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펜2023-11-27 22:14:13
이번 주 왓챠 추천작 - <판문점 에어컨>

이번 주 추천작은 왓챠 단독 스트리밍 중인 단편영화 <판문점 에어컨>. 왓챠에는 서울독립영화제나 미장센단편영화제 등 국내 유수의 영화제에서 상영되어 좋은 평가를 받은 독립 단편영화나 애니메이션 등이 제법 많다. <판문점 에어컨>도 그중 하나로, 꽤 오래전에 봤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꺼내보게 되는 매력이 있는 영화. 2018년 제44회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처음 소개되었으며, 이태훈 감독이 연출하고 양광운 작가와 각본을 공동 작업했다. 발표된 지 벌써 몇 년이 지났지만, 이곳저곳에서 꾸준히 사랑받으며 상영을 이어오고 있는 영화기도 하다.
<판문점 에어컨>은 제목 그대로 판문점에 위치한 에어컨이 고장 나며 벌어지는 에피소드다. 무더운 날씨의 여름 땡볕이지만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최전방의 판문점. 군사분계선 위에 세워진 UN군사정전위원회 회의실의 에어컨이 고장나고, 이 에어컨을 고치기 위해 수리기사가 출동한다. 문제는 에어컨의 실외기가 북한 쪽에 있다는 것. 수리기사는 난감해하지만, 곧 체념하고 조심스레 북쪽 땅을 밟아 고장 난 실외기를 향해 몸을 기울인다.
이태훈 감독은 미장센단편영화제 인터뷰에서 이 영화의 아이디어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S사의 에어컨 실외기가 판문점에 있는 사진을 보고 그 사진 한 장에서부터 온갖 상상의 나래를 뻗어나갔다고 말했는데, '판문점'이라는 공간이 주는 상징성이 있어서인지 몇 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단지 '에어컨 수리'라는 해프닝이 벌어짐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흡입력있는 영화가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영화의 무대가 된 판문점 T2라는 공간은 단 한 번도 동시에 열린 적이 없어서, 남쪽이 들어가면 북측이 닫아야 하고 북측이 들어오면 남측이 닫아야만 하는 규칙이 있다고 한다. 말 그대로 이 공간은 '바람'이 통할 일이 전혀 없다는 뜻인데, <판문점 에어컨>은 해프닝이 마무리되는 영화의 마지막에 이 문을 활짝 열어두고 에어컨 바람 그러니까 '인공의 바람'이 필요하지 않은 자연 그대로, 생긴 그대로의 공간으로 열어두어 남북 그리고 남북을 둘러싼 대외적인 관계의 인위성을 날카롭게 짚어낸다.
덥고 답답한 공간은 닫힌 문을 활짝 열면 그만이지만, 그럴 수 없는 공간이 바로 판문점, 그리고 휴전 중인 두 국가의 대치선이다. <판문점 에어컨>은 남북이 끌어안고 있는 아이러니함을 판타지적인 장면들의 중첩으로 소화하는 동시에, 코미디 장르의 단편 영화가 가져야 하는 기본적인 재미 또한 놓치지 않는다. 10년 후에 다시 보아도, 수작이라 느껴질 만한 작품.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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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 때 이런 영화들을 보며 자라긴 했었지
세계관 최강자
이 영화의 주인공은 용의 전사 겸 팬더 포(잭 블랙)이다. 지금의 포에겐 걱정이랄 것이 없다. 당연하지. 빌런도 세 동물이나 때려눕혀 이젠 웬만한 악당들이 성에 차지 않을 정도고, 사람들의 인정도 받아 여러모로 충만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근데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심지어 친아버지 리 샨(브라이언 클랜스턴)까지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포는 매일이 축제 같다. 평범하게 악한들을 해치우고 인질이었던 아이를 집에 데려다 주고 난 어떤 날이었다. 갑자기 어디선가 동물들이 떼거지로 몰려든다. “포! 타이렁이 돌아왔다는 소문이 있어!” 터무니 없는 이야기라고 넘기는 포. 사실 터무니 없는 이야기가 맞다. 왜냐하면 포는 과거에(<쿵푸 팬더> 1편에서) 타이렁을 때려눕힌 적이 있기 때문이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려는 포. 하지만 포를 귀찮게 하던 여우 젠(아콰피나)이 흥미로운 이야기를 한다. “이건 분명 카멜레온(비올라 데이비스) 짓이야. 그녀가 누군지 아는 동물은 나뿐이지!” 귀가 열린 포. 용의 전사로서 카멜레온에게 승리해 평화의 계곡의 평화를 사수하기 위해 모험을 떠난다.
이런 영화들을 봤었지
<쿵푸팬더 4>는 드림웍스의 애니메이션이 가진 근본을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다. 그 ‘드림웍스 애니메이션 하면 생각나는 것’이 무엇이냐. 글쓴이는 ‘어릴 때 이런 영화들을 보면서 자란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이 기획의도에 걸맞게 영화는 온갖 귀여운 것들로 가득 차 있다. 가령 어린 동물들이 등장하는 모든 장면들은 다 재미있다. 혼자 노는 외로운 동물은 하나 없이 이 영화를 보는 아이들이 다 ‘아 저렇게 사이좋게 친구들이랑 노는 게 좋구나!’라는 생각을 쉽게 받아들일 것 같다. 또 그 아이들이 이 세계에서 어떻게 세상을 이루고 있는가? 에 대한 부분도 흥미롭다. 영화에서 젠의 본거지로 갈 때 아이들이 등장한다. 이 어린 동물들이 판단을 내리고 행동하는 방식을 보면 이 영화가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만큼 사소한 부분도 따듯한 필치로 이야기를 구성한 것이다. 어리다고 다 어머니 아버지 품에 안겨서 ‘엄마아빠 말 잘 들어야 해!’라고 말하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와도 충돌하고 어른으로서 좋은 역할을 이행하는 것 같지도 않다. <쿵푸 팬더 4>는 이 지점에서는 나름 매력 있는 화법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클리셰에 천착하지도 않았고 그걸 부수려고도 하지 않은 채로 자신만의 무언가를 만든 것이다.
