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3-09-18 23:30:17
[SICFF 데일리] 기울어진 세상을 헤엄쳐
영화 <나의 수호신>
SYNOPSIS.
위험에 빠진 아이, 이상하고 귀여운 수호 동물과 마주치다
PROGRAM NOTE.
절친 타이스와 함께 수영 대회를 준비 중인 열한 살 소녀 아마. 아마는 스스로 네덜란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세네갈 출신인 아마의 부모님은 망명 신청을 거절당해 더이상 합법적으로 네덜란드에 거주할 수가 없다. 어느 날 남동생과 엄마가 불시에 잡혀가고, 도망친 아마는 아빠를 찾아 헤매던 중 거대한 호저가 자신을 따라오고 있음을 알게 된다. <나의 수호신>은 네덜란드에 있는 수많은 불법 이민자들이 평범하게 살아가는 현실에서 착안한 판타지 영화다. <나의 수호신>은 자신의 집이라 생각했던 곳에서 쫓겨나는 상황에 직면한 아이의 이야기를 통해 ‘집의 의미’를 묻는다. 이민자 이슈는 현대 사회에서 가장 큰 논란 중 하나이지만, <나의 수호신>은 인권이라는 큰 틀 안에서 우정과 연민의 힘으로 해피엔딩을 맞는 동화 같은 이야기를 통해 현실의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기를 소망하는 작품이다. (최은영)

우리가 사는 도시를 집어들고 가방 털 듯 탈탈 털면, 거기서 후두둑 떨어지는 동물들은 개, 고양이, 햄스터… 같은 것만이 아닐 거라는 이야기를 어디에서 읽었더라. 생각지 못한 동물들이 후두둑 떨어질 거라는, 정글에서나 볼 거라고 생각했던 동물들이 실은 우리와 같은 도시에 살고 있다는 그 말을.
그렇다면 사람은 어떨까. 나와 비슷한, 아주 닮지는 않았어도 대충 엇비슷한, 그리고 나와 다르지만 대충 예상했던 사람의 범위, 그 바깥의 누군가를 분명 마주하게 되지 않을까.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을 도시 한복판에서 마주칠 거라 생각하지 않듯이.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익숙한지 아닌지 고작 그 문제다. 누군가의 상상력 하나로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이 우리에게 너무 익숙해진 것처럼.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을 그려 본다면, 우리 모두 똑같이 그릴 수 있을 것처럼.
우리의 주인공 아마는 그렇게 도시를 탈탈 뒤집으면 조금 당혹스러울 법적 지위를 가진 채로, 네덜란드 로테르담에 살고 있다. 성격도 밝고, 공부도 잘하고, 네덜란드 최고의 수영 선수를 보며 꿈을 무럭무럭 키우고 있는 될성부른 수영 유망주 어린이이기도 한데, 대회 하나를 나가려고 해도 ‘써도 될 것’과 ‘써서는 안될 것’을 신중하게 골라내야 하는 처지에 있다.
아마가 사는 집은 그 자체로 하나의 마을 같다. 아이들을 씻기고 자신도 씻기를 즐겨 하는 이웃이 샤워기를 틀면 계단참으로 물이 주르륵 흐르는, 그만큼 연결되어 있는. 그러나 아마의 가족은 이런 상황에 불평을 일삼기보다 자연스러운 생활의 풍경으로 받아들이면서 살고 있다. 아빠와 장난칠 때나 썼던 소금 통 하나를 사러, 그 심부름 하나로 아마의 생활이 영영 달라질 때까지는.
집에 있던 아마의 어머니와 동생은 “불법 이민자”여서 잡혀 가고, 아마는 놀이터에 숨어서 일을 나가신 아빠를 기다린다.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아마의 세상이 전체적으로 기울어 있음을 관객은 이내 깨닫게 된다.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앵글이 항상 기울어 있다. 학교도, 경찰서도, 집 바깥도, 전부 다 기울어 있다. 아마가 아빠를 찾아 들어간 “드 로테르담” 건물, 아빠의 일터 또한.
이 기울기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것이다. “불법 이민자”에 대한 편견은 말할 것도 없고, 아마는 스스로가 네덜란드 사람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자랐기 때문에, 자신이 불법 이민자이고 그 편견 속에 살아가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사무직과 청소 일에 대한 편견도 가지고 있다. 아버지가 일한 업체의 이름은 Sunshine services이지만, 역설적으로 선샤인이라고는 전혀 빛나지 않는 밤에만 일하고, 밤으로 취급받는다. 세계가 기울어 있는 것이 사실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 서글픈 현실에 갑자기 거대한 호저가 나타난다. 영화 자막에서는 고슴도치로 번역되었지만, 호저는 고슴도치와 다르다. 꿀벌과 말벌 정도의 차이랄까. 고슴도치가 가시를 있는 힘껏 세워도 멀리서 (그러니까 그 가시가 나를 공격하기 않을 거리에서) 보면 귀엽겠지만, 호저가 가시를 세우는 모습을 멀리서 보면… 그로테스크하다.
나는 호저라는 생물이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호저를 처음 봤는데, 심지어 인도의 동물원에서 야행성 동물들을 모아 놓겠다고 조명을 있는 대로 침침하게 해 둔 어둠 속에서 그 가시가 파르르 서는 모습으로 처음 보았다. 뭔데 저거. 뭐야. 왜 무서워. 무서움을 익히 아는 다른 동물보다, 전혀 모르는 생물의 가시가 더 무서웠다. 알고 보니 호저는 정말 만만치 않은 생물이었다. 호저의 가시에 공격을 받으면 맹수도 배겨낼 재간이 없다.
그러나 이 영화, <나의 수호신> 원제인 ‘토템’답게, 이 영화 속 거대한 호저는 귀엽기만 하다. 도시 속의 사람은 내지 못한 위로의 울음소리를 호저가 낸다. 제목이 <나의 수호신>인데 자막에는 ‘토템’으로 나와, 수많은 어린이 관객들이 엄마에게 “토템이 뭐야?”를 물어야 했음은 아쉬운 포인트지만… (참고로 네이버 국어사전에 따르면 토템은 “부족 또는 씨족과 특별한 혈연관계가 있다고 믿어 신성하게 여기는 특정한 동식물 또는 자연물. 각 부족 및 씨족 사회 집단의 상징물이 되기도 한다.”)
