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onymoushilarious2023-07-31 22:03:37
가장 건전한 먹방 그리고 외로움에 대한 담론
영화 '리틀 포레스트' 리뷰
요즘 먹방은 하나의 장르로서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나는 가장 일반적인 형태의 먹방을 보진 않는다. 항상 안 봤던 것은 아니고, 어느 순간부터 보게 되지 않았다. 특히 먹방이 인터넷 영상의 한 장르를 넘어 공중파의 소재로 등장하고 나서부터는 선택해서 볼 수 있는 컨텐츠가 아닌, TV 채널을 돌리다가 무심코 보게 되버리는 순간들이 축적되며 점점 찾지 않게 된 장르다.
하지만 공중파의 탓만 하기엔 다른 이유가 있다. 언젠가부터 많이 먹는 행위가 보기 좋고, 복스럽게 보여 음식을 더 먹고 싶어지게 만든다는 인식이 생긴 것 같다. 하지만 이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많이, 그리고 과도하게 빨리 먹어버리는 행위는 복스러움을 넘어 탐욕스러워 보이는 순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단지 많이 먹는 행위가 보기 좋다는 것은 너무 단순한 표현이라고 생각하며 음식을 많이 먹는 것이 어느 순간부터는 결핍의 일환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음식을 먹는 양과 상관없이 천천히, 음미하면서 먹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어느날 갑자기 이미 봤던 영화이지만 '리틀 포레스트'를 다시 정주행했다. 아, 물론 처음은 일본판으로 시작해 한국판으로 마무리했다. 그리고 그 영화에 나오는 모든 음식들이 다 맛있어 보여서 내가 따라할 수 있는 수준의 요리들은 전부 다 따라해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먹었던 음식은 수제비였는데, 그 수제비를 먹으면서 '리틀 포레스트' 시즌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먹방이 아닐까 생각했다. 가장 건강한 형태로 식욕을 유발하는, 그래서 더 따라하고 싶게 만드는 그런 먹방 말이다. 물론 내 입맛이 토속적인 편이기에, 영화 속 음식이 다 맛있어 보였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최근 소식좌가 생겨나는 것을 보아, 많은 사람들도 이제 나처럼 많이 먹기만 하는 먹방은 질린 것 같다. 오히려 많이 먹지 않아도 천천히 먹는 것이 더 맛있게 느껴진다.
하지만 인터넷에서 오늘도 생겨나는 수많은 먹방 방송들 중에서 오늘도 나는 이 영화를 다시 켜보는 것은 클래식은 영원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아닐까. 수많은 먹방러들보다 이제는 음식을 천천히, 온전히 먹는 사람을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고파진다는 것은 결국 나는 먹방이라는 새로운 장르에 질려 버렸다는 반증인 것 같다. 수많은 퓨전 음식들이 있어도 결국 다시 돌아오게 되는 것은 음식 본연의 맛이고, 그 본연의 맛을 구현해 내고, 맛보는 사람들을 보면서 가장 평범한 것이 가장 위대한 것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는다.
리틀 포레스트를 보면서 내 것이 있는 독립적인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내가 내 요리를 만들어먹을 줄 아는 사람은 혼자 먹고 있어도 외로워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배달음식에 의존하며 오늘도 먹다남은 플라스틱통을 냉장고에 우겨넣으며 현타가 올지는 몰라도. 내가 먹는 음식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성과도 있고 희로애락이 담겨있기에 외로움에 침잠해있을 틈이 없다.
나의 엄마가 한 말 중에
"외롭다고 난리치는 사람들은 참 할 일도 없나 싶더라. 취미도 없고, 좋아하는 것을 지속할 끈기들도 없어서 계속 남한테 뭘 해달라고 조르기만 해. 외로울 시간이 어딨어, 내 할일만으로도 신경쓸 일이 얼마나 많은데, 외롭다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할 일이 그렇게도 없나 싶더라고."
물론 내 엄마는 좀 독립적인 스타일이라 매정한 사람일 때도 있지만 이 말에 공감했다. 내 것을 나를 위해 만드는 삶은 나를 외롭게 할 틈을 주지 않고 여유를 가져다주기에 먹방러들처럼 급하게 먹을 필요도 없다. 남에게 애정을 갈구하지 말고, 남에게서 바라는 애정을 내가 나에게 해주면 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영화 속 김태리도, 일본판 주인공도 혼자 살지만 외로워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그게 내 눈에도 멋있어 보였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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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 한 명이 초능력자가 되는 방법을 개발하고, 오랜만에 재회한 그들은 얼떨결에 한 팀이 된다. 도시를 지키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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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침내, 성공한 이순신과 거북선!
- 미디어 매체에서 "이순신"의 모든 해전을 "대첩"으로 표현하나, 엄밀히 말하면 "한산도 대첩"만이 유일하다. - "김시민 - 진주대첩"과 "권율 -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에 속하며, 국내 역사 전체를 들여다보면 "을지문덕 - 살수대첩"과 "강감찬 - 귀주대첩"과 함께 "한국사 3대 대첩"에 속한다.많은 전투들이 있었음에도 유독, "한산도 대첩"이라는 단어가 붙은 이유는 뭘까?그에게 "패배"라는 단어가 없지만 "거북선"과 "학익진", 그리고 "승리"로 "이순신"이라는 브랜드가 정립되었기 떄문이다.전작 <명량, 2014>이 거둔 총 국내 관객 수는 1761만명은 역대 국내 박스오피스 1위에 해당된다.그나마, 이에 육박한 성적을 거둔 영화가 <극한직업, 2019>의 1626만명이었으니 새삼 얼마나 대단한 성적인가?아무튼, 이런 흥행을 거뒀으니 당연히 속편 제작에 대한 소식이 들려왔지만 좀체 들리지 않았다. - 그도 그럴 것이 "이순신"을 맡았던 최민식 배우가 하차했고, 무엇보다 영화의 흥행과 달리 평가가 좋지 않았다.1. 전작의 피드백을 수용했을까?전작에 대한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다!흥행도 흥행이었지만, 그만큼의 반대급부로 쏟아진 악평들은 "시리즈"의 가능성을 불확실하게 만들었다.물론, "명량해전"이 심심했던 전투라는 말이 아니다. - "백의종군"으로 물러났던 "이순신"이 다시 복직하나, 이전 "칠천량 전투"에서 "거북선"을 비롯해 수군 전력의 90%를 잃은 상태(13척)에서 133척의 왜선을 격파하는 이야기는 오히려, 개연성을 지적당할 "언더독"의 부활 스토리이다!이에 <명량>은 이순신의 피폐한 정신 상태를 보여줘 설득력을 더하지만, "충(忠)"의 강조로 소위, 국뽕과 신파로 승화되어 관객들의 분노를 일으킨다.<명량>의 문제를 알기에 "김한민 감독"은 이번 <한산>에 오면서, 관객들이 기피하는 국뽕과 신파를 덜어내었다.하지만, 이러면서 또 하나의 문제에 직면하니 그건 두께이다.표면적으로 이번 <한산: 용의 출현>은 "이순신"과 "와키자카"의 대결이지만, "이순신 - 원균"의 갈등을 비롯해 "와키자카 - 가토"의 갈등, 거북선의 설계도에 따른 첩보전, 그리고 의병들의 육지전까지 많은 캐릭터들이 등장한다.이 모든 것을 챙기기에는 2시간 10분은 너무나도 짧지만, "항왜군사"로 등장하는 "준사"와 '의(義)와 불의(不義)의 싸움이지' 대사는 단연, 돋보인다.2. 일본과 조선의 다른 시작점먼저, 일본의 경우. '전국시대'를 알고 가자!각 지역의 성주들이 자처해 전쟁으로 혼란했던 시기로 무사, 일명 "사무라이"들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자신들의 주군을 바꿨다는 것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FA"로 팀을 이적했다는 개념)그런 점에서 "와키자카"가 '자신의 공적을 양보한다'라는 말에 부하들이 발끈하는 장면은 그들이 '전쟁을 어떻게 보여주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순간이다.그렇다면, 조선은 어떤가? - 시간을 거꾸로 돌려본다면, "고조선"의 "단군왕검"부터 국가의 이름만 다른 채 "왕정"은 이어갔다.특히, "제정일치"고 "선민사상", 그리고 "탄생설화" 등은 신성불가침한 이미지를 만들었다.물론, 이외에도 다양한 정책들로 중앙 집권화, 왕권을 유지해나갔다. (예시로, "고려"의 "왕건"은 호족들에게 자신의 성씨를 부여하거나 결혼을 했다)그런 가운데 "인의예지신", 그리고 "충효"는 자연스레 강조되었으니 조선과 일본, 이들이 내세우는 명분이 다를 수밖에 없다.그렇기에 "준사"의 모습에 <고지전, 2010>에서 전쟁의 이유에 되묻는 장면에서 "예전에는 알았는데, 까먹었다"라는 대사가 자꾸만 맴도는 것이다.3. 일반으로 보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야기는 이만하고, 관객들이 기대하는 것은 "액션"이다!결과부터 말하면, 이번 <한산: 용의 출현>은 전작 <명량>보다 더 발전된 전투신들을 선보인다.전작이 "백병전"으로 처절한 느낌으로 일관되었다면, 전략과 무기의 차이가 전쟁에서 '얼마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지?'를 어김없이 보여준다.극에서 "바다 위에 성"이라고 일컫는 '학익진'의 위용부터 돌격하는 '거북선'의 모습 외에도 해류를 이용해 도리어, 꺾어서 들어가는 뛰어난 운전 실력까지 51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지루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흐뭇하다.· tmi. 1 - <명량, 2014>에서도 보듯이 "와키자카"는 이후 생존하는 데에 성공한다.· tmi. 1. 1- 근데, 이 과정에서 미역을 먹으면서 겨우 살아났기에 지금까지도 집안의 전통으로 "한산도 대첩"이 일어난 날은 꼭 미역을 먹는다고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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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크린 너머 세계 속으로… 영국] 아이는 여전히 뜀박질을 멈추지 않는다.
