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란2023-11-24 19:26:39
애도를 위한 애도
듣는 것보다 보는 것에 더 중심을 두고, 의미를 찾아내길 추천한다.
* 본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이 담겨 있습니다.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 Show Me the Way to the Station, 2019
일본 | 드라마 | 126분
감독: 하시모토 나오키
애도를 위한 애도,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는 다분히 감정적이다. 관객에게 집요하게 잊고 있던 이별을 떠올리게 하고 상실에 허우적대던 과거를 다시 경험하게 한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겪어왔던 슬픔과 아픔을 꺼내게 한다. 그리고 스스로 원했던 것처럼 묻게 한다. 이미 알고 있지만, 어렴풋이 다들 짐작하고 그러려니 하던 '역'의 존재를 아이와 같은 입장에서 되묻는다. "그래 네 말이 맞아, 대체 그 역은 어디 있는 걸까? 또 어디로 가는 걸까?"
여기서 우린 사야카가 말하는 '역'의 존재를 이미 잘 알고 있다. 가고 싶은 마음만으로는 절대 갈 수 없고 찾을 수도 없는 장소, 산 사람들은 결코 밟을 수 없는 영역.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야카의 옆에 서서 묻는 거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마음은 그럴 수 없는 아이러니함,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당연한 명제 때문이다.
그를 영영 잊어버릴까 봐 절절한 그리움과 괴로움조차 함부로 놓을 수 없는 그 마음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다.
우린 그 행위와 시선, 모든 마음의 조각들을 엮어 시간의 길을 만들고 이를 '애도'라 부른다.

주인공의 내레이션이 장면 곳곳에 감정의 활력을 불어넣지만,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는 사실 언어(음성)가 제거된 무성영화라 해도 무방하다. 대사보다 인물의 행동으로 사건을 강렬하게 그리는 방식이 이 작품만의 남다른 표현 방식이다. 감독은 사건의 인과관계를 음성언어보단 인물들의 손짓과 눈빛으로 차근차근 전개하면서, 상실과 그리움을 화면 가득 채워 넣는다. 섬세한 몸의 언어와 절제되어있지만 풍부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연출 방식으로 관객의 공감과 감동 포인트를 쉽게 점령한다. 이 지점엔 반드시 영화의 스토리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모두 명확하게 이해했다는 전제조건이 필수인데, 이는 영화의 첫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전철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던 사야카가 전철이 지나간 뒤 철로에 난 길을 건너는 장면까지 단 3분.
이 짧은 장면엔 길을 걷는 내내 허공에 팔을 뻗은 사야카의 모습이 전부다. 그러나 우린 아이를 통해 영화의 방향을 자연스럽게 눈치챈다. 아이는 아직 친구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이며, 이별로 인해 극심한 슬픔을 겪고 있다. 결국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는 '누군가를 잃은 이별'을 겪어내는, 인물의 애도 과정을 담은 작품이다.

루는 사야카에게 언제나 멋진 선물을 해준 존재다. 자신과 같은 외로움을 가진 반려견이었고, 하나뿐인 친구였으며 늘 곁에 있는 가족이었다. 말 그대로 루는 사야카에게 전부였다. 그렇기에 사야카는 단호하게 말한다.
"루는 절대 죽지 않았어!"라고. 심장병으로 죽은 반려견을 잊지 못해 현실을 강하게 부정하는 사야카의 현재는, 루와 함께 했던 과거의 추억과 끊임없이 교차된다. 계속 반복되는 과거 회상으로 우린 루가 사야카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확실하게 인지하고, 점점 더 사야카가 느끼는 고통을 이해하게 된다.
사야카는 다시 혼자가 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아이는 이미 부모에게 강아지가 최대 10년 정도밖에 살지 못한다는 말을 들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준비된 이별과 그렇지 못한 이별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보이는 행위의 준비가 아니라 남들은 결코 볼 수도, 알 수도 없는 마음의 준비. 사야카는 루가 자신이 체험학습을 갔을 때 갑작스럽게 떠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루의 죽음은 사야카에겐 정말 먼 미래였으니까. 결국 환경적, 시간적 요인에 의한 죽음이란 불길하지만 예정된 조짐을 조금도 느끼지 못했던 아이는 결코 루를 떠나보낼 마음이 없다. 인간으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이 맞닥뜨려야 하는 자연재해와 다를 바 없는 상황에 놓인 사야카에게 애도란 그저 '어른들의 거짓말', '부정' 그 자체였다.

오래 살면 살수록 인간은 타인의 죽음에 익숙해지고 무뎌진다는 말을 나무라듯,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는 어린아이의 상실과 노인의 상실을 구분 짓지 않는다. 후세는 오래전 사야카 또래, 어린 아들(고이치로)을 사고로 잃었고, 사야카의 할아버지는 아내를 떠나보냈다. 두 사람 모두 사야카와 같은 준비된 이별이 아니었다. 사야카는 자신의 마음을 찌르는 고통이 후세와 할아버지가 느끼는 고통과 다르지 않음을 발견한다. 그들 역시 강하게 현실을 부정하면서도, 돌연 현실을 받아들이고, 또 갑자기 돌변하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슬픔과 그리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사야카는 그들을 보며 조금씩 자신을 둘러싼 상실을 풀어낸다. 상처를 치유해야 하는 걸 본능적으로 아는 것처럼 후세에게 루와 함께 한 이야기를 하며 과거를 추억하고, 반대로 자연스럽게 후세에게 그의 죽은 아들에 대해 듣는다. 아내가 마지막으로 마당에서 박꽃을 심었던 때를 회상하는 할아버지의 옆에 앉아 조용히 그의 손등에 손을 포개며 그를 위로하고, 또 할아버지에게 위로받는다.
