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3-08-24 17:38:47
(할인 끌어~올려!) 저렴하게 영화티켓 구매하는법
머리식히러 영화 예매하려는데 티켓 가격 보고 다시 취소버튼 ....누르지 마시고! 찾자! 할인 방법을! 버튼 몇번이면 너두 할 수 있어! 야 너두? 나두!!!!! 우리 똑똑하고 조금 부지런한 문화인이 되어보자구요 �
Relative contents
-
- 이방인의 뒷모습
*영화 <안녕 미누>에 들어간 미누 씨의 삶 이야기가 들어있습니다.
네팔에 사는 미노드 목탄 씨의 침실 벽에는 목장갑이 액자에 걸려 있다. 그 모습은 여러 의미로 생경하다. 지극히 한국적인 아이템이기도 하거니와, 소중하게 액자에 끼워놓을 일은 더더욱 없는 일상의 물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장면은 미노드 목탄 씨의 인생을 고스란히 담은 풍경이기도 하다. 그는 학교를 졸업하고 20대 초반 어린 나이였던 1992년 한국으로 일하러 떠났다. "미누"라는 이름으로, "1세대 이주 노동자"라 불리던 그는 2009년 어느 날 갑작스럽게 추방을 당했다. 이 영화는 그 미누 씨의 삶을 담았다.
미누 씨는 네팔에서 성실하게 살고 있다. 한국 어학원에서 강의를 하고, 강의를 수료한 후 자격을 갖춘 청년들이 한국으로 일하러 떠날 때 다정한 말로 격려한다. 카페를 열고, 인형 만드는 기술을 가르치고, 판로까지 터 주면서 청년들이 네팔을 떠나지 않고 돈을 벌 수 있는 방법도 열심히 찾는다. 그가 처음 한국에 온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함이었을 테니, 이만큼 든든하게 섰다면 성공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의 등에서는 이방인의 뒷모습이 어른거린다. 그는 자기가 나고 자랐을 네팔 시장을 걸으며 "남대문 시장 생각난다"며 웃는다. 네팔 사람이라고 다 히말라야 가본 건 아니라며, 자기 히말라야는 안 가봤다고 웃지만 <목포의 눈물>을 구성지게 부를 줄 안다. 한국에서 일하던 시절, 고향을 떠나 일을 한다는 점에서 동병상련이었던 아주머니들이 밥도 챙겨주고 건강도 걱정해주고 그러면서 가르쳐 주었던 노래란다.
그의 웃음은 어쩐지 씁쓸하고 외롭다. 분명 활짝 웃는데 눈물 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강산이 두 번 바뀔 만큼 긴 시간 동안 살았던 나라에서 추방당한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네팔 사람으로 태어나 네팔에서 자랐어도 그를 이루는 것들의 상당수는 한국에서 만들어진 것일 텐데. 한국에서 찾아온 손님들에게 한국식 밥상을 차려주는 솜씨를 봐도, 나이를 물으면 "한국 나이로"를 접두어처럼 붙여 대답하는 모습을 봐도, 놀라면 "깜짝이야"가 먼저 나온다는 걸 봐도, 그의 어딘가에서 분명 한국 DNA가 느껴진다. 네팔 사람들과 네팔어로 대화하고 네팔의 명절을 챙기고 있어도 그는 네팔에서 오래 산 한국 사람처럼 보였다. 어떻게 보면 한국인보다 더 지독하고 치열하게 한국의 모든 것과 부딪고 얽힌 사람이어서 그런 걸까.
네팔에서 늘 주변 사람들을 챙기고 있듯 그는 한국에서도 그런 사람이었다. 식당에서도 일하고 봉제공장에서도 일했지만, 밴드도 결성했다. 신나고 경쾌한 멜로디인데 "오늘은 나의 월급날 가슴이 두근두근합니다"로 시작한 가사가 "오 사장님 이러지 마세요 그동안 밀린 내 월급을 주세요 날 욕한 건 참을 수 있어요 내 월급만은 돌려주세요"로 흘러가는 <월급날>이나 박노해 시인이 쓴 동명의 시를 모티프로 쓴 <손무덤> 같은 노래들. 이주 노동자들이 줄줄이 자살로 죽어나가던 시절, 밴드 스탑크랙다운("단속을 멈춰라')은 현장의 분위기를 만들고 이주 노동자들과 사회의 중간다리가 되어 주었다. 미누는 자연히 이들의 아이콘이 되었다.
그러나 밴드 공연이 잡혀있던 어느 날 갑작스럽게 추방을 당한다. 불법 체류자를 추방하는 게 무엇이 나쁘냐 할 수도 있겠지만, 며칠씩 미누를 따라다니다가 집 앞에 있는 그를 잡아간, 말하자면 '표적 수사'였다. 당시에도 게다가 추방 이후 미누의 삶에 일어나는 일들은 "이게 법치국가냐"라고 되묻는 스탑크랙다운 멤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법치국가면 법대로 해야지, 왜 미누는 예외가 되는가. 한국 사는 동안에도 그저 노동을 했고 노동에 당연히 따르는 권리를 말했을 뿐인 그가, 이제는 버젓이 사업가가 되어 한국에 들어오려는 그가 얼마나 체제에 반동적인 인물이라고 법에 예외까지 두는 것일까.
불법 체류와 이주 노동자 문제는 언제나 첨예한 사회 갈등 소재가 되었고, 담론은 나뉠 수밖에 없다. 법은 잘 지키라고 있는 거고 그러니까 지키면 되잖아,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애초에 법을 지킬 만한 여건이 주어지지 않은 이들에게 불법은 선택이 아니었다. 또한 법치국가가 법을 형평성 없이 적용했다는 것은 누구든 고개를 내저을 수밖에 없는 별도의 문제다.
게다가 미누 씨의 인생을 보고 나면 법과 국적을 다 떠나서 숙연해지는 것을 느낀다. 추방과 격리로 응답한 한국 사회에게 그는 마지막까지 자신이 가진 나눔과 연대, 따뜻한 애정만을 주고 떠났다. 이 영화는 그가 남기고 간 마지막 선물이다.
