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diamaniac2023-09-18 02:11:39
[SICFF 데일리] 진정한 어른의 역할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 〈좋은 집〉
2023 제11회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에 방문했다.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 내'어른들을 부탁해 - 단편'을 감상했다. 해당 섹션은 어른의 마음으로 바라본 어린이에 관한 보다 깊은 주제를 다룬 11편의 단편영화가 소개된다.
※ <좋은 집>의 스포일러가 존재하니 유의 부탁드립니다. ※
<좋은 집>
중개인 해진의 부동산으로 보호종료아동 연우가 집을 구하러 온다. 해진은 이전 세입자들을 문제 삼으며 연우의 계약을 거부하는 집주인과, 오늘 꼭 집을 구해야만 하는 연우 사이에서 갈등한다.
'어른들을 부탁해 - 단편' 프로그램의 첫 이야기인 '좋은 집'은 보호종료아동 연우와 중개인 해진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이 이야기는 어른으로서의 책임과 갈등, 그리고 사회에서 처음으로 발 딛는 보호종료아동의 노력을 다룬다. 연우는 집을 구하기 위해 중개인 해진을 만난다. 해진은 처음에는 연우를 돕기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계약을 성사시킨다. 그러나 집주인은 연우가 보호종료아동인 사실을 알게 되면 계약을 거부한다. 이때 해진은 집주인의 결정에 동조하지만, 결국에는 연우를 도우려고 한다.
'좋은 집'은 어른으로서의 역할과 책임을 강조하며, 사회에서의 어른들의 역할에 대해 깊게 생각하게 한다.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해진과 집주인의 다른 접근 방식을 통해 어른으로서의 책임을 비교하고, 어떻게 더 나은 결정을 내릴 수 있었을지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된다. 해진은 연우를 위해 최선을 다하며, 이로써 어떤 상황에서도 더 나은 삶을 찾는 데 어른들이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보여준다. 그러나 집주인은 연우의 보호종료아동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결정을 내린다. 이로 인해 우리는 사회에서 어른들이 어떻게 돕고 지원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다.
더 나아가, '좋은 집'은 연우와 같이 사회에 나온 보호종료아동들을 위한 진정한 어른의 도움과 지원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러한 아이들은 자립과 독립을 위해 특별한 지원과 안전망이 필요한 현실이다. 그들을 위한 금전적인 지원뿐만 아니라 교육, 상담, 직업 훈련 등의 실질적인 지원이 필요하며, 이러한 지원을 통해 그들이 사회로 나온 후에도 안정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중요하다.
'좋은 집'은 이야기를 통해 사회적 문제와 어른들의 역할에 대한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며, 보호종료아동과 같이 어른으로 성장하려는 이들을 지원하는 방법에 대한 고민을 자연스럽게 일깨워준다.
*영화 전문 웹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프레스로 초청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Relative contents
-
- ‘밸리 오브 러브’에서 찾는 진정한 균형의 의미
균형은 어느 한쪽으로 기울거나 치우치지 않은 상태를 의미한다. 오늘날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균형에 관심이 많은 시대를 살고 있다. 일과 삶의 균형을 의미하는 워라밸, 규칙적이고 생산적인 삶을 추구하는 갓생 같은 키워드 속에도 균형이 숨어있다. 추구하는 방향이나 목적은 조금씩 다를지 몰라도 그 안에 숨겨진 본질은 같다.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은 균형 잡힌 상태를 이상적으로 보는 것이다.
기실 우리가 이상향으로 삼는 이들도 균형이라는 단어와 잘 어울린다. 그들은 사회적인 성공을 이루었으나 이에 집착하지 않고, 지나친 감정의 증폭을 느끼거나 부정적인 에너지에 몰두하지도 않는다. 이성적이고 긍정적이며 많은 이들의 찬사를 받는다. 반면 ‘균형’을 잃어버린 이들에 대한 시선은 냉정에 가깝다.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고 자신을 잘 컨트롤해야지”라는 말들이 이러한 사회적 시선과 심리를 대변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균형에 몰두하게 된다. 그것만이 옳은 길 같이도 느껴진다.
하지만 때로는 의문이 든다. 부정적인 감정, 일상의 파괴 등 여러 형태의 불균형은 그저 잘못된 것일까? 우리가 찾는 균형이란 결국 무엇일까? 우리 삶에 존재하는 불균형과 균형의 의미를 영화 <밸리 오브 러브>와 함께 찾아보고자 한다.
세 사람 사이엔 없는 것,
<밸리 오브 러브>영화 <밸리 오브 러브>(Valley of Love, 2015)에는 이혼한 부부 이자벨과 제라르가 등장한다. 오래전에 이혼한 두 사람은 오랫동안 왕래하지 않고, 그사이에 새로운 가정을 꾸린다. 그러던 어느 날, 두 사람은 아들 마이클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마이클은 죽기 전 두 사람에게 “두 분이 같이 있으면 나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알쏭달쏭한 메시지를 담은 유언 같은 편지를 남긴다. 아들을 다시 만나기 위해 데스밸리를 여행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서 그들이 지키고 싶던 삶의 균형이 깨졌음을 엿볼 수 있다.
첫 번째 균형의 상실, 부모와 아들
이미지 출처: 영화 <밸리 오브 러브>(Valley of Love, 2015)첫 번째 균형의 상실은 부모와 아들의 관계에서 드러난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복잡하지만, 양육과 자립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로 축약된다. 이상적인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상호 존중과 교감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과 관심으로 양육하고, 자식은 부모의 보살핌을 받지만, 독립적인 인간으로 성장한다. 하지만 이자벨과 제라르, 마이클의 관계에서는 이를 찾아볼 수 없다.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소통의 부재다. 부부가 이혼한 후 마이클은 7살까지 어머니와 살고, 이후에는 아버지에게 보내진다. 이후 제라르가 마이클을 기숙학교로 보내며 세 사람의 관계는 완전히 단절된다. 데스밸리를 돌아보던 중 이자벨은 “자기가 낳은 자식을 어떻게 안 볼 수 있을까?”라고 자책하고, 제라르는 마이클의 친구조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고 고백한다.
마이클이 부모와 만나는 걸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제라르는 말하지만, 세 사람 사이에는 이미 모든 애정과 관심이 균형을 잃고 망가졌음을 알 수 있다. 두 사람은 아들의 죽음까지도 타인에게서 전해 듣는다. 틈틈이 자신의 또 다른 아이들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확인하거나, 딸들의 소식을 전달하는 두 사람 의 현재 모습과 극명한 대비를 준다.
두 번째 균형의 상실, 이자벨과 제라르
오래 전에 이혼한 이자벨과 제라르는 겉으로 보기에는 나쁘지 않은 관계처럼 보인다. 오랜만에 만난 그들은 큰소리로 다투는 대신 가벼운 인사를 나누며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는다. 하지만 평화롭게 보였던 관계는 여행을 거듭할수록 점차 변한다.