커피 머신도 사랑이 필요하다며 쓰다듬는 사람이 있는 도시에서, 아마는 그저 호저와 함께 걷는다. ‘상상 속의’ 존재가 아니라면 같이 걸을 상대도 없는, 대도시 속 외로운 아이의 삶. 집이었던 곳은 경찰과 개의 손에 마치 범죄자의 소굴처럼 취급되며 서슴 없는 수색의 대상이 되지만, 호저는 깡통 차기 놀이 상대가 되어 준다. 마치 전통 속 여우 사냥의 한 장면처럼, 아마가, 사람이, 개에게 쫓기는 장면이 현실에서는 연출되지만 호저는 파르르 가시를 세워 아마를 지켜준다.
극중에서 호저를 볼 수 있는 인물은, 아마와 마음의 결을 같이 하는 이들뿐이다. 애초에 아마의 옆에 서 있었던 이들을 제외하면, ‘그리오grio’ 그러니까 가수이자 시인인, 노래로 이야기를 전해 이야기가 사라지지 않게 하는 일을 사명으로 품은 이들밖에 없다. 이는 영화를 포함한 예술의 기능 중 주요한 한 지점을 짚는다. 기울어진 세상에서도 노래는 계속되어야 함을.
‘온 세계가 당신의 조국’이라는 네온사인이 무의미하게 빛나는 거대한 도시에서, 정작 도시 안에서 평생을 자란 사람을 밀어내는 도시에서, 아마는 호저의 등에 올라 기울어진 세상을 걷는다. 이 차가운 현실에, 이야기 하나를 놓는다. 그 순간 세상은 변한다.

기울어진 세상에서도 ‘상자 바깥에서, 틀을 깨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쩌면 그들이 그리오grio의 후예, 그러니까 이야기가 잊히지 않도록 하는 이들인지 모르겠다. 아마가 외로운 여정을 걷는 내내 곳곳에서 아마를 먹이는 손길이 있었듯이, 이 외로운 도시를 가방 뒤집듯 탈탈 털면, 생각지도 못한 동물들이나 사람들과 함께, 환대의 손길 또한 함께 후두둑 떨어질 것이다.
아마는 앞으로도 기울어진 세상을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아마의 정체성은 ‘네덜란드인’에서 ‘경계인’으로 달라졌을 것이다. 사실은 우리 모두 경계인임을 우리는 언제 깨달을 수 있을까. 여기 계속 사는 거냐는 질문, 아마와 타이스 두 아이의 물음에 부모님의 대답은 동일했다. “그래, 당분간은.” 이사를 가든 추방을 가든, 결말이 어떻든 우리 여기서 당분간은 살아갈 존재들임은 동일하다. 도시를 뒤집어 탈탈 털면 후두둑 떨어질 존재들이라는 사실만큼은 동일하다.
그게 다르게 취급되는, 기울어진 세상을 우리 살아가지만, 이 기울어진 세상에서 노래와 환대의 손길은 계속되니, 새처럼 날아드는 그 손길과 멜로디를 따라 계속 헤엄쳐갈 일이다. 씩씩하게!
9월 15일 20:00-21:37 롯데시네마 은평 5관
9월 17일 16:00-17:37 롯데시네마 은평 6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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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그대로의 당신이 좋아요.
12년 만에 돌아온 <브리짓 존스의 베이비>는 5월 9일 브리짓의 생일로 시작한다. 브리짓을 떠올리면 자동적으로 머릿속으로 재생되는 ‘All by myself’가 흐른다. 소파에 앉아 홀로 Happy birthday to me를 부르다 ‘내가 어쩌다 또 이런 꼴이 됐을까?’하고 말하며 All by myself 음악을 꺼버리는 브리짓.
생일 아침엔 널 빨리 낳으려고 매운 것을 먹고, 23시간이나 진통을 했다는 엄마의 무용담과 남자 없이도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엄마의 잔소리로 시작했다. 예쁜 아기와 턱이 멋진 남편은 없지만, 다이어트에는 성공했고 아직 양로원에 가기엔 너무 팔팔하니, 삶이 우울한 것만은 아니라고 하면서도 43살 이나(?) 된 것을 직장 동료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 한다. 그녀의 바람과 다르게 출근과 동시에 장난스럽게 만든 R.I.P(rest in peace ; 편히 잠드소서) 비석 이미지를 건네 주며, 생일케이크 가득 43개의 초를 꽂아 노래를 불러주는 동료가 있으니, 그녀는 사랑받는 삶을 살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판넬로 RIP비석을 들고 있는 것을 보며, 기분이 이상했다. ‘저기요... 43살이 그렇게 많은 나이인가요?' 아마도 생물학적으로 아이를 가지기엔 어려운 나이임을 표현하려고 한 것이라 생각하지만)
처음 <브리짓 존스의 일기>를 보았을 때, 그러니까 2001년 나는 이십대 초반이었고, 서른 두 살 영국에 살고 있는 브리짓을 보며 삼십대가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하고 생각했다. 적극적으로 살기로 위해 일기를 쓰기로 결심한 브리짓처럼, 나 역시 한동안 쓰다 멈춰 둔 일기를 다시 쓰고 싶었다.
사실 영화에서 브리짓은 내내 엉망진창의 삶을 사는 것 처럼 나오지만, 바람 핀 남자에게 이대로 질 수 없다며 자존감 회복을 위해 술을 버리고, 책을 새로 사고, 운동을 하고, TV매체로의 새로운 꿈을 향해 도전하는 멋진 사람이었다. 사실 면접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도 꽤나 좋았다. 어찌되었든 나를 꾸며 가식적으로 보이려고 한 방송국에서는 부족함을 들켜 버리고, 상사랑 자서 지금 직장을 그만 둬야 한다는 솔직한 대답에 출근하라고 한 것은 영화에서 내내 이야기 하고 있는 “지금 그대로의 당신이 좋아요.” 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으니까.
브리짓 존슨의 일기 시리즈는 로맨스라는 옷을 입고 있지만, 사실은 브리짓의 현실적인 고민과 자아발견 성장의 이야기다. 뉴스 PD로 살고 있는 43살에도 직장에서의 자신의 자리를 걱정하며, 남들이 하기 꺼리는 일에 자원하고, 아빠가 누군지 모를 임신에도 일단 내 아이임은 확실하니, 자신의 결정대로 앞으로 성큼 성큼 나아간다.
다이어트에는 성공했지만,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하고 여전히 엉뚱하고 실수하고 그럼에도 불구 하고 잘 웃고, 잘 헤쳐 나가는 브리짓의 시간을 지켜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좋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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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 그 엉망 진창에 대하여.