영화에서 액션이 활용되는 방식 그러니까 시각적인 부분도 아이들을 고려한 듯하다. 우선 글쓴이는 이 <쿵푸 팬더 4>의 단점 중 하나가 액션영화로서 방점이 덜 찍혔다는 쪽에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 단점은 반대로 돌아와 ‘아이들이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사랑스러운 캐릭터성’이란 말로도 해석할 수 있다. 무슨 말이냐고? 영화가 일부러 액션의 향만 첨가하고 세계관의 토대를 다지는 것을 목표로 두고 있다는 뜻이다. 이 이유로 어떤 부분에선 영화가 기획의도를 잘 살리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사랑스러운 포와 젠의 모습을 보여주고 앞으로 시리즈를 예고하기만 하면 됐지 액션이 왜 필요해? 이 영화에서 쿵푸는 액션의 갈래로서 묘사하는 것이 아닌 그냥 서사에서 도구로서 작동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합 척척 주고받고 싸우는 모습보다 영화의 귀엽고 유머 가득한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다. 스포일러를 하지 않고 보여주는 것이 아닌 선에서 다른 예를 들어보자면, <캡틴 아메리카 : 윈터 솔저>의 일부 장면을 가져온다고 해보자. 윈터 솔저 vs 캡틴 아메리카의 맨몸 액션 장면을 보면 영화가 이 작품을 통해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것 같다. 1편의 줄거리를 잘 모르는 사람도 두 사람의 무력과 관계를 유추할 수 있게끔 맨목액션을 타이트하게 짜는 것이다. 실제로 글쓴이는 <캡틴 아메리카 : 퍼스트 어벤져>를 안 봤음에도 이 영화를 통해 캡틴 아메리카가 어떤 캐릭터인지, 그리고 왜 이 영화에서 액션이 중요한지 알 수 있었다. 캡틴 아메리카 왜 멋있어? 당연히 이 장면 때문이지!로 요약이 가능한 것이다. 이 <쿵푸 팬더 4>는 이 <캡틴 아메리카 : 윈터 솔져>에서 액션이 활용되는 방식이랑은 정반대라고 볼 수 있다. 포와 젠에게 쿵푸가 왜 필요해? 그거야 두 캐릭터 간의 관계 때문이고, 그 내밀한 부분은 영화 안에 있기 때문이지!라고 답하는 것이다. 영화 안에서 사용된 색도 이를 성실하게 구현하듯 밝고 사랑스러운 톤이 중심이다. 아이들끼리 와서 무난하게 볼 만한 영화라는 기획의도를 충실히 살리는 것이다.
직구 뒤 슬라이더
이 영화에서 감독이 승부수로 던졌을 것 같은 요소는 두 가지다. 우선 아버지가 두 명이라는 점이다. 아버지가 둘인 이유는 간단하다. 어렸을 때 포가 아버지를 잃어버렸고, 그런 포를 핑(제임스 홍)이 키웠다. 이런 상태에서 친아버지를 찾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두 명이다. 요즘의 할리우드를 생각하면 이 두 사람이 동성애 로맨스로 향할 것 같다. 하지만 이 영화에선 1차적인 클리셰를 비튼다. 두 동물의 관계가 로맨스라고 보기엔 많이 어렵다. 하지만 이 두 동물을 연결하는 관계는 포를 통해 다진 견고한 우정이다. 이 두 설정을 영화 안에서 캐미로 살리는 부분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또 이 영화의 감독은 ‘아버지가 두 동물인’ 가족의 형태를 인정하기까지 하는 친절한 모습까지 보여준다. 영화가 두 캐릭터를 받아들이는 방식이 줄거리 내에서 굉장히 중요해서 이 부분이 이야기의 전부를 쓰는 꼴이 되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다 쓰긴 어려울 것이다. 다만 이 두 캐릭터가 사실상 본 영화의 진주인공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인데 특정 캐릭터들 간의 차이를 보여주는 좋은 선택이었다고 본다.
그리고 글쓴이는 메인빌런이 ‘카멜레온’이라는 것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설정이라고 생각한다. 뱁새 따라가다 가랑이 찢어진다는 건 영화가 수도 없이 다뤄온 클리셰 중 클리셰기는 하다. 하지만 이 영화가 전적으로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영화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이들에게 “남을 따라 하지 말고 너 자신을 찾아라”라고 하면 와닿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부분을 염두하고 플롯을 짠다면 뭐부터 염두해야 할까? 따라 하려는 이유 / 따라 하고 난 다음 / 캐릭터가 가진 모순 이 세 가지라고 생각한다. 왜? 남을 좇는다는 행위가 얼마나 허상인지를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이 캐릭터가 나약한 정도를 묘사할 수 있으니까. 영화는 이 세 부분을 나름 철저하게 묘사하면서 쉬운 화법을 통해 관객들이 ‘남을 따라 한다는 것’의 의미를 탐구하게 유도한다. 이것은 영화가 간단한 액션과 귀염뽀짝한 색감과 소소한 유머를 가졌다는 점과 시너지를 낸다. 아무리 옳은 말을 해도 듣기 거북하게 하면 역효과가 나기 마련인데 이 영화는 그렇지 않은 영리함을 지닌 것이다.
허무한 마무리?
글쓴이가 생각하는 이 영화의 단점은 무기가 없다는 점이다. 이 영화는 그냥 무난하다. 장르적으로 뭔가 태도를 취하지만 확실하게 어필하는 무언가가 없다. 액션? 윗문단에도 적었지만 이 영화에서 ‘쿵푸’가 들어가는 이유는 인물간의 관계를 연결 짓기 위함이다. 포의 시원한 쿵푸액션을 기대하기엔 모자란 점이 많다. 또 핵심 캐릭터인 젠의 덩치를 보면 시원시원한 액션을 구현하기엔 역부족하니 영화가 이것을 염두하고 기획한 흔적도 보인다. 코미디? 영화에서 소소하게 웃음이 나는 장면이 있기는 하나 이것이 장르적인 특성이라고 볼 정도로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다. 왜? 젠의 캐릭터성이 포의 것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에 잭 블랙의 개인기를 보기엔 영화가 이런 부분까지 보여줄 여력이 없다. 애니메이션 특유의 사랑스러움? 그렇다고 보기엔 이 영화가 서양이 생각하는 동양의 이미지를 너무 대놓고 가져와서 구현한 느낌이 있다. 가령 카멜레온이 사는 동네를 보면 이 캐릭터들도 동양적인 색채를 띄고 있다는 점이 이야기의 핍진성의 관점에서 ‘너무 뻔한 거 아닌가’하는 의구심이 들게 하는 부분이다. 화려한 볼거리? 후반부 카멜레온과 관련한 모든 장면들이 굉장하긴 하지만 드림웍스의 전작 <장화 신은 고양이 : 죽여주는 모험>을 생각한다면 역시나 심심하다. 대단히 신선하다던가 귀엽다던가 유머러스하던가로 승부 보는 것이 아닌 기괴한 맛만 있으니 영화가 시각적인 부분을 잡으려다 만 것이다.
이렇게 내내 슴슴한 영화인 탓에 편의적인 줄거리가 거슬린다. 대표적으로 영화가 젠의 행보를 그냥 편의적으로 설정했다. 클리셰에 기댔다고 볼 수 있는데, 여기서 좀 더 불친절했거나 무언가를 암시하거나 극적인 감정선이 들어가도 큰 문제는 없었을 것 같다. 하지만 영화는 그럴 수 없었다. 왜? 이 영화는 내지는 시리즈가 이 영화를 통해 해소해야 하는 과제가 있다. 이 과제를 수행하려면 젠 입장이 다 이해되어야 한다. 그럼 포를 상대적으로 영향이 받는 캐릭터로 설정할 수밖에 없는데, 이런 이유로 주인공(포)이 핍진성이 떨어지게 묘사되는 것이다. 이에 연장선상에서 카멜레온이라는 캐릭터도 젠을 돋보이기 위해서 기능적으로 사용됐다. 카멜레온의 액션이 더 들어갔으면 영화의 생동감이라는 관점에서 충분히 빛을 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단지 '어떤 행위'를 두드러지기 위해 캐릭터들을 소모적으로 쓴 감이 있으니 빌런의 매력이라는 점에서 영화는 단점을 가진다.
