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혁2023-07-03 11:14:10
[극장에서 본] 풍성한 잔칫상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2023>
누구도 해보지 않았다는 신선함은 원조라는 인식을 심어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렇기에 조금이라도 겹친다면 진부함 혹은 따라 한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따라오기 마련인데, "멀티버스"는 누가 먼저 했을까?
그도 그럴 것이 <어벤져스: 엔드게임, 2019>에서 인피니티 스톤을 모으는 과정에서 처음 나왔으며, 최근에 개봉한 "DC"의 <플래시>는 이를 직접적으로 언급했다.
그런 점에서 전작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 2018>는 이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진 않았지만, 다양한 "스파이더맨"을 선보였다!
전작으로부터 시간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스파이더맨"으로 활동하는 "마일스"에게 "그웬"이 나타난다.
이유를 물어볼 것도 잠시, 그들의 앞에 자유로이 시공간을 오가는 "스팟"이 나타나고 그를 막기 위해 모든 곳에서의 "스파이더맨"이 모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들의 리더 "미구엘"은 그동안 "마일스"에게 말하지 못한 비밀을 밝히는데...
1. 이젠, 기피감도 드는 소재인데...
앞서 말했듯이 "멀티버스"를 소재로 삼은 영화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의 기대치는 역시, 다양한 모습의 "스파이더맨"이다.
전작 <뉴 유니버스>에서도 "일본 만화"풍의 캐릭터부터 "누아르", 그리고 "스파이더 햄" 등. 다양한 버전들을 선보였으며, 이에 맞는 분위기까지 연출해냈다.
이런 시각적인 부분에서 충족했던 전작과 마찬가지로 이번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또한 관객들의 눈을 즐겁게 만드는 데에 부족함이 없다. - 스파이더 캣부터 서부 영화, 그리고 티라노까지 안 좋아할 수가 있을까?
여기에 "MCU"부터 "레고", 그리고 <베놈, 2018> 등. 여러 영화들을 언급하거나 출연시켜 "멀티버스"만의 재미까지 챙기려 든다.
이렇게 "팬 서비스"가 두둑한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이나 해당 영화의 장점은 이야기에 있다.
앞서 써 내려간 <플래시2023>의 리뷰에서도 말했듯이 "만약(IF)이 '정사'가 아닐까?"는 혼란함은 "멀티버스"가 가지는 문제점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는 수많은 스파이더맨들 사이에서도 "마일스 모랄레스"라는 캐릭터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런 점에서 영화가 가져온 주제는 어딘가 익숙하다.
그도 그럴 것이 <어벤져스: 엔드게임, 2019>에서 "아이언맨"과 "캡틴 아메리카"의 퇴장에서도 언급된 소재 "개인의 행복"과 "다수의 행복"이기 때문이다.
이를 "스파이더맨"만의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라는 규칙으로 적용하는 동시에 "멀티버스"의 붕괴까지 연결 지으니 "스파이더맨"만으로도 '이렇게, 스케일이 크게 가져올 수 있구나'라는 감탄까지 하게 된다.
2. 귀 빼고는 다 즐거운 영화
무엇보다 "스파이더맨"이라는 이름에 떨어지지 않는 액션 시퀀스와 "스팟 - 미구엘" 등. 인상적인 캐릭터들이 많다.
2시간 20분이라는 긴 러닝 타임도 있지만, 이들의 동기부터 활약상은 단점으로 지적되는 끝나지 않은 이야기의 결말을 벌써부터 기대하게 만들고 있다.
당초 2부작으로 기획된 작품으로 이야기의 결말이 완벽하게 끝나지 않은 게 단점이 아닌 장점이라는 것만으로도...
굳이, 문제점을 찾아본다면 "음악"에 있지 않을까?
전작 <뉴 유니버스, 2018>만 하더라도, "Sunflower"외에도 "What's Up Danger"와 "Elevate"까지 계속해서 듣고 싶은 노래들이 있었던 것과 다르게, 이번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는 귀에 맴도는 노래는 없었다! - 이건, 확실하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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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령과 소통할 수 있는 16살 영매 샤오쩐! 다른 친구들처럼 평범한 삶을 살고 싶지만 그것이 마음처럼 쉽지만은 않다. 신전에서 사람들의 고민을 들어 주고 해결해 주던 일상을 보내던 샤오쩐은 한 학생이 전학 오면서 예상치 못한 일들을 겪게 되고, 그 친구를 통해 사랑과 슬픔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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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새해, 기분 '개' 좋아지는 다섯 글자 [도그데이즈] 티저 예고편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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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퀴엠과 같던 김창열의 물방울
'물방울 화가'라는 이름을 가진 화백 김창열의 자서전과 같은 영화다. 보고 싶었던 영화를 개봉 전 시사회를 통해 보게 되어 기대가 컸는데,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써 시사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기대 이상의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자서전과 같지만 하나의 예술 작품을 보는듯했다. 영화를 보고 나와서 내 입 밖으로는
'그래, 이런 영화를 기다렸어-'를 연신 내뱉었다.
다니던 회사에서 예술 강연을 준비할 기회가 생겼었다. 그때 박서보, 김창열 작가 등 우리나라 미술계를 대표하는 화백들에게 주목하게 되었다.
한때는 두 화백의 작품을 자주 찾아보기도 했었던 기억이 난다. 특별히 김창열 화백은 물방울이라는 특정한 도구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인지 궁금했던 것 같다.
나의 궁금증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영화<물방울을 그리는 남자>는 김창열 화백이 왜 물방울 화가라고 불리는지에 관해 답을 한다.
김창열 화백이 물방울을 그리는 이유에 관해서 말이다. 이렇게 설명할 수도 있겠다.
김창열 화백의 물방울을 만나기 전의 삶과 물방울을 만난 이후, 물방울을 이해하게 된 아들의 이야기라고.
'아직도 호랑이가 산에 있던' 북한의 맹산 그리고 남한과 뉴욕, 프랑스, 제주까지. 화백 김창열을 만들어간 이야기라고도 말할 수 있다.
김창열 화백은 전쟁의 아픔을 뼈아프게 겪은 세대의 인물이다. 그가 겪었던 삶의 여러 모양과 아들에게 자주 들려줬던 이야기 그리고
노래를 함께 그렸다. 영화<물방울을 그리는 남자>의 감독이자 그의 둘째 아들인 김오완은 아들의 시선과 함께 화백 김창열에 대한 '경외감'을
표현했다. 영화는 물방울에 집착한 한 화백의 삶의 아픔과 애환. 고집. 침묵. 고요 속의 노래가 가득 매운다.
김오완은 아버지 김창열에게는 침묵과 기묘한 균열이 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과는 다른 '인간', '예술가'인
김창열을 이해하는 과정이라기보다는 아버지 김창열 그리고 인간 김창열의 침묵과 기묘한 균열에 가까이 다가가는 과정을 기록한 영화다.
그가 보고 겪은 여러 죽음들을 오랫동안 추모하던, 레퀴엠과 같던 김창열의 작품들.
그가 수없이 그린 물방울의 의미를 영화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를 통해 꼭 만나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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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트 레이더스> 메시지만 강렬한 디스토피아 영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참석한 영화 <아네트>의 시사회 관람 후기입니다.
2043년, 전쟁으로 황폐화된 땅에는 새로운 제국을 세우려는 독재국가 에머슨이 들어선다. 거대한 새를 연상시키는 드론에 의해 감시받는 세상을 만든 가운데, 에머슨은 시민권이 없는 미성년자 모두를 군인으로 양성하기 위해 아카데미로 끌고 간다. 그러나 에머슨의 통치를 따르지 않는 '니스카(엘레 마이아 테일페데스)'는 딸 '와시즈(브룩클린 르텍시에 하트)'와 함께 숲 속에서 유랑생활을 한다. 그러던 중 와시즈가 큰 부상을 당하고, 약을 구하러 마을에 온 니스카는 도리어 병사들에게 와시즈를 빼앗기고 만다. 딸과 헤어진 후 슬픔에 잠긴 채 살아가던 니스카. 그러 그녀 앞에 마찬가지로 에머슨의 지배에 저항하는 토착민 크리 족 사람들이 나타나고, 니스카는 그들과 함께 딸을 되찾기 위한 반격에 나선다.
