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3-08-28 16:10:54
[SIWFF 데일리] 우리는 오렌지 태양 아래
영화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SYNOPSIS
갑작스러운 사고로 남편 도경을 잃고 폴란드 바르샤바로 떠난 명지, 같은 사고로 동생을 잃은 지은, 단짝 친구와 이별한 해수. 남겨진 사람들은 서로를 돌보며 몸과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진다. 상실의 슬픔 뒤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따뜻한 희망의 이야기. 김애란 작가의 동명 소설 원작.
PROGRAM NOTE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는 문학적 기품을 바탕으로, 언어가 중요한 영화다. 이는 설혹 원작 정보를 알지 못한 채 작품을 접한 관객일지라도 충분히 감지할 수 있는바, 중심인물들부터가 글쓰기 혹은 책과 관련된다. 하지만 그들조차 좀처럼 언어화하지 못할 일이 벌어지고, 편지라는 형식으로나마 그들이 가까스로 발화에 이르는 과정이 영화의 얼개를 이룬다. 여기에 마비 내지 부동의 자세에서 활강에 성공하기까지 점증하는 신체들의 이미지가 대구 된다. 허리께에서 시작해 몸 전체로 퍼져 나가는 발진 역시 의미심장하다. 그런데 이처럼 일견 관념적으로도 느껴지는 이야기의 배경으로 광주와 바르샤바라는 구체적 지명과 풍경이 제시되고, 마침내 인물들의 트라우마가 발화되는 순간이 도래한다. 지난 10여년 간의 한국 상황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특정한 어느 사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을 터, 관객과 영화 속 인물들 간의 연결이 감정이입을 넘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장소와 시대와 디에게시스의 경계를 넘어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트라우마들의 아픔을 공유한다는 감각이 뚜렷하게 환기되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태양을 바라보는 인물들이 교차편집되며 서로 간 동시성이 확보되고 이를 목도하는 관객 또한 그들의 애도와 회복에 동참할 수 있게 된다. 어쩌면 연대라는 것은 이렇게 생겨나는지도 모른다. [이유미]

명지(박하선)가 사는 아파트로, 두 개의 소음이 동시에 날아든다. 전화를 알리는 휴대전화의 진동 소리와, 아파트 바깥에서 들려오는 자동차 도난 경보음. 경고음과 함께 들려온 소식은 부고를 알렸다. 경고음은 사건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지만, 그 소리 또한 인생에 갑자기 날아들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이런 일들은 지금까지의 세상을 무너뜨리고, 전혀 다른 곳이 되게 한다.
남편의 생명을 삼킨 물을 욕조에 받았다가 흘려보내기도 하고, 시어머니가 챙겨주시는 반찬은 냉장고에 그냥 쌓이기만 하면서, 명지의 세계 또한 달라져 있다. 영화 초반의 이러한 장면들은 짧은 호흡으로 뚝뚝 끊긴다. 이것은 상실 이후의 일상과 닮아 있다. 긴 호흡으로 뭘 하기 어렵다. 아니, 그냥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기조차 긴 호흡으로 하기가 어렵다.

아주 작은 연결고리만으로 일상이 툭툭 끊어지기 때문이다. 잔뜩 삭아버린 실처럼. 초코 아이스크림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함께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던 어떤 날을 떠올리고, 테이블 모서리만 어루만져도 따뜻한 기억을 되돌아보게 된다. 영화 내내 명지의 아파트 조명은 꺼져 있어, 따뜻한 빛으로 가득했던 과거와 더욱 대비된다. 불이 꺼져버린 집처럼, 영혼 어딘가의 불이 꺼진 것처럼.
조금이라도 연결고리가 적게 느껴질 곳으로, 명지를 불러낸 사촌언니의 다정한 초대를 받아 폴란드 바르샤바로 향하지만, 명지가 가는 모든 곳에 명지의 상처도 함께 갈 수밖에 없다. 아무 이유도 없이 갑자기 날아들었던 비보처럼, 아무 이유도 없이 원인불명의 발진이 몸에 붉게 자라난다. 우리 삶에 원인불명으로 찾아오는 일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생각해 보면 원인을 뚜렷하게 알 수 있는 것이야말로 놀라운 일 같지만, 우리는 또렷하게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더욱 괴로워한다.
그 괴로움 속에서, 가장 황홀한 꿈은 그만큼 가장 슬픈 꿈이 된다. 부재한 누군가가 등장하는 꿈은 다 그렇다. 그런 세상에서는, 잘 지내냐는 짧은 말이 아프게 다가올 수도 있다. 전화를 해보자는 별 거 아닌 말이, 작고 유쾌한 말이 폐부 깊숙한 곳을 푹 찌를 수도 있다.

이들의 세상은 지독한 상실의 아픔에 둘러싸여 있어서다. 이건 어쩌면 물에 빠지는 것과도 비슷해서, 머리칼 올올이 깊숙한 곳까지 온통 나를 적시고 도저히 숨을 쉴 수 없게끔 괴롭힌다. 도경과 지용이 떠난 세계에 남겨진 이들은, 도경과 지용의 마지막을 앗아간 것과 비슷한 고통을 계속해서 느끼고 있다.
그러나 이 영화의 인물들은 움직인다. 모든 단어에 추억이 묻어 있고, 딱 그만큼의 슬픔이 묻어나는 세상에서도. 명지가 폴란드 바르샤바로 떠났듯, 지용을 잃은 지은과 해수도 자기 자리에서 힘차게 움직이려 애를 써본다. 인물들이 이처럼 상실 너머로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영화의 호흡이 조금씩 길어진다. 해일처럼 밀려와 관객을 덮는다.

왜 하필 폴란드 바르샤바였으며, 왜 하필 광주였나? 죽음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은 도시. 죽음을 잘 기억하는 것이 역설적으로 상실 이후의 삶을 잘 살아가기 위한 방법임을 잘 아는 사람들의 도시. 충분히 위로되지 못한 슬픔은 끝까지 그 눈을 뻣뻣하게 부릅뜨고 살아 나를 따라온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 알고 싶지 않았지만, 알아버린 사람들이, 여전히 세상의 무수한 슬픔에 시선을 보내는 곳.
그곳에서 만난 현석(김남희)과 명지 사이, 덩그러니 질문 하나가 놓인다. “그때 그 손을 놓지 않았다면 우린 지금 같이 있을까?” 현석이 명지에게 던진 질문이기도, 명지가 도경을 생각하며 던진 질문이기도 하다. 갑작스러운 원인불명의 상황에서, 남겨진 이가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일,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말 중에 이 질문이 있다.

