가
영화의 엔딩, 결말 의미 해석, 관람차
조작 프로세스 글에 달린 조지 오엘의 댓글, 조지 오웰의 소설 [1984]
<댓글 부대>는 진실과 거짓을 명확히 구별해 주지 않는다. 엔딩도 그렇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데?"라는 의문이 들것이다. 이는 영화가 남긴 찝찝함을 가진 채 군중 심리, 진실과 거짓, 커뮤니티의 맹점, 각자의 해석 등을 계속 생각해 볼 수 있게 만들려는 제작자의 의도일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사이다처럼 범죄자, 대기업 때려잡기! 사회 정의 구현! 을 실현했다면 그건 또.. 멋이 없었을거다. 하지만 전혀 감이 오지 않고 답답함만 쌓여있는 상태라면, 다른 이들의 해석을 찾아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나는 상진이 주인공, 만전이 악당이라고 생각한다. 찻탓캇은 실제 만전의 댓글부대 중 한 명이고, 거짓으로 댓글 부대 제보 시나리오를 짠 다음에 그걸 웹 소설 사이트에 미리 올려둔 후, 상진을 자극해 다시 한번 기사를 쓰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를 카피 논란에 휩싸이게 만들어 사회적인 타격을 줬다고 생각한다. 상진은 처음 찻탓캇을 만났을 때, 찻탓캇의 얘기를 믿지 않기에 녹음기를 바로 켜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데, 찻탓캇은 그런 상진에게 신뢰감을 주기 위해 진지하게 이야기를 이어간다. 본인이 친구들과 함께 살고 있고, 누군가는 죄책감을 느꼈고, 감옥에 갈지도 모른다 느꼈다.. 하며 어리고 약한 부분을 이야기하고, 이름을 알려주는 것 모두 상진에게 신뢰감을 주기 위한 행위였고 상진은 결국 찻탓캇의 말을 믿었다 뒤통수를 맞는다.
찻탓캇이 말하는 팀알렙의 모습이 나올 때, 그들의 집 창가엔 커다란 관람차와 유원지가 보인다. 보통 이런 시끄러운 유원지 바로 앞에 가정집이 입주하는 경우는 흔치 않고, 반짝이는 관람차는 왠지 꿈같은 느낌을 준다. 그래서 나는 찻탓캇이 말하는 팀알렙의 이야기가 모두 꿈같은 허상, 거짓이라고 느껴졌다. 찡뻤킹이 납치를 당하고 관람차의 불이 꺼진 모습이 나온 후 찻탓캇의 이야기는 끝나는데, 그 이후 상진의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이 시작된다. 관람차의 불이 꺼졌다는 건 그의 거짓 이야기가 끝났고, 이제 현실의 사건이 이어질 것임을 암시한 느낌이다.
극 중에서 댓글부대 프로세스 글에 '조지 오엘’이라는 별명을 가진 사람이 ‘이거 올리고 살아계신가요?’라고 적은 댓글이 나온다. 이는 소설가 조지 오웰과 소설 [1984]를 떠오르게 만든다. [1984]는 1949년에 쓰인 오래된 이야기임에도 현대 사회의 문제를 정확히 짚어낸 소설로 정보 기술의 발달로 개개인의 사생활과 신상정보가 쉽게 노출되는 독재 국가에서 진실을 찾으려 노력하는 주인공의 윈스턴 스미스가 겪는 사건이 담겨있다. 모두가 국가의 감시를 받고 복종하는 사회에서 윈스턴 스미스는 감시를 피해 국가가 숨겨놓은 물건을 사고 그들의 통제를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을 키워간다.
<댓글 부대>의 이야기와 결은 다르지만 현대사회의 문제를 날카롭게 짚어낸 소설이기도 하고, 어떠한 통제(여론 조작/독재 국가) 안에서도 진실을 찾으려 하는 윈스턴 스미스의 모습이 영화 속 상진의 모습과 닮아있기도 하니 한 번쯤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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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오리지널 <콜> 리뷰
이창동 감독의 '버닝'으로 혜성처럼 등장하며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전종서 배우.
그 배우는 차기작으로 넷플릭스 오리지널의 <콜>에서
박신혜 배우와 두톱으로 영화를 이끌어가야하는 책임감 또한 맡게 됐다.
물론 세 번째 작품으로 할리우드 진출작인 <모나리자와 블러드 문>이 국내외 영화제에서 공개되었으나,
국내 11월 24일 개봉 예정인 <연애 빠진 로맨스>(감독 정가영)가 전종서 배우를 세 번째로 만나볼 수 있게 되는 공식적인 작품이 되지 않을까 싶다.
오랜만에 다시 <콜>을 다시 보게됐고, 그에 대한 리뷰를 작성하게 됐다.
