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4-03-11 13:57:19
3월 둘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곡성> 뛰어넘은 <파묘> 800만 돌파
<곡성> 제친 <파묘>
<파묘>는 16일만에 700만 관객을 넘어서며 나홍진 감독의 <곡성>을 넘어 오컬트 장르 최고 흥행작이 되었는데요. 한국은 지금 파묘들었다. 이번주 주말 박스오피스 씨네픽과 함께해요
[국내 박스오피스]
장재현 감독의 <파묘>가 지난 주말에도 흥행 독주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누적 관객 수 804만여 명으로 <서울의 봄>보다 일주일 빨리 800만 관객을 넘겼습니다. 다음으로 <듄: 파트 2>가 누적 관객 수 128만 명, <웡카>가 340만명을 기록하며 각각 2위,3위를 기록했습니다.
북미 박스오피스에선 <쿵푸팬더 4>가 <듄: 파트2>를 밀어내고 1위에 올라섰습니다. <쿵푸팬더4>는 모든 쿵푸 마스터들의 능력을 복제하는 빌런 ‘카멜레온’에 맞서기 위해 용의 전사인 자신마저 뛰어넘어야 하는 ‘포’의 새로운 도전을 그립니다. 앞서 <쿵푸팬더> 시리즈는 국내에서 약 13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 전 세계적으로 약 20억 달러의 수익을 낸 드림웍스 최고 흥행 시리즈로 국내에서는 오는 4월 10일 개봉예정입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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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별한 시선으로 특별하지 않음을 말하다.
<디어 에반 한센(Dear Evan Hansen)>, <나, 다니엘 브레이크>, <말아톤>, <7번방의 선물>과 같이 장애를 겪고 있는 주인공을 중심으로 한 영화는 비록 상업영화에 비해 현저히 적은 수이기는 하지만, 국내외 영화계에 꾸준히 등장하고 있다. 앞서 예시를 든 영화들처럼, 장애와 같은 사회적 약자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들은 흔히 사회적 약자의 위치에 놓인 인물을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해당 인물이 어려움과 고난을 겪게 되는 모습을 통해 ‘사회적 약자인 주인공의 고난→ 조력자 혹은 특정 사건과 만남→ 주인공의 극복/ 희망’과 같은 클리셰를 사용해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러한 영화의 전개는 관객에게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혹은 상상해보지 못한 상황을 이해하고, 몰입해볼 기회를 제공하며, 영화에서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인물에 대한 이해와 통찰을 강화한다. 그러나 이러한 진행방식은 영화의 전반을 중심인물을 중심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어, 때로는 영화의 중심인물이 아닌 주변 인물들이나 그들이 겪는 사건, 영화 전반에 걸쳐 숨겨져 있는 의도와 영화의 주제에 대한 이해도와 관심도를 하락시킨다는 단점을 보이기도 하며 ‘주인공의 고난과 극복’이라는 전형적이고 반복적인 클리셰에 관객이 흥미를 잃게 될 가능성 또한 있다. 이런 ‘사회적 약자’라는 같은 소재를 가진 영화들의 어떤 공통적인 이야기 전개 방식 속에서 영화 <나는 보리>가 갖는 시선은 특별하다. <나는 보리>는 농인을 바라본다. 소수가 아닌 다수로서, 장애인 가족이 아닌, 비장애인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한 가족으로서,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소통하는 존재로서, 그리고 농인과 청인을 다르지 않은 시선에서 말이다.
1. 경계를 허무는 시선
‘코다(CODA:Child Of Deaf Adult)’는 농인인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난 청인 자녀를 뜻하는 용어로, 2020년에 개봉한 김진유 감독의 <나는 보리>는 ‘코다(CODA)’인 소녀 ‘보리’의 일상과 그런 보리를 통해 바라보는 세상을 담은 영화이다. 김진유 감독은 실제 농인인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난 ‘코다(CODA)’로, 영화<나는 보리>는 김진유 감독의 유년기를 바탕으로 한 자전적인 이야기로부터 시작되었다. 때문에 <나는 보리>의 주인공이자, ‘코다(CODA)’인 소녀 보리는 김진유 감독의 어린 시절이 투영되어있는 인물이라고도 볼 수 있다. <나는 보리>의 주인공인 11살 ‘보리’는 어린 시절 김진유 감독처럼 농인인 부모님을 대신해 은행 업무를 보고, 음식을 주문하고, 물건을 구매하는 등 주로 가정 내에서 아이보다는 어른들이 하게 되는 일들을 도맡아 한다. 영화 속 “나는 누나 귀 안 들리는 거 싫어. 치킨 못 먹어.”라는 농인 동생 정우의 대사를 통해서, 아침에 혼자 알람을 듣고 일어나 가족들을 깨우고 등교하는 보리의 모습을 통해서, 보리가 “내일 할아버지 집에 갈거야.”라는 갑작스러운 엄마의 말에도 따라나서 엄마와 동생의 몫까지 기차표를 구매하고, 택시 앞자리에 탑승해 길을 안내하고, 수어를 사용하지 못하는 할아버지와 농인인 엄마 사이에서 수화를 통역해주는 장면을 통해서 보리의 가족들이 생활의 얼마나 많은 부분을 보리에게 맡기고 의지하고 있으며, 보리가 가족들 사이에서 어떠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을지 짐작해볼 수 있다. 그렇지만 영화는 보리가 이러한 책임들을 도맡음으로써 결코 불행하다거나 힘겹다거나, 가족들이 보리에게 과도하게 의존하여 보리가 없이는 아예 생활이 불가능하다는 식으로 묘사하지는 않는다. 분명히 불리하고 힘든 요소를 지니고 있음에도 영화에서 보리네 가족은 따스함과 서로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넘치는 화목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어떻게 보면 가족 구성원 내에 농인이 없는 일반 가정보다 더욱 화목한 모습으로 말이다. 이는 은정이가 자신의 부모님은 항상 바쁘고 매번 걸려오는 전화와 부모님의 심부름은 다 자신의 몫이라고 투덜대며 보리를 부러워하는 장면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 이렇게 화목하고 따뜻한 가족의 묘사는 농인인 부모님과 청인인 자녀로 구성되었지만, 보통의 가족들처럼 따뜻하고 화목했던 김진유 감독의 가정환경이 반영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렇게 화목한 가족 내에서도 왠지 모르는 소외감을 느끼는 인물이 있는데, 바로 ‘보리’이다. 들리지 않는 부모님 혹은 동생 정우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다수에 속하는 청인 ‘보리’ 말이다. 이러한 설정은 <나는 보리>가 농인의 문화와 세상을 특별하지 않게 바라봄으로써 가지는 미덕을 돋보이게 해준다. 보리는 가족들 사이에서 생활하며 느끼는 알 수 없는 소외감에 매일 아침, 자신도 부모님과 동생처럼 소리를 듣지 못하게 해달라는 소원을 빌기도 하며, 심지어는 소리를 잃기 위해 MP3를 최대 음량으로 키워 이어폰을 귀에 바짝 꽂은 채 음악을 듣거나 물에 귀를 자주 담그면 청력이 감퇴한다는 TV 속 해녀의 인터뷰를 보고 직접 바다에 뛰어들기도 한다. 이러한 보리의 행동과 소외감은 일반 청인 관객들이 보기에 이질적이고 쉽게 공감할 수 없으며 한편으로는 충격적이라는 평가도 받는다. 그러나 이런 보리의 심리와 행동, 영화의 설정이 <나는 보리>의 진정한 가치를 드러낸다.
