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BBITGUMI2023-12-28 22:45:28
작은 아이의 세계, 그 속의 감정들
-<클레오의 세계>(2023)
개봉 전 시사회에서 영화를 먼저 관람하고 작성된 리뷰입니다.
오마이뉴스에서 [영화 속 감정 읽기] 라는 연재를 합니다. 영화리뷰안에 각 인물이 대표하는 감정을 적고 그에 대한 여러 생각들을 소개할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갓난아이들에게 옆에 있는 엄마는 의지해야 할 꼭 필요한 존재다. 먹을 것을 해결해 주고, 아직 뭐가 뭔지 잘 알지 못하는 아이들을 도와주는 엄마는 그 아이의 전부다. 그러니까 엄마가 아이의 세계다. 꼭 엄마만 그런 존재가 되라는 법은 없다. 아빠도 그런 존재가 될 수도 있고, 친척이나 다른 누군가가 아이와 오랜 시간 같이 시간을 보내고 도움을 준다면, 그 자체로 아이의 세계에 포함될 수 있다. 어른들이 보기에 아주 좁고 작은 세계지만, 아이에게 그 세계는 무너지면 안 되는 무척이나 큰 세계다.
영화 <클레오의 세계>는 주인공 클레오(루이스 모루아-팡자니)의 세계를 보여준다. 그를 어릴 적부터 키운 보모 글로리아(일사 모레노 제고)는 어쩌면 클레오의 전부다. 하지만 글로리아에게 고향으로 떠나야 할 사정이 생기고 결국 이별을 맞이하게 된다. 영화는 클레오의 반응과 표정을 클로즈업으로 보여주면서 그가 겪는 상실감과 그의 세계가 무너지고 있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웃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클레오는 마음 한 구석이 시리고 슬프다. 흔들리는 클레오의 세계를 영화는 담담하고 강렬하게 담고 있다.
첫 번째 감정 - 클레오의 두려움
클레오의 세계에는 아빠도 있고, 학교 친구들과 선생님도 있고, 보모인 글로리아도 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글로리아가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크다.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가장 많이 웃고 떠들면서 감정을 공유한다. 엄마라는 존재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적어도 클레오의 세계에 엄마는 없다. 그 엄마라는 존재를 대신하는 사람이 바로 글로리아다. 글로리아는 클레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친구이자 엄마 같은 존재다. 같이 샤워를 하고, 같이 병원을 가고, 같이 밥을 먹는다. 그러니까 일상을 공유하는 두 사람은 어쩌면 떨어질 수 없는 관계가 되어버렸는지 모른다.
영화 초반 클레오와 글로리아의 수다와 장난을 지나면, 고향에 계신 글로리아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온다. 그 전화를 받고 글로리아가 우는 그 순간부터 클레오에게는 자신도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조금씩 생겨난다. 슬픔을 잠시 묻어둔 채 클레오를 챙기고 재우는 글로리아의 모습도 그렇게 편해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글로리아는 어느 순간에 클레오에게 이제 자신은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이야기해 버린다. 클로에는 그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한다. 모든 아이가 그렇듯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거냐는 물음을 다시 던진다.
돌아오지 않는다는 글로리아의 말에 클레오는 기운이 없어진다.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의 아이에겐 자신이 알던, 무척이나 친숙했던 큰 세계가 통째로 사라져 버릴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그의 두려움은 학교에서 활동할 수 있는 기운을 없애고 때론 눈물을 흘리게 만든다. 하지만 곧 그 세계는 무너진다. 아빠에게 위로받고 또 장난도 곧잘 치지만, 그런 아빠의 노력이 텅 비어버린 클레오의 세계를 전부 채울 수는 없다.
두 번째 감정 - 클레오의 질투
글로리아가 고향으로 돌아간 이후에도 클레오는 마음속에서 글로리아를 놓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그는 방학이 시작하자마자 글로리아의 고향으로 놀러 가게 된다. 여기서 클레오가 겪는 일들의 대부분은 기쁨의 감정을 느낄 순간들이다. 오랜만에 자신의 모든 세계인 글로리아를 만났고, 그의 가족들을 만나 인사를 나누는 모습은 클레오에겐 잃어버린 세계를 찾은 기쁨을 선사한다. 자신의 집이 있는 파리보다는 열악한 시골 섬의 작은 마을이지만 여기저기 다니며 구경도 하고, 바다에서 수영도 배우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글로리아에게는 임신한 딸과 아들이 있다. 글로리아의 딸이 출산하게 되면서 그의 집에선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시도 때도 없이 들린다. 이때부터 글로리아는 자신의 손주를 돌보는 일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클레오는 자신이 받던 글로리아의 사랑을 갓난아이가 빼앗아갔다는 느낌을 받는다. 자신이 느끼는 온 세상을 그 아이에게 빼앗겼다는 생각이 작은 클레오의 마음속에 큰 질투의 불씨를 불어넣는다. 그가 글로리아의 손주에게 하는 어떤 행동은 조금은 충격적으로 느껴지지만 클레오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만하다. 클레오의 세계는 이미 무너지고 있었으니까.
클레오와 갓난아이가 함께 있는 모습과 클레오가 하는 행동을 본 글로리아는 클레오에게 밖으로 나가라고 소리친다. 그때부터 클레오는 달리기 시작하고, 해변까지 간 클로에는 절벽에서 바다로 뛰어든다. 폭발하는 질투심과 죄책감이 동시에 그를 괴롭힌다. 어쩌면 클레오의 세계는 이미 없어져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당황한 클레오의 표정은 그 모든 붕괴를 표현하고 있다. 클레오의 감정은 그가 해변으로 달려가는 그 모든 순간에 완전히 방출된다. 그걸 보고 있으면 보는 이들도 안타까움에 어쩔 줄 모르게 된다. 클레오의 질투는 자연스럽게 그의 마음속에 일종의 파괴본능을 만들어냈고, 스스로 악마가 되고 싶었던 클레오는 부끄러움에 바다로 몸을 던진다.