이 글은 영화 [루이스 웨인;사랑을 그린 고양이 화가]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랑. 봄의 다른 이름이자 숨겨진 본심처럼 느껴지는 단어다.
오래 기다려온 아름다움으로 눈앞이 아찔해지는 경험은 마치 사랑에 빠진 연인의 마음과도 같아서, 짧아서 언제나 아쉬운 마음도 더해져 계절 내내 우리를 웃고 울게 한다.
영화 [루이스 웨인; 사랑을 그린 고양이 화가]는 마음이 솜털처럼 푹신해지는 봄과 사랑을 둘 다 담은 영화이다. 또한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필모에도 봄바람이 부는 것 같은 영화이니 터지는 꽃망울처럼 거부할 수 없는 영화가 되기를 빌어본다.
돋보기를 프리즘으로 바꾸기;베니가 사랑에 빠지면 일어나는 일.
사진 출처:다음 영화
영화에서 제2의 주인공이라 불릴만한 요소는 당연히 고양이다. 무려 산책하는 고양이 피터의 귀여움을 앞세웠으며 루이스 웨인은 익숙지 않았던 고양이 그림으로 자신의 유명세를 날렸으니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영화에는 고양이만큼 폭력적으로(?) 존재감을 어필하지는 않지만 분명 다른 주인공이 하나 더 있다. 사랑을 속삭이는 두 연인의 대사에서도 빠지지 않는 대상인 "빛"이다.
루이스의 삶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단 한 곳, 삽화에 집중한 돋보기 같은 삶을 살았다. 그는 성공적으로 종이의 한 부분을 태울 수 있었지만 다른 모든 것들에 있어서는 그 어떤 요령도 터득하지 못한 채 살았다. 삽화를 그리는 행위 외의 모든 것은 그를 그저 괴롭히는 것들에 불과했고, "쓸데없는" 것들에 정신을 빼앗길수록 그림에 집중하려는 마음은 더 강해졌다.
루이스의 삶은 에밀리를 만나면서부터 달라졌다.
그녀는 프리즘과 같은 삶을 살았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일들을 총천연색 무지개로 바꿀 줄 알았다. 덕분에 루이스는 난생처음 보는 색의 축제 속에 삶을 내던질 수 있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집중할 줄 알았고, 서로에게 받은 마음을 여러 색으로 한껏 풀어낼 수 있었다. 두 사람이 만나 행복을 만들어가는 장면들에 유독 빛이 아름답게 촬영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비록 영화이지만 화면 가득한 빛들을 보면 움츠러들었던 마음도 보송하게 마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사랑.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던 것에 대해서.;하나의 사랑이 아닌 다양한 사랑.
사진 출처:다음 영화
영화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타이틀에 내걸었다.
하지만 우리가 이 단어에서 바로 떠올릴 수 있는 "연인 사이에서 존재하는 감정"만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천륜이라는 단어에 이보다 더 어울릴 수 없는 가족에 대한 애증에 가까운 사랑. 루이스가 직업에 대해 가진 사랑, 그리고 루이스의 작품으로 인해 많은 기쁨을 얻은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함께 보여준다.
에밀리가 루이스에게 삶을 보는 태도를 바꿔준 것처럼.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루이스는 조금씩 자신이 알고 있는 형태의 사랑이 아닌 다른 모습의 사랑들에 익숙해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책임감으로 착각했던 가족의 사랑과 인정을 조금씩 쌓아가고, 직업에서도 어느 정도 수준 이상의 성공을 거두었으며, 이 덕에 초라한 말로를 맞이할 뻔했던 한 예술가의 인생은 그나마 정상 궤도 가까이 올라오게 된다.
다양한 형태의 사랑이 영화에 등장할수록, 평생을 그 어떤 무언가에 눌려 살았던 루이스의 모습이 더욱 딱하게 느껴진다. 만약 에밀리마저 없었더라면, 이 모든 형태의 사랑은 그에게 평생 걸리적거리는 장애물이었을테고. 이로 인해 루이스는 에밀리를 만나기 전의 그 어벙하고 멍해 보이는 상태로 오늘도 길을 걸어가기 바빴을 것이다.
루이스는 눈치챘을까.
에밀리와의 달콤했던 시간 이외의 모든 순간들도 자신을 향한, 혹은 자신이 원한 사랑들의 다양한 형태로 이뤄졌던 삶이 존재했음을.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배우가 된 그 남자.;이젠 그냥 멋있음.
사진출처: 다음 영화
유튜버 [거의 없다]님의 최신 영상에 의하면.
배우는 크게 감정을 안으로 소화시키는데 능한 사람과 터뜨리는 것에 소질이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영화 [신세계]가 흥행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 하나도 전자에 속하는 배우 이정재와 후자의 황정민이 만났기 때문이라고.
가끔 베니(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애칭)를 보고 있으면 이 희한한 배우는 대체 어디에 속하는지 궁금할 때가 많다.
데뷔작에 가까운 상업 드라마가 국제적 대박을 치고도 자신의 목소리를 낼 줄 알고. 하는 작품마다 자신의 위치를 완벽하게 찾아들어가 어떤 오점도 남기지 않는 연기를 하는 이 사람. 호통을 쳐도. 한숨을 내쉬어도. 이 배우 외의 다른 사람은 생각도 할 수 없게 만드는 사람. 물론 아쉬울 때도 있었다.
예전에도 리뷰한 것처럼 상실에 젖은 천재의 역할에 너무 자주 거론되는 사람인 것만 같아서.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가 연기하는 모든 인물들은 다 다르게 느껴진다. 그들은 모두 각각 다른 슬픔과 고뇌를 가지고 있고 이 모든 역할들은 베니의 노력으로 우리에게 항상 마음의 이곳저곳을 울리곤 한다.
그가 어떤 곳에 속하는 배우이건 상관없이. 꾸준한 작품 활동으로 인해 우리에게 찾아와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말을 마음으로나마 전한다.
이번 영화에서도 베니는 루이스 웨인의 일대기를 연기했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 한 편에서 보여주는 연기의 스펙트럼 만으로도 그가 영화사(史)에 해야 할 일은 다 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배우가 아닌 인간 베네딕트 컴버배치만큼은 사랑이 무엇인지 충분히 느끼고 마음 가득 머금기만을 바랄 뿐이다.
