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남규2024-05-05 11:01:42
[JIFF 데일리] "사랑이 머무는 순간, 도르래가 움직인다" 영화 <곤돌라> 관람 후기
<곤돌라>
[JIFF 데일리] '사랑이 머무는 순간, 도르래가 움직인다'
영화 <곤돌라> 관람 후기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 <곤돌라>
제목 : 곤돌라(Gondola)
감독 : 바이트 헬머
러닝타임 : 85분
관람 등급 : 전체 관람가
시놉시스 : 케이블카는 산골과 계곡의 마을을 연결한다. 케이블카 승무원으로 일하기 시작한 이바. 두 개의 케이블카 중 하나가 올라가면 다른 한 대가 내려가고... 케이블카는 중간에서 만나기 마련이다. 다른 케이블카에 타고 있는 승무원의 이름은 니노. 이바와 니노는 30분마다 지나가면서 서로를 만나고 어느날, 그들은 합심하여 상사에게 맞서기로 한다.
곤돌라(Gondola). 케이블카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는데, 이번 영화를 기점으로 정확한 의미를 확인했습니다. 단어는 총 세 가지 의미를 지칭하고 있었습니다. 1.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작은 보트 2. 비행선이나 기구 따위에 달린 바퀴 3. 고층 건물의 옥상에 설치하여 짐을 올리는 시설. 영화는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깊은 산 속과 계곡 주변의 마을 사람들을 이어주는 2, 3번의 뜻을 가진 곤돌라를 보여줍니다. 두 주인공과 동내 꼬마 아이들의 순수한 사랑 이야기를 담으며 마지막으로 4번째 ‘사랑을 실어 나르는 관계’라는 의미까지 추가합니다.
영화의 시작은 누군가의 죽음과 주인공의 등장으로 시작합니다. 케이블카로 관을 옮긴다는 점과 관 위에 직원 옷을 올려두었다는 점 등 정황상 곤돌라 직원의 죽음을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케이블카와 관이 함께 지나가며 마을 주민들이 애도하는 장면이 영화 가장 초반에 만난다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곤돌라에 관을 실어 나르는 장면마저 기예르모 델 토르 감독님의 서늘한 동화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장례식을 영화 초반부에 배치한 점과 케이블카의 흐름에 따라 이어지는 시선은 블랙 코미디와
비유로 가득한 영화가 나아갈 방향을 보여준다고 생각했죠. 결과적으로 곤돌라의 공석은 새로운 주인공이
‘직원복이 맞아서’ 차지하게 됩니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가벼운 이유로 시작한 것이죠.
상영이 시작하고 가장 먼저 놀란 점은 ‘무성 영화’라는 점입니다. 오래전
고딕한 영화가 기술적인 한계로 인해 인간의 목소리를 담을 수 없었던 것과 달랐습니다. 다분히 의도적으로
대사가 없었고, 문장으로 이루어진 설명이 없다 보니 처음부터 관객은 화면에서 얻을 수 있는 시각 정보를
얻기 위해 빠르게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구어체가 사라진 세상에서는 배우의 눈짓, 미세한 표정 변화 하나하나에 집중해야 했습니다. 여기에 마찬가지로
창작자의 감성이 묻은 강렬한 효과음과 감미로운 음악이 찾아옵니다. ‘무성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웨스 앤더슨 감독의 아름다운 색감과 황금비를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팀 버튼 감독의 빅피쉬 같은 독창적인 상상력을 사랑하시는 분이라면 관람을 추천합니다.
이후 두 세가지 시퀀스가 이어집니다. 대부분 곤돌라 직원인 두 여인의 타오르기 시작하는 사랑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특히 상차행, 하차행 케이블카가 마주치는 순간을 재밌게 묘사하는
점은 미셸 공드리 감독의 ‘무드 인디고’가 생각났습니다. 언젠가 비행기에 올라탄 승무원이 되고 싶은 주인공은 케이블카를 비행기, 버스, 증기선 모양으로 꾸미죠. 일련의 사건으로 주인공들이 서로에게 증오가
쌓인 상태에서는 케이블카는 곧 전차로 변신해 혈투의 현장이 되기도 합니다. 반대로 서로에게 사랑의 감정이
깊어지면 곤돌라는 신혼행 웨딩카로 변하죠. 곤돌라는 두 주인공과 마을 사람들의 감정을 빗대는 장치이자
소통을 이어주는 연결점으로 묘사됩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곤돌라를 통해 보여줄 수 있는 상상력을 극한까지
긁어 모았고, 그것을 아날로그 감성이 듬뿍 담긴 시선으로 제작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영화를 감독하신 ‘바이트 헬머’ 감독님은 1999년 영화 ‘투발루’로 데뷔해 ‘브라이 이야기’, ‘우리친구 피들스틱스’ 등 전체적으로 동화적인 포근한 감성이 담긴 영화에 집중하고 계십니다. 시네퀘스트 영화제 코미디부문 최우수 장편영화상, 스웨덴 판타스틱영화제 관객상을, 바에른 영화제 최우수 감독상을 수상한 이력을 가진 분이죠.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영화는 어른 동화처럼 따뜻하지만 아찔한 시선을 갖고 있습니다. 영화가 동화 같은 이유는 총 세가지입니다. 첫번째는 ‘필름 카메라 감성 같은 색감 선정’입니다. 푸르름이 사방에 깔린 산골 마을에서 원색 계열의 옷들은 초록색과 극명하게 대비하며 시각적으로 만족감을 주었습니다. 유럽 분위기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오스트리아와 스위스 지역의 고산 지역에서 추억을 갖고 계신 분들이라면 분명 관람을 추천합니다.
두번째는 ‘사랑은 곤돌라를 타고’라는 점입니다. 영화는 내내 사랑하는 서로가 보내고 받고, 당기고 밀어주는 요소로 가득했습니다. 특히 곤돌라 직원으로서 상대와 많이 만날 수 없는 상황에서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보여줍니다. 일정 간격으로 서로 번갈아 체스를 두며 상대를 약 올리기도, 승차장에 선물을 올려두고 반응을 살피기도 합니다. 간질거리는 애정 표현은 악의 없는 순수함으로 느껴졌습니다.
마지막으로 ‘인위적이지 않은 간접적인 소리’입니다. 대사가 없는 영화기에 시각적인 부분과 효과음이 매우 크게
작동합니다. 발걸음 소리, 곤돌라가 움직이는 기계음 소리
등 일상보다 몇 배는 확대한 효과음처럼 들렸습니다. 특히 유리잔 위를 물 묻은 손가락으로 문지르면 피어나는
우주를 담은 것 같은 소리 등 구어체가 전할 수 없는 부분을 영화는 청각적인 대체재로 가득하게 만들었죠. 다회차
상영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눈을 감고 영화를 관람해 보시길 추천합니다.
개인적으로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만난 작품 중 손에 꼽고 싶은 아름다운 영화였습니다. 두 여성의 사랑을 거칠지 않고
부드러운 초여름 날씨처럼 표현했다는 점, 중력을 거스르고 마찰을 줄이는 도르래를 사랑과 관계로 표현했다는
점이 좋았습니다. 무주산골영화제에서 또 만나길 희망할 정도였습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극한으로 달려가는 두 여인의 감정선에 집중했다면,
이번 <곤돌라>는 동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본 사랑이 어떻게 곤돌라로 이어지는지를 중점으로 두었다고 생각합니다. 필름, LP, 투박한 아날로그 감성을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꼭 관람하시길 추천합니다.
2024.05.03 CGV전주고사 2관(202)
2024.05.05 메가박스 전주객사 2관(410)
2024.05.10 메가박스 전주객사 6관(914)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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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 나는 누가 책임져?
김태용 감독이 연출한 최우식 주연 영화 거인입니다.
너무 좋은 영화라 더 많은 분들이 보셨으면 좋겠어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Music
Levity – Johny Grimes#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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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태양은 움직이지 않는다> 30초 예고편
하루 동안 정기적인 보고를 하지 않으면 터지게 되는
폭탄을 가슴속에 지닌 채 기밀 정보를 알아내는 AN통신.
요원 ‘타카노(후지와라 타츠야)’와 ‘타오카(타케우치 료마)’는
대기업 CNOX와 태양광 에너지가 관련된 엄청난 비밀을 알게 된다.
여기에 정체불명의 여인 ‘아야코(한효주)’와
일급 스파이인 ‘데이비드 킴(변요한)’까지 관련 정보를 노리면서
상황은 걷잡을 수 없게 되는데…
차세대 에너지를 둘러싼 보이지 않는 전쟁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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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고요의 바다> 공식 예고편
대원들이 살해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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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한 삶을 산다는 건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을 영화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의 주인공의 삶과 적용시켜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먼저 주인공 론 우드로프(매튜 매커너히)는 텍사스에 사는 로데오에 열광하고 여자, 술, 마약에 환장하는 블루 컬러 노동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삶을 사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는 쾌락에 지배당하는 욕망의 노예라고 말한다.
그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일터에서 일하던 중 전기에 감전되는 사고를 당한다. 그는 실려 간 병원에서 혈액 검사 를 통해 자신이 에이즈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현실을 부정하려 했지만 몸의 이상 현상을 느끼면서 에이즈가 무엇인지 공부하기 시작한다.
공부하면서 알게 된 사실은 제약 회사와 FDA 사이에는 놓여진 수많은 이권의 충돌이었다. 바이러스 뿐 아니라 백혈구마저 마구 공격하는 AZT는 장기적으로 에이즈 환자들의 면역 시스템을 완전히 파괴하는데 제약 회사와 연계된 FDA와 병원들은 다른 약에 대해 눈을 감고 AZT에 대한 실험을 한다.
그 결과 환자들은 아무런 방도없이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우드로프는 처음에는 AZT 처방을 위해 멕시코로 가지만 거기서 다른 약들의 존재에 대해 알고 이를 돈벌이에 이용하기 시작한다. 그런 그의 행동은 부를 자신의 최고의 행복이라고 착각한 경우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부는 아무리 해도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우드로프의 삶은 불행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점차 최고의 선을 알게 된다. FDA로 인해 다른 약을 처방받지 못하는 수많은 에이즈 환자들은 론으로 인해 오히려 병원보다 더 나은 처방을 내려주고, 우드로프가 병원에서 만났던 게이인 레이온(자레드 레토) 덕분에 게이 커뮤니티의 많은 환자들이 론이 개설한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에 가입을 도와준다.
FDA로서는 론이 눈의 가시 같은 존재가 된다. FDA는 법을 개정하면서까지 론의 사업을 방해한다. 론의 입장에서는 30일밖에 못산다고 단언했던 병원의 처방보다 자신의 처방이 훨씬 더 효과가 있다고 온 몸으로 증명했고 자신의 클럽 가입자들이 병원보다 사망률이 1/10에 불과하다고 강변했지만 사업은 점점 힘들어져 간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약 구매가 어려워진 상황에서 가장 친했던 레이온이 병원에서 사망하자 그는 법과 대결하기로 결심한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원래의 론 우드로프의 모습과 천차만별이다.
처음의 그는 쾌락과 부만 탐하는 사람이었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는 목적이 없는 삶을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에이즈에 대해서 공부하고, 호모포비아었던 그가 게이친구인 레이온과 친해지면서 그들의 삶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른 게이들의 병을 호전시키기 위해 그는 갖은 노력을 다한다. 그의 목적이 변화된 것이다.
하지만 법은 론의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 그러나 법원에서 패배한 그였지만 클럽 가입자들은 론에게 박수를 보내고 우드로프는 남은 여생을 살아가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행복해지기 위해선
그의 모습을 살펴보면 도덕적 탁월성을 가꾸어 나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도덕적 탁월성은 실천으로 얻어진다. 그는 몸소 에이즈를 호전하는 약을 얻기 위해 직접 일본으로 가서 약을 얻는다. 이는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계속 반복되는데 이것은 습관의 결과로 생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그는 점점 행복에 도달하고 있다. 그리고 가치는 가치와 그것이 아닌 가치가 더해 질 때, 그 가치의 좋음은 커진다. 이는 우드로프가 처음에는 게이를 혐오했다. 그러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몸소 움직이며, 게이들의 삶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그러면서 그는 게이들을 이해하고 그들과 친구가 된다. 이는 편견이 사라지고 우정이 더해져 그를 더욱 행복한 사람으로 만든다. 우드로프의 개인적인 병도 점차 호전해 나가고 그와 더불어 사회적인 그의 위치도 달라졌다. 사람들은 그를 용감하게 FDA와 대적하는 인물로 보게 된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사회적인 지위도 중요하다. 우드로프는 처음에는 문란하고 답이 없는 사람이었다면, 지금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역랑 안에서 비겁하게 도망치지 않고 맞설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우드로프는 병원에서 예견한 수명과는 달리 더 오래 살았다. 그건 병을 호전시킬 약품을 찾은 것도 하나의 이유이지만 그가 점점 행복한 삶을 사는 인간이 되었기 때문에 그는 더 오래 살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지적인 관조를 통한 삶을 깨우쳤기 때문이다.
