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onymoushilarious2024-05-31 22:23:07
다빈치 코드를 보고 두서없이 주절거리는 글
영화적 내용은 없습니다. 그저 뻔한 주절거림이에요
댄 브라운을 한때 좋아했었다. 아주 과거의 일이다. 그런 그를 좋아하는 나는 음모론에 흥미를 느끼는 걸까. 좋아하는 프로그램이 '그것이 알고싶다'인 것을 보면 그런 험악한 범죄를 재구성하는 과정이 흥미롭다고 생각한다면, 이런 나 사이코패스인걸까. 아 모르겠고 걍 미스터리 분야에 관심있다는 것으로 정리하자. 댄브라운에 심취한 건 '다빈치코드' 때문이었다.
미스터리에 미치는 인간이 종교계의 끝판왕인, 그 분의 삶을 다시 추적하는 내용에 흥미기 안갈 수 있었겠는가. 그저 미지의 세계인데. 하지만 그 추론과정에 역사적인 사료의 객관성이 고려된 것 같진 않다. 사실 음모론으로 시작해 음모론으로 끝나는 서사라고 할 수 있다. 누군가는 신성모독이라고 할테지만 내게 종교는 탐구의 대상이지 믿음의 대상은 아니라서 그저 이상한 애가 뜬소리하네 라고 생각해주길 바란다.
예수는 사실 한 명의 인간이었고 가정도 있었으며 아내도 있었다는 가정은 너무나 위험한 추론이다. 그런 설이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이 서사에 빠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세상에 산재하는 다양한 상징에 대한 해석을 보는 재미가 있었다. 여성과 남성을 가르는 기호 뿐만 아니라 다빈치의 그림에서 숨겨놓은 의미가 있다니, 분석적이면서 공상이 많은 나에게 큰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찾아보니 서사 속 의미들과 예수에 관련한 주장들은 거의 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주장들이던데, 또 그런 허무맹랑한 이야기들이 듣고 있으면 재미는 있다. 그러니 호사가라는 단어도 있는 거겠지.
지금까지 내가 이야기한 내용은 소설을 기반으로 한 감상이었다. 영화도 최근에 봤는데 글만 못했다. 아무래도 영화라는 매체 특성상 역사를 함축해 설명해야 하고 서스펜스도 있어야 햐고 하는데, 워낙 방대한 역사를 두 시간으로 설명하려니 부족한 지점이 보였다. 방대한 역사를 대사로 처리하기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지막에 갈수록 소설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해가 갈까 싶은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소설을 잘 묘사한 영화임은 틀림없다. 그정도로 표현해내기도 쉽지 않았겠다 싶다. 어딘가 상징을 찾고 분석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에게 로버트랭던은 얼마나 멋있는 인간이었겠는가. 그 캐릭터에 대한 애정으로 끝까지 봤다고 해도 된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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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만에 넷플릭스 전세계 1위 한국 드라마 지옥 정주행 하기(해석)
넷플릭스 오리지날 한국 드라마 지옥 1~3 편의 내용입니다.
영화에취한다 비지니스메일: allwey02@gmail.com
사용중인 이어폰 : 저지연 무선이어폰 GTW270 hybr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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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2021년 10월 신작 공개예정
[WEEKEND CHOICE MOVIE] #넷플릭스#넷플릭스신작 #NETFLIX
#넷플릭스10월 #넷플릭스공개예정 #백스피릿 #마이네임 #아무도살아서나갈수없다 #네집에누군가있다 #더길티
영화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https://blog.naver.com/rainbbox
@Weekend Choice Mo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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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좋은 사람> 30초 예고편
고등학교 교사 '경석'의 반에서 지갑 도난 사건이 발생하고, 같은 반 학생인 '세익'이 범인으로 지목된다.
'경석'은 '세익'을 불러 어떤 말을 해도 믿을 테니 진실을 말하라고 하지만,
세익은 무조건 아니라며 억울함을 호소한다.
그날 밤, 학교에 데려왔던 ‘경석’의 딸 ‘윤희’가 교통사고를 당하게 되고
또 다시 ‘세익’이 범인으로 지목되는데…
의심하는 순간 모든 것이 흔들렸다
의심과 믿음 그 사이에 좋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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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변신: 어느날 갑자기> 예고편
군의관 엘리자베스는 스스로 PTSD를 의심하며 집으로 돌아온다. 가족과 함께 치료를 하던 중 무서운 환상이 점점 더 심해짐을 경험한다. 그리고 이웃에 살고 있는 퇴마사로부터 그녀와 가족들이 집 주변에 스며든 고대 악령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다는 경고를 받는다. 이제 그녀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악령과 목숨을 건 싸움을 벌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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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의 미학
인물 뒤편을 가득 채운 붉은색 타일은 욕망을 상징하는 색채로 기능한다. 표면적으로는 따뜻하고 안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듯하지만, 그 강렬함 속에는 언제든 폭발할 수 있는 불안정성과 위기의 기운이 잠재되어 있다. 이 강렬한 색채는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이린의 얼굴과 극명한 대비를 이루며, 일상의 고요함 아래 숨겨진 감정의 긴장과 이중성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드라이버는 이 장면에서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고, 사각형의 벽걸이 거울을 통해 '프레임 속의 프레임'으로 간접적으로 등장한다. 이는 아이린과 드라이버 사이의 물리적 거리뿐만 아니라, 심리적, 감정적 거리감을 동시에 상징한다. 화면 왼편의 아이린은 부드럽고 따뜻한 자연광 아래 위치해 있는 반면, 오른편 거울 속 드라이버는 어둡게 반사된 실루엣으로 표현된다. 이 빛과 어둠의 대비는 단순한 시각적 구도를 넘어, 드라이버가 품고 있는 내면의 폭력성과 그림자를 암시하며, 동시에 아이린이 그것을 아직 인식하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빛'은 여기서 단순한 조명이 아니라 상징적 도구로 작용한다. 아이린은 드라이버라는 어둠을 비추는 유일한 존재로 설정되며, 이는 드라이버의 내면 깊숙이 자리한 구원에 대한 갈망과 내적 갈등을 은유적으로 시각화한다. 아이린은 드라이버에게 있어서 이루어질 수 없는 존재이자, 결코 닿을 수 없는 다른 세계의 존재다. 거울 속 가족 사진은 이러한 감정 구조를 더욱 구체화한다. 사진은 드라이버가 욕망하는 관계의 형태이자, 동시에 그가 영원히 속할 수 없는 세계를 상징한다. 이 사진을 둘러싼 초록빛 액자는 생명과 희망, 일상의 따뜻함을 함축하고 있으며, 아이린과 그녀의 가족을 지켜주고 싶다는 드라이버의 바람과도 맞닿아 있다.
아이린과 그녀의 가족을 지키기 위한 선택을 한 드라이버는 화면의 가로 3분의 1 지점에 위치한다. 그의 얼굴은 반으로 나뉘며, 한쪽은 희미한 빛에 드리워져 있고, 다른 한쪽은 그림자에 잠겨 있다. 이 조명 대비는 낮의 평범하고 밤에는 폭력적인 이중적 정체성 사이에서 균형을 잃어가는 존재임을 명확히 드러낸다. 갈색 계열의 커튼은 규칙적인 가로결 무늬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는 드라이버가 처한 현실의 구조적 제한과 틀을 암시한다. 커튼은 바깥 세상과의 경계를 이루는 동시에, 드라이버의 시야와 선택지를 가리는 장벽으로 기능한다. 이는 마치 그가 놓인 세계의 베일, 혹은 벗어날 수 없는 감옥처럼 보인다. 아이린과 그녀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선택한 폭력의 세계가 출구 없는 고립만을 남긴다는 것을 시각화한다. 왼쪽 3분의 2를 채운 커튼과 오른쪽 벽면의 어둠, 그리고 그 사이 좁은 틈에 위치한 드라이버는 마치 벼랑 끝에 몰린 존재처럼 보인다. 희미한 빛조차 그에게 완전히 닿지 못하고, 그는 점점 어둠의 세계로 잠식되는 중이다. 해당 쇼트는 드라이버가 더 이상 일상으로 되돌아갈 수 없음을 암시한다. 그는 이미 파괴자로 이동하고 있으며, 커튼이라는 시각적 경계는 그가 어떤 선을 넘었음을 시사한다. 돌파구는 없고, 빛은 점점 사라진다. 이 장면은 드라이버의 내면과 운명의 방향성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정교한 시각적 구성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드라이버는 상징적인 전갈 자켓을 입은 채, 붉은 문을 향해 좁고 긴 복도를 걷는다. 전갈은 사냥꾼이자 파괴자의 의미를 가지며, 드라이버가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폭력의 숙명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는 오른손에 망치를 들고 있으며, 이는 곧 파괴의 수단이자 보호의 도구로 이중적으로 기능한다. 드라이버는 프레임의 정확한 중심, 소실점 위에 배치되어 있다. 이는 그가 되돌아갈 수 없는 선택지에 다다랐다는 시각적 표현이자, 운명적으로 이끌리는 선형 구조 안에 있다는 암시다. 화면 끝에 위치한 붉은색 문과 벽면 장식은 드라이버 내면의 폭력성과 피를 상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이린을 향한 욕망과 뜨거운 보호 본능을 상징한다. 이는 그가 폭력을 택함으로써 사랑을 지키고자 하는 모순된 결단을 나타낸다. 복도 양옆에 길게 걸린 여러 개의 전구형 조명은 아이린이라는 인물의 존재를 상징하는 '빛'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 빛은 드라이버가 완전히 어둠 속으로 빠져들지 않도록 유일하게 남겨진 희미한 지표이자, 그의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내면의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빛은 그가 도달하려는 공간을 밝히지 않는다. 그는 오직 붉은 문 너머, 불확실한 세계로 걸어 들어갈 뿐이다. 이 장면은 드라이버라는 인물이 사랑과 파괴, 구원과 타락의 경계에 서 있는 존재임을 시각적으로 명확하게 드러낸다. 드라이버는 스스로 선택한 길 위에 있지만, 더 이상 돌아갈 곳은 없다.
