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ELM2021-03-23 22:42:00
마담 보바리 (1949) / Madame Bovary (1949)
/ 감상 /
이 영화는 '마담 보바리' 소설의 원작자인 플로베르가 재판을 받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의 죄목은 문란한 혹은 사회의 규율을 위반하는 소설을 지은 죄이다.
그는 마담 보바리의 욕정이 넘치는 모습은 사회가 만든 것이라고 말한다.
근데 사실 난 잘 모르겠다.
그 시대는 여성을 사회적으로 억압하고 여성이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고 성적으로 어필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여기는 사회적 분위가 있었다는 것을 사실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가 자신의 사랑 혹은 욕망을 잘못된 방식으로 표현하고 분출하는 마담 보바리를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을까?
이건 아닌 것 같다.
그녀가 찰스를 비롯한 자신의 가정에 한 행동을 옹호하기 위한 발언으로밖에 안보인다.
여기서의 마담 보바리는 그냥 욕망에 쩌들어서 가정을 버린 여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폐급 인간이다.
솔직히 보면서 찰스가 너무 불쌍해서 절로 욕이 나왔다.
노트북의 노아를 잇는 찐 사랑꾼 찰스..
자신 몰래 바람피고, 그 내연남에게 배신당했다고 남편 앞에서 실신하고, 자기 앞으로 빚을 잔뜩 떠넘기고, 갑자기 자살하는 그녀 앞에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그의 찐사랑과 대인배적 모먼트에 무릎을 탁치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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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소설을 원작으로 한 고전명작영화!
내가 본 영화 중 아마 가장 오래된 영화 아닐까..
Madame Bovary, C'est moi!
- Gustave Flaubert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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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짓으로 둘러쌓인 세계에서 기대한 사랑
거짓으로 둘러쌓인 세계에서 기대한 사랑
영화 <무뢰한>
감독] 오승욱
출연] 전도연, 김남길, 박성웅
시놉시스] 범인을 잡기 위해선 어떤 수단이든 다 쓸 수 있는 형사 정재곤. 그는 사람을 죽이고 잠적한 박준길을 쫓고 있다. 그를 잡을 수 있는 유일한 실마리는 박준길의 애인인 김혜경. 재곤은 정체를 숨긴 채 혜경이 일하고 있는 단란주점 마카오의 영업상무로 들어간다. 하지만, 재곤은 준길을 잡기 위해 혜경 곁에 머무는 사이 퇴폐적이고 강해 보이는 술집 여자의 외면 뒤에 자리한 혜경의 외로움과 눈물, 순수함을 느낀다. 오직 범인을 잡는다는 목표에 중독되어 있었던 그는 자기 감정의 정체도 모른 채 마음이 흔들린다. 그리고 언제 연락이 올 지도 모르는 준길을 기다리던 혜경은, 자기 옆에 있어주는 그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스포일러 유의#
느와르라는 장르를 선택한 멜로
언더커버, 살인, 경찰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영화 무뢰한이 느와르 장르를 표방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작품을 본 이들 중에서 과연 무뢰한을 느와르 영화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영화 느와르는 정재곤와 김혜경의 멜로를 위해 장르적으로 느와르라는 조미료를 조금 섞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살인마 박준길을 잡기 위해 혜경이 일하는 술집의 언더커버로 들어가면서 밤에 만나는 화려한 혜경이 아닌 모든 일이 끝나고 아침 해와 함께 평범한 여성으로 돌아가는 혜경을 목도하면서 그녀가 가진 삶의 무게와 상처에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게 된다. 자신 역시 현재 자신의 상황이 범죄자와 형사의 갈림길에서 그 정체성을 스스로 의심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흔들리는 혜경을 보며 자신을 보는 것과 같은 측은함과 여성으로서의 매력을 동시에 느꼈을 것이다. 특히, 서로의 몸에 난 상처들을 공유하면서 그 상처가 전혀 아름다운 기억이 아님을 알게 되고 서로의 아픔을 말없이 이해해줄 수 있는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그 둘은 마음의 문을 조금씩 열기 시작한다. 하지만 정재곤은 경찰로서 박준길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사살을 하게 되고, 이를 목격한 김혜경은 배신과 분노에 치를 떨며 다시 밑바닥 인생을 살아간다. 그렇게 다시 조우한 정재곤과 김혜경. 재곤은 혜경에게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자신은 배신을 한 적이 없다고 말하지만 그런 그에게 혜경은 칼을 찌르며 영화는 마무리된다. 이처럼 영화 무뢰한 정재곤과 김혜경이라는 캐릭터가 서로를 경계하다가 잠시 공감하고, 그리고 한 사건으로 인해 헤어지는 어찌보면 사랑과도 같은 그 이야기를 느와르라는 장르를 통해 표현을 해내고 있었다.