이 질문은 웅덩이가 되어, 인물들이 겪은 제각각의 상실이 여기에 고인다. 그리고 거기서 이들은 만난다. 명지는 이 질문이 도경과 지용 사이에도 놓여 있었음을 깨닫는다. 놓친 손이 있지만, 또 힘차게 움직여 닿으려고 애쓰는 손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반대편에서 편지를 통해 지은과 명지의 손이 마주한 순간, 명지도 손을 움직여 메일을 써 본다. 부치지 못해도 괜찮다. 너무 어려워도, 손가락을 움직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조금은 괜찮다. <벌새>의 영지 선생님처럼 말해 본다. 아무 것도 못할 것 같지만 손가락을 움직일 수 있다고.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시리가 남긴 그 새삼스러운 질문은 어쩌면, 말이 아니라 손가락으로 답할 수 있는 질문인지도 모르겠다.

그 끝에서, 명지는 마침내 햇빛을 마주본다. 밖에서 들어오는 흐릿한 불빛 외에는 좀처럼 밝아지는 일 없는 어둑한 집에서, 오렌지색 노을과 눈을 마주친다. 슬픔은 여전하겠지만, 명지의 아파트가 이전처럼 밝고 따뜻한 빛으로 차오르려면 한참 시간이 더 필요하겠지만, 몸으로 마음으로 상실을 겪어내고 있는 지은도 명지도, 살아서 그 빛과 눈을 마주한다. “우리는 오렌지 태양 아래 그림자 없이 함께 춤을” 추고, “아름다웠던 그 기억에서 만나” 또 손을 뻗어 잡을 수 있을 것이다.

2023.08.27. 16:00-17:44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3관 (상영코드 321)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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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은 믿음을 믿으십니까?
종교가 있는 친구에게 물은 적이 있습니다. "믿음은 어떻게 생겨?" 친구는 한동안 고민하다가 이렇게 답해주었습니다. "믿으니까 그냥 믿는 거지." 분명하면서도 모호한 답변에 마음속에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 믿음이란 뭘까?
- 믿음은 어떻게 작동할까?
- 믿고 있는 것이 진실이라고 어떻게 확신할까?
- 만약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해결되지 못한 채로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던 질문들은 '이 영화' 이후 다시 한번 수면 위로 떠올랐습니다.
※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은 <클럽 제로> 프라이빗 시사회를 통해 영화를 감상했습니다. <클럽 제로>는 2023년 1월 24일 국내 개봉 예정작입니다.
클럽 제로
Club Zero
엘리트 기숙사 학교에 새로 부임한 영양 교사 '노벡'은 아이들에게 의식적 식사를 가르치는 특별한 수업을 진행합니다. 의식적 식사는 말 그대로 의식적인 섭취를 통해 과식을 줄이고 주체적으로 음식을 먹는 식사법입니다. 어떤 아이는 아무런 의심 없이 의식적 식사법을 따르고, 어떤 아이는 친구 그룹에 머물기 위해 의식적 식사법을 따릅니다. 또 어떤 아이는 끝까지 거부하다가 학점을 잘 받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의식적 식사법을 따르죠. 의식적 식사법을 따르게 된 배경은 각기 다르지만, 아이들은 점차 의식적 식사와 영양 교사 '노벡'을 향한 믿음을 갖게 됩니다.
아이들이 의식적 식사를 받아들이자 '노벡'은 음식을 아예 섭취하지 않는 극단적인 식사법을 권하기 시작합니다. 올바른 믿음을 가진 몇몇 사람들만 절식의 이점을 누리며 '클럽 제로'의 일원으로 살고 있다는 말과 함께 말이죠. 아주 적은 양의 음식만을 의식적으로 섭취하던 아이들은 결국 '클럽 제로'의 규칙에 따라 아무것도 먹지 않기에 이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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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쯤에서 '노벡'이 제시한 의식적 식사를 실천하는 방법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음식을 먹기 전에 깊게 숨을 들이쉬고 내쉽니다. 눈앞의 음식에 정신을 집중하고, 최대한 천천히 음식을 섭취합니다.
적은 양의 음식을 천천히 섭취하는 것에 충분히 적응했다면, 다음 단계는 한 번에 한 가지 종류의 음식만 먹는 것입니다. 역시 음식을 먹기 전에는 심호흡하고 음식에 온전히 집중해야 합니다.
마지막 단계는 절식입니다. 음식을 먹어야만 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의식적으로 신체와 정신을 통제합니다.
글로 읽어서는 크게 와닿지 않는 설득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어떻게 이 식사법을 믿고 따르게 된 걸까요? '노벡'은 은밀한 전술을 통해 아이들의 믿음을 조종합니다. 처음에는 과식이 신체, 정신,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상에 얼마나 해로운지를 설명하며 납득 가능한 수준에서 가르침을 전합니다. 적게 먹는 것이 어떻게 몸의 자정 작용을 일으키고, 어떻게 하고자 하는 일에 더 집중할 수 있게 하며, 어떻게 세상을 더 지속가능하게 하는지 설명하죠.
그런데 섭식을 통한 변화를 이야기하던 '노벡'의 논점이 조금씩 섭식 그 자체로 옮겨가기 시작합니다. 그럴싸한 명분들은 사라지고, 섭식이 단지 관습적인 것일 뿐이라는 급진적인 주장으로 전환되죠. 평생 먹지 않고 사는 것이 과학적으로 가능하냐고 묻는 아이에게는 "자신이 직접 몸으로 증명했기에 답을 찾으려 들 필요가 없다"는 말로 홀려 버립니다.
교육과 보호를 목적으로 엄격하게 통제된 공간인 엘리트 기숙사 학교에서, 선생님은 최고의 권위자입니다. 아이들은 가르침으로 포장된 조종을 피하기가 어렵죠. 일순간 '노벡'을 깊이 신뢰하게 된 아이들에게 절식은 또 하나의 이상적이며 바람직한 새로운 식사법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믿음이 눈을 가린 아이들에겐 생기를 잃어가는 서로의 얼굴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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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적 식사법을 웰니스, 자아실현, 지속가능성을 위한 식사법으로 소개한다는 면에서 '노벡'의 말은 언뜻 현혹적이기도 합니다. 이 가치들은 영화 밖 현실에서도 간헐적 단식, 미라클 모닝, 채식주의와 같은 새로운 움직임을 일으킨 촉매제니까요. 이렇듯 변화들은 으레 그래왔던 관습('하루 세 끼를 먹어야 건강하다', '잠은 충분히 자야 한다', '영양소를 고루 섭취해야 한다')과는 다른 모습을 띱니다. 과거엔 관습만을 단 하나의 진실로 여기는 보수적인 경향이 있었지만, 다양성의 시대인 요즘은 다릅니다. 오히려 관습만을 정답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배척당하기 쉽죠. 관습을 부수는 새로운 움직임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조성된 겁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급진적인 사상들은 더 자유롭게 세상 밖으로 나오죠.
