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류산2024-05-16 22:40:24
지배종인 인간의 존재의미를 묻는다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 리뷰
진화한 유인원(Ape)과 퇴화된 인간들이 살아가는 디스토피아 행성. 유인원은 세상의 지배종이 되었고 인간들은 사냥의 대상에 불과하다. <메이즈 러너> 시리즈의 웨스 볼 감독이 연출하고, <아바타: 물의 길> 조쉬 프리드먼이 각본을 썼다. 제작비는 1억 6천만 달러, 한화로 약 2200억 원이다. 평균제작비 약 100억(홍보비 추가 총제작비는 약 125억)이 드는 한국 상업 영화를 20개 이상 만들 수 있는 대작이다.
혹성탈출 시리즈는 리부트(Reboot) 영화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이 리부트 영화의 유행을 가져왔다. 놀런 감독은 오래되어 폐기 수준에 있던 배트맨의 캐릭터에 새롭게 스토리를 입혀 대박 흥행을 가져왔다. 이후 많은 리부트 영화 시리즈가 시도되었고 혹성탈출 시리즈도 그중 하나다.
혹성탈출 시리즈처럼 한국에서도 마동석의 <범죄도시> 성공으로 시리즈 영화에 관심이 많아졌다. 개별 독립된 영화는 유명감독의 대작 영화일지라도 흥행을 장담할 수 없다. 시리즈 영화의 장점은 예측가능성이다. 경험을 토대로 제작비 규모와 개봉 시기를 정하기가 쉽다.
캐릭터를 관객에게 설명하는 시간 등 영화 초반의 빌드업 과정을 과감하게 줄이고 바로 본론에 들어가 관객을 몰입하게 할 수 있다. 충성도 높은 팬덤이 형성되면 흥행의 강력한 엔진이 된다. 시리즈 영화는 스핀오프(번외 편)와 프리퀄(전사) 등 다양한 형태로 변주할 수 있어 확장성도 크다.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는 인간 세상이 어떤 방식으로 망할 수 있는 지의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태양계 행성의 지배종이 된 유한한 존재인 인간. 영화는 인간의 욕망과 교만으로 결국 문명을 잃어버리게 될 디스토피아 세상의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화면 크기가 감동을 다르게 한다.’는 아내의 말에 동의한다. 영화를 방구석 1열이 아닌 극장에서 보는 주된 이유다. 우리는 용산 CGV 아이맥스 관에서 영화를 보았다. 마치 실제 유인원들이 영화에 출연한 듯 얼굴에 나타나는 섬세한 감정표현, 거대한 숲이 된 고층 빌딩, 프록시무스 군단의 거처인 폐기된 크루즈선 등을 큰 화면에서 실감 나는 영상으로 즐겼다.
러닝타임은 다소 긴 145분이다. 이 정도의 상영시간이라면 놀라운 영상만으로는 부족하다. 이야기(Story)와 서사(Narrative)가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관객이 중간에 피로도를 느끼게 됨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굳이 옥에 티를 찾자면 그렇다. |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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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WFF 데일리] 흡연하는 페미니스트라면,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영화
8★/10★(신수원 감독 작품, 2021년, 108분, 한국.)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의 역사를 기록하는 영화, 영화에 대한 영화의 계보를 기록한다면 어떤 영화가 포함될까? 우리가 영화를 사랑하게 되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그린 〈시네마 천국〉부터 혁혁한 공로를 세웠으나 소외되어온 흑인의 기여를 영화사에 기입하겠다는 야심을 품은 최근의 〈놉〉까지 다양한 영화가 떠오른다.
그리고 여기, 〈오마주〉가 있다. 〈오마주〉는 종종 ‘홍일점’ 대접을 받았으나 대체로 빛 좋은 개살구로 취급되었던 여성 영화인에게 바치는 헌사다. 여전히 영화계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동시대 여성 영화인들을 향한 연대의 마음을 담은 영화이기도 하다. 주인공은 중년의 여성 영화감독 지완이다. 지완은 세 편의 영화를 연출했으나 흥행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집에서는 ‘꿈꾸는 여자랑 살면 외로워진다’는 핀잔을 받거나 돈 되는 일을 해보는 게 어떠냐는 말을 듣기도 한다. 지완이 여기서 별다른 상처를 받지 않는다는 점이 흥미롭다. 가족의 말이 지완에게 모욕이 아닌 일상이란 의미다.
그러던 지완에게 영상자료원에서 일 하나가 들어온다. 1960년대에 활동한 한국의 두 번째 여성 영화감독인 홍재원 감독의 〈여판사〉* 상영회를 준비 중인데 필름 상태가 좋지 않으니 복원해달라는 의뢰였다. 〈여판사〉는 판사로 일했던 여성이 남편에게 독살당했다는 실제 사건에 모티프를 얻어 제작된 영화였다. 홍재원 감독은 결말을 바꾸어 주인공이 좋은 판사인 동시에 효부로도 인정받았다는 영화를 만들었다. ‘슈퍼우먼’을 강요하는 상상 속 세계에서나마 ‘단죄’ 당한 여성을 복권시켜준 것이다. 현실의 홍재원 감독은 혹시나 모를 불이익에 절친한 동료에게조차 자신에게 딸이 있음을 밝히지 않았을 정도로 고독하게 영화 작업을 이어갔지만 말이다.
지완은 어렵게 〈여판사〉의 대본을 구하고 성우와 후시녹음을 하며 영화의 사운드 공백을 채워나가는 등 복원 작업에 매진한다. 그런데 어딘가 이상하다. 영화가 뚝뚝 끊긴다. 중간에 잘린 부분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 검열 때문이다. 검열당한 장면이 대단히 파격적이었던 것도 아니다. 그저 여자가 담배를 피우는 장면이었다. 담배를 피우는 페미니스트 관객이라면, 홍재원 감독의 옛 여성 동료인 필름 기사가 복원해낸 이 장면에서 기품 있는 뒷모습으로 담배를 피우는 화면 속 주인공과 함께 흡연하고 싶어 견딜 수 없을지도 모른다. 시대와 맥락에 따라 담배는 저항과 연대의 상징이 된다.
〈여판사〉의 잊힌 조각들을 맞춰나가는 과정에서 지완은 홍재원 감독에게서 자신을 본다. 홍재원 감독 역시 여성이 소수자인 영화판에서 힘겹게 버티며 세 편의 영화를 찍었다. 힘들었지만 적게나마 자신의 곁을 지키는 동료 여성들이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좋은 아내, 엄마이자 좋은 감독이어야 했다. 지완과 놀랍도록 닮은 데가 많다.
지완은 두렵다. 홍재원 감독을 향한 연대의 마음과 동시에 현실에 대한 공포가 샘솟는다. 홍재원 감독은 세 번째 영화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영화를 찍지 못했다. 그 시절 그녀와 함께 영화를 작업했던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1960년대와 2020년대가 겹치기 시작한다. 지완은 세 번째 영화가 흥행에 처참히 실패했고, 오랜 세월을 함께 작업한 동료 여성 PD는 눈물 흘리며 그 영화를 끝으로 영화계를 떠나겠다고 선언한다. 지완은 남편‧아들과 다정하게 투닥거리지만 그들이 지완의 꿈을 응원해주지는 않는다. 자궁에 큰 혹이 생겨 자궁적출 수술을 받기도 한다.