제71회 베를린 국제영화제와 제46회 토론토 국제 영화제를 비롯한 세계 유수 영화제에 공식 초청된 바 있는 <나이트 레이더스>는 다니스 고렛 감독의 첫 장편 연출작이다. 고렛 감독은 <나이트 레이더스>의 출발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토착민의 삶은 나날이 극심해지는 혐오와 차별 역사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런데도 그간 제삼자에게 토착민의 이야기는 항상 신기하고, 민속적이고, 옛날이야기에 불과했다. 이에 현실에서 목소리를 내기 두려운 사람마저 목소리를 내게 하는 힘이 있는 SF 및 판타지와 같은 장르에 보편적인 역사이기도 한 토착민의 비극을 녹여내려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나이트 레이더스>는 세계 각지의 토착민, 원주민들이 겪은 구체적인 사건들을 한 데 모아 디스토피아 세계를 묘사하고 있다.
우선 다니스 고렛 감독 본인이 캐나다 사람인만큼 <나이트 레이더스>는 캐나다 역사 속 원주민들의 비극적인 경험을 스크린으로 불러온다. 작중 에머슨은 전쟁에서 패배한 이들에게 두 가지 차별정책을 시행하며, 이는 영화의 주요한 갈등을 유발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하나는 거대한 벽으로 대표되는 분리 정책이다. 에머슨 시민이 사는 곳과 비시민권자가 사는 곳을 철저히 나누고, 비시민권자에게는 드론을 통해 식량을 배급하면서 철저히 통제하려 든다. 이러한 에머슨의 통치 정책은 캐나다 정부가 원주민들에게 시행한 탄압과 강압적 동화 정책과 똑 닮아 있다. 과거 영국령 캐나다 정부는 원주민들의 땅을 강탈하고 그들을 보호 구역에 집어넣었다. 또 보호구역 내에 부실한 인프라를 설치하거나, 보호 구역에서 나오면 연금을 받지 못하게 하기도 했다. 본래 유목민이던 이들에게 낯설고 고달픈 생활을 강제함으로써 자신들에게 의존하도록 만든 것이다.
다른 하나는 에머슨 아카데미의 존재다. 에머슨 아카데미는 과거 캐나다 정부가 설립한 '레지덴셜 스쿨(Residential School)'의 다른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레지덴셜 스쿨은 반란과 분쟁의 빌미 근절하기 위해 같은 국가관과 동질성을 공유하도록 영국계 캐나다인의 가치관을 원주민들에게 주입하려는 목적으로 세원진 학교다. 이 학교들에서 원주민들은 영어식 이름으로 강제 개명되고, 영어만을 사용할 수 있었으머, 원주민 전통의상 착용을 금지당하고 백인들이 입는 양복, 양장 착용이 강제되었다. 이곳에서 어린 소년소녀들은 교사에게 자주 강간당하기도 했다. 결국 부모 밑에서 사랑받지 못하고 사육되다시피 한 아이들은 가족애를 잃을 수밖에 없었고, 이는 원주민들의 가정과 사회를 더욱 빠르게 파멸로 이끌었다.
영화는 이처럼 레지덴셜 스쿨에서 자행된 악습들을 아카데미라는 가상의 공간 안에서 묘사한다. 에머슨은 어린아이들에게 선진 교육을 통해 삶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핑계를 대면서 그들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고, 가족과 떨어져 지내게 하며 정체성을 약화시킨 뒤 철저히 국가에 충성하도록 강제한다. 곧 실제 역사적 사건이 와시즈가 아카데미 내에서 엘리자베스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며 어머니 니스카와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 아이들이 밤이면 기숙사에서 한 명씩 불려 나가 성폭행당하는 것, 그리고 아카데미에서 교육받은 젊은 아이들이 국가의 명령을 거부하지 못한 채 어머니에게 총구를 겨누는 장면으로 바뀌어 재현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딸을 구하기 위해 아카데미에 침투하는 니스카의 모습에는 단순한 모성애를 넘어서는 의미가 숨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나이트 레이더스>는 뉴질랜드 원주민인 마오리 족의 역사도 디스토피아 세계에 녹여내고 있다. 이는 본 작의 총괄 프로듀서이자 <토르: 라그나로크>와 <조조 래빗>의 감독을 맡은 바 있는 타이카 와이티티에 게 마오리족 피가 흐르기 때문으로 보인다. 작중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드론의 존재가 단적인 예시다. 드론은 에머슨의 통치 기반이라 할 수 있는 신무기로, 미등록 미성년자를 수색 및 추적하고, 전투용 내지는 식량 배급용으로도 활용된다. 이때 드론이 배급한 식량에 바이러스가 숨어 있었던 것은 유럽인들에 의해 새로운 전염병이 퍼져 나갔던 사례들과 오버랩된다.
이에 더해 드론의 존재는 유럽인의 등장과 동시에 당시 기준 최신 무기였던 머스킷 총이 뉴질랜드에 전래되고, 이 무기를 지닌 부족이 그렇지 못한 부족을 착취하고 노예로 만든 사건인 '머스킷 전쟁'이 마오리족 역사에 기록된 것을 연상시킨다.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머스킷 전열 보병처럼 길게 늘어서서 일제히 총을 겨누어 화망을 형성한 채 접근해오는 에머슨 군인들과 빈약한 무장으로 맞서는 크리 족의 모습도 영국군과 마오리 족 사이에 펼쳐진 '마오리 전쟁'의 변형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영화 속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인 드론과 와시즈가 지닌 독특한 능력이 더해져 전투의 향배를 뒤바꾸게 되는 전개는 결국 19세기 당대 신무기인 머스킷에 의해 피로 얼룩졌던 역사를 영화적으로 치유하는 장면이나 다름없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대목은 나다와 뉴질랜드 두 사례에 대해 여러 토착민들의 역사가 공유하는 보편성을 맛볼 수 있는 지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스페인군이 침입한 멕시코나 남아메리카의 사례만 보더라도 알 수 있듯이, 신무기나 새로운 전염병 때문에 유럽 이주민들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한 사례는 지구 이곳저곳에 모두 흩어져 있기 때문이다.
다만 상이한 지역의 공통된 역사적 사건들을 한 데 모은 <나이트 레이더스>의 조각보 같은 매력이 온전히 스크린에서 전해진다고 보기는 어렵다. 장르 영화로서의 완성도에 아쉬움이 남기 때문이다. 사실 디스토피아 세계를 다루는 장르 영화인 관계로 <나이트 레이더스>에는 다른 영화들을 연상시키는 장면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그 유사함의 정도가 상당히 높은 편이고, 익숙한 설정과 전개를 풀어내는 방식에 있어서도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인상이 강하게 남는다. 그러다 보니 시도 자체는 인상적이었던 영화의 메시지와 감흥도 모두 깎여버리고 만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대표작인 <아바타>와의 비교가 대표적인 사례다. 사실 <아바타>의 경우에도 충격적이었던 시각 효과와 달리, 스토리적인 측면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주인공인 제이크 설리가 판도라 행성의 원주민인 나비족의 구세주가 되어 인간의 침입을 막아낸다는 플롯은 충분히 예측 가능하고 평면적이라는 비판을 피하지 못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바타>는 나비족의 역사와 사회, 내외적 갈등, 그리고 그들의 신과 구세주인 에이와와 토루크 막토에 대해 충분히 설명해주었고, 그 결과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는 강력한 몰입감을 자아내는 데 성공했다.
반면에 <나이트 레이더스>의 메시지와 전개 양측면에서 모두 중심이 되어야 할 크리 족의 이야기는 디테일이 부족하다. 그저 몇 마디의 대사와 설정으로 구성되어 있을 뿐이다. 토착민 출신이지만 토착민과 그렇지 않은 이들 사이에서 살아가던 니스카와 와시즈 모녀의 이야기와 만나는 순간에도 별다른 갈등 없이 흡수되어 버린다. 그렇기에 수많은 역사적 사례들을 한 곳에 모았음에도 불구하고 작중 크리 족의 서사는 토착민 공동체로서의 특색이 살아나지 않는다. 단지 독재국가가 지배하는 디스토피아 세계에 반대하는 저항군이라는 익숙한 모습만 눈에 들어온다. 이는 <나이트 레이더스>가 결코 인상적인 장르영화는 아닌 이유다.
