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3-08-24 17:3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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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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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었다
베테랑을 본 날, 그날은 문화의 날이었다. 그래서 영화를 두 편을 봤다. 그 중에 하나가 암살이다. 암살과 베테랑은 오랫동안 걸려있어서 몇몇 사람들은 독과점 같다는 이야기도 하지만 사실 이 영화들은 사람들이 많이 봤으면 하는 마음이 크다. 특히 암살은 여운이 남는다.
여기도 믿고보는 배우들이 나온다. 베테랑에서도 만난 믿고보는 오달수, 또 믿고보는 하정우. 사실 씬 자체는 몇 컷 안 되지만 두 영화의 신스틸러.. 언제나 중요한 역할 믿고보는 진경.
암살은 쉽게 말하면 독립운동을 그리는 영화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알고 있는 독립운동이 아닌 다른 독립운동이었다.
이 영화가 나오자 마자 표절시비가 붙었다. 100억 소송이었나? 역사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나 소설의 표절시비라 의아했다. 읽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플롯이 얼마나 비슷한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런 식으로 소송을 하면, 세상에 많은 사극들은 조선왕조실록의 표절이 아닌가. 뭐 이런 얘기다. 저런 표절시비가 붙고 나서 작가는 책을 재출간했고, 아마 '암살이 표절한 책'으로 홍보를 해서 꽤 돈을 벌었을 것이다. 뉴스를 보니 영화 측에서 표절시비 책 전량회수를 요구했다고 하는 것 같다. 그래야지. 그런 악의적인 소송이라니.
여튼 독립운동을 하는, 특히 적극적으로 육체적으로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배신과 배신이 난무하고, 깨달음이 있다. 고민하는 자신의 모습과 두려워하는 자신의 모습을 감추기 위해 과하게 밝게 행동하고, 자신이 독립운동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모든 상황들을 유쾌하게 받아들이는 속사포는 마음을 짠하게 했다. 돌아와줘서 좋았으나 그 이후의 상황이 예상이 되어서 돌아오지 말지 그랬니.. 하는 안타까움도 들었다.
배우의 구멍이 없었다. 다들 연기를 잘했다. 연기를 못한다고 까이는 전지현이지만, 사실 나는 전지현이 그렇게 연기를 못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특히 베를린에서의 그 절제된 연기는 썩 마음에 들었었다. 이번에 연기도 마찬가지 였다. 딱 그 사람. 딱 이 사람. 같았다.
암살도 임무를 마친 그들의 모습을 보여 통쾌한 마음이 들었으면 했지만, 되려 무거워졌다. 베테랑에서 느끼던 통쾌함은 느낄 수가 없었다. 이는 아마 우리 곁에 여전히 남아있는 친일파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이건 해석하기 나름이지만 마지막의 이정재의 죽음은 그들의 마지막 임무완수가 아니라 이정재의 죄책감에서 나온 상상이 아닐까 싶다. 늙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났던 안오균과 이정재의 죄책감의 하나인 그... 후배.
그리고 이정재가 쓰러진 그 마당은 이미 발전한 서울에서 문을 열고 나갔을 때 보이는 모습이라고 보기에는 동떨어진 모습이었다. 너른 들에 흩날리는 천들은 아무것도 없는 이정재의 마음을 표현한 것은 아닐까. 그게 이정재가 혹시 자살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이건 내 생각이기는 하지만.
누군가 하정우가 죽지 않았다면? 이경영이 자살을 했다면? 이라는 의문을 남겼다. 하정우가 죽지 않았다면 너무 뻔한 사랑이야기가 되어 버렸을 것 같고, 이경영이 자살을 했다면 그들의 임무가 찜찜하게 되었을 것 같다. 그 임무를 위해 죽은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말이다. 그리고 어쩐지 내 마음도 찜찜했을 것 같다.
이경영의 자살은 어쩐지 '에잇 ㅅㅂ, 나는 잘못이 없어. 딸 손에 죽느니 그냥 내가 죽고 말지' 이런 느낌이 들었을 것 같았달까? 결국 딸 손에는 죽지 않았지만... 이경영의 자살은 어쩐지 좀 분하다.
사실 하정우의 죽음은 안타깝기 마련이다. 미란다호텔에서 두 사람의 조합은 정말 환상이었는데! 조금씩 엇갈린 것 같아 안타깝기도 했다.
이정재는 관상에 이어서 악역인데, 의외로 악역이 잘 어울리면서 맛갈나게 소화를 한다. 특히 관상에서 부터 들려줬던 그 특유의 걸걸한 목소리가 사람의 마음을 살살 긁는다. 짜증이 나게? 어쨌든 잘 소화해 냈다. 악역을 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이 영화를 보고, 배우들과의 이야기를 들은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하나. 하정우와 전지현의 멜로. 벌써 몇 번이나 만났지만 제대로 된 멜로를 연기하지 못한 두 사람에게 정통멜로 하나를 던져주는 것은 어떨까? 어서 물어보세요, 멜로의 떡밥을(정통멜로가 아니어도 좋아오 로멘틱코미디도 좋으니 물어주세요, 떡밥을).
아,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었다. 라는 건 씁쓸하지만 지금 우리나라의 승리자는 친일파라고 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나라를 위해 희생된 수많은 인물들이 묻히고, 지금에서는 국정교과서까지 추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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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빛 말고 핏빛어린 디톡스 시청각자료!
이토록 끝까지 갈지 몰랐다. 생각 이상이다. 상영 중 옆에 앉은 중년 부부의 볼멘 소리가 나올정도록 불편한 이미지와 영상은 관객들의 눈과 귀를 괴롭힌다. 나이를 불문하고 노출된 주인공(들)의 몸을 보는 건 점점 힘들어져가고, 파국으로 치닫는 이야기는 자리에서 일어날 힘조차 빼앗는다. 마지막까지 이 기조를 유지하는 감독의 뚝심은 핏빛 잔치를 벌이며 끝내 관객을 넉다운 시킨다. 어쩌면 <서브스턴스>는 왜곡된 미(美) 추구와 젊음을 쫓는 데 혈안이 된 사회적 풍토, 이를 조장하는 미디어의 횡포, 이 늪에 빠진 이들에게 전하는 공포의 디톡스 시청각자료와 같다.
별도 지기 마련이다. 오스카 상을 수상하고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입성할 정도 큰 인기를 얻은 엘리자베스(데미 무어)는 최고의 스타였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TV 에어로빅 쇼 진행자로 근근히 먹고 산다. 하지만 제작자 하비(데니스 퀘이드)는 그녀의 50세 생일을 축하(?)하듯 보란 듯이 해고를 전한다. 더 젊고 예쁜 진행자로 교체하려는 그의 속셈에 엘리자베스는 희생양이 되고, 업친데 덮친격으로 교통사고도 당한다. 실의에 빠진 그녀는 우연히 병원 남성 간호사로부터 의문의 USB를 받는다. 안에 담긴 건 한 번의 주사로 젊어지는 효과를 누릴 수 있다는 신약 ‘서브스턴스’ 소개 내용. 거울에 비친 생기 없는 얼굴과 중력에 굴복하는 몸뚱이를 본 그녀는 고민 끝에 서브스턴스를 구매한다. 그리고 약물 주입후 자신의 몸에서 매력적인 20대 수(마가렛 퀄리)가 탄생한다. 예상대로 그녀는 하비의 관신을 받고, 엘리자베스가 진행하던 TV 쇼를 맡는다. 하지만 문제는 7일을 기준으로 둘 중 한 명은 잠들어야 한다. 이 균형을 잘 지킨다면 아무 일도 없었겠지만, 엘리자베스보다 더 나은 삶을 사는 수는 이 규칙을 어기고 만다.
