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3-12-17 20:56:56
"조용한 행복"의 도시
영화 <사랑은 낙엽을 타고> 리뷰
PROGRAM NOTE.
은퇴를 번복하고 돌아온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최신작 〈폴른 리브스〉는 감독의 프롤레타리아 3부작[〈천국의 그림자〉(1986) 〈아리엘〉(1988) 〈성냥공장 소녀〉(1989)] 계보를 잇는 작품이다. 우크라이나 침공 소식을 전해주는 라디오 외에는 세상과 단절된 여자와 우울한 일상을 알코올로 달래는 자칭 터프가이 남자는 헬싱키의 밤 거리에서 만나 호감을 느낀다. 이들의 조심스러운 로맨스는 몇 번의 우연과 몇 번의 불운을 거치며 한 걸음씩 나아간다. 무미건조한 유머를 쉬이 납득하기 어렵더라도 간간이 웃음을 터뜨리게 되는 순간이 있고, 삶에서 무수한 실패를 거듭해 온 주인공들의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을 조용히 응원하게 된다. 색다른 별미는 아니지만 진하게 끓여낸 김치찌개가 당기는 것처럼, 지난 40년간 인간의 외로움에 천착한 아키 카우리스마키 필모그래피의 정수를 맛볼 수 있다. 특히 시네필이라면 브레송, 고다르, 자무쉬, 채플린 등 거장들에 대한 헌사를 발견하는 재미를 더할 수 있을 것이다. (박가언/2023년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POINT.
✔️ 꼭 운명적으로 로맨틱하지 않아도 아기자기 귀엽고 러블리할 수 있지. 인생 뭐 있나! 보고 나면 기분이 산뜻해지는 로맨스 영화
✔️ 북유럽이랑 우리 정서 잘 안 맞지 않았나? 그런 줄 알았는데... 자꾸 피식피식 웃음이 나와요
✔️ 80년대부터 쭉 영화 작업을 해온 감독이 은퇴 선언을 뒤엎으며 들고 온 작품. 꾸준히 해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노련한 힘이 엿보여요
✔️ '영화'라는 세계에 대한 애정이 반짝반짝 묻어나는 작품
✔️ 2023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상 수상작
✔️ 엄청 귀여운 연기천재 강아지가 나옵니다. 실제 감독이 키우는 개인데, 칸 영화제 출품작 중에서 가장 연기력이 훌륭한 개에게 수여되는 "팜 도그Palm Dog 상" 부문에서 심사위원상 수상작
✔️ 12월 20일 개봉! 연말에 따뜻하고 싱그러운 로맨스를 찾으신다면 추천해요

#"조용한 행복"의 도시
도시의 삶은 치열하다. 이 문장을 쓰고 나서 지울까 말까 많이 고민했다. 이런 당연한 말 쓸 필요 있나? 이제는 용어조차 좀 고리타분하게 느껴지는 "N포 세대" 같은 단어들까지 굳이 끄집어내지 않더라도, 도시에서 삶을 헤엄치는 건 갈수록 녹록하지 않은 일이 되어 가고 있다. 어쩌면 "N포 세대"라는 용어에서 시의성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 것은, 이전에는 "N포"라는 표현 안에서 "포기"의 대상이었던 것들이 더 이상 포기할 대상조차 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K-드라마의 자장 안에서 유구하게 사랑받은 로맨스라는 장르 또한, 이 치열한 도시의 삶 속에서 빛깔을 달리해 왔다. 물론 변화는 다면적이고 그 기저에도 수많은 것들이 깔려 있으므로 지나치게 단순화할 수는 없고, 동일한 장르의 동일한 변화에 대해서도 사람마다 감정이 다를 수밖에 없겠지만... 예전에 나왔다면 "너무 현실성이 없다"고 평가 받았을 설정들이 로맨스와 쏙쏙 접목되는 게 너무나 익숙해진 지금, 빙의/회귀/환생 등 다양한 방법으로 현실을 떠나서만 가능한 로맨스도 분명 존재한다. 지치고 초라한 현실을 잠시 떠났을 때 화려하게 열리는 세상이, 거기서만 로맨스에 이입할 수 있는 사람들이, 이 도시에는 분명히 있다.

이 영화는 그런 우리에게 쑥 다가온다. 헬싱키의 "조용한 행복"을 담아서. 영화 속 두 인물의 이야기를 인터넷에 올렸다면 한국 인터넷 세상의 선생님들께 한소리 들었을 것이다. 너네가 지금 연애할 때니? 직업도 마땅치 않고, 그나마도 불안정하게 오락가락하는데. 심지어 상대는 이런 상황인데!
그러나 왜일까? 고요한 도시에서 그저 불을 켜고 끄면서 적당적당히 스쳐가는 하루하루 속, 크게 애틋하지도 대단하게 로맨틱하지도 않게 흘러가는 두 사람의 로맨스를 보고 있노라면, 일을 하고 집에 와서 쉬고 공과금 낼 돈을 헤아려 보고 라디오에서는 전쟁 소식이 끊임없이 들려오고... 이런 일상의 편린까지 함께 보고 있노라면, 그래 인생 뭐 별 거 있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 끝에 어쩐지 산뜻한 로맨스를 목격했다는 싱그러운 기분이 남는 것은 왜일까?