개봉일 때가 선거날이었고 이벤트로 팝콘을 무료로 주는 이벤트를 했었다. 그럼 어머니 아버지들이 투표하고 아이들 손 잡고 영화관에 갔다는 의미이기도 하겠지? 여기에는 모자람이 없다. 아이들끼리 보기 좋은 애니메이션 영화.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서 어린 시절을 추억할 때 ‘나 이런 영화 보고 자랐지!’하며 자랐던 영화로는 제격이다. 뭐 데이트무비로 이 영화를 고른다고 해도 무리가 없다. 하지만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는 영화는 아니다. 아이들을 위한 영화고 그 나름의 재미가 있다는 것이 전부다. 외모에 대한 이야기를 보여준 <슈렉> 시리즈나 디즈니의 <라푼젤>을 생각하면 영화가 51%짜리 성공을 거뒀다고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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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 넷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12월 넷째 주도 잘 보내셨나요?
이번 주도 추위는 계속 된다고 합니다. 다들 목도리와 장갑 착용하셔서
최대한 몸을 따뜻하게 하고 외출하시길 바랍니다!
씨네픽과 함께하는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과 한 주 동안 진행했던 씨네픽 예측 이벤트인
<영웅> 주말 관객 수 예측'도 같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시작해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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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주말 박스오피스
1. <아바타: 물의 길> (-)
▶ <아바타: 물의 길>는 13년만에 선보이는 <아바타>의 속편인만큼 많은 사람들의 기대 속에서
개봉을 하였고, 영화 역시 호평을 받으며 1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주말 동안 (12월 23일 - 12월 25일) 관객 수 190만 5,903명을 동원했으며, 총 누적 관객 수는
557만 5,869명을 돌파하였습니다.
2. <영웅> (NEW)
▶ 한국 영화 최초로 라이브 녹음 방식으로 촬영하며 생생한 감동을 전한 영화 <영웅>은
배우들의 열연으로 호평을 받으며 주말 박스오피스 2위를 차지하였습니다.
주말 동안 (12월 23일 - 12월 25일) 관객 수 60만 4,268명을 동원했으며, 총 누적 관객 수는
80만 4,753명을 돌파하였습니다.
3.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1)
▶ 두 소년, 소녀의 아름답고 슬픈 사랑 이야기를 담은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가 크리스마스의 영향을 받아 셋째 주보다 한 단계 올라간 3위를 차지하였습니다.
주말 동안 (12월 23일 - 12월 25일) 관객 수 11만 8,158명을 동원했으며, 총 누적 관객 수는
52만 7,244명을 돌파하였습니다.
▶ 씨네픽의 이번 주 132회 예측 이벤트는 <영웅> 주말 박스오피스 순위 예측 이벤트입니다.
씨네픽 참가자분들이 예측해주신 박스오피스 순위 예측 결과는 어땠는지 다 같이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영웅>의 포털사이트 네이버가 제공하는 실제 관람객의 성별/나이별 관람 추이를 보겠습니다.
남성 66%, 여성 34%로 남성이 여성보다 더 높은 비율을 보였습니다.
연령대 별로는 30대가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였고, 그 다음으로 20대, 40대, 50대, 10대
순으로 높은 비율을 차지하였습니다.
▶한 주 동안 씨네픽 이벤트의 참가자분들 중 <영웅> 주말 관객 스코어에 가장 근접한 예측치를
보인 건 40대 초 남성과(634,435명)과 46세 이상 남성(590,842명)이었습니다. 또한 <영웅>
주말 관객 수 스코어 예측의 정답자 비율은 (오차범위 +-10,000) 전체 참가자의 2.9%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영웅> 주말 스코어 예측 이벤트에 참여한 20/30대 비율은 아래 표와 같습니다.
4. <올빼미> (▼2)
▶ 개봉한 지 한 달 넘게 지난 <올빼미>는 전까지 상위권을 유지하다가 신작과 크리스마스의
영향으로 2단계 떨어진 4위를 차지하였습니다.
주말 동안 (12월 23일 - 12월 25일) 관객 수 11만 3,926명을 동원했으며, 총 누적 관객 수는
309만 9,671명을 돌파하였습니다.
5. <신비아파트 극장판 차원도깨비와 7개의 세계> (▼2)
▶ 아이들을 타겟으로 한 애니메이션 영화는 대부분 개봉주에 상위권을 차지하다 이후부터는
상위권을 유지하기 조금 어려운데 크리스마스의 영향으로 5위를 차지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주말 동안 (12월 23일 - 12월 25일) 관객 수 10만 3,897명을 동원했으며, 총 누적 관객 수는
29만 7,387명을 돌파하였습니다.
북미 주말 박스 오피스
▶ 북미 박스오피스 TOP 5는 한국과 동일하게 <Avatar: The Way of Water>가 주말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였다.
<Avatar: The Way of Water>는 주말 동안(12월 23일 - 12월 25일) 매출액은
56,000,000 (한화 약 714억)의 매출액을 달성했으며, 총 누적 매출액은 253,681,686
(한화 약 3,234억)을 달성하였습니다.
<북미 박스오피스 TOP 5>
1. <아바타: 물의 길> 5,600만 달러 (누적 2억 5,368만 달러)
2. <장화 신은 고양이: 끝내주는 모험> 561만 달러 (누적 3,496만 달러)
3. <Whitney Houston I wanna dance with Somebody>530만 달러 (누적 530만 달러)
4. <바빌론> 350만 달러 (누적 350만 달러)
5. <블랙팬서: 와칸다 포에버> 302만 달러 (누적 4억 2,567만 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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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픽의 12월 다섯째 주 박스오피스 분석 콘텐츠는 여기까지입니다.
이번 주도 건강한 한 주가 되기를 바라며
씨네픽은 다음 주 월요일, 이 시간에 또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씨네랩 에디터 Hiz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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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어지는 빛과 외면하는 얼굴들 사이에서
<택시 드라이버>
-Taxi Driver 1976
-마틴 스콜세지
-드라마, 스릴러
‘트래비스 비클’은 뉴욕의 밤거리를 달리는 택시 드라이버이다. 그가 운전할 때마다, 보이는 길거리엔 자동차와 간판들에서 나오는 빛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어떤 남자에게는 그 가득한 빛이 조금도 들어오지 않았다.
가면조차 쓸 수 없는
영화 내내, 트래비스를 한 명의 사람으로 여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트래비스는 자신이 모는 택시와 하나처럼, 마치 도구처럼 취급 받았다. 영화 속 유력한 대통령 후보 팰런타인은 트래비스의 택시를 타게 된다. 팰런타인을 위해 선거운동을 하는 벳시에게서 들었던 남자를 자신의 차에 태우게 된 트래비스는 신이 나서 그를 응원하며 듣기 좋은 말을 건넨다. 그러자 팰런타인은 웃으며 다음 대통령이 바꿔줬으면 하는 것을 묻는데, 정치에 대해 아는 것 없이 그저 순수한 반가움과 기쁨으로 말을 건넸던 트래비스는 당연히 대답하지 못한다.
