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er2024-04-14 19:11:27
일을 향한 외사랑
영화 <거미집> 리뷰
재능은 일상적으로는 천부적이고 타고나는 것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의미를 들여다보면 의외로 노력 또한 재능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사전에서는 '어떤 일을 하는 데 필요한 재주와 능력. 개인이 타고난 능력과 더불어 훈련된 능력'을 아울러 재능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니 타고난 재주만으로는 재능을 묘사하기에 부족하다. 어떤 노력이 뒷받침되고 있는지도 추가로 설명해야 한다. 타고난 재주가 전부가 아니니 재능에는 정도가 없다. 일을 잘하느냐 못하느냐는 속도의 문제가 된다. 설정한 목표를 얼마나 빠르게 도달할 수 있느냐의 문제다. 타고난 재주와 성실한 노력은 목표를 등반하는 두 가지 도구다. 그렇지만 대부분 노력은 줄이고 타고난 재주로 등반하고 싶어 하기에 골치가 아프기 시작한다. 재주는 무의식적으로 작동하고 노력은 의식적인 행동의 결과니까.
재주이건 노력이건 중요한 건 믿음이다. 믿음이 추진력이 된다. 목표로 질주해 나가는 힘은 믿음이다. 특별히 수치화할 수는 없어도 자신을 믿는 힘이 필요하다. 운동처럼 눈에 보이게끔 드러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노력한 경과가 드러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힘을 쏟아야 하는 재주와 노력의 총량을 가늠해 보면서 시간을 가늠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얼마나 올라갈 수 있을지를 대략적으로 고민하며 선택을 내리게 된다. 재능을 포기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재능을 포기한다는 건 그 일을 버리는 일이다. 미지의 시도를 감내하기란 무척이나 어렵다.

거미집은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극 중에서 만드는 영화의 이름 또한 '거미집'이다. 엄청난 데뷔작을 촬영하고 나서 그저 그런 영화만 만들어오던 감독 김열은 촬영 막바지에 이른 어느 날, 꿈에서 현재 촬영하는 작품을 획기적으로 바꿀 수 있는 아이디어를 얻는다. 크게 바꿀 필요도 없다. 결말만 조금 바꾸면 3류 영화가 명작이 될 수 있다. 감독은 바뀐 결말로 자신이 다시금 올라설 수 있음을 믿는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영화의 촬영은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드라마 촬영을 위해 스튜디오를 비워야 하다 보니 시간이 없다. 가뜩이나 상황을 더 어렵게 만드는 건 검열이다. 영화의 내용을 검열받던 시절이다 보니 바꾼 결말 또한 허가를 받아야 촬영할 수 있다.

감독은 여주인공 캐릭터를 바꿔서 순종적인 인물에서 주체적인 인물상으로 새롭게 그려내려고 한다. 비련의 여주인공이 아닌 신여성으로. 당대에 보기 어려운 그러한 새로운 인물로 묘사하려고 한다. 물론, 캐릭터를 바꾸는데 결말만 살짝 바꾼다고 될 일은 아니다. 당연히 인물의 성격이 설득력을 갖춰야 하니 극의 전개 과정을 꽤 많이 바꿔야 했다. 정작 배우들은 바뀐 내용이나 바뀌기 전이나 별다른 차이점을 느끼지 못하는 데에도 말이다. 감독은 자신의 커리어를 반전시킬 수 있는 한 번의 거대한 선택을 꿈꾸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무척이나 회의적이다. 평론가나 함께 일하는 배우들 모두 그랬다. 캐릭터를 바꾼다고 해서 근간인 치정극에서 뭐가 크게 달라지겠는가.
영화는 허가를 받아야 한다. 영화 안에서는 감독이 OK 사인을 내리기 전에는 무엇도 넘어갈 수 없다. 영화 밖에서는 감독이 사인을 기다려야 한다. 검열 속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건 허가받지 않은 것들 뿐이다. 정해진 틀 안에서 최대한 융통성을 발휘해야 한다. 처지가 역전되는 상황이 다양하게 변주되면서 나오는 게 흥미로웠다. 문공부 직원, 영화 제작사 대표, 주연 배우가 번갈아가면서 권한을 쥐고 흔든다. 흔들리는 건 감독 또한 마찬가지다. 작품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아슬아슬한 위치였다. 배우들의 불신을 잠재우면서 제작사, 문공부의 검열과 제재를 피할 방도를 구해야 했다. 이 두 가지 시선을 정리해야 했다. 한쪽은 같은 방향을 바라보게끔, 다른 한쪽은 시선을 돌려 다른 쪽을 보게끔 말이다.

누군가 내가 가진 능력을 낱낱이 해부해서 까발릴 것 같다는 상상. 쉼 없이 달리다가 이따금 일을 한다는 사실이 낯선 감각으로 느껴질 때 그런 생각을 한다. 무의식으로 내려앉은 과정이 이따금 생소하게 다가오는 순간들. 의식적으로 숨 쉬는 것처럼 말이다. 감독이 처한 위치 또한 이런 형국이지 않았을까? 자신감으로만 밀어붙이기엔 역부족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만들어져야 하니까. 갈등 속에서 영화를 만드는 이들은 각자의 재능으로 분주하다. 어그러지려면 수도 없이 많은 이유로 중단될 수 있는 일이겠지만 어떻게든 방법을 떠올려서 결과물을 향해 다가간다.
믿음을 힘으로 쓰면 일종의 광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동일하다. 영화 전반에 짙게 깔려있는 쌉싸름한 유머 코드는 일의 형태를 다시금 고민해 보게 만든다.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가짜 일과 진짜 일을 구분해보기도 하고, 일의 경지를 추동하는 수고로움을 짚어보게 되기도 한다. 치정극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무엇일까? 남녀 간의 사랑에서 성별 구분을 지우고, 존재와 무존재의 구분을 지우는 식으로 나아가면 궁극적으로는 무엇이 남을까? 자신까지 삼켜 먹어버릴지도 모른다. 일을 향한 열의 또한 사랑의 메커니즘으로 작동한다. 일을 처절하기 그지없는 외사랑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흥미로운 눈으로 쳐다보게끔 만든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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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구에서 외치는 드니 빌뇌브의 운명론!
3년 전만 해도 듄친자는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듄친자의 운명을 거부했다. <듄>만으로는 뭔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듄: 파트2>를 본 이후 이젠 듄친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헤어 나올 수 없는 모래 늪에 두 다리가 빠져 탈출하지 못할지언정 그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 이 고전 원작을 자신만의 운명 사슬로 엮어낸 드니 빌뇌브의 연출력을 보아하니 더 이상 탈출구는 없어 보였다. 어쩌면 이 수순은 그의 모든 계획이었으리니~ 폴을 위해, 그와 함께 대서사시를 만드는 이들을 위해, 그리고 이 모든 걸 좌지우지하는 드니 빌니브를 위해 외쳐본다. 리산 알 가입!
| 운명을 거스를 수 없는 자, 인간이니!
폴(티모시 살라메)은 살아남았다. 황제 샤담 4세(크리스토퍼 월켄)의 모략으로 아트레이데스 가문이 없어졌지만, 가문 유일의 후계자인 그는 어머니인 레이디 제시카(레베카 퍼거슨)와 함께 사막 부족인 프레멘 덕분에 목숨을 부지한다.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는 폴과 레이디 제시카는 각자 새로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각각 반란군, 부족 대모가 된다. 레이디 제시카는 더 나아가 폴을 프레멘이 그토록 바라던 메시아 ‘퀴사츠 해더락’으로 만들려 한다. 폴은 그 운명을 거스르려 하고, 동료인 챠니(젠데이아 콜먼)와 사랑을 키워 가려 한다. 한편, 반란군의 기세가 점점 높아지는 것을 우려한 황제는 하코넨 가문의 암살자 페이드 로타(오스틴 버틀러)를 아라키스로 보낸다.
(모두가 인정하지 않겠지만) 드니 빌뇌브 영화의 단골 주제는 ‘운명’이다. 극 중 인물들은 벗어날 수 없는 운명 앞에 놓이고, 그 선택을 해야 하는 입장에 놓인다. <그을린 사랑>의 쌍둥이 남매는 태생의 비밀, <컨택트>의 루이스(에이미 아담스)는 미래의 모습, <블레이드 러너 2049>의 K(라이언 고슬링) 또한 정체성의 비밀을 확인하고 자신만의 선택을 한다. 마치 언제 죽을지 모르는 수족관 속 활어처럼, 이들은 이미 정해진 운명을 목도하고, 그제야 자신이 처한 처지를 확인한다. 그리고 거스르고 싶지만,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의 소용돌이에 자진해서 들어간다. 그 희생과 감내를 해야만 사랑하는 이들에게 값진 것을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드니 빌뇌브가 <듄> 프로젝트를 맡았다고 했을 때, 감독의 작품 속 관통된 ‘운명론’이 다뤄질 것이라 예상했다. 메시아의 운명을 타고났지만, 그 자리에 섰을 때 우주의 재앙이 몰려온다는 걸 알고 이를 벗어나려는 주인공 폴은 드니 빌뇌브가 군침을 흘릴 캐릭터라 생각했기 때문. 운명을 알고 그것을 벗어나려 하지만 자신의 나약함을 확인한 후 그 운명을 받아들이는 모습은 감독 이전 작품의 주인공들과 그 궤를 같이한다.
<듄>은 폴에게 닥칠 운명의 소용돌이 여파를 크고 깊고 넓게 만들려는 목적성이 가장 컸다. 감독의 운명론을 보여주기 위한 디딤판을 견고히 만들기 위해 영화는 아스트레더스 가문의 몰락, 하코넨 가문과의 악연, 프레멘과의 인연, 퀴사츠 해더락의 운명 등을 보여주고, 암시하는 데 주력한다.
