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롬2023-12-09 13:03:23
희망, 연대로 만든 따뜻한 한 잔
<나의 올드 오크>(2023)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 <미안해요, 리키>(2019) 이후 약 4년 만에 켄 로치 감독이 세 번째 선물을 들고 찾아왔다. <나의 올드 오크>(2023)는 켄 로치 감독의 3부작이자 은퇴작으로 남는 작품이기에 더 뜻깊은 선물로 다가온다. 켄 로치 감독 3부작은 사회 구조와 복지 제도의 어두운 단면을 가감 없이 보여주며 관객에게 깊은 성찰과 메시지를 전달한다. <나의 올드 오크>(2023)는 마지막까지 영국 북동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번 작품은 다른 전작들보다 영국 문화가 짙게 물들어 있고, 가장 따뜻한 영화다.
※본 영화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 초청으로 참석했습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난민
난민 문제는 오늘날 해결해야 할 숙제로 자리 잡고 있다. 아프리카나 중동 지역에서 전쟁과 내전으로 넘어온 선량한 난민 이주자를 유럽이 가장 많이 수용하고 있다. <나의 올드 오크>(2023)는 영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난민 수용의 갈등 문제를 그리고 있다. 시리아 내전으로 영국으로 온 야라(에브라 마리)네 가족을 본 동네 주민들은 난민 이주에 탐탁지 아니한다. 야라네 가족뿐만 아니라 마을에서 거주하는 난민들의 복지가 자신들이 받는 복지보다 난민에게 더 큰 복지를 받는다는 불만과 위선을 보인다. 야라의 카메라를 망가뜨리거나 도움을 받아도 난민이란 프레임에 도리어 욕을 먹고, 오해를 받는다. 그러나 ‘The Old Oak’라는 펍에서 벌어지는 일을 통해 난민의 인식이 변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함께 밥을 먹고, 영상을 보며, 점차 관계의 벽을 허물어간다. 마침내 야라 아버지 추모 장면에서 마을 사람들이 추모하러 오는 장면은 모두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똑같은 사람이라는 휴머니즘에 도달한다.

연대
영화 배경인 영국 북동부 마을은 어질러진 퍼즐과 같았다. 광산이 폐광되며 쇠퇴해 버린 마을은 각자가 살아가기 위해 바빠졌다. TJ(데이브 터너) 역시 마찬가지다. 아버지의 죽음, 아내의 이혼, 아들과 깨져버린 신뢰로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자살을 택하려던 그에게 다가온 건 ‘마라’라는 강아지였다. ‘마라’는 광부 용어로 친구와 동료 그 이상의 연대를 일컫는 말이다. TJ는 다시 살아가는 용기를 얻고, ‘The Old Oak’라는 펍을 운영하며 살아간다. 이곳은 옛날 광산 노동자뿐만 아니라 주민들의 쉼터이자 놀이터였다. TJ는 야라와 타니(데비 허니우드)와 함께 난민 가족들과 소외된 마을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40년도 더 된 펍 안쪽 방을 개방한다. 과거 폐광을 막기 위한 노동자들의 연대가 있었다면 지금은 지역 주민들의 연대라는 퍼즐 조각을 맞추기 위해 분투한다. 연대의 퍼즐이 맞춰지는가 하나 모종의 사건으로 부서져 버린 듯 보였다. 하지만, 야라의 아버지 장례식을 마을 사람들이 추모하러 오면서 아름다운 연대의 퍼즐이 맞춰졌다는 걸 알아챈다.

희망
<나의 올드 오크>는 각자가 품은 희망을 보여준다. TJ는 가족의 회복, 야라는 아버지의 생존, 펍의 단골들은 과거의 영광 등이 있다. 야라는 사진 찍는 걸 좋아한다.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면 희망과 용기가 생긴다고 한다. 야라가 찍은 사진 속 마을 사람들의 화목한 미소는 처음 마을에 도착해서 찍었던 모습과 대비된다. 의심과 낯섦에서 공존과 희망, 마을의 공동체 정신으로 변신한다. 희망은 신뢰를 통해 만들어지는 대사는 영화 전반을 관통하는 메시지로 작용한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와 <미안해요, 리키>(2019) 보다 희망의 메시지를 그리며 극복하는 과정은 켄 로치 감독 3부작 중에서 가장 희망 있고, 따뜻한 영화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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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아는 이방인의 도시, <군산전기>
군산전기 City of Outlanders, 2020
한국 / 다큐멘터리 / 61분
감독: 문승욱, 유예진
우리가 아는 이방인의 도시,<군산전기>
출처: 영화 <군산전기> 스틸컷(다음)
대형 LED 위에 무용가 안나가 누워서 춤을 춘다. 그녀의 고요하게 뻗어가는 팔과 애절하게 꺾이는 다리가 피아노와 첼로의 선율과 만나면서, 역사가 기억이 되고 기록이 추억이 된 군산이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 함께 등장한다. 장소와 사람, 안나가 소개하는 군산은 장소가 아니라 사람으로 풀이되고,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들을 일관적으로 '이방인'이라 소개한다. <군산전기>는 이방인, 군산을 이방인의 입을 통해 설명하는 장편 다큐다.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 이방인. 있는 그대로 읽으면, 꽤나 차갑고 낯설게 느껴진다. 나와 마주 보고 있지만, 심리적인 거리는 두 배 이상 멀어, 지금은 물론 앞으로도 섞일 마음이 전혀 없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군산전기>의 이방인은 다르다. 영화가 조명하는 이방인엔 거부하지 못할 따뜻함이 묻어있다. 처음부터 눈과 귀로 파고드는 무용과 음악의 이끌림보다도 더 집중되는 무언가가 있다. 호기심이다.
호기심은 '이방인'을 거부할 수 없는 이유를 찾기 위한 발판으로, <군산전기>의 긴 궤도를 끝까지 지탱한다.
출처: 영화 <군산전기> 스틸컷(다음)
군산은 주민 몇백 병이 살던 작은 어촌 마을이었다. 영화는 그런 군산이 이방인들의 도시가 된 연유를 간단한 자막과 그때의 사건이 담긴 사진 자료로 대체한다. 일제 강점기, 일제의 쌀 수탈, 노동자들의 유입, 이후 군산을 둘러싼 희망과 좌절의 반복, 그 과거 위에 여전히 현재를 덧씌워 사는 지금의 군산. <군산전기>는 군산에 정착한 이들과 떠나는 이들을 인터뷰하며 중간중간 반짝였던 역사를 끼워 넣는다. 그리고 여전히 처음과 같은 분위기와 시선을 유지한다. 군산이란 환경은 군산에 소속되어 사는 이방인의 삶의 방식과 가치관 등으로 표출된다. 따라서 군산은 한결같이 정적이고 고요하며 동시에 인간적인 따스함으로 관객에게 다가온다. 일제의 잔재로 남은 건축물(벽돌식 콘크리트 건물 같은)에서도 그 기운은 계속된다. 멀리서 보고 가까이서 봐도 삭막하고 답답한데, 아이러니하게도 보면 볼수록 정반대의 감정을 갖게 하는 것이다. 역사적인 특성상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노출되는 애절함과 애환, 나아가 고통은 이방인으로서의 군산에겐 이미 지나간 정류장일 뿐이다. 비극을 인식하는 것만으로 휘몰아치는 고통의 파장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사람들, 그들의 강인함은 단순히 시간이 흐른다고 길러지는 능력이 아니다.
출처: 영화 <군산전기> 스틸컷(다음)
호기심의 답은 당연하게도 군산의 이방인들이다. 그들은 자신을, 고향을 떠나 군산에 정착한 외부인, 이방인이라 부른다. 이미 50년 넘게 살고 있지만, 쉽사리 군산을 자기 고향이라 말하지 않는다. 제2의 고향이란 말도 없다. 이웃도 이방인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방인처럼 살지 않는다. 이방인이면서 이방인이 아닌 삶. 이들에게 '이방인'은 복잡하지 않은 동시에 단순하지 않다. 단어란 껍데기만 남기고 그 안을 자신들의 언어로 가득 채워 새로 만든 듯하다. 이러한 태도는 군산에 새로 유입되는 젊은 이방인에게도 빠르고 쉽게 전이된다. 기존의 이방인이 새로운 이방인에게, 또 떠나려는 이방인에게 마음의 편차 없이 다가가는 방식은 그들이 처음 군산에 뿌리내린 방식과 맞닿아 있다.
