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4-05-23 12:12:58
5월 4주 차, 최신 씨네 뉴스
<베테랑2> 류승완 감독 50년 만에 칸 입성
미드나이트 스크리닝 부문에 초청된 <베테랑2>가 10분간 기립박수를 받았습니다.
류승완 감독 "영화를 칸에서 상영하게 돼 말로 표현할 수 없이 기쁘다.
칸에 오기까지 50년이 걸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무척 짧을 것 같다"
"칸 영화제 관계자분들과 오늘 극장을 찾은 관객분들, 이 영화를 아직 만나지 못한 미래의 관객분들,
그리고 이 영화를 함께해준 배우들과 가족 모두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베테랑은 오는 하반기에 개봉 예정이며, 1편 개봉 이후 9년 만에 나오는 시리즈 작품
? 아주 어두운 분위기의 작품이 될 것이며 정해인이 멋지게 나온다고 힌트를 남김
?칸 영화제 초청 후 시놉시스가 유출되며 메인 빌런은 연쇄살인범으로 밝혀짐
5월 4주차 씨네뉴스 함께 해요!
<베테랑2> 류승완 감독 50년 만에 칸 입성
<베테랑2>가 칸국제영화제에 입성했습니다.
제77회 칸 국제영화제 미드나잇 스크리닝 부문에 초청된 <베테랑2>가 뤼미에르 대극장에서 처음으로 공개됐습니다. 상영 후 10분간 관객의 기립박수가 이어졌으며 영화를 연출한 류승완 감독은 “여러분은 칸까지 오시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셨나요? 저는 50년이 걸렸습니다”라는 말로 기쁨을 표현했습니다.
디즈니랜드 비공개 레스토랑 <클럽 33> 영화화
디즈니랜드 내에 비밀리에 존재하는 회원제 비공개 레스토랑 <클럽 33>이 영화화됩니다.
<클럽 33>은 미국 캘리포니아를 비롯해 상하이, 도큐 부지 내의 레스토랑으로 일반인에게는 공개되지 않고 주로 스폰서인 법인 회원과 개인 회원만 이용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 실사판 영화는 미스터리한 극비 클럽 33에 초대장을 받은 탐정 지망생 청년이 주인공으로 그곳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해 단골손님들이 젊은 탐정에게 사건 해결을 의뢰하는 이야기입니다.
트럼프 전기 영화 칸 영화제서 기립박수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젊은 시절을 다룬 영화 <어프렌티스>가 칸 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됐습니다.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후보에 오른 작품이며 이 영화에는 트럼프 전 대통려이 첫 부인 이바나를 상대로 강제 성관계를 갖는 장면이 담겨있어 가장 주목받는 화제작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시사회 참석한 관객들로부터 약 8분간의 기립박수를 받았습니다.
<지구를 지켜라> 리메이크 <부고니아> 요르고스 감독 연출 확정
한국의 SF 코미디 <지구를 지켜라!>의 리메이크작 연출을 요르고스 란티모스가 맡게 되었습니다.
주연은 <라라랜드>, <가여운 것들>에 출연한 미국의 대표 배우 엠마스톤과 <파워 오브 도그>, <시빌 워>로 얼굴을 알린 미국의 배우 제시 플레먼스가 주연에 캐스팅되었습니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은 엠마스톤과 <더 페이버릿>, <가여운 것들> , <카인즈 오브 카인드니스>에서 호흡을 맞춘 바 있으며 <부고니아>는 음모론에 빠진 두 젊은이가 대기업의 CEO가 지구를 파괴하려는 외계인이라고 확신하고 그를 납치하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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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어 리뷰 - 조던이 안 나오는데 재미있는 조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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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아이콘을 만든 그들의 실화
당신이 알고 있는 그 이상의 이야기
1984년, 업계 꼴찌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나이키는
브랜드의 간판이 되어 줄 새로운 모델을 찾는다.
나이키의 스카우터 소니 바카로(맷 데이먼)는
NBA의 떠오르는 루키 마이클 조던이 나이키의 미래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미 시장을 장악한 컨버스와 아디다스가 그와의 계약을 노리는 상황
나이키 팀은 조던의 마음을 얻기 위한 전략을 세우는데….
누구에게나 점프하는 순간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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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9월 5일: 위험한 특종> 메인 예고편
테러 인질극 생중계, 그리고 9억 명의 시청자 방송을 멈출 것인가, 계속할 것인가! 온에어 스릴러📻 [9월 5일: 위험한 특종] 메인 예고편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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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키싱 부스 3> 공식 예고편
[2021년 8월, 넷플릭스 공개]
엘, 아직도 학교를 결정 못 한 거야?
멋진 남친 노아와 평생 절친 리 사이에서 예비 대학생 엘은 어디로 향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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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아가씨>, 미안해 하진 않을게
*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처음 아가씨를 봤을 때는 숙희와 히데코가 남았고, 오랜만에 다시 보니 코우즈키와 백작이 남는다. 처음엔 자유를 찾은 모습에 함께 설레고 들떴다면, 이번엔 그 자유를 빼앗은 이의 이야기가 궁금해져서 그렇다. 백작은 막판에 순진하면 불법이라는 업계 불문율을 어겨서 불행을 자초한 순정 사기꾼이라 치자. 코우즈키는 히데코의 이모부다. 가족끼리 왜 그러지? 가족끼리 이럴 수 있나? 아니, 가족이니까 이렇게까지 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 그에게 취미를 물으면 독서와 책 수집이라 할 텐데, 혹여 어떤 책을 좋아하는지 제목을 묻지 않았다면 분명 후회하게 될 것이다. 가장 아끼는 책을 나열해보자. <채찍은 말한다>, <도마뱀 가죽>, <타락한 속옷 판매원들>, <백합의 바다>, <장의사의 침실>. 제목부터 스멀스멀 느껴진다. 그렇다. 책을 좋아한다는 게 19금 문학이었다. 천일야화처럼 읽고 수집하고, 다른 이들에게 들려주고 판매한다. 낭독회는 혼자만의 취미가 아니라 엄연한 사업이다. 수집한 책에 삽화가 2D였다면, 그는 낭독회에서 이를 3D로 구현한다. 가족의 일원을 연기도 전달력도 좋은 '낭독 전문 배우'로 양성했다. 처음엔 아내를 시켰고 아내가 세상을 뜨자 처조카인 히데코에게 그 역할을 맡겼다. 아내는 자살한 것도 아니었다. 도망치려던 그녀의 마지막은 코우즈키와 지하실이 알고 있다.죽은 아내도, 히데코도 좋아서 낭독을 시작했을 리 없다. 코우즈키가 그 책이 그렇게 좋아서 햇볕도 들지 않도록 어두컴컴하게 만들고, 집은 쓸데없이 크기도 남다르게 만들어서 도망치기 전에 붙잡혀 갇히는 게 더 빠르다. 지하실에 있는 다양한 신체 부위나 특이한 도구들은 그가 이미 상상에서 그치지 않는 사람이란 걸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혓바닥은 붓끝의 먹물이 스며들어 검디검다. 그 정도 열정이라면 2차 창작도 충분히 가능하다. 그가 작품을 외우기만 했을까? 낭독회에 올린 책 중에 자신이 쓴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저 멀리 프랑스에서 책을 들여올 돈이 필요해 히데코와 정혼하고, 스스로를 더러운 이야기를 좋아하는 노인이라고 말할 정도면, 참으로 대단한 인물일세.
코우즈키의 세계관은 이분법적이다. 그에게 조선은 추하고 일본은 아름답다. 아름다운 건 잔인하지만 조선은 무르고, 흐리고, 둔하기 때문이란다. 일본과 영국은 좋아하고 조선은 싫어하는 건 힘의 양상 때문이다. 역관이던 그가 성공한 건 일본이 흥하자 힘이 강한 편에 섰기 때문이다. 금광 채굴권을 비롯해서 전에는 상상하지 못할 부를 얻었다. 그의 취향대로 일본과 영국을 섞은 저택을 지었다. 하지만 사는 것과 입는 것만 바뀌는 것으론 부족하다. 그는 이렇게 가진 힘을 유지하고 싶었기에 아예 조선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일본 사람으로 탈바꿈하기 위해 애를 쓴다. 결국 조선인 아내를 버리고 일본인 아내와 결혼했다.물론 여전히 그 집의 실질적인 운영은 여전히 조선 사람들에 의해 돌아가고 있다. 조선의 아내는 그의 충실한 집사이자 정부처럼 지내고, 집안의 모든 음식은 조선인 시종들이 만들어준다. 그들은 믿을 수 있나? 조선은 추하다면서 그 조선 사람들과 어떻게 같이 잠을 자고, 밥을 먹을 수 있을까. 곁에 두고 쓸 정도는 되는 것인가. 여름에 냉면을 버리지 못하는 것을 보니, 아직 완전히 일본인이 되진 못한 모양이다. 암만, 여름엔 냉면이지.
그의 처음이 궁금하다. 어떤 계기로 19금 책을 수집하고 낭독을 하기로 했을까. 같은 것을 보고도 상상은 다르니, 그 상상을 나눠보는 게 재밌다고 했다. 19금 문학을 즐기고 수집하는 건, 문제라고 보기 힘들다. 낭독회도 크게 보면, 자신과 비슷한 취향을 가진 이들과 함께 하는 비공식 소규모 행사다.문제가 되는 건 자신만의 취향과 사업을 위해 가족을 끌어들였다는 점이다. 전처였던 조선인 아내는 의외로 자신의 생활에 만족하는 것처럼 보인다. 전 남편을 나리 마님이라고 부르고, 스스로 사사키라고 부르고, 일본인 아내나 히데코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소소하게 즐기고, 낭독회에서 무대 효과와 연출을 담당하고 있다. 무엇보다, 그녀는 낭독회에 출연하는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욕심으로 이어진 가족, 일본인 아내와 히데코는 19금 문학 낭독을 강요받았다. 원하는 대로 느낌을 살려 낭독하지 않으면 숨 막히는 체벌이 이어졌고, 도망치고 싶어도 깊은 서재에 무지의 경계선인 뱀을 두고 철창 앞에서 가로막히는 자괴감을 반복적으로 느껴야만 했다. 말대답을 하거나 분노를 표현하면 정신병원에 가두겠다는 협박을 받았다. 땅속에 묻어버리거나, 개처럼 목줄을 하게 한다는 말에 사시나무처럼 떨던 히데코의 이모는 이미 경험이 있는 듯했다. 어린 히데코는 성인이 될 때까지 가족 중에 이모부만 좋아하는 책을 이모부만 좋아하는 방식으로 낭독하는 것만 배웠다. 무슨 훈육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어느 남자를 봐도 돌 같이 느끼고, 심지어 싫어하게 되었다. 그놈의 낭독이 뭐길래. 이모부는 후견인이라는 명목으로 그녀를 조종했다.