찰리는 시종일관 뜀박질을 멈추지 않는다. 다른 아이들처럼 여유롭게 걷는 것 대신 숨가쁘게 달려나가는 것을 택한다. 아이는 왜 달릴 수 밖에 없었을까. 열다섯 성장기 소년인만큼 운동하는 것은 무척이나 당연한 일로 보이기도 한다. 이사 오기 전, 학교에서 했다던 풋볼 대신 돈이 들지 않는 운동인 달리기를 택한 것일 수도 있다. 두 이유 모두 납득 가능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찰리에게 뜀박질은 무엇보다도 숨을 쉬기 위한 방법처럼 보인다.
찰리는 언제나 무언가에 가로막힌다. 찰리의 아버지인 레이가 데려온 여자와 아침을 함께 할 때 방문과 벽 사이에 위치한 그는 영락없이 갇힌 모습이다. 델 아저씨와 함께 처음 경주마들이 모여있는 곳에 가 일을 했을 때도 그는 트레일러와 벽 사이에 갇혀 있다. 카메라는 끊임없이 찰리를 무언가에 가두는 프레이밍을 유지한다. 그의 숨통이 막히는 상황에서는 언제나 그를 문과 벽(혹은 벽처럼 보이는 무언가) 사이에 위치시켜 가두어버린다. 하지만 달릴 때만큼은 그런 그를 가로막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소년은 가로막히지 않기 위해서, 숨을 내뱉기 위해서 뜀박질을 멈출 수 없는 것이다.
달려야 숨을 쉴 수 있는 찰리가 본디 자유롭게 달려야하는 린온피트에게 온 마음을 내다 준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을 것이다. 피트에게 자신을 투영시킨 찰리는 그를 죽음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결국 피트와 함께 길 위에 선 찰리는 달리는 대신 피트와 함께 걷는 것을 택한다. 찰리와 피트가 함께 길 위를 걸어가는 장면은 주로 아주 먼 익스트림 롱샷으로 비춰진다. 그들을 가두지 않고 자유롭게 놓아주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카메라는 그저 관망할 뿐이다. 찰리와 피트가 정말 자유로워질 수 있는지 한번 지켜보라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찰리는 피트를 위해 그와 함께 달아났다고 생각하지만. 찰리와 함께여도 피트는 전과 같이 목줄에 매여있다. 피트는 정말 숨을 쉴 수 있었을까? 여전히 목줄에 매여 달릴 수 없는 피트가 자유롭다는 생각은 찰리의 착각이었을 뿐이다. 피트 역시 자유롭기 위해 마지막까지 달리는 것을 택한다.
피트와 헤어진 후 한동안 뜀박질을 멈추었던 찰리는 마지 고모와 만나자 다시금 달리기 시작한다. 아이는 뜀박질을 다시 시작했지만 이제는 더이상 어딘가에 갇히지 않는다. 찰리가 드디어 마지 고모와 만난 그 날 밤, 찰리는 잠을 이 루지 못하고 그에게 찾아간다. 문을 두드린 아이는 문과 벽에 갇히지 않은 채 아주 손쉽게 방 안으로 들어간다. 카메라는 아이를 문과 벽 사이에 가두어 프레이밍하는 대신 그저 아이가 사라진 방문을 비추는 것을 택한다.
뜀박질을 다시 시작한 아이는 처음으로 숨을 고르고 뒤를 돌아본다. 그 전까지 아이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뒤돌아 볼 수 없었다. 뒤를 살펴 볼 겨를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많은 일을 겪고 드디어 집으로 돌아온 찰리는 악몽과도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마지 고모의 말처럼 악몽이 전부 사라지진 않겠지만 분명 나아질 것이다. 찰리가 뒤돌아볼 수 있게 된 것 처럼 말이다. 오프닝과 달리, 찰리의 뜀박질을 멀리서 바라보는 것 대신 아이의 얼굴을 보다 가까이서 담는 것을 택한 카메라 역시 그렇게 될 것임을 약속하는 것만 같다.
아이는 여전히 뜀박질을 멈추지 않지만 이제는 괜찮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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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버그> 실화의 재현과 재구성 사이에서 길을 잃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올레 tv '파본자들' <세버그> 편의 방송 내용을 재정리한 글입니다.
프랑스 파리에서 누벨바그의 스타로 활동하던 영화배우 '진 세버그(크리스틴 스튜어트)'. 그녀는 영화 촬영을 위해 미국으로 오던 비행기에서 흑인 인권 운동가 '하킴 자말(안소니 마키)'을 만난다. 하킴의 모습에 묘하게 끌린 그녀는 그를 통해 흑인 인권 운동에 자금을 기부하는 등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만, 그 때문에 FBI의 표적이 된다. 안 그래도 혁명의 분위기가 감돌던 60년대 후반에 FBI 입장에서는 진의 반정부적 행보는 눈엣가시였기 때문이다. 결국 FBI는 신입요원 '잭(잭 오코넬)'에게 진을 24시간 감시하고 더 나아가 그녀의 명예와 경력을 망가뜨릴 공작을 꾸미기 시작한다.
실존 인물이나 실화 사건을 다루는 영화는 실화의 재현이라는 과제 앞에서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다. 한정적인 러닝타임 내에서 복잡한 실제 사건을 온전히 스크린으로 옮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화를 다루는 영화는 흔히 중심 소재가 될 인물 혹은 사건의 특정 면모를 부각하고, 작가의 해석을 기반으로 세부 요소 간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데 중점을 둔다. <소셜 네트워크>와 <스티브 잡스>와 같은 작품이 대표적이다. 이 두 영화는 사실 관계에 있어서 왜곡된 지점이 있다는 지적을 받았지만, 법정 싸움과 프레젠테이션이라는 이벤트를 중심으로 마크 주커버그와 스티브 잡스라는 유명인의 덜 알려진 개인사를 임팩트 있게 재구성하여 호평받은 바 있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세버그>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기본적으로 <세버그>는 장 뤽 고다르의 영화 <네 멋대로 해라>에 출연했고, 1960년대에 적극적으로 사회운동에 참여하였으며, FBI의 감시 대상이 되어 많은 고초를 겪기도 한 영화배우 진 세버그의 다채로운 삶을 들여다보는 영화다. 문제는 영화가 묘사하는 진 세버그의 모습이 철저히 FBI라는 공권력의 피해자라는 이미지로 고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진 세버그의 첫 등장 장면부터 영화가 그려내고자 하는 진 세버그의 상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세버그의 첫 장면은 진이 오토 프레밍거 감독의 <성 잔다르크>(1957)에서 잔다르크 역을 맡아 연기하는 모습이다. 이때 영화 카메라는 십자가 쇠사슬로 결박된 채 화형을 기다리고, 불이 올라오면서 고통스러워하는 잔다르크를 계속해서 비춘다. 마치 진 세버그가 앞으로 당할 많은 고통들을 암시하는 듯이. 이에 더해 영화 카메라가 한 사람이 고통을 가감 없이 찍듯이, 그녀 역시 FBI와 언론의 카메라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고 그로 인해 큰 시련을 겪게 될 것이라는 점을 암시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그녀가 왜 사회운동에 나서게 되었는지, 흑인 인권 운동이 그녀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기에 더 편안한 삶을 뒤로한 채 고난 길을 선택했는지에 대해서 영화는 함구한다. 그저 그녀에게 사회적 병폐를 개선하려는 의지가 원래부터 있었다는 식의 묘사를 제외하면, 사회운동가로서의 진 세버그의 신념, 사상, 가치관을 탐구하는 장면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 외의 장면에서 진의 모습은 계속되는 도청과 감시로 인해 점점 피폐해지는 것의 반복에 머무른다. 그나마 도입부 남편과의 대화에서 프랑스 사회를 뒤흔들었던 68 혁명이 그녀에게도 영향을 미쳤던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가능할 따름이다.
그 대신 평면적인 이미지로 고정된 진 세버그의 빈자리는 가상의 인물인 잭 솔로몬에게 넘어간다. 어떻게 보면 진 세버그가 주인공인 영화에서 정작 세버그는 문제의 발단을 제공하는 데서 그치고, 영화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는 가상의 인물인 잭 솔로몬을 통해서 제시되는 주객이 전도되는 상황이 펼쳐지는 것이다. 실제로 당장 잭의 첫 등장 장면만 보더라도 영화 속 그가 진 세버그와는 달리 상당히 깊은 내적, 철학적 갈등을 겪게 될 것임을 쉽사리 알 수 있다.
잭은 새롭게 발령받은 FBI 사무실로 출근하기 전에 아내와 잠깐 언쟁을 벌이며 자신의 최애 만화책인 <캡틴 아메리카> 1편을 버리려는 아내를 만류한다. 잭이 캡틴 아메리카의 팬암을 알려주는 이 짧은 에피소드는 작중 그에게 주어진 선택지를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캡틴 아메리카라는 영웅은 이제 영화를 통해서도 익숙한 인물이지만, 이름대로 미국 정부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국가가 상징하는 자유라는 이념과 권리를 위해 움직이는 슈퍼히어로다. 따라서 캡틴 아메리카 만화책 에피소드는 진 세버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공권력이 한 개인을 대상으로 공작을 펼치는 작전에 투입되는 잭이 신념과 현실 사이에서 겪게 될 내적, 외적 갈등을 함축해 보여준다.
물론 진 세버그에 대한 평면적 묘사와 잭의 고민을 함께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세버그>가 50여 년 전 사건으로부터 시사점을 전달하는 것은 사실이다. FBI와 언론의 유착 관계로 인해 억지로 만들어진 스캔들이 진을 고통스럽게 하는 모습은 최근 몇 년간 뜨거운 감자였던 가짜 뉴스 이슈를 떠올리게 한다. FBI의 감청 및 감시 행위는 자연히 공권력과 개인의 관계 안에서 개인의 자유가 어느 범위까지 제한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볼 기회이기도 하다. 또 최소한 도청장치를 찾을 수는 있는 진과 달리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감시당하더라도 그 사실을 인식조차 못할 세상을 사는 입장에서 <세버그>는 경각심을 일깨우는 영화라고 할 수도 있다. 단지 가상의 인물이 이처럼 흥미로운 주제와 메시지와 더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진 세버그의 이름을 걸고도 그녀의 삶을 적절히 활용하지 못하는 괴리감은 영화의 메시지가 느껴지기는 하지만 와닿지는 않는 문제를 낳는다.