처음부터 아들의 요구에 따라 데스밸리를 여행하는 것에 회의적이었던 제라르는 약속했던 일주일을 채우지 않겠다고 선언해 이자벨의 분노를 산다. 이자벨은 제라르와 다투던 중 “나쁜 놈”, “알코올 중독자”라며 거침없이 힐난한다. 영화에서는 두 사람의 직접적인 이혼의 원인이 드러나지 않지만, 이러한 모습에서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오래된 갈등이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서로의 감정을 이해하고, 상호 존중하며 서로의 책임과 역할을 다하는 것을 많은 이들이 이상적인 부부로 이야기한다. 이자벨은 “우리도 마찬가지야. 각자 살기 바쁘니까.”라는 말로 자신들의 과거를 축약한다. 하지만 최소한의 교류도 하지 않았던 두 사람의 모습에서 균열만 남았음을 알 수 있다.
세 번째 균형의 상실, 삶과 죽음
이미지 출처: 영화 <밸리 오브 러브>(Valley of Love, 2015)아들 마이클의 죽음을 뒤따르는 만큼, 영화는 삶과 죽음의 경계와 균형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다룬다. 이자벨은 아들의 죽음에 대해 “내 잘못인가?” 묻고, 제라르는 “우리가 낳았으니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고 답한다. 이성을 찾으려 하지만 아들의 죽음 앞에서 두 사람이 얼마나 자책하고 괴로워하는지를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이성과 감정 사이에서 균형을 잃은 이자벨은 좀처럼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아들이 살아있을 것이라 믿는 이자벨의 바람처럼 영화 또한 삶과 죽음에 대한 경계를 흐릿하게 연출한다. 아들 마이클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묘사하거나 보여주지 않아, 관객들까지 ‘죽음’을 의심하게 만드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주인공들이 겪는 초자연적인 현상이다.
이자벨은 혼자 호텔 방에 있던 중 누군가의 인기척을 느끼고 소리를 지른다. 놀라 달려온 제라르에게 이자벨은 누군가 자신의 발목을 잡았다고 말하며 그것이 마이클일 것이라 확신하지만, 제라르는 이를 믿지 않는다. 하지만 다음날 이자벨의 발목에 붉은 자국이 남는 둥, 이자벨이 겪은 일이 단순한 환상이나 착각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두 사람이 겪은 일은 마이클이 살아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상실의 아픔에 무너진 두 사람이 여전히 아들과 연결되어 있음을 바라고, 삶과 죽음의 경계조차 잊고 싶어하는 갈망을 드러낸다.
우리가 찾는 균형이라는 환상
이미지 출처: 영화 <이터널 선샤인>(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2005)
<밸리 오브 러브>의 두 사람이 여행을 통해, 자신들의 삶의 균형이 무너졌음을 확인하는 것처럼 영화 <이터널 선샤인>(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2005)은 기억 삭제라는 장치를 통해 균형을 재조명한다.
오랜 연인이었던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서로를 상처 입히며 이별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은 고통을 잊기 위해 서로에 대한 기억을 지우게 된다. 고통스러운 기억은 물론, 추억까지 사라지는데 조엘은 클레멘타인과의 추억을 유지하기 위해 기억 삭제를 멈추려 한다. 하지만 조엘의 노력은 물거품으로 사라지고 두 사람은 서로를 잊게 된다. 기억을 잃었지만 두 사람은 다시 사랑에 빠지고, 기억을 지웠던 과정까지 떠올리게 된다.
<이터널 선샤인>에서 기억 삭제는 보편화된 것으로, 상처, 단절 등 여러 부정적인 상황과 이로 인한 감정의 불균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이상적인 해결책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다시 관계를 이어가기로 결정하며 과거의 고통까지 받아들인다. 이는 삶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불균형의 반복과 갈등 사이, 우리가 찾던 균형이라는 이상이 진정 무엇인가 되묻게 한다.
‘진짜’ 균형을 찾는 방법
이미지 출처: 영화 <밸리 오브 러브>(Valley of Love, 2015)
제라르와 이자벨은 아들의 요구대로 데스밸리를 여행하던 중, 아들의 죽음이 현실임을 알게된다. 제라르는 마이클의 환상을 만나고 “우리를 용서한다고 말했다”며 울음을 터트린다. 두 사람이 아들의 죽음과 깊은 깊은 상실감을 오롯이 받아들이는 순간, 완전히 끊어졌던 부모와의 연을 다시 잇고자 했던 마이클의 마지막 부탁이 이행되고 깨어진 세 사람 사이의 균형이 맞춰짐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우리가 찾고자 했던 삶의 균형은 아픔을 외면하고 억지로 만들어낼 때가 아니라, 모든 상실과 불균형을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회복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살다보면 여러 상처를 입게 된다. 그 과정에서 이성을 잃거나, 부정적인 감정에 빠지기도 한다. 많은 이들이 그럴 때 스스로를 비난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우리 삶은 억지로 꾸며낼 수 없는, 예측할 수 없는 과정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불쾌한 감정과 상황을 잘라내면 우리의 삶은 완전한 균형을 찾는 것일까? 그 감정은 우리를 성장시킨다. 우리는 아픔을 느끼기 때문에 행복도 더 깊이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영화는 그것을 수없이 이야기한다. 상실은 치유의 시작이 되고, 개인은 다시 우리가 된다고. 이것이 우리가 인생의 균형을 맞춰가는 과정이라고 말이다.
* 이 글은 문화예술 플랫폼 안티에그(Antiegg)에 게재된 글입니다.
-
- 이 영화가 죽음을 대하는 태도
모든 존재는 태어난 이상 삶을 살아가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자주 품곤 한다. 삶의 의미와 목적을 탐구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렵고 모호한 문제다. 때로는 그 질문을 깊게 고민하면서 존재론적인 문제에 매달리기도 하고, 때론 이 고민이 답답하고 불편해 외부로 짜증과 분노를 표출하기도 한다. 이런 고민들은 철학적으로 매우 복잡한 문제이기 때문에, 뚜렷한 답을 찾기 어렵다. 우리는 그저 삶의 한가운데에서 갑자기 불쑥 솟아오르는 의문들을 마주할 뿐이다.
삶의 의미를 고민하는 순간들은 특별히 예측할 수 없다. 연애, 결혼, 아이의 탄생, 그리고 누군가의 죽음과 같은 중요한 사건들이 있을 때,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인간 존재의 사이클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특히 죽음은 삶의 끝을 알리는 동시에, 그 자체로 큰 고통을 동반한다. 그런 이유로, 많은 사람들은 삶의 고통과 죽음을 연결해 우울함에 빠져들기도 한다. 사춘기는 이러한 생각들이 더욱 예민해지는 시기이다. 몸과 마음의 변화를 겪으며 삶과 죽음에 대한 질문이 더욱 깊어지고, 많은 청소년들이 불안과 혼란 속에서 이러한 문제를 마주하게 된다.
이 성장의 시기에는 죽음에 대해 고민하고, 삶의 의미를 탐구하는 과정이 깊어진다. 청소년들은 자주 자신이 세상 속에서 어떤 존재인지, 삶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해 철저히 질문하게 된다. 이는 필연적으로 불안과 혼란을 동반하는데, 이 혼란을 잘 견뎌내는 것만이 삶의 복잡성을 받아들이고, 성숙한 삶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된다. 이 과정에서 죽음은 그 자체로 하나의 철학적인 화두로 등장한다.