이를 바탕으로 <듄: 파트2>에서의 폴은 자신에게 놓인 운명과 대립한다. 전반부 스스로의 힘으로 모레 벌레를 타며 프레멘에게 인정받고, 무앗딥, 우슬 이란 이름을 얻는 그는 운명을 거스르며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챠니와의 운명적인 사랑 또한 그에게 큰 힘이 된다. 하지만 정해진(또는 누군가가 정해놓은) 운명과 환경에 무릎 꿇게 되는 폴은 메시아가 되어 황제군과 대립하고 많은 이들이 바라는 하지만 정작 자신은 바라지 않는 그 역할의 무게를 감내한다.| 누구를 위한 메시아인가?
운명 앞에 놓인 폴의 선택과 향후 벌어지는 이야기는 마치 대서사시를 마주하는 듯한 거센 후폭풍처럼 그려진다. 가문의 비밀 무기를 등에 업고 프레멘들과 함께 황제와 하코넨 가문 군대를 공습하며 피할 수 없는 대결을 치르는 폴은 더 이상 소년이 아닌 죽을 고비를 넘기며 성장한 어른으로서 적 앞에 당당히 선다. 폴의 성장담만으로 <듄: 파트2>의 이야기는 매력적이다. 아니 어쩌면 폴의 성장을 지켜보기 위해 이 작품을 선택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의 성장은 누구의 선택인가? 폴의 선택이라 장담할 수 없다. 레베카는 자신과 배 속의 아기, 폴을 모두 살리기 위해 아들을 메시아 퀴사츠 해더락의 길로 인도한다. 이후 메시아를 통해 평화를 누리고자 하는 프레멘들의 공통된 마음을 이용, 그들의 대모로서 막강한 권력을 가진다. 그녀는 마치 프레맨은 물론, 폴을 체스판의 말처럼 운용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긴다. 영화에서 체스판이 나오는 건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레베카는 폴의 어머니이기도 하지만 베네 게세리트다. 여성들이 주축이 된 이들은 ‘인류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나가는 것’을 지상 목표로 삼고 있는 집단인데, 전 우주의 평화를 위해 일을 해야 하는 이들은 막대한 권력을 갖는다. 황제보다 더 위에 있는 이가 바로 베네 게세리트의 수장격인 가이우스(샬롯 램플링)다. 그녀의 계획에 반기를 들고 폴의 아버지와 결혼한 것도 모자라 자기 아들을 쿼사츠 헤더락으로 만들려는 레베카는 가이우스에게 눈엣가시다. (이는 1편에도 잘 나온다.) 이런 이유에서 가이우스는 레베카와 향후 권력에 치명타를 날릴 폴을 없애기 위해 황제를 이용, 장대한 암살계획을 세웠다. 어쩌면 목숨을 건 레바카의 체스판 놀이는 가이우스에게 던지는 복수의 체크 메이트처럼 보인다.
레베카보다 한술 더 뜨는 이가 있으니 프레멘의 수장 스틸가(하비에르 바르뎀)다. 사막 환경 속에서 프레멘을 한데 묶고 이들에게 비전을 제시하는 그의 방법은 메시아다. 곧 메시아가 당도해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는 허황된 믿음. 이 믿음으로 민족을 대동단결시키고, 군대를 조직화해 행성을 지키고 운용해 나간다. 스틸가가 레베카 보다 두뇌 회전이 빨라 보이지 않는다. 대신 메시아의 당도를 순수하게 믿는 쪽이다. 맹목적인 믿음. 그래서 더 위험해 보인다.
원작에서도 종교의 허위성, 우상화를 적극적으로 비판하고 있는데, 드니 빌뇌브 또한 이를 오롯이 가져와 다양한 인물 군상을 통해 이 위험성을 알리고 있다. 우상은 운명이자 선택되는 것이 아닌 만들어지는 것. 그리고 충분히 감언이설을 통해 실현될 수 있다는 과정은 영화를 통해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각색의 방점은 챠니!
<듄: 파트2>가 좋던 싫던 간에 모두 다 인정하는 건 각색 부분이다. 방대한 원작의 이야기를 166분으로 압축한 것 자체만으로도 놀랍다는 의견. 원작을 읽은 이들에게는 더 크게 다가올 것이다. 드니 빌뇌브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현대적인 시각으로, 비판 어린 눈초리로 이 작품을 볼 수 있는 여지를 만든다. 바로 챠니를 통해서.
원작과 달리, 영화에서의 챠니는 매우 중요한 역할이다. 폴의 연인이자, 민족의 평화를 위해 헌신하며, 운명론에 휩싸인 주변 인물들 사이에서 철저한 객관화가 되어있는 인물이기 때문. 폴이 쿼사츠 헤더락의 길을 걷고 끝내 자신 앞에 황제를 무릎 꿇게 하는 상황을 지켜봄에도 그녀는 다른 이들과 달리 반기를 든다. 폴을 향해 머리 숙이는 병사들 사이에서 홀로 경의를 표하지 않고, 이내 그곳을 탈출하는 챠니에게 있어 이 상황은 마뜩잖은 것에 모자라 잘못된 길을 기어이 가는 이들을 향해 눈으로 질타를 날리는 듯하다.
이번 영화가 감독의 전작과 다른 부분 있다면 운명의 소용돌이에 놓인 이들을 주관적이지 않은 객관화된 시점으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마치 챠니는 곧 감독의 분신처럼 보인다. 종교의 허위성과 우상화에 비판적인 원작자의 의도는 각색을 통해 챠니로 옮겨진다. 영웅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했다는 감독은 책이 출간된 1965년보다 자주적이며 독립적인 현대 여성의 특징과 현시대의 관점을 챠니에게 입힌 후, 이 기막힌 운명을 지켜보게 한다. 감독은 마치 차니로 하여금 관객이 이 바보 같은 운명론자들의 행태가 어떤 일을 초래하는지 목도하게 한다. 드니 빌뇌브의 각색은 압축만큼 차니의 활용도도 빛나 보인다.| 극강의 수직 액션, 티모시 샬라메의 얼굴은 말해 뭐해!
다루고자 하는 비범한 이야기를 더 강하고 흡입력 있게 만드는 건 영상이다. 모레 벌레를 타고 이를 이용해 공격하는 액션, 프레멘과 하코넨, 황제군의 대결 등은 전편의 액션이 맛보기였음을 말하듯 극강의 영상미를 보여준다. 특히 100% 아이맥스로 촬영한 영화의 특성상 공들인 수직 액션이 입을 떡 벌어지게 하는데, 극초반 모래 언덕 라인을 기준으로 언제 올지 모를 적의 공격을 긴장감 있게 풀어내는 장면이나, 하늘에 떠 있는 하코낸 우주선과 프레맨 지상군의 대결, 원형 경기장 안에서 펼쳐지는 페이드 로타의 액션, 황제군을 향한 모레 벌레의 공격 등은 양옆이 아닌 위아래가 긴 아이맥스 고유 화면비 1.43:1에 안착, 최적의 몰입감을 선사한다.
액션만큼 열일하는 이가 있으니 티모시 샬라메다. 점차 어른으로 성장하는 과정에 놓인 폴의 다양한 감정은 티모시 샬라메의 연기로 표출되는데, 종교, 정치적 권력을 얻으면 그 즉시 종말로 치닫는 다는 걸 아는 것처럼 티모시 샬라메는 표정과 눈빛으로 그 불안과 고뇌를 표출한다. 마치 조금만 건드려도 바스러질것 같은 그의 불안한 초상은 아이러니하게도 아름다워 보인다. (이래서 티모시 티모시 하는가 봅니다.) 여기에 메시아 선택 후 나오는 리더의 위용과 카리스마 연기가 방점을 찍으며 관객은 넉다운된다.
이제 남은 건 재앙과 추락이다. 폴의 예지대로 파트3에서는 고점에서 나락으로 떨어지는 이야기가 펼쳐질 모양새다. 반대로 이 방대한 유니버스의 결말이 어떻게 매듭지어지든 이 시리즈는 현시점에서 할리우드 대형 프렌차이즈 제작 시스템의 고점을 찍을 듯하다. 티모시 샬라메의 연기도. 그리고 극장가에 거세게 부는 모래바람도.
사진= 워너브라더스 제공
평점: 4.0 / 5.0
한줄평: 사구에서 피어난 전설의 이야기는 현재진행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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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석이 떨어졌던 그곳에서 '고도를 기다리며'
Asteroid
영화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애스터로이드는 영화에서 만들어진 가상의 도시다. 주민이라곤 87명밖에 없는 작은 마을 애스터로이드. 미국 남서부의 한가운데 자그맣게 위치해 있다. 이 동네 가운데에는 차가 지나갈 수 있는 도로가 있고 음식점이 있다. 차를 정비하는 정비소가 근처엔 주유소까지 있다. 이 외에는 다른 숙박시설이 몇 군데 있다. 하지만 이 도시의 명물은 행성이 충돌한 흔적이다. 우주과학이 발달한 도시 애스터로이드. 이 도시에는 이 크레이터를 연구하는 몇 과학자들이 함께 살고 있기도 했다.
애스터로이드는 한적하다면 한적하다고 볼 수 있는 도시다. 이 도시에 방문객이 왔다. 아이들이 내린다. 이 아이들이 온 이유는 도시에 행사가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 있는 영재들을 모아 장학금을 여는 일정이 있었던 것이다. 어느 음식점에 두 가정이 도착했다. 한 가정은 어머니와 딸이 함께 온 밋지와 디아나 모녀, 또 다른 사람들은 오기와 우드로 부자다. 난데없이 아버지 오기가 밋지와 디아나 모녀를 향해 사진을 찍는다. "왜 허락 없이 사진을 찍는 거죠?" 밋지가 묻는다. 오기의 답은 간단했다. "전 사진작가거든요." 대신 일반적인 사진작가는 아니고, 주로 전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찍는 사람이었다. "좋아요. 사진을 인쇄한 결과를 보고 싶군요. 그 대신 사진이 예쁘게 나오면 다 괜찮아요." 밋지는 유명 배우였기 때문에 여기저기 찍히는 사진이 많이 피곤했다. 이 만남을 시작으로 밋지와 오기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또 동시에 디아나와 우드로의 이야기 역시 펼쳐진다.