인도로 떠나던 20대 초반의 내게 누군가 했던 말을 기억한다. "한 사람이 어떤 사회의 일원으로 완전히 흡수되기까지 2년이 걸린대."로 시작된 그 말은 "그러니까 너 돌아오면 많이 힘들 거야.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덜 힘들 거고. 나중 되면 무슨 말인지 알 거야."로 끝났다. 그리고 그 말은 정말 꼭 맞았다.
인도 산 지 1년 반쯤 되었을 때, 식당에서 김치찌개를 먹고 인도 루피화를 꺼내어 계산을 치르는 꿈을 꾼 적이 있다. 인도 내의 한국 식당은 거의 안 가봤으니까 그건 현실 반영이라기보단 내 상태를 고스란히 비추는 꿈이었을 거다. 더 시간이 지나 한국에 돌아왔을 때는 더욱 당황스러웠다. 나고 자란 땅에서, 평생을 살아온 내 방에서 나는 남처럼 서성거렸다. 내 자신이 낯설고, 낯설다는 것이 당혹스러웠다. 예방주사처럼 내게 누군가 넣어준 몇 마디 말을 동아줄 삼아 그 시간을 보냈다.
하물며 1992년에서 2009년, 아이 하나가 장성할 만큼의 시간이 지나도록 한국에 산 그가 그 이후의 시간을 어떻게 보냈을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어떤 친구는 내게 "너 3년 있었지? 그럼 딱 그만큼 힘들 거야."라고 말했고, 실제로 귀국한 지 3년쯤 지나니 인도는 내게 추억이 되었다. 미누 씨에게 한국은 아직 추억이 될 수 없는, 자기 안에서 너무 팔팔하게 날뛰는 기억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네팔 거리를 걷는 그의 뒷모습, 여권 가진 자기의 모국을 걸어다니면서도 이방인의 냄새를 풍기는 그 뒷모습이 너무 슬펐다. "고향에 고향에 이르러도 그리던 고향이 아니러뇨"라는 지용의 시구가 과연 우리만의 것일까.
-
- <이도공간> - ‘지울수록 선연해지는 슬픔과 마주하다’
이도공간 (異度空間, Inner Senses)
개봉일 : 2003.06.05 / 재개봉 : 2021.07.21. (한국 기준)
감독 : 나지량
출연 : 장국영, 임가흔, 이자웅, 주가령
‘지울수록 선연해지는 슬픔과 마주하다’
2003년 4월 1일, 유명을 달리한 배우 ‘장국영의 유작’ <이도공간>이 19년 만에 롯데시네마를 통해 재개봉했다. 불에 타 유실된 필름을 아주 어렵게 구해 우여곡절 끝에 재개봉에 성공했다는 <이도공간>은 영화의 내용이나 완성도와는 별개로 ‘장국영의 유작’이라는 타이틀로 인해 짊어진 무게가 무거웠던 작품이다. 2003년 장국영이 삶을 마무리 지었을 때, ‘장국영이 이 작품을 찍고 귀신에 씌여, 우울에 빠져 죽음을 선택했다.’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는데.. 정말 연관성이 거의 없는 이야기지만 그들은 이렇게라도 장국영의 죽음을 부정하고, 합당한 이유를 찾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이도공간>은 장국영 필모 중에 유일한 공포영화다. 은근 무서운 장면들이 있다는 이야기에 걱정했는데, 몇 장면의 긴장감만 견디면 그럭저럭 괜찮았다. 귀신이나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공포보다 마음 깊이 숨겨뒀던 상처에 대한 두려움에 더 집중한 작품이기에 귀신에 대한 공포감때문에 감상하지 못하고 있다면 잠시 눈 딱 감고! 도전해보길 추천한다. (개인적으론 공포보다는 슬픈 영화라는 느낌이 더 강하기도 했다.)
아주 짧은 공포감을 견디고 나면 장국영의 아련하고도 아름다운 눈빛을 마주할 수 있으니.. ‘무섭지 않을까?’하는 걱정으로 이 순간을 놓쳐버리기엔 너무 아깝다.
<이도공간>은 사람이 아닌 영혼에게 시달리며 괴로워하는 짐과 얀의 이야기다. 얀은 자신이 귀신을 본다고 말하며 매일을 공포에 시달린다. 짐은 귀신같은 건 존재하지 않으며 모두 뇌에 저장된 정보들이 만들어낸 허상이라고 말한다. 이 영화에서 짐과 얀이 마주하게 되는 귀신이란 존재는 ‘귀신’ 그 자체라기보단 오래전에 묻어둔 슬픔과 트라우마, 그리고 외로움의 산물이다. 부모님의 이혼과 반복된 재혼으로 인해 어릴 때부터 홀로 살아온 외로운 얀과 사람들의 심리에 대해 알고 싶다며 책에만 집중하고 혼자 살아가는 워커 홀릭 짐. 두 사람은 외로움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허공으로 시선을 돌린다.
누구나 살면서 크게 부끄러웠거나 지독히 슬펐거나 또는 수없이 후회하게 되는 순간을 겪는다. 그런 순간들은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고 오래도록 사람을 괴롭힌다. 시간을 되돌릴 순 없으니 “차라리 잊고 싶다”고 생각하며 기억을 지우는 상상을 한 번쯤은 해본 적 있지 않은가. 하지만 고통은 무작정 지우려 할수록 선연해지기 마련이고 외면하고 묻어두려 할수록 더 무거워진다. 고통에 맞서는 건 분명 아주 두렵고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마주해야 한다. 가장 큰 슬픔인 이별 또한 마찬가지다.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래도록 아파하고 무조건 묻어두기보단 그를 받아들이고 아픈 만큼 그리워 하면 되는 것이다. 이 또한 무지 어려운 일이지만.. 슬픔이 속에서 곪아 새로운 고통을 만들어내기 전에, 무너져내리기 전에 그 순간과 직면해야 한다.
이도공간 시놉시스
부모의 이혼으로 홀로 남겨진 ‘얀’은 오래된 낡은 아파트로 새로 이사를 온다.
이사 온 첫날부터 아파트에 감도는 이상한 기운에 자신 말고 다른 존재들이 집에 함께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고 불안감을 느낀다. 불안해하는 자신을 위해 사촌 언니는 정신과 대학교수 ‘짐’을 소개 시켜주고 그녀가 보이는 건 자신의 과거 상처로 인해 비롯된 존재라는 말로 그녀를 안심시켜준다. 서서히 이상한 존재에게서 멀어지며 회복되어 가던 그녀는 ‘짐’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싹트게 되는데... 하지만 그에게 다가갈수록 ‘짐’은 알 수 없는 행동을 하기 시작한다.