가족 내 유일하게 들을 수 있는 존재로서, 사회적으로 우리가 흔히 다수라 말하는 청인에 속함에도 보리가 농인으로 사는 삶을 원하는 모습을 통해 <나는 보리>는 장애인은 약자, 청인은 일반인이라고 흔히 우리가 말하는 이분법적 사고와 농인의 삶을 남다르게 바라보고 불편할 것이라 섣불리 동정하는 우리의 선입견을 깨트려주기 때문이다. <나는 보리>에는 농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특별하지 않기를 바라는, 있는 그대로의 농인을 보여주고 싶은 감독의 의도가 그대로 드러난다. 앞서 말했듯, 보리는 물품을 구매하고, 음식을 주문하고, 은행 업무를 보는 등 흔히 보호자가 해줄 법한 일들을 모두 맡아 하는데, 이렇게 가족들의 생활편의를 도울 뿐 아니라 보리는 사회로부터 가족들을 보호하기도 한다. 이는 보리가 동생 정우의 축구경기 출전과 엄마와 함께 옷을 사는 장면을 통해 알 수 있다. 동생 정우 역시 농인인데, 정우는 축구 실력이 뛰어남에도 귀가 들리지 않아 경기 수행이 어려울 것이라는 이유로 출전선수가 아닌 후보 선수로 지목된다. 이에 정우가 후보선수라는 것을 알게 된 보리는 이장님인 아버지를 둔 친구 은정이를 통해 정우가 축구경기에 출전할 수 있도록 돕는다. 또한, 보리가 엄마와 단둘이 옷가게를 방문한 장면에서 보리는 옷가게의 직원들이 자신과 엄마가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이유로 무시와 비하를 서슴지 않고, 옷 가격 또한 원가보다 높게 책정해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이후 보리는 잘못된 거스름돈을 점원에게 돌려주며 엄마에게 부당한 대우를 하는 모습을 목격했고, 자신은 들리지 않는 척하고 있었을 뿐 사실은 우리에게 어떤 행동과 말을 했는지 다 보고 들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표현한다. 이렇게 보리는 가족의 도우미와 더불어 보호자의 역할도 소화한다.
그렇다면 청인인 보리는 다른 이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을까? 가족들의 도움 없이도 모두 스스로 잘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보리가 가족을 돕듯, 보리 또한 가족의 도움과 관심, 사랑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은 영화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보리는 불꽃놀이를 보러 가족과 함께 시장에 나가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중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부모님의 손을 놓친다. 안내방송을 해도, 전화를 걸어도 들을 수 없는 부모님과 동생이기에 이들을 찾을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 보리는 막막하기만 하다. 이 순간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내내 밝고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던 보리는 처음으로 11살 제 나이 또래처럼 어린아이 같은 울음을 터뜨린다. 영화는 이렇게 가족 내에서 보호자의 역할을 하는 보리 또한 가족들의 보살핌과 도움이 필요하며, 우리가 사회적 약자라고 생각하는 농인도 도움을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큰 힘과 도움이 되어 주는 존재라는 걸 알려준다. 다음 소주제에서 더 언급하겠지만, <나는 보리>와 유사한 작품으로 미국에서 개봉한 <코다>라는 음악 영화가 있는데, 이 작품에서도 ‘코다(CODA)’인 주인공 소녀가 “지금까지 가족 없이 뭘 해본 적이 없어요.”라며 망설이는 모습을 통해 <나는 보리>와 마찬가지로 평소에는 자신이 가족들을 도와야 하지만 역으로 자신도 가족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걸 보여준다. 이렇게 영화 속에서는 청인과 농인이 모두 도움이 필요한 존재이기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만큼 강한 존재이기도 함을 보여주는데, 결국 <나는 보리>가 이야기하는 바는 이러한 영화의 장면들과 보리의 아빠가 보리에게 반복해서 뱉는 말을 통해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들리든, 들리지 않든 우린 똑같아.” <나는 보리>가 바라보는 청인과 농인은 연약한 존재이자 때론 강한 존재로서 장애의 유무와 관계없이 그저 똑같은 한 사람일 뿐이다.
2. 다르고도 같은 소녀들– 영화 <코다>의 루비, <나는 보리>의 보리
<나는 보리>의 보리와 유사하게 ‘코다(CODA)’ 주인공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를 그린 영화가 있는데, 바로 2021년 미국에서 개봉한 <코다>이다.
두 영화의 주인공 보리와 루비는 모두 코다 중에서도 가족 내에서 유일하게 소리가 들리는 자녀 'OHCODA’이자, 미성년자 코다 ‘KODA’에 속한다는 점, 그리고 영화가 청인과 농인의 화합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나, 두 영화 속 소녀의 가정 환경이나 농인의 세계를 묘사하는 방식, 그리고 인물의 선택에서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나는 보리>에서 보리의 관심이 가족들과 보내는 크고 작은 이야기들과 학교, 친구들과의 관계에 집중되어 있다면, <코다>의 루비는 졸업과 성인을 앞둔 나이로 진학과 가족의 생계 등 자신의 삶과 가족으로부터의 독립을 고민하는 데에 몰두한다. 두 영화에서 내가 가장 주목했던 차이는 보리는 가족들과 동일시 되어 자신도 소속감을 느끼기를 바라는 반면, 루비는 가족의 품에서 벗어나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가기를 원한다는 점이었는데, 이는 단순히 졸업 학년과 11살이라는 인물의 나이 차이 때문에 나타난 차이 만은 아닐 것이며, 두 소녀의 가정 환경과 제작자(감독)의 배경과 우리 사회에 깊게 자리 잡은 문화적 배경 또한 영화의 관점과 주인공의 선택에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루비의 가족은 아빠와 오빠가 운양하는 어선으로 근근이 생계를 유지해 가는데, 일정치 않은 수입과 틈만 나면 중간에서 이익을 떼가는 중개업자들 때문에 루비의 진학비용 걱정은 물론, 늘 생활비 걱정을 안고 지낸다. 또한, 루비의 가족은 가족 내의 강한 유대와 결속을 강조한다. 예를 들어, 루비의 엄마가 식사할 때 다른 행동을 하지 못하게 이야기하는 장면이나 가족의 일에는 꼭 모두가 함께 자리하게 하는 장면을 통해 루비의 엄마가 가족의 소통과 결속을 강조하는 인물로 그려지는데, “그거 알아? 엄마도 세상 밖으로 나와야 해.”라는 루비의 대사와 “들리는 년들은 나랑 말 안 해.”