이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결국 배우 개개인의 퍼포먼스다. 실제로 가상 인물인 잭 솔로몬의 비중이 상당히 높고, 진의 신념이나 가치관에 대한 설명이나 묘사가 많이 등장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연기는 진 세버그라는 인물에 생동감을 불어넣어 준다. 칸 영화제 레드카펫에 맨발로 등장하거나 자신의 양성애 성향을 공개하는 배우 본인의 용기와 이미지를 자신을 사찰하는 정부 기관과 정부의 손을 잡고 자신을 공격하는 언론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캐릭터의 강인함에 적절히 투영한 후반부 기자회견 장면이 대표적이다.
하킴 자말 역을 맡은 앤소니 마키가 돋보이는 것도 같은 연장선상에 있다. <세버그>는 상술했듯이 인물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역사적 맥락이나 사실에 대한 언급이 그다지 많지 않은 작품이다. 이때 MCU에서 팔콘, 그리고 2대 캡틴 아메리카 역을 맡아 인종차별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왔던 안소니 마키의 이미지는 본래 영화가 해야 할 설명을 대신하는 듯 보인다. 배우의 이미지를 그대로 살린 덕분에 많지 않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하킴 자말은 흑인 인권 운동가로서 첫 등장부터 강한 임팩트를 남기고, 진의 행동과 대사에 개연성을 추가적으로 불어넣는 데 성공하기 때문이다.
사실 <세버그>와 유사한 시간대의 실화 사건을 다루는 작품은 최근 몇 년 사이 자주 접할 수 있었다. 흑인 인권운동과 베트남 전쟁 반대 시위로 다소 혼란스러웠던 미국 사회상과 그 안에서 각자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싸웠던 이들의 모습은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나 <트라이얼 오브 시카고 7>과 같은 작품에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주인공이어야 할 세버그를 단순한 피해자로 묘사할 뿐인 <세버그>는 위의 작품들과 달리 당시 사회상에 대한 통찰이나 비판, 진 세버그에 대한 재해석 대신 그저 배우들의 열연만 기억에 남는 실망감을 선사하고 만다.
P(Poor 형편없는)
재현에는 성공했으나 재구성에는 실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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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썬더볼츠*>: 공허한 우울의 미로에서 널 구할 결심
어벤저스는 아이언맨으로부터 시작해 아이언맨으로 끝났다. 남아있는 이들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시점이지만 여전히 누군가는 어벤저스와 타노스의 핑거 스냅으로 인한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그 누구든 어벤저스와 타노스의 핑거 스냅에서 벗어나야 할 때다.
CIA 국장으로 있는 발렌티나 알레그라 드 폰테인의 한마디가 인상적이다.
”어벤저스는 안 옵니다“
맞는 말이다. 너무나도 당연하지만 이 영화는 어벤저스에 대한 영화가 결코 아니다. 어벤저스와 옷깃 한 번 스쳐봤을까 싶은 나머지 사람들의 이야기다. 엔드게임 이후 여러 시리즈와 영화를 개봉하며 빌드업을 쌓아온 마블의 첫 완성작이라고 볼 수 있는 썬더볼츠. 이들의 이야기는 무엇으로 시작될까.
공허함이라는 미로에 빠진 기니피그
IMDB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짙게 깔려있는 공허함이라는 감정에서 시작한다. 공허함은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날 괴롭히고 있는지 분명하지 않다. 옐레나가 느끼는 공허함도 그러하다.
아이언 슈트와 아버지 하워드 스타크와의 독특한 부자 관계를 가진 아이언맨, 페기 카터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가슴속 깊이 지켰던 캡틴 아메리카, 아버지와 어머니의 죽음 그리고 로키와 얽힌 사연을 가진 토르까지. 어쩌면 이들이 겪었던 것도 일종의 공허함의 범위에 들어갈지도 모르겠다. 어벤저스도 이러한 인간적인 문제들을 겪고 극복하며 진짜 히어로로 각성했다.옐레나를 포함해 이번 썬더볼츠의 등장인물들도 마찬가지다. 다만, 차이점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게 이 영화의 포인트다. 어벤저스는 각자 지닌 문제를 스스로 극복했었다. 하지만, 썬더볼츠의 구성원들은 대단한 기술 능력을 얻거나 새로운 깨달음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닌 인간적인 방식으로 상실과 결핍 그리고 공허함에 직면하며 극복하고자 노력한다.
각자의 감정과 이야기를 공유하고 함께 위로한다. 옐레나를 선두로 썬더볼츠 인원들은 밥의 깊은 내면에 들어가 그를 그의 우울의 방에서 꺼내고자 애쓴다. 힘을 내야 해 따위의 위로가 아니다. 그 사람의 내면 깊은 곳을 살핀다. 거기서 같이 싸우고 같이 상처 입으며 우울의 미로에서 다 같이 나오려고 한다.
IMDB초인적인 힘을 가진 영웅들이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각자 스스로 해결하기 힘든 문제를 지니고 있고, 투덜거리면서 때로는 우울하다고 이야기하는 형 누나들이 두 팔 걷어 도와주는 모습이랄까. 나도 그랬었지, 너도 그랬었구나 하며 도와주는 모습에 가까워 보였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가 줬던 감동과는 달리 좀 더 와닿는 감동이 아닐까 확신한다. 특히, 썬더볼츠가 우울의 미로와 방을 도장 깨기 하는 장면은 명장면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인상적이다.
위는 영화 내적으로 바라봤을 때의 이야기다. 사실 공허함이라는 것을 주인공들만 느끼진 않을 터다. 그 주체를 마블과 마블 팬들로 바꿔서 이야기하는 것도 어색하진 않다. 마블은 아이언맨부터 시작해 어벤저스 엔드게임까지 다시없을 전성기를 누렸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 지금의 썬더볼츠 까지, 스파이더맨을 제외하면 마블은 매 작품에서 혹평을 받았다.
관객 기대치에 못 미치는 영화로 하향곡선을 5년 이상 타왔다. 얼마 전 개봉한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 역시 큰 반향을 일으키진 못했으니까. 마블 역시 과거의 영광과 비교되는 현재 위치에서 알 수 없는 공허함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이런저런 다양한 시도는 하는데, 팬들이 좋아하지 않으니 말이다.마블뿐만 아니라 마블 팬들도 나름 공허하지 않을까. 높아진 진입장벽은 늘 빠지지 않는 주제가 되었다. 이로 인해 일반 팬들에 대한 마블의 외연 확장은커녕 팬층 자체가 얇아졌다 과하게 해석하면, 지난 10여 년 동안 일 년에 한두 번은 마블 영화를 보기 위해 즐거운 마음으로 극장을 찾았을 관객들이 현재는 그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니까.
오죽하면, 속는 셈 치고 또 본다는 말이 나올까. 더 이상 새로운 추억거리가 쌓이지 않으니 이건 이거대로 기분이 상하는 일이다. 이런 팬심을 아는지, 썬더볼츠의 엔딩 크레딧에선 셀프디스와도 같은 내용의 장면들을 넣어놨다.(물론, 극의 내용에 따른 극안에서의 반응이기도 하다.) 이 작품의 완성도와 평가를 제쳐두고 마블 팬들의 마음이 어떤지 감독은 공감하고 있다는 것 같기도 하다.IMDB
이런 측면에서, 썬더볼츠는 마블과 팬들에게 은유적인 영화다. 이를 드러내는 또 다른 장면이 있다. 옐레나와 기니피그 장면이다. 미로에 갇힌 기니피그는 등장인물들을 의미하기도 하면서 앞으로의 이야기에 대한 복선이자 마블과 마블 팬들까지 투영한 장치로 보였다.
썬더볼츠 주인공 각자가 결핍과 공허라는 미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마블 역시 과거의 영광을 되찾고자 발버둥 치고 있지만 여전히 같은 자리를 멤돌 뿐이며. 새로운 마블을 관람한 팬들의 마음이 달라지지 않고 있는 것들을 의미하는 것처럼 말이다.하지만, 옐레나에 의해 실험실 미로에 갇힌 기니피그가 구출되는 장면에서는 소박한 희망도 엿볼 수 있었다. 옐레나를 선두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 썬더볼츠가 결성되는 모습을 통해 이 영화, 썬더볼츠가 어벤저스라는 과거의 영광이라는 미로에서 마블과 마블 팬들을 꺼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감독의 소박한 희망 말이다.
마블이 지금까지 실험해온 엔드게임 이후의 여러 영화들처럼 그저 실험적인 시리즈로만은 남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부분이기도 했다. 물론, 미로에서 성공적으로 탈출했는지 아닌지는 온전히 관객들이 평가하겠지만.마블, 부활했나?
아무리 좋은 영화라고 해도. 보는 사람에 따라 아쉬운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다. 썬더볼츠도 마찬가지다. 지속적으로 이야기가 나오지만, 높아진 진입장벽은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앞으로도 계속 심해질 거다. 이제 마블 영화는 제로베이스에서 시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몇몇 캐릭터의 쓰임이 아쉽다. 태스크마스터의 죽음이 대표적이다. <블랙 위도우>편에 처음 등장하며 나타샤 로마노프와 대등한 수준으로 그려졌었는데, 극 초반에 너무 쉽게 사망한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이 캐릭터를 등장시킨 이유를 잘 모르겠다.IMDB다음은 레드 가디언이다. 시종일관 영화의 분위기 메이커로 그려진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로 따지면 드렉스와 비슷한 인물이다. 힘도 세고, 나름대로 개그를 시전하는 모습까지. 하지만, 썬더볼츠에서 계속 ”위 아 썬더볼츠“ 라고 힘주어 말하는 역할과 일부 코믹한 내용을 빼면 역시 어떤 맥락에서 이 캐릭터를 이해해야 할지 갸우뚱하게 된다. 그저 재미만 있으면 되는 건가? 아니면, <블랙 위도우>에 등장했고 거기서 옐레나와의 관계는 다 설명했으니까 이 캐릭터는 이 정도로 사용해도 된다는 건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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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트도 마찬가지다. 어찌 보면 태스크마스터 말고 고스트가 극 초반부에 사망했다고 한들, 영화의 큰 흐름이 달라지지 않았을 것 같다. 태스크마스터 만큼 고스트의 역할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는 답변을 내놓기가 어려운 애매한 캐릭터라고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센트리. 밥이 센트리로 잘못 각성하는 부분에서 센트리 능력에 대한 설명이 부실했다.