그는 남은 삶을 헛되이 살지않고 법적으로는 졌지만 그의 투쟁은 멈추지 않았다. 자신만의 철학을 찾아낸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찾은 철학을 실현하며 살았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의 관점에서 봤을 때 행복한 사람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과 행위들은 결국에는 행복으로 가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 행복은 다른 가치들과는 다른 완전하고 자족적인 성격을 가졌다. 즉 행복이란 최고의 좋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지적인 삶의 관조를 통해 찾을 수 있는 행복한 삶을 산다는 것은 매우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을 실천한다면 행복이 그렇게 먼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의 론 우드로프처럼 자신의 역량 안에서 행복을 찾아간다면 그처럼 자신의 삶이 영화로 만들어져서 사람들에게 많은 귀감이 될 기회가 생길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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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을 뛰어넘어 너에게 갈게
시간을 뛰어넘어 너에게 갈게
넷플릭스 <상견니>, <다크>
더 이상 SF는 그 이름과 달리 공고한 과학적 상상(이라 쓰고 현실에서 증명된 과학 이론에 기반한 여러 가지 변형물들)이 중요하지 않다. 고도로 발달한 미래의 기계 문명이든 우주 어딘가에 있는 가상 행성의 왕족이든 그냥 현실에 없는 것을 아무거나 상상해도 SF다. 실제로 2019년 휴고상(Hugo Award)은 2019년 팬픽션 플랫폼인 AO3을 '변형적 작품 단체'로 정의하며 최고 참고문헌 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그래서 <다크>나 <상견니> 같은 타임슬립 물들을 볼 때에도 세계관의 촘촘함이나 과학적 설정의 논리성 같은 것에는 크게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게다가 <상견니>는 시간대의 이동보다는 영혼이 빙의한다고 해야 맞을 것 같은 설정이다. 그래도 어쨌거나 두 작품 모두 리니어 시간대의 일정 지점들로 이동하니까 타임슬립 물이라 치고 공통된 부분을 살펴보면, 두 시리즈의 주인공들 모두 크게 두 가지 목적을 띄고 타입 슬립을 하며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간다. 하나는 자신이 사랑하는 상대를 만나기 위해서, 다른 하나는 동시에 어떤 멸망(세계나 어떤 사람의)을 막기 위해서다. 처음에는 명료한 목적을 가지고 시작한 타임슬립이지만 주인공들이 놓쳤던 세부 사항이나 다른 인물들의 행동으로 인해 시간의 흐름 속 인과 관계의 흐트러지며 상황은 주인공들이 생각한 대로 흘러가지 않게 되고 이런 형식의 갈등 양상을 주제로 회차가 전개된다.
'어느 시점으로 돌아가 어떤 요소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가 주요 얼개인 이런 장르 물든 '타임 라인 정리'나 '해석' 같은 이름으로 블로그 포스팅 혹은 트위터 타래를 만들기 좋아하는 덕후들에겐 최적의 장르다. 두 드라마의 이름으로 검색을 해 보면 내용을 순차적으로 정리해 놓은 게시물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나는 장르물에 대해 크게 조예가 깊지는 않아서 내용을 따라잡는 데에 크게 중요한 부분이 아니면 굳이 분석하며 세계관의 순차성이나 인과관계에 대해 깊이 생각하며 보지는 않았기에 그에 대해 자세하게 이야기는 못 하겠다.
전체적인 내러티브를 보자면 <다크>는 비교적 초반에 인물과 사건들이 서로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밝히고 그에 따라 인물들 각각의 서사가 전개되는 방식이다. '이 관계들이 어떻게 정리되는 걸까?'란 시즌1에서 의문을 시작하고 시즌2에서는 누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풀어 나간다. 두 주인공의 액션 아이템이 정리된 시즌3에 접어들면서, 점점 타입슬립-미션 수행-실패 이 일련의 과정이 동어 반복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상견니>는 초반에 플롯을 밝히지 않고 미스터리를 풀어 나가며 중반부부터 인물들의 배경과 서사가 서서히 밝혀지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중반부에는 불필요한 설정, 특히 남자 빌런의 출연에 할애된 시간이 지나치게 많다 느껴지는데 한국이나 중국 드라마는 편성된 에피소드 수가 많다 보니 종종 이렇게 필요 이상의 과한 설정이 많고 쓸데없는 배경 설명에 오랜 시간을 할애하는 하는 단점이 있다. 그렇지만 장편 드라마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부분들을 배제하고 본다면 두 주인공의 관계의 애절함을 보여주는 데에는 두 드라마 모두 무리가 없다.
사랑에는 장애물이 필요하다. 얄궂지만 순조롭기만 한 관계는 지루함이나 의심을 사게 된다.
요즘 들어 드라마들을 보며 느끼는 것인데, 생각해 보면 옛날에는(옛날이라 봤자 한 10년 정도 전이지만) 비현실적 세계관 설정이 없이 등장인물들의 관계성이 그 자체로 엄청나게 자극적이었다. <파리의 연인>이나 <내 이름은 김삼순> 드라마들을 되돌아보면 여자 주인공의 신데렐라 서사를 포함해 지금 다시 나온다면 사람들에게 절대 군말 없이 받아들여질 수 없는 설정이 많다. 2020년에는 아무리 잘생긴 남자라 하더라도 무례하고 돈밖에 모르는 남자에게 따뜻한 마음을 일깨워 주는 가난하지만 밝은 여자 주인공에게 몰입하고 싶은 여성은 별로 없을 것이다.
계급을 제외하고 사랑에 눈이 먼 두 젊은이를 떼놓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장벽은 '죽음'이다. 사실 이것도 옛날 드라마에서는 많이 쓰인 소재긴 하다. 남자 주인공이나 여자 주인공이 백혈병이나 희귀 암 같은 불치병에 걸려 죽게 된 내용의 드라마와 영화를, 95년 이후로만 나열해도 아마 몇십 개가 나올 것이다. 당대의 센세이셔널한 인기 가수였던 조성모를 필두로 한 발라드 가수들의 뮤직 비디오에는 꼭 누군가가 총에 맞거나 차에 치이거나 하는 이유로 죽고 슬퍼하는 연인의 눈물이 클로즈업되곤 하는 레퍼토리도 있었고 말이다.
<다크>와 <상견니>에서도 결국 죽음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타임슬립을 하는 것도 있는데, 연인의 상실에 대처하는 전제 자체가 이런 과거의 신파극들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리움에 못 이겨 연인을 찾아간다는 식의 신파가 아니라, 알고 보니 연인이 서로 이어질 수 없었던 이유가 어떤 타임라인 혹은 인과관계의 균열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그 균열을 바로 잡으면 연인을 되찾을 수 있다는 식의 문제 해결적 플롯이다.
하지만 갈등이 고조되고 관계의 애절함이 극대화되려면 시공간을 넘나드는 두 사람이 쉽게 만나선 안 된다. 엄청나게 많은 엇갈림과 자신들이 초래한 서사의 균열을 겪어내야만 한다. 앞서 말한 분량을 채워내야 하는 장편 시리즈들의 고충을 현실적으로 이해하고 넘어간다면, 시청자들도 과연 두 남녀 주인공이 언제쯤 이어지는지, 이어지기는 이어지는 것인지 애가 타는 마음으로 지켜보게 된다. 특히 상견니는 남국의 정취가 있는 타이난을 배경으로 교복을 입은 등장인물들이 울고 웃는 모습을 보여주며 동아시아 시청자들의 '학교에서 보낸 여름'에 대한 향수를 자극한다.
이제는 관계 자체가 주는 자극보다는 어떤 설정이나 세계관에서 오는 물리적 장벽들이 관계를 어렵게 만드는 플롯이 더 쉽게 시청자들의 흥미를 끌게 됐다. 한 마디로 '너의 환경에도 불구하고 너를 사랑해'보다 '네가 다른 세계에 존재해도 너를 사랑해'가 훨씬 더 로맨틱하게 느껴지는 시대가 된 것이다. 예전에는 상상력을 전시하기 위해 쓰이던 SF 세계관들이 이제는 현실의 관념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들이 됐다. 무엇이 됐든 뛰어넘기 어려운 장벽만이 로맨스의 농도를 짙게 하는 법이다.
* 본 콘텐츠는 브런치 Good night and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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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담컨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장르
감독, 제작진, 배우, 장르, 줄거리 그 무엇도 알지 못한 채로 보기를 추천하기에 아무 정보도 기입하지 않겠다.
아, 러닝타임 정돈 괜찮겠다. 139분.
대체 뭐라고 표현할까.
마땅한 단어를 떠올리던 무렵, 박찬욱 감독의 한 줄 평을 발견했다.
야단법석 왁자지껄 아수라장 대환장파티에서 막 빠져나왔는데 거울로 보니 내 눈에 눈물이.
그래, 이거다. 영화의 첫인상은 '정신없다'였고, 언젠가부터 '감독의 정체가 뭘까' 싶었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땐 눈물 콧물 범벅된 마스크에 불쾌감을 느끼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난생처음 보는 종류의 영화였으니까.
컷 전환이 쉼 없이 빠른데도 러닝 타임은 2시간을 훌쩍 넘으니 실제보다 더 길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니 기깔나는 상영관에서 보는 걸 추천한다. 또렷한 색상 구현과 입체적인 사운드를 선보이는 돌비 시네마라던가.
메가박스 코엑스. 영화 시간보다 일찍 도착해서 아래로 늘어진 계단 한쪽에 털썩 앉았다. 전광판은 때마침 <에에원>의 짤막한 예고편을 무한 반복 중이었다. 사전 정보 없이 보고 싶어서 일부러 시선을 두지 않았는데, 소리는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I'll save you"였나. 뭘 구하겠다는 말이 반복해서 들렸다.
뭐지. 세상을 구하는 전사 이야기인가. 히어로 영화인가. 저 사람이 주인공인가 보다. 대충 예감하며, 오래 앉아야 하는 걸 대비해 화장실에 들렸다. 그리고 아쿠아리움 같은 돌비 시네마 입구에 들어서서 공연장 같은 좌석에 앉았고. 돌비 시네마는 이 시스템이 얼마나 대단한지 온몸으로 체감하게 한다. 애피타이저로 입맛을 돋우듯 영화를 보기 전 오감을 일깨운다. 두근두근. 괜한 기대감에 사로잡히던 찰나, 영화가 시작되었다.
그땐 몰랐다. 화장실에서 휴지를 뜯어왔어야 했단 걸.
*아래로는 스포가 이어집니다.
거울.
그게 영화의 시작이었다. 컷 하나인데 길이가 꽤 길었다. 거울 속에 비친 얼굴들은 웃고 있었던가. 무언가 말하는 것도 같았다. 천천히 거울 속으로 들어가듯 카메라가 가까워지고, 거울 안 세계로 화면 가득 들어찼다. 거울을 마주한 나와 거울 속 나. 하나이지만 둘이고, 둘이지만 하나다. 지금 생각하면 '우린 멀티버스 세계관입니다'를 대놓고 보여준 셈이다.
그러나 관람 중에 멀티버스를 생각하지 못했던 건 이어지는 장면이 워낙 정신없어서다. 책상 위를 한가득 메운 하얀 영수증들. 다소 꾸깃꾸깃한 영수증들은 시끄러운 소리를 냈고, 그걸 정리하는 건지 신경질을 내는 건지 모를 동작으로 주인공 '에블린'이 자신의 남편과 뭐라 뭐라 대화를 이어갔다. 국수 좀 봐달라, 아버지 생신인데, 세금 내야 하고, 조이가 여자 친구를, 영수증은 다, 세탁소가, 종잡을 수 없는 말들이 영어와 중국어를 마구 오가며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보는 이도 정신없는데 당사자들은 얼마나 더 정신이 없겠는가. 에블린은 남편 '웨이먼드'에게 이거 해라, 저거 해라 말하지만, 정작 웨이먼드는 어느 하나도 제대로 못한다. 밝고 쾌활한 목소리로 날카롭고 까칠한 에블린의 비위를 맞추는 듯했다. 여기에 그들의 딸, '조이'가 여자 친구 '베키'를 데려온다. 조이도, 베키도 환영받지 못한다. 특히 에블린에게서.
정신없이 얽히던 흐름이 뚝, 끊기던 때가 있었으니. 에블린의 아버지가 집에서 세탁소로 내려온 걸 발견하고서였다. 중국어에 서툰 조이가 할아버지에게 베키를 설명한 단어를 찾고 있을 때, 에블린이 말을 빼앗는다. 조이의 친한 친구라고. 그런 식이었다. 에블린은 조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먹고사는 데 급급해서라지만, 명백한 거부 의사였다.
에블린, 조이, 웨이먼드, 이들 가족은 아무도 행복하지 않은 상태에 놓였다. 웨이먼드는 이혼 서류를 내밀려고 했으나 이마저도 바쁜 상황에 내쳐졌고, 막상 목숨이 오가는 급급한 상황에 치닫고서야 에블린이 그 서류를 펼쳤다. 혼돈에 또 다른 혼돈인 거다.
세무사에게 세탁소 회계감사를 받는 게 무슨 목숨까지 걸 일이 되었을까? 바로 웨이먼드가 '알파' 세계의 웨이먼드로 바뀌는, 멀티버스 세계관이 열리고부터다. '조부 투파키'라는 거대 악이 세계를 뒤흔드는 중인데 에블린이 유일하게 대적할 수 있다는 거다. 당연히, 에블린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웨이먼드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 왔던, 꿈과 사랑이 넘치던 20대였으면 모를까. 지금은 쳇바퀴 같은 삶에 허덕대기 바쁜 시궁창 인생인데. 무슨 능력이 있다고.