평이하지 않은 기록을, 평범하지 않았던 일들을 그대로 안고 사는 법을 터득했기에 이방인들은 행복과 불행을 쉽게 나누지 않고, 온갖 사건과 상념을 잔잔한 물결로 받아들이며 지금도 ‘군산’에 산다. 무탈하게 소소하게 또 따뜻하게. <군산전기>는 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관객까지 이방인으로 만들었다. 첫 장면에 등장한 군산을 비추던 대형 LED 화면은 관객이 직접 넘나든 거대한 문이자 창이었다.
출처: 영화 <군산전기> 스틸컷(다음)
군산은 일본에 의해 만들어진 계획도시로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만 했다는 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군산이란 뼈대를 과거와 현재가 그대로 공유하고 있으나 지금의 군산은 예전의 군산과 다르다, 모든 것이 달라졌다. 이방인의 도시란 어감이 묘하게 공동체적으로 인식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 안엔 관객도 포함되어 있다.
'마음을 열어요, 그리고 마주 보아요.'
우린 다 함께 산다, 계속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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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튼 피어날 것은 피어난다
SYNOPSIS.
대출과 빚에 허덕이는 ‘브루노’와 ‘알베르’ TV 중고거래에서 우연히 만난 둘은 공짜 맥주와 감자칩에 이끌려 얼떨결에 환경 운동에 동참하고, 지구 온난화를 막기 위해 블랙 프라이데이에 반대하는 ‘캑터스’를 만나 환경 운동에 점점 진심이 되어가는데… 살기는 어렵지만 사랑은 하고 싶은 두 남자와 환경 문제 외에는 모든 것이 무감각한 여자까지… 갓생을 꿈꾸는 파리지앵 3인의 동상이몽 라이프가 시작된다!
POINT.
✔️ 프랑스 영화는 난해하다는 인식을 깨고 한국에서도 흥행했던 <언터처블: 1%의 우정> 감독 작품이에요
✔️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사랑받은 <알로 슈티>처럼 가볍고 유쾌하게 볼 수 있는 코미디 영화예요
✔️ 팬데믹과 기후위기 속에서 젊은 세대가 느끼는 감각을 전제로 한 작품이라서 흥미로워요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노에미 멜랑 주연! 마티유 아말릭 등 우리에게 익숙한 배우 얼굴들도 반가워요
계절을 따라 부지런히 옷장 정리를 하다가 한숨이 나온다. 아직 멀쩡하다 못해 새 옷에 가까운 상태이지만 여태까지 손이 잘 가지 않았고 앞으로도 입을 것 같지 않은 옷부터, 마르고 닳도록 입었긴 해도 버리긴 애매한 옷까지... 버릴 것이냐 말 것이냐, 늘 고민하는 동안에도 옷장에는 새 옷이 들어오고, 더 이상은 공간이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결국 큰맘먹고 옷을 덜어냈다. 그리고 이제 당분간 옷을 사지 않기로 결심한다. 내 돈 주고 산 옷이 나에게 짐이 되는 게 싫다. 그러는 동안 밖에는 종일 그치지도 않고 장마 같은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강원도 어디에는 눈이 왔다고 한다. 지금 5월인데요.
우리가 이런 시대를 산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텀블러를 쓰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말이 단톡방에서 대놓고 부정 당하던 시절이 있었다. 천 번을 써야 한다는둥 그건 의미가 없다는둥... 나는 더 이상 그 단톡방에서 말을 하지 않는다. 텀블러에 대한 의견 차이가 아니라 타인에 대한 예의 차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기후위기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이제 몇 남지 않은 것 같지만, 그럼에도 개인의 민감도 차이는 분명 존재하고, 거기에 타인에 대한 예의를 갖추기엔 너무 바쁘고 지치고 화가 나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가 이런 시대를 산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그런 우리 삶과 닮은 현실을 산다. 그래서 이 영화는 흥미롭다. 기후위기라는 단어를 몰랐던 시절의 로맨스처럼 부요한 재정 상태나 환경 상황을 자랑할 수 없는, 낭비할 거라곤 없고 그래서 휘청거려도 기댈 데 없는 세대를 담고 있어서.
심지어 이 영화의 주축을 이루는 브루노와 알베르는 소액 대출을 계속하다가 파산에 이르른 사람들이다. 공짜 맥주를 따라가다 보니 환경 단체 사람들을 만났고, 지금껏 그래왔듯 어영부영 돌려막기 하는 태도로 이들의 활동에 합류한다. 닉네임제로 운영되는 환경 단체 규칙에 따라 '캑터스(Cactus, 선인장)'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하는 여자를 보며 점차로 환경 운동에 진심이 되어가는데, 앞날은 여전히 캄캄하다. 브루노도 알베르도 각자의 행복을 찾아갈 수 있을지 궁금해 하며 이 영화를 따라가다 보면, 캄캄하고 답답한 상황임에도 어쩐지 실 없이 웃게 된다.
올해도 힘든 한 해가 될 거예요
사실 이 영화의 원제는 '힘든 한 해 une année difficile'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우리가 익히 아는 프랑스의 대통령과 고위 정치인들이 나와서 "올해도 힘든 한 해가 될 것입니다" 같은 문장들을 말하는 장면들이 모여 나오는데 이 오프닝 시퀀스가 상당히 인상 깊었다. 모든 시대에는 그 시기의 어려움이 있고, 모든 세대는 각자의 어려움을 돌파하며 살아가야 한다. 캑터스와 친구들은 그 문제를 환경 문제로 정의했고, 그에 따라 스크럼을 짜고 구호를 외치며 시대에 맞선다.
이들에게는 낭비할 자원도, 기댈 환경도 없다. 그렇기에 과격해진다. 환경 문제보다 부동산과 주식이 더 중요한 한국의 기성세대에게는 믿고 싶지 않겠지만, 전세계적으로 청년과 청소년들은 이 불만을 말하고 있다. 신자유구의 구조에서 빈부격차는 점점 빅토리아 시대의 그것에 가까워지고 있어 청년 세대는 점차 가난해지고 있으며 (이 부분은 한국 사회에서도 대체로 동의하는 것 같지만), 환경적으로도 기댈 곳 없이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소리만 듣고 있기 때문이다.
기후위기 앞에서 목소리를 냈지만 들리지 않아 더 이상 말할 수 없다며 입을 꿰매고, 환경 문제의 시급성을 가장 큰 소리로 외치기 위해 미술품을 파괴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영화 속 환경단체 사람들도 가게를 막고, 차량 통행을 막고, 심지어는 비행기 출발까지도 막는다.
이들에 대한 관객의 반응 차이가 흥미로운데, 현실에서의 환경 단체를 바라보는 시각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을 폭도처럼 묘사하거나 오히려 이들 때문에 반감이 생긴다며 어깃장을 놓는 사람들이 있다. 너희 때문에 더더욱 채식하기 싫어. 식물은 안 불쌍하니? 같은 사람들 말이다. 골프장의 환경 오염을 지적 당하기는 싫어하면서, 환경 단체 사람들의 행동은 하나씩 문제 삼는 사람들.