서글프기만 했던 어린아이가 위로받고, 반대로 타인을 위로하는 장면은 인간과 인간이 서로를 의지하며 함께 고통을 이겨내는 가슴 벅찬 장면으로 연결된다. 영화는 이 따뜻하고 감동적인 장면들을 한 스푼의 환상과 버무리며 이야기의 몰입감을 높이고, 주제를 더 빛나게 한다. 길고 은은하게 퍼지던 루를 향한 사야카의 진심은, 고이치로와 캐치볼을 하는 후세의 기다렸던 웃음으로 인해 묵직한 파동을 만든다. 그리하여, 사야카가 후세를 보며 "무언가 굉장히 소중한 걸 본 것 같았다."라고 말한 대사는 모든 이의 마음에 돌고 돌아 끝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오고 만다.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는 애도를 위한 방식으로 '함께'하는 애도를 선택했다.
사야카는 후세와 함께 루가 떠나고 남은 빈자리를 그대로 '공석'으로 둘 줄 아는 방법을 터득한다. 둘은 슬픔과 두려움은 나누고 따뜻한 온기로 마음을 채우며, 알 수 없는 곳으로 영영 떠밀려가지 않도록 서로를 붙잡는다. 홀로 남겨진다는 불안과 다가올 외로움에 맞서 서로의 손을 맞잡고 떠나는 이의 마지막을 지켜보는 일, 그리하여 남겨진 자에게 주어진 삶을 씩씩하고 담담히 살아가는 일.. 사야카는 사라지는 것이 결코 떠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면서, 다시 미소를 되찾는다. 아이는 기억하기 시작하면서, 영원의 의미를 깨닫는다. 루는 언제나 자신의 곁에 있다는 사실, 영원을 말이다.
애도는 반드시 애도로 작별해야 한다. 강제가 아니라 스스로 어두웠던 방문을 열고 나와야 한다. 그 방이 자신의 마음속에 늘 존재한다는 걸 깨닫고 언제든 들어가 울고 웃을 수 있음을 굳게 믿어야 한다. 후세가 말한 역은 누구나 찾을 수 있고,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영화는 그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사야카에게 직접 끊어진 기찻길을 발견하게 했다. 그리고 모르는 척 사야카와 루의 비밀 장소를 우리에게 노출했다. 나만의 비밀 장소를 선정하는 건 애도를 향한 첫 번째 걸음이 분명하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 사야카는 전철이 향하는 곳이 어딘지 궁금해하지 않을 것이다.
작별에 '고맙다'는 말 한마디가 덧붙으면, 아름다운 작별이 된다.
고맙게도 후세도, 할아버지도, 사야카도 모두 아름다운 작별을 했다.

우린 기억하는 일을 지겨워하지 않기에 늘 자신이 정한 중심을 잃지 않는다.
영화가 시작한 뒤 내레이션으로 들려오던 사야카의 목소리가 한순간에 어른의 목소리로 변한 걸 눈치챈다면, 이 말에 공감할 것이다. 사실 이 영화는 아이였던 사야카가 어른이 되어 '나의 중심, 루'를 추억하는 이야기였다.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는 과거로 내일을 말하는 법을 잘 아는, 능숙한 작품이다.
개인적으론 듣는 것보다 보는 것에, 귀를 쫑긋거리기보다 눈을 더 크게 뜨고 사야카를 바라보길 추천한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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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갑자기 친한 척 하지 맙시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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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그런 부친들에게.
자식과 친해지고 싶나요? 물론 아이들에게는 엄마가 필요하니까 아이들에게 손 많이 가던 때는 친구도 만나고 술도 마시고 낚시도 하고 여행도 가고, 직장도 쭉 다니며(혹은 때려치우기도 하며) 커리어를 쌓고, 도전도 해보고 실패도 해보며, 내가 번 돈을 놀고 먹는 부인과 자식에게 쓰는 게 때로는 좀 아깝기도 했지만.
자식이 아버지를 존경하거나 다정하게 대하지 않아서 기분이 나쁜가요? 옛날이고 지금이고 돈을 벌어다 주면 된 거 아니냐고 화를 내기는 했지만. 다른 집 자식들은 주말마다 찾아오고 전화도 자주하고 용돈도 주고 여행도 보내주는데, 왜 아버지에게는 늘 데면데면할까요.
이제 자신이 가정 내에서 쓸모 없는 것 같나요? 정답입니다. 아이들의 발달과정에서 애착형성이 아주 중요하던 시기에나 당신이 필요했지, 말 좀 통하고, 이제 손도 안 가는 자식들에게 당신과 지나가는 아저씨의 차이점은 외형이 닮았다는 것뿐이랍니다.
왜 여러 부친들이 맥락도 없이 갑자기 친한 척을 할까요? 이제와 가족애 같은 말로 친한 척을 하면 당하는 입장에서는 얼마나 난감할까요. ATM이 된 아버지, 외로운 아버지, 실컷 키워놓았더니 제 엄마만 아는 자식들, 그런 이야기는 너무 흔해서, 영화든 소설이든 만화든 어떤 작품에서도 보고 싶지도 않답니다. <가시고기>에서 끝냈어야 하는 아버지.
아아 진절머리나는 아버지의 외로움. 한 번도 친한 적 없었는데 왜 뜬금없이 자식과 당신이 친한 사이라고 상정하는 걸까요. 친하지도 않은데 왜 갑자기 당신의 외로운 영혼, 혹은 아픈 몸을 가족들이 구원해야 할까요.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하나도 안 친했던 아빠랑 친해지고 싶은 사람?
구원, 영화는 '구원'을 말한다. 나는 찰리를 신경쓰지 않겠다. 세상이 찰리를 연민할 것이다. 300kg에 육박하는 초고도비만이라 문 밖으로 한 발자국도 걸어나오지 못하는 몸뚱이를 가진 남자, 가족도 없이 혼자 사는 남자, 시간강사 일을 하며 자식을 위해 돈을 저축하고 있지만 자식으로부터 외면받는 아버지이니까.
대신, 오직 찰리를 구원하고자 했던 세 명의 여성만을 신경쓰겠다.
리즈
간호사인 리즈는 찰리의 거의 유일한 친구다. 병원에 가지 않겠다고 우기는 찰리를 물심양면으로 돕는다. 지난 겨울에는 차가 고장나서 춥고 먼 길을 걸어 찰리에게 와 줄 정도로 지극정성이다.