유사성과 진부함을 넘어서지는 못한 것 외의 한계도 있다. 스릴러 영화인데도 긴장감을 거의 불어넣지 못하는 식이다. 실제로 영화는 제목인 'Night Raiders'가 '밤의 침입자'라는 뜻인데도 불구하고 밤에 벌어지는 여러 사건들을 제대로 그려내지 못한다. 에머슨 아카메디에 갇힌 와시즈를 구출하기 위한 니스카와 크리 족의 습격만 보더라도 작전의 중간 과정부터 아카데미에서 탈출하려는 과정에 이르는 세부 사항들이 지나치게 많이 생략되었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다. 그러다 보니 해당 시퀀스는 클라이맥스로 고조되는 중간 다리로써 그 부조함을 숨기지 못한다. 그나마 숲에서 숨어 지내던 니스카 모녀와 그들을 습격한 드론 간의 짧은 전투가 세계관을 소개하는 역할을 충실히 이행할 뿐이다. 이처럼 <나이트 레이더스>는 뜻깊고 인상적인 아이디어의 잠재력을 실현하기에는 부족했던, 투박한 장르 영화로 남는 데 그치고 만다.
P(Poor, 형편없음)
어설픈 짜임새 때문에 빛이 바랜 역사적 비극의 영화적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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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힘내라고 하면 힘낼 수 있나요
진짜 포기하고 싶다. 아니 포기해야겠다. 애초부터 불가능한 꿈을 꿨기 때문에 좌절감도 맛보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노력을 무지막지하게 들여도 안 되는 것이 있으니 삶이란 역시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하다못해 메이플스토리의 데미안과 스우를 잡는 것도 숙련도가 올라가면 쉬워지는데 삶은 그런 게 없어 잔인하다. 난 근본적으로 사랑받기엔 못돼 쳐 먹은 인간이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만하고 싶다. 죽고 싶은 건 아닌데 당분간 뭘 하고 싶다는 마음이 안 든다. 모든 것이 싫다. 무엇이든 할 맘이 안 든다는 뜻이다.
그래서 포기하면 뭐 어쩔 건데? 엄마, 아빠한테 내 정신적인 고통을 줄줄 늘어놓으면 어떤 지점이 달라지나? 사실 선생님에게 최근의 내 상태를 말한다고 해서 바뀌는 건 없었기에 이 선택이 내 인생을 바꿀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냥 똑같은 하루의 반복일 것이다. 몸이 고장 난 것도 바뀌지 않을 거고. 뭔갈 사고 싶은 강박은 아마 죽을 때까지 가지 않을까 싶다. 맞다. 나는 지친 것 같다. 유럽에 갔다 와도 지친 게 해소되지 않아 '이런 식으로 가다간 나의 정신적 탈진은 아마 영원할 것'이라고 설레발을 쳤던 때가 생각난다. 다시 생각해보면 1년 동안 지치는 타이밍이 한 번도 안 오는 게 더 이상하다. 어물쩡 넘긴 나 자신이 싫다. 쉬어야 할 때 제대로 쉬질 못했으니 지금 닳고 닳았다. 요즘 나는 삶의 동기부여가 단 1%도 남지 않았다. 난 남들에게 위로해주는 법은 알았지 나 자신에게 격려를 하는 법이라곤 단 조금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사람도 사랑도 다 무섭다. <굿 윌 헌팅>과 <그린 북>이 어쩐지 환상 속의 이야기처럼 들리는 요즘이다. 가끔은 내가 쓴 글이 사실이 아니길 바랄 때도 많은데 요즘은 반대의 기분을 느끼고 있다. 정말 내가 쓴 글이 맞는 말이란 말인가. 인간의 가장 좋은 친구가 돈이라기엔 난 경험해야 할 것들이 많지 않나. 상상과 희망도 재미가 없는 오늘 난 천천히 가는 버스에 기대 잡생각을 하고 있다.
<체리 향기>는 소소한 일상에 관한 영화다. 나의 인생영화 중 한 편으로 꼽는 작품이기도 하다. 트럭을 운전하는 주인공. 어쩐지 표정에서 사연이 많아 보인다. 이 사람은 갑자기 지나가는 남자 한 명을 태운다. 군인을 태운 주인공 바디. 바디는 군인에게 본인의 사연을 늘어놓는다. 그는 죽고 싶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이유를 찾지 못했다고 한다. 어디 땅굴에 묻힐 테니 그 조력자가 돼 달라는 부탁을 한다. 군인은 당연히 거절한다. 다음 손님으로 신학도를 태운 바디. 같은 부탁을 하지만 역시 거절한다. 죽는 것도 예삿일이 아니다. 바디는 세 번째 손님을 찾아 나선다.
세 번째 손님은 나비를 박제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아들의 치료비가 급해 바디의 제의를 받아들인 이 노인은 주인공과 차를 타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주제는 삶의 의미에 관한 이야기다. 나 역시 죽고 싶던 때가 있었어요. 내가 인생을 살아야 했던 이유는 코 끝에 스친 체리 향에서 왔죠. 소소한 삶의 가치에 대해 설명하는 노인. 바디는 귓등으로 듣는 둥 마는 둥 한다. 아예 말을 안 들은 것 같기도 하다. 사실 바디에게 변화가 있긴 했다. 노인을 다시 찾아간 바디. 내일 내가 살아있을지도 모르니 적극적으로 깨워달라는 요청이었다. 영화는 웃으며 바디의 근심 걱정 모든 것을 떠나보내지 않는다. 노인의 진정성이 통했다고 해서 바디의 우울함이 사라지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바디는 다시 무덤 아래에 누웠다. 생각이 바뀐 게 없는듯한 바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디의 요청에서 우리는 뭔가를 기억할 수 있다. 유의미한 차이는 있지만 이 무언가가 어떻게 표현되는지는 정의해주지 않은 채 영화는 그렇게 끝난다.
영화에 엔딩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바디는 죽을 곳에 다시 누웠다. 그의 생각은 변화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당연하다. 난 인생을 얻는 동기부여의 힘이 갑자기 어느 날 번쩍하고 생기는 게 아니라고 본다. 한참을 어두운 터널 속에서 살 때 느낀 게 있다. '힘 내'는 너무 포괄적인 단어라는 것이다. 힘을 내? 힘을 낸다는 게 무슨 뜻이지? 힘 내면 내가 이 뭐 같은 일상을 이겨낼 수 있나? 당연히 이 반응이 '와닿지 않았다'란 말을 자격지심에 빠져 거칠게 하면 나오는 것이란 걸 모르지는 않는다. 말하는 이에게 상처 줄 생각 단 1도 없지만 큰 골자가 되는 생각은 아직도 변함이 없다. 앞서 쓴 바와 같이 그 말을 하는 이는 내가 다시 기운을 차렸으면 하는 마음에서 한 것일 테지. 난 살짝 다르다. (그렇다고 힘 내!라는 말을 하는 게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그런 말을 잘하지 않는다. 어차피 내가 겪는 비극은 나를 다시 공격할 것이고, 난 같은 방식으로 또 표류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바디는 모든 걸 웃어넘겨 행복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단 조금의 변화만 있었다.
그렇기에 영화는 사려 깊다. 바디의 인생이 무조건 다 잘 풀릴 거라고 묘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에서 부정적인 순간을 마주할 때를 생각해보자. 어느 순간을 극복했다고 해서 비슷한 불행이 찾아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나? 행복이 갑자기 뚝 떨어지나? 아닐 것이다. 삶은 같은 순간의 반복이다. 그래서 어느 것을 극복했다는 생각이야 말로 인간의 교만일 수도 있다. 큰 힘을 줘가며 삶의 순간을 지나가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다. 이 이유로 인생에 환기란 건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 같다. 환기가 안되기 때문에 상처는 누적될 수밖에 없다. 또 힘 내!라는 말에 힘을 내기엔 우리 인생은 너무 곪았다. 모두가 심하게 깊게 파여서 단순히 끌어올리는 게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다. 목표에 실패하기. 사랑하는 누군가가 떠나기. 영원한 이별. 이런 삶을 가로지르는 실패는 항상 우리 곁에 있다. 이에 대한 생각이라고 하는 건 우리 머릿속에서 통제할 수 있는 요소가 아니기 때문에 상처와 우울함은 천둥번개 치듯이 갑자기 사라지지 않는다. 이 때문에 우리는 필연적으로 삶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 과거를 지워버린다? 지울 수 있으면 인간이 아니지.