#정물, 음악, 그리고... 영화
영화가 보여주는 두 주인공의 현실은 역시나 녹록하지 않다. 어쩌면 당신은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답답한 기분을 느낄지도 모른다. 마트 계산대에서 바코드 찍히는 소리와 함께 물건이 하나하나 빠져나가고, 바로 이어서 우리의 주인공 안사(알마 포위스티)가 매대에 물건을 채워넣는 장면으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도시는 어쩌면 거대한 물건의 컨베이어 벨트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두 사람의 첫 일자리부터가 두 사람에게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 안사가 일하는 마트에서는 폐기 물품 관련 원칙을 이유로 모욕적인 언사를 퍼붓는다. "오래된 건 치워야 한다"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관리자에게 "저도 오래됐다"고 응수하며, 당당하게 손 잡고 걸어나오는 안사와 동료들은 지혜로운 일꾼이자, 마트라는 공간을 굴러가게끔 하는 실질적 힘이었다. 노동자가 없으면 돌아가지 않는 곳들이 주제를 모르고, 의미를 상실한 원칙과 불합리한 조건을 들이댄다. 남자 주인공 훌라파(주시 바타넨)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흡연 구역인 가스통 바로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업무 시간에 술을 훌훌 들이켜는 이쪽의 잘못도 있지만... 노동법전을 펼쳐보고 싶게 만드는 상황이 계속 펼쳐진다.

많은 사람들이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영화를 "프롤레탈리아적"이라고 말한다. 엄밀히 따져서 주인공이 노동자인 것은 한국의 오피스 로맨스 드라마들도 마찬가지다. <꽃보다 남자> 혹은 <상속자들>처럼 주인공이 재벌급이거나 학교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 아니라면 어지간해서는 다 매한가지라는 소리다. 그런데 왜 유독 "프롤레탈리아적"이라고 평가를 받을까? 노동자로서 주인공의 위치가 흔들려서? 그렇다 한들 켄 로치 영화 같은 작품과도 분명 결이 다르다.
나는 어쩐지 이 영화에 "프롤레탈리아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싶지 않은데, 주인공의 직업이야 필요에 따라 교사가 될 수도 있고 수영선수가 될 수도 있고... 이 직업 저 직업을 전전하는 모습을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은 '프롤레탈리아'라는 단어에서 풍기는 남다른 투쟁의 냄새를 풍기지 않는다. 그냥 돈이 필요하니 일을 하고, 일하다 부당한 일을 당하면 화도 내고, 하루하루를 살고 있을 뿐이다.
내겐 오히려 두 사람의 삶에서 풍기는 냄새가 예술의 냄새에 가깝다고 느껴졌다. 물론 일상은 쉬이 남루해지고, 노동은 너무 쉽게 소도구 취급을 받으며, 세상의 분쟁 소식은 여기저기 쏟아진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 중에도 전쟁과 닮은 것들이 있다. 그안에서 아직은 사랑이라 부르기 어려운 마음조차 여러 차례 어긋나고 불발되기도 한다. 어쩌면 마음 편할 날 하루 없는 치열하고 차가운 도시의 삶이, 우리 현실의 전부인지 모른다. 그러나 작은 기대, 눈빛, 그리움, 기다림, 사랑... 그런 말들이 차곡차곡 쌓이는 동안, 일상에는 예술이 더해지고 분쟁의 소리는 아득하게 멀어진다.

정물 같은 방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다, 분쟁 소식을 피해 음악으로 채널을 돌리는 여자. 꽁트 같은 대화를 주고받으며 술잔을 계속 비우는 남자. 누군가의 선곡 속에서 주고받은 눈빛에서, 두 사람이 함께 있는 시간은 차츰 영화가 된다. 고전 영화처럼 음악이 대신 두 사람의 정서를 말하고, 그저 걷고 일하고 마시고 눕고 하는 일상의 행위들을 더없이 "영화스러운" 음악들이 감싼다. 그렇게 영화가 된다.

#시간이 가르치는 마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식은 분명히 우리와 시간의 궤를 같이 하고 있는 전쟁 소식이고, 안사가 일하러 간 공간에서는 급기야 2024년 달력까지 등장하지만, 영화의 소품이나 주인공들이 소통하는 방식은 넉넉하게 쳐도 80년대 이전의 것들처럼 보인다. 낡은 라디오와 레터나이프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마치 아이폰과 갤럭시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이다. 두 사람은 옛날옛적 핸드폰이나 집 전화를 갖고 있으며, 그나마도 엇갈린다.
아날로그적인 기다림을 통해, 두 사람의 로맨스에는 아릿한 감정이 더해진다. 수북하게 쌓인 담배 꽁초 같은 것, 도시에서 실제로 마주했다면 그저 치워야 할 쓰레기(이자 도시를 침수하게 만드는 악의 축)에 지나지 않을 것들조차 아련한 감각을 부여받는다. 마치 반죽을 숙성시키듯 감정 또한 재워 놓는 시간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시간이 가르치는 마음이 있다. 81분이라는 산뜻한 러닝타임 동안 이 영화와 함께 도시를 걸으며 영화에 푹 잠기다 보면, 영화라는 장르가 오랜 세월 우리 안에 어떻게 스며 있었는지 향기로운 찻물처럼 배어 나온다. 고전 영화의 아름다운 감각이 일상의 편린을 자박자박 밟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고다르처럼, 브레송처럼, 채플린처럼.
81분 동안 내가 걸은 도시는 <라라랜드>의 대척점에 놓인 것 같은 건조한 도시였다. 꿈과 춤으로 황홀한 사랑과 유쾌한 사람들의 도시가 아닌, 일과 술로 건조한 사람들의 고요한 도시. 그러나 여기에도 사랑스러운 색채와 귀여운 대사들이 있다. 무엇보다도 영화가 있다. 정물처럼 놓이고 꽁트처럼 가볍게 흘러가는 일상 위에도. 때로는 그런 일상에 과하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건조함이 생을 긍정하게 만들기도 한다. 오늘만큼은 치열한 도시를 잊고, 다 아무렴 어때 하고 무던하게 하루를 맺고 싶어진다.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의 초대를 받아 시사회에 참석하여 감상한 후 솔직하게 작성하였습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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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고타 | 마지막 기회의 땅에 자욱이 낀 허무함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997년 IMF의 후폭풍을 직격으로 맞고서 지구 반대편 콜롬비아 보고타로 향한 '국희'(송중기)와 국희 아버지 '근태'(김종수). 국희는 아버지의 전우이자 보고타 한인 상인회의 권력을 쥔 '박 병장'(권해효) 밑에서 일을 시작하고, 국희의 성실함이 마음에 든 박 병장은 그를 의류 밀수 현장에 시험 삼아 투입시킨다.