하지만 이 영화 속 마티유 아말릭이 분한 캐릭터를 보라. 그는 은행에서 일하는 기성세대이자, 파산 위기에 놓인 젊은이들을 위해 봉사활동까지 하는 훌륭한 어른이지만, 동시에 카지노 출입에 미련을 못 버리는 사람이기도 하다. 우리는 모두 다 조금씩 모자란 채로 산다. 그것을 청년 세대만의 문제로 취급하거나, 환경에 관심 있는 사람들만의 유난으로 치부하는 자세는 별로 어른스럽지 못하다. 물론... 이 영화 속 청년들도 무분별한 소비를 그만두고 좀 미래 지향적인 재정 계획이 필요하긴 하겠지만, 그게 꼭 골프장 부동산 주식으로만 귀결되는 모양새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해본다. 어차피 우리 모두가 동일한 가치를 지향할 수는 없으니 그렇다면 조롱이라도 하지 않았으면. 바로 그런 자세들이 가뜩이나 힘든 올 한 해를 더 힘들게 해요...
올해도 힘든 한 해가 될 거라는 오프닝 시퀀스는, 역시나 2024년에도 들어맞는다. 우리 시대가 유독 힘들게 느껴지는 것은 내가 지금 세대이기 때문이다. 지나고 나서 보면 과거의 '힘든 한 해'는 다 지나간 것들이기에 단순해 보인다. 1920년대는 독립운동이었겠지. 1970년대에는 민주화였겠지. 하지만 당대에도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 않았을 것이다. 독립운동 하에 치열하게 갈라졌을 생각을, 민주화와 경제화 앞에서 각양각색으로 펼쳐진 담론들과 그 안의 우선순위 다툼들. 지금도 마찬가지다. 환경이 먼저냐, 경제가 먼저냐. 어려움조차 각자의 몫으로 흩어져 버린 것 같은 절망적인 한 해, 역시나 올해도 힘든 한 해다.
하지만 유쾌하게 해나갈 수 있지
세상 모든 단체처럼 이들이 활동하는 환경 단체 안에서도 다양한 다이나믹이 펼쳐진다. 물론 환경을 위한 활동을 펼친다는 점은 다름이 없지만, 환경 외의 모든 것에 무감한 채 앞만 보고 달려나가는 캑터스와 달리, 브루노와 알베르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 안에서 다른 감정들이 동기로 작용하기도 하고 결정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건 지극히 자연스럽다. "OO에서 만나서 결혼하게 됐어요"라고 말하며 웃는 커플들 모두 그런 시간을 거쳤을 것이다.
이들이 주고받는 사랑 또한 여느 영화와는 다르다. 장미꽃과 안개꽃 뒤섞인 90년대 테이블 위의 로맨틱한 식사도 없는, 고급스러운 명품 선물도 없는 만남. 단지 스스로가 살기 위한 구호를 외치며 만나고, 스스로가 좀더 부끄럽지 않게 살기 위해 선물 하나를 고르거나 받을 때에도 신중하다. 자연스럽게 삶에 녹아든 구호들은, 가끔은 아주 비장하지만 또 매일 묵직하지만은 않다. 이들의 사랑도 이들이 외치는 구호도 삶에 그렇게 녹아든다. 투쟁과 경각심, 기후 우울의 세대이자 가난과 채무의 세대인 이들은, 그렇게 삶에 유쾌한 순간들을 녹여낸다.
동시에 이 영화는 사랑의 작대기에만 집중하지도 않는다. 동병상련 브루노와 알베르의 적당하고 느슨한 협력, 얼레벌레 상황을 타개해 나가는 모습. 전형적인 끈끈한 우정과는 거리가 있지만, 원래 우정이라는 게 그렇게 얼레벌레 쌓이는 경우가 더 많지 않나. 이따금 알지 못했던 서로의 모습을 보고 시원하게 깔깔 웃어버리기도 하고, 영웅 서사 같은 일을 겪기도 하면서, 이들은 하루씩 나아간다. 남들과 다른 감각으로, 그러나 각자의 방식으로 아름답게.
그 즐거운 모습을 보다 보면 짙은 기후우울이 조금 달아나는 기분이다. 그치. 내일이 없는 삶 같은 기분이 들지만, 오늘을 차곡차곡 이어가는 거지. 비록 낭비할 낭만도 기댈 환경도 없이, 혼란스럽게 흔들리는 빈곤한 세대이지만. 이들의 투쟁이 아무리 불안하게 휘청거리는 것처럼 보여도, 이들의 선택이 아무리 빈곤한 것처럼 보여도, 화낼 필요 없다. 아무튼 피어날 것들은 피어난다. 마음도, 사랑도 우정도, 그 안에서 내일도.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하여 시사회에 참석해 감상한 후 작성하였습니다. 영화 개봉은 5월 15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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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믿을 수 있는 존재야?
인간은 정말 믿을 수 있을까? 이 문제는 쉽게 대답할 수 없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후, 다양한 종족이 생겨나고 국가라는 집단이 만들어지면서 인간은 같은 인간을 속이고 원하는 것을 쟁취해 왔다. 그건 역사적으로 무수히 벌어진 일이고, 거짓과 정치적인 전략이 늘 존재해 왔다. 그래서 인류는 그런 위험성을 대비하고 방어할 수 있는 정보들을 전달해 왔다. 조심하고 또 조심한다. 그렇다면 이것을 바탕으로 ’ 인간은 믿을 수 없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을까?
반대의 경우도 있다. 정말 믿을 수 있는 인간이 있다면 진심으로 믿는다. 그 싱대방을 위해 어떤 것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런 믿음을 가진 인간들끼리 가족이 되거나, 특정 집단을 형성하여 하나의 사회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서로 공통점이 있거나 같은 생각을 하는 부류다. 그런 걸 만들어낸다는 것 자체가 ‘인간들은 믿을 수 있는 존재’라는 전제가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이 전제는 첫 번째 사례와 충돌한다. 인간은 믿을 수도 있고, 믿을 수 없기도 하다. 이 얼마나 혼란스러운 결론인가.
영화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영화는 지난 세 편의 시리즈인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 <혹성탈출 종의 전쟁>에서 100년 이상이 지난 시기를 다룬다. 인간은 지능이 거의 없는 존재로 소수만 살아남아있고, 지능을 가지게 된 유인원이 언어를 구사하면서 생태계의 최강자로 존재하고 있다. 이들에게 인간이란 지능이 낮은 동물이면서 믿을 수 없는 존재여서 접근을 피하고 있는 존재다.
첫 번째 감정 - 노아의 의심
영화의 주인공 노아(오원 티그)는 한 부족의 젊은 청년이다. 성인식을 해야 할 정도로 성장한 노아와 친구들은 진정한 성인으로 인정받는 의식을 진행하기 위해 높은 절벽 위에 있는 독수리 둥지에서 알을 하나씩 가져온다. 노아와 친구들은 맨 처음 등장부터 높은 절벽을 오르기 시작한다. 특히나 노아는 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독수리 둥지까지 올라간다. 무사히 알을 가지고 돌아오는 과정에서 노아는 인간의 흔적을 발견하고, 그 이후 인간을 추적하던 다른 유인원 집단에 의해 부족의 공간이 모두 파괴되고 만다.
부족의 대부분이 납치되어 어디론가 끌려가고, 기절했다 뒤늦게 깨어난 노아는 곧바로 다른 부족원을 찾아 나선다. 이 과정에서 노아는 다른 유인원 라카(피터 메이컨)와 인간 메이(프레이아 앨런)를 만난다. 처음 인간이라는 존재를 만난 노아는 메이를 무척 경계한다. 노아가 알고 있는 정보라고는 인간은 위험하고 교활해 가까이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정보는 부족의 나이 든 장로로부터 교육받은 정보이고, 그것에 대한 근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인간과의 첫 만남부터 의심으로 시작한 노아는, 메이가 다른 인간들과는 다르게 지능이 있고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더 크게 의심하게 된다. 물론 노아의 부족 사람들이 갇혀있는 곳과 메이가 가고자 하는 곳이 같고 목적이 같기에 힘을 합하지만, 노아의 마음속에 자리한 의심은 사라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영화의 말미 노아와 그의 부족에게 한 메이의 행동은 노아의 의심을 더더욱 부정적인 쪽으로 만들어간다. 이 영화 내내 노아의 의심은 조금 작아질지언정,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두 번째 감정 - 메이의 두려움
그럼 반대로 유인원인 노아를 보는 메이의 감정은 어떨까. 메이의 진짜 생각은 영화 후반부가 되면서 더 크게 드러나게 된다. 영화 초반 메이가 처음 노아와 라카의 앞에 등장했을 때, 메이는 자신이 지능을 가진 인간이라는 것을 숨겼다. 지능이 낮은 존재처럼 행동해 먹을 것을 얻어내고, 따뜻한 담요까지 얻어냈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경계하고 무서워하는 듯한 행동을 보여준다. 그렇게 지능을 가진 유인원들이 안심하고 그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상황을 만들었다.