숙희는 처음에 히데코를 두고 가엾고도 가엾다 했지만, 가장 가엾은 사람은 코우즈키가 아닐까. 히데코, 숙희, 백작, 코우즈키 모두 가짜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하지만 세 명은 서로 속이고 속임을 당하면서 각자 생각하고 있는 상대방이 가짜라는 걸 깨달았다. 백작을 사랑했어야 할 히데코는 숙희에게 빠져들었고, 히데코가 백작과 사랑에 빠지게 도와주기로 했던 숙희는 히데코에게 반했다. 히데코와 사랑에 빠지는 척만 할 예정이던 백작은, 오히려 막판에 히데코를 정말로 사랑하게 되었다. 히데코는 숙희를 어리숙하고 순진한 도둑의 딸로만 알았지만, 진심으로 자기를 걱정하고 족쇄처럼 묶여있던 낭독 책을 찢어발기고 물에 적시는 박력이 있었다. 숙희도 히데코는 세상 물정 모르는 숙맥으로 알았건만, 웬걸, 다년간의 19금 문학 낭독으로 다져진 연기력과 탁월한 배경지식에 놀라고 말았다. 백작은 남자에게 물새처럼 차가운 히데코임에도, 낭독회에서 공작부인 줄리에트로 연기한 모습과 그녀의 솔직한 모습에 매력을 느꼈다.
그러나 코우즈키가 마음을 빼앗긴 가짜는 현실이 아니라 상상이고, 사람이 아닌 이야기다. 사람은 오해를 풀고 몰랐던 부분을 알아가면서 서로를 이해하게 되지만, 이야기 속의 상상은 환상만 더해간다. 장르적 특성상 그에겐 모든 여자는 섹스라는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한다. 누군가를 어떻다고 할 때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것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를 떠올리게 되는데 비해 코우즈키는 19금 소설의 인물로만 떠올린다. 자신의 전처인 사사키가 백작과 잠자리를 하고도 남는다고 생각하며 부들부들 떨 땐, 함께 한 시간이 있는데 그리 생각하는 게 신기하다. 어느 남자든 가리지 않고 좋아할 거였으면, 애당초 당신 곁에 있지 않았을 수도 있는데.
낭독하지 않는 히데코 역시 새로운 이야기 속에 '어떤 년'일 뿐이다.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나 의심이 된다면 백작에게 묻던 그의 질문을 기억해보자. '히데코가 어떤 년인가? 부드럽던가? 조여오던가? 주름은 많이 접혔던가? 충분히 젖었던가? 애액의 점도와 탁도는? 저항하던가? 아니면 침을 뱉으면서 혐오스러워하던가? 어서 해달라고 애원하던가? ' 백작이 자신의 아내인 히데코와의 초야를 어떻게 떠벌이고 다니냐고 호통을 치거나 말거나 새로운 이야기 <처조카의 초야>에 푹 빠져있었다. 정신 차리게, 코우즈키. 히데코는 당신의 처조카야. 당신의 죽은 아내의 죽은 언니의 유일하게 살아있는 딸이라고.
세상에서 책을 제일 좋아하는 부유하신 코우즈키 나리 마님. 일본인 귀족인 척했던 제주도 출신 백작과 하룻강아지 같은 하녀 숙희 덕분에 썩 즐겁지 못하다. 아끼던 책들은 처참히 망가졌고, 낭독을 맛깔나게 해 줄 배우도 없다. 히데코가 재산을 다 찾아갔으니 새로운 책을 사거나 관리할 경제적인 여유도 없어졌다. 함께 이야기를 들은 신사들 역시 아쉬움이 완연할 것이다. 그들은 상상에 푹 빠져 이야기 속 등장인물에 감정이입을 하곤 했다. 얼마나 짜릿했을지 몰라도 우리가 보는 그들은 낭독이 울려 퍼지는 서재에서 눈을 형형하게 빛내며 때때로 주먹을 불끈 쥐거나 숨을 들이켜거나, 모자로 다리 사이를 가릴 뿐이다. 우리는 그들의 상상을 짐작할 뿐이고,
히데코와 숙희는 백작에게 '사기꾼이 사랑을 하나?'라고 물었지만 사기꾼이라고 왜 사랑을 하지 못하겠나. 거짓 속에서 진심이 더 명확하게 드러날 수 있는데. 그리고 둘이 할 소리는 아닌 게, 사람 속이고 이용하는 게 사기꾼이니 그녀들도 백작과 다를 바 없다. 차이가 있다면 이들의 작전은 성공했다는 것뿐이다. 그러니 이들이 하는 게 사랑이라면, 백작이 하는 것도 사랑이다. 코우즈키의 사랑이 픽션이라면, 세 사람이 한 사랑은 팩션쯤 될 것이다.코우즈키는 가장 좋아하던 책 5권에 맞춰 백작의 손가락을 하나씩 자르고, 손에 구멍을 뚫고, 성기를 자르려 했다. 히데코와 숙희가 코우즈키의 집에 붙잡혀 왔다면 어땠을까. 히데코의 이모를 죽이고 벚꽃나무에 매달았듯이, 그 둘도 괴롭히고 벚꽃나무에 매달거나, 낭독을 할 정도로만 살려두고 온몸을 고통스럽게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추호도 몰랐다. 아름다움이 잔인하고, 무르고 흐리고 둔한 게 추하다고 말하던 그가, 푸른 수은 연기를 이상하게 아름답다고 느끼면서, 무르고 흐리고 둔해지면서, 지하실에서 눈을 감게 될 줄 말이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그는 잔인하고 추하게 죽음을 맞이한 셈이다. 그것도 히데코의 초야 이야기를 들으려고 안달이 나서, 자기 손으로 직접 백작의 입에 수은이 담긴 담배에 불을 붙여준 것 때문에. 심지어 그가 좋아하던 이야기를 그는 늘 감상하는 입장이었지만, 그 역시 이렇게 <아가씨>라는 이야기에 담길 줄 알았을까. 안타깝지만 미안한 마음은 들지 않는다. 그가 볼모로 잡았던 가족들의 삶을 생각하면, 스스로 불러온 결말은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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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WFF 데일리] 지구는 오렌지처럼 파랗고, 일상은 전쟁처럼 평화롭다
지구는 오렌지처럼 파랗다
The Earth Is Blue as an Orange
Cast
감독: 이리나 칠리크
Synopsis
싱글 맘 ‘안나’는 아이들과 함께 우크라이나 돈바스의 전쟁 지역 최전방에 살고 있다. 영화에 대한 사랑이 깊은 ‘안나’ 가족은 전쟁 속 자신들의 삶을 영화로 찍어 나간다. 그들에게 있어 트라우마를 작품으로 만든다는 것은 인간으로 남기 위한 마지막 수단이다. (출처: 서울국제여성영화제)
Review
영화 상영 시작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엄청난 굉음이 들려옵니다. ‘사운드 조정이 잘못되었나?’ 하는 생각도 잠시, 등골이 오싹해지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아, 이게 바로 전쟁의 소리구나. 러시아와의 국지전이 계속되는 우크라이나 돈바스 지역에 사는 ‘안나’ 가족의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지구는 오렌지처럼 파랗다>는 사운드 하나만으로 늘 포격의 위험이 도사리는 전쟁의 중심지로 관객을 데려갑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이어지고 있는 지금,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안나’ 가족의 이야기를 만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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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견디며 삶의 터전을 지키는 사람들
무너진 건물, 국경을 지키는 군인들, 포탄이 떨어진 흔적, 도로를 달리는 군용 트럭. <지구는 오렌지처럼 파랗다>에는 전쟁의 피해가 그득한 돈바스 지역과 그 안에서 고통을 고스란히 견디며 살아가는 주민들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아무래도 주민들은 전쟁에 익숙해진 모양입니다. 포탄이 떨어졌을 때 고막이 찢어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웃으며 줄줄 읊어대는 돈바스의 아이들을 보면 알 수 있죠.
‘안나'의 아이들은 인터뷰 장면에서 전쟁 지역에서 사는 소회를 털어놓습니다. 포탄이 집으로 날아오는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감각이 생겼다는 아이, 전쟁이 없었다면 지금보다 더 착한 아이가 될 수 있었을 거라며 서글프게 미소 짓는 아이, 모든 걸 사라지게 한 전쟁이 공허하다고 고백하는 아이. 도대체 아이들에게 이러한 트라우마와 고통을 안기면서까지 러시아는 무얼 얻고자 하는 걸까요?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포격에 대비해야 하는 ‘안나' 가족과 돈바스 지역 주민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들이 그곳을 떠나지 않는 이유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위험을 무릅쓰고 터전을 지키려는 사람들을 마냥 답답해할 수만은 없습니다. 폭력으로 터전을 파괴하는 사람들에게 대항하는 법은 그 안에서 삶을 지속하는 방법뿐이니까요. 만약 돈바스 지역을 지킨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없었다면, 이 전쟁은 지금보다 더 심각한 양상으로 치달았을 겁니다.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인 돈바스는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의 주요 갈등 지역 중 한 곳입니다. 2014년 3월,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크림 반도를 무력 점령했고, 뒤이어 친러시아 분리주의자들이 돈바스의 일부 지역을 점령했습니다. 2015년 휴전 협정이 이뤄졌으나, 국지전은 끊이지 않았죠. <지구는 오렌지처럼 파랗다>는 러시아가 크림 반도를 점령한 이후, 돈바스 지역에서 끊임없이 벌어진 국지전의 실상을 '안나' 가족의 목소리로 고발하는 작품입니다.
전쟁의 아픔을 딛고 이제 좀 살아보려고 애쓰는 '안나' 가족의 이야기가 알려진 지 고작 2년 만에 러시아의 공격이 다시 시작됐습니다. 올해 자행된 침공에 관해서는 잘 알고 있었지만,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우크라이나의 전시 상황이 이렇게 오래 지속된 일인지 몰랐습니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한참동안이나 오랜 전쟁의 시간을 견뎌온 돈바스 주민들을 향한 안타까움이 마음에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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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속에서 삶을 지탱하는 법
'안나' 가족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전쟁통의 비참한 가족과는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비극을 아등바등 견뎌내지 않고, 어쩐지 평화롭기까지 합니다. 악기를 연습하고, 실을 묶어 흔들리는 이를 뽑고, 고양이에게 밥을 주고, 졸업 공연을 진행하고, 대학 합격을 기원하며 연등도 날립니다. 비록 졸업 사진의 배경이 무너진 건물이고, 그 사이로 군용 트럭이 지나가지만요.
그들이 이렇듯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살아낼 수 있는 힘은 다름 아닌 영화 제작에서 비롯됩니다. <지구는 오렌지처럼 파랗다>는 영화를 찍는 가족을 찍는 영화입니다. 그들은 집 한쪽 벽면에 검은색 천을 걸어 인터뷰 공간을 만들고, 자신들의 경험을 토대로 전시 상황의 돈바스를 묘사하는 영화를 만듭니다. 함께 머리를 맞대어 각본을 쓰고, 영화를 연출하죠. 언제 포탄이 날아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포탄이 날아오는 척 연기하며 영화를 찍습니다.