<서브스턴스>는 바디 호러를 표방한 사회 풍자극이다. 그 중심에는 빛나는 순간을 영원히 지속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 자리잡는다. 엘리자베스의 직업은 배우다. 스스로 빛나는 게 아니라 자신을 좋아하는 대중들이 있어야 빛나는 이 직업의 운명은 그를 행복하게 만들지만, 때로는 그를 옥죈다. 자신보다 남들의 시선을 신경써야 하고, 그들의 욕망을 채워주는 역할을 수행해야 하다 보니 결국 남는 건 노화된 몸과 쪼그라든 자신감이다. 이 상황을 좀처럼 받아들일 수 없는 그녀는 과거 빛났던 순간을 다시 찾고 싶은 마음 뿐이다. 젊음을 그리워하고 되찾고 싶은 그녀를 이해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기혐오에 빠지는 모습은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이는 ‘늙음이 곧 사회적 도태’라는 불안에 잠식된 현대인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조금이라도 더 젊어져 사회의 가장자리에 남고 싶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현대인들처럼, 그녀 또한 돌이킬 수 없는 서브스턴스의 유혹에 빠진다.
‘기억하라, 당신은 하나다!’라는 말은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다. 이를 뒷받침 하듯 극 중 ‘서브스턴스’를 소개하는 영상에도 두 개의 노란자로 구성된 계란이 나온다. 엘리자베스와 수를 연상시키는 이 이미지는 완벽한 균형을 맞췄을 때 공존이 이뤄진다는 걸 의미한다. 하지만 이 균형은 깨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둘은 규칙을 어기고 서로를 증오한다. 주사를 맞은 후 엘리자베스는 수를 탄생시키고, 젊음과 기회의 빛을 얻었지만, 정작 본인은 그 빛에 드리워진 그늘에서 7일을 보낸다. 이들의 간극은 점차 벌어지고, 서로를 증오하고, 결국 망가뜨린다. 결국 ‘당신은 하나’라는 명제를 잊은 채 자신의 삶을 더 영위하고자 하는 욕심으로 모든 일을 그르친다. 영원한 젊음을 원하며 이를 상징한 와인을 탐닉한 클레오파트라, 젊은 하녀의 피로 젊음을 유지했던 피의 백작 부인 엘리자베스 바토리를 따라하듯 엘리자베스 또한 욕망이란 늪에서 허우적 된다.
<서브스턴스>는 자신의 욕망에 자신이 결러든 여성의 참혹한 최후만을 그리지는 않는다. 올해 칸국제영화제 각본상을 받을 정도로 이야기의 힘을 가진 영화는 프랑스 여성 감독인 코랄리 파르쟈가 연출과 각본을 담당했다. 감독은 덫에 빠진 건 여성 자신이지만 더 아름답고 완벽한 나를 원한건 대중, 특히 젊음을 갈구하는 남성들의 시선이라 말한다. 그리고 이를 조장하는 미디어의 횡포도 꼬집는다.
하비를 비롯해 미디어 수뇌부와 자본가들이 모두 남성인 건 우연히 아니다. 이들의 시선에 응당 응해야 자신이 빛난다는 걸 알고 있는 엘리자베스는 이 미친 선택을 하며 또 한 번 그들이 마련한 무대에 오른다. 후반부로 갈수록 껍데기는 바뀌었어도 자신의 몸둥아리에서 나온 분신(들)이기에 그 욕망은 변함없다. 하지만 모습이 바뀐 후, 대중들은 사랑이 아닌 혐오의 시선을 보내고, 이를 확인한 그녀는 별빛처럼 빛나는 순간은 핏빛으로 바꿔버린다. 용솟음치는 핏빛은 화면 전체를 가득 메우는데, 감독은 이 장면을 통해 엘리자베스를 이같은 괴물로 만들 게 한 건 그녀의 욕망만이 아니라 그렇게 만든 너희(대중)들의 시선도 한 몫한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이 장면에서 핏물의 방향이 어디로 향해있는지를 유심히 보면 감독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다.
영화는 충격적이고 불쾌하다. 바디 호러 장르를 좋아하는 분들이 아니라면 상영관 밖으로 나가고 싶은 충동이 계속 자신을 괴롭혔을 것이다. 그럼에도 두 다리를 묶고 엉덩이를 들썩이지 못하게 하는 건 데미 무어에 기인한다.
이는 단순히 혼신을 다한 그녀의 광기 연기 때문은 아니다. 엘리자베스는 곧 데미 무어처럼 보인다. <사랑과 영혼> 등 1990년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던 여배우였지만, 세월을 막을 수 없었던 그녀는 전신 성형을 시도한 바 있다. 거액을 들여 젊음을 유지하려 했던 과거는 물론, 연기와 작품 이야기 보단 온갖 가십 기사로 만났던 그녀의 삶은 엘리자베스와 닮아 있다. <서브스턴스>가 미키 루크의 삶을 투영한 <더 레슬러>의 여성판으로 불리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데미 무어의 삶을 간접 체험하는 듯한 그녀의 연기는 그동안 말하지 못했고, 말할 기회 조차 없었던 울분을 마구 마구 토해내듯 분기점이 될만한 연기력을 뿜어낸다. 골근글로브에 이어 이번 오스카의 유력 여우주연상 후보로 점쳐지는 건 당연한 결과다.
‘개미친 영화’. <서브스턴스> 런칭 포스터에 담긴 이 강렬한 문구는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그 이유는 단순히 가학적이고, 파괴적이며, 과감한 노출 등 수위가 높은 충격적 영화라는 점 때문만은 아니다. 여성으로서 살아가기 힘든 사회상을 정면으로 들이 받는 행동에 있다. 그리고 끝까지 간다. 우리의 마음 속 갖가지 욕망 덩어리를 터뜨리고, 잘못된 시선을 마취 없이 교정하는 그 고통은 생각보다 오래 간다. 이 통증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딱 하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카메라가 아닌 자신에게 키스 퍼포먼스를 날리면 된다. 애써 완성한 화장을 마구 마구 지우지 말고.사진제공: 찬란
평점: 4.0 / 5.0
한줄평: 데미 무어의 개미친 연기에 설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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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EONJU IFF 데일리] 영화의 무덤 앞에서, 다시 영화를 묻다.