검은색과 어둠을 특징으로 하는 센트리라서 그런 능력이 나온 것이라는 추론 정도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이 정도로 퉁치려고 한 거라면 감독의 섬세함이 아쉬워지는 부분이다. 그리고 밥의 가정불화 문제가 타노스 이상의 힘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센트리로 각성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는 것도 생각해 보면 이게 맞나 싶다.
이런 아쉬움이 있긴 하지만 소소하게 재미있는 장면들도 많았다.
특히, 여러 영화에 대한 오마주를 잘 활용했다고 생각한다.극 초반 옐레나의 실험실 액션 장면은 누구나 알 수 있듯 올드보이의 장도리씬을 오마주 한 것으로 보인다. 마블에서 올드보이를 오마주 했다니. 가슴이 웅장해진다. 버키가 오토바이를 타고 유도탄득 한 손에 들고 질주하는 장면은 터미네이터를 떠올리게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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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버키의 멋진 모습을 볼 수 있어서 흡족했다. 그리고 스타크 타워를 향해 운전하는 버키에게 레드 가디언이 계획이 있냐고 묻는 순간에 타고 있는 차량을 냅다 건물 입구로 박아버리는 장면은 다크나이트 조커의 스쿨버스 장면이 떠오르기도 했다.
짭-캡틴 아메리카 존 워커 전투씬의 한 장면은 스티브 로저스와 윈터 솔저가 도심에서 싸우는 장면을 오마주 했고. 센트리가 총알을 막는 장면에서는 매트릭스가 떠오르기도 했다. 총알 멈추는 장면이야 많이 재생산된 거라서 이제는 오마주라고 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지만. 스타크 타워에서 엘리에베이터로 움직이는 장면은 어벤저스 모습을 상기시키기도 했다.
이상 내용을 종합해 보면, 이번 작품만으로는 과거의 추억과 영광을 원하는 마블을 구하기엔 힘에 부쳐 보인다. 그리고 마블 팬들을 새로운 챕터로 확실하게 이끌어 갈지도 확신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블이 조금은 정신 차린 건 아닐까 하는 희망을 느낄 수 있었다.
더불어, 썬더볼츠이자 새로운 어벤저스가 어떤 이야기를 그려 나갈지 기대되는 작품이긴 하다. 아쉬운 부분이 있지만, 기존 히어로 영화답지 않은 서사와 연출이 돋보인 영화였다. 속 시원한 재미는 없을지는 몰라도 깨알 재미는 충분하니 극장에서 보기에는 충분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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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망이란 무엇인가
삶은 항상 고통스럽다. 하지만 우리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언젠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희망이다.
인생이 버려지고 밟히고 피를 흘려도, 믿음을 덤덤하게 손에 쥐고 있는 사람에게 희망은 온다.
희망이 온다는 믿음, 그것이 희망이다.
<쇼생크 탈출>은 침대 맡에 걸어두고 싶은 바로 그런 영화다. 언제나 다시 봐도 질리지 않는, 보는 사람에게 희망을 건네주는 작품이니까. 담담한 무기징역 수감자 레드(모건 프리먼)의 목소리로 읽어주는 앤디 듀프레인(팀 로빈슨)은 절망이 가득한 쇼생크 감옥에 어울리지 않는 한줄기 희망이다. 그가 짙은 회색빛 감옥에 덧칠해 나가는 희망이 서린 일상들은 자신뿐 아니라 쇼생크 모두에게 작은 빛을 전해준다. 그 빛은 이 영화를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비친다. 앤디가 탈옥 후에 갔다는 지와타네오가 어딘지 나는 아직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곳을 희망한다. 그곳은 희망이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절망과 희망은 모두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쇼생크 탈출>의 주인공 앤디 듀프레인이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모습은 누구에게나 빛이 난다. 하지만 때론 절망은 희망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서, 무엇이 절망이고 무엇이 희망인지 알기가 쉽지 않다. 이 영화는 희망의 두 얼굴을 보여주고 등장하는 숫자에 절망과 희망에 대한 상징을 담아서, 우리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아가도록 알려준다.
[아래부터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 번의 총알과 절망, 희망의 다른 얼굴
<쇼생크 탈출>에는 총알을 사용하는 세 번의 장면이 나온다. 총알은 곧 절망이다.
첫 번째는 앤디가 부인과 정남(情男)을 죽였다고 하는 총알이다. 하지만 장전하는 모습만 나올 뿐, 앤디가 그들을 죽였는지는 정확히 나오지 않는다. 당시 앤디는 술을 마시고 취한 상태였고, 강에 버렸다고 하는 총도 나오지 않아 증거인멸로 죄가 가중되어 유죄가 된다. 앤디의 죄에 대한 이 모호한 설정은 영화 클라이맥스까지 계속된다. 앤디는 무죄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게 정말인지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한다. 사실 그에게서는 무죄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모습보단, 모든 걸 체념한 무기력한 사람만이 보인다. 쇼생크의 첫날 다른 죄수들은 억울하다며 울고 난리 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앤디는 억울해하지 않는다.
앤디는 자책을 하고 있었다. 설령 자신의 기억대로 부인을 죽이지 않았다고 해도, 부인이 바람피우다 죽은 것은 자신이 부인에게 외로움을 느끼게 해서였다고. 앤디는 부인과 정남을 죽인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왔지만, 앤디는 스스로를 죄책감의 감옥에 가둔 셈이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어떤 일이 생기면 사람은 스스로를 절망의 감옥에 가둔다. 마음속에 있는 절망의 감옥에서 나갈 수 있는 길은 용서다. 자신을 묶을 수 있는 것은 자신뿐이다. 그것을 알면, 자신을 묶었던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다.
두 번째 총알은 앤디의 무죄를 증언할 증인을 죽인 총알이다. 모든 것이 잘 풀릴 수도 있다고 확신한 순간, 그 총알은 앤디를 가장 깊은 절망에 빠트린다. 살다 보면 '아, 이제 희망이 이루어지겠구나'와 같은 날이 온다. 그러나 희망의 분위기가 느껴진다고 해서 그것이 완전한 희망의 결과가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사람은 종종 희망에 차올라서 모든 것을 망가트린다. 중요한 것은 희망이 오든 절망이 오든 쉽게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희망은 절망의 얼굴로 바뀐다.
세 번째 총알은 교도소장의 권총 자살이다. 자신의 모든 비리가 밝혀졌을 때, 그리고 자신이 빈털터리가 되었다는 걸 알았을 때 교도소장은 절망의 끝에서 총알을 선택했다. 모든 죄수들에게 끝없는 절망을 주며 군림하던 그가, 사실은 자신에게 오는 절망은 감당할 힘이 없었던 것이다. 자신이 지금까지 만들고 뿌려놓은 절망의 씨앗들이, 모두 자신에게 돌아오는 기분이었을 테니. 진짜 절망을 겪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작은 절망도 감당하지 못한다. 그리고, 남에게 준 절망은 언젠가 자신에게 돌아온다.
두 개의 밧줄과 구원, 절망에 길들여진다는 것
<쇼생크 탈출>에는 두 개의 밧줄이 있다. 밧줄은 구원이다.
처음 밧줄은 쇼생크에서 가장 나이 많은 브룩스의 구원을 도와주는 밧줄이다. 브룩스는 쇼생크에서 꼬부랑 노인이 될 때까지 갇혀있어서, 쇼생크가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감옥에 길들여진' 죄수였다. 영화에 나오는 쇼생크의 가장 무서운 점은 폭력적인 간수도 비리투성이의 교도소장도 아닌, 그 절망에 '길들여진다는 것'이다. 절망 안에 오래 있다 보면 원래의 자신이 어떤 가능성을 지닌 사람이었는지 잊어버린 채 명령에 따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우리가 기르는 개에게 목줄을 채워 그 1미터의 절망으로 '길들이는'것처럼.
브룩스는 가석방을 받았지만 쇼생크에서 나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 지 알고 있었다. 동료에게 칼부림을 해서라도 절망 속에서 살고 싶어 했다. 절망에 길들여진 사람은 절망이 곧 희망이다. 세상으로 내던져진 브룩스는 희망과 자유라는 절망에 빠지고, 그 구원의 길로 밧줄로 목을 매는 것을 선택한다. 그는 자살함으로써 희망이라는 이름의 절망으로부터 스스로를 구원한다.
두 번째 밧줄은 앤디의 밧줄이다. 앤디 역시 그 절망에서 구원해 줄 도구로 밧줄을 손에 든다. 그러나 앤디는 영화에서 내내 나오듯 쉽게 절망에 길들여지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강한 사람이었고, 결국 절망에서 구원하는 길은 탈옥이라 마음먹는다. 밧줄은 탈옥하기 위한 최소한의 도구였다. 사실 구멍을 파놓은 지는 오래되었고, 단지 탈옥을 하기 위한 명분이 필요했을 뿐이다. 스스로를 절망에서 구원하는 길은 마음먹기가 가장 힘든 법이다.