세 번째 감정 - 글로리아의 슬픔
이 영화가 클레오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글로리아의 감정을 보여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클레오를 키워온 글로리아 역시 클레오에게 많은 감정을 나눠주었다. 그렇게 서로 나눈 감정은 마치 보이지 않는 끈처럼 두 사람을 연결하고 있다. 고향으로 떠나야 하는 순간에 글로리아는 눈물을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히 그의 마음에 글로리아의 자리는 꽤나 크게 만들어져 있었을 것이다. 담담히 그 상황을 설명하고 떠나는 글로리아는 자신의 힘으로 키워낸 작은 아이의 세계를 잠시 바라보고 돌아선다.
클레오가 자신의 고향으로 찾아온 방학기간 동안, 글로리아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자신만의 사업을 준비하면서 딸의 출산을 돕고, 태어난 아이를 챙겨야 했다. 그러니까 자신에게 잠시나마 찾아온 클레오가 너무나 반갑지만, 온전히 그에게만 신경을 쓸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글로리아는 자신의 가족을 좀 더 신경 쓰며 챙길 수밖에 없다. 여전히 클레오에게 다정한 글로리아지만, 그런 모든 상황을 지나면서 클레오의 세계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영화의 맨 마지막 장면엔 글로리아가 울음을 터뜨린다. 클레오를 공학까지 배웅하며 돌아서는 그의 마음은 복잡하다. 결국 클레오와 완전히 이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다시 한번 상기하면서 펑펑 눈물을 쏟는다. 아마도 클레오의 방학기간 동안 클레오도 그 사실을 명확하게 알게 되었을 것이다. 클레오는 비행기로 향하며 울음을 터뜨리진 않았지만 글로리아는 끝없이 눈물을 흘린다. 그의 눈물은 클레오의 세계에서 완전히 떠나게 된 그 상황에 대한 슬픔이 담겨있다.
영화 <클레오의 세계>는 클레오라는 아이의 시선에서 상황들을 따라간다. 다양한 클로즈업을 통해 클레오가 진짜로 볼만한 장면들을 화면으로 담고, 느낄만한 감정들을 무척 잘 전달하고 있다. 특히 영화 중간중간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는 전환 장면은 수채화 같은 이미지를 통해 클레오의 세계가 가진 따뜻함을 전달하고 있다.
이 영화는 작은 아이 클레오의 성장기라고 할 수 있다. 아주 협소한 작은 공간만 존재했던 클레오의 세계는 아마도 이 영화 속의 일을 겪고 나면 엄청나게 거대해지고 단단해질 것이다. 우리 모두가 겪은 성장기처럼. 글로리아는 비록 엄마는 아니었지만 클레오에게 중요한 존재였고, 두 사람이 나눴던 감정의 교류는 모두 진정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영화는 그 거대한 사랑을 클레오의 얼굴과 표정으로 잘 보여준다. 영화의 원제에는 보모의 이름인 글로리아 가 들어간다. 하지만 한국에 수입되면서 <클레오의 세계>로 제목이 바뀌었다. 처음엔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클레오의 세계가 곧 글로리아였으니.. 어쩌면 이 상황을 잘 표현한 완벽한 번역이 아닐까.
*영화의 스틸컷은 [왓챠]에서 다운로드하였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https://www.notion.so/Rabbitgumi-s-links-abbcc49e7c484d2aa727b6f4ccdb9e03?pvs=4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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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CFF 데일리] 생각하는 아이들, 생각하는 학교
감독: 네사 니 시아냔, 데클란 맥그래스
출연진: 맥커리비 교장 선생님과 아이들
시놉시스: 벨파스트 지역에 있는 한 초등학교에는 특별한 철학 수업이 있다. 이 수업을 주재하는 맥커리비 교장 선생님은 엘비스를 추앙하고 고대 철학을 사랑하는 유쾌한 사람이다. 빈곤과 마약, 종교 분쟁으로 얼룩진 벨파스트 지역은 아이들의 현재와 미래를 담보하기 어려운 동네. 맥커리비 선생님은 만연한 폭력과 빈곤의 그늘에서 아이들, 나아가 그들이 사는 바로 이곳을 변화시키기 위해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수업 방식에 그리스 철학자들의 지혜를 동원한다.(하략) (최은영)
아일랜드, 벨파스트 지역에는 특별한 초등학교가 있다. 벽에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세네카 등 저명한 철학자들의 명언이 장식되어 있고, 아이들은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다양한 철학자들의 사상을 배우며 자유로이 토론한다. 교장은 권위를 내세우지 않으며 선생님들은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존중받는다. 잘못을 저지른 아이는 교장 선생님과의 토론을 통해 스스로의 잘못과 그것의 인과 관계, 그리고 그러한 잘못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스스로 깨달아 나가게 된다. 학부모는 학교를 신뢰하고, 선생님의 말을 존중한다. 이 얼마나 이상적인 학교란 말인가? 요즘 한국을 떠들썩하게 하는 초등학교 이슈들(주로 학생과 교사, 그리고 학부모에 얽힌 불합리한 사건들)을 생각하면 이것은 정말이지 영화 같은 일이어서, 필자는 엔딩크레딧이 올라가기 전까지는 이것이 다큐멘터리가 아닌 것으로 착각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적인 학교는 절로 생기지 않는다. 마치 헤엄치는 백조처럼 다양한 사람들의 끊임없는 노력이 이 학교를 있게 했다. 교장은 권위를 내려놓고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기꺼이 고개를 숙이고, 동료 교사들을 교사로서 존중한다. 아이들이 방황의 기로에 놓였을 때 가장 먼저 달려가는 이 역시 그이다. 마약과 종교 분쟁, 총기 사고 따위로 삭막하고 황량하던 벨파스트 지역에서 아이들이 어두운 길로 빠져들지 않게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기르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맥커러비 교장이 목표한 바이다. 그러나 아이를 가르친다는 것은 비단 아이 그 자체만을 가르치는 것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며, 벨파스트 지역이 가지는 특수성은 때로는 그들의 노력을 무상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와 교직원들은 노력한다. 아이를 가르친다는 것은 아이의 삶과 생각을 바꾸는 일이고, 그것은 나아가 벨파스트와 아일랜드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교장은 말한다. 단 하나의 학생이라도 그들로 하여금 좋은 변화를 맞이한다면 그것으로도 좋을 일이라고.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어투에는 확신이 깃들어 있다.