마치면서
가끔 예고편이 영화를 좀 더 (효과적으로) 망친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물론 예고편이 보여주는 모습이 인물들의 인생에 있어 가장 드라마틱 했기에 루이스와 에밀리의 모습을 영화 전면에 내세운 것이겠지만. 이 영화를 두 사람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사랑 이야기로 착각하면 매우 실망하기 쉽다. 또한 고양이가 엄청 나올 것이라 예상하면 더욱 재미없는 영화가 될 것이다.
그러나 루이스 웨인의 삶과 그 안에 사랑이라는 것이 어떤 모습으로 존재했는지에 집중한다면. 단지 달콤하기만 한 영화는 아니지만 조금 더 풍성하게 감상할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아, 이제 정말 대배우가 되어버린 베네딕트의 연기도 가슴을 울리기 충분하다. 흔치 않은 그의 멜로 눈깔(?)을 감상할 수 있었기에 더 귀하기도 한 영화랄까.
카카오뷰도 있어요+_+
[이 글의 TMI]
1. 이제 어느 정도 일정이 정리되었다.
2. 응원해 주신 덕분에 좋은 조건으로 좀 더 편하게 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3. 백수 처음 해보는데 이렇게 좋은 것인 줄 몰랐음다.
4. 코로나 후유증은 많이 좋아졌지만. 여전하다.
5. 그래도 그릭요거트 퍼먹으면서 씩씩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루이스웨인사랑을그린고양이화가 #베네딕트컴버배치 #최신영화 #영화리뷰 #영화리뷰어 #네이버인플루언서 #브런치작가 #내일은파란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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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원의 밤> 잔인하지만 서정적이고 낯선 누아르
1. '양도수(박호산)' 사장의 명령으로 경쟁 관계에 있는 북성파를 제치려고 하지만 번번이 실패를 맛보던 '박태구(엄태구)'는 돌연 비보를 접한다. 누나와 조카가 모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것. 북성파가 작업에 들어온 것으로 의심한 태구는 즉시 그들의 보스를 공격하고, 북성파의 2인자인 '마상길(차승원)' 이사의 복수를 피하기 위해 도망가기로 결정한다. 러시아로 가기 전 잠시 들린 제주도에서 태구는 묘한 분위기의 '재연(전여빈)'을 만난다. 사격 연습을 하다가 갑자기 총을 자신의 머리에 겨누는 등 걷잡을 수 없는 그녀로부터 그는 뭐라 말하기 어려운 동질감을 느끼며 조금씩 편안함을 되찾지만, 태구를 향한 복수의 칼날은 이내 제주도로 들이닥친다.
영화학자 토마스 슈츠는 <할리우드 장르의 구조>에서 영화 장르의 변화를 네 단계로 나눴다. 실험 단계에서는 특정한 장르로 부를 수 있을 공통된 움직임이 포착된다. 고전 단계에서 공통의 움직임은 제작자와 관객 모두가 공유며 하나의 장르를 규정하는 특정한 이야기 전개의 공식과 도상(볼거리) 같은 관습으로 자리매김한다. 이후 장르 영화는 기존의 관습을 거부하는 불균질한 요소들이 더해지는 세련화 단계를 지나 기존에 확립된 장르의 전통을 파괴하는 마지막 바로크 단계에 다다른다. 비록 모든 영화 장르에 적용될 수는 없지만, 전반적인 장르의 흐름을 이해하는 기준으로서 위의 과정은 유용하다고 볼 수 있다.
2. 이러한 장르의 변화라는 맥락 안에서 볼 때 박정훈 감독의 누아르 영화 <낙원의 밤>은 분명히 인상적인 작품이다. 한국형 누아르의 진수를 보여준 <신세계>(고전)를 거쳐 여성 주인공을 전면에 내세운 <마녀>(세련화)로 이어진 박훈정 표 누아르가 한 단계 더 나아가려는 시도가 <낙원의 밤>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외피와 이야기의 발단이 한국형 누아르의 도상과 관습을 충실히 따르는 것에 비해, 중반부에 숨겨둔 진짜 이야기는 장르의 관습에서 탈피하고 있다.
실제로 <낙원의 밤>의 연출, 도입부, 스타일 등을 자세히 살펴보면 감독의 전작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태구가 북성파 두목을 죽이거나 조폭들이 회동을 하는 장소로 한국의 누아르, 범죄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우나와 중국집이 등장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시다. 좁은 공간에서 벌어진 액션씬 역시 감독의 전작에서 여러 차례 명장면을 남긴 바 있다. <신세계>에서는 엘리베이터 안, <브이아이피>에서는 중국의 한 아파트 복도와 방이 그 장소였다면 이번에는 차 안, 차와 차가 맞붙은 좁은 공간, 문이 잠긴 식당에서 액션이 펼쳐진다.
이야기의 발단도 마찬가지다. 양 사장의 행동대장인 태구는 시한부 판정을 받은 누나와 조카가 살해되는 것을 막지 못한다. 북성파가 자신의 가족을 죽였다고 판단한 그는 복수를 위해 북성파 두목을 살해하고, 필연적으로 뒤따를 복수의 굴레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제주도로 향한다. 이러한 태구의 이야기는 냉혹하고 음울한 담배 연기로 가득한 박훈정 감독의 특유의 연출과 스타일을 만나 또 한 번 사나이들의 의리와 배신, 피비린내 나는 복수를 펼쳐 보이려는 듯 보인다.
3. 그러나 제주도로 장소를 옮긴 후 <낙원의 밤>은 예상된 경로를 벗어난다. 당장 결말부터 각 인물에게 기대하는 바를 충족시키지 않는다. 발단에서 차례로 등장하는 태구, 양 사장, 마상길은 모두 본래 목적을 이루지 못한다. 태구는 완전히 도망치지도 못하고, 가족들의 원한을 진짜 범인에게 갚아주지도 못한다. 마상길과 양 사장은 그들의 거래와 계획을 깔끔히 끝맺는데 실패한다. 대신 타란티노 감독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충격적이고 하드코어한 결말을 통해 오직 재연만 복수에 성공한다. 이는 마치 <마녀>에서 누아르 영화의 남성 주인공의 자리가 여성에게 넘어간 것을 연상시키는 마무리다.