[첫번째 감정] 리디아의 혼란
영화 <비틀쥬스 비틀쥬스>의 리디아(위노나 라이더)는 삶 전체가 혼란스러운 인물이다. 그녀는 과거 <비틀쥬스> 1편에서 이미 사춘기를 겪으며 죽음을 동경하던 청소년이었다. 당시 리디아는 세상에 대한 혼란스러운 감정과 죽음에 대한 동경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이 영화의 설정에 따르면, 죽은 사람들은 현실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비슷하게 존재할 수 있으며, 죽음 이후에도 일종의 시스템 안에서 살아간다고 묘사된다. 그래서 리디아는 죽음이 곧 끝이 아니라는 생각에 빠지며, 죽은 사람들조차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안도감을 느꼈다.
리디아는 죽은 사람들과 대화하고 그들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은 그녀에게 삶의 불편함과 혼란스러움을 더욱 강하게 느끼게 만들었다. 죽음이 곧 자유로움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리디아는 죽음을 동경하게 되었다. 하지만 비틀쥬스(마이클 키튼)라는 혼돈의 존재와 마주하면서, 실제로 죽음이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삶 역시 혼란스럽고 예측 불가능하며, 죽음도 그렇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1편에서 리디아는 이러한 깨달음을 통해 삶을 이어가는 힘을 얻었다.
이번 영화 <비틀쥬스 비틀쥬스>에서 리디아는 중년이 되어 등장한다. 청소년기를 지나 성인이 된 리디아는 사춘기 시절과는 또 다른 혼란에 직면한다. 딸 아스트리드(제나 오르테가)와의 관계는 원활하지 않으며, 결혼 생활 역시 만족스럽지 않다. 그녀는 여전히 삶의 혼란 속에서 방향을 찾지 못하고 있다. 다시 한 번 삶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게 된 리디아는 자신이 청소년 시절에 가졌던 의문들을 다시 꺼내어 묻는다. 이번에도 답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녀는 딸에게 자신이 겪었던 혼란을 물려주고 싶지 않지만, 딸은 엄마를 부끄러워하고 그들 사이의 소통은 단절된다. 어쩌면 리디아의 모습은 우리 모두의 모습이 투영된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 역시 비슷한 시기에 혼란과 방황을 겪고, 그 답을 찾으려 애썼으니까.
[두번째 감정] 아스트리드의 혼란
리디아의 딸 아스트리드 또한 혼란스러운 상황에 놓여있다. 어머니와의 소통 문제,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겹쳐 그녀는 끊임없이 불안감을 느낀다. 아스트리드는 어머니처럼 죽음을 직접적으로 경험하거나 유령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어쩌면 이는 그녀가 아직 삶과 죽음의 경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스트리드는 죽음이란 것이 그저 먼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둘러싼 가족의 죽음, 특히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가 연이어 세상을 떠나며 겪는 혼란에 직면하게 된다.
죽음이라는 테마는 아스트리드에게도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팀 버튼의 세계관에서는 죽음은 그저 자연스러운 일처럼 묘사된다. 죽음은 삶의 일부일 뿐이며, 죽음 자체는 슬픔의 대상이 아니다. 아스트리드는 이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결국 어머니 리디아와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아스트리드가 죽음을 통해 깨닫게 되는 것은 삶의 의미이기도 하다. 그녀는 어머니가 자신 곁에 늘 있었음을 깨닫고, 그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게 된다.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죽음은 한편으로는 아무렇지 않게, 자연스러운 현상처럼 묘사된다. 팀 버튼이 창조한 이 세계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는 희미하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의 죽음조차 비극으로 다뤄지지 않으며, 그저 일상의 한 부분처럼 느껴진다. 이는 죽음이 곧 삶의 일부이며, 둘은 별개가 아니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삶과 죽음이 연결되어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세번째 감정] 비틀쥬스의 혼란
비틀쥬스는 그 자체로 혼란을 상징하는 캐릭터다. 그의 존재는 리디아와 아스트리드가 겪는 혼란을 극대화하는 역할을 한다. 비틀쥬스는 스스로 혼란을 일으키는 존재이지만, 흥미로운 점은 그가 아무 때나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누군가 그의 이름을 세 번 불러야 소환된다는 것이다. 이는 혼란이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상황에서 누군가에 의해 촉발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리디아나 아스트리드가 겪는 혼란이 결국 비틀쥬스를 소환하게 된다는 설정은, 우리가 삶에서 겪는 혼란이 결국 외부의 영향과 내부의 불안이 결합해 터져 나오는 방식과 유사하다.
비틀쥬스는 단순히 악당이나 장난스러운 존재가 아니다. 그는 리디아와 아스트리드, 그리고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혼란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전달한다. 그가 끊임없이 일으키는 혼란은 마치 우리 삶의 불확실성과도 같다. 비틀쥬스는 우리가 직면한 혼돈을 극대화시키고, 그 안에서 자신만의 방식을 찾아나가는 인물들처럼, 관객들 또한 그 혼란 속에서 삶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팀 버튼 감독은 독특한 상상력과 기괴한 미학으로 유명하다. <비틀쥬스> 1편은 80년대 당시에도 파격적인 연출로 주목을 받았고, 이번 <비틀쥬스 비틀쥬스>는 그 후속편으로서 팀 버튼다운 세계관을 극대화한 작품이다. 그가 30년 만에 이 시리즈를 다시 꺼내든 이유는, 아마도 삶과 죽음의 경계를 다시 한 번 탐구하고자 하는 그의 철학적 고민에서 비롯된 것일 것이다. 1편이 내포했던 혼란과 유머, 그리고 기괴함은 여전히 살아있으며, 2편에서는 중년의 리디아를 통해 성숙한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
영화 속 배우들의 연기는 이러한 복잡한 감정들을 잘 전달한다. 위노나 라이더는 리디아로서의 혼란과 방황을 탁월하게 표현했고, 제나 오르테가는 신세대 캐릭터인 아스트리드를 통해 새로운 시각에서 삶과 죽음을 탐구한다. 비틀쥬스를 연기한 마이클 키튼 역시 특유의 괴짜스러움을 유지하면서도 캐릭터의 혼란스러운 본질을 완벽하게 살려낸다.
결국 이 영화는 혼란 속에서도 삶은 계속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것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 이 영화 속 리디아나 아스트리드는 자신의 삶 속에서 보이지 않았던 따뜻함과 사랑을 영화 말미에서야 발견한다. 그것이 곧 삶의 의미이자 살아가야할 이유다. 또한 영화의 맨 마지막, 리디아의 새엄마인 딜리아(캐서린 오하라)이 죽음 이후 아무렇지 않게 저 세상 열차를 타는 모습은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여야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W-3QpAc6ioo
-
- 싸움은 기세로 이기는 것
사람은 참 재미있다. 많은 사람이 한 가지 목적으로 모인 집단은 더 재미있다.우리는 모두 제각기 너무나 다른 사람들이고 정서도 너무나 다른데, 집단으로 묶이는 순간 새로운 집단 심리가 탄생한다. 예컨대 모든 것이 정반대 같은 사람들도 '집에 가고 싶군….'이라는 말만큼은 같이 하고 있다든지. 학생 때, 아니 그때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도 없이 신입 때만 해도 힘차게 '넵!'을 외치던 사람들이 기묘하게 기운이 없어졌다든지.