‘안나’ 가족은 황폐해진 도시에서 좋아하는 영화 촬영에 있는 힘껏 집중합니다. 그들에게 영화는 삶을 지탱하는 방법인 동시에 돈바스의 고통을 세상에 알리는 방법이죠. <지구는 오렌지처럼 파랗다>는 영화를 찍는 ‘안나’ 가족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면밀히 들여다보며, 전쟁 속에서 한 가족이 어떻게 삶을 영위해 나가는지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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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는 오렌지처럼 파랗다>는 프랑스 시인 폴 엘뤼아르의 시를 차용한 제목입니다. 파란 오렌지, 오렌지 같은 지구. ‘파랗다, 오렌지, 지구'는 논리적으로 전혀 연결되지 않는 단어들입니다. 그러나 ‘지구는 오렌지처럼 파랗다’라는 문장 안에서만큼은 세 단어가 모두 동등하게 존재하죠. 돈바스의 ‘안나’ 가족에게는 ‘전쟁, 평화, 일상’도 이와 같습니다. 전쟁도 일상이고, 평화도 일상이고, 결국 전쟁은 곧 평화인 거죠. 연결고리가 없어 보이는 단어들이지만, 그들의 삶 속에 세 단어는 동등하게 존재합니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전쟁 속에서도 삶을 이어가야만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들의 일상은 전쟁처럼 평화롭습니다.
Schedule in SIWFF
2022.08.27(토)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8관 10:00
2022.08.28(일)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9관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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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웨스 앤더슨의 '빈 곳' 비추기
어느 날, 작은 마을에 쥐가 출연하자 사람들은 설치류 전문가 '쥐잡이 사내'를 불러 쥐를 박멸하려고 한다. 쥐를 잡기 위해 쥐를 닮아버린 '쥐잡이 사내'는 나름의 전문지식을 활용해 쥐를 찾아보려고 하지만, 쥐는 나타나지 않는다(쥐잡이 사내). 맹독을 가진 우산뱀이 이불 안으로 기어들어와 옴짝달싹 못하고 누워있는 남자는 온몸이 땀으로 젖는다(독). 작은 시골 마을, 불량배들에게 쫓기는 약한 소년은 위협을 피해 높은 나무로 올라갔고(백조), 타짜가 되기 위해 초능력을 익히려는 남자는 하루 종일 카지노를 돈다(기상천외한 헨리슈가 이야기).
「찰리와 초콜릿 공장」으로 잘 알려진 영국의 동화 작가 로알드 달의 인물들이 웨스 앤더슨의 카메라로 다시 태어났다. 넷플릭스의 [ 로알드 달 시리즈 ]를 통해서다. 넷플릭스는 2021년 '로알드 달 스토리 컴퍼니'를 9,200억 원을 들여 인수하고, 그 직후 웨스 앤더슨과 함께 4편의 단편소설을 영화화하는 '로알드 달 시리즈' 제작을 결정했다. 적잖은 자본이 투입된 프로젝트인 셈인데, [ 로알드 달 시리즈 ]는 그다지 대중향을 고려한 것 같진 않다. 4편의 단편영화로 구성된 [ 로알드 달 시리즈 ]의 애초 기획은 장편이었다고 하는데, 거의 실험극에 가까운 구성으로 봤을 때 러닝타임을 줄인 건 옳은 선택이었던 듯싶다.
웨스 앤더슨이 이 시리즈를 통해 보이고자 한 것은 어떤 '이야기'가 아니라 이야기가 출연하는 조건-형식이다. 지금껏 필모그래피에서 다분히 연극적인 내레이션과 미장센을 구사해온 웨스 앤더슨은 '로알드 달 시리즈'를 통해 아예 연극 무대를 영화의 형식으로 통합하는 시도까지 나아간다. 시네마 카메라가 주는 화면의 깊이(Depth)를 배제하고, 평면적인 세트를 갈아끼우는(?) 방식으로 화면을 전환한다. 심지어 세트를 옮기는 스탭들이 공공연하게 화면 안으로 들어오는가 하면 배우들은 그들에게 눈짓을 보내거나 작은 목소리로 지시를 주고받는다. 웨스 앤더슨 특유의 수평/수직적인 카메라 이동(돌리)도 도드라진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요소는 '마임(mime)'이다. [ 로알드 달 시리즈 ]에서 배우들은 어떤 특정한 소품을 마임으로 대체하는데, 예를 들어 허공에 빈손으로 총을 쏜다던가(백조), 보이지 않는 자루에서 보이지 않는 쥐를 꺼내는(쥐잡이 사내) 식이다.
화면 구성뿐만 아니라 서사를 이끌어나가는 축도 남다른데, [ 로알드 달 시리즈 ] 속 캐릭터들은 저 자신의 육성으로 스토리를 읊어댄다. 내레이션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캐릭터들은 자신의 생각이나 상태 등을 진술하는 걸 넘어 제4의 벽을 부수고 영화 전체의 스토리를 직접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소설/대본의 지문을 직접 읽어주는 형식에 가깝다고 할까. 이런 구성이 주는 독특한 위화감은 「기상천외한 헨리슈가 이야기」에서 도드라진다. 「기상천외한 헨리슈가 이야기」는 '헨리슈가'씨가 우연히 발견한 한 기록을 읊으며 이야기가 진행되는 소위 '액자식 구성'을 취하는데, 영화의 중반부가 되면 아예 원작자 로알드 알이 등장하여 '이야기를 읊어주는 헨리슈가씨를 읊어'준다.
웨스 앤더슨이 어마 무시한 대자본이 투입된 프로젝트에서 이런 도전적인 시도를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유관자가 아니라면 아무도 모를 일이지만, 아마도 아이디어의 시작에는 원작자 로알드 달의 작품 철학이 있을 수도 있겠다. 로알드 달은 자신의 작품이 수정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생전 출판사에 자신의 직접 쓴 원고에 문장 부호 하나 바꾸지 말라고 요구했던 적이 있을 정도. 심지어 그는 자신의 작품 「마녀를 잡아라」를 영화화했던 '니콜라스 뢰그' 감독의 「마녀와 루크」를 보고 결말이 바뀌었다는 이유로 시청 금지 캠페인까지 추진했었다.
그런 원작자의 성향을 고려했을 때, 텍스트를 이미지로 바꾸는 작업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근거는 없고, 그냥 개인적인 예상이다. 웨스 앤더슨은 이미 「판타스틱 Mr. 폭스」를 통해 로알드 달의 작품을 영화화한 적 있다). 아이디어의 태동이야 어쨌든, 웨스 앤더슨은 '텍스트의 영화화'라는 프로젝트에서 일종의 '메타 Meta - 형식' 적인 목표를 품었다. 앞서 언급했듯 그것은 이야기가 출연하는 형식 - 조건을 밝히는 것이다.
배우들로 하여금 지문을 그대로 읊게 하고, 드르륵거리며 세트를 옮기며, 인위적인 마임을 선보이는 건 영화/연극의 핵심인 '제4의 벽'을 명시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전략이다. 특히 캐릭터의 의식이나 행동에 대한 묘사가 지극히 문어(文語) 적인 이유가 원작이 소설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흔히 '제4의 벽'을 철저히 숨기는 것은 '이야기'를 형성하기 위한 필요조건으로 여겨지고, 피치 못해서든 실수이든 '제4의 벽'을 드러내는 것은 창작자의 역량 부족으로 비판받는다. 카메라/조명/음향 등의 기술적 한계는 물론, 연출/편집의 유려함이나 대본의 '개연성'문제 역시 '제4의 벽'개념의 연결선상이다. '그럴 듯' 해야 관객이 작품을 '현실'로 여기고(속고) 그 뒤에 비로소 '이야기'가 따라붙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로알드 달 시리즈]에 따르면, 과연 그런가?
일단 관객들은 [로알드 달 시리즈]를 현실의 반영으로서 몰입하지 않는다. 물론 그런 사람들도 있을 수 있지만, 일단 웨스 앤더슨은 그것을 기대하지 않았다(다시 한번 말하지만, 배우들이 카메라 밖 스텝들과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독특한 연출뿐만이 아니다. 대본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인데, [로알드 달 시리즈]는 딱히 기승전결이나 '개연성' 같은 걸 챙기지 않는다. 그럼에도 관객들은 영화에 몰입하고, '이야기됨'을 감각한다. 즉, [로알드 달 시리즈]에서 '이야기'의 형성 조건이란 '제4의 벽을 숨기기/ 그럼으로써 관객들을 속이기'가 아닌 셈이다. 대신 웨스 앤더슨은 다른 걸 숨긴다. 마치 공백을 가리키는 손가락, 마임처럼.
이를테면 「쥐잡이 사내」의 '이야기'는 결말에서 비로소 형성된다. '쥐잡이 사내'에 따르면 건초더미 속에 숨어있는 쥐들은 무언가 맛있는 것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에 미끼를 먹지 않았다. 그러나 쥐가 먹었을 '맛있는 것'의 정체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망부석같이 놓여있는 거대한 건초더미만 있을 뿐.
「독」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불 안에 똬리를 틀고 있는 독뱀을 쫓기 위해 영화 내내 온갖 난리(?)를 쳤지만, 정작 이불을 걷어내자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꿈을 꾸셨나 봐요"라는 인도인 의사의 말 한마디에 흥분해 뱀처럼 독을 쏘아대는 해리만 있을 뿐이다(결국 뱀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밝혀지지 않는다). 「기상천외한 헨리슈가 이야기」에서 결국 헨리슈가의 정체가 누구인지는 공백으로 남았고(작중에서 그는 누구나 알만한 유명인이며 '곧 밝혀지게 될 것'이라고 했다), 「백조」 속 괴롭힘당하는 어린 소년 '왓슨'이 어떻게 됐는지도 알 수 없다. 명료하게 해석될 수 없는 내레이션만 남았을 뿐이다.
[로알드 달 시리즈]가 숨긴 것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무엇을 숨겼는지를 안다면,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은 이미 발각된 것이니까. 간략한 위치에 어떤 공백이 있다는 어렴풋한 사실 정도를 뉘앙스로 풍기는 것으로 이야기는 출연한다.