그런데 이 말을 다르게 하면, 지금의 에블린이 택하지 않은 삶을 택한 에블린이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거다. 능력 넘치는 버전의 에블린 말이다. 그렇다. 어딘가엔 웨이먼드를 따라가지 않고, 늦은 밤 위험한 상황에 처했다가 쿵후 선생님의 도움으로 위기를 벗어나고, 쿵후를 마스터해서 세계적인 액션 배우가 된, 돈/명예/커리어 어느 하나 놓치지 않은 에블린이 있다.
자, 이제 괴팍한 버전의 세무사 '디어드리'에게 맞설 쿵후 전문 배우 에블린이 필요하다.
이쯤 되어선 멀티버스의 개념과 스토리의 뼈대를 다 설명해서인가. 온갖 장르가 마구잡이로 뒤섞인다. 액션, 호러, 코미디, 시트콤, 블랙코미디, 공포, 드라마, 다큐멘터리, 스릴러, 로맨스, 애니메이션,... 장르의 멀티버스화라고나 할까.
멀티버스 세계관을 보여주느라 교차하는 장면이 많지만, 전체적인 톤앤매너는 비슷했다. 코미디. 다만 한없이 가볍고 허술한데 이상하게 매력적인 B급 영화인 것 같다가 진중하고 철학적인 상황으로 들어섰으니. 바로 돌들의 대화 장면이다.
물론 앞서 말했듯 전체 분위기는 코미디인지라 갑작스러운 전환에 영화관 전체가 웃음바다가 되었지만.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조부 투파키, 그러니까 조이의 멀티버스 중 한 모습이자 어찌 보면 본질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가 평온을 느끼는 건 자신이 돌인 세계가 유일하다. 움직이지도, 말하지도, 누구에게 명령을 내리지도, 싸우지도 않고 그저 가만히 있는 때. 그러나 외로움은 느꼈는데, 자신처럼 모든 세계를 자유로이 넘나들게 된 에블린과 함께라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에블린이 동조했을까? 일상에 전전긍긍하던 에블린이라면 그랬을 거다. 이거야 말로 자신이 꿈꾸던 거라며.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 그런데 이때의 에블린은 이전과 다르다. 특별한 능력치를 지닌 에블린과 연결하여 뭐든 될 수 있어서, 세상을 구할 히어로라서 그런 게 아니라, 용서했기 때문이다. 실패로 점철된 자기 자신을.
It was beautiful.
에블린이 웨이먼드를 택하지 않은 덕에 유명한 배우가 된 세상을 경험한 후, 현재로 돌아와 남편 웨이먼드에게 했던 말이다. 꿈꾸는 표정 때문에 웃음이 절로 났지만, 마냥 재밌게 넘길 장면은 아니었다.
수천 번 생각했을 거다. 웨이먼드 대신 다른 걸 택했다면 자신의 삶이 이토록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았을 거라고. 매번 헤실대면서 긍정적으로만 굴지, 실속 없다고. 그 때문에 지금 이 모양 이 꼴이라고. 남 탓을 하는 건 신기하게도 자기 자신을 탓하는 것이다. 결국 모든 선택을 자신이 했기 때문이다.
실패하는 선택지만 쏙쏙 골라온 스스로가 얼마나 불쌍하고 멍청하게 느껴지겠는가. 비관의 늪에 빠지기 딱 적절한 상태로, 에블린은 살아왔다. 웨이먼드가 끝을 고한 것도 애정이 닳았다기보다는 괴로움 때문이었을 거다. 그와 함께 행복한 미래를 약속했는데, 자신은 에블린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고 말았으니까. 각자도생이 최선이라고 여겼을 거다.
현재 남편인 웨이먼드가 아니라 알파 웨이먼드를 더 의지하고 따르던 에블린을 생각하면 그럴 만하다. 싸움에 능하고, 자신에게 나아갈 방향과 방법을 제시하고, 단호하게 말할 줄 아는 웨이먼드를 훨씬 마음에 들어 했으니까. 배우의 삶을 사는 다른 에블린의 세상에 평생 머물고 싶어 했던 것처럼.
그러나 에블린이 알파 행성에서 온 이들과 완전히 대치 상태에 놓였을 때, 에블린도 조부 투파키처럼 파괴의 기로에 서려고 할 때, 에블린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하다. 남편인 웨이먼드의 절박한 외침으로 말이다. 그가 말했다. 우리 모두 솔직해지자고. 그 이전인가 이후였나. 이 말도 덧붙였다. 자신의 바보 같은 친절함은 생존 전략이라고. 우린 저마다의 방식으로 애쓰며 살아가고 있다고.
싸움을 좋아하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그런데 왜 지속적으로 싸우는가. 시작은 이유가 있었을 거다. 그런데 싸움이란 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목적이 흐릿해진다. 모르겠는 순간에 놓이는 거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지? 그러나 솔직하게 이 마음을 드러내는 순간 약점이 될 것만 같다. 싸움은 자신의 옳음을 과시하려는 행위이니까, 강해야 할 것 같은 거다. 모든 생명체는 위협을 느낄 때 그렇다. 검붉은 속 날개를 펼치는 곤충이나 독을 뿜는 전갈이나 뱀처럼.
인간은 주로 분노를 과시한다. 잔뜩 찌푸린 미간에 자극적인 욕설을 퍼붓고, 상대가 굴복할 때까지 극한으로 치닫는 거다. 제가 지닌 물리적 힘과 능력도 내세우며.
그런데 그깟 따사로운 마음이라니.
분노는 강하지만, 따스함은 유약하다. 유약하고도 솔직하다. 아프기 싫고, 누군가를 아프게 하기도 싫고,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서 무섭고, 나만 그만하고 싶은 것 같아서 더 무섭다는 걸 대놓고 내보인다. 전쟁터 한복판에 누워서 두 손 두 발 다 든 상태.
'적'이라고 상정한 존재들은 무시무시해 보인다. 하지만 집단이 아닌 각 개인으로 보다 보면, 한낱 인간일 뿐이다. 그들은 원하는 게 있는데 얻다 말하기도 뭣하고, 말한다고 해결이 되지도 않고, 혼자 앓고만 있는 거다. 에블린은 공격하는 대신 그들의 갈망을 들여다본다. 말 못 할 성적 취향이 있고, 신경 통증 때문에 고생 중이고, 자신의 단짝을 애절하게 찾는 각각의 사람.
솔직한 마음을 받아들이고 나니 그 누구도 공격할 여력이 없다. 발라당 바닥에 누워서 행복에 겨울뿐.
영화에서 줄곧 던진 메시지가 이랬다. 죽어라 싸우고 요란법석 피워봤자 한낱 우주 먼지인 인간들. 지구도 우주에 있는 크고 작은 행성들 중에 하나이다. 지구가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면, 인간이 전부라는 생각은 더더욱 말이 안 된다. 무수하디 무수한 존재 중에 하나인 우리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닌 존재다.
Nothing Matters.
별 거 아니기에 부질없다는 생각으로 삶을 내던지려던 인물, 혼돈 그 자체였던 조부 투파키였다.
그가 만든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암흑, 블랙홀. 영화에서는 이걸 까만 토핑이 박힌 베이글로 유쾌하게 표현하긴 했다만. 조부 투파키는 세상을 휩쓸 생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파괴할 수단으로 베이글을 만들었다. 모든 것을 마음껏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마음껏 될 수 있기에 되레 아무것도 의미가 없던 거다.
가운데가 뻥 뚫린 베이글의 모양새가 그의 표상이었는지도 모른다. 겉은 사악함의 결정체 같아서 모두에게 해를 끼칠 것 같지만, 실은 아무것도 없다. 비어있는 걸 감추기 위해 겉모습을 더더욱 화려하고 시끌벅적하게 꾸며냈는지도 모른다.
다 갖춘 그에게 필요한 건, 정말이지 인간다운 결론이긴 한데, '의미'이다.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고 해서 아무 의미가 없는 건 아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둘째 치고, 나 하나만 놓고 봐도 그렇다. 나는 나에게 의미 있는 존재다.
이 사실을 보여주는 데에 멀티버스 세계관만큼 적합한 게 있나. 에블린의 모든 선택이 무수히 많은 세상의 에블린을 만들었다. 각각의 에블린은 살아가면서 자신의 환경, 취향, 욕망을 따라 새로운 일을 겪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길을, 새로운 삶을 만들어간다. 아무것도 아닌 그토록 작은 먼지 하나가 이리도 다양한 굴곡을 헤쳐나갔단 말이다.
그러니 살면서 문득, 혹은 지금 당장 자신이 의미 없게 느껴진다면 여태까지의 삶을 돌이켜보자. 셀 수도 없이 많은 선택들을 말이다.
정말, 나 자신이 나에게 아무 의미 없었나?
세무사 디어드리와 에블린은 알파 세계관에서도, 현재 세계관에서도 앙숙이다. 디어드리는 이미 에블린을 문제 투성이라고 여기고, 그런 무지막지한 모습을 에블린은 융통성 없다고 느낀다. 그런데 손이 핫도그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둘은 애틋하고 사랑이 넘치는 관계다. 이런 대비는 클리셰 같은 걸까? 잘 몰라서 멋대로 판단하는 것이지, 알고 보면 나쁜 사람도 착한 사람이라고. 서로 사랑하기 공익 캠페인 같은 휴머니즘일까.
영화의 끝자락. 정해진 기한(당일 오후 6시) 내에 영수증을 다시 정리하라는 디어드리의 마지막 경고는 당연히, 산전수전 다 겪은 에블린이 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이때 에블린은 방망이를 들고 주저 없이 나아가 유리창을 시원하게 깨부순다. 답이 없으니 완전히 미쳐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에블린은 비로소 자기 자신을 드러냈다. 세탁기와 건조기로 그득한 이 공간이 얼마나 지긋지긋할까. 다 엎고 싶었을 텐데 그걸 꾹 참고 누르고 견디기만을 반복했다. 모두가 곪아 터지면서까지. 무모하고도 무책임한 행동. 그거야말로 에블린에게 가장 필요했다. 한 번쯤은 나 몰라라 하고 도망갔어야 했다. 못해먹겠다고.
에블린이 자신의 생존전략을 썼듯 웨이먼드도 자신의 전략을 펼쳤다. 그리고 디어드리는 일주일로 기한을 늘린다. 정말 마지막이라며. 대체 무슨 얘기를 했기에. 에블린은 궁금할 수밖에 없다. 웨이먼드가 한 얘기는 단순한 사실이었다. 자신이 에블린에게 이혼 서류를 내밀었다고. 디어드리도 에블린에게 솔직하게 말한다. 자신도 그 느낌이 뭔지 안다고. 오묘한 동질감과 유대감이 생긴 둘.
마치 다른 핫도그 세계 속 에블린과 디어드리의 관계가 여기까지 이어진 느낌이었다. 에블린들은 전혀 다른 세상에서 전혀 다른 삶을 사는 게 아닌 것 같다. 라쿤에게 요리를 배운 '라따뚜기' 요리사의 이야기로 알게 되었듯, 우리는 혼자가 아니니까. '나'만 해도 내가 무수히 많아서. 지금의 나는 실패만 해왔을지언정 그게 전부가 아닌 것이다.
이 엄청난 교훈과 깨달음을 싣고 영화는 마지막 장면으로 향한다. 예전처럼 세무조사를 받으러 온 상황. 하지만 모든 것이 달라졌다. 함께 온 사람들과 그들 간의 관계, 디어드리와의 관계, 태도, 그 모든 것이. 이미지로 충분히 보여줄 수 있지만, 영화는 딱 한 마디로 전부를 보여준다.
죄송해요. 못 들었어요.
체면 차리느라 속마음 숨기며 애먼 일 벌이지 말고, 솔직 담백하게. 평가받을까 봐 움츠러들지 말고, 자신의 결핍 앞에서 당당히. 우스꽝스럽고, 멋지고, 재밌고, 지루하고, 진지하고, 덤벙대고, 약속을 잘 지키고, 늦고, 웃고, 우는 온갖 모습의 나 자신에게, BE KIND.
끝으로 왓챠피디아에도 남긴 감상을 이곳에 한 번 더 공유해본다.
Nothing matters.
So please, be kind to EVERYTHING EVERYWHERE.
Then you realize the whole world ALL AT ONCE.
우리는 모두 아무것도 아닌 존재랍니다.
그러니 온갖 모습을 지닌 자신을 좀 사랑스럽게 바라봐 주세요.
나 자신의 의미가 완전히 새롭게 보일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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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각과 기억 사이에서 갈등하는 방관자
이 글은 영화 [리멤버]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글을 퍼가거나 인용 시 반드시 출처를 표시해주세요.
포르셰와 권총 사이;삶과 죽음, 그리고 두 가지의 꿈
사진출처:다음 영화
[리멤버]에서는 정 반대의 개념들이 많이 등장한다. 삶과 죽음이 그러하고, 기억과 망각이 그러하며, 친일파의 부(Richness)와 그렇지 않은 자 들의 궁핍도 그러하다. 이런 개념들은 그저 영화에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몇 번이고 부딪치고 충돌하며 영화에서 갈등을 만들어낸다.