무엇보다도 영화의 방향성이 기존의 장르 관습적 선로에서 벗어나는 분기점은 공항에서 태구와 재연이 만나는 순간이다. 이 장면부터 영화는 그저 처음 만난 두 남녀가 새로이 관계를 만드는 데 주목할 뿐이다. <신세계>에서 '정청'(황정민)과 '이자성'(이정재)의 굳건한 관계가 형성되어 유지될지 혹은 파괴될지가 관건이었던 것과는 다르다. 의리와 정, 피의 복수를 되새기는 사나이들을 강조하는 누아르의 관습을 거부한다. 그러다 보니 복수의 칼날을 가는 마상길이 가끔씩 얼굴을 비추는 것을 빼면 영화는 중반부부터 누아르라는 사실마저 잠시 잊게 만들 정도로 일반적인 누아르 작품과는 결이 다르다. 이는 태구와 재연의 드라마를 유려한 앙상블에 담아낸 두 주연 배우, 엄태구와 전여빈의 퍼포먼스가 유달리 인상 깊은 이유기도 하다.
4. 이때 두 주인공의 관계 맺기의 중심에는 각자의 트라우마가 위치한다. 마치 거울 치료를 하듯이 서로의 과거와 현재로부터 자신의 트라우마를 마주 보고, 극복해 나가는 것이다. 태구는 시한부 판정을 받은 재연을 보면서 마찬가지로 죽을 날이 정해진 누나를 떠올리고, 죽음을 피해 도망치는 자신과 그녀가 동병상련임을 깨닫는다. 재연의 삼촌이 총을 밀수하면서 마련한 선물을 끝내 전달하지 못하는 것을 지켜볼 때는 끝내 생일 선물을 열지 못한 본인의 조카와 재연을 겹쳐 본다.
한편 재연은 온 가족을 죽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삼촌의 모습을 제주도로 도망쳐온 태구에게서 본다. 또 가족이 죽는 것을 그저 지켜보아야만 했고, 그래서 복수심을 버릴 수 없는 그녀는 가족의 복수를 한(혹은 했다고 생각한) 태구의 심정을 어렵지 않게 이해한다. 이처럼 회한과 트라우마가 뒤섞이면서 물회를 사이에 두고 애틋해지는 둘의 관계는 묘한 동질감으로 인해 우정처럼 보이기도 하고, 가족 간의 정처럼 보이기도 하며, 동시에 이성 간의 사랑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흥미롭게도 영화는 굳이 이들의 관계를 정의 내리려고 애쓰지 않는다. 구체적인 설명 대신 아름다운 영상 안에 함축적으로 담아낸다. 태구와 재연은 차가운 필터에 포착된 제주도의 아름다운 해변가에서 함께 담배를 피운다. 둘이 서로를 온전히 알아가고,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불운했던 그들의 삶에 마침내 치유와 평화를 얻고 오래간만에 행복해지는 순간, 제주도의 아름다운 풍경은 마침내 낙원이 된다. 하지만 그들의 행복은 담배 연기처럼 금세 사라진다. 아름다운 낙원에서 온기가 느껴지지 않듯이 그들은 이내 마상길의 모습으로 자신들을 매섭게 쫓아오는 섬뜩한 복수의 굴레에 다시 빠져든다. 이처럼 태구와 재연의 관계성을 불명확한 경계 안에 담아낸 결과 <낙원의 밤>은 서정적인 누아르라는 차별화된 정체성을 완성한다.
5. 다만 <낙원의 밤>이 거둔 독특한 성과는 결코 매끄럽지 않은 완성도로 인해 빛이 바랜다. 우선 플롯의 치밀함보다는 감정선과 정서를 담아내는 미장센에 힘을 준 결과물은 좋게 말하면 영화를 곱씹어 볼 기회를 주고, 나쁘게 말하면 애매하다. 명확하지 않은 두 인물의 관계성, 그로 인한 예상외의 전개는 창고와 식당에서 펼쳐지는 클라이맥스에 처연함과 잔인함이 맞부딪히는 충격을 가득 불어넣거나 그저 영문을 알 수 없는 당황스러움만을 남기면서 명확한 호불호를 유발한다.
또한 몇몇 한국 영화에서 반복되는 어설픈 유머, 임팩트를 주기 위해 잔뜩 힘을 준 인위적인 명대사들은 개성적인 캐릭터들의 수준을 따라가지 못하는 듯 보인다. 무자비한 악역임에도 불구하고 철저히 자신의 말과 약속만큼은 칼같이 지키는 마상길, 소시민적인 듯하면서도 비열함을 숨기지 못하는 박 과장과 양 사장처럼 극에 강력한 긴장감을 불어넣는 인물들도 끝내 영화의 전반적인 톤에서 따로 노는 듯한 느낌을 지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낙원의 밤>은 새로운 시도의 성취에 온전히 만족할 수는 없는, 끝내 낯섦을 새로움으로 바꾸지는 못한 한국형 누아르 영화에 머문다.
A(Acceptable, 무난함)
불완전한 영화적 시도가 담은 서늘하게 슬픈 청춘들의 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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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벗어날 탈(脫)
불일부이(不一不二), 오프닝부터 기이한 거문고 소리와 함께 전면에 떠오르는 한자어는 아리송하다. 불교 철학에서 출발한 위 구절은 ‘너와 나는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다. / (다르게 말해서)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라는 뜻이다. 의미를 풀어보니 이해가 더 복잡해진다. 두 인물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임을 짐작케 한다.
불치병에 걸려 삶의 막바지에 선 영목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108배에 매진한다. 죽음을 맞기 전, 마치 열반의 경지에 이르려는 듯 여자친구의 애닳은 전화에도 굴하지 않고 단지 절을 할 뿐이다. 숭고하게 절을 하고, 물잔을 비우고, 산책을 하고, 단상을 기록하며 번뇌를 지우기 위해 노력한다. 무겁게 생각하지 않으려하지만 도리어 생각이 많아지는 역설을 발견하는 나날이 지속되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산책을 하다가 홀린 듯 나무 더미 속 공간으로 기어들어가 붉은 꽃 한 송이를 보게 된다. 그 날 이후 영목은 붉은 옷의 형상을 목격하기 시작한다. 신경이 쇠약해져 헛것을 보게 된 걸까, 혹은 부다의 현현인가. 공포에 휩싸인 영목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박차를 가한다.
지우는 작가다. 애니메이션으로 입문했지만 이내 그만두고 그림을 그린다. 전시를 앞두고 있지만 번아웃이 온 탓에 마감기한에 쫓기고 있다. 영감을 기다리다가, 예전에 그렸던 애니메이션이나 내보라는 기획자의 독촉 전화를 받고는 자신이 애니메이션을 그만 둔 이유를 반추해보기 시작한다. 어렸을 때부터 끝을 두려워한 지우는 죽음의 필연성에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왜 모든 것은 끝내 멈추어야 하는가? 왜 모든 이야기는 끝이 나야 하는가? 과거 남자친구와 함께한 니스 여행에서 찍은 사진을 들춰보다가 어렴풋이 답을 찾고 다시 애니메이션을 그리기 시작한다.