그렇기에 이 영화 포스터를 보는 순간 묘한 양가감정에 사로잡힌다.
회사원은 언제나 싸우고 싶다니. 그 말은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일에 관한 논쟁이 됐든, 그 과정에서 억지웃음을 지어야 하는 순간이든, 싸우고 싶은 마음은 직장인의 뇌리를 꽤나 자주 스친다. 그러나 기묘하게 기운이 없어진 직장인들은 싸울 힘도 별로 없다. 굳이 따지자면 좋게 좋게 끝내고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그런데 그 직장인들이 업무 외적으로 싸운다면? 그러니까 학교 다닐 때 교실 밖에서 패싸움하던 학생들처럼 직장인들에게도 그런 패거리가 있다면? 이 영화는 그 패거리가 존재할 뿐 아니라 매우 자연스러운, 가장 현실적인 현실(=직장)에 한 겹의 판타지를 얹어 그 누구도 본 적 없는 세계관을 만들어낸다.
다소 황당한 설정이지만 원래 무에서 유를 창조하기보다 일부 진실과 일부 거짓을 섞을 때 더 자연스러운 창조가 가능한 법이다. 패싸움을 직접 겪어본 사람이 많지는 않아도 미디어 덕에 낯익은 소재라서, 익숙한 문법끼리의 조합인 데다가 그걸 메타적으로 설명해주는 내레이션이 친절하여 영화에 곧잘 녹아들 수 있다. 패거리를 이루고, (왜?) 서로 평정하고, (대체 왜?) 우열을 가리고, (산재 처리는 되나?) 심지어 다른 회사까지 찾아가 도장 깨기를 한다. (대체 일은 언제 해?)
상식적이고 현실적인 계산과 이해는 어느새 자연스럽게 내려놓게 된다. 보고 있다 보면 기묘한 친근감마저 든다. 어쩌면 위계로 짓눌러 속수무책의 "직장 내 괴롭힘"을 만들어내고 웃으면서 수동적 공격으로 속을 뒤집는 것보다는 대놓고 치고받고 싸우는 게 속 편해 보이기도 하고...
중간부터는 여직원이라고 칭하자니 몸싸움 상대로는 다소 억울한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혹시 이것이 유리천장들의 억울한 파이 싸움을 상징하는 것일까?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만들었는데 나 혼자 생각이 많아지는 걸까, 아니면 정말 많은 의미를 심어둔 걸까? 기묘한 고민이 들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런 생각조차 우습고 유쾌하게 흘러가는 즐거운 코미디 영화다.
"캐릭터가 맛있고 배우들이 친절해요"라고 별점 가득 맛집 리뷰라도 남기고 싶을 만큼, 배우들이 캐릭터를 선명하게 살려낸다. 다소 과장될 수밖에 없는 표정과 대사, 캐릭터들임에도 들뜨는 인물 하나 없이, 방금 갓 만화에서 길어 올린 활어처럼 통통 튀어 오른다. 그렇게 죽일 듯이 때려놓지만, 의리도 있고 일반인을 끌어들이지 않는다는 묘한 정의감도 있으며, 심지어 쓰레기 분리수거까지 철저하게 한다. 저러면 일은 대체 언제 하나 싶지만 전화도 친절하게 받고 회사 비품 하나까지 세심히 챙기는 성실한 직원들이기도 하다. 매력이 없을 수가 없다. 일본 남자 배우 기근이 심각해 보이던데 그 어려움을 이렇게 출연진 여초 현상으로 타파해 보려는 걸까 문득 그런 궁금증마저 들 만큼 모든 여자 배우들의 기세가 좋다.
그 중에서도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두 사람. 등장하자마자 회사를 평정해 버린, 전형적인 소년 만화 주인공처럼 멋지게 등장한 란(히로세 아리스), 달콤한 케이크나 낮잠 같은 가볍고 나른한 주제로 스몰 토크를 하던 '평범한 여직원'이었다가 우연히 란과 친해지며 '주인공의 친구'가 되는 나오(나가노 메이). 두 사람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소년 만화의 공식대로 풀어낸 메타적인 내레이션을 통해 관객의 이해를 돕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이야기의 중심에 선다.
싸움이든 일이든 이렇게 여성들이 다 해 먹는 작품에는 통쾌함이 있다. 소년만화에서 남자아이들에게만 부여하던 역할들을 여자들끼리 이리저리 나누고, 배역 이름조차 없이 "여자 1" 심지어 "여자 시체 1"이 되기 십상이었던 희미한 배역들마저 성별 반전이 이루어졌다. 이건 교묘한 미러링인가? "경단녀"들의 세계와 같은 행동 다른 반응의 세계를 비틀어 꼬집는 것인가? 별생각 없이 즐거운 영화인데 또 나 혼자 멀리 가는 걸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것이 관객의 즐거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즐거워하고 있는데, 결말이 또 반전을 선사한다. 정말이지 끝까지 방심할 수 없는 영화였다. 누군가에게는 또 하나의 유머 한 방, 누군가에게는 아쉬움으로 남을 엔딩이라고 생각하는데, 개인적으로는 결말을 딱 1분만 도려내고 싶었다. 내 취향에는 아쉬움이 깊은 마무리였음에도 이 영화가 싫어지지 않은 이유는 아마 이 영화의 뚝심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이 황당해하든 헛웃음을 짓든 아쉬워하든 아랑곳 않고 나는 나의 길을 가겠다는 뚝심으로 이루어진 영화라서 마음이 끌린다.
그래. 뭐든 자기 '쪼'대로 가는 게 힙이든 핫이든 쿨이든 되는 거다. 유치하면 어떻고 뻔뻔하면 어때. 뭐가 됐든 하는 데까지 몰아붙이면 뭐라도 된다. 일본 영화계가 갈라파고스화됐다는 평을 숱하게 듣는다 해도, 누구나 좋아할 만한 풋풋한 사랑의 감성이나 싱그러운 꿈의 색채가 아니어도 뭐 어때. 어쩐지 잡다하게 눌어붙은 무거운 마음이나 고민 같은 것들을 아무렇지 않게 툭툭 털고 내 쪼대로 가면 될 것 같다는, 묘한 힘이 솟아난다. 싸우는 직장인을 보고 나와서 성실한 직장인이 될 사람이 여기 있어요...
어쩐지 그 점은 싸움과도 닮은 구석이 있다. 싸움은 결국 기세로 하는 거 아닐까? 전력이 비슷하다면 자기 기세를 끝까지 몰아붙이는 사람이 이기는 거다. 이 영화는 그런 의미에서 그 누구도 완패할 수 없는 영화다.
즐겁게 보고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서는데, 어쩐지 이 영화 속 인물들에게 한 번 더 말을 걸고 싶어진다. 중간중간 이 "소년만화" 안에서 자신의 위치가 어디인지 짚어보는 인물들에게. 그동안 자리가 허락되지 않던 이야기를 전복하고 그 안에서 내 위치를 잡은 모습 정말 너무 좋았는데, 그런데 꼭 그 이야기의 문법으로만 자신를 규정할 필요도 없다고. 각자가 주인공으로 각자의 해피 엔딩을 그려내면 된다고. 싸움 짱 여직원을 찾아가 결투를 신청하는 마음으로 이 영화의 엔딩에도 그렇게 저항을 해 본다.
