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BBITGUMI2021-03-27 21:20:30
작은 개인의 투쟁기를 담다
<그리고 방행자>(2021)
삶을 살아가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싸워야 할 때가 있다. 부당하게 자신의 것을 빼았겼거나, 불이익을 받을 때 그리고 자신의 친한 지인이나 가족이 어떤 피해를 당할 때면 그것에 대항하여 투쟁을 해야 한다. 그것은 법적인 투쟁이 될 수도 있고, 사회적 시위 형태가 될 수도 있다. 그 투쟁의 경중은 있겠지만 누구나 어떤 기관이나 개인에게 불만을 토로하거나 논쟁을 하는 것도 개개인의 작은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자신의 권리나 자리를 지키려는 노력을 계속해나가는 데는 꽤 많은 에너지가 소모된다.
그 투쟁이 성공하든 성공하지 않든 삶은 어떤 방식으로든 계속되고 그 상황에 적응해서 살아가게 된다. 그 영향은 그대로 자녀에게도 전달되어 어떤 에너지를 선사한다. 그리고 그 자녀도 작은 투쟁을 해나가며 삶을 이어간다. 어쩌면 이런 작은 싸움들은 피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누구나 이렇게 아주 작은 투쟁들을 이어나간다. 무엇보다 모든 투쟁의 과정에는 자기 자신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길고 어려운 상황일지라도 자기 자신을 잃지 않는다면 어떤 기회가 오는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그리고 방행자>는 방행자라는 인물의 발자취를 따라간다. 그리고 그의 아들 손원경의 삶도 비춘다. 손원경은 장난감 수집광으로 장난감 박물관을 운영하며 지내왔던 인물이다. 그가 이런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자신의 어머니의 발자취를 알리는 이유는 뭘까. 아마도 어머니 방행자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은 투쟁들을 기록으로 남기고 그의 죽음에 대한 부당함을 같이 알리기 위함일 것이다.
그의 투쟁은 아주 개인적인 것에서 출발한다. 미국에서 유학 중이던 남편에게서 온 이혼 통보 서류를 받은 그는 곧 이혼 취소 소송을 진행한다. 그 당시에 전례가 없었던 법적 투쟁으로 방행자는 그 일에 자신의 노력을 다한다. 혼자 아이를 키우며 지냈던 그에게 그것은 어쩌면 그가 느낀 부당한 감정을 조금이나마 사라지게 하려는 노력이었다. 영어로 된 메모와 그가 그 당시 테이프에 녹음했던 통화 기록들에서 그가 얼마나 절박하게 그 일에 매달렸는지 알 수 있다.
그가 두 번째로 투쟁하게 된 것은 조금은 사회적인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그가 과거에 오랜 기간 살았던 대원군의 별장에 대한 것이다. 소유권을 주장하는 이가 나타나며 법적 투쟁에 나선다. 몇십 년의 법적 싸움 끝에 결국 집을 잃게 되는데 그 이후 그는 에너지를 잃은 듯 보이지만 그는 그 싸움의 에너지를 그림을 그리거나 피아노를 배우면서 소모해 나간다.
아들과 손자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그의 마지막 투쟁은 아들의 사업과 연관되어 있다. 경향신문 본사 건물에서 장난감 박물관을 하던 아들 손원경은 매장과 관련하여 신문사의 부당한 대우를 받고 매장을 철수하게 되는데 그 싸움을 그 당시 아팠던 아들을 대신하게 된 것이다. 여러 매장과 관련이 있었고 신문사와의 투쟁이었기에 어쩌면 가장 사회적인 투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일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신문사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던 그는 어느 순간 그 신문사 건물에서 목을 메어 자살한다.
영화 <그리고 방행자>는 그 일련의 과정에서 방행자라는 인물이 어떤 방식으로 싸움을 이겨냈고, 또 어떤 인물인지를 조금씩 보여준다. 해당 인물의 아들이 연출하고 있는 다큐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개인적인 사심이 들어가 있을 수도 있는 영화다. 영화는 최대한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객관적 일지는 사실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방행자라는 인물의 투쟁이다. 방행자의 투쟁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개인에게는 좀 크게 느껴지고, 사회에서는 그렇게 크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사실 목소리를 외부에 알릴 기회가 많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다소 객관성이 떨어져 보이고 영화적 완성도가 조금 부족해 보여도 이런 개인적인 노력과 삶에 대해 알아야 할 필요성은 있을 것이다. 영화 <그리고 방행자>는 그런 점에서는 의미 있는 다큐였던 것 같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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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러브 앤 몬스터스>
[2021년 4월 14일, 넷플릭스 공개]
돌연변이 괴물들이 지구를 덮치고 7년이 지났다.
살아남은 인류는 지하에 숨어 목숨을 부지해야만 했다.
그렇게 버텨온 조엘 도슨(딜런 오브라이언).
그가 무전을 통해 고등학교 시절 여자 친구 에이미와 다시 연결된다.
그리고 여전한 자신의 사랑을 확인한다.
그녀와의 거리 135킬로미터. 이 지하 벙커에 그를 붙잡을 거라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어떤 위험이 있더라도 에이미를 다시 만나고 싶다.
그렇게 조엘은 해안을 향해 떠난다.
사랑을 찾아, 희망을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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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플 TV+ <핀치> 공식 예고편
"아주 특별한 가족의 여정. 11월 5일, Apple TV+에서 '핀치' - Finch가 공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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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심과 관음의 경계에서
미스터리와 스릴러를 무척 좋아하는 저는 실제로 벌어진 사건·사고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사건의 개요, 증거, 검거 과정 등 공개된 자료를 샅샅이 읽어보기를 즐겨 하지요. 그런데 가끔 그런 제 모습이 섬찟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새로운 정보를 찾아내려고 인터넷 세상을 뒤지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 실제 사건들을 단순한 재미와 흥미로 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때가 그렇습니다. 그럴 때면 정보가 넘쳐나는 오늘날의 세상에서는 관심도 한순간에 관음으로 변할 수 있음에 몸서리치며, 서둘러 인터넷 창을 닫곤 합니다.
<레드 룸스>는 누구든 관심과 관음의 경계에 설 수 있는 디지털 세상에서, 둘 사이를 넘나들며 극악무도한 살인 용의자를 주시하는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살인, 납치, 스너프 필름처럼 자극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자극을 최대한 줄이는 섬세한 연출이 돋보이는 작품이죠.
※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은 <레드 룸스> 시사회를 통해 영화를 감상했습니다. <레드 룸스>는 2024년 10월 9일 국내 개봉작입니다.
레드 룸스
Red Rooms
Summary
10대 소녀 3명을 끔찍하게 살해하고 생중계한 혐의로 재판을 받는 ‘슈발리에’ 그리고 슈발리에의 재판을 매회 방청하는 모델 겸 해커 ‘켈리앤’. 심증만 있을 뿐, 물증 없는 재판이 길어지는 가운데 슈발리에를 추종하는 팬들과 희생자 가족이 대립한다. 한편, 존재하지 않는 줄로만 알았던 마지막 희생자 영상이 다크 웹에 등장한다. (출처: 씨네21)
Cast
감독: 파스칼 플란테
출연: 줄리엣 가리에피, 로리 바빈, 맥스웰 맥카비-로코스
무언의 방식으로 경계를 흔들다
영화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서스펜스를 만듭니다. 스릴러 영화에서는 일반적으로 관객이 아는 사실을 주인공만 모르게 하거나, 여러 시점을 교차하며 조금씩 사실을 드러내는 등의 방식으로 긴장감을 조성하죠.
<레드 룸스>는 관객에게 정보를 전달하지 않는 방식으로 서스펜스를 만듭니다. 관객이 주인공 '켈리앤'에 관해 아는 내용은 극히 적습니다. 그가 컴퓨터에 꽤 해박한 것으로 보이며, 모델 일을 겸하고 있다는 정도지요. '켈리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목적이 있는지 관객은 알 길이 없습니다. 이러한 정보의 여백은 살인 용의자의 재판에 참석하고자 밤을 새우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 그의 행동을 수상쩍게 만듭니다. 더불어 '켈리앤'이 선인인가, 악인인가에 관한 의문도 유발하죠. 이 사람의 행동을 관심으로 볼 것인가, 관음으로 볼 것인가? 그가 추구하는 것은 정의인가, 흥미인가? 의구심은 계속해서 커져만 갑니다.
이 과정에서 영화는 카메라의 움직임이나 소리를 긴박하거나 과격하게 사용하지 않습니다. 느리고 묵직한 움직임, 적시에 최소한으로 사용된 음악과 효과음으로 한없이 강렬한 장면들을 만들어내죠. 그 무엇도 명료하게 설명하지 않지만, 관객은 저도 모르게 이야기 속으로 빠져듭니다. 이러한 연출력은 영화 초반부의 법정 신에서 빛을 발합니다. 초점을 두는 대상을 바꾸어 가며 촬영한 롱테이크로 지루함 없이 사건의 개요를 전달하고, 프레임 안에서 서로 어긋나는 시선을 클로즈업으로 담아내며 관객의 주목도를 높이죠. 이러한 시선의 교차는 이후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몇 차례 더 등장하는데요. 발화하지 않고 오직 영화적 기술만으로 서스펜스를 만들어내는 것은 <레드 룸스>의 특별한 매력 중 하나입니다.