영화계 여성 선배를 발견했다는 기쁨과 공포의 혼재 속에서 지완은 깨닫는다. 멈추지 않고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지완을 다잡는 건 지완 자신뿐만이 아니다. 〈여판사〉를 복원하며 가슴으로 깊게 공명한 홍재원 감독, 그리고 이제는 노쇠해진 그녀의 여성 동료도 지완이 멈추지 않기를 바란다. “자네는 끝까지 살아남아.” 지완에게 여러 여성의 삶과 꿈이 포개진다. 이제 지완은 혼자가 아니다. 끝내 히트작은 만들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지완은 영화를 계속함으로써 무언가가 변화했음을, 그리고 그 변화는 바로 어려운 시대를 살아낸 여성 선배들에게 빚진 것임을 기억하며 영화를 만들 것이다. 존경과 헌사로서의 ‘오마주’. 이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그녀가 언젠가 후배 여성 영화인들에게 받을 것이기도 하다.
여성 영화의 계보와 여성이 영화를 만든다는 것의 의미를 감동적으로 그려낸 것이 〈오마주〉의 전부는 아니다. 〈오마주〉에는 어쨌든 무언가를 만들어놓는 것의 중요성도 담겼다. 지금은 아무도 보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 ‘하찮은’ 결과물이 언제 누구에게 어떻게 가 닿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여판사〉가 그러했듯 성실하고 뜻있는 후배에게 발견되는 일은 극소수에게만 허락된 특권일 확률이 높다. 하지만 그럼에도 기록을 남기는 일은 중요하다. 누군가는 그 시대를 다르게 살아냈음을 나 자신에게, 언젠가 만나게 될 이름 모를 후배에게 증언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벅차오를 정도로 감동적인 이 영화는 잊힌 창작자들에게, 어려운 현실을 살아가는 창작자들에게 진한 위로와 연대의 계기로 다가갈 것이다.
*〈오마주〉가 참고한 홍은원 감독의 〈여판사〉는 한국고전영화 유튜브 채널에서 감상할 수 있다.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에 초청받아 서울국제여성영화제(SWIFF)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8월 25일부터 9월 1일까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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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우리들>, 우리들이 살아남은 역학관계
*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사회생활이란 말은 직장생활부터를 뜻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이미 사회생활에서만큼은 초짜가 아니다. 어린이집, 유치원, 초중고등학교, 대학교(동아리, 군대 등 포함)를 지나 그리고 직장으로 발을 들여놓기 때문이다. 물론 경험이 많다고 능숙하다는 건 아니다.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 사춘기니까 예민할 수 있지 정도가 변두리에 있는 어른들이 할 수 있는 말이다.
영화 <우리들>을 보면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의 지난 '사회생활'이 떠올랐다. 친구들이 생각보다 잔인하다는 생각은 많이 했다. 우리들은 약점이나 빈틈을 마구잡이로 헤집을 수 있었다. 딱히 어른처럼 지켜야 할 선이나 체면이 명확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뭐든지 금방 습득했다. 초등학교를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친구들이 싸우는 걸 본 적이 있었다. '넌 키가 작잖아'하면서 놀리는 말에 할 말이 떨어진 친구가 "넌 아빠 없잖아, 아빠 없는 애잖아"라는 말을 하면서 승리에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 아니지. 그건 아니었다. 아빠가 있고 없는 게 자랑하거나 폄하받을 일인가. 그 말을 듣고 일그러진 얼굴이 머리채를 잡으면서 제대로 몸싸움이 시작됐다. 그때, 처음 사람이 무서웠다.
알지 알지 저 표정
<우리들>에 나온 친구들을 보면 어디서 다 많이 본 광경이다. 무리를 짓고, 이간질을 하고, 약점을 공유한다. 친구와 친하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혼란스럽다. 영화에서 승자를 굳이 가리자면 보라 하나다. 선과 지아를 패처럼 들었다 놨다 한다. 보라는 1등을 놓치면서 약간의 데미지는 입었을지언정 여전히 교실의 중심이다. 아이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입맛에 맞게 떠들고 다니면서 선은 거지로, 지아는 도둑으로 추락시켰다. 보라의 코는 마음에 안 드는 사람에겐 나지도 않는 퀘퀘한 냄새를 맡는다. 주변에 시녀처럼 떠받드는 친구들이 맞장구를 친다.
선과 지아는 뭔가 잘못된 줄 알면서도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한다. 전학생인 지아가 선이와 절친이 되었다. 심지어 지아는 선이네 집에서 꽤 오래 먹고 자고 했다. 지아가 개학날 냉담할 줄 선이는 몰랐겠지만 관객들은 예감했을 것이다. 보라와 팔짱을 끼고 가는 그 순간부터. 친구 사이란 게 때론 연인 사이보다 무섭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고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면 보라와 같이 다니는 게 그렇게까지 큰 의미가 없다는 걸 알게 되겠지만 지금에 둘에겐 중요한 문제다. 보라의 눈밖에 나는 건 왕따가 되는 지름길이니까. 왕따를 당해봤기 때문에 둘도 어쩔 수 없이 침묵하거나 동조한 순간이 있으리란 건 짐작할 수 있다. 혼자가 되는 건 말도 안 되는 비아냥거림마저 도움 없이 견뎌야 하는 괴로운 일이다. 그게 싫어서 견디게 된다. 조금 치사하고 찜찜하더라도 보라가 원하는 대로 맞췄던 것이다.
같은 공간에서 의무적으로 시간을 보내는 학교는 우리에겐 정글과 다를 게 없다. 인싸와 아싸, 순화하면 주류와 비주류에 대한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 누군가는 관심의 중심에 있고 싶어 하고 그 사이에 자리를 잡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다. 사이좋게 친하게 지내라고 말하기보다 온전히 살아남으라고 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몸싸움은 나면 차라리 티라도 나지만 그 외의 것들은 선생님에게 말씀드리기도 어렵다. 선생님마저도 소외된 학생이 없도록 교실을 이끌기 힘들다. 교실은 결국 혼자 살아남아야 하는 곳이다.
물론 학교 밖이라고 전혀 상관없는 건 아니다. 경제적인 상황이 친구를 제약하기도 한다. 어떤 부모님들은 급이 맞는 친구들과 지내라고 아이들에게 조언을 한다. 어떤 아이들은 "너희 집은 전세야, 자가야?" 같은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물어본다. 지아에게 선은 조금은 같이 다니기 쪽팔린 친구였을지도 모른다. 좁은 집에 에어콘도 없고, 핸드폰도 없고 학원을 다니기는커녕 색연필을 사거나 같이 놀기에도 돈을 걱정하는 친구였다. 집이 부유하지 않은 것도 약점이 된다.