확답을 하지 않는 영화
많은 이들이 후기에서 이렇게 찝찝할 수가 없다며 영화평을 남기곤 했었다. 결말 부분만 봐도 김혜경의 칼에 찔린 정재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결론을 내려주지 않는다. 그리고 사실 영화 속 두 남녀, 정재곤과 김혜경 사이에서도 그 관계를 정의하기 힘들 정도로 애매한 관계를 이어나간다. 이 둘이 과연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언더커버로서의 역할을 하기 위해 그런 감정을 꾸며내는 것인지 처음봐서는 도통 알 수 없는 애매한 대사들로 영화는 진행된다. 이러한 애매함과 오묘함 때문에 감정선을 제대로 캐치하고 싶은 사람들은 결국 N차 관람을 이어나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영화를 반복해서 보다보면 대사에서 가려져 있던 캐릭터의 심리가 행동을 통해서 그리고 한 프레임에 잡히는 구도를 통해서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이 캐릭터가 현재 어떤 상태이고 상대방이 던진 질문에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조금이나마 캐치할 수 있다. 재곤과 혜경의 첫만남 후 해장국 집에서 대화를 나누던 그들이 거리로 나왔을 때, 서로에게 경계심을 품고 있을 때는 한 프레임 속에서도 여러 장치를 통해 둘 사이에 선을 그려놓고 있었다. 하지만 점차 이들이 서로에게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하면서 이 둘을 가르던 선은 점차 사라진다. 하지만 재곤의 배신 이후 다시 만난 곳에서는 재곤이 혜경을 바라보는 시선에서는 선이 등장하지 않지만, 혜경이 바라보는 시선에서는 재곤을 선 밖에 두고 있다. 특히 칼을 들고 나가며 재곤과 조우할 때는 그림자 속에 있는 혜경과 빛 속에 있는 재곤과 같이 뚜렷한 구분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아마 혜경은 재곤의 행동을 배신으로 받아들이고 그에 대한 존재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지만 혜경을 알게된 순간부터 재곤은 자신은 일로써 해야할 행동을 했을 뿐 혜경에게만큼은 진심이었음을 알려주는 장치가 아니었을까 하는 나름의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둘은 순수한 사랑에 목말라 있었다.