'클레멘타인'이라는 인물을 영리하게 사용해 '켈리앤'의 모호함을 강화하기도 합니다. '켈리앤'과 '클레멘타인'은 모두 노숙해서라도 살인 용의자 '슈발리에' 재판에 들어가려는 사람들입니다. 언론 매체는 그들을 모두 광팬으로 명명하죠. '클레멘타인'은 속내를 알 수 없는 '켈리앤'과 달리 열정적으로 '슈발리에'를 옹호하는 전형적인 하이브리스토필리아(중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끌림을 느낌) 성향의 광팬입니다. 그렇다면 '클레멘타인'과 같은 행동(재판에 참여하기 위해 노숙하기)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켈리앤'도 같은 성향이 있는 사람일까요? 대중이 미치광이라 부르는 '클레멘타인'마저도 진실을 목도하고 재판장을 떠나갔는데, 그 이후에도 노숙을 이어가는 '켈리앤'은 그보다 더 미치광이인 걸까요? 이렇듯 인물을 사용한 교묘한 연출은 관객의 생각을 쥐고 흔들며, 중후반부의 긴장감을 계속해서 고도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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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의 세계 속 산재한 공포
'켈리앤'이 인터넷 세상에서 사용하는 아이디 '샬롯의 여인'도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줍니다. 샬럿의 여인은 성안에서 오직 거울로만 세상을 바라보다가, 사랑하는 이를 만나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성밖으로 나가는 아서왕 이야기 속 인물입니다. 이때, 샬럿의 여인이 일방적으로 사랑하는 남성의 연인이 바로 극 중 '켈리앤'이 사용하는 인공지능 비서의 이름인 '기네비어'이기도 하죠.
현실에서는 언제나 무표정으로 일관하지만, 인터넷에서는 세상의 면면을 속속들이 바라보는 '켈리앤'은마치 샬럿의 여인과도 같습니다. 수많은 사람의 이메일 주소와 비밀번호가 아카이빙되어 있는 그의 메모장을 보면, '켈리앤'이 방 안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관음해 왔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켈리앤'과 샬럿의 여인을 동일시하여 바라본다면, 과감한 종국의 선택이 성 밖으로 나선 샬럿의 여인의 결단과 다를 바 없이 보입니다. 재판을 통해 디지털 세상 밖에서 처음으로 진짜('슈발리에')를 목격하고, 운명에 해가 되더라도 용감한 선택을 하기로 결정한 것이죠.
결말에 당도해 '켈리앤'이 저지르는 행동은 정의롭지만, 사실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공포스럽기 그지없습니다. 타자 몇 번, 클릭 몇 번에 손쉽게 각종 개인정보와 사생활을 파악해 버리고, 무시무시한 일들이 벌어지는 다크웹 '레드 룸스'에서 가상화폐로 스너프 필름을 구매하는 과정이 말입니다. 우리의 디지털 일상이 얼마나 두려운 연결과 공유로 가득한지 깨닫게 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공포 영화이기도 합니다.
모든 것을 스마트폰 하나로 해결할 수 있는 이 세상은 달리 말하면 스마트폰에만 침투하면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세상입니다. 모든 것을 알 수 있음은 강력한 권능입니다. 어쩌면 정보를 쥐고 흔들 수 있는 사람들은 자신을 신이라고 착각할지도 모르지요. 앞으로 우리가 필히 마주하게 될 범죄, <레드 룸스>의 이야기보다도 더 잔혹하고 낯설 디지털 세상의 개인정보 범죄가 더 두려워집니다.
One-Liner
계산된 여백과 영리한 연출로 만들어낸 강력한 저감도 서스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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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네트에게 오은영 박사님이 보인다.
분명히 다작 감독은 아니다. <소년, 소녀를 만나다, 1984>, <나쁜 피, 1987>, <퐁네프의 연인들, 1991>, <폴라 X, 1999>, <홀리 모터스, 2012>, 그리고 <아네트, 2021>. <아네트>는 <홀리 모터스> 이후 9년 만에 '프랑스 천재 감독'이라는 수식어를 가진 카락스 감독의 복귀작이며, 2021년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하였다. 2020년 칸 영화제는 코로나19로 열리지 않았고, 2019년 칸 영화제 감독상 수상작은 마침 본 브런치에 있어 잠깐 소개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https://brunch.co.kr/@ppeeppae/3
작가주의 경향이 짙은 영화는 감독 그 자체가 된다. 그동안의 작품을 보면 자신에 대한 질문에서 사랑으로 넘어가 <아네트>에서 본격적으로 딸의 존재를 둘러싼 질문을 늘어놓는 것처럼 보인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 위태로운 요트 위에서 추는 왈츠는 전쟁 같은 부부싸움을 수려하게 그린다. 이 장면은 <아네트> 포스터의 대표 이미지로 실렸다. <라라랜드, 2015>에서 미아와 셉이 함께 추던 왈츠와는 차원이 다르다. 카락스 감독은 창작물을 만들어내는 감독으로서의 삶, 한 여인을 사랑한 남자로서의 삶, 특별한 재능을 가진 딸을 육아하는 아버지로서의 삶 사이에서 무수한 고민을 하였고, 그것에 대한 답을 <아네트>로 작성하여 세상에 내놓았다. 그러나 답을 쉽게 공개하면 재미가 없을지 모르니 생각하고 또 생각하도록 몇 가지 장치를 마련하였다.
영화 <아네트, 2021> 포스터
<창작물을 만들어내는 감독>
스탠딩 코미디 쇼를 하는 헨리와 오페라에서 노래를 하는 안은 결혼 하여 부부가 되었다. 그러나 대중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셀럽으로 사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은 가십거리가 되어 대중에게 소비된다. 헨리는 코미디로 대중을 '죽여주고', 안은 극 중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며 대중 대신 '죽어준다'. 대중은 날카로운 것 같다가도 때로는 한없이 우매하게 느껴지는 존재이다. 그들의 코드를 알아채는 것은 쉬운 것 같기도 하고, 어려운 것 같기도 하다. 결혼을 하고 난 후 자신의 직업에 대한 질문은 더욱 깊이를 더해가고, 꺼내고 싶지 않은 심연과 마주하기도 한다. 미래를 약속한 동반자는 나도 모르는 새 나를 옥죄는 경쟁자가 되어버린다.
바나나를 즐겨먹는 '신의 유인원' 헨리는 '킹콩', 사과를 즐겨먹는 '인간' 안은 '앤'을 닮았다. 헨리는 무대 위에 올라 대중에게 즐거움을 제공하지만, 분노조절이 잘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안은 소프라노라서 높은음으로 소리를 잘 낸다. 1930년대 초기 미국 영화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이들은 전통적인 셀럽이었다.
라라랜드에 사랑과 전쟁을 더하면
<한 여인을 사랑한 남자>
헨리는 안을 사랑해서 결혼했고, 딸 아네트를 낳았다. 그러나 자신의 커리어에 대한 자신감이 떨어질수록 그 불똥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아내 안에게 튀어버린다. 지극히 못난 행동이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방법으로 자신의 불안을 달래고 있다. 금이 간 부부 사이를 붙여보고자 세 식구는 요트 여행을 떠나지만, 술에 취한 헨리는 강제로 안을 붙들고 왈츠를 추다가 바닷물 속으로 영영 잃어버리고 만다.
헨리와 안 사이에는 한 남자가 있다. 이 남자는 안이 노래를 부를 때 무대 아래에서 피아노 반주를 했었다. 늘꿈에 그리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된 날 그는 이루지 못한 사랑인 안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린다. 실례한다고 하면서 독백과 지휘를 반복하는 이 장면은 영화의 백미로 꼽고 싶다. 사실 삼각관계의 완성은 서브 남자 주인공의 매력 발산이 아니겠는가.
헨리와 안 사이에 나의 무대를 갈망하는 지휘자가 있다
<특별한 재능을 가진 딸을 육아하는 아버지>
셀럽의 2세는 태어날 때부터 피곤하다. 탯줄을 자르는 순간부터 콘텐츠가 되어 대중에게 소비되기 때문이다. 아네트는 어머니를 잃었지만, 엄마의 재능을 물려받아 노래를 잘 부른다. 헨리는 망가져버린 자신의 꿈을 밀어 두고, 아네트를 데리고 다니며 전 세계를 누빈다. 아버지의 비밀을 모두 알고 있지만 말하지 않고 있던 아네트는 마지막에 아버지와 정면으로 맞서며 '아버지를 사랑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슬픈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자신은 온전하게 사랑을 받기보다는 그저 착취당했다고 고백한다.