그런데 만약 <클럽 제로>의 의식적 식사법처럼 진실과 동떨어져 보이는 사상이 '관습을 깨부수는 새로운 움직임'인 양 모습을 드러낸다면 어떨까요? 누군가 당신에게 세상을 바꾸는 바람직한 식사법이라며 의식적 식사를 제안한다면, 당신은 그것을 가짜 진실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요? 그것이 급진적인 움직임인지, '급진'의 탈을 쓴 어불성설인지 구분할 수 있을까요?
영화를 보면서 '반드시 먹어야 한다'는 생각은 그저 관습일 뿐이라고 말하는 '클럽 제로'와 '지구는 둥글다'는 사실이 관습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잘못된 가설일 뿐이라고 말하는 지구 평면설 추종자들이 겹쳐 보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상이 진짜 진실이고, 이 시대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급진적인 움직임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에겐 그들의 말이 '급진'의 탈을 쓴 어불성설로 들리죠. 그러나 하지만 아주 먼 과거로 돌아가 보면, "지구는 둥글다!"고 말하는 제가 '클럽 제로'나 오늘날의 지구 평면설 추종자처럼 진실과 동떨어져 보이는 사상을 따르는 사람이었을 겁니다.
관습을 깨부수는 움직임들이 계속해서 생겨나는 이 세상에서,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고 배우는 이 세상에서, 진짜 진실을 쫓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요? 과연 제가 믿고 있는 것들 중 진짜 진실은 몇 개나 될까요? 자기만의 세계 안에서만 존재하는 진실을 진실이라 부를 수 있을까요? <클럽 제로>는 누구도 진짜 진실을 알아차릴 수 없으며, 진실은 결국 나의 세계 안에서 형성된 하나의 믿음일 뿐이라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썩은 해골물을 맛있게 꿀꺽꿀꺽 마셨다는 원효대사처럼 말이죠. 비슷하게 <클럽 제로>에서도 아이들 중 한 명인 '엘사'가 '의식이 섭식을 통제한다'는 자신만의 진실을 피력하고자 먹은 것을 게워 낸 뒤 그 토사물을 다시 섭취하는 시위를 벌입니다. '엘사'의 현실에서는 그것이 진실이기에 토사물을 다시 먹을 수 있었습니다.
결국 진실은 믿음이 만드는 허상이라면, 우리는 믿음을 어떻게 믿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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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제로>는 소재도 급진적이지만, 연출도 그러합니다. 평범하게 구성해도 무방한 공간들을 형형색색의 화려한 색으로 채우고, 러닝타임 내내 신경에 거슬리는 난타음, 기계적인 줌인, 슬로우 모션 같은 촬영기법을 반복적으로 사용하죠. 이러한 연출들로 영화는 한 편의 잔혹동화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비현실적인 기묘함이 영화 속 세계에서는 당연한 현실이었다는 걸 생각해 볼 때, 어쩌면 그 세계 안에서 절식은 채식주의와 비슷한 수준의 급진적 움직임이었을지도 모르겠네요. 끝까지 진실과 탈진실, 그리고 믿음에 대한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영화, <클럽 제로>였습니다.
Summary
최고급 기숙사 시설에서 학생들에게 일대일 특별 교육을 제공하는 엘리트 학교의 새로운 영양교사로 임명된 ‘미스 노백’. 건강을 유지하면서 학습 능력을 키우는 ‘의식적 식사법’을 가르치는 ‘미스 노백’의 다정하면서도 카리스마 넘치는 수업에 아이들은 점차 빠져들게 되고 더 극단적이고 위험한 식사를 이어가는데… (출처: 씨네21)
Cast
감독: 예시카 하우스너
출연: 미아 와시코브스카, 마티유 데미, 엘자 질버스테인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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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우를 잡는 붉은 닭
2025년 8월 12일 화요일, 용산 CGV 아이파크몰에서 장립가 감독의 <폭스 헌트>(2025) 영화 시사회를 진행했다. <폭스 헌트>는 국제적인 자금 밀매 조직에 맞서 싸우는 중국 경제범죄수사대의 사건을 그린다. 특히, 돈세탁으로 불법 자금 174억 8천만 위안을 빼돌린 '다이이첸(양조위)'을 뒤쫓아 중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특수 작전 팀 '폭스 헌트'라는 작전을 시작하는 홍콩 영화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본 영화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씨네픽 시사회 초청으로 참석했습니다.
<폭스 헌트> 스틸컷
영화는 중국에서 ‘해외로 자본을 빼돌리는 여우 같은 범죄자’를 끝까지 추적해 처단하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단순한 범죄 소탕극이 아니라 자국민과 국가를 위해 희생하는 공무원과 경찰을 추앙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중국 공안부의 실제 국제 반부패 작전인 ‘Operation Fox Hunt’를 바탕으로 한 작품인 만큼 국제 범죄 스릴러의 틀 위에 국가적 사명을 강조한다. 엔딩 크레딧에서 불법을 자행한 범인을 체포하는 영상을 보여줌으로써 범죄를 처단하는 정의로운 연출을 보여준다.
마케팅 전략에서도 흥미로운 점이 있다. 홍콩 영화계의 살아 있는 전설 양조위를 전면에 내세워 작품의 브랜드 가치를 높였는데, 양조위가 연기한 다이 이첸은 교활하면서도 우아한 금융 사기자이자 자본 유출의 핵심 인물로, ‘여우 같은’ 캐릭터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의 존재감은 여우 같은 얍삽한 움직임을 보이며 작품의 무게를 흔든다. 배우 단이홍이 연기한 '예쥔'은 다이이첸(양조위)을 잡기 위한 형사로 사냥감을 잡기 위해 사냥감 그 이상의 교묘한 움직임을 선보인다. 각자가 예측할 수 없는 호흡은 관객에게 긴장감을 선사한다.