나 역시 초등학교 친구들의 생일파티에 가지 않았고 친구네 집에 놀러 가지 않았다. 물론 우리 집에서 생일파티를 하거나 집에 초대하지 않았다. 우리 집과 비교 대상을 머리에 남기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멋모르고 친구네 생일파티에 한 번 갔더니 불편했다. 주택인 우리 집과 달리 아파트였다. 그네가 있는 놀이터, 소파가 있는 넓은 거실, 내 방이 있는 친구들의 집. 생일이라고 맛있는 과자며, 치킨과 피자를 시켜놓고 친구들을 불러 선물을 나눠갖는 모습에 이질감이 들었다. 배배 꼬였는지 몰라도 자랑처럼 느껴졌다. 친구 자랑, 집 자랑. 나에게는 없는 것. 내가 부모님에게 요구할 수 없는 것. 게다가 생일에 초대받는다고 꼭 절친하다는 의미도 아니고. 학교에서만 친하게 지내도 되는 건 아닌가 싶고.
지금은 돌직구를 툭툭 던지곤 하지만 영화 속 선이와 초등학교 때 내가 무척 비슷했다. "아니, 그게 아니고......" 하면서 할 말은 못 하고 나중에 집에 와서 받아치지 못한 게 바보 같았다. 학교에서의 힘은 단순하다. 친구가 많거나 공부를 잘하거나, 재밌거나, 예쁘고 잘생겨서 인기 있거나. 시험에서 1등을 놓친 보라가 지아가 받는 박수와 칭찬에 아쉬워하며 혼자 우는 걸 보니 그랬다. 교실엔 수많은 학생이 있지만 1-2등 사이는 경마 시합처럼 경쟁을 부추긴다. 친구가 많고 매력이 넘치는 친구들이 내심 부러웠지만 티를 내진 않았다. 가끔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대못을 박고 가면 눈물을 참느라고 고생했다. 속상하고 억울하면 눈물부터 차올랐던 건지. 몸이 말을 듣지 않아서 더 속상했다. 화장실에 있던 낙서, 냉랭한 걸 넘어 심지어 역겨워하는 듯한 표정. 재수가 없다거나 말이 많다거나 표정이 이상하다거나? 이유가 뭐가 됐든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지금도 여전히 상처는 받겠지만 어느 정도 내려놓았다.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할 수는 없는 거다. 내 탓만 할 필요는 없다. 특히 나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세상에 그런 사람만 있는 것도 아니다.
사람 때문에 한 번 쓸쓸함을 느끼고 나면 쓸쓸해 보이는 사람이 저절로 눈에 들어오게 된다. 선이 자신에게 까칠하게 구는 지아가 계속 눈에 들어온 건 비슷한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혼자 뻘쭘해하거나 겉돌고 있는 모습이 마음에 걸린다. 그 모습을 보면 확신이 생긴다. 왕따를 당하는 이유가 있다고들 하지만 완전히 동의할 수만은 없다. 이유 없는 왕따도 분명히 있으니까. 누군가를 괴롭히거나 자기 자신을 과시하고 다니는 사람 말고 아무런 잘못 없이도 왕따를 겪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기 때문이다. 조용하고 혼자라서 만만하다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하다.
남보기에는 평범하고 내가 겪기엔 다사다난한 초등학교 시절을 보내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출제자의 의도와는 관계없는 순도 100% 진심을 담은 글을 제출했다. 학교폭력을 예방하는 글짓기 대회에서 '파'가 생기는 걸 조심하자고 썼다. 여러 명이 몰려다니는 친구들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대표가 있다. 그 친구의 이름을 따서 '00파'라고 이름 붙였다. 우리는 파를 이끌거나, 파에 속하거나, 어느 파에도 속하지 않은 주변인이 되거나 셋 중에 하나다. 파끼리 갈등이 생기기도 하고, 파에서 주도권을 가진 친구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대체로 소외된 친구)을 괴롭힐 수 있는 가능성을 지적하는 글이었다. 상도 타지 못했고 어떤 선생님이 그 글을 읽고 흥미로웠다고 얘기를 눈앞에서 듣고선 민망함에 도망쳤다. 머릿속을 그대로 보여준 기분이었다.
10여 년이 지나도 여전히 내 생각은 비슷하다. 몸싸움만이 폭력이 아니고 눈에 잘 띄지 않은 말이나 행동 역시 폭력이다. 약간의 아쉬움이라면 조직폭력배같이 00 파라고 설명했던 점. '또래집단 간의 역학관계'로 바꿔서 말했으면 좀 전문성이 있었을까. 역학관계가 불균형해졌을 때 폭력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으니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나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애초에 학교폭력 예방에 선생님들이 기대하던 답이 무엇이었을까?
초등학교가 끝날 무렵 나에게도 희한한 일이 생겼다. 5-6명과 함께 다니는 친구가 있었다.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밝고 친구도 많았다. 어느 날 갑자기 우리 모임에 들어오지 않겠냐고 제안을 하더라. 좋으니 논의해보고 얘기해달라고 답했다. 그런 제안을 받은 게 신기했다. 같이 다니면 좋고 아니면 말고 식의 마음이었다. 그래서 논의 결과를 듣자 하니 한 사람이 반대해서 아쉽지만 들어오지 못하게 되었다는 거다. 그런가 보다 했는데 지나고 나니 궁금했다. 들어오라고 제안을 한 친구나, 반대를 한 친구나 무슨 의미로 그랬을까 하고. 아쉽지 않았다. 어쩌면 나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평가 내리진 않았을까 그런 상상이 들어서였던 것 같다. 마음에 안 든다든지, 같이 다니면 불편하다든지 등의 이유로 말이다. 만약 그랬다면, 내가 생각하던 친구와는 거리가 멀었을 것이다.
(윤 눈두덩이에 멍 발견)
"윤아, 너 왜 계속 연호랑 놀아."
"응?"
"아니, 연호가 계속 너 다치게 하잖아. 맨날 상처 내고 때리고, 장난도 너무 심하고."
"이번에 나도 같이 때렸는데."
"그래?"
"응, 연호가 나 때려서 나도 쫓아가서 연호(머리) 확 때렸어"
"그래서?"
"그래서? 연호가 일어나면서 여기를(눈)을 확 때렸어"
"그래서?"
"그래서 같이 놀았어."
"... 놀았다고?"
"어, 보물찾기 하러 나갔는데."
"야, 이 윤, 너 바보야? 그러고 같이 놀면 어떻게 해?"
"그럼 어떡해?"
"다시 때렸어야지"
"또?"
"그래. 걔가 다시 때렸다면 또 때렸어야지. "
"... 그럼 언제 놀아?"
"...... 어?"