하지만 절망에 있을 때 언제 올지 모르는 희망을 꿈꾸며 절망에 저항하기보다는, 절망에 순응하고 길들여지는 게 심리적으로 안정이 된다. 현실에 대한 부정과 저항은 고통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지옥에 있으면 천국을 꿈꾸기보단 지옥에 적응하는 게 낫다고 여길수 있다. 그러나 절망에 길들여진다는 것은 앞으로 다가올지도 모를 희망을 절망으로 바꾸는 결과를 가져온다. 길들여지느냐, 길들여지지 않느냐. 그 마음가짐이 희망을 절망으로 바꾸기도 하고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기도 한다. 영화에서 나오는 밧줄이 '절망'으로 구원하느냐 '희망'으로 구원하느냐의 두 얼굴을 가진 것처럼.
하나의 도구와 증거, 희망을 대하는 태도
<쇼생크 탈출>에는 단 하나의 탈옥도구와 증거가 나온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탈출하는 단 하나의 방법은 절망과 희망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앤디가 유죄를 선고받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증거인멸이었다. 앤디가 강에 버렸다는 총이 발견되지 않아서. 총알을 발사하면 총알에 고유의 흔적이 남는다. 그 흔적으로 사용된 총알과 비교할 수 있어 정말 앤디가 쏜 것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있다. 하지만 앤디는 술에 취해 아무렇게나 총을 버리는 바람에 자신의 무죄를 입증해 줄 증거를 없애버린 셈이었고, 총이 발견되지 않자 증거인멸로 더 형을 무겁게 받는 원인이 되었다.
사람이 절망에 빠졌을 때, 그 절망에 취해 이성적이지 않은 행동을 한다. 절망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자신을 구원해주러 오는 손길을 스스로 내치고 더욱 깊은 물속으로 빠져들어가는 것이다. 작은 실수나 작은 잘못으로 끝날 수 있던 것을 스스로가 더 키워간다. 그래서 절망에 빠졌을 때는 자포자기의 행동을 하기보단, 희망을 알아볼 수 있도록 정신을 차리고 있는 게 중요하다. 절망에 빠졌다고 느낀 그 순간이 진짜 절망이 아니다. 절망이라고 여기고 모든 것을 포기하는 순간이 진짜 절망이다. 희망도 마찬가지다. 희망이 보인다고 섣부르게 판단하고 기쁨에 겨워하는 순간 희망은 오기도 전에 신기루처럼 사라질 수도 있다. 순간적인 감정의 흔들림으로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하지 않아야 한다.
앤디는 쇼생크에서 사는 동안 찾아온 수많은 절망에서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딱 한번, 무죄를 입증할 수도 있겠다는 희망이 손에 잡혔다고 생각했을 때 그는 실수를 저질렀다. 교도소장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그건 자신의 무죄를 증명할 마지막 기회를 놓치게 되어, 희망을 더한 절망으로 빠트리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더군다나 그 행동으로 탈옥용 굴을 판 것을 들킬 뻔했다.
앤디는 희망으로 가는 길에서 다시는 실수하지 않았다. 철저한 계획을 세워서 흔들리지 않고 나아갔다. 그리고 이번에는 자신이 탈옥했다는 증거를 경찰들이 발견할 수 있도록 하는 걸 잊지 않았다. 그래야 자신이 투고한 '쇼생크의 비리'에 진실함이 더해질 테니까. 희망이 완벽한 현실이 될 때까지 묵묵히 계획을 실행했다. 우리도 삶에서 그러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 희망이 완벽한 현실이 될 때까지 섣불리 샴페인을 터트리지 않는 것 말이다.
실재하지 않는 여성, 희망의 모습
<쇼생크 탈출> 에는 여성이 실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곧 희망의 모습이다.
앤디의 부인은 사진조차 나오지 않는다. 또 가석방 심사원이나 숙소 관리인으로 여성이 나오지만 존재감이 없다. 하지만 '리타 헤이워드'는 다르다. 리타 헤이워드는 쇼생크 감옥 안 극장에서 매번 틀어주는 영화 <길다>의 히로인이다. 레드를 비롯한 수감자들은 리타 헤이워드가 머리를 휘날리며 등장하는 컷에 엄청난 환호를 한다. 하지만 그녀는 죄수들에겐 실제가 아닌 허상이다. 그러기에 쇼생크 수감자들에게 리타는 희망이다. 이 영화의 원작인 스티븐 킹의 소설 제목도 원래는 <리타 헤이워드와 쇼생크에서의 구원(Rita Hayworth and Shawshank Redemption)>이다.
물론 겉으로 보면 리타 헤이워드라는 허상은 감옥에서 외롭게 지내는 수감자들에게 조금이나마 허락되는 여흥에 불과하다. 그 작고 하찮은 여흥이 그나마 수감자들을 웃게 만든다. 하지만 그녀의 '포스터에 숨겨진 구멍'은 구원을 주는 희망의 길이었다. 교도소장이 포스터를 손가락으로 찌르자, 있을 리가 없는 포스터 속으로 팔이 빨려 들어가 버린다. 그리고 그녀는 교도소장에게 자신의 비밀을 훤히 드러내 보인다.
하지만 그녀는 단순한 성적 비유로의 여성이 아니라, 앤디를 지켜주고 구원한 여신인 셈이다. 물론 포스터가 계속 바뀌어 나중에는 리타 헤이워드가 아니라 라켈 웰치지만, 그건 중요치 않다. 비현실적인 구멍, 구원, 그리고 희망과 카타르시스는 모두 그 안에 있다.
희망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단지 믿음으로써만 존재한다. 어쩌면 실제로 없을 수도 있다. 어떤 이들은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없다고 여긴다. 하지만 리타 헤이워드는 희망이 있다고 믿는 믿음에서 희망이 시작한다고 말해준다. 희망은 눈에 보이지 않는 희망을 믿지 않는 자에게 찾아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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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옥에 성공한 앤디는, 친구 레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한다. 좋은 것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고. 쇼생크 수감자들은 '희망은 위험한 것'이라며 경계한다. 그런 희망이 더 절망에 빠지게 하고 괴롭게 만들다가 죽어가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런 레드에게, 앤디는 희망을 말한다. 레드도 절망에 길들여져 절망이 희망이 되었기에, 자살이라는 절망의 여행을 희망처럼 꿈꿀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앤디가 희망에 대한 믿음을 레드에게 물들였기 때문이다. 앤디는 모차르트의 오페라를 가슴에 품고 있었다. 가슴속에 간직한 희망은 누구도 뺏어갈 수 없다.
삶에서 절망을 선택할 것인가, 희망을 선택할 것인가는 나에게 달렸다. 둘은 같은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끝없이 절망과 마주하지만 희망을 가슴에 품고 있다면 앤디처럼, 레드처럼 입가에 미소를 잃지 않고 살아갈 수가 있다.
좋은 것은 절대 사라지지 않으니까. 레드가 국경을 넘으며, 간직했던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나는 문득 내가 아이처럼 흥분해 가만히 앉아있지도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건 끝을 알 수 없는 긴 여행을 시작하는 자유인만이 느낄 수 있는 흥분이리라.
나는 무사히 국경을 넘을 수 있길 희망한다.
나는 내 친구를 만나 악수하기를 희망한다.
나는 태평양이 꿈에서 본 것처럼 푸르기를 희망한다.
나는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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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간의 의미, <곤돌라>
영화 <곤돌라> (바이트 헬머, 2025)의 배경이 되는 곳은 한 산골이다. 이곳에서 곤돌라는 사람, 가축, 물건 등 다양한 것을 실어 나르며 마을과 마을 사이를 연결한다. 이곳의 삶에서 떼어 놓을 수 없는 중요한 연결고리인 곤돌라는 나아가 곤돌라의 승무원인 ‘이바’와 ‘니노’의 사이를 연결한다. 두 사람은 곤돌라의 위쪽 정류장의 체스판으로 함께 체스를 둔다. 곤돌라가 운행을 해야 위쪽 정류장으로 이동해 말을 옮길 수가 있고, 곤돌라가 운행을 하면 두 정류장의 중간 지점에서 두 대의 곤돌라가 교차하며 두 사람이 마주치게 된다. 그리고 한 사람을 태우고 다른 한 사람을 엇갈려 지나가던 영역은 어느새 두 사람이 함께하는 데이트 장소가 된다.
이러한 변화를 싫어하는 사람은 바로 곤돌라를 소유한 남성이다. 그는 자신의 곤돌라가 이윤의 창출 수단이 아닌 연결과 연대의 장이 되는 것에, 또 자신의 고백을 거절한 이바가 니노와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는 것에 불만을 품는다. 하지만 오해를 넘어서며 단단해진 이바와 니노는 그의 사적인 생산수단인 곤돌라를 탈환하여 주민들을 위한 공공재로 탈바꿈하는 데에 성공하고, 그가 곤돌라로 축적한 이익을 바로 그 곤돌라 위에서 흩뿌린다. 그리고 곤돌라의 높고 얇은 줄 위에서 뛰어내려 함께 단단한 땅에 발을 붙이고 걷는다.
영화에 대한 인상은 간단하게 ‘귀엽다’는 말로 축약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치 만화영화를 보는 듯한 연출이 이러한 인상을 만든다. 상황에 맞는 소품과 코스튬이 어디선가 튀어나오고, 거대한 장치가 곤돌라 레일에 뚝딱 설치된다. 인물들은 말 대신 표정이나 몸짓, 비명, 웃음 등을 활용해 감정을 표현한다. 이러한 연출은 현실에서 조금 붕 떠 있는 듯한 동시에 포근한 느낌을 주며 작품 전체의 톤을 잡는다.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 덕에 다소 허무맹랑한 장면들도 ‘영화적 허용’의 범주 안에 들어가며 웃음과 감동의 요소가 되어 준다.
대사 없이 표현되는 두 사람의 감정과 관계 변화, 그리고 영화의 전개에 따라 변화하는 곤돌라의 의미 등을 생각하며 보면 더욱 재미있는 작품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영화 <곤돌라> 시사회에 참석 후에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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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평남녀 리뷰 - 내 인생은 언제쯤 평평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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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해당 영상은 배급사 '씨네소파'의 저작권이용 허락을 받아 제작된 영상입니다 :)?