이 많고 많은 극단의 대립을 영화는 크게 포르셰(인규)와 권총(필주)의 모습을 빌어 설명한다.
붉은 포르셰는 누구나 가질 수 없다. 특히 인규(남주혁)에겐 허황되고 이뤄질 수 없는 꿈에 가깝지만. 행여 실수로라도(?) 포르셰를 사게 될지도 모르는 그 희소에 가까운 희망을 위해서라면 반드시 영위해야 하는 삶의 결정체가 스포츠카이기도 하다.
이는 필주(이성민)에게도 어느 정도 비슷하다.
포르셰는 포기하고 싶지만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뛰고 있는 심장처럼 붉었고. 또한 누가 봐도 허무맹랑하지만 자신은 반드시 성공시켜야만 하는 목표이기도 했다. 그랬기에 필주는 자신의 지리멸렬한 삶을 그저 놓아버릴 수 없었다.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잊고 싶었지만. 아직 그러기엔 너무 일렀다.
그에 반해 권총은 필주에게는 죽음이었고. 망각하려는 것이 아닌 망각의 과정 속에서도 잊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목표에 가까웠다. 잊음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삶에서도 몇십 년 묵은 응어리는 자신의 뇌리에서 잊힐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인규는 포르셰를 보며 열광한다. 그러나 필주에게 삶은 그저 자신의 목표를 위한 수단일 뿐이다. 필주에겐 이런 총이 생의 후반부를 바쳐 이루고 싶은 꿈이었지만. 인규에게는 그저 위험해 보이는 낡은 목표에 불과했다.
번쩍번쩍한 삶은 자꾸 죽음과 과거의 기억을 잊으라며 빛나는 포르셰의 형태로 필주를 유혹하지만. 죽음마저도 초월한 남자의 의지는 결국 작동이 되는지조차 의심스러운 고대 유물 같은 총이 몇 번에 걸쳐 방아쇠를 당기게 만들었다.
방관자에게 찾아오는 대물림의 비극;지금의 우리도 겪고 있다.
사진출처:다음 영화
필규는 점점 인규의 삶을 무시할 수 없었다.
인규의 삶은 (친일파로 대변되는) 악이 근절되지 않거나 불합리한 일을 좌시(외면) 했을 경우 역사는 반복되며, 그 속에서 아무 영문도 모른 채 대를 이어 고통받는 사람이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인규는 소외되었고 약했으며, 선택의 여지는 열심히 살 수록 줄어들고 있는 것처럼 느꼈을 것이다.
처음엔 안심시키는 말처럼 내뱉었던 문장이었다. 인규 너에게는 아무 피해 없게 하겠다는 말은.
그러나 인규에게 같은, 혹은 비슷한 뉘앙스의 문장을 몇 번이고 내뱉는 동안 필규는 점점 진심을 실어야 했다.
필주는 더 이상 방관자로서의 삶을 살지 않기로 마음먹었고. 인규가 그런 삶을 조금이라도 짧게 살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소명을 반드시 이뤄야 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사적이라 할 수 있는 복수가 인규의 삶을 하루아침에 바꿔놓을 수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악의 고리 하나쯤은 끊어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하나가 끊어지고 나면, 힘의 불균형이 이뤄져 늦더라도 결국은 완전히 이런 고통이나 악의 세습도 이뤄지지 않는 날이 올 것이라 믿었을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2022년 현재에도, 슬슬 끊어지기 시작하는 악연의 고리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노동자의 피를 흰 천으로 가린다 하여 그 사건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무성의하게 진행된 보상 아닌 보상은 장례식장에 팥으로 만든 음식을 들이게 만들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머리를 조아린다 하여 사과했으니 이제 괜찮을 것이라며 생각하고 넘어갈 사건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방관자의 자세로 뒷짐을 진 채 이러다 사그라든다는 태도를 취한다면, 다음번에 기계에 빨려 들어가게 될 대상은 내가 될 것이다. 필주 또한 방관자가 견뎠어야 할 마음의 무게를 그렇게 인생을 바쳐 갚았다.
방관자가 치러야 할 대가는 그렇게도 길고 무거웠다.
결과와 과정의 딜레마;영화를 보며 속이 시원해야 하는가.
사진출처:다음 영화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 [바스터즈]에서는 가상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나치 독일을 말 그대로 불살라버리는 이야기를 그린다. 이런 가상의 처벌은 영화를 보는 거의 모든 사람들의 속을 시원하게 해 주는 카타르시스를 불러왔다.
그러나 리멤버의 어조는 조금 더 무겁다. 과정이 중요한지. 아니면 결과로만 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저울에 떡 하니 올린다. 그 어떤 곳으로 저울이 기울어진다 해도 두 덩어리의 생각이 마음 위에 올려진 것은 변함이 없기에 영화를 보며 마음이 조금씩 무거워진다.
문제는 영화가 메시지를 설명하는 방법이 불친절하다는 데 있다.
인물에 대한 그 어떤 설명도 하지 않으며, 모든 설정을 영화를 위해 이용하고 있다. 그러니 인규가 멋들어지게 포르셰를 몰아붙인다 해도 [베이비 드라이버]처럼 박진감 넘치지 않으며.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병에 걸린 필주는 [메멘토]나 [살인자의 기억법]처럼 기억의 왜곡 한 번 없이 스스로의 임무가 완성될 때까지 그 어떤 것도 잊지 않는다.
그 결과, 직설적이다 싶을 정도로 명확한 메시지는 비겁하고 무책임한 전달 방식 때문에 너무도 빨리 관객의 마음속에 자리 잡아 버리고. 그 이후의 시간들은 그저 자신의 메시지를 재확인하는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영화는 최악의 케이스는 피했다. 바로 메시지도, 전달 방식도 최악인 경우 말이다.
책임을 지라는 것은 데이터 센터에 일어난 화재에 통감하며 사퇴하라는 뜻이 아니며. 사과의 형태로 만원도 되지 않는 포인트를 지급하는데 끝나는 것이 아닐 텐데도. 한국을 거의 독점하고 있던 귀여운 라이언을 필두로 한 이 회사는 메시지도, 방식도 최악인 형태의 사과를 했다. 위안부에게 사죄하라는 요구에 그 당시의 시세로 몇십 엔을 지불한 일본 정부와 다를 게 없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최악의 실수를 저지른 담당자들은, 다음 세대의 피해자에 해당하는 인규의 대사에서 배워야 할 것이다. 좋지 않은 결과에는 사퇴(필주의 경우는 죽음)가 아닌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시시하고 치사하게 등을 보이며 그 사태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이 영화처럼 메시지라도 마음에 와닿게 했었어야 했다.
마치면서
매번 말하지만.
나는 이성민 배우가 “뜨기”만을 죽어라 바란 사람 중 하나다. 분명 작은 역할이었던 그가, 점점 지변을 넓혀가며 변두리에서 중앙에 가까운 자리에 서는 순간을. 내 인생의 일부분을 할애하며 기다려왔고, 그렇게 맞이한 좀 더 밝은 곳에 서 있는 배우의 모습에 뿌듯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가운데 토막의 자리는 여러 이름의 책임감도 함께 요하는 자리였다. 주연으로 나선 영화들에서 거뒀던 성적들은 그다지 좋지 않았고. 나는 행여나 그가 밀려날까 봐 조마조마했다.
비록 배역이고 그 또한 연기의 일부였겠지만. 이성민 배우는 그동안의 마음고생을 80대 노인이 되는 동안 거쳐야 했을 시간과 고난만큼 잘 씹어 삼켰고, 그 결과 영화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연기 내공의 변주를 보여준다. 영화의 후반부에서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내뱉는 말 한마디에도 눈물을 쏟게 만들 만큼.
물론 이번 영화가 훌륭한 영화냐라고 묻는다면. 애석하게도 좋고 나쁨의 경계에 있는 외나무다리에서 몇 번이고 양쪽으로 번갈아가며 빠질 영화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럼에도 그의 연기는 이 불친절하고 비겁한 방법으로 메시지를 보여주는 영화를 멱살 잡고 끌고 간다. 그 모습은 때론 애처롭지만, 자신의 어깨에 놓인 짐의 무게를 완벽히 이해한 자의 책임감을 비추기도 한다.
완벽하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영화의 말미에서 안도와 아주 조금의 행복이 섞인 얼굴로 입가에 미소를 흘리던 필주에게서 무언가를 이제 승화시킨 듯 한 이성민 배우의 홀가분함도 함께 보이는 듯했다.
[이 글의 TMI]
최근 참 많은 일이 있었다.
특히 주말에 있었던 이태원 참사는 아픈 마음과 함께 그런 사태에서 드러난 인간 양상에 대한 분노로 인해 정말 힘들었다.
이 사건 속에 존재한 방관자들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자신이 치러야 할 대가는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으며. 기대했던 모습보다 훨씬 더 처참할 것이라는 것을.
상처받고 힘든 모든 분들에게 평안이 조금씩이라도 빨리 오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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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리뷰] 소울 (SOUL)
소울
감독 피트 닥터
출연 제이미 폭스, 티나 페이
네이버 평점 : 9.32 / 10 (네티즌 평점 기준 참여인원 8,230명)
왓챠 평점 : 4.1 / 5 (참여인원 4.8만 명)
개인 평점 : ★★★★★ (5 / 5)
소울 리뷰 3줄 요약
1. 영화가 끝나고 여운이 남는 작품
2. 사후 세계 내용 같지만 주로 생전 세계(?)와 삶의 의미를 다룬다.
3. 픽사 작품 중 가장 어른을 위한 애니메이션
+ 소소한 쿠키영상 있음
(큰 의미 없는 쿠키영상이지만 크레딧이 내려갈 때에도 귀여운 영혼 캐릭터가 꾸준히 등장하니 보고 나오는 것도 나쁘지 않음)<소울> 포스터 [출처: 네이버 영화]
<소울> 포스터 [출처: 네이버 영화]
- 픽사의 22번째 작품
소울은 픽사의 22번째 작품으로 이를 기념해 작중 어린 영혼 주인공의 이름 역시 22번이다.
픽사의 역대 장편 영화 중 가장 어른스러운 작품으로 직전 작품이었던 온워드가 굉장히 어린이용 작품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대조적이라고 할 수 있다.
감독 피트 닥터와 그의 전 작품 [출처: 씨네 21 인터뷰, 네이버 영화]
- 픽사 3 대장 피트 닥터
픽사에는 토이스토리 1편부터 작업을 해왔던 3명의 애니메이터 겸 감독들이 있는데 이들이 감독, 원안 등에 참여한 작품을 모두 나열하면 전체 작품의 70%에 다다른다.
그들이 바로 피트 닥터(업, 인사이드 아웃), 앤드류 스탠튼(니모, 월 E), 존 라세터(토이스토리, 카)로 존 라세터는 2018년 파문을 일으켜 현재는 퇴출당했다. 그리고 피트 닥터는 현재 퇴출당한 존 라세터의 뒤를 어이서 픽사의 CCO(최고 크리에이티브 책임자)를 담당하고 있다.
<소울>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 생전 세계를 다룬 스토리
보통 영화의 소재로 많이 사용되는 건 사후 세계지만 소울에서 주로 다뤄지는 배경은 생전 세계이다.
즉, 태어나기 전의 세계를 메인 배경으로 다루고 있다.
영혼을 소재로 하는 작품치고 이런 독특한 설정들이 뻔할 수 있는 소재를 신선하게 담아내는 지극히 픽사스러운 상상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영혼들의 관리를 담당하고 있는 관리자들의 묘사를 추상화스럽게 표현한 부분이 개인적으로는 인상적이었다.
<소울>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 재즈는 언제나 즐겁다
주인공이 재즈 피아니스트를 꿈꾸는 인물이기 때문에 영화 속 노래들이 거의 재즈로 이루어져 있다.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재즈가 흐르는 편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재즈 영화라고 생각해도 괜찮다.
재즈의 멜로디는 사람을 홀리게 만드는 게 있어서 영화를 보고 난 후에도 영화 속 재즈 음악을 들으면서 여운을 느껴보기 좋다.
- 소울 메인 예고편
<소울> 메인 예고편 [출처: 디즈니 공식 유튜브]
H, E, (LL) 두 개의 하키 스틱ㅋㅋㅋㅋㅋㅋ
찐 새로운 인생과 리뉴얼 새로운 인생이랄까
※이후부터 스포일러
+글쓴이의 생각의 흐름
스포 방지 용 <소울>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어떻게 생각해보면 아르키메데스 때부터 살아온(?) 그리고 그 무수한 멘토들과 함께 보내본 22번에게도 모르는 세상(현실의 지구)이 있다는 것에서 경험의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그 즐거움을 알 수 없다는 것은 우리가 어떤 것을 경험할 때 온전히 즐기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말해준다.
살아가는 태도는 굉장히 중요한 영역이다.
마음가짐에 대한 유명한 일화로 낡을 만큼 낡아버린 예시지만 원효대사 해골물이 꾸준히 등장하는 이유는 그만큼 찰떡 비유이기 때문이다.