영화 정보
감독: 라두 주데 (Radu Jude)
제작국가: 루마니아
제작연도: 2024년
상영시간: 62분
장르: 다큐멘터리
상영 형식: DCP, 컬러/흑백
상영 섹션: 특별전 : 가능한 영화를 향하여
아시아 프리미어
시놉시스
꽃잎 하나가 떨어지네
어, 다시 올라가네
나비였네
- 모리타케리뷰
라두 주데(Radu Jude)의 2024년작 <잠 #2>은 앤디 워홀(Andy Warhol)의 1963년 실험영화 <잠(Sleep)> 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실험 다큐멘터리다.
“The most wonderful thing about living is to be dead.”라는 워홀의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영화는, 그의 무덤을 1년간 실시간으로 비추는 웹캠 스트리밍을 데스크톱에서 녹화하고 편집해 만든 62분 분량의 작품이다. 영화에는 서사도, 인물도, 대사도 없다. 단 하나의 고정된 프레임 속에서 계절과 날씨, 낮과 밤이 교차하고, 사람과 동물들이 등장하고 사라진다. 그러나 그 정적 속에, 우리는 이미지의 탄생과 소멸, 감시와 연출, 존재와 소비라는 복잡한 층위를 발견하게 된다.
워홀의 무덤 앞은 ‘영원한 잠’의 공간이지만, 그곳은 좀처럼 조용하지 않다. 낮에는 무덤을 관리하는 이가 등장하고, 밤에는 고라니나 다람쥐 같은 동물들이 어슬렁거린다. 방문자들은 이곳에서 사진을 찍고, 담배를 피우며, 때로는 카메라를 향해 포즈를 취하고 손을 흔든다. 이들은 추모객이 아니라, ‘자신이 찍히고 있음’을 인식한 퍼포머다. 누군가는 캠벨 수프 캔이나 금발 가발처럼 워홀을 상징하는 오브제를 놓고 가기도 한다. 이 반복적 행위는 워홀 생전의 작업인 반복, 복제, 이미지화를 무덤이라는 장소를 통해 역설적으로 재현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작품이 ‘영화’로서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을 재구성한다는 점이다. 감독은 전통적인 촬영 장비 없이, 단지 컴퓨터 데스크톱 화면을 1년간 녹화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완성했다. 화면에는 Earth Cam이 보이고 화면을 녹화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디지털 매체의 물리성과 흔적이 숨김 없이 드러난다. 영화는 움직임보다 시간의 밀도에 집중하며, 관찰과 기다림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시네마의 감각을 되살린다. 마치 뤼미에르 형제가 <열차의 도착(1896)>에서 처음으로 카메라를 들고 '기다림을 기록했듯,
<잠 #2>은 질문한다. 영화는 반드시 움직여야 하는가? 이야기해야만 하는가? 관객은 이 영화에서 무덤을 찾는 이들과 동일시된다. 무언가를 보고, 찾고, 의미를 부여하려 애쓰며, 결국 그 행위 자체가 하나의 영화적 체험이 된다.
감독은 단 한 번의 카메라 이동도 없이, 시간의 흐름과 반복을 통해 죽음과 생명, 정지와 운동, 감시와 연출, 기록과 망각 사이의 긴장을 구축한다. 정점은 가장 격렬한 자연 현상인 비바람과 천둥이 일어나는 장면에서 도달한다. 자연이 소란스러울수록, 무덤은 더욱 고요하고 단단하게 그 자리를 지킨다. 이 정적은 영화의 본질이 움직임이 아니라 ‘시간을 밀도 있게 담아내는 형식’임을 다시금 일깨운다.
웹캠이라는 감시 장치가 자동적으로 영상을 기록하고, 감독이 그것을 선택해 편집하며, 관객이 다시 관람하는 이 삼중 구조는 관찰, 노출, 프라이버시를 둘러싼 현대적 감각을 불러낸다. <잠 #2>은 다큐멘터리 윤리와 창작 주체의 위치에 대해 묻는 동시에, 영화라는 예술이 ‘기록’ 이상의 어떤 감각을 전달할 수 있는지 묻는다.
2025년 전주국제영화제 ‘가능한 영화를 향하여’ 섹션에 이 영화가 초청된 것은 단지 형식 실험의 결과가 아니다. <잠 #2>은 영화가 될 수 있는 것의 경계, 영화가 지속될 수 있는 방식, 그리고 동시대 관객이 감각하는 감수성을 정면으로 탐색하는 작품이다. 장르와 상업성으로 포화된 동시대 영화 환경 속에서, 이 작품은 영화의 존재 이유를 근본적으로 다시 묻는다.
앤디 워홀은 생전 ‘관람거리’를 생산하던 이미지의 작가였다. <잠 #2>은 그가 죽은 후, 어떻게 하나의 이미지로 고정되어 다시 소비되는가를 보여주는 동시에, 영화라는 매체 또한 그러한 반복 소비의 경계에 놓여 있음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 영화는 조롱도, 찬양도 아닌 침묵 속의 응시로 답한다. 마치 관처럼 정적인 프레임 속에서, 우리는 영화를 다시 시작한다. 워홀의 무덤 앞에서, 영화의 무덤을 조용히 열어젖히며.
상영 일정
2025년 5월 1일 10:30
전주디지털독립영화관
2025년 5월 3일 21:00
메가박스 전주객사 1관
2025년 5월 5일 10:00
메가박스 전주객사 4관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 : 2025.04.30 ~ 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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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의 논리로 선 땅에서 예술의 정수를 쌓아 올리다!
3시간 35분. 극장에서 인터미션 마주할 수 있게 한 <브루탈리스트>는 잊지 못할 영화적 경험을 안긴다. 영화 외적일 뿐만 아니라 영화 내적으로도 잊지 못할 경험을 전한다. 왜 이 영화가 이렇게도 길수밖에 없는지, 긴 시간 동안 왜 우리는 미국으로 간 한 유대인 건축가가 돈의 논리로 선 땅에서 예술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목도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끝내 알게 된다. 마치 기나긴 터널을 묵묵히 버티며 끝내 밝은 빛을 맞는 느낌처럼, 영화는 끈질기게 자유를 갈망하는 라즐로의 고통의 나날을 촘촘하게 쌓아 올린다.
파시즘을 피해 미국행을 택한 건축가 ‘라즐로 토스’(애드리언 브로디). 하지만 그를 기다리는 건 자유의 삶이 아닌 이민자로서 겪는 냉혹한 현실이다. 사촌의 일터에 얹혀살고 가구를 만드는 일을 하지만, 자신의 재능을 100% 발휘하지 못하는 현실은 참기 힘들다. 부유한 사업가인 해리슨(가이 피어스)의 서재를 리모델링하는 일을 맡고 유려한 공간을 만드는 데 성공한 그지만, 결과는 되려 거친 항의를 받는다. 결국 사촌 집에서 쫓겨난 라즐로는 막노동으로 근근이 먹고산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에게 버럭 소리치던 해리슨이 찾아와 과거 일을 사과하며, 자기 집에 초대를 한다. 이에 응한 라즐로는 그에게 건축물 설계 제안을 받는다.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 여긴 라즐로. 하지만 예산, 시대를 앞선 건축 양식 등 장애물을 만나고, 또 다른 시련을 겪는다.
| 자유의 여신상이 거꾸로?