완전히 같은 직종은 아니지만 나도 비슷하게 학생을 가르치는 입장으로서 이 학교의 이야기는 여러 부분에서 좋은 영감을 주었다. 열정적인 교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마음껏 열정을 펼칠 수 있는 환경이 충분히 마련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육을 신뢰하고, 그만큼 지원하며 바라는 대로 따르는 환경이 충분히 갖추어졌을 때, 교사는 가질 수 있는 최대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학생들이 받는 교육과 무관하지 않다. 언젠가 한국도 이런 학교가 생길 수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09-16(토)15:00 - 16:42 롯데시네마 은평 7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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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등한 위치에서 수평을 이루는 사랑을 해야되는 이유
영화 ‘번지 점프를 하다’를 통해 매체의 영향과 매체를 통한 학습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해당 영화의 감독은 그루밍 성범죄를 생각하고 이 영화를 제작한 건 아니지만 오늘날 이 영화가 혹평을 받고 있는 걸 생각한다면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무언가를 만들 때 얼마나 신중하게 만들어야 되는지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과거 걸캅스를 통해 디지털 성범죄란 무엇인지에 더 자세히 알게 되었는데 ‘그루밍 성폭력’이라는 개념을 알게 된 건 그렇게 오래 되지 않아서 영화 속 서인우라는 인물이 현빈이라는 학생을 대하는 자세가 왜 그루밍 성폭력인지를 끊임없이 생각해보았다.
그루밍 성범죄란 영화에서 나온 것처럼 선생님과 같이 지위를 위계나 위력으로 사용해 피해자와 정서적인 유대를 쌓으며 심리적으로 가해자를 믿고 의지하게 만든 뒤 성폭력을 가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어느 정도 성숙한 생각을 할 수 있는 나이, 성적자기결정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그루밍 성범죄의 피해자가 된다는 것은 가해자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이를 눈치채지 못하도록 피해자를 안심시킨다는 점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이런 종류의 성범죄를 범죄로 인식하기 어려운 이유가 내가 존경하는 누군가가 또는 타인에게 존경을 받는 누군가가 나에게 관심을 준다는 것이 특별하다고 생각하게끔 만들고 이러한 혼란이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일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어렵게 만들기 때문에 이것을 범죄로 인지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느꼈다.
그렇기 때문에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경험을 범죄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다. 피해자의 나이가 어릴수록 그 위험가능성을 파악하기 어렵고 가해자는 이런 피해자의 판단능력의 미숙함을 악용한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점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런 낭만적인 감정이 쌓여 연인으로 발전했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과연 피해자 본인이 한 선택인지를 생각해봐야 한다고 느꼈는데 사회적으로 보호 받아야 되는 취약계층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삼아 그들의 생계를 도와준다는 명목하에 이루어질 수도 있기 때문에 자칫 가스라이팅과 같은 더 큰 폭력, 더 큰 범죄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피해자를 구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성인과 미성년 사이에서 일어나는 그루밍 성범죄의 경우 이것을 사랑으로 인정한다면 다른 비슷한 상황에 놓여있는 피해자들 또한 범죄에서 빠져나오기 어렵기 때문이다.
해당 영화가 그루밍 성범죄에 대한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 만든 영화는 아니었지만 현대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 사회적 지위를 이용한 성범죄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간접적으로 표현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2021년인 현재 성교육의 필요성과 이런 범죄 속에서 피해자를 구제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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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해전야 / New Year Blues, 2020
지금도 회자되는 <러브 액츄얼리2003>,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2009>, 그리고 <발렌타인 데이2010>의 특징이 있습니다.
한데 모이기 어려운 배우들이 한 영화에 나오는 것과 특정 시즌을 노렸으며, 하나같이 "옴니버스"영화라는 점입니다.
그런 점에서 영화 <새해전야>도 크게 다르지가 않는데, 제목에서 어디선가 본듯한 느낌도 들 겁니다.
그도 그럴 것이 <결혼전야2013>를 만들었던 "홍지영"감독을 비롯하여 "이연희"와 "김강우"분도 이번 영화에서 그대로 나오거든요.
속편에 대한 걱정은 잠시, 미뤄두고 영화 <새해전야>는 개봉부터 힘들었습니다.
제목처럼 2020년 12월 30일에 개봉해 "새해"를 맞이하는 것이 계획이었겠지만, "코로나19"로 그러지 못했습니다.
양력으로는 이미, 새해를 맞이한 지 2달이나 흘렀지만 아직 음력으로는 아직이니 부득이하게 "설 연휴"에 맞춰 개봉했는데요.
무엇보다 <소울>과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까지 국내 극장가에서 국내 영화 찾기도 힘들어 내심 이런 영화를 기대했기도 했고요.
'그렇게, 관람한 느낌은 어땠는지?' - 영화 <새해전야>에 대한 감상을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영화는 어느덧, 새해를 앞둔 연말을 보여줍니다.
강력반에서 민원실로 좌천된 '지호'는 이혼 소송 중 '신변보호'를 요구하는 "효영", 일방적인 남자 친구의 이별 통보에 홧김에 아르헨티나까지 오게 된 "진아"는 그곳에서 와인 배달원 "재헌"을 만납니다.
그리고 결혼을 앞둔 패럼릭픽 국가대표 "래환"과 "오월", 국제 커플 "용찬"과 "야오린", 그리고 "용찬"의 누나이자 시누이 "용미"까지 이들은 모두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1. 소재만 바꾸면 쓰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새해전야2021>는 <결혼전야2013>를 만들었던 "홍지영"감독을 비롯해 "이연희"와 "김강우"분이 그대로 나오는데요.
그렇기에 전편을 챙겨봐야 하는 걱정도 잠시 일렁이나 배역들이 이어지는 영화는 아니기에 관객들에게 이런 숙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편을 챙겨본 관객들로서는 영화의 유사함은 지워지지 않을 겁니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국제결혼과 위기가 존재하는 커플도 있으니 <새해전야>로서는 이야기가 이어지지도 않는 <결혼전야>와의 비교는 피할 수가 없습니다.