찰리는 리즈에게 미안해,라고 계속 말하지만 말뿐이다. 리즈는 찰리가 울혈성심부전을 앓고 있고, 머지 않아 죽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도 찰리의 끼니를 챙기는 사람은 리즈뿐이다.
딸 엘리를 만나는 것도 만류한다. 현재 찰리의 상태에 악영향을 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찰리의 집에 새생명교회 전도사라는 놈(토마스)이 찾아오는데, 리즈는 토마스를 쫓아낸다. 토마스는 고장난 라디오마냥 똑같은 소리만 반복한다. '주님이 저를 보내신 이유가 있다' '이 육신을 버리고 빛으로 다시 태어나' 같은. 토마스가 다니는 새생명교회에서 '종말', '144,000명이 구원받고' 같은 말을 하는 걸로 보아, 미국의 신천지교회인가 보다(신천지에서도 요한계시록의 최후의 심판, 종말, 144,000명 구원 등을 말한다. 대충 신천지라 보면 되겠다).
토마스는 자꾸 찰리 주변을 찝적거린다. 마치 신천지처럼... 그러다 리즈에게 한 소리를 듣게 된다. 리즈는 새생명교회 소속의 가정에 입양되었다. 아마 가족 모두가 신천지교도마냥 종교에 빠져있었던 듯하다. 아버지는 리즈의 오빠 앨런을 같은 교회 여자와 결혼시키려 했으나 그는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가족을 버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살면 되는데 앨런은 결국 가족과 종교를 등졌다는 고통으로 거식증을 앓다 강물에 투신하여 죽는다. 이런 얘기까지 해도 토마스는 고장난 라디오처럼 신이 자신을 보낸 이유가 있다느니, 빛으로 만든 육신을 받고, 어쩌고 저쩌고를 반복한다.
리즈가 찰리를 돌보는 행위는 죽은 앨런에 대한 애도다. 앨런에게 음식을 먹이기 위해 나름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구하지 못했기에, 찰리만큼은 구하고 싶다. 그렇기에 찰리에게 줄 치킨과 샌드위치와 도넛과... 먹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사다 준다. 리즈는 머지않아 또 다시 실패하게 될 것이다. 또 다시 오빠의 죽음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리즈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찰리를 구하기 위하여.
엘리
찰리의 딸, 질풍노도의 시기를 통과하는 중인 16세. 세상 모든 것을 싫어하며 주변 사람들을 괴롭히는 불량학생.
찰리가 떠날 때 엘리는 고작 8살이었다. 아버지는 떠났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기 때문이다. 제자였던 남자를 사랑하게 된 아버지는 가족을 버렸다. 매달 양육비를 부쳐주었으나 엘리는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다 쓰레기다.
그런 엘리는 학교에서 정학을 먹고, 뜬금없이 아버지를 찾아간다. 개연성은 없지만 일단 넘어가도록 하자. 엘리가 학교를 무사히 졸업하기 위해서는 에세이를 잘 써서 내야 한다.
찰리는 엘리와 가까워지고 싶어 딜을 한다. 에세이를 대신 써 주는 걸로, 그리고 그동안 모은 12만 달러(현재 환율 1,300원으로 계산했을 때 약 1억 5천만 원)도 엄마 몰래 엘리에게 주겠다고 한다. 정말 달콤한 제안이다. 엘리의 입장에서는 어떤 아저씨가 갑자기 나타나 숙제도 해주고 돈도 준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물론... 아버지라는 존재를 평생 그리워했고, 또 앞으로도 그리워 할 테지만.
죽음을 앞두고 엘리와 가까워지고 싶다는 생각은 폭력적이다. 엘리에게 아버지가 필요한 시기에는 사랑에 빠져 외면하다가 이제서야 자식과 가까워져야 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게다가 죽음을 앞두고 있기까지 한데.
이런 점에서 넷플릭스 드라마 <그레이스 앤 프랭키>의 두 남자가 더 신사적이라고 해야 할까. 최소한 자식은 다 키워놓고 커밍아웃을 했으니 말이다.
찰리는 엘리에게 끝없이 넌 완벽하고, 멋지고, 똑똑하다고 세뇌를 시킨다. 과연 엘리를 위한 일인지는 모르겠다. 엘리의 취향, 엘리의 교우관계, 엘리의 관심사, 엘리의 장래희망, 엘리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지 않는가. 자기가 한 선택이 다 틀리지는 않았다는 믿음을 얻기 위해, 오직 자기 자신만을 구원하기 위한 발화에 불과하다.
엘리는 집에 자꾸 찾아오는 토마스의 뒷조사를 하여 그의 정체를 밝혀낸다. 구원 타령 하는 토마스도 사실은 교회 활동비 횡령으로 도망다니는 신세에 불과했다(니 팔자나 구원해라).
토마스에게 마리화나를 권하고 토마스의 사진을 찍고 음성을 녹음한 결과는 결국 토마스 가족과 교회가 토마스를 받아들이게 하는 결과가 되었다. 그래서 찰리는 엘리가 나빠 보이지만 다른 사람을 도와주려 하는 좋은 사람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자기자신도 엘리에게 고해성사를 한다. 내가 그렇게 하면 안 됐는데(이거 <애프터 썬>의 아버지도 했던 대사다) 미안하다.
어쨌거나 찰리는 엘리에게 사과를 했으니 마음은 좀 편해졌겠다.
메리
이 이야기의 가장 큰 피해자 메리의 비중이 적다는 것이 안타깝다. 사실 세 여자 모두 비중이라 할 게 없다. 찰리 때문에 인생이 꼬인 세 여자라는 것뿐. 메리는 어린 자식을 두고 남제자와 바람이 난 남편의 소문을 혼자 감당하며 어린 딸을 키웠다.
한때 사랑했던 사람은 변심했고(1콤보) 심지어 그 대상은 남자고(2콤보) 떠났으면 잘 살기라도 하지 초고도비만이 되어 죽음을 앞두고 딸 앞에 나타났고(3콤보) 심지어 모아둔 돈은 자신에게 한 푼도 안 주고 딸만 준다고(4콤보) 하니, 도대체 몇 대를 얻어맞은 것인가.
