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서 유2024-01-21 15:43:09
익숙함과 고루함 사이
<아쿠아맨과 로스트 킹덤>을 보고서
<아쿠아맨>은 다 쓰러져가는 DCU에 한 줄기 빛이 되어준 몇 안 되는 영화 중 한 편이었다. 컨저링시리즈의 제임스완 감독이 만들어내는 활기찬 액션 쾌활극은 아쿠아맨이 처음 등장한 <저스티스 리그>에서 그의 활약을 상쇄시키기에 충분하였다. 게다가 극 중 메라역의 엠마 허드의 이미지가 바닥을 치기 전이었던지라 <아쿠아맨>은 잘 만든 한 편의 오락영화로서 기능을 충실히 다하였다. 이런 괜찮은 작품을 전작으로 두고 있으니 <아쿠아맨과 로스트 킹덤>이 기대되지 않을 수가 있으랴.
<아쿠아맨과 라스트 킹덤>의 줄거리는 기타 여느 버드무비와 큰 차이점 없이 평이하게 흘러간다. 전 편에서 감옥에 수감됨 이부동생 '움'과 함께 빌런인 '블랙 만타'를 소탕하고자 하는 내용이 기승전개로 매끄럽게 전개된다. 가족애라는 하나의 큰 주제 안에서 이부동생과 티키타카하며 적을 소탕하는 과정은 무척이나 익숙하기에 크게 거슬리지 않는다. 이번 영화 역시 오락영화로서 충분히 기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익숙함에는 한 끝차이로 고루함이 따라온다. 이미 이러한 히어로, 버드무비를 많이 봐온 관객들은 전혀 새롭지 않은 스토리에 자칫 지루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재미있게 본다면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재미있게 볼 수 있지만 아쿠아맨의 색다른 무언가를 기대했던 관객들 또는 팬들이라면 실망할지도 모른다. 흡사 <토르: 러브 앤 썬더>의 양분화된 관객의 반응을 보는 듯하다. 물론 무조건 모든 영화가 새로울 필요도 없거니와, 재밌게 잘 만들면 충분하지라는 생각의 관객들이라면 이 영화를 즐겁고 유쾌하게 관람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 영화가 히어로영화라는 점에서 끊임없이 MCU의 전성기 때와 비교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버드무비의 형식을 취하고 있기에 실제로 주인공은 두 명이므로 시선이 두 캐릭터에 분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주인공인 엠마 허드의 논란과 DCU의 상황 등을 미루어 보았을 때 위험한 모험보다는 안전한 길을 택한 제임스 완 감독에 결정도 이해되는 바이다. 영화 <아쿠아맨과 로스트 킹덤>은 오락영화로서의 기능은 충분히 다하였기에, 향후 시리즈를 내다보고 영화가 진행되는 것은 어쩌면 모험을 넘어 도박일 수 있기 때문이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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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에겐 이 꼰대가 필요하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목을 매달 밧줄을 산 뒤 회사에 사직서를 내고, 집에 들어오던 전기도 끊고, 모든 것을 포기하기로 결심한 '오토’(톰 행크스). 정장을 차려입고 죽을 준비를 다 마친 그. 그러나 세상은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드디어 죽을 수 있겠다 싶은 타이밍마다 이웃들이 그를 방해하기 때문. 새로 이사 온 '마리솔'(마리아나 트레비노)과 '토미'(마누엘 가르시아룰포) 부부는 주차도 제대로 못해서 오토의 속을 뒤집어 놓고, 아무 때나 먹을 걸 가져다준 뒤 오토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오토는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 '소냐'(레이첼 켈러)'의 묘비 앞에 앉아 이웃들 때문에 죽고 싶어도 죽지를 못한다며 푸념을 늘어놓는다. 하지만 그의 인생 최악의 순간, 원치 않았던 이웃들의 관심 덕분에 그의 삶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한다.
마크 포스터 감독의 신작 <오토라는 남자>는 스웨덴 소설 '오베라는 남자'를 영상화한 코미디 작품으로, 인생 최대의 트라우마에 빠진 한 남자가 어떻게 삶의 의지를 되찾는지를 그려낸 착실한 드라마다. 동시에 건실한 가족 영화이기도 하다. 먼저 떠나보낸 가족을 향한 오토의 사랑과 회한이 가슴을 울리기 때문이다. 영화는 코미디로 시작해서 잔잔한 감동으로 마무리되는 교과서적인 전개를 보여준다. 이 정공법은 꽤 성공적이다. 러닝타임 내내 관객석에서는 정확한 타이밍에 맞춰 웃음과 울음이 터져 나온다.
그런데 <오토라는 남자>를 그저 준수한 코미디이자 가족 영화로만 남겨 두자니 아쉬움이 남는다. 주인공 오토를 연기한 배우 톰 행크스의 존재 때문이다. 그는 '가장 미국적인 배우'이자 '미국의 얼굴'이라 불린다. 그의 연기력이나 흥행력을 고려하면 미국의 송강호라고 해도 될 터. 그런 그가 소품이라고 불릴만한 영화에 출연했으니, 한 가지 질문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대체 톰 행크스가 왜 이 영화에 출연했을까?" 물론 이유는 본인만 알겠지만 영화 속에도 짐작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 <오토라는 남자>는 단순히 한 남자의 이야기로 보이지 않는다. 그보다는 21세기를 살아가는, 특히 민주주의를 누리는 모두가 곱씹어 봐야 할 이야기에 가깝다.
웃픈 꼰대, 오토
<오토라는 남자>는 코미디로 시작한다. 오토의 괴팍함이 주재료다. 그의 하루 패턴을 훑으면서 그가 얼마나 괴팍한지 보여준다. 매일 같은 시간에 눈을 뜨는 오토. 눈이 오는 날이면 자기 집 앞 인도까지 눈을 치운다. 눈이 오지 않으면 아침을 먹고 바로 동네 순찰에 나선다. 주차장에 주차증이 없는 차가 있는지, 도로와 주차장을 분리하는 문은 잘 잠겨 있는지, 쓰레기장 분리수거는 잘 되어 있는지, 자전거 보관대가 아닌 곳에 자전거를 두고 가지는 않았는지, 신문이나 광고가 동네 미관을 해친 건 아닌지. 일일이 확인한다. 오토의 눈에 거슬리는 일을 하면 그 누구도 독설을 피할 수 없다. 새로 이사 온 이웃도,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낸 친구도, 갈 곳 없는 길고양이도.
하지만 그가 괴벽해진 이유를 알고 나면, 그의 모습은 더 이상 웃기지 않다. 그의 괴팍함은 트라우마를 숨기려는 방어 기제다. 임신한 소냐와 나이아가라 폭포 여행을 떠났던 오토. 행복한 시간을 보낸 그들은 버스를 타고 이동 중이었다. 그런데 오토가 잠시 화장실을 간 사이 버스가 전복되는 사고가 일어난다. 그는 다행히도 무사했지만, 불행하게도 소냐는 그러지 못했다. 그녀는 유산했고, 그녀의 하반신도 마비됐다. 오토는 뒤늦게 버스 회사가 규정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채 버스를 운행해서 사고가 일어났다는 걸 알았다. 이는 마음속 깊은 흉터가 됐다.