감독은 이런 관점에서 영화를 보는 우리에게 좀 특별한 시각을 보여준다. 간단하다. 인생을 사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 것이다. 그리고 그게 전부라고 말하는 것 같다. 영화는 극적인 성장을 보여주지 않는다. 생의 목적에서 진 인물이 다시 이겨내는 걸 제시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분명한 연출 의도라고 생각한다. 어차피 이 사람은 같은 곳에서 똑같은 실패를 경험할 것이다. 여러분은 예외인가? 아니다. 여러분이 사는 이유가 무엇이든 결과적으로 같은 곳에서 머무르는 건 매한가지일 것이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무언가를 위해 달려왔다고 생각해왔지만 나는 지금의 이 기분이 뭔지 모르겠다. 죽고 싶은 건 절대 아니다. 엄마 아빠가 나한테 못하냐? 그것도 아니다. 나는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기분이 뭔지 모르겠다.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외로움인지. 권태인지. 뭔가를 이겨내기 위해 그렇게 노력해왔지만 그게 정말 의미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또 언제는 사람들에게 기회를 열어주는 게 돈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그건 내가 나를 속였던 거짓말이었다. 나는 내 20대를 관통하는 동기부여보다 더 얻고 싶은 것을 마음속에 둔 인간이었고 그 관점에서는 사실 실패한 인생을 살고 있다. 이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이런 나를 보여주는 증거다.
근데 또 삶을 포기하라 한다면 아쉬울 것 같다. 아니 사실 지금 당장은 모든 걸 던져버리고 쉬은 게 맞긴 하다. 당장 이 세상을 뜨고 싶지는 않다. 나에겐 수많은 것들이 남아있다. 아직도 정산 못 받은 돈. 가지 못한 여행지. 공익근무지에 들어오는 바나나우유. 우리나라 아티스트가 나이키와 협업해서 나오는 새로운 스니커즈. 버림받았다는 상처가 왠지 모르게 사실이 아닐 거라는 기대감까지. 나는 아직도 바라는 것이 많다. 지금의 내가 이렇게나 무너져있다고 해서 앞으로의 시간이 기대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언제든 이 시간은 흘러가 있을 것이고, 나는 오랫동안 극복하지 못한 삶의 터널을 훌쩍 지나있을 것이다. 이 모든 걸 포기하기엔 나는 오랜 시간 동안 이 상태로 살아왔다. 행복하게 만드는 것들을 포기해야 한다. 그건 좀 많이 어렵다. 사랑받기 위해 이제까지 달려온 모든 시간들에 실패해 지금은 괴롭지만 내가 하루하루를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이런 소소한 재미들 덕이었다. 이를 위해 계속 같은 것만 하겠지. 지겹게. 그러나 삶은 원래 지겨운 것이 맞다. 근데 또 지겨워서 좋은 것이다. 실패한 인생을 살더라도 나를 일으켜주는 사소한 무언가가 있다면 하루를 버리기엔 너무 아쉽다. 그래. 사랑받는 인생 다 좋은데. 이것 역시 나에게 중요한 거 맞는데. 돈 많이 벌어서 나 좋은 거 엄마 아빠 멋있는 거 사는 거 다 좋은데. 사실 나는 어느 날 맡은 체리 향기와 같은 소소한 인생의 재미를 좇는 사람이었다. 그런 재미 하나 만드려고 일을 벌이고 돈을 벌고 하는 것이다. 난 감독이 삶의 이 지점에 대해 논한다고 생각한다. 이유를 찾지 못한 당신에게 묻는 것이다. 과연 당신의 삶의 이유가 그렇게 중요한가요? 아닐걸. 의외로 우리의 삶을 가로지르는 것은 사소한 무언가에서 나올지도 모른다. 그게 우리를 바뀌게 하고, 서서히 좋아지게 만들며, 또 살아 숨 쉬게 도와준다. 오늘 하루도 고생 많았다. 매일마다 감상이 다른 내 글을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함을 표한다. 다들 지겨울 것이다. 매일이 현타의 연속이고 우울감은 하루마다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너무 멀리 와버렸다. 그러니까 오래 살자. 힘은 되도록이면 내지 말자. 빨리 가지 말고 천천히,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들을 위해 살자. 그러려면 천천히 걸어야 할 것이고, 남들보다 늦을지도 모른다. 근데 그건 어차피 중요하지 않을수도 있다. 한번 사는 인생 과연 그 목표가 삶의 전부가 되더라도 우리는 그것보다 큰 가치를 지니고 있을테니 말이다. 고통받으며 살더라도 오래오래 살자. 언젠가 만날 체리 향기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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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년 푸른 뱀의 해! 영화로 뱀의 기운 얻어가세요
2025년 을사년 푸른 뱀의 해를 맞아 뱀의 기운을 잔뜩 얻을 수 있는 애니메이션들을 준비해 보았습니다!
특히 <우리 함께 아웃백으로! Back to the Outback>는 푸른 뱀이 주인공인 만큼 놓쳐서는 안되겠죠?
그럼 2025년을 버텨낼 힘찬 기운을 온몸으로 맞으러 가볼까요?
우리 함께 아웃백으로!
Back to the Outback
배드 가이즈
The Bad Guys
쿵푸 팬더
Kung Fu Panda
정글북
The Jungle Book
주토피아 2
Zootopia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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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FF 데일리] 그녀가 고통을 이겨내는 법
시놉시스
일약 스타덤에 오른 신디 로퍼의 삶과 음악. 더불어 흔들리지 않는 페미니스트이자 지칠 줄 모르는 사회운동가로서의 삶을 연대기적으로 조명한다. 시대의 아이콘이자 선구적인 아티스트인 신디 로퍼. 그녀의 세계를 탐험하는 흥미진진한 모험이 지금,여기,바로 시작한다.
EDITOR AMY
1980년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시대의 아이콘 신디 로퍼. 마돈나와 자웅을 겨루었던 여성 보컬리스트. 가수로서 top에 오른것 뿐만 아니라 뮤지컬 제작자,배우, 사회운동 다방면으로 영향을 끼친 그녀의 삶과 음악을 동시에 !
NEXT LEVEL
<Girls Just Want to Have Fun> 싱글차트 2위, <Time After Time> 싱글차트 1위, <She Bob> 3위 등 첫 앨범에서만 히트곡을 쏟아내고, 600만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1985년 그래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신인상을 비롯하며 80년대 중반까지 내는 음악마다 정상을 유지했다. 신디 로퍼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킹키부츠>의 작사 작곡을 맡으며 활동영역을 넓혔는데, 이 작품으로 사상 최초 토니상의 영예를 안았다.
음악을 하지 않을땐 연기, 사회운동 참여하며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그녀는 성공은 한번 끝나는 정상이 아니라 연속이며 계속해서 그 지점에 오르고 싶다고 말한다. 영화를 마무리하면서 그녀는 또 ‘NEXT LEVEL'을 꿈꾼다.
페미니즘, 성 소수자, 가정 폭력
그녀는 왜 소수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을까?
그녀가 직접 경험했기 때문이다. 어렸을때 부터 가정폭력을 당하고, 성소수자였던 그녀의 친구들의 죽음 등 자신에게 일어났던 사건과 경험들을 노래에 녹여냈다. 특히 True Colors는, 자신의 고유한 색을 당당하게 드러내라 라는 가사는 LGBT를 대표하는 곡이기도 하다. 신디 로퍼는 본인을 작사 작곡을 하며 노래에 진심과 위로를 전했다.
'Girls wanna have some fun'
블랙핑크 노래에서도 샤라웃 된 노래 구절이다. 신디로퍼는 80년대부터 페미니즘을 선도했다.
그녀가 어떤 사명를 가지고 하는 느낌이라기 보단 자신이 진심으로 바라는 말들은 거침없이 표현한듯 보인다. 진심을 담았기에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고 사람들이 진정으로 즐길수 있었던거 아닐까. 죽음과 폭력 사이에서 그녀가 좌절하지 않고 세상에 더 나설수 있었던건 이에 연대하는 관객들 덕분이었다. 사람들은 신디 로퍼의 노래에 위로를 받고 신디로퍼는 그런 사람들을 보며 계속 나아가는 중이다.