물론 원효대사는 '속았다!'라고 느껴지는 느낌이 강하지만 우리가 어떤 태도로 임하느냐가 우리의 평가와 판단에 매우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긍정적 마음으로 생활한다면 실제로도 하루 동안 생기는 많은 이벤트들이 긍정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물론 무조건적인 긍정이 답은 아니기 때문에
중요한 판단을 내려야 하는 부분(주식이라던가... 주식이라던가...)에서는 예측된 긍정론을 경계하는 것도 좋은 판단에 도움이 되어 줄 것이다.
결론은 조금 더 우리 일상 속 순간순간의 경험을 들여다보자는 것이다.
우리는 일상 속 소소한 경험, 지나가는 삶에 지나치게 무심하곤 하다.
예를 들면 출근길에 바라보는 창밖은 우리에게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도 누군가에겐 감동을 줄 수 있는 풍경이고
누군가에겐 힐링이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좋아하는 포인트들을 알고 있는 것은 중요하다.
마치 사탕을 좋아해서 한 움큼 집어 올 줄 아는 22번처럼 말이다.
우리는 우리를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게 무엇인지 잘 모른다.
주인공에겐 재즈였고 22번에겐 재즈한 행동들이었다면 우리가 즐거워지는 순간들,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물건들, 행동들에 대해 잘 알고 그것이 일상에 녹아내려있을 때 한층 풍부한 하루를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안 해도 시간이 빠르게 흐르고 굉장히 몰입해도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
그것은 실시간으로 느끼는 부분이 현저하게 적다는 것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반대로 풍부한 감정을 느끼는 순간에 시간이 멈춘듯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하루가 너무 긴 것도 좋지만은 않겠지만 가끔 하루 속에 풍부하고 풍성한 순간이 숨어있는 것은 굉장한 힐링이 되어 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것이 여행이기도 하고 그런 하루하루가 우리에게 재충전과 에너지를 부여해 주기 때문이다.
소울이 품고 있는 메시지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약간의 사담을 더하자면 소울이라는 단어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한다.
우리 일상 속에는 혼, 영혼과 관련된 표현들이 많다. 예를 들면 혼을 담다, 영혼이 없다, 혼이 나갔다.
굉장한 집중을 이루어냈을 때 소위 하얗게 불태우면 혼을 담았다고 한다.
나의 혼이 담길 만큼 그것과 밀접하게 교류했다는 의미이다.
영혼이 없다. 말 그래도 아무런 느낌 없이 감정 없는 표현에 쓰이는 말이다.
혼이 나갔다.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실제로는 보고 들을 수 있지만 혼이 나가서 봐도 모르고 들어도 모르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혼내다의 어원도 영혼에서 파생된 단어라고 하니 어찌 보면 당연하면서도 생각보다 많은 단어에 있었다는 게 조금 신기하더라.
이렇게 생각하면 영화 속 영혼을 이루고 있는 것들이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영화 속에서 어린 영혼들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성격 가치관 등을 장착한다.
앞서 살펴본 단어만 보더라도 우리는 영혼을 생각할 때 그 사람의 생각, 성격을 담고 있다고 여기고 굉장한 몰입을 영혼과 연결시킨다
또한 감정적인 포지션을 느끼는 역할을 영혼에게 주어주고 있기 때문에 영화 속 소울에 대한 묘사가 꽤나 원초적인 영혼에 대한 생각들을 잘 표현해 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영어를 잘 하진 못하지만 소울과 관련된 영어 표현들을 찾아봐도 우리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는 게 아무래도 혼에 대한 이미지나 인식은 문화를 벗어나서 다르지 않은 주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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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FAN 데일리] 편견과 오만을 뛰어넘어 경청
Summary
학교에 데려다주던 엄마의 잔소리를 적당히 웃어넘기는 듯하던 고등학생 딸은 그날 세상을 영원히 등지는 비극적인 선택을 하고 만다. 학교폭력, 랜덤채팅 어플리케이션 등 통상적인 청소년 문제를 중심으로 사건을 조사하던 경찰은 주변인 증언을 확보하면서 처음에는 전혀 짐작하지 못했던 오묘하게 뒤틀린 모녀 관계를 발견하게 되는데…. (출처: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Cast
감독: 김수인
출연: 장서희, 강안나, 최소윤
우리나라에서 아이를 잘 키우는 것의 기준이 언제부터 SKY 입학, 대기업 입사, 전문직 합격이 되었을까요? 영화는 현실의 거울이라는데, 얼마나 많은 자식이 부모로부터 고통을 받으면 뒤틀린 모녀 관계를 소재로 하는 한국 영화가 계속해서 등장하는 걸까요? 과연 나이를 지긋이 먹은 먼 훗날에는 "예전에 할미가 젊었을 때, 우리나라에 그렇게 '극성 엄마'를 소재로 한 영화들이 많았어요. '극성 엄마'가 뭐냐고? 그런 게 있었어요." 하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올까요?
머릿속에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씁쓸한 말풍선들은 뒤로 제쳐두고, 생각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이 작품에 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만난 세 번째 작품 <독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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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등교하지 않고 사라진 고등학생 '유리'가 몇몇 사람들과 함께 죽은 채 발견됩니다. 경찰은 동반 자살을 염두에 두고 가족, 선생님, 친구들로부터 증언을 수집하며 사건의 진상을 파헤쳐 나가죠. 극은 두 가지 갈래의 미스터리와 함께 흘러갑니다. '유리'는 왜 자살했을까? 그리고 엄마 '혜영'과 딸 '유리'는 도대체 어떤 모녀 관계였을까?
'유리'를 죽음으로 내몬 것이 엄마였다는 건, 사사건건 '유리'의 삶에 간섭하고 집착하는 엄마 '혜영'의 모습에서 쉽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혜영'에게는 자녀에게 독이 되는 부모, 독친의 모습이 계속해서 엿보이죠. 가수를 준비하는 친구 '예나'와 딸에게 관심을 쏟는 담임 선생님 '기범'은 엄마 '혜영'에게 "근본 없는 거"에 지나지 않습니다. 딸의 사회적 등급을 떨어뜨릴 방해꾼 나부랭이들이죠. 결혼정보회사 매니저인 '혜영'은 딸이 더 나은 등급의 사람으로 거듭나도록 극성 엄마가 되기를 자처합니다.
핸드폰 통화 내용까지 몰래 도청할 정도로 유난을 떨었던 '혜영'이지만, 모순되게도 딸의 진짜 목소리를 들어주는 엄마는 아니었습니다. 들려오는 목소리에도 귀를 막고, 듣고 싶은 것만 들었죠. 과할 만큼 철저하게 관리했으나, 실제로는 자기 자식에 관해 제대로 아는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타살 정황이 없는 상황에서도 아이는 절대 자살할 성격이 아니라고 굳게 믿고, 딸에게 걸림돌처럼 보였던 '예나'와 '기범'을 냅다 살인 혐의로 고소해 버리죠. 생선 알레르기가 있는 줄도 모르고, 머리에 좋다며 꽁치를 넣은 찌개를 억지로 먹여오기도 했습니다.
'혜영'의 무서운 점은 자신에게 그래도 된다는 특권이 있다고 단단히 믿는다는 겁니다. 특권의 이름은 다름 아닌 '엄마'. 엄마니까 도청할 수도 있고, 엄마니까 자식을 위해 이런다는 거죠. 안타깝게도 '엄마'라는 이름을 특권으로 착각하는 극성 부모는 현실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자식을 영어 유치원에 보내려고 '4세 고시' 따위를 치르는 것도, 엄마니까 그러는 거랍니다. 이런 뉴스들을 읽으면 가슴 안쪽이 답답해져 옵니다. 부모라는 이름을 특권 삼아 내세우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엄마니까'라는 방패가 아이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히는 날카로운 칼날이 될 수 있다는 걸 정말 모르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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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가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자신을 꽉 조여오는 엄마의 울타리를 도저히 견디지 못해서'와 같은 이유로 단순하게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독친>은 무척 섬세한 영화입니다. 지나치게 내밀해서 당사자가 아니면 쉽게 알 수 없는 모녀 관계의 실상에 한 걸음씩 다가가면서, 관객이 '유리'가 죽음을 선택한 진짜 이유를 깊이 있게 이해하게끔 유도하죠.
'유리'는 더 나은 세상에서 엄마에게 사랑하는 법을 알려주고자 떠난다고 고백합니다. 나중에 드러나지만, 엄마 '혜영'은 어린 시절 가정폭력의 피해자였습니다. 폭력으로 길러졌기에 지나친 보살핌과 집착을 사랑이라고 착각했을지도 모르죠. 엄마도 딸도 서로를 사랑하는 건 분명한데, 왜 이런 비극적인 결말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던 걸까요? <독친>은 뿌리 뽑지 못한 가정폭력과 인간을 등급으로 나눠 함부로 평가하는 우리 사회가 만들어 낸 비극의 한 단면을 잘 들여다보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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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자식들의 아픔은 '유리'뿐만 아니라 친구 '예나'와 선생님 '기범'에게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부모 없이 자란 '예나'는 독친인 줄 알면서도 부모가 있는 '유리'를 부러워합니다. '기범'은 형과 끊임없이 비교당하며 가족의 일원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비참함을 겪고 있었죠. 주변인으로만 사용하고 끝낼 수 있었던 인물에게도 각각의 서사를 부여해 다양한 형태의 가족 문제를 그려낸 것은 이 영화만의 훌륭한 지점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독친>은 사건의 진상을 밝혀가는 흔한 미스터리 소재를 가지고도 흔치 않은 인상을 남기는데요. 여기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엄마의 폭압에 괴로워하는 자식이 어떻게 말라비틀어져 가는지를 단계적으로 표현한 플롯과 배우의 연기력이죠. 자식을 죽음에 몰아넣었으면서도 자기 탓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극성 엄마의 비뚤어진 모성을 연기한 장서희 배우도 대단했지만, 딸 '유리' 역을 맡은 강안나 배우의 연기는 영화가 끝난 후에도 눈앞에 아른거릴 정도로 강렬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착하고 성실한 모범생 반장이나, 이면에는 심연으로 끝없이 가라앉는 우울감으로 가득한 '유리'. 밝게 웃어 보이다가도 깊게 패인 마음의 상처로 인해 저도 모르게 이성의 끈이 끊어지는 순간을 겪는 입체적인 캐릭터입니다. "사랑받는 사람은 반드시 행복할 거라는 편견"에 갇힌 아이의 모습과 엄마의 지나친 간섭에 내몰려 "내가 주는 사랑이 받는 사람에게도 사랑일 거라는 오만" 아래 살아가는 아이의 모습을 동시에 표현해야 하는 몹시 어려운 역할이었죠. 그러나 강안나 배우는 이를 해냅니다. 그의 연기를 보며 몇 번이나 감탄했는지! 엄청난 배우의 무한한 가능성을 엿본 것 같아 무척이나 설렜습니다. 앞으로 펼쳐질 강안나 배우의 필모그래피가 아주 기대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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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도 부모가 처음이라서, 자칫하면 독친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독친이 되지 않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혜영'이 끝끝내 하지 못한 것, '잘 들어주기'를 실천하면 됩니다. 귀를 열고, 마음을 열고 아이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주는 겁니다. 우리 사회에도 편견과 오만을 넘어 경청하는 선친이 더 많아지길 바랍니다. 정말 언젠가는, 영화가 반영하는 이 사회의 모습이 조금은 다를 수 있도록 말입니다.
Schedule in BIFAN2023.07.01(토) CGV소풍 4관 19:302023.07.04(화) CGV소풍 4관 19:302023.07.06(목) CGV소풍 10관 11:00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기간 : 06월 29일 - 07월 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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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 나는 누가 책임져?
김태용 감독이 연출한 최우식 주연 영화 거인입니다.
너무 좋은 영화라 더 많은 분들이 보셨으면 좋겠어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Music
Levity – Johny Grimes#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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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태양은 움직이지 않는다> 30초 예고편
하루 동안 정기적인 보고를 하지 않으면 터지게 되는
폭탄을 가슴속에 지닌 채 기밀 정보를 알아내는 AN통신.
요원 ‘타카노(후지와라 타츠야)’와 ‘타오카(타케우치 료마)’는
대기업 CNOX와 태양광 에너지가 관련된 엄청난 비밀을 알게 된다.
여기에 정체불명의 여인 ‘아야코(한효주)’와
일급 스파이인 ‘데이비드 킴(변요한)’까지 관련 정보를 노리면서
상황은 걷잡을 수 없게 되는데…
차세대 에너지를 둘러싼 보이지 않는 전쟁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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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고요의 바다> 공식 예고편
대원들이 살해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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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한 삶을 산다는 건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을 영화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의 주인공의 삶과 적용시켜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먼저 주인공 론 우드로프(매튜 매커너히)는 텍사스에 사는 로데오에 열광하고 여자, 술, 마약에 환장하는 블루 컬러 노동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삶을 사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는 쾌락에 지배당하는 욕망의 노예라고 말한다.
그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일터에서 일하던 중 전기에 감전되는 사고를 당한다. 그는 실려 간 병원에서 혈액 검사 를 통해 자신이 에이즈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현실을 부정하려 했지만 몸의 이상 현상을 느끼면서 에이즈가 무엇인지 공부하기 시작한다.