그 후로도 오토는 자꾸 다친다. 장애인이 된 아내를 무시하고, 그녀를 배려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는 점차 마음의 문을 닫기 시작했고, 아내마저 세상을 떠나자 아예 고슴도치처럼 날카로워졌다. 원칙을 어기는 사람을 싫어하고, 비난한다. 마트 직원이 로프 길이와 가격을 잘못 계산하면 크게 화내고, 회사에서 부사수가 상사로 임명되자 곧바로 사직서를 제출한다. 이웃들이 혹시나 잘못된 행동을 한 건 아닌지 감시하면서 매일 순찰을 돈다. 그렇기에 오토는 더 이상 우습지 않다. 웃프다.
오토의 트라우마 극복기
동시에 <오토라는 남자>는 눈물을 자아내는 드라마다. 오토의 병든 내면을 가감 없이 펼쳐 보이고, 삶과 죽음의 경계 사이에서 그가 치유되는 과정을 묘사하기 때문이다. 소냐와 사별한 뒤, 트라우마가 더 심해지자 오토는 결국 죽기로 결심한다.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무덤에 가서 소냐와 대화를 나눈다. 조만간 당신 옆으로 가겠다고. 당신과 재회해서 행복한 시간을 보낼 거라고. 오토는 죽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을 모두 동원한다. 천장에 목을 매달기도 하고, 차 안에 가스를 채워서 질식사도 시도한다. 전철에 몸을 던지거나 머리에 총을 쏘는 것도 선택지에 있다. 그는 자살을 시도할 때마다 자기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점차 죽어가면서 아내와 행복했던 과거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기차에서의 첫 만남, 레스토랑에서의 첫 데이트, 졸업식과 프러포즈, 신혼 생활까지. 오토에게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치유다.
이상한 일이 생긴다. 과거의 행복했던 순간으로 되돌아가려고 할 때마다 오토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처한다. 하루는 앞집에 이사 온 마리솔이 창문을 고치겠다며 사다리를 빌려 달라고 부탁한다. 하루는 한때 절친한 친구였으나 사이가 멀어진 루벤의 집 라디에이터를 수리해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아무 때나 찾아오는 마리솔은 대뜸 운전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한다. 어느 날에는 고등학교 교사였던 소냐의 제자, 말콤이 하룻밤만 재워 달라고 부탁한다. 성소수자라는 이유만으로 아버지에게 쫓겨났다면서. 편견 없이 자기를 대해줬던 선생님이 생각나서 왔다고. 새 가족도 생긴다. 눈 내린 날에 얼어 죽기 직전이었던 고양이를 돌봐줄 수 있는 사람이 오토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오토는 굳게 닫았던 마음의 문을 연다. 자살하지 않아도 이승에서 죽은 아내와 함께 살 수 있는 길을 깨닫는다. 이웃에게 베풀고, 그들과 삶을 공유하면서 소냐의 뜻을 이어가면 된다. 소냐가 말콤에게 그랬고, 마리솔이 자기에게 그랬듯이. 타인을 향한 관심과 이웃과의 협력 덕분에 그는 마침내 트라우마를 극복한다. 죽음을 포기하고 아내의 유품도 정리한다. 그렇게 오토는 자기 삶을 살아간다. 덕분에 그의 장례식에서 동네 이웃들은 슬퍼하기보다는 기쁘게 웃을 수 있다. 자살을 꿈꾸던 그가 편안히 죽음을 마주한 건 그가 트라우마를 완전히 떨쳐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지금, 오토 같은 꼰대가 필요한 이유
여기까지만 보면 <오토라는 남자>는 한 노년 남성이 평화를 되찾는 사적인 이야기다. 그런데 오토의 꼰대스러움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다르다. 영화에 숨어 있는 사회적 함의가 엿보이기 때문이다. 루벤의 집 라디에이터를 고치면서 오토는 이렇게 한탄한다. 세상이 예전 같지 않다고. 더 이상 사람들이 이웃들의 일에, 공동체를 관리하는 일에 관심을 갖지 않고 각자 살기 바쁘다고. 실제로 오토가 순찰할 때 다른 이웃들의 반응은 한결같다. 웬 오지랖이냐는 식이다. 파편화된 시민의 모습은 다른 장면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자살하기 위해 전철역을 찾은 오토. 그가 선로에 몸을 던지려는 순간, 다른 남성이 먼저 선로에 떨어져 버린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오토. 그러나 그는 주위 승객들의 반응에 더 놀란다. 그들은 하나같이 핸드폰을 꺼내 동영상만 찍을 뿐 아무도 도우려 나서지 않는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교육학자인 존 듀이는 공중의 쇠퇴를 경계했다. 그는 기술의 변화로 인해 다른 산업 구조가 등장하고, 사회가 거대해지고 조직화되면 사람들이 점점 비인격적인 관계를 중시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작중 듀이가 전망한 사회적 관계의 변화는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일례로 오토가 퇴사할 때, 같은 부서 직원 한 명은 축하 케이크 위에 그려진 오토의 얼굴을 아무렇지 않게 반으로 잘라버린다. 그 결과 민주주의에 필요한 가치나 조건, 그리고 공동체는 훼손된다. 개인은 많지만 공동체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없다. 오토 말고는 아무도 거리에 신경 쓰지 않고, 공동체가 합의한 규칙을 중시하지 않듯이. 중요한 의사결정은 권력과 재력을 지닌 사람에게 넘어간다. 건설 회사가 오토와 이웃들의 집을 불법적으로 매수하려 해도 그들은 권력자를 막을 힘이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오토의 꼰대스러움은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이다. 거대해진 사회에 대응해 '거대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듀이의 주장과도 궤를 같이한다. 듀이는 이웃 공동체, 지역 공동체처럼 신뢰를 바탕으로 모인 이들끼리 서로 자유롭고 직접적으로 소통해야 한다고 말한다. 실제로 오토와 이웃들은 솔직하게 소통하고 협력해서 루벤의 집을 지켜냈다. 그가 요양원에 들어가게 될 위기도 타개할 수 있었다. 이웃 공동체에 대한 애정은 가지고 있었던 오토의 '순찰'에 힘입은 결과였다. 비록 예민하게 원칙을 따지고 방식이 거칠기는 했지만. 뒤집어 보면 <오토라는 남자>는 상이한 정체성 간에 대화 대신 갈등만 가득한 현재 미국 사회를 겨냥한 영화이기도 하다. 이는 원작 소설과 달리 이웃 주민의 인종이나 성 정체성이 수정된 이유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미국의 얼굴'인 톰 행크스가 오토 역을 맡은 건 꽤 의미심장하다.