하지만 조금씩 메이는 자신의 똑똑함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위기가 더 커지고 머리를 써야 하는 순간, 그녀의 입에서 누군가의 이름이 나온다. 바로 ‘노아’ 다. 마치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에서 주인공 시저가 유인원으로써 처음 입 밖으로 내뱉었던 ‘NO'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다. 기본적으로 메이는 유인원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거의 멸망직전에 있고, 인간보다 강력한 존재가 된 유인원은 인간에게 믿을 수 없는 존재다.
메이는 노아와 그 부족을 돕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두려움은 모든 유인원들을 향하고 있다. 그 두려움은 메이가 가진 비밀을 이야기하지 못하게 만든다. 노아가 나쁘지 않은 유인원의 리더라는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메이는 그 두려움을 거두지 못한다. 그녀는 노아와 단둘이 이야기하는 그 순간에도 권총을 숨긴 채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노아와 그 부족을 속였다. 이 영화 안에서 메이는 그 두려움에 완전히 종속된 인간이라고 느껴진다. 그 유인원에 대한 두려움은 결국 인간이 가진 지식과 기술들을 완전히 숨기는 행동으로 귀결된다.
세 번째 감정 - 프록시무스의 욕망
이 영화의 빌런인 프록시무스(케빈 듀런드)는 적어도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 안에서 만큼은 가장 리더처럼 보이는 인물일 것이다. 그는 목표가 뚜렷하다. 바다 옆에 존재하는 인간들이 사용했던 벙커의 문을 여는 것이다. 그 안에 담긴 여러 지식과 정보 그리고 무기들을 차지하는 것이 목표다. 그의 욕망은 지능을 가진 존재라면 한 번쯤 욕심낼만한 것들이다. 그는 영화에 등장해서 다른 유인원들을 향해 이야기한다. 힘을 합치면 강하다. 그 말을 토대로 조금은 강압적이지만, 다른 유인원들의 힘을 이용해 낸다.
그 말은 사실 과거 시저가 살아있을 때 유인원 집단이 가진 힘을 극대화하기 위해 사용했던 일종의 정치적 용어다. 과거 시저의 말이 모든 유인원들을 위한 것이었다면, 프록시무스의 그 말은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만약 그의 목표대로 벙커를 열어 인간의 지식을 이용하게 되었을 때, 다른 유인원들도 잘 살게 될 수도 있겠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은 프록시무스의 몫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프록시무스는 두려움과 의심이 없다. 그는 자신이 모든 유인원을 통제하고 있다고 자신하고 있고, 지능이 있는 인간들까지 차지함으로써 못하는 것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카리스마적인 지도자 타입인 그는 아주 단순하게 자신의 욕망이 이끄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적어오 이 영화 안에서 목표가 드러나는 건 프록시무스와 노아뿐이다. 프록시무스는 자신의 욕망, 노아는 부족의 부활이 그 목표다. 개인의 목표와 집단의 목표가 충돌하고, 그것이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가 된다.
그렇다면 인간 메이의 목표는 무엇인가. 그건 이 영화가 끝까지 숨기다가 이야기가 끝나기 직전에 털어놓는다. 그건 인간의 생존욕망과 메이의 두려움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표출된다. 그 모든 설명을 보고 나면 맨 처음 메이가 등장했을 때부터의 행동들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목표 역시 노아와 마찬가지로 인간 부족의 부활이다. 당연히 유인원 노아와 인간 메이의 목표는 상충될 수밖에 없다. 다시 시작되는 이 시리즈의 동력은 바로 그 목표의 충돌이다.
영화는 끝나기 전 다시 묻는다.
‘인간은 믿을 수 있는 존재인가’. 여기에 한 가지 더 질문을 더한다.
‘유인원과 인간은 같이 살아갈 수 있는가’.
영화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는 그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아마도 다음 시리즈가 이어진다면, 그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풀어놓을 것 같다. 이 영화를 연출한 웨스볼 감독은 영화 <메이즈러너> 3부작을 완성하면서 액션이나 CG연출을 매끄럽게 표현할 수 있는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번 영화에서도 수많은 유인원들의 모습을 화면에 자연스럽게 펼쳐놓는다. 특히나 마지막 하이라이트 장면이 바닷가 절벽에서 펼쳐지는데, 이 영화에 딱 맞는 완벽한 로케이션이었다. 노아가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상승의 이미지를 보여줄 수 있는 절벽 그리고 바다에서 들이치는 수많은 난관인 거센 파도, 댐의 붕괴로 인한 홍수는 노아가 겪을 수 있는 모든 고난을 화면으로 펼치기에 최적화된 환경이었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자연스럽게 성경에 있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이야기 구조도 노아가 한 부족을 살리는 이야기로 이어지기 때문에 서사의 구조에 그 이야기가 덧붙여져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영화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에서 더 중요하게 다루는 건, 바로 인간에 대한 신뢰다. 영화관람을 모두 마친 관객에게 영화는 묻는다. 인간을 정말 믿을 수 있을까? 철학적 질문을 블럭버스터의 형식을 빌려 최첨단의 기술력으로 훌륭하게 던지는 영화다.
*영화의 스틸컷은 [왓챠]에서 다운로드하였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https://www.notion.so/Rabbitgumi-s-links-abbcc49e7c484d2aa727b6f4ccdb9e03?pvs=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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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2019)> 리뷰
이따금 영화를 보러 갈 때 나는 최소한의 시놉시스도 읽지 않고 가곤 한다. 이날도 마찬가지였다. 하시모토 나오키의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2019)>가 일본 영화라는 것 정도만 알았고, 원작이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 그래서 영화가 시작되었을 때,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가 소녀의 성장담이고, 그 성장의 저변엔 아이가 너무도 사랑했던 반려견이 있다는 걸 알자마자 감독이 '치트키를 썼다'라고 느꼈다. 아마 어린 시절 반려동물과 잠시간이라도 시간을 보냈던 사람이라면 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영원할 것만 같은 행복을 순식간에 무너뜨리는 상실은 우리를 너무나 크게 흔들어놓기 마련이니까. 실제로 상영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순간부터 영화관에선 훌쩍거리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렸다. 사실, 나 역시 훌쩍인 관객 중 한 명이었다. 영화가 끝난 후 엉엉 울어 충혈된 눈으로 대중교통을 타게 되는 걸 걱정했을 만큼.
하지만 이 영화, 아쉽다. 배우 개개인의 연기가 뛰어났던 것은 물론 아련하기 그지없는 풍경도 훌륭하게 담겼는데 말이다. 어째서일까? 나는 그것이 감독의 욕심 때문이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주인 시즈카가 쓴 원작의 모든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던 마음이 오히려 영화의 메시지를 불분명하게 만들지 않았나 싶다. 굳이 비유하자면……. 코스 요리를 컴팩트하게 대접하려면 최소한 '정식' 정도는 되어야 했는데, 이 영화의 분량은 일 인분-한 그릇 요리에 불과했던지라, 재료가 좋았음에도 영 소화가 되지 않는다고나 할까.