서보형 감독의 첫 번째 장편 영화인 벗어날 탈은 실험적이다. 전형적인 영화 구조에서 벗어나 서로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야기를 병치시켜 풀어내다가, 종국에는 이어버린다. 죽음을 연료삼아 깨달음으로 나아가기위해 노력하지만, 죽음(미지의 형상)을 두려워하는 영목. 멈춤을 두려워하여 영원히 유예하려고 하지만, 사진(정지한 것)에서 생명을 포착하고 애니메이션(움직이는 것)을 다시 그리게 된 지우. 서로가 두려워하는 것을 열망하고 열망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먹고 먹히는 관계. 영화는 순환하며 점에서 거대한 고리 모양의 구조를 띠고 있다. 마치 안과 밖을 구분할 수 없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대비되는 것을 나란히 보여주면서 다름을 부각하고 있다. 여자와 남자, 상승과 하강, 멈춤과 움직임 그리고 물과 불. 영목(남성)과 지우(여성)은 각각 수직운동과 정지-움직임을 반복하며 삶(물)과 죽음(불)을 찾아 헤매고 있다. 그러나 가장 짜릿한 지점은 서로 다른 개념이 접합되는, 말하자면 불일부이가 실현되는 때이다. 영목과 지우가 만나는 순간, 죽은 줄만 알았던 해변의 사나이가 영목으로 환생한 순간, 저승사자 같은 빨간 옷의 여인이 지우로 치환된 순간.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마치 영혼을 주고받듯 성스럽게 입을 맞추며 이어진다.
지우의 애니메이션 속에서 두 사람이 합쳐지는 장면은 불일부이를 더욱 명료하게 나타낸다. 이야기 속에서 한 남성은 한 여성의 자궁으로 기어들어가 잉태된다. 남성의 모습에서 꽃을 찾으러 나무 더미 세상으로 기어들어가는 영목이 겹쳐진다. 지우는 둥그런 베개를 뱃속에서 세상 밖으로 출산해내는 연기를 하는데, 마치 지우가 영목을 출산한 것처럼 느껴진다. 서로 대비되는 것을 좇던 두 인물이 결합하게되니, 영목은 죽음을 연료삼아 추구했던 깨달음보다 삶의 기쁨이 더 중요함을 깨닫고, 지우는 끝의 두려움을 극복하여 움직이는 애니메이션을 시작할 용기를 얻는다. 삶과 죽음이 구분되지 않고 이어지니 만물은 서로 같지도, 다르지도 않다는 뫼비우스의 띠가 완성되는 것이다.
2018년 제작한 단편영화 <탈날 탈(頉)>에서 확장된 <벗어날 탈(脫)>은 정해진 포맷 안에서 제작한다는 규칙을 가지고 있었다. 4대 3비율을 사용하며, 남녀 한 명씩만 등장시키고 거문고 음악을 사용할 것. 가히 제한된 조건 속에서 창의력이 극대화된 경우라 할 만하다.
4:3, 정확히는 1.375:1(아카데미 비율)의 화면비를 사용하면서 회화적 연출이 두드러진다. 수직운동을 반복하는 영목의 움직임을 담기에 탁월했다.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며 수행에 정진하거나, 몸을 꼿꼿이 편 채로 좌선하는 모습에서 잘 드러났다. 또한 프리즈프레임을 활용하여 회화적 특성을 부각하면서도, 1초 24번 이하로 프레임을 분절하여 달리는 지우의 모습을 간격있게 표현한 장면은 움직임을 중시하는 지우의 특질을 강조하는 것에서 나아가 움직이는 이미지(Moving Pictures)라는 영화 매체의 본질까지 환유한다.
박우재 음악감독의 거문고 연주는 혼란스러운 극의 분위기를 선율로서 충실하게 표현한다.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른 채 무작정 구도하는 마음, 미지의 형상과 조우하여 혼란스러운 마음에서 영목과 지우가 만나 하나로 이어지는 장면까지. 작은 단위로 특정 비트를 표현하는 것에서 발전하여 하나의 선율로서 장면을 뒷받침하기까지 다양하게 기능한다.
로베르 브레송은 시네마토그래프를 ‘움직이는 이미지와 소리를 가지고 하는 글쓰기.’라고 표현했다. 영화는 태동 이래 끊임없이 존재론적 위협을 받아왔다. ‘제7의 예술’로 명명되며 독립된 예술로서 지위를 공고히하는가 했지만, 회화, 문학, 연극, 음악, 무용의 특징과 비교하는 방식으로 정의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브레송의 표현은 독자적인 영화의 정의를 정립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벗어날 탈>은 회화의 특징을 끌어들이면서도 가장 영화적인 방식으로 승화시켜 시네마토그래프로서 구현해내었다는 점이 신선하면서도 반갑다. 이미지(쇼트)의 충돌에서 발생하는 역학과 탁월한 사운드를 잘 버무려 영화의 본질을 존중하면서도, 인접 예술의 특성을 십분 활용하여 저변을 확장한 실험적 시도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2021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된 이후 3년 만에야 관객들을 만날 수 있었다는 사실이 개탄스럽다. 익숙하지 않은 불교 교리를 영화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표현의 한계가 직관적 동요를 이끌어내는 데 어려움이 있을 수 있으나, 정신적인 것을 시각화하여 필름 위에 환원해냈다는 점만으로도 괄목할 만하다.
원을 그리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벗어날 탈>은 부서지면서 생겨날 것을 권한다. 멸(滅)의 끝은 생(生)의 시작이고, 생의 끝은 곧 멸의 시작이니 매끈하게 이어진 마음으로 사는 것이 진정 삶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길이 되는 것이다. 인생이라는 순환의 길 위에서 마음을 기울일 것은 바라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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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흐릿한 얼굴 위로 하얀 빛
SYNOPSIS.
그녀는 하오하오와 헤어졌지만 그는 늘 그녀를 찾아냈다. 주술이나 최면에 걸린 것처럼 벗어날 수 없었다. 그녀는 늘 돌아왔고 스스로 다짐했다. "은행에 있는 50만 대만달러를 전부 써 버리면 그를 영영 떠날 거야"
그녀는 클럽에서 잭을 만났다. 잭은 항상 그녀를 데리고 다녔고 그녀를 가장 친한 친구처럼 대해 줬다.