드라이버가 폭력을 휘두를 때마다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극단적인 앙각은 드라이버의 존재를 과장하고 왜곡하며, 인간의 형상을 넘어서 괴물 혹은 신화적 존재로 치환시킨다. 이 앙각은 단순한 시점의 전환이 아니라, 드라이버 내면 깊숙이 감춰진 잔혹성과 근원적인 욕망을 끌어올리는 장치로 작용한다. 화면에서 드라이버의 주먹과 손에 쥔 망치는 왜곡된 구도 속에서 더욱 거대하고 위협적으로 강조된다. 이는 '사랑을 위해 악마가 될 수 있는 자'라는 드라이버의 정체성과 감정의 극한을 시각적으로 압도하는 방식으로 표현한다. 배경에 깔린 강렬한 붉은색은 폭력의 순간마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색채로, 파괴와 욕망, 동시에 아이린을 향한 집착적 보호 본능을 상징한다. 이 장면은 드라이버가 더 이상 인간적인 도덕성의 경계를 따르지 않음을 명확히 드러내며, 그의 사랑이 어떻게 파괴의 형태로 발현되는지를 시각적으로 응축한다.
롱샷으로 잡았지만, 좌측에 배치된 드라이버의 존재가 희미해지기는 커녕 더욱 극대화된다. 전체적으로 안개가 껴 차갑고 어두운 톤에 대비되게 가면을 쓴 드라이버의 뒤로 두 개의 주홍빛 등불이 비춰지고 있다. 더는 물러날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해버린 드라이버의 냉혹한 다짐을 보인다. 두 개의 등불은 드라이버와 아이린의 사랑, 또는 드라이버가 지키고 싶은 아이린과 그의 아들을 상징한다. 이 쇼트는 드라이버의 결연한 다짐을 무표정한 실루엣으로 완성한다.
<드라이브>는 말보다 색감과 조명, 구도 배치와 샷의 크기, 그리고 인물 사이의 거리감으로 감정을 표현하며 폭력과 사랑 그리고 고독에 선 주인공 ‘드라이버’의 초상을 완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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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FF 데일리] K-드라마 5스푼 + 반전 3스푼 + 스릴러 2스푼
악의 기원 /The Origin of Evil
세바스티앙 마르니에 Sébastien MARNIER
France, Canada/2022/123min/불면의 밤
생선 통조림 공장에서 일하는 스테판. 중년의 나이가 되도록 단 한 번도 아버지를 보지 못했던 그녀가 드디어 아버지 세르주를 만난다. 아버지에 관한 기억이라고는 평생 그를 원망하다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푸념뿐이지만, 어쨌든 세르주는 이제 세상에 단 하나밖에 남지 않은 그의 혈육이다. 어렵게 용기를 내 세르주를 찾아간 스테판. 당연하게도 세르주의 현 가족은 스테판을 반기지 않는다. 부인 루이즈, 딸 조르주뿐 아니라 집에서 가사노동자 아녜스까지도 대놓고 스테판을 적대한다. 성공한 사업가인 아버지는 재산만 노리는 현 가족에게 강한 불만을 표하고 스테판은 그런 아버지와 조금씩 가까워진다.
그러나 스테판이라고 마냥 순진한 것은 아니다. 사실 그녀에게는 다른 목적이 있다. 그녀는 세르주와 그의 가족들에게 자신을 생선 통조림 공장의 노동자가 아닌 경영자라 소개한다. 단순히 주눅 들기 싫은 마음 때문은 아니다. 세르주와 조르주 부녀가 회사 경영권과 재산 분할 문제로 첨예한 갈등을 빚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스테판은 이 거짓말로 아버지에게 어필하고자 한다. 자신에게도 ‘경영 능력’이 있음을 과시함으로써 말이다. 여기까지가 〈악의 기원〉의 전반부다. 어딘가 익숙하다. 돈 많은 아버지와 배다른 형제의 유산 다툼 그리고 가족 간의 갈등과 반목. 우리가 익히 봐온 K-드라마의 전개다.
그러나 영화의 이야기 얼개를 파악한 후, 적당히 즐겁게 영화를 감상하려던 찰나, 지금까지와는 정반대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관객이 한 시간 동안 쌓아온 인물에 대한 이미지와 평가를 완전히 뒤집는 비밀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의 경계가 무너지고 주요 인물의 정체성이 뒤집힌다. 새롭게 펼쳐지는 이야기에서 기존의 연대는 깨지고 새로운 이익 공동체가 형성된다.
이 모든 이야기의 중심축에 여성들이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스테판, 루이즈, 조르주, 아녜스 그리고 스테판의 동성 연인까지. 이들이 관계의 연결망을 복잡다단하게 해체하고 재연결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 과정이 거짓말, 폭력, 위선, 범죄, 연대, 욕망을 통해 어떻게 부풀려지고 쪼그라드는지를 스릴러 형식으로 다루는 것도 감상 포인트다. 결국 영화는 자기 것이 아닌 것을 거짓으로 차지하려 하는 행위가 ‘악의 기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메시지는 영화의 주요 행위자들이 여성이라는 점에서 뒤집어 생각할 여지를 제공한다. 스테판과 아녜스/루이즈와 조르주 사이에 존재하는 계급 격차를 함께 고려했을 때, 영화의 메시지는 또 한 번 성급한 결론을 유보시킨다. 여성과 노동계급이 모두 우리 사회의 비주류라는 점에서 여기에 속한 자들의 ‘나쁜’ 욕망의 의미가 두터워지는 것이다. K-드라마, 반전‧스릴러 영화의 재미를 고루 갖춘 데다 메시지까지 흥미로워 전반부의 적당한 느슨함을 훌륭히 갈무리해낸다. ‘불면의 밤’ 섹션에 어울리는 영화다.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 초청으로 제24회전주국제영화제에 기자로 참석해 작성한 글입니다.
★이 영화의 상영 시간은 제 24회 전주국제영화제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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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을 마주하지 못한 이들에게 전하는 위로 같은
라일리는 촉망받는 미식축구 선수이다. 학교에서도 주목받는 인기남인 데다 운동선수로도 각광받고 있는 그의 삶은 문제가 없어 보인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스카웃해가겠다는 학교도 있으니 그의 삶은 그야말로 탄탄대로다. 그런데 아무도 말하지 못한 그의 핸드폰 속 세계에는 남자들의 몸자랑으로 가득한데....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정말 모호하게 인지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저 자신의 삶의 방식에 불만이 없기 때문에 정체성에 대해 깊이 탐구할 생각도 딱히 없는 것 같다. 그는 미식축구 선수로서 아드레날린이 가득한 삶에 이미 익숙해져 있고,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연기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그의 삶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리암이라는 친구와 안면을 트게 되면서 그의 온전했던 삶이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한다.
1. 잘 짜여진 운동선수의 삶 속 어울리지 않는 그의 정체성
흔히 남자가 남자를 좋아한다고 하면 그 남자의 행동이 다분히 여성스러울 것이라는 편견을 갖게 된다. 하지만 사회가 규정한 기준보다 여성스럽다고 해서 전부 다 게이도 아니거니와 사회가 규정한 기준에 맞다고 해서 게이가 아닌 것도 아니다. 라일리는 학교에서도 인기 많은, 소위 주류 문화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에 아무도 그의 정체성을 의심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남성미가 뿜뿜하는 운동선수였기 때문에 더 의심하지 못했다. 미디어에서 보여지는 게이는 여성스러운 남자들의 모습으로 많이 어필되어 왔는데, 그런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르게 보이기도 하고 말이다. 겉보기에 그는 착하고 인기많은 이성애자 남자 같아 보였다. 항상 아버지에 의해 운동 위주의 삶을 살아왔던 그였기 때문에 그는 커가면서 자신의 취향을 잘 알았지만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자신이 해야할 역할을 알아서 잘 연기한 착한 아들이었던 것이다.