콜롬비아 세관에 걸릴 위기에서도 목숨 걸고 박 병장의 물건을 지켜내며 거래를 성사시킨 국희. 이에 박 병장뿐만 아니라 통관 브로커 '수영'(이희준)도 그의 과감함에 주목하고, 그들은 국희를 각자 사업에 끌어들이려 애쓴다. 한편, 국희 역시 자기가 누구 편을 드느냐에 따라 보고타 한인 사회의 판도가 달라질 수 있음을 눈치채고, 더 과감하고 큰 꿈을 꾸기 시작한다.
해외 로케이션 프로젝트의 끝
코로나 직전 한국 영화계는 해외 로케이션 열풍이 불었다. 해외에서 테러나 범죄에 휩싸인 한국인이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작품들이 연달아 기획되고 제작됐다. <모가디슈>, <수리남>, <협상>, <비공식작전>에 이르기까지 결이 다 같은 작품이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이색적인 해외 풍경을 배경으로 제약 없이 총기 액션을 보여줄 수 있으니 블록버스터 영화에 최적화된 소재다.
<혈의 누>의 각본가이자 <소수의견>으로 데뷔한 김성제 감독의 신작, <보고타: 마지막 기회의 땅>(이하 <보고타>)도 마찬가지다. 남미라는 배경, 범죄조직 내에서의 사투라는 공통점 덕분에 <수리남>과 묘하게 맞닿은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차이점도 있다. 실화를 기반으로 한 선배들과 달리 <보고타>는 픽션이다. 명확한 모티브를 중심으로 일관된 분위기와 정서 안에서 콤팩트한 서사를 자유롭게 펼친다.
하지만 이는 양날의 검이다. <보고타>가 견지하는 허무함의 정서가 애당초 상업영화에 적절하지 않기 때문. 잘 살려도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데, 심지어 <보고타>는 그 특색도 두드러지지도 않는다. 장르도, 배우도 연상할 수 있는 작품이 너무 많기 때문. 그렇게 <보고타>는 모나지도 않지만, 기억에 남지도 않는 범작으로 귀결된다.
목적을 잃은 이들의 앙상블
<보고타>는 새롭지 않다. 익숙한 한국형 범죄 드라마 외피를 콜롬비아로 바꿨다. 한 가족이 콜롬비아 보고타로 이민을 갔다. 그중 아들 국희가 한인 밀수 조직 말단에서 한인회 우두머리가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는 위로 올라가려고 여러 무리수를 둔다. 무리수는 복수를 꿈꾸는 적을 낳기 마련이고, 국희는 친구와 적을 쉽사리 구분할 수 없는 난전 속으로 빠져든다.
이렇듯 뻔한 이야기이지만, <보고타>는 의외로 흡입력이 좋다. 각 캐릭터의 서사를 관통하는 구심점 덕분이다. 핵심 키워드는 '목적'이다. <보고타>에는 삶의 목적을 잃고 현상 유지만 하다가 침전되는 이들로 가득하다. 근태가 대표적이다. 그는 콜롬비아를 거쳐서 미국으로 건너가자는 꿈을 가지고 이민을 선택했다. 그러나 보고타에서 적응에 실패한 나머지 그는 목표를 잃고 술에 취해 살며, 국희 집을 강도질하던 중에 사망한다.
수영도 처음에는 원대한 그림이 있었다. 대기업 주재원이었다가 IMF 때문에 밀수업자가 된 그는 보고타 최대의 쇼핑몰을 지겠다는 꿈을 꿨다. 하지만 패딩 사업이 적중한 뒤 그의 꿈은 물거품 속으로 사라진다. 국희와 함께 다짐했던 쇼핑몰 프로젝트는 그의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현상을 유지하면서 밀수가 가져다 줄 눈앞의 이익을 챙기기 바쁘니까. 그는 밀수금지법 제정과 같은 변화에 발맞출 힘도, 의지도 없다.
박 병장도 다르지 않다. 보따리장수였던 그는 보고타의 여섯 구역 중 가장 부촌인 6구역에서 사는 게 인생 목표였다. 바퀴벌레라는 멸시를 들으며 일한 끝에 보고타 상인들 중 가장 부자가 되었고 6구역에 저택도 마련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부터 박 병장은 다른 사람이 됐다. 다음 목표를 정하지 못했기 때문. 그는 보고타 한인회를 통제하면서 권력을 유지만 할 뿐, 수영처럼 남미에서 패딩을 팔겠다는 새 비전을 떠올리지는 못한다.
그들은 꿈꾸는 사람이 밉다
국희는 다르다. 그에게는 언제나 목표가 있다. 보고타에 도착한 직후에는 돈을 벌어서 한국으로 금의환향하겠다고 다짐한다. 보고타에 적응한 후에는 박 병장을 보고 배우면서 6구역으로 이사를 가겠다는 꿈을 갖는다. 6 구역에 들어선 후에도 그는 새로운 꿈을 꾼다. 수영과 같이 막연하게만 계획했던 쇼핑몰을 올릴 계획을 실제적으로 짜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설령 손에 피를 묻힐 일이 생겨도, 그는 마다하지 않는다.