* 영화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주의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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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초반부 서연(박신혜)은 병실에 계신 엄마(김성령)와의 짧은 면회(아버지는 20년전에 돌아가시고, 엄마와의 관계를 좋지 않음이 짐작된다)를 뒤로하고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다. 집 안에서 우연히 낡은 무선전화기를 발견하고,
정체 모를 사람으로부터 전화를 받게 된다.
발신인인 영숙(전종서)은 서연이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하곤 하는데 ,
결국은 과거의 20년전에 살고 있는 영숙과 20년후 현재의 서연이 같은 집에 살고있음을 깨닫게된다.
처음은 여느 젊은 또래마냥 소소하게 얘기를 나누고, 일상을 보내며 우정을 쌓아가는 듯하다가.
서연의 아버지(박호산)이 20년전에 화재로 돌아간 사실을 알고, 영숙이 자신이 과거를 바꿈으로써 아버지를 살릴 수 있지 않겠냐며 제안을 한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서연은 다시 화목한 일상을 찾는 듯하나 되려 서연의 화목함은
서연과 영숙의 유대감을 깨뜨린 듯 하다.
(서연과 영숙은 그들의 불안이나 불행이 둘 사이를 결속해주는 유대감인듯 하다)
영숙 또한 자신의 미래를 알고 있는 서연에게 자신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위험한 요청을 하게되고,
급기야 위협을 하기 시작한다.
영화 <콜>의 Point.
1. 단편(몸값)에서 영화적 인정을 받은 신예감독(이충현 감독)의 장편 데뷔작
2. 두 여성인 배우를 전면으로 내세운 스릴러.
(많은 스릴러 영화들은 흔히 가해자는 남성, 피해자는 여성으로 설정하지만)/
<콜>에서는 조연으로 등장하는 남자배우들조차 모두 죽는다
3. 영화적 설정이나 장치의 최소화
4. 서연과 영숙의 캐릭터. 특히 이제껏 국내영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영숙의 캐릭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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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정의 오류가 몇몇 보이는 영화이지만, 스릴러 장르의 세대변화 같은 것을 느꼈다고나 할까(젊어진 것 같다)
또한 군더더기 없어 보이는 세련되고 스타일리쉬한 한 편의 스릴러 영화처럼 느껴진다.
씨네랩 에디터 Hez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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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사랑하는 것만큼 당신을 사랑했더라면.
나를 사랑하는 것만큼 당신을 사랑했더라면 사랑이라는 단어가 최악의 다른 말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수많은 선택 속에서도 또 다른 선택을 하는 율리에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그의 이상향과 사랑은 빠져들었다고 생각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이루어진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에는 많은 문제에도 포기하지 않는 성격과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실제가 아닌 정신과 감정을 좇던 율리에는 사람 자체를 담는 일을 선택하게 되고 그와 동시에 사랑에 빠진다. 무엇이든 해내며 끊임없이 변화를 마주하는 율리에 와 그를 아우르고 있는 사랑이라는 감정은 그로 하여금 최악의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에 큰 힘을 싣는다. 좀 더 나은 무언가를 위해 기다리고 있는 한 여자와 그에게 없어서는 안 될 사랑은 왜 그에게 있어서 최악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율리에는 정착하지 못한 채 지나간 시간 앞에서 더욱 혼란스러워한다. 편안함 앞에서 족쇄를 느끼기도 하고 낯섦에서 자유를 느끼며 또 다른 선택을 한다. 율리에는 현재의 감정과 지금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감정으로 남겨두어야 하는 것들을 남겨둔 채 세상이 멈춘 것처럼 끊임없이 달린다. 그렇게 도착한 사람과 사랑 앞에서 망설이지 않고 나아가는 모습이 놀라우면서 동시에 부러웠다. 도저히 쉽지 않은 그 선택은 자신을 위해, 자신에 의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인생에서 겪을 수 있는 것 중에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이 얼마 없기에 더더욱 그랬다. 현실을 생각하면 과거와 현재를 제쳐두며 현재에 집중하는 삶을 선택할 수 없었을 텐데 그는 온몸으로 혼란에 부딪힌다.