귀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이성적인 정신과 대학교수 ‘짐’은 같은 동료 교수의 소개로 ‘얀’을 만나게 된다.
모든 현상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고, 그녀가 부모의 이혼과 상처로 귀신이란 허구를 만들어냈다고 안심시켜준다. 상담 치료를 한 이후 두 사람은 더욱 가까워지고 서로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만, 그녀와 가까워질수록 ‘짐’ 주변에 알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계속된 불면증에 시달리던 ‘짐’은 자신이 잊고 있었던 과거의 사건이 떠오르기 시작하는데...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제가 본 건 환상이 아니에요.”
운수 없게도 귀신을 보게 됐다는 얀과 귀신은 뇌가 만들어낸 정보의 집합체라는 짐. 얀은 사촌 형부의 소개로 짐을 만나게 된다. 정신과 대학교수인 짐은 불안에 떨고 있는 얀에게 약이 아닌 우유 캔디와 믿음을 담은 수면제를 건넨다. 모두가 얀을 “미쳤다”고만 말 하는데, 짐은 그들과 다르게 조용히 얀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
얀의 일기장과 사진들을 살펴보던 짐은 얀이 귀신을 보는 건 ‘기억 속 어딘가 숨겨진 문제’때문일 것이라 확신한다. 얀이 마음 깊이 숨겨둔 문제는 어릴 적부터 겪어온 지독한 외로움이었다. 얀의 부모님은 얀이 어릴 때 이혼을 하고 각자의 길을 찾아 떠난다. 그녀는 부모님에게 사랑 받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한다. 애정결핍에서 나온 불안감은 곧 상대를 위한 집착으로 바뀌고 얀은 점점 더 외로워진다. 그리고 죽은 이의 정보를 받아들여 곧 그것을 귀신으로 만들어낸다.
얀은 짐에게 의지하며 천천히 사랑에 빠진다. ‘귀신이라니, 미친 소리하네’같은 말이 아닌 ‘귀신은 없으니 두려워 말라’며 부드러운 눈빛을 보내는 따뜻한 사람. 그런 짐을 두고 어떻게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짐도 얀을 만나며 호감을 느끼지만 선뜻 다가가지 못한다. 그는 의사와 환자의 사이엔 거리가 있어야 한다고, 얀이 자신에게 의존하게 둘 순 없다고 말한다. 가볍게 흘러간 ‘의존’이라는 단어는 짐의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둔 그의 가장 큰 상처에 대한 힌트였다.
“제 친구가 되어주실래요?”
한참을 고민하던 짐은 상처를 극복한 얀을 보고 그녀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한다. 얀은 짐을 통해 외로움을 채워갔고 한 발짝 더 나아가 자신의 오래된 상처인 부모님과 눈을 맞춘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는 엄마의 손을 잡는다. 그렇게 얀은 자신을 오래도록 괴롭혔던 외로움과 고통을 극복했고, 더 이상 귀신을 보지 않게 된다.
짐은 얀을 만나며 첫사랑의 죽음 이후로 처음 연애를 한다. 첫사랑인 유에가 죽고 나서 처음으로 느끼는 사랑의 감정. 그리고 그 감정은 짐이 외면하고 묻어뒀던 죄책감과 고통의 순간을 떠올리게 만든다.
“잊기로 한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결국 찾아버린 1982년, 유에가 자살하던 그날의 기억. 짐은 끝까지 유에의 죽음을 모르는척하고 싶어 했지만, 그가 마음 깊이 묻어뒀던 소년은 그러지 않길 바랐던 것 같다. 무의식 상태로 집을 뒤지던 짐은 유에의 흔적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 유에의 흔적이 담긴 편지와 그녀의 기사가 담긴 신문.
짐은 가장 순수했던 그 시절,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던 소녀가 자신을 탓하며 바닥으로 추락하는 순간을 목격한다. 너무 충격적이고 고통스러웠던 순간이었기에 짐은 아예 그 순간과 유에의 존재를 지워버리고 만다. 그리고 오래도록 묻어뒀던 고통이 현실로 다시 떠오른 순간, 그것은 공포가 되어 짐을 조여온다.
얀과 짐은 서로에게 ‘기억 속 어딘가 숨겨진 문제’를 직면하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한다. 얀은 짐을 통해 부모님을 다시 만나게 되고 짐은 얀을 만나며 첫사랑 유에를 떠올리고 그녀가 울린 알람에 눈을 떠 유에의 흔적을 마주한다.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다시 마주하고 슬픔과 상실을 인정하는 과정은 고통을 귀신이라는 공포스러운 존재를 보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짐은 갑작스레 밀어닥친 기억에 괴로워하며 유에의 귀신으로부터 도망친다.
“난 지금까지 행복한 적이 한 번도 없었어..
내가 무슨 자격으로 행복할 수 있겠어.”
사랑하는 소녀 유에가 나 때문에 자살을 택했다는 죄책감.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는 슬픔과 고통. 짐은 밀려오는 충격에 힘없이 비틀거린다.
부끄럽지만 진심이었던 날들, 찬란한 오후에 함께할 미래를 약속했던 빛나는 순간. “네가 죽으면 함께 죽을 거”라고 말하면서 순수하게 웃던 소년소녀. 유에의 죽음으로 사랑과 약속들이 순식간에 깨지고 짐은 결국 모든 걸 잊는다. 그리고 고통과 더불어 유에와 함께했던 행복했던 순간들도 모두 묻어버린다.