액자 안에 액자
영화는 전체적으로 극 중 극형식을 취하고 있다. 감독의 전작 중 하나인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과 공통점을 취하는 부분이 있는 것이다. 다만 전작과 갖는 차이점은 배경으로 어떤 것을 기저에 깔고 있는지에 대한 부분이다. 우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다. 카메라는 1985년으로 향한다. 한 소녀가 공동묘지 안으로 들어간다. 어떤 동상 앞에 선다. 주섬주섬 책을 꺼내는 소녀. 책을 쓴 작가는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한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무슈'라는 호텔 컨시어저다. 그러니까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구성은 '들었던 이야기를 책에서 읽은' 쪽이 되는 셈이다. 다른 작품인 <프렌치 디스패치>는 기자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기자는 어떤 이야기를 무슨 관점에서 담는가가 핵심인 직업이다. 심지어 이야기의 전제조건 자체가 한 언론사의 발행인이 죽어가며 남긴 유언이다. 그러니까 들었던 이야기를 관점에 따라 풀어냈다는 것이 작품의 핵심이라고도 볼 수 있는 셈이다.
본작인 <애스터로이드 시티> 역시 액자식 구성을 취하고 있다. 영화 전체적으로 깔려있는 전제조건은 영화의 이야기 배경에 연극이 깔려있다는 점이다. <프랜치 디스패치>가 언론을 소재로 했다는 점과 공통점, 차이점을 동시에 갖는다. 직업인으로서의 특성이 두 작품의 공통점이 된 것이다. 우선 <프렌치 디스패치>에서는 언론인으로서의 특성인 ‘어떤 걸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것이 영화에서 핵심으로 작동한다. 이번에는 <애스터로이드 시티>에 나오는 영화와 예술의 관계다.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문장은 극후반부에 반복돼서 나오는 어떤 문장이다. 이 문장이 직접적으로 나오는 것과는 별개로 영화는 한 이미지를 반복하고 있다. 초반부에 제시되는 특정한 사건, 영화에서 인물들이 대화하는 방식, 웨스 앤더슨 특유의 강박적인 미장센, 이상한 유머감각이 그 근거다. 이는 예술과 현실의 관계라는 영화의 핵심 키워드와도 관련이 있다. 다시 영화의 구조로 돌아온다. 창작자가 어떻게 연극을 만들었는가? 가 영화의 핵심으로 들어갔다는 점은 역시 직업인으로서의 특징이 들어갔다고 볼 수 있다.
다음은 차이점이다. 사실 1차적으로 드러나는 차이점은 ‘구체적인 시기를 설정했는가’에 대한 부분이다. 하지만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이 역시 같은 지점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 본작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1955년이라는 시간적 배경이 의미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프렌치 디스패치>는 가상의 도시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물론 <애스터로이드 시티>도 가상의 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 구체적인 시점이 들어갔다는 점은 분명한 특이점처럼 느껴진다. 무슨 말이냐? 당시 브로드웨이, 미국의 연극판은 최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고 한다. 또 있다. 또 흔히 1950년대 중반의 할리우드라고 하면 걸작이 쏟아지던 때였다. 흔히 고전 할리우드라고도 한다. <현기증>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등 여러분들도 흔히 한 번 들어봤을 법한 작품들이 나왔다. 이런 영화들이 개봉하던 때에 이 작품들을 만드는 과정을 이야기로 만들었다는 것은 이 시기의 예술가들이 갖고 있는 관점을 영화에서 다루고 싶어서였겠지? 즉 1950년대의 미국을 영화가 그리워한다는 점이 핵심이 된다고 볼 수 있는 셈이다. 이는 <프렌치 디스패치>에서도 찾을 수 있는 공통점이다. ‘무언가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질문에 고정적으로 깔려 있는 대전제가 뭘까? 바로 과거의 사건은 기억 속에서 마모되지 않다면 가만히 있다는 점이다. 이를 왜 그리워할까?를 스스로에게 반문한다면 그 과거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려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럼 그 핵심이 저널리스트와 공통점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이 공통점은 결국 예술가의 이면에 깔려있다는 점, 현실에서 벗어나 예술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는가 와도 닿아있는 셈이다.
흑백과 컬러
이 영화는 전작 <프렌치 디스패치>와 유사하게 흑백/컬러 두 설정을 이어가고 있다. 본작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 흑백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부분은 극에서 현실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반대로 컬러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은 극 중 극에 관한 부분이다. 이 컬러와 흑백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이어가고 있는가도 영화의 소소한 재미거리가 된다. 그러나 단순히 소소한 것으로 영화를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큰 줄기로서 연출 방식을 이해할 수 있다. 이 흑백으로 표현한 부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이 흑백 시퀀스 전부가 컬러 시퀀스를 이해하는 거의 모든 가이드라인이다. 대표적으로 초반부에 연극 작가와 배우가 대화하는 신이 있다. 이 부분이 대표적인데, 예술이 현실로 끌고 들어왔다고도 볼 수 있는 셈이다. 이 반복은 영화 중 연극에서, 다시 후반부의 흑백 시퀀스에서, 초반-후반의 수미상관 구조에서 반복된다고도 할 수 있다. 현실과 가상의 대비? 당연히 경계선을 흐려서 영화의 하이라이트 신까지 끌고 가기 위함이다. 전체적으로 난해한 작품이지만 이 색채대비를 서사로 끌고 온 방식을 주의 깊게 본다면 여러분도 이해가 어렵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고도를 기다리며>
영화에서 사용되는 큰 아이러니 중 하나는 '직접 드러나진 않지만 간접적으로는 엄청 중요하게 밑줄 쳐져 있다'라는 점이다. 작품을 보면서 가장 먼저 생각난 사람은 두 사람이다. 바로 레오 까락스와 스티븐 스필버그다. 후자는 <파벨만스> 때문이다. 현실이 어떻게 영화화되는지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펼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 전체적으로 레오 까락스의 <홀리 모터스>와 <아네트>가 갖고 있는 아이러니가 생각이 났다. 전자 <홀리 모터스>는 얼굴을 바꾸는 영화라고 볼 수 있다. 왜 역할을 바꿀까? 바로 영화와 현실의 관계를 묘사하기 위함이다. 역할을 바꾼다는 점을 반복함으로써 영화를 만들고 보는 일이 현실과 얼마나 유사한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반대로 <아네트>에서 쓰인 아이러니는 주인공 부부의 딸과 관련한 부분이다. 딸이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하지만 목각인형으로 묘사가 됐었다. 뭐 이외에도 영화 대사가 매번 노래인 거나 바다를 묘사하는 방식이 누가 봐도 연극적인 것도 작품 자체의 아이러니를 품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이는 초반부에 제시되는 한 에피소드와도 관련이 있었다. 이 사건이 품고 있는 거대한 아이러니가 있고, 또 이 일이 갖고 있는 세팅이 있다. 후자의 성격 상 이 일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영화의 제목이 왜 '애스터로이드'인가 와도 관련이 있다. 직접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인물들이 이 일을 어떻게 생각했는지가 공간 설명에서 이미 다 깔려있다.
하지만 영화에서 가장 중요했다고 볼 수 있는 아이러니는 대사에서 나온다. 영화는 <고도를 기다리며>와 비슷한 지점이 있다. 영화에서 인물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고독은 상실이다. 캐릭터들은 각자의 사정에 의해 무언가를 잃어버려 외로워하고 있다. 이를 위해 초반부의 한 사건을 기다리고 있기도 하고, 연극을 만들기도 하며 연극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또한 극 중 극에서 이상한 행동을 벌이는 경우도 몇 있다. 이 상실에 대한 리액션은 인물들이 어떻게 대화하는가? 와 관련이 있다. 영화의 난이도를 직접적으로 가장 크게 올리는 요소가 된다. 어느 장면에서는 이게 코미디로 작동한다. 그러나 역시 중요한 건 이 사람들이 초반부의 사건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에 대한 부분이다. 글쓴이는 이것이 <고도를 기다리며>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사실 우리 인생은 이런 장면들로 가득 차있다. 시간이 약은 아니다. 정말 모든 걸 다 잊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그런 건 없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아이러니는 이런 것들이다. 과연 뭐가 현실이고 뭐가 예술일까? 하지만 무엇이든 지금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것들이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현실을 위해 예술이 있다. 반대로 예술 덕에 현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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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잔하고 예상 가능했지만 감동을 넘치게 주었던 영화 <미나리>
영화 <미나리>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SNS에서 작품을 홍보하는 윤여정의 영어 무대 인사 덕분이었다. 그래서 처음 그 영상을 볼 때는 굉장히 과거의 작품이 지금 다시 회자되고 있는 독립영화라고 생각햇었다. 하지만 선댄스영화제부터 골든글로브까지 유수의 영화제를 휩쓸고 있는 현재 진행형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고 개봉을 하자마자 영화관으로 달려가서 봤다.
영화 <미나리> 시놉시스
낯선 미국, 아칸소로 떠나온 한국 가족. 가족들에게 뭔가 해내는 걸 보여주고 싶은 아빠 제이콥은 자신만의 농장을 가꾸기 시작하고 엄마 모니카도 다시 일자리를 찾는다.