그가 지나쳤던 것들에 의해 다시 배우기도 하고 끊임없이 질문하며 나아가고 생각으로 그치지 않는 행동은 일련의 과정들을 거쳐 자신의 본질을 찾아간다. 받아들이는 의연함과 현재에서 비롯된 미래를 잃었을 때, 찾아오는 감정이 내가 사라지면 내가 기억하는 너도 사라질 거라는 말로 남는다는 것도 그가 했던 만남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가 했던 선택이 결코 쓸모없는 행위가 아녔음을 방증한다. 수많은 사람이 사랑하고 후회하면서도 끊임없이 사랑하는 이유인가 보다.하지만 그 사랑에도 끝은 존재한다. 영원할 것 같았던 사람들이 흩어져 사라지고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순간을 마주한다. 사랑할 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고 최악이었던 내가 보였다. 사랑할 땐 최악이 되었던 '나'는 '나'를 사랑하기에 더 최악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수많은 챕터를 넘기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가 했던 선택과 사랑은 그저 치기 어린 것에 불과했을지도 모르나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는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겐 욕심, 누군가에겐 상처였던 율리에의 사랑은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가며 진정으로 원하던 사랑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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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가장의 숨겨둔 분노 표출기
결혼생활이 꽤 오래 지나면서 아내 또는 남편과의 관계가 소홀해지는 시기가 온다. 사춘기를 맞은 아이들은 부모에게 섭섭함을 토로하고 뭔가 대단한 걸 해주길 바란다. 어쩌면 인생의 권태기라고 부를 수 있을 그 시기는 남자에게도, 여자에게도 조금은 힘든 시기다. 그런 과정에서 부부는 점점 관계가 멀어지고 아이들과도 조금씩 멀어져 간다. 그럴 때면 진정한 자기 자신에 대해 성찰하고 그것을 드러내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인정받으려 하기도 한다.
영화 <노바디>의 주인공 허치(밥 오덴커크)는 아내 레베카(코니 닐슨)와 권태기를 겪고 있고, 아들에게는 무시당하기 일쑤다. 어느 날 강도가 들었을 때, 강도를 방망이로 제압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놓아주자 아들은 더욱 아빠를 무시한다. 특히 영화 초반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허치가 겪는 평범한 일상을 반복적으로 짧은 컷으로 보여주는데 그저 평범한 가장으로 보이고, 삶이 조금은 지루해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허치는 더욱 움츠러들어있고 자신의 의견을 다른 사람과 제대로 나누지 못한다.
그때 집에 침투한 강도는 허치가 가진 과거의 무언가를 깨운다. 딸의 고양이 팔찌를 가져간 강도를 탐색하여 주소를 알아내고 그곳에 가서 그들을 협박하는 모습에서는 그의 분노가 표출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그것을 억누르고 있다. 그 강도의 집을 나와서 집에 올 때 버스에서 만난 불량배 일당은 허치가 숨기고 있던 본성을 완전히 깨운다. 그때부터 영화는 본격적인 액션을 시작한다.
<존 윅>의 각본가 데릭 콜스타드와 기획자 데이비드 레이치가 신인 감독과 만들어낸 <노바디>는 존 윅의 분위기가 많이 난다. 타격감 있는 액션과 독특한 시퀀스는 영화에 신선함을 느끼게 해 주고, 통쾌함을 준다. 그렇게 주인공 허치가 악당에 대항하여 하나하나 깨나 가는 모습을 보면 그가 숨기고 있던 본성을 볼 수 있고, 그가 가진 능력의 한계치는 어디까지인지, 그의 과거가 무엇인지 궁금하게 한다. 숨겨진 과거가 있다는 점에서 존 윅이라는 캐릭터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
어쨌든 허치는 영화 안에서 한 가정의 남편이자 아빠로서의 자존감을 회복해 나간다. 결국 그가 가진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야 말로 가족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가 솔직하게 과거를 털어놓고 그것을 보여줬을 때, 그의 아내는 그것을 결국 받아들인다. <노바디>의 이야기는 가정의 회복이라는 측면에서는 영화 <존 윅>과는 다른 길을 간다. 가족 드라마에 좀 더 치중하면서 액션은 <존 윅>보다는 덜 스타일리시하고 밀도가 낮다. 그럼에도 오락영화로서는 어느 정도 기본 재미는 갖추고 있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간단한 리뷰가 포함된 movielog를 제 유튜브 채널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주로 말 위주로 전달되기 때문에 라디오처럼 들어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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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바디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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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라이 대 싸이코 / 변요한 신혜선 / 그녀가 죽었다 / 스토킹 범죄
영화직관하는남자 홍큐의 "그녀가 죽었다"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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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노회찬6411> 메인 예고편
시커메진 한국 정치의 판을 바꾸고자 했던 사람
서민의 언어로 그들의 속을 시원하게 대변했던 사람
함께 비를 맞으며 약자와 공감하고자 했던 사람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길 희망했던 사람
누구나 악기 하나 정도는 다룰 수 있는 사회를 꿈꿨던 사람
지금 더욱 그리운 이름
노회찬의 진짜 이야기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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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히어> 메인 예고편
인생이라는 대단한 모험 그 모든 순간은 여기서✨ [히어] 메인 예고편 공개📸 2025년 2월 메가박스 대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