그는 그에게 주어진 환경적 이득을 포기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학교에서 인기도 많고, 가족들에게도 사랑받는 아들이었던 이 포지션을 그는 포기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사람은 결국 환경의 노예라서, 좋게 말하면 잘 짜여진 생활이고, 나쁘게 말하면 통제적인 환경에서 자신을 향한 기대를 놓아버리기엔 그는 너무 어린 나이이기도 했다. 자신의 정체성을 똑바로 마주하기엔 그를 둘러싼 환경이 그를 두렵게 했고, 그렇다고 무시하기엔 그의 정체성이 그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 커져 버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의 모습이 참 보면 볼수롤 안타까웠다.
2. 리암이라는 존재
라일리의 온전한 삶에 돌을 던진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리암으로, 학교에서 게이라는 사실이 꽤나 공공연하게 퍼져 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자신의 정체성을 직시했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라일리와는 다르게 자신의 삶에 대해 긍정한다. 라일리는 자신이 살고 싶은 삶에 자신의 정체성은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혼란을 느꼈지만 리암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이니 긍정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오히려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통제적인 삶을 살던 라일리에게 그의 존재는 꽤나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몸은 리암에게 끌리고 있으면서도 이성은 그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라일리의 위선적인 태도는 리암을 질리게 했지만 라일리에게는 일종의 통과의례였다고 생각한다. 아직 자신에게 솔직할 수 없는 그에게 한 번 정도는 해야할 일종의 몸부림이었다고나 할까. 그는 그를 둘러싼 환경을 뚫고 나와야 했기 때문이다.
3. 남의 시선보다는 내 자신이 중요하다는 당연한 메시지
이 영화는 쿨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하지 못하고 살아온 라일리의 자아 찾기 프로젝트와 같은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그는 언제나 부모님을 위해서 자신을 숨기고 친구들과의 평가에 신경쓰면서 자신에게 가장 소홀했던 사람이었다. 보다보니, 이 영화는 표면적으로는 LGBTQ영화이지만 '자신을 가장 신경쓰면서 살아야 한다'는 보편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뭐, LGBTQ라고 하면 대단한 메시지가 있을 것 같지만 사실 성소수자들도 함께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들이기에 당연한 것이 아닌가 싶다. 세상의 주류 문화에 치여 자신을 돌보지 못한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 괜히 미안해졌다.
내 정체성에 대해 깨달았지만 내 자신을 표현하지 못함에서 나오는 슬픔을 나같은 이성애자들이 어떻게 이해한다고 말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영화 속에서만큼은 라일리의 여자친구가 그를 온전히 이해할 있어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많은 소수자들이 라일리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살고 있을 것이고, 온전히 나 자신이 이해받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고통받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이 영화를 추천해주고 싶다. 어떤 선택의 기로에 서 있을 때, 가장 먼저 귀기울여야 할 사람은 자기 자신이라는 메시지를 주기 위해서. 내 마음에 귀 기울이는 것이 '이기적이면 어떡하지'라는 고민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럴 땐 이기적이어도 괜찮다'는 위로를 건네고 싶을 때 추천하면 좋을 것 같다.
이런 영화를 보고 글을 쓰고 있지만 사실 내가 어떤 말을 해주어야 할 지는 모르겠다. 내가 그들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도 위선 같고, 그들에게 공감한다는 말을 하는 것도 너무 재수없어 보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내 주변에 라일리 같은 친구가 있다면 라일리의 여자친구와 같은 포지션에 있고 싶다. 그렇게 그들의 정체성을 편하게 이야기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가장 최선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극장을 나왔다.
이번 '서울프라이드영화제'를 다녀오면서 내가 봐왔던 영화들의 범주가 더 넓어진 것 같아 좋았다. 물론 그전에도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등 LGBTQ를 봐오긴 했지만 더 다양한 성수수자들의 입장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게 되어 내 상식 선에서는 생각할 수 없었던 여러 생각들이 스쳤다. 이번 영화제를 다녀오면서 나같은 이성애자들은 어떤 태도를 정립하는 것이 소수자들에게 존중을 표시하는 길일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너무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도 거짓말 같고, 너무 감정적으로 공감하는 것도 과해보일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한 발치 떨어져서 그들의 삶에 민폐가 되지 않는 것이 중요하겠다는 결론이었다. 적당한 수준의, 선을 넘지 않는 무관심을 표시하는 것, 그것이 곧 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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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부극의 새로운 템포
황량한 벌판, 결투, 피스톨, 말, 선술집 등등. 미국 개척시대를 바탕으로 하는 영화 장르 서부극을 떠올릴 때 생각나는 것들이다. 무엇보다 비장한 분위기를 빼놓을 수 없다. 사막 위에서 말과 권총에만 의지한 채 삶을 이어가는 서부극 주인공들의 모습은 ‘내던져진 삶’이라는 인간의 고독한 실존과 닮은 데가 있다. 대부분의 서부극이 쓸쓸한 비장함을 뿜는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 조금 다른 결의 서부극이 있다. 영화 〈퍼스트 카우〉는 누군가의 표적이 되어 쫓기는 중국인 남성 킹 루를 유대인인 쿠키가 구해 주면서 시작된다. 그들은 몇 년 후 정착촌에서 만나고, 돈을 벌 방법을 궁리하다가 마을의 유일한 젖소의 우유를 훔쳐 빵을 만들어 팔기로 한다. 그리 특별하지 않은 줄거리 임에도 왜 〈퍼스트 카우〉는 수많은 전문가들의 극찬을 받았을까? 이 영화가 기존의 서부극과 다른 점을 두 가지 측면에서 짚어 보자.
영화 〈퍼스트 카우〉 스틸컷우선, 두 주인공이 너무 ‘귀엽다.’ 귀엽다는 말처럼 서부극과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있을까 싶지만, 어쨌든 두 주인공 쿠키와 킹 루는 너무 귀엽다. 두 성인 남성이 우악스럽지 않은 방식으로, 세심하게 서로를 배려하며 우정을 쌓아 가는 장면들이 나올 때마다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몰래 우유를 짜는 와중에 젖소에게까지 다정하게 말 거는 쿠키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서부극의 두 남성 주인공에게서 저런 표정이 나올 수 있다는 게 정말 놀랍고 새로웠다(물론, 서부극이 아니라도 영화에서 이토록 귀엽고 사랑스러운 표정을 가진 남성 주인공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두 번째는 〈퍼스트 카우〉의 주제다. 대부분의 서부극은 개인의 강함과 탁월함으로 고난을 헤쳐 나가는 남자가 주인공이다. 여기서 우정의 자리는 없거나, 부차적이다. 주인공은 타인과 관계 맺는 대신 자기 내면에 침잠해 삶의 무게를 외로이 견딘다. 그러나 “새에게는 둥지, 거미에게는 거미줄, 인간에게는 우정”이라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구로 시작하는 〈퍼스트 카우〉는 인간이 인간임을 느끼게 하는 온기의 공간으로 우정을 그려 낸다. 고뇌하는 얼굴 대신 서로에게 기댄 두 남자의 표정이 영화의 전면에 등장하는 이유다. 〈퍼스트 카우〉는 혼자 고뇌하며 답을 찾는 서부극의 유산 위에서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자고 말하는 용기 있는 영화다.
영화 〈퍼스트 카우〉 스틸컷
〈퍼스트 카우〉가 서부극의 전통을 비틀기 위해 사용한 건 템포의 변주다. 영화는 지독할 정도로 느리다. 빠르고 빈틈없는 장면의 연속으로 전개되는 영화에 익숙해진 우리에게는 자칫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지루함의 순간을 견뎌 내고 쿠키와 킹 루의 미묘한 표정을 마주하는 데 성공한다면, 그때부터 내내 행복한 즐거움으로 영화를 볼 수 있다.
집에 놀러 온 자신을 대접하기 위해 장작을 패는 킹 루를 보며, 나는 무얼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바닥을 쓸고 나뭇가지로 친구의 집을 장식하는 쿠키의 표정은 〈퍼스트 카우〉가 지독히 느렸기에 포착할 수 있는 장면이다. 즉 영화는 느린 템포로 대상을 천천히 비춤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두 남자가 우정을 만들어 가는 긴 호흡에 동참케 한다. 〈퍼스트 카우〉의 느림은 섬세한 배려가 깃든 머뭇거림, 서로를 위하는 따뜻한 마음을 보여 주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던 것이다.