물론 <오토라는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다. 원작 소설을 읽었다면 내용이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452 페이지에 달하는 원작의 내용 중 잘려나간 부분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책을 스웨덴에서 먼저 영화화한 <오베라는 남자>에 미치지 못한다는 의견도 나올 수 있다. 스웨덴 버전은 제89회 아카데미 시상식 외국어 영화상, 분장상에 노미네이트 될 정도로 호평받은 수작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하다. 누구와 함께 극장을 찾든 간에 <오토라는 남자>를 보고 나면 옆 사람에게 감사를 전할 일이 생길 거라는 사실이다. 엔딩 크레디트에는 이 영화의 진가가 담겨 있다. 엔딩 크레디트는 오토와 마리솔의 아이들이 등장하는 서툰 그림으로 가득하다. 또 홀로 사는 이들에게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을 하라는 문구가 같이 등장한다. 그러니 영화관을 나설 때 마음이 따뜻해지지 따뜻해지지 않기는 어렵다.
A(Acceptable, 무난함)
오토의 순찰이 계속될 때, 우리 모두는 행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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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션 X 터널 / The Martian, 2015 X Tunnel, 2016
#마션 X 터널 / The Martian, 2015 X Tunnel, 2016
이 글은 "터널(2016)"이 개봉했을 때부터 써보고 싶었습니다. 네, 내내 머릿속에서 몇 번을 되뇌고, 이제야 써보는 글입니다.
영화 "터널(2016)"과 "마션(2015)"은 서로, 비슷하면서도 다른 영화입니다. 먼저, 같은 점은 주인공들은 서로, 어느 곳에 고립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서로 외부에 있는 이 사람들은 이 주인공을 구하려 애를 씁니다.
이 점을 본다면 이 영화는 배경만 다를 뿐 이야기는 똑같습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명백하게 다릅니다. 네, 구하는 분위기가 말이죠.
영화 "터널(2016)"의 경우는 자동차 세일즈맨인 "정수"는 큰 계약건을 전화로 성사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중에 터널이 무너지는 사고를 겪습니다. 그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망가진 차량, 아이의 생일 케이크 그리고, 배터리가 닮고 있는 핸드폰만이 전부입니다.
그는 곧바로 "소방서"에 연락을 취하지만, 오는 대답은 "상황이 파악되는 대로 구하러 갈 테니 기다려달라."라는 답이 옵니다. 그리고, 현장에 온 "소방대원"이 이 사건의 규모가 엄청나게 크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곧바로, 영화 "마션(2015)"을 보면 이 영화는 한 술 더 떠서 이 남자는 "화성"에 고립되는 이야기입니다.
화성에 대한 조사를 하던 탐사대는 조사 중에 마크 와트니를 모래폭풍으로 잃고 맙니다. 그렇게, 뭔가 챙길 여유도 없이 이들은 화성을 떠납니다.
하지만, 모래폭풍이 그치고 죽은 줄 알았던 "와트니"는 살아있었습니다.
이유는 안테나가 몸을 뚫었고 산소가 누출되는 줄 알았지만, 피가 나옴으로 그대로 굳음으로 다시 밀폐되었고 그는 기적적으로 살았습니다.
하지만, 팀원들이 그를 두고 간 사실을 알게 되면서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참 뭣 같은 상황에 휩싸이지만 그는 일단, 여기서 식량문제를 해결하기로 하는데...
공교롭게도 두 영화다 원작 소설이 있는 영화입니다.
그만큼 이야기에 대한 흠을 잡는 것이 큰 무리가 있습니다. 원작 소설은 정확히 말하고 있지만 영화화를 거치면서 "각색"과정에서 빠진 것을 제가 미쳐 못 보고 지나칠 수 있으니 말이죠.
하지만, 굳이 말하자면 이들의 차이는 그 첫 번째는 과학일 겁니다.
"마션(2015)"의 경우는 이를 참 즐겁게 해결합니다.
영화는 이를 관객들에게 말을 거는 "제4의 벽"을 깨는 방법을 사용합니다.(정작, "와트니"가 말을 거는 존재는 나중에 여기서, 이 자료를 볼 누군가입니다.)
영화에서 "제4의 벽"을 깨는 것은 그 이야기만이 가지는 경계가 없어지면서, 그 이야기만이 가진 리얼리티를 죽이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이 방법을 과감하게 사용하고, 관객들에게 이 영화의 이야기를 거리를 두게 만들고 "소격효과"를 불러일으킵니다.
영화가 가상의 이야기가 아닌 "진짜, 할 수 있을까?"에 대한 현실성에 대한 논란을 가져옵니다. 물론, 영화는 여러, 화학식으로 이를 가능케 말하지만 정작 이를 알아먹는 관객들은 극 소수일겁니다.
이렇게, 알아먹기도 힘든 공식이지만 관객들은 "진짜, 가능한 일이구나."로 이 영화의 진실됨을 보여줍니다.
그에 비해서, "터널(2016)"은 이야기의 경계를 잘 지켜나갑니다. 네, 분명, 영화가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관객들이 속한 세계에 일어났음직한 일들을 그리고, 왠지 닮은 인물들을 보여주지만, 이에 그칩니다.
그리고, 정작 생존에 대한 공식은 우연 혹은 느낌에 좀 더 맞춰져 있습니다.
누가, "케이크"의 열량을 알겠지만 이런 육감적인 부분은 오히려, 우리들 관객들의 모습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네, "마션"의 경우가 정말, 소수의 사람들이지만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극의 분위기는 서로, 비슷하면서도 상반되어있습니다.
먼저 "터널(2016)"의 경우를 살펴보면, 이를 개그의 요소로 많이 사용하는데 가령, 예를 들면 라디오에서 '어디 가지 마세요.'라는 문구를 '어디 갈 데도 없다.'라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정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외에도 워셔액으로 차를 닦고, 집게로 수염을 정리하는 "정수"의 모습을 통해서 "터널"안에서도 삶은 계속됨을 이렇게 보여줍니다.
물론, 이외에도 "강아지"의 등장도 이 영화를 좀 더 가볍게 만듭니다.
하지만, 정작 이를 구하는 바깥의 분위기는 그렇지 않습니다. 점점 이를 구하자는 분위기는 사그라들고, 구하는 과정에서 사망자까지 속출하면서 영화를 좀 더 무거운 방향으로 이끌어갑니다.
그리고, 두 영화가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에 대한 차이가 이 상황에 나옵니다. "터널(2016)"에서 한 의원이 "도롱뇽 서식지"에 대한 말을 합니다. 그는 이가 개발에 대한 손실액이 어마어마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대경('오달수'분)"은 이 사람에게 "도롱뇽이 아니라 사람입니다."라는 말을 합니다. 네, 여기서 영화는 '우리가 한 사람의 목숨을 가치를 금전적으로 매길 수 있는가?'에 말을 건넵니다.
그에 비해서 "마션(2015)"은 돈보다는 시간에 쫓기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네, 영화는 사실적으로 공식을 내세우면서 "마크"의 생존에 사실성을 더했음에도 정작, "돈"이라는 현실성은 개의치 않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왠지, 현실 같은 영화와 영화 같은 현실 이 똑같은 두 영화가 결정적으로 차이를 드러내는 것은 바로, 인간관입니다.