EDITOR A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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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z세대의 첫사랑 집합소, 지브리
필자는 96년생이다. 소위 사회에서 규정 지은 MZ 세대의 일원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태어난 연도를 기준으로 세대를 나누는 것은 정말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MZ 세대는 80년생부터 2002년생까지를 정했던 것이던데, 인터넷이 빠르게 발달하고, 다른 나라보다 최소 1.5배는 빨리 흘러가는 우리 나라에서 80년생과 2002년생을 비슷한 시기를 살아가는 세대라고 규정짓는 것은 너무 오차범위가 큰 분류라고 본다. 80년생은 인터넷의 태동을 지켜봐왔겠지만 90년대생만 하더라도 누군가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알아서 삶에 인터넷을 녹여 일상화시킨 세대라서 누군가에게 인터넷에서 어떻게 뭘 해야 하는지 배운 적이 없다. 하물며, 2000년대생은 어떠했겠는가. 90년대 생은 최소한 MP3를 알고 있는 세대이지만 2000년대생은 MP3도 모르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따라서, 하나의 세대를 규정하는 기준을 인터넷의 태동으로 규정지어, MZ 세대는 디지털 원주민이고, 90년대 생은 사회적으로 어떠하고, 하는 것은 어른들의 만들어놓은 프레임에 MZ 세대를 가두려 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MZ세대를 인터넷의 발달과 그 인터넷의 발달과 함께 자라온 세대로 규정짓는 것은 어른들의 관점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MZ세대에게 인터넷은 그저 당연하게 있어왔던 생활과도 같은 것이라 같은 또래 사람들 사이에는 인터넷 때문에 특별함을 느낀 적은 없기 때문이다. 우리 세대만의 특별함, 동질감을 느끼기에는 인터넷이라는 단어로는 부족하다. 오히려, 만화 영화를 보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이야기들이 같은 또래끼리 더 먹힌다.
80년대생부터 2000년대생의 일부가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은 과거에 히트했던 만화 영화에 대한 향수를 공유하는 순간일 것이다. 그에 대한 파생효과로 mz 세대들 사이에서 2000년대 초반에 인기가 많았던 애니메이션 주제곡 플레이리스트가 유튜브에 많이 돌아다니고 있다. 그만큼 수요가 많은 컨텐츠라는 것이다.
그 당시의 인기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회사 중에서 쌍두마차를 달리는 두 회사가 있었으니, 미국 애니의 대표 주자, 디즈니와 일본 애니의 대표주자, 지브리가 있다. 그 중에서 나는 오늘 이 글에서 지브리에 대해서, 아니, 나와 같은 세대의 여자라면, 공감할 지브리 속 각자만의 첫사랑 찾기를 실현할 수 있는 글을 써보고자 한다. MZ세대 간의 공감대를 찾기 위해서, 그리고 내 사심을 채우기 위해서.
1. 하울
MZ 세대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던 영화들의 남주들은 소년미가 돋보인다. 그 소년미의 대표격인 캐릭터가 바로 하울이다. 여린데, 전장에서 싸우기도 하고, 다정한데, 예민하기도 이 남자는 여성들의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판타지적 인물이다. 지브리에서 노리고 미남으로 캐릭터 설정을 했다고 하던데(진짜인진 모르겠다) 그런 잘생긴 얼굴을 가지고, 소피만 바라보는 순정파에 전쟁 후 돌아왔을 때에 보이는 안쓰러움까지 겹쳐 꽤 많은 여자들을 노예로 만들기 십상인 성격이다.
2. 하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등장하는 하쿠는 치히로가 마녀의 늪에 빠져 정체성을 완전히 잃어가지 않도록 치히로를 돕는다. 하쿠 자신도 센처럼 이름을 잊고, 유바바의 노예로 살아가는데, 하울과 비교해 보호해주고 싶은 사람이라기 보다는 나를 보호해줄 믿음직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심어줄 만큼 야무진 캐릭터이다. 센은 하쿠가 없었다면, 꽤 오랫동안 마법세계에서 해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센을 탈출시키려고 노력하는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판타지스럽다. 성격으로만 보면, 하쿠가 가장 속깊고, 의지하고 싶어지는 캐릭터라서 나에게는 원픽 첫사랑 캐릭터였다.
3. 아시타카
모노노케 히메에 등장하는 아시타카는 산을 보자마자 반한 사람처럼 행동하는데, 이 점은 조금 이해할 수 없었다. 첫 눈에 반하는것을 믿지 않는 내가 너무 비관적인 것일까. 하지만 자연을 대표하는 산과 인간의 발전적인 욕구를 대표하는 에보시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한다. 자연과 인간의 개발의 공존을 주창하는데, 인간의 생존에 기술이 필요하다면, 과도한 욕심은 지양되어야 한다고 외친다.에보시에 협력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산과는 다른 방식으로 자연을 지키고자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아니, 왜 남주가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하는 건지 이해가 잘 안갔었는데, 영화를 다보고 나니, 그저 중립적인 캐릭터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함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산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점, 무의식중이긴 했지만 산에게 직접적으로 고백하는 장면에서 굉장히 사랑 표현에 있어 솔직한 점이 아주 매력적인 캐릭터였다. 내 사람을 확실히 지킬 줄 아는 평화주의자 같은 느낌이랄까.
4. 작화적 관점
미술에 대해서는 전문적으로 아는 지식은 없지만 지브리의 작화는 참 세심하다. 디즈니의 작화는 해가 갈수록 입체적으로 살아움직이는 듯한 작화가 특징이지만 지브리의 작화는 손으로 그린 티가 확연하게 난다. 2D 만화책을 그냥 움직이는 형태로 만들어놓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 특징이 극대화된 장점으로 표현된 영화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었다고 생각한다. 동화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영화 배경에 하울의 여리여리함은 정말 잘 어울렸다.그런 아날로그적이면서도 세심한 작화는 독자들의 상상의 여지를 제공해 관객만의 관점에서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작화를 더 판타지스럽게 받아들이는 데에 한 몫 했다고 생각한다.
아시타카는 작화가 정말 미남으로 잘 생겼는데, 아시타카가 개인적으로 가장 공들여서 그린 티가 났다고 생각한다. 외모적으로는 가장 취향 저격으로 생겼었다. 하울도 미남이기는 하지만 뭐랄까 여리여리함보다는 조금 더 의지가 확실해보이게 생긴 상을 좋아해서 그런 것 같다. 하지만 성격 상으로는 아시타카가 조금 별로였는데, 그 이유는 그의 중립적인 모습은 달리 말하면, 우유부단으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성격으로는 하쿠가 가장 취향이지만 외모 상으로는 잘생긴 얼굴을 망치는 앞머리가 있는 단발이 이상하게 보일 때가 많았다. 그래서 항상 잘생긴 얼굴을 가리는 답답한 앞머리를 가진 캐릭터라고 생각해왔었다.
하지만 달리 말하면, 친구들과 지브리 얘기를 할 때, 캐릭터들의 작화에 대해 누군가는 산이 취향이네, 소피가 취향이네 하면서 긴 시간 동안 얘기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아, 각기 캐릭터들이 모두 개성있게 생겼음은 확실한 것 같다.
** 지브리에 대한 추억이 있는 동년배들이 있다면 댓글을 달아주셔도 좋을 것 같다. 나와 비슷하게, 또는 다르게 생각하는 자신만의 지브리 첫사랑이 있는지, 내가 제시한 지브리 첫사랑들 말고도 다른 캐릭터들을 좋아한다라든지. 의견은 대환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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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웨이브 <통령소녀> 공식 예고편
혼령과 소통할 수 있는 16살 영매 샤오쩐! 다른 친구들처럼 평범한 삶을 살고 싶지만 그것이 마음처럼 쉽지만은 않다. 신전에서 사람들의 고민을 들어 주고 해결해 주던 일상을 보내던 샤오쩐은 한 학생이 전학 오면서 예상치 못한 일들을 겪게 되고, 그 친구를 통해 사랑과 슬픔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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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도그데이즈> 티저 예고편
2024년 새해, 기분 '개' 좋아지는 다섯 글자 [도그데이즈] 티저 예고편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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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퀴엠과 같던 김창열의 물방울
'물방울 화가'라는 이름을 가진 화백 김창열의 자서전과 같은 영화다. 보고 싶었던 영화를 개봉 전 시사회를 통해 보게 되어 기대가 컸는데,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써 시사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기대 이상의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자서전과 같지만 하나의 예술 작품을 보는듯했다. 영화를 보고 나와서 내 입 밖으로는
'그래, 이런 영화를 기다렸어-'를 연신 내뱉었다.
다니던 회사에서 예술 강연을 준비할 기회가 생겼었다. 그때 박서보, 김창열 작가 등 우리나라 미술계를 대표하는 화백들에게 주목하게 되었다.