“자유롭다는 착각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노예다”
<브루탈리스트>라는 영화를 설계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건 자유다. 극 중 등장하는 괴테의 말처럼 라즐로는 파시즘의 공포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찾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온다. 그리고 어두컴컴한 배에서 올라와 자유의 공기를 마신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는 건 온전한 자유가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깊은 늪이다.
영화 초반을 생각해 보면 라즐로에게 미국은 자유의 나라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자유의 여신상이 거꾸로 비친 것만 봐도 그렇다. 라즐로에게 그리고 더 나아가 아메리칸드림을 이루기 위해 배를 타고 미국으로 온 이민자들에게 자유의 여신상은 온전히 그 모습을 하고 있지 않다. 어쩌면 이 여신은 온전히 그리고 똑바로 미국인들에게만 자유를 선사하는 아이콘일 수 있다.
이렇듯 라즐로는 이민자로서 본의 아니게 차별을 받는다. 한 예로 자신을 미국인으로 칭하고, 기독교 신자인 사람을 아내로 맞이한 사촌은 라즐로의 유일한 구원자인 동시에 철저한 배신자로 나온다. 이유는? 돈값을 못 해서다. 의도가 어떻든 그가 설계한 서재를 보고 화가 난 해리슨 때문에 공사비를 못 받은 사촌은 이 모든 잘못을 라즐로에게 돌리고, 그를 쫓아낸다. 아무리 혈연관계라 해도 미국에서는 이용 가치가 없는 이민자를 곁에 둘 이유가 없다. 어찌 보면 전쟁으로 고향을 도망쳐 나왔지만, 결국 돈의 논리로 선 미국에서도 그가 누릴 자유는 없는 것이다.
| 아메리칸드림 속에 숨겨진 이민자의 수난근근이 하루하루를 버텨가던 라즐로에게 산타가 나타난다. 바로 해리슨이다. 라즐로가 만든 서재 덕분에 유명세를 탄 덕분에 해리슨은 라즐로를 곁에 두고 자신에게 특별하고, 사람들에게 영원히 기억에 남을 건축물을 지어달라고 한다. 이를 승낙한 라즐로는 그 즉시 헤어 나올 수 없는 족쇄에 채워진다.
미국과 자본주의의 결정체로 보이는 해리슨은 돈으로 라즐로의 재능을 산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착취한다. 겉으로는 선의를 배푸는 척하지만, 그의 속내는 어떻게든 라즐로의 재능을 빼먹을 궁리만 하는 것. 이런 속내는 시간이 지나면서 수면 위로 올라오는데, 자신이 고용한 이들의 입을 통해 경비 감축 등의 이유로 라즐로를 압박한다. 라즐로의 예술성만큼이나 해리슨에게 중요한 건 돈이다.
생각해보면 해리슨이 이 건축물을 짓는 건 돌아가신 어머니를 기리기 위한 것도, 마을 공동체를 위한 것도, 역사적으로 길이 남을 예술 건축물을 짓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명예 도취. 있어 보이기 위한 과식욕의 매개체를 만드는 것뿐이다. 예산 때문에 단 몇 미터를 줄이는 것에 분노하는 라즐로를 겉으로 이해하지만, 그의 감정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해리슨의 모습은 마약 같은 명성을 지속적으로 이어 나가기 위한 수단으로 예술가를 착취하는 자본가들의 모습과 일치한다.
자신이 갖지 못한 그 예술성을 탐닉하고 어떻게든 동경을 넘어 빼앗고 싶어 하는 모습. 해리슨을 연기한 가이 피어스는 ‘록펠러와 살리에리 중간쯤’이라고 묘사할 정도로 자신의 캐릭터를 설명한 바 있다. 해리슨의 모습은 유럽의 아름다움을 오로지 돈으로 사서 만들려고 했던 미국의 민낯과도 일치한다. 이를 보여주듯 극 중 해리슨은 라즐로는 정신적으로, 성적으로 착취한다. 결국 미국은 이런 예술가들의 피와 땀, 눈물을 통해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1.66:1의 화면비, 비스타비전이 주는 폐쇄성<브루탈리스트>는 현재는 거의 쓰지 않는 비스타비전으로 촬영되었다. 브래디 코베 감독이 이 화면비를 고수한 이유는 무엇일지 생각해보면, 라즐로 등 이민자들이 느끼는 폐쇄성을 오롯이 보여주기 위한 장치로 보인다.
영화는 조피아의 취조실로부터 시작되고, 이어지는 장면은 짙은 어둠 속 배 안에서 가판으로 올라가는 라즐로의 모습이다. 마치 감옥처럼 느껴지는 통로를 어떻게든 탈출하려는 그의 모습이 보이는 데, 보는 입장에서는 시네마스코프와 달리, 비스타 비전만의 폐쇄성이 느껴진다. 이후, 이 화면비로 보이는 라즐로의 여정 또한 어딘가 모르게 갇힌 듯한 느낌을 전한다.
결국 영화는 이 비율을 통해 미국에 와서도 온전히 자유를 찾지 못하고 감옥에 갇힌 듯한 라즐로의 모습을 보여준다. 비로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각형의 감옥에서 스스로 나오지 못하는 그의 모습. 어떻게 해서도 벗어날 수 없는 그만의 감옥은 그가 마약을 끊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브루탈리즘을 소재로 한 영화는 건축처럼 대칭과 반복 등의 구조적 특징을 오롯이 펼친다. 조피아의 얼굴로 시작해 조피아의 얼굴로 끝내는 영화는 인터미션을 기준으로 1막 ‘도착의 수수께끼’, 2막 ‘아름다움의 견고한 본질’은 수미쌍관 구조를 가져간다. 특히 혼자던(1부), 가족과 함께 하던(2부)는 미국이란 땅에서 그는 자유가 아닌 감옥신세라는 걸 동일하게 보여준다. 극중 에르제벳이 말한 것처럼 이들에게 미국은 썩은 나라이며, 말을 하지 않던 조피아는 결혼과 동시에 약속의 땅이스라엘로 떠난다.
| 중요한 건 과정이 아니라 예술이자 목적지!
끝내 완성한 건축물은 해리슨이 아닌 라즐로의 것이다.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나라에서 죽어가는 예술혼은 끝내 지난한 여정을 관통하며 우뚝 솟아오른다. 이 건축물은 파시즘으로부터 도망친 이후 보이지 않는 그의 마음속 아픔과 인생이 녹아 있다. 후반부 라즐로를 강간한 사실을 에르제벳의 입을 통해 공개된 이후 해리슨은 이 건물로 도망치는데, 그때 비로소 이 건축물의 내부가 온전히 공개된다. 마치 자신과 에르제벳이 경험했던 감옥이 이 공간에 녹아져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어둡고 폐쇄적이며, 기도 공간에서는 햇빛에 비치는 십자가를 통해 비로소 자유를 느끼게 한다.