※ 이하 스포일러 주의
위에서 짤막하게 말했듯,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는 반려견과 이별한 소녀 사야카(닛츠 치세)가 상실을 어떻게 수용하며 성장하는지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내가 쓴 표현이 다소 애매한 까닭은, 나는 이 영화가 소녀의 성장을 그리는 데에 실패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아리무라 카스미의 모놀로그를 통해 사야카가 '어찌 되었든 유년기의 상실을 겪었으며 많은 흔들림을 겪었음에도 성숙한 어른으로 성장하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뿐, 영화 내내 사야카는 결코 얕지 않은 수렁으로 거듭 떨어진다. 영화 말미 아이가 보이는 발돋움은 너무나도 미약하여 성장/치유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을 뿐, 앞으로 모든 것이 잘 되리라고 안도하기엔 부족하다. 내가 꼽고 싶은 문제는 사야카를 온전히 이해하고 감싸 안는 어른이 부재한다는 사실이고, 나는 이 점에서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가 소프트한 버전의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가 아닐지 생각하게 된다.
영화의 큰 줄기를 시간순에 맞추어 나열하자면 대략 이렇다.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소녀 사야카는 우연히 자신처럼 사람들에게 거부당하는 강아지 루를 만난다. 동질감을 느낀 사야카는 부모님을 설득하여 루를 데려오는 데에 성공한다. 사야카는 루를 아꼈고, 루 역시 사야카를 잘 따랐다. 매 순간이 추억이었으나 행복한 시간은 너무도 짧았다. 일 년을 채우지 못하고 루가 돌연 무지개다리를 건넜던 것이다. 긴 시간 병을 앓은 것도 아니었기에 상실은 너무도 급작스러웠고, 사야카는 어른들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거라며 루의 죽음을 외면한다. 아이는 죽음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사야카는 이미 할머니를 잃은 경험이 있고, 이후 조우하는 재즈카페 레이디버드의 주인 후세(오이다 요시)가 아들을 잃었음을 영민하기 눈치채기도 한다. 다만, 루의 죽음을 수용하지 않을 뿐이다. 안다는 것과 받아들인다는 것, 그것은 너무도 다른 영역이기에.
사야카의 모습은 분명 애도와 우울 사이 어드매에 위치한다. 물론 사야카가 루를 잃은 후 외부 세계에 맹렬한 적개심을 보이거나, 스스로를 학대하지는 않는다. 또한 눈물을 흘리거나 자신을 평가절하하며 세상의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상실이 가져온 낙담은 아이의 여름을 삭제한다. 사야카의 여름은 루가 존재하던 과거에 머물러있다. 예컨대 아이는 루와 함께 다니던 산책길을 홀로 걸으며 존재하지 않는 강아지의 목줄을 잡고 있거나, 함께 뛰놀던 공터에서 마치 루가 있는 양 공을 던진다. 그런데 가족은 아이의 방황에 대해 침묵한다. 아무래도 소녀의 가족은 다정하지만, 아이의 외로움을 눈치챌만큼 사려 깊진 못한 것 같다. 심지어 숙모는 마당에 놓인 루의 집을 이젠 치울 때가 되지 않았냐고 넌지시 운을 떼기도 했다.
그러던 중, 아이는 떠돌이 개(혹은 그저 주인을 잃은 개일 수도 있으나 명시되지는 않는다) '루스'를 키우는 후세 할아버지와 친해지게 된다. 후세 할아버지는 아주 오래전 아들 고이치로(사토 유타로)를 잃고 아들의 죽음을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채 평생을 보낸 인물로, 사야카와 다소 삐꺽이는 첫 만남을 가졌음에도 쉽게 친해진다. 영화 포스터상에선 '외톨이들의 우정'이라는 표현으로 축소되었으나 두 사람이 나눈 우정은 심장이 나락까지 떨어지는 경험을 한, 슬픔을 간직한 이들이 나이를 뛰어넘어 서로를 치유하는 여정이었다. 그것이 퍽 성공적이었다는 것은 사야카가 저도 모르게 내뱉은 '소중한 건 기다리는 게 아니야, 찾으러 떠나는 거야!'라는 말에서 짐작할 수 있다. 아이는 다시 미래를 향해 발걸음을 떼었다.
그러나 문제는 후세 할아버지가 병을 앓고 있었다는 데에 있다. 후세 할아버지와 사야카가 바다에 놀러 갔던 날 기적이 일어난 것인지 둘은 서로의 결핍을 환상을 통해 마주했다. 아마 별 일이 없었더라면 두 사람은 각자를 절망에 빠뜨렸던 상실과 화해를 이뤘으리라. 하지만 후세 할아버지는 병이 악화되어 세상을 떠난다. 그는 고이치로와 캐치볼을 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모종의 후련함을 느꼈던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완전한 치유라 보기 어렵다. 상실을 떠나보내고 성숙해진 모습으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시간이 그에겐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의 죽음은 사야카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어찌하겠는가. 어린 소녀는 루를 잃은 상처에서 완전히 회복하기 전, 슬픔을 공유할 수 있었던 친구마저 떠나보내게 된 셈이지 않나. 결국 사야카는 후세가 유언처럼 남긴 기차역을 찾아 헤맨다. 공터에서 루와 함께 발견했던 철근 앞에 선 순간 소녀가 후세와 고이치로, 루가 있는 '건너편'으로 가려하는 모습은 적지 않게 상징적이다. 아이가 삶이 아니라 죽음을 적극적으로 선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체관람가 등급을 받았으니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영화는 아이가 죽음으로 가는 것이 불가능했다는 것을 암시하고 후세 할아버지의 개 '루스'와의 재회를 보여준다. 하지만 이것이 진실로 치유를 향한 유일한 해답인지에 대해선 여전히 의문스럽다. 시간이 이별의 아픔을 해결해준다는 낙관은 무정하다. 비교적 공유 가능한 죽음인 '루'의 상실조차 오로지 후세와 나누며, 홀로 감당하기엔 너무나 벅찬 아픔을 견디고 있던 아이에게 찾아온 두 번째 상실은 정말이지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다. 병원의 간호사가 말하는 "너는 가족도 아니잖니, "라는 말은 마음을 도려내듯 아프다. 샤아카가 겪는 시련이 폭력적이라고까지 느껴지는 까닭은, 아이가 일상을 영위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내면의 슬픔을 어루만지지 않는 어른들의 무참한 모습 때문이리라.
글쎄, 니체는 나를 죽이지 못하는 시련/고통은 나를 강하게 만든다고 말한 바 있으나, 나는 그의 말을 모든 이에게 적용하고 싶지 않다. 아무리 개인이 그리 생각할지라도 상실/시련을 겪는 주변인들이 지녀야 하는 윤리적 자세가 과연 침묵과 망각, '묻지 않음'에서 비롯되는 배려뿐이겠는가. 상흔이 가득한 마음을 안고 살아가는 당신과 나에게 필요한 것은 결국, 서로에게 기댈 수 있도록 어깨를 먼저 내어줄 수 있는 용기와 온기가 아닐까.
이밖에,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의 특징 중 하나로 러닝타임 내내 회상과 환영이 자주 오버랩된다는 점을 꼽을 수 있겠다. 영화가 주로 초점을 맞추는 시간대가 루의 죽음 이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일 수도 있겠으나, 논리적으로 회고하지 않는 아이들 특유의 시간선을 재현하기 위한 장치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다만 나는 영화에서 모놀로그는 제외했거나, 영화 말미에 짧게라도 모놀로그를 맡은 아리무라 카스미가 등장하여 사야카의 모습을 비춰주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만일 감독이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처럼 아이의 시선으로 받아들이는 상실과 상실 극복의 과정을 그리고 싶었다면 전자를, 한 개인이 자신을 성장하게 한 시련에 대한 회고를 기획한 것이었다면 후자를 선택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감독은 어린 사야카가 이끄는 극 중 성인이 된 사야카의 목소리를 덧입혔다. 이에 영화는 영상 속 메인 롤과 화자가 일치하지 않는 상태로 진행되었고, 메울 수 없는 시간적 간극은 평행선을 달렸다. 영화를 이끄는 주체인 사야카가 분열된 상태에서 진행되는 상황인데,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는 후세와 고이치로, 사야카의 조부모님, 강아지 루 등 많은 이들의 이야기를 욕심껏 전달한다. 결국 영화는 과도한 메시지/이야기가 콜라주 된 채 마무리된다.