‘해롭지 않은 남성성은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 들 때가 있다. 이런 질문에 회의적인 사람이라면 〈퍼스트 카우〉를 꼭 봤으면 좋겠다. 우리는 그저 해로운 남성성이 과잉 노출되어 필요 이상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세상에 살고 있을 뿐,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쿠키와 킹 루가 각각 유대인과 중국인이라는 점도 마찬가지다. 희망은 ‘중심’에서 떨어진 저 먼 곳으로부터 이미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오래전부터.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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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0회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 추천작 ] 신화에 우리의 이야기를 담으면
제가 추천할 작품은 바로 비스트 오브 아시아 시리즈 입니다!
비스트 오브 아시아 시리즈는 EBS에서 기획한 아시아 12개국 국제공동제작 어린이청소년 시리즈물입니다. 각 나라의 신화를 현대적으로 해석해 아이들의 목소리를 담았습니다.
제가 본 작품은 한국의 단군신화를 모티브로 한 페어 트레이닝, 인도의 선악신화를 통해 자아를 찾아가는 이야기 핸드폰, 인도의 부탄의 검은목 두루미 신화 모티브로 가족의 부재를 위로하는 새엄마를 관람했습니다.
비스트 오브 아시아 시리즈에서 가장 연출적으로 인상깊게 보았던 부분은 바로 위의 사진처럼 애니메이션이 결합되었다는 것입니다! 중간중간에 신화 내용이 나올 때마다 애니메이션을 통해 신화를 표현한 것이 신기했습니다. 또 세가지의 신화들이 끊기지 않고 사람의 모습을 한 동물들을 찾는 탐정단이 있고 제보를 받아서 진행된다는 스토리 전개 방식도 새로웠습니다.
페어트레이닝의 경우 아이들이 성장하는 이야기를 양궁과 페어트레이닝이라는 소재를 통해 잘 표현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에는 견제와 비교의 대상으로만 여겨졌던 친구가 나를 더 성장시키는 존재와 함께 나아가는 존재로 인식되면서 아이들의 성장을 담은 작품입니다.
세 편의 영상으로 구성되어 다양한 나라의 신화를 만나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온라인으로 나머지 비스트 오브 아시아의 시리즈도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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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스 폰 트리에, 어둠 속의 댄서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이야기를 시작하며
들어가기에 앞서 1973년 발매된 Paul Simon의 싱글 <American Tune>이라는 노래를 잠시 소개하고자 한다. 가사를 읽어보면, 이 노래는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미국으로 이주했으나 뼛속까지 지쳐버린 이민자들이 부르는 '미국식 한의 정서'를 담은 노래이다. 잉글랜드인들을 태운 메이플라워 호가 막 신대륙에 도착했을 때 꿈과 이상으로 가득 차 있던 시절은 이미 아득한 옛날이 되었지만, 70년대에도 여전히 미국이라는 신화는 새롭게 쓰이고 있었다. 60년대 말에 소련보다 먼저 달에 도착하였으며,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룬다. 노래의 화자는, 모든 것은 진보하고 변화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이민자인 내 삶만은 나아지지 않는 것인지, 이 노동은 죽을 때까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인지를 묻는다.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메이플라워 이래 아메리칸 드림을 위한 여행은 계속된다. 이제는 오직 일신의 안식을 바라며 노래는 끝이 난다. 이 곡이 <마태 수난곡>의 코랄을 모티브로 했다는 것은 한참 뒤에 안 사실이다. 예수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수난을 기꺼이 받아들였다면, 이들은 무엇을 위해 그 수난을 감당해야 했던가?
Many's the time I've been mistaken
And many times confused
Yes, and I've often felt forsaken
And certainly misused
Oh, but I'm alright, I'm alright
I'm just weary to my bones
Still, you don't expect to be bright and bon vivant
So far away from home, so far away from home
And I don't know a soul who's not been battered
I don't have a friend who feels at ease
I don't know a dream that's not been shattered
Or driven to its knees
But it's alright, it's alright
For we lived so well so long
Still, when I think of the
Road we're traveling on
I wonder what's gone wrong
I can't help it, I wonder what has gone wrong
And I dreamed I was dying
I dreamed that my soul rose unexpectedly
And looking back down at me
Smiled reassuringly
And I dreamed I was flying
And high up above my eyes could clearly see
The Statue of Liberty
Sailing away to sea
And I dreamed I was flying
We come on the ship they call The Mayflower
We come on the ship that sailed the moon
We come in the age's most uncertain hours
And sing an American tune
Oh, and it's alright, it's alright, it's alright
You can't be forever blessed
Still, tomorrow's going to be another working day
And I'm trying to get some rest
That's all I'm trying to get some rest뉴욕 센트럴 파크에서 <American Tune>을 부르는 Slmon & Garfunkel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와 지난 2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폰 트랩 대령 역을 맡았던 故 크리스토퍼 플러머 배우의 부음 소식을 듣고서, 부모님의 추억팔이용으로 내가 어릴 적에도 같이 DVD로 돌려 보았던 영화를 오랜만에 떠올렸다. 많은 이들이 위 영화에 대하여 세대를 아우르는 추억이자 향수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라스 폰 트리에의 <어둠 속의 댄서>를 보았다. 12세 관람가, 아이슬란드 가수 비요크의 주연, 칸느 2관왕의 업적, 개봉 당시 평단의 극찬, 포스터에서 비요크의 행복한 미소를 머금은 표정 때문에 라스 폰 트리에 판 <사운드 오브 뮤직>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안이하게 관람을 시작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영화는 악랄한 - 이렇게 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 의도를 가진 감독이 만든 2시간 20분짜리 악몽이었다. <American Tune>을 들었을 때, 희망도 절망도 아닌 <수난>의 정서를, 영화를 보면서 똑같이 느꼈다. 과거와 미래의 희망은 이 뮤지컬 무대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것을 얻기 위한 과정, 아주 지난하고 힘든 과정만이 영화 속에 담길 뿐이다.
소음은 리듬이 되고 음악이 된다
1964년 미국 워싱턴 주.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아들과 함께 이민을 떠나온 셀마(비요크)는 싱크대 공장에서 일하면서 자신과 같은 유전병을 가진 아들의 눈을 고치기 위한 수술비를 벌고 있다. 영화의 오프닝은 그녀가 일과 후에 뮤지컬 연습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직장 동료 캐시(카트린느 드뇌브)도 참여하고 있다.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60년대를 풍미했던 <쉘부르의 우산>의 그 카트린느 드뇌브가 변변치 않은 무대에 억지로 올라가 있는 듯한 기묘한 모습, 일사불란한 다른 배우들과 호흡을 맞추지 못하고 홀로 겉도는 셀마의 모습을 모습은 어딘가 부자연스럽고 의심쩍다. 그녀의 뮤지컬 실력은 무대가 아니라 공장 소음 안에서 꾸는 몽상에서만 제대로 발휘된다. <라라랜드>에서 전주만 들어도 신이 나는 뮤지컬 ost에 맞추어 화려한 의상을 입은 이들이 LA 고속도로를 점거한 군무에 익숙했던 우리의 눈은, 미국 동부 공장 노동자들이 위험하고 비좁은 공장 안에서 추는 춤이 어색하기만 하다.
6mm 핸드헬드 필름 카메라로 촬영한 셀마의 일상은 그녀가 보는 세상에 대한 어지럽고 둔탁한 인상을 담고자 노력하며, 마치 한 체코계 이민자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사실성도 부여한다. 시력이 감퇴하는 대신에 예민해진 셀마의 청각은, 그녀의 삶이 매번 나락으로 떨어지는 순간에 주변의 작은 소음을 감지한다. 그 작은 소음, 규칙적인 리듬으로부터 그녀의 노래는 다시 시작되고, 셀마는 혼자서 미치기 직전의 순간에 그 박자에서 다시 희망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다른 뮤지컬 영화와 달리 관객은 뮤지컬 장면에 매번 온전히 몰입할 수가 없는데, 위험한 공장 프레스 앞에서 몽상을 하고 있는 셀마의 현실 모습이 점차 뮤지컬 장면 안으로 침투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 같은 위태로운 현실의 침투를 통해 관객의 몰입을 일부러 훼방 놓으면서, 극이 후반부로 치달아 갈수록 뮤지컬이 나오는 몇 분을 시간이 멈춰버린 지옥처럼 길게 만들어 버리는 데 성공한다.
후반부로 치달을 수록 이 소음은 하나 둘 제거되면서 성스러운 종교 음악만이 남는다. 교도소 안에서 셀마는 '여긴 왜 이렇게 조용한가요?'라고 물으면서 절망한다. 이 때 비요크의 95년도 앨범 'It's so quiet'라는 노래와 뮤비가 즉각적으로 떠올랐는데, 설마 이것까지도 감독의 시니컬한 농담인 지를 의심했다. 이 곡의 뮤비안에서 비요크는 엠마 스톤 못지않게 화려한 원색 드레스를 입고서 뮤지컬의 여주인공처럼 '여긴 너무 조용해!'라고 주변을 조용히 시킨 다음, 가장 경쾌하고 자신 있게 꽥 소리를 지른다. 그러나 셀마로 분한 그녀는 자신을 미치게 하는 고요를 쫓아내지 못한다. 겨우 통풍구로 들려오는 막연한 채플 소리에 의지하여 세상에서 가장 구슬픈 <My favorite things>를 부를 뿐이다.