라즐로의 내상과 에르제벳의 외상이 합쳐져 완성한 듯한 이 건축물은 결국 이 부부가 겪은 아픔과 인생을 응축한 것과 다름없어 보인다. 브루탈리즘은 ‘날것 그대로의 콘크리트’(Béton brut)라는 어원이 말해주듯, 아무런 장식 없이 콘크리트로 구축한 이 건축물은 누군가에게는 흉물처럼 보인다. 하지만 누군가에는 시련과 고난을 버텨 끝내 자유를 찾고자 노력한 이들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나이가 든 조피아는 라즐로의 예술을 전시하는 비엔날레 행사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삶이 아무리 유린당해도 중요한 건 목적지이지 여정이 아닙니다.” 미국의 삶을 접고 예루살렘에 온 라즐로가 조피아에게 했던 이 말은, 고통의 나날을 보냈지만, 어떻게든 삶의 인장을 남긴 라즐로와 에르제벳, 그리고 수많은 이민자를 향한 찬사다. “어떤 격변이 있어도 오래 살아남는 것을 만들기 위해 건축을 한다”는 라즐로의 답은 이민자들의 역사를 바탕으로 세워 올려진 미국의 본질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과연 미국은 누가 세웠는가!
사진제공: 유니버셜 픽쳐스
평점: 4.0 / 5.0
한줄평: 돈의 논리로 선 땅에서 예술의 정수를 쌓아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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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채로운 모성애의 면면을 들춰보는 영화
로스트 도터
감독 매기 질렌할
출연 올리비아 콜맨, 다코타 존슨, 제시 버클리
※씨네랩 크리에이터로 초청받아 영화제 참석해 관람한 작품입니다.
개인 평점 : ⬛️⬛️⬛️⬜️ (3.5 / 5)
*7월 14일 개봉 예정작
로스트 도터 리뷰 3줄 요약
1. 다채로운 모성애의 면면을 들춰보는 영화
2. 극 중 인물들이 느끼는 불안이 영화 내내 깔려있다.
3. 서사보다는 인물들의 감정과 분위기로 메시지를 전하는 영화
+ 뛰어난 여배우들이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연기력을 폭발시키는 영화
+ 가정적이고 아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조금 색다른 정서가 낯설 수 있음.
<로스트 도터> 영화 포스터 [출처: 씨네랩]
매기 질렌할의 감독 데뷔작
배우 매기 질렌할의 감독 데뷔작으로 매기 질렌할은 이름부터 짐작할 수 있듯 제이크 질렌할의 누나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나이트>에 레이첼 도스로 출연한 것이 유명하다.
<로스트 도터>는 이탈리아 작가인 엘레나 페란테의 소설 <잃어버린 사랑>이 원작이며 감독인 매기 질렌할이 각본(각색)과 감독을 맡은 작품이다.
<제31회 고담어워드 수상> (작품, 신인감독, 각본, 주연상) 매기 질렌할 감독 [출처: 네이버 영화]
매기 질렌할은 첫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베니스 국제 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했고, 그 외에도 전 세계 37관왕을 달성했다.
최근 국내에서도 그렇고 해외에서도 그렇고 배우들이 영화를 연출하는 경우를 종종 보곤 하는데, 배우들이 작품을 연출할 경우 조금 더 개성 있는 작품들이 많이 나오는 것 같아서 즐겨보는 편이다. 그런 의미에서 곧 개봉하는 이정재 감독의 영화 <헌트>도 기대 중이다.
<로스트 도터>는 배우와 감독을 보면 알겠지만 연출, 각본, 촬영, 주연까지 모두 여성으로 구성된 트리플 F등급 영화이다. (트리플 F등급: 감독, 작가, 주요 캐릭터가 모두 여성인 작품) 또한 스토리 역시 원작보다 여성에 대한 다양한 시선과 서사를 담아내었다고 생각되는데, 아직 원작을 읽어보진 못했지만 원작 리뷰와 영화 스토리를 비교해본 결과 영화가 조금 더 모성애에 대한 일반적인 시선을 비트는 일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로스트 도터> 스틸컷 젊은 레다(제시 버클리)와 현재의 레다(올리비아 콜먼) [출처: 네이버 영화, 씨네랩]
화려한 배우진의 밀도 높은 연기
우선 주연부터 2019년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에 빛나는 올리비아 콜먼이 주인공 레다 역할을 맡았다. 그녀는 아카데미, 골든글로브, 에미상 등 여러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을 만큼 뛰어난 연기력으로 유명하고 <로스트 도터>에서도 아주 수준 높은 연기를 선보인다.
나는 오히려 그녀보다는 젊은 레나 역을 연기한 배우 제시 버클리에게 더 눈길이 갔는데, 처음 보는 배우였음에도 젊은 시절 레나의 복잡한 감정들을 몹시 잘 담아내서 인상적이었다. 특히 가족을 상대로 세상 귀찮은 표정과 짜증을 부리던 모습과 원하는 삶을 살며 환하게 웃는 그녀의 표정은 이따금씩 아이들을 바라보며 짓곤 하는 미소와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이들 외에도 다코타 존슨이나, 에드 해리스 등 유명 배우들이 대거 등장한다. 물론 위의 2명이 이야기를 대부분 끌고 가는 역할이긴 하지만 조연부터 아역까지 뛰어난 연기력을 보여주는 영화였다. 참고로 극 중에서 젊은 레다와 함께 등장하는 하디 교수는 감독인 매기 질렌할의 실제 남편인 피터 사스가드이다.
진한 스킨십을 하는 장면도 있어서 알고 나니 신기했던 캐스팅이었다.
<로스트 도터> 스틸컷 왼쪽은 배우 피터 사스가드 [출처: 네이버 영화, 씨네랩]
<로스트 도터> 스틸컷 [출처: 씨네랩]
같지만 다른 두 엄마의 이야기
모성애를 다루는 영화다 보니 여러 모습의 엄마들이 등장한다.
주인공인 레다는 엄마를 졸업하고 혼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느낌의 인물이고, 젊은 엄마인 니나는 한참 아이와 가정 속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리고 과거의 레다는 지금의 모습과는 또 다른 엄마를 보여준다.
틈틈이 등장하는 니나의 친척 컬리 역시 새롭게 엄마가 되는 인물이다.
원작에서는 주인공인 레다의 엄마에 대한 이야기도 담겨 있다고 하니 원작을 읽어보면 더 풍부한 이야기를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다양한 엄마들의 모습은 엄마라는 존재가 느낄 수 있는 다양한 감정을 서로 다른 상황과 인물을 통해서 보여준다. 그 모든 복합적인 감정과 선택이 모두 모성애라는 단어로 귀결되면서 우리가 평소 관습적으로 생각하는 모성애의 모습과는 다른 더 풍부하고 복합적인 엄마의 모습을 느껴볼 수 있는 영화였다.
메인 예고편
<로스트 도터> 메인 예고편 [출처: 그린나래미디어 유튜브]
※ 아래는 주관적인 감상평과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조금 이해하기 어려웠다.
영화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로 보러 갔고, 영화에서 전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한 채로 영화관을 나왔다.