라는 엄마의 대사에서 유추해볼 수 있듯, 사실 엄마의 이러한 행동은 청인과의 교류는 두려워하며 피하고, 농인에 공감할 수 있는 가족 내에서 소속감과 안정감을 유지하려는 엄마의 방어기제이다. 그리고 이렇게 가족 내의 유대를 강조하는 엄마의 행동과 자신도 부양의 대상이라는 인식이 저절로 심어지게 되는 루비네 가정의 분위기와 환경은, 루비가 가족에게서 벗어나 세상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열망을 더욱 부추겼을 것이다. 반면, 보리의 가족은 루비네 가족과 같은 입장으로, 농인으로서 겪는 불편함과 어려움이 분명 있음에도 따뜻하고 화목한 가정의 본보기라고 표현해도 어색함이 없을 정도로 따뜻한 모습을 보인다. 오히려 <나는 보리>에서 보리의 부모님은 큰 부담이 될 수 있는 수술비조차도 전혀 상관없다며 정우와 보리의 귀를 위해선 큰 비용지출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이고, <코다>에서는 가족의 생계수단이던 낚시도 <나는 보리>에서는 보리 아빠의 오랜 취미이자, 어린시절부터 아빠의 유일한 친구가 되어 준 존재, 아빠와 보리가 속마음을 교감하게 되는 시간과 배경으로 나타난다. <코다>는 미국에서 제작된 영화이며 원작 영화인 <미라클 벨리에>는 프랑스에서 제작되었고, <나는 보리>는 우리나라의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국내에서 제작되었다. 이에 루비와 보리의 선택 차이에는 우리나라보다 비교적 이른 나이의 면허취득과 독립을 맞이하는 서양의 문화와 개인주의, 그리고 한국의 가족공동체 정신과 협동, 한국의 ‘정’이라는 이데올로기 또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가정과 사회에 대한 루비와 보리의 관점과 선택에서는 차이를 보이지만, 두 영화 모두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농인과 청인의 경계를 허물고, 화합과 이해에 도달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점은 같다. <코다>의 경우 영화의 후반부. 음악 영화답게 음악을 통해 주제를 드러낸다. 루비의 오디션과 대학 진학을 내내 반대하던 루비의 부모님은, 교내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루비의 모습과 루비의 노래에 환호하는 관객의 모습, 그리고 그 누구보다 노래를 사랑하는 듯한 루비의 태도를 보고 오디션 당일 아침, 직접 운전을 해 오디션장까지 함께 간다. 오디션장에서 루비가 부르는 노래는 “Both sids now”. 앞서 말했듯, 영화의 메인 사운드 트랙이자 주제를 나타내고 있기도 한 이 루비의 오디션 곡은 “하려던 일들이 많았지만 구름이 내 앞을 막았지. 이제 구름을 양쪽에서 보게됐어. 위와 아래에서”, “이제 사랑을 양쪽에서 보게 됐어. 주는 쪽과 받는 쪽에서”, “이제 인생을 양쪽에서 보게 됐어. 이기는 쪽과 지는 쪽에서”와 같이 성장하며 주변에 있던 것들에 대해 달라진 이해와 시선에 대한 가사를 담은 곡으로, 루비가 ‘코다(CODA)’로서 살아가며 때로는 농인인 가족이 자신의 인생의 장애물이라고 생각했던, 때로는 농인 가족 속에 속한 유일한 청인이 자신이 소외된 존재인 것처럼 느껴졌던, 때로는 다른 가족들과 다른 자신의 가족이 부끄럽고 이해할 수 없었던 루비가 이제는 농인과 청인의 입장 양쪽 모두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으며 가족을 이해하게 되었음을 노래한다. 그뿐만 아니라, 오디션 현장에 몰래 들어온 가족들을 위해 루비는 노래를 부름과 동시에 가사에 맞추어 수화를 하는데, 이 장면을 통해 영화 <코다>는 루비의 성장과 이해, 농인과 청인의 교류와 화합을 완벽히 실현시킨다.
<코다>가 서로 다르다고 생각했던 이들의 이해와 화합에 중심을 두었다면 <나는 보리>는 서로 간의 이해와 더불어 ‘코다(CODA)’로서 살아가는 보리의 자아정체성 확립과 농인과 청인과의 경계를 허무는 것을 중점적으로 다루며, 농인도 청인과 다를 것 없는 평범한 한 사람이라는 점을 더 강조해 말한다. <나는 보리>의 미덕은 바로 이렇게 농인 가족이 등장하지만, 비장애인 가족과 다르지 않은 보편적 정서를 다룬다는 점에 있다. 다름보다는 같음을 느끼게 하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허물게 한다. 실제로 나는 보리의 김진유 감독은 “처음부터 장애를 어떻게 다루겠다는 거창한 목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보리의 감정에 집중했고, 그 감정선을 따라 보리 가족의 모습을 묘사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기존의 장애를 다룬 영화와 차별점을 갖게 된 것 같다.”라며 특별한 의도를 담기보단 오히려 그저 농인을 향한 시선이 특별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을 뿐이라고 인터뷰에서 말한 적이 있다. 영화 <나는 보리>의 후반부에서, 보리는 시장에서 구매했던 부적인 ‘악마의 눈’을 바다에 던지는데, 이러한 보리의 행동을 통해 일시적이지만 농인의 입장을 직접 체험해보고 사회의 차별적인 시선을 경험해본 보리가 더 이상 가족에 대한 타인의 차별적인 시선이나 편견을 의식하지 않게 되었으며 ‘코다(CODA)’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하고, 타인의 시선이 어떻든, 자신에게는 그 누구보다 평범하고 소중한 가족의 의미를 확립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나는 보리>는 보리가 도로와 바다 사이 좁은 방호벽 같은 길 위를 양팔을 벌린 채 균형을 잡으며 걸어가는 모습이 배우들의 이름과 함께 등장하며 마무리되는데, 도로도 바닷가도 아닌 사이 도로 방호벽 위를 조심조심 걸어가는 보리의 모습을 통해 농인과 청인 사이에 놓여있는 ‘코다(CODA)’ 보리의 정체성과 농인과 청인의 경계를 허무는 시도를 완성한다.
3. 보리가 보여주는 농인의 세상
<나는 보리>에서 보리는 가족들과 같아지고 싶다는 마음에 농인이 되기 위한 노력 중 하나로, 물에 귀를 자주 담그면 잘 들리지 않는다는 TV 속 해녀의 말에 직접 바다에 뛰어들며, 이상 없이 무사히 구조되었음에도 보리는 이후로 계속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된 척, 자신도 농인이 된 척 행동하는데, 이렇게 농인으로서 생활하는 동안 보리는 농인을 향한 사회의 시선을, 가족들이 농인으로서 겪었을 어려움과 외부에서 받았을 차별들을 경험하게 된다. 앞서 <나는 보리>의 미덕은 농인 가족이 등장함에도 비장애인 가족과 전혀 다른 바 없이 느껴지는 보편적인 정서를 다룬다는 점이라고 하였는데, 이렇게 영화 전반에 걸쳐 경계를 허물고, 보편적인 정서를 다루지만, 보리가 직접 농인의 입장으로 살아가는 생활들을 담음으로써 일상 속에서 농인이 겪게 되는 불평등한 차별과 시선 또한 짧은 내에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 또한 <나는 보리>의 또 다른 미덕이라고 볼 수 있다.