그래도 메리는 찰리를 용서한다. 찰리의 심장에서 나는 소리에 마음 아파 한다. 나라면 배신자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을까. 난 못한다. 남편은 동성 제자와 바람났고, 자식은 엇나가고, 기댈 데는 술뿐이다.
찰리에게는 엘리의 좋은 점만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메리는 엄마로서도 실패한 것이 될 테니까. 그러니 찰리는 엘리에게 "넌 완벽하고, 똑똑하고, 멋진 아이"라는 말밖에 할 게 없다.
찰리가 사랑을 선택한 것에 후회가 없을지는 몰라도, 대가는 너무도 컸다. 모두를 희생하게 하는 사랑도 사랑인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애인에 대한 애도도 틀려먹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지 못한 자신을 혐오하며 끝없이 폭식이라는 자해를 하는 것은 실패한 애도다.
찰리는 심장에 통증이 있을 때나 곧 죽겠다 싶을 때 누군가가 허먼 멜빌의 <모비 딕>을 읽고 쓴 에세이를 읽으며 안정을 취한다. 신경안정제 같은 이 에세이는 자기가 읽은 에세이 중 최고라고 한다. 그리고 엘리가 집에서 낙서하듯 쓴 몇 문장도 운율이 맞다는 이유로 전율한다. 자기 손으로 키우지도 않은 자식이지만 재능이 있으니 감동적인가. 웃기는 소리다.
모든 이상한 지점들에도 불구하고 찰리에게 마음이 가는 것은 사랑에 빠지면 누구나 어리석은 선택을 하게 된다는 걸,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애도고 뭐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때로는 목숨 걸고 한 선택이 다 틀려먹었고 돌이킬 수도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때 가장 원망스러운 건 내 뜨거운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 세상도 아니고 먼저 떠난 애인도 아니고 자기 자신이다. 찰리는 스스로가 혐오스러워 가장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자신을 괴롭혀왔다는 것을, 찰리를 보고 있는 세 여자뿐 아니라 영화 밖의 사람들도 다 알고 있다. 삼키지 못하는 애인에게 음식을 먹이지 못했던 통탄을 자신의 입에 욱여넣음으로 애도를 선택한 마음까지도.
<더 웨일>은 자신의 모든 선택이 틀렸다는 걸 받아들이기 어려운 한 남자를 구원하기로 한 영화다. 우리는 누구나 조금씩 어리석고 이름값 못하는 호모 사피엔스이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찰리와 다를 바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를 구원해야 한다.
구원은 셀프. 남을 구원하겠다는 주제 넘는 생각과 타인으로부터 구원받겠다는 나약한 마음가짐을 멀리하자. 그저 방을 청소하고 건강하게 식사하자. 운동을 하고 잠을 푹 자자. 인정하기 너무 싫지만 내가 했던 정신나간 선택들이 그때는 최선이었다는 것을 받아들이자. 그리고 리즈와 엘리와 메리처럼 모든 죽어가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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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이라3> 이후 그렇다할 인상을 남기지 않았던 브렌든 프레이저의 연기는 정말 아름다웠다. 그리고 의료보험은 매우 중요하다. 의료민영화는 절대 안 된다.
더 웨일(The Whale)
감독: 대런 아로노프스키
주연: 브렌든 프레이저, 세이디 싱크, 홍 차우
상영시간: 117분
개봉일: 2023. 03. 01.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시사회에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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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토록 끔찍한 연애
이토록 끔찍한 연애
넷플릭스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는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 정서가 불안정한 여자의 연애를 소재로 한 로맨틱 코메디다. 하지만 다른 많은 할리퀸 로맨스처럼 상처가 많고 정서불안인 여주인공이 진정한 사랑을 만나 행복해 지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리고 주인공이자 ‘미친 전여친’ 장본인인 레베카는 다른 로맨틱 코메디의 여주인공들처럼 사랑스럽거나 공감이 가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이 드라마를 보다가 '레베카가 내 친구면?'이란 질문을 받는다면 다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것이다.
이 시리즈의 핵심은 레베카가 정말 문자 그대로 미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고등학교 시절 첫 사랑을 우연히 만나 그것이 운명이라 믿고 뉴욕에서 캘리포니아로 이주해 버리고, 자신이 짝사랑하는 남자의 여자친구와 친해지기 위해 말도 안 되는 갖은 노력을 다 한다. 자신을 좋아하는 남자들과 연인 관계로 발전한 뒤에도 평화롭고 일상적인 연애는 불가능 하다. 자기파괴적이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이미 혼자 머릿속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백년해로까지 한 상태다. 그냥 평범하게 '정상적'으로 행동할 순 없는거냐는 의문이 들면서, 이런 생각이 함께 떠오른다. '정상이 뭔데?'
인간에게는 어떤 방식으로든 상처가 있기 때문에,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사람들도 모두 사실은 어느 정도 미쳐 있다. 거기다 좋든 싫든 서로 섞여 살면서 매일 남의 못 볼꼴을 봐야 인간 사회에 나오면 다들 증세가 더 심해 진다. 매일 남들의 미친 짓을 코앞에서 강제로 구경해야 하고, 나도 남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야 한다. 은연 중 매일이 서로 상처를 주고 받는 일상의 연속인 것이다. 그 중에서도 연애 관계는, 이미 각자의 상처와 트라우마를 가지고 성장한 사람들이 1:1로 만나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는 관계다. 자연히 더럽고 치사한 꼴을 다른 관계보다 몇 배로 더 많이 볼 수 밖에 없다. 더 인간적이고 솔직해야 유지할 수 있는 관계 안에서 사람들은 모두 좀 더 미친 사람이 된다. 우리를 가장 괴롭히는 인간 관계는 가장 가까운 관계들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전부 미쳤다고 해서 우리가 맺는 관계가 다 가짜인 건 아니란 점이다. 사람들이 서로 어떻게 상처를 주고 받는지, 그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고 대처해야 하는지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각자의 상처는 이미 받은 것이고 스스로가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이다. 우리는 이미 그런 인간들이 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더 이상의 생채기를 멈추겠다고 모든 문을 닫고 그 어떤 인간과도 교류하지 않을 순 없다. 그것은 또다른 방식의 미친 사람이 되는 지름길일 뿐이다.