밀수금지법에 대한 갈등 국면에서 그들의 차이는 더 명확해진다. 국희에게 콜롬비아 정부의 새로운 밀수 금지 정책은 큰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기회다. 그는 밀수금지법을 계기로 한인회 상가를 쇼핑몰로 탈바꿈시키고자 한다. 반면에 꿈을 꾸지 않고 목적도 잃은 없는 이들에게 밀수방지법은 생존을 위협하는 문제다. 밀수를 통한 차익 없이는 사업을 지탱할 수 없으니까.
그들의 차이는 단순한 노선 갈등을 넘어서서 인간적인 감정의 영역으로 확대된다. 국희는 자기처럼, 또 자기와 함께 꿈을 꾸지 않는 수영과 박 병장에게 실망한다. 반대로 그들은 꿈을 향해 직진하는 국희가 자신들을 경멸한다고 느낀다. 수영은 국희에게 도리어 자기 꿈을 빼앗긴 것 같다고 믿는다. 박 병장은 국희가 먹여주고 키워준 은혜도 모른다고 아니꼽게 생각한다. 실망감과 자격지심이 뒤섞인 끝에 그들은 서로를 총구로 겨눈다.
그 결과 <보고타>는 허무함의 정서로 가득하다. 국희는 친아버지보다 더 가족 같은 형, 삼촌과 함께 성공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들은 그를 배신했고, 국희는 자기 꿈을 이루기 위 그들을 죽여야만 했다. 하지만 그들이 죽은 순간, 국희에게 남은 꿈과 목표는 앙꼬 없는 찐빵일 뿐이다. 설령 쇼핑몰을 올려서 성공한다 하더라도 그 성공을 같이 나눌 사람들이 남아있지 않으니까.
허무함을 설명하지 못하는 허무함
그런데 허무한 분위기는 정작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다. 장치는 여럿 있다. 송중기의 내레이션이 대표적이다. 힘이 빠진 목소리는 시작부터 끝까지 차분하다 못해 체념한 듯하다. '마지막 기회의 땅'이라는 부제와 어울리지 않을 정도다. 결말을 보고 나면 어조를 이해할 수 있다. 그의 내레이션이 허무함의 정서를 처음부터 암시하나 게 아닌가 싶다. 노을 지는 하늘, 안개 낀 폭포와 같은 콜롬비아의 풍광을 담은 촬영도 마찬가지다.
정교하지 않은 화법은 이 장치들을 무력화한다. 일례로 국희가 박 병장, 수영과 대립하는 계기는 일차원적으로 묘사된다. 본래 그들의 대립은 두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는 목표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갈등이고, 다른 하나는 성공한 국희를 향한 감정의 표출이다. <보고타>는 제한된 분량 내에서 이야기를 풀려고 후자에 초점을 맞춘다. 그 결과 국희, 수영, 박 병장의 반목은 단순히 시기, 질투로 인한 분란처럼 보인다.
문제는 시기와 질투를 부각되는 후반부 전개의 설득력이 낮다는 것. 갑자기 시간대를 3년 후로 넘기다 보니 흐름이 한 차례 끊어진다. 자연히 국희의 서열이 수영과 박 병장보다 높아지고, 그들이 변화에 분노하는 상황에 몰입하기 어려워진다. 클라이맥스도 긴장감이 덜하다. 사소한 이유로 서로 목숨을 노리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렇게까지 피를 볼 일인가?'라는 의문이 남기 마련이다.
외골수인 국희의 선택도 작위적이다. 그는 자기 계획과 비전을 설득하는 대신, 힘으로 밀어붙이기만 한다. 이는 세 사람이 서로를 배신하는 광경을 연출하기 위한 억지 같다. 그 결과 종국에 국희를 사로잡은 씁쓸함, 고독함, 허무함을 관객 입장에서는 온전히 느끼기 어렵다. <보고타>라는 작품 본연의 매력이 아예 지워진 꼴이다.
설명도, 포장도 못한다
허무함이 부각되지 않다 보니 영화의 끝에서는 여러 단점도 미처 숨겨지지 않는다. 우선 기획 방향부터 어긋난 듯하다. 드라마에 더 적합해 보일 정도로 긴 서사를 압축하는 과정에서 여러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보고타>는 <수리남>을 연상시킨다. 남미라는 배경, 범죄 조직이라는 소재가 같을 뿐만 아니라, 전개 구조를 비롯해 등장인물까지도 대부분 대응되기 때문이다.
국희는 '강인구'(하정우)와, 박 병장은 '전요환'(황정민)과 같은 역할이다. 수영과 '작은 박사장'(박지환)은 '최창호'(박해수)와 '데이빗'(유연석)과 같은 기능을 한다. '박응수'(현봉식) 역시 근태와 마찬가지로 주인공을 각성시킨다. 그런데 정작 영화 전체 분량은 <수리남>의 1/3밖에 안된다. 자연히 전개가 급하고 부실할 수밖에 없다. 각 인물이 변심하게 되는 동기나 계기를 관객에게 명확히 인지시킬 여유가 없는 까닭이다.
이에 더해 기시감마저도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특색이 없다는 느낌이 강하다. 배우 개인의 문제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간 배우가 맡은 캐릭터의 집합체 같다는 인상을 떨칠 수 없으니까. 거칠게 말하자면 <보고타>는 <화란> 속 치건이 보고타로 이민을 와서, <로기완>의 주인공처럼 고생하다가, <재벌집 막내아들>의 진도준처럼 눈부신 성공 끝에 인생무상을 느끼는 이야기나 다름없다.
평면적이고 새롭지 않은 국희의 캐릭터성은 일종의 도화지 같다. 이희준, 권해효, 박지환, 조현철 등 여러 배우들이 각자 개성을 보여주면서 앙상블을 이룰 수 있는 배경인 셈이다. 하지만 결코 장점은 아니다. 상술했듯이, 조연들의 서사를 급하게 건너뛴 대가로 전반적인 짜임새를 잃었기 때문. 결국 <보고타>는 장점도 무색하게 만드는 익숙함 속에 갇힌 채 허무하게 막을 내린다.