4편의 단편 중에 일반적인 의미에서 가장 온건하게 이야기 꼴(?)을 갖추고 있는 작품은 「기상천외한 헨리슈가 이야기」 이지만, 가장 '힘'이 느껴지는 건 그 대척점에 있는 「쥐잡이 사내」인 점은 의미심장하다(「쥐잡이 사내」의 로튼 토마토 지수는 만점이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TV는 달이라고 백남준이 말했던가. 최초의 이야기일 다양한 문명의 신화들이 대체적으로 '밝히기'보단 '숨기기'에 급급했던 것에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본래 이야기란 행간과 자간이고, 씬과 씬, 컷과 컷 사이의 어둠이다. 그곳에 마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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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을 강제당하는 노인들
노인이 주인공인 두 영화가 같은 날(2월 7일) 개봉했다. 한국 영화 〈소풍〉과 일본 영화 〈플랜 75〉. 플롯, 캐릭터, 감성, 질감 등 많은 것이 다른 영화지만 두 영화에는 공통점도 있다. 우리 사회가 ‘노인’이라는 기표의 내용을 어떻게 채우고 있는가? 노인은 그 앞에서 무엇을 느끼는가? 두 영화가 공유하는 질문이다. 지금껏 살아온 삶의 맥락이 소거된 채 가족과 사회에 ‘부담’을 주는 천덕꾸러기가 되어버렸다는 자괴감만 남은 현실. 이것이 과연 노인에 대한 온당한 대우일까? 두 영화가 이 질문에 어떻게 답변하는지를 따라가보자.
먼저 〈소풍〉이다. 여성 노인 은심의 집에 갑자기 아들네 가족이 들이닥친다. 사업상 어려움을 겪는 아들은 은심의 보험이나 집을 처분해 목돈을 마련하고 싶어 하는 눈치다. 파킨슨병이 시작되어 몸에 불편을 느끼면서도 아들이 이때다 싶어 요양원 이야기부터 꺼낼까 봐 이를 전하지 않은 은심은 때마침 찾아온 고향 친구 금순을 따라 60년 만에 고향을 찾는다. 고향에서는 금순과 우정을 더 단단히 다지고, 고향을 야반도주하듯 떠날 수밖에 없었던 과거를 마주하며, 자신을 짝사랑했던 태호와 재회해 지금껏 누리지 못한 행복한 시간을 만끽한다. 그러나 행복 속으로 불쑥불쑥 끼어드는 노환과 질병은 이들에게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일깨운다. 은심과 금순은 얼마 남지 않은 생애 동안 자신이 마무리해야 할 일이 있다는 데 공감하고 그 일을 매듭 지은 후 소풍을 떠난다.
그들이 마무리해야 하는 일은 무엇이었을까? 자식에게 부담 주지 않기다. 영화는 계속 부모에게 무언가를 바라기만 하는 자식들을 부정적으로 재현한다. 노인들이 기댈 데 없이 홀로 건강을 돌봐야만 하는 현실의 문제를 담아내기도 한다. 그러나 두 노인은 결국에는 자식들에게 가진 것을 모두 넘겨준다. 사업이 망해 고꾸라지는 아들(은심), 평생 한 번이라도 가족과 아파트에서 살아보고 싶은 장애인 아들(금순)은 두 노인이 자식들에게 모든 재산을 넘기는 근거가 된다. 그리고 두 사람이 간 소풍의 장소. 바다 옆, 아름답지만 날카롭게 깎인 절벽에서 은심과 금순은 손을 잡고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간다. 그들의 발걸음이 자식에 대한 ‘책무’를 다했다는 뿌듯함을 만끽하기 위함인지, 해야 할 일을 다 했으니 친구와 함께 세상을 등지겠다는 뜻인지 분명하게 제시하지 않고 영화는 마무리된다. 자녀의 문제를 ‘해결’했으니 노환과 질병이라는 자기 문제에서는 자식에게도, 국가에서도 받아낼 것이 없다는 듯 홀가분한 얼굴이다. 그러나 노인이 가족과 사회 모두에게 ‘부담’이기만 한 사회에서 이들의 삶이 ‘소풍’일 수 있을까? 노인에게 행복한 삶이 가능함을, 그들의 고난이 사적인 영역에 방치되었음을 보여준 영화는 두 노인의 강요된 퇴장을 ‘아름답게’ 포장하여 자신이 제기한 비판적 함의를 재빠르게 회수한다. 모든 걸 퍼주고도 ‘부담’이 되길 거부하는 노인의 삶을 아름다운 ‘소풍’에 비유함으로써 말이다.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을 더한 〈플랜 75〉에서도 노인이 사회의 ‘부담’인 건 마찬가지다. 영화는 울분에 찬 청년이 노인을 살해하는 범죄 현장과 범인이 자살하며 스스로를 영웅으로 치켜세우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노인 돌봄에 필요한 ‘비용’에 청년 세대가 극단적 반감을 가지는 것은 미래의 일도, 일본만의 일도 아니라는 점에서 섬뜩한 오프닝이다. 사회 갈등이 증폭되자 정부가 새로운 정책을 발표한다. 정책 이름은 ‘플랜 75’. 75세 이상 노인 중 신청자에 한해 ‘편안한’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돕는다는 내용이다. 기묘한 정책이다. 정책은 공공성을 담보해야 하는데 플랜 75는 공적으로 책임져야 할 일을 사적으로 책임지라는 일에 공적 권력을 동원한다.
78살의 미치는 고민이 깊다. 혼자 사는 그는 호텔에서 청소하며 생계를 이어왔는데 최근 고령의 노동자가 작업 중 쓰러지는 사건이 발생하자 비슷한 일이 재발할까 두려운 호텔에 의해 해고당한다. 고령이라는 이유로 재취업은 쉽지 않다. 게다가 미치의 집은 철거를 앞두고 있다. 그러던 와중 정부는 플랜 75가 큰 정책적 효과를 거두었다는 데 고무되어 신청자 연령을 대폭 낮추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고 발표한다. 결국 미치는 플랜 75를 신청한다. 여기서 우리는 〈소풍〉과 같은 질문을 마주한다. 자식에게 모든 걸 넘겨주고 아무런 공적 부조를 받지 못하는 삶을 ‘소풍’으로 포장하는 일은 자발적인가? 플랜 75, 즉 죽음을 선택하는 미치의 결정은 자발적인가?
두 영화에서 세 노인이 내린 선택은 강제된 자율이다. ‘노인을 부양하는 데는 비용이 들고, 그건 우리 모두에게 부담이야’라고 말하는 사회에서 ‘존경받는 노인’으로 ‘아름답게’ 삶을 마무리하려면 내려야만 하는 선택은 이미 정해져 있다. 왜 국가가 노인을 방치하냐고 항의하는 자는 미래 세대를 걱정하지 않는 ‘이기적’ 노인이 되도록 이미 담론 지형이 구축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 ‘존엄’하고 ‘품위’ 있는 마무리는 강제된 역할 기대 혹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소풍〉과는 달리 〈플랜 75〉에서는 미치가 마지막 순간에 결정을 철회하고 삶을 이어가겠다는 결심을 한다. 그리고 이 장면의 배경을 은은하게 빛나는 햇빛으로 하여 노인을 ‘비용’, ‘부담’이 아닌 ‘인간’으로 대하는 사회의 모습을 상상케 한다. 같은 주제를 다루어 서로 다른 메시지를 내는 두 영화는 노인이 ‘비용’이자 ‘부담’인 시대의 분위기를 공통적으로 포착해낸다. 〈플랜 75〉의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이 실제로 도래하기 전에 〈소풍〉이 그려내는 현실을 다르게 해석하고 풀어낼 고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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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FF 데일리] 독립‧예술영화의 최대 축제, JIFF 개막식 이모저모
2024년 5월 1일.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모악당에서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식이 4,000여 명의 관객이 참여한 가운데 공승연, 이희준 배우의 사회로 열렸다. 이번 영화제에는 국제경쟁 부분에 747편, 단편과 장편을 합한 한국영화 부문에 1,513편이 출품되어 역대 최고의 경쟁률을 기록했다고 전해진다. “독립과 대안이라는 가치로 다양한 영화를 선보여왔다”는 민성욱 공동집행위원장의 말에 더한층 무게가 실리는 대목이다.
팬데믹 강타의 후유증이 아직 완전히 가라앉지 않았고, OTT의 등장으로 기존 영화 산업을 관통하던 모든 공식은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여러모로 영화계는 격변의 시기를 통과하는 중이다. 그 와중에도 독립‧예술영화의 기반을 오랫동안 다져온 전주국제영화제에 이토록 많은 작품이 출품되었다는 건 영화인들이 안팎의 위기에도 영화로 말하기를 멈추지 않았다는 의미일 터. ‘우리는 늘 선을 넘지’라는 지난해의 슬로건을 올해도 유지한 이번 영화제가 어떤 영화를 펼쳐낼지가 유독 기대되는 이유다.
개막식에는 민성욱, 정준호 공동집행위원장의 축사와 우범기 조직위원장 겸 전주 시장의 개막 선언, 개막 축하 공연, 경쟁 부문 심사위원들의 심사 기준 언급 등의 순서로 채워졌다. 국제경쟁 부문 심사위원을 맡은 유지태 배우는 누군가 정성들여 만든 영화를 심사위원의 주관으로 평가하는 일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다면서도 "이번 영화제가 지금도 골방에서 글을 쓰는 감독과 작가, 예비 배우들을 위한 영화제가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밝히기도 했다. 역대 최대 출품작 중 어떤 작품이 수상의 영예를 누릴지 궁금증이 증폭된다.
한편 개막작으로는 최근 베이징국제영화제에서 예술공헌상을 수상한 미야케 쇼 감독의 〈새벽의 모든〉이 선정되었다. 각각 월경전후증후군인 PMS와 공황장애로 어려움을 겪는 두 남녀가 서로를 도우며 연대와 희망을 벼려내는 영화다. 생리 때만 되면 평소의 차분하고 사려 깊은 성격과는 달리 공격성이 마구 분출되는 후지사와는 이 문제로 난처한 일이 반복되자 새로 들어간 회사를 2달 만에 그만 둘 수밖에 없을 정도로 증세가 심하다. 마찬가지로 어느 날 갑자기 공황장애가 찾아온 야마조에 역시 이 때문에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런 둘이 어린이용 과학 키트를 만드는 자그만 회사에서 함께 일한다. 서로의 어려움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상대가 불편하고 짜증나기만 했지만 우연한 계기로 상대 역시 정신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안 이후에는 조금씩 ‘참견’하는 ‘오지랖’으로 서로를 보듬어나간다. 야마조에의 말마따나 둘 사이에는 이해할 수 없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하지만 서로를 도와줄 수는 있다. 〈새벽의 모든〉은 이 사소한 사실을 차근히 펼쳐내 보인다.