짐은 유에처럼 옥상의 끝에 서서 유에의 귀신을 바라보며 유에와 함께했던 시간을 천천히 떠올린다. 끝은 고통이었지만 결코 되돌릴 수 없기에 더욱 소중한 기억. 그는 우리의 기억이 ‘사라진 아름다움’으로 흔적 없이 흩어지지 않도록 “이제부턴 아무것도 잊지 않을게”라고 다짐한다. 그날 밤, 짐은 괴롭다는 이유로 직면하지 못하고 도망치기만 했던 그리움과 사랑으로 물든 인생의 한순간을 되찾는다. 유에의 흔적이 사라진 자리엔 얀이 서있고, 짐이 유에에게 선물했던 새가 묻힌 무덤가엔 새 두 마리가 앉아있다. 짐을 오래도록 괴롭혔던 슬픔의 색이 옅어지고, 새로운 사랑이 그 기억과 흔적 위에 얹어진다. 오랜 외로움이 버티고 있던 자리에 새로운 인연이 생겼음에도 아직 환한 웃음을 되찾지 못한, 조금은 퍼석한 표정의 짐을 보며 여전히 위태롭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지만, 이젠 그의 옆엔 얀이 있으니까. 조금씩 괜찮아질 수 있겠지.
“지금 당장은 무서워도 내일은 웃어넘길 수 있어요. 그렇게 해볼래요?”
이별이나 갑작스레 들이닥친 충격을 받아들이는 건 쉽지 않다. 짐처럼 사랑했던 이가 갑자기 죽음을 선택하는 일을 겪었다면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건 정말 고통스럽고 힘든 일이다.
나도 짐과 비슷한 일을 겪으며 “차라리 그를 모른 채 살았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하며 모든 흔적을 외면하려 노력했던 시절이 있었다. 외면한다고 해서 고통이나 슬픔이 사라지는 건 아닌데 그때는 그게 최선인 줄 알았다. 이제는 그가 남긴 흔적을 따라 밟으며 건강하게 그리워하고 있지만, 슬픔을 직면하고 받아들이는 건 참 버거운 일이었다. 그렇게 슬픔에 젖어 아팠던 날들을 모으고 또 모으다 보니 결국은 웃으며 그를 추억할 수 있는 오늘이 왔다. 슬픔을 받아들여야 하는 지금 당장은 무섭겠지만 그렇게 마주한다면 내일은 조금 더 나아질 수도, 더 나아가 웃을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은 무서워도 내일은 웃어넘길 수 있어요. 그렇게 해볼래요?”
이 대사를 몇 번 곱씹다 보니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해진다. 이젠 다른 세상으로 떠난 배우 장국영. 그와의 이별은 그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와 슬픔이 됐겠지. 하지만 그때의 상처를 극복하고 오늘도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실감할 때마다 참 놀랍다. 나는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담은 박수를 보내고 싶다. 무사히 슬픔을 극복하고 아름다운 추억을 보듬으며 살아가는, 용감하고 강한 그대들이 참 멋지다고, 그 마음 오래도록 변치 않았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오래오래 함께 그리워하자고.
-
- 무엇이 장애인을 ‘장애인’이게 하는가
7★/10★
장애등급제는 장애인들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한다는 목적으로 1998년에 제정되었다. 이후 장애인은 장애 정도에 따라 1~3급(중증), 4~6급(경증)으로 나뉘어 차등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수많은 장애의 양상이 고작 여섯 개의 등급에 완전히 들어맞을 리 없다. 존재를 등급으로 나누어 차등하는 일은 언제나 딱 맞지 않는, 경계에 있는 존재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영화 〈복지식당〉은 장애등급제가 어떻게 제정 목적과는 정반대의 효과를 야기하는지를 고발한다. 주인공은 “누가 봐도 1급”인데 장애등급 심사에서 5급 판정을 받은 재기다. 재기는 교통사고로 ‘중증’ 장애를 입었으나, 팔을 들어 올릴 수 있고 몇 미터나마 걸을 수 있다는 이유로 ‘5급’ 판정을 받는다. 결과는 재앙이다. ‘5급’은 사사건건 재기의 발목을 잡는다. 활동보조를 신청할 수도, 장애인 콜택시를 지원받을 수도 없다. 모두 ‘중증’ 장애인에게만 제공되는 복지 혜택이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전동휠체어 구입 지원을 알아보려 건강보험공단에 문의하지만 공단 직원은 장애인 단체에 가서 상담을 해보라고만 말한다. 장애등급을 재지정받기 위한 행정심판을 알아보는 재기에게 ‘업무 방해’ 운운하며 짜증을 내는 공무원도 있다. “왜 진작 5급이라고 말 안 해서 사람 헷갈리게 해요?”라는 수모는 그에게 일상이다. 즉, 재기에게 장애 등급을 부여한 국가는 있지만 재기의 권리를 보장하는 국가는 없다. 국가는 멍에만 줄 뿐 그 무엇도 책임지지 않는다. 제도와 인간의 뒤바뀐 위계에 권위를 부여하여 장애인을 수치심과 좌절의 영역에 방치할 뿐이다.
취업도 마찬가지다. 재기는 민관이 함께 마련한 장애인 취업 면접에 참여한다. 그러나 면접관은 ‘제대로 걷고 물건도 들 수 있는 사람(경증 장애인)’만 채용한다고 말한다. “제대로 걷고 물건도 들 수 있으면 그게 장애인인가요? 비장애인이지”라는 재기의 대꾸에는 깊은 분노와 좌절이 담겼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가닿지 못하고 공허히 흩어진다. 그렇다고 중증 장애인을 채용하는 회사에 취직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재기가 ‘5급’이기 때문이다. 모든 게 이런 식이다. 지팡이를 지원받을 때, 행정심판 비용 마련을 위해 은행에 대출받을 때도 등급이 문제다. 현실과 등급의 불일치는 재기가 가는 모든 곳을 끈덕지게 따라다니며 그를 괴롭힌다.