이렇듯 아쉬움이 적지 않으나 언급했듯, 배우들의 연기는 모두 훌륭했다. 또한 영화 내내 펼쳐지는 일본의 따스한 풍경은 영화가 지닌 부드러운 톤의 이야기와 정확히 맞아떨어져 몰입하기가 놀라우리만큼 쉬웠다. 영화관에서 한참 울고 나왔으면서도 믿기지 않아 스스로에게 되물어본다. 외국 영화를 보며 이토록 노스탤지어에 젖는 게 가능할까?라고.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고 괜스레 놀리던 어린 시절의 나는 오래 전의 기억이기에 빛바랜 지 오래라 생각했는데, 이 영화를 통해 다시금 생명력을 얻었는지 떠올리기만 해도 코끝이 괜히 시큰해진다.
★★
* 본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참석하여 감상한 후, 주관적 견해에 따라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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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크린 너머 세계 속으로… 프랑스] 남성적 시선으로부터 탈주하는 클레오의 도시 산책
<5시부터 7시까지 클레오>는 누벨바그를 대표하는 여성 감독 아녜스 바르다의 초기 연출작으로, 여성해방운동이 거세게 일었던 2차 페미니즘 물결을 통과하는 시기에 만들어졌다. 바르다는 ‘클레오’를 표현하는 과정을 통해서 한 여성의 정체성 찾기에 골몰했다. 영화는 젊고 아름다운, 나름 가수로서도 성공한 여성인 ‘클레오’가 암 진단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세상과 삶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와 더불어 그의 내면의 변화를 보여준다. 로라 멀비가 대부분의 서사 영화 구조 속에서 여성은 수동적인 볼거리로서의 기능만을 한다고 지적한 바와 달리, 영화는 젊은 여성 주인공 클레오의 ‘시선’을 섬세하게 따라가면서 그녀의 삶과 주체성에 이야기의 초점을 맞춘다.
1. 보여지는 대상으로서의 클레오
<5시부터 7시까지 클레오>는 제목 그대로 오후 5시에서 오후 7시 사이, 90여 분에 걸친 클레오(코린 마르샹, Corinne Marchand)의 시공간 이동과 대도시 산책을 13개의 장별 구성으로 펼쳐낸다. 이 과정을 통한 내러티브의 방향성은 대상으로서 정체성에 몰입했던 클레오가 주체로 변이생성 해나가는 탈주의 과정이기도 하다. 클레오의 시공간 이동은 자신이 암에 걸려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부터 도피하고픈 욕구로부터 발생된다. 젊고 아름다운 스타 가수란 정체성을 즐기며 화려한 삶을 누리던 클레오에게 불현듯 다가온 ‘죽음(암)’에 대한 공포는 존재론적 고뇌를 촉발하는 극적 동기로 작용한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나타나는 주요 응시 대상은 클레오가 뽑는 9장의 타로 카드들이다. 각각 ‘클레오’라는 인물의 과거-현재-미래를 나타내는 이 카드들은 그의 모습이 등장하기도 전에 관객들에게 클레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며, 마치 예언처럼 앞으로 일어날 사건들을 암시하는 기능을 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미래를 상징하는 카드들은 그에게 암에 걸려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유발하는 동기로 작용한다. 이때 등장하는 해골카드를 클레오가 보고 절망에 빠지자 점술가는 이 카드가 꼭 죽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새로운 탄생을 의미하기도 한다고 말하는데, 이를 대상으로서만 살아가던 클레오가 주체로서 변화하는 것을 의미하는 기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을 암시하는 불길한 점괘를 안고 점집을 나선 클레오는 건물 출구에 걸린 커다란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보면서, ‘추함이야말로 죽음을 의미하며, 아름다움을 유지하는 한 나는 살아있다’는 자기주술성 위로로 아름다운 여성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한다. 그러나 양 벽면에 걸린 거울이 서로를 비추면서 무한대로 분열되는 그의 이미지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로 인해 얻게 되는 존재론적 고뇌가 현재의 정체성을 뒤흔들어 놓을 것임을 암시한다.
거리로 나선 클레오는 모든 이들의 시선의 대상이 된다. 자신에게 꽂히는 그러한 타인들의 시선을 클레오는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가 카페에 도착했을 때, 매니저 앙젤르는 ‘아파 보이냐’는 그의 질문에 ‘아름답다’는 답변을 할 뿐이다. 이때 클레오는 또다시 뒤돌아 거울을 바라본다. 앙젤르는 죽음에 대한 공포로 눈물을 흘리는 클레오를 보며, 그의 절망이 단지 ‘호들갑’에 지나지 않는다고 판단한다. 앙젤르가 볼 때 클레오는 미성숙한 자아를 가진 ‘어린아이’로, 자신의 보살핌이 필요한 대상이다. 존 버거가 말한 것과 같이, 클레오는 앙젤르로 대표되고 있는 남성중심적 사회의 규율과 질서의 통제를 받는 인물인 것이다. (영화 속 앙젤르는 여성이지만, 남편을 잃은 과부로서 클레오를 마치 자신의 것처럼 소유 및 통제하고자 하는 욕망을 드러내는 인물이다. 앙젤르는 남성중심적 사회의 규율과 이데올로기를 상당히 내면화한 인물로 나타난다. 이러한 그의 집착은 영화 전반부를 중심으로 잘 드러난다.)
집으로 돌아가는 중에 쇼윈도에 놓인 모자를 보고 방문한 모자 가게에서도 클레오는 도처에 놓인 거울들에 비친 새 모자를 쓴 자신의 이미지 보기를 반복한다. 이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확인하면서 죽음에 대한 불안감을 달래 보는 수단이기도 하다. 갖가지 모자를 써 보면서 스스로의 아름다운 외모에 도취하던 클레오는 결국 여름철에 맞지 않는 검은 털 모자를 구매해 쓰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지만, 이내 ‘화요일에는 새 옷을 입으면 불운이 생긴다’는 미신을 믿는 앙젤르에 의해 제지당한다. 연이어 가부장적 운명론에 집착하는 앙젤르에 의해 두 사람은 운수 없는 차 번호를 피해, 드물게 존재하는 여성 기사의 택시에 탑승하게 된다. 그러나 택시에 탑승함으로써 거리의 수많은 시선으로부터 벗어난 것 같아 보였던 클레오는 차량 속에서도 여전히 수많은 시선들의 대상이 된다. 이동 중에도 차창 밖의 행인들의 시선과 옆 차선 차량을 운전하는 남성들의 희롱을 겪은 클레오는 심지어는 창밖으로 마주한 아프리카의 원시적인 가면으로부터도 자신을 관찰하는 시선을 느낀다. 그리고 이때 그는 문득 거북함을 호소한다. 한편, 남성 지배적인 택시 업계에서 여성으로서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밤거리도 두렵지 않다며 용감한 투쟁담을 들려주는 이 여성 택시기사와의 동행에서 클레오는 여성의 직업에 대한 일종의 성정치학적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이 에피소드 또한 이후 펼쳐질 클레오의 전복적인 산책 여정을 예고해 주는 내러티브 기호로 작동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택시를 타고 귀가를 한 클레오는 애인과의 만남을 준비하며 가슴이 답답해지는 증상을 느끼면서도 신체 가꾸기를 위한 스트레칭을 한다. 속옷 차림으로 스트레칭을 하는 그에게 앙젤르는 길고 화려한 털로 꾸며진 아름다운 실내가운을 입힌다. 스트레칭을 마친 클레오는 이내 침대에 앉아 머리를 매만지고 거울을 들여다본다. 이러한 그의 행위는 ‘아름답기에 사랑받는 여자’라는 관습적 내면화를 보여주는 반복적인 신체 움직임으로, 닫힌 틀에 갇힌 자아 대상화에 불과하다. 연이은 장면에서는 ‘남자는 아픈 여자를 싫어하니까 아프다는 내색을 하지 말라’는 앙젤르의 충고가 클레오에게 전해진다. 가장 편안하고 안전하게 느껴야 할 공간인 집/침실에서마저 그는 끊임없이 누군가를 위해 꾸밈노동을 해야 하는, 보여지는 대상으로서의 삶을 살고 있음이 계속해서 영화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스타 가수이자 부유한 애인을 가진 클레오의 일상을 지배하는 행위는 거울 속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확인하는 일이다. 영화 속에서 거울은 가부장적 조직과 규제 속에서 훈련된 클레오의 행위가 정체성으로 재현되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존 버거가 말한 바와 같이, 클레오의 자아는 감시자로서의 자아와 감시당하는 자아라는 두 개의 항으로 찢어져 거울 보기의 행위를 반복하면서 타인에게 보여지는 대상으로서의 정체성을 구성한다.