한때는 두 화백의 작품을 자주 찾아보기도 했었던 기억이 난다. 특별히 김창열 화백은 물방울이라는 특정한 도구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인지 궁금했던 것 같다.
나의 궁금증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영화<물방울을 그리는 남자>는 김창열 화백이 왜 물방울 화가라고 불리는지에 관해 답을 한다.
김창열 화백이 물방울을 그리는 이유에 관해서 말이다. 이렇게 설명할 수도 있겠다.
김창열 화백의 물방울을 만나기 전의 삶과 물방울을 만난 이후, 물방울을 이해하게 된 아들의 이야기라고.
'아직도 호랑이가 산에 있던' 북한의 맹산 그리고 남한과 뉴욕, 프랑스, 제주까지. 화백 김창열을 만들어간 이야기라고도 말할 수 있다.
김창열 화백은 전쟁의 아픔을 뼈아프게 겪은 세대의 인물이다. 그가 겪었던 삶의 여러 모양과 아들에게 자주 들려줬던 이야기 그리고
노래를 함께 그렸다. 영화<물방울을 그리는 남자>의 감독이자 그의 둘째 아들인 김오완은 아들의 시선과 함께 화백 김창열에 대한 '경외감'을
표현했다. 영화는 물방울에 집착한 한 화백의 삶의 아픔과 애환. 고집. 침묵. 고요 속의 노래가 가득 매운다.
김오완은 아버지 김창열에게는 침묵과 기묘한 균열이 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과는 다른 '인간', '예술가'인
김창열을 이해하는 과정이라기보다는 아버지 김창열 그리고 인간 김창열의 침묵과 기묘한 균열에 가까이 다가가는 과정을 기록한 영화다.
그가 보고 겪은 여러 죽음들을 오랫동안 추모하던, 레퀴엠과 같던 김창열의 작품들.
그가 수없이 그린 물방울의 의미를 영화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를 통해 꼭 만나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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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트 레이더스> 메시지만 강렬한 디스토피아 영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참석한 영화 <아네트>의 시사회 관람 후기입니다.
2043년, 전쟁으로 황폐화된 땅에는 새로운 제국을 세우려는 독재국가 에머슨이 들어선다. 거대한 새를 연상시키는 드론에 의해 감시받는 세상을 만든 가운데, 에머슨은 시민권이 없는 미성년자 모두를 군인으로 양성하기 위해 아카데미로 끌고 간다. 그러나 에머슨의 통치를 따르지 않는 '니스카(엘레 마이아 테일페데스)'는 딸 '와시즈(브룩클린 르텍시에 하트)'와 함께 숲 속에서 유랑생활을 한다. 그러던 중 와시즈가 큰 부상을 당하고, 약을 구하러 마을에 온 니스카는 도리어 병사들에게 와시즈를 빼앗기고 만다. 딸과 헤어진 후 슬픔에 잠긴 채 살아가던 니스카. 그러 그녀 앞에 마찬가지로 에머슨의 지배에 저항하는 토착민 크리 족 사람들이 나타나고, 니스카는 그들과 함께 딸을 되찾기 위한 반격에 나선다.
제71회 베를린 국제영화제와 제46회 토론토 국제 영화제를 비롯한 세계 유수 영화제에 공식 초청된 바 있는 <나이트 레이더스>는 다니스 고렛 감독의 첫 장편 연출작이다. 고렛 감독은 <나이트 레이더스>의 출발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토착민의 삶은 나날이 극심해지는 혐오와 차별 역사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런데도 그간 제삼자에게 토착민의 이야기는 항상 신기하고, 민속적이고, 옛날이야기에 불과했다. 이에 현실에서 목소리를 내기 두려운 사람마저 목소리를 내게 하는 힘이 있는 SF 및 판타지와 같은 장르에 보편적인 역사이기도 한 토착민의 비극을 녹여내려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나이트 레이더스>는 세계 각지의 토착민, 원주민들이 겪은 구체적인 사건들을 한 데 모아 디스토피아 세계를 묘사하고 있다.
우선 다니스 고렛 감독 본인이 캐나다 사람인만큼 <나이트 레이더스>는 캐나다 역사 속 원주민들의 비극적인 경험을 스크린으로 불러온다. 작중 에머슨은 전쟁에서 패배한 이들에게 두 가지 차별정책을 시행하며, 이는 영화의 주요한 갈등을 유발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하나는 거대한 벽으로 대표되는 분리 정책이다. 에머슨 시민이 사는 곳과 비시민권자가 사는 곳을 철저히 나누고, 비시민권자에게는 드론을 통해 식량을 배급하면서 철저히 통제하려 든다. 이러한 에머슨의 통치 정책은 캐나다 정부가 원주민들에게 시행한 탄압과 강압적 동화 정책과 똑 닮아 있다. 과거 영국령 캐나다 정부는 원주민들의 땅을 강탈하고 그들을 보호 구역에 집어넣었다. 또 보호구역 내에 부실한 인프라를 설치하거나, 보호 구역에서 나오면 연금을 받지 못하게 하기도 했다. 본래 유목민이던 이들에게 낯설고 고달픈 생활을 강제함으로써 자신들에게 의존하도록 만든 것이다.
다른 하나는 에머슨 아카데미의 존재다. 에머슨 아카데미는 과거 캐나다 정부가 설립한 '레지덴셜 스쿨(Residential School)'의 다른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레지덴셜 스쿨은 반란과 분쟁의 빌미 근절하기 위해 같은 국가관과 동질성을 공유하도록 영국계 캐나다인의 가치관을 원주민들에게 주입하려는 목적으로 세원진 학교다. 이 학교들에서 원주민들은 영어식 이름으로 강제 개명되고, 영어만을 사용할 수 있었으머, 원주민 전통의상 착용을 금지당하고 백인들이 입는 양복, 양장 착용이 강제되었다. 이곳에서 어린 소년소녀들은 교사에게 자주 강간당하기도 했다. 결국 부모 밑에서 사랑받지 못하고 사육되다시피 한 아이들은 가족애를 잃을 수밖에 없었고, 이는 원주민들의 가정과 사회를 더욱 빠르게 파멸로 이끌었다.
영화는 이처럼 레지덴셜 스쿨에서 자행된 악습들을 아카데미라는 가상의 공간 안에서 묘사한다. 에머슨은 어린아이들에게 선진 교육을 통해 삶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핑계를 대면서 그들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고, 가족과 떨어져 지내게 하며 정체성을 약화시킨 뒤 철저히 국가에 충성하도록 강제한다. 곧 실제 역사적 사건이 와시즈가 아카데미 내에서 엘리자베스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며 어머니 니스카와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 아이들이 밤이면 기숙사에서 한 명씩 불려 나가 성폭행당하는 것, 그리고 아카데미에서 교육받은 젊은 아이들이 국가의 명령을 거부하지 못한 채 어머니에게 총구를 겨누는 장면으로 바뀌어 재현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딸을 구하기 위해 아카데미에 침투하는 니스카의 모습에는 단순한 모성애를 넘어서는 의미가 숨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나이트 레이더스>는 뉴질랜드 원주민인 마오리 족의 역사도 디스토피아 세계에 녹여내고 있다. 이는 본 작의 총괄 프로듀서이자 <토르: 라그나로크>와 <조조 래빗>의 감독을 맡은 바 있는 타이카 와이티티에 게 마오리족 피가 흐르기 때문으로 보인다. 작중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드론의 존재가 단적인 예시다. 드론은 에머슨의 통치 기반이라 할 수 있는 신무기로, 미등록 미성년자를 수색 및 추적하고, 전투용 내지는 식량 배급용으로도 활용된다. 이때 드론이 배급한 식량에 바이러스가 숨어 있었던 것은 유럽인들에 의해 새로운 전염병이 퍼져 나갔던 사례들과 오버랩된다.