이 영화의 또 다른 매력은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 로케이션 촬영이다. 파리의 세느강, 루브르 주변 거리, 노르망디 해변 등 주요 도시와 자연 풍경이 등장해, 스릴러 장르 속에서 의외로 미장센을 선사한다. 범죄자를 쫓는 숨 가쁜 추격 장면이 이 낭만적인 풍경 속에 대비되는 연출을 보여준다. 한편,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라는 문장이 있지만, 영화는 이 문구의 뜻을 비틀며 프랑스의 법규를 따르는 척한다. 오히려 프랑스 문화에 중국의 문화를 융합하고자 시도한다. 프랑스인에게 고량주를 권하면서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는 장면이나 각 나라의 유명한 노래를 함께 부르며 마치 같은 동포라는 친근한 분위기를 유도하는 연출은 푸아그라에 고량주를 먹는 느낌이다.
서사의 평면성과 정치적 메시지의 과도한 강조도 관객에게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 특히, 중국 정부의 반부패 캠페인과 국가주의적 색채가 작품 전반을 강하게 물들이고 있어, 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관객도 있을 것이다. 후반부로 갈수록 ost부터 연출까지 범죄를 처단하겠다는 굳은 의지와 국가 수호에 관한 자부심을 담아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 공조 수사라는 설정과 실제 사건을 모티프로 한 긴장감 있는 전개, 배우들의 존재감은 영화의 힘을 끌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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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자 환경에 맞는 삶의 속도란
사실 시놉시스만 보고 완전히 일본 작품이라고 생각했는데, 영화 시작 무렵 제작지원 항목에 너무나도 익숙한 한국기관의 이름들이 나와서 한국 기업이 일본 영화에 투자를 한 것인가 했다가 감독 이름이 박혁지! 한국이름이어서 굉장히 당황한 채로 영화를 보기 시작한 영화 <행복의 속도>. 순간 다른 영화의 시놉시스를 잘못 보고 들어온 것인가 혼란스러웠지만 아름다운 오제와 봇카에 대해 이야기가 바로 시작되어서 감독만 한국 사람이었구나 속으로 잘못 본게 아니구나 안도하며 다큐멘터리를 보기 시작했다.
영화 <행복의 속도> 시놉시스
지금, 당신은 어느 길 위에 있나요?
꽃, 바람, 새 그리고 나뭇길... 해발 1,500미터 천상의 화원 ‘오제’. ‘이가라시’와 ‘이시타카’는산장까지 짐을 배달하는 ‘봇카’다. 70~80kg의 짐을 지고 같은 길을 걷지만 매 순간 ‘오제’의 길 위에서 자신의 시간을 채워가는 '이가라시'. 반면 '봇카'를 널리 알리고 싶은 '이시타카’. 닮은 듯 다른 두 사람이 건네는 이야기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행복의 속도>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
아름다운 오제의 현장을 담아내다
영화 <행복의 속도>를 보면 정말 어느 누구라도 감탄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4K가 얼마나 풍경을 잘 담아내는지 그 위용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오제의 광활한 풍경에서부터 조그마한 잎사귀와 꽃, 나비까지. 그 모든 자연을 하나하나 포착해서 담아낸 영화 <행복의 속도>는 사계절을 느낄 수 있는 환경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작년까지는 계절의 변화와 그 계절의 아름다움에 대해 크게 감흥이 없었는데 유달리 올해 들어서 바뀌는 계절이 굉장히 예쁘고 사진찍는게 행복한 한 해였다. 그런 1년을 보내는 시기에 만난 영화 <행복의 속도>에서 바뀌는 계절의 색감을 너무나도 찬란하게 비춰주고 있어서 오제로 여행을 가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아날로그의 삶을 살아가는 오제일본에 있는 오제라는 국립공원은 디지털은 잘 찾아볼 수 없는 공간이었다. 대부분의 정산은 수기로 이뤄지고 택배 시스템도 차량이 아니라 사람이 직접 걸어서 산장에 필요한 물품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 봇카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매일 70-80kg이나 되는 짐을 이고지고 산장으로 옮긴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걸을 때 스마트폰을 보거나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걷는다. 그리고 사람들을 만나면 세상에 대한 가십거리나 사회문제 혹은 오늘 회사에서 있었던 일들을 주로 이야기한다. 하지만 오제에 사는 사람들과 봇카는 조금 달랐다. 평소보다 꽃이 빨리 시들었고, 어떤 식물이 예쁘게 피었으며, 누에고치가 언제 나비가 될 것인지 등 온통 자연에 대한 이야기로 대화가 이뤄지고 있었다.
처음 이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솔직히 어색했다. 어딜가서 올해 꽃이 일찍 폈어! 이 얘기로 상대방과 이야기의 물꼬를 트지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만큼 자연의 변화에 무심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빠른 사회에 선사하는 느린 영화
모든 것이 빠르게 지나가는 현대사회와 완전히 대치되는 영화라고 볼 수 있는 영화 <행복의 속도>. 요즘 영화들도 빠른 컷전환과 화려함을 보여주고 있다면 영화 <행복의 속도>에서는 느린 화면 전환과 아름다운 자연을 다양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대체하고 있었다. 그리고 빠르게 물건을 이송할 수 있는 헬기에 주목하기보다 몇시간이 걸리더라도 본인의 일을 묵묵히 하는 봇카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속도에 대한 질문을 넌지시 던지고 있었다.
과연 빠르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일까?
물론 오제와 같은 자연환경이 아닌 빌딩숲에 둘러쌓이고 월급을 받는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말고 자신의 속도에 맞춰서 살아가라는 조언은 얼토당토하지 않다. 환경과 사회 자체가 다르니 말이다. 하지만 회사가 아닌, 개인의 삶 자체에는 그 이야기가 다르다고 생각한다. 본인의 일상을 유지하는 방식이 회사와 사무를 처리하듯 정신없이 빠르게 지나치기 보다는 그 순간 떨어지는 낙엽을 보고, 지하철을 타며 노을지는 한강을 바라보며, 밤하늘에 떠있는 달을 보며, 나의 속도대로 일상을 지켜내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영화 <행복의 속도>는 꼭 봇카들처럼, 오제에 사는 사람들처럼 디지털을 다 버리고 아날로그의 세상으로 돌아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 나름의 속도를, 자신의 페이스를 찾으라고 전달해주고 있어서 잔잔한 울림을 주었던 것 같다.