두 사람이 벼려내는 연대의 장소가 회사라는 점은 눈여겨볼만하다. ‘회사’는 자본주의의 핵심인 장소다. 회사에서의 끝없는 경쟁과 자기 갱신은 인간의 정신을 소진시키다 이내 탈진시킨다. 모든 정신 질환의 원인이 자본주의일 수는 없지만, 동시대 정신질환의 많은 특징이 여기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후지사와와 야마조에는 회사에서 만나 회사에서 연대한다. 아무도 없는 주말 저녁의 캄캄한 회사에서 서로를 위로하는 순간을 쌓는 식이다. 그들이 하는 노동도 마찬가지다. 밤하늘의 별자리와 관계된 제품을 기획하고 디자인하며, 두 사람은 기존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밤’의 의미를 되새긴다. 밤은 어둡고 깜깜하지만 해가 떠 있을 때는 미처 볼 수 없는 별을 볼 수 있게 해주고, 인간은 별에 대한 호기심으로 지구 밖 세계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영화는 두 사람의 제품 개발 과정에 별에 얽힌 신화적 이야기를 덧대 밤에만 가능한 서사를 탐색하기도 한다.
여기서 밤은 정신 질환자가 침잠하는 세계의 은유다. 지구 밖에도 무한한 우주가 있지만 인간의 내면에도 그만큼 큰 우주가 있다. 때문에 두 사람이 노동하면 노동할수록, 즉 인간을 착취하는 자본주의적 활동에 충실할수록 자본주의가 옥죈 내면의 세계가 깊어지는 역설이 발생한다. 야마조에의 말마따나 두 사람에게는 여전히 미래 전망이 없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두 사람만 알 수 있는 세계를 탐닉함으로써 결코 자본주의가 잠식할 수 없는 자기 내면의 무한한 공간을 마주한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두 사람 회사 사람들이 평화로운 한때를 보내는 장면을 배경으로 올라가는 것 역시 우리가 자본주의의 일터인 회사를 다른 방식으로 재의미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암시한다. 아기자기하게 관계 맺으며 조금은 여유롭게 일하는, 나의 모든 것을 갈아 넣을 필요가 없는 동시에 일과 삶을 괴리시킬 필요가 없는 그런 일터의 가능성 말이다. 그곳에서는 일할수록 불행해지는 현대인의 비극이 반복되지 않을 것만 같다. 〈새벽의 모든〉은 정신 질환에 관한 차근하면서도 급진적인 메시지를 던지는 영화다.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을 통해 제25회 국제전주영화제에 기자로 초청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개막작 〈새멱의 모든〉 상영 시간은 아래와 같습니다. 다른 영화 상영 시간은 영화제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5월 1일 19:30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모악당(001)
-5월 2일 13:30 CGV전주고사 3관(120)
-5월 5일 10:30 전주디지털독립영화관(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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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과 1로 이뤄진 디지털 세상이 이렇게 귀여웠던가?
전작을 보지 않아서 이해를 할 수 있을까 조금 걱정스러웠던 영화 <주먹왕 랄프2: 인터넷 속으로>. 하지만 그런 우려는 필요 없었다. 캐릭터만 가져왔을 뿐 내용은 완전히 다른 것이어서 충분히 이해하고 감동을 받았던 작품이었다.
영화 <주먹왕 랄프2: 인터넷 속으로> 시놉시스
오락실 게임 세상에 이어 이번엔 인터넷 세상이 발칵 뒤집힌다?! 각종 사고를 치며 게임 속 세상을 뒤집어 놨던 절친 주먹왕 ‘랄프’와 ‘바넬로피’는 버려질 위기에 처한 오락기 부품을 구하기 위해 와이파이를 타고 인터넷 세상에 접속한다.
얼떨결에 올린 동영상으로 순식간에 핵인싸에 등극한 ‘랄프’와 룰도 트랙도 없는 스릴만점 슬로터 레이스 게임에 참여하게 된 ‘바넬로피’. 지금껏 경험한 적 없는 엄청난 스케일과 새로운 재미에 흠뻑 빠진 ‘랄프’와 ‘바넬로피’는 랜섬웨어급 사고로 인터넷 세상을 혼란에 빠뜨린다. 과연, 이들은 무사히 집에 돌아갈 수 있을까?
*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주먹왕 랄프2 : 인터넷 속으로>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디지털 세상을 아날로그로 표현하다
오락실 게임방의 캐릭터들이 각자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하나의 캐릭터로 표현된 영화 <주먹왕 랄프2: 인터넷 속으로>. 그래서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0과 1로만 이뤄진 디지털 세상을 나의 분신들이 돌아다니는 설정으로 구현한 것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네이버나 구글에 검색을 할 때 성가셨던 자동완성 검색기능을 리셉션에 있는 안내원이 안내를 해주는 것처럼 묘사를 하다니,,, 기발했다. 그런 상상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데 지금 이 리뷰를 쓰는 와중에도 컴퓨터 속 나의 분신이 꼭 영화 <주먹왕 랄프2: 인터넷 속으로>에 나오는 것처럼 행동을 할 것만 같아 귀엽게 느껴진다. 그래서 아무리 내가 디지털 세상에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아날로그적 시스템에 가장 최적화 되어 있고 그 기능에 굉장한 향수를 느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돈많은 우리의 디즈니
트레일러와 티저가 올라왔을 때부터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포털사이트 이름들이 아주 대놓고 등장한다는 것이다. 구글, 이베이, 유튜브를 보면서 랄프가 구글을 고글 파는데냐고 물어보는데 간접광고 아주,,, 아름다웠다. 현실에서 접하던 인터넷 사이트가 그대로 등장을 하나보니 랄프와 바넬로피가 훼방놓고 다니는 인터넷 세상이 내가 이용하는 세상처럼 더 사실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나 싶었다. 그리고 요새 트렌드인 인플루언서가 랄프를 통해 잘 드러나서 애니메이션이지만 현실 반영이 참 잘되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그런데 랄프, 돈을 너무 쉽게 버는 게 아닌가,,,, 얼마나 그 시장이 레드오션인데,,, SNS 가지고 돈을 벌려면 시간과 돈, 노력을 얼마나 퍼부어야 하는데!! 하면서 지난 날 과거의 내 모습이 떠오르며 질투가 나기도 했다. 랄프가 귀엽다가 듬직했다가 질투가 나가다 아주 감정이 복합적이었다.
우정에 대한 집착 = 랄프 바이러스
영화 <주먹왕 랄프2: 인터넷 속으로>의 배경은 인터넷 세상이지만 주제는 아름다운 우정이다. 참 디즈니스러운 주제다. 뻔한 내용이지만 사람을 울리는 디즈니는 참 매력적인 것 같다. 겨울왕국 이후로 개봉한 디즈니 작품들을 보면서 울지 않았던 작품이 없었던 것 같다. 바넬로피를 집착적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랄프가 약간 바이러스처럼 복제되어서 랜섬웨어처럼 인터넷에 엄청 빠르게 퍼져나간다. 그래서 바넬로피가 보면 칭구~~~~? 이러면서 쫓아다닌다. 컴퓨터 속에 있는 바이러스들이 저러고 돌아다닐 것 같아서 귀여운데 무서웠다. 심지어 내 노트북이 저런 친구를 두질 않길 바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 였다. 랄프가 스스로에게, 자신의 분신인 바이러스 랄프에게 ‘네가 하는 행동은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야’라고 말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하며 떨어져 있어도 행복할 수 있고, 바넬로피의 꿈을 응원하는 모습에 기특하면서도 슬픈 감정이 들었다.
영화 <주먹왕 랄프2: 인터넷 속으로>는 인터넷 세상을 너무나도 사랑스럽게 풀어내면서 그 속에 우정도 함께 그려낸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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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어 리뷰 - 조던이 안 나오는데 재미있는 조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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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아이콘을 만든 그들의 실화
당신이 알고 있는 그 이상의 이야기
1984년, 업계 꼴찌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나이키는
브랜드의 간판이 되어 줄 새로운 모델을 찾는다.
나이키의 스카우터 소니 바카로(맷 데이먼)는
NBA의 떠오르는 루키 마이클 조던이 나이키의 미래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미 시장을 장악한 컨버스와 아디다스가 그와의 계약을 노리는 상황
나이키 팀은 조던의 마음을 얻기 위한 전략을 세우는데….
누구에게나 점프하는 순간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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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9월 5일: 위험한 특종> 메인 예고편
테러 인질극 생중계, 그리고 9억 명의 시청자 방송을 멈출 것인가, 계속할 것인가! 온에어 스릴러📻 [9월 5일: 위험한 특종] 메인 예고편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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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키싱 부스 3> 공식 예고편
[2021년 8월, 넷플릭스 공개]
엘, 아직도 학교를 결정 못 한 거야?
멋진 남친 노아와 평생 절친 리 사이에서 예비 대학생 엘은 어디로 향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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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아가씨>, 미안해 하진 않을게
*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처음 아가씨를 봤을 때는 숙희와 히데코가 남았고, 오랜만에 다시 보니 코우즈키와 백작이 남는다. 처음엔 자유를 찾은 모습에 함께 설레고 들떴다면, 이번엔 그 자유를 빼앗은 이의 이야기가 궁금해져서 그렇다. 백작은 막판에 순진하면 불법이라는 업계 불문율을 어겨서 불행을 자초한 순정 사기꾼이라 치자. 코우즈키는 히데코의 이모부다. 가족끼리 왜 그러지? 가족끼리 이럴 수 있나? 아니, 가족이니까 이렇게까지 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 그에게 취미를 물으면 독서와 책 수집이라 할 텐데, 혹여 어떤 책을 좋아하는지 제목을 묻지 않았다면 분명 후회하게 될 것이다. 가장 아끼는 책을 나열해보자. <채찍은 말한다>, <도마뱀 가죽>, <타락한 속옷 판매원들>, <백합의 바다>, <장의사의 침실>. 제목부터 스멀스멀 느껴진다. 그렇다. 책을 좋아한다는 게 19금 문학이었다. 천일야화처럼 읽고 수집하고, 다른 이들에게 들려주고 판매한다. 낭독회는 혼자만의 취미가 아니라 엄연한 사업이다. 수집한 책에 삽화가 2D였다면, 그는 낭독회에서 이를 3D로 구현한다. 가족의 일원을 연기도 전달력도 좋은 '낭독 전문 배우'로 양성했다. 처음엔 아내를 시켰고 아내가 세상을 뜨자 처조카인 히데코에게 그 역할을 맡겼다. 아내는 자살한 것도 아니었다. 도망치려던 그녀의 마지막은 코우즈키와 지하실이 알고 있다.죽은 아내도, 히데코도 좋아서 낭독을 시작했을 리 없다. 코우즈키가 그 책이 그렇게 좋아서 햇볕도 들지 않도록 어두컴컴하게 만들고, 집은 쓸데없이 크기도 남다르게 만들어서 도망치기 전에 붙잡혀 갇히는 게 더 빠르다. 지하실에 있는 다양한 신체 부위나 특이한 도구들은 그가 이미 상상에서 그치지 않는 사람이란 걸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혓바닥은 붓끝의 먹물이 스며들어 검디검다. 그 정도 열정이라면 2차 창작도 충분히 가능하다. 그가 작품을 외우기만 했을까? 낭독회에 올린 책 중에 자신이 쓴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저 멀리 프랑스에서 책을 들여올 돈이 필요해 히데코와 정혼하고, 스스로를 더러운 이야기를 좋아하는 노인이라고 말할 정도면, 참으로 대단한 인물일세.