작품 [평평남녀]는 28일에 개봉합니다
바쁜 회사일로 연애는 못하고
기막힌 아이디어는 까이기 일수
승진은 남의 이야기
열정만렙 33살 만년대리! 우리의 영블리 영진
어느 날, 능력은 없지만 빽은 있는 낙하산 준설이 그녀 앞에 떨어지고
하루도 평평할 날 없는 영진의 고달픈 일상이 시작되는데…
일도 사랑도 꼬여버린
할많하않 오피스 브이로그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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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단 보다 보면 나도 모르게 몰입하고 있는 거침없는 한 사내의 사건![1탄/결말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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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즈니+ <조명가게> 메인 예고편
어두운 골목 끝, 삶과 죽음의 경계 다양한 사람들이 오는 곳, [조명가게] 12월 4일 디즈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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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썬더 포스>
[2021년 4월 9일 넷플릭스 공개]
슈퍼빌런이 넘쳐난다. 싹 쓸어버리자! 어린 시절, 악당들을 혼내주자던 두 친구.
그 중 한 명이 초능력자가 되는 방법을 개발하고, 오랜만에 재회한 그들은 얼떨결에 한 팀이 된다. 도시를 지키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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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침내, 성공한 이순신과 거북선!
- 미디어 매체에서 "이순신"의 모든 해전을 "대첩"으로 표현하나, 엄밀히 말하면 "한산도 대첩"만이 유일하다. - "김시민 - 진주대첩"과 "권율 -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에 속하며, 국내 역사 전체를 들여다보면 "을지문덕 - 살수대첩"과 "강감찬 - 귀주대첩"과 함께 "한국사 3대 대첩"에 속한다.많은 전투들이 있었음에도 유독, "한산도 대첩"이라는 단어가 붙은 이유는 뭘까?그에게 "패배"라는 단어가 없지만 "거북선"과 "학익진", 그리고 "승리"로 "이순신"이라는 브랜드가 정립되었기 떄문이다.전작 <명량, 2014>이 거둔 총 국내 관객 수는 1761만명은 역대 국내 박스오피스 1위에 해당된다.그나마, 이에 육박한 성적을 거둔 영화가 <극한직업, 2019>의 1626만명이었으니 새삼 얼마나 대단한 성적인가?아무튼, 이런 흥행을 거뒀으니 당연히 속편 제작에 대한 소식이 들려왔지만 좀체 들리지 않았다. - 그도 그럴 것이 "이순신"을 맡았던 최민식 배우가 하차했고, 무엇보다 영화의 흥행과 달리 평가가 좋지 않았다.1. 전작의 피드백을 수용했을까?전작에 대한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다!흥행도 흥행이었지만, 그만큼의 반대급부로 쏟아진 악평들은 "시리즈"의 가능성을 불확실하게 만들었다.물론, "명량해전"이 심심했던 전투라는 말이 아니다. - "백의종군"으로 물러났던 "이순신"이 다시 복직하나, 이전 "칠천량 전투"에서 "거북선"을 비롯해 수군 전력의 90%를 잃은 상태(13척)에서 133척의 왜선을 격파하는 이야기는 오히려, 개연성을 지적당할 "언더독"의 부활 스토리이다!이에 <명량>은 이순신의 피폐한 정신 상태를 보여줘 설득력을 더하지만, "충(忠)"의 강조로 소위, 국뽕과 신파로 승화되어 관객들의 분노를 일으킨다.<명량>의 문제를 알기에 "김한민 감독"은 이번 <한산>에 오면서, 관객들이 기피하는 국뽕과 신파를 덜어내었다.하지만, 이러면서 또 하나의 문제에 직면하니 그건 두께이다.표면적으로 이번 <한산: 용의 출현>은 "이순신"과 "와키자카"의 대결이지만, "이순신 - 원균"의 갈등을 비롯해 "와키자카 - 가토"의 갈등, 거북선의 설계도에 따른 첩보전, 그리고 의병들의 육지전까지 많은 캐릭터들이 등장한다.이 모든 것을 챙기기에는 2시간 10분은 너무나도 짧지만, "항왜군사"로 등장하는 "준사"와 '의(義)와 불의(不義)의 싸움이지' 대사는 단연, 돋보인다.2. 일본과 조선의 다른 시작점먼저, 일본의 경우. '전국시대'를 알고 가자!각 지역의 성주들이 자처해 전쟁으로 혼란했던 시기로 무사, 일명 "사무라이"들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자신들의 주군을 바꿨다는 것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FA"로 팀을 이적했다는 개념)그런 점에서 "와키자카"가 '자신의 공적을 양보한다'라는 말에 부하들이 발끈하는 장면은 그들이 '전쟁을 어떻게 보여주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순간이다.그렇다면, 조선은 어떤가? - 시간을 거꾸로 돌려본다면, "고조선"의 "단군왕검"부터 국가의 이름만 다른 채 "왕정"은 이어갔다.특히, "제정일치"고 "선민사상", 그리고 "탄생설화" 등은 신성불가침한 이미지를 만들었다.물론, 이외에도 다양한 정책들로 중앙 집권화, 왕권을 유지해나갔다. (예시로, "고려"의 "왕건"은 호족들에게 자신의 성씨를 부여하거나 결혼을 했다)그런 가운데 "인의예지신", 그리고 "충효"는 자연스레 강조되었으니 조선과 일본, 이들이 내세우는 명분이 다를 수밖에 없다.그렇기에 "준사"의 모습에 <고지전, 2010>에서 전쟁의 이유에 되묻는 장면에서 "예전에는 알았는데, 까먹었다"라는 대사가 자꾸만 맴도는 것이다.3. 일반으로 보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야기는 이만하고, 관객들이 기대하는 것은 "액션"이다!결과부터 말하면, 이번 <한산: 용의 출현>은 전작 <명량>보다 더 발전된 전투신들을 선보인다.전작이 "백병전"으로 처절한 느낌으로 일관되었다면, 전략과 무기의 차이가 전쟁에서 '얼마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지?'를 어김없이 보여준다.극에서 "바다 위에 성"이라고 일컫는 '학익진'의 위용부터 돌격하는 '거북선'의 모습 외에도 해류를 이용해 도리어, 꺾어서 들어가는 뛰어난 운전 실력까지 51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지루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흐뭇하다.· tmi. 1 - <명량, 2014>에서도 보듯이 "와키자카"는 이후 생존하는 데에 성공한다.· tmi. 1. 1- 근데, 이 과정에서 미역을 먹으면서 겨우 살아났기에 지금까지도 집안의 전통으로 "한산도 대첩"이 일어난 날은 꼭 미역을 먹는다고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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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크린 너머 세계 속으로… 영국] 아이는 여전히 뜀박질을 멈추지 않는다.
찰리는 시종일관 뜀박질을 멈추지 않는다. 다른 아이들처럼 여유롭게 걷는 것 대신 숨가쁘게 달려나가는 것을 택한다. 아이는 왜 달릴 수 밖에 없었을까. 열다섯 성장기 소년인만큼 운동하는 것은 무척이나 당연한 일로 보이기도 한다. 이사 오기 전, 학교에서 했다던 풋볼 대신 돈이 들지 않는 운동인 달리기를 택한 것일 수도 있다. 두 이유 모두 납득 가능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찰리에게 뜀박질은 무엇보다도 숨을 쉬기 위한 방법처럼 보인다.
찰리는 언제나 무언가에 가로막힌다. 찰리의 아버지인 레이가 데려온 여자와 아침을 함께 할 때 방문과 벽 사이에 위치한 그는 영락없이 갇힌 모습이다. 델 아저씨와 함께 처음 경주마들이 모여있는 곳에 가 일을 했을 때도 그는 트레일러와 벽 사이에 갇혀 있다. 카메라는 끊임없이 찰리를 무언가에 가두는 프레이밍을 유지한다. 그의 숨통이 막히는 상황에서는 언제나 그를 문과 벽(혹은 벽처럼 보이는 무언가) 사이에 위치시켜 가두어버린다. 하지만 달릴 때만큼은 그런 그를 가로막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소년은 가로막히지 않기 위해서, 숨을 내뱉기 위해서 뜀박질을 멈출 수 없는 것이다.
달려야 숨을 쉴 수 있는 찰리가 본디 자유롭게 달려야하는 린온피트에게 온 마음을 내다 준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을 것이다. 피트에게 자신을 투영시킨 찰리는 그를 죽음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결국 피트와 함께 길 위에 선 찰리는 달리는 대신 피트와 함께 걷는 것을 택한다. 찰리와 피트가 함께 길 위를 걸어가는 장면은 주로 아주 먼 익스트림 롱샷으로 비춰진다. 그들을 가두지 않고 자유롭게 놓아주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카메라는 그저 관망할 뿐이다. 찰리와 피트가 정말 자유로워질 수 있는지 한번 지켜보라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찰리는 피트를 위해 그와 함께 달아났다고 생각하지만. 찰리와 함께여도 피트는 전과 같이 목줄에 매여있다. 피트는 정말 숨을 쉴 수 있었을까? 여전히 목줄에 매여 달릴 수 없는 피트가 자유롭다는 생각은 찰리의 착각이었을 뿐이다. 피트 역시 자유롭기 위해 마지막까지 달리는 것을 택한다.
피트와 헤어진 후 한동안 뜀박질을 멈추었던 찰리는 마지 고모와 만나자 다시금 달리기 시작한다. 아이는 뜀박질을 다시 시작했지만 이제는 더이상 어딘가에 갇히지 않는다. 찰리가 드디어 마지 고모와 만난 그 날 밤, 찰리는 잠을 이 루지 못하고 그에게 찾아간다. 문을 두드린 아이는 문과 벽에 갇히지 않은 채 아주 손쉽게 방 안으로 들어간다. 카메라는 아이를 문과 벽 사이에 가두어 프레이밍하는 대신 그저 아이가 사라진 방문을 비추는 것을 택한다.