영화 <행복의 속도>는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개개인의 행복의 속도에 대해 넌지시 알려주었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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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착하고 무해한 로맨스를 그리려는 어설픈 강박
* <달짝지근해: 7510>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달짝지근해: 7510 (2023)
감독: 이한
출연: 유해진, 김희선, 차인표, 진선규, 한선화
각본: 이병헌
장르: 로맨틱 코미디
상영시간: 118분
제과회사 연구원 '치호(유해진)'는 집과 회사만을 오가는 규칙적인 일상 속에서 오로지 '과자' 하나만을 보고 살아간다. 회사에서는 가장 유능한 직원으로 통하지만 현실 감각은 제로에 가까워 얼핏 보면 바보처럼 비치기도 한다. 결정적으로 그는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어려워 하고, 오직 혼자만의 삶을 추구한다.
그런 '치호' 앞에 나타난 대책 없이 밝은 여자 '일영(김희선)'은 매사에 직진일 정도로 적극적이고, 거침 없이 솔직하다. 어디로 튈 줄 모르는 통통 튀는 매력의 그녀는 매일이 똑같았던 '치호'의 삶을 완전히 뒤흔들어 놓는다. 한번의 상처를 겪었던 '일영'은 순수함의 결정체와도 같은 '치호'에게 끌리고, 생애 처음으로 달짝지근한 감정에 빠진 '치호'의 심장도 조금씩 '일영'에게 반응하기 시작한다.
<달짝지근해: 7510>은 촌스럽지만 귀엽고, 올드하지만 친숙한 중년들의 로맨스를 그린 영화다. 중년의 캐릭터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로맨스 작품들이 대개 불륜이나 치정을 밑바탕에 두고 있던 것과 달리 두 남녀 주인공의 순수한 멜로를 선보였다는 점에서 약간의 새로움을 점하기도 했다. 사회비판적 이슈를 다룬 현실적이고 어두운 작품들이나 자극적인 범죄 액션물과 달리 가볍고 착한 이야기를 담았기에 현 영화 트렌드에 피로감을 느꼈을 관객들이라면 충분히 선호할 법한 작품이다.
귀엽고 어리숙한 '유해진', 사랑스러운 '김희선'의 매력은 평범한 캐릭터에 생명력을 불어넣으며 슬랩스틱 코미디와 로맨스를 오가는 두 사람의 케미도 훌륭하다. 특히 '유해진'은 카메오로 등장하는 '염혜란', '임시완', '현봉식' 등 짧은 분량의 배우들과도 맛깔 난 티키타카를 선보이며 짧게 치고 빠지는 장면에서의 웃음 타율 또한 나쁘지 않다.
다만 배우들의 연기력에 기댄 채 뻔하고 낡은 이야기를 답습하고 있다는 건 여전히 아쉽다. 중년 로맨스를 주제로 한 작품이라 의도적으로 올드한 요소를 배치한 것일까? 특유의 '말 맛'으로 정평난 '이병헌' 감독의 매력이 각본에서 크게 두드러지지 않고, 아재개그랍시고 가미된 대사들은 고루할 지경이다. 어딘가 나사가 빠진 듯한 '치호'의 행동, '유해진'과 카메오 출연진들의 호흡 정도만이 제역할을 해낼 뿐 인물들의 대사가 가져다주는 재미는 부족하다. 특히 '차인표', '진선규', '한선화' 등 조연 캐릭터들은 철저히 주인공을 위한 도구로만 활용된다. '이병헌' 감독의 작품들에서는 조연 캐릭터의 쓰임이 한정적이지 않다고 느껴 왔는데, <달짝지근해>에서는 각본에만 참여한 탓인지 뛰어난 배우들을 한정적으로만 사용해 아쉬움이 컸다.
'유해진'이 연기하는 로맨틱 코미디 주인공이라면 훨씬 더 재기발랄하고 유쾌한 캐릭터가 탄생할 수 있지 않았을까? '착함'이라는 메시지를 강조하기 위한 강박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스토리를 제어하고 있는 듯한 안정감 때문에 각본의 매력이 반감된 듯하다. 그래도 계단에서 넘어지는 '일영'을 받아주지 않는 '치호'나 '일영'을 업고 가다 함께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는 신처럼 틀을 깨는 몇몇 장면들은 '이병헌'스러웠다.
물론 코미디 장르만을 표방한 작품은 아니기에 결과적으로 더 중요한 건 두 주인공의 사랑이 결실을 맺어가는 과정이다. 하지만 <달짝지근해>에 내재된 올드한 색깔은 '치호'와 '일영'의 로맨스에서도 유효하다. 마치 노골적으로 레트로를 지향한 것처럼 극에 등장하는 소품이나 배경들은 요즈음의 시내상과는 제법 거리가 있다. '치호'가 끌고 다니는 녹색 프라이드 자동차나 데이트 장소로 등장하는 '김밥천국', 어플로 송금을 하는 시대에 굳이 500원을 거슬러 주겠다는 행동까지. 그 흔한 SNS나 메신저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내가 지금 2003년에 나온 영화를 보는 게 아닌가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로맨스 이야기의 구조도 클리셰를 그대로 따른다. 우연한 장소에서 만난 두 남녀가 예기치 못한 사건들로 계속 엮이고, 설렘이 몽글몽글한 썸을 타다가 연애에 골인. 그리고 가족을 비롯한 주변인물로 인해 눈물을 머금고 이별을 하지만, 극적인 사건을 계기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해 재결합을 한다는 결말까지. 너무나 많이 보아 왔던 한국 로맨틱 코미디의 공식을 벗어나지 않는다. 특히 가장 감동적이어야 할 '치호'의 공개 고백 신은 기대만큼의 감정을 끌어올리지 못한다. '일영'은 그의 고백을 뒤늦게 접하게 되는데, 이때 발생한 시간 차가 감정선을 끊어버리는 역효과를 낳았다.