보리가 가족들처럼 농인이 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친구들은 학교에서 이전과 확연히 다른 태도를 보인다. 보리와는 상의 없이 보리에게 화장실 청소 당번임을 통보한다던가, 은정이와 보리가 나란히 앉아있는 모습을 보았음에도 보리를 투명인간처럼 쏙 빼놓고 은정이에게만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식으로 말이다. 학교와 또래 친구들 내에서뿐만 아니라 보리는 주변 어른들에게서도 평소에는 보지 못했던 모습들을 보게 되는데, 부모님 대신 정우와 농인이 된 척하는 보리를 데리고 병원에 간 고모가 ‘착한 거짓말’이라는 명분으로 병원에 다녀온 후 엄마, 아빠에게 수술하게 되면 정우가 앞으로 축구를 하지 못할 것이라는 의사의 말을 전하지 않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또한, 엄마가 함께 간 옷가게에서는 보리와 엄마가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이유로 몰래 점원들끼리 상의하여 더 높은 가격으로 옷을 판매하는 것을 보게 되며, 지나가는 보리를 본 동네 어른들이 “어린 것이 딱해서 어떡해.”라며 들리지 않게 된 보리를 안타까워하며 안쓰러운 시선으로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을 바라보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렇게 보리가 농인인 체를 하며 겪게 되는 주변의 변화와 상황들은 우리가 영화 밖 현실사회에서 농인을 바라보는 태도를 잘 반영하고 있다. 모두가 그렇다고 말할 순 없겠지만, 우리 사회는 흔히 장애를 섣불리 안타깝다는 식으로 바라보거나 ‘힘들겠다’라는 식으로 동정 같은 공감을 한다. 작은 시선, 별 의미 없는 말 한마디일 수 있지만, 때로는 이렇게 무의식적으로 툭툭 나오는 시선과 말들은 당사자의 마음에 꽂히기도 한다. 이렇게 영화 속에서 11살 소녀가 특별히 큰일 없이 지나가는 소소한 일상 속에서 차별을 경험하도록 한 것에도 농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특별하지 않았으면 하는 김진유 감독의 바람과 유년 시절 감독이 겪었던 감정, 그리고 그의 자전적인 이야기들이 바탕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김진유 감독은 “제가 만났던 농인 부모 중 60% 정도가 자녀가 농인으로 태어나길 바랐다. 농인이라는 것 자체가 불편하지 않고,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인터뷰한 바 있는데, 이를 통해 사회에서 우리가 농인을 볼 때 무의식적으로 우리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경향이 개입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감독이 영화에서 보리가 직접 농인을 체험하게 함으로써 농인이 일상 속에서 빈번하거나 흔하게 겪게 되는 어려움을 보여주고, 그 어떤 가정보다 따뜻하고, 온전하고, 화목한 가정의 분위기를 그림으로써 현실에서의 농인을 향한 특별한 시선을 제거하고자 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4. <나는 보리>에 대한 글을 마치며
영화 <나는 보리>는 농인의 삶을 이야기함과 동시에 ‘코다(CODA)’라는 익숙하지 않은 용어와 존재를 알리고, 이런 ‘코다(CODA)’ 소녀를 주인공으로 설정함으로써 단순히 농인의 생활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 농인과 청인,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구분하는 경계를 허물고 농인 가족이 특별하지 않은 보통의 가족임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또한, 보리가 농인이 되고 싶어 하는 바람을 통해 관객들에게 보편적인 사고에서 전환된 시각과 관점을 제공한다는 점에서도 큰 의의를 지닌다.
<나는 보리>의 김진유 감독은, “장애인 가족도 비장애인과 다르지 않다는 식의 묘사도 하고 싶지 않았고,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농인 가족의 평범한 일상과 자신이 살았던 모습만을 보여줘도, 대중이 농인을 조금 더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라고 인터뷰에서 생각을 밝힌 바 있다. 이러한 감독의 애정 어린 시선이 영화 <나는 보리>와 그것을 보는 관객에게도 통한 것일까. <나는 보리>의 보리네 가족은 보는 사람의 마음도 더불어 따뜻해질 정도로 그 누구보다 화목하고 행복해 보이며, 영화를 통해 그들의 삶과 ‘코다(CODA)’로서 살아가는 보리의 삶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들을 더 이해하고, 그들과 더 가까워지고 싶다는 마음이 저절로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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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여름의 일주일 / A Week Away, 2021
뮤지컬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넷플릭스 오리지널인 <그 여름의 일주일>은 나름의 기대를 걸었던 작품입니다. 점차 뮤지컬 영화가 보기 힘들어졌을 뿐 아니라 코로나19로 인해 그나마 볼 수 있었던 뮤지컬 영화들을 만나기 힘들어졌으니까요. 그런 와중에 넷플릭스에서 종종 뮤지컬 영화를 제작해 주니, 비록 집에서 관람해야 하지만 경쾌한 음악이 곁들여진 신작 영화를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하게 되었네요.
아무튼 기대를 품었지만 자세한 조사까지 하지는 않았던 터라 영화를 틀자마자 조금은 당황했습니다. 개인적으로 포스터만 봤을 때는 우연히 만난 남녀의 풋풋하고도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를 풀어낼 것처럼 보이는데, 갑자기 여름 캠프를 떠나더라구요. 이때 아차 싶었습니다. 영화의 관람 등급을 보면 알겠지만 <그 여름의 일주일>은 가족들이 모두 볼 수 있게 만들어진 가족 뮤지컬 영화입니다. 그래서 전체 관람가 등급이 가지고 있는 몇몇 한계점들을 자연스레 내포하고 있기도 하구요.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유치하게도 느껴지는 스토리는 물론, 아이들이 신경 쓰지 않을 캐릭터의 묘사부터 배경 설명, 그리고 급한 전개 등이 보인다는 점은 어쩔 수 없이 아쉽게 다가왔네요. 의미없는 행동들의 나열들도 상당히 거슬리기도 하구요. 하이틴 분위기의 로맨스인 줄 알았는데, 이것도 저것도 아닌 구성 또한 상당히 애매하게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전체적으로 디테일에 신경 쓰지 않고, 가족 영화라는 큰 틀 안에 일단은 두루뭉술하게 맞춰둔 느낌이 강한 영화였습니다.
노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일단 노래의 멜로디 자체는 좋았습니다. 딱히 꽂히거나 중독성 있는 넘버는 없지만, 어느 정도 신나게 들을 수 있을 정도의 노래였네요. 다만 넷플릭스 오리지널 뮤지컬 영화는 확 다가오는 무언가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 참 아쉽게 다가옵니다. <더 프롬>도 그랬지만 보통 뮤지컬 영화하면 플레이 리스트에 넣어 두고두고 듣는 맛이 있어야 하는데, 한 방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드네요. 개인적으로 노래 가사도 뭔가 깊은 의미를 담고 있지 않고 그 순간의 즐거움을 표현하는 것에 그친다는 점도 조금은 아쉽게 다가옵니다. 뭐 이것 또한 가족 영화라는 틀에 맞춰 쉽게 쓴 탓도 있겠지만, 뭔가 뮤지컬 영화임에도 노래는 사이드 메뉴에 불과한 느낌이랄까요. 중요한 연결고리에 노래들을 집어넣어 그 효과를 상승시키는 것이 아니라, 일단 무조건 신날 때 넣고 보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노래가 여운이 남지도 않고 휘발성이 강하네요.
개인적으로 놀라웠던 점은 대놓고 기독교적인 색채를 띠고 있다는 점입니다.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더 프롬>에서 줄기차게 까댔던 게 기독교였던 것 같은데, 같은 넷플릭스 오리지널에서 기독교를 찬양하는 내용이 나오니 참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하네요. 종교에 관한 내용을 다루는 것은 뭐 제작자 마음이지만, 개인적으로 조금은 아쉽게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일단 정통 기독교적인 착하디착한 내용은 조금 낡아 보이기도 하거든요. 또한 영화의 메인 스토리에 너무 뜬금없이 끼어있는 느낌이 강하기도 하구요. 한계가 있었겠지만 어차피 다룰 소재면 조금 다듬어서 다뤘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구요.