오늘 듣고 싶은 노래는 일본의 여성 싱어송라이터 보니 핑크의 happy ending. "믿어보렴 happy ending 네가 손 뻗은 바로 그 끝에 있어" 이 느낌으로 이 영화를 기억하고 싶다. 앞으로도 이렇게 자기만의 기세로 싸움을 몰아붙이는 영화들이 많이 찾아와주길!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참석 후 작성하였습니다. 12월 15일에 개봉한 영화로 지금 극장에서 만나실 수 있습니다. :)
-
- 어둠 속의 눈동자와 빨간 자동차
! 이 글은 영화 <나이트 크롤러>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감독) 댄 길로이
출연) 제이크 질렌할, 빌 팩스톤, 르네 루소
저널리즘, 미디어 윤리에 관한 논의들은 여러 콘텐츠를 통해 재생산 되고 있다. 카메라에 대한 담론이 카메라에 의해, 정확히는 카메라로 만들어진 것들에 의해 형성된다는 아이러니 속에서도 <스포트라이트>, <더 포스트> 등 저널리즘 영화는 꾸준히 만들어져왔다. 영화 <나이트 크롤러> 역시 비슷한 궤를 공유하는데, 이 영화는 앞의 두 영화보다 직선적이다. 언론인의 감정적 고뇌, 내면적 성찰 장면이 나오지 않고, 하나의 길을 확신하며 나아간다. 따라서 관객은 루이스 블룸(제이크 질렌할)의 동승자가 되어 그의 빨간 차에 몸을 맡길 수 있다. 그러나 극 중 조수석에 앉아있는 릭(리즈 아메드)이 윤리적 제동을 걸 때마다 자동차는 멈추게 되며, 관객에게도 선택지가 주어진다. 이 차에서 내릴지 말지 결정할 수 있는 짧은 시간이 주어지는 것이다.
영화는 구직 활동을 하는 블룸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협상 기술을 통해 일자리를 얻는 것을 시도하지만, 계속해서 실패한다. 그러다 우연히 사고 현장에 놓인 그는 취재 영상을 찍어 팔아넘기는 ‘나이트 크롤러’를 마주한다. 그리고 그의 눈은 번뜩인다. 작은 캠코더와 경찰 무전기를 사서 특종 현장에 달려가는 블룸. 그의 큰 눈은 마치 카메라 렌즈처럼 보인다. 사건 현장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간 그는 다른 경쟁자보다 더 실감하는 영상을 얻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지역 보도국의 니나(르네 루소)에게 영상을 판매한다. 그리고 블룸의 손에 지폐가 쥐어지는 순간 그와 관객은 확신할 수 있다. 그는 ‘나이트 크롤러’가 될 것이라는 것을.
그때부터 블룸은 특종 사건을 뒤쫓는다. 남들보다 빨리 도착한 그는 카메라를 들지만, 연출되지 않은 날 것의 현장은 사각의 프레임에 담기에 쉽지 않다. 결국 그는 시체를 옮겨 더 극적인 화면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러한 영상들은 그의 평판과 지갑을 두텁게 해준다. 분명 이 상황은 잘못됐다. 누군가는 그의 문제를 바로잡아야한다.
그리고 타이밍이 맞게 릭이 등장한다. 정확하게는 블룸이 채용한 ‘조수’이다. 그의 역할은 특종 현장까지의 최단 거리를 알아내는 것. 인간 내비게이션이 된 릭은 업무에 적응해간다. 그러다 어느 주택에서 총격 사건이 발생하는데, 범인의 얼굴과 차량번호를 촬영한 블룸은 집 안까지 들어가 시체 3구를 발견한다. 하지만 그는 이 사건을 종결시킬 생각이 없다. 그는 사건 현장과 관련된 영상만을 방송국에 팔아넘기고, 범인과 관련된 정보를 이용해 다음 사건을 만들어낼 작정이다.
릭은 관객을 대변한다. 무언가 잘못됐음을 느끼는 그는 블룸을 막아서려하지만, 생활고에 시달리는 그는 확실한 ‘을’의 위치에 놓여있다. 결국 그는 적당한 보수를 약속받으며 그의 계획을 따른다. 그리고 영화는 클라이맥스에 다다른다. 나이트 크롤러 블룸은 본인에게 의문을 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사건은 이미 발생했으며, 나는 그것을 카메라에 담아낼 뿐이다.’ 실제로 그는 관찰자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는 점차 연출가에 가까워진다. 상황을 설계하고 그것을 완벽한 위치에서 찍어낸다. 이는 영화라는 매체와도 닮아있다. 각본 단계에서 발생한 사건은 촬영 단계에서 영상화된다. 그리고 관객은 그 사건과 마주한다. 우리가 보고 있는 영상들은 진실일까? 자본주의 구조 속에서 콘텐츠는 점차 자극적으로 만들어진다. 그래야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기 때문이다. 관객은 어디까지나 그것을 수용할 수 있을까? 이 영화는 하나의 실험에 가깝다. 사람의 동공은 어둠 속에서 확장되는데, 마침 영화관은 어둡다. 커진 눈동자에 들어오는 새빨간 블룸의 자동차. 우리는 그의 차에서 언제쯤 내릴 수 있을까? 영화를 보면서 그 타이밍을 확인해보시길.
-
- 회광반조 혹은 부활의 서막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실비'(소피아 디 마티노)가 '계속 존재하는 자'(조너선 메이저스)를 죽인 후, TVA에 돌아온 '로키(톰 히들스턴). 갑작스럽게 생긴 타임슬립 능력 때문에 고생하는 와중에 로키는 TVA가 위기에 빠졌음을 깨닫는다. 시간선이 무한대로 증폭하기 시작한 나머지 시간 직조기가 파괴되기 직전이고, 이를 막지 못하면 모든 우주가 붕괴할 테니까.
이에 '모비우스'(오언 윌슨), TVA 가이드북의 저자 '우로보로스/OB'(키호이콴)와 함께 시간 직조기를 고치기 시작한 로키. 그는 '렌슬레이어'(구구 음바타로)의 방해를 뚫고 계속 존재하는 자의 변종 '빅터 타임리'(조너선 메이저스)를 찾아내며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실패를 맛본 로키는 마침내 깨닫는다. 운명의 딜레마 속에서 결단을 내릴 때가 됐음을.
<로키 2>, MCU 드라마의 최고점
<완다비전>부터 <로키 2>까지 총 9편. MCU가 디즈니+에서 선보인 드라마 숫자다. 사실 MCU 드라마는 양에 비해 질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부속물 같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영화가 메인 스테이지라면, 드라마는 사전 작업에 가까웠다. 실제로 <완다비전>은 <닥터 스트레인지 2>를, <팔콘과 윈터 솔져>는 <캡틴 아메리카 4>와 <썬더볼츠>를, <미즈 마블>과 <시크릿 인베이젼>은 <더 마블스>를 준비하는 단계였다.