영화의 처음과 끝에 카락스 감독과 그의 딸 나스탸가 직접 등장한다. 공교롭게 나스탸의 어머니도 돌아가셨다. 영화의 처음에는 이제 영화가 시작한다고 알리며 조용히 집중하라고 공지하고, 영화의 마지막에는 영화가 재미있었다면 소문을 내달라고 당부한다. 카락스에게 천재 감독이라는 수식어는 허용됐지만, 흥행 감독이라는 수식어는 붙여지지 못했다. <아네트>는 카락스 감독의 첫 영어 영화로 아마존 스튜디오가 배급을 맡아 감독의 전작보다 더 많은 관객을 만날 준비를 마쳤다고 한다. 스크린을 뚫고 나오는 영화와 현실의 경계 허물기는 <아네트>가 카락스 감독의 것임을 드러내며 선명한 도장을 찍는다.
레오스 까락스 감독과 그의 딸 나스탸
아네트에게 오은영 박사님이 보인다. 아버지와 맞선 후 인형은 죽고, 사람이 다시 태어났다. 혹시 아이를 키우고 있다면 사람이 아닌 인형처럼 대하지 않았는지, 그동안 아이를 착취하지는 않았는지 질문해보자. 그리고 온전한 사랑을 주겠노라 다시 한번 다짐하며 꼭 안아주자. 우리는 서로 너무 많이 사랑하니까. We love each other so much.
* 해당 리뷰는 씨네 랩(CINE LAB) 크리에이터 시사회 참석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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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girl의 그렇게 어머니가 된다
아시아계 감독이 아시아 사춘기 소녀의 빨간 맛 성장통 이야기를 다루는 방식
동서양을 불문하고 청소년들은 학교생활이라는 사회를 경험하고 급격하게 성장하면서 사춘기라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공통적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반항심으로 가득 차 있거나 정서적인 혼란이 생기는 등 사춘기의 여러 증상에 대해 당장 사춘기를 겪고 있는 청소년들뿐만 아니라 그 시기가 한참 지났음에도 대부분의 성인이 공감할 정도로 불안정한 시기의 대명사인 사춘기의 악명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합니다. 이렇듯 사춘기에 관해 전 세계의 적지 않은 인원들이 공감대를 형성하는 만큼 사춘기 시기의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그들이 겪는 문제와 성장통을 다루는 이야기는 많이 영화화되었습니다. <메이의 새빨간 비밀> 또한 청소년, 특히 여성의 사춘기를 소재로 한 영화입니다. 하지만 특이한 점으로 픽사의 모든 장편 애니메이션 중에서 아시아인으로 대표되는, 동양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다루며, 서양이 아닌 동양을 배경으로 하는 애니메이션이 처음으로 탄생했습니다.
부모의 전폭적인 보살핌과 사랑, 자녀는 그에 대한 도리로서 효(孝)를 지켜야 한다는 부모 자녀 사이의 관계는 동양의 근본과도 같은 사상입니다. 그렇기에 아시아 부모 자녀 사이의 관계는 서양에 비해 상대적으로 강하게 작용합니다. 이는 부모가 자녀를 올바른 길로 이끌고 둘 사이의 친밀도가 높은 등의 장점도 있지만 부모의 자녀에 대한 과도한 간섭 혹은 제약과 같이 구속력이 강해질 수 있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특히 자녀가 사춘기일 경우 둘 사이의 갈등이 더 심화되곤 합니다. <메이의 새빨간 비밀>은 이러한 아시아 어머니와 사춘기 소녀 사이의 갈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중국계 캐나다인인 도미 시 감독 본인의 경험을 토대로 이야기를 쓴 만큼 둘 사이의 관계는 글로는 형용하기 어려운, 소녀의 숨 막히는 듯한 감정을 세밀하게 담아내었습니다. 그렇기에 이 관계를 많이 경험해 보았던 우리나라 관객들이 특히 영화 속 상황에 대해 공감하고 메이에게 빠져들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이 영화는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고 부모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보다 자기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춘기 소녀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현실적이지만 사랑스럽게 그려냈습니다. 비단 사춘기 소녀뿐만 아니라 어머니 또한 어머니이기 이전에 소녀였으며, 그녀의 두려움과 부족함을 다루었다는 점도 호평할 만한 요소입니다. 이는 메이가 사춘기 시절의 어린 밍을 위로하고 끌어안는 클라이맥스 씬을 통해서 관객들의 감정과 공감을 이끌어내었던 연출을 예시로 들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메이의 새빨간 비밀>의 초반부에서 밍의 캐릭터성을 보여줄 때 아이의 감정을 신경 쓰지 않고 지나치게 간섭하며, 심지어 학교에서 스토킹까지 하는 등 극성인 아시아계 어머니로서의 스테레오타입을 그대로 담고 있어 괜히 거북한 감정을 일으키게 만듭니다. 또한 3세대에 걸친 모녀간의 갈등을 해소하는 과정이 급작스럽고 애매하게 진행되며, 해소 이후의 상황을 '앞으로 사이좋게 지내게 되었답니다' 식의 좋게좋게 마무리하려는 모습은 많이 아쉽게 느껴집니다.
아시아 가족의 특수성과 사춘기 소녀가 만났을 때,
그리고 어머니란 이름의 또 다른 소녀와 아쉬운 갈등 해소 과정
존경심 가득한 문화에 대한 헌사, 오마주와 연출로 담아내다
디즈니, 픽사의 애니메이션에서 찾아보기 힘든 연출 하나가 유독 <메이의 새빨간 비밀>에서 자주 등장하였습니다. 장르의 특성상 과장된 표현은 모든 애니메이션에 담겨 있지만 이 영화는 앞선 두 회사의 애니메이션과는 조금 다른 부분에 과장된 표현을 담았습니다. 일본 애니메이션으로 대표되는, 2D 애니메이션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초롱초롱한 눈 혹은 중국 당면을 뽑아내는 듯한 눈물 묘사를 그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이들은 이전의 픽사의 작품들에게서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연출이기에 해당 연출을 처음 접했을 때 '정말 픽사의 작품이 맞나?'라는 생각까지 할 정도로 당황스러웠습니다. 하지만 후술할 내용과 관련하여, 이 당혹스러운 연출을 아무런 의도 없이 사용하지는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액션하고는 1도 상관이 없어 보이는 주제의 영화이지만, 놀랍게도 독특하거나 스펙터클한 액션이 종종 등장하곤 합니다. 메이가 인간의 모습과 판다의 모습을 바꿔가며 건물을 뛰어넘는 씬과 밍의 거대한 판다가 돔의 좁은 틈을 통해 모습을 드러내고 돔을 초토화시키는 씬은 이 영화가 가진 액션의 대표로 언급할 수 있습니다. 이때 메이가 모습을 변경해 가며 이동하는 씬은 마법소녀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동 방식이며, 밍의 거대 판다와 관련된 액션은 고지라와 같은 일본 괴수물에서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연출입니다. 즉, 해당 연출은 유명한 아시아권 문화들을 오마주의 형식으로 영화에 등장시킴으로써 그 문화에 대한 존경심과 애정을 드러내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과장된 표현도 아시아 문화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취지로써 사용한 연출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감독의 의도와는 별개로, 특히 과장된 표현은 <메이의 새빨간 비밀>의 통상적인 분위기와는 괴리감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기괴하다고 느껴질 여지가 충분해, 관객들의 호불호가 갈릴 만한 연출입니다.
아시아 문화에 대한 헌사로서 오마주를 영화에 담았으며, 픽사스럽지 않은 느낌을 주는
좋은 의미로, 혹은 나쁜 의미로 픽사스럽지 않다
여러모로 <메이의 새빨간 비밀>은 지금까지의 픽사의 영화들과는 다른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영화의 외적인 측면에서는 앞서 다뤘던 독특한 연출이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적인 측면으로는 서사가 가지고 있는 과감함이 여타 픽사 영화들과 다른 느낌을 줍니다. 이는 픽사의 장점이자 강점으로 언급되곤 하던 독특하면서도 묵직한 무게감을 가지고 있는 서사와 주인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로봇이 사랑을 하고 장난감이 살아 움직이는 건 독특함이지 과감함이 아닙니다. 남자아이와의 스킨십을 하는 망상을 비밀 노트에 그리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씬 등을 통해, <메이의 새빨간 비밀>은 사춘기의 사랑에 관해 노골적이고 솔직한 과감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픽사에는 <니모를 찾아서>와 같이 부모와 사춘기 자녀 사이의 갈등을 다룬 비슷한 주제의 영화가 있지만, 민감한 이야기를 직접적이고 과감하게 담아낸 경우는 <메이의 새빨간 비밀>이 처음입니다. 이렇게 내외적인 측면에서 이 영화만이 가진 독특함 덕분에, 기존의 픽사 영화와 분위기가 사뭇 다르게 느껴집니다. 이 변화를 좋게 평가하는 기존의 관객들도 분명히 존재하겠지만, 과거 픽사 영화의 분위기를 더 좋아한다는 이유로 이 영화를 좋지 않게 평가할 관객들이 다수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후자의 입장과 더 가깝습니다. 이따금씩 독특한 분위기를 가진 영화로서의 역할은 어울릴지 몰라도, 앞으로 픽사 영화의 분위기가 <메이의 새빨간 비밀>을 따라간다면 저는 더 이상 픽사 영화를 좋아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기존 픽사 영화의 독특함과는 다른 과감함.