영화도 이런 유사성을 알기에 "시누이" 캐릭터를 새로이 추가하거나 이별이 아닌 "이혼"이라는 소재들을 바꾸는 등 시도들이 보입니다.
물론, 이렇다고 해서 <새해전야>만의 온전한 그림들을 나오지는 않지만 가장 아쉬운 점은 "옴니버스" 즉, 이야기입니다.
국내에서 "옴니버스"는 흥행이 잘 안되는 장르이면서도 어려운 장르입니다.
그나마, 흥행에 성공한 영화가 "장진"의 <굿모닝 프레지던트2009>가 기록한 255만명임과 동시에 네이버 평점 6.70으로 좋지도 않습니다.
왜, 이런 이유가 있는 것일까요?
2. 이야기의 구조가 같다고 복붙을?
이런 이유에는 "옴니버스"라는 장르의 특수성을 살펴봐야 합니다.
많은 배우들이 출연하는 것만 본다면, "멀티캐스팅"과 유사하나 "옴니버스"는 각 캐릭터들의 이야기가 개별적으로 전개되는데요.
이야기의 연결도 되지 않아 캐릭터별로 이야기를 봐야 하는 관객들의 피로는 다른 영화에 비해 배가 됩니다.
그렇기에 이야기의 러닝타임은 길어지고, 캐릭터들의 설명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단면적으로 소개되는데 그칠 뿐입니다.
그리고 이런 단점들이 <새해전야>에서도 그대로, 노출되고 반복됩니다.
각자의 이야기들을 살펴보면, 관계에서의 위기를 보여주는데 이에 대한 과정이 좋게 말하면 시원시원하고 나쁘게 말하면 정말 급합니다.
'지호 - 효영'의 경우. 두 캐릭터가 이혼을 겪는 캐릭터들인데 '지호'는 이후 전처에게 전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의외로 전처는 이에 '잘 사귀어 보라'라는 응원을 받지만, '효영'은 전 남편에게 위협을 당하는 엇갈린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만해도 길게 풀어갈 수 있지만, 영화는 이를 그냥 과감하게 뛰어넘기며 맺어주는 장면으로 마무리합니다.
이런 모습이 "래환 - 오월"에게도 그대로 반복되고, "용찬 - 야오린"에게도 적용되니 동어반복에 관객들은 지쳐가는데요.
그래서인지 "꼭 있어야 했나?'싶은 캐릭터 출연의 당위성까지 흔들립니다.
3. 익숙함이 주는 포근함?
그렇기에 "옴니버스"에게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각 캐릭터들의 동선을 겹치는 우발적인 장면들 넣는데요.
스크린 너머 관객들은 알지만, 극 중 캐릭터들을 모르는 정보의 비대칭으로 만들어지는 재미는 "옴니버스"를 즐기는 요소 중 하나입니다.
<새해전야>에서도 이런 장면들이 보이는데, 극 중 "용찬"이 "지호"에게 사건을 의뢰하거나 "래환"의 재활 트레이너가 "효영"이라든지 "오월"과 "용찬"의 누나 "용미"가 서로 아는 사이라든지 말이죠.
하지만 이런 관계들이 별개의 이야기가 아니라 같이 화면에 나온다는 것에 그치며, "옴니버스"라서 더 아쉬운 시도에 그칩니다.
영화 <새해전야>의 원제 'New Year Blues'에서 'Blues'는 가벼운 우울증으로 해석됩니다.
극 중에서도 이를 "새해병"으로 "월요병"과 비슷하게 말하는데, 이를 빗대어 본다면 극장에서 본 게 아쉽다고 해석되기도 하는데요.
그럼에도 영화 <새해전야>는 무리 없이 즐기는 영화임은 분명합니다.
앞서 언급한 <러브 액츄얼리2003>,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2009>, 그리고 <발렌타인 데이2010>처럼 한없이 가벼우며, "로맨틱 코미디"이라면 무릇 나와주어야 하는 장면들과 상황까지 모든 것이 예상 가능한 영화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본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는 맛이라 냄비에 물부터 올리는 과정처럼 <새해전야>는 신작인데도 익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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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illers of the flower moon / 플라워 킬링 문
2023년 11월 21일에 감상한 '플라워 킬링 문'에 대한 짤막한 감상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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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소개 /
‘플라워 킬링 문’은 진정한 사랑과 말할 수 없는 배신이 교차하는 서부 범죄극으로 ‘어니스트 버크하트’(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몰리 카일리’(릴리 글래드스톤)의 이루어질 수 없는 로맨스를 중심으로 오세이지족에게 벌어진 끔찍한 비극 실화를 그려낸다. 데이비드 그랜 작가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아카데미를 수상한 거장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이 연출과 각본을 맡았으며, 에릭 로스가 각본에 함께 참여했다.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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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상평 /
플롯구성과 연출이 눈에 띄는 영화였다.
씬과 씬을 연결하는 플롯구성이 어느하나 튀지 않고 자연스럽고 매끄러웠다. 연출 또한 마찬가지.
가장 인상깊은 연출은 당연히 마지막씬이다.
재판 이후의 이야기를 연극형식의 나레이팅으로 보여주면서 관객들을 현실로 끌여들였고, 마지막에 마틴 스콜세지가 감독으로서 직접 등장하여 그들(오세이지족)의 마지막을 위로한다.