그럼에도 확실하게 단언할 수 있는 것은 두 주인공, 정재곤과 김혜경은 사랑에 목말라 있는 인물들이었다. 경찰로서 재곤은 다양한 범죄자를 만나며 그들의 거짓말에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며 자신 역시 그들과 비슷해지진 않을까 하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면서, 아내와 이혼을 한 상태다. 그리고 김혜경 역시 마담으로서 웃음을 팔며 다양한 사람들의 거짓에 노출되고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 박준길이 자신으로 인해 살인을 저질렀다는 죄책감과 자신의 돈으로 도박을 하며 돈을 다 잃어버린 그에 대한 답답함을 가지고 살아간다. 이 둘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그들의 환경이 거짓으로 둘러쌓여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한 거짓 속에서 재곤과 혜경은 서로에게 비슷한 상처와 아픔이 있음을 알게 되고,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이 아닌 그저 인간 정재곤과 인간 김혜경으로서 순수하게 서로에게 마음을 열게 된다. 특히, 정재곤은 경찰이라는 직업적인 정체성의 혼란 속에서 오히려 이영준이라는 새로운 인물로서 자신을 감추면서 이 변화가 오히려 정재곤에게 순수한 사랑의 감정을 일깨우게 해준 것이 아닐까 싶다. 서로의 정체를 숨기고 그저 대화를 통해 서로를 알아가며 친목을 다지는 가면무도회 속의 사람들처럼 말이다. 그렇게 자신 곁으로 온 혜경에게 재곤은 우리 함께 살까? 라며 혜경의 마음을 떠보자 해경은 ‘진심이야?’하면서 영화 속에 가장 행복한 미소와 기대감을 표현한다. 하지만 바로 재곤은 ‘그걸 믿냐’며 자신이 표현한 진심을 다시 쓸어담자 혜경은 활짝 열렸던 마음을 황급히 닫으며 그저 잡채를 먹을 뿐이었다. 이 장면에서만 봐도 혜경이 얼마나 순수하게 한 남자와의 사랑을 원했는지 잘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 기대에 재곤은 형사로서 언더커버였음 밝힘으로써 져버리게 되고, 더욱 큰 배신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혜경은 자신의 순수함을 짓밟은 재곤에게, 그리고 순수했던 자신에 대한 분노를 칼로 재곤의 배를 찌르며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칼에 맞은 재곤은 그녀를 향한 마음만은 진심이었기에 상처를 감추며 동료 경찰들에게 먼저들어가라는 손짓을 하고 마지막까지 그녀를 지켜준 것이 아닐까 싶다.
영화 무뢰한은 남녀의 오묘한 감정선을 다룬 작품으로, 다시 볼 때마다 보지 못햇던 작은 요소들을 더 발견하는 재미가 있는 작품이었다. 다음에 다시 본다면 새롭게 발견한 요소들로 그 감정선을 더 풍부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남기는 수작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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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셋째 주 극장 개봉 & 예정작
안녕하세요 씨네랩입니다. 7월 4주차 개봉예정작을 소개합니다
한국에서 적극적인 홍보를 펼치고 있는 데드풀과 울버린 !
데드풀 실사영화 시리즈의 주조연 캐릭터들의 재등장은 물론, 영화 로건의 타임라인까지 등장하는듯 한데요!
한국에서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을 받고 개봉된 첫 번째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이자 영화 예고편 조회수가 3억 6천만회를 넘어서며 역대 최고 시청 기록했다고 합니다.
과연 데드풀의 대사처럼 마블의 구세주가 될 수 있을지
데드풀과 울버린
개요: 공포 | 미국, 이탈리아 | 89분
감독: 마이클 모한
주연: 시드니 스위니, 알바로 모르테
개봉: 2024.07.17.
배급: (주)디스테이션
히어로 생활에서 은퇴한 후, 평범한 중고차 딜러로 살아가던 ‘데드풀’이 예상치 못한 거대한 위기를 맞아 모든 면에서 상극인 ‘울버린’을 찾아가게 되며 펼쳐지는 도파민 폭발 액션 블록버스터
미니언즈 4
개요: 공포 | 미국, 이탈리아 | 89분
감독: 마이클 모한
주연: 시드니 스위니, 알바로 모르테
개봉: 2024.07.17.
배급: (주)디스테이션
슈트-업 하고 악당 전담 처리반 AVL이 된 ‘에이전트 미니언즈’와 미니언즈 만큼 귀여운 ‘그루 주니어’가 태어나면서 더욱 완벽해진 ‘그루 패밀리’. 이들 앞에 과거 그루의 고등학교 동창이자 그에게 체포당했던 빌런 ‘맥심’이 등장하고, 오직 그루를 향한 복수심에 불타올라 탈옥까지 감행한 맥심은 그루 패밀리의 뒤를 바짝 추격하며 위협을 가하기 시작하는데...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개요: 공포 | 미국, 이탈리아 | 89분
감독: 마이클 모한
주연: 시드니 스위니, 알바로 모르테
개봉: 2024.07.17.