공부하면서 알게 된 사실은 제약 회사와 FDA 사이에는 놓여진 수많은 이권의 충돌이었다. 바이러스 뿐 아니라 백혈구마저 마구 공격하는 AZT는 장기적으로 에이즈 환자들의 면역 시스템을 완전히 파괴하는데 제약 회사와 연계된 FDA와 병원들은 다른 약에 대해 눈을 감고 AZT에 대한 실험을 한다.
그 결과 환자들은 아무런 방도없이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우드로프는 처음에는 AZT 처방을 위해 멕시코로 가지만 거기서 다른 약들의 존재에 대해 알고 이를 돈벌이에 이용하기 시작한다. 그런 그의 행동은 부를 자신의 최고의 행복이라고 착각한 경우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부는 아무리 해도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우드로프의 삶은 불행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점차 최고의 선을 알게 된다. FDA로 인해 다른 약을 처방받지 못하는 수많은 에이즈 환자들은 론으로 인해 오히려 병원보다 더 나은 처방을 내려주고, 우드로프가 병원에서 만났던 게이인 레이온(자레드 레토) 덕분에 게이 커뮤니티의 많은 환자들이 론이 개설한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에 가입을 도와준다.
FDA로서는 론이 눈의 가시 같은 존재가 된다. FDA는 법을 개정하면서까지 론의 사업을 방해한다. 론의 입장에서는 30일밖에 못산다고 단언했던 병원의 처방보다 자신의 처방이 훨씬 더 효과가 있다고 온 몸으로 증명했고 자신의 클럽 가입자들이 병원보다 사망률이 1/10에 불과하다고 강변했지만 사업은 점점 힘들어져 간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약 구매가 어려워진 상황에서 가장 친했던 레이온이 병원에서 사망하자 그는 법과 대결하기로 결심한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원래의 론 우드로프의 모습과 천차만별이다.
처음의 그는 쾌락과 부만 탐하는 사람이었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는 목적이 없는 삶을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에이즈에 대해서 공부하고, 호모포비아었던 그가 게이친구인 레이온과 친해지면서 그들의 삶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른 게이들의 병을 호전시키기 위해 그는 갖은 노력을 다한다. 그의 목적이 변화된 것이다.
하지만 법은 론의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 그러나 법원에서 패배한 그였지만 클럽 가입자들은 론에게 박수를 보내고 우드로프는 남은 여생을 살아가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행복해지기 위해선
그의 모습을 살펴보면 도덕적 탁월성을 가꾸어 나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도덕적 탁월성은 실천으로 얻어진다. 그는 몸소 에이즈를 호전하는 약을 얻기 위해 직접 일본으로 가서 약을 얻는다. 이는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계속 반복되는데 이것은 습관의 결과로 생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그는 점점 행복에 도달하고 있다. 그리고 가치는 가치와 그것이 아닌 가치가 더해 질 때, 그 가치의 좋음은 커진다. 이는 우드로프가 처음에는 게이를 혐오했다. 그러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몸소 움직이며, 게이들의 삶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그러면서 그는 게이들을 이해하고 그들과 친구가 된다. 이는 편견이 사라지고 우정이 더해져 그를 더욱 행복한 사람으로 만든다. 우드로프의 개인적인 병도 점차 호전해 나가고 그와 더불어 사회적인 그의 위치도 달라졌다. 사람들은 그를 용감하게 FDA와 대적하는 인물로 보게 된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사회적인 지위도 중요하다. 우드로프는 처음에는 문란하고 답이 없는 사람이었다면, 지금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역랑 안에서 비겁하게 도망치지 않고 맞설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우드로프는 병원에서 예견한 수명과는 달리 더 오래 살았다. 그건 병을 호전시킬 약품을 찾은 것도 하나의 이유이지만 그가 점점 행복한 삶을 사는 인간이 되었기 때문에 그는 더 오래 살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지적인 관조를 통한 삶을 깨우쳤기 때문이다.
그는 남은 삶을 헛되이 살지않고 법적으로는 졌지만 그의 투쟁은 멈추지 않았다. 자신만의 철학을 찾아낸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찾은 철학을 실현하며 살았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의 관점에서 봤을 때 행복한 사람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과 행위들은 결국에는 행복으로 가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 행복은 다른 가치들과는 다른 완전하고 자족적인 성격을 가졌다. 즉 행복이란 최고의 좋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지적인 삶의 관조를 통해 찾을 수 있는 행복한 삶을 산다는 것은 매우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을 실천한다면 행복이 그렇게 먼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의 론 우드로프처럼 자신의 역량 안에서 행복을 찾아간다면 그처럼 자신의 삶이 영화로 만들어져서 사람들에게 많은 귀감이 될 기회가 생길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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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을 뛰어넘어 너에게 갈게
시간을 뛰어넘어 너에게 갈게
넷플릭스 <상견니>, <다크>
더 이상 SF는 그 이름과 달리 공고한 과학적 상상(이라 쓰고 현실에서 증명된 과학 이론에 기반한 여러 가지 변형물들)이 중요하지 않다. 고도로 발달한 미래의 기계 문명이든 우주 어딘가에 있는 가상 행성의 왕족이든 그냥 현실에 없는 것을 아무거나 상상해도 SF다. 실제로 2019년 휴고상(Hugo Award)은 2019년 팬픽션 플랫폼인 AO3을 '변형적 작품 단체'로 정의하며 최고 참고문헌 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그래서 <다크>나 <상견니> 같은 타임슬립 물들을 볼 때에도 세계관의 촘촘함이나 과학적 설정의 논리성 같은 것에는 크게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게다가 <상견니>는 시간대의 이동보다는 영혼이 빙의한다고 해야 맞을 것 같은 설정이다. 그래도 어쨌거나 두 작품 모두 리니어 시간대의 일정 지점들로 이동하니까 타임슬립 물이라 치고 공통된 부분을 살펴보면, 두 시리즈의 주인공들 모두 크게 두 가지 목적을 띄고 타입 슬립을 하며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간다. 하나는 자신이 사랑하는 상대를 만나기 위해서, 다른 하나는 동시에 어떤 멸망(세계나 어떤 사람의)을 막기 위해서다. 처음에는 명료한 목적을 가지고 시작한 타임슬립이지만 주인공들이 놓쳤던 세부 사항이나 다른 인물들의 행동으로 인해 시간의 흐름 속 인과 관계의 흐트러지며 상황은 주인공들이 생각한 대로 흘러가지 않게 되고 이런 형식의 갈등 양상을 주제로 회차가 전개된다.
'어느 시점으로 돌아가 어떤 요소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가 주요 얼개인 이런 장르 물든 '타임 라인 정리'나 '해석' 같은 이름으로 블로그 포스팅 혹은 트위터 타래를 만들기 좋아하는 덕후들에겐 최적의 장르다. 두 드라마의 이름으로 검색을 해 보면 내용을 순차적으로 정리해 놓은 게시물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나는 장르물에 대해 크게 조예가 깊지는 않아서 내용을 따라잡는 데에 크게 중요한 부분이 아니면 굳이 분석하며 세계관의 순차성이나 인과관계에 대해 깊이 생각하며 보지는 않았기에 그에 대해 자세하게 이야기는 못 하겠다.
전체적인 내러티브를 보자면 <다크>는 비교적 초반에 인물과 사건들이 서로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밝히고 그에 따라 인물들 각각의 서사가 전개되는 방식이다. '이 관계들이 어떻게 정리되는 걸까?'란 시즌1에서 의문을 시작하고 시즌2에서는 누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풀어 나간다. 두 주인공의 액션 아이템이 정리된 시즌3에 접어들면서, 점점 타입슬립-미션 수행-실패 이 일련의 과정이 동어 반복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상견니>는 초반에 플롯을 밝히지 않고 미스터리를 풀어 나가며 중반부부터 인물들의 배경과 서사가 서서히 밝혀지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중반부에는 불필요한 설정, 특히 남자 빌런의 출연에 할애된 시간이 지나치게 많다 느껴지는데 한국이나 중국 드라마는 편성된 에피소드 수가 많다 보니 종종 이렇게 필요 이상의 과한 설정이 많고 쓸데없는 배경 설명에 오랜 시간을 할애하는 하는 단점이 있다. 그렇지만 장편 드라마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부분들을 배제하고 본다면 두 주인공의 관계의 애절함을 보여주는 데에는 두 드라마 모두 무리가 없다.
사랑에는 장애물이 필요하다. 얄궂지만 순조롭기만 한 관계는 지루함이나 의심을 사게 된다.
요즘 들어 드라마들을 보며 느끼는 것인데, 생각해 보면 옛날에는(옛날이라 봤자 한 10년 정도 전이지만) 비현실적 세계관 설정이 없이 등장인물들의 관계성이 그 자체로 엄청나게 자극적이었다. <파리의 연인>이나 <내 이름은 김삼순> 드라마들을 되돌아보면 여자 주인공의 신데렐라 서사를 포함해 지금 다시 나온다면 사람들에게 절대 군말 없이 받아들여질 수 없는 설정이 많다. 2020년에는 아무리 잘생긴 남자라 하더라도 무례하고 돈밖에 모르는 남자에게 따뜻한 마음을 일깨워 주는 가난하지만 밝은 여자 주인공에게 몰입하고 싶은 여성은 별로 없을 것이다.
계급을 제외하고 사랑에 눈이 먼 두 젊은이를 떼놓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장벽은 '죽음'이다. 사실 이것도 옛날 드라마에서는 많이 쓰인 소재긴 하다. 남자 주인공이나 여자 주인공이 백혈병이나 희귀 암 같은 불치병에 걸려 죽게 된 내용의 드라마와 영화를, 95년 이후로만 나열해도 아마 몇십 개가 나올 것이다. 당대의 센세이셔널한 인기 가수였던 조성모를 필두로 한 발라드 가수들의 뮤직 비디오에는 꼭 누군가가 총에 맞거나 차에 치이거나 하는 이유로 죽고 슬퍼하는 연인의 눈물이 클로즈업되곤 하는 레퍼토리도 있었고 말이다.
<다크>와 <상견니>에서도 결국 죽음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타임슬립을 하는 것도 있는데, 연인의 상실에 대처하는 전제 자체가 이런 과거의 신파극들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리움에 못 이겨 연인을 찾아간다는 식의 신파가 아니라, 알고 보니 연인이 서로 이어질 수 없었던 이유가 어떤 타임라인 혹은 인과관계의 균열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그 균열을 바로 잡으면 연인을 되찾을 수 있다는 식의 문제 해결적 플롯이다.
하지만 갈등이 고조되고 관계의 애절함이 극대화되려면 시공간을 넘나드는 두 사람이 쉽게 만나선 안 된다. 엄청나게 많은 엇갈림과 자신들이 초래한 서사의 균열을 겪어내야만 한다. 앞서 말한 분량을 채워내야 하는 장편 시리즈들의 고충을 현실적으로 이해하고 넘어간다면, 시청자들도 과연 두 남녀 주인공이 언제쯤 이어지는지, 이어지기는 이어지는 것인지 애가 타는 마음으로 지켜보게 된다. 특히 상견니는 남국의 정취가 있는 타이난을 배경으로 교복을 입은 등장인물들이 울고 웃는 모습을 보여주며 동아시아 시청자들의 '학교에서 보낸 여름'에 대한 향수를 자극한다.
이제는 관계 자체가 주는 자극보다는 어떤 설정이나 세계관에서 오는 물리적 장벽들이 관계를 어렵게 만드는 플롯이 더 쉽게 시청자들의 흥미를 끌게 됐다. 한 마디로 '너의 환경에도 불구하고 너를 사랑해'보다 '네가 다른 세계에 존재해도 너를 사랑해'가 훨씬 더 로맨틱하게 느껴지는 시대가 된 것이다. 예전에는 상상력을 전시하기 위해 쓰이던 SF 세계관들이 이제는 현실의 관념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들이 됐다. 무엇이 됐든 뛰어넘기 어려운 장벽만이 로맨스의 농도를 짙게 하는 법이다.
* 본 콘텐츠는 브런치 Good night and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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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담컨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장르
감독, 제작진, 배우, 장르, 줄거리 그 무엇도 알지 못한 채로 보기를 추천하기에 아무 정보도 기입하지 않겠다.
아, 러닝타임 정돈 괜찮겠다. 139분.
대체 뭐라고 표현할까.
마땅한 단어를 떠올리던 무렵, 박찬욱 감독의 한 줄 평을 발견했다.
야단법석 왁자지껄 아수라장 대환장파티에서 막 빠져나왔는데 거울로 보니 내 눈에 눈물이.
그래, 이거다. 영화의 첫인상은 '정신없다'였고, 언젠가부터 '감독의 정체가 뭘까' 싶었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땐 눈물 콧물 범벅된 마스크에 불쾌감을 느끼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난생처음 보는 종류의 영화였으니까.
컷 전환이 쉼 없이 빠른데도 러닝 타임은 2시간을 훌쩍 넘으니 실제보다 더 길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니 기깔나는 상영관에서 보는 걸 추천한다. 또렷한 색상 구현과 입체적인 사운드를 선보이는 돌비 시네마라던가.