그러고 나서 영화 포스터에 적힌 문장을 보면서 영화를 복기해보니 영화가 조금씩 읽혔던 것 같다.
“아름답지 않고 희생하지 않는 엄마에 대하여”
극 중에서 이 메시지를 가장 강력하게 전달하는 인물은 젊은 시절의 레다이다.
레다는 번역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꽤 커리어를 잘 쌓아가고 있었는데, 그런 레다에게 두 명의 아이는 계속 돌봐줘야 하는 불편함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가정을 떠나서 일과 자유를 선택한다.
자신의 실력을 알아봐 주는 유명 교수와 사랑에 빠져 가족을 떠난다.
아이들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그녀가 아이를 대하는 모습에서 조금은 불편함이 있었다.
아이들은 부모의 사랑을 받으면서 큰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크게 의지하고 많은 관심을 갈구한다. 물론 이런 부분이 부모에게 때때로 귀찮고 피곤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아이가 엄마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레다를 때리는 모습을 보고 <금쪽같은 내 새끼>나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가 떠올랐다.
가끔 문제 아이들의 행동의 원인이 부모의 무관심에서 비롯된 경우가 있는데 아이가 엄마가 싫어하는 행동으로 부모의 관심을 끌고 있는 모습이 너무 현실적이라서 약간은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영화 속에서 레다의 첫째 아이 비앙카는 마치 사고로 죽은 것처럼 묘사된다. 이는 레다에게 상처받은 비앙카의 모습을 표현한 것처럼 느껴지는데, 어쩌면 레다와 비앙카의 관계가 끊어졌던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는 물건이 있으니 바로 인형이다.
처음에는 니나의 딸인 엘레나가 아끼는 인형이 중요한 물건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후 이 인형을 레다가 충동적으로 훔치게 되는 것이 주요한 사건인데, 이는 약간의 죄책감과 자신이 놓았던 모성에 대한 집착처럼 느껴졌다. 이후 젊은 레다가 첫째 비앙카에게 자신이 아끼던 인형 미니 마마를 물려주는 장면에서 인형이 한번 더 등장하게 되는데, 여기서 인형은 엄마에게서 아이에게까지 이어지는 사랑의 되물림처럼 등장하지만 곧 레다의 무관심으로 인한 관계의 단절을 의미하는 물건이 된다.
레다는 아이와 놀아주는 대신 자신이 아끼는 인형과 놀고 있으라는 말로 비앙카에게 소홀하게 대하고 화가 난 비앙카는 레다의 인형인 미니 마마에게 낙서하고 괴롭히는 것으로 화를 표출한다.
하지만 레다는 자신이 준 인형을 아끼지 않는 비앙카에게 오히려 화를 내며 나무라다가 이럴 거면 버리자면서 밖으로 던져버리고 인형은 산산이 부서진다.
이 장면은 자신보다 인형을 더 아끼는 듯한 모습으로 비앙카의 산산이 부서지는 마음을 대변함과 동시에 아이에게 실망하고 완전히 부서져버린 레다의 모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에 피를 흘리는 레다가 해변에 누워서 두 딸과 통화하는 장면을 보면 두 아이는 어엿한 어른으로 잘 자랐고, 서로 안부를 나누고 대화하는 여느 가족과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로서 모성이랑 가족이라는 관계 역시 한순간에 마법처럼 생기는 것이 아닌 여러 시간과 많은 노력을 통해 형성되는 다른 관계와 다르지 않으며, 우리가 가족 간의 사랑을 무조건적으로 강제할 수는 없다는, 모두가 힘든 현실과 육아 속에서 부담을 느끼면서 무한한 사랑을 품어낼 수는 없다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끝으로 뛰어난 연기력과 함께 모성이라는 단어 속에 가려진 엄마라는 존재가 가지는 다양한 감정을 엿보고 싶다면 추천하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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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지적 독자 시점 | 엉뚱한 방향으로 열심히 달린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웹소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의 유일한 독자, '김독자'(안효섭). 그가 계약직으로 일하던 회사를 퇴사하는 날, 10년 동안 연재된 소설도 마침내 을 맺는다. 오랜 기간 애정을 쏟았던 소설의 결말을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었던 김독자는 작가에게 날카로운 피드백을 남기고, 예상치 못한 답장을 받는다. 바로 직접 소설의 주인공이 되어서 결말을 바꿔보라는 것.
김독자가 답장을 확인한 순간, 그의 눈앞에는 세계가 멸망했다는 상태창과 소설 속 도깨비가 등장하고 소설에서만 봤던 미션들이 사람들에게 주어지기 시작한다. 그 순간 김독자는 깨닫는다. 자신만이 이 시나리오의 전개와 결말을 알고 있으며, 더 나아가 소설 속 주인공인 회귀자 '유중혁'(이민호)을 찾아야만 자기 목숨과 이 세계를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실패로 귀결된 올인
<전지적 독자 시점>(이하 <전독시>)의 영화화 소식은 기대보다는 걱정이 큰 뉴스였다. 이유는 여럿이지만, 장르의 속성이 특히 문제였다. 영화와 웹소설, 두 장르는 본질적으로 접점을 찾기 어렵다. 극장에서 개봉하는 상업 영화는 대중을 공략해야 하는 상품이다. 심지어 손익분기점이 관객 600만 명인 영화라면 특정 세대나 성별을 뛰어넘는 보편성을 갖춰야만 한다.
그에 반해 웹소설은 본질적으로 대중적이지 않다. 인기작, 흥행작이라 해도 웹소설이라는 장르는 기본적으로 웹툰보다도 더 특수한 틀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웹소설은 주인공의 사회적 성공을 통한 대리만족을 추구하고, 즉각적인 성장과 복수를 통한 '사이다' 전개를 보여주는 데 주력하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 '상태창'을 비롯한 특유의 클리셰가 적극 활용된 게임 판타지의 문법이 더해지면 특수성은 배가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전독시>는 필연적으로 한 가지 과제를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바로 웹소설의 특수성과 영화의 보편적인 감성을 화학적으로 결합야 한다는 것. 이에 <전독시>는 <신과 함께> 시리즈를 전략적으로 벤치마킹한 듯하다. 몇몇 세계관 설정이나 캐릭터들의 기본적인 특성만 남겨둔 채, 메시지와 이야기는 익숙한 형태로 바꿨다. 이는 설령 원작 팬들에게 비판받더라도, 대중성을 잡겠다는 선택과 집중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전독시>의 해답은 그저 미봉책에 그치고 말았다. 정작 일반 관객마저 설득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보편적인 서사로 탈바꿈한 김독자의 이야기는 매끄럽고, 그 안에 담긴 메시지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문제는 굳이 김독자가 아니어도 쉽게 보고 들을 수 있는 이야기로 117분을 채웠다는 것. 그 결과 <전독시>는 볼거리만 빼면 다른 사회 비판 작품과 다를 게 없는, 관객으로서는 선택할 이유가 없는 영화가 되어버렸다.