비요크의 <It's so quite> 뮤직 비디오
유럽 감독이 만든 악몽 'American bad dream'
감독의 비행 공포증 때문에 이 영화가 유럽 여러 지역에서 촬영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배우 또한 데이비드 모스(빌 휴스턴 역)를 제외한 주요 캐릭터들은 모두 유럽 출신의 배우들이다. 우리는 미국 땅을 제대로 밟아본 적도 없는 덴마크 감독이 가상으로 구현해 낸 미국의 허상을 보고 있다. 2차 대전 이후, 정치와 경제적 패권은 모두 이 신대륙으로 넘어갔고, 유럽에는 오직 과거에의 향수와 문화예술적 자부심만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 착란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도움이 되지 못하며 무용한 지 영화는 낱낱이 그린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셀마는 동료들과 함께 <사운드 오브 뮤직>의 뮤지컬을 연습하고 있다. 마리아와 본 트랩가 아이들은 동화처럼 아름다운 알프스 산맥의 계곡과 산, 합스부르크 왕가의 위용을 자랑하는 아름다운 미라벨 궁전을 배경으로 이제 누구에게나 친숙한 '도레미송'을 부르고 있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로버트 와이즈 감독의 손을 거쳤으므로 티 없이 밝고, 아름답게 묘사된 장면들은 이제 관객을 골리는 악취미를 가진 유럽 감독에 의하여 생활에 찌든 유럽계 이민자들의 소일거리 취미로 축소, 재현된다.
셀마의 예술적 기질과 취미는 생산 활동에 저해되는 결격 사유가 되고, 아들의 병원비가 아니라 아버지에게 돈을 보내고 있다는 변명은 '공산주의에서는 모든 것을 나누는군요'라는 조롱으로 돌아온다. 체코에서의 좋았던 시절을 발설하면 '그러면 체코로 돌아가지 왜 여기 있냐'는 핀잔이 돌아온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이 이웃의 얼굴을 한 미국 사회의 위선을 보여주는 것은 놀랍지도 않지만, 그는 2차 대전 후 더 나은 삶을 찾아서 맹목적으로 미국 땅을 밟은 유럽계 이민자들의 무력함,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희망을 노래하는 백치미, 현실과 이상의 혼돈, 후세대를 위한 자발적이고 맹목적인 희생까지도 비틀어 보여준다.
빌과 제프, 체격이나 인상이 비슷한 마을의 두 남자가 셀마의 주위를 맴돈다. 빌은 그녀에게 트레일러를 내주고, 아들 진을 낮동안 돌봐 주는 친절하고 선한 이웃이고, 제프는 셀마에게 호감을 보이는 낯선 이다. 눈이 멀어가는 셀마에게는 이 둘의 의도와 진심을 분간할 능력이 없다. 결국 셀마는 태워주겠다는 제프의 호의를 거절하고 그녀와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가까운 빌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결정적인 그녀의 선택, 빌을 의지하고 서로의 비밀을 공유한 것을 계기로 그녀의 운명은 추락의 길을 걷는다.
영화가 빌을 묘사하는 방식은 흔한 미국 영화에서 악당을 그리는 방식과는 다르다. 그는 사악하기보다는 저열한 인물이다. 치밀하다기보다는 '눈 가리고 아웅'식의 거짓말로 둘러대고, 부인이 그의 거짓말을 믿도록 신파 장면을 연출하며, 경제적 정신적 파산으로 인해 죽음을 생각해왔으나 스스로 죽을 용기도 없어서 셀마에게 그 역할을 위임한다. 부인과 셀마뿐 아니라, 정의를 지키다 순국한 희생양으로 의로운 죽음을 맞았다고 스스로 믿을 만큼 자기 자신까지 속이는 비열한 인물이다. 그래서인지 셀마의 범죄 장면은, 살면서 웬만하면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을 만큼 지리멸렬하였다. 앞서 말했듯이 이 장면을 끔찍하도록 길게 느껴지게 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뮤지컬 대사와 음악이다. 이제 그녀의 환상 속에서 강은 핏빛으로 흐르며, '날 용서할 수 있나요'라는 그녀의 노래는 부조리의 끝을 달린다.
수녀에서 어머니로, 어머니에서 수녀로
<사운드 오브 뮤직>의 마리아는 수녀에서 선생님으로, 다시 트랩 가 아이들의 어머니로 신분이 바뀐다. 마리아의 재기 발랄함과 에너지를 감당하지 못하는 수녀원, 트랩 대령과의 초반 대립을 거쳐, 그녀는 오직 자신의 노래로써 한 가족을 변화시킨다. 후에 그녀의 부재를 앓는 아이들을 위해 아내이자 자애로운 어머니로 돌아와 한 가족을 이루게 된다. 반면 <어둠 속의 댄서>의 셀마는 숙제하는데 이상한 질문만 하는 어머니, 아들의 생일에 자전거도 못 사주는 어머니, 범죄자 어머니, 아이가 찾아도 답이 없는 어머니이다. 셀마는 그녀의 유전병 때문에 서서히 시력이 감퇴하자 주인공 마리아 역에서 수녀 역의 조연으로 밀려난다. 이것은 어머니(Mother)에서 살인자(Murderer)로, 그리고 제도적으로 아이와 어떤 연결고리도 갖지 못하는 희생당하는 성 처녀와 같은 수녀(Nun, 아이에게는 무의미함 None)로 전락하는 것을 상징한다. 마리아의 선택은 수녀원의 자비로운 허락과 자유 의지에 따랐던 반면, 셀마에게는 점점 극단적이고 좁은 A/B 선택지만 주어질 뿐이다. 그녀를 진심을 다해 돕고자 하는 캐시마저 이 시스템에 동조하게 되는 것은 슬픈 역설이었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은 셀마를 잔다르크에 자주 비견했다고 한다. 마지막 순간에 '진(Jean)'의 이름을 부르짖는 그녀는 브레송의 <잔다르크의 재판>에서 누구도 굽힐 수 없는 신념을 가졌던 잔(Jeanne)의 모습을 닮아있다. 그녀가 원하여 자유 의지로 신념의 전쟁을 했는지, 하늘에 있는 누군가 계시를 내렸는지를 묻는다면 전혀 그렇지 않다. 그녀는 잔 다르크처럼 의연한지를 묻는다면 역시 그렇지 않다. 그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전화기에 대고 화내며 울부짖고, 두려움과 고통 때문에 몸부림친다. 사실 그녀는 평범한 어머니, 선생님이자 아이들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되고 싶어 했던 한 여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바라던 대로 운명의 되물림이 끊어졌다는 소식을 들으며 결국 그녀는 자신이 치른 희생에 합당한 구원을 받았다는 듯 수그러든다. 그녀의 마지막을 지켜보는 관객 앞에서 그녀의 마지막 절규 혹은 노래가 울려 퍼지고, 한 번의 추락, 그리고 뮤지컬의 막이 드디어 닫힌다.
서론에서 언급했던 폴 사이먼의 <American Tune>에서 후렴구 가사를 다시 곱씹어 보았다. "I dreamed I was dying"에서 "And I dreamed I was flying"으로 변주, 높이 승화되는 구절은, 죽음을 통해 비로소 노동의 고통에서 해방된 육신을 말한다. 그리고 해방된 자는 이제 자유의 여신상이 바다로 항해하는 저 이상향의 풍경을 또렷하게 내려다볼 수 있다. 강탈당한 것을 지켜내고 본인 스스로까지 제물로 바치고 나서야 셀마는 시력을 되찾아 자신의 인생이 어떤 의미였는지 또렷하게 직시할 수 있다. 그렇게 더딘, 노동자들의 피땀으로 흘러가는 이 항해는 후대에게 전승된다.
And I dreamed I was flying
And high up above my eyes could clearly see
The Statue of Liberty
Sailing away to sea
And I dreamed I was flying마치며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는 전쟁이 모든 것을 휩쓸기 직전에 사람들이 품었던 꿈과 희망, 가족의 결합을 노래하였다. 그리고 난민이 된 트랩 가 가족들이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서 알프스를 희망차게 넘으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어린 시절 영화를 보면서 항상 이상했던 것은 알프스는 춥고 험할 텐데 이 사람들은 동네 뒷동산을 산보하듯 노래를 부르고 행복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즉 영화는 불행했던 과거(트랩가 7남매 어머니의 죽음)와 다가올 불안한 미래(난민의 삶)는 잘라버린 채 온전하고 행복한 모습들만 보여준다. 마치 이에 대한 블랙 패러디처럼, <어둠 속의 댄서>는 셀마가 이민 전 행복했었던 체코에서의 과거를 보여주는 것도 생략하고 , 그리고 그녀의 희생을 통해 아들 진에게 주어진 좀 더 밝은 미래를 보여주지 않은 채 무대의 막을 내린다.