인간은 애석하게도 사회적 동물이라 어떤 형식으로든 타인과 상호 작용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결국 우리는 스스로 관계에 의미를 부여하고 누군가와 어떻게 관계를 맺을지 각자 결정해야만 한다. 아무리 더럽고 치사해도 인간에게 관계란 생존의 문제니까.
이 드라마를 시청하다가 레베카에게 진절머리가 나게 되는 이유는, 그녀가 사람들이 감추고 싶어하는 모습을 스크린 속에서 여과없이 재연하는 캐릭터기 때문이다. 평소에 내가 정상적인 척, 감정 기복이 없는 척, 이성적인 것처럼 간신히 연기하며 살아 가다가 내가 애써 감춰 놓은 그 모습을 누군가 격렬하게 표출하는 걸 지켜보는 건 정말 괴로운 일이다. 하지만 레베카를 욕하고 그녀를 향해 탄식하면서도 계속 그녀를 지켜 보게 되는 건 그녀의 대처와 반응이 궁금해서다. 우리도 그렇게 애정을 구걸하고 동시에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자기중심적 태도 때문에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할 때가 있다(생각보다 자주, 그리고 자각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자주). 레베카도 딱히 정답을 알고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사례 연구는 의미가 있는 것이니까.
* 본 콘텐츠는 브런치 Good night and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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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사된 민주주의의 촌극과 물음
7★/10★
*영화의 결말을 포함한 글입니다.
2006년. 부탄에 느닷없이 민주주의가 하사되었다. ‘쟁취’가 아닌 ‘하사’다. 부탄 국왕이 백성들을 위한 ‘선물’로 민주주의 도입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모의 선거가 진행된다. 하지만 실무를 맡은 선거 담당관은 어찌할 바를 모른다. 주민들에게 민주주의에 관한 체화된 개념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자유와 평등을 강조하는 파란 당, 산업 발전을 강조하는 빨간 당, 보존을 강조하는 노란 당을 두고 모의 선거를 진행하는데, 노란 당이 95퍼센트를 득표한다. 노란색이 왕실의 색이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고. 그를 얻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은 그 대상과 함께할 미래를 구체적으로 상상한다. 그래서 상상한 미래가 현실로 도래했을 때 기꺼이 만끽한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거라도 내 생활과 연결되어 있다고 상상해본 적이 없는 거라면, 그 가치는 빛을 발하기 어렵다. 부탄에서의 민주주의처럼 말이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선거는 마을에 갈등을 일으킨다. 평화롭게 지내던 한 가족이 모의 선거 때 어떤 정당을 지지할 것인지를 두고 대립한다. 소수파를 지지하는 아버지와 그 자녀는 마을과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한다. 갈등을 조정하고 타협하는 ‘최고의’ 정치 제도인 민주주의가 되레 없던 갈등을 초래한 것이다. 적어도 부탄의 시골 마을에서는, 민주주의가 평화와 행복을 파괴했다.
시골 마을의 평화로운 풍광과 정취를 배경으로 한 잔잔한 분위기와는 달리, 영화의 물음은 날카롭다. 마을에 선거를 가르치러 온 담당관들은 민주주의가 ‘좋은 것’이라고 확신한다. 민주주의가 ‘현대화’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확신한다. 선진국 대다수가 민주주의를 취한다면, 민주주의는 좋은 것이라고. 서구 중심적 발전주의 사고의 발로다. 단 하나의 선형적 기준을 만들어놓고 모든 역사를 욱여넣어 특수성을 소거하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영화의 첫 번째 질문, 즉 ‘보편적이고 현대적인 민주주의는 절대선인가’라는 물음이다.
또 다른 이야기 축이 있다. 국왕이 민주주의 도입을 발표하자, 한 노승이 제자에게 총을 구해오라 시킨다. 제자는 총기 수집가 미국인과의 경쟁 끝에 마을 주민이 가진 총을 구해 노승에게 간다. 노승은 총을 들고 부처님의 깨달음을 기리며 만든 탑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 옆에 파놓은 구덩이에 총을 던진다. 그 위에 탑을 쌓자고 제안한다. 민주주의가 거부할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라면, 이미 하사되어 되돌릴 수 없는 것이라면, 증오‧고통‧갈등의 상징인 총을 땅에 묻고 그 위에 탑을 세워 새로운 깨달음의 시대를 열어가자는 제안이다.
어떻게든 총을 되찾기 위해 주변을 얼쩡거리며 골몰하던 미국인 총기 수집가는 어안이 벙벙하다. 얼결에 자유세계와 민주주의의 ‘리더’인 미국인이라며 칭송받는 그는 어떻게든 그 총을 갖기 위해 많은 돈을 썼다. 그는 돈과 물질만 있으면 어떤 문제든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수집가는 미국의 민주주의가 자본주의에 잠식되어 망가졌다는 현실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돈에 먹힌 민주주의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그가 끝내 총기를 갖는 데 실패한 데서 알 수 있듯이, 목적한 바를 이루는 효율적인 방법도 아니다. 대조적으로, 노승은 쟁취하지 않은 하사된 민주주의일지라도 어떻게 받아들이고 만들어갈지에 따라 위대해질 수도 있다는 역설적 가능성을 상징한다.
돈에 굴복한 민주주의와 하사된 민주주의의 가능성 사이의 이 대조는 민주주의가 마주하는 날로 혼란스러워지는 작금의 현실에 소박하고 정다운 질문을 던진다. 서구 중심적, 발전주의적 시간성 비판에 민주주의란 무엇이며 어떠해야 하는지에 관한 질문을 버무려 갈등을 조정하고 화합하는 것으로서의 민주주의를 다시금 상상케 하는 것이다. 물론 이 질문만으로 ‘자유세계’의 병든 민주주의를 회복할 수 있다는 기대는 나이브한 태도일 테다. 하지만 비현실적인 질문이라도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절망적 현실을 비추는 환상 속 거울로써의 역할 정도는 할 수 있는 질문이지는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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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WFF 데일리] 다르고 같은 두 여성(女性)
감독: 소데 유키코
출연: 카도와키 무기, 미즈하라 키코, 코라 켄고, 이시바시 시즈카, 야마시타 리오
시놉시스: 도쿄 상류층에서 자라난 하나코, 그리고 지방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도쿄에서 간신히 생계를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는 미키. 지극히 다른 출신 배경을 가진 20대 후반의 두 여자는 한 남자를 계기로 만나게 되고, 서로 다른, 그러나 같은 세계를 발견한다.