〈복지식당〉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재기는 복지 제도의 모순과 공백을 영악하게 이용하는 장애인에게도 소외당한다. 병호는 재기가 병원에 있을 때 만난 지체 장애인으로 어려움에 처한 재기에게 행정심판을 위한 변호사 소개, 장애인 콜택시 지원, 장애인 스포츠 선수 등록 등 여러 호의를 제공한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재기에게 병호의 호의는 큰 도움이 되고 둘은 금세 서로 호형호제하며 가까워진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병호의 호의가 재기 삶에 대한 통제로 변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영향력이 확대되자, 병호는 이를 위력으로 전환해 금전적‧감정적 착취를 일삼는다. 심지어 홀로 아들을 키우는 재기의 사촌누나에게도 자신이 재기의 안위를 손에 쥐고 있다고 뻐기며 치근덕거린다. 병호는 제도의 허점을 파고들어 단단한 카르텔을 형성하여 위력을 획득했다. 재기뿐만 아니라 장애인 지원센터, 활동보조인 모두가 병호의 위력 아래 있다. 병호가 동료 장애인을 데리고 장애인 활동지원 센터를 옮기면 그 센터는 망하고, 병호에게 밉보이면 활동보조로 일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병호는 장애등급제의 허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장애를 가진 채 태어나 가족에게 버림받고 시설에 들어갔다가 18살에 나온 그는 제도의 틈새에서 자신의 ‘살 자리’를 찾았다. 장애인에게는 ‘집단 내 밥그릇 싸움이 유일한 생존 수단’이라는 감독의 말**은 병호의 주도면밀한 ‘악랄함’이 어떻게 가능해졌는지를 가늠케 한다. 요컨대 병호는 장애인에게 주어지는 제도적 수혜의 최대치를 활용하는 데 능숙하다. 이는 병호에게 이용당하다 버림받은 재기가 끝내 가지지 못한 것이다.
병호에게 굽신거리기를 거부하는 재기가 그에게 맞는 등급을 부여받아 필요한 지원을 받을 수 있을까? 복지제도의 은유인 ‘식당 메뉴판’은 과연 모든 장애인이 누려 마땅한 권리를 알기 쉽게 전달하는 언어로 다시 쓰일 수 있을까? “부디 제가 자립해서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장애 등급을 재지정해달라는 판사를 향한 재기의 호소는 제대로 응답받을 수 있을까? 그리하여 마침내 복지 제도는 ‘인간다운 삶’을 보장한다는 본래의 목적에 더 가까워질 수 있을까?
이 질문들은 ‘무엇이 장애인을 장애인이게 하는가’라는 근본적 물음으로 나아간다. 재기는 단 한 번도 장애 그 자체 때문에 좌절하지 않는다. 장애가 곧 불행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재기가 등급과 상관없이 활동보조와 장애인 콜택시를 이용할 수 있었다면, 경제 활동을 할 수 있었다면, 공적 권력이 자신의 책임을 다해 병호에게 의지할 필요가 없었다면, 애초에 인간에 ‘등급’을 매겨 차등 지원하는 폭력적 발상이 없었다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가정(假定)들은 늘 재기를 배반하는 방식으로 귀결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재기를 ‘불행’하게 만든다. 병호의 호의로 잠시나마 긍정적인 미래를 그릴 수 있었을 때, 재기가 행복한 표정으로 웃는 장면 역시 그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장애 그 자체가 아님을 짐작케 한다.
2022년, 장애인 이동권 시위로 생긴 큰 ‘소란’이 해가 바뀐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장애인은 다른 소수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대중에게 더 큰 ‘온정적’ 시선을 받는다. 하지만 이들에게 필요한 건 호의가 아닌 권리 보장이다. 장애인이 자신에게 허락된 선을 넘은 결과는 처참했다. 재기가 행복할 가능성을 배반한 여러 가정이 그러했듯, 섬세하고 꼼꼼하게 질문되어야 할 문제들은 비장애인들의 ‘불편함’과 대립하는 구도에 갇혀 이번에도 제대로 논의되지 못하고 있다. 〈복지식당〉은 권리 보장을 외치는 장애인의 몸과 말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사회에 대한 영화적 개입이다. 재기가 묻는다. 무엇이 장애인을 ‘장애인’이게 하는가.
*진보적 장애인 단체는 장애등급제를 폐지하기 위해 오랫동안 싸워왔다. 이들의 주장은 일부 수용되어 현재는 장애가 중증과 경증의 두 단계로 나뉜다. 그러나 장애인 단체의 요구는 장애등급제의 ‘완전한’ 폐지다.
**김소미, “‘복지식당’과 함께 장애인 권리 투쟁의 현실을 돌아보다”, 〈씨네21〉, 2022.04.21.
★이 영화는 시리즈온, 티빙, 웨이브, 쿠팡 플레이, 왓챠 등에서 다시 볼 수 있습니다.
-
- 고독정식보단 시끌시끌 투게더지
쓸쓸한 고독정식을 먹는 것보단 시끌시끌하지만 투게더가 더 보기 좋다는 걸까. 솔로보다 팀이 낫다고 '더 마블스'는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를 너무 재미없고 유치하게 풀어낸다는 게 아쉽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 페이즈 5의 3번째 영화이자 캡틴 마블의 두 번째 실사영화인 '더 마블스'는 우주를 지키는 최강 히어로 캡틴 마블 캐럴 댄버스(브리 라슨)가 초능력을 사용할 때마다 모니카 램보(티요나 팰리스), 미즈 마블 카말라 칸(이만 벨라니)과 위치가 바뀌게 되면서 의도치 않게 새로운 팀플레이를 펼치게 되는 이야기를 그린다.
사실 캡틴 마블 캐릭터 설정이 다른 캐릭터들보다 압도적인 능력치를 지닌 '먼치킨'에 가깝기 때문에 재밌게 구성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크리족 리더이자 빌런인 다르-벤(자웨 애쉬튼)이 자신의 나라 할라를 구원하기 위해 사용하는 아이템 퀀텀 뱅글과 그로 파생된 점프 포인트 여파로 캡틴 마블, 모니카 램보, 그리고 미즈 마블이 서로 엮이게 되는 스토리로 밸런스를 맞춘 것으로 보인다.
풀버전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
-
- 마음과 시선의 방향
SYNOPSIS.
1972년 뮌헨, 올림픽 생중계에 도전한 ABC 방송국 스포츠팀은 무장한 테러리스트들이 선수촌에 난입해 인질극을 벌이고 있음을 알고 이를 생중계로 보도한다. 솟구치는 시청률과 9억 명의 시청자까지, 생방송으로 내보내는 단독 특종에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그들은 테러리스트들 역시 자신들의 방송을 보고 있음을 알게 되는데… 올림픽 사상 초유의 테러 인질극 생중계! 방송을 멈출 것인가, 계속할 것인가!
POINT.
✔️ 실화 기반이지만, 1972년 뮌헨 올림픽 참사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무리 없이 이해할 수 있도록 친절하게 전개됩니다.
✔️ 그러나 잔인한 장면은 들어있지 않아요. 저는 이 지점이 좋았습니다.