영화를 보면서 한부모, 장애인, 이민자, 블루칼라 노동자 등 모든 측면에서 의지할 곳 없는 사회 소수자인 한 여성을 여러 장치들을 가지고 극한의 상황으로 몰아가는 가학성이 과연 필수 불가결한 것이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실제로 영화는 많은 논란거리를 낳았고, 2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평단과 관객의 평가 또한 극명히 갈리고 있다. 형식적으로는 뮤지컬 장르를 표방하고는 있지만 사실은 관객을 심적으로 괴롭히기 위한 인위적인 수단에 불과한 게 아니었나? 감독은 실제로 홀로 아이를 키우고 있던 비요크를 비슷한 상황에 몰아넣어 과하게 몰입시킴으로써 훌륭한 연기가 아닌 그녀의 진실된 고통을 착취한 것이 아닌가?
사디스트적인 악취미를 가진 감독이 단지 본인의 유희를 위해 이 영화를 만든 게 아니라는 가정 하에, 이 씁쓸하고 어두운 뮤지컬 영화는 종교적인 희생과 구원에 대한 메시지를 담은 20세기판 <마태 수난곡>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감독은 브로드웨이 뮤지컬보다는 차라리 <셀마 수난곡>을 쓰고 있는 것 같다. 마지막에 나무판자 위에 몸을 결박당하는 셀마의 모습을 보며 성경에 나오는 '그 존재'가 아닌 다른 누구를 떠올릴 수 있겠는가? 그녀는 20세기의 아메리칸 드림을 믿고 현실에서 구원받기 위한 모든 이민 세대들을 위해 스스로 희생당한 대속죄인이다. 따라서 그녀에게 가해지는 것들은 자식 세대가 같은 고통을 겪지 않기 위해 필연적으로 감내해야 할 시련이기에, 그녀는 친구의 얼굴을 한 어떤 '사탄'의 시험과 유혹에도 이겨낸다. 이로써 그녀의 아들과 후손들은 광명의 한 자락을 볼 수 있다. 그들은 또 다른 결의 결핍과 상처를 떠안은 채 아메리칸 드림의 항해를 이어간다.
[Eurofilm 11. 덴마크, 독일,스웨덴, 네덜란드, 미국, 영국, 핀란드,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2021년 3월 6일 감상 / 2021년 3월 7일 씀
* 본 콘텐츠는 브런치 karenine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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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만에 넷플릭스 전세계 1위 한국 드라마 지옥 정주행 하기(해석)
넷플릭스 오리지날 한국 드라마 지옥 1~3 편의 내용입니다.
영화에취한다 비지니스메일: allwey02@gmail.com
사용중인 이어폰 : 저지연 무선이어폰 GTW270 hybr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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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2021년 10월 신작 공개예정
[WEEKEND CHOICE MOVIE] #넷플릭스#넷플릭스신작 #NETFLIX
#넷플릭스10월 #넷플릭스공개예정 #백스피릿 #마이네임 #아무도살아서나갈수없다 #네집에누군가있다 #더길티
영화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https://blog.naver.com/rainbbox
@Weekend Choice Mo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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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좋은 사람> 30초 예고편
고등학교 교사 '경석'의 반에서 지갑 도난 사건이 발생하고, 같은 반 학생인 '세익'이 범인으로 지목된다.
'경석'은 '세익'을 불러 어떤 말을 해도 믿을 테니 진실을 말하라고 하지만,
세익은 무조건 아니라며 억울함을 호소한다.
그날 밤, 학교에 데려왔던 ‘경석’의 딸 ‘윤희’가 교통사고를 당하게 되고
또 다시 ‘세익’이 범인으로 지목되는데…
의심하는 순간 모든 것이 흔들렸다
의심과 믿음 그 사이에 좋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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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변신: 어느날 갑자기> 예고편
군의관 엘리자베스는 스스로 PTSD를 의심하며 집으로 돌아온다. 가족과 함께 치료를 하던 중 무서운 환상이 점점 더 심해짐을 경험한다. 그리고 이웃에 살고 있는 퇴마사로부터 그녀와 가족들이 집 주변에 스며든 고대 악령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다는 경고를 받는다. 이제 그녀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악령과 목숨을 건 싸움을 벌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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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의 미학
인물 뒤편을 가득 채운 붉은색 타일은 욕망을 상징하는 색채로 기능한다. 표면적으로는 따뜻하고 안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듯하지만, 그 강렬함 속에는 언제든 폭발할 수 있는 불안정성과 위기의 기운이 잠재되어 있다. 이 강렬한 색채는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이린의 얼굴과 극명한 대비를 이루며, 일상의 고요함 아래 숨겨진 감정의 긴장과 이중성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드라이버는 이 장면에서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고, 사각형의 벽걸이 거울을 통해 '프레임 속의 프레임'으로 간접적으로 등장한다. 이는 아이린과 드라이버 사이의 물리적 거리뿐만 아니라, 심리적, 감정적 거리감을 동시에 상징한다. 화면 왼편의 아이린은 부드럽고 따뜻한 자연광 아래 위치해 있는 반면, 오른편 거울 속 드라이버는 어둡게 반사된 실루엣으로 표현된다. 이 빛과 어둠의 대비는 단순한 시각적 구도를 넘어, 드라이버가 품고 있는 내면의 폭력성과 그림자를 암시하며, 동시에 아이린이 그것을 아직 인식하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빛'은 여기서 단순한 조명이 아니라 상징적 도구로 작용한다. 아이린은 드라이버라는 어둠을 비추는 유일한 존재로 설정되며, 이는 드라이버의 내면 깊숙이 자리한 구원에 대한 갈망과 내적 갈등을 은유적으로 시각화한다. 아이린은 드라이버에게 있어서 이루어질 수 없는 존재이자, 결코 닿을 수 없는 다른 세계의 존재다. 거울 속 가족 사진은 이러한 감정 구조를 더욱 구체화한다. 사진은 드라이버가 욕망하는 관계의 형태이자, 동시에 그가 영원히 속할 수 없는 세계를 상징한다. 이 사진을 둘러싼 초록빛 액자는 생명과 희망, 일상의 따뜻함을 함축하고 있으며, 아이린과 그녀의 가족을 지켜주고 싶다는 드라이버의 바람과도 맞닿아 있다.
아이린과 그녀의 가족을 지키기 위한 선택을 한 드라이버는 화면의 가로 3분의 1 지점에 위치한다. 그의 얼굴은 반으로 나뉘며, 한쪽은 희미한 빛에 드리워져 있고, 다른 한쪽은 그림자에 잠겨 있다. 이 조명 대비는 낮의 평범하고 밤에는 폭력적인 이중적 정체성 사이에서 균형을 잃어가는 존재임을 명확히 드러낸다. 갈색 계열의 커튼은 규칙적인 가로결 무늬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는 드라이버가 처한 현실의 구조적 제한과 틀을 암시한다. 커튼은 바깥 세상과의 경계를 이루는 동시에, 드라이버의 시야와 선택지를 가리는 장벽으로 기능한다. 이는 마치 그가 놓인 세계의 베일, 혹은 벗어날 수 없는 감옥처럼 보인다. 아이린과 그녀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선택한 폭력의 세계가 출구 없는 고립만을 남긴다는 것을 시각화한다. 왼쪽 3분의 2를 채운 커튼과 오른쪽 벽면의 어둠, 그리고 그 사이 좁은 틈에 위치한 드라이버는 마치 벼랑 끝에 몰린 존재처럼 보인다. 희미한 빛조차 그에게 완전히 닿지 못하고, 그는 점점 어둠의 세계로 잠식되는 중이다. 해당 쇼트는 드라이버가 더 이상 일상으로 되돌아갈 수 없음을 암시한다. 그는 이미 파괴자로 이동하고 있으며, 커튼이라는 시각적 경계는 그가 어떤 선을 넘었음을 시사한다. 돌파구는 없고, 빛은 점점 사라진다. 이 장면은 드라이버의 내면과 운명의 방향성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정교한 시각적 구성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드라이버는 상징적인 전갈 자켓을 입은 채, 붉은 문을 향해 좁고 긴 복도를 걷는다. 전갈은 사냥꾼이자 파괴자의 의미를 가지며, 드라이버가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폭력의 숙명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는 오른손에 망치를 들고 있으며, 이는 곧 파괴의 수단이자 보호의 도구로 이중적으로 기능한다. 드라이버는 프레임의 정확한 중심, 소실점 위에 배치되어 있다. 이는 그가 되돌아갈 수 없는 선택지에 다다랐다는 시각적 표현이자, 운명적으로 이끌리는 선형 구조 안에 있다는 암시다. 화면 끝에 위치한 붉은색 문과 벽면 장식은 드라이버 내면의 폭력성과 피를 상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이린을 향한 욕망과 뜨거운 보호 본능을 상징한다. 이는 그가 폭력을 택함으로써 사랑을 지키고자 하는 모순된 결단을 나타낸다. 복도 양옆에 길게 걸린 여러 개의 전구형 조명은 아이린이라는 인물의 존재를 상징하는 '빛'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 빛은 드라이버가 완전히 어둠 속으로 빠져들지 않도록 유일하게 남겨진 희미한 지표이자, 그의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내면의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빛은 그가 도달하려는 공간을 밝히지 않는다. 그는 오직 붉은 문 너머, 불확실한 세계로 걸어 들어갈 뿐이다. 이 장면은 드라이버라는 인물이 사랑과 파괴, 구원과 타락의 경계에 서 있는 존재임을 시각적으로 명확하게 드러낸다. 드라이버는 스스로 선택한 길 위에 있지만, 더 이상 돌아갈 곳은 없다.