그리고 꼭 '치호'는 경계성 지능 장애에 가까운 인물로, '일영'은 미혼모로 설정해야만 했을까. 40대라는 나이는 이미 쓰디쓴 인생에 한참을 데여 풋사랑을 시작하기에 늦은 시기라는 데는 동의한다. 이 때문인지 중년 남녀가 순수하고 착한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일종의 결함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처럼 비쳐져 씁쓸했다. 극중 '치호'는 형을 비롯해 주변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기 일쑤고, '일영' 역시 치근덕거리는 직장 상사나 쉬운 여자 취급하는 사람들 때문에 괴로워한다. 따뜻하고 다정한 '치호'와 편견 없고 당찬 '일영'이 서로에게 끌리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얘기다. 각자의 아픔을 가진 남녀가 서로를 보듬어줌으로써 사랑을 꽃피우는 따뜻한 이야기이지만, 이게 매력적이거나 세련된 소재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로맨스와 코미디에만 집중하면 좋았을 텐데, 사회적 약자에 관한 이야기로 주제의식을 확장하다 보니 이도 저도 아닌 스토리가 돼 버렸다.
중장년층에게는 향수를 자극할 정취가 깔려 있고, 올드한 유머 또한 특정 세대에게 먹힐 만한 여지가 있다. 스토리의 여러 흠결을 배제하더라도 '유해진'과 '김희선'의 캐릭터 소화력과 이름값이 충분히 드러나 영화의 단점이 일부 보완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영화는 지나칠 정도로 착하고 무해한 로맨스만을 강조하며 이를 위해 마치 짜 맞춰진 것처럼 움직이는 이야기와 캐릭터들은 그저 작위적으로 비친다. 새롭고 달짝지근한 맛의 영화라기엔 그저 오래되고 익숙한 맛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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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영화 [더 배트맨]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비난은 늘 낯설고 새로운 것의 그림자 역할을 자처했다. 다니엘 크레이그가 처음 007이 되었을 때만 해도 모든 사람들이 여태까지 이런 007은 본 적이 없다며 비난과 험담의 벽을 쌓아 올렸으니까.
그러나 첫 작품이었던 [카지노 로열]은 사람들이 쌓아놓은 미움의 벽을 시원하게 밀어버렸다. 덕분에 다니엘은 시리즈 사상 가장 마초적이면서 인간적인 요원으로 자리 잡았고. 15년 동안의 임무를 완수하고 기꺼이 우리에게 안녕을 고했다. (참고 1)
DC에서 가장 많은 팬을 보유하고 있다고 과언이 아닐 배트맨 시리즈는. 예술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잡기로 유명한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손에서 가장 완벽한 3부작으로 태어났다. 그리고 희대의 악역인 조커를 낳았다.
이런 시리즈에 아직 물음표가 가득한 배우인 로버트 패틴슨을 앞세운 새 배트맨 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매우 큰 모험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영화 [더 배트맨]의 시작은 새로운 것들로 가득했고. 덕분에 그림자인 비난 역시 짙게 깔려있는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영화 [더 배트맨]은 이런 비난의 색을 가득 담았다. 어둡고 또 무겁다. 로버트 패틴슨은 우울하고도 생각으로 가득한 배트맨 역할을 여태 해 온 역할들과는 다른 분위기로 풀어내 영화의 깊이를 더했다.
제작진이 비난에 대처한 방식은 영화의 색깔과 같았고. 비난은 슬그머니 배트맨이 가진 고뇌의 무게에 합쳐져 긴 러닝타임 내내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9회 말 2아웃 상황의 DC가 드디어 해냈다는 생각이 들 때 즈음이면 가벼운 마음만큼이나 영화 속 배트맨의 마음도 조금은 밝아졌음을 느낄 수 있다.
3,6,9는 진리다.;배트맨도 피할 수 없는 3년 차 성적표
사진 출처:다음 영화
3년 차.
일반 회사로 친다면 이제 슬슬 대리 달아야지?라는 덕담 같은 압박이 귓가에 쌓이기 시작할 때다. 불가능할 것만 같던 업무 짬도 차기 시작하고 전체적인 일의 그림도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익숙해져 버린 자리 덕에 슬슬 회사 전체에 대한 불만도, 그리고 이직을 했을 경우의 "조건"들에 대해 점치기도 시작한다. 또한 근원적으로 내가 과연 이 일을 계속해도 될 것인가에 대한 의심과 물음도 하나둘씩 마음을 채운다.
올해 3년 차에 들어선 고담 시 (명예) 공무원인 배트맨의 위치가 정확히 이 지점에 있다. 이제 고담 시 전체도 제법 눈에 익었고. 모든 범죄에 출동할 수 없으니 Priority를 세워 선택적으로 야근할(?) 줄도 안다. 그럼에도 고담 시의 경찰들에게는 가면을 쓴 자경단들 중 하나 정도라는 생각에 그칠 뿐이지만.
그럼에도 경찰들이 이 혼돈의 배트맨을 잡아들이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에게 기대하는 "능력"이 (연차 대비) 출중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뛰지 않는다.
날아다니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현란하게 움직이지도 않는다. 배트맨은 자신의 정체가 그들의 코앞에 다가갈 때까지 천천히, 그리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밤이 만들어 낸 안개가 걷히면서 배트맨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에. 범죄자들은 그제서야 허공을 향해 빛나고 있는 박쥐 모양의 경광등을 떠올리며 마른침을 삼킬 수밖에 없어진다. 물론 그 마른침이 다 넘어가기도 전에 얻어맞고 바닥에 뻗어 있겠지만.
영화는 배트맨이라는 캐릭터가 가진 위압감을 매우 잘 묘사하고 있다. 분명 다른 히어로들보다 휘황 찬란하다거나, 빠르지도 않지만. 배트맨이 등장하는 모든 장면에서 오는 압박감만은 매우 대단하다. 저벅저벅 걸어오는 그 발걸음에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집념을 느낀 악당들에게 배트맨은 훌륭하고도 끔찍한 악몽이며.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지만 동시에 만나보고 싶기도 한 빌런이다.
세례 받은 배트맨;자신 스스로도 구원해 내기.
사진출처:다음 영화
영화 속 배트맨은. 마치 자신의 진정한 MBTI가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수많은 질문들 앞에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자신이 행하던 것이 복수였는지. 혹은 정의였는지에 대해 생각하듯이.(참고 2)
리들러의 공격은 너무도 현실에 착 붙어 있어서.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점을 파고들었다. 덕분에 외면하고 싶은 연좌제에 대한 이슈를 똑바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 또한 뒷골목의 사람과 다를 바가 없을 것만 같아서.
셀리나는 자신이 드러낼 수 없는 마음속 분노의 모습과 닮아있어 더 이상의 고아가 탄생하는 것도. 고아가 저지르는 잘못도 없기를 바라는 배트맨의 입장에서는 그녀가 어둠 속에서 사는 사람이 되는 것 또한 막아야 했다.