나름의 장점도 보였는데, 디테일을 완전히 포기해버린 느낌이 강해서 안타까웠네요. 나름 캐릭터 간의 케미도 좋아서 짧지만 즐거웠던 어느 여름날의 기억을 상기시켜주기도 하지만 너무 순간적인 흥분으로만 다루고 있어서 허전한 느낌이 강했습니다. 유치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상당하구요. 여러모로 아쉽게 다가온 영화였습니다.
* 본 콘텐츠는 블로거 팬서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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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탄광 속 카나리아는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대기 오염으로 황폐해진 2071년 서울. 사람들은 네 구역에 나뉘어 산다.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되는 최상류층 거주 구역인 코어 구역. 중상류층 거주 구역인 특별구역. 산소를 공급받아 살아가는 일반구역. 아무런 지원이 없는 난민구역. 산소를 독점한 천명 그룹과 산소를 전달하는 택배 기사 없이 이 세계를 살 수는 없다. 그러나 언제나 혁명은 있는 법. 난민 출신 택배기사 '5-8'(김우빈)이 속한 지하 조직 '블랙 나이트'는 천명 그룹 없는 세상을 꿈꾸며 천명그룹 대표 '류석'(송승헌)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이에 5-8은 자기 진의를 의심하는 군인 '정설아'(이솜)와 택배기사를 꿈꾸는 난민 '사월'(강유석)을 이용해 류석에게 접근하기 시작한다.
<택배기사> 선배의 전철을 답습하다
한국 영화 시장은 SF 불모지다. 한국 SF 영화는 특히 더 성공하기 어렵다. 팬데믹 이후로 기간을 한정해 보자. 그나마 넷플릭스 <승리호>가 한국형 스페이스 오페라 영화의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넷플릭스 <고요의 바다>, <정이>나 티빙에서 공개된 <서복>은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최동훈 감독의 <외계+인 1부>도 실패를 맛봤다.
의아하다. 한국 SF 영화는 왜 성공하지 못하는 걸까? 이유야 많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한국 영화는 소재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 소재 자체는 흥미롭다. 달 탐사, 안드로이드, 복제 인간, 외계인, 시간 여행... 할리우드도 오랜 기간 사랑한 아이템이다.
그러나 소재나 설정은 배경에 불과하다. 판은 잘 깔아놓지만, 결국 다른 장르로 돌아선다. <고요의 바다>, <정이>, <서복>의 끝은 모두 신파다. <외계+인 1부>도 SF라고 하지만 <전우치> 속편처럼 보인다. 굳이 SF 영화를 표방하지 않아도 스토리텔링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택배기사>도 마찬가지다. 한국 SF 영화의 고질병을 답습했다. 소재는 신선하다. 택배기사가 디스토피아 세계 질서를 유지하는 영웅이라는 발상. 대기 오염이 극심한 지구에서 산소를 확보한 기업이 권력을 잡는다는 설정. 그럴듯하다. 하지만 다른 SF 영화와 비교해 보면 <택배기사>는 실패에 가깝다. 소재를 활용하는 디테일, 소재와 주제 의식의 결합은 여전히 충분치 않다. 클리셰의 향연도 참신한 소재를 끝내 가리고 만다.
디테일: <매드맥스> 대 <택배기사>
<택배기사>와 비교하기 좋은 영화로는 우선 톰 밀러의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를 꼽을 수 있다. 소재를 활용하는 디테일의 문제를 한눈에 볼 수 있으니까. 두 영화는 디스토피아 세계관을 좌지우지하는 '절대 반지'가 등장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영화를 지탱하는 근간이다. 따라서 시각매체인 영화는 이 절대 반지의 힘을 직관적으로 보여줘야 한다.
<매드맥스>는 과제를 훌륭히 수행했다. 뜨거운 해와 녹초 하나 없는 메마른 사막. 배경만 봐도 목이 탄다. 거칠게 울리는 배기음은 그 자체로 갈증을 일으킨다. 영화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임모탄 조가 물을 조절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일순간 엄청난 양의 물이 폭포처럼 떨어진다. 사람들은 폭포 밑에서 물을 한 방울이라도 더 담기 위해 발악한다. 그 순간 이 디스토피아 사회의 계급 구조가 한눈에 들어온다. 덕분에 관객은 언제 어디서나 물을 절박하게 갈구하는 맥스에게 이입하기 쉽다.
<택배기사>는 이 지점에서 실패했다. 배경은 있다. 한국의 봄을 닮은 지저분한 대기와 메마른 땅은 산소가 중요한 이유를 알려준다. 그러나 산소의 중요성을 시각적으로 강렬하게 직접 보여주는 장면은 없다.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몇 분 못 버틴다는 대사는 힘이 없다. 등장인물이 너무나도 쉽게 마스크를 벗다 보니 임팩트가 부족한 까닭이다. 그 결과 산소를 지배하는 천명의 권세도 막연하게 느껴진다. <택배기사> 속 세계에 빠져들기 어려운 이유다.
메시지: <설국열차> 대 <택배기사>
<택배기사>는 메시지도 뭉툭하다. <택배기사>의 주제의식은 <설국열차>의 그것과 유사하다. 두 작품 모두 디스토피아 세계를 배경 삼아 체제 유지에 혈안인 기득권층을 비판한다. 자연 재앙이 닥친 가운데 권력층은 물자 배급을 제한한다. 철저히 칸을 나눈다. 단단한 계급 사회를 조직해 사회를 안정시킨다.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어린아이를 이용하는 비인도적인 일도 서슴지 않는다. 이에 비기득권층은 폭동을 일으키고, 혁명을 시도한다.
하지만 <설국열차>는 단순히 계급투쟁을 다루는 데에서 그치지 않았다. 기득권층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자고 쉽게 말하는 영화가 아니었다. 이 작품은 혁명이 궁극적으로 실패한다는 통찰을 보여줬다. 제 아무리 성공한 혁명이라 해도, 지배계층만 바뀔 뿐 실상은 달라지지 않는다. 혁명을 일으킨 이들도 권력에 취할 테니. 월포드가 커티스에게 자리를 넘겨주듯이. 그러니 이 악순환을 끝낼 방법은 하나다. 남궁민수처럼 아예 기차에서 탈출해야 한다. 따라서 <설국열차>는 불합리한 체제 자체를 송두리째 파괴하자는 외침이었다.
<택배기사>는 <설국열차> 같은 야망도, 통찰도 없다. 비판의 칼날은 충분히 예리하지 않다. 거칠게 말하면 안일하다. 시리즈 후반부에 천명그룹은 무너진다. 류석은 모든 권력을 잃는다. 그러자 대한민국 정부가 힘을 잡는다. 대통령은 새로운 보금자리인 A 구역이 모든 난민에게 열려 있다고 발표한다. 류석은 악으로, 대한민국 정부는 선으로 규정된다. '권력자만 바뀌었을 뿐 체제는 그대로 아닌가' 하는 의심은 이분법적인 구도 사이에 설 수 없다. 산소와 거주 구역이 여전히 권력자의 손아귀에 있는데도. 즉, 5-8의 혁명은 새로운 권력자에게 힘을 몰아줬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풍부한 이야기를 펼칠 만한 설정은 일차원적으로 소비된다. 예를 들어 5-8은 태양을 가린 먼지가 옅어지고 햇빛이 강해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는 기차 밖 얼음이 녹고 추위가 약해지고 있다는 <설국열차>의 설정과 판박이다. 그런데 함의는 전혀 다르다. 전자는 언젠가 마스크 없이 살 수 있는 세상이 올 거라는 일반론적인 희망을 보여주는 데서 그친다. 반면에 후자는 혁명이 단순히 지배층 타도에서 멈추면 안 된다는 핵심적인 설정이다. 기차 밖에서도 살 수 있으니 기차라는 시스템 자체를 파괴해야 한다는 야망이 담겼다.