자연히 여러 설정을 설명하느라 바빠서 주인공 이야기에 집중할 여력도 없었다. <로키>만 해도 멀티버스 설정을 알리느라 바빠서 로키의 분량을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그나마도 로키의 변종 중 하나인 실비와 나눠야 했으니. <변호사 쉬헐크> 역시 헐크와 데어데블에 밀려서 정작 주인공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다. 선후배 케미가 돋보인 <호크아이>에서도 바튼보다는 케이트 비숍에게 비중이 쏠렸다.
따라서 <로키 2>에게는 과제 두 개가 있었다. MCU 드라마로서 독립적인 완결성을 증명해야 했다. 로키의 단독 작품으로서는 주인공에게 온전히 집중해 달라는 요구를 충족시켜야 했다. <로키 2>는 해냈다. 2011년부터 10년 넘게 이어진 로키의 성장 서사를 더 바랄 수 없을 만큼 깔끔하고 감동적으로 매듭지었다. 다만 물음표도 여전하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3>처럼 <로키 2>도 MCU의 구원자라는 확신만큼은 주지 못했다.
그 시절 우리가 로키를 사랑한 이유
2011년 <토르: 천둥의 신>에서 첫 선을 보인 이후로 로키는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MCU 빌런이었다. 본래 <토르: 다크 월드>에서 죽어야 했지만, 사전 시사회에서 관객이 좀처럼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되살려야 했을 정도로.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서도 죽음을 잔인하게 연출하고 몇 차례에 걸쳐 죽었다고 언급한 후에야 관객들은 그의 사망을 수용했다.
관객은 신의 결핍에 공감했다. 그는 버려지고 싶지 않았고, 혼자이고 싶지 않았다. 토르 주위에 친구가 가득한 것을 질투하고, 냉소하며, 비웃는 거만하고 까칠한 신이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외로웠다. 자기 종족이 아닌 이들 사이에서 길러졌고, 아버지에게서 버려졌으며,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따른 어머니가 죽는 발단을 초래했다. 그렇기에 그는 누구보다도 토르가 자기를 동생으로 인정하길 바랐고, 기꺼이 형의 오른팔이 되었다.
동시에 로키는 자유의지 때문에 누구보다도 인간적이었다. 패배자라는 운명을 이기려는 욕구로 가득했기에 그는 괴로웠다. 아스가르드의 두 번째 왕자이기에 결코 왕이 될 수 없는 2인자의 설움. 어떻게 해도 잘난 형 토르를 이길 수 없었던 패배자의 회한. 장난의 신은 죽을 때가 돼서야 비로소 이길 수 없는 운명을 수용했다. 세상을 재창조하며 신 노릇을 하려는 타노스에게 "너는 결코 신이 될 수 없다"라고 말하면서.
물론 로키는 토르 트릴로지, <어벤져스>, 그리고 <인피니티 워>를 통해 자기 약점과 결점을 모두 극복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드라마 <로키>의 영리함이 드러난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에 재등장한 2012년도 로키를 활용해 그 시절 팬들이 사랑했던 로키를 재소환해 두 번째 기회를 줬다. 자유의지를 발휘해 다른 방향으로 성장하고, 그에게 주어진 '영광스러운 목적'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장난의 신, 마침내 영광을 맛보다
실비가 계속 존재하는 자를 죽이고, 시간 직조기는 폭증하는 시간선을 버티지 못하며, 모든 시간대가 파괴될 상황. 페이즈 1부터 혼자였고, 항상 자유를 갈망한 로키는 이제 딜레마에 직면한다. 겉으로는 우주와 TVA를 지키려고 과거와 미래를 넘나들며 노력하지만 속내는 달랐다. 실비의 지적대로 로키는 또다시 혼자가 되기 싫었다. 모비우스를 비롯한 TVA 동료가 본래 시간선에서 자기를 잊고 살아갈 때 외롭게 남고 싶지 않았다.
다른 선택지도 있었다. 실비가 계속 존재하는 자를 죽이기 전에 먼저 그녀를 죽이면 신성한 시간선과 TVA를 모두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다. 그녀를 사랑하니까. 다른 모든 시간선의 붕괴도 지켜볼 수 없다. 함께 사라질 모든 자유의지의 소중함을 누구보다도 잘 아니까. 그래서 그는 타협점을 찾는다. 빅터 타임리를 찾아내 시간 직조기 수리를 맡기고, OB의 지식을 모두 전수받아 새 장치를 만든다. 그러나 끝내 실패한다.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운명의 갈림길에서 로키는 결심한다. 신성한 시간선을 지키기 위해 다른 변종을 죽이고 세계를 파괴하는 대신, 모든 존재의 자유의지를 지켜주기로. 계속 존재하는 자의 역할을 대신해서 모든 시간대에 무한한 가능성을 부여하기로. 언제나 자기를 괴롭힌 자유의지에 몸을 맡겨 자기 결핍을 채워내기로. 운명에 순응하는 대신 자기 이야기를 새롭게 쓰기로.
그렇게 로키는 신성한 시간선과 멀티버스의 종말을 막았다. 비록 혼자 남았지만, 친구와 애인은 지켰다. 장난의 신이 아니라 이야기의 신이 되어 항상 떠들던 '영광스러운 목적'도 이뤘다. <어벤져스>에서 인간에게 모든 자유를 빼앗아 평화적인 질서를 이루겠다던 로키는 모든 이의 자유를 수호하는 신이 되었다. 그렇게 13년에 걸친 그의 성장은 끝났다. 영화가 아닌 드라마로 만나야 하는 게 아쉬울 정도로 감동적인 마무리다.
멀티버스 사가에 뿌리내리다
<로키 2>는 로키의 이야기를 끝맺으면서도 위기의 MCU에 새로운 나무를 심기에 더욱 인상적이다. 특히 영리하게 활용한 신화적인 모티브의 함의가 의미심장하다. 모든 시간선을 손에 쥔 채 왕좌에 앉은 로키. 수많은 시간선이 그를 감싸고 있는 모습은 마치 나무 같다. 북유럽 신화 속 우주의 중심에서 모든 세계를 연결하는 '위그드라실'을 닮았다.
위그드라실 덕분에 멀티버스 사가가 시작 이후 갈피를 못 잡던 MCU는 비로소 안정감을 갖는다. 위그드라실과 신성한 시간선의 차이 덕분에 비로소 큰 그림이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 신성한 시간선은 직선적이다. 멀티버스 전쟁을 막는다는 미명 하에 모든 시간대(branch)의 자유의지를 파괴한 결과다. 위그드라실은 다르다. 온갖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가지(branch)에는 각 우주의 자유의지가 깃들어 있다.
그 덕분에 MCU는 비로소 멀티버스 사가의 큰 그림을 어렴풋이나마 보여줄 수 있다. <앤트맨 3> 속 사건이 짧게나마 언급되듯이 로키가 살려두고 보호하는 자유의지로 인해 멀티버스 전쟁이 시작될 수 있다는 것. 더 나아가 그 전쟁에서 로키에게 새로운 역할이 주어질 수도 있다는 것. 그러니 <로키 2>는 곱절로 감동적이다. 가장 사랑받은 캐릭터의 아름다운 마무리로 여태 흔들리던 세계관에 단단한 뿌리를 잡아주니까.