자신은 정치에 대해 모른다며 넘어가려는 트래비스와 집요하게 원하는 것을 말하라는 팰런타인. 미묘하게 변한 강압적 분위기에 트래비스는 고민하다, 길거리의 쓰레기들을 쓸어버리고 싶다고 말한다. 자신이 원했던 것을 트래비스가 말해줘서 놀랐던 것일까. 아니면 너도 그 쓰레기 중에 하나인데 쓰레기가 쓰레기를 쓸어버리고 싶다고 말하니 어처구니가 없었던 것일까. 팰런타인의 표정은 의미심장하게 변한다. 차에서 내리며 잔돈은 넣어두라고 말하는 팰런타인. 그것은 분명 선의와 호의가 아닌 약자를 향한 강자의 멸시였다. 끝까지 가면을 벗지 않는 팰런타인과 가면을 쓸 여력조차, 아니 마음조차 없는 트래비스. 그 간극은 승객이 택시 드라이버에게 돈을 건네는 창문 하나만큼의 좁은 거리에서 이루어졌지만, 사실 그 간극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할만큼 넓었다. 그렇게 강자와 약자 간의 계급이 주는 간극ㄱ은 옳은 방향으로 가려던 한 사람의 방향을 조금씩 뒤틀었다.
빛이 보이지 않는 추락
팰런타인이 트래비스를 조금씩 뒤틀었다면, 트래비스를 끝내 추락시킨 것은 벳시이다. 그녀를 처음 만난 인상을 로맨틱한 독백으로 전하는 트래비스, 그 순간은 마치 꿈 속에서 천사를 본 것처럼 황홀함과 희망으로 가득했다. 그렇게 트래비스의 일방적인 노력에 둘은 가까워지는 듯 보였지만 그들의 관계는 한 순간에 허무하게 끝이 난다. 그 이유는 다른 것도 아닌 영화 한 편이었다. 트래비스와 벳시는 함께 영화를 보러 가는데, 영화에는 나체의 남녀가 나오게 된다. 그러자 벳시는 영화관을 박차고 나가게 되고 트래비스를 포르노나 보는 쓰레기로 취급한다. 포르노 영화가 아니라고 항변하는 트래비스. 평생 그런 영화만을 보아왔고 다른 영화를 볼 기회조차 없었던 트래비스는 그저 자신에게 익숙하고 재밌는 영화를 소개해주고 싶은 마음이었을 뿐 다른 의도는 없었다. 하지만 벳시는 그런 그의 말을 듣지 않고 또 다른 택시를 타고 떠나버린다.
만약 트래비스가 택시 드라이버가 아니었다면 벳시가 단 영화 한편으로 트레비스를 그렇게까지 매몰차고 차갑게 몰아붙였을까. 아마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트래비스의 말투, 옷차림, 직업 등으로 벳시는 이미 트래비스의 가치를 단정지었고, 그 단정에 대한 확신의 근거가 바로 그 영화일 뿐이었을 것이다. 벳시가 떠나버리자 트래비스는 자신도 택시가 있다며 중얼거린다. 그리고 아마 그 순간 트래비스는 자신이 나아질 수 없는, 그리고 언제든지 대체되고, 갈아탈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영화의 후반부, 갱단들 사이에서 아이리스를 구한 트래비스는 영웅이 된다. 그러던 중, 아이러니하게도 벳시가 다시 한번 트래비스의 택시를 탄다. 그렇게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다 택시는 벳시의 집 앞에 도착한다. 그리고 벳시는 택시값을 계산하려 지폐를 꺼낸다. 둘의 인연을 정리해버리는 그 지폐 한 장. 너가 아무리 발악해도, 쓰레기라는 사실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듯한 조소. 지폐 한 장에는 그 조소가 담겨 있었다.
저 창문 너머에서 들리는
영화 속, 그 누구보다 순수하고 깨끗했던 트래비스. 그를 보면서 <트루먼 쇼>의 ‘트루먼’이 겹쳐 보였다. 언제나 웃고 행복하고자 했던 트래비스와 트루먼. 하지만, 세상은 이들을 내버려두지 않았고 철저히 도구화 했다. 세상은 이들이 대중을 즐겁게 하는 일, 그리고 사람을 나르는 일만을 하길 원했고, 그것을 넘어선 무언가를 희망하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트루먼은 창문을 깨고 자유를 얻었지만, 트래비스는 끝내 창문을 깨지 못했다. 택시 드라이버로서 바라본 거리에 가득한 인간 쓰레기들. 그것들 중에는 펠런타인처럼 화려하고 깨끗한 외면을 가졌지만, 누구보다 지독한 것들도 있었다. 그렇게 트래비스는 거리의 쓰레기들을 쓸어버리겠다는 목표를 가지게 되고 단련한다. 그렇게 단련이 끝나고, 펠런타인의 유세현장에 나타난 트래비스. 그는 무언가 확신을 한 듯, 모히칸 머리를 하고 있다. 사람을 위하는 척 연기하며 단상에 선 펠런타인과 사람들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뿐인 트래비스.
하지만 서로가 받는 관심과 사랑의 총량은 펠런타인이 서있는 단상과 트래비스 사이의 거리만큼이나 차이 났다. 택시의 창문 사이보다도 더욱 멀어진 둘의 거리는 결코 좁힐 수 없었다. 사람들을 위하는 척 가면을 벗지 않는 펠런타인. 트래비스는 그를 암살하려 하지만 총도 제대로 꺼내 보지 못하고 허무하게 실패한다. 그제서야 군중들이 처음으로 트래비스를 쳐다보게 되고, 그 순간에 사람들의 눈에 비치는 트래비스는 영웅의 모습이 아닌 허중지둥 비겁하게 도망치는 한심한 쓰레기의 모습이었다.
나에게만 암흑같은
학대받는 아이리스를 위해 트래비스는 갱단을 괴멸시킨다. 그리고 스스로도 자살하기 위해 방아쇠를 당긴다. 하지만 그에게 남은 총알은 없었다. 총알이 없었던 것을 알게 된 트레비스는 안심했을까, 아니면 절망했을까. 분명 절망했을 것이다. 트래비스는 자신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쓸어버려야 하는 거리의 쓰레기로 생각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희망에서 시작하여 스스로를 죽어야 할 쓰레기라고 단정짓기까지의 외로운 과정들. 이 과정들은 좁은 방, 꺼진 TV 앞에서 홀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고통과 상실의 연속들이었음이 분명하다. 그 과정들을 알아준 이는 없었다. 갱단을 소탕하고 소파 위에 쓰러진 트래비스부터 시작하여 괴멸된 갱단, 트래비스를 포위한 경찰들을 거쳐 길거리의 사람들까지 담아내는 카메라. 그 카메라가 담아내는 하이앵글은 건조하고 관조적이다. 스스로를 쓰레기라고 하는 자들과 스스로는 쓰레기가 아니라고 말하는 자들. 이들 중 쓰레기는 누구일까.