"연호가 때리고 나도 때리고 연호가 때리고 그럼 언제 놀아? 나 그냥 놀고 싶은데"
-영화 <우리들> 중
선의 마음을 돌린 건 이 대화가 유력했다고 본다. 순수하게 서로에게 잘해주고 솔직했던 때와 다르게 지금 지아와 선이의 관계는 상처투성이에 정도를 한참 지나쳤다. 아무리 그래도 건드릴 게 따로 있지, 싸울 때 최대 약점이나 가족은 건드리지 말라는 메뉴얼이 있었으면 좋겠다. 지아는 보라와 지내려고 왕따인 선을 무시한다. 반면 자신이 소외되니까 선의 아버지가 알콜중독자라며 자극적인 거짓 정보를 털어놓고 왕따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선 역시 이판사판으로 지아가 전에 왕따 당한 경험이 있고 어머니가 영국에 있다며 거짓말한 것들을 떠벌린다. 어른의 입장으로도 관계를 유지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심각한 사이가 됐다.
하지만 그럼에도 선이는 지아와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남았다. 지아와 함께 들였던 봉숭아 물도, 보라에게 빌려 바른 매니큐어도 다 지워진 손톱에는 봉숭아 물이 아주 약간 남아있다. 딱 그만큼의 마음만큼 지아와 함께 지내고 싶었을 것이다. 분명 둘만 있었을 때는 즐거웠던 시간이었고 이 모든 건 학교에서 보라를 사이에 두고 시작된 것이니까. 나 역시 선이처럼 맞으면 또 때려야 하는 건 물론이고 2-3배는 더 때리자는 주의였는데 윤이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선이는 지아에게 상처받으면서도 여전히 지아를 놓지 않았다. 상처를 받았다고 언제까지 얼마나 돌려줘야 하는 걸까. 그 길로 다른 친구와 놀든지, 아니면 때리는 손을 멈추고 그 친구와 다시 화해하고 놀든지. 윤이에게 배웠다.
선이에게도 선택권이 생겼다. 영화의 마지막. 피구 시합에서 팀을 짜느라 한 사람씩 골라간다. 아, 저 기분 뭔지 알지. 내가 '매력적인 선택지'가 아니라 입이 탄다. 최후의 1인이 되면 아무도 원하지 않는 사람이란 걸 확인하고야 마니 마지막만 아니었으면 좋겠는 심정. 지아가 바로 그 찌끄레기가 된다. 찌끄레기에겐 사람들이 함부로 대한다. 선을 밟았으니 나가라며 고집을 피우고 아무도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 영화 초반 선이 당했던 상황 그대로다. 여태까지 선에게 했던 걸 생각하면 지아가 그 꼴을 당하고 있어도 선이 역시 침묵해도 상관없었다. 선이 말고 다른 사람들도 입이 있지만 아무 말 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선이는 목소리를 내어서 지아가 선을 밟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우리가 살아남은 역학관계에서는 단 한 사람의 목소리가, 단 한 사람이 내 편이 되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꼭 주류에 속하는 게 아니라, 꼭 많은 사람을 알고 지내지 않아도 된다. 지아 역시 깨달았을 것이다. 가장 내가 보잘것없고 도움이 필요할 때 도움을 준 선이야말로 진짜 친구라는 걸. 고마움이라도 담았는지 두 손 모아 쭈뼛쭈뼛 서있는 지아와 전보단 당당해 보이는 선의 모습을 보면 앞으로의 일은 모른다. 둘이 이 지경까지 온 건 보라 때문이란 걸 깨닫고 보라에게 벗어나려고 할지는 확실하지 않다. 선이 지아를 위해 목소리를 냈을 때처럼 지아가 그렇게 해줄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선과 지아가 보라를 부러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 부러워할 필요가 없단 건 쉽게 알 수 있다. 근처에 있는 친구들은 언제든지 보라를 떠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필요해서 곁에 있는 거니까. 보라보다 더 공부를 잘하고 집안이 넉넉한 친구가 생기면 바로 갈아타고도 남을 것이다. 둘이 그렇다고 보라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보라가 했던 일을 증명하기는 어렵다. 가장 쉬운 방법은 가만히 지켜보는 것이다. 놀랍게도 그런 사이는 누가 알아서 망가뜨리지 않아도 스스로 끝난다. 세 사람 중 한 사람만 자리를 떠나도 그 사람을 욕을 맛깔나게 하다가 들킨다든지. 어떻게 아냐고? 직접 봤으니까. 그런 싸움은 팝콘이나 먹으면서 지켜보면 된다.
그러니 선이 아버지처럼 "애들이 고민이 뭐가 있어, 학교나 가고 공부나 하면 됐지"하시는 말씀은 참 속상한 이야기다. 공부할 땐 초등학교가 평생을 좌우한다고도 하는데 사회생활은 평생 좌우하지 못하리란 법도 없다. 어떤 학창 시절도 쉽지 않았다. 학교 가고, 공부하고, 친구와 교실에서 지내는 매일이 보이지 않는 힘 사이에서 우리가 비틀거리며 고민하던 시간이었다. 잔인하고도 한편으로는 즐거웠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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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시끄러운 폭탄은 러닝타임 안에서 터진 듯
단란한 한 때
잘 지내고 있었다. 강도영은 어느 곳에서 강연하고 있다. 왜 강연을 하고 있을까? 탁월한 리더십으로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부하 군인들을 살린 공이 있던 남자 강도영. 강도영은 전직 해군 부함장으로서 역할을 다했기에 높은 덕망을 쌓고 있었다. 어디론가 향하는 강도영. 강도영에겐 옛 전우들이 있다. 사실 전우들이 그렇게 잘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전우는 술로 일상을 보내고 있다. 또 다른 전우는 가족들이 있지만 옛 기억의 트라우마 속에서 살고 있다. 그렇게 속이 편하지는 않은 강도영.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한다. 남아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일상 속에서 갑자기 사건이 터졌다. 갑자기 떠들썩한 뉴스. 뉴스에서는 한 가정집이 폭탄 테러를 당했다고 전한다. 뭔 일이지? 갑자기 걸려오는 전화.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군지는 알 수 없었다. 전화를 건 사람은 차가운 목소리로 하고자 하는 말을 전한다. 저기 강도영 씨. 전우 중에 누구 알지? 그 사람 집에 폭탄 넣어놨어. 다음은 놀이터니까 그런 줄 알아. 뭔 소리야? '전화를 건 누군가'가 뉴스를 확인하라는 말을 했기 때문에 바로 찾아보기로 한다. 옛 전우가 있는 집 쪽에 폭탄테러가 터졌다는 말이 어렵지 않게 들린다. 금세 테러범은 뭔가 한이라도 맺힌 듯 다음 타깃을 지정한다. 그 타깃은 놀이터와 축구장이다. 두 장소에 폭탄이 설치됐다고 한다. 그리고 그 놀이터에 강도영의 부인인 장유정이 폭발물 제거 팀으로 참여하고, 축구장에는 그 어떤 지원도 없다. 선택의 딜레마에 놓인 상황. 강도영은 폭탄 테러 앞에서 사람들과 가족을 구할 수 있을까?