독자(讀者)에게 독자(獨自)의 길을 묻다
<전독시>의 핵심 서사는 김독자와 유중혁의 갈등이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이하 <멸세법>)의 유일한 독자인 김독자는 알고 있다. '성좌'들의 놀이터가 되어 버린 이 세계의 운명이 유중혁의 목숨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멸세법'의 주인공인 유중혁은 주어진 미션에 실패해도 회귀해서 다시 미션을 수행할 수 있지만, 그가 실패했을 때 존재하던 세계는 소멸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김독자는 유중혁을 도우려 한다. 소설 상으로는 충무로역에서 화룡과 전투를 벌이다가 죽을 예정인 유중혁의 운명을 바꿔야 한다. 그래야만 본인도 생존할 수 있고, 지하철에서부터 동고동락한 동료들도 살릴 수 있다. 김독자는 자기 도움을 받아서 화룡을 물리치라고 제안하며 유중혁에게 접근한다. 자신이 예지력 비슷한 능력을 지녀서 주요 시나리오와 미션, 장소 및 아이템과 같은 온갖 정보를 알고 있다고도 어필한다.
하지만 유중혁은 김독자의 제안을 거절한다. 필요한 정보를 주면 알아서 화룡과 싸우겠다고. 더 흥미로운 것은 그의 역제안이다. 그는 김독자가 금호역에서 충무로역까지 살아서 오면 조건부로 제안을 받아들일 수도 있다며 여지를 남긴다. 실제로 김독자가 충무로역에 기어코 도달하자 그는 이렇게 제안한다. 무작위로 생성되는 초록색 타일 위에 서야 괴물들의 공격을 피할 수 있는 '그린 존'에서 살아남으라고.
단순히 살아남을 뿐만 아니라 설령 동료들이 목숨을 잃어도 그들을 돕지 않고 홀로 살아남으라고도 요구한다. 즉, 유중혁은 혼자서 움직이는 걸 선호하는 자기 방식을 따를 수 있는지 증명하라면서 김독자를 시험에 빠트린다. 자기 목숨과 이익부터 먼저 챙길 것인지, 아니면 남을 돕다가 같이 죽을 것인지. '멸세법'의 유일한 독자(讀者)였던 김독자에게 독자(獨自)가 될지 말지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셈이다.
독자(獨自)가 될 수 없는 이유
이 선택의 갈림길에서 김독자는 흔들린다. '멸세법'의 원래 전개대로라면 유중혁의 말을 따를 때 생존 확률이 높아지니까. 또 세계가 멸망한 상황에서도 살아남으려고 타인을 속이고 짓밟는 광경을 이미 목격했기에 현실을 비관하기도 한다. 그러나 초록색 타일 위에 가만히 서 있는 자신과 달리 다른 시민들까지도 구하기 위해 괴물들과 혈투를 벌이는 동료들을 보면서 김독자는 과거를 떠올리고, 결심한다. 독자(獨自)는 되지 않기로.
왜냐하면 그는 이미 유중혁이 제시한 길대로 살아봤고, 그 끝에서 비극을 맛봤기 때문이다. 학교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또 다른 피해자 친구와 싸워야만 했다. 그 친구가 자살하자 죄책감과 절망이 그를 덮쳤고, 그로부터 도망치고 위안을 얻기 위해 그는 '멸세법' 속 세계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소설의 결말은 김독자의 트라우마를 건드렸고, 그의 절망을 심화시켜 버렸을 뿐이었다.
모든 미션을 완료한 유중혁 외에 다른 인간은 모두 죽은 '멸세법'의 결말은 김독자의 인생을 부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으니까. 김독자는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세상에서 줄곧 피해자였다. 학교 폭력에 시달리고, 성인이 되어서는 비명문대 출신이라고 무시당하고, 계약직의 설움을 온몸으로 느끼며 살아왔다. 그렇기에 단 한 명의 강자, 곧 독자의 삶과 이야기 외에는 무가치하다는 소설과 유중혁의 길을 김독자는 결코 긍정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혼자라도 확실히 살아남을 길을 포기한다. 그 대신 알고 있는 전개도 아니고, 죽을지 살지도 모르지만, 동료들과 함께하는 길을 선택한다. 유중혁과 같은 독자(獨自)의 길도, 주어진 전개를 따르기만 하는 독자(讀者)의 길도 아닌 새로운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즉, <전독시>는 경쟁과 약육강식의 원칙, 본능적인 이기심의 길 외에 이타적으로 공존하는 삶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자 한다.
독자도, 독자도 아닌 주인공의 삶
김독자의 선택에 담긴 함의는 다른 캐릭터의 사연을 만나 확장되고 강화된다. 예를 들어 수류탄 투척 훈련 중 수류탄을 놓친 훈련병을 구하지 못했다는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부사관 '이현성'(신승호)은 혼자 살아남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누구보다도 가장 잘 아는 캐릭터다. 금호역 바깥으로 정찰을 나갔다가 '천인호'(정성일)의 속임수에 당해서 친구를 잃은 '정희원'(나나) 또한 혼자 생존한 삶의 무의미함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이지혜'(지수) 또한 김독자와 유사한 선택의 갈림길에 선다. 교실에서 세계의 멸망 소식을 들은 뒤 옆자리 짝꿍을 교살하고, 같은 반 친구 중 유일하게 살아남는 데 성공한 지혜. 그녀는 유중혁처럼 독자적으로 움직이며 자신의 안위만을 챙기지만, 몸을 던져서 일행을 살리려는 김독자의 끈질긴 설득에 마음을 고쳐먹는다. 그렇게 이들은 도깨비들이 만든 규칙에 도전해서 승리를 거두며 함께 살아남는 삶의 의미를 새삼 깨닫는다.
이처럼 <전독시>는 모두가 주인공으로서 한 장을 차지할 수 있는 삶을 이야기한다. 진화한 화룡을 제압하는 클라이맥스의 구성만 보더라도 의도를 명확히 알 수 있다. 유중혁 혼자서는 화룡에게 아무런 상처도 내지 못한다. 하지만 김독자, 이현성, 정희원, 이지혜, '유상아'(채수빈), '이길영'(권은성)가 한 팀으로 뭉쳐서 잠재된 능력을 모두 발휘하면 화룡도 제압할 수 있다. 액션의 구성으로서 메시지를 온전히 시각화한 셈이다.
메시지가 낳은 기시감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지점에서 <전독시>는 매력을 잃는다. <전독시>의 메시지는 이 IP만의 특색이 아니기 때문이다. 승자 독식, 이기적 경쟁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공동체의 중요성과 타인과 함께 사는 이타적 삶의 가능성을 강조하는 서사는 굳이 <전독시>가 아니더라도 여러 사회고발물에서 접할 수 있다. <오징어 게임>과 비교하더라도 휴머니즘의 상징이 된 성기훈과 김독자의 캐릭터성은 큰 차이가 없다.