트래비스는 룸미러를 통해 언제나 손님들을 쳐다본다. 그 모습은 손님들이 자신을 친구이자 한 사람으로 생각해 주기를 바라는 것처럼도 보였다. 하지만 트래비스의 그런 바램에 무색하게도 그들은 아무도 트래비스를 친구 또는 사람처럼 여기지 않았다. 그들에게 트래비스는 그저 쓰레기통이었다. 택시의 뒷좌석에 자신이 들고 온 쓰레기를 버리고, 침을 뱉고, 토를 하는 인간들. 그들이 그러한 행동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트래비스는 쓰레기들을 위한 쓰레기통이었기 때문이었다. 대답도 하지 말고 그저 입 닥치고, 자기의 이야기를 듣기만 하라는 한 손님의 말처럼 트래비스의 인생에는 자신의 생각과 원하는 것을 이야기 할 기회가 없었다. 그저 기계처럼 택시만 모는 것이 세상이 그에게 바라는 유일한 것이며 그에게 주어진 사명이었다.
그곳에 몸을 맡겨
트래비스가 택시를 몰 때마다 보이는 자동차들의 라이트와 가게의 간판들. 그것들이 내뿜는 빛은 흠결 없이 깨끗하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흐리고 탁하다. 하지만 그 흐리고 탁한 빛들 중 어느 한줄기조차도 트래비스를 비추지 않았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는 존재하며, 그림자가 없는 빛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세상은 그들의 빛이 흐리고 탁함을 부정하며, 그림자가 조금이라도 자신들의 곁에 드리우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림자가 다가오면 멀어지는 빛들. 그 빛들은 누군가를 외면하는 얼굴과 닮아있다.
트래비스에게 남은 삶은 그야말로 잿빛이다. 트래비스가 아이리스를 구하고 영웅이 된 것조차 그의 망상이라는 해석이 있을 정도로, 영화 속 트래비스의 남은 삶에는 어떠한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 길거리의 쓰레기들을 누구보다 혐오하지만, 그들에게 시선이 점점 끌리는 트래비스. 어쩌면 트래비스는 그 쓰레기들이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거리의 쓰레기들도 과거에는 트래비스와 닮은 눈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희망의 눈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갔지만, 수많은 멸시와 외면을 마주하고 결국, 자기혐오의 결정체가 되어 쓰레기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지나가다 수없이 봐온 쓰레기 더미들이 내뿜는 눅눅한 비린내와 누린내마저 온기로 여겼을 것이다. 그렇게 그 온기마저 느끼기 위해 그들은 그 쓰레기 더미로 뛰어들었고, 그들은 점점 더 커다란 쓰레기 더미를 만들어 나간 것이다. 겨울이 되고, 혼자서 추위를 견디기 어려워질수록 트래비스도 점점 더 그 온기에 이끌릴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트래비스들이 고민하며 지나왔던 거리를 지나, 결국 쓰레기 더미에 몸을 맡기게 된다. 낮이 되고, 많은 사람들이 뉴욕의 길거리를 지나가면서 저 쓰레기 더미들을 불쾌해하고 흉물스럽게 여길 것이다. 그러나 기억해라. 그 길거리의 쓰레기 더미들은 만든 건 그 어떠한 것도 아닌 당신들과 우리, 그리고 나라는 진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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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림픽과 전두환을 반추하기에는 너무 얕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불법 운송 사업을 하며 돈을 벌던 레이서 '동욱(유아인)'과 엔지니어 '준기(옹성우)'. 그들은 양손에 큰돈을 쥔 채 올림픽을 앞둔 1988년 서울로 돌아온다. 그러나 절친 '복남(이규형)'을 비롯해 동욱의 여동생인 '윤희(박주현)'과 디제이 '우삼(고경표)'를 만난 반가움도 잠시, 상계동 판자촌을 무단으로 철거하는 등 기대와 다른 서울의 모습에 그들은 실망을 금치 못한다. 그러던 중 동욱과 '상계동 슈프림팀'의 행보를 눈여겨보던 '안 검사(오정세)'는 전두환의 비자금을 추적하는 비공식 작전을 그들에게 제안하고, 일생의 꿈인 아메리칸드림을 이룰 기회를 잡기 위해 상계동 슈프림팀은 서울 도심을 질주하기 시작한다.
상업 영화의 예술성은 대중의 열망이 반영되는 지점에 달려 있다는 말이 있다. 상업 영화는 최대한 많은 관객을 유인해 최고의 수익을 올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때 개봉 당시 다수의 대중이 공유하는 감정과 열망, 환상을 화면에 녹여내면 자연히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고, 그래서 많은 상업 영화는 공동체의 집단적 경험을 비추는 창이 된다. 예를 들어 <터널>, <판도라> 같은 한국의 재난 영화는 세월호 사고를 다양한 방식으로 소환한다. 정부와 사회적 시스템에 대한 불신은 할리우드식 구원자를 기대할 수 없다는 대중적 인식을 스크린 속에 녹여낸다. 최근 흥행에 실패한 <비상선언>의 사례는 세월호 사고를 바라보는 사회적 인식과 열망이 점진적으로 변하고 있는 현실도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역으로 의의가 있다.
이러한 상업 영화의 특성은 정치적 맥락에서도 유효하다. 실제 역사 속 정치적 인물이나 사건과는 별개로 해당 사건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반응을 영화는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전두환 씨가 대표적이다.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정당성 없는 대통령이자 자국민을 학살한 독재자인 그는 사망 전까지 추징금도 다 갚지 않았고, 광주 시민들에게 제대로 된 사죄의 뜻을 밝힌 적도 없다. 또 이미 사망했기에 그에게 죗값을 물릴 수단도 없다. 영화는 이러한 역사적, 정치적 과오를 심판할 수 있다. 그의 사망 전에 제작된 작품이기는 하나 <26년>은 5.18 민주화운동 당시 깊은 상처를 입은 이들이 그를 암살하려는 이야기를 다룬다. 최근에 개봉한 <헌트>만 하더라도 그를 처단하는 것이 역사적으로 온당한 처사임을 암시한다.