아직 어린 아이들을 위해 모니카의 엄마 순자가 함께 살기로 하고 가방 가득 고춧가루, 멸치, 한약 그리고 미나리씨를 담은 할머니가 도착한다. 의젓한 큰딸 앤과 장난꾸러기 막내아들 데이빗은 여느 그랜마같지 않은 할머니를 영- 못마땅해 한다.
함께 있다면, 새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하루하루 뿌리 내리며 살아가는 어느 가족의 아주 특별한 여정이 시작된다.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조했습니다.
할머니의 순자의 목소리
영화 <미나리>를 보면서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들은 중첩적으로 쌓인 컷과 할머니 순자의 목소리였다. 분명히 다음 장면에서 나와야 할 순자의 목소리를 아직 컷이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 들려주고, 그 다음에 순자가 말하는 상황으로 컷을 진행한다. 이러한 장면이 한 3~4번 반복이 됐는데 그러한 장면 모두 전장면과 후장면을 연결시켜주고 캐릭터의 심리상태를 순자/할머니가 보듬어 안아주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순자가 ‘아직까지 안자고 뭐하고 있어?’라고 손자 데이빗에게 물어보는 장면에서 해당 목소리는 아빠 제이콥이 단수로 인해 한밤 중에 파이프를 살펴보고 터덜터덜 걸어가는 장면에 함께 삽이이 되고 그 다음 데이빗이 하느님께 기도하고 있었다고 말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이처럼 영화는 할머니가 무심결에 한 말일 수도 있지만 그 한마디 한마디가 가족에 대한 염려와 가족들이 현재 겪고 있는 불안감을 포용하는 대사들이어서 힘이 없는 할머니일지라도 포근하게 안아주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괜시리 마음이 따뜻해지는 장치였다.
예상된 결과로 감동을 주는 방법영화 <미나리>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을 꼽아보자면 데이빗이 처음으로 달려가는 대상이 할머니라는 것이 굉장히 감동적이었다. 심장이 약해 뛰면 안 되는 아이였고, 스스로도 그것을 잘 알기 때문에 웬만하면 뛰지 않고 자제를 하던 아이였다. 애써 노사를 지어왓던 창고가 할머니로 인해 불에 탔고, 할머니가 죄책감으로 집을 떠나려고 할 때 할머니와 티격태격하며 할머니 같지 않다고 핀잔을 준 데잆이 할머니에게 달려가 말한다.
“우리 같이 집으로 가요. 집 방향은 거기가 아니에요.”
달려갈 줄 알았다. 분명 데이빗이 할머니에게 핀잔을 주지만 그 과정에서 마음을 점차 열어갔고, 자신이 가장 의지하고 있는 사람이 할머니임을 깨닫고 할머니를 챙길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데이빗이 발걸음을 떼고 달려가는 그 연출과 카메라 워킹과 깔리는 bgm은 사람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예상했던 결과였지만 그 뻔함을 굉장히 감동적으로 연출을 잘해서 펑펑 눈물을 흘리다 나왔다.
하나의 가족이 된다는 것
영화 <미나리>를 보면서 느낀 것은 그저 결혼을 했다고 해서, 그 저 아이가 있다고 해서, 같이 산다고 해서 가족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제이콥은 아이들에게 성공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오히려 가족들을 더 궁지로 내몰았고, 모니카는 아픈 아들 데이빗을 지켜야했기 때문에 제이콥과 반목한다. 그리고 그 부부 사이에서 아이들의 정서는 불안해져만 간다.
아마 이러한 과정은 아직 뿌리내리지 못한 뿌리 내리는 과정 속에서의 마찰을 보여준 장면들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화재라는 악조건 속에서 서로에 대한 애틋함과 가정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시작하는 제이콥의 가족을 보면서 이러한 시련이 더욱 한 가족이 미나리처럼 단단하게 뿌리를 내리는 계기가 되었구나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씨가 발아를 해서 뿌리를 내려가는 과정이 힘들지만 한 번 단단하게 뿌리내리면 쉽게 사라지지 않고 그 땅에서 잘 자라는 미나리의 모습을 연약한 결속이었던 가족이 서로를 신뢰하는 진정한 가족으로 거듭나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고 생각이 들었다.
영화 <미나리>는 이민의 경험이 없더라도 충분히 잔잔한 감동과 여운을 선사했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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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트릭스: 리저렉션〉, 끝내주는 추억팔이
1999년 개봉한 〈매트릭스〉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매트릭스〉는 평단과 관객 모두를 사로잡으며 가히 세기의 SF영화라 불릴 만한 성취를 이뤄냈다. 〈매트릭스2: 리로디드〉, 〈매트릭스3: 레볼루션〉은 1편에 비해 충격의 강도가 덜하긴 했지만, 그래도 볼 만한 SF 액션영화의 역할 정도는 거뜬히 해냈다.
혁신적인 액션과 플롯, 완성도 높은 비주얼 등 〈매트릭스〉의 장점으로 꼽히는 요소는 많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놀라웠던 건, 영화의 세계관이었다. 두 워쇼스키 감독이 포스트모던 시대를 다룬 장 보드리야르의 기념비적 걸작 《시뮬라시옹》(1981)을 전 스태프에게 읽어보라 권한 일화는 유명하다(《시뮬라시옹》은 〈매트릭스〉 1편에 스치듯 나오기도 한다). 자본주의 스펙터클이 본격화된 사회, 인터넷‧디지털 기술이 발전한 사회에서 우리는 ‘실재’ 없는 ‘가상의 상호모방’에 둘러싸인 채 살아간다. 우리가 온오프라인에서 만나는 모든 광경은 원본을 추적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과정을 거친 모방된 이미지이며, 이 과정이 무한 반복되며 원본의 권위는 상실된다. 이제 원본은 없고 모방된 것들만 남아 서로를 참조하여 또다시 모방한 결과물, 즉 시뮬라크르만 남는다. ‘시뮬랴시옹’은 시뮬라크르가 생산되는 끝없는 과정을 지칭하는 말이다. 원본도, 맥락도 사라진 사회는 냉소와 무감각만이 지배하게 된다는 것이 보드리야르의 음울한 시대진단이었다.
지금은 보드리야르의 개념이 이전처럼 많이 인용되진 않는다. 세계가 기호와 이미지의 의미 없는 순환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고 비판한 이론가들도 있었고, 시뮬라시옹의 세계에서도 윤리와 희망은 가능하다고 말한 이론가도 있었다. 하지만 좋든 싫든 세기말을 깊이 있게 고민하고자 하는 사람들 모두가 보드리야르를 경유해야만 했음은 부정할 순 없다. 〈매트릭스〉도 마찬가지다. 0과 1로 이루어진 세계에 갇힌 인간을 다룬 디스토피아는 그 누구도 〈매트릭스〉만큼 잘 그려내지 못했고, 같은 주제를 다루는 영화는 좋든 싫든 〈매트릭스〉의 성취를 검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시대가 변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자본주의적 스펙터클, 디지털 이미지의 범람에 절망하거나 회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기서 ‘재미’와 ‘희망’ 그리고 ‘가능성’을 찾는다. 보드리야르가 통찰한 시대의 음울한 특징은 우리의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다. 자유를 박탈당한 채 살아가지만 더 이상 자신이 ‘갇혀 있다’고 여기지 않는 사람들. 〈매트릭스: 리저렉션〉이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지 살펴보자.
〈매트릭스: 리저렉션〉에서는 기계로부터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죽은 네오(키아누 리브스)와 트리니티(캐리 앤 모스)가 죽지 않고 등장하는데, 이는 프로그램을 안정시키기 위한 매트릭스의 선택이었다. 강력한 소스 코드인 네오와 트리니티 없이는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매트릭스가 이 둘을 되살린 것이다. 세월이 흘러 중년이 된 네오는 게임회사의 개발자로 일하고 있다. 네오가 매트릭스와 싸웠던 경험과 기억은 그가 개발한 게임 스토리였다는 거짓 환상으로 축소되었다. 네오의 기억 속에서 과거의 경험이 솟구칠 때마다 매트릭스 속 심리상담가는 이를 신경쇠약으로 진단하고 네오에게 ‘파란 알약’을 먹인다(〈매트릭스〉 1편에서 네오가 각각 진실과 허구를 상징하는 빨간 알약과 파란 알약 중 전자를 선택한 장면은 유명하다).
〈매트릭스: 리저렉션〉은 네오가 두 번째로 ‘빨간 알약’을 먹고 프로그램 밖으로 나오는 과정, 매트릭스에서 세 아이의 엄마이자 누군가의 남편으로 살아가고 있는 트리니티에게 네오가 진짜 자유를 선물하는 과정을 담았다. 사실 이 과정에서 이전 시리즈물과 크게 달라진 건 없다. 시대가 변한 만큼 트리니티를 네오의 조력자로만 재현하지 않는다는 점, 영화 〈클라우드 아틀라스〉‧드라마 〈센스8〉에서 선보인 감각적인 연출과 세계관을 더했다는 점이 눈에 띠지만(영화에는 〈센스8〉에 출연한 배우들이 많이 나온다. 이들의 얼굴을 다시 보는 재미가 있었다), 이를 20여 년이 지나 시리즈를 다시 만든 이유로 제시하기엔 어딘가 부족해 보인다. 인간의 자유를 박탈하는 기계와 그 안에서 오히려 편안함을 느끼는 인간이라는 주제도 마찬가지다. 시대의 변화를 반영한 듯, 기계와 인간이 이분법적으로 나뉘어 대립하기만 하는 건 아니라는 설정을 중간중간에 배치해두었음에도 기계가 인간의 자유를 박탈한다는 영화의 기본 전제는 수정되지 않은 채 반복된다.