*이 글은 영화의 주요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내부인과 외부인
도쿄에서도 중심가에 사는 상류층 하나코는 가족 모임에 도착해 약혼자와 헤어졌다고 통보한다. 친구 무리 중에서도 이쓰코와 하나코 자신을 제외하고는 모두 결혼했을 만큼 혼기가 찬 나이라 하나코의 가족과 지인들은 모두가 그의 맞선을 추진하는데 앞장선다. 이상한 상대들만 나타나 잘 안 풀리던 중에 하나코는 형부 소개로 어느 자문 변호사를 만나고 그와 결혼하게 된다. 남편이 될 코이치로는 해운업에 정계 진출까지 한, 하나코의 집안보다 더 높은 계급의 사람이다. 자상한 성격으로 보이는 코이치로를 믿으며 결혼의 순서를 차차 밟아가던 중에 하나코는 미키의 존재를 알게 된다.
영화는 미키의 등장과 함께 영화의 초점을 하나코의 결혼이 아닌 두 사람의 '다름'으로 옮겨간다. 결혼할 남편의 여자인 미키를 하나코는 질투나 분노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미키에게 코이치로를 짧게 만난 게 전부인 자신보다 그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거라 여겨 만나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미키 또한 이 만남에 당황하기는커녕 자신은 그와 소위들 말하는 그런 사이도 아니었고 앞으로는 더 만나지 않을 테니 안심하라 말한다. 이 특이한 만남 이후 하나코와 미키는 다시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가지만 하나코에게는 작은 변화를 가져온다.
다르고 같은 두 여성(女性)
이 영화가 두 사람의 다름에 주목하는 방식은 그것을 너무 드러내 놓고 대조하는 것처럼도 느껴지는데 4부 구성 중 1부가 '내부', 2부가 '외부'로 이름 지어진 것부터 두 사람의 다름이 부각된다. 하나코가 도쿄 중심가(쇼토)에 사는 상류층이라면, 미키는 지방의 작은 마을에서 상경해 근근이 먹고사는 인물이다. 두 사람은 자라온 환경, 생활태도부터 시작해 모든 것이 다른 존재다. 미키의 입장에서 이를 실감하는 장면이 많은데 대학에서 만난 상류층 친구가 4200엔 애프터눈 티 세트를 망설임 없이 주문하는 걸 보는 장면이나 자신이 포크를 떨어뜨려 당황하는 사이 바로 직원을 손짓으로 부르는 하나코를 보는 장면이 그렇다.
이 영화는 이 '다름'을 단순히 대조하는 데 치중하는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이런 다름 속에서도 같아질 수밖에 없는 여자들, 특히나 일본에 사는 여성이 부딪힐 수밖에 없는 어떠한 환경에 주목한다. 3부 '결혼'에서 하나코가 결혼을 하면서 하나코는 이전과는 다른 삶에 버거워지기 시작한다. 시어머니는 자식은 언제 낳을 거냐며 부부를 압박하고, 일을 다시 시작하고 싶어 형부에게 일자리를 묻지만 형부는 남편과 상의해보라 답한다. 무엇보다 남편이 정계 진출을 시작하면서 좋았던 두 사람 사이는 소원해지기 시작한다.
하나코는 우연히 자전거를 타고 가는 미키를 보게 되고 이들은 재회한다. 미키의 집에 가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는 길지 않지만 두 사람 간의 유대감을 형성하기에 충분하다. 자신과 별다를 것 없는 고민을 가진 하나코를 보며 미키는 상류층도 자신 고향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고민을 한다는 게 의외라 한다. 부모의 직업(혹은 환경)을 답습하는 처지에 대한 동질감이 형성된다. 미키는 하나코에게 조언한다. "사소한 감정이나 일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된다"라고.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라며 그것만 해도 성공한 거라 말하는 미키의 모습은 하나코가 자신의 현재를 돌아보는 계기를 만든다.
환상 속의 도쿄
동질감을 느끼고 연대하는 관계는 하나코와 미키 두 사람 간에만 있지 않다. 하나코 친구들의 모임에서 한 친구가 "남자들은 살림 돌보며 일할 정도만 하길 원하잖아"라고 말하자 모두가 공감하며 웃는 장면은 하나코의 상황이 개인의 경험에서 그치지 않고 여성이 겪는 상황으로 확장시켜 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와 더불어 이 영화가 섬세하게 느껴진 건 여성 간의 연대와 더불어 가업을 잇는 것을 목표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코이치로의 상황과의 연대로도 확대되는 것이었는데, 내용상 그와의 로맨스를 넣을 법함에도 그런 부분을 거의 배제하다시피 한 것은 이 이유 때문이지 않을까 짐작하게 하는 부분이다.
영화 후반 미키와 리에의 대화에서 리에는 자신들이 사는 도시 도쿄를 "사람들의 동경이 만들어낸 환상 속의 도쿄"라 칭한다. 도쿄는 도쿄에 사는 사람들을 양분 삼아 삼킨다면서. 미키와 리에는 대학 시절 이후 오랜만에 만났음에도 다시 전과 같이 가까워진다. 도쿄로 상경한 같은 지방 출신이어서, 미키가 피치 못할 집안 사정으로 대학을 졸업하지 못해서일 수도 있다. 도쿄는 바깥에서 들어오기도, 그 안에 있음을 유지하기도 힘든 것이기 때문에, 함께했던 미키가 리에는 반가웠을 것이다. 한편에는 하나코가 이쓰코와 함께 있다. 방황의 시기를 거친 그는 집안 간 사정으로 소송 없이 조용히 치른 이혼 후 이쓰코의 매니저가 되어 있다. 도쿄 안의 내부인과 외부인은 서로 다른 위치에서 저마다 분리되어 있지만 자기의 길을 찾아 나선다. 영화의 엔딩에서, 3층의 코이치로와 2층의 하나코가 서로를 바라보며 웃듯 영화는 사람들의 동경 속에서 커져만 가는 환상 속의 도쿄를 살아내는 도쿄인들을 위한 잔잔한 위로를 담아낸다.