Poor 형편없음
국희와 달리 모나지 않았지만, 국희처럼 미움받을 용기도 없었던 1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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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쾌함을 잃지 않는 클래식한 로드 무비
색채를 통한 성장의 미장센
긴야의 붉은 욕망
초반부, 긴야는 여자친구에게 이별을 통보받고 남성성에 큰 상처를 받았다. 이후, 긴야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여성에게 집착한다. 남성성을 회복하기 위한, 다른 여성을 만나기 위한 욕망이 투영된 수단이 바로 붉은색 차이다. 싫다고 거부하는 아케미를 억지로 안으려고까지 하며 상대방의 마음은 고려하지 않고, ‘욕망’에만 급급하던 긴야를 상징한다. 아케미와 유사쿠와 함께 여행을 할수록 욕망으로 가득하던 붉은색 차는 턱에 막혀 굴러가지 않고, 제동을 못해 온갖 이물질을 뒤집어쓰며 더럽혀진다. 붉은 욕망의 색채가 퇴화된다. 후회가 담긴 유사쿠의 조언과 아케미와의 관계를 통해 진정한 사랑과 진정한 남성성에 대해 학습하며 성장한다.
유사쿠의 노란 성장
노란색은 사랑과 창조, 그리고 행복의 의미를 지닌다. ‘행복의 노란 손수건’이 처음 등장한 것은 시마 미쓰에(바이쇼 치에코)가 아이를 임신했을 때이다. 노란 손수건을 달아서 멀리서도 알 수 있게 해달라고 말한다. 노란색은 창조, 생(生)의 이미지이다. 부정적 의미로는 비겁함과 불안정을 상징하기도 한다. 아내가 초혼이었을 당시 아이를 유산한 사실에 배신감을 느낀 시마 유사쿠는 못된 말을 퍼부으며 폭력성을 드러내고 집을 나가 우발적 살인을 저지른다. 아내의 상처는 고려하지 않고, 자기중심적인 ‘비틀린 남성성’을 드러낸다. 출소 후, 긴야의 모습을 통해 과거 자신이 얼마나 비겁했는지 자각하고 성찰한다. 세 인물의 여행이 아내에게 용서를 구하고 다시 시작하고자 하는 용기를 가져다준다. 노란색이 창조와 생(生)의 이미지로 시작해, 불안정한 비겁함이다가 다시 사랑과 행복의 이미지로서의 의미를 갖기까지가 유사쿠의 전반적 성장 서사이다. 인물의 발전을 한 가지 색채를 통해 표현하였다.
종착지는 유바리
여행이라는 장소의 이동을 따라 각 공간에서 경유하며 만나게 되는 사람들과 발생하는 사건들을 통해 인물이 성장하는 공식을 가진 로드 무비. 긴야와 유사쿠의 성장 서사가 교차되고, 비틀린 남성성을 가졌던 두 남성의 반성과 성찰의 테마가 주된 플롯이다. 로드무비의 특성에 비추어 보았을 때 세 인물의 종착지는 유바리이다. 유사쿠의 과오 청산과 긴야의 깨달음은 유바리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진정한 사랑의 결실을 맺게 된 긴야와 아케미, 그리고 집 앞 나무에 매달려 펄럭이는 수많은 노란 손수건으로 끝나는 마지막 장면에선 뭉클한 감동마저 선사한다.
여성 서사의 공백은 1977년도라는 시대적 한계를 넘지 못하였지만, 유쾌함만큼은 넘어선 야마다 요지 감독의 <행복의 노란 손수건>. 유쾌한 로드무비를 찾던 관객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영화일 것이다.
*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하여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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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곳이 거미의 땅이라 불리는 이유
곧 철거를 앞둔 공간. 잡초가 무성한 이곳은 단순한 폐허가 아니다. 이곳엔 잊힐 수 없는 고통과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세 여성이 있다. 분식집을 운영하는 박묘연, 폐지를 줍는 박인순, 그리고 흑인 혼혈인 안성자. 이들은 여전히 기지촌에 남아 있다.
영화의 시작은 익숙하지 않은 공간을 천천히 탐색하는 카메라의 시선으로 열리며, 배경에 흐르는 영어 음성은 이 공간이 미군 기지와 연관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폐허처럼 보이는 이곳은 곧 미국과 한국의 역사가 얽힌 공간임을 드러낸다. 화면에 잡힌 잡초와 비석은 이 공간이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 몸부림쳤던 여성들의 삶과 그 속에 깃든 고통을 상징한다.
첫 번째 인물은 박묘연이다. 그녀는 분식집을 운영하며 음식을 준비하고 판매하는 일상을 살아간다. 그러나 장사를 마친 후 홀로 주사를 놓는 모습은 그녀의 외로움과 고독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인터뷰를 통해 드러난 그녀의 과거는 더욱 아프다. 26번의 중절수술과 미군 남성들로부터 받은 상처들. 그녀가 견뎌야 했던 고통은 기지촌에서 살아온 여성들의 삶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다큐멘터리는 이후 빈 공간과 폐허를 비추며 한 남성의 나레이션을 들려준다. 그는 "낮에는 개미처럼 일하고 밤에는 거미처럼 사라져야 했던" 자신의 존재를 이야기한다. 그의 말은 기지촌에서 살아야 했던 이들의 처절한 삶을 은유적으로 그려내며, 박묘연의 고통스러운 과거를 관객에게 더욱 강렬하게 각인시킨다.