네, 제가 "터널(2016)"을 보았을 때 "마션(2015)"만큼의 현실성 있는 공식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마음에 안 들었 것이 사람을 대하는 이들의 차이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영화는 이렇게, 흘러흘러 끝에서 비슷하면서도 다른 엔딩을 보여줍니다. 먼저, "마션(2015)"의 경우는 결국, 손에 손잡고의 1988 서울 올림픽의 주제가처럼 화합의 장을 이루어냅니다.
우주선을 제공한 "중국"의 도움으로 "마크"를 구하는 데에 성공하고 "나사"는 이후 "중국 우주인"과 함께 나사의 우주선을 탐으로 "지구촌"이라는 단어를 실현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중국"이 꽁꽁 숨긴 우주의 기술력을 홍보한다는 다른 속마음도 있지만 결국, 이도 "마크"를 구하려는 마음이 배경이 되었기에 부정적보다는 긍정적인 면이 더 커 보입니다.
그에 비해서 "터널(2016)"의 경우는 구출이 멈췄다가 다시 진행되어 구출이 됩니다. 하지만, "정수"가 세상에 나와서 꺼낸 첫 마디는 "다 꺼져. 이 씨발 새끼들아"입니다.
무엇이 그를 분노케했을까요? - 화는 이전에 보이던 구출 작업을 멈춘 소식을 접한 "정수"의 마음이 여기에 담겨있을 겁니다. 구해준다고 해놓고서는 구해주지 않는 이들의 일처리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 다수의 사람들에게 설문을 돌려서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모습 말이죠.
이러면서, 정작 나오니 생색을 내려는 이들의 모습이 맘에 들지는 않았을 겁니다.
정작, 구해주기는 했지만, "정수"는 이게 이들의 선처가 아닌 내가 누려야 할 권리로 비쳐 보았을 점으로 보면, 이들의 업무태만과 태도는 그렇게 마음에 들지는 않았을 겁니다. 네, 자기가 세금 내서 일하는 놈들이 봉급 주는 사람한테 이렇게 굴었으니 말이죠.
영화의 초반에도 나오는 "안전한 대한민국"의 표지판이 무너지는 것처럼 영화는 영화이지만, 현실의 이야기처럼 느껴졌고 "마션(2015)"은 "화성 유인성"이라는 아직 현실에 일어나지 않는 일을 현실처럼 보여준 영화입니다.
다만, 아쉬운 점은 "터널(2016)"은 엔딩이 그렇게 어울리지는 않았습니다.
이야기가 보여준 그 설명을 뒤집어 버린 것 같아서 그런데, 차라리 "마션(2015)"처럼 촌스럽지만 톤을 유지하는 것이 더 어울리지 않았나 싶다. 그렇다면, 지금도 "터널"이라는 영화는 "하정우"로 기억될 텐데,
※ "마션(2015)"이 더 놀라운 것은 감독이 "리들리 스콧"이라는 점인데, 그의 이후 작품인 "에이리언: 커버넌트"만 보더라도 그에게 '희망찬가'는 어울리지 않는 타이틀로 보였는데, 이도 선입견이었나 봅니다.
* 본 콘텐츠는 블로거 파천황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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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예르모 델 토로'가 전하고 싶었던 어두운 피노키오
먼저 떠난 아들
김삿갓이 뭐죠? 방랑시인이 뭐죠? 우리의 예술가이자 귀뚜라미 크리켓은 오늘도 여행하고 있다. 크리켓이 여행 숙소로 머무는 곳은 보통 나무(들)의 심장이다. ‘어디 적당한 나무 없을까?’ 두리번두리번 돌아다니는 크리켓. 크리켓은 그렇게 숙소에 앉아 자기만의 언어로 세상과 소통하려 한다. 좋아. 이 자리가 좋겠어. 짐을 풀고 나무에 잠깐 누울 준비를 한다.
퍽. 퍽. 이게 무슨 소리야? 크리켓은 화들짝 놀란다. 나무에서 나오는 크리켓. 어떤 할아버지가 술에 취한 채로 나무를 베려고 한다. 길가다가 벼락 맞는 것과 거의 유사한 수준의 불운이다. 할아버지는 뭔가에 단단히 씌인 것 같다. 무슨 일이지? 저 할아버지는 이 나무 근방에서 매일같이 술을 마시는 사람이었다. 할아버지의 이름은 제페토. 카메라는 제페토의 이야기를 조명한다. 제페토는 세계 2차 대전 당시에 아들을 폭탄에 의해 잃었다. 회한과 후회가 제페토에게 남았다. 아버지가 되어 지키지 못했다는 아쉬움은 마음의 병으로 남는다. 미쳐가는 제페토. 제페토는 매일같이 아들의 묘지에 앉아 다시 돌아와 달라고 애원한다. 그런데 터무늬 없다. 망자가 돌아올 리는 없으니까. 제페토는 나무를 베서 또 다른 아들을 만들려고 한다. 직업적인 특성을 발휘하는 제페토. 오래 걸리지 않아 '피노키오'라는 나무 인형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 피노키오에 갑자기 특별한 마법이 들어왔다. 피노키오는 신의 도움을 받아 생명을 얻는다. 나타나자마자 온갖 사고는 다 치고 다니는 피노키오. 과연 피노키오는 어떤 일상과 삶을 마주하게 될까?
아날로그 감성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이라. 굉장히 오랜만에 들어보는 듯하다. 7살 즈음에 봤던 <강아지똥>이 생각난다. 직접 만든 점토 같은 느낌으로 전개했던 게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요즘은 애니메이션을 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그림처럼 그려 전개한다. 모형으로 만드는 경우는 거의 없다. 무슨 말이냐? 1 프레임 단위로 모형을 그려 이야기를 만들면 제작자의 눈알과 팔이 빠지기 쉬울 것이라는 의미다. 물론 그려서 이야기를 만드는 것도 노가다 중 노가다지만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은 더 심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영화는 이 스톱모션 기법으로 제작한 영화다. 과거에 전설적으로 내려오던 동화를 예전에 제작하던 방식으로 만들었다? 아무 생각 없이 도입한 것이 아닐 것이다.
영화는 과거의 어떤 것에 대해 코멘트하고 있다. 영화는 피노키오의 형식만 따왔을 뿐이지 사실 아예 딴판인 이야기다. 영화에서 중요했다고 볼 수 있던 키워드는 두 가지다. 바로 전쟁의 참혹함과 '너 다움을 잃지 말아라'라는 말이다. 이는 과거의 어떤 것을 되살릴 수밖에 없는 영화의 형식과도 이어진다. 일단 아들이 죽었기에 피노키오를 만든 제페토. '과거의 사건에 대한 현재의 반작용'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너 다움을 잃지 말아라'라는 말은 예술가로서 두 감독이 후배들에게 전하는 메시지처럼 들린다. 과거의 편린에 사로잡히지 말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재창조하라는 말로 들리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주제적인 측면은 제페토와 피노키오가 처절할 정도로 어떤 것에 집착하고 있는 것으로 대표된다. 영화를 보고 나면 과거를, 그리고 그 과거와 관련된 기억을 어떻게 보존할 것인지를 각자 생각하게 된다.