여기까지면 좋으련만. 브루스 웨인으로서의 삶은 일찌감치 박살 난 지 오래라 어떻게 돌아가야 하는지도 감을 잡을 수가 없는 상황이기까지 했다.
이렇게 모든 것이 엉망인데. 배트맨은 자신의 앞에 놓인 질문에 답을 해야 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리고 정확하게. 게다가 늦지 않게.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고담 시 사람들이 사상을 입을 수도 있는 그 순간에. 배트맨은 마지막 결정을 내린다. 그리고 기꺼이 물속으로 뛰어든다.
마치 영화의 진행 내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던 복수와 정의 중 후자를 선택하기로 마음먹은 순간임과 동시에. 여태까지 지니고 있던 모든 고뇌를 세례를 통해 씻어내린 것처럼 느끼게 하는 장면이었다.
그의 MBTI는 결정되었고. 동시에 새로운 배트맨이 되었다. 그리고 배트맨은 망설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을 좀 더 가까이서 직접 돕는 것을 가장 먼저 행동으로 옮김으로써. 그는 이 역할에 당위성을 고쳐 붙였다. 스스로의 힘으로.
다른 사람을 구하겠다고 생각했지만. 과연 그가 건져올린 것들에 자신도 있음을 알아주는 날이 오기를 빈다.
과연 이직에 성공할 수 있을까?;일단 야근부터 좀 어떻게 해보자.
사진 출처:다음 영화
영화의 말미에. 배트맨은 아주 잠깐이지만 그 지독한 어둠에서 벗어나 사람들을 도우는 일에 합류한다. 마치 부끄러운 자신의 모습을 가리기라도 하려는 듯 그 모습마저도 먼지 구덩이에서 한 번은 구르고 나온 것 같은 모습이지만. 배트맨의 눈길과 몸짓은 경직되어 있던 영화의 초반과는 조금은 달라 보이기까지 한다.
그전까지 자신에게는 어둠만 허락된다고 생각했다. 어둠을 먹고 사는 자들을 처리하는 것이 자신의 복수이자 고담 시의 질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밤의 지배자들에게는 두려움이라는 바이러스를 뿌려댈 수 있지만. 낮의 주인들에게는 희망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낮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아 희망이 전염될 가능성이 더 많다는 것도 잊고 있었다.
이제 배트맨은 고담 시를 떠날 수 없다.
3년 차가 갖고 있던 고민도 사라졌고, 자신의 MBTI도 명확해졌다. 그리고 야근만 하던 삶을 주간 근무로 바꿀 수 있는 희망도 이젠 갖게 되었다.물론 이런 각오가 무색하게 6년 차의 헛바람은 찾아올 것이고. 이 도시는 여전히 자신을 배신하겠지만. 게다가 잊고 있었던 야근도 종종 하게 될 테지만. 이제 배트맨의 눈은 바뀌었다.
앞으로 나아가는 용기는 매일 다른 것을 하며 자극을 찾는 것이 아닌. 똑같은 일상을 견뎌내는 힘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의 눈으로.이 초보 공무원이 고담에서 보낼 영원한 시간들 중 딱 오늘 하루만이라도 부디 평온할 수 있기를 바란다. 야근도 안 하면 더 좋고.
마치면서;+좋아한 장면
호불호가 매우 강할 영화다. 액션이나 최첨단 무기, 혹은 브루스 웨인의 어마 무시한 부(Richness)를 기대한다면 한없이 지루할 것이고. 지울 수 없는 이름인 히스 레저를 떠올린다면 더더욱 실망할 영화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점들을 지우고 새로운 배트맨에 집중한 것이 좋았다. 배트맨의 탄생이나 고담 시 7급 공무원 정도의 짬을 가진 타이밍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제 겨우 병아리 티를 벗고 뭔가 해보려고 하는 의욕은 많지만 처음 접해보는 문제들에 부딪쳐 시무룩해지기 쉬운 딱 3년 차의 모습이라서. 그냥 응원해 주고 싶었다.
최근 영화가 길어지는 추세에 대한 큰 반감이 있긴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닝타임이 길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하다못해 리뷰를 어떻게 써야 할까 같은 쓸데없는 잡생각 없이 그저 이 야근만 하는 공무원의 고군분투 일처리를 보다 영화관을 나왔다. 그가 아주 조금은 행복.. 까지는 아니더라도 마음이 가벼워진 게 보이는 것 같아 다행이다.
[좋아한 장면]
중간에 나오는 자동차 추격전 장면과 천장을 박살 내면서 떨어져내리는 장면은 뭐 말할 것도 없지만. 글에도 쓴 홍수 난 광장으로 떨어지는 장면에서 그냥 자꾸 눈물이 났음. 기꺼이 고난으로 뛰어드는 자 만이 얻을 수 있는 재탄생을 잘 살린 것 같았음.
참고 1
007시리즈 말고 다니엘 크레이그가 연기한 007에 대해 쓰다가 저장해둔 글이 있었는데 거기서 조금 갖고 옴. 개인적으로 크리스찬 베일의 엄청난 팬이기 때문에 로버트 패틴슨이 배트맨을 한다고 했을 때 입에 거품을 물고 반대했던 사람이었으나. 이 영화 보고 나서 영원히 입다물기로 함.
참고 2
내 MBTI도 제대로 못 외우는 주제에 리뷰 쓰겠다고 찾아봄. 실제로 배트맨의 MBTI는 INTJ이며. 나는 INFJ임. 문제는 그게 무슨 뜻인지를 아직도 잘 모름.
[이 글의 TMI]
1. 영화는 (너무 무거워서) 내 취향이지만. 리뷰는 좀 가볍게 쓰고 싶었음.
2. 어두운 영화 좋아하는지 몰랐는데 내 OTT 서비스 보고 싶어요 한 목록 보니까 이건 뭐. 아포칼립스던데.
3. 샐러드 먹고 16시간 금식은 내가 봐도 너무 힘들다. 근데 그걸 두 달째 하고 있지.
#더배트맨 #맷리브스 #로버트패틴슨 #앤디서키스 #조크라비츠 #폴다노 #DC #영화추천 #최신영화 #영화인플루언서 #네이버인플루언서 #브런치작가 #내일은파란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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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월 셋째 주 극장 개봉 & 예정작 ?
레옹 20주년 재개봉 소식!
4월 3주차 개봉예정작 CINEPICK!