다음으로 등장하는 박인순의 일상은 더욱 고단하다. 폐지를 줍고 혼자 방 안에 누워 있는 그녀의 모습은 외로움을 더욱 부각시킨다. 그녀는 미국에 두 자녀를 남겨두고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그 과정에서 성병에 걸리고 포주에게 이용당하며 빚만 늘어났다. 분노와 한을 안고 절에 다니며 마음의 평화를 찾으려 하지만, 그녀의 분노는 여전히 날카롭다. 숲속에서 외치는 그녀의 절규는 "모든 고통을 가져가라"는 외침과 함께 그 처절함을 극대화한다. 이 장면은 보는 이의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마지막 인물인 안성자는 기지촌에서 태어난 흑인 혼혈 여성이다. 그녀의 삶은 어머니에게 버림받고 모진 수모를 견뎌야 했던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녀는 분식집에서 눈물을 흘리며 햄버거를 먹는 장면으로 등장하며, 관객에게 그녀의 내면에 자리한 상처와 슬픔을 암시한다. 안성자는 과거의 자신을 판타지적으로 재현한 연출 장면을 통해 그녀의 내면을 탐구한다. 빨간 원피스를 찾아 입고 텅 빈 댄스홀에서 춤을 추는 모습은 그녀의 상처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며 관객의 감정을 자극한다.
이 다큐멘터리는 극영화처럼 연출된 장면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거울을 보는 모습, 빨간 원피스를 입고 춤추는 장면, 수박을 먹는 모습 등은 다큐멘터리의 경계를 넘나드는 독특한 시도로, 인물들의 감정을 더욱 강렬하게 전달한다. 이런 연출이 과연 다큐멘터리의 범주에 속하는가에 대한 논란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사실을 바탕으로 한 이들의 고통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전달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다.
영화는 세 여성의 일상 -> 공간의 나레이션 -> 기지촌 여성들의 고통과 외로움이라는 구성으로 진행된다. 미군 기지촌 위안부로 살아온 여성들의 이야기는 그동안 감춰져 왔다. 철거와 함께 잊혀질 위기에 처한 이들의 아픔은 쉽게 드러내지 않고자 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더욱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이야기다. 잡초가 무성한 폐허 속 비석처럼 이들의 이야기가 잊혀지지 않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다큐는 여성들의 고통이 단순히 개인적인 불행이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임을 관객에게 묻는다. 왜 여성들의 고통은 남성들에 의해 기인하는 경우가 많은가?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고통을 어떻게 기억하고 공감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다큐멘터리는 그 질문을 강렬하게 던지며 관객에게 깊은 울림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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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EONJU IFF 데일리] 기억과 이미지의 서사적 탐구
영화 정보
감독: 레몽 드파르동 (Raymond DEPARDON)
제작국가: 프랑스
제작연도: 1984년
상영시간: 68분
장르: 다큐멘터리
상영 형식: DCP, 흑백
상영 섹션: 시네필전주
Korean Premiere
시놉시스
레몽 드파르동이 홀로 카메라 앞에 앉아 사진작가이자 영화감독으로서 자신의 시작과 의심, 기쁨에 대해 나지막히 이야기한다. 그는 감정에 복받쳐 이미지에 대한 자신의 열정을 우리에게 전한다.
리뷰
<찰칵 소리와 함께한 시절> Les Années déclic (The Declic Years)는 프랑스 감독 레몽 드파르동(Raymond Depardon)의 자전적 다큐멘터리이다.
한 예술가의 개인적 서사가 사회적 기억과 사진의 본질에 대한 탐구로 확장되는 작품이다. <찰칵 소리와 함께한 시절>은 과거를 회고하는 작업에 머물지 않고, 예술적 정체성과 역사적 변화를 이미지로 기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심도 깊게 탐구한다. 영화는 시대적, 미학적 중요성과 더불어 영화와 사진이라는 매체가 상호작용하며 창출하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레몽 드파르동은 자신의 어린 시절과 프랑스 사회의 급변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과 영상 기록을 통해 개인적 경험과 역사적 사건을 교차시킨다. 이러한 작업은 사진과 영상이 단순히 순간을 포착하는 도구를 넘어 시대의 흐름을 기록하는 매개체임을 증명한다. 그는 자신의 목소리를 통해 과거를 회상하며, 사회적 맥락 속에서 개인적 서사가 어떻게 공적인 의미를 띠는지를 탐구한다.
영화 속 드파르동의 이미지는 사적이면서도 공적인 성격을 가진다. 도시와 농촌의 대조적 풍경, 노동자의 일상, 그리고 사회 변화의 기록은 특정 개인의 삶을 넘어 사회적 기억으로 기능하며,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의 본질적 역할을 상기시킨다. 이 작업은 개인적 기억과 사회적 기록 사이의 경계를 허물며, 이미지가 과거를 보존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재와 미래를 위한 성찰과 경고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드파르동은 사진의 정적 이미지를 영화적 내러티브로 전환하며, 고정된 순간들이 시간적 흐름 속에서 어떻게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는지를 시각적으로 구현한다. 이미지의 기억 보존과 재해석 과정을 탐구하며, 관객들에게 이미지의 기록적 힘을 환기시킨다.
오늘날 디지털 시대의 넘쳐나는 이미지 속에서, <찰칵 소리와 함께한 시절>은 사진과 영상이 정보 전달을 넘어 인간의 정체성과 역사를 구성하는 중요한 매체임을 강조한다.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와 사진이라는 두 매체의 창의적 상호작용을 통해 예술과 기록의 경계를 재정의하며, 이미지가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서사를 어떻게 통합할 수 있는지 탐구한다.