배급: (주)디스테이션
어릴 적에 부모를 여읜 폴은 말을 잃은 채 두 이모와 함께 산다. 이모들은 폴을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 만들려고 했지만 33살의 폴은 댄스교습소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는 것이 전부이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이웃 마담 프루스트의 집을 방문한 폴은 그녀가 준 차와 마들렌을 먹고 과거의 상처와 추억을 떠올리게 되는데…
진주의 진주
개요: 공포 | 미국, 이탈리아 | 89분
감독: 마이클 모한
주연: 시드니 스위니, 알바로 모르테
개봉: 2024.07.17.
배급: (주)디스테이션
영화감독 진주는 촬영을 일주일 앞두고 촬영장소인 카페가 없어지는 일을 겪는다. 다행히 선배의 소개로 찾아간 진주에서 주환을 만나고, 영화 시나리오에 딱 맞는 낭만적인 카페 ‘삼각지 다방’을 발견한다. 50년 동안 지역 예술가들이 모이는 아지트였던 '삼각지 다방'은 사람들의 추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지만, 이곳 역시 철거가 예정된 상태. 엉겁결에 진주는 예술가들과 함께 철거 반대 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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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맬컴과 마리> 말다툼 그 자체가 드러낸 영화의 진정성
1. 지난 2월에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맬컴과 마리>는 단출하다. 등장인물은 남녀 주인공 단 2명이다. 영화의 배경은 집 안팎을 멀리 벗어나지 않는다. 흔한 회상 장면 하나 없이 하룻밤 동안 이루어지는 '맬컴(존 데이비드 워싱턴)'과 '마리(젠데이아 콜먼)'의 대화가 사건의 전부다. 그래서 영화감독인 맬컴과 배우 지망생이었던 마리 간에 말싸움과 화해, 또 다른 말싸움과 화해, 그것들이 반복될 뿐이다. 흔한 플래시백도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흑백 화면으로 장식되어서 화려한 영상을 즐기는 재미도 없다. 그러나 기교 없이 두 사람이 살아온 상이한 세계의 충돌을 진한 감정선에 담은 <맬컴과 마리>는 오히려 그렇기에 영화적인 영화다.
2. <맬컴과 마리>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상황으로 시작한다. 자신의 영화를 세상에 선보인 맬컴은 평론가들의 호평과 관객들의 박수 세례에 매우 들뜬다. 반면에 마리는 무슨 이유에선가 기분이 좋지 않다. 축하주를 들자는 맬컴의 제안에, 평론가들의 평가와 대화를 들려주는 맬컴의 목소리에 그녀는 도통 집중하지 못한다. 맬컴은 마리의 태도에, 마리는 그 이유를 짐작조차 못하는 맬컴의 모습에 화가 나면서 둘은 길고 긴 말다툼의 시작을 알린다.
사실 이러한 오프닝은 로맨스 영화에서 빠지기 어려운 클리셰다. 현실에서도 적지 않게 경험할 수 있는터라 보는 사람을 순식간에 홀리기는 하지만 흔한 로맨스, 멜로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작품이 말싸움의 발단을 보여주는 방식은 이 작품이 한 커플의 갈등 그 이면을 보여주고자 하는 영화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둘은 분명 한 공간에 있지만 동시에 한 공간에 없다. 웬만해서는 컷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몇 분간 두 주인공은 방과 거실, 부엌과 거실, 거실과 테라스 등 서로 다른 공간에 있다. 부엌과 거실을 좌우로 오가는 카메라 사이에는 창문틀과 같이 세로로 그어진 선이 그들 사이를 갈라놓는다. 서로의 거리, 음악과 같은 방해물 때문에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제대로 된 대화도 되지 않는다. 이후 반복되는 듯 조금씩 달라지는 둘의 대화는 왜 둘 사이가 분리되어야 했는지, 그리고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하나씩 짚어 나간다.