그럼에도 〈매트릭스: 리저렉션〉이 좋았던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이 영화가 〈매트릭스〉 시리즈에 매료됐던 사람들의 향수를 강하게 자극한다는 점이다. 비극적으로 결별해야만 했던 네오와 트리니티가 재회했다는 것뿐만이 아니다. 영화 내내 반복적으로 소환되는 이전 〈매트릭스〉 시리즈의 장면들은 관객의 추억을 자극하는 동시에 ‘원본’과 ‘모방’의 구도를 다시금 질문하는 효과 역시 자아낸다.
두 번째는 〈매트릭스〉 시리즈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이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이다. 〈매트릭스: 리저렉션〉이 기존 설정을 변화시키지 않은 건 감독이 무능해서가 아니다. 보드리야르와 워쇼스키가 문제 삼고자 한 상황은 오히려 더 심각해졌다. 기술이 인간의 삶을 잠식해간다는 명제가 자아내는 두려움이 자발적으로 개인을 인터넷 공간에 전시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바뀌었음이 이를 증명한다. 즉 기본적인 세계관을 유지한 감독의 선택에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매트릭스〉 시리즈의 세계관과 설정이 유효하다는 감독의 자신감이 묻어 있다. 사람들이 기계로 매개되는 이미지의 범람에 아무런 불편함‧거부감을 느끼지 못하는 상황은 〈매트릭스〉의 문제틀이 사라져서는 안 된다고 요청하고 있다.
요컨대, 라나 워쇼스키는 자본주의 스펙터클‧디지털 이미지와 대립하는 인간의 자유라는 문제틀에 더 섬세하고 감각적인 연출을 더해 돌아왔다. 이 영화가 〈매트릭스〉 시리즈를 보지 않은 사람, 〈클라우드 아틀라스〉‧〈센스8〉을 보지 않은 사람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건 분명한 한계다. 하지만 워쇼스키가 건설해온 세계에 매료되었던 적 있는 사람들에게 〈매트릭스: 리저렉션〉은 여전히 울림이 있는, 끝내주는 추억팔이로 다가갈 것이다. 이런 사람이 나뿐만이 아님을 확신한다. 워쇼스키의 영화적 모험이 멈추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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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마가 이사왔다 | '엑시트'를 꿈꿨던 오컬트 로코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제2의 <엑시트>를 꿈꾸다
2019년 여름 극장가의 주인공이었던 <엑시트>는 겉과 속이 달랐다. 예고편과 포스터만 보면 평범한 한국형 코미디 같았다. 특히 배우들의 이미지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영화처럼 느껴졌다. <건축학개론> 속 조정석의 코믹한 이미지와 <공조>에서 강한 인상을 남긴 임윤아의 푼수 연기를 전면에 내세운 게 분명해 보였다.
실상은 달랐다. 구조 헬기를 부르는 장면처럼 확실한 웃음 포인트를 선보이면서도 재난 영화로서의 긴장감을 잃지 않는 균형감이 돋보였다. 특히 취준생 주인공들을 내세워서 가상의 재난을 현실에 비유한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화학 가스에 뒤덮인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 빌딩 위로 향하는 그들은 마치 더 높은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 끊임없이 사다리를 두고 경쟁해야 하는 스크린 밖의 2030 세대와 다를 바 없었다.
<엑시트>의 이상근 감독이 선보인 신작, <악마가 이사왔다>는 제2의 <엑시트>가 목표다. 로맨틱 코미디라는 겉모습과는 달리 내용물은 오컬트를 활용한 코미디와 신파로 가득한 가운데, 위로와 치유의 메시지로 여러 장르를 묶어 놓은 모양새가 <엑시트>와 유사하다. 그러나 이 전략은 유효하지 않다. <엑시트>와는 달리 다양한 장르를 묶어줄 연결고리가 허술한 나머지, 그럴듯한 소재에 비해 결과물은 아쉬움을 남기기 때문이다.
서양식 오컬트와 코미디의 만남
<악마가 이사왔다>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요소는 오컬트다. 차이가 큰 동서양 오컬트를 코미디와 드라마, 로맨스를 엮는 실로 활용하는 스토리텔링이 인상적이다. 사실 서양과 동양의 오컬트는 사뭇 다르다. 전자가 대체로 악마 같은 대상을 퇴마하는 과정을 다루지만, 후자는 원혼이나 귀신의 트라우마나 사회적 억압 등에서 비롯된 한을 풀어주는 이야기가 많다.
그렇기에 동서양 오컬트를 한 작품 내에 녹여내기는 쉽지 않다. <파묘>만 봐도 알 수 있다. 수십 년간 한 맺힌 원혼을 달래기 위해 파묘를 하고 굿을 하는 전반부는 동양적 오컬트 영화에 가까웠다. 그에 반해 후반부는 한국을 배경으로 일본의 오니를 등장시키면서도 서양식 오컬트의 퇴마 의식과 비슷한 전개를 보여줬다. 천만 관객을 돌파하고도 <파묘>에 대한 반응이 꽤 엇갈렸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악마가 이사왔다>의 초반부는 서양식 오컬트 외양을 띤다. 퇴사 후 무료한 일상을 보내던 중 아랫집에 이사 온 '선지'(임윤아)에게 첫눈에 반한 '길구'(안보현). 하지만 그는 밤마다 전혀 다른 인격을 변하는 선지를 목격한 뒤 호기심 반, 두려움 반으로 그녀의 정체를 탐색하고, 마침내 그는 선지의 아버지 '장수'(성동일)로부터 진실을 듣는다. 새벽마다 깨어나는 악마 '밤선지'가 '낮선지'에게 붙었으며, 이 악마를 퇴마하는 법은 없다는 것.
장수는 반신반의하는 길구에게 새벽 동안 밤선지를 돌보는 아르바이트를 제안하고, 제의를 승낙한 길구는 난동 벌이는 밤선지를 제어하느라 새벽마다 고통받는다. 그녀의 난동은 코미디의 소재이기도 하다. 밤선지가 편의점 신제품을 매일 싹쓸이한 뒤 한발 늦게 온 고객을 조롱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소소하게 일상의 금기를 깨는 악마적인 사건들로 구성된 광경은 마치 <핸섬이즈>와 유사한 결의 웃음을 자아낸다.
한국형 오컬트로 빚은 신파
하지만 밤선지의 사연이 드러나는 순간부터는 동양식 오컬트가 전면에 나선다. 수백 년 전 기근이 닥쳤을 때, 밤선지는 굶주림으로 가족을 잃었고, 마을 사람들은 고아가 된 그녀를 굿의 제물로 바쳤다. 이후 원혼이 된 그녀는 불에 탄 본인 유해가 담긴 옹기에서 조용히 소멸 날을 기다렸다. 하지만 낮선지의 외조모가 그녀를 옹기에서 내쫓으면서 휴식을 방해하자 그녀는 선지의 가족에게 대를 이어 붙어 있는 것으로 복수했다.
즉, 그녀는 퇴치해야 할 악마가 아니라 한을 풀어줘야 할 원혼이었다. 서양식 오컬트의 겉모습을 빌렸지만, 이면에서는 동양식 오컬트 서사를 착실히 쌓아 올린 셈이다. 이러한 스토리텔링은 여러 장르의 가교 구을 한다. 감성과 형식이 다른 두 오컬트가 동시에 등장해도 어색하지 않다. 오컬트의 성격이 달라지는 순간 코미디가 신파로 전환되기에 영화의 흐름도 끊어지지 않는다.
이에 더해 진부함과 식상함의 농도도 옅어진다. 기근으로 가족을 잃고, 제물로 희생되었다는 사연은 여러 사극에서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클리셰다. 하지만 길구가 원혼의 한을 덜어주기 위해서 그녀가 담겨 있었던 옹기를 찾으러 제주도에 도착한 순간, 이 클리셰는 비로소 눈치채지 못했던 복선을 찾는 재미로 이어진다. 왜냐하면 제주도는 유달리 기근으로 고생을 많이 했고, 육지와는 다른 문화를 간직해 온 공간이기 때문이다.
일례로 제주도는 경신대기근으로 인해 1670년 9월에 42,700여 명이었던 인구가 불과 2년 만에 27,578명으로 줄어드는 피해를 바 있다. 또 비극적인 역사와 고립된 지형으로 인해 제주도는 고유의 무속 신앙 전통이 뿌리 깊다. 지금도 해원상생굿을 통해 4.3 사건 피해자를 기리고 있으며, 환자굿으로써 당시의 트라우마를 달랜 생존자들도 많다. 이처럼 특수한 지역적 서사를 발견하는 순간, 기구한 원혼의 사연은 차별화될 수 있다.
빵과 옹기의 의미
유달리 자주 등장한 소재인 빵과 옹기의 의미 또한 같은 맥락에서 찾을 수 있다. 선지는 낮에도 밤에도 유달리 빵에 집착한다. 낮에는 제빵사로 일하면서 프랑스 제빵 유학도 준비한다. 국가대표 유망주였을 뿐만 아니라 올림픽 메달도 거뜬할 수영 재능을 지녔는데도 제빵사의 꿈에만 매달린다. 밤에는 편의점에서 파는 시폰 케이크에 집착한다. 진열대에 제품이 올라가는 즉시 전량 구매해서 먹어버릴 정도다.
선지의 행동에는 단순한 개인 취향 그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는 듯하다. 육지와는 달리 제주도에서 카스텔라, 롤케이크, 단팥빵 같은 빵이 전통적으로 명절 차례상이나 제사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제음식이기 때문이다. 즉, 항상 빵을 갈구하는 그녀의 행동은 허기짐을 표현하는 장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간 그녀가 받지 못했고, 또 가족들에게 차려주지 못했던 제사상에 대한 한이 담긴 음식이 바로 빵인 셈이다.