제목이 '데시벨'인 이유
일단 영화 제목은 '데시벨'이다. 이 제목을 설정한 이유는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왜? 당연히 소음의 정도에 따라서 폭탄이 발포되는 설정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건 신선했다. 보통 폭탄테러라는 설정이면 그냥 폭탄만 펑 터지는 것만 있지 여기에다가 부차적으로 뭔가를 붙인 경우는 거의 못 봤다. 그래서 이 소재가 영화에 가져다 줄 신선함은 분명한 이점이다. 아니 소리를 활용해서 폭탄이 터진다면 신선하잖아? 초반부는 이 설정에 힘을 얻고 질주한다. 아직 흑막이 왜 소리를 활용해서 폭발물을 설치할지 이유가 제시될 때도 아니다. 오케이. 강도영이 축구장이랑 놀이터 사이에서 고민하는 설정 자체도 좋았다. 이렇게 서사가 앞으로 전개될 일만 남았는데? 데시벨이라는 키워드 안에 숨어있는 인물들 간의 속사정을 알 수 있겠지?
이 궁금증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인물들 간의 속사정은 있다. 흑막이 왜 폭탄 테러를 벌였는지. 목표를 뒀던 대상들을 왜 그렇게 설정했는지. 강도영은 과거에 어떤 과오를 저질렀는지. 감독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딜레마는 무엇인지. 이 인물이 폭탄을 어떻게 만들 수 있었는지. 폭탄을 제거할 수 있나 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해 서스펜스 묘사까지 나름 잘 담았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게 없다. 왜 소음을 활용한 폭탄을 사용했는가? 에 대한 이야기다. 여기에 대한 설명이 아무것도 없다. 그냥 폭탄이 터지고 수습하고 이 내용의 반복이다. 그래서 이 '데시벨'과 관련한 소음 폭탄이라는 세팅이 사실 시한폭탄과 차이점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렇게 키워드로 작동하는 주요한 소재를 설명하는 것을 공란으로 쳤기 때문에 빈자리에 들어가는 것이 더 불필요하게 느껴진다. 적당히 불필요만 하면 좋았을 텐데 이것들이 어떤 것으로 구성됐는가?를 본다면 더 아쉽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불필요한 것들
일단 초반부다. 놀이터와 축구장 두 장소에 폭탄이 설치된다. 당황하는 강도영. 강도영은 축구장으로 향한다. 축구장에는 사람이 바글바글하다. 카메라는 축구장 안에 있는 다른 손님으로 향한다. 축구장 안에는 한 부자가 있다. 축구장 구경에 여념이 없는 부자. 아버지가 어떤 일인지 좌석 밖으로 나오려고 한다. 아버지는 전직 해군 부함장 강도영을 만난다. 어? 유명인이네? 아버지의 직업은 기자다. 대박! 기자라는 직업적인 특성이 영화 안에서 빛을 발할 것으로 보인다. 강도영은 아버지 오대오를 보자마자 말한다. '축구장에 폭탄이 있어요' 당황하는 오대오. 오대오는 갑자기 마음을 먹고 어떤 행동을 한다.
이 장면엔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생각해보면 뭔가 이상하다. 일단 첫 번째. 강도영과 오대오는 처음 보는 사이다. 처음 보는 사이에 '축구장에서 폭탄테러가 있으니 뭔가를 해보세요'라고 말한다라. 그리고 이 행동을 한다. 그런데 이 행동이 영화 서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나? 그것도 아니다. 흑막이 폭탄을 터트리는 것과 이 행동은 아무 관계가 없다. 또 이 상황 바로 직전에 흑막이 주인공에게 '남에게 알리면 폭탄이 터진다'라고 말한다. 그럼 이 상황이 굳이 필요가 있는 것일까? 싶다. 영화 초반부에 제시되는 어떤 상황이 정리되고 난 후, 대오와 도영은 같이 차를 탄다. 단순히 정상훈이라는 배우의 이미지를 활용한 코미디로 장면을 사용한 것이다. 이것은 사실 우리가 이 영화가 아니더라도 <SNL>를 위시로 한 여러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봐왔던 것이다. 그래서 코미디가 웃기지도 않거니와 식상하게까지 느껴진다. 아. 이 인물의 부부로 나오는 캐릭터도 왠지 익숙한 느낌이다. 부인이 맡은 캐릭터는 김슬기 배우가 맡았다. 김슬기 배우가 대중적으로 인지도를 알린 계기가 뭘까? 역시 <SNL>이다. 이 프로그램에서 봤던 김슬기 배우의 모습이 그대로 나온다. 이렇게 기존의 이미지와 중복되는 설정을 두 번이나 보기 때문에 이 두 인물에 관한 내용이 불필요하게 느껴진다.
이와 관련한 내용은 대오의 직업과도 관련이 있다. 대오는 기자다. 대오가 기자이니 만큼 이 이야기에 주요하게 작동할 수 있다. 이건 당연하다. 서울 한복판에서 테러가 벌어지는데. 그런데 사람이 직업적 특성을 발휘해야 할 때가 있고 아닐 때가 있다. 폭탄테러와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게 생긴 피해자한테 그 와중에도 녹음을 하려고 들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도 코미디를 위해 넣은 것 같았는데, 이 장면이 들어간 것이 이야기 전개에 있어 좀 걸리적거리는 느낌이 든다. 뿐만 아니라 기자로서의 직업적 특성이 이 외에 작동하는 부분이 있나? 없다. 딱 한 번 있다. 극후반부 이 모든 이야기가 정리되고 누군가와 질의를 한다. 이때 한 번 직업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이 장면은 영화의 주제적인 측면과도 연관이 있다. 메시지를 강조하기 위해서 인물을 기능적으로 사용한 것이다. 이와 관련한 것은 흑막과도 이어진다. 흑막이 어떤 것에 불만을 가지고 복수극을 계획한다. 그런데 영화를 보다 보면 굳이? 싶은 부분이 있다. 이는 흑막 캐릭터에 감정이입이 되지 않는다는 말도 되겠지만 결정적으로 대오라는 인물에 대한 성찰 부족이 아닌가 생각한다. 사실 극에 주어지는 몇몇 설정만 잘 활용해도 흑막의 복수극은 성공하고도 남았다.
무리수
그리고 흑막의 범죄 방식에 대해서도 의문이 있다. 첫 번째. 폭탄을 설치하는 위치다. 축구장부터 시작해서 후반부까지 폭탄을 설치하는 위치를 보면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높은가? 에 대해 의문이 든다. 뭐 모든 영화에 현실성을 따지는 일이 이상하게 드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화를 보다 보면 이 부분이 '어떻게 물리적으로 가능했나' 싶다. 장기간에 걸쳐 준비했다는 말이 나오지만 글쎄? 과연 시간을 오래 들인다고 해서 이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했을까? 아무도 없는 어떤 공간에 가서 천장에 쥐도 새도 모르게 카메라를 달고, 지하로 내려가 폭탄을 설치하는 일이 저렇게 쉬울 수 있을까?