이 일은 10년 전인 2001년의 일이었다. 세계는 21세기를 맞이했고, 새로운 밀레니엄을 축하했다.
POINT.
✔️ <비정성시>, <카페 뤼미에르>, <쓰리 타임즈>, <자객 섭은낭>... 대만 뉴웨이브의 대표자 허우샤오시엔 감독의 작품
✔️ 세기말 청춘의 정서를 흠뻑 느껴볼 수 있는 작품. 허우샤오시엔 감독은 이 작품에 대해 "요즘 젊은이들"의 빠른 속도 속 젊음을 담았다고 평한 바 있습니다.
✔️ 대배우 서기의 저력을 볼 수 있는 작품. 시나리오 없이 시놉시스로 시작해서 촬영한 영화라고 (아니 뭐라고?) 해요.
✔️ 금마장 영화제 촬영상, 영화음악상, 음향효과상 + 겐트 영화제 감독상. 칸영화제 경쟁부문에도 초청받았어요.
✔️ (재)개봉은 2024년 12월 31일. 밀레니엄처럼 찾아올 새해의 새벽에 어울리는 영화입니다.
영화가 시작되면 빛이 어슴푸레한 터널 안으로 배우 서기가 분한 '비키'가 터널을 가로질러 걸어간다. 뚝뚝 비트가 떨어지는 음악 위로, 긴 머리가 흩날리고, 현란한 무늬의 옷에 감싸인 팔을 휘적거리기도 하고... 그 위로 영화 시놉시스가 내레이션으로 등장한다. 헤어져도 계속해서 찾아오는 연인과 매인 듯 자꾸 돌아가게 되는 연인. 3인칭으로 담백하게 풀어낸 내레이션 이후 터널 끝에서 계단을 내려간 비키는,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나면, 방금 들은 내레이션이 영화에 그대로 펼쳐진다. 영화 전반은 비키의 내레이션이 나온 후 그 내용을 화면으로 풀어내는 식이다. 내레이션은 2001년으로부터 '10년 후', 즉 2001년작인 이 영화를 기준으로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비키는 '나'라는 1인칭 대신 '그녀'라는 3인칭을 사용해 내용을 풀어낸다. 우연히 만나 불 같은 사랑에 빠져 모든 걸 버리고 서로에게 엉겼던 진득한 풋사랑은, 회상의 말보다 영상 속에서 더 지리멸렬하다.
어리고 철없고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연인의 관계는 대부분 어두운 조명 속에서 흘러간다. 밤의 간접 조명, 거의 블랙라이트 조명에 가까워 흰 옷이 푸르게 비치는 클럽의 조도, 희미한 빛, 깜빡이는 불빛 아래서나 그들은 서로를 원하고 있다. 그들에게 투명하고 올곧은 직사광선은 내리쬐는 법이 없다. 아침이 되어도 빛은 간유리나 비닐이 덕지덕지 발린 창을 투과하여 들어오며, 그나마도 끊임없이 소리를 빚어내는 유리 문발에 걸려 갈가리 조각난다.
유리알 부딪는 소리는 이내 관계의 파열음으로 발전한다. 목욕 수건과 샤워 타올 차림으로 경찰을 맞이하는 이 커플의 결말은 결국 (이 시대 창작물에 흔했던 방식 중 하나로) 비키를 몰아넣으며 일단락되지만, 내레이션에서 "주술" 같다고 표현했던 것처럼 이 사랑은 쉽게 끝나지 않는다. 사람이 파멸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오기 쉽지 않은 까닭은 아마도... 파멸의 원인이 남긴 자욱이 너무 깊어, 설령 내게 해롭다는 사실을 안다 해도 떼어내기 쉽지 않은 탓일 것이다.
두 사람의 사랑은 무감하게 삐그덕거리며 공허하게 지속된다. 하오하오가 몇 번이나 "우리는 다른 세계에서 왔"다고 강조하듯 상반된 빛이다. 검푸른 클럽 디제잉의 빛을 집안에까지 가져오는 하오하오와 달리, 붉은 계열 물건이 많은 비키의 방은 언제나 난색 조명으로 밝혀져 있다. 간유리와 유리 발로 깎이고 깨져 들어오는 빛일지언정 같은 빛 안에 있던 날들은 이미 바랬다.
사랑이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와도 발을 내딛어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중에는 사랑을 징검다리처럼 밟아야만 발을 내딛는 이들이 있다. 땅 위에 단단히 두 발을 딛고 서는 대신, 사랑에서 다음 사랑으로, 때로는 불안한 발을 서서히 옮기느라 두 개의 돌 위에, 발을 괴고 있는 것이다.
휘적휘적 걷던 비키는, 유리알 같은 파열음을 남기며 끈질기게 이어져온 하오하오와의 인연이 잠시 소강 상태에 들어섰을 때 잭을 만난다. 잭은 의아하리만큼 충성스러운 자세로 비키를 보호한다. 억지로 약을 빼앗아야 했던 하오하오와 달리, 그는 부엌에 서서 비키에게 먹일 무언가를 요리한다. 끊임없이 괜찮다는 말을 해준다.
그러나 잭의 요리는 비키의 입맛에 맞지 않아 매운 소스를 몇 번이나 다시 뿌려야 하고, 반대로 잭의 담배는 비키에게 너무 강하다. 도무지 맞지 않는다. 내레이션이 먼저 펼쳐진 후에 영상이 펼쳐져 비교적 알기 쉬웠던 전반부와 달리, 잭의 시간은 영상이 먼저 펼쳐진 후 내레이션으로 정리된다. 하오하오에 비해 잭은 알기 어려운 인물이다.
엉망진창으로 자기를 좀먹는 관계라는 걸 알았다 해도, 요즘 같으면 인터넷에 올리자마자 헤어지라는 댓글이 빗발칠 (아니면 <무엇이든 물어보살> 나와서 서장훈에게 한 소리 씨게 듣고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에 박제될) 하오하오여도, 그와의 관계는 최소한 비키에게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잭이 아무리 "친구처럼" 대해 주었다 해도 그는 비키에게 미지의 세계다. 그가 해결하려고 애쓰는 일이 무엇인지도 명확히 알 수 없다.