기본적인 세팅만 따온 이야기
영화 제목에 '피노키오'가 들어간다. 피노키오? 우리가 아는 피노키오 아냐? 맞다. 우리가 아는 피노키오다. 거짓말하면 코가 늘어나는 걔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는 이 거짓말이라는 모티브를 활용한다. 이 거짓말이라는 모티브는 영화가 품고 있는 다른 한 측면 '다양성'을 관통하는 키워드기도 하다. 나무로 되어있는 피노키오. 사회성이란 게 없기 때문에 여기저기 쏘다니며 사고 치기 일쑤다. 이런 캐릭터 세팅은 전쟁의 참혹함이라는 시대적 배경과도 이질적으로 맞물리며 후자를 더 돋보이는 효과를 보여준다. 또 피노키오가 나무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역시 기능적으로 활용하지 않았다. 이 나무로 구성된 피노키오의 특성은 영화의 후반부까지 끊임없이 제시된다. 늘어난 코를 활용한다던가, 불에 탄다던가, 부서지면 수리할 수 있다던가 하는 캐릭터의 특성을 코미디, 판타지로 소화한다.
또한 이야기 전개 자체가 아예 원작과는 다르게 전개되는 부분이 있다. 해피엔딩으로 끝나 모두가 행복하게 마무리 저었던 결말과는 달리 이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는 좀 다른 방식으로 영화를 마무리짓는다. 이는 '남겨져 있는 자'가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는가?라는 명제가 대비되는 전-후반부의 설정으로 강화되는 것이다. 영화는 이를 전달하기 위해 전쟁의 참혹함을 시대적인 배경으로 세팅했다. 또 피노키오의 이야기를 차용했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제목에서 '피노키오'보다 '기예르모 델 토로의'라는 단어가 더 중요한 것이다. 보는 이로 하여금 다른 지점을 찌르는 작품이기 때문에 넷플릭스든 극장에서든 투자하는 시간이 아깝지 않을 것이다.
이 분은 뭘 먹고살길래
이 영화의 메가폰을 잡은 사람은 기예르모 델 토로다. 아마 영화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이 이름을 모를 수가 없다. 약간 매니아적인 감독 중에서 제일 대중적인 느낌?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으로 아카데미 위너도 됐고 <판의 미로>라는 걸작을 만들기도 했다. 이 뿐인가? 올해 초에 <나이트메어 앨리>를 개봉시키기도 했다. 일단 델 토로의 작품 특성이라고 하면 시각화 비주얼이다. <나이트메어 앨리>를 제외하고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키워드는 '괴물'이다. 델 토로는 영화에서 괴물을 잘 등장시킨다. 그런데 괴물을 시각화하는 방식이 너무 특이해서 보는 이로 하여금 기억에 선명하게 나온다. 또 폭력 수위도 쉽지 않다. 어쩔 땐 잔인하기도 한 델 토로. 이런 델 토로가 '피노키오'라는 고전소설을 리메이크한다는 것이 좀 아쉽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고 일단 영화가 전체이용가 심의 등급을 받았다고 해서 글쓴이는 그렇게까지 기대하지 않았다.
영화는 이런 기대를 한 이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델 토로의 인장을 쾅쾅 박아 넣었다. 일단 영화에서 틸다 스윈튼이 맡았던 신 캐릭터가 있다. 여기에서 이 여신 캐릭터의 비주얼이 곤충 개미와 '램프의 요정 지니'를 섞은 듯한 비주얼로 뽑혔다. 이 캐릭터가 잔인한 장면을 만들지는 않는다. 그런데 일반적인 이미지에서 뒤틀려있다는 점에서 델 토로 연출 특성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외에 초반부에 제시되는 영혼의 묘사 방식, 귀뚜라미의 시각화, 피노키오의 모습, 후반부에 등장하는 괴수까지 델 토로에게 기대할 수 있는 모든 기대치를 충족하는 뛰어난 연출법이 돋보인다. 그래서 혹시 '아 이거 기예르모 델 토로 순한 맛 아닌가' 싶은 분들은 전~혀 그러지 않다고 대답하고 싶다. 영화는 스톱모션이라는 촬영기법과 어딘가 기이한 캐릭터 시각화로 영화의 분위기를 이끌며 후반부까지 질주한다.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
어느덧 2022년의 끝자락을 맞이한다. 올해는 또 어디까지 왔을까. 연말을 앞두고 많은 분들이 생각이 많아질 것이라 생각한다. 글쓴이는 요즘 그런 생각을 한다. 혼자라는 것. 나만 이럴까?라는 것이다. 단순히 커플이 되거나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람, 혹은 그런 목표들이 내 인생에서 언제까지 나를 지키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마음 한 구석이 어두워진다. 점점 내가 사랑하는 것들에게서 나부터가 마음이 떠나가고 있는 듯하고, 사랑하는 애인은 아직까지 타이밍이 아닌 것 같거든.
영화는 혼자 남은 캐릭터들을 계속해서 보여준다. 그리고 계속해서 인물들은 한 자리에서 맴돌며 사랑의 의미에 대해 스스로 반문하는 듯하다. 이 질문은 결국 관객에게 전달된다. 과연 우리 인생에서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전쟁의 참혹함에 대해서도 당연히 코멘트하고 있는 영화지만 이는 올해 우리가 다시 한번 상기되는 사실이라 생략하기로 한다) 어쩌면 이 영화에서 남아있는 제페토와 피노키오의 행적을 주목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당연히 있고, 그 과정이 끔찍할지라도 우리는 서로가 있기 때문에 행복하니까. 다 아는 맛 같지만 마음 한 구석을 찌르는 따뜻한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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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야말로 봄날의 햇살 같은 이야기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포스터 ⓒENA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편성 : ENA, 16화 완결 │ 장르 : 한국, 법정·드라마연출 : 유인식 │ 극본 : 문지원 │ 등급 : 15세 이상 시청가출연 : 박은빈(우영우), 강태오(이준호), 강기영(정명석), 하윤경(최수연), 주종혁(권민우) 외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ENA
과연 봄날의 햇살 같은 이야기
봄날의 햇살. 이 드라마를 관통하는 최고의 단어가 아닌가 싶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이야기다. 이 드라마는 그야말로 봄날의 햇살 같다. 나는 따뜻한 이야기를 좋아하지만 허황되게 동화 같은 이야기에는 극한의 거부감을 느끼는 매우 까다로운 시청자인데, 이 드라마는 영리하게도 그 경계에 머문다. 차별을 향한 혐오의 시선을 녹이는 따뜻함은 있지만, 그것이면 다 된다는 식의 허황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작열하지 않고 은은히 내려앉는 봄날의 햇살처럼.