뜀박질을 다시 시작한 아이는 처음으로 숨을 고르고 뒤를 돌아본다. 그 전까지 아이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뒤돌아 볼 수 없었다. 뒤를 살펴 볼 겨를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많은 일을 겪고 드디어 집으로 돌아온 찰리는 악몽과도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마지 고모의 말처럼 악몽이 전부 사라지진 않겠지만 분명 나아질 것이다. 찰리가 뒤돌아볼 수 있게 된 것 처럼 말이다. 오프닝과 달리, 찰리의 뜀박질을 멀리서 바라보는 것 대신 아이의 얼굴을 보다 가까이서 담는 것을 택한 카메라 역시 그렇게 될 것임을 약속하는 것만 같다.
아이는 여전히 뜀박질을 멈추지 않지만 이제는 괜찮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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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버그> 실화의 재현과 재구성 사이에서 길을 잃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올레 tv '파본자들' <세버그> 편의 방송 내용을 재정리한 글입니다.
프랑스 파리에서 누벨바그의 스타로 활동하던 영화배우 '진 세버그(크리스틴 스튜어트)'. 그녀는 영화 촬영을 위해 미국으로 오던 비행기에서 흑인 인권 운동가 '하킴 자말(안소니 마키)'을 만난다. 하킴의 모습에 묘하게 끌린 그녀는 그를 통해 흑인 인권 운동에 자금을 기부하는 등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만, 그 때문에 FBI의 표적이 된다. 안 그래도 혁명의 분위기가 감돌던 60년대 후반에 FBI 입장에서는 진의 반정부적 행보는 눈엣가시였기 때문이다. 결국 FBI는 신입요원 '잭(잭 오코넬)'에게 진을 24시간 감시하고 더 나아가 그녀의 명예와 경력을 망가뜨릴 공작을 꾸미기 시작한다.
실존 인물이나 실화 사건을 다루는 영화는 실화의 재현이라는 과제 앞에서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다. 한정적인 러닝타임 내에서 복잡한 실제 사건을 온전히 스크린으로 옮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화를 다루는 영화는 흔히 중심 소재가 될 인물 혹은 사건의 특정 면모를 부각하고, 작가의 해석을 기반으로 세부 요소 간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데 중점을 둔다. <소셜 네트워크>와 <스티브 잡스>와 같은 작품이 대표적이다. 이 두 영화는 사실 관계에 있어서 왜곡된 지점이 있다는 지적을 받았지만, 법정 싸움과 프레젠테이션이라는 이벤트를 중심으로 마크 주커버그와 스티브 잡스라는 유명인의 덜 알려진 개인사를 임팩트 있게 재구성하여 호평받은 바 있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세버그>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기본적으로 <세버그>는 장 뤽 고다르의 영화 <네 멋대로 해라>에 출연했고, 1960년대에 적극적으로 사회운동에 참여하였으며, FBI의 감시 대상이 되어 많은 고초를 겪기도 한 영화배우 진 세버그의 다채로운 삶을 들여다보는 영화다. 문제는 영화가 묘사하는 진 세버그의 모습이 철저히 FBI라는 공권력의 피해자라는 이미지로 고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진 세버그의 첫 등장 장면부터 영화가 그려내고자 하는 진 세버그의 상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세버그의 첫 장면은 진이 오토 프레밍거 감독의 <성 잔다르크>(1957)에서 잔다르크 역을 맡아 연기하는 모습이다. 이때 영화 카메라는 십자가 쇠사슬로 결박된 채 화형을 기다리고, 불이 올라오면서 고통스러워하는 잔다르크를 계속해서 비춘다. 마치 진 세버그가 앞으로 당할 많은 고통들을 암시하는 듯이. 이에 더해 영화 카메라가 한 사람이 고통을 가감 없이 찍듯이, 그녀 역시 FBI와 언론의 카메라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고 그로 인해 큰 시련을 겪게 될 것이라는 점을 암시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그녀가 왜 사회운동에 나서게 되었는지, 흑인 인권 운동이 그녀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기에 더 편안한 삶을 뒤로한 채 고난 길을 선택했는지에 대해서 영화는 함구한다. 그저 그녀에게 사회적 병폐를 개선하려는 의지가 원래부터 있었다는 식의 묘사를 제외하면, 사회운동가로서의 진 세버그의 신념, 사상, 가치관을 탐구하는 장면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 외의 장면에서 진의 모습은 계속되는 도청과 감시로 인해 점점 피폐해지는 것의 반복에 머무른다. 그나마 도입부 남편과의 대화에서 프랑스 사회를 뒤흔들었던 68 혁명이 그녀에게도 영향을 미쳤던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가능할 따름이다.
그 대신 평면적인 이미지로 고정된 진 세버그의 빈자리는 가상의 인물인 잭 솔로몬에게 넘어간다. 어떻게 보면 진 세버그가 주인공인 영화에서 정작 세버그는 문제의 발단을 제공하는 데서 그치고, 영화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는 가상의 인물인 잭 솔로몬을 통해서 제시되는 주객이 전도되는 상황이 펼쳐지는 것이다. 실제로 당장 잭의 첫 등장 장면만 보더라도 영화 속 그가 진 세버그와는 달리 상당히 깊은 내적, 철학적 갈등을 겪게 될 것임을 쉽사리 알 수 있다.
잭은 새롭게 발령받은 FBI 사무실로 출근하기 전에 아내와 잠깐 언쟁을 벌이며 자신의 최애 만화책인 <캡틴 아메리카> 1편을 버리려는 아내를 만류한다. 잭이 캡틴 아메리카의 팬암을 알려주는 이 짧은 에피소드는 작중 그에게 주어진 선택지를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캡틴 아메리카라는 영웅은 이제 영화를 통해서도 익숙한 인물이지만, 이름대로 미국 정부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국가가 상징하는 자유라는 이념과 권리를 위해 움직이는 슈퍼히어로다. 따라서 캡틴 아메리카 만화책 에피소드는 진 세버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공권력이 한 개인을 대상으로 공작을 펼치는 작전에 투입되는 잭이 신념과 현실 사이에서 겪게 될 내적, 외적 갈등을 함축해 보여준다.
물론 진 세버그에 대한 평면적 묘사와 잭의 고민을 함께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세버그>가 50여 년 전 사건으로부터 시사점을 전달하는 것은 사실이다. FBI와 언론의 유착 관계로 인해 억지로 만들어진 스캔들이 진을 고통스럽게 하는 모습은 최근 몇 년간 뜨거운 감자였던 가짜 뉴스 이슈를 떠올리게 한다. FBI의 감청 및 감시 행위는 자연히 공권력과 개인의 관계 안에서 개인의 자유가 어느 범위까지 제한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볼 기회이기도 하다. 또 최소한 도청장치를 찾을 수는 있는 진과 달리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감시당하더라도 그 사실을 인식조차 못할 세상을 사는 입장에서 <세버그>는 경각심을 일깨우는 영화라고 할 수도 있다. 단지 가상의 인물이 이처럼 흥미로운 주제와 메시지와 더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진 세버그의 이름을 걸고도 그녀의 삶을 적절히 활용하지 못하는 괴리감은 영화의 메시지가 느껴지기는 하지만 와닿지는 않는 문제를 낳는다.
이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결국 배우 개개인의 퍼포먼스다. 실제로 가상 인물인 잭 솔로몬의 비중이 상당히 높고, 진의 신념이나 가치관에 대한 설명이나 묘사가 많이 등장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연기는 진 세버그라는 인물에 생동감을 불어넣어 준다. 칸 영화제 레드카펫에 맨발로 등장하거나 자신의 양성애 성향을 공개하는 배우 본인의 용기와 이미지를 자신을 사찰하는 정부 기관과 정부의 손을 잡고 자신을 공격하는 언론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캐릭터의 강인함에 적절히 투영한 후반부 기자회견 장면이 대표적이다.
하킴 자말 역을 맡은 앤소니 마키가 돋보이는 것도 같은 연장선상에 있다. <세버그>는 상술했듯이 인물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역사적 맥락이나 사실에 대한 언급이 그다지 많지 않은 작품이다. 이때 MCU에서 팔콘, 그리고 2대 캡틴 아메리카 역을 맡아 인종차별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왔던 안소니 마키의 이미지는 본래 영화가 해야 할 설명을 대신하는 듯 보인다. 배우의 이미지를 그대로 살린 덕분에 많지 않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하킴 자말은 흑인 인권 운동가로서 첫 등장부터 강한 임팩트를 남기고, 진의 행동과 대사에 개연성을 추가적으로 불어넣는 데 성공하기 때문이다.
사실 <세버그>와 유사한 시간대의 실화 사건을 다루는 작품은 최근 몇 년 사이 자주 접할 수 있었다. 흑인 인권운동과 베트남 전쟁 반대 시위로 다소 혼란스러웠던 미국 사회상과 그 안에서 각자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싸웠던 이들의 모습은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나 <트라이얼 오브 시카고 7>과 같은 작품에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주인공이어야 할 세버그를 단순한 피해자로 묘사할 뿐인 <세버그>는 위의 작품들과 달리 당시 사회상에 대한 통찰이나 비판, 진 세버그에 대한 재해석 대신 그저 배우들의 열연만 기억에 남는 실망감을 선사하고 만다.
P(Poor 형편없는)
재현에는 성공했으나 재구성에는 실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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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썬더볼츠*>: 공허한 우울의 미로에서 널 구할 결심
어벤저스는 아이언맨으로부터 시작해 아이언맨으로 끝났다. 남아있는 이들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시점이지만 여전히 누군가는 어벤저스와 타노스의 핑거 스냅으로 인한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그 누구든 어벤저스와 타노스의 핑거 스냅에서 벗어나야 할 때다.
CIA 국장으로 있는 발렌티나 알레그라 드 폰테인의 한마디가 인상적이다.
”어벤저스는 안 옵니다“
맞는 말이다. 너무나도 당연하지만 이 영화는 어벤저스에 대한 영화가 결코 아니다. 어벤저스와 옷깃 한 번 스쳐봤을까 싶은 나머지 사람들의 이야기다. 엔드게임 이후 여러 시리즈와 영화를 개봉하며 빌드업을 쌓아온 마블의 첫 완성작이라고 볼 수 있는 썬더볼츠. 이들의 이야기는 무엇으로 시작될까.