그녀가 새벽마다 옹기를 찾아 돌아다니는 이유도 지역적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녀는 쓰레기장이나 꽃집을 돌면서 유독 화분이나 여러 항아리를 살펴본다. 본래 자신의 쉼터여야 할 옹기를 찾기 위해서. 이때 옹기 역시 제주도의 특수성을 상징하는 소재로 활용된다. 제주도 특유의 고냉이찰흙으로 빚어진 옹기는 불로 구웠을 때 천연 유약인 ‘자연유’가 저절로 입혀지는 등 육지의 다른 옹기와의 차이가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제주 옹기는 음식의 맛을 돋우고, 내용물의 변성을 막으며, 물을 정화하기로 유명하며, ‘숨 쉬는 항아리’로 불리기도 한다. 이러한 특징은 과거 사람들이 소녀의 유해를 화장해 옹기에 담은 이유, 선지의 외조모가 그 옹기를 발견한 뒤 씻어낸 후에 김치를 담그다가 원한을 산 계기로 이어진다. 즉, 옹기 또한 사후에도 평화를 얻지 못한 아픔을 강조하는 또 하나의 영화적 장치인 셈이다.
실종된 긴장감과 달함
하지만 오컬트 소재를 신파로 풀어내는 사이에 <악마가 이사왔다>는 오컬트 장르 본연의 서스펜스와 쾌감을 놓치고 말았다. 우선 낮선지와 밤선지라는 아이디어는 거의 활용되지 못했다. 선지와 영화 <잠>에서 몽유병을 앓는 듯 보이는 '현수'(이선균)는 처지가 유사하지만, 그를 지켜보는 주변인들의 두려움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후자와 달리 전자는 낮과 밤이 다른 선지가 유발하는 공포감을 거의 조성하지 못한다.
오컬트 분위기를 고조할 캐릭터도 제대로 못 활용했다. 무당처럼 보이는 '영식'(신현수)이 등장하지만, 그에 대한 설명은 다. 그가 선지에게 깃든 원혼을 노리는 이유도, 원혼을 퇴치하는 데 한 차례 실패한 뒤 다시 접근하지 않는 이유도 알 길이 없다. 그러다 보니 그의 등장 장면은 제대로 된 위기 상황을 만들지 못한다. 자연히 선지에게 악마가 아니라 원혼이 붙었다는 진실이 밝혀지는 반전의 순간도 임팩트가 줄어든다.
악역의 빈약한 존재감은 로맨스에도 악영향을 준다. 로맨스 영화에서 남녀 주인공은 함께 위기를 극복하면서 관계를 발전시킨다. 학교나 회사에서는 어려운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하고, 집에서는 부모의 반대를 꺾는 식으로. 영식이라는 캐릭터가 별다른 기능을 못 하는 이상, 길구와 선지는 함께 극복할 특별한 위기 상황을 맞지 못한다. 결국 그들의 관계가 아파트 이웃, 직장 동료 이상으로 발전할 만한 계기도 찾아볼 수 없다.
몇 안 되는 이벤트마저 길구와 밤선지의 몫이다 보니 로맨스의 주인공도 애매하다. 길구와 낮선지가 서로 호감을 느낀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정작 길구와 밤선지의 관계가 변화하는 모습에 분량과 비중이 집중된 이상, 길구와 낮선지가 주도적으로 로맨스를 만들어 나간다는 인상은 받기 어렵다. 그 결과 길구와 낮선지가 연애를 시작하는 결말은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하며, 로맨틱 코미디로서의 만족감도 절대 크지는 않다.
무위에 그친 성공 방정식
로맨스의 실종은 길구의 서사를 공기화하면서 <악마가 이사왔다>의 완성도를 결정적으로 저해한다. 길구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되짚어 보면 영화의 의도는 유추할 수 있다. 아마도 밤선지의 한을 달래주는 여정을 겪으면서 길구가 자신의 아픔도 이겨내는 과정을 보여주려 한 듯하다. 타인을 향한 선의가 자기 아픔도 치유할 수 있다는 메시지로 무장한 것.
이는 <엑시트>가 '용남'(조정석)을 활용한 방식과 매우 유사하다. 취준생으로 지내며 무기력해졌던 용남은 잊고 있었던 장기, 클라이밍 기술을 살려서 재난 상황을 극복하는 영웅으로 거듭난다. 용남에게 재난이 덮쳤다면, 인형 뽑기가 재능인 길구에게는 귀신이 찾아왔다. 회사 생활이 남긴 상흔을 술과 인형 뽑기로 애써 가리며 지내던 길구는 선지와의 모험을 통해 자기 아픔도 치유하고, 재능을 살릴 수 있는 새로운 길도 찾아낸다.
그런데 로맨스 서사가 약하고, 오컬트에서 비롯된 신파가 중심 스토리라인이다 보니 길구의 서사는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길구 감정선이나 내적 변화와 성장까지 들여다볼 시간이 충분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그가 선지를 만나기 전까지의 그의 일상을 보여주는 초반부는 대체 왜 필요한 건가 싶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달리 말해 길구가 주인공이어야만 하는 이유를 관객에게 제시하는 데 실패했다.
그 결과 <악마가 이사왔다>는 재난 영화를 빼고 오컬트를 더해서 제2의 <엑시트>가 되고 싶었던 꿈을 이루지 못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예상할 수 있 맛과 의외의 신선함을 모두 선사한 <엑시트>와 달리, <악마가 이사왔다>는 예상한 맛이 안 나는 와중에 예상 못 한 맛도 특별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나마 임윤아라는 배우가 드라마뿐만 아니라 영화도 이끌 수 있는 주연임을 확실하게 증명했다는 성과가 있을 따름이다.
Poor 형편없음
두 번은 안 통한 <엑시트>의 성공 방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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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나 아렌트가 자랑스럽게 생각할 '존 오브 인터레스트'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강력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독일인 부부 루돌프 회스(크리스티안 프리에델)와 헤트비히 헤스(산드라 휠러)다. 세계 2차 대전 중이다. 일에 충실하는 루돌프 회스. 아예 집 옆에 일터가 있을 정도로 일에 진심이다. 조용한 일상. 아내와 귀여운 아이들과 함께 사니 두려울 것이 없다. 다만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것이 있을 뿐이다. 사는 집 옆에 있는 것이 아우슈비츠 수용소고, 루돌프는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임무를 받았다는 것이다.
우선 이 영화를 보고 가장 먼저 생각난 건 가까스로 다 읽은 한나 아렌트의 책 두 권이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 보면 한나 아렌트가 제시한 개념 ‘악의 평범성’에 대해 손쉽게 접할 수 있다. ‘악의 평범성’은 평범한 사람에게도 누구나 악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기도 하지만 더 본질적인 함의를 품고 있다. 바로 누구나 악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가 중요한데, 생각하거나 관심 갖지 않고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다 보면 악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 그녀가 제시한 ‘악의 평범성’이다. 한나 아렌트는 이 성격을 설명하기 위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에서 한 남자를 조명한다. 바로 아돌프 아이히만이다. 아이히만은 재판 중에서 당당하게 “나는 조직이 시키는 일을 했을 뿐”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 남자의 궤변에 격분한다. 하지만 서서히 관찰하면 관찰할수록 아이히만이 우리 평범한 사람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닫는다. 발상의 전환이 일어난 한나 아렌트. 한나 아렌트는 이 아이히만의 모습을 포착하며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타인의 입장에 대한 무사유(Thougtlessness) 하나만으로도 평범한 직장인이 역사에 남는 전쟁범죄자가 된 것이다.
이 ‘악의 평범성’을 제시한 것은 후대에 엄청난 파급력을 낳는다. 당연하다. 원래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잖아? 이긴 자들은 승자의 입장에서 상대방, 그러니까 악의 근원을 “이 집단이 이래서 문제야!”로 퉁칠 수 있다. 아니면 인간이란 원래 그런 존재라고 규정하면 쉽다. 잔다르크가 마녀로 지목당해 화형 당하는 과정을 생각해 보면 종교라는 잣대가 명확하다. 또 서양의 기독교나 동양의 맹자가 인간에겐 원죄/악한 본성이 있다고 해석한 것도 악이라는 개념이 특정한 상황 하에 만들어진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그리고 그게 되게 대단한 거라고 생각할 수 있다. 우리 인류 역사상 히틀러 같은 존재는 흔하지 않다. 이런 측면을 고려해 보면 악은 특정한 무언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한나 아렌트는 이를 전적으로 거부한다. 특정한 무언가가 있기에 대단하다던가 굉장히 특이한 게 아니다. 그냥 전적으로 평범한 사람일 뿐, 생각 없이 산 것의 총합체라고 정의한 것이다. 물론 한나 아렌트 이전의 역사가들이 악에 대해 이렇게 규명한 것은 나름대로 합리적인 것처럼 보인다. 이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도 그 악의 형태가 구현되고 있다. 가령 영화에서 온갖 비명소리가 들리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는 회스 부부의 모습은 분명한 악이다. 아니면 유대인의 코트를 빼앗아 입는 헤트비히의 모습 역시 분명한 악이다. 하지만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한나 아렌트가 제시한 ‘무사유’의 과정을 두 측면에서 보여준다. 어떻게?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아이히만이 보여주듯, 조직에 흘러가는 남자(루돌프)와 타인에게 무관심한 여자(헤르비히)를 통해서. 또 <인간의 조건>에서 한나 아렌트가 역설하듯 인간과 인간사이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을 강조한 방식을 그대로 계승하면서다.