✔️ 속도감 있는 전개 안에서, 방송국에서 일하는 언론인들의 책임감과 고민이 생생하게 전달됩니다.
✔️ 더불어 언론인들의 전문가다운 면모로 척척 손발이 맞는 장면들도 재미있었어요.
✔️ 그 장면들을 뒷받침하는 것은 다양한 배우들의 협연입니다. <퍼스트 카우>, <쇼잉 업>에서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존 마가로, <티처스 라운지>에서 인상 깊은 모습을 보여준 레오니 베네쉬가 강렬한 인상을 남깁니다.
✔️ 포스터만 보면 <스포트라이트>보다 10년 앞서 나온 영화처럼 보여요... 하지만 영화는 좋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는 장르의 영화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을 버거워하고, 영화라 해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테러를 기다리고 싶지 않아서 그렇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본 건 존 마가로의 얼굴이 궁금해서였다. <퍼스트 카우>에서 소처럼 순박한 눈망울을 보여주었고, <쇼잉 업>에서 불퉁하게 세상과 불화하는 동생의 표정을 보여주었던 그가, 이번에는 어떤 얼굴을 보여줄까. 그리고 나는 존 마가로를 못 알아볼 뻔 했다. 아니 존 마가로를 궁금해 할 겨를이 없었다. 빠른 전개 안에서 다음 이야기를 궁금해 하느라.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 것도 모르고 영화관에 앉았지만, 극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언론의 생중계 현장을 담은 영화이다 보니 그들의 대화와 상황 설명을 통해 친절하게 정보가 전달되고, 방송을 만드는 과정을 척척 담아내어 그 설명이 늘어지는 법도 없다. LA 비평가 협회상에서 편집상을 수상한 이유를 알 것 같은 대목이다.
전개가 빠른 영화의 스토리라인에 대해 구구절절 말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만 보고 나서 마음에 남은 생각들만 정리해 보고 싶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마음
영화 초반에 인물들이 서로의 국적을 인식하고 있음이 대사에서 수 차례 드러난다. 지네딘 수알렘이 연기한 캐릭터 자크의 경우, 자크라는 이름보다 프랑스인이라는 국적으로 더 많이 불리고 인지될 만큼 국적이 강조된다. 이는 자연스럽게 당시의 상황을 조망한다. 독일에 대한 감정이 아직 남아있는 세계, 세계에 대한 감정이 아직 남아있는 독일. 앙금은 남아있지만 이제 가장 평화적이고 우호적인 이벤트가 펼쳐져야 한다. 국적에 따라 다른 입장은 개인의 감정에도 영향을 준다. 평화와 우호를 말하는 행사에서조차 국적을 고려하여 방영 우선순위를 결정할 만큼.
우리 각자의 자리는 과연 각자만의 자리인가. 독일과 프랑스, 미국의 관계 뿐 아니라 영화의 배경이 되는 테러 사건 또한 국적에 따라 다른 입장과 감정이 뒤얽힌 사건이다. 테러리즘 사건 하나만 놓고 가타부타 판단하기엔 너무 많은 사건과 역사가 줄줄이 얽혀 있으며,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는 그들만의 문제도 아니다. 맥마흔 선언과 밸푸어 선언의 발화자였던 영국을 비롯해 여기 얽힌 국가들이 더 많이 있다.
과거는 온전하게 과거로만 존재하지 못하고, 타자는 철저하게 타자로만 존재하지 못한다. 이러한 세상에서 무언가를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시각으로 본다는 것은 가능한가? 언론인이라면 다르게 답할 수 있겠지만... 시민인 나로서는 그저 연결되어 있는 서로를 감각하며 나의 자리를 확인하고 내 시각이 어느 방향에 서 있는지를 좀더 명확히 아는 것, 그리고 그만큼을 감안하는 것, 어쩌면 그게 최선의 균형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영화 밖에서 조심스러워지는 마음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기에, 영화를 보는 동안도 영화 바깥이 궁금했다. 그리고 보는 동안 혹시라도 이스라엘의 '피해자성'을 호소하는 장면이 나올까봐 꽤나 긴장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제일 먼저 감독과 제작진이 유대인인지 다급하게 찾아보게 될까봐 긴장했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기에. 영화의 안과 밖 또한 예외가 아니기에.
지금 이 순간에도 인질이 석방되고 군이 철수하고 있다. 그동안 사람을 말살할 것처럼 쏟아붓던 공격이 멈춘 것은 참으로 다행이지만 마냥 안심할 수만은 없다. 트럼프 대통령이 가자 지구를 "장악"해서 "재개발"하곘다는 소리를 하고 있고, 휴전 협상 다음 단계는 아직 불투명하다.
이런 세상에서 팔레스타인 과격 단체가 이스라엘 대표단을 인질로 잡아 벌인 테러극을 담은 영화라면, 이 영화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어떻게 그리는지 민감하게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영화는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장면을 전혀 담지 않았고, 테러 사건의 전개는 전화와 전보를 비롯한 소식으로 전달되어 대사로 공유된다. 각자의 자리에서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본인 할 일을 하는 언론인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에 주력한 영화다운 선택이다.
영화 속 언론인들은 이제 막 도입된 위성 생중계라는 신기술과, 자신들이 정통한 각종 기술을 펼쳐 보인다. 옛날 텔레비전에는 저런 식으로 자막을 깔았던 거구나, 사진을 저런 식으로 확대했구나, 스튜디오 연결은 저렇게 하는구나... 같은 생각들을 하며 본 그들의 능숙한 손놀림 뒤에는, 지금 어디와 연결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이 소식을 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그때그때 선택해야 하는 언론인들의 본능이 있다. 역시나, 영화 밖에서 조심스러워지는 마음이다.
제작자의 마음과 시청자의 마음
능숙하게 자기 일을 하면서 그때그때 판단을 내리는 언론인들의 모습은, 전문가처럼 보여 한편으로는 멋있으면서도... 동시에 징그럽다. 선택을 내릴 때 그들은 인간성을 우선순위에 둘 수 없기 때문이다. 선택이 미칠 파장을, 그 경우의 수를 일일이 계산한다면 방송은 완성될 수 없을 것이다.