회광반조, 아니면 부활의 서막
다만 <로키 2>도 극복 못한 한계가 있다. 우선 결말의 임팩트와는 별개로 평균적인 완성도는 높지 않다. 특히 3화까지는 흡입력이 약하다. 빅터 타임리를 찾고 TVA를 구하려는 내용이 펼쳐지는데, 이 대목의 전개가 다소 느슨하기 때문. 또 20세기 런던이나 시카고 박람회 정도를 제외하면 시즌 1과 달리 공간적 배경이 TVA와 시간 직조기 통제실로 한정적이다. 자연히 타임슬립의 재미가 떨어진다. 이를 만회할 액션씬도 부족하다.
작품 외적으로는 여전히 속 시원한 해답을 내놓지 못했다. MCU는 페이즈 4부터 같은 질문에 시달렸다. "인피니티 사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멀티버스 사가를 안착시킬 수 있는가?" 여태 답은 '아니요'였다. 토르, 닥터 스트레인지, 앤트맨, 블랙팬서 모두 길을 잃었다. 스파이더맨도 기존 프랜차이즈의 인기에 힘입어 인기를 끌었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3>가 그나마 성공적이었지만, 인피니티 사가의 에필로그에 가까웠다.
<로키 2>도 마찬가지다. 물론 새로운 세계관을 보여준 <로키>는 멀티버스 사가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인피니티 사가에서 가장 사랑받은 캐릭터 중 하나를 빌려온 작품이기도 하다. <가오갤 3>처럼 인피니티 사가의 또 다른 에필로그라 봐도 무방하다. 그렇기에 <로키 2>가 멀티버스 사가의 회광반조일지, 아니면 부활의 서막일지는 아직 물음표다. <가오갤 3>의 다음 주자가 <더 마블스>인 걸 고려하면 더더욱.
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자유 의지로 완성한 영광스러운 마무리
-
- 타임 루프 감옥에서 살아남는 101가지 방법
간만에 청량하고 화끈한 로맨스 코미디 한 편을 보았습니다. 2020 선댄스 영화제 출품작 중 사상 최고 판매가 기록(약 2,250만 달러)을 세우고, 로튼 토마토 신선도 95%를 기록하며, 2021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뮤지컬/코미디 부문 최우수 작품상과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영화, 바로 <팜 스프링스>입니다.
이 영화는 미국 팜 스프링스 지역에서 열린 결혼식에 참석한 두 사람이 매일 똑같은 하루가 반복되는 타임 루프(Time loop)에 빠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영화 포스터에서는 이 영화를 단 세 단어로 요약하죠. '타임 루프, 썸머, 로맨틱 코미디'. 이 단어들은 <팜 스프링스>를 설명하기에 조금의 과함도, 약간의 부족함도 없습니다. 그 이유를 지금부터 살펴보시죠.
※ 8월 11일(수)에 진행된 <팜 스프링스>의 언론/배급 시사회를 통해 영화를 감상했습니다. <팜 스프링스>는 2021년 8월 19일 국내 개봉 예정작입니다.
팜 스프링스
Palm Springs
첫 번째 단어, '타임 루프'입니다. 타임 루프는 영화가 사랑하는 단골 소재입니다. 액션 장르의 <엣지 오브 투모로우>부터 로맨스 장르의 <어바웃 타임>, <이프 온리>까지, 장르를 불문하고 타임 루프 소재는 관객의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치트키였죠. 하지만 비슷한 소재를 다루는 영화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영화의 참신함이 떨어질 우려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개 '우연히 타임 루프 마법에 빠진 주인공이 우여곡절 끝에 타임 루프를 빠져나와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며 살아간다'는 주제를 내포하기에 관객에게 색다른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어렵죠. 저 역시도 큰 기대 없이 영화관에 방문했습니다.
하지만 <팜 스프링스>는 여타 타임 루프 소재의 영화들과는 확실히 달랐습니다. 유사한 부분이 분명히 있지만, 신선함이 더 컸다는 표현이 정확할 겁니다. '우연히 타임 루프 마법에 빠진 주인공'까지는 이전의 작품들과 유사하나, 이 '주인공'이 타임 루프 마법에 빠진 시점이 독특합니다. 일반적으로 타임 루프물의 주인공은 영화 시작과 함께 타임 루프의 마법에 빠지는데요. <팜 스프링스>의 남자 주인공 '나일스'는 매일 반복되는 타임 루프의 감옥 속에서 억겁의 시간을 살아온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입니다. 얼마나 오래 타임 루프 안에 갇혀 있었는지는 '나일스'도, 관객도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반복되는 11월 9일, 그 하루가 너무나도 익숙한 나머지 자신의 원래 직업이 무엇인지조차 망각해버리고, 결혼식에서 멀끔한 정장 대신 하와이안 셔츠를 걸쳐도 아무렇지 않은 '나일스'의 모습을 통해 그저 짐작해볼 뿐이죠.
‘나일스’는 타임 루프 속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터득합니다. 탈출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기에 이곳을 벗어날 생각조차 없죠. 대신 그 안에서 꽤 편안하고 행복한 일상을 영위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영화는 매일 반복되는 무료한 일상 속에서도 의미 있는 삶을 향유하는 법을 유쾌하게 보여줍니다. 영화 중반 즈음엔 타임 루프에 갇혀 사는 삶도 그리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그런데 문득 타임 루프에 갇힌 '나일스'의 상황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팬데믹으로 인해 일상생활에 제한이 생긴 우리는 집 안에서 매일 반복되는 무료한 하루를 보내고 있으니까요. 코로나19가 우리를 타임 루프의 감옥에 빠트린 셈이죠. 하지만 이러한 삶도 향유하고자 마음먹으면 충분히 누릴 수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탈출할 방법이 없다면, '나일스'처럼 살아남는 방법을 터득해야만 하죠. 참으로 시의적절한 영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한편, '나일스'로 인해 갑작스럽게 타임 루프에 빠져 혼란스러움을 겪는 여자 주인공 '세라'는 어떨까요? <팜 스프링스>는 타임 루프가 익숙한 '나일스'와 타임 루프가 낯선 '세라'의 대비를 위트 있게 풀어내기도 합니다. 타임 루프 안에 여러 명의 타임 루퍼(Time looper)들이 존재하는 것 또한 매우 신선한 접근이었습니다. 하필 술을 퍼마시고 잊어야 할 정도로 괴로운 기억이 있는 11월 9일의 아침이 매일 같이 반복되다니, '세라'는 이 타임 루프를 탈출해야만 했습니다. 이 지점에서 '세라'는 주류 영화가 다뤄왔던 여성 캐릭터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방법을 찾을 때까지 수동적으로 기다리고, 요행을 바라지도 않습니다. ‘세라'는 주체적으로 이 고리를 끊어낼 방법을 찾습니다. 남성 캐릭터의 이야기에 부수적으로 여성 캐릭터를 끼워 넣는 형태를 완전히 벗어났죠. 그녀는 무한의 시간이 존재한다는 타임 루프의 장점을 이용해 양자 역학을 공부하고, 시공간의 곡률을 이해하려 노력합니다. 똑똑한 과학자가 등장해 주절주절 어려운 말을 늘어놓고는 툭 방법을 던져주는 SF적 설정이나 비가 내리는 날 연인과 키스를 나누면 현실로 돌아갈 수 있다는 판타지적 설정에 의존하는 대개의 타임 루프 영화와 다른 지점이죠. '세라'는 과연 탈출에 성공했을까요?