메가박스 코엑스. 영화 시간보다 일찍 도착해서 아래로 늘어진 계단 한쪽에 털썩 앉았다. 전광판은 때마침 <에에원>의 짤막한 예고편을 무한 반복 중이었다. 사전 정보 없이 보고 싶어서 일부러 시선을 두지 않았는데, 소리는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I'll save you"였나. 뭘 구하겠다는 말이 반복해서 들렸다.
뭐지. 세상을 구하는 전사 이야기인가. 히어로 영화인가. 저 사람이 주인공인가 보다. 대충 예감하며, 오래 앉아야 하는 걸 대비해 화장실에 들렸다. 그리고 아쿠아리움 같은 돌비 시네마 입구에 들어서서 공연장 같은 좌석에 앉았고. 돌비 시네마는 이 시스템이 얼마나 대단한지 온몸으로 체감하게 한다. 애피타이저로 입맛을 돋우듯 영화를 보기 전 오감을 일깨운다. 두근두근. 괜한 기대감에 사로잡히던 찰나, 영화가 시작되었다.
그땐 몰랐다. 화장실에서 휴지를 뜯어왔어야 했단 걸.
*아래로는 스포가 이어집니다.
거울.
그게 영화의 시작이었다. 컷 하나인데 길이가 꽤 길었다. 거울 속에 비친 얼굴들은 웃고 있었던가. 무언가 말하는 것도 같았다. 천천히 거울 속으로 들어가듯 카메라가 가까워지고, 거울 안 세계로 화면 가득 들어찼다. 거울을 마주한 나와 거울 속 나. 하나이지만 둘이고, 둘이지만 하나다. 지금 생각하면 '우린 멀티버스 세계관입니다'를 대놓고 보여준 셈이다.
그러나 관람 중에 멀티버스를 생각하지 못했던 건 이어지는 장면이 워낙 정신없어서다. 책상 위를 한가득 메운 하얀 영수증들. 다소 꾸깃꾸깃한 영수증들은 시끄러운 소리를 냈고, 그걸 정리하는 건지 신경질을 내는 건지 모를 동작으로 주인공 '에블린'이 자신의 남편과 뭐라 뭐라 대화를 이어갔다. 국수 좀 봐달라, 아버지 생신인데, 세금 내야 하고, 조이가 여자 친구를, 영수증은 다, 세탁소가, 종잡을 수 없는 말들이 영어와 중국어를 마구 오가며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보는 이도 정신없는데 당사자들은 얼마나 더 정신이 없겠는가. 에블린은 남편 '웨이먼드'에게 이거 해라, 저거 해라 말하지만, 정작 웨이먼드는 어느 하나도 제대로 못한다. 밝고 쾌활한 목소리로 날카롭고 까칠한 에블린의 비위를 맞추는 듯했다. 여기에 그들의 딸, '조이'가 여자 친구 '베키'를 데려온다. 조이도, 베키도 환영받지 못한다. 특히 에블린에게서.
정신없이 얽히던 흐름이 뚝, 끊기던 때가 있었으니. 에블린의 아버지가 집에서 세탁소로 내려온 걸 발견하고서였다. 중국어에 서툰 조이가 할아버지에게 베키를 설명한 단어를 찾고 있을 때, 에블린이 말을 빼앗는다. 조이의 친한 친구라고. 그런 식이었다. 에블린은 조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먹고사는 데 급급해서라지만, 명백한 거부 의사였다.
에블린, 조이, 웨이먼드, 이들 가족은 아무도 행복하지 않은 상태에 놓였다. 웨이먼드는 이혼 서류를 내밀려고 했으나 이마저도 바쁜 상황에 내쳐졌고, 막상 목숨이 오가는 급급한 상황에 치닫고서야 에블린이 그 서류를 펼쳤다. 혼돈에 또 다른 혼돈인 거다.
세무사에게 세탁소 회계감사를 받는 게 무슨 목숨까지 걸 일이 되었을까? 바로 웨이먼드가 '알파' 세계의 웨이먼드로 바뀌는, 멀티버스 세계관이 열리고부터다. '조부 투파키'라는 거대 악이 세계를 뒤흔드는 중인데 에블린이 유일하게 대적할 수 있다는 거다. 당연히, 에블린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웨이먼드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 왔던, 꿈과 사랑이 넘치던 20대였으면 모를까. 지금은 쳇바퀴 같은 삶에 허덕대기 바쁜 시궁창 인생인데. 무슨 능력이 있다고.
그런데 이 말을 다르게 하면, 지금의 에블린이 택하지 않은 삶을 택한 에블린이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거다. 능력 넘치는 버전의 에블린 말이다. 그렇다. 어딘가엔 웨이먼드를 따라가지 않고, 늦은 밤 위험한 상황에 처했다가 쿵후 선생님의 도움으로 위기를 벗어나고, 쿵후를 마스터해서 세계적인 액션 배우가 된, 돈/명예/커리어 어느 하나 놓치지 않은 에블린이 있다.
자, 이제 괴팍한 버전의 세무사 '디어드리'에게 맞설 쿵후 전문 배우 에블린이 필요하다.
이쯤 되어선 멀티버스의 개념과 스토리의 뼈대를 다 설명해서인가. 온갖 장르가 마구잡이로 뒤섞인다. 액션, 호러, 코미디, 시트콤, 블랙코미디, 공포, 드라마, 다큐멘터리, 스릴러, 로맨스, 애니메이션,... 장르의 멀티버스화라고나 할까.
멀티버스 세계관을 보여주느라 교차하는 장면이 많지만, 전체적인 톤앤매너는 비슷했다. 코미디. 다만 한없이 가볍고 허술한데 이상하게 매력적인 B급 영화인 것 같다가 진중하고 철학적인 상황으로 들어섰으니. 바로 돌들의 대화 장면이다.
물론 앞서 말했듯 전체 분위기는 코미디인지라 갑작스러운 전환에 영화관 전체가 웃음바다가 되었지만.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조부 투파키, 그러니까 조이의 멀티버스 중 한 모습이자 어찌 보면 본질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가 평온을 느끼는 건 자신이 돌인 세계가 유일하다. 움직이지도, 말하지도, 누구에게 명령을 내리지도, 싸우지도 않고 그저 가만히 있는 때. 그러나 외로움은 느꼈는데, 자신처럼 모든 세계를 자유로이 넘나들게 된 에블린과 함께라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에블린이 동조했을까? 일상에 전전긍긍하던 에블린이라면 그랬을 거다. 이거야 말로 자신이 꿈꾸던 거라며.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 그런데 이때의 에블린은 이전과 다르다. 특별한 능력치를 지닌 에블린과 연결하여 뭐든 될 수 있어서, 세상을 구할 히어로라서 그런 게 아니라, 용서했기 때문이다. 실패로 점철된 자기 자신을.
It was beautiful.
에블린이 웨이먼드를 택하지 않은 덕에 유명한 배우가 된 세상을 경험한 후, 현재로 돌아와 남편 웨이먼드에게 했던 말이다. 꿈꾸는 표정 때문에 웃음이 절로 났지만, 마냥 재밌게 넘길 장면은 아니었다.
수천 번 생각했을 거다. 웨이먼드 대신 다른 걸 택했다면 자신의 삶이 이토록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았을 거라고. 매번 헤실대면서 긍정적으로만 굴지, 실속 없다고. 그 때문에 지금 이 모양 이 꼴이라고. 남 탓을 하는 건 신기하게도 자기 자신을 탓하는 것이다. 결국 모든 선택을 자신이 했기 때문이다.
실패하는 선택지만 쏙쏙 골라온 스스로가 얼마나 불쌍하고 멍청하게 느껴지겠는가. 비관의 늪에 빠지기 딱 적절한 상태로, 에블린은 살아왔다. 웨이먼드가 끝을 고한 것도 애정이 닳았다기보다는 괴로움 때문이었을 거다. 그와 함께 행복한 미래를 약속했는데, 자신은 에블린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고 말았으니까. 각자도생이 최선이라고 여겼을 거다.
현재 남편인 웨이먼드가 아니라 알파 웨이먼드를 더 의지하고 따르던 에블린을 생각하면 그럴 만하다. 싸움에 능하고, 자신에게 나아갈 방향과 방법을 제시하고, 단호하게 말할 줄 아는 웨이먼드를 훨씬 마음에 들어 했으니까. 배우의 삶을 사는 다른 에블린의 세상에 평생 머물고 싶어 했던 것처럼.
그러나 에블린이 알파 행성에서 온 이들과 완전히 대치 상태에 놓였을 때, 에블린도 조부 투파키처럼 파괴의 기로에 서려고 할 때, 에블린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하다. 남편인 웨이먼드의 절박한 외침으로 말이다. 그가 말했다. 우리 모두 솔직해지자고. 그 이전인가 이후였나. 이 말도 덧붙였다. 자신의 바보 같은 친절함은 생존 전략이라고. 우린 저마다의 방식으로 애쓰며 살아가고 있다고.
싸움을 좋아하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그런데 왜 지속적으로 싸우는가. 시작은 이유가 있었을 거다. 그런데 싸움이란 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목적이 흐릿해진다. 모르겠는 순간에 놓이는 거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지? 그러나 솔직하게 이 마음을 드러내는 순간 약점이 될 것만 같다. 싸움은 자신의 옳음을 과시하려는 행위이니까, 강해야 할 것 같은 거다. 모든 생명체는 위협을 느낄 때 그렇다. 검붉은 속 날개를 펼치는 곤충이나 독을 뿜는 전갈이나 뱀처럼.
인간은 주로 분노를 과시한다. 잔뜩 찌푸린 미간에 자극적인 욕설을 퍼붓고, 상대가 굴복할 때까지 극한으로 치닫는 거다. 제가 지닌 물리적 힘과 능력도 내세우며.
그런데 그깟 따사로운 마음이라니.
분노는 강하지만, 따스함은 유약하다. 유약하고도 솔직하다. 아프기 싫고, 누군가를 아프게 하기도 싫고,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서 무섭고, 나만 그만하고 싶은 것 같아서 더 무섭다는 걸 대놓고 내보인다. 전쟁터 한복판에 누워서 두 손 두 발 다 든 상태.
'적'이라고 상정한 존재들은 무시무시해 보인다. 하지만 집단이 아닌 각 개인으로 보다 보면, 한낱 인간일 뿐이다. 그들은 원하는 게 있는데 얻다 말하기도 뭣하고, 말한다고 해결이 되지도 않고, 혼자 앓고만 있는 거다. 에블린은 공격하는 대신 그들의 갈망을 들여다본다. 말 못 할 성적 취향이 있고, 신경 통증 때문에 고생 중이고, 자신의 단짝을 애절하게 찾는 각각의 사람.
솔직한 마음을 받아들이고 나니 그 누구도 공격할 여력이 없다. 발라당 바닥에 누워서 행복에 겨울뿐.
영화에서 줄곧 던진 메시지가 이랬다. 죽어라 싸우고 요란법석 피워봤자 한낱 우주 먼지인 인간들. 지구도 우주에 있는 크고 작은 행성들 중에 하나이다. 지구가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면, 인간이 전부라는 생각은 더더욱 말이 안 된다. 무수하디 무수한 존재 중에 하나인 우리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닌 존재다.
Nothing Matters.
별 거 아니기에 부질없다는 생각으로 삶을 내던지려던 인물, 혼돈 그 자체였던 조부 투파키였다.
그가 만든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암흑, 블랙홀. 영화에서는 이걸 까만 토핑이 박힌 베이글로 유쾌하게 표현하긴 했다만. 조부 투파키는 세상을 휩쓸 생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파괴할 수단으로 베이글을 만들었다. 모든 것을 마음껏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마음껏 될 수 있기에 되레 아무것도 의미가 없던 거다.
가운데가 뻥 뚫린 베이글의 모양새가 그의 표상이었는지도 모른다. 겉은 사악함의 결정체 같아서 모두에게 해를 끼칠 것 같지만, 실은 아무것도 없다. 비어있는 걸 감추기 위해 겉모습을 더더욱 화려하고 시끌벅적하게 꾸며냈는지도 모른다.
다 갖춘 그에게 필요한 건, 정말이지 인간다운 결론이긴 한데, '의미'이다.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고 해서 아무 의미가 없는 건 아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둘째 치고, 나 하나만 놓고 봐도 그렇다. 나는 나에게 의미 있는 존재다.
이 사실을 보여주는 데에 멀티버스 세계관만큼 적합한 게 있나. 에블린의 모든 선택이 무수히 많은 세상의 에블린을 만들었다. 각각의 에블린은 살아가면서 자신의 환경, 취향, 욕망을 따라 새로운 일을 겪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길을, 새로운 삶을 만들어간다. 아무것도 아닌 그토록 작은 먼지 하나가 이리도 다양한 굴곡을 헤쳐나갔단 말이다.
그러니 살면서 문득, 혹은 지금 당장 자신이 의미 없게 느껴진다면 여태까지의 삶을 돌이켜보자. 셀 수도 없이 많은 선택들을 말이다.
정말, 나 자신이 나에게 아무 의미 없었나?