공허함이라는 미로에 빠진 기니피그
IMDB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짙게 깔려있는 공허함이라는 감정에서 시작한다. 공허함은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날 괴롭히고 있는지 분명하지 않다. 옐레나가 느끼는 공허함도 그러하다.
아이언 슈트와 아버지 하워드 스타크와의 독특한 부자 관계를 가진 아이언맨, 페기 카터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가슴속 깊이 지켰던 캡틴 아메리카, 아버지와 어머니의 죽음 그리고 로키와 얽힌 사연을 가진 토르까지. 어쩌면 이들이 겪었던 것도 일종의 공허함의 범위에 들어갈지도 모르겠다. 어벤저스도 이러한 인간적인 문제들을 겪고 극복하며 진짜 히어로로 각성했다.옐레나를 포함해 이번 썬더볼츠의 등장인물들도 마찬가지다. 다만, 차이점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게 이 영화의 포인트다. 어벤저스는 각자 지닌 문제를 스스로 극복했었다. 하지만, 썬더볼츠의 구성원들은 대단한 기술 능력을 얻거나 새로운 깨달음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닌 인간적인 방식으로 상실과 결핍 그리고 공허함에 직면하며 극복하고자 노력한다.
각자의 감정과 이야기를 공유하고 함께 위로한다. 옐레나를 선두로 썬더볼츠 인원들은 밥의 깊은 내면에 들어가 그를 그의 우울의 방에서 꺼내고자 애쓴다. 힘을 내야 해 따위의 위로가 아니다. 그 사람의 내면 깊은 곳을 살핀다. 거기서 같이 싸우고 같이 상처 입으며 우울의 미로에서 다 같이 나오려고 한다.
IMDB초인적인 힘을 가진 영웅들이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각자 스스로 해결하기 힘든 문제를 지니고 있고, 투덜거리면서 때로는 우울하다고 이야기하는 형 누나들이 두 팔 걷어 도와주는 모습이랄까. 나도 그랬었지, 너도 그랬었구나 하며 도와주는 모습에 가까워 보였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가 줬던 감동과는 달리 좀 더 와닿는 감동이 아닐까 확신한다. 특히, 썬더볼츠가 우울의 미로와 방을 도장 깨기 하는 장면은 명장면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인상적이다.
위는 영화 내적으로 바라봤을 때의 이야기다. 사실 공허함이라는 것을 주인공들만 느끼진 않을 터다. 그 주체를 마블과 마블 팬들로 바꿔서 이야기하는 것도 어색하진 않다. 마블은 아이언맨부터 시작해 어벤저스 엔드게임까지 다시없을 전성기를 누렸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 지금의 썬더볼츠 까지, 스파이더맨을 제외하면 마블은 매 작품에서 혹평을 받았다.
관객 기대치에 못 미치는 영화로 하향곡선을 5년 이상 타왔다. 얼마 전 개봉한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 역시 큰 반향을 일으키진 못했으니까. 마블 역시 과거의 영광과 비교되는 현재 위치에서 알 수 없는 공허함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이런저런 다양한 시도는 하는데, 팬들이 좋아하지 않으니 말이다.마블뿐만 아니라 마블 팬들도 나름 공허하지 않을까. 높아진 진입장벽은 늘 빠지지 않는 주제가 되었다. 이로 인해 일반 팬들에 대한 마블의 외연 확장은커녕 팬층 자체가 얇아졌다 과하게 해석하면, 지난 10여 년 동안 일 년에 한두 번은 마블 영화를 보기 위해 즐거운 마음으로 극장을 찾았을 관객들이 현재는 그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니까.
오죽하면, 속는 셈 치고 또 본다는 말이 나올까. 더 이상 새로운 추억거리가 쌓이지 않으니 이건 이거대로 기분이 상하는 일이다. 이런 팬심을 아는지, 썬더볼츠의 엔딩 크레딧에선 셀프디스와도 같은 내용의 장면들을 넣어놨다.(물론, 극의 내용에 따른 극안에서의 반응이기도 하다.) 이 작품의 완성도와 평가를 제쳐두고 마블 팬들의 마음이 어떤지 감독은 공감하고 있다는 것 같기도 하다.IMDB
이런 측면에서, 썬더볼츠는 마블과 팬들에게 은유적인 영화다. 이를 드러내는 또 다른 장면이 있다. 옐레나와 기니피그 장면이다. 미로에 갇힌 기니피그는 등장인물들을 의미하기도 하면서 앞으로의 이야기에 대한 복선이자 마블과 마블 팬들까지 투영한 장치로 보였다.
썬더볼츠 주인공 각자가 결핍과 공허라는 미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마블 역시 과거의 영광을 되찾고자 발버둥 치고 있지만 여전히 같은 자리를 멤돌 뿐이며. 새로운 마블을 관람한 팬들의 마음이 달라지지 않고 있는 것들을 의미하는 것처럼 말이다.하지만, 옐레나에 의해 실험실 미로에 갇힌 기니피그가 구출되는 장면에서는 소박한 희망도 엿볼 수 있었다. 옐레나를 선두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 썬더볼츠가 결성되는 모습을 통해 이 영화, 썬더볼츠가 어벤저스라는 과거의 영광이라는 미로에서 마블과 마블 팬들을 꺼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감독의 소박한 희망 말이다.
마블이 지금까지 실험해온 엔드게임 이후의 여러 영화들처럼 그저 실험적인 시리즈로만은 남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부분이기도 했다. 물론, 미로에서 성공적으로 탈출했는지 아닌지는 온전히 관객들이 평가하겠지만.마블, 부활했나?
아무리 좋은 영화라고 해도. 보는 사람에 따라 아쉬운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다. 썬더볼츠도 마찬가지다. 지속적으로 이야기가 나오지만, 높아진 진입장벽은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앞으로도 계속 심해질 거다. 이제 마블 영화는 제로베이스에서 시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몇몇 캐릭터의 쓰임이 아쉽다. 태스크마스터의 죽음이 대표적이다. <블랙 위도우>편에 처음 등장하며 나타샤 로마노프와 대등한 수준으로 그려졌었는데, 극 초반에 너무 쉽게 사망한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이 캐릭터를 등장시킨 이유를 잘 모르겠다.IMDB다음은 레드 가디언이다. 시종일관 영화의 분위기 메이커로 그려진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로 따지면 드렉스와 비슷한 인물이다. 힘도 세고, 나름대로 개그를 시전하는 모습까지. 하지만, 썬더볼츠에서 계속 ”위 아 썬더볼츠“ 라고 힘주어 말하는 역할과 일부 코믹한 내용을 빼면 역시 어떤 맥락에서 이 캐릭터를 이해해야 할지 갸우뚱하게 된다. 그저 재미만 있으면 되는 건가? 아니면, <블랙 위도우>에 등장했고 거기서 옐레나와의 관계는 다 설명했으니까 이 캐릭터는 이 정도로 사용해도 된다는 건가 싶었다.
IMDB
고스트도 마찬가지다. 어찌 보면 태스크마스터 말고 고스트가 극 초반부에 사망했다고 한들, 영화의 큰 흐름이 달라지지 않았을 것 같다. 태스크마스터 만큼 고스트의 역할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는 답변을 내놓기가 어려운 애매한 캐릭터라고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센트리. 밥이 센트리로 잘못 각성하는 부분에서 센트리 능력에 대한 설명이 부실했다.
검은색과 어둠을 특징으로 하는 센트리라서 그런 능력이 나온 것이라는 추론 정도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이 정도로 퉁치려고 한 거라면 감독의 섬세함이 아쉬워지는 부분이다. 그리고 밥의 가정불화 문제가 타노스 이상의 힘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센트리로 각성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는 것도 생각해 보면 이게 맞나 싶다.
이런 아쉬움이 있긴 하지만 소소하게 재미있는 장면들도 많았다.
특히, 여러 영화에 대한 오마주를 잘 활용했다고 생각한다.극 초반 옐레나의 실험실 액션 장면은 누구나 알 수 있듯 올드보이의 장도리씬을 오마주 한 것으로 보인다. 마블에서 올드보이를 오마주 했다니. 가슴이 웅장해진다. 버키가 오토바이를 타고 유도탄득 한 손에 들고 질주하는 장면은 터미네이터를 떠올리게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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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버키의 멋진 모습을 볼 수 있어서 흡족했다. 그리고 스타크 타워를 향해 운전하는 버키에게 레드 가디언이 계획이 있냐고 묻는 순간에 타고 있는 차량을 냅다 건물 입구로 박아버리는 장면은 다크나이트 조커의 스쿨버스 장면이 떠오르기도 했다.
짭-캡틴 아메리카 존 워커 전투씬의 한 장면은 스티브 로저스와 윈터 솔저가 도심에서 싸우는 장면을 오마주 했고. 센트리가 총알을 막는 장면에서는 매트릭스가 떠오르기도 했다. 총알 멈추는 장면이야 많이 재생산된 거라서 이제는 오마주라고 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지만. 스타크 타워에서 엘리에베이터로 움직이는 장면은 어벤저스 모습을 상기시키기도 했다.
이상 내용을 종합해 보면, 이번 작품만으로는 과거의 추억과 영광을 원하는 마블을 구하기엔 힘에 부쳐 보인다. 그리고 마블 팬들을 새로운 챕터로 확실하게 이끌어 갈지도 확신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블이 조금은 정신 차린 건 아닐까 하는 희망을 느낄 수 있었다.
더불어, 썬더볼츠이자 새로운 어벤저스가 어떤 이야기를 그려 나갈지 기대되는 작품이긴 하다. 아쉬운 부분이 있지만, 기존 히어로 영화답지 않은 서사와 연출이 돋보인 영화였다. 속 시원한 재미는 없을지는 몰라도 깨알 재미는 충분하니 극장에서 보기에는 충분한 영화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