또 흑막이 폭탄 테러를 벌일 때 인질로 삼는 대상에 대해 말할 수 있다. 흑막은 폭탄 테러를 다섯 번 정도 했다. 한 번은 영화의 어떤 사건을 겪고 거동이 힘들어진 약자다. 나머지 세 번은 아이들을 대상으로 했다. 아이들이 과연 무슨 잘못을 해서 테러의 희생자가 되는 걸까? 영화에서 지배계층의 아둔한 선택에 대해 비판하는 듯한 톤과 이 피해자 세팅은 뭔가 이질감이 느껴진다.
이 무리수인 설정은 영화의 쿠키 영상이라고 볼 수 있는 부분에도 통한다. 쿠키영상은 과거 시점이다. 영화의 가장 첫 번째 시퀀스에서 제시되는 한 에피소드의 끝마무리쯤으로 보이는 영화. 이 쿠키영상은 영화에서 제일 불필요한 사족같이 느껴진다. 사실 내용은 별거 없다. 이 영화의 주요 인물들끼리 '형이라고 불러!'라고 부르는 부분이다. 다만 문제는 영화의 흐름과 좀 안 맞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영화의 핵심 인물을 더 입체적으로 그렸다면 이에 이입이 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좀 피상적으로만 이야기를 보여준 감이 있어 이에 대한 내용이 그 전 장면에서 보여준 뭉클한 하이라이트와 안 맞는 것이다.
볼만할지도 몰라
뭐 그렇게 단점만 늘어놓은 영화지만 나쁘지 않은 부분도 있다. 일단 흑막 연기를 맡았던 이종석 배우의 연기가 좋았다. 뭔가 파리한데 그 안에 광기가 서려있는 내면 연기를 잘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이 인물의 광기로 설명하는 이야기가 굉장히 많다. 이를 위해서 액션부터 시작해 눈빛 하나하나까지 극의 분위기를 설정하는 좋은 연기였다. 또 이상희 배우의 연기도 굉장히 안정적이었다. 장유정이라는 캐릭터는 강도영보다 더 강단 있고 씩씩한 인물이다. 이를 위해 두려운 것도 없이 당당하게 맞서는 연기를 보여줬다. 후술 하겠지만 인물 간의 전체적인 대사 톤이 잘 안 들린다. 그래서 그런지 이상희 배우의 뚜렷한 발성이 들릴 때마다 기대가 되는 느낌이 있다. 또 차은우 배우도 연기를 잘했다. 솔직히 차은우 배우 캐스팅에 이름 뜰 때만 해도 별로 기대를 안 했다. 그런데 예상외로 주제적인 측면에서 효과적으로 본인을 활용하는 좋은 연기를 보여줬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세팅이 차은우, 이종석 두 배우가 맡은 캐릭터가 형제라는 것이었다는 왓챠피디아의 누군가가 생각난다.
또 폭탄을 활용한 사운드 연출도 좋았다. 쾅! 소리에 현실감도 있고 크기 조절도 잘했다. <늑대사냥>이 영화 내내 귀 따가운 사운드 연출을 들려준 것에 비하면 이 부분은 탁월했다고 생각한다. 극에서 사소한 서스펜스를 유지할 수 있던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영화에서 사운드가 단점으로 작용하는 부분도 있다. 바로 대사가 잘 안 들린다는 것이다. 이는 김래원, 이종석, 이상희 같은 베테랑이 아닌 배우들이 아니면 대사 전달이 떨어진다는 치명적인 단점과도 이어진다. 여러모로 아쉬운 퀄리티에 아주 큰 구멍이 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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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제간에 그려낸 서로의 초상화.
이 글은 영화 [승부]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때 그려진 초상화를 보면. 드라마 촬영 후 후보정까지 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보기에는 적나라하다는 표현 밖에는 붙여줄 수가 없는 작품이 많다. 하지만 초상화를 남기는 것은 어명의 영역이었기에 그 어떤 숨김도 거짓도 없어야만 한다는 설명을 듣고 나면. 당연하다는 생각에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한 폭의 그림에 담기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았을 땐. 마냥 어명이라 하더라도 신이 나지는 않았을 것만 같다. 애써 숨기고 싶었던 곰보 자국이 그림 안에서 살게 될 자신의 뺨 위에서도 지워지지 않을 것이고. 미처 발견하지 못했거나 알지 못했던 단점마저도 초상화에 들어있을 수도 있었을 테니까.
사진출처:다음 영화
제자인 창호(유아인)가 그린 자신의 초상화를 발견했을 때. 조훈현(이병헌)은 아마도 처음으로 자신의 곰보자국들을 들여다봤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도 알고 있었던 익숙한 흉터뿐만 아니라. 미처 알지 못했던 자신의 기풍에 있는 부스럼까지 발견했을 때의 그 무력감은. 아마도 바둑의 신(神)과 겨루어도 질 것 같지 않았던 그 당시 그의 자존감의 크기만큼이나 크고 깊었을 것이다.
처음엔 제자의 초상화를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들여다보니 보인 것일 뿐이라 믿고 싶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자신을 결승전에서 앞에 두고 스승의 초상화를 또 한 번 묵묵히 그려내는 제자의 모습을 보며. 훈현은 자신의 장점도 단점도. 승패를 가린다는 어길 수 없는 어명 같은 하나의 목적 앞에서는 그 어떤 것도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을 것이다.
창호가 그린 초상화가 자신과 똑 닮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는 몸을 일으켜 애써 그 초상화 앞에서. 그리고 그 초상화의 주인 앞에서 멀어져야만 했다. 더 들여다보았다가는 정말로 제자에게, 혹은 제자가 그린 자신의 초상화에 잡아먹힐 것만 같았으니까.
사진 출처:다음 영화
스승과 승부는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데 훈현은 꽤 오랜 세월을 바쳐야 했다. 그동안 결승마다 만난 자신의 제자 앞에서 수도 없이 패배와 친해져야 했다. 무관왕이라는 타이틀 아닌 타이틀도 어느새 그의 옆에서 입김이 느껴질 위치에서 머물곤 했다.
자신의 제자는 물과 같아서. 칼처럼 예리한 자신은 베어낼 수도. 손에 쥘 수도 없었다. 그는 속절없이 차디찬 물에 떠밀려 허우적거리기만 할 뿐. 아무리 자신을 휘둘러도 창호의 눈썹 하나조차 움직이게 할 수 없었다. 이대로 이 깊이를 알 수 없는 물에 빠져 죽는 것 외에 남은 선택지는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전신(戰神) 조훈현에게 후퇴한다는 말까지 수식어가 될 수는 없었다. 그는 분명 제자에게 스승과 승부는 다른 것이라 가르쳤으며. 자신이야 말로 이 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칼로 제자를 베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달궈진 자신을 식혀서 단단하게 연마해 주는 것이 제자의 존재라는 것을 인지하게 된 순간부터. 조훈현의 손에는 제자의 모습. 아니 자신의 라이벌의 모습을 담은 초상화가 완성되기 시작했다.
사진 출처:다음 영화
다시 만난 제자는 자신에겐 패배를 배우게 한 스승이 되어 있었고, 승리를 알려준 스승을 만난 제자는 훈현의 손에 들려 있는 자신의 초상화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이 기묘한 사제관계의 라이벌은, 다시 한번 치열하다 못해 피가 마르는 신선놀음을 시작해야만 했다.