카나리아는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택배기사>는 공허하다. 어두운 배경은 다양한 영화를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하다. 대기업의 음모와 계급 사회에 대한 경고는 다급하지 않다. 공허함은 클리셰가 채워 넣는다. 대기업 회장과 저항군 리더의 멘토가 막역한 친구, 동료 사이였다는 식의 익숙한 반전이 뒤따른다.
막연하고 평면적이며 예측 가능한 대립 구도 속에서는 캐릭터도 살아남기 어렵다. 카리스마 있는 히어로도, 위협적인 빌런도 없다. 그저 나쁘게 보여야 하니 나쁜 짓만 골라하는 악역을 내세운다. 실제로 류석의 행적은 기업의 수장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어리석다. 그는 폭주하다가 알아서 무너지고 혁명은 성공했다고 치켜세운다. 에피소드 6개에 긴장감이 감돌 수도 없고, 결말에 쾌감이 있을 수도 없는 이유다.
더 큰 문제도 보인다. <택배기사>의 실패가 <택배기사>만의 실패가 아닐 수 있다는 우려다. 최근 접한 OTT 작품 중 적지 않은 수가 최소한의 개연성과 볼거리를 제공하는 데 그치기 때문이다. 이들은 익숙하지 않은 장르를 활용하지만, 고민의 흔적이 부족하다. 현실 속 사건, 클리셰, 상징적인 장면을 짜깁기하고 이목을 끌 스타를 앞세운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우려된다. <기생충>과 <오징어게임>의 성공으로 촉발된 한국 콘텐츠의 성장이 양적 성장에서 멈추는 것은 아닐까 싶다. <택배기사>가 카나리아는 아닐까 싶다. K-콘텐츠 시장이 의외로 빨리 무너질 수도 있다고 경고하는 노랑새는 아닐까.
Dreadful 끔찍함
K 콘텐츠의 새 미션. 카나리아가 죽기 전에 탈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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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기의 진실
두 여자가 대화한다. 학생 인터뷰어와 작가 인터뷰이. 작가는 자꾸 인터뷰 내용에서 벗어나려 한다. 자신의 이야기보다 학생의 이야기에 더 관심이 많아 보인다. 인터뷰가 채 끝나기 전, 시끄러운 음악이 들린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그 음악은 작가의 남편이 튼 것이다. 작가는 또 저런다며 한숨을 내쉬고, 인터뷰를 급하게 끝낸다. 쿵쿵거리는 음악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움직이는 각자를 잡아내는 카메라. 그리고 작가의 남편이 죽는다. 남편의 죽음의 진실을 알아내기 위한 재판이 시작된다. 쟁점은 작가가 남편을 죽였는가.
『추락의 해부』는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크기를 활용한다. 크게, 시각과 청각이라는 두 요소에서 크기 대비를 잘 관찰할 수 있다. 먼저, 시각적 크기를 살펴보자. 감독은 의도적으로 클로즈업 쇼트와 롱 쇼트를 번갈아 사용하며 사실의 증거와 진실의 구성 사이를 유려하게 오간다. 인물의 감정이 드러나는 순간은 아주 가까이에서 촬영하여 눈의 미세한 떨림을 포착하는가 하면, 떨어진 남편의 모습이나 설원의 풍경을 아주 멀리서 촬영하여 전체를 조망하기도 한다.
이러한 시각적 크기는 영화가 취하는 진실에 대한 태도와 밀접하게 관련 있다. 영화에서 표현된 시각적 크기는 한 규칙을 중심으로 치밀하게 설계되어 있다. 사실은 롱 쇼트로, 진실은 클로즈업 쇼트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를 이야기 하기 위해서는 ‘사실’과 ‘진실’의 차이를 먼저 규정할 필요가 있다. ‘사실’은 있는 그대로의 증거라면, ‘진실’은 사실을 바탕으로 구성되는 숨은 의미라고 규정할 수 있다. 즉, 사실은 현상을 포착하는 것이라면, 진실은 그것들을 조합해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추락의 해부』는 사실보다는 진실에 집중한다. 즉, 분절된 과거들이나 발견한 증거가 아니라, 각 인물이 알고 있는 것들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기억과 상상에서 진실을 파악하고자 한다. 그렇기에 영화는 롱 쇼트와 클로즈업 쇼트를 대비적으로 이용하며 관객이 사실보다는 진실에 관심을 가지도록 의도한다.
롱 쇼트는 대상보다는 배경을, 대상의 세세한 움직임보다는 큰 이동을 포착하는데 유리하다. 이러한 특성은 사실을 드러내는 것에 있어 용이하다. 롱 쇼트가 가장 흥미롭게 이용된 장면은 남편의 죽음에 대한 두 가지 가설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 영화는 여타 법정 드라마와 달리, 플래시백이 많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남편의 죽음을 설명하는 두 상반된 가설만은 플래시백으로 표현한다. 이때, 롱 쇼트를 이용하여 남편이 죽는 과정을 아주 멀리서, 부감으로 포착하며 그 사건의 전말을 관조하고 있다. 영화는, 이러한 부감으로 표현한 시퀀스를 통해서, 사건의 당사자가 아닌 검사와 부검의에 의해 남편의 죽음을 설명하는 과정이, 인물의 감정과 의미는 거세하고 그 움직임만 포착하는, ‘사실’을 찾아내려는 시도일 뿐이라고 보여준다.
특히, 이 장면에서 미니어처를 이용하여 상대적으로 일상적인 스케일의 화면을 마치 롱 쇼트인 것처럼 표현함으로써, 재판에서 인형처럼 이용되고 있는 인물들의 처지와, 그들과 어떠한 감정적 연결 없이 관조하고 있는 관객의 모습을 상기한다. 게다가 서로 상충된 두 설명을 모두 비슷한 방식으로, 또한 비슷한 분량으로 시각화하여 무엇이 사실인지조차 모호하게 한다.
즉, 영화는 롱 쇼트를 통해 진실이 거세된 사실의 무상함을 표현한다. 그리고 이때 아주 무미건조한 목소리, 이미지와 상충되는 사운드를 오버랩하여, 관객이 제시된 사실들을 믿을 수 없게 만들 뿐만 아니라, ‘사실이 과연 모든 것을 드러내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하도록 만든다. 많은 시각 정보를 담는 롱 쇼트가 오히려 사실의 부분만을 보여줄 뿐이다.