고스트 버스터즈
Ghostbusters: Frozen Empire
ⓒ 네이버영화
개요: 액션, 모험 | 미국 | 115분
감독: 마이크 미첼, 스테파니 스티네
출연: 잭 블랙, 아콰피나, 비올라 데이비스, 더스틴 호프만 등
개봉: 2024.04.17.
배급: 소니픽처스
시놉시스
얼어붙은 세상을 깨라! 무더운 여름의 뉴욕의 어느 날, 고대 유물 속 깨어난 ‘데스칠’로 인해 정체불명의 냉기가 몰려오고 마침내 도시는 얼어붙고 만다. 유령을 퇴치하는 ‘그루버슨’(폴 러드)과 라이즈 버스터즈 멤버들은 얼어붙은 세상을 깨부수기 위해 유령 군단을 쫓기 시작하는데…
CINE PICK!
고스트버스터즈 시리즈의 4번재 작품. 전작인 고스트버스터즈 라이즈에서 이어지는 내용으로 3편 라이즈가 평가와 흥행에 모두 성공하며 후속편을 선보인 작품입니다. 전작의 공동 각본과 총괄 프로듀서를 담당했던 길 키넌이 맡았으며, 1984년의 오리지널 <고스트버스터즈>의 매력을 그대로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이야기로 재탄생했습니다.
정순
ⓒ 네이버영화
개요: 드라마 | 대한민국 | 104분
감독: 정지혜
출연: 김금순, 윤금선아, 조현우, 김최용준 등
재개봉: 2024.04.10.
배급: (주)더쿱디스트리뷰션
시놉시스
하루아침에 평화로운 일상을 빼앗긴 정순. 딸 유진을 비롯한 모두가 정순을 대신해 분노할 때, 그녀는 여전히 곧고 다정하게 ‘정순’다운 내일을 시작하려 한다. 전 세계를 감동시킨 세상 가장 빛나는 이름 <정순>
CINE PICK!
부산독립영화제 최우수연기상, 로마 국제영화제 최고의 여자배우상, 심사위원 대상을 차지한 <정순>은 영화 <잠> <세이레> 등 독립영화 장편상업영화에서 얼굴을 톡톡히 알려온 김금순 배우 주연의 영화로 작품성과 연기력을 모두 인정받은 작품입니다.
땅에 쓰는 시
Poetry on Land
ⓒ 네이버영화
개요: 다큐멘터리 | 대한민국 | 113분
감독: 정다운
출연: 정영선
개봉: 2024.04.17.
배급: 영화사 진진
시놉시스
도심 속 선물과도 같은 선유도공원부터 국내 최초의 생태공원 여의도 샛강생태공원, 과거와 현재를 잇는 경춘선 숲길까지··· 우리 곁을 지키는 아름다운 정원을 탄생시키며 한국적 경관의 미래를 그리는 조경가 정영선 공간과 사람 그리고 자연을 연결하는 그의 사계절을 만나다.
CINE PICK!
2024년 4월 17일 개봉 예정인 한국의 다큐멘터리 영화. 국내 1세대 조경가 정영선의 국내에 ‘조경’이라는 개념이 자리 잡기 시작하던 때부터 현재까지 가자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조경가의 정영선의 아름다운 정원과 공간에 대한 철학을 담은 작품입니다.
Leon
레옹
ⓒ 네이버영화
개요: 범죄, 액션 | 프랑스, 미국 | 132분
감독: 뤽 베송
출연: 장 르노, 나탈리 포트만, 게리 올드만 등
재개봉: 2024.04.17.
배급: ㈜제인앤씨미디어그룹, 와이드 릴리즈㈜
시놉시스
정처 없이 떠돌며 살아가는 킬러, ‘레옹’(장 르노) 어느 날, 그의 이웃집 소녀 ‘마틸다’(나탈리 포트만)의 온가족이 몰살당한다. 우연히 살아남은 ‘마틸다’는 ‘레옹’에게 도움을 청하고, ‘레옹’은 하루아침에 소녀의 보호자가 되고 만다. ‘마틸다’는 ‘레옹’과 함께 지내며 자신의 가족을 몰살한 이가 부패 경찰 ‘스탠스필드’(게리 올드만)임을 알게 되고, 사랑했던 남동생의 복수를 결심하는데…
CINE PICK!
1994년에 개봉한 뤽 베송 감독의 영화로 개봉당시 큰 흥행 수익과 대한민국을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레옹 신드롬을 일으키며 대성공을 거둔 작품입니다. 엄청난 암살실력을 보인 장 르노, 영화를 넘어 패션의 아이콘이 되어버린 단발머리와 초커를 착용한 마틸다를 연기한 나탈리 포트만, 개리 올드만의 역대 최고의 광기어린 악역 연기와 아이코닉한 이미지를 완성시킨 명작입니다.
이렇게 극장 개봉 영화, 총 네 편의 영화를 소개해 드렸는데 어떠셨나요?
그럼 남은 한 주도 건강하게 보내시길 바라며, 지금까지 씨네랩 에디터 Amy였습니다!
https://www.instagram.com/cinepi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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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한반복 도르마무를 하고 있는 남자의 사연은?
영화 드라마 모두 마사지하듯 시원하게 이야기로 풀어드립니다! 씨네마사지 ? 8월 19일 개봉예정 영화 팜스프링스 시사회 관람 리뷰입니다. 100만번째 하루를 반복하고있는 남자의 사연은? 믿고 보는 타임루프물!! 솔직한 감상평과 함께 이야기해 보았습니다. *시사회 초대는 영화 전문 플랫폼 [씨네랩]에서 제공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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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죽던 날] 리뷰:주제가 쉽게 와닿지 않았던 영화, 다소 장황했고 지루했다.
#내가죽던날#김혜수#이정은
저는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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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3000년의 기다림> 메인 예고편
"Make a Wish" 신비로운 비주얼, 매혹적인 미장센! 사랑, 모험, 드라마, 로맨틱..? [3000년의 기다림] 메인 예고편 전격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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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프렌치 디스패치> 리뷰 예고편
20세기 초 프랑스에 위치한 오래된 가상의 도시 블라제
다양한 사건의 희로애락을 담아내는 미국 매거진 ‘프렌치 디스패치’
어느 날, 갑작스러운 편집장의 죽음으로
최정예 저널리스트들이 한자리에 모이고
마지막 발행본에 실을 4개의 특종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당신을 매료시킬
마지막 기사가 지금 공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