그 신선놀음의 끝에는 분명히 승자와 패자가 존재하지만. 영화의 말미에 가서는 더 이상 그 결과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물론 제삼자의 입장이라 그랬을지도.)
자신의 스승과 대국을 할 수 있다는 자체가. 자신의 곰보자국을 인정하며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스승과 제자, 라이벌 사이를 오가는 이 대국은. 단순한 승부라는 말을 넘어서서 서로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과정이기도 했으니까.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더 높은 경지에 이르게 하는 바둑판 위에서 펼쳐진 그들의 대결은 승패를 가르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더 나은 자신을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그들이 남긴 서로의 초상화가 단순한 기보가 아닌. 인생의 기보로 남았기에 나 역시도 이런 영화를 보며 그들의 흉터에서 느껴지는 아픔마저도 느낄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마치면서;책임지지 못한 돌에 대하여
사진출처:다음 영화
영화 [시네마 천국]에서 토토는 할아버지에게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오지도 말고. 이곳을 잊어버리라는 말을 듣는다. 완벽하게 이해할 수야 없었겠지만. 그만큼 토토의 성공을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는 것쯤은 어린 토토라도 이해했을 것이다. 어린 창호의 왼손에 채워진 시계는 그런 걱정과 염려를 담뿍 담은 채 굳건히 채워졌다.
물론 영화에서도. 현실에서도(?) 이창호는 변하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할 것들을 묵묵히 해내며 앞으로 정진했다. 스승인 조 국수에게 배운 것처럼 바둑돌 하나하나에도 책임을 다 했고 그 결과 정상의 자리를 15년가량이나 지키며 남에게도. 스승과 라이벌에게도. 그리고 자신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이 역할을 연기한 배우 유아인의 경우는 그렇지 못했다. 분명 매우 좋은 영화이며 큰 만족감으로 마음을 가득 채우고 나올 수 있었던 영화였으나. 그는 초심을 잃은 토토가 되어 영화 속에서만 강렬한 연기를 보일 뿐이다.
조훈현의 시점만이 아닌 이창호의 시점으로도 영화를 해석하고 싶은 마음이 강했으나. 커버린 토토가 할 것은 참회밖에 없기에. 이 영화의 영광과 대단함이 한 풀 꺾이는 것만 같은 아쉬움을 지울 수는 없었다.
조훈현은 이창호에게 승리와 패배를 동시에 가르친 참된 스승이었다. 배우 유아인에게도 그런 스승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안타까움도 동시에 드는 영화였다.
[이 글의 TMI]
1. 영화관에서 팝콘 안 먹기 2회 성공
2. 오늘 점심 회식인데 도망가고 싶다.
3. 이 비를 통해서 불이 반드시 꺼졌으면 좋겠다.
#승부 #김형주 #이병헌 #고창석 #유아인 #한국영화 #실화바탕영화 #영화추천 #최신영화 #영화리뷰어 #영화해석 #결말해석 #영화감상평 #개봉영화 #영화보고글쓰기 #Munalogi #브런치작가 #네이버영화인플루언서 #내일은파란안경 #메가박스 #영화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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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먹을 쥐었다, 폈다
최근 <오징어 게임>까지 'K-콘텐츠'가 각광받고 있지만, 아직 도전하지 못한 장르가 있다면 "뮤지컬"이다.
물론, <삼거리 극장, 2006>이 존재하나 '상업 영화'와는 거리가 멀었으니 이번 <인생은 아름다워>가 상업적으로는 처음 시도하는 '뮤지컬 영화'이다. - 물론, 개봉을 기다리는 <영웅>도 있다!
혹자는 국내 뮤지컬 인기가 떨어지는 이유에 '가사가 한국어'라는 이유를 언급하나, <라라랜드, 2016>를 보는 "미국인"과 <레미제라블, 2012>을 듣는 "프랑스인"은 어떻게 설명할 건가?영화는 병원에서 시한부 판정을 받은 아내 '세연'이 남편 '진봉'에게 마지막 생일 선물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달라는 이야기이다.
1. 왜, 인기가 없을까?
앞서 말했듯이 유독, 국내에서의 뮤지컬 제작이 꺼려지는 이유에 '가사가 한국어'라는 말이 나온다.
물론, 외국 작품을 가져와 번역하는 과정에서 일부 가사와 음의 길이가 맞지 않아 어색할 수도 있지만 이를 핵심으로 볼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영화 <사랑은 비를 타고, 1952>는 일련의 과정으로 통해서 "뮤지컬"을 제대로, 설명한다.
영화는 "무성 영화"에서 "유성 영화"로의 시대로 접어드는 과정에서 "뮤지컬"을 소개하나 만만치 않는 그 과정을 소개한다.배우가 마이크에 대사를 하지 않아 녹음이 안되거나 몸에 부착하면, 심장 박동이 들리고 오디오 선에 넘어지는 등 많은 시행착오를 보여준다. - 극 중. 시사회에선 진주 목걸이 만지는 소리도 들린다!
이외에도 그동안 표정과 몸짓으로 관객들에게 이야기를 전달했던 배우들은 발음과 대사 암기 등 변화에 따른 발전이 동반된다. - 실례로 많은 무성 영화 스타들은 유성 영화에 적응하지 못해 사라지거나 새로운 얼굴들이 출연했다!
이렇게, "뮤지컬"은 문화의 발전으로 볼 수 있다면 동시간대의 국내 상황은 어땠을까?2. 많고 많은 시대 중에서...?
현재, 대한민국 최초의 영화로 정의되는 "나운규"의 <아리랑, 1926>는 일제강점기 시대에 개봉한 작품이다.
이후 "한국 전쟁"과 "냉전"을 맞이한 영화는 "반공"을 앞세운 선전물이 되었으니 문화의 발전을 떠나 감히, 낭만을 논할 수나 있었을까?
그렇다면,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는 왜, 1990년으로 설정했을까? - 극 중. 서울 극장에 <사랑과 영혼, 1990>이 걸려있다.
이런 이유에는 90년대만큼이나 문화의 다양성을 논하기에 좋은 시기가 없기 때문이다.대통령 직선제(6월 민주항쟁)를 가져왔으나 "군부"가 유지되며, 지속되는 데모로 사회는 불안정했지만 "X세대"가 등장하는 등 문화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음악만 살펴보면, "김수희"의 "애모(트로트)"를 비롯해 "서태지와 아이들(힙합)", "신승훈(발라드)", "김건모(레게)", 그리고 "HOT(아이돌)"까지 한 번의 성공으로 우르르 뒤따라가는 펭귄들이 아니라 무모한 콜럼버스들이 판치던 시대이다.
여기, <쉬리, 1999>를 시작으로 "블록버스터"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탄생하는 등. 변화가 시작되고 있었다!3. 옛 방식이 무식하지만...
이렇게, 모든 환경이 갖춰진 <인생은 아름다워>이나 보여주는 결과물은 아쉬움이 생긴다.