우 to the 영 to the 우. 똑바로 읽어도 거꾸로 읽어도 우영우인 주인공 ‘영우’는 뛰어남과 모자람을 동시에 지녔다. IQ 164로 천재에 해당하는 지능을 가졌지만, 사람의 감정을 파악하고 소통하는 데에는 어려움을 겪는 자폐스펙트럼 장애를 앓고 있어서다. 그래서 그녀는 법전을 달달 외우는 천재성을 보이지만, 남들은 다 통과하는 회전문도 통과하지 못하는가 하면, 자신이 하는 고래 이야기를 남들이 싫어하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한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ENA
영우의 캐릭터는 허황인가 현실인가
그런 영우를 둘러싼 세상에는 두 가지 시선이 존재한다. 영우를 같은 인격체로 대하는 시선과, 그렇지 못한 시선. 전자는 영우의 천재성과 특별함을 귀히 평가하지만, 후자는 어울리지 못하는 영우의 사회성을 지적한다. 이 드라마는 어쩌면 두 가지 시선 모두를 지녔을 시청자를 영우의 세계관에 데려다 놓으며, 천천히 자폐인을 이해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드라마를 보다 보면, 외부인의 시선이었던 시청자는 어느새 영우의 세계관에 들어와 세상 밖을 보게 된다.
우리는 자폐인에 대해 잘 모른다. <말아톤>에서 본 조승우의 모습이 내게는 유일한 자폐인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자폐를 가지고 과연 변호사라는 유능한 직업을 할 수 있는지. 이게 현실성이 있는 건지. 자폐 스펙트럼 장애도 수많은 결이 나뉜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탓이다. 영우는 실제로 자폐를 앓았던 미국의 동물학자 ‘템플 그랜딘’을 모티브로 한다. 템플 그랜딘은 영우처럼 취약하고 부족한 면이 있었지만, 높은 지능을 가지고 있었고 덕분에 대학교수까지 역임한 인물이다. 자폐가 사회생활을 전혀 하지 못할 수준의 장애라고 여기는 것도, 어쩌면 우리가 매체를 통해 한정적인 모습만 보아왔기 때문은 아닐까.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ENA
이런 법정 드라마는 처음이지?
이 드라마가 매력적인 것은, 그런 자폐인을 올곧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대형 로펌에서 일하는 영우가 좌충우돌 사건들을 해결해나가는 과정들에서도 착실하게 재미가 쌓여간다. 자폐인에게는 편견이 없다. 따라서 어떤 대상에 대한 과도한 연민이나 편향된 잣대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점은 공교롭게도 감정을 배제하고 공정해야 하는 변호사의 직업 특성에 특화된다. 그런 시선으로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영우를 보는 것은 과연 이 드라마의 큰 즐거움이었다. 정의롭되 휩쓸리지 않고, 감정을 덜어내되 치사해지지 않는 공정함. 패소와 승소를 번갈아 하지만 영우가 맡은 여러 가지의 사건들은, 그녀에게도 그리고 시청자에게도 묵직한 교훈을 남긴다.
더불어 이 따뜻한 드라마에서 영우만큼이나 애정이 갔던 캐릭터를 굳이 굳이 한 사람 꼽고 싶다. 단연 ‘정명석’ 변호사다. 영우에게 봄날의 햇살이었던 최수연 변호사도, 그녀를 훌륭히 키워낸 아버지도 좋았지만, 진정으로 영우에게 후광을 안겨준 이는 바로 정명석 변호사가 아니었을까. 대형 로펌 ‘한바다’의 선배 변호사였던 그는, 신입으로 들어온 우영우 변호사를 진심으로 대했다. 장애가 있다고 약자로 취급하지도 않았고, 천재라고 해서 시기하거나 적대하지도 않았다. 그는 선배 변호사로서 후배 변호사가 특정한 방식에 얽매이지 않고 창의로운 시선으로 사견을 풀도록 돕는다. 그런 두 사람의 선하고도 바른 시너지를 보는 것은 또 하나의 묘미였다. 살면서 그런 멘토를 만날 수 있는 것은 얼마나 큰 인생의 행운일지. 정명석 변호사를 연기한 강기영 배우에게도 인생 캐릭터가 아니었을까 싶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ENA
모든 차별과 편견을 녹이는 이야기의 힘
세상에는 다양한 결의 변호사가 존재한다는 걸 안다. 주로 권력과 자본의 편에 서서 의뢰인을 담당하는 변호사도 있겠고, 주로 소외계층의 편에 서서 어깨를 내어주는 변호사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변호사를 그 둘로만 나누는 것 역시 나의 편견은 아니었을지 이 드라마를 보고 반성하게 됐다. 수임료가 비싼 대형 로펌에서 일하는 변호사들에게는 정의감이 없을 거라는 생각, 돈과 권력을 가진 의뢰인은 모두 범죄자일 거라는 생각. 하지만 ‘한바다’ 같은 대형 로펌이라고 권모술수가 남발하는 곳은 아니었다. 돈 많은 의뢰인들에게도 억울한 사연은 있으며, 돈 잘 버는 변호인에게도 정의감과 의협심은 존재했다. 다채로운 자폐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로펌과 법정의 세계 역시 다채로웠다. 한바다에 영우와 정명석이 있는 것처럼. 흰고래 무리 속에 외뿔고래가 있는 것처럼.
이것 아니면 저것. 가난하고 착한 변호사와 돈 잘 벌고 부패한 변호사. 비장애인과 장애인. 우리의 머릿속에 있는 경계선을 지워나가게 만드는 이 드라마가 유난히 좋았다. 봄날의 햇살은 경계를 따지지 않고 어디에든 공평하게 내려앉는다. 초록색 들판에도, 차가운 아스팔트에도, 흑백논리로 세상을 보려 했던 누군가의 마음에도. 누군가가 이 드라마를 한마디로 정의하라고 한다면 그래서 나는 ‘봄날의 햇살 같은’ 드라마라고 하고 싶다. 차별과 편견이 만연한 세상의 모든 곳에 이 따뜻한 이야기의 햇살이 가 닿기를..., 바라본다.
인스타그램 @woodu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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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당신을 알지 못하고 나 자신도 솔직히 잘 모르고
서서히 균열
이 영화의 주인공은 미국 국적의 배우 엘리자베스(나탈리 포트만)이다. 엘리자베스는 누군가에게 향하고 있다. 이동 중인 엘리자베스. 카메라는 이 영화의 다른 주인공 그레이스(줄리언 무어)와 조(찰스 멜튼)에게로 향한다. 둘은 부부다. 엘리자베스는 이 그레이시, 조 부부를 취재하기 위해 두 사람이 살고 있던 곳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왜? 엘리자베스에게 시나리오가 들어왔다. 그 시나리오에서 나온 대로라면 엘리자베스가 맡게 된 배역이 그레이시를 토대로 한 것이었다. 기자처럼 다가온 그레이시. 그레이시의 질문과 시선이 점점 충돌하기 시작한다.
원형 구조?