세무사 디어드리와 에블린은 알파 세계관에서도, 현재 세계관에서도 앙숙이다. 디어드리는 이미 에블린을 문제 투성이라고 여기고, 그런 무지막지한 모습을 에블린은 융통성 없다고 느낀다. 그런데 손이 핫도그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둘은 애틋하고 사랑이 넘치는 관계다. 이런 대비는 클리셰 같은 걸까? 잘 몰라서 멋대로 판단하는 것이지, 알고 보면 나쁜 사람도 착한 사람이라고. 서로 사랑하기 공익 캠페인 같은 휴머니즘일까.
영화의 끝자락. 정해진 기한(당일 오후 6시) 내에 영수증을 다시 정리하라는 디어드리의 마지막 경고는 당연히, 산전수전 다 겪은 에블린이 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이때 에블린은 방망이를 들고 주저 없이 나아가 유리창을 시원하게 깨부순다. 답이 없으니 완전히 미쳐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에블린은 비로소 자기 자신을 드러냈다. 세탁기와 건조기로 그득한 이 공간이 얼마나 지긋지긋할까. 다 엎고 싶었을 텐데 그걸 꾹 참고 누르고 견디기만을 반복했다. 모두가 곪아 터지면서까지. 무모하고도 무책임한 행동. 그거야말로 에블린에게 가장 필요했다. 한 번쯤은 나 몰라라 하고 도망갔어야 했다. 못해먹겠다고.
에블린이 자신의 생존전략을 썼듯 웨이먼드도 자신의 전략을 펼쳤다. 그리고 디어드리는 일주일로 기한을 늘린다. 정말 마지막이라며. 대체 무슨 얘기를 했기에. 에블린은 궁금할 수밖에 없다. 웨이먼드가 한 얘기는 단순한 사실이었다. 자신이 에블린에게 이혼 서류를 내밀었다고. 디어드리도 에블린에게 솔직하게 말한다. 자신도 그 느낌이 뭔지 안다고. 오묘한 동질감과 유대감이 생긴 둘.
마치 다른 핫도그 세계 속 에블린과 디어드리의 관계가 여기까지 이어진 느낌이었다. 에블린들은 전혀 다른 세상에서 전혀 다른 삶을 사는 게 아닌 것 같다. 라쿤에게 요리를 배운 '라따뚜기' 요리사의 이야기로 알게 되었듯, 우리는 혼자가 아니니까. '나'만 해도 내가 무수히 많아서. 지금의 나는 실패만 해왔을지언정 그게 전부가 아닌 것이다.
이 엄청난 교훈과 깨달음을 싣고 영화는 마지막 장면으로 향한다. 예전처럼 세무조사를 받으러 온 상황. 하지만 모든 것이 달라졌다. 함께 온 사람들과 그들 간의 관계, 디어드리와의 관계, 태도, 그 모든 것이. 이미지로 충분히 보여줄 수 있지만, 영화는 딱 한 마디로 전부를 보여준다.
죄송해요. 못 들었어요.
체면 차리느라 속마음 숨기며 애먼 일 벌이지 말고, 솔직 담백하게. 평가받을까 봐 움츠러들지 말고, 자신의 결핍 앞에서 당당히. 우스꽝스럽고, 멋지고, 재밌고, 지루하고, 진지하고, 덤벙대고, 약속을 잘 지키고, 늦고, 웃고, 우는 온갖 모습의 나 자신에게, BE KIND.
끝으로 왓챠피디아에도 남긴 감상을 이곳에 한 번 더 공유해본다.
Nothing matters.
So please, be kind to EVERYTHING EVERYWHERE.
Then you realize the whole world ALL AT ONCE.
우리는 모두 아무것도 아닌 존재랍니다.
그러니 온갖 모습을 지닌 자신을 좀 사랑스럽게 바라봐 주세요.
나 자신의 의미가 완전히 새롭게 보일 테니까요.
-
- 망각과 기억 사이에서 갈등하는 방관자
이 글은 영화 [리멤버]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글을 퍼가거나 인용 시 반드시 출처를 표시해주세요.
포르셰와 권총 사이;삶과 죽음, 그리고 두 가지의 꿈
사진출처:다음 영화
[리멤버]에서는 정 반대의 개념들이 많이 등장한다. 삶과 죽음이 그러하고, 기억과 망각이 그러하며, 친일파의 부(Richness)와 그렇지 않은 자 들의 궁핍도 그러하다. 이런 개념들은 그저 영화에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몇 번이고 부딪치고 충돌하며 영화에서 갈등을 만들어낸다.
이 많고 많은 극단의 대립을 영화는 크게 포르셰(인규)와 권총(필주)의 모습을 빌어 설명한다.
붉은 포르셰는 누구나 가질 수 없다. 특히 인규(남주혁)에겐 허황되고 이뤄질 수 없는 꿈에 가깝지만. 행여 실수로라도(?) 포르셰를 사게 될지도 모르는 그 희소에 가까운 희망을 위해서라면 반드시 영위해야 하는 삶의 결정체가 스포츠카이기도 하다.
이는 필주(이성민)에게도 어느 정도 비슷하다.
포르셰는 포기하고 싶지만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뛰고 있는 심장처럼 붉었고. 또한 누가 봐도 허무맹랑하지만 자신은 반드시 성공시켜야만 하는 목표이기도 했다. 그랬기에 필주는 자신의 지리멸렬한 삶을 그저 놓아버릴 수 없었다.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잊고 싶었지만. 아직 그러기엔 너무 일렀다.
그에 반해 권총은 필주에게는 죽음이었고. 망각하려는 것이 아닌 망각의 과정 속에서도 잊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목표에 가까웠다. 잊음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삶에서도 몇십 년 묵은 응어리는 자신의 뇌리에서 잊힐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인규는 포르셰를 보며 열광한다. 그러나 필주에게 삶은 그저 자신의 목표를 위한 수단일 뿐이다. 필주에겐 이런 총이 생의 후반부를 바쳐 이루고 싶은 꿈이었지만. 인규에게는 그저 위험해 보이는 낡은 목표에 불과했다.
번쩍번쩍한 삶은 자꾸 죽음과 과거의 기억을 잊으라며 빛나는 포르셰의 형태로 필주를 유혹하지만. 죽음마저도 초월한 남자의 의지는 결국 작동이 되는지조차 의심스러운 고대 유물 같은 총이 몇 번에 걸쳐 방아쇠를 당기게 만들었다.
방관자에게 찾아오는 대물림의 비극;지금의 우리도 겪고 있다.
사진출처:다음 영화
필규는 점점 인규의 삶을 무시할 수 없었다.
인규의 삶은 (친일파로 대변되는) 악이 근절되지 않거나 불합리한 일을 좌시(외면) 했을 경우 역사는 반복되며, 그 속에서 아무 영문도 모른 채 대를 이어 고통받는 사람이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인규는 소외되었고 약했으며, 선택의 여지는 열심히 살 수록 줄어들고 있는 것처럼 느꼈을 것이다.
처음엔 안심시키는 말처럼 내뱉었던 문장이었다. 인규 너에게는 아무 피해 없게 하겠다는 말은.
그러나 인규에게 같은, 혹은 비슷한 뉘앙스의 문장을 몇 번이고 내뱉는 동안 필규는 점점 진심을 실어야 했다.
필주는 더 이상 방관자로서의 삶을 살지 않기로 마음먹었고. 인규가 그런 삶을 조금이라도 짧게 살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소명을 반드시 이뤄야 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사적이라 할 수 있는 복수가 인규의 삶을 하루아침에 바꿔놓을 수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악의 고리 하나쯤은 끊어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하나가 끊어지고 나면, 힘의 불균형이 이뤄져 늦더라도 결국은 완전히 이런 고통이나 악의 세습도 이뤄지지 않는 날이 올 것이라 믿었을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2022년 현재에도, 슬슬 끊어지기 시작하는 악연의 고리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노동자의 피를 흰 천으로 가린다 하여 그 사건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무성의하게 진행된 보상 아닌 보상은 장례식장에 팥으로 만든 음식을 들이게 만들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머리를 조아린다 하여 사과했으니 이제 괜찮을 것이라며 생각하고 넘어갈 사건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방관자의 자세로 뒷짐을 진 채 이러다 사그라든다는 태도를 취한다면, 다음번에 기계에 빨려 들어가게 될 대상은 내가 될 것이다. 필주 또한 방관자가 견뎠어야 할 마음의 무게를 그렇게 인생을 바쳐 갚았다.
방관자가 치러야 할 대가는 그렇게도 길고 무거웠다.
결과와 과정의 딜레마;영화를 보며 속이 시원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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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 [바스터즈]에서는 가상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나치 독일을 말 그대로 불살라버리는 이야기를 그린다. 이런 가상의 처벌은 영화를 보는 거의 모든 사람들의 속을 시원하게 해 주는 카타르시스를 불러왔다.
그러나 리멤버의 어조는 조금 더 무겁다. 과정이 중요한지. 아니면 결과로만 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저울에 떡 하니 올린다. 그 어떤 곳으로 저울이 기울어진다 해도 두 덩어리의 생각이 마음 위에 올려진 것은 변함이 없기에 영화를 보며 마음이 조금씩 무거워진다.
문제는 영화가 메시지를 설명하는 방법이 불친절하다는 데 있다.
인물에 대한 그 어떤 설명도 하지 않으며, 모든 설정을 영화를 위해 이용하고 있다. 그러니 인규가 멋들어지게 포르셰를 몰아붙인다 해도 [베이비 드라이버]처럼 박진감 넘치지 않으며.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병에 걸린 필주는 [메멘토]나 [살인자의 기억법]처럼 기억의 왜곡 한 번 없이 스스로의 임무가 완성될 때까지 그 어떤 것도 잊지 않는다.
그 결과, 직설적이다 싶을 정도로 명확한 메시지는 비겁하고 무책임한 전달 방식 때문에 너무도 빨리 관객의 마음속에 자리 잡아 버리고. 그 이후의 시간들은 그저 자신의 메시지를 재확인하는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영화는 최악의 케이스는 피했다. 바로 메시지도, 전달 방식도 최악인 경우 말이다.
책임을 지라는 것은 데이터 센터에 일어난 화재에 통감하며 사퇴하라는 뜻이 아니며. 사과의 형태로 만원도 되지 않는 포인트를 지급하는데 끝나는 것이 아닐 텐데도. 한국을 거의 독점하고 있던 귀여운 라이언을 필두로 한 이 회사는 메시지도, 방식도 최악인 형태의 사과를 했다. 위안부에게 사죄하라는 요구에 그 당시의 시세로 몇십 엔을 지불한 일본 정부와 다를 게 없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최악의 실수를 저지른 담당자들은, 다음 세대의 피해자에 해당하는 인규의 대사에서 배워야 할 것이다. 좋지 않은 결과에는 사퇴(필주의 경우는 죽음)가 아닌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시시하고 치사하게 등을 보이며 그 사태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이 영화처럼 메시지라도 마음에 와닿게 했었어야 했다.
마치면서
매번 말하지만.
나는 이성민 배우가 “뜨기”만을 죽어라 바란 사람 중 하나다. 분명 작은 역할이었던 그가, 점점 지변을 넓혀가며 변두리에서 중앙에 가까운 자리에 서는 순간을. 내 인생의 일부분을 할애하며 기다려왔고, 그렇게 맞이한 좀 더 밝은 곳에 서 있는 배우의 모습에 뿌듯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가운데 토막의 자리는 여러 이름의 책임감도 함께 요하는 자리였다. 주연으로 나선 영화들에서 거뒀던 성적들은 그다지 좋지 않았고. 나는 행여나 그가 밀려날까 봐 조마조마했다.
비록 배역이고 그 또한 연기의 일부였겠지만. 이성민 배우는 그동안의 마음고생을 80대 노인이 되는 동안 거쳐야 했을 시간과 고난만큼 잘 씹어 삼켰고, 그 결과 영화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연기 내공의 변주를 보여준다. 영화의 후반부에서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내뱉는 말 한마디에도 눈물을 쏟게 만들 만큼.
물론 이번 영화가 훌륭한 영화냐라고 묻는다면. 애석하게도 좋고 나쁨의 경계에 있는 외나무다리에서 몇 번이고 양쪽으로 번갈아가며 빠질 영화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럼에도 그의 연기는 이 불친절하고 비겁한 방법으로 메시지를 보여주는 영화를 멱살 잡고 끌고 간다. 그 모습은 때론 애처롭지만, 자신의 어깨에 놓인 짐의 무게를 완벽히 이해한 자의 책임감을 비추기도 한다.
완벽하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영화의 말미에서 안도와 아주 조금의 행복이 섞인 얼굴로 입가에 미소를 흘리던 필주에게서 무언가를 이제 승화시킨 듯 한 이성민 배우의 홀가분함도 함께 보이는 듯했다.
[이 글의 TMI]
최근 참 많은 일이 있었다.
특히 주말에 있었던 이태원 참사는 아픈 마음과 함께 그런 사태에서 드러난 인간 양상에 대한 분노로 인해 정말 힘들었다.
이 사건 속에 존재한 방관자들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자신이 치러야 할 대가는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으며. 기대했던 모습보다 훨씬 더 처참할 것이라는 것을.
상처받고 힘든 모든 분들에게 평안이 조금씩이라도 빨리 오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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