결국 잭과의 관계 속에서도 비키의 얼굴은 내내 흐릿하다. 잭의 집 부엌에는 큼직한 창이 나 있지만, 비키에 앉아있는 거실은 여전히 난색 조명으로만 겨우 밝혀져 있다. 잭의 자동차를 타고 그에게 얼굴을 온통 기대고 있을 때조차, 비키의 얼굴은 터널 속에서 스치는 조명으로 짧고 흐릿하게만 보인다.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조차 햇빛이 유리에 푸르게 반사되어 얼굴은 흐릿하다. 손에 쥔 머그컵에도 흐린 얼굴 무늬가 찍혀 있다.
영화 내내 비키의 얼굴은 흐릿했다. 흐릿한 간접 조명에 그림자 져서, 클럽의 검푸른 조명에 실루엣만 남아서... 심지어 일본 혼혈 형제와 함께 향했던 유바리 시에서 신나게 눈밭을 뛰어 다니던, 모처럼 생기 있어 보이던 그 날조차 눈밭에 푹 찍은 얼굴은 흐릿한 흔적만을 남겼다. 사랑 비슷한 것에서 사랑 비슷한 것으로, 제 발로 땅 딛고 가기보다 불안하고 빠른 발걸음으로 겅중겅중 넘어온 비키의 사랑이 그랬듯.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에서 눈 쌓인 유바리 영화의 거리를 걸을 때, 낯선 외국어를 입내 내어 따라할 때 비로소 비키의 얼굴은 환하게 빛난다. 그 순간에 이르러서야 내레이션은 잭과 하오하오의 순간들을 무감하게 서술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에 대한 감상을 밝힌다. 그리움이 묻어 있던 잭의 외투를. 해가 뜨면 사라져 버리는 눈사람처럼 느껴졌던 하오하오, 그의 불안을 끌어안고 사랑을 나눈 추억을. 비로소 비키는 사랑의 온전한 서술자가 된다.
그 자리에 영화가 있다. 정갈하게 낡아 가는 오래된 포스터들이, 그 안에 담긴 이야기들이 우리의 흐릿한 얼굴을 비춘다. 흰 눈처럼 빛을 반사해 우리 마음을 들여다 보게 하고, 1인칭의 언어로 나의 사랑을 서술하게 한다. 아무 것도 없이 흰 눈만 내리는 것 같은 그 거리에, 영화가 있다. 우리의 마음이, 있다.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참석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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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나 디즈니가 일깨워주는 ‘나’라는 기적
? About Mo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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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론 하워드 감독 / 스테파니 비트리즈, 윌머 발더라마 목소리 출연
미국, 콜롬비아 / 109분 / 애니메이션 / ALL
2021.11.24 개봉 (D+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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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Words Review
언제나 디즈니가 일깨워주는 ‘나’라는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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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int
린-마누엘 미란다 음악감독의 오리지널 뮤지컬 넘버, 화려하고 알찬 색감, 따뜻한 가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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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
디즈니의 올해 네 번째 애니메이션 <엔칸토 : 마법의 세계>를 드디어 만나고 왔다. 그간 흥행했던 디즈니 애니메이션 <라푼젤>과 <주토피아>를 연출한 ‘바이론 하워드’와 뮤지컬 넘버의 거장 ‘린 마누엘 미란다’가 의기투합했다. 멕시코 문화를 속속들이 잘 풀어낸 <코코>에 이어 <엔칸토>에서는 콜롬비아 문화를 다채롭게 잘담아냈다. 그만큼 포스터에서부터 알 수 있는 것처럼 색감이 정말 화려하다. 개인적으로는 지금까지 본 디즈니 애니메이션 중에 단연 으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보는 눈이 매우 즐거웠다. 이번 <엔칸토>를 보면서 확실히 느낀 것이지만, 디즈니 영화의 주제는 항상 ‘자신’으로 부터 시작해서 귀결된다. 나 자신의 수많은 단면 중 하나하나의 감정들 혹은 가치들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 올해 개봉했던 영화들로 예시를 들어보자면, <소울>은 행복,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은 도전, <루카>는 사랑, 그리고 <엔칸토>에서는 진실을 그린다. 어쩌면 모두 당연한 것들일지라도 당연한 만큼 스스로 깨닫기 힘든 법이다. 세상의 모든 가치들에 비례해 내가 느끼는 감정들과 생각들은 일일이 나열할 수 없다. 그만큼 디즈니도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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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ore (3.5)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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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대사
“기적은 너희가 받은 능력이 아니라 너희 자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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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비스 리뷰 - 시대의 아이콘으로 메세지를 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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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의 아이돌, 시대의 아이콘, 영원한 슈퍼스타
`엘비스`의 모든 것이 뜨겁게 펼쳐진다!
미국 남부 멤피스에서 트럭을 몰며 음악의 꿈을 키우던 19살의 무명 가수 `엘비스`.
지역 라디오의 작은 무대에 서게 된 `엘비스`는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몸짓과 퍼포먼스로 무대를 압도하고,
그에게 매료된 관객들에게 뜨거운 환호성을 받는다.
쇼 비즈니스 업계에서 일하던 `톰 파커`는 이를 목격하고
`엘비스`에게 스타로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하며 함께할 것을 제안한다.
자신이 자라난 동네에서 보고 들은 흑인음악을 접목시킨
독특한 음색과 리듬, 강렬한 퍼포먼스, 화려한 패션까지
그의 모든 것이 대중을 사로잡으며 `엘비스`는 단숨에 스타의 반열에 올라선다.
그러나 시대를 앞서 나간 치명적이고 반항적인 존재감은 혼란스러운 시대 상황과 갈등을 빚게 되고
지금껏 쌓아온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고 압박하는 `톰 파커`까지 가세해
`엘비스`는 그의 뜻과는 다른 선택을 하게 된다.
이로 인해 평생을 함께한 매니저 `톰 파커`와의 관계도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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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니가 어릴 적 만났던 괴물 [몬스터 콜과 BENEE의 Monsta] (가사/해석/lyrics)
매일 밤 우릴 찾아오던 괴물,
어쩌면 우리가 부른 게 아닐까?
A Monster Call X Monsta FMV
*source
Benee - Monsta
몬스터 콜 (2016)
*수익을 창출하지 않는 채널입니다.
*추후 수익 발생 시 원저작자에게 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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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도그데이즈> 메인 예고편
사람도, 강아지도 '개' 귀엽다! 행복만 가득해지는 [도그데이즈] 메인 예고편 공개? 2024년 기분 '개' 좋은 영화 2월 7일은 극장에서 [도그데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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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그녀가 사라졌다>
사라져버린 '루시' 그녀는 환상일까? 현실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