이 영화를 구성하는 이야기는 작품 그 자체를 형상화했다. 이 영화의 핵심을 이루는 모티브가 무엇일까? 작중에서 자주 반복되는 대사인데, ‘나를 이해할 수 있어?’라는 말이다(이 문장은 시놉시스에도 있기 때문에 스포일러가 아니다). 이 영화는 이 질문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듯한 촬영 구도를 반복한다. 가령 우리가 가장 쉽게 이 영화에 대한 정보를 볼 수 있는 포스터를 보면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두 사람(그레이시/엘리자베스)의 얼굴을 가로로 연이어 배치하는 장면이 몇 있다. 이는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촬영으로 보여준다고도 볼 수 있는 지점이다. 비단 촬영뿐만 아니라 이야기의 몇 요소들도 두 사람의 관계를 암시하고 있다. 엘리자베스의 직업은 배우다. 배우는 그 사람의 인생에 대해 흉내 내는 일이다. 이런 점에서 ‘배우’라는 소재는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가?’와 직결되는 문제라고도 할 수 있겠지? 이렇게 이 영화는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반복해서 답을 내놓는다. 반복되는 상황, 소품, 이야기 흐름까지 이 세상을 우리가 이해하는 방식에 대해 코멘트하고 있다. 이는 영화 팬들이라면 알고 있을 <벨벳 골드마인>에서의 변태적인 미장센과 공통점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이 <벨벳 골드마인>과 유사하게 <메이 디셈버>는 거의 모든 소재에 대칭이라는 키워드를 배치시켰는데 이 부분 역시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던지는 지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영화의 모든 디테일이 핵심을 향한다는 것이 공통점이 된 것이다. 심지어 영화가 게으르지도 않다. 이 밀도를 다층적으로 활용하기도 한데, 엘리자베스와 그레이시 뿐만아니라 조나 엘리자베스, 그레이시와 조, 그리고 세 인물과 그 나머지까지 인물들은 서로 사회를 이루며 영화를 둘러싸고 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인물들 간의 연결관계와 공통점을 묘사하는 이유는 영화가 내리는 결론과도 닿아있다. 영화는 가장 중요한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 이 것을 숨기는 방식 역시 신선한데, 이는 토드 헤인즈가 그동안 시도해 온 파격적인 이야기 형식의 연장선상 같아 보이니 등장인물 중 유달리 도드라지는 한 캐릭터에 주의집중하시길 바란다. 또 우리가 수많은 영화에서 봐왔던 사랑의 이기적인 속성도 활용하는데, 역시 거장은 거장이구나 싶다.
틈입하는 사운드
이 영화를 보면서 먼저 귀에 들어왔던 건 사운드다. 이 영화는 음향효과를 특별하게 사용했다. 어떻게? 바로 이 영화의 플롯을 음향으로 청각화한 것이다. 대표적으로 세 번째 장면에선가 어떤 여자애가 냅다 소리 지르는 부분이 있다. 이와 유사하게 영화를 보다 보면 ‘우연히 갑자기 어떤 소리가 끼어드는’ 장면을 몇 개 찾을 수 있다. 이런 것들이 아무 맥락도 없이 공통점을 보며 그냥 들어가지 않았겠지? 이 음향 효과들은 다른 영화의 사운드들이 잘 짜여 있기 때문에 더 두드러진다. 핵심은 ‘다른 영화의 사운드가 잘 짜여 있다’는 점인데, 이는 사실 영화에서 누군가와 누군가의 관계로 치환되고 있다. 주인공 간의 관계에 비명소리 같은 것이 틈입하는 것이다. 이 양상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보면 영화가 조금은 어렵지 않게 느껴질 것 같다.
영화가 사운드를 활용한 다른 방식은 인물의 정서다. 이 영화의 이야기는 원인을 규명할 수 없는 불안감으로 가득 차 있다. 영화를 보다 보면 그 불안한 요소가 무엇인지 쓸 수 있지만 이야기 내적으로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쓰긴 좀 어렵다. 하지만 분명하게 언급할 수 있는 건 ‘사운드’다. 이 영화의 초반부에 의미심장한 장면이 있다. 바로 그레이시가 “소시지가 다 떨어졌구먼”이라고 말하는 장면이다. 소시지가 다 떨어졌다는 게 이야기 흐름 상 중요한 장면이 되진 아니겠지? 하지만 이 장면에 밑줄이 쫙 그 여진 이유는 연출하는 방식에 있다. 이 음향은 왠지 모르게 불안정한 인물들의 분위기, 인간관계, 그리고 플롯 흐름과도 관련이 있다. 글쓴이는 청각적 요소를 이렇게 활용해서 불안감을 만들어낼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각과 청각이 서로 충돌하면서 불안함을 만들어내고, 그 도착지에 무엇이 있는지를 염두하고 본다면 영화가 좀 더 쉬울 것이다.
다층적인 이야기
이 영화의 두 주인공 그레이시와 엘리자베스는 여성이다. 이를 이 영화가 여성영화로서 읽히는 지점이 몇 있다. 이 영화가 인물을 대상화하는 방식을 보면 기존에 알고 있던 ‘팜므파탈’ 같은 것이 뒤틀렸다는 걸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이는 감독의 전작 <캐럴>에서도 느낄 수 있던 부분이기도 하다. 또 이 영화가 핵심을 인물로 또 플롯으로 소화한 것과 유사하게 표현한 부분도 있다. 바로 이 영화의 플롯을 형상화한 형태 중 ‘원’이라는 것이 여기에 이어지는 것이다. 이 두 장면에서 영화 내적인 논리로 작동하는 것이 여성영화로서의 맥락으로도 작동하니 영화가 영리한 선택을 뒀다고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영화의 적지 않은 부분에서 ‘여성의 주체적인 선택’을 암시하는 대사가 몇 있으니 이런 맥락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요소 역시 촘촘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영화를 예술가의 영화로 읽을 수 있다. 이 영화는 예술가와 세상이 상호작용하는 방식에 대해 다룬 이야기처럼 읽히기도 한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예술은 표면적으로는 두 가지다. 하지만 어떤 예술은 기자가 구사하는 저널리즘으로, 또 다른 현실은 마치 연극적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현실과 예술을 병치시켜 엔딩에 이르면 이 영화가 정말 넘고 싶어했던 것이 무엇일까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다. 글쓴이는 이런 소재들도 과연 거장이다 싶었지만 오히려 단점이 느껴지는 지점이기도 했다. 다층적인 이야기를 구성함에 따라 인물들이 엄청나게 생동감이 있는 타입들은 또 아니었던 듯 하다. 서서히 스며드는 나탈리 포트만의 연기와 줄리언 무어의 맹위, 종잡을 수 없는 찰스 멜튼이 굉장했어서 그렇지 영화가 다이나믹한 템포로 빠르게 달리지는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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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까맣게 순수한 아이들의 누아르
언프레임드 - 반장선거 (Unframed, 2021)
개봉일 :2021.12.08. (왓챠 공개)
감독 : 박정민
출연 : 김담호, 강지석, 박효은, 박승준
까맣게 순수한 아이들의 누아르
프레임 안에서 연기를 펼치던 4명의 배우들이 프레임을 넘어, 카메라 앞이 아닌 카메라 뒤에서 각자가 품어온 이야기를 펼치는 새로운 프로젝트 <언프레임드>. 박정민, 손석구, 최희서, 이제훈 배우까지. 그들이 바라본 세상의 조각들이 이토록 애틋하고, 원초적인 빛깔을 띠고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언프레임드>에 담긴 4편의 단편영화를 보면 그들이 영화와 이야기를, 이 세상을 얼마나 골똘히 바라보고 있는지 깊이 느낄 수 있다. 더불어 감정을 온전히 전하기 위해 꼭 긴 시간을 쓰는 것만이 정답은 아니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닫게 만든다.