과연 한 번의 일탈인가, 변화의 초석인가
픽사 영화는 항상 시작하기 전에 짧은 단편 영화를 상영하고 나서 본편이 시작됩니다. 픽사의 유명한 영화 <인크레더블 2>이 상영될 때 역시 본편이 시작하기 전에 단편을 상영하였고, 이때 상영된 영화가 바로 <바오>였습니다. 부모의 자식 사랑이란 주제를 가지고 대사 한 마디 없이 관객들에게 강한 충격을 준 단편으로, 본편보다 이 영화가 더 기억에 남는다는 평을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파격적이었습니다. 이러한 <바오>를 제작한 감독은 바로 <메이의 새빨간 비밀>의 감독인 도미 시입니다. 어찌 보면 이 영화가 <바오>의 연장선상에 있는 영화라고도 보입니다. 그녀의 첫 장편 영화 데뷔작으로 본다면 무난하기는 하지만, 픽사란 타이틀이 붙어있기에 아쉬움이 더 크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감독이 하고 싶은 말을 1시간 40분이란 짧은 러닝타임에 담아내기엔 많이 부족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앞으로 어떤 새로운 애니메이션을 관객들에게 보여줄지 기대가 되기도 합니다. 픽사가 가진 전통을 토대로, 본인의 색채를 어울리게 섞어 또 하나의 새로운 명작을 만들어 내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
빨간색은 행운의 색이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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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렁이는 조명 속에서도 변함없이 빛나는 우리의 추억.
모든 순간들이 기록될 수 있다면 좋겠지만 특히 우리 안에 자리 잡아 행복하게 만드는 기억이 있다. 하지만 그리워지는 그때를 볼 때, 나의 기억과는 조금 다른 장면들이 기록되어 있을 때도 있다. 지금을 만들어내 과거를 바라보겠지만 결코 무심하지 않을 감각의 결정체를 마주하는 순간이다. 그렇게 가까이서는 볼 수 없었던 그 순간을 담은 영화 '애프터썬'은 2월 1일에 개봉했다. 내가 사는 지역에서는 예술 영화가 개봉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확인하지 않고 있다가 뒤늦게 발견해서 상영관에서 내려가기 전에 봤다. 일찍 봤다면 더 좋았겠지만 완전히 놓치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렇게 힘들고 어렵게 봤던 영화라 더욱 기억에 남는다.
사랑이 다채로웠음을 새삼 느끼는 순간의 연속이었다. 그 모습 그대로 빛나고 있는 마음이 불투명한 곳에서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말로 쉬이 표현되지 않았던 마음을 영상의 언어로 표현하며 저마다의 사랑이 펼쳐진다. 그렇게 우러난 마음의 형태는 다양한 모습으로 기억된다. 그것은 시간이 지나도 바래지지 않는 영원한 기록물로 남아 혹시라도 지금의 소피와 과거의 아빠를 연결해 준다. 그때는 보지 못했던 그들의 모습은 마주치는 시선 너머의 따뜻한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같은 하늘 아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다는 그 말이 참 인상적이었다. 순간순간을 연결해 주는 영상이라는 기록물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느끼게 해 준다.
지나쳐가는 일상 속에서 문득 마주하는 추억의 모습이 항상 빛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좀 서글프게 느껴진다. 영원할 것 같았던 그때는 어디로 가버린 걸까. 세월이 지나 빛이 바래진 그때의 모습은 슬프더라도 자신의 기억 속에서 만큼은 반짝이며 일렁이는 빛을 유지하며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잔잔하게 표현되는 감정들이 명확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조각조각 나버린 추억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물결을 만들어낸다. 그 물결에 온갖 기억이 다 쓸려나가도 바래지지 않을 소피와 아빠의 사랑 한 조각은 여전히 거기 그리고 여기에 남아있다. 비록 거친 모습이라고 할지라도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있다는 것을 추억이라는 한 단어로 표현한다.
다시 되돌릴 수 없는 그때의 희미한 기억을 계속해서 재생하며 아빠도, 딸도 과거의 기억으로 빨려 들어간다. 어둠 속에 잠식되기도 했고 웃음으로 가득 메우기도 했던 슬픔을 마주한다. 오래된 만큼 빛바랜 화면은 내가 굳게 믿고 있던 것들이라고 할지라도 지금에 도달해서야 이해할 수 있는 것들로 변해있었다. 곳곳에 매몰된 우울을 밀어내고라도 내어주어서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아빠의 다정함을 이제야 마주한다. 적어도 내가 살아가는 곳에는 빛으로 가득 메워주고 싶었던 모습이 맴돈다. 홀로 빛과 어둠이 차례로 번쩍거리는 곳에서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버틸 수 없이 흔들리던 그 공간에서 원래 있어야 할 그곳으로 돌아가며 빛의 흔적을 짙게 남긴다. 시점이 어긋나며 만날 수 없을 것 같았던 딸과 아빠가 마주하는 순간은 나오지 않았지만 이 장면이 끝나면 두 사람은 그때처럼 부둥켜안고 따뜻함을 나누고 있을 것만 같다.
영화는 그 순간의 기억을 담는 매개체로서의 역할을 한다. 제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영화의 모습은 항상 좋을 수는 없다. 개인의 취향과 감상은 언제나 다르니까. 그래서인지 이번 영화는 짙게 피어나는 색감 속에 즐비한 감정의 나열은 다소 복잡하게 보였다. 명확하게 표현되는 것들이 적은 탓에 시차를 두고 벌어진 이들 사이의 모든 것들이 덕지덕지 붙은 데다가 뒤섞인 느낌이 들었다. 또한 기억의 격차 사이에 생략된 이야기들은 20년 사이의 감정선을 모두 이해하기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잘 만들어졌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지루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거칠고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난잡하게 섞이다가 마음을 울리며 끝끝내 맴돈다. 영화를 볼 때도, 보고 나서도 닿지 않을 것 같았던 영화의 향취는 또 다른 기억으로 다가와 흔적을 남긴다. 시간이 지날수록 짙어지는 이 여운은 소피가 20년이 지나고 나서야 그때의 아빠를 이해한 것과 같은 감정일 것이다. 이 영화는 제목 자체로 애프터썬이다. 기억의 향취가 가득해 아득해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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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가 끝나도 끝나지 않을 슬픔의 삼각형.
이토록 불편하고 여러모로 성가시며 그 마저도 웃게 만드는 영화가 또 있을까. 세 갈래로 이루어져 사회의 여러 모습을 영화에 담아 인상 깊은 연출을 보여준 영화 <슬픔의 삼각형>을 소개한다. 불편한 부분들로 가득하지만 2시간 20분이라는 시간이 무색하게 몰입감이 넘친다. 영화는 불편한 장면들의 연속이며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던 생각들을 영화의 모든 등장인물의 대사를 통해 전달하는 모습이 인상 깊다. 제75회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슬픔의 삼각형>은 5월 17일에 개봉했다. <포스 마쥬어: 화이트 베케이션>, <더 스퀘어>에 이어 루벤 외스틀룬드의 남성 부조리 3부작의 마지막 영화이다.
오디션을 보기 위에 몰려든 남자 모델들은 모두 상반신을 노출하고 있다. 인터뷰하는 장면과 함께 패션 브랜드에 따른 표정이 상당히 인상적이다. 두 브랜드의 모습을 타겟층에 따라 다르게 표현하는 모델들의 표정과 인터뷰의 내용은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곤란을 겪고 있는 남성 모델들의 사정이 언급된다. 어떤 것으로도 채워 넣을 수 없는 슬픔의 삼각형으로 인해 합격하지 못한다. 자연스러움을 원하면서도 인위적인 젊음을 얻으려는 모순은 뒤이은 장면에서 지속된다. 어디에도 닿지 않는 패션 행사의 휘향 찬란한 메시지와 황당한 상황이 일어나지만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본격적으로 패션쇼가 시작된다.
그렇게 패션쇼가 끝나고 칼과 야야는 저녁식사를 같이 하고 침묵 속에서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낸다. 업계 특성상 야야에 비해 수입이 적었던 칼이 항상 데이트 비용을 냈지만 오늘도 역시 칼이 내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오늘은 꼭 이야기하기로 마음을 먹고 이야기를 꺼낸다. 하지만 야야는 표정이 굳어지며 남자가 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면 섹시하지 않다는 이유로 회피한다.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내용이 다루어지지 않으면서 갈등은 점차 심화된다. 계속해서 대화를 나누며 상황은 마무리되고 협찬으로 두 사람은 호화로운 크루즈 여행을 떠난다.
고급 크루즈에 승선한 사람들은 칼과 야야를 제외하면 대부분 나이 든 백인 상류층이다. 그들은 아름다운 풍경을 즐기며 호화로운 여행을 즐긴다. 이들의 뒤에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직원들 뿐만 아니라 배의 여러 곳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일을 하고 있다. 또한 이들은 무리한 요구를 해도 이들의 만족을 위해서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해야만 했다. 그렇게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여행에서 맞이하는 선상파티는 날씨로 인해 하염없이 흔들리고 사람들이 위선을 토해내며 선내가 엉망진창이 된다. 그 배가 난파되며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웬 섬에서 눈을 뜬다.