가장 마지막씬에서는 오세이지족들이 모여 큰 원을 만드는데, 이 원은 곧 꽃의 형상을 띈다. 이는 "flower moon"에서 희생된 소중한 영혼들을한자리에 모아 기리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3시간 30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을 이렇게 끌고 갈 수 있는 힘은 거장 마틴 스콜세지와 디카프리오, 로버트 드니로의 세박자가 맞아 떨어졌기 때문에 나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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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스 폰 트리에, 어둠 속의 댄서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이야기를 시작하며
들어가기에 앞서 1973년 발매된 Paul Simon의 싱글 <American Tune>이라는 노래를 잠시 소개하고자 한다. 가사를 읽어보면, 이 노래는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미국으로 이주했으나 뼛속까지 지쳐버린 이민자들이 부르는 '미국식 한의 정서'를 담은 노래이다. 잉글랜드인들을 태운 메이플라워 호가 막 신대륙에 도착했을 때 꿈과 이상으로 가득 차 있던 시절은 이미 아득한 옛날이 되었지만, 70년대에도 여전히 미국이라는 신화는 새롭게 쓰이고 있었다. 60년대 말에 소련보다 먼저 달에 도착하였으며,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룬다. 노래의 화자는, 모든 것은 진보하고 변화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이민자인 내 삶만은 나아지지 않는 것인지, 이 노동은 죽을 때까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인지를 묻는다.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메이플라워 이래 아메리칸 드림을 위한 여행은 계속된다. 이제는 오직 일신의 안식을 바라며 노래는 끝이 난다. 이 곡이 <마태 수난곡>의 코랄을 모티브로 했다는 것은 한참 뒤에 안 사실이다. 예수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수난을 기꺼이 받아들였다면, 이들은 무엇을 위해 그 수난을 감당해야 했던가?
Many's the time I've been mistaken
And many times confused
Yes, and I've often felt forsaken
And certainly misused
Oh, but I'm alright, I'm alright
I'm just weary to my bones
Still, you don't expect to be bright and bon vivant
So far away from home, so far away from home
And I don't know a soul who's not been battered
I don't have a friend who feels at ease
I don't know a dream that's not been shattered
Or driven to its knees
But it's alright, it's alright
For we lived so well so long
Still, when I think of the
Road we're traveling on
I wonder what's gone wrong
I can't help it, I wonder what has gone wrong
And I dreamed I was dying
I dreamed that my soul rose unexpectedly
And looking back down at me
Smiled reassuringly
And I dreamed I was flying
And high up above my eyes could clearly see
The Statue of Liberty
Sailing away to sea
And I dreamed I was flying
We come on the ship they call The Mayflower
We come on the ship that sailed the moon
We come in the age's most uncertain hours
And sing an American tune
Oh, and it's alright, it's alright, it's alright
You can't be forever blessed
Still, tomorrow's going to be another working day
And I'm trying to get some rest
That's all I'm trying to get some rest뉴욕 센트럴 파크에서 <American Tune>을 부르는 Slmon & Garfunkel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와 지난 2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폰 트랩 대령 역을 맡았던 故 크리스토퍼 플러머 배우의 부음 소식을 듣고서, 부모님의 추억팔이용으로 내가 어릴 적에도 같이 DVD로 돌려 보았던 영화를 오랜만에 떠올렸다. 많은 이들이 위 영화에 대하여 세대를 아우르는 추억이자 향수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라스 폰 트리에의 <어둠 속의 댄서>를 보았다. 12세 관람가, 아이슬란드 가수 비요크의 주연, 칸느 2관왕의 업적, 개봉 당시 평단의 극찬, 포스터에서 비요크의 행복한 미소를 머금은 표정 때문에 라스 폰 트리에 판 <사운드 오브 뮤직>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안이하게 관람을 시작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영화는 악랄한 - 이렇게 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 의도를 가진 감독이 만든 2시간 20분짜리 악몽이었다. <American Tune>을 들었을 때, 희망도 절망도 아닌 <수난>의 정서를, 영화를 보면서 똑같이 느꼈다. 과거와 미래의 희망은 이 뮤지컬 무대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것을 얻기 위한 과정, 아주 지난하고 힘든 과정만이 영화 속에 담길 뿐이다.
소음은 리듬이 되고 음악이 된다
1964년 미국 워싱턴 주.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아들과 함께 이민을 떠나온 셀마(비요크)는 싱크대 공장에서 일하면서 자신과 같은 유전병을 가진 아들의 눈을 고치기 위한 수술비를 벌고 있다. 영화의 오프닝은 그녀가 일과 후에 뮤지컬 연습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직장 동료 캐시(카트린느 드뇌브)도 참여하고 있다.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60년대를 풍미했던 <쉘부르의 우산>의 그 카트린느 드뇌브가 변변치 않은 무대에 억지로 올라가 있는 듯한 기묘한 모습, 일사불란한 다른 배우들과 호흡을 맞추지 못하고 홀로 겉도는 셀마의 모습을 모습은 어딘가 부자연스럽고 의심쩍다. 그녀의 뮤지컬 실력은 무대가 아니라 공장 소음 안에서 꾸는 몽상에서만 제대로 발휘된다. <라라랜드>에서 전주만 들어도 신이 나는 뮤지컬 ost에 맞추어 화려한 의상을 입은 이들이 LA 고속도로를 점거한 군무에 익숙했던 우리의 눈은, 미국 동부 공장 노동자들이 위험하고 비좁은 공장 안에서 추는 춤이 어색하기만 하다.
6mm 핸드헬드 필름 카메라로 촬영한 셀마의 일상은 그녀가 보는 세상에 대한 어지럽고 둔탁한 인상을 담고자 노력하며, 마치 한 체코계 이민자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사실성도 부여한다. 시력이 감퇴하는 대신에 예민해진 셀마의 청각은, 그녀의 삶이 매번 나락으로 떨어지는 순간에 주변의 작은 소음을 감지한다. 그 작은 소음, 규칙적인 리듬으로부터 그녀의 노래는 다시 시작되고, 셀마는 혼자서 미치기 직전의 순간에 그 박자에서 다시 희망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다른 뮤지컬 영화와 달리 관객은 뮤지컬 장면에 매번 온전히 몰입할 수가 없는데, 위험한 공장 프레스 앞에서 몽상을 하고 있는 셀마의 현실 모습이 점차 뮤지컬 장면 안으로 침투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 같은 위태로운 현실의 침투를 통해 관객의 몰입을 일부러 훼방 놓으면서, 극이 후반부로 치달아 갈수록 뮤지컬이 나오는 몇 분을 시간이 멈춰버린 지옥처럼 길게 만들어 버리는 데 성공한다.