상영일정
2025년 5월 2일 14:30
CGV 전주고사 5관
2025년 5월 5일 21:30
CGV 전주고사 5관
2025년 5월 8일 14:00
메가박스 전주객사 2관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 : 2025.04.30 ~ 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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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엇갈린 심장의 박동, 하트비트 (Les amours imaginaires, 2010)
다양한 사랑의 형태에 대해 말하는 자비에 돌란. 이번에는 짝사랑인지 모를 어중간한 경계와 우정과 사랑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 세 인물을 카메라에 담았다. 친한 친구인 프랑시스와 마리가 우연히 알게 된 니콜라를 좋아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특유의 감각적인 영상미를 더해 표현했다.
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과 새로운 친구로의 관심이었지만, 뒤이어 사랑이라는 단계로 나아가며 두 인물의 암묵적인 눈치싸움이 시작된다. 평소엔 자주 집을 들르며 가볍게 차를 마시거나, 서로의 옷을 추천해주며 소소한 것까지 챙기는 사이에서 어느새 조금씩 관계의 균열이 생긴다. 나중엔 니콜라에게 주려고 산 선물들을 서로 비교하거나, 둘이 갈 만한 식당에 미리 들어와 우연한 만남임을 가장하는 듯 관심을 받기 위해 사소한 것들로 유치한 편법을 쓰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쌍방이 아닌, 너무 일방적인 사랑이지만 이에 대응하는 니콜라의 태도 또한 두루뭉술하다. 이 모든 행동들을 다 그저 우정으로 치부해버리는 듯, 이 상황에 연연하지 않고 둘과의 만남을 즐길 뿐이다.
#솔직한 감정선과 미장센
관객의 입장에서는 상대적으로 혼란스러움을 겪는 프랑시스와 마리의 입장에 더 공감하고, 좋지 않은 끝에 도달할 것을 알지만 적극적으로 애정을 주는 이 둘에게 왠지 모를 연민이 들기도 한다. 어쩌면 그들이 겪는 슬픔과 공허함이라는 경험이 우리에게 더 익숙해서가 아닐까. 영화와 같은 매체들에서 사랑은 꽤나 이상적으로 그려지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우리 누구나 잘 알고 있다. 사랑이라는 가장 보편적이고 개인적인 감정 속에서, 어쩌면 가장 내밀하고 들키고 싶지 않은 속성이 바로 사랑을 함으로써 수반하는 아픔일 것이다. 짝사랑은 항상 아프고 외로우며, 그렇기에 세 인물이 함께하는 장면들은 겉으로는 행복해 보이지만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은 불안감이 엄습해온다. 이런 모습들을 미묘한 표정 변화와 강한 원색의 빛으로 돌란은 우리가 그 순간을 오롯이 받아들이도록 의도한다. 다른 누구와 밤을 보내거나 함께 있을 때, 프랑시스와 마리는 그제야 자신의 솔직한 좌절감을 드러내며 눈물을 흘린다. 이때 파랗고 빨간빛들로 그들을 비추어 날것의 감정을 시각적으로 보여주고, 화보를 연상시키는 몇몇 연출들로 돌란만의 미장센을 한층 더 강화시킨다.
#구성의 변화와 결말, 원제의 의미
초반부와 중후반부에 독특한 구성이 있는데, 크게 두 챕터로 나뉜 독백 파트가 존재한다.
처음엔 사랑의 환상에 빠지게 되는 순간, 다음엔 그 환상이 걷어지고 현실을 맞이하게 되는 순간을 영화밖에 존재하는, 여러 인물들이 자신의 경험을 기반으로 진지하게 이야기한다. 이런 시점을 기준으로 세 인물들의 사랑의 방향은 서서히 달라진다. 영화 자체의 스토리 라인에는 반영되지 않지만, 영화 전반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사랑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을 볼 수 있어서 좋은 시도라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 장면은 사랑의 본질에 대한 보편적이고 어쩔 수 없이 반복되는 고리를 보여준다. 사랑하는 대상이 변하는 것이지,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걸 재밌게 표현한다.
<하트비트>의 원제 Les amours imaginaires, 다시 말해 ‘상상 속의 사랑’은 이러한 결론에 도달한다. 보통 잘 깨닫지 못하지만, 우리는 종종 그 사람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씌워놓은 환상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 속에 갇힌 사랑은 결국 나에게 돌아와 박히는 아픈 가시일 뿐인 것을 간과한 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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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the Christ/미국/2004)
(이미지 출처: 네이버 이미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
멜 깁슨이 배우라기보다 감독으로 내 머릿속에 각인된 영화.
The Passion of the Christ는 극장개봉 전에 이미 유명해진 영화다. 반유대주의 영화라고 하여, 헐리웃을 점령한 유대인들로부터 미국의 엘리트 계층, 자본가 계층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유대인들에 이르기까지, 은근한 혹은 노골적인 반감이 표출되었다. 영화가 상영되고 난 후 그 유명세는 더 한층 상승되었다. gory 하다, 따라서 horror 장르로 분류해야 한다는 비아냥이 쏟아졌다. 심지어 수위가 높은 잔인한 고문장면 때문에 약한 심장을 가졌던 관객은 목숨을 잃기까지 했다.
더욱이 이제 멜 깁슨은 유대인들의 왕국인 헐리웃의 영화에 캐스팅되기는 글렀다는 말들이 공공연하게 오갔다. 아마 그 예측은 옳을 것이다.
영화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와 동고동락했던 열 두 제자 중 하나인 가롯 사람 유다 이스카리옷의 배반과 당시 유대 종교 엘리트 계층인 바리새인들의 음모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임을 당한 후 예언대로 사흘만에 부활하기까지, 즉 구약의 예언이 완벽하게 성취되는 기독교 복음의 핵심을 다룬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기독교 구약과 신약성경의 텍스트에 매우 충실하다.