가장 먼저 탐구해야 할 인물은 루돌프 회스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루돌프 회스가 조직 내에 꽉 박혀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영화 연출을 통해 보여준다. 이 연출은 꼭 필요했다. 왜? 루돌프 회스가 실존인물이기 때문에. 한나 아렌트가 제시한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역사적인 상황과 결부시켜 강조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래야 이 영화가 비판하고자 하는 악의 속성이 더 설득력을 얻는다. 영화는 이를 위해 건조하게 그의 직장인으로서의 일상을 보여준다. 가령 외부 협력업체가 와서 회스에게 뭔가를 설명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 장면 속 두 남자는 그냥 대표자들끼리의 대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 장면을 기점으로 영화는 그가 직장인으로 얼마나 자기 하는 일에 투신하는지를 묘사한다. 좀 필요 없어 보이는 전화 장면이 여러 번 들어간 이유는 여기에 있다. 여기에 특별한 설정이 영화에서 빛을 발한다. 아우슈비츠 옆에 사무실이 있고 거기서 산다는 특징은 가정적이면서도 열심히 일하는 루돌프 회스의 모습을 보여주기 쉽다. 열심히 일하고 난 다음 아이들에게 동화를 읽어주는 아버지 회스의 모습은 지극히 평범한 악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루돌프라는 인물에게 가장 첫 번째로 수행해야 하는 과제는 직장인으로서의 업무나 가정의 안녕이 아니다. 나치라는 조직이다. 나치의 일원으로서 소속됐다는 한 가지 사실이 이 사람 인생에서 제일 중요하다. 왜? 초반부터 영화가 이 인물의 내면을 이미지로 강조하고 있다. 루돌프 회스가 누군가에게 축하받는다. 그런데 그 축하를 해주는 사람들이 나치 조직원들이다. 얼핏 보면 회색 옷 입은 사람이 떼거지로 몰려들어 누가 누구인지 구분이 안 된다(심지어 배경도 회색 저택이다). 영화가 고의적으로 카메라를 멀리 떨어트려서 누가 루돌프 회스인지 알 수 없게끔 묘사하는 것이다. 축하받는 사람과 하는 대상이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 이것은 명백하게 수신자와 발신자가 정해진 행동을 흐려놓겠다는 감독의 의도를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개인보다 조직을 강조한 것이다.
또 이 인물이 직장인으로서의 활동반경과 쉴 수 있는 집의 바운더리가 그렇게 선명하지 않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옆에 산다는 것도 이상한데 거기서 일을 한다는 건 더 기괴하다. 자연인으로서의 모습이 조직에 잡아먹힌 루돌프의 모습을 보여주는 설정이 되는 것이다. 영화 후반부에 루돌프가 전출을 가니 마니 하는 설정이 들어간 것도 흥미롭다. 사실 이 에피소드 자체가 굳이 영화에서 중요하지 않다. 어쨌든 안 간 거라서 굳이 알 필요도 없고, 갈등이 격정적이지도 않다. 영화의 기-승-전-결이 이 전출 여부를 두고 쌓아 올린, 소위 ‘빌드업’ 한 것도 아니라 맥 빠지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 일이 이 가족에게 끼친 영향이 중요하다. 조직이 루돌프 회스의 가족공동체를 해체시킬 정도로 주인공(회스)에게 절대적이었다는 의미다. 나치와 히틀러의 말이라면 뭐든 다 줄 수 있는 사람이다. 엔딩신에서 헛구역질이 날 정도로 내면의 무언가를 갖고 있지만 결국 어둠 속으로 걸어가는 그의 모습 역시 인물의 이런 부분을 설명하고 있다. 그의 무의식이 영화의 플롯에 그대로 나타난 것이다. 이렇게 루돌프의 내면을 보여주는 연출은 후반부에서 다시 반복된다. 초반 루돌프가 축하받는 장면과 후반부 나치 조직원들끼리 회의하는 장면은 수미상관처럼 반복된 것 같다. 왜? 회의를 주체하는 장면을 가장 첫 신에선 보여주지 않는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는 부감 숏으로 화자를 숨긴 것이다. 이다음 장면을 보면 영화 안의 회의 주제에는 회스가 제시한 근거가 중요하게 설정되어 있다. 다음 장면은 회스가 자기 의견을 역설하는 장면을 넣으면서 회의의 끝을 분명하게 보여주지도 않는다. 루돌프 회스가 회의에서 중요하다는 것만 묘사하고 그 안의 내용을 보여주지 않는 것이다. 루돌프 회스가 이 당시 나치라는 조직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기 때문에도 근거를 찾을 수 있으나, 영화 초반부를 생각해 보면 수미상관처럼 조직 안의 루돌프 회스를 강조하기 위함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단지 사운드의 힘만 믿은 게 아닌 비주얼의 힘이 조직에 휩쓸리는 루돌프의 모습을 보여줬다. 악의 평범성을 드러내는 연출인 것이다.
두 번째로 이야기할 수 있는 인물은 루돌프의 아내 헤트비히 회스다. 이 인물이 이 영화에 차지하는 물리적 비중은 굉장히 많다. 하지만 그 비중치고 영화 안에서 유효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인물은 아니다. 오히려 이 인물은 플롯 전면이 아닌 영화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이야기를 담당한 캐릭터처럼 보인다. 근거는 간단하다. “내가 이 집을 가지려고 17년 동안 고민해 왔다!”라는 대사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강조하고 싶은 것. 이 인물의 동선이다. 이 인물은 집 밖에 멀리 나가지 않는다. 루돌프가 타 지역으로 나가거나 헤트비히 어머니가 그녀의 집으로 도착한 것과는 대비된다. 전업 가정주부인 것으로 보이는 헤트비히. 남편 루돌프에게 ‘아우슈비츠의 여왕’이라는 말을 듣는다. 후반부 루돌프와의 갈등에서도 이 사람은 집 밖에 나가기 싫다. 남편을 속여서라도, 유대인들 고용해서라도 만든 집이니 만큼 애착이 강한 것이다. 이렇게 집에 박혀있는 헤트비히. ‘아우슈비츠의 여왕’이면 자기 집 안에 일어나는 것들에 대해 능통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이 영화가 이 인물을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인물은 집안사정에 그렇게 밝은 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관심이 짧은 것처럼 느껴진다. 첫 번째 근거. 이 사람이 집 안에 일어나는 상황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증거는 대놓고 드러난다. 이 영화의 사운드 지분 중 크다고 볼 수 있는 아기의 울음소리도 그 예시 중 하나다. 그냥 ‘왜 이렇게 울까?’ 한 마디면 엄마로서의 역할이 끝나나? 후반부에 남자 형제들끼리 비닐하우스 같은 곳에서 다투다 형이 동생을 장난으로 가두는 상황이 벌어진다. 여기서 동생이 울고불고 소리 지르지만 어머니 헤트비히는 알아채지 못한다. 중후반부 폴란드 소녀가 사과를 수용소 근처에 묻는 장면이 있다. 그때도 이 헤트비히는 인기척을 느끼지만 구체적으로 알려고 하지 않는다. 강가에 재가 떠다니는 것도 헤트비히가 아이들을 씻는 장면은 있지만 원인을 예방한 다 던가 하는 진단이 없다. 어머니로서의 역할에 취해있기만 하지 실질적으로 ‘일 잘한다’라는 말을 듣기엔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영화 후반부에 묘사되는 루돌프 회스의 불륜은 이 인물(헤트비히)의 무능력함을 암시하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어디 다른 곳에서 바람을 피우는 것이 아니다. 루돌프의 집 근처에 있는 사무실에서 불륜이 이어진다. 루돌프의 아이가 “아빠 땀 냄새나!”라고 말할 정도로 이 남자의 불륜은 이 가정과 분리된 것이 아니다. 철저하게 남편이 속였기 때문에 불륜을 저지른 것 아니냐?라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루돌프 회스는 실제로도 가정적이지 않은 인간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헤트비히 의 대사 “오래전에 (전출이) 결정 난 것으로 보이는데 왜 말하지 않았냐”라는 말은 과연 그녀가 남편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생각하게 만든다. 이 집안이 화기애애하다는 시각적인 만족감에 도취되어 가정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자각하지 못한다는 건 그녀의 분명한 패착이다. 마치 나치 독일과 히틀러가 집권하고 난 다음의 모습이 1차 대전 전후의 독일을 재건하고 있다고 믿었을 독일인들처럼 말이다. 글쓴이가 헤트비히가 2차 대전 당시의 독일인들을 비유하고 있다는 건 여기에서 온다. 나의 행동이 독일의 재건을 위해서라는 자기기만, 가정에 착실한 어머니라는 자기기만이 나치당의 지지자들과 헤트비히에 중요하게 작동하는 것이다. 이 비유에 의미를 부여하니 영화 안의 두 대사가 더 와닿는다. 유대인 학살이 기본적으로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은 채, “너희들(유대인)은 나 덕에 편하게 사는 거야”라며 남편이 널 재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고 폭언을 하는 것. 그녀가 가진 모순을 이 영화가 폭넓게 묘사하는 것이다. 또 후반부에 루돌프가 헤르비히에게 “우리의 성과”라는 식으로 “우리”를 강조하는 것이 흥미롭다. 당연하다. 자국민들을 속인 나치의 군인들도 당연히 문제가 있지만, 심정적 동조자로서 학살에 ‘무관심’과 ‘자기기만’으로 참여한 당시 독일인들도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그냥 단지 일상만 보여주는 줄 알았는데 그 이면에 담긴 의미가 무시무시한 좋은 각본의 힘이다.