후반부로 치달을 수록 이 소음은 하나 둘 제거되면서 성스러운 종교 음악만이 남는다. 교도소 안에서 셀마는 '여긴 왜 이렇게 조용한가요?'라고 물으면서 절망한다. 이 때 비요크의 95년도 앨범 'It's so quiet'라는 노래와 뮤비가 즉각적으로 떠올랐는데, 설마 이것까지도 감독의 시니컬한 농담인 지를 의심했다. 이 곡의 뮤비안에서 비요크는 엠마 스톤 못지않게 화려한 원색 드레스를 입고서 뮤지컬의 여주인공처럼 '여긴 너무 조용해!'라고 주변을 조용히 시킨 다음, 가장 경쾌하고 자신 있게 꽥 소리를 지른다. 그러나 셀마로 분한 그녀는 자신을 미치게 하는 고요를 쫓아내지 못한다. 겨우 통풍구로 들려오는 막연한 채플 소리에 의지하여 세상에서 가장 구슬픈 <My favorite things>를 부를 뿐이다.
비요크의 <It's so quite> 뮤직 비디오
유럽 감독이 만든 악몽 'American bad dream'
감독의 비행 공포증 때문에 이 영화가 유럽 여러 지역에서 촬영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배우 또한 데이비드 모스(빌 휴스턴 역)를 제외한 주요 캐릭터들은 모두 유럽 출신의 배우들이다. 우리는 미국 땅을 제대로 밟아본 적도 없는 덴마크 감독이 가상으로 구현해 낸 미국의 허상을 보고 있다. 2차 대전 이후, 정치와 경제적 패권은 모두 이 신대륙으로 넘어갔고, 유럽에는 오직 과거에의 향수와 문화예술적 자부심만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 착란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도움이 되지 못하며 무용한 지 영화는 낱낱이 그린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셀마는 동료들과 함께 <사운드 오브 뮤직>의 뮤지컬을 연습하고 있다. 마리아와 본 트랩가 아이들은 동화처럼 아름다운 알프스 산맥의 계곡과 산, 합스부르크 왕가의 위용을 자랑하는 아름다운 미라벨 궁전을 배경으로 이제 누구에게나 친숙한 '도레미송'을 부르고 있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로버트 와이즈 감독의 손을 거쳤으므로 티 없이 밝고, 아름답게 묘사된 장면들은 이제 관객을 골리는 악취미를 가진 유럽 감독에 의하여 생활에 찌든 유럽계 이민자들의 소일거리 취미로 축소, 재현된다.
셀마의 예술적 기질과 취미는 생산 활동에 저해되는 결격 사유가 되고, 아들의 병원비가 아니라 아버지에게 돈을 보내고 있다는 변명은 '공산주의에서는 모든 것을 나누는군요'라는 조롱으로 돌아온다. 체코에서의 좋았던 시절을 발설하면 '그러면 체코로 돌아가지 왜 여기 있냐'는 핀잔이 돌아온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이 이웃의 얼굴을 한 미국 사회의 위선을 보여주는 것은 놀랍지도 않지만, 그는 2차 대전 후 더 나은 삶을 찾아서 맹목적으로 미국 땅을 밟은 유럽계 이민자들의 무력함,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희망을 노래하는 백치미, 현실과 이상의 혼돈, 후세대를 위한 자발적이고 맹목적인 희생까지도 비틀어 보여준다.
빌과 제프, 체격이나 인상이 비슷한 마을의 두 남자가 셀마의 주위를 맴돈다. 빌은 그녀에게 트레일러를 내주고, 아들 진을 낮동안 돌봐 주는 친절하고 선한 이웃이고, 제프는 셀마에게 호감을 보이는 낯선 이다. 눈이 멀어가는 셀마에게는 이 둘의 의도와 진심을 분간할 능력이 없다. 결국 셀마는 태워주겠다는 제프의 호의를 거절하고 그녀와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가까운 빌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결정적인 그녀의 선택, 빌을 의지하고 서로의 비밀을 공유한 것을 계기로 그녀의 운명은 추락의 길을 걷는다.
영화가 빌을 묘사하는 방식은 흔한 미국 영화에서 악당을 그리는 방식과는 다르다. 그는 사악하기보다는 저열한 인물이다. 치밀하다기보다는 '눈 가리고 아웅'식의 거짓말로 둘러대고, 부인이 그의 거짓말을 믿도록 신파 장면을 연출하며, 경제적 정신적 파산으로 인해 죽음을 생각해왔으나 스스로 죽을 용기도 없어서 셀마에게 그 역할을 위임한다. 부인과 셀마뿐 아니라, 정의를 지키다 순국한 희생양으로 의로운 죽음을 맞았다고 스스로 믿을 만큼 자기 자신까지 속이는 비열한 인물이다. 그래서인지 셀마의 범죄 장면은, 살면서 웬만하면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을 만큼 지리멸렬하였다. 앞서 말했듯이 이 장면을 끔찍하도록 길게 느껴지게 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뮤지컬 대사와 음악이다. 이제 그녀의 환상 속에서 강은 핏빛으로 흐르며, '날 용서할 수 있나요'라는 그녀의 노래는 부조리의 끝을 달린다.