특히나 이 영화처럼 급박하게 굴러가는 갑작스러운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뉴스 보도국이 아니라 스포츠국이지만 지금 상황을 곧바로 담을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다. 상황을 알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이라는 사명감과, 방송 자체의 완성도에 대한 욕심과, 갑작스럽게 굴러가는 상황을 파악하고 따라가는 데 분주한 마음은 이리저리 뒤엉킨다. 그 안에서 최소한의 윤리 준칙이 무너지기 너무 쉬워 보이는 시스템이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동안 제작자의 마음보다 더 징그러운 것을 발견하는데, 내 안에서 발견한 시청자의 마음이다. 사건 전개를 궁금해 하면서 상황이 전개되기를 기다리는 기자의 마음, 또 나의 마음. 그건 어디를 향하고 있나. 심지어 온 가족이 둘러앉아 텔레비전을 보던 그때와 달리, 지금은 모두가 각자의 스크린을 각자의 알고리즘 안에서 보고 있는 세상이다. 더블체크되지 않은 정보 채널이 마구 난립하는 세상. 영화에서 보여준 것처럼 언론인들이 서로 논의하며 갈등하여 적정선을 찾아가는 결과물조차 뜻하지 않은 사고를 칠 수 있는데, 그 과정조차 생략된 '가짜 뉴스 채널'이 너무 많은 세상에서 나는 과연 무엇을 보고자 하는가.
실시간으로 본다는 건 참 무서운 일이다. 영화를 보는 동안 나는 한때 실시간으로 보면서 그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던 어떤 순간들을 떠올렸다. 거대한 참사가 일어나는 장면을 몇날며칠 우리가 가만히 보고 있었던 순간들. 정제되고 편집된 뉴스 영상이 아닌, 마구잡이로 찍힌 사고 현장을 조용한 방에서 핸드폰으로 들여다 보면서 '이걸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게 맞아?' 싶었던 순간들. 가슴이 쿵쾅거려 잠들기 어려웠던 밤들로 이어졌지만, 이런 날들이 길어지고 아득해지면 무뎌질 수밖에 없다.
지난 15개월 동안 가자지구에서 얼추 추산하기로도 4만 명이 넘는 사람이 죽었고, 이 중 70% 가량이 여성과 어린이라는 UN의 분석이 있었다. 실제 사망자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을 거라는 추측이, 카더라 통신이 아닌 의학 학술지에 실렸다. 병원과 학교는 의례적으로 마지막 안전지대지만, 전쟁 규칙을 무시하고 조준 폭격하기도 했다. 하루에 몇 명씩 죽었다더라, 그 중 아이들이 몇이라더라...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는 끔찍한 소식을 무수히 들으며 나는 이미 무뎌졌다. 실시간으로 본다는 것은 사람을 미치게 괴롭게 하거나 무뎌지게 하거나, 둘 중 하나의 수순이 되기 쉽다.
그래서 이 영화의 엔딩이 의미있게 느껴졌다. 불 꺼진 스튜디오에서 제프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향하는 곳, 그곳은 유일하게 희미한 빛이 드는 공간이었다. 사람들의 얼굴 사진이 붙어 있는 게시판이다.
우리의 시선은 계속해서 흔들린다. 상황 전개 소식을 듣고 복도에 선 언론인들을 비추는 카메라가 흔들렸듯. 물론 흔들리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스스로를 다잡겠지만, 언론인도 흔들린다. (흔들렸을 때의 결과가 너무 끔찍하기에, 그들에게 남다른 균형 감각이 주어지길 간절히 바라게 되지만.) 시청자도 흔들린다. 시청자는 숫자가 되어 언론인에게 영향을 주고, 언론인들은 또 다른 숫자를 창조해낸다. 우리는 순환한다.
그러나 흔들림 끝에 우리의 시선이 희미한 빛 아래 사람의 얼굴에 머물 수 있다면. 결국 시선은 마음 가는 곳을 향하게 되어 있다. 95분을 빼곡하게 채우는 영화적 재미가 있는 작품이었지만, 동시에 영화 바깥 나의 시선을 가다듬게 만드는 좋은 작품이었다.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참석하여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
-
- 이 세상 모든 금쪽이에게 보여주고 싶은 시청각교재!
이 영화를 우리 아이들에게 바칩니다. 우린 너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
오은영 박사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 이 문구는 <인사이드 아웃 2>의 엔딩크레딧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마치 제작진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것 같은 이 문구는 큰 의미로 다가온다. 13살 사춘기에 접어든 라일리의 변화와 성장을 다뤘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복잡다단한 감정에 사로잡혀 사는 10대는 물론, 그 시절을 관통했던 것을 잠시 잊고 올바르다고 생각한 방향으로 아이들의 자아를 만들려는 어른들의 그릇된 마음이 담겨 있다. 중요한 건 애나 어른이나 모두 보듬어 준다는 것. 그래서 눈물이 나고, 그러므로 이 세상 모든 사춘기 가족에게 이 영화를 바치고 싶다.
세월은 참 빠르다. 고향을 벗어나 새로운 곳에 정착하지 못해 힘들었던 라일리가 벌써 13살이 되었으니 말이다. 13이란 숫자는 즉, 사춘기가 왔다는 것!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기쁨’, ‘슬픔’, ‘버럭’, ‘까칠’, ‘소심’은 라일리의 소중한 감정과 좋은 기억만 담기 위해 노력하고, 기쁨이는 매일 안 좋은 기억 구슬을 먼 곳을 보내는 일까지 도맡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이들에게 뜻밖의 친구들이 등장한다. ‘불안’, ‘부럽’, ‘따분’, ‘당황’이 그 주인공. 예상했듯 이들은 한 팀이 되지 못하고, 이 중 기쁨이와 불안이는 서로 대립만 한다.
<인사이드 아웃 2>는 기존 감정들과 새로운 감정들이 대립하다가 정신적으로 위험에 처한 라일리를 구하기 위해 서로 손을 잡고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모험을 그린다. 전편의 수장이었던 피트 닥터의 바통을 받은 켈시 만 감독은 전편의 장점을 오롯이 이어받고, 여기에 확장성을 더한다. 극 중 라일리가 사춘기에 접어들었다는 설정과 더불어 새로운 친구를 만나고 그 안에서 사회관계망을 넓히는 등 내외적으로 세계관을 넓혔다. 성장의 폭과 감정의 수가 비례한다는 기준 아래, ‘불안’, ‘부럽’, ‘따분’, ‘당황’이란 새로운 감정들이 대거 투입되는데 그 중심에는 불안이가 있다.