하나님이 창조한 첫 번째 인간 아담으로 인해 인류에게 죄가 들어왔다. 하나님은 죄와 상관할 수가 없다. 그의 거룩함으로 말미암아 죄지은 자들은 죽을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죄 없고 흠 없는 외아들을 인간으로 세상에 보내 인간들이 당해야할 하나님의 심판을 대신 당하도록 '상관'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인류가 당할 모든 저주를 혼자 감당한 뒤 인간으로 죽었다. 그리고 역시 예언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다. 그리하여 인류구원을 위한 고난의 사역을 완전히 성취했다.
멜 깁슨이 가톨릭(구교) 신자여서 그랬겠지만 영화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에 대한 경외심이 배어있다.
그러나 구교와 신교를 초월한 복음의 정수를 전달하고 싶었던 감독의 의도는 고대 유대인들과 로마 군인들이 사용하던 그 언어로 영화를 제작했다는 것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기독교가 여러가지 종파로 나뉘기 전, 인간의 이데올로기가 섞이기 전의 예수 수난사건과 그의 부활이라는 복음의 핵심에 충실하고자 했던 것.
그리고 멜 깁슨은 영화를 전 세계에 배급하면서 더빙이 가능한 원고가 아닌 자막용 원고만을 만들었다. 영화를 더빙하지 못하도록 M/E (Music and Effect) 트랙도 아예 만들지 않았다. 이쯤되면 그의 의도가 더욱 분명해진다.
이 영화를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정관사 the와 함께 대문자로 시작하는 Passion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난을 당하고 죽음'을 뜻함을 알았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신(하나님)과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온 신(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인간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하나님은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여 그들에게 스스로를 계시함으로써 그가 창조한 인간들과 교통하며 신의 뜻에 따라 통치되는 아름다운 국가를 세워 그 주변의 이방사람들에게 본을 보이고 모두 그 아름다운 국가를 따라 살기를, 즉 모든 인류가 신의 자녀가 되기를 바랬다. 그러나, 신의 계획안에서, 그것은 실현되지 못했다. 그래서 약속을 철두철미하게 지키는 신실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한 약속을 했다. 내가 메시아를 보내리라. 그가 너희들을 구원하리라... 그리고 내 뜻으로 통치되는 나라가 이루어질 것이다. 그것이 바로 구약성경의 핵심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약속을 지켰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의 약속대로 이 땅에 왔다. 그는 이스라엘 땅에 태어난 성육신(인간의 몸으로 온 신)이다. 예수는 구약성경 곳곳에 예언으로 주어진 말씀대로 메시아로서 감당해야할 모든 것을 빠짐없이, 그리고 정확하게 성취한다. 그는 말로는 도저히 옮길 수 없는 고난을 피하지 않고 고스란히 당했다. 예언을 이루어 하나님의 약속을 실현하기 위해. 그것은 인류 역사에 다시없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며 순종이다.
영화의 첫 장면에 등장하는 구약성경의 한 구절,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얻었도다." (이사야서 53장 5절)는 메시아에 대한 대표적인 예언이자 이 영화의 주제이다.
이제 인류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모두 구원을 얻게 되었다,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한다면. 그가 인류의 생명을 위해 기꺼이 죽음을 택하였다는 것을, 그리하여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을 이루었다는 것을 믿기만 한다면.
영화에 그려진 인간들의 모습은 어떤가.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을 잘 아는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는 그를 통해 하나님의 예언이 성취되는 것을 고통으로 지켜본다. 그 곁에는 예수의 열 두 제자 중 하나인 요한과 예수의 가르침을 좇았던 막달라 마리아가 늘 함께 있다. 그들은 아무 힘없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안타까움과 아픔으로 지켜보는 무력한 자들이었다.
예수와 함께 먹고 자며 전도하였던 제자 중 하나였던 유다는 물질이 탐이나 돈에 스승을 판다. 반역자다. 그리고 수제자였던 베드로는 흥분한 사람들이 자신을 해칠까봐 스승을 모른다고 부인한다. 그는 비겁했다.
당시 구약을 믿고 암송하며 가르쳤던 유대교 종교 엘리트이며 지도자인 바리새인들은 난데없이 나타난 천한 목수의 아들 예수가 가르치는 말씀의 권위와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는 그의 기적의 능력을 질투했으며,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공공연히 비판하는 예수를 두려워했다. 아니, 예수 때문에 그들의 인기와 권위가 실추될까봐 무서웠다. 그래서 거짓증거를 날조하여 신성모독으로 예수를 죽였다. 야비한 살인자였다.
그리고 예수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로마의 군인 빌라도. 그는 예수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유대인들 사이에 민란이 나면 로마황제의 눈 밖에 나게 되고 그렇게 되면 그의 정치생명은 끝나고 말 것을 두려워한 비겁한 출세주의자였다.
그리고 그 무력함, 비겁함, 야비함, 두려움 등의 어두움은 모든 인간에게서, 나에게서 늘 찾아지는 것들이다. 예수의 십자가 보혈로 깨끗하게 되지 않는 한.
인간은 세상에서의 안락한 삶, 즉 세상을 사랑하고, 속이는 자 사탄은 세상의 재미로 인간을 미혹하며 죄를 짓게 함으로써 신과 인간 사이를 갈라놓는다.
그러나 신은 위대한 사랑이다. 인간은 늘 하나님을 배반하나 하나님은 약속을 신실하게 지켜 인간에게 예수를 보냈다. 그리고 온갖 사탄의 책략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죽음, 즉 사탄을 이김으로써 다시 한 번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기회를 인간에게 주었다.
인간은 단지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메시아이며 예수의 보혈로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믿기만 하면 죄의 종, 즉 사탄의 종으로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그 신분을 바꿀 수 있다. 그것이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며 이 영화의 요지이다((©2021. 최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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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리 와, 이제 그만 기다려.” / 박보영, 송중기 주연 늑대소년 명대사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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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Alone Together - Mona Wonderli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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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직관하는남자 홍큐의 "승부"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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