수녀에서 어머니로, 어머니에서 수녀로
<사운드 오브 뮤직>의 마리아는 수녀에서 선생님으로, 다시 트랩 가 아이들의 어머니로 신분이 바뀐다. 마리아의 재기 발랄함과 에너지를 감당하지 못하는 수녀원, 트랩 대령과의 초반 대립을 거쳐, 그녀는 오직 자신의 노래로써 한 가족을 변화시킨다. 후에 그녀의 부재를 앓는 아이들을 위해 아내이자 자애로운 어머니로 돌아와 한 가족을 이루게 된다. 반면 <어둠 속의 댄서>의 셀마는 숙제하는데 이상한 질문만 하는 어머니, 아들의 생일에 자전거도 못 사주는 어머니, 범죄자 어머니, 아이가 찾아도 답이 없는 어머니이다. 셀마는 그녀의 유전병 때문에 서서히 시력이 감퇴하자 주인공 마리아 역에서 수녀 역의 조연으로 밀려난다. 이것은 어머니(Mother)에서 살인자(Murderer)로, 그리고 제도적으로 아이와 어떤 연결고리도 갖지 못하는 희생당하는 성 처녀와 같은 수녀(Nun, 아이에게는 무의미함 None)로 전락하는 것을 상징한다. 마리아의 선택은 수녀원의 자비로운 허락과 자유 의지에 따랐던 반면, 셀마에게는 점점 극단적이고 좁은 A/B 선택지만 주어질 뿐이다. 그녀를 진심을 다해 돕고자 하는 캐시마저 이 시스템에 동조하게 되는 것은 슬픈 역설이었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은 셀마를 잔다르크에 자주 비견했다고 한다. 마지막 순간에 '진(Jean)'의 이름을 부르짖는 그녀는 브레송의 <잔다르크의 재판>에서 누구도 굽힐 수 없는 신념을 가졌던 잔(Jeanne)의 모습을 닮아있다. 그녀가 원하여 자유 의지로 신념의 전쟁을 했는지, 하늘에 있는 누군가 계시를 내렸는지를 묻는다면 전혀 그렇지 않다. 그녀는 잔 다르크처럼 의연한지를 묻는다면 역시 그렇지 않다. 그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전화기에 대고 화내며 울부짖고, 두려움과 고통 때문에 몸부림친다. 사실 그녀는 평범한 어머니, 선생님이자 아이들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되고 싶어 했던 한 여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바라던 대로 운명의 되물림이 끊어졌다는 소식을 들으며 결국 그녀는 자신이 치른 희생에 합당한 구원을 받았다는 듯 수그러든다. 그녀의 마지막을 지켜보는 관객 앞에서 그녀의 마지막 절규 혹은 노래가 울려 퍼지고, 한 번의 추락, 그리고 뮤지컬의 막이 드디어 닫힌다.
서론에서 언급했던 폴 사이먼의 <American Tune>에서 후렴구 가사를 다시 곱씹어 보았다. "I dreamed I was dying"에서 "And I dreamed I was flying"으로 변주, 높이 승화되는 구절은, 죽음을 통해 비로소 노동의 고통에서 해방된 육신을 말한다. 그리고 해방된 자는 이제 자유의 여신상이 바다로 항해하는 저 이상향의 풍경을 또렷하게 내려다볼 수 있다. 강탈당한 것을 지켜내고 본인 스스로까지 제물로 바치고 나서야 셀마는 시력을 되찾아 자신의 인생이 어떤 의미였는지 또렷하게 직시할 수 있다. 그렇게 더딘, 노동자들의 피땀으로 흘러가는 이 항해는 후대에게 전승된다.
And I dreamed I was flying
And high up above my eyes could clearly see
The Statue of Liberty
Sailing away to sea
And I dreamed I was flying마치며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는 전쟁이 모든 것을 휩쓸기 직전에 사람들이 품었던 꿈과 희망, 가족의 결합을 노래하였다. 그리고 난민이 된 트랩 가 가족들이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서 알프스를 희망차게 넘으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어린 시절 영화를 보면서 항상 이상했던 것은 알프스는 춥고 험할 텐데 이 사람들은 동네 뒷동산을 산보하듯 노래를 부르고 행복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즉 영화는 불행했던 과거(트랩가 7남매 어머니의 죽음)와 다가올 불안한 미래(난민의 삶)는 잘라버린 채 온전하고 행복한 모습들만 보여준다. 마치 이에 대한 블랙 패러디처럼, <어둠 속의 댄서>는 셀마가 이민 전 행복했었던 체코에서의 과거를 보여주는 것도 생략하고 , 그리고 그녀의 희생을 통해 아들 진에게 주어진 좀 더 밝은 미래를 보여주지 않은 채 무대의 막을 내린다.
영화를 보면서 한부모, 장애인, 이민자, 블루칼라 노동자 등 모든 측면에서 의지할 곳 없는 사회 소수자인 한 여성을 여러 장치들을 가지고 극한의 상황으로 몰아가는 가학성이 과연 필수 불가결한 것이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실제로 영화는 많은 논란거리를 낳았고, 2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평단과 관객의 평가 또한 극명히 갈리고 있다. 형식적으로는 뮤지컬 장르를 표방하고는 있지만 사실은 관객을 심적으로 괴롭히기 위한 인위적인 수단에 불과한 게 아니었나? 감독은 실제로 홀로 아이를 키우고 있던 비요크를 비슷한 상황에 몰아넣어 과하게 몰입시킴으로써 훌륭한 연기가 아닌 그녀의 진실된 고통을 착취한 것이 아닌가?
사디스트적인 악취미를 가진 감독이 단지 본인의 유희를 위해 이 영화를 만든 게 아니라는 가정 하에, 이 씁쓸하고 어두운 뮤지컬 영화는 종교적인 희생과 구원에 대한 메시지를 담은 20세기판 <마태 수난곡>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감독은 브로드웨이 뮤지컬보다는 차라리 <셀마 수난곡>을 쓰고 있는 것 같다. 마지막에 나무판자 위에 몸을 결박당하는 셀마의 모습을 보며 성경에 나오는 '그 존재'가 아닌 다른 누구를 떠올릴 수 있겠는가? 그녀는 20세기의 아메리칸 드림을 믿고 현실에서 구원받기 위한 모든 이민 세대들을 위해 스스로 희생당한 대속죄인이다. 따라서 그녀에게 가해지는 것들은 자식 세대가 같은 고통을 겪지 않기 위해 필연적으로 감내해야 할 시련이기에, 그녀는 친구의 얼굴을 한 어떤 '사탄'의 시험과 유혹에도 이겨낸다. 이로써 그녀의 아들과 후손들은 광명의 한 자락을 볼 수 있다. 그들은 또 다른 결의 결핍과 상처를 떠안은 채 아메리칸 드림의 항해를 이어간다.
[Eurofilm 11. 덴마크, 독일,스웨덴, 네덜란드, 미국, 영국, 핀란드,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2021년 3월 6일 감상 / 2021년 3월 7일 씀
* 본 콘텐츠는 브런치 karenine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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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미 속에서 감출 수 없는 실망감
해리포터 세계관에서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를 꼽아보자면 하면 뉴트 스캐맨더! 그 이유는 해리포터 기숙사 테스트에서 후플푸프로 나왔고, 이 세계관에서 가장 유명한 후플푸프 출신은 뉴트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온갖 기대를 하고 보러 갔으나 그 기대 때문인지 실망을 금치 못했던 영화 신비한 동물들과 덤블도어의 비밀. 재미는 있었지만 작품에 대한 안타까움이 너무 컸던 작품이었다.