온전히 나의 감정에 충실해야 했던 과거와 달리, 사춘기에 접어들면 불안, 자신감 결여, 타인의 시선, 외로움 등 기쁨보다 슬픔의 영역에 가까운 감정들이 마구마구 생겨나기 마련. 전편에서 슬픔의 우울한 기운을 어떻게든 배제하려는 기쁨이처럼, 불안이 또한 그 어둠의 영역이 라일리를 집어삼키지 않도록 자신의 계획을 무리하게 밀어붙인다. 이에 희생양은 기존 5가지 감정들인 셈.
하지만 전편의 기쁨이가 그렇듯 불안이 또한 중요한 것을 간과하고,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다른 방향으로 진전되는 라일리의 모습에 당황한다. 점점 불안이 영혼을 잠식하듯, 불안이의 멋들어진(?) 계획은 실행하면 할수록 라일리의 영혼을 갉아먹는다. 점점 악화되는 라일리의 모습은 청소년들의 불안장애 과정이 이렇게 진행된다는 걸 보여주는 것은 물론, 그 시기를 지나온 이들에게는 안쓰러움까지 전한다.
기쁨이 또한 혼란을 겪는 건 마찬가지다. 올바른 자아를 만들기 위해 나쁜 기억을 저 먼 곳으로 날려버린 기쁨이는 이 사태를 겪고, 자기 잘못을 깨닫는다. 하나의 자아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꼭 좋은 기억만 있어야 하는 게 아니라는 것. 더불어 한 사람의 자아는 감정과 마찬가지로 누군가에 의해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말이다. 결과적으로 영화는 내외적으로 기쁨이와 라일리의 성장통을 잘 그린다고 볼 수 있다.
이 부분은 자식을 둔 부모라면 마음이 뜨끔해진다. 이 작품의 프로듀서인 마크 닐슨은 한 인터뷰에서 “라일리의 감정뿐만 아니라 부모로서 10대를 바라보는 시각도 녹였는데, 특히 기쁨이를 부모가 자식을 바라보는 관점으로 만들었다.”고 밝힌 바 있다. 기쁨이에게서 육아 예능 <요즘 육아 금쪽 같은 내 새끼>에 출연한 부모의 모습이 겹치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 부모 관객이라면 기쁨이를 보며 자식을 위해서 컨트롤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행동 자체가 되레 악영향을 미치는 건 아닌지라는 반성 어린 생각을 할 것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꼭 좋은 사람이 되는 게 답이 아니라는 것, 부족한 것을 숨기지 않고 그 자체로 인정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걸 이 영화는 묵직하게 던진다.
후반부 모든 갈등 요소가 해소되는 장면은 사춘기를 관통하고 있는, 관통했던 모든 이들의 눈물 버튼이 된다. 특히 괜찮은 사람처럼 행동하려고, 친구들 무리에 들어가려고 부단히 노력했던 지난날의 과거, 그리고 어른이 되어서도 이 노력이 현재진행형인 이들에게 이 작품은 그 자체가 작은 위로를 전한다.
켈시 만 감독은 이 영화에 접근할 때 속편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오리지널이라고 생각하며 만들었다고 말했지만, 아쉽게도 전편의 아우라를 벗어나지는 못한다. 전반적인 갈등, 해결 과정이 전편과 비슷하게 흘러가 설정에 따른 신선함과 개성은 떨어진다. 그럼에도 관객의 기억에 침투해 과거의 경험을 떠올리게 하면서 공감대를 형성, 이를 바탕으로 감동을 전하는 픽사의 장점은 이번에도 관객의 마음을 움직인다. 사춘기 자녀를 둔 가족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덧붙이는 말: 극 중 라일리도, 까칠이도 마음을 빼앗긴 이가 있었의니 바로 ‘랜스’다. 라일리가 즐겨하는 게임 캐릭터인데, 허당미가 장난 아니다. 필살기 또한 너무 매력적이라고 할까. 전편의 빙봉처럼 감동적인 장면을 선사하는 캐릭터는 아니지만, 진중함과 코믹함이 믹스된 씬스틸러로 제 몫을 한다. 국내 더빙판에서는 이동욱이 이 캐릭터의 목소리 연기를 책임지고 있다. 궁금하면 더빙판으로~~
사진 제공: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평점: 3.5 /5.0
한줄평: 이 세상 모든 금쪽이에게 보여주고 싶은 시청각교재!
-
-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맨이 팬들에게 준 선물들 정리! (이스터에그)
안녕하세요 마블쟁입니다!!
드디어 스포가 있는 자세한 리뷰 영상입니다!
영화 속에 들어있던 수많은 이스터에그들 중,
이번 영화의 실질적 주인공이라고 해도 될 캡틴과 아이언맨의 떡밥 및 이스터에그 들을 자세히 정리해 보았습니다!
영상 재미있게 봐주세요~
2018. 04. 27 영상입니다!
채널 구독하기: https://www.youtube.com/channel/UC6jj...
마블쟁이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marvelersstudio
마블쟁이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marvelersst...
-
- [조커리뷰]조커를 완성한 영화! 앞으로DC는 조커를 건들지 말라!
#조커#조커리뷰#영화조커리뷰
조커 리뷰입니다!
-
- 넷플릭스 <브랜드 뉴 체리 플레이버: 미니시리즈> 공식 예고편
지금껏 알았던 복수극은 잊어라! 1990년대 초반, 영화를 만들고자 할리우드로 향한 신인 감독. 하지만 섹스와 마법, 복수, 새끼 고양이가 뒤엉킨 환각의 터널이 그녀를 기다린다. 이 혼돈에서 벗어날 길은 어디인가. 로자 살라자르와 캐서린 키너, 에릭 랭, 제프 워드, 매니 저신토 출연. 신작 미니시리즈 《브랜드 뉴 체리 플레이버》는 8월에 최초 공개된다.
-
- 영화 <렌필드> 티저 예고편
갑중갑 드라큘라의 직속비서 #렌필드 ?♂ 4월, 그의 눈물겨운 종신 계약 탈출기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