드라이버가 폭력을 휘두를 때마다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극단적인 앙각은 드라이버의 존재를 과장하고 왜곡하며, 인간의 형상을 넘어서 괴물 혹은 신화적 존재로 치환시킨다. 이 앙각은 단순한 시점의 전환이 아니라, 드라이버 내면 깊숙이 감춰진 잔혹성과 근원적인 욕망을 끌어올리는 장치로 작용한다. 화면에서 드라이버의 주먹과 손에 쥔 망치는 왜곡된 구도 속에서 더욱 거대하고 위협적으로 강조된다. 이는 '사랑을 위해 악마가 될 수 있는 자'라는 드라이버의 정체성과 감정의 극한을 시각적으로 압도하는 방식으로 표현한다. 배경에 깔린 강렬한 붉은색은 폭력의 순간마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색채로, 파괴와 욕망, 동시에 아이린을 향한 집착적 보호 본능을 상징한다. 이 장면은 드라이버가 더 이상 인간적인 도덕성의 경계를 따르지 않음을 명확히 드러내며, 그의 사랑이 어떻게 파괴의 형태로 발현되는지를 시각적으로 응축한다.
롱샷으로 잡았지만, 좌측에 배치된 드라이버의 존재가 희미해지기는 커녕 더욱 극대화된다. 전체적으로 안개가 껴 차갑고 어두운 톤에 대비되게 가면을 쓴 드라이버의 뒤로 두 개의 주홍빛 등불이 비춰지고 있다. 더는 물러날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해버린 드라이버의 냉혹한 다짐을 보인다. 두 개의 등불은 드라이버와 아이린의 사랑, 또는 드라이버가 지키고 싶은 아이린과 그의 아들을 상징한다. 이 쇼트는 드라이버의 결연한 다짐을 무표정한 실루엣으로 완성한다.
<드라이브>는 말보다 색감과 조명, 구도 배치와 샷의 크기, 그리고 인물 사이의 거리감으로 감정을 표현하며 폭력과 사랑 그리고 고독에 선 주인공 ‘드라이버’의 초상을 완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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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FF 데일리] K-드라마 5스푼 + 반전 3스푼 + 스릴러 2스푼
악의 기원 /The Origin of Evil
세바스티앙 마르니에 Sébastien MARNIER
France, Canada/2022/123min/불면의 밤
생선 통조림 공장에서 일하는 스테판. 중년의 나이가 되도록 단 한 번도 아버지를 보지 못했던 그녀가 드디어 아버지 세르주를 만난다. 아버지에 관한 기억이라고는 평생 그를 원망하다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푸념뿐이지만, 어쨌든 세르주는 이제 세상에 단 하나밖에 남지 않은 그의 혈육이다. 어렵게 용기를 내 세르주를 찾아간 스테판. 당연하게도 세르주의 현 가족은 스테판을 반기지 않는다. 부인 루이즈, 딸 조르주뿐 아니라 집에서 가사노동자 아녜스까지도 대놓고 스테판을 적대한다. 성공한 사업가인 아버지는 재산만 노리는 현 가족에게 강한 불만을 표하고 스테판은 그런 아버지와 조금씩 가까워진다.
그러나 스테판이라고 마냥 순진한 것은 아니다. 사실 그녀에게는 다른 목적이 있다. 그녀는 세르주와 그의 가족들에게 자신을 생선 통조림 공장의 노동자가 아닌 경영자라 소개한다. 단순히 주눅 들기 싫은 마음 때문은 아니다. 세르주와 조르주 부녀가 회사 경영권과 재산 분할 문제로 첨예한 갈등을 빚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스테판은 이 거짓말로 아버지에게 어필하고자 한다. 자신에게도 ‘경영 능력’이 있음을 과시함으로써 말이다. 여기까지가 〈악의 기원〉의 전반부다. 어딘가 익숙하다. 돈 많은 아버지와 배다른 형제의 유산 다툼 그리고 가족 간의 갈등과 반목. 우리가 익히 봐온 K-드라마의 전개다.
그러나 영화의 이야기 얼개를 파악한 후, 적당히 즐겁게 영화를 감상하려던 찰나, 지금까지와는 정반대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관객이 한 시간 동안 쌓아온 인물에 대한 이미지와 평가를 완전히 뒤집는 비밀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의 경계가 무너지고 주요 인물의 정체성이 뒤집힌다. 새롭게 펼쳐지는 이야기에서 기존의 연대는 깨지고 새로운 이익 공동체가 형성된다.
이 모든 이야기의 중심축에 여성들이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스테판, 루이즈, 조르주, 아녜스 그리고 스테판의 동성 연인까지. 이들이 관계의 연결망을 복잡다단하게 해체하고 재연결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 과정이 거짓말, 폭력, 위선, 범죄, 연대, 욕망을 통해 어떻게 부풀려지고 쪼그라드는지를 스릴러 형식으로 다루는 것도 감상 포인트다. 결국 영화는 자기 것이 아닌 것을 거짓으로 차지하려 하는 행위가 ‘악의 기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메시지는 영화의 주요 행위자들이 여성이라는 점에서 뒤집어 생각할 여지를 제공한다. 스테판과 아녜스/루이즈와 조르주 사이에 존재하는 계급 격차를 함께 고려했을 때, 영화의 메시지는 또 한 번 성급한 결론을 유보시킨다. 여성과 노동계급이 모두 우리 사회의 비주류라는 점에서 여기에 속한 자들의 ‘나쁜’ 욕망의 의미가 두터워지는 것이다. K-드라마, 반전‧스릴러 영화의 재미를 고루 갖춘 데다 메시지까지 흥미로워 전반부의 적당한 느슨함을 훌륭히 갈무리해낸다. ‘불면의 밤’ 섹션에 어울리는 영화다.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 초청으로 제24회전주국제영화제에 기자로 참석해 작성한 글입니다.
★이 영화의 상영 시간은 제 24회 전주국제영화제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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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을 마주하지 못한 이들에게 전하는 위로 같은
라일리는 촉망받는 미식축구 선수이다. 학교에서도 주목받는 인기남인 데다 운동선수로도 각광받고 있는 그의 삶은 문제가 없어 보인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스카웃해가겠다는 학교도 있으니 그의 삶은 그야말로 탄탄대로다. 그런데 아무도 말하지 못한 그의 핸드폰 속 세계에는 남자들의 몸자랑으로 가득한데....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정말 모호하게 인지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저 자신의 삶의 방식에 불만이 없기 때문에 정체성에 대해 깊이 탐구할 생각도 딱히 없는 것 같다. 그는 미식축구 선수로서 아드레날린이 가득한 삶에 이미 익숙해져 있고,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연기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그의 삶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리암이라는 친구와 안면을 트게 되면서 그의 온전했던 삶이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한다.
1. 잘 짜여진 운동선수의 삶 속 어울리지 않는 그의 정체성
흔히 남자가 남자를 좋아한다고 하면 그 남자의 행동이 다분히 여성스러울 것이라는 편견을 갖게 된다. 하지만 사회가 규정한 기준보다 여성스럽다고 해서 전부 다 게이도 아니거니와 사회가 규정한 기준에 맞다고 해서 게이가 아닌 것도 아니다. 라일리는 학교에서도 인기 많은, 소위 주류 문화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에 아무도 그의 정체성을 의심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남성미가 뿜뿜하는 운동선수였기 때문에 더 의심하지 못했다. 미디어에서 보여지는 게이는 여성스러운 남자들의 모습으로 많이 어필되어 왔는데, 그런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르게 보이기도 하고 말이다. 겉보기에 그는 착하고 인기많은 이성애자 남자 같아 보였다. 항상 아버지에 의해 운동 위주의 삶을 살아왔던 그였기 때문에 그는 커가면서 자신의 취향을 잘 알았지만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자신이 해야할 역할을 알아서 잘 연기한 착한 아들이었던 것이다.