서울 올림픽과 전두환의 관계를 되짚다
8월 26일에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서울대작전>도 같은 맥락 내에 놓여 있는 작품이다. 끝내 환수하지 못한 그의 추징금을 탈취하는 카 레이싱 액션은 판타지 안에서 이루어지는 정의의 심판이나 다름없다. 특히 영화가 88년 서울 올림픽을 배경으로 삼은 것은 영리한 선택으로 보인다. 단지 작품의 핵심 포인트인 레트로 분위기를 전체적으로 부각하게 적합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서울 올림픽은 전두환의 몰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본래 전두환 정부는 쿠데타로 인한 불안한 민심을 수습하고 정권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정권의 2인자인 노태우 전 대통령까지 투입하며 올림픽 유치에 몰두했다. 그러나 정권의 방패막이가 되어야 했던 서울 올림픽은 오히려 전두환 정부를 찌르는 칼이 되어 버렸다. 올림픽을 위해 많은 외신이 서울에 들어와 있던 관계로 87년 항쟁 당시 개최가 취소되거나 개최지가 변경될 것을 우려한 정부는 강경하게 대응하지 못했고, 결국 이는 민주화 개헌과 전두환의 실각으로 이어졌다. 올림픽 유치에 전념했던 전두환이 정작 개회식에도 참석하지 못한 것은 서울 올림픽과 전두환 정부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따라서 서울 올림픽 개막을 목전에 둔 시점을 배경으로 비자금을 몰래 빼돌려 피신하려는 전두환을 끝까지 추격해 심판하는 스토리는 합당한 역사적 심판이자, 많은 이들의 공감을 끌어낼 영화적 상상력의 발현이라 할 수 있다. 영화의 중반부가 대체 역사물 같은 인상을 주며, 실제 역사와는 달리 모든 비자금을 잃고 백담사에 갇힌 그의 무력한 모습이 냉소를 자아내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음새가 헐거운 스토리텔링
그러나 <서울대작전>은 과거의 무게를 짊어지기에는 부족했던, 깊이가 얕은 액션 영화라는 인상을 지우지 못한다.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아이디어와 흡입력 있는 소재의 잠재력을 설득력 있게 구체화하는 데 실패한다. 문제는 스토리텔링의 측면과 장르적 관습 두 가지다. 우선 <서울대작전>은 동욱을 비롯한 상계동 슈프림팀의 아메리칸드림과 전두환의 비자금이라는 상이한 이야기의 연결고리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다. 올드카를 사랑하고 카 레이싱을 즐기며 힙합에 빠진 만큼이나 화려한 뉴욕 브롱스 힙합 패션을 입고 다니는 이들. 그들은 필(Feel)과 소울(Soul)이 넘치는 문화의 본거지 미국을 동경하며, 자유와 멋이 가득한 아메리칸드림을 꿈꾼다.
하지만 전두환을 잡아들이려는 야망 가득한 안 검사에게 사우디에서 벌어들인 불법 외화를 비롯한 여러 범죄 행각을 들킨 후 그들은 전두환을 심판하는 비밀 작전에 투입된다. 이때 영화는 머리에 총구가 겨누어지고, 동료가 납치당하는 와중에도 목숨을 걸고 전두환의 비자금을 쫓는 그들의 동기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못한다. 안 검사에게 코가 꿰였다고 한들, 그들은 이미 당대의 사회적 고찰, 인식, 성찰과는 거리가 먼 행적을 보여주었다. 그런 그들이 돌연 역사에 먹칠한 독재자를 눈 뜨고 볼 수 없다는 정의감을 발산하게 된 계기는 쉬이 납득되지 않는다. 작중 불과 1년 전인 87년 항쟁과 관련해 어떠한 언급도 등장하지 않기에 레이싱 패밀리가 정의의 화신이 되는 전개는 더욱 이해되지 않는다.
이미 갖고 있던 좋은 패를 영화가 활용하지 못했기에 더욱 의아하기도 하다.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정부는 경기장 건설 및 달동네 환경정비 및 재개발이라는 명목하에 수많은 주민을 길거리로 내몬 바 있다. 성화 봉송 중 불량주택이 보이면 안 된다는 이유로 판잣집을 무단으로 철거하기도 했으며, 그중에는 상계동 천막촌도 포함된다. 사우디에서 귀국한 동욱과 준기가 자신들의 터전이었던 상계동이 초토화된 것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하는 도입부는 이 사건을 반영한다.
이 장면은 전두환 대 상계동 패밀리의 대립을 더 직관적이고, 감정적이고, 무게감 있게 묘사할 기회였다. 주인공들이 무력한 약자이자 피해자임을 강조해 그들이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는 절실함을 더 부각할 수 있었다. 올림픽을 이유로 장애인과 노숙자를 탄압한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등과 연계해 정의감에 기대는 대신 더 날카롭게 비판을 가할 수도 있다. 이에 더해 라이벌이자 앙숙으로 등장하는 동욱과 '갈치(송민호)'가 협력하게 되는 계기를 더 자연스럽게 풀어낼 윤활유가 될 수도 있었다. 이 기회를 모두 놓쳤기에 <서울대작전>의 이야기는 전반적으로 이음새가 헐겁다는 인상을 준다.
과해 보이는 장르적 유사성
한편 장르적으로 독창성이나 신선함이 느껴지지 않는 것도 문제다. 특히 레이싱 액션의 대표주자인 <분노의 질주> 시리즈의 그림자가 짙다. 일례로 작중 카 레이싱이나 체이싱 시퀀스 속 장면은 <분노의 질주> 시리즈와 매우 유사하다. 전두환의 조직에 가담하기 위한 시험으로 등장한 도심을 가로지르는 레이싱 장면은 <분노의 질주> 시리즈의 시그니처나 다름없다. 작중 남서울 공항에서의 액션 시퀀스는 시작부터 끝까지 그 구성과 순서가 시리즈의 6편인 <분노의 질주: 더 맥시멈>의 공항 액션 시퀀스와 흡사하다.
또한 캐릭터의 구성도 <분노의 질주>의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한다. 동욱은 단단하고 뜨거운 가족애와 동료애로 무장한 리더 '도미닉 토레토(빈 디젤)'와 역할이 같다. 동욱의 여동생인 윤희는 도미닉의 여동생인 '미아(조다나 브루스터)'를 연상시키며, 그녀가 유달리 오토바이를 애용한다는 점은 토레토 크루의 다른 여성인 '지젤(갤 가돗)'과 닮았다. 동욱의 절친인 복남은 리더 못지않게 뛰어난 레이싱 실력을 바탕으로 그를 충실히 보좌한다는 점에서 <분노의 질주>의 또 다른 진주인공 '브라이언(폴 워커)'과 대동소이하다. 기술자인 준기나 DJ인 우삼은 쉴 틈 없는 개그 콤비인 '로만(타이리스 깁슨)'과 '테즈(루다크리스)'를 보는 듯하다. 마지막으로 비공식 수사를 펼치는 안 검사는 작전 기획부터 정보와 차량 지원에 이르기까지 '미스터 노바디(커트 러셀)'를 빼닮았다.
이에 더해 80년대 음악으로 가득한 카세트테이프가 중요한 소재로 등장한 것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를, 음악과 드라이브의 조화를 강조하는 연출은 또 다른 카 레이싱 액션 영화인 <베이비 드라이버>를 연상시키지 않을 수 없다. 사실 할리우드의 장르 영화 속 장면을 배경만 바꾸어 활용하는 연출은 한국 영화의 고질병 중 하나다. <탑건>의 한국판이라 할 수 있는 <R2B: 리턴 투 베이스>, <300>과 <킹덤 오브 헤븐>의 액션 시퀀스를 그대로 가져와 배경만 고구려로 바꾼 <안시성>이 대표적이다. 이처럼 기술력이 좋아졌다 한들 독창성이 느껴지지 않는 문제가 반복된다는 점에서 <서울대작전>의 만듦새와 구성은 자연히 얄팍해 보인다.