이 기시감은 생존 게임과 같은 <전독시>의 구조로 인해 극대화된다. 지하철 칸에서 살아남으려면 생명 하나 이상을 죽여야 하는 미션은 <오징어 게임>에서 등장한 구슬치기나 숨바꼭질과 다를 게 없다. 금호역에서 더 많은 코인을 차지하기 위해 피해자를 만들어 내는 군상극은 오징어 게임 참가자들이 숙소에서 서로를 죽고 죽이며 패거리를 이루는 정치극과 그 메커니즘이 동일하다.
충무로역에 만들어진 그린존은 그 정점이다. 사람들은 매번 숫자와 위치가 달라지는 초록 타일 위에 서기 위해서 서로를 끌어내리며 악전고투를 벌이는데, 이 장면은 <오징어 게임 2>가 선보인 짝짓기 게임과 절대 다르지 않다. 사회적 메시지도 그 자체로는 특별하지 않은 가운데, 메시지를 전달하는 형식조차 익숙한 결과 <전독시>는 예상치 못하게 <오징어 게임> 열화판 혹은 게임 판타지 버전 <오징어 게임>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불친절해서 이질적인
만약 <전독시>가 차별화된 볼거리를 보여줬다면 이 기시감을 효과적으로 가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독시>는 그러지 못했다. CG로 구현된 스펙터클이 화려하지만 이질적이기 때문이다. 환상 속의 배경과 괴물 캐릭터는 눈요깃거리로서의 역할은 해낸다. 상태창이 뜨는 게임 판타지 세계관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마치 RPG 게임을 스크린 위에 구현한 듯한 느낌도 있다.
문제는 CG로 만들어진 화면만 볼 때와는 별개로 정작 배우들이 카메라에 잡힐 때는 배경과 인물이 따로 논다는 것. 자연히 CG를 즐기기에는 불편할 수밖에 없다. CG로 구현한 판타지 세계관을 받아들일 심적인 여유를 주지 않아서 더 어색한 감도 있다. <전독시>는 받아들여야 하는 정보량이 많은 영화다. 갑자기 멸망한 세계, 도깨비와 괴물의 존재, 느닷없는 시나리오와 코인, 회귀자라는 또 다른 주인공과 판타지운 아이템 등등.
그런데 관객이 모든 설정을 이해할 틈도 주지 않고 영화가 빠르게 진행되니 몰입도는 현저히 낮을 수밖에 없다. 심지어 청각적 요소도 상황을 악화한다. <전독시>는 상황이나 설정 설명을 온전히 대사에 맡겼다. 이런 상황에서 폭발음 등에 대사가 묻히는 경우가 잦다 보니 관객은 영화가 불친절하다고 느끼기 쉽다. 이 또한 CG의 화려함보다는 이질감과 같은 단점이 먼 눈에 띄는 이유 중 하나다.
그로 인해 마땅히 주목을 받아야 할 장점조차도 빛을 잃는다. 충무로역 액션 시퀀스가 대표적이다. 초반에는 일직선의 역사 구조를 활용해서 한 방향으로 내달리는 움직임을 반복하며 역동감을 선사한다. 화룡이 진화하는 순간 지하철 역사의 벽면이 붕괴하서 우주 공간이 펼쳐질 때부터는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는 입체적인 동선을 보여줌으로써 쾌감을 선사한다. 하지만 영리한 발상과 구성은 이질감과 불친절함에 의해 가려져 버린다.
<전독시>가 보여준 현재와 미래
제작자인 리얼라이즈픽쳐스 원동연 대표는 <전독시>가 개봉 직후 600만 명이라는 손익분기점을 달성하기 어려운 흥행 추세를 보이자, 언론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 초반 타점이 별로 안 좋다. 그리고 원작 팬들이 계속 공격을 하고 있어서 힘들지만 겪어야 할 일이다." 안타깝게도 이 발언은 <전독시>가 흥행하지 못한 현재를 방증할 뿐만 아니라 한국 영화계의 어두운 미래를 예고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특수성이 무기인 웹소설을 보편적인 감성으로 재해석한 이상 이미 <전독시> 영화는 원작과 선을 그은 작품이다. 즉, 흥행 부진의 책임은 일반 관객에게 굳이 다른 작품 대신 <전독시>를 선택할 이유, 오랜만에 영화관을 찾아야 할 이유를 제공하지 못한 영화 자체에 있다는 의미다. 이런 상황에서 흥행 부진의 책임을 원작 팬들에게 돌리는 것은 실패에 대한 원인을 분석하지 못했거나 일부러 외면한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설령 <전독시>가 영화 소비 쿠폰과 문화의 날 효과에 힘입어 극적으로 흥행에 성공한다 해도 마냥 기뻐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원인을 제대로 분석하지 못한다면 유사한 문제,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도 없으니까. 더 나아가 <전독시>와 같은 실수를 다른 작품도 하지 말라는 법이 없고, 그럴수록 일반 관객이 영화관을 찾을 이유는 사라지기 마련이므로.
Poor 형편없음
방향성도 만듦새도 설득력 없는, 공허하게 화려한 블록버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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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다비전이 차려놓은 마블의 탄탄한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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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03. 16 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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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블쟁이 인스타그램: @marvel_jeng2* 영상에 사용된 모든 음악은 Epidemicsound 의 정식 라이센스 음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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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 마블의 미래?
00:46 화이트 비전
02:00 모니카 람보
03:11 캡틴마블2 & 시크릿 인베이젼
04:33 숙제타임!
06:03 닥터 스트레인지 & 스칼렛 위치
09:41 여러분 덕분에 많이 웃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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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 1주 최신 개봉영화(돈룩업, 마이 뉴욕 다이어리, 캅샵, 몬스타엑스 더 드리밍, 이상존재)
[WEEKEND CHOICE MOVIE] 2021년 12월 1주차 #개봉영화
#최신영화#영화추천 #영화예고편
#돈룩업 #마이뉴욕다이어리 #캅샵 #몬스타엑스더드리밍 #이상존재
영화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https://blog.naver.com/rainbb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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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엘리트들: 못다한 이야기> 티저 예고편
[2021년 6월, 넷플릭스 공개]
《엘리트들》 시즌 4가 시작됩니다. 하지만 그 전에 봐야 할 게 이렇게나 많답니다! 《엘리트들: 못다 한 이야기》
첫 번째 이야기: 구스만 + 카예 + 레베
두 번째 이야기: 나디아 + 구스만
세 번째 이야기: 오마르 + 안데르 + 알렉시스
네 번째 이야기: 카를라 + 사무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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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아망떼> 메인 예고편
파리
열정적인 사랑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행복한 연인 리사와 시몬.
시몬의 부주의로 벌어진 사고에 함께 도피를 계획하지만, 시몬이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아 둘은 헤어지게 된다.
인도양
3년 후, 남편 레들러와 떠난 여행지에서 우연히 리조트 직원으로 일하고 있는 시몬을 만난 리사는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청거리고.
제네바
리사의 주변을 맴도는 시몬의 정체를 알고도 침착함을 잃지 않는 레들러.
레들러를 떠나지도, 시몬을 버리지도 못하는 리사에게 시몬은 위험한 계획을 제안하는데...
각자의 방식으로 사랑하는 세 사람의 운명은 과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