이에 더해 드론의 존재는 유럽인의 등장과 동시에 당시 기준 최신 무기였던 머스킷 총이 뉴질랜드에 전래되고, 이 무기를 지닌 부족이 그렇지 못한 부족을 착취하고 노예로 만든 사건인 '머스킷 전쟁'이 마오리족 역사에 기록된 것을 연상시킨다.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머스킷 전열 보병처럼 길게 늘어서서 일제히 총을 겨누어 화망을 형성한 채 접근해오는 에머슨 군인들과 빈약한 무장으로 맞서는 크리 족의 모습도 영국군과 마오리 족 사이에 펼쳐진 '마오리 전쟁'의 변형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영화 속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인 드론과 와시즈가 지닌 독특한 능력이 더해져 전투의 향배를 뒤바꾸게 되는 전개는 결국 19세기 당대 신무기인 머스킷에 의해 피로 얼룩졌던 역사를 영화적으로 치유하는 장면이나 다름없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대목은 나다와 뉴질랜드 두 사례에 대해 여러 토착민들의 역사가 공유하는 보편성을 맛볼 수 있는 지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스페인군이 침입한 멕시코나 남아메리카의 사례만 보더라도 알 수 있듯이, 신무기나 새로운 전염병 때문에 유럽 이주민들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한 사례는 지구 이곳저곳에 모두 흩어져 있기 때문이다.
다만 상이한 지역의 공통된 역사적 사건들을 한 데 모은 <나이트 레이더스>의 조각보 같은 매력이 온전히 스크린에서 전해진다고 보기는 어렵다. 장르 영화로서의 완성도에 아쉬움이 남기 때문이다. 사실 디스토피아 세계를 다루는 장르 영화인 관계로 <나이트 레이더스>에는 다른 영화들을 연상시키는 장면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그 유사함의 정도가 상당히 높은 편이고, 익숙한 설정과 전개를 풀어내는 방식에 있어서도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인상이 강하게 남는다. 그러다 보니 시도 자체는 인상적이었던 영화의 메시지와 감흥도 모두 깎여버리고 만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대표작인 <아바타>와의 비교가 대표적인 사례다. 사실 <아바타>의 경우에도 충격적이었던 시각 효과와 달리, 스토리적인 측면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주인공인 제이크 설리가 판도라 행성의 원주민인 나비족의 구세주가 되어 인간의 침입을 막아낸다는 플롯은 충분히 예측 가능하고 평면적이라는 비판을 피하지 못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바타>는 나비족의 역사와 사회, 내외적 갈등, 그리고 그들의 신과 구세주인 에이와와 토루크 막토에 대해 충분히 설명해주었고, 그 결과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는 강력한 몰입감을 자아내는 데 성공했다.
반면에 <나이트 레이더스>의 메시지와 전개 양측면에서 모두 중심이 되어야 할 크리 족의 이야기는 디테일이 부족하다. 그저 몇 마디의 대사와 설정으로 구성되어 있을 뿐이다. 토착민 출신이지만 토착민과 그렇지 않은 이들 사이에서 살아가던 니스카와 와시즈 모녀의 이야기와 만나는 순간에도 별다른 갈등 없이 흡수되어 버린다. 그렇기에 수많은 역사적 사례들을 한 곳에 모았음에도 불구하고 작중 크리 족의 서사는 토착민 공동체로서의 특색이 살아나지 않는다. 단지 독재국가가 지배하는 디스토피아 세계에 반대하는 저항군이라는 익숙한 모습만 눈에 들어온다. 이는 <나이트 레이더스>가 결코 인상적인 장르영화는 아닌 이유다.
유사성과 진부함을 넘어서지는 못한 것 외의 한계도 있다. 스릴러 영화인데도 긴장감을 거의 불어넣지 못하는 식이다. 실제로 영화는 제목인 'Night Raiders'가 '밤의 침입자'라는 뜻인데도 불구하고 밤에 벌어지는 여러 사건들을 제대로 그려내지 못한다. 에머슨 아카메디에 갇힌 와시즈를 구출하기 위한 니스카와 크리 족의 습격만 보더라도 작전의 중간 과정부터 아카데미에서 탈출하려는 과정에 이르는 세부 사항들이 지나치게 많이 생략되었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다. 그러다 보니 해당 시퀀스는 클라이맥스로 고조되는 중간 다리로써 그 부조함을 숨기지 못한다. 그나마 숲에서 숨어 지내던 니스카 모녀와 그들을 습격한 드론 간의 짧은 전투가 세계관을 소개하는 역할을 충실히 이행할 뿐이다. 이처럼 <나이트 레이더스>는 뜻깊고 인상적인 아이디어의 잠재력을 실현하기에는 부족했던, 투박한 장르 영화로 남는 데 그치고 만다.
P(Poor, 형편없음)
어설픈 짜임새 때문에 빛이 바랜 역사적 비극의 영화적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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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힘내라고 하면 힘낼 수 있나요
진짜 포기하고 싶다. 아니 포기해야겠다. 애초부터 불가능한 꿈을 꿨기 때문에 좌절감도 맛보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노력을 무지막지하게 들여도 안 되는 것이 있으니 삶이란 역시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하다못해 메이플스토리의 데미안과 스우를 잡는 것도 숙련도가 올라가면 쉬워지는데 삶은 그런 게 없어 잔인하다. 난 근본적으로 사랑받기엔 못돼 쳐 먹은 인간이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만하고 싶다. 죽고 싶은 건 아닌데 당분간 뭘 하고 싶다는 마음이 안 든다. 모든 것이 싫다. 무엇이든 할 맘이 안 든다는 뜻이다.
그래서 포기하면 뭐 어쩔 건데? 엄마, 아빠한테 내 정신적인 고통을 줄줄 늘어놓으면 어떤 지점이 달라지나? 사실 선생님에게 최근의 내 상태를 말한다고 해서 바뀌는 건 없었기에 이 선택이 내 인생을 바꿀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냥 똑같은 하루의 반복일 것이다. 몸이 고장 난 것도 바뀌지 않을 거고. 뭔갈 사고 싶은 강박은 아마 죽을 때까지 가지 않을까 싶다. 맞다. 나는 지친 것 같다. 유럽에 갔다 와도 지친 게 해소되지 않아 '이런 식으로 가다간 나의 정신적 탈진은 아마 영원할 것'이라고 설레발을 쳤던 때가 생각난다. 다시 생각해보면 1년 동안 지치는 타이밍이 한 번도 안 오는 게 더 이상하다. 어물쩡 넘긴 나 자신이 싫다. 쉬어야 할 때 제대로 쉬질 못했으니 지금 닳고 닳았다. 요즘 나는 삶의 동기부여가 단 1%도 남지 않았다. 난 남들에게 위로해주는 법은 알았지 나 자신에게 격려를 하는 법이라곤 단 조금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사람도 사랑도 다 무섭다. <굿 윌 헌팅>과 <그린 북>이 어쩐지 환상 속의 이야기처럼 들리는 요즘이다. 가끔은 내가 쓴 글이 사실이 아니길 바랄 때도 많은데 요즘은 반대의 기분을 느끼고 있다. 정말 내가 쓴 글이 맞는 말이란 말인가. 인간의 가장 좋은 친구가 돈이라기엔 난 경험해야 할 것들이 많지 않나. 상상과 희망도 재미가 없는 오늘 난 천천히 가는 버스에 기대 잡생각을 하고 있다.
<체리 향기>는 소소한 일상에 관한 영화다. 나의 인생영화 중 한 편으로 꼽는 작품이기도 하다. 트럭을 운전하는 주인공. 어쩐지 표정에서 사연이 많아 보인다. 이 사람은 갑자기 지나가는 남자 한 명을 태운다. 군인을 태운 주인공 바디. 바디는 군인에게 본인의 사연을 늘어놓는다. 그는 죽고 싶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이유를 찾지 못했다고 한다. 어디 땅굴에 묻힐 테니 그 조력자가 돼 달라는 부탁을 한다. 군인은 당연히 거절한다. 다음 손님으로 신학도를 태운 바디. 같은 부탁을 하지만 역시 거절한다. 죽는 것도 예삿일이 아니다. 바디는 세 번째 손님을 찾아 나선다.
세 번째 손님은 나비를 박제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아들의 치료비가 급해 바디의 제의를 받아들인 이 노인은 주인공과 차를 타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주제는 삶의 의미에 관한 이야기다. 나 역시 죽고 싶던 때가 있었어요. 내가 인생을 살아야 했던 이유는 코 끝에 스친 체리 향에서 왔죠. 소소한 삶의 가치에 대해 설명하는 노인. 바디는 귓등으로 듣는 둥 마는 둥 한다. 아예 말을 안 들은 것 같기도 하다. 사실 바디에게 변화가 있긴 했다. 노인을 다시 찾아간 바디. 내일 내가 살아있을지도 모르니 적극적으로 깨워달라는 요청이었다. 영화는 웃으며 바디의 근심 걱정 모든 것을 떠나보내지 않는다. 노인의 진정성이 통했다고 해서 바디의 우울함이 사라지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바디는 다시 무덤 아래에 누웠다. 생각이 바뀐 게 없는듯한 바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디의 요청에서 우리는 뭔가를 기억할 수 있다. 유의미한 차이는 있지만 이 무언가가 어떻게 표현되는지는 정의해주지 않은 채 영화는 그렇게 끝난다.