3. 둘은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서 언쟁을 벌인다. 맥 앤 치즈를 먹을지 말지로 시작된 둘의 대화는 이내 맬컴의 영화에 대한 이야기에서 평단의 평가 내용에 대한 의견 교환으로 이어진다. 맬컴이 자신을 감사 소감에서 빼놓은 것에 대한 마리의 불만, 영화 제작 과정에 대한 이야기, 과거에 만났던 이성과 그들의 과거사가 그 뒤를 따른다.
그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영화를 둘러싼 말다툼이다. 구체적으로는 영화에 대한 의견의 충돌, 이 언쟁의 내용이 작품에 부여하는 통일성이 흥미롭다. 맬컴은 자신의 영화를 두고 흑인 여성이 미국의 의료제도 내에서 감내해야 하는 젠더 폭력을 다루는 진정한 걸작이라고 평가한 비평가를 신랄하게 욕한다. 그는 영화에는 정치적 메시지가 필요하지 않고, 단지 "마음과 찌릿함"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화낸다. 영화가 한 인물을 어떤 미스터리 안에 녹여내는지 그 아이디어와 기교가 정치적의 의도에 앞서야 한다면서.
그러자 마리는 맬컴에게 말한다. 너에게는 그 마음에 있어야 할 진정성이 없다고. 너도 내 이야기로 영화를 만들고, 나의 아픈 기억과 추악함을 아름답게 바꿔 놓으면서 내가 스스로 목소리를 낼 기회를, 내 진정성을 드러낼 기회를 없앴다고. 영화가 그 자체로서 존중받아야 한다고 열을 내는 맬컴에게 그조차도 그 사실을 상쇄하려고 유식한 척하는 거라고 일갈한다. 영화가 자본주의의 대표적인 예술 형태인 이상 그도 이미 정치적 의도와 메시지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모순을 일깨운다. 배우 지망생에 불과한 자신과 달리 그가 대학을 나오고, 성공적인 커리어를 시작한 영화감독이라는 점에서 인종 문제와 별개로 사회적 기득권이라는 정체성을 대변하고 있음을 꼬집는다.
4. 이때 영화를 둘러싼 갈등을 창문 삼아 둘의 말다툼을 다시 들여다보면, 맬컴과 마리의 대화는 둘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정체성의 대립이자, 그것들의 단면을 조각조각 보여주는 것과 다름없다. 평론가의 비평에서 시작되어 다시 그 비평으로 되돌아오는 그들의 언쟁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다양한 정체성 중 하나만을 강조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격렬한 토론의 장이기 때문이다. 둘은 흑인이라는 정체성 안에 묶여 있지만 남녀, 대학 경험의 유무, 기득권과 비기득권, 영화감독과 배우 지망생 등 다양한 정체성의 차이를 보인다. 그래서 그들은 같은 문제에 대해서 결코 같은 관점에서 대화할 수 없다. 맬컴이 마리에게 감사 인사를 하지 않거나 그녀를 캐스팅하지 않은 일도 각자에게 전해지는 무게감은 천지차이다. 결국 영화가 보여주고자 한 진정성, 맬컴과 마리의 외양으로 드러난 진정성은 일원화할 수 없는 수많은 정체성의 차이인 것이다.
영화는 이러한 정체성들의 충돌, 한 개인의 인생과 또 다른 개인의 인생이 총체적으로 충돌하는 과정을 맬컴의 말마따나 실로 영화적으로, 멋진 아이디어와 기교로 담아낸다. 우선 흑백으로 촬영된 영화는 인종문제에 감춰지기 쉬운 수많은 정체성의 갈등을 보다 명백하고 직설적으로 전달한다. 세상이 전부 흑백인 세계에서 배우들의 피부색보다는 배우들의 입으로 전달되는 내용 그 자체에 더 주목이 간다.