클로즈업 쇼트는 특정 인물 혹은 사물이 강조한다. 특히, 익스트림 클로즈업의 경우에는 눈의 미세한 움직임 등 아주 작은 움직임조차 포착한다. 그리고 이렇게 포착하는 이미지는 인물의 감정으로부터 기인한 변화들이다. 특히, 시각장애를 가진 아들이 사진을 가까이 들여다 보는 장면은, 아들의 볼 수 없는 눈 자체가 카메라가 되어, 자신과 사진을 클로즈업하며, 사실의 증거를 넘어 진실의 구성으로 이어지는 클로즈업이 잘 드러난 장면이다. 생각에 잠긴 인물의 모습, 선택을 해야 하는 인물의 모습 등을 아주 가까이서 면밀히 뜯어보는 것은, 관객으로 하여금 사건의 전말보다는 인물에게 사건이 가지는 의미를 궁금하게 만들고, 추리하게 한다. 즉, 서사의 중심이 인물이 스스로 구성하는 진실로 옮겨지는 것이다.
또한, 아주 제한된 것들만을 보여주기에, 관객은 시각 외의 정보를 요구한다. 숨소리, 목소리와 어조 등 청각 정보에 귀 기울이게 된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장면에서 청각 정보의 내용보다는 분위기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인물이 하는 대화의 구체적인 단어, 내용 보다는 그들의 목소리의 높낮이, 말과 말 사이의 쉼 등에 더 신경을 쓰게 된다. 이 또한, 사실보다는 진실을 파헤치는 것과 관련이 있다. 클로즈업 쇼트를 통해 자극되는 다른 감각은 구체적인 사실의 단순한 나열 너머의 분위기, 감정, 관점 등이 훨씬 더 두드러지게 만든다. 그리고 앞도적으로 롱 쇼트보다 클로즈업을 많이 쓰며, 심지어는 전반적으로 다른 영화에 비해 인물을 가까이서 담으며, 감독은 사실보다 진실에서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낸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은 시각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청각으로도 확장된다. 첫 장면에서부터 강렬한 음악은 큰 소리로 인물의 대화에 끼어들며 신경을 곤두세우게 한다. 영화에서 큰 소리는 두 가지의 역할을 한다. 하나는 방해이고, 다른 하나는 표출이다. 큰 소리는 음악, 대화 등에서 자주 나타나는데, 이는 종종 다른 사람 또는 상대와의 대화를 방해한다. 이로 인해 소통에서 단절이 발생하고, 이 요소들은 오해를 만든다. 충분한 정보가 부재하게 됨으로써, 그 뒤에 숨은 의미가 가려지는 것이다. 또한, 큰 소리는 발화하는 사람의 감정을 표출하는 수단이 되거나, 그 소리를 들은 사람이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거나 왜곡하는 계기가 된다. 남편은 자신의 불만을 큰 음악 소리나 목소리로 표출하고, 아내는 자신의 불만을 또 다른 큰 소리로 표현한다. 이것이 폭발하는 장면이 부부가 싸우는 장면이다. 반면, 아들은 부모의 다툼 소리를 들었다고 말하는 것을 통해 자신이 구성한 아버지 죽음의 진실을 표출하고, 실험을 통해 그것이 부정되었을 때, 자신이 구성한 진실을 의심하고 왜곡하기도 한다.
반면, 영화는 아주 작은 소리를 통해, 인물의 진심을 드러낸다. 살아 있는 인물인 엄마와 아들은 자신의 진실을 이야기할 때 상대적으로 작은 소리로 말한다. 혼잣말이나 둘 사이의 대화를 통해서만, 심지어는 음소거를 통해서, 진심을 드러내고, 자신의 진실을 표출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두드러지는 장면은 아들이 개를 통해 실험하는 장면과 자신만의 진실을 선택하는 장면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진실을 이야기하는 그들의 목소리는 너무 작아서, 또한 너무 개인적이고, 때로는 고요해서 그것들은 외려 왜곡되고 무시되며 방해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아들과 엄마의 대화가 차단되고, 아들 혼자 방에 들어가고, 엄마와 떨어져 있는 시간을 갖기를 요청하는 모습에서 이러한 불통이 표현된다. 하지만 시끄러운 첫 시퀀스와 대비되며 끝나는 고요한 마지막 시퀀스는 소리가 거세되고 아들의 심리이자 아빠의 분신으로써 역할하는 개와 함께, 잠에 드는 엄마의 모습에서 그들의 소음과 고요에 의한 불통이, 적요에 의한 소통으로 변한다. 말로써 이어지던 단절이, 행동으로서 연결된 것이다.
법정에서 검사는 아내가 쓴 소설의 일부를 인용한다. 주인공은 20장과 300장의 대립을 강조하고, 소설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을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이는 남편과 표절 문제로 싸울 때도 드러난다. 영화는 끊임없이 크기를 대비하며, 진실의 부분과 전체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탐구한다. 영화는 이렇게 크기의 대비를 통해 사실의 모호함과 진실의 개별성을 직시하게 한다. 이를 통해, 과연 전체는 부분의 집합에 불과한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진실은 구성됨을 아들과 그를 관찰하는 카메라의 거리, 아들을 둘러싼 소리의 크기로 표현한다. 시각장애를 가진 아들이 느끼는 시각적 비합리와 청각적 모순성을 통해 영화는 진실이란 무엇인지 질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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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죽음이 가스라이팅이 아니길
태어나는 것은 자유가 아니지만 죽는 것은 자유로워진 세상에서 노인들은 정말 행복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일까? 현대사회의 키워드 중에서 고령화는 모를 수가 없는 단어가 되었다. 몸이 망가질대로 망가져도 정신이 말짱해 고통 속을 해매는 경우, 몸은 비교적 건강하지만 정신은 온전치 못해 가족들이 고생하는 경우가 속출하면서 웰빙, 웰다잉 이라는 단어도 참 많이 중요해지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은 내 노후가 충분한 돈이 있는 안락한 삶이라는 전제가 깔려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노인은 생활전선에서 제외되고, 거듭 제외당하다가 결국 비참한 말로의 주인공이 된다. 그만큼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없는 삶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비참한 삶으로 이끌기에 살아갈 날은 남았지만 돈은 없는 노인에게 삶은 지옥과도 같다. 이 영화는 그런 노인들의 삶을 그리는 영화다.
1. 삶에 큰 화두를 던지는
영화를 보는 내내 정말 서글펐다. 내 인생도 저렇게 궁지에 몰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자식이 있다면 자식들이 케어해줄 수도 있겠지만 내 인생은 자식이 없을 것이라는 가정을 두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이기에 돈을 많이 모아놔야 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모아둔 돈이 없으면 결국 열심히 살아도 사회는 나를 점점 소외시킬 것이기에, 소외된 삶속에서 나는 점점 외로워져갈 것이다. 외로움은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내 신념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황이 닥칠 수 있다는 위험을 느끼지 못한다면 내 인생은 외로움을 넘어 비참함이 될 것이다.
이 영화는 어떻게 늙어갈 것인가에 대한 심오한 고민을 하게 되는 영화임은 틀림없다. 노인들을 대하는 사회의 분위기와 젊은 세대들이 바라보는 죽음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노인들의 모습 등등 노인들 중에서도 저소득층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영화일 것 같다.