영화에 엔딩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바디는 죽을 곳에 다시 누웠다. 그의 생각은 변화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당연하다. 난 인생을 얻는 동기부여의 힘이 갑자기 어느 날 번쩍하고 생기는 게 아니라고 본다. 한참을 어두운 터널 속에서 살 때 느낀 게 있다. '힘 내'는 너무 포괄적인 단어라는 것이다. 힘을 내? 힘을 낸다는 게 무슨 뜻이지? 힘 내면 내가 이 뭐 같은 일상을 이겨낼 수 있나? 당연히 이 반응이 '와닿지 않았다'란 말을 자격지심에 빠져 거칠게 하면 나오는 것이란 걸 모르지는 않는다. 말하는 이에게 상처 줄 생각 단 1도 없지만 큰 골자가 되는 생각은 아직도 변함이 없다. 앞서 쓴 바와 같이 그 말을 하는 이는 내가 다시 기운을 차렸으면 하는 마음에서 한 것일 테지. 난 살짝 다르다. (그렇다고 힘 내!라는 말을 하는 게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그런 말을 잘하지 않는다. 어차피 내가 겪는 비극은 나를 다시 공격할 것이고, 난 같은 방식으로 또 표류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바디는 모든 걸 웃어넘겨 행복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단 조금의 변화만 있었다.
그렇기에 영화는 사려 깊다. 바디의 인생이 무조건 다 잘 풀릴 거라고 묘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에서 부정적인 순간을 마주할 때를 생각해보자. 어느 순간을 극복했다고 해서 비슷한 불행이 찾아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나? 행복이 갑자기 뚝 떨어지나? 아닐 것이다. 삶은 같은 순간의 반복이다. 그래서 어느 것을 극복했다는 생각이야 말로 인간의 교만일 수도 있다. 큰 힘을 줘가며 삶의 순간을 지나가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다. 이 이유로 인생에 환기란 건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 같다. 환기가 안되기 때문에 상처는 누적될 수밖에 없다. 또 힘 내!라는 말에 힘을 내기엔 우리 인생은 너무 곪았다. 모두가 심하게 깊게 파여서 단순히 끌어올리는 게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다. 목표에 실패하기. 사랑하는 누군가가 떠나기. 영원한 이별. 이런 삶을 가로지르는 실패는 항상 우리 곁에 있다. 이에 대한 생각이라고 하는 건 우리 머릿속에서 통제할 수 있는 요소가 아니기 때문에 상처와 우울함은 천둥번개 치듯이 갑자기 사라지지 않는다. 이 때문에 우리는 필연적으로 삶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 과거를 지워버린다? 지울 수 있으면 인간이 아니지.
감독은 이런 관점에서 영화를 보는 우리에게 좀 특별한 시각을 보여준다. 간단하다. 인생을 사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 것이다. 그리고 그게 전부라고 말하는 것 같다. 영화는 극적인 성장을 보여주지 않는다. 생의 목적에서 진 인물이 다시 이겨내는 걸 제시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분명한 연출 의도라고 생각한다. 어차피 이 사람은 같은 곳에서 똑같은 실패를 경험할 것이다. 여러분은 예외인가? 아니다. 여러분이 사는 이유가 무엇이든 결과적으로 같은 곳에서 머무르는 건 매한가지일 것이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무언가를 위해 달려왔다고 생각해왔지만 나는 지금의 이 기분이 뭔지 모르겠다. 죽고 싶은 건 절대 아니다. 엄마 아빠가 나한테 못하냐? 그것도 아니다. 나는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기분이 뭔지 모르겠다.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외로움인지. 권태인지. 뭔가를 이겨내기 위해 그렇게 노력해왔지만 그게 정말 의미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또 언제는 사람들에게 기회를 열어주는 게 돈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그건 내가 나를 속였던 거짓말이었다. 나는 내 20대를 관통하는 동기부여보다 더 얻고 싶은 것을 마음속에 둔 인간이었고 그 관점에서는 사실 실패한 인생을 살고 있다. 이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이런 나를 보여주는 증거다.
근데 또 삶을 포기하라 한다면 아쉬울 것 같다. 아니 사실 지금 당장은 모든 걸 던져버리고 쉬은 게 맞긴 하다. 당장 이 세상을 뜨고 싶지는 않다. 나에겐 수많은 것들이 남아있다. 아직도 정산 못 받은 돈. 가지 못한 여행지. 공익근무지에 들어오는 바나나우유. 우리나라 아티스트가 나이키와 협업해서 나오는 새로운 스니커즈. 버림받았다는 상처가 왠지 모르게 사실이 아닐 거라는 기대감까지. 나는 아직도 바라는 것이 많다. 지금의 내가 이렇게나 무너져있다고 해서 앞으로의 시간이 기대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언제든 이 시간은 흘러가 있을 것이고, 나는 오랫동안 극복하지 못한 삶의 터널을 훌쩍 지나있을 것이다. 이 모든 걸 포기하기엔 나는 오랜 시간 동안 이 상태로 살아왔다. 행복하게 만드는 것들을 포기해야 한다. 그건 좀 많이 어렵다. 사랑받기 위해 이제까지 달려온 모든 시간들에 실패해 지금은 괴롭지만 내가 하루하루를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이런 소소한 재미들 덕이었다. 이를 위해 계속 같은 것만 하겠지. 지겹게. 그러나 삶은 원래 지겨운 것이 맞다. 근데 또 지겨워서 좋은 것이다. 실패한 인생을 살더라도 나를 일으켜주는 사소한 무언가가 있다면 하루를 버리기엔 너무 아쉽다. 그래. 사랑받는 인생 다 좋은데. 이것 역시 나에게 중요한 거 맞는데. 돈 많이 벌어서 나 좋은 거 엄마 아빠 멋있는 거 사는 거 다 좋은데. 사실 나는 어느 날 맡은 체리 향기와 같은 소소한 인생의 재미를 좇는 사람이었다. 그런 재미 하나 만드려고 일을 벌이고 돈을 벌고 하는 것이다. 난 감독이 삶의 이 지점에 대해 논한다고 생각한다. 이유를 찾지 못한 당신에게 묻는 것이다. 과연 당신의 삶의 이유가 그렇게 중요한가요? 아닐걸. 의외로 우리의 삶을 가로지르는 것은 사소한 무언가에서 나올지도 모른다. 그게 우리를 바뀌게 하고, 서서히 좋아지게 만들며, 또 살아 숨 쉬게 도와준다. 오늘 하루도 고생 많았다. 매일마다 감상이 다른 내 글을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함을 표한다. 다들 지겨울 것이다. 매일이 현타의 연속이고 우울감은 하루마다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너무 멀리 와버렸다. 그러니까 오래 살자. 힘은 되도록이면 내지 말자. 빨리 가지 말고 천천히,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들을 위해 살자. 그러려면 천천히 걸어야 할 것이고, 남들보다 늦을지도 모른다. 근데 그건 어차피 중요하지 않을수도 있다. 한번 사는 인생 과연 그 목표가 삶의 전부가 되더라도 우리는 그것보다 큰 가치를 지니고 있을테니 말이다. 고통받으며 살더라도 오래오래 살자. 언젠가 만날 체리 향기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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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년 푸른 뱀의 해! 영화로 뱀의 기운 얻어가세요
2025년 을사년 푸른 뱀의 해를 맞아 뱀의 기운을 잔뜩 얻을 수 있는 애니메이션들을 준비해 보았습니다!
특히 <우리 함께 아웃백으로! Back to the Outback>는 푸른 뱀이 주인공인 만큼 놓쳐서는 안되겠죠?
그럼 2025년을 버텨낼 힘찬 기운을 온몸으로 맞으러 가볼까요?
우리 함께 아웃백으로!
Back to the Outback
배드 가이즈
The Bad Guys
쿵푸 팬더
Kung Fu Panda
정글북
The Jungle Book
주토피아 2
Zootopia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