재난으로 인해 상황은 전혀 다르게 변하고 새로운 계급 사회가 등장한다. 배 위보다 철저한 계급 사회가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오로지 생존이 목표인 이 섬에선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이들은 쓸모없는 존재가 전락하고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던 화장실 청소 담당 직원 애비게일이 이들의 '캡틴'이 된다. 절대적인 힘을 가지게 되며 이 섬은 여성이자 동양인인 애비게일을 중심으로 한 사회가 된다. 독점적으로 취하고 있는 음식과 생존 능력은 적어도 이 사회에서만큼은 절대적인 기준이었기 때문에 새롭게 생긴 이 세계를 지키기 위한 욕구는 더더욱 커진다. 또한 그 권력에서 맛보게 된 진정한 소유의 욕망이 겹쳐 더욱 끔찍하게 다가온다. 초반의 긴장감에 비해 후반부의 몰입감이 떨어지지만 절대적인 힘을 가지며 취하게 되는 것들이 현대 사회에서 볼 수 있는 권력구조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에는 충분했다.
슬픔의 삼각형은 미간의 주름을 뜻하기도 하고 현대 사회의 자본주의에서 펼쳐지는 계급을 뜻하기도 한다. 영화의 전체적인 주제와 걸맞게 모순적인 것을 말하면서도 동시에 또 모순적인 영화의 모습이 이중적이어서 매력적이었다. 영화 속 배경은 무지와 자의식 과잉으로 가득한 혐오의 공간이다. 그곳에서 펼쳐지는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확실하게 비극적이면서도 위선으로 내면을 채운 이들이 처한 상황이 유머스러움을 유발한다. 물론 이마저도 불편한 요소들이 존재하지만 모든 상황의 변화로 인해 미처 말하지 못했던 현대 사회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씁쓸함이 감도는 건 영화가 끝나도 사라지지 않을 슬픔의 삼각형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저 아직 정해지지 않은 답만이 그 삼각형의 모양을 결정짓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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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저 너를 사랑한다는 것
해길랍 (海吉拉, Hijra in Between, 2018)
개봉일 : 2021.03.31 (한국 기준)
감독 : 채밀결
출연 : 허광한, 요애녕, 임의잠
그저 너를 사랑한다는 것
해길랍(海吉拉, 히즈라). 여성의 성 정체성을 갖고 있는 생리적인 남성 계층을 뜻하는 말. 남자이면서 여자의 정체성을 가진, 남자이기도 여자이기도 한 사람.
처음엔 <해길랍>이라는 영화 제목의 뜻을 모르고 허광한 배우만을 바라보며 이 영화를 골랐더랬다. 예고편으로 공개된 영상들의 분위기도 그렇고, 시놉시스 상으로도 그렇고 당연하게도 달달한 첫사랑 이야기쯤일 거라 생각했는데.. 이 영화는 당연함의 범위가 아닌 색다름의 범위로 빗겨나간다.
새로운 소재와 영화의 초반부의 결은 상당히 좋다. <해길랍>은 허광한이라는 배우를 보며 가장 먼저 기대하게 되는 이미지를 온전히 만족시켜주며 한순간에 시선을 사로잡는다. 하지만 이 새로운 소재와 다소 가파르게 마무리되는 결말은 끝내 진한 호불호라는 결과를 낳게 되어 그 부분이 조금 아쉽다. 짧은 러닝타임의 탓도 있겠지만 초반부 로맨스에 너무 많은 힘을 쏟아버린 느낌이랄까. 끝이 애매모호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말고, 그냥 허광한을 보시라.. 말하고 싶다.
해길랍 시놉시스
등굣길 버스 안, 반짝이는 서로에게 반한 ‘탕셩’과 ‘완팅’은 가슴 뛰는 첫사랑을 시작한다. 서로의 세상이 되어가던 어느 날, 충격적인 사고로 ‘완팅’은 한 통의 편지와 ‘탕셩’만 남겨둔 채 곁을 떠난다. 몇 년 후, ‘탕셩’ 앞에 새로운 친구 ‘류팅’이 등장한다. 낯선 익숙함에 잊지 못했던 감정이 자라나는데…
* 아래 내용부터는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원탕셩과 완팅은 등굣길에 매일 같은 버스를 탄다. 서로에 눈에 띈 두 사람은 무방비로 첫사랑에 빠지고 벅찬 두근거림을 느끼며 서로를 알아간다. 하지만 완팅의 사고와 동시에 이들의 첫사랑은 깨져버리고, 끝나지 않는 그리움만이 남은 시점에 새로운 모습을 한 인연이 다가온다.
자신의 모습을 비관하며 "이런 모습으론 널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하는 완팅과 "어떤 모습이든 사랑할게."라고 말하는 원탕셩. 상대방을 너무도 사랑하기에 사랑할 수 없다고, 사랑하기에 그마저도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하는 두 사람. 결론은 다르지만 결국엔 '사랑'이라는 한 방향으로 향하는 이들의 마음이 온전하게 하나가 될 수 있을까?
하나의 사랑을 향해 달려가던 중 커다란 갈림길을 만난 청춘의 흔들림이 미세한 진동을 타고 전해진다. 저주 같은 현실 앞에서도 너라는 사람을 사랑하기로 마음 먹는다는건 어떤 기분일까. 잘 상상되지 않는다.
또 다른 사랑의 모습을 보다.
모두가 지겨울 만큼 외쳐대는 사랑이란 건 무엇일까. <해길랍>은 청춘 남녀 3명을 통해 대부분의 사랑이 아닌 특별한 사랑을 그려낸다. 소심하지만 인연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마음을 가진 착한 소녀 완팅, 호탕하고 시원시원한 성격을 가진 완팅의 오래된 친구 시전, 용기 있게 첫사랑을 시작하고, 첫사랑을 잊지 못해 기다리고 있는 소년 탕셩. 세 사람은 아주 잠시지만 사랑의 라이벌이 되기도 하고, 빛나는 청춘을 함께 한 둘도 없는 절친 사이가 되기도 하고, 알 수 없는 감정을 선사하는 혼란한 사이가 되기도 한다.
우정이라 생각했던 감정이 사랑이 되기도 하고 사랑이었던 그를 향한 감정이 먼 거리감으로 변하기도 하고, 다시 용기를 내 한걸음 다가서기도 하고 도망치기도 한다. 탕셩, 완팅, 시전은 우정과 사랑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간다.
영원할 거라 생각했던 사랑과 우정이 완팅의 변화와 함께 깨져버리고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던 각자의 정체성은 사정없이 흔들린다. 그리고 흔들림 끝에 만난 새로운 갈림길에서 세 사람은 용기를 짜내 마음이 이끄는 길로 향한다.
왠지 어색해진 사이 속에서 완팅의 변화는 사랑이란 감정을 더욱 명확히 정의해 줄 행운이었을지, 저주였을지 모르겠다. 이 이야기에서 단 하나 확실히 알 수 있었던 건, 세 사람 모두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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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러브 앤 몬스터스>
[2021년 4월 14일, 넷플릭스 공개]
돌연변이 괴물들이 지구를 덮치고 7년이 지났다.
살아남은 인류는 지하에 숨어 목숨을 부지해야만 했다.
그렇게 버텨온 조엘 도슨(딜런 오브라이언).
그가 무전을 통해 고등학교 시절 여자 친구 에이미와 다시 연결된다.
그리고 여전한 자신의 사랑을 확인한다.
그녀와의 거리 135킬로미터. 이 지하 벙커에 그를 붙잡을 거라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어떤 위험이 있더라도 에이미를 다시 만나고 싶다.
그렇게 조엘은 해안을 향해 떠난다.
사랑을 찾아, 희망을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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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플 TV+ <핀치> 공식 예고편
"아주 특별한 가족의 여정. 11월 5일, Apple TV+에서 '핀치' - Finch가 공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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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심과 관음의 경계에서
미스터리와 스릴러를 무척 좋아하는 저는 실제로 벌어진 사건·사고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사건의 개요, 증거, 검거 과정 등 공개된 자료를 샅샅이 읽어보기를 즐겨 하지요. 그런데 가끔 그런 제 모습이 섬찟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새로운 정보를 찾아내려고 인터넷 세상을 뒤지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 실제 사건들을 단순한 재미와 흥미로 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때가 그렇습니다. 그럴 때면 정보가 넘쳐나는 오늘날의 세상에서는 관심도 한순간에 관음으로 변할 수 있음에 몸서리치며, 서둘러 인터넷 창을 닫곤 합니다.
<레드 룸스>는 누구든 관심과 관음의 경계에 설 수 있는 디지털 세상에서, 둘 사이를 넘나들며 극악무도한 살인 용의자를 주시하는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살인, 납치, 스너프 필름처럼 자극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자극을 최대한 줄이는 섬세한 연출이 돋보이는 작품이죠.