2. 너무 답이 뻔히 보이는
하지만 영화는 노인들의 한정적인 모습만으로 보여주고자 했던 지점이 조금 아쉬웠다. 물론 사회적으로 노인을 바라보는 분위기는 아주 긍정적이진 않더라도 그들을 보호해야할 정부마저 플랜 75를 출시하며 어찌보면 노인을 위하는 척하지만 노인들을 사지로 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이영화는 내용이 잔잔하다 못해 지루하다고 느낄 수 있는 지점이 많다. 혼자 사는, 외로운 노인의 삶을 그리는 것만으로도 동정의 요소가 참 많은데, 다른 노인들의 다양한 죽음의 선택 이유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 정부의 무관심, 사회의 무관심으로 체념해서, 혹은 더 이상 물러설 데가 없어서 죽음이라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는 사람들만 보여주는 지점이 조금 아쉬웠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삶의 미련을 버리는 이유가 조금 더 다양하게 나왔더라면 더 공감이 가지 않았을까 싶다. 그저 버림받은 노인들의 불쌍한 모습만을 묘사하는 것만으로 제대로된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결국 이 영화의 장르는 신파가 아닐까.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울어, 참고 또 참지 울긴 왜 울어, 영화를 보면서 왜 이 가사가 계속 맴돌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신파라고 생각하면서도 주인공 할머니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걸 보면 어쩌면 난 아닌 척 하면서도 이 영화에 동화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직 조부모님이 생존해계신 나로서는 아주 무시할 수는 없는 이야기였는지도 모른다.
다시 물어보겠다.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사회가 온다면, 당신은 정말 삶의 미련을 버리고 자의적으로, 더 아프기 전에 비참해지기 전에 하루라도 조금 더 건강할 때 죽음을 맞이할 것 같은가? 나는 별로 그럴 것 같진 않다. 누구에게나 삶의 이유가 있기에 삶에 대한 집착도 어느정도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쿨하게 자신의 인생을 포기할 수 만은 없을 것이다. 적당한 체념이 들어가겠지. 하지만 나의 삶의 끝이 자발적이든 타의적이든 누군가에게, 사회에게 알게모르게 가스라이팅당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었음 좋겠다. 나의 죽음을 향한 선택이, 나의 안식을 위한 길이길 바란다.
이 영화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참여한 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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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래식은 이렇게 만드는 것이다
이전에 파묘를 리뷰했지만 사실 파묘가 더 일찍 개봉했음에도 불구하고, 듄을 먼저 보았다. 그만큼 오랫동안 기다려온 기대작이었다는 뜻이다. 그래놓고 이렇게 늦게 리뷰하는 것은 나의 게으름이라, 할말이 없지만.
그래도 기대한 보람이 있었다. 간만에 제대로된 클래식을 맛보았는데, 잘 다듬어진 클래식이라 두고두고 볼 것 같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보면 이렇게 스케일이 큰 영화를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정말 다시금 대단하다고 느낀다. 그리고 이런 영화를 대하는 관객의 자세란 어떤 것일까 다시금 되새긴다.
'듄 파트 1'의 내용은 영웅이 되기 전의 유약했던 시절의 고난을 다루었다면 '파트2'는 영웅이 될 조짐이 보이는 상황 속 주인공이 처한 딜레마와 고뇌를 담은 작품이다. 영화 속에서 그가 영웅이 될 지 안 될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영웅이 될 것은 자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다만, 영웅의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 가진 고뇌는 이렇게 고독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웅장함은 마치 성경에서 처음 출애굽기를 읽을 때의 상상 속 웅장함과 비슷했다. 그러고 보면 이 영화는 과거 많은 설화, 전설 등에서 레퍼런스를 찾을 수 있다. 어찌보면 흔한 서사라고 볼 수도 있어 서사 자체는 흥미롭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클래식은 영원하다고 했던가. 흔한 서사를 다룰 때에는 디테일이 중요한 것 같다. 이 영화는 웅장함을 지키는 게 중요했는데 그 웅장함의 정도가 과하면 유치해보이고, 약하면 이게 영웅인지 헷갈리게 된다. 이 적당한 웅장함을 유지하기 위한 디테일로는 폴 아트레이디스가 무아딥이 되는 과정에서 자신의 자아와 영웅이 될 운명 사이에서 고뇌하는 지점이 있다. 영웅이 될 사람은 태생부터 비범했으며 온 우주가 그의 영웅만들기에 혈안이 된 것만 같고 개인으로서의 그의 모습은 많이 무시되는 과거의 클리셰와는 달리 듄의 폴 아트레이디스는 유약함을 가진 한 개인으로서의 면모도 보인다. 개인으로서의 삶과 사회를 위해 나자신을 희생해야 하는 팔자 사이에서 그는 결국 영웅이 되기를 선택한다. 그걸 보면서 영웅 팔자는 일종의 가스라이팅 같기도 하면서 그 가스라이팅 마저도 그 팔자의 일부인 것 같기도 하다.
수많은 영웅 서사 중에서도 이 영화가 독특한 영웅 서사가 된 디테일에 대해 논한다면 누군가는 사막 배경이라는 척박한 환경을 논하고, 디테일 중에서 웅장함을 배가시키는 음악도 한몫 한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주인공 폴 아트레이디스의 고뇌를 얘기할 것 같다.
이런 영화가 만들어졌다면 관객은 그저 그 웅장함을 온전히 느끼기만 하면 된다. 이 영화의 장점은 클래식한 서사에 가장 현대적인 기술력을 덧붙여 클래식이 가야할 길을 보여줬다는 데에 있다.
클래식이 고플 때 나는 90년대 혹은 그 이전의 영화를 돌려보곤 한다. 현재까지 이용되는 서사의 대부분이 그 때 이미 등장했었기 때문에 가장 처음 만들어졌던 서사가 가장 자극적이고 재밌는 법이다. 그래서 현 시대는 편집의 시대라고 하지, 창조의 시대라고 하지 않는 것이다. 기술력은 과거보다 압도적으로 달라졌기에 모두가 다 아는 출애굽기 조차 다시 이 기술력으로 묘사한다면 인간이 느낄 신적인 존재에 대한 위압감은 더 배가될지도 모른다. 이 영화에서도 그런 기술력이 가진 장점의 정점을 본 것만 같았다. 트랜스포머, 신과 함께 등 선진 기술력으로 마케팅했던 수많은 영화를 보았지만 이 영화의 그런 기술력을 앞세운 영화의 가장 성공적인 만듦새의 표본을 보는 느낌이랄까. 돈을 쓰려면 이렇게 써야하는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관람했었다.
총평
꼭 영화관에서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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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vielog #7] 정말 우리 엄마 맞아? 엄마와 딸의 관계를 보여주는 영화 런
Rabbitgumi 입니다.
극장에서 상영 중인 영화 런을 보고 왔습니다.
배우 사라폴슨이 주연을 맡은 스릴러에요.
영화 서치를 연출했던 아니쉬 차칸티 감독이 연출한 두 번째 영화입니다.
굉장히 스릴있고 재미있는 영화에요.
집이라는 공간과 장애인으로 가지는 제약을 잘 활용하고 있죠.
엄마와 독립직전 딸과의 관계를 풀어내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영상을 참고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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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아담> 메인 예고편
혼전 임신 사실을 숨겨야만 해서 고향은 떠난 여인 ‘사미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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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자기 집에 며칠 간 머물며 함께 빵 만들기를 허락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세 사람은 서로에 대한 마음을 점차 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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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위쳐 시즌 2> 티저 예고편
[2021년 12월 17일, 넷플릭스 공개]
전설이 다시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