두 캐릭터 말고 이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 중요한 것은 카메라와 사운드다. 우선 카메라. 이 영화가 카메라로 일상을 담는 방식이 특별하다. 그냥 일상적인 걸 담으면 모르겠는데 어디에서 훔쳐보는 것처럼 화면을 담았다. 실제로 검색해 보면 어렵지 않게 이 영화의 촬영 기법을 찾을 수 있다. 세트장을 만들고 카메라를 많이 설치한다. 대신 카메라가 어디에 있는지 말해주지 않는다. 이건 중요하다. 억지로 드라마를 배격했기 때문이다. 카메라가 대놓고 있다. 그럼 그건 대놓고 영화다. 배우들이 서로 얼굴 보면서 연기한다. 감정의 이입을 유발하고 곡진한 무언가를 탐구한다는 것. 이건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에 대치되는 부분이다. 관심을 떼는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의 응집성을 위해서라도 감정이입을 유발하면 하고 싶은 걸 보여주기 어렵다. ‘얘 나쁘지?’가 되는 순간, 인물의 표정이 보이는 순간 비명의 의미가 옅어진다. 영화가 그은 선을 스스로 넘는 것이다. 촬영 구도만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명확하게 만드는 연출이었다.
하지만 이 카메라를 활용한 연출 중에 정말 중요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시각적인 것으로 사방이 막힌 이미지를 강조한 것이다. 모든 샷에서 벽이 강조되는 건 아니다. 그런데 벽이 필요하지 않은 장면에서 굳이 벽을 보여준다는 게 핵심이다. 중후반부에 어떤 남자가 벽 너머의 풀숲에 어떤 것을 뿌리는 장면이 있다. 일반적인 카메라워킹이라면 벽을 등지고 찍는 게 맞다. 그런데 굳이 이 장면에서 벽과 남자, 풀숲이 같이 등장한다. 벽을 보여주고 싶었던 감독의 의도가 읽힌다. 더 나아가 청각적인 요소는 벽과 충돌하며 영화에 균열을 낸다. 남자가 숲에 무언가를 뿌리는 장면에서 들리는 소리. 어떤 남자가 비명인지 절규인지 질문인지 모를 소리를 지른다. 곧바로 총성이 들린다. 카메라는 여기서 총에 맞는 사람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벽만 보여준다. 마치 소리가 벽에 부딪힌 것처럼. 그 대신 관객들은 상상력이라는 게 있어서 벽과 소리만 보여줘도 이 상황이 어떤 일인지 대충 예상할 수 있다. 굳이 이렇게까지 사운드를 강조하는 이유? 아니 그 이전에 사운드를 어떻게 강조했을까? 벽의 이미지를 강하게 보여줘서 이 영화 안에 쳐져있는 벽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실 이 영화를 본 사람에게 벽의 의미는 간단하다. 무관심이라는 벽이다. 계속해서 안에 있는 야채니 꽃이니 라일락이니 수영장이니 하는 것들을 보여주지만 무관심이라는 벽이 인물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벽의 의미는 앞에서 언급한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닿고 있다. 악의 평범성을 이 영화가 사운드와 카메라의 존재로 보여준 것이다. 이 벽의 존재 덕에 카메라는 무엇을 찍을지에 대한 고민도 끝냈다. 분명한 악에 대해서는 카메라로 찍고 희생자들은 사운드를 통해 표현한다. 이 영화의 인물들은 악에 익숙한 악인이 되는 셈이다. 이 맥락에서 열 카메라로 표현한 소녀를 설명할 수 있다. 악이 아닌 무언가의 존재, 그러니까 유대인에게 사과를 주는 따뜻한 마음이 이 영화의 카메라에 담기지 못한 선의가 된다. 사운드만 부각되는 것이 아닌 촬영에 의한 연출이 영화의 주제를 강조했다.
이 영화의 사운드는 영화의 핵심을 담는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단란한 가족들의 일상 속 비명이 틈입한다. 이 비명이 가지는 임팩트는 영화를 본 모든 사람이 다 같은 의견을 말할 것 같다. 비명도 비명 나름이다. 어떻게 기괴한 소리만 다 골라서 삽입했는지 이런 요소들도 다 감독의 감각이 크게 주요한 것으로 보인다. 전작 <언더 더 스킨>에서 외계인(스칼렛 요한슨)이 지구인들과의 교감을 표현하는 방식이 이 영화에서 사운드로 치환된 셈이다. 이 선택은 아주 좋았다. 학살의 진상을 원초적인 방식으로 다가가게 한다. 원초적인 기억으로 남았다? 우리 일상 속에서 비슷한 것만 보면 생각난다는 의미다. 이 의미는 중요하다. <헤어질 결심>에서 감정적인 임팩트로 관객에게 큰 효과를 낸 것과는 다르게 신기한 방식으로 관객에게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청각을 아주 잘 활용했다. 이 영화 예술의 근본에는 무성영화라는 게 있다. 이 말은 즉슨 영화라는 예술 자체가 시각적인 걸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인지심리학에서 인류는 시각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연구도 있다. 이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영화라는 예술이 가진 두 특징을 과감하게 무시하며 청각적인 요소를 강조한다.
하지만 영화가 청각적인 것을 활용하는 방식의 화룡점정은 오프닝과 엔딩에 있다. 이 영화의 청각적인 요소에는 뭐가 담겨 있을까? 비명이다. 유대인들의 절규가 담겨있다. 오프닝을 본다. 오프닝은 검은색 화면인 채로 음악을 크게 틀어놓는다. 첫 장면부터 청각적인 것이 중요하다고 힘을 꽉 주는 것이다. 이 기점으로 영화의 청각적인 것에 대해 연이어 생각해 보면 이후에 비명소리가 들린다. 대신 시각적인 부분이 청각적인 장면과 먼저 시작하지 않는다. 그럼 비명소리가 이 이야기의 이전에 깔려있다는 의미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리고 영화의 엔딩으로 날아간다. 루돌프가 헛구역질을 한다. 현대의 박물관 노동자가 건물을 닦는다. 닦는 소리가 부스럭거린다. 그리고 다시 영화의 시점으로 돌아와 루돌프 회스가 어둠으로 걸어간다. 시점이 세계 2차 대전 한가운데로 돌아간 것이다. 그다음이 엔딩이다. 이 영화의 엔딩은 오프닝처럼 청각적인 요소만 부각한다. 영화 후반과 초반이 비명소리로 이루어져 있고 그 중간이 직선으로 흘러가는 일상이다. 이 영화는 일종의 타임라인인 것이다. 영화의 과거와 미래, 오프닝과 엔딩이 청각적인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영화 안에서 비명소리가 청각적인 요소로 강조된다는 것. 그렇다면 영화의 과거와 미래를 이 감독이 어떻게 해석했는지에 대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홀로코스트는 곧 비명과도 같았다는 의미처럼 들렸다. 악인들이 시선을 돌리지 않아 만든 비극이 홀로코스트라고 말한 셈이다.
괴물 같은 영화다. 음향, 촬영, 각본, 연출 모든 부분에서 한 부분의 극점에 다다른 능력을 보여줬다. 심지어 산드라 휠러를 위시로 한 배우들의 연기도 굉장히 뛰어나기까지 하니 무결점의 영화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굳이 꼽자면 극의 재미를 부각한 영화가 아니라서 누군가는 지루하다고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위험부담(?)에도 글쓴이가 장점으로 확신하는 것이 있다. 정말 필요한 인간의 조건이 무엇인지 묻는 것이라는 점이다. 사실 이 영화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만큼 징글징글하고 강박적으로 관객에게 질문한다. 사실 이 사람들이 왜 인간 근처도 가지 못하는지는 영화가 쉽게 설명하고 있다. 이 설명하는 부분은 곧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과도 이어진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이라는 책에서 인간의 관계성에 대해 언급했다. 정치적인 행위부터 시작해 불멸하게 남는 여러 기록까지, 또 공/사적인 공간의 필요성까지 이 세상을 이루는 모든 것들이 다 함께 살아가는 것에서 온다고 역설했다. 이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이 <인간의 조건>에 대한 깊은 통찰을 아주 속 깊게 우려낸 사골국처럼 느껴진다. 이 영화에서 대화하는 사소한 것들, 공간들, 하녀의 움직임부터 루돌프 회스의 동선과 공간까지 이 모든 것이 <인간의 조건>의 목차처럼 느껴진다. 충격적인 영화다. <액트 오브 킬링>과 함께 과거의 비극이 단지 과거에만 국한될 것이 아닌, 날카롭고 깊은 인사이트를 보여주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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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웃기는 티키타카! 류승룡이 다시 돌아왔다! 장르만 로맨스!
류승룡 배우가 주연을 맡은 영화 장르만 로맨스가 개봉했습니다.
배우인 조은지 감독의 상업장편 영화 데뷔작이죠.
주요 등장인물들의 티키타카가 매력적이고, 특히 류승룡 배우의 코믹연기가 돋보이는 영화입니다.
물론 진중한 연기도 같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흥미롭고 따뜻하게 볼 수 있어요.
가족이나 친구들과 보기에 좋은 영화입니다.
사람들간의 관계에 대한 영화이니 주변 관계들을 생각하며 보시면 더 흥미롭게 보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세한 리뷰는 전체 영상을 봐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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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편 보다 조금 나아진 공조, 멋진 FBI요원을 더하다
?Rabbitgumi 입니다!
공조 2편이 개봉을 했어요.
현빈과 유해진의 합이 잘 맞았던 영화죠.
이번에는 다니엘 헤니가 미국 요원으로 등장합니다.
윤아가 던지는 유머도 꽤 타율이 높은 편이죠.
유일하게 명절 직전 개봉한 영화 공조2 인터내셔날
이 영화가 어땠을지 좀더 자세히 알려드릴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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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애프터 양> 메인 예고편
함께 살던 안드로이드 인간 ‘양’이 어느 날 작동을 멈추자
제이크 가족은 그를 수리할 방법을 찾는다.
그러던 중, ‘양’에게서 특별한 메모리 뱅크를 발견하고
그의 기억을 탐험하기 시작하는데…
무엇을 남기고 싶었어,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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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블랙 위도우> 마지막 선택 예고편
‘어벤져스’ 군단에서 강력한 전투 능력과 명민한 전략을 함께 겸비한 히어로 ‘블랙 위도우’ 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