다음 장인 5장에서, 클레오는 사업 일로 바쁘기에 잠시 들렸다 가는 연인과 의례적인 만남을 갖는다. 연인에게 영화 <돈주앙>을 보러 나가는 데이트를 조르기도 하지만, 그는 ‘나의 여신 클레오파트라’, ‘나의 보석’이란 찬사를 클레오에게 퍼붓고 곧 떠날 뿐이며, 아프다는 클레오의 말에 ‘고운 몸에 병이 나서는 안된다’고 말하면서 그녀의 고통을 ‘괜한 걱정’ 따위로 치부해 버린다. 이후 노래 연습을 위해 방문한 두 친구 역시 클레오의 병을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기고 우스꽝스러운 장난을 치면서 클레오 갈등을 빚는다.
이후 이어지는 시퀀스에서 클레오가 <당신 없이(Sans Toi)>라는 노래를 부르는 장면에서, “당신 없이는 나는 빈 껍질이에요”라는 가사를 통해 타인의 시선 없이는 존재하지 못하는 대상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클레오를 떠올릴 수 있다. 이렇듯 애인의 태도와 자신을 대하는 주변 사람들의 태도에 클레오가 절망적인 피로감을 느끼게 되면서, 아름다움만이 자신의 가치이고, 남성으로부터 사랑받는 여성이므로 자신은 행복하다고 믿었던 그녀의 정체성에 균열의 조짐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아름다운 대상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강박적 욕망으로부터 탈주 충동을 느낀 클레오는 이제 지금껏 스스로를 옥죄어왔던 가발과 온갖 치장을 벗어던진다. 화려하게 장식된 흰 실내가운을 벗어던지고 가벼운 검은 원피스로 갈아입은 그는 앙젤르의 경고를 무시하고서,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검은 털모자를 쓴 채 홀로 집을 나선다.
2. 보는 주체로서의 플로랑스
다시 거리로 나선 클레오는 여전히 도시 사람들의 시선이 가닿는 대상이다. 하지만 이때 클레오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선에서는 변화가 포착된다. 홀로 거리에 나선 클레오는 중국음식점 외부에 걸린 거울 앞에 서는데, 전반부와 대비되는 태도와 독백으로 자신의 이미지 투영에 직면한다.
“표정 없는 얼굴, 바보 같은 모자…”
그의 독백은 처음부터 이 순간까지 반복되어온 아름다움에 고착된 대상화된 정체성을 전복시키기 시작한다. 이런 전복은 보여지는 대상에서 세상과 자신을 보는 주체로 생성하기 시작하는 산책 여정으로 급진전된다.
이제 그는 ‘스타가수 클레오’가 아닌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파리라는 도시의 군중 중 하나, 즉 ‘익명의 존재’로서 도시 이곳저곳을 구경하기 시작한다. 클레오는 산 채로 개구리를 삼키는 신기하지만 끔찍스러운 마술쇼를 구경하기도 하고, 사람이 붐비는 카페에서 주변 사람들의 대화를 엿듣고 그들을 관찰하기도 하면서, 익명의 군중 속에서 신체의 충동을 따라가며 산책하는 ‘탐사자’로 변화해나간다.
이전까지는 마치 그의 모습을 관음 하듯이 촬영했던 카메라의 시점은 이제 여성이자 주체인 클레오의 시선으로 바뀌어 촬영된다. 그는 여전히 시선의 대상이지만, 동시에 동등한 인격체로서 다른 이들을 관찰하는(따라서 때로는 시선이 부딪히며 눈을 마주치기도 하는) 주체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클레오는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기 위해 조각 작업실로 향한다. 이곳에서도 클레오는 작업을 하는 조각가들과 조각품들 사이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관찰을 멈추지 않는다. 친구는 조각실에서 누드 모델 일을 하는 중인데, 지금까지 줄곧 대상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져왔던 클레오가 이제는 ‘보는’ 입장에서 누드 모델, 즉 대상으로 서 있는 친구를 관찰하는 장면은 아이러니하다. 일을 마치고 클레르는 친구와 같이 거리를 걸으며 신체와 일상, 그리고 자신이 직면한 병과 죽음, 불안에 관한 대화를 나눈다.
이 과정에서 친구는 누드모델 일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휴면상태와 같으며, 조각가들은 그저 형태와 아이디어로 자신의 신체를 보는 것이라면서 자신의 신체 주체성을 토로한다. 여성의 신체를 대하는 가부장적 통념과 시선을 전복시키는 이런 경험은 점술가의 예언이나 앙젤르의 충고와 같은 운명적 틀에 갇혀있던 클레오에게 주체-되기의 계기로 다가온다.
친구가 헤어진 후, 뚜렷한 목적지 없이 거리를 방황하던 클레오는 홀로 몽수리 공원에 들어선다. 보는 이 없는 한적한 공원을 산책하는 클레오는 휘파람을 불면서 자신의 신체와 세상의 관계를 즉흥적으로 노래한다.
아름답고 변덕스런 나의 몸/ 새파란 나의 눈은/ 한번 보면 빠져들어/ 나의 매혹적인 모습은/ 포기할 수도 저항할 수도 없는 유혹/ 모두들 궁금해하지 내 매력과 미소를
이렇게 터져 나오는 노랫말은 보여지는 대상에서 자신의 신체를 관찰하며 걷고 보는 주체가 되어 스스로 연출해 내는 즉흥극이기도 하다. 여기서 스스로의 신체를 관찰하는 클레오의 자아는 존 버거가 이야기한 여성의 분리된 두 자아 중 감시하는 자아, 즉 남성의 시선을 내면화한 것과는 다르다. 클레오의 이러한 자기 응시는 타인에게 어떻게 보이느냐를 여부에 두었다기보다는,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인간으로서 자신을 발견해나가는 과정에 가깝다. 또한 이렇듯 능동적으로 세상을 관찰하는 탐색자의 역할을 수행해나가는 클레오를 통해, 영화는 ‘보는’ 행위의 쾌락이 능동적인/남성과 수동적인/여성으로 쪼개진다고 본 로라 멀비의 이론이 다소 이분법적인 구분이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5시부터 7시까지 클레오>는 대상이었던 여성이 한 주체로서 능동적으로 자신의 세계를 확장해 나가는 과정을 관객들에게 보여주며 일종의 ‘여성적 시선’을 제시한다. 이러한 영화 속에서 관객들은 주체로서의 남성이나 객체로서의 여성보다는 주체되기를 선택한 여성의 시선에 몰입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자연의 소리와 풍경을 만끽하며 홀로 걷고 있던 클레오에게 ‘앙투완’이라는 남자가 그녀를 ‘여름날 여신(Flora)’이라고 칭송하며 다가와 말을 걸기 시작한다. 환대 없는 어색한 상태에서 시작된 둘의 관계는 이내 죽음에 대한 불안감 공유로 소통이 가능해진다. 클레오는 암을 진단받을지도 모르는 불안을, 앙투완은 알제리전 참전 중 나오게 된 휴가의 마지막 날, 전쟁 중 닥쳐올지 모를 죽음에 관한 두려움을 토로한다. 내면의 고통을 드러내며 소통하게 된 타자와의 만남은 클레오에게 잊었던 기억의 ‘체현’, 즉 잠재된 주체성의 발현을 촉발하는 동기로 작동한다.