※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은 <레드 룸스> 시사회를 통해 영화를 감상했습니다. <레드 룸스>는 2024년 10월 9일 국내 개봉작입니다.
레드 룸스
Red Rooms
Summary
10대 소녀 3명을 끔찍하게 살해하고 생중계한 혐의로 재판을 받는 ‘슈발리에’ 그리고 슈발리에의 재판을 매회 방청하는 모델 겸 해커 ‘켈리앤’. 심증만 있을 뿐, 물증 없는 재판이 길어지는 가운데 슈발리에를 추종하는 팬들과 희생자 가족이 대립한다. 한편, 존재하지 않는 줄로만 알았던 마지막 희생자 영상이 다크 웹에 등장한다. (출처: 씨네21)
Cast
감독: 파스칼 플란테
출연: 줄리엣 가리에피, 로리 바빈, 맥스웰 맥카비-로코스
무언의 방식으로 경계를 흔들다
영화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서스펜스를 만듭니다. 스릴러 영화에서는 일반적으로 관객이 아는 사실을 주인공만 모르게 하거나, 여러 시점을 교차하며 조금씩 사실을 드러내는 등의 방식으로 긴장감을 조성하죠.
<레드 룸스>는 관객에게 정보를 전달하지 않는 방식으로 서스펜스를 만듭니다. 관객이 주인공 '켈리앤'에 관해 아는 내용은 극히 적습니다. 그가 컴퓨터에 꽤 해박한 것으로 보이며, 모델 일을 겸하고 있다는 정도지요. '켈리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목적이 있는지 관객은 알 길이 없습니다. 이러한 정보의 여백은 살인 용의자의 재판에 참석하고자 밤을 새우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 그의 행동을 수상쩍게 만듭니다. 더불어 '켈리앤'이 선인인가, 악인인가에 관한 의문도 유발하죠. 이 사람의 행동을 관심으로 볼 것인가, 관음으로 볼 것인가? 그가 추구하는 것은 정의인가, 흥미인가? 의구심은 계속해서 커져만 갑니다.
이 과정에서 영화는 카메라의 움직임이나 소리를 긴박하거나 과격하게 사용하지 않습니다. 느리고 묵직한 움직임, 적시에 최소한으로 사용된 음악과 효과음으로 한없이 강렬한 장면들을 만들어내죠. 그 무엇도 명료하게 설명하지 않지만, 관객은 저도 모르게 이야기 속으로 빠져듭니다. 이러한 연출력은 영화 초반부의 법정 신에서 빛을 발합니다. 초점을 두는 대상을 바꾸어 가며 촬영한 롱테이크로 지루함 없이 사건의 개요를 전달하고, 프레임 안에서 서로 어긋나는 시선을 클로즈업으로 담아내며 관객의 주목도를 높이죠. 이러한 시선의 교차는 이후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몇 차례 더 등장하는데요. 발화하지 않고 오직 영화적 기술만으로 서스펜스를 만들어내는 것은 <레드 룸스>의 특별한 매력 중 하나입니다.
'클레멘타인'이라는 인물을 영리하게 사용해 '켈리앤'의 모호함을 강화하기도 합니다. '켈리앤'과 '클레멘타인'은 모두 노숙해서라도 살인 용의자 '슈발리에' 재판에 들어가려는 사람들입니다. 언론 매체는 그들을 모두 광팬으로 명명하죠. '클레멘타인'은 속내를 알 수 없는 '켈리앤'과 달리 열정적으로 '슈발리에'를 옹호하는 전형적인 하이브리스토필리아(중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끌림을 느낌) 성향의 광팬입니다. 그렇다면 '클레멘타인'과 같은 행동(재판에 참여하기 위해 노숙하기)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켈리앤'도 같은 성향이 있는 사람일까요? 대중이 미치광이라 부르는 '클레멘타인'마저도 진실을 목도하고 재판장을 떠나갔는데, 그 이후에도 노숙을 이어가는 '켈리앤'은 그보다 더 미치광이인 걸까요? 이렇듯 인물을 사용한 교묘한 연출은 관객의 생각을 쥐고 흔들며, 중후반부의 긴장감을 계속해서 고도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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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의 세계 속 산재한 공포
'켈리앤'이 인터넷 세상에서 사용하는 아이디 '샬롯의 여인'도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줍니다. 샬럿의 여인은 성안에서 오직 거울로만 세상을 바라보다가, 사랑하는 이를 만나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성밖으로 나가는 아서왕 이야기 속 인물입니다. 이때, 샬럿의 여인이 일방적으로 사랑하는 남성의 연인이 바로 극 중 '켈리앤'이 사용하는 인공지능 비서의 이름인 '기네비어'이기도 하죠.
현실에서는 언제나 무표정으로 일관하지만, 인터넷에서는 세상의 면면을 속속들이 바라보는 '켈리앤'은마치 샬럿의 여인과도 같습니다. 수많은 사람의 이메일 주소와 비밀번호가 아카이빙되어 있는 그의 메모장을 보면, '켈리앤'이 방 안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관음해 왔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켈리앤'과 샬럿의 여인을 동일시하여 바라본다면, 과감한 종국의 선택이 성 밖으로 나선 샬럿의 여인의 결단과 다를 바 없이 보입니다. 재판을 통해 디지털 세상 밖에서 처음으로 진짜('슈발리에')를 목격하고, 운명에 해가 되더라도 용감한 선택을 하기로 결정한 것이죠.
결말에 당도해 '켈리앤'이 저지르는 행동은 정의롭지만, 사실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공포스럽기 그지없습니다. 타자 몇 번, 클릭 몇 번에 손쉽게 각종 개인정보와 사생활을 파악해 버리고, 무시무시한 일들이 벌어지는 다크웹 '레드 룸스'에서 가상화폐로 스너프 필름을 구매하는 과정이 말입니다. 우리의 디지털 일상이 얼마나 두려운 연결과 공유로 가득한지 깨닫게 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공포 영화이기도 합니다.
모든 것을 스마트폰 하나로 해결할 수 있는 이 세상은 달리 말하면 스마트폰에만 침투하면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세상입니다. 모든 것을 알 수 있음은 강력한 권능입니다. 어쩌면 정보를 쥐고 흔들 수 있는 사람들은 자신을 신이라고 착각할지도 모르지요. 앞으로 우리가 필히 마주하게 될 범죄, <레드 룸스>의 이야기보다도 더 잔혹하고 낯설 디지털 세상의 개인정보 범죄가 더 두려워집니다.
One-Liner
계산된 여백과 영리한 연출로 만들어낸 강력한 저감도 서스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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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네트에게 오은영 박사님이 보인다.
분명히 다작 감독은 아니다. <소년, 소녀를 만나다, 1984>, <나쁜 피, 1987>, <퐁네프의 연인들, 1991>, <폴라 X, 1999>, <홀리 모터스, 2012>, 그리고 <아네트, 2021>. <아네트>는 <홀리 모터스> 이후 9년 만에 '프랑스 천재 감독'이라는 수식어를 가진 카락스 감독의 복귀작이며, 2021년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하였다. 2020년 칸 영화제는 코로나19로 열리지 않았고, 2019년 칸 영화제 감독상 수상작은 마침 본 브런치에 있어 잠깐 소개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https://brunch.co.kr/@ppeeppae/3
작가주의 경향이 짙은 영화는 감독 그 자체가 된다. 그동안의 작품을 보면 자신에 대한 질문에서 사랑으로 넘어가 <아네트>에서 본격적으로 딸의 존재를 둘러싼 질문을 늘어놓는 것처럼 보인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 위태로운 요트 위에서 추는 왈츠는 전쟁 같은 부부싸움을 수려하게 그린다. 이 장면은 <아네트> 포스터의 대표 이미지로 실렸다. <라라랜드, 2015>에서 미아와 셉이 함께 추던 왈츠와는 차원이 다르다. 카락스 감독은 창작물을 만들어내는 감독으로서의 삶, 한 여인을 사랑한 남자로서의 삶, 특별한 재능을 가진 딸을 육아하는 아버지로서의 삶 사이에서 무수한 고민을 하였고, 그것에 대한 답을 <아네트>로 작성하여 세상에 내놓았다. 그러나 답을 쉽게 공개하면 재미가 없을지 모르니 생각하고 또 생각하도록 몇 가지 장치를 마련하였다.
영화 <아네트, 2021> 포스터
<창작물을 만들어내는 감독>
스탠딩 코미디 쇼를 하는 헨리와 오페라에서 노래를 하는 안은 결혼 하여 부부가 되었다. 그러나 대중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셀럽으로 사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은 가십거리가 되어 대중에게 소비된다. 헨리는 코미디로 대중을 '죽여주고', 안은 극 중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며 대중 대신 '죽어준다'. 대중은 날카로운 것 같다가도 때로는 한없이 우매하게 느껴지는 존재이다. 그들의 코드를 알아채는 것은 쉬운 것 같기도 하고, 어려운 것 같기도 하다. 결혼을 하고 난 후 자신의 직업에 대한 질문은 더욱 깊이를 더해가고, 꺼내고 싶지 않은 심연과 마주하기도 한다. 미래를 약속한 동반자는 나도 모르는 새 나를 옥죄는 경쟁자가 되어버린다.