영화 신비한 동물들과 덤블도어의 비밀 시놉시스가장 위험한 마법에 맞선, 세상을 구할 전쟁이 시작된다!
1930년대, 제2차 세계대전에 마법사들이 개입하게 되면서 강력한 어둠의 마법사 그린델왈드의 힘이 급속도로 커진다. 덤블도어는 뉴트 스캐맨더에게 위대한 마법사 가문 후손, 마법학교의 유능한 교사, 머글 등으로 이루어진 팀에게 임무를 맡긴다. 이에 뉴트와 친구들은 머글과의 전쟁을 선포한 그린델왈드와 추종자들, 그의 위험한 신비한 동물들에 맞서 세상을 구할 거대한 전쟁에 나선다. 한편 전쟁의 위기가 최고조로 달한 상황 속에서 덤블도어는 더 이상 방관자로 머물 수 없는 순간을 맞이하고, 서서히 숨겨진 비밀이 드러난다.*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신비한 동물들과 덤블도어의 비밀>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그렇다, 그들은 귀여웠다
사실 신비한 동물사전 시리즈를 보는 이유는 귀여운 동물들을 구경하는 일 아닐까? 실제 존재하지 않고 마법 세계에만 존재하는 동물들을 연구하고 찾아나서는 동물학자 뉴트와 동물들의 케미 기대하며 보는 팬들이 많을 것이다. 이번 신비한 동물과 덤블도어의 비밀에서도 그 귀여운 장면이 등장한다. 바로 지하 감옥에 있는 테시우스를 구하려 가는 장면에서 말이다. 도대체 그 빨간 아이들은 누구일까? 꽃게..? 랍스터? 어쨌든 수백마리의 꽃게들이 요새와 같은 지하감옥을 돌아다니며 죽은 사람들의 사체를 먹고 있었다. 테시우스를 구하러 간 뉴트는 이 아이들의 모방심리를 활용해서 이상한 포즈로 다같이 테시우스가 있는 곳까지 엉덩이를 씰룩씰룩 흔들며 찾아간다. 심지어 테시우스를 구하고 돌아갈 때도 다같이 씰룩이면서 가는데 정말 영화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빵 터졌던 순간이었다.
그리고 피켓과 태디가 뉴트의 지팡이와 함께 간수에게 맡겨진다. 뉴트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피켓과 테디는 열심히 나름대로 간수를 속이려고 하던 찰나 졸던 간수가 깨어나면서 동망치는 그 장면 역시 굉장히 귀여웠다. 중간중간 귀여운 동물 친구들이 많이 나와서 어두웠던 영화의 분위기를 잘 살려주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도대체 신비한 동물이 왜 필요했을까?
사실 이번 작품이 차라리 덤블도어와 그린델왈드에 초점을 맞추는 아예 별도의 이야기로 만들어지는 것이 훨씬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억지로 신비한 동물드로가 덤블도어의 이야기를 끼워 맞춘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덤블도어와 그린델왈드 사이가 틀어지고 그린델왈드가 마법동물들을 악용하기 시작하면서 덤블도어는 이를 막고 마법세계과 머글세계를 동시에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는 컨셉으로 가야 이야기 자체도 심도 있고, 캐릭터 간의 서사도 더 살릴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신비한 동물이 주가 되고 덤블도어가 끼어든 느낌이라 어떤 캐릭터도 그리 영화 속에서 인상적으로 잘 살리지 못했다. 그리고 크레덴스가 덤블도어의 가문이라는 사실까지 밝혀내면서 도통 동물들이 왜 등장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작품이었다. 동물이라는 신비함과 그린델왈드의 음모가 전혀 어울리지 않아서 잘 섞이지 않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보는 내내 안타까웠다.
캐릭터 간의 합은 어디 있을까?
이번 작품의 문제점이라고 하자면 캐릭터 간의 합이 없다. 각자 각개전투를 한다. 분명히 머글, 동물학자, 위대한 마법사 집안, 오러 국장, 교술, 뉴능한 조수 이렇게 다양한 존재들이 모여 있고 그린델왈드와의 전쟁을 준비하는데 사태의 심각성이 와닿지 않는다. 모두가 비밀을 감춘 채 장막 뒤에 있는 느낌이었고, 심지어 그렇다면 결말에서 그간의 비밀이 한꺼번에 풀리면서 퍼즐이 맞춰지는 카타르시스라도 전해져야 할텐데 그렇지 않다. 밍숭맹숭 끝난 느낌에다가 전략이 "무계획이 계획이다. 다중계획이다."였는데 그래도 이게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는 인지할 수 있도록 해야되는데 도대체 뭘 하려는지 알 수가 없으니 집중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무언가를 자꾸 감추려고만 하고 이에 한 서사도 제대로 풀어내지 않아서 밀도감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은 작품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 신비한 동물들과 덤블도어의 비밀이 돈 아까울 정도 못 만든 작품은 아니다. 기대했던 것보다 실망스러웠을 뿐 재밌는 작품이긴 하다. 그저 더 잘 만들 수도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크다보니 쓴소리를 더 하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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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스프링 송> 메인 예고편
“우린 그냥 봄의 노래를 만드는 거야”
겨울이 끝나길 기다리던 어느 날,
‘준상’은 새로운 곡을 준비하던 밴드 멤버 ‘준화’에게
뮤직비디오 제작을 제안한다.
언젠가 우연히 본 영화를 떠올리며
촬영지부터 콘티, 대사까지 즉흥적으로 정하게 된 ‘준상’.
일본 배우 ‘아키노리’와 한국 배우 ‘소진’, 그리고 ‘순원’까지
준상의 갑작스러운 계획 하나로 한곳에 모이게 된다.
온전히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함께하게 된 네 남녀,
과연 우리는 이 노래의 끝에서 봄을 만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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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정에 빠진 나쁜 녀석들!? 용의자가 된 녀석들의 짜릿한 액션 수사가 시작된다!? [나쁜 녀석들: 라이드 오어 다이] 145초 무삭제 예고편 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