Schedule2022-08-27 13:00-15:05 <그 아이는 귀족>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3관2022-08-29 16:30-18:35 <그 아이는 귀족>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4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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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로커가 어느가족보다 나은가
간만에 엄마를 끌고, 영화를 보러 갔다. 주로 혼자 보러 가는 편이지만 유명한 영화제에서 상을 탔다는 이유로 이 영화를 보러가자고 끌고갈 명분이 생겼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이 글은 가족을 끌고 봐야할 만큼 이 영화가 상업적인 영화인지에 대해 고찰하며, 영화제에서 상을 타는 영화가 상업적인지에 대해서 다시 제고해보고자 쓰는 글이다. 이 영화의 네이버 평점이 낮던데, 나는 이 영화의 평점이 낮은 이유에 대해 나름대로의 이유를 찾다 보니, 쓰게 된 글이랄까.
1.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정체성
이 영화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일관적인 정체성에 대해서는 알 수 있는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전작인 "어느 가족"에서도 가족이 된 이유가 각자 달랐지만 핏줄보다 더 가까운 가족이 되었다는 점에서는 이 영화 브로커와 정서적 맥을 같이 한다. 가족보다 못한 사이가 있는 만큼 가족만큼 가까운 남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전작인 어느 가족보다는 좀 못한 것 같다.
나는 어느 가족을 볼 때는 이 사람들이 진정 가족이었을지 의심하고, 또 의심하다가 마지막 아이의 나지막한 외침으로 이들은 서로를 가족으로 인정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나지막한 음성은 그 어떤 대사보다도 그들의 끈끈함을 강조하는 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 영화는 대놓고 남으로 뭉쳐 가족이 되어가는 사람들의 관계를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그들은 아이를 팔아넘기기 위한 경제적 이유로 뭉쳐다니지만 사실은 그들은 그 누구보다도 서로를 의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대사 하나하나, 눈빛 하나하나로 알 수 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직접적 표현이 전작의 비해 진부하다고 느끼게 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게 된다.
두 작품 모두 외로운 개인들의 집단화를 통해 새로운 형태의 가족이 생길 수도 있음을 묘사하지만 가족애에 대한 표현의 차이가 이렇게 영화의 매력을 반감시킬 수도, 배가 시킬 수도 있다는 점을 확인했다는 점에서 두 영화들은 비교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두 영화는 비슷한 듯 하면서 다르기 때문이다.
2. 가족이라는 단어가 가진 복잡성
그리고 어느 가족에서는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형태의 가족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아이에게 도둑질을 가르쳐서라도 돈을 모아야 한다. 그리고 브로커 속 소영이 자신이 낳은 아이를 팔아넘기려는 이유는 그녀가 살인자이기에 멀쩡한 가족을 이루어줄 수 없기 때문에 어둠의 경로를 통해서라도 멀쩡한 형태의 가족을 만들어주려고 한다. 이 두 영화 속에서 이야기하는 테마는 비슷하다.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가족의 형태에대한 고찰이 바로 그것이다.
소영이 국가 기관의 도움을 받지 않고, 브로커들과 함께 움직이며, 자신이 낳은 아이를 팔아넘기려고 하는 상대 가족들은 국가의 법이 합당한 가족이라고 인정하지 않거나 아이를 합법적으로 입양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법의 테두리는 생각보다 많이 보수적이라서 가족이라는 단어가 성립되려면 혈육이라는 개념이 개입하여야 한다. 그리고 합당한 형태의 결혼이어야 하고, 아이를 입양하는 데에 있어 외적인 자격 조건이 완벽하여야 혈육이 아닌 다른 아이를 입양해 키울 수 있음을 '인증'할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형태의 법적인 해석은 가끔 "정인이 사건"과 같은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아이를 입양하기에 외적 조건이 완벽하지만 자신이 입양했다는 사실을 트로피 삼아 아이를 인질 삼고 있는 가정, 아이를 입양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아이를 입양하기에는 외적인 법적 조건이 충족되지 않아 뒷돈 주고, 브로커를 이용하는 사람들, 이 둘 중 어떤 사람들이 더 나쁜 걸까. 가족이라는 단어는 무엇이기에 이리도 복잡하게 해석되어야 할까. 영화를 보면서 계속 들었던 생각이다. 가족이라는 단어가 뭐가 그렇게 특별하기에 다들 하나의 가족을 만들고 싶어 안달들이 나 있는 걸까 하는 생각 말이다. 가족이라는 단어에는 참 많은 명암이 있는 것 같다.
3. 이 영화에 평점 테러하는 사람들에게
물론, 이 영화가 감독의 이전 영화보다 조금 진부한 부분이 있다고는 생각한다. 하지만 이 영화를 영화관에서 보면서 느꼈던 특이점이 있었다. 영화관에서 예상 외로 어르신들이 정말 많이 계셨다는 점이다. 내가 간 영화관이 서울은 아니었지만 시골의 한 작은 영화관이었기에 이런 점이 두드러졌다. 이 영화는 유명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 수상자를 배출한 영화이다. 이 영화를 선택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영화의 캐스팅과 남우주연상 수상 여부에 따라 선택한 것이 아니었을까 의심하게 하는 지점이었다.
이 영화는 단연코 상업영화라고 보기는 힘들다. 상업 영화라고 하기엔 영화의 테마가 마이너하고, 어둡다. 상업 영화들은 관객이 공감하도록 적극적으로 설득하지만 이런 상업적이지 않은 영화들은 그렇지 않다. 공감을 설득하지 않고, 공감을 유발하는 상황을 그저 보여줄 뿐이다. 그래서 이 영화가 왜 상까지 받았느냐, 개연성이 너무 없어서 평점을 1점만 주는 사람들에게 혹시 이 영화의 외적인 수상 성과에 따라 영화를 선택하진 않았는지 한 번 정도는 되돌아봐야 할 것 같다.