바나나를 즐겨먹는 '신의 유인원' 헨리는 '킹콩', 사과를 즐겨먹는 '인간' 안은 '앤'을 닮았다. 헨리는 무대 위에 올라 대중에게 즐거움을 제공하지만, 분노조절이 잘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안은 소프라노라서 높은음으로 소리를 잘 낸다. 1930년대 초기 미국 영화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이들은 전통적인 셀럽이었다.
라라랜드에 사랑과 전쟁을 더하면
<한 여인을 사랑한 남자>
헨리는 안을 사랑해서 결혼했고, 딸 아네트를 낳았다. 그러나 자신의 커리어에 대한 자신감이 떨어질수록 그 불똥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아내 안에게 튀어버린다. 지극히 못난 행동이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방법으로 자신의 불안을 달래고 있다. 금이 간 부부 사이를 붙여보고자 세 식구는 요트 여행을 떠나지만, 술에 취한 헨리는 강제로 안을 붙들고 왈츠를 추다가 바닷물 속으로 영영 잃어버리고 만다.
헨리와 안 사이에는 한 남자가 있다. 이 남자는 안이 노래를 부를 때 무대 아래에서 피아노 반주를 했었다. 늘꿈에 그리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된 날 그는 이루지 못한 사랑인 안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린다. 실례한다고 하면서 독백과 지휘를 반복하는 이 장면은 영화의 백미로 꼽고 싶다. 사실 삼각관계의 완성은 서브 남자 주인공의 매력 발산이 아니겠는가.
헨리와 안 사이에 나의 무대를 갈망하는 지휘자가 있다
<특별한 재능을 가진 딸을 육아하는 아버지>
셀럽의 2세는 태어날 때부터 피곤하다. 탯줄을 자르는 순간부터 콘텐츠가 되어 대중에게 소비되기 때문이다. 아네트는 어머니를 잃었지만, 엄마의 재능을 물려받아 노래를 잘 부른다. 헨리는 망가져버린 자신의 꿈을 밀어 두고, 아네트를 데리고 다니며 전 세계를 누빈다. 아버지의 비밀을 모두 알고 있지만 말하지 않고 있던 아네트는 마지막에 아버지와 정면으로 맞서며 '아버지를 사랑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슬픈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자신은 온전하게 사랑을 받기보다는 그저 착취당했다고 고백한다.
영화의 처음과 끝에 카락스 감독과 그의 딸 나스탸가 직접 등장한다. 공교롭게 나스탸의 어머니도 돌아가셨다. 영화의 처음에는 이제 영화가 시작한다고 알리며 조용히 집중하라고 공지하고, 영화의 마지막에는 영화가 재미있었다면 소문을 내달라고 당부한다. 카락스에게 천재 감독이라는 수식어는 허용됐지만, 흥행 감독이라는 수식어는 붙여지지 못했다. <아네트>는 카락스 감독의 첫 영어 영화로 아마존 스튜디오가 배급을 맡아 감독의 전작보다 더 많은 관객을 만날 준비를 마쳤다고 한다. 스크린을 뚫고 나오는 영화와 현실의 경계 허물기는 <아네트>가 카락스 감독의 것임을 드러내며 선명한 도장을 찍는다.
레오스 까락스 감독과 그의 딸 나스탸
아네트에게 오은영 박사님이 보인다. 아버지와 맞선 후 인형은 죽고, 사람이 다시 태어났다. 혹시 아이를 키우고 있다면 사람이 아닌 인형처럼 대하지 않았는지, 그동안 아이를 착취하지는 않았는지 질문해보자. 그리고 온전한 사랑을 주겠노라 다시 한번 다짐하며 꼭 안아주자. 우리는 서로 너무 많이 사랑하니까. We love each other so much.
* 해당 리뷰는 씨네 랩(CINE LAB) 크리에이터 시사회 참석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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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girl의 그렇게 어머니가 된다
아시아계 감독이 아시아 사춘기 소녀의 빨간 맛 성장통 이야기를 다루는 방식
동서양을 불문하고 청소년들은 학교생활이라는 사회를 경험하고 급격하게 성장하면서 사춘기라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공통적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반항심으로 가득 차 있거나 정서적인 혼란이 생기는 등 사춘기의 여러 증상에 대해 당장 사춘기를 겪고 있는 청소년들뿐만 아니라 그 시기가 한참 지났음에도 대부분의 성인이 공감할 정도로 불안정한 시기의 대명사인 사춘기의 악명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합니다. 이렇듯 사춘기에 관해 전 세계의 적지 않은 인원들이 공감대를 형성하는 만큼 사춘기 시기의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그들이 겪는 문제와 성장통을 다루는 이야기는 많이 영화화되었습니다. <메이의 새빨간 비밀> 또한 청소년, 특히 여성의 사춘기를 소재로 한 영화입니다. 하지만 특이한 점으로 픽사의 모든 장편 애니메이션 중에서 아시아인으로 대표되는, 동양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다루며, 서양이 아닌 동양을 배경으로 하는 애니메이션이 처음으로 탄생했습니다.
부모의 전폭적인 보살핌과 사랑, 자녀는 그에 대한 도리로서 효(孝)를 지켜야 한다는 부모 자녀 사이의 관계는 동양의 근본과도 같은 사상입니다. 그렇기에 아시아 부모 자녀 사이의 관계는 서양에 비해 상대적으로 강하게 작용합니다. 이는 부모가 자녀를 올바른 길로 이끌고 둘 사이의 친밀도가 높은 등의 장점도 있지만 부모의 자녀에 대한 과도한 간섭 혹은 제약과 같이 구속력이 강해질 수 있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특히 자녀가 사춘기일 경우 둘 사이의 갈등이 더 심화되곤 합니다. <메이의 새빨간 비밀>은 이러한 아시아 어머니와 사춘기 소녀 사이의 갈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중국계 캐나다인인 도미 시 감독 본인의 경험을 토대로 이야기를 쓴 만큼 둘 사이의 관계는 글로는 형용하기 어려운, 소녀의 숨 막히는 듯한 감정을 세밀하게 담아내었습니다. 그렇기에 이 관계를 많이 경험해 보았던 우리나라 관객들이 특히 영화 속 상황에 대해 공감하고 메이에게 빠져들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이 영화는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고 부모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보다 자기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춘기 소녀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현실적이지만 사랑스럽게 그려냈습니다. 비단 사춘기 소녀뿐만 아니라 어머니 또한 어머니이기 이전에 소녀였으며, 그녀의 두려움과 부족함을 다루었다는 점도 호평할 만한 요소입니다. 이는 메이가 사춘기 시절의 어린 밍을 위로하고 끌어안는 클라이맥스 씬을 통해서 관객들의 감정과 공감을 이끌어내었던 연출을 예시로 들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메이의 새빨간 비밀>의 초반부에서 밍의 캐릭터성을 보여줄 때 아이의 감정을 신경 쓰지 않고 지나치게 간섭하며, 심지어 학교에서 스토킹까지 하는 등 극성인 아시아계 어머니로서의 스테레오타입을 그대로 담고 있어 괜히 거북한 감정을 일으키게 만듭니다. 또한 3세대에 걸친 모녀간의 갈등을 해소하는 과정이 급작스럽고 애매하게 진행되며, 해소 이후의 상황을 '앞으로 사이좋게 지내게 되었답니다' 식의 좋게좋게 마무리하려는 모습은 많이 아쉽게 느껴집니다.
아시아 가족의 특수성과 사춘기 소녀가 만났을 때,
그리고 어머니란 이름의 또 다른 소녀와 아쉬운 갈등 해소 과정
존경심 가득한 문화에 대한 헌사, 오마주와 연출로 담아내다
디즈니, 픽사의 애니메이션에서 찾아보기 힘든 연출 하나가 유독 <메이의 새빨간 비밀>에서 자주 등장하였습니다. 장르의 특성상 과장된 표현은 모든 애니메이션에 담겨 있지만 이 영화는 앞선 두 회사의 애니메이션과는 조금 다른 부분에 과장된 표현을 담았습니다. 일본 애니메이션으로 대표되는, 2D 애니메이션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초롱초롱한 눈 혹은 중국 당면을 뽑아내는 듯한 눈물 묘사를 그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이들은 이전의 픽사의 작품들에게서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연출이기에 해당 연출을 처음 접했을 때 '정말 픽사의 작품이 맞나?'라는 생각까지 할 정도로 당황스러웠습니다. 하지만 후술할 내용과 관련하여, 이 당혹스러운 연출을 아무런 의도 없이 사용하지는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액션하고는 1도 상관이 없어 보이는 주제의 영화이지만, 놀랍게도 독특하거나 스펙터클한 액션이 종종 등장하곤 합니다. 메이가 인간의 모습과 판다의 모습을 바꿔가며 건물을 뛰어넘는 씬과 밍의 거대한 판다가 돔의 좁은 틈을 통해 모습을 드러내고 돔을 초토화시키는 씬은 이 영화가 가진 액션의 대표로 언급할 수 있습니다. 이때 메이가 모습을 변경해 가며 이동하는 씬은 마법소녀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동 방식이며, 밍의 거대 판다와 관련된 액션은 고지라와 같은 일본 괴수물에서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연출입니다. 즉, 해당 연출은 유명한 아시아권 문화들을 오마주의 형식으로 영화에 등장시킴으로써 그 문화에 대한 존경심과 애정을 드러내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과장된 표현도 아시아 문화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취지로써 사용한 연출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감독의 의도와는 별개로, 특히 과장된 표현은 <메이의 새빨간 비밀>의 통상적인 분위기와는 괴리감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기괴하다고 느껴질 여지가 충분해, 관객들의 호불호가 갈릴 만한 연출입니다.