타임 루프 속에서 살아남는 법부터 타임 루프를 탈출하는 법까지, 모두 예상과는 달랐습니다. '확실히 달랐다'는 표현이 전혀 아깝지 않죠.
⊙ ⊙ ⊙
두 번째 단어는 ‘썸머’입니다. <팜 스프링스>는 제목 그대로 '팜 스프링스'라는 지역의 특성이 잘 드러나는 영화입니다. 그게 여름과 무슨 관련이 있냐고요? 팜 스프링스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리버사이드 군에 있는 지역으로, 사막에 둘러싸인 휴양지거든요. 여름에는 최대 50도까지 기온이 오르는 더운 사막 기후라, 11월이 여행에 가장 적합한 시기인 지역이죠. 영화의 배경인 '탈라'와 '에이브'의 결혼식이 11월 9일로 설정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영화 속 배경은 '될 대로 돼라' 마인드로 하와이안 셔츠를 입고 결혼식장을 횡보하는 '나일스'와 정말 잘 어울립니다.
같은 하루가 매일 반복되는 타임 루프의 특성을 적극 활용해 내일이 없는 것처럼 하루를 보내는 '나일스'와 '세라'의 화끈한 데이트 장면들도 뜨거운 여름과 잘 어울립니다. 마침 11월 9일에 집을 비운 팜 스프링스의 어느 가정집은 타임 루프가 계속되는 한 영원히 빈 객실과도 같죠. 그들만의 안전 가옥에서 맥주 한 캔과 함께 수영을 즐기는 모습은 지상 낙원이 따로 없습니다. 코로나19로 수영장을 놀러가기도, 피서를 떠나기도 어려운 요즘, 대리만족하기에 아주 제격이죠. 맥주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영화 속에서 '나일스'와 '세라'는 끊임없이 맥주를 마십니다. 여기에도 숨겨진 비밀이 하나 있더군요. 그들이 마시는 맥주는 '아쿠파라(Akupara)'라는 브랜드인데요. 이는 힌두교에서 세계를 등껍질에 짊어진 거북이를 이르는 말로, '무한대의, 불멸의'라는 뜻을 가진 가상의 브랜드라고 합니다. 영화의 핵심 소재를 이 커플과 뗄레야 뗄 수 없는 맥주 브랜드 속에 숨겨 놓았네요.
드넓은 사막 한가운데 있는 휴양지, 시원한 맥주와 하와이안 셔츠까지. 누군가 '여름'하면 떠오르는 영화를 물었을 때, 추천할 만한 영화가 또 한 가지 생겼습니다.
⊙ ⊙ ⊙
마지막으로 ‘로맨스 코미디’입니다. 영화는 결국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를 다룹니다. 타임 루프 속에서 지루한 하루하루를 지내던 '나일스'와 지나간 고통에 연연하며 괴로워하던 '세라'는 타임 루프 덕에 오직 현재에만 충실하는 법을 배우죠.
그들에겐 필요한 것은 바로 어바인(Irvine)이었습니다. 어바인(Irvine)은 '나일스' 때문에 타임 루프 지옥에 빠진 또 한 사람인 '로이'의 가족들이 거주하는 곳입니다. '세라'와의 사랑에 어려움을 겪는 '나일스'가 '로이'를 찾아갔을 때, '로이'는 이렇게 충고하죠.
"We all have an Irvine."
우리에겐 모두 어바인이 있어.
<팜 스프링스>에서 딱 한 문장의 대사만을 기억해야 한다면 저는 이 대사를 택할 겁니다. 자신을 타임 루프 지옥으로 끌어들인 '나일스'를 원망하며 그를 끊임없이 괴롭히던 '로이'는 문득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머무르는 어바인의 소중함을 깨닫고, 타임 루프에서의 삶에 적응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나일스'에게도 자신만의 어바인을 찾으라고 충고하죠. 타임 루프 지옥에 빠지더라도 어바인과 같은 안식처가 있으면 우리는 살아갈 수 있습니다. 과연 '나일스'의 어바인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리고 여러분의 어바인은 무엇인가요? 영화를 감상하시면서 곰곰이 생각해보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 ⊙ ⊙
여름철 더위가 한풀 꺾인 모양새입니다. 날씨가 풀린 것인지, 이 영화의 청량함이 제 더위를 앗아간 것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코미디를 기대하시는 분도, 로맨스를 기대하시는 분도, 참신한 타임 루프물을 기대하시는 분도 모두 만족스럽게 보실 수 있는 영화일 겁니다. 참, 이 영화에는 익숙한 배우들도 다수 등장합니다. <위플래쉬> 플레처 교수 역의 J.K. 시몬스, <리버데일> 베로니카 역의 카밀라 멘데스, <슈퍼맨과 로이스> 슈퍼맨 역의 타일러 헤클린까지, 여러 배우의 연기를 보는 재미도 함께 누려보세요.
Summary
“오늘은 어제고, 내일도 오늘이에요…” 인생 최고의 날로 기억될 멋진 결혼식이 열리는 팜 스프링스의 리조트. 타임루프 세계관에 갇힌 남자 나일스에게 오늘은 100만 번째(?) 결혼식일 뿐이다. 하지만 우연한 사고로 세라가 나일스의 세상에 개입하면서 똑같았던 하루는 늘 특별한 오늘(!)이 되는데… 진짜 내일 없이 사는, 두 남녀의 썸머 코믹 로맨스가 시작된다! (출처: 씨네21)
Cast
감독: 맥스 바바코우
출연: 앤디 샘버그, 크리스틴 밀리오티, J.K. 시몬스 외
-
-
-
- 넷플릭스 <니모나> 공식 예고편
- 조금은 악당. 조금은 영웅. 《니모나》, 6월 30일 공개. 오직 넷플릭스에서.
-
- 영화 <잘리카투> 메인 예고편
푸줏간(도축장)에서 도망친 물소가 온 마을을 헤집고 다닌다. 마을 남자들은 폭주하는 물소를 잡기 위해 나서고 이웃 마을 남자들까지 몰려들자 한바탕 대소동이 벌어진다. 평화롭던 마을은 물소를 제압하려는 남자들로 인해서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버리고, 인간과 짐승의 구분이 사라져 버린 물소 사냥은 점차 무분별하고 폭력적인 광기로 변해간다.
※ 잘리카투(또는 살리카투) JALLIKATTU는 인도 남부 타밀나두주의 수확축제인 퐁갈에서 진행하는 전통있는 집단 경기다. 황소를 남자들 무리 속에 풀어놓으면 참가자들은 황소의 등에 올라타서 최대한 오래 버티거나 소를 움직이지 못하게 제압하는데, 이 과정에서 살벌한 장관이 펼쳐진다. 리조 조세 펠리세리 감독의 <잘리카투>는 잘리카투 경기를 묘사하는 영화는 아니다. 확실히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