마지막으로 <서울대작전>은 전반적인 설정과 톤을 잘못 맞춘 듯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작중 동욱과 그의 팀, 갈치와 그의 팀은 제각기 카센터를 운영하는 자동차 마니아들이다. 이는 미국의 차고 문화를 한국에 맞게 현지화한 듯 보인다. 그러나 미국과 달리 한국에서 차고 문화는 보편적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따라서 차를 매개로 맺어진 우정이나 가족 의식, 연대감은 자세한 설명 없이는 온전히 전달되지 않고, 관객의 입장에서 주인공들에게 감정적으로 이입하기도 힘들다.
또한 더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를 조성하더라도 충분히 다루고자 했던 이야기를 소화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오프닝부터 엔딩 크레디트에 이르기까지 빼곡히 삽입된 힙합 음악의 분위기처럼 <서울대작전>은 시종일관 유쾌하고 과시적이고 과장된 멋을 빼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이야기에 비해 캐릭터들은 붕 뜨고, 송민호를 위시한 여러 배우의 연기도 부자연스러우며, 특히 '강인숙(문소리)' 회장이나 '이현균(김성균)' 실장처럼 무게감을 잡아야 할 악역들은 우스워진다. 그 결과 전두환에 대한 가상의 심판이 이루어지는 순간의 클라이맥스는 기대에 비해 쾌감이 그리 크지 않다. 이처럼 그럴싸한 아이디어에서 힘차게 출발한 <서울대작전>의 질주는 역사의 무게 앞에서, 그리고 잘못된 튜닝으로 인해 간신히 결승선에 도착하는 데 그치고 만다.
D(Dreadful, 끔찍한)
실패하는 지름길만 골라 달려 나가는 88년도 한국판 <분노의 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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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이 놓쳤을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7선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어디까지 보셨나요?
여러분이 놓쳤을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7편을 준비했습니다!
금요일 저녁에는 넷플릭스와 함께 해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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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의 자리는 어디인가
PROGRAM NOTE.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자신의 일에 열정적인 뭄타즈는 섬세한 남편 하이더르, 가족 내에서 절대자로 군림하는 시아버지 아만, 큰형 내외 및 그들의 네 딸과 함께 산다. 몇 년째 전업주부로 살던 하이더르는 카리스마 있는 트랜스젠더 뮤지션 비바의 백댄서로 취직하게 되고, 그와 동시에 뭄타즈는 전업주부가 될 것을 강요받는다. 하이더르는 첫 만남부터 강렬했던 비바에게 이끌리고, 뭄타즈는 원치 않는 임신으로 답답함을 느낀다. 자아가 확고한 뭄타즈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비바 뿐 아니라 흔들리는 성적 정체성을 가진 하이더르와 시아버지 아만에 이르기까지, 영화는 종교적이고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억압되고 착취되는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문제를 섬세하게 그려냈다. 사임 사디크 감독의 데뷔작 <조이랜드>는 칸영화제 주목할만한시선 심사위원상을 수상했다. (박선영/2022년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POINT.
✔️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심사위원상을 비롯, 각종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들이 눈여겨본 영화
✔️ 파키스탄이라는 (한국 관객들에게는) 낯선 나라 영화인데, 어디서 <헤어질 결심> 냄새가 나요 킁킁
✔️ 파키스탄 출신 말랄라 유사프자이가 프로듀서로 참여. 말랄라는 여성 교육에 대해 꾸준히 목소리 낸 인물이니만큼, 여성을 보는 시각에 대한 우려를 접어도 좋아요
✔️ 보고 난 직후는 물론, 보고 난 이후에도 며칠씩 여운이 계속되는 영화
✔️ 믿고 보는 '슈아픽쳐스' PICK! <행복한 라짜로>, <말없는 소녀> 같은 수작을 우리와 연결해준 곳이에요
✔️ 12월 13일 개봉!
영화 <조이랜드>는 거대한 하나의 일가족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연로하여 휠체어를 탄 아버지, 큰아들 '살림'과 아내 '누치', 둘째 아들 '하이더르'와 아내 '뭄타즈'. 그리고 살림과 누치 사이 아이들까지. 한 마당을 공유하며 사는 모습이 마치 우리네 옛날 마당 깊은 집처럼도 보인다.
그러나 영화를 보다 보면 이내 일가족보다 훨씬 거대한 무언가가 그 마당에 살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인도-파키스탄 분리 독립 시기보다 훨씬 이전부터 이곳에 살았다고 아버지가 자랑스럽게 말하는, 이들의 땅 '라호르'는 파키스탄에서 둘째 가라면 아쉬울 만큼 유서 깊은 도시다. 다양한 왕조의 수도였던 곳, 한때 세계에서 손꼽히는 주요 도시이기도 했던 곳, 그러나 1940년대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 독립되던 시절 무수한 피가 흘렀던 곳. 차이가 차별이 되어 사람을 죽였던 곳. 그 모든 이야기는 역사의 뒤안길로 흘러갔을 텐데, 이제 더 이상 차이가 차별이 되는 일은 없을까?
#"단일한" 파키스탄 사람이에요
일가족의 고요한 마당에서도 차별은 넘쳐 흐른다. 딸 넷을 낳았지만 아들이 아니라서 실망하는 것도, "아들"이니 응당 염소 하나쯤은 잡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도, 아들에게 일자리가 생겼으니 자신의 커리어를 착착 쌓아 가던 며느리는 이제 전업 주부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도, 그러나 그 아들의 일자리가 "에로틱한 공연"을 하는 극장이라는 사실은 이웃들에게 좀 비밀로 해두는 것도.
게다가 이런 차별은 절대 "단일한" 기준을 가질 수 없다. 차별은 양날의 칼이므로, 힘을 쥔 쪽에도 상처를 남기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성차별에서 여성이 남성에 비해 약자지만, 힘을 쥔 남성들이 만든 차별의 굴레가 어떤 남성들에게는 '맨박스'가 되듯이. 다만 힘을 쥔 쪽은 규칙을 이리저리 변용하면서 상처를 피할 길을 도모해 볼 수 있다. 그렇게 차별은 이중 삼중의 잣대를 번복하여 만들어내고, 하나 둘 잣대가 늘어나다 보면 어느새 삐죽삐죽한 창살처럼 우리를 가둔다. 그 창살 안에서 버틸 재간이 없는 사람들이 튀어나올 때, "공동체를 지킨다"는 명목의 제재가 가해진다.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잣대들은 사실 공동체의 모두를 찌르고 있다. 힘을 쥔 쪽이라는 것도 결국 상대적 개념일 뿐이니까.
이 영화의 주요 인물들은 사실 모두 그 창살 바깥에 더 잘 어울리는 인물들이다. "전통적인 남성성"과 잘 어울리지 않는 하이더르, 트랜스젠더 비바, 전업주부의 삶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뭄타즈, 받아들였지만 그런 뭄타즈를 이해하는 누치, 심지어 전통의 적극적인 수호자처럼 보였던 아버지나 이웃집 파야즈 부인조차도...
단일하지 않은 차별의 기준들은 각자의 비밀들을 만들어내고, 그 비밀은 거울이 깨지듯 방사형으로 퍼진다. 그 자리의 어느 누가 과연 행복했을까?