아시아 문화에 대한 헌사로서 오마주를 영화에 담았으며, 픽사스럽지 않은 느낌을 주는
좋은 의미로, 혹은 나쁜 의미로 픽사스럽지 않다
여러모로 <메이의 새빨간 비밀>은 지금까지의 픽사의 영화들과는 다른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영화의 외적인 측면에서는 앞서 다뤘던 독특한 연출이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적인 측면으로는 서사가 가지고 있는 과감함이 여타 픽사 영화들과 다른 느낌을 줍니다. 이는 픽사의 장점이자 강점으로 언급되곤 하던 독특하면서도 묵직한 무게감을 가지고 있는 서사와 주인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로봇이 사랑을 하고 장난감이 살아 움직이는 건 독특함이지 과감함이 아닙니다. 남자아이와의 스킨십을 하는 망상을 비밀 노트에 그리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씬 등을 통해, <메이의 새빨간 비밀>은 사춘기의 사랑에 관해 노골적이고 솔직한 과감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픽사에는 <니모를 찾아서>와 같이 부모와 사춘기 자녀 사이의 갈등을 다룬 비슷한 주제의 영화가 있지만, 민감한 이야기를 직접적이고 과감하게 담아낸 경우는 <메이의 새빨간 비밀>이 처음입니다. 이렇게 내외적인 측면에서 이 영화만이 가진 독특함 덕분에, 기존의 픽사 영화와 분위기가 사뭇 다르게 느껴집니다. 이 변화를 좋게 평가하는 기존의 관객들도 분명히 존재하겠지만, 과거 픽사 영화의 분위기를 더 좋아한다는 이유로 이 영화를 좋지 않게 평가할 관객들이 다수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후자의 입장과 더 가깝습니다. 이따금씩 독특한 분위기를 가진 영화로서의 역할은 어울릴지 몰라도, 앞으로 픽사 영화의 분위기가 <메이의 새빨간 비밀>을 따라간다면 저는 더 이상 픽사 영화를 좋아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기존 픽사 영화의 독특함과는 다른 과감함.
과연 한 번의 일탈인가, 변화의 초석인가
픽사 영화는 항상 시작하기 전에 짧은 단편 영화를 상영하고 나서 본편이 시작됩니다. 픽사의 유명한 영화 <인크레더블 2>이 상영될 때 역시 본편이 시작하기 전에 단편을 상영하였고, 이때 상영된 영화가 바로 <바오>였습니다. 부모의 자식 사랑이란 주제를 가지고 대사 한 마디 없이 관객들에게 강한 충격을 준 단편으로, 본편보다 이 영화가 더 기억에 남는다는 평을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파격적이었습니다. 이러한 <바오>를 제작한 감독은 바로 <메이의 새빨간 비밀>의 감독인 도미 시입니다. 어찌 보면 이 영화가 <바오>의 연장선상에 있는 영화라고도 보입니다. 그녀의 첫 장편 영화 데뷔작으로 본다면 무난하기는 하지만, 픽사란 타이틀이 붙어있기에 아쉬움이 더 크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감독이 하고 싶은 말을 1시간 40분이란 짧은 러닝타임에 담아내기엔 많이 부족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앞으로 어떤 새로운 애니메이션을 관객들에게 보여줄지 기대가 되기도 합니다. 픽사가 가진 전통을 토대로, 본인의 색채를 어울리게 섞어 또 하나의 새로운 명작을 만들어 내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
빨간색은 행운의 색이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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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렁이는 조명 속에서도 변함없이 빛나는 우리의 추억.
모든 순간들이 기록될 수 있다면 좋겠지만 특히 우리 안에 자리 잡아 행복하게 만드는 기억이 있다. 하지만 그리워지는 그때를 볼 때, 나의 기억과는 조금 다른 장면들이 기록되어 있을 때도 있다. 지금을 만들어내 과거를 바라보겠지만 결코 무심하지 않을 감각의 결정체를 마주하는 순간이다. 그렇게 가까이서는 볼 수 없었던 그 순간을 담은 영화 '애프터썬'은 2월 1일에 개봉했다. 내가 사는 지역에서는 예술 영화가 개봉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확인하지 않고 있다가 뒤늦게 발견해서 상영관에서 내려가기 전에 봤다. 일찍 봤다면 더 좋았겠지만 완전히 놓치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렇게 힘들고 어렵게 봤던 영화라 더욱 기억에 남는다.
사랑이 다채로웠음을 새삼 느끼는 순간의 연속이었다. 그 모습 그대로 빛나고 있는 마음이 불투명한 곳에서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말로 쉬이 표현되지 않았던 마음을 영상의 언어로 표현하며 저마다의 사랑이 펼쳐진다. 그렇게 우러난 마음의 형태는 다양한 모습으로 기억된다. 그것은 시간이 지나도 바래지지 않는 영원한 기록물로 남아 혹시라도 지금의 소피와 과거의 아빠를 연결해 준다. 그때는 보지 못했던 그들의 모습은 마주치는 시선 너머의 따뜻한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같은 하늘 아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다는 그 말이 참 인상적이었다. 순간순간을 연결해 주는 영상이라는 기록물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느끼게 해 준다.
지나쳐가는 일상 속에서 문득 마주하는 추억의 모습이 항상 빛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좀 서글프게 느껴진다. 영원할 것 같았던 그때는 어디로 가버린 걸까. 세월이 지나 빛이 바래진 그때의 모습은 슬프더라도 자신의 기억 속에서 만큼은 반짝이며 일렁이는 빛을 유지하며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잔잔하게 표현되는 감정들이 명확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조각조각 나버린 추억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물결을 만들어낸다. 그 물결에 온갖 기억이 다 쓸려나가도 바래지지 않을 소피와 아빠의 사랑 한 조각은 여전히 거기 그리고 여기에 남아있다. 비록 거친 모습이라고 할지라도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있다는 것을 추억이라는 한 단어로 표현한다.
다시 되돌릴 수 없는 그때의 희미한 기억을 계속해서 재생하며 아빠도, 딸도 과거의 기억으로 빨려 들어간다. 어둠 속에 잠식되기도 했고 웃음으로 가득 메우기도 했던 슬픔을 마주한다. 오래된 만큼 빛바랜 화면은 내가 굳게 믿고 있던 것들이라고 할지라도 지금에 도달해서야 이해할 수 있는 것들로 변해있었다. 곳곳에 매몰된 우울을 밀어내고라도 내어주어서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아빠의 다정함을 이제야 마주한다. 적어도 내가 살아가는 곳에는 빛으로 가득 메워주고 싶었던 모습이 맴돈다. 홀로 빛과 어둠이 차례로 번쩍거리는 곳에서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버틸 수 없이 흔들리던 그 공간에서 원래 있어야 할 그곳으로 돌아가며 빛의 흔적을 짙게 남긴다. 시점이 어긋나며 만날 수 없을 것 같았던 딸과 아빠가 마주하는 순간은 나오지 않았지만 이 장면이 끝나면 두 사람은 그때처럼 부둥켜안고 따뜻함을 나누고 있을 것만 같다.
영화는 그 순간의 기억을 담는 매개체로서의 역할을 한다. 제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영화의 모습은 항상 좋을 수는 없다. 개인의 취향과 감상은 언제나 다르니까. 그래서인지 이번 영화는 짙게 피어나는 색감 속에 즐비한 감정의 나열은 다소 복잡하게 보였다. 명확하게 표현되는 것들이 적은 탓에 시차를 두고 벌어진 이들 사이의 모든 것들이 덕지덕지 붙은 데다가 뒤섞인 느낌이 들었다. 또한 기억의 격차 사이에 생략된 이야기들은 20년 사이의 감정선을 모두 이해하기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잘 만들어졌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지루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거칠고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난잡하게 섞이다가 마음을 울리며 끝끝내 맴돈다. 영화를 볼 때도, 보고 나서도 닿지 않을 것 같았던 영화의 향취는 또 다른 기억으로 다가와 흔적을 남긴다. 시간이 지날수록 짙어지는 이 여운은 소피가 20년이 지나고 나서야 그때의 아빠를 이해한 것과 같은 감정일 것이다. 이 영화는 제목 자체로 애프터썬이다. 기억의 향취가 가득해 아득해짐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