코우즈키의 세계관은 이분법적이다. 그에게 조선은 추하고 일본은 아름답다. 아름다운 건 잔인하지만 조선은 무르고, 흐리고, 둔하기 때문이란다. 일본과 영국은 좋아하고 조선은 싫어하는 건 힘의 양상 때문이다. 역관이던 그가 성공한 건 일본이 흥하자 힘이 강한 편에 섰기 때문이다. 금광 채굴권을 비롯해서 전에는 상상하지 못할 부를 얻었다. 그의 취향대로 일본과 영국을 섞은 저택을 지었다. 하지만 사는 것과 입는 것만 바뀌는 것으론 부족하다. 그는 이렇게 가진 힘을 유지하고 싶었기에 아예 조선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일본 사람으로 탈바꿈하기 위해 애를 쓴다. 결국 조선인 아내를 버리고 일본인 아내와 결혼했다.물론 여전히 그 집의 실질적인 운영은 여전히 조선 사람들에 의해 돌아가고 있다. 조선의 아내는 그의 충실한 집사이자 정부처럼 지내고, 집안의 모든 음식은 조선인 시종들이 만들어준다. 그들은 믿을 수 있나? 조선은 추하다면서 그 조선 사람들과 어떻게 같이 잠을 자고, 밥을 먹을 수 있을까. 곁에 두고 쓸 정도는 되는 것인가. 여름에 냉면을 버리지 못하는 것을 보니, 아직 완전히 일본인이 되진 못한 모양이다. 암만, 여름엔 냉면이지.
그의 처음이 궁금하다. 어떤 계기로 19금 책을 수집하고 낭독을 하기로 했을까. 같은 것을 보고도 상상은 다르니, 그 상상을 나눠보는 게 재밌다고 했다. 19금 문학을 즐기고 수집하는 건, 문제라고 보기 힘들다. 낭독회도 크게 보면, 자신과 비슷한 취향을 가진 이들과 함께 하는 비공식 소규모 행사다.문제가 되는 건 자신만의 취향과 사업을 위해 가족을 끌어들였다는 점이다. 전처였던 조선인 아내는 의외로 자신의 생활에 만족하는 것처럼 보인다. 전 남편을 나리 마님이라고 부르고, 스스로 사사키라고 부르고, 일본인 아내나 히데코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소소하게 즐기고, 낭독회에서 무대 효과와 연출을 담당하고 있다. 무엇보다, 그녀는 낭독회에 출연하는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욕심으로 이어진 가족, 일본인 아내와 히데코는 19금 문학 낭독을 강요받았다. 원하는 대로 느낌을 살려 낭독하지 않으면 숨 막히는 체벌이 이어졌고, 도망치고 싶어도 깊은 서재에 무지의 경계선인 뱀을 두고 철창 앞에서 가로막히는 자괴감을 반복적으로 느껴야만 했다. 말대답을 하거나 분노를 표현하면 정신병원에 가두겠다는 협박을 받았다. 땅속에 묻어버리거나, 개처럼 목줄을 하게 한다는 말에 사시나무처럼 떨던 히데코의 이모는 이미 경험이 있는 듯했다. 어린 히데코는 성인이 될 때까지 가족 중에 이모부만 좋아하는 책을 이모부만 좋아하는 방식으로 낭독하는 것만 배웠다. 무슨 훈육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어느 남자를 봐도 돌 같이 느끼고, 심지어 싫어하게 되었다. 그놈의 낭독이 뭐길래. 이모부는 후견인이라는 명목으로 그녀를 조종했다.
숙희는 처음에 히데코를 두고 가엾고도 가엾다 했지만, 가장 가엾은 사람은 코우즈키가 아닐까. 히데코, 숙희, 백작, 코우즈키 모두 가짜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하지만 세 명은 서로 속이고 속임을 당하면서 각자 생각하고 있는 상대방이 가짜라는 걸 깨달았다. 백작을 사랑했어야 할 히데코는 숙희에게 빠져들었고, 히데코가 백작과 사랑에 빠지게 도와주기로 했던 숙희는 히데코에게 반했다. 히데코와 사랑에 빠지는 척만 할 예정이던 백작은, 오히려 막판에 히데코를 정말로 사랑하게 되었다. 히데코는 숙희를 어리숙하고 순진한 도둑의 딸로만 알았지만, 진심으로 자기를 걱정하고 족쇄처럼 묶여있던 낭독 책을 찢어발기고 물에 적시는 박력이 있었다. 숙희도 히데코는 세상 물정 모르는 숙맥으로 알았건만, 웬걸, 다년간의 19금 문학 낭독으로 다져진 연기력과 탁월한 배경지식에 놀라고 말았다. 백작은 남자에게 물새처럼 차가운 히데코임에도, 낭독회에서 공작부인 줄리에트로 연기한 모습과 그녀의 솔직한 모습에 매력을 느꼈다.
그러나 코우즈키가 마음을 빼앗긴 가짜는 현실이 아니라 상상이고, 사람이 아닌 이야기다. 사람은 오해를 풀고 몰랐던 부분을 알아가면서 서로를 이해하게 되지만, 이야기 속의 상상은 환상만 더해간다. 장르적 특성상 그에겐 모든 여자는 섹스라는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한다. 누군가를 어떻다고 할 때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것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를 떠올리게 되는데 비해 코우즈키는 19금 소설의 인물로만 떠올린다. 자신의 전처인 사사키가 백작과 잠자리를 하고도 남는다고 생각하며 부들부들 떨 땐, 함께 한 시간이 있는데 그리 생각하는 게 신기하다. 어느 남자든 가리지 않고 좋아할 거였으면, 애당초 당신 곁에 있지 않았을 수도 있는데.
낭독하지 않는 히데코 역시 새로운 이야기 속에 '어떤 년'일 뿐이다.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나 의심이 된다면 백작에게 묻던 그의 질문을 기억해보자. '히데코가 어떤 년인가? 부드럽던가? 조여오던가? 주름은 많이 접혔던가? 충분히 젖었던가? 애액의 점도와 탁도는? 저항하던가? 아니면 침을 뱉으면서 혐오스러워하던가? 어서 해달라고 애원하던가? ' 백작이 자신의 아내인 히데코와의 초야를 어떻게 떠벌이고 다니냐고 호통을 치거나 말거나 새로운 이야기 <처조카의 초야>에 푹 빠져있었다. 정신 차리게, 코우즈키. 히데코는 당신의 처조카야. 당신의 죽은 아내의 죽은 언니의 유일하게 살아있는 딸이라고.
세상에서 책을 제일 좋아하는 부유하신 코우즈키 나리 마님. 일본인 귀족인 척했던 제주도 출신 백작과 하룻강아지 같은 하녀 숙희 덕분에 썩 즐겁지 못하다. 아끼던 책들은 처참히 망가졌고, 낭독을 맛깔나게 해 줄 배우도 없다. 히데코가 재산을 다 찾아갔으니 새로운 책을 사거나 관리할 경제적인 여유도 없어졌다. 함께 이야기를 들은 신사들 역시 아쉬움이 완연할 것이다. 그들은 상상에 푹 빠져 이야기 속 등장인물에 감정이입을 하곤 했다. 얼마나 짜릿했을지 몰라도 우리가 보는 그들은 낭독이 울려 퍼지는 서재에서 눈을 형형하게 빛내며 때때로 주먹을 불끈 쥐거나 숨을 들이켜거나, 모자로 다리 사이를 가릴 뿐이다. 우리는 그들의 상상을 짐작할 뿐이고,
히데코와 숙희는 백작에게 '사기꾼이 사랑을 하나?'라고 물었지만 사기꾼이라고 왜 사랑을 하지 못하겠나. 거짓 속에서 진심이 더 명확하게 드러날 수 있는데. 그리고 둘이 할 소리는 아닌 게, 사람 속이고 이용하는 게 사기꾼이니 그녀들도 백작과 다를 바 없다. 차이가 있다면 이들의 작전은 성공했다는 것뿐이다. 그러니 이들이 하는 게 사랑이라면, 백작이 하는 것도 사랑이다. 코우즈키의 사랑이 픽션이라면, 세 사람이 한 사랑은 팩션쯤 될 것이다.코우즈키는 가장 좋아하던 책 5권에 맞춰 백작의 손가락을 하나씩 자르고, 손에 구멍을 뚫고, 성기를 자르려 했다. 히데코와 숙희가 코우즈키의 집에 붙잡혀 왔다면 어땠을까. 히데코의 이모를 죽이고 벚꽃나무에 매달았듯이, 그 둘도 괴롭히고 벚꽃나무에 매달거나, 낭독을 할 정도로만 살려두고 온몸을 고통스럽게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추호도 몰랐다. 아름다움이 잔인하고, 무르고 흐리고 둔한 게 추하다고 말하던 그가, 푸른 수은 연기를 이상하게 아름답다고 느끼면서, 무르고 흐리고 둔해지면서, 지하실에서 눈을 감게 될 줄 말이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그는 잔인하고 추하게 죽음을 맞이한 셈이다. 그것도 히데코의 초야 이야기를 들으려고 안달이 나서, 자기 손으로 직접 백작의 입에 수은이 담긴 담배에 불을 붙여준 것 때문에. 심지어 그가 좋아하던 이야기를 그는 늘 감상하는 입장이었지만, 그 역시 이렇게 <아가씨>라는 이야기에 담길 줄 알았을까. 안타깝지만 미안한 마음은 들지 않는다. 그가 볼모로 잡았던 가족들의 삶을 생각하면, 스스로 불러온 결말은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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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WFF 데일리] 지구는 오렌지처럼 파랗고, 일상은 전쟁처럼 평화롭다
지구는 오렌지처럼 파랗다
The Earth Is Blue as an Orange
Cast
감독: 이리나 칠리크
Synopsis
싱글 맘 ‘안나’는 아이들과 함께 우크라이나 돈바스의 전쟁 지역 최전방에 살고 있다. 영화에 대한 사랑이 깊은 ‘안나’ 가족은 전쟁 속 자신들의 삶을 영화로 찍어 나간다. 그들에게 있어 트라우마를 작품으로 만든다는 것은 인간으로 남기 위한 마지막 수단이다. (출처: 서울국제여성영화제)
Review
영화 상영 시작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엄청난 굉음이 들려옵니다. ‘사운드 조정이 잘못되었나?’ 하는 생각도 잠시, 등골이 오싹해지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아, 이게 바로 전쟁의 소리구나. 러시아와의 국지전이 계속되는 우크라이나 돈바스 지역에 사는 ‘안나’ 가족의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지구는 오렌지처럼 파랗다>는 사운드 하나만으로 늘 포격의 위험이 도사리는 전쟁의 중심지로 관객을 데려갑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이어지고 있는 지금,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안나’ 가족의 이야기를 만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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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견디며 삶의 터전을 지키는 사람들
무너진 건물, 국경을 지키는 군인들, 포탄이 떨어진 흔적, 도로를 달리는 군용 트럭. <지구는 오렌지처럼 파랗다>에는 전쟁의 피해가 그득한 돈바스 지역과 그 안에서 고통을 고스란히 견디며 살아가는 주민들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아무래도 주민들은 전쟁에 익숙해진 모양입니다. 포탄이 떨어졌을 때 고막이 찢어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웃으며 줄줄 읊어대는 돈바스의 아이들을 보면 알 수 있죠.