하지만 나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때문에 본 것인데도 내용의 진부함, 긴장감이 있는 듯 없는 듯한 전개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는 동감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보육원에서 도망쳐 뒤늦게 합류한 발칙한 남아 캐릭터가 너무 귀여웠어서 지루한 스토리에 한줄기 빛이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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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오브 인터레스트: 사운드가 쌓아 올린 공포의 몽타주
존 오브 인터레스트: 사운드가 쌓아 올린 공포의 몽타주
(출처: 네이버 영화)
조너선 글레이저 감독의 존 오브 인터레스트 (The Zone of Interest, 2024)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배경으로 하지만, 전형적인 홀로코스트 영화가 아니다.
관객이 목격하는 것은 수용소 내부의 참상이 아니라, 담장 너머에서 벌어지는
일에 무관심한 한 가족의 일상이다. 그러나 영화는 시각적인 정보만으로
이 가해자의 삶을 조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운드가 화면 위로 쌓이며
'수직 몽타주'를 통해 전율을 만들어낸다.
사운드의 대위법, 두 개의 세계를 가르는 수직 몽타주
에이젠슈테인이 제시한 수직 몽타주 (Vertical Montage)는 영상과 소리가
단순한 동기화가 아니라, 각자의 리듬을 가지면서 충돌하거나 병치되는 방식이다.
그는 사운드를 단순한 배경음이 아니라 또 하나의 독립적인 층위로 작동시키며
의미를 확장하는 방식으로 활용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 글레이저는 수직 몽타주의 원리를 적용한다고 볼 수 있다.
화면에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장 루돌프 회스의 가족이 등장한다. 그들은 정원을
가꾸고, 아이들은 물놀이를 하며, 아내는 수영을 즐긴다. 그러나 사운드는
이 평온한 풍경을 허락하지 않는다.
① 가시화되지 않는 공포: 들려오는 참상의 소리
관객이 듣는 것은 울타리 너머에서 들려오는 처형 소리, 기차의 기적 소리,
희미한 비명과 절규이다. 하지만 인물들은 이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수용소의 기계음과 끊임없이 타오르는 화염은 영화 내내 들리지만,
이 소리는 이들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이러한 사운드의 병치는 시각적으로는 평온한 장면을 유지하면서도,
관객이 감각적으로 경험하는 공포를 극대화하는 전략이다.
② 음향적 충돌: 대립하는 리듬과 감정
에이젠슈테인의 몽타주 이론 중 '대위법적 사운드 몽타주'는 영상과 사운드가
조화되지 않고 충돌할 때 감정을 배가한다고 본다. 글레이저의 연출은 이러한
원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잔디 위를 뛰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가벼운
대화 뒤로 불길과 비명이 어우러진다. 이러한 음향적 몽타주는, 우리가
시각적으로 보고 있는 장면과 청각적으로 경험하는 장면이 충돌하며 형성되는
불협화음 속에서,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더욱 강렬하게 만든다.
미니멀리즘적 이미지와 음향의 폭력성
이 영화에서 가장 특징적인 점은 '보여주지 않는' 방식으로 공포를 전달한다는
것이다. 카메라는 학살의 현장을 직접 담지 않는다. 그러나 소리는 존재를
부정할 수 없는 형태로 우리를 압도한다. 시각적으로는 단순한 인물의 움직임,
가정집의 평범한 풍경이 담기지만, 청각적으로는 아우슈비츠의 거대한 산업적
학살이 무겁게 다가온다. 즉,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시각적 충격이 아닌
음향적 공포를 통해 홀로코스트의 악몽을 환기한다.
정리하자면 조너선 글레이저의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사운드를 단순한
보조적 요소가 아니라, 의미를 창조하는 몽타주의 핵심 축으로 삼았다.
에이젠슈테인의 수직 몽타주 기법과 같이 '보이는 세계'와 '들리는 세계'의
간극을 통해 관객을 불안하게 만든다고 볼 수 있다.
이 영화는 전형적인 전쟁영화, 홀로코스트 영화처럼 강제 수용소의 참상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대신, 그 참상 속에서도 일상을 지속하는
가해자의 무관심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사운드를 통해
구축된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폭력을 내면화하는지,
그리고 우리가 듣고도 모른 척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 작품이다.
그리고 이 질문은 스크린이 아니라 관객의 청각 속에 각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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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의 속도 후기/일본의 오제 국립공원/봇카의 일상/ 개입하지 않아서 더 진솔한 영화/ 보기만 해도 힐링이 되는 다큐멘터리
영화직관하는남자 영직남의 "행복의 속도"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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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마크맨 후기 / 테이큰은 벌써 13년전 / 은퇴한 해병대의 멕시코 갱들 참교육
영화직관하는 남자 영직남의 “마크맨”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은 없습니다~#액션영화, #로드무비, #리암니슨, #마약카르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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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서유기 : 재세요왕> 티저 예고편
삼장법사에 의해 오행산 기슭에서 구출된 '손오공'은 과오를 뉘우치고 경전을 배우기 위해 서역으로 길을 떠난다.
긴 여정의 길, 배고픔을 주체하지 못한 '손오공'과 친구들은 만년의 한번씩 열린다는 인삼과 열매를 몰래 따먹게 되고 설상가상 신선수라 여기는 인삼과 나무를 파괴해 버리자 나무 아래 봉인되어 있던 요괴의 왕 '원체'가 깨어나고 만다. 세상은 혼란에 휩싸이고, 요괴들은 날뛰기 시작하는데..
'손오공' 전설에 맞서 세상을 구할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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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폭력의 그림자> 메인 예고편
황홀한 아일랜드 배경에 스며드는 액션
전직 복서이면서 자폐증을 앓는 아들에게 좋은 아빠가 되고자 한다.
그러나 청부 살인 일을 맡게 되면서 그의 삶은 위태롭게 흔들리기 시작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