언프레임드의 첫 번째 에피소드 <반장선거>. 처음 만나는 초등학생 누아르
언프레임드의 에피소드 1은 박정민 배우가 연출한 <반장선거>다. 초등학생이라 하면 가장 먼저 순수한 모습을 떠올리게 되지만, ‘생각해보면 나의 초등학생 시절은 순수하지 않았다.’고 말하던 그는 힙한 초등학생 누아르를 내놓기에 이른다.
초등학생과 누아르? ‘에이 초등학생들이 해봤자~’라고 생각한다면 섭섭하다. 카메라에 담긴 배우들의 다양한 표정들엔 어른들 못지않은 서늘함과 긴장감이 팽팽하게 들어차있다. 특히 주연인 강지석 배우와 김담호 배우의 연기가 가히 압권이다. 서늘한 눈빛과 목소리를 뽐내는 강지석 배우와 귀여운 외모와 단단한 집중력을 갖춘 김담호 배우의 상극에 위치한 매력이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케미가 상당하다.
<반장선거> 스토리
반장선거는 제목 그대로 한 학기 동안 학급을 관리할 반장을 뽑는 ‘반장선거’를 주제로 한다. 반장 후보로 각각 남자, 여자 아이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은 유장원, 주선영과 수줍은 성격으로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정인호가 등록되고, 아이들은 본인이 지지하는 후보를 위해 목소리를 높인다. 노래를 부르고 간식을 돌리고 열심히 공약을 뽐내고 심지어 싸우기까지 한다. 장원, 선영의 지지자들이 요란하게 싸우는 동안 지지자 없이 단독으로 출전한 인호는 말없이 고개를 숙이거나 책상과 천장의 중간 어딘가를 바라보고만 있다. 어떠한 비밀을 숨긴 채 말이다. “너 반장할래?” 유장원의 서늘한 목소리가 들리며 선거의 전말이 밝혀진다.
엉덩이를 들썩이게 만드는 리듬감
<반장선거>의 배우들만큼이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매력 포인트를 꼽자면 리듬감이 아닐까 싶다. 쉴 틈 없이 변화하는 컷들과 그 안에 꽉 채워진 어린 배우들의 순수하고 뜨거운 숨결, 마미손의 힙한 음악이 합쳐지며 만들어내는 리듬감과 긴장감이 영화가 끝난 후에도 귓가와 머릿속을 빙빙 맴돈다. 어릴 적 한 번쯤 들어봤을 ‘기호N번 000!’이라는 아이들의 선거 송과 세련된 음악의 만남이라니. 여태껏 상상해 본 적 없었지만, 상상 그 이상으로 찰떡 그 자체였다.
순수하지 않았던, 또는 너무 순수했던 초등학생 시절
공교육의 범위를 벗어난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지라 지금도 그런진 모르겠지만, 나의 초등학생 시절도 박정민 배우의 그 시절처럼 딱히 새하얗게 순수하진 않았던 것 같다. 나만이 아니라 모든 친구들이 말이다. 순수하긴 했으나 새까맣게 순수했다고 해야 할까? 나는 초등학생 시절을 너무 순수해서 본능에 한 발짝 더 가까웠던 순간들로 기억한다.
본능적으로 강자의 편에 서고, 그를 믿고 따르며 무언가 떨어지길 기대하는 본능. 그렇게 편을 가르고 서로의 세력을 뽐내고 견제하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내 어린 시절의 모습을 보았다. 특히 ‘이거 선영이가 주는거다-’라며 간식을 돌리던 컷에서 내면의 웃음이 터져버렸다. 반장선거가 가까워질 때면 왠지 간식이 풍족하게 뿌려졌던 기억이 있었는데, 그게 정말 ‘기분 탓’이 아니었구나, 우리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인생은 역시 누아르
어른이 되어 다시 들여다본 아이들의 세계가 참 흥미롭게 느껴진다. 별거 아닌 것 같은 말 한마디도 한껏 진지하게, 온 힘을 다해 싸우던 그때. 그놈의 반장이 뭐라고.. 선생님도 아니고 반장인데.. 하지만 그땐 그 자리가 그렇게 대단해 보였더랬다. 국회의원도 대통령 선거도 아닌 반장선거지만 이 선거는 나름 진지한 투쟁이자 세력 다툼이다. 어른들의 다툼을 축소해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선거 한 판이 이토록 흥미로울 줄은 몰랐다.
민주주의의 꽃, 선거!를 가뿐하게 씹어먹고 있는 까맣게 순수한 영혼들을 보며 우리의 인생은 역시 판타지보단 누아르에 가까운 것 같다며 고개를 끄덕여본다. 역시 강한 자의 편에서 우르르 몰려다니는 게 인생이지!
하지만 마지막 결과를 보자면.. 그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아무튼, 한발 떨어져서 투표를 지켜본 사람으로서.. 이 투표, 다시 하고 싶다.. 그래도 이렇게 인호가 친구들이랑 잘 어울리면 그걸로 된 건가? 아니다. 역시 조금 쓰다.
상대적으로 큰 키에 그늘진 얼굴로 문밖에 올라서있는 강지석 배우와 빛을 받고 있는 동그란 얼굴로 강지석 배우를 올려다보는 김담호 배우의 모습이 뇌리에 강하게 남았다. 유장원과 정인호라는 캐릭터에 어쩜 이렇게 잘 맞는지.. 두 배우가 보여준 집중력과 연기에 감탄했다.
강지석 배우는 최근에 <좋은 사람>을 통해 발견한 이효제 배우와 참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언젠가 두 배우가 같은 프레임 안에 있는 모습도 꼭 보고 싶다. 오늘부터 소원 빌어야지. 앞으로 쑥쑥 클 일만 남은 배우님들.. 랜선 이모가 응원할 예정이니 바르게만 자라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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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의남자]리뷰/해석:진정한 천만영화란 무엇인가를 보여준 작품
#왕의남자#이준익#천만영화
오래된 영화다보니 주로 줄거리를 중심으로 풀어봤습니다.영상에 사용된 BGM
?Music provided by 브금대통령
?Track : 겨울에 피는 꽃 - https://youtu.be/Vmrrd9nON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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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아메리칸 트레이터> 메인 예고편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
미국 정부는 평범한 여성을 반역죄 혐의 8건으로 긴급 체포한다.
그녀의 이름은 밀드레드 길라스 a.k.a '액세스 샐리'.
밀드레드는 독일 나치 선전부 장관 '괴벨스'(토마스 크레취만)의 지휘 아래,
미군의 사기를 떨어트리는 선전 방송을 진행해 미국 국민들의 증오를 한 몸에 받는다.
그녀의 반역죄 유무를 결정하는 재판에 온 국민의 관심이 쏟아지고,
유명 변호사인 '제임스 라플린'(알 파치노)이 밀드레드의 변호를 맡게 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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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헝거> 티저 예고편
만약에 ?손금을 바꾸면 우리도 바뀔까?? 내가 아닌 내가 되고 싶었던 우리의 성장통 [헝거] 티저 예고편 대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