‘안나'의 아이들은 인터뷰 장면에서 전쟁 지역에서 사는 소회를 털어놓습니다. 포탄이 집으로 날아오는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감각이 생겼다는 아이, 전쟁이 없었다면 지금보다 더 착한 아이가 될 수 있었을 거라며 서글프게 미소 짓는 아이, 모든 걸 사라지게 한 전쟁이 공허하다고 고백하는 아이. 도대체 아이들에게 이러한 트라우마와 고통을 안기면서까지 러시아는 무얼 얻고자 하는 걸까요?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포격에 대비해야 하는 ‘안나' 가족과 돈바스 지역 주민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들이 그곳을 떠나지 않는 이유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위험을 무릅쓰고 터전을 지키려는 사람들을 마냥 답답해할 수만은 없습니다. 폭력으로 터전을 파괴하는 사람들에게 대항하는 법은 그 안에서 삶을 지속하는 방법뿐이니까요. 만약 돈바스 지역을 지킨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없었다면, 이 전쟁은 지금보다 더 심각한 양상으로 치달았을 겁니다.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인 돈바스는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의 주요 갈등 지역 중 한 곳입니다. 2014년 3월,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크림 반도를 무력 점령했고, 뒤이어 친러시아 분리주의자들이 돈바스의 일부 지역을 점령했습니다. 2015년 휴전 협정이 이뤄졌으나, 국지전은 끊이지 않았죠. <지구는 오렌지처럼 파랗다>는 러시아가 크림 반도를 점령한 이후, 돈바스 지역에서 끊임없이 벌어진 국지전의 실상을 '안나' 가족의 목소리로 고발하는 작품입니다.
전쟁의 아픔을 딛고 이제 좀 살아보려고 애쓰는 '안나' 가족의 이야기가 알려진 지 고작 2년 만에 러시아의 공격이 다시 시작됐습니다. 올해 자행된 침공에 관해서는 잘 알고 있었지만,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우크라이나의 전시 상황이 이렇게 오래 지속된 일인지 몰랐습니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한참동안이나 오랜 전쟁의 시간을 견뎌온 돈바스 주민들을 향한 안타까움이 마음에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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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속에서 삶을 지탱하는 법
'안나' 가족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전쟁통의 비참한 가족과는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비극을 아등바등 견뎌내지 않고, 어쩐지 평화롭기까지 합니다. 악기를 연습하고, 실을 묶어 흔들리는 이를 뽑고, 고양이에게 밥을 주고, 졸업 공연을 진행하고, 대학 합격을 기원하며 연등도 날립니다. 비록 졸업 사진의 배경이 무너진 건물이고, 그 사이로 군용 트럭이 지나가지만요.
그들이 이렇듯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살아낼 수 있는 힘은 다름 아닌 영화 제작에서 비롯됩니다. <지구는 오렌지처럼 파랗다>는 영화를 찍는 가족을 찍는 영화입니다. 그들은 집 한쪽 벽면에 검은색 천을 걸어 인터뷰 공간을 만들고, 자신들의 경험을 토대로 전시 상황의 돈바스를 묘사하는 영화를 만듭니다. 함께 머리를 맞대어 각본을 쓰고, 영화를 연출하죠. 언제 포탄이 날아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포탄이 날아오는 척 연기하며 영화를 찍습니다.
‘안나’ 가족은 황폐해진 도시에서 좋아하는 영화 촬영에 있는 힘껏 집중합니다. 그들에게 영화는 삶을 지탱하는 방법인 동시에 돈바스의 고통을 세상에 알리는 방법이죠. <지구는 오렌지처럼 파랗다>는 영화를 찍는 ‘안나’ 가족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면밀히 들여다보며, 전쟁 속에서 한 가족이 어떻게 삶을 영위해 나가는지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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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는 오렌지처럼 파랗다>는 프랑스 시인 폴 엘뤼아르의 시를 차용한 제목입니다. 파란 오렌지, 오렌지 같은 지구. ‘파랗다, 오렌지, 지구'는 논리적으로 전혀 연결되지 않는 단어들입니다. 그러나 ‘지구는 오렌지처럼 파랗다’라는 문장 안에서만큼은 세 단어가 모두 동등하게 존재하죠. 돈바스의 ‘안나’ 가족에게는 ‘전쟁, 평화, 일상’도 이와 같습니다. 전쟁도 일상이고, 평화도 일상이고, 결국 전쟁은 곧 평화인 거죠. 연결고리가 없어 보이는 단어들이지만, 그들의 삶 속에 세 단어는 동등하게 존재합니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전쟁 속에서도 삶을 이어가야만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들의 일상은 전쟁처럼 평화롭습니다.
Schedule in SIWFF
2022.08.27(토)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8관 10:00
2022.08.28(일)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9관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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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웨스 앤더슨의 '빈 곳' 비추기
어느 날, 작은 마을에 쥐가 출연하자 사람들은 설치류 전문가 '쥐잡이 사내'를 불러 쥐를 박멸하려고 한다. 쥐를 잡기 위해 쥐를 닮아버린 '쥐잡이 사내'는 나름의 전문지식을 활용해 쥐를 찾아보려고 하지만, 쥐는 나타나지 않는다(쥐잡이 사내). 맹독을 가진 우산뱀이 이불 안으로 기어들어와 옴짝달싹 못하고 누워있는 남자는 온몸이 땀으로 젖는다(독). 작은 시골 마을, 불량배들에게 쫓기는 약한 소년은 위협을 피해 높은 나무로 올라갔고(백조), 타짜가 되기 위해 초능력을 익히려는 남자는 하루 종일 카지노를 돈다(기상천외한 헨리슈가 이야기).
「찰리와 초콜릿 공장」으로 잘 알려진 영국의 동화 작가 로알드 달의 인물들이 웨스 앤더슨의 카메라로 다시 태어났다. 넷플릭스의 [ 로알드 달 시리즈 ]를 통해서다. 넷플릭스는 2021년 '로알드 달 스토리 컴퍼니'를 9,200억 원을 들여 인수하고, 그 직후 웨스 앤더슨과 함께 4편의 단편소설을 영화화하는 '로알드 달 시리즈' 제작을 결정했다. 적잖은 자본이 투입된 프로젝트인 셈인데, [ 로알드 달 시리즈 ]는 그다지 대중향을 고려한 것 같진 않다. 4편의 단편영화로 구성된 [ 로알드 달 시리즈 ]의 애초 기획은 장편이었다고 하는데, 거의 실험극에 가까운 구성으로 봤을 때 러닝타임을 줄인 건 옳은 선택이었던 듯싶다.
웨스 앤더슨이 이 시리즈를 통해 보이고자 한 것은 어떤 '이야기'가 아니라 이야기가 출연하는 조건-형식이다. 지금껏 필모그래피에서 다분히 연극적인 내레이션과 미장센을 구사해온 웨스 앤더슨은 '로알드 달 시리즈'를 통해 아예 연극 무대를 영화의 형식으로 통합하는 시도까지 나아간다. 시네마 카메라가 주는 화면의 깊이(Depth)를 배제하고, 평면적인 세트를 갈아끼우는(?) 방식으로 화면을 전환한다. 심지어 세트를 옮기는 스탭들이 공공연하게 화면 안으로 들어오는가 하면 배우들은 그들에게 눈짓을 보내거나 작은 목소리로 지시를 주고받는다. 웨스 앤더슨 특유의 수평/수직적인 카메라 이동(돌리)도 도드라진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요소는 '마임(mime)'이다. [ 로알드 달 시리즈 ]에서 배우들은 어떤 특정한 소품을 마임으로 대체하는데, 예를 들어 허공에 빈손으로 총을 쏜다던가(백조), 보이지 않는 자루에서 보이지 않는 쥐를 꺼내는(쥐잡이 사내) 식이다.
화면 구성뿐만 아니라 서사를 이끌어나가는 축도 남다른데, [ 로알드 달 시리즈 ] 속 캐릭터들은 저 자신의 육성으로 스토리를 읊어댄다. 내레이션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캐릭터들은 자신의 생각이나 상태 등을 진술하는 걸 넘어 제4의 벽을 부수고 영화 전체의 스토리를 직접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소설/대본의 지문을 직접 읽어주는 형식에 가깝다고 할까. 이런 구성이 주는 독특한 위화감은 「기상천외한 헨리슈가 이야기」에서 도드라진다. 「기상천외한 헨리슈가 이야기」는 '헨리슈가'씨가 우연히 발견한 한 기록을 읊으며 이야기가 진행되는 소위 '액자식 구성'을 취하는데, 영화의 중반부가 되면 아예 원작자 로알드 알이 등장하여 '이야기를 읊어주는 헨리슈가씨를 읊어'준다.
웨스 앤더슨이 어마 무시한 대자본이 투입된 프로젝트에서 이런 도전적인 시도를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유관자가 아니라면 아무도 모를 일이지만, 아마도 아이디어의 시작에는 원작자 로알드 달의 작품 철학이 있을 수도 있겠다. 로알드 달은 자신의 작품이 수정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생전 출판사에 자신의 직접 쓴 원고에 문장 부호 하나 바꾸지 말라고 요구했던 적이 있을 정도. 심지어 그는 자신의 작품 「마녀를 잡아라」를 영화화했던 '니콜라스 뢰그' 감독의 「마녀와 루크」를 보고 결말이 바뀌었다는 이유로 시청 금지 캠페인까지 추진했었다.
그런 원작자의 성향을 고려했을 때, 텍스트를 이미지로 바꾸는 작업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근거는 없고, 그냥 개인적인 예상이다. 웨스 앤더슨은 이미 「판타스틱 Mr. 폭스」를 통해 로알드 달의 작품을 영화화한 적 있다). 아이디어의 태동이야 어쨌든, 웨스 앤더슨은 '텍스트의 영화화'라는 프로젝트에서 일종의 '메타 Meta - 형식' 적인 목표를 품었다. 앞서 언급했듯 그것은 이야기가 출연하는 형식 - 조건을 밝히는 것이다.