클레오는 ‘클레오파트라’에서 따온 스타 가수로서의 가명 대신 자신의 본명 ‘플로랑스Florence’(플로랑스는 꽃의 신 ‘플로라Flora’로부터 유래한 이름으로, 꽃처럼 피어나는 생명력을 상징한다.)를 기억해 낸다. 거울 틀 속에 갇혀 보여지는 대상에 머물던 클레오가 플로랑스라는 주체가 되어가는 과정은 그들을 바라보는 관객, 혹은 거리 군중의 시선에 조응한다. 동전의 양면처럼 삶과 죽음이 공존하듯이 일상과 전쟁, 개인적 삶과 사회적 정치의 공존은 ‘클레오→플로랑스’라는 변화, 즉 보여지는 대상에서 보는 주체로의 변이생성을 충동하는 ‘산책의 변증법’(산책하는 한 존재가 거리에서 군중과 만나며 변화하는 모습을 벤야민은 ‘산책의 변증법’으로 설명해낸다.)을 드러내준다. 잃어버린 이름을 되찾은 플로랑스는 가부장적 운명론으로부터 벗어나 죽음의 그림자를 걷어내고, 처음으로 자신만의 행복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3. 경계 밖을 사유하는 산책의 여정
아름다운 스타 가수인 클레오가 익명의 군중 속에 떠도는 플로랑스로 변화해가는 과정은, 거울이라는 틀 속에 갇힌 대상에서, 그 틀을 깨고 탈주하는 주체의 회복이자 생성이라는 점에서 극적 대비를 보여준다. 이를 통해 영화는 ‘보여지는 대상’으로서 여성 이미지를 구축해온 성차별적 영화 관습에 전복적인 이미지 재현을 달성해낸다. 1961년, 여성들이 처한 삶의 영역과 조건 전체를 변화시키는 것에 목표를 두었던 제2 물결 페미니즘(1960년대 미국에서 시작되어 서구세계 전체로 퍼진 여성주의 운동으로, 제1세대 여성주의가 여성 참정권을 비롯하여 제도적 성평등에 집중한 데 비하여, 제2세대 여성주의는 섹슈얼리티, 가족, 재생산 권리, 불평등 등으로 담론 범위를 넓혔다.)이 막 태동하던 시기 세상에 나온 <5시부터 7시까지 클레오>는 사회적인 표상으로서의 여성 이미지에서 벗어나, 삶과 죽음 사이에서 존재론적 고뇌를 겪는 한 개인으로서의 여성의 이야기다.
그것은 ‘성녀와 창녀’ 혹은 ‘숭배와 강간’으로 상징되는 틀을 깨고 여성 주체가 생성하는 또 다른 시공간을 찾아 나선 산책의 여정이기도 하다. 이 영화가 발표된 지 약 반세기가 흐른 현재, 여전히 영화계 내에서 여성은 물신화된 욕망의 대상으로 소비되며 ‘여성으로서의 여성’은 대부분 부재하는 상황에서 이렇듯 클레오가 가지는 주체로서의 여성 이미지 서사는 젠더적 관점에서 주목해 볼 만한 쟁점을 가진다. 관습적 세상의 틀로부터 탈주하면서 현실의 변화를 사유하고 스스로 실천해 내는 클레오의 그러한 산책 여정은 현실과 공존하는 영화적 시공간의 기능을 증명해 내는 장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변재란, 「아녜스 바르다, 여성의 역사, 영화의 실천」, 『순천향 인문과학논총』 제38권 2호, 순천향대학교 인문학연구소, 2019, 121-142쪽.
유지나, 「대상에서 주체로의 변이생성 연구: <5시에서 7시까지 클레오>를 중심으로」, 『씨네포럼』, Vol.0 No.34, 동국대학교 영상미디어센터, 2019, 9-30쪽.
Berger, John, 「다른 방식으로 보기」, 최민 옮김, 열화당, 2012.
Laura Mulvey, Visual and Other Pleasures, Basingstoke: Macmillan, 1989, 16p.(쇼히니 초두리, 「페미니즘 영화이론」, 노지승 옮김, 앨피, 2012, 67쪽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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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두 놉이라할땐 난 옙!
블로그 소개란에 써있는 '약간의 재미를 더하기 위해서는 스포일러를 받아도 상관없습니다. ㅎㅎㅎ'는 실제, 영화를 보는 스타일이다.
'진짜 재밌는 영화는 스포가 되어도 재밌다'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호하기에 "절름발이가 범인이다"는 결말에서 그 충격이 그대로 온다면, 좋은 영화로 받아들인다.
근데, 이번 <놉>만큼은 스포일러를 피했으면 하는 바람이다.영화 <놉>은 하늘에 떠 있는 "그것"에 의해 아버지를 잃은 "OJ"와 여동생 "에메랄드"가 "그것"과 맞닥뜨린다는 내용이다.
1. 말처럼 변한 관객들
영화 <놉>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고 중요한 소재는 "말"을 택한 이유에는 동물들 가운데 가장 겁이 많은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잘 달린다는 표현보다는 "천적으로부터 도망간다"라는 보호적인 행동으로 봐야 한다. 공포 영화에서 관객들의 의중과 달리 행동하는 데에 "왜 저래?" 하는 짜증 나는 순간이 있을 거다!
하지만 무서움과 별개로 궁금함도 생겨 상반되는 낯섦을 관객들에게 안겨준다.
극 중. "OJ"를 비롯해 모든 캐릭터들은 하늘에 떠있는 물체에 집중하고는 이를 찍어 "오프라 쇼"와 같은 곳에 팔려는 욕심을 보여준다.
"그것"에 의해 아버지를 잃었는데도 왜 그럴까?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판도라"는 "제우스"에게 "상자를 열어보지 말라"라는 당부를 듣지만, 궁금함을 이기지 못해 세상의 모든 죄악이 나오고 만다.
우리는 그걸, "호기심"이라 하며 "본능"이라고 말한다.2. 우리 모두, 쇼비즈니스에 있다!
영화 <놉>에서의 "말"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극 중. "OJ"와 "에메랄드"는 자신들을 소개하는 데에 '에드워드 머이브릿지'가 촬영한 최초의 영화 <움직이는 말1878>에 나온 기수의 후손이라고 소개하며, "OJ"와 그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목장은 할리우드 촬영장에 쓰일 말들이다.
여기, 현재 "주피터 랜드"를 운영하는 "주프"는 아역 배우로 성공적인 커리어를 보냈으니 <놉>은 애써, '메타포'를 숨기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 내용과 홍보에는 "스포일러"를 경계한다!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해야 하는 "쇼비즈니스"의 특성상. <놉>의 "그것"은 쉽사리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카메라맨 "호스트"와 "에메랄드"는 열심히, "그것"을 찍으려는 캐릭터들의 모습은 아이맥스 필름과 디지털, 그리고 자연광과 피사체라는 경쟁 구도로 이어진다.
물론, "먼저 찍어야 한다"라는 목적은 다를 바가 없다.
그렇기에 바깥에 서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어느 블로거의 말마따나 좋아요와 댓글, 그리고 조회 수로 먹고사는 "쇼비즈니스"의 원리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tmi. 1 - "OJ"를 맡은 "다니엘 칼루야"는 <놉>의 촬영으로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에서 하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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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대무가> 1차 예고편
"쇼타임" 힙머니즘 엔터테이닝 무비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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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쁘띠 마망> 티저 예고편
외할머니의 유품을 정리하기 위해,
엄마 ‘마리옹’과 함께 시골집으로 내려온 ‘넬리’.
어린시절 엄마의 추억이 깃든 그곳에서
‘넬리’는 엄마와 이름이 같은 동갑내기 ‘마리옹’을 만나게 된다.
단숨에 서로에게 친밀함을 느끼는 ‘넬리’와 ‘마리옹’!
하지만 ‘넬리’는 이 우연한 만남 속에서 반짝이는 비밀을 알게 되는데…
“나 비밀이 있어.
내 비밀이면서, 네 비밀이기도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