마치 "애빌린의 역설" 같다. 집단의 구성원 누구도 원하지 않는 방향의 결정임에도, 모두가 자신의 의사와 상반되는 결정을 하게 되는. 전통이라는 미명을 덮고 있는 것 중 이런 애빌린의 역설이 얼마나 많을까.
#지혜로운 사람은 바다를 좋아하고
영화에는 많은 공간이 등장하지 않지만, 하나하나 매우 인상 깊다. 어느 장소 하나 일면적이기만 한 곳이 없다. 마당과 집안 깊은 곳이 분명하게 분리되어 있는, 이 영화에 뭄타즈가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장면에서 유독 그 대비를 극명히 보여주었던 집. 사회에서 요구하는 엄격한 성별 역할을 내려놓는 공간이었던 극장. 모든 남성 관객들이 스스로에게만 유하게 적용되는 잣대의 틈으로"에로틱한 공연"을 보는 곳인 동시에, 비바에게는 반대로 그 모든 잣대의 창살을 내던지고 나와서 춤을 춘 장소였던 극장. 이름부터 기쁨을 품고 있는, '꿈과 희망의 공간'으로 상징되는 놀이공원 조이랜드. 누치와 뭄타즈가 잠시 일상의 고통을 잊고 소소한 일탈을 할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 정도의 일탈밖에 할 수 없는 삶의 무게와 거기서조차 존재하는 차별의 비릿한 시선을 느끼게도 하는 공간.
가장 역설적인 공간은 바다일 것이다. 비록 지금은 조악한 조명밖에 없는 방에서 바다의 흔적으로 들고 온 조개 껍데기 하나 덜렁 들고 있지만, 비바는 바다를 자유롭게 갈 수 있는 사람이었다. 평생 라호르에서만 살아온 하이더르 또한, 가보지 못했지만 사실 언제든 마음 먹으면 갈 수 있는 곳. 반면 카라치에 친척 집이 있어 언제든 해변에 가볼 수 있었음에도 옷이 젖는다는 이유로 발목밖에는 담가보지 못한 뭄타즈.
비바와 하이더르, 뭄타즈. 바다에 대한 이 세 사람의 기억과 접근성은 모두 다르다. 그러나 한 가지 공통점만은 있다. "지혜로운 사람은 바다를 좋아하고, 인자한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마치 <헤어질 결심>에서 "난 인자한 사람이 아닙니다. 난 바다가 좋아요." 말했던 서래처럼, 이들 또한 인자한 사람의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는 것.
이 영화가 "트랜스젠더와의 불륜 이야기"로 뭉뚱그리는 시각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영화는 트랜스젠더 비바가 '팜므 파탈'적인 매력으로 일가족을 무너뜨리는 이야기도 아니며 (진짜 아니다), 한 기혼 남성과 결혼 외부자 두 사람이 히히덕거리며 기혼 여성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이야기도 아니다 (진짜 아니다). 어쩐지 이 영화를 보면서 자꾸 생각났던 <헤어질 결심>이 그런 이야기가 아니었듯이.
이 영화는 단지 그 세 사람 모두가 눌려 있던 구조를 보여준다. 그 거대한 구조 아래 세 사람이 어떤 존재였는지 보여주고, 이들이 각각 어떤 선택을 하는지를 보여준다. 두껍게 덮인 애빌린의 역설을 걷어내고 끝내 규칙에서 이탈하는 인간들의 자리가 어디인지 묻는다. 아름다운 인물들의 설렜던 마음을 손가락처럼 들어, 그 지점을 슬프게 가리킨다.
#뭄타즈의 이름
이 영화의 인물들이 모두 제각각의 이유로 "설레지만 슬픈" 인물이었지만, 내 눈에 가장 밟힌 인물은 뭄타즈이다. 나는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씩씩하게 살아가는 여성을 사랑하지 않는 방법을 모르므로. 파키스탄에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나로서는, '뭄타즈'라는 이름을 살면서 딱 두 번째 들었다.
처음으로 들은 이름 또한 현실에서 마주한 인물은 아닌데, 무굴 제국 황제 샤 자한의 아내였던 뭄타즈 마할이다. 샤 자한이 태어날 때만 해도 무굴 제국의 수도가 라호르였으니, 아주 인연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비록 그가 사망한 곳이자, 죽은 아내를 기리기 위해 어마어마한 건축 사업을 벌인 곳은 라호르가 아닌 아그라였지만. 그 미친 사랑의 결과물이 타지마할이다. 뭄타즈 마할의 무덤.
샤 자한은 뭄타즈를 몹시 "총애"하여, 전쟁터에도 데리고 다녔다 한다. 14번째 아이를 낳다가 사망한 후,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샤 자한은 타지마할을 짓기 위해 어마어마한 공력을 쏟아붓는다. 벽면에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 일일이 대리석을 파고 돌을 박아 넣었으며, 이탈리아처럼 먼 곳에서 수입해온 자재도 있었다. 똑같은 모양의 검은색 건물을 하나 더 지어 두 건물의 그림자가 포개지게 만들고 싶었다는데, 나라가 휘청일 정도의 건축을 보다 못한 아들 손에 끌어내려지며 이 미친 사랑의 공작이 불발되고 만다.
듣다 보면 늘 양가 감정이 드는 이야기이다. 그 나라 백성이었다면 그따위 무덤 보기도 싫었을 것 같고, 그 모든 이야기가 옛 전설처럼 고여 버린 지금으로서는 아무튼 그 도시를 먹고살게 해 주는 랜드마크가 되었으니. 그러나 그 뭄타즈 마할의 이름과 포개지는, <조이랜드> 속 뭄타즈를 생각하면 서글퍼진다. 샤 자한이 뭄타즈를 무척 사랑했다는 것만은 의심할 수 없지만 (누차 강조하지만 "미친" 사랑이다.) 그 사랑이 뭄타즈를 행복하게 했을지는 잘 모르겠기에. 말랄라 같은 프로듀서가 있었다면, 14명의 아이를 낳으며 전쟁터를 따라다니지 않아도 되는 삶이었다면. 시대 정신조차 달랐던 때이니 뭄타즈가 무엇을 원했는지 우리로서는 알 수 없지만, 뭄타즈가 어떤 삶이든 선택할 수 있었다면, 다른 이야기의 가능성이 열려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임은 분명하다.
수백 년 전에 무덤에 갇힌 뭄타즈 마할도, 뭄타즈를 비롯해 각자의 창살에 갇혀 있던 이 영화 속 인물들도, 이 인물들이 표사하는 파키스탄 사회도, 그런 자유로운 선택지의 세상에 갑자기 짠 놓일 수는 없다. 그런 "조이랜드"는 우리에게 없다. 너무 아름답지만 멀고 아득한, 우리의 조이랜드.
그래서 이 영화가 마지막까지 쟁쟁 외친 소리가 며칠씩 여운으로 남아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가보지 못한, 가보지 못할 조이랜드가 아득하게 슬퍼서. 말랄라가 어떤 마음으로 프로듀싱에 참여했는지, 어쩐지 조금 알 것도 같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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