물론, '오리지널 넘버'를 대신해 '이문세'의 <조조할인>을 비롯해 '이적'의 <다행이다>와 '토이'의 <뜨거운 안녕> 등 익숙한 대중가요를 뮤지컬스럽게 편곡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갖춰진 세트에서 보여주는 군무들을 하나의 테이크가 아니라 '편집'해서 보여준다는 것이다.앞서 말했듯이 "뮤지컬"은 "무성 영화"에서 "유성 영화"로의 시대로 접어드는 과정에서 탄생한 장르로 고집스럽게 긴 테이크를 가져간다.
이런 이유에는 당시. "편집"이라는 기술이 어려운 점도 있겠지만, 얼굴의 표정과 행동만으로 이야기의 현실성을 지켜냐야하는 '고육책'으로 예상된다.
그런 점에서 본 작품에서 보여주는 "뮤지컬"은 90년대~00년대 이야기가 있는 뮤직비디오 "드라마 타이즈"에 더 가깝다.4. 첫 술에 배부를 쏘냐!
물론, 영화가 선정한 선곡 리스트와 편곡은 마음에 들지만 힘을 받는 데에 시간이 걸리고 뮤지컬 장면에 들어가는 순간이 어렵다!
이런 이유는 이야기의 톤과 음향이 갑자기 튀기 때문인데, 완력기가 있었으면 할 정도로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할 정도로 힘들었다.
극 중. 마지막에 "세연"과 아이들의 통화에서 눈물이 날 뻔하면서도, 비염(훌쩍훌쩍)에 그친 점도 이러하다!무엇보다 이야기에도 아쉬움이 생긴다.
극 중. 아내 '세연'의 모습은 희생만을 강요하는 윗세대 어머님들의 모습이 겹치며, 무심한 남편 '진봉'과 그들의 아이들까지 지나치게 "스테레오"이다.
결국, 이 모든 갈등이 봉합되는 전개와 개연성도 어설픈 노랫소리에 잠식되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물론, 마지막 장면에서 눈물이 찔끔날 뻔한 건 어디까지나 배우들의 연기력 때문이니 오해하지는 말자!그래도,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는 끝나고 나서 플레이 리스트로 또 한 번 즐기는 미덕을 제공하니 좋게 봐주시길... :)
· tmi. 1 - 결혼식 장면에서 부르는 "이적"의 <다행이다>는 공교롭게도, 실제 아내분과의 결혼식 축가로 만들어진 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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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디그/The Dig, 2021>
외국을 배경으로 한 역사 영화는 우리가 몰랐던 사실들을 알게 해주는 매력이 있다. 거기에 고고학이라는 새로운 소재도 더해진다면, 처음 보는 형식의 영화를 만나는 재미가 있을 것이다. 넷플릭스에 새로 공개된 <더 디그>가 바로 그런 영화다. 흥미로운 소재와 탄탄한 출연진으로 바탕으로 나름의 매력을 보여주는 영화, <더 디그> 리뷰다.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드리운 시절, 어느 한 부유한 미망인이 아마추어 고고학자를 고용해 자신의 땅의 있는 무덤들을 발굴하기 시작하고, 그 무덤 속에서 역사를 뒤바꿀 부장품들이 발견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영화는 역사와 고고학이라는 나름 신선한 주제를 이용해 우리의 삶과 죽음, 그리고 인류의 미래 등을 바라보고 있다. 우리의 삶과 죽음도 역사의 일부분이고 후대에게 물려줄 전유물이 될 테니까. 조금 부족한 연출력이 거슬리기도 하지만 나름 생각할만한 문제를 던져준다. 고고학이라는 주제 자체의 색다름은 물론, 발굴 현장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점점 진행되는 발굴 과정과 방해와 협력 등으로 이루어진 인간관계에서 오는 재미도 충분히 있는 편이다. 정적인 분위기로 끌고 가 굉장히 건조하고 고전적인 이미지가 연상되는 점은 나름 인상적이고, 광활한 무덤의 풍경을 보여주는 촬영이 참으로 환상적이다. 2차 세계대전을 앞둔 20세기 영국의 환경을 생생하게 살려낸 미장센들도 영화의 장점이다.
다만 영화 자체는 조금 아쉽게 다가온다. 영화는 시작부터 굉장히 빠른 전개와 생략을 통해 극을 풀어나가고, 세세한 설명도 없어서 약간 불친절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런 요소 때문에 영화가 불친절하게 느껴지는 순간, 앞서 말한 건조하고 고전적인 이미지의 영향으로 굉장히 재미없게 느껴질 수 있다는 점은 단점이다. 거기에 왜 존재하는지 의문이 드는 장면들도 종종 보이며, 인물의 심리묘사도 약간은 아쉽게 되는듯한 감이 있다. 거기에 러브라인까지 등장하는데, 사족 처럼 느껴진다. 이 러브라인은 따지고 보면 불륜인데, 이 관계의 주인공이 릴리 제임스 인건 참 아이러니하다. 극의 마무리도 급하게 얼버무리는 듯한 느낌이 든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많은 것을 담고 싶은 욕심으로 인해 흘러넘치거나, 혹은 폭발적인 감정을 드러낼 때 지나치게 절제한다. 완급조절이 상당히 아쉽다.
이런 극 속에서 배우들은 여전히 분한다. 캐리 멀리건은 참 매력적인 배우라는 생각이 든다. <인사이드 르윈>에서 처음 만난 배운데,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배우다. 그녀가 맡은 캐릭터인 이디스 프리티 자체가 참 애매하게 그려져있는데, 캐리 멀리건은 프리티 부인이 겪고 있는 고민, 고통, 걱정을 잘 표출해낸다. 레이프 파인즈도 참 잘 어울리는 캐릭터를 연기한 듯싶다. 빌런이 잘 어울리는 레이프 파인즈가 이런 고고학자 연기가 어울릴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나 름 중요한 위치에 있는 릴리 제임스는 참 아쉬운 배우다. <베이비 드라이버>에서 보고 빠져버린 배운데, 논란이 생겼으니 참. 어쨌든 그녀의 연기는 나쁘지 않은 편이다. <엠마>에서 안야 테일러 조이의 상대역으로 눈도장을 찍은 자니 플린도 열연하며, 굉장히 익숙한 배우인 켄 스콧도 얼굴을 비춘다. 넷플릭스의 화려한 출연진을 볼 때마다 새삼 넷플릭스의 영향력에 놀란다.
분위기나 촬영이나 나름의 재미나, 여러모로 재밌는 요소는 갖췄지만 부족한 연출력이 아쉽게 다가온 영화다. 역사 영화나, 혹은 20세기 영국의 분위기를 좋아한다면 추천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조금 아쉽게 본 영화, <더 디그>다.
* 본 콘텐츠는 네이버 블로거 팬서 작가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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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다 다르다.
성격, 제각각이다.
외국인 학생들이 모인 한국의 한 대학 국제 기숙사.
이곳에서 그들은 우정을 쌓고, 사랑에 들뜨고, 세상을 배운다.
대부분 엉망진창 뒤죽박죽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