배우들로 하여금 지문을 그대로 읊게 하고, 드르륵거리며 세트를 옮기며, 인위적인 마임을 선보이는 건 영화/연극의 핵심인 '제4의 벽'을 명시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전략이다. 특히 캐릭터의 의식이나 행동에 대한 묘사가 지극히 문어(文語) 적인 이유가 원작이 소설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흔히 '제4의 벽'을 철저히 숨기는 것은 '이야기'를 형성하기 위한 필요조건으로 여겨지고, 피치 못해서든 실수이든 '제4의 벽'을 드러내는 것은 창작자의 역량 부족으로 비판받는다. 카메라/조명/음향 등의 기술적 한계는 물론, 연출/편집의 유려함이나 대본의 '개연성'문제 역시 '제4의 벽'개념의 연결선상이다. '그럴 듯' 해야 관객이 작품을 '현실'로 여기고(속고) 그 뒤에 비로소 '이야기'가 따라붙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로알드 달 시리즈]에 따르면, 과연 그런가?
일단 관객들은 [로알드 달 시리즈]를 현실의 반영으로서 몰입하지 않는다. 물론 그런 사람들도 있을 수 있지만, 일단 웨스 앤더슨은 그것을 기대하지 않았다(다시 한번 말하지만, 배우들이 카메라 밖 스텝들과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독특한 연출뿐만이 아니다. 대본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인데, [로알드 달 시리즈]는 딱히 기승전결이나 '개연성' 같은 걸 챙기지 않는다. 그럼에도 관객들은 영화에 몰입하고, '이야기됨'을 감각한다. 즉, [로알드 달 시리즈]에서 '이야기'의 형성 조건이란 '제4의 벽을 숨기기/ 그럼으로써 관객들을 속이기'가 아닌 셈이다. 대신 웨스 앤더슨은 다른 걸 숨긴다. 마치 공백을 가리키는 손가락, 마임처럼.
이를테면 「쥐잡이 사내」의 '이야기'는 결말에서 비로소 형성된다. '쥐잡이 사내'에 따르면 건초더미 속에 숨어있는 쥐들은 무언가 맛있는 것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에 미끼를 먹지 않았다. 그러나 쥐가 먹었을 '맛있는 것'의 정체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망부석같이 놓여있는 거대한 건초더미만 있을 뿐.
「독」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불 안에 똬리를 틀고 있는 독뱀을 쫓기 위해 영화 내내 온갖 난리(?)를 쳤지만, 정작 이불을 걷어내자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꿈을 꾸셨나 봐요"라는 인도인 의사의 말 한마디에 흥분해 뱀처럼 독을 쏘아대는 해리만 있을 뿐이다(결국 뱀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밝혀지지 않는다). 「기상천외한 헨리슈가 이야기」에서 결국 헨리슈가의 정체가 누구인지는 공백으로 남았고(작중에서 그는 누구나 알만한 유명인이며 '곧 밝혀지게 될 것'이라고 했다), 「백조」 속 괴롭힘당하는 어린 소년 '왓슨'이 어떻게 됐는지도 알 수 없다. 명료하게 해석될 수 없는 내레이션만 남았을 뿐이다.
[로알드 달 시리즈]가 숨긴 것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무엇을 숨겼는지를 안다면,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은 이미 발각된 것이니까. 간략한 위치에 어떤 공백이 있다는 어렴풋한 사실 정도를 뉘앙스로 풍기는 것으로 이야기는 출연한다.
4편의 단편 중에 일반적인 의미에서 가장 온건하게 이야기 꼴(?)을 갖추고 있는 작품은 「기상천외한 헨리슈가 이야기」 이지만, 가장 '힘'이 느껴지는 건 그 대척점에 있는 「쥐잡이 사내」인 점은 의미심장하다(「쥐잡이 사내」의 로튼 토마토 지수는 만점이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TV는 달이라고 백남준이 말했던가. 최초의 이야기일 다양한 문명의 신화들이 대체적으로 '밝히기'보단 '숨기기'에 급급했던 것에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본래 이야기란 행간과 자간이고, 씬과 씬, 컷과 컷 사이의 어둠이다. 그곳에 마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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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을 강제당하는 노인들
노인이 주인공인 두 영화가 같은 날(2월 7일) 개봉했다. 한국 영화 〈소풍〉과 일본 영화 〈플랜 75〉. 플롯, 캐릭터, 감성, 질감 등 많은 것이 다른 영화지만 두 영화에는 공통점도 있다. 우리 사회가 ‘노인’이라는 기표의 내용을 어떻게 채우고 있는가? 노인은 그 앞에서 무엇을 느끼는가? 두 영화가 공유하는 질문이다. 지금껏 살아온 삶의 맥락이 소거된 채 가족과 사회에 ‘부담’을 주는 천덕꾸러기가 되어버렸다는 자괴감만 남은 현실. 이것이 과연 노인에 대한 온당한 대우일까? 두 영화가 이 질문에 어떻게 답변하는지를 따라가보자.
먼저 〈소풍〉이다. 여성 노인 은심의 집에 갑자기 아들네 가족이 들이닥친다. 사업상 어려움을 겪는 아들은 은심의 보험이나 집을 처분해 목돈을 마련하고 싶어 하는 눈치다. 파킨슨병이 시작되어 몸에 불편을 느끼면서도 아들이 이때다 싶어 요양원 이야기부터 꺼낼까 봐 이를 전하지 않은 은심은 때마침 찾아온 고향 친구 금순을 따라 60년 만에 고향을 찾는다. 고향에서는 금순과 우정을 더 단단히 다지고, 고향을 야반도주하듯 떠날 수밖에 없었던 과거를 마주하며, 자신을 짝사랑했던 태호와 재회해 지금껏 누리지 못한 행복한 시간을 만끽한다. 그러나 행복 속으로 불쑥불쑥 끼어드는 노환과 질병은 이들에게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일깨운다. 은심과 금순은 얼마 남지 않은 생애 동안 자신이 마무리해야 할 일이 있다는 데 공감하고 그 일을 매듭 지은 후 소풍을 떠난다.
그들이 마무리해야 하는 일은 무엇이었을까? 자식에게 부담 주지 않기다. 영화는 계속 부모에게 무언가를 바라기만 하는 자식들을 부정적으로 재현한다. 노인들이 기댈 데 없이 홀로 건강을 돌봐야만 하는 현실의 문제를 담아내기도 한다. 그러나 두 노인은 결국에는 자식들에게 가진 것을 모두 넘겨준다. 사업이 망해 고꾸라지는 아들(은심), 평생 한 번이라도 가족과 아파트에서 살아보고 싶은 장애인 아들(금순)은 두 노인이 자식들에게 모든 재산을 넘기는 근거가 된다. 그리고 두 사람이 간 소풍의 장소. 바다 옆, 아름답지만 날카롭게 깎인 절벽에서 은심과 금순은 손을 잡고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간다. 그들의 발걸음이 자식에 대한 ‘책무’를 다했다는 뿌듯함을 만끽하기 위함인지, 해야 할 일을 다 했으니 친구와 함께 세상을 등지겠다는 뜻인지 분명하게 제시하지 않고 영화는 마무리된다. 자녀의 문제를 ‘해결’했으니 노환과 질병이라는 자기 문제에서는 자식에게도, 국가에서도 받아낼 것이 없다는 듯 홀가분한 얼굴이다. 그러나 노인이 가족과 사회 모두에게 ‘부담’이기만 한 사회에서 이들의 삶이 ‘소풍’일 수 있을까? 노인에게 행복한 삶이 가능함을, 그들의 고난이 사적인 영역에 방치되었음을 보여준 영화는 두 노인의 강요된 퇴장을 ‘아름답게’ 포장하여 자신이 제기한 비판적 함의를 재빠르게 회수한다. 모든 걸 퍼주고도 ‘부담’이 되길 거부하는 노인의 삶을 아름다운 ‘소풍’에 비유함으로써 말이다.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을 더한 〈플랜 75〉에서도 노인이 사회의 ‘부담’인 건 마찬가지다. 영화는 울분에 찬 청년이 노인을 살해하는 범죄 현장과 범인이 자살하며 스스로를 영웅으로 치켜세우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노인 돌봄에 필요한 ‘비용’에 청년 세대가 극단적 반감을 가지는 것은 미래의 일도, 일본만의 일도 아니라는 점에서 섬뜩한 오프닝이다. 사회 갈등이 증폭되자 정부가 새로운 정책을 발표한다. 정책 이름은 ‘플랜 75’. 75세 이상 노인 중 신청자에 한해 ‘편안한’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돕는다는 내용이다. 기묘한 정책이다. 정책은 공공성을 담보해야 하는데 플랜 75는 공적으로 책임져야 할 일을 사적으로 책임지라는 일에 공적 권력을 동원한다.
78살의 미치는 고민이 깊다. 혼자 사는 그는 호텔에서 청소하며 생계를 이어왔는데 최근 고령의 노동자가 작업 중 쓰러지는 사건이 발생하자 비슷한 일이 재발할까 두려운 호텔에 의해 해고당한다. 고령이라는 이유로 재취업은 쉽지 않다. 게다가 미치의 집은 철거를 앞두고 있다. 그러던 와중 정부는 플랜 75가 큰 정책적 효과를 거두었다는 데 고무되어 신청자 연령을 대폭 낮추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고 발표한다. 결국 미치는 플랜 75를 신청한다. 여기서 우리는 〈소풍〉과 같은 질문을 마주한다. 자식에게 모든 걸 넘겨주고 아무런 공적 부조를 받지 못하는 삶을 ‘소풍’으로 포장하는 일은 자발적인가? 플랜 75, 즉 죽음을 선택하는 미치의 결정은 자발적인가?
두 영화에서 세 노인이 내린 선택은 강제된 자율이다. ‘노인을 부양하는 데는 비용이 들고, 그건 우리 모두에게 부담이야’라고 말하는 사회에서 ‘존경받는 노인’으로 ‘아름답게’ 삶을 마무리하려면 내려야만 하는 선택은 이미 정해져 있다. 왜 국가가 노인을 방치하냐고 항의하는 자는 미래 세대를 걱정하지 않는 ‘이기적’ 노인이 되도록 이미 담론 지형이 구축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 ‘존엄’하고 ‘품위’ 있는 마무리는 강제된 역할 기대 혹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소풍〉과는 달리 〈플랜 75〉에서는 미치가 마지막 순간에 결정을 철회하고 삶을 이어가겠다는 결심을 한다. 그리고 이 장면의 배경을 은은하게 빛나는 햇빛으로 하여 노인을 ‘비용’, ‘부담’이 아닌 ‘인간’으로 대하는 사회의 모습을 상상케 한다. 같은 주제를 다루어 서로 다른 메시지를 내는 두 영화는 노인이 ‘비용’이자 ‘부담’인 시대의 분위기를 공통적으로 포착해낸다. 〈플랜 75〉의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이 실제로 도래하기 전에 〈소풍〉이 그려내는 현실을 다르게 해석하고 풀어낼 고민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