그는 그에게 주어진 환경적 이득을 포기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학교에서 인기도 많고, 가족들에게도 사랑받는 아들이었던 이 포지션을 그는 포기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사람은 결국 환경의 노예라서, 좋게 말하면 잘 짜여진 생활이고, 나쁘게 말하면 통제적인 환경에서 자신을 향한 기대를 놓아버리기엔 그는 너무 어린 나이이기도 했다. 자신의 정체성을 똑바로 마주하기엔 그를 둘러싼 환경이 그를 두렵게 했고, 그렇다고 무시하기엔 그의 정체성이 그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 커져 버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의 모습이 참 보면 볼수롤 안타까웠다.
2. 리암이라는 존재
라일리의 온전한 삶에 돌을 던진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리암으로, 학교에서 게이라는 사실이 꽤나 공공연하게 퍼져 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자신의 정체성을 직시했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라일리와는 다르게 자신의 삶에 대해 긍정한다. 라일리는 자신이 살고 싶은 삶에 자신의 정체성은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혼란을 느꼈지만 리암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이니 긍정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오히려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통제적인 삶을 살던 라일리에게 그의 존재는 꽤나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몸은 리암에게 끌리고 있으면서도 이성은 그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라일리의 위선적인 태도는 리암을 질리게 했지만 라일리에게는 일종의 통과의례였다고 생각한다. 아직 자신에게 솔직할 수 없는 그에게 한 번 정도는 해야할 일종의 몸부림이었다고나 할까. 그는 그를 둘러싼 환경을 뚫고 나와야 했기 때문이다.
3. 남의 시선보다는 내 자신이 중요하다는 당연한 메시지
이 영화는 쿨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하지 못하고 살아온 라일리의 자아 찾기 프로젝트와 같은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그는 언제나 부모님을 위해서 자신을 숨기고 친구들과의 평가에 신경쓰면서 자신에게 가장 소홀했던 사람이었다. 보다보니, 이 영화는 표면적으로는 LGBTQ영화이지만 '자신을 가장 신경쓰면서 살아야 한다'는 보편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뭐, LGBTQ라고 하면 대단한 메시지가 있을 것 같지만 사실 성소수자들도 함께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들이기에 당연한 것이 아닌가 싶다. 세상의 주류 문화에 치여 자신을 돌보지 못한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 괜히 미안해졌다.
내 정체성에 대해 깨달았지만 내 자신을 표현하지 못함에서 나오는 슬픔을 나같은 이성애자들이 어떻게 이해한다고 말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영화 속에서만큼은 라일리의 여자친구가 그를 온전히 이해할 있어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많은 소수자들이 라일리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살고 있을 것이고, 온전히 나 자신이 이해받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고통받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이 영화를 추천해주고 싶다. 어떤 선택의 기로에 서 있을 때, 가장 먼저 귀기울여야 할 사람은 자기 자신이라는 메시지를 주기 위해서. 내 마음에 귀 기울이는 것이 '이기적이면 어떡하지'라는 고민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럴 땐 이기적이어도 괜찮다'는 위로를 건네고 싶을 때 추천하면 좋을 것 같다.
이런 영화를 보고 글을 쓰고 있지만 사실 내가 어떤 말을 해주어야 할 지는 모르겠다. 내가 그들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도 위선 같고, 그들에게 공감한다는 말을 하는 것도 너무 재수없어 보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내 주변에 라일리 같은 친구가 있다면 라일리의 여자친구와 같은 포지션에 있고 싶다. 그렇게 그들의 정체성을 편하게 이야기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가장 최선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극장을 나왔다.
이번 '서울프라이드영화제'를 다녀오면서 내가 봐왔던 영화들의 범주가 더 넓어진 것 같아 좋았다. 물론 그전에도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등 LGBTQ를 봐오긴 했지만 더 다양한 성수수자들의 입장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게 되어 내 상식 선에서는 생각할 수 없었던 여러 생각들이 스쳤다. 이번 영화제를 다녀오면서 나같은 이성애자들은 어떤 태도를 정립하는 것이 소수자들에게 존중을 표시하는 길일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너무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도 거짓말 같고, 너무 감정적으로 공감하는 것도 과해보일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한 발치 떨어져서 그들의 삶에 민폐가 되지 않는 것이 중요하겠다는 결론이었다. 적당한 수준의, 선을 넘지 않는 무관심을 표시하는 것, 그것이 곧 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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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부극의 새로운 템포
황량한 벌판, 결투, 피스톨, 말, 선술집 등등. 미국 개척시대를 바탕으로 하는 영화 장르 서부극을 떠올릴 때 생각나는 것들이다. 무엇보다 비장한 분위기를 빼놓을 수 없다. 사막 위에서 말과 권총에만 의지한 채 삶을 이어가는 서부극 주인공들의 모습은 ‘내던져진 삶’이라는 인간의 고독한 실존과 닮은 데가 있다. 대부분의 서부극이 쓸쓸한 비장함을 뿜는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 조금 다른 결의 서부극이 있다. 영화 〈퍼스트 카우〉는 누군가의 표적이 되어 쫓기는 중국인 남성 킹 루를 유대인인 쿠키가 구해 주면서 시작된다. 그들은 몇 년 후 정착촌에서 만나고, 돈을 벌 방법을 궁리하다가 마을의 유일한 젖소의 우유를 훔쳐 빵을 만들어 팔기로 한다. 그리 특별하지 않은 줄거리 임에도 왜 〈퍼스트 카우〉는 수많은 전문가들의 극찬을 받았을까? 이 영화가 기존의 서부극과 다른 점을 두 가지 측면에서 짚어 보자.
영화 〈퍼스트 카우〉 스틸컷우선, 두 주인공이 너무 ‘귀엽다.’ 귀엽다는 말처럼 서부극과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있을까 싶지만, 어쨌든 두 주인공 쿠키와 킹 루는 너무 귀엽다. 두 성인 남성이 우악스럽지 않은 방식으로, 세심하게 서로를 배려하며 우정을 쌓아 가는 장면들이 나올 때마다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몰래 우유를 짜는 와중에 젖소에게까지 다정하게 말 거는 쿠키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서부극의 두 남성 주인공에게서 저런 표정이 나올 수 있다는 게 정말 놀랍고 새로웠다(물론, 서부극이 아니라도 영화에서 이토록 귀엽고 사랑스러운 표정을 가진 남성 주인공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두 번째는 〈퍼스트 카우〉의 주제다. 대부분의 서부극은 개인의 강함과 탁월함으로 고난을 헤쳐 나가는 남자가 주인공이다. 여기서 우정의 자리는 없거나, 부차적이다. 주인공은 타인과 관계 맺는 대신 자기 내면에 침잠해 삶의 무게를 외로이 견딘다. 그러나 “새에게는 둥지, 거미에게는 거미줄, 인간에게는 우정”이라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구로 시작하는 〈퍼스트 카우〉는 인간이 인간임을 느끼게 하는 온기의 공간으로 우정을 그려 낸다. 고뇌하는 얼굴 대신 서로에게 기댄 두 남자의 표정이 영화의 전면에 등장하는 이유다. 〈퍼스트 카우〉는 혼자 고뇌하며 답을 찾는 서부극의 유산 위에서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자고 말하는 용기 있는 영화다.
영화 〈퍼스트 카우〉 스틸컷
〈퍼스트 카우〉가 서부극의 전통을 비틀기 위해 사용한 건 템포의 변주다. 영화는 지독할 정도로 느리다. 빠르고 빈틈없는 장면의 연속으로 전개되는 영화에 익숙해진 우리에게는 자칫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지루함의 순간을 견뎌 내고 쿠키와 킹 루의 미묘한 표정을 마주하는 데 성공한다면, 그때부터 내내 행복한 즐거움으로 영화를 볼 수 있다.
집에 놀러 온 자신을 대접하기 위해 장작을 패는 킹 루를 보며, 나는 무얼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바닥을 쓸고 나뭇가지로 친구의 집을 장식하는 쿠키의 표정은 〈퍼스트 카우〉가 지독히 느렸기에 포착할 수 있는 장면이다. 즉 영화는 느린 템포로 대상을 천천히 비춤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두 남자가 우정을 만들어 가는 긴 호흡에 동참케 한다. 〈퍼스트 카우〉의 느림은 섬세한 배려가 깃든 머뭇거림, 서로를 위하는 따뜻한 마음을 보여 주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던 것이다.
‘해롭지 않은 남성성은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 들 때가 있다. 이런 질문에 회의적인 사람이라면 〈퍼스트 카우〉를 꼭 봤으면 좋겠다. 우리는 그저 해로운 남성성이 과잉 노출되어 필요 이상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세상에 살고 있을 뿐,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쿠키와 킹 루가 각각 유대인과 중국인이라는 점도 마찬가지다. 희망은 ‘중심’에서 떨어진 저 먼 곳으로부터 이미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오래전부터.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