스크립트를 쓰는 맬컴이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는 와중에도 하나하나 말로 설명하는 것에 비해 마리가 잠깐의 소극을 보여주며 맬컴에게 자신의 심정을 이해시키는 방식 역시 그 자체로 영화적이다. 영화가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에는 심금을 울리는 대사와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배우의 연기력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그저 하룻밤 사이에 벌어지는 일을 두 주인공 사이에 오가는 대사, 표정, 제스처 안에 녹여내는 것 역시 그들의 마음속 이야기를 가장 진정성 있게 풀어놓는 방식으로 보인다. 그 결과 미니멀한 연출을 만난 젠데이아 콜먼과 존 데이비드 워싱턴의 연기력은 더욱 빛난다.
5. 2시간에 걸친 격렬한 언쟁은 맬컴과 마리가 거듭 싸우는 와중에도 거듭 키스와 스킨십을 서로에게 퍼부은 것처럼 화해로 마무리된다. 그런데 서로를 잡아먹을 것 같던 상처 주는 말들의 형언으로 가득하던 영화의 결말은 아무런 대사 없이 조용하다. 화해하는 모습을 원경에서 뒷모습만 잡을 뿐이다. 어째서일까.
서로가 감추어 두었던 모든 이야기들을 후련히 털어냈기 때문은 아닐까. 비로소 서로의 세계와 상황을 인식하고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발자국을 내딛을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더 이상의 대화, 폭언, 언쟁, 고함이 없어도 진정으로 서로에게 감사함을, 존중을, 사랑을 전달할 수 있는 것도 그 이유일 것이다.
마치 영화가 온전히 맬컴과 마리의 이야기에 집중하면서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 것이 아쉬울 정도로 영리하고 신선하게 만들어진 것처럼. 동시에 가감 없이 정치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도 다양한 의견을 모두 낼 수 있었던 것처럼. 그렇기에 이처럼 서로 다른 세계를 살아온 두 사람의 충돌을 진정성 안에 써 내려가는 <맬컴과 마리>는 실로 영화적인 영화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사랑싸움의 이면에서 벌어진 진정성 있는 인생, 영화, 세계의 충돌과 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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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주전쟁>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
<우주전쟁>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
하류층 반영웅
참 이상한 결말이다. 외계인의 습격을 받은 듯 잔해와 낙엽만이 가득한 보스턴 거리에 레이가 딸을 안은 채 쓸쓸히 걷고 있다. 그런데 그의 처량한 모습과는 달리 그가 그토록 찾았던 전처는 집에서 평안히 걸어 나온다. 외계인과 싸우겠다며 달려나가 화염 속에 자취를 감춘 아들 로비도 그곳에서 별안간 튀어나온다. 외계인과 정신이 나가버린 사람들 사이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레이의 처절한 생존기는 그들의 알 수 없는 평안 앞에서 참으로 허망하고 우스운 일이 돼버린다. 말하자면 스필버그는 이 대목에서 영화의 근간을 형성하던 사실성을 느닷없이 전복시킨다. 여기엔 어떠한 현실적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이를 강하게 뒷받침하는 것은 조도다. 스필버그는 사물의 하이라이트가 하얗게 떠서 없어질 정도로 과다한 광량을 사용함으로써 이것이 현실이 아니라는 신호를 보낸다. 그렇다면 이 비현실적 장면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이 장면의 주인공이며 영화 전체의 주인공인 레이의 비극적 상상 혹은 악몽을 의미하는 걸까. 만일 그렇다면 무엇이 그에게 비극적 상상과 악몽을 떠올리게 한 걸까.
<우주 전쟁>에는 보통의 재난영화와 달리 영웅이 없다. 서사를 견인하는 주체인 레이는 스필버그 영화의 모든 주인공을 통틀어서 가장 마음을 주기 어려운 비호감 캐릭터다. 어린 소년처럼 자식을 이겨 먹으려고 하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그들에게 지나치게 무심하다. 그렇다고 천재 과학자라거나 고위 관직에 있는 상류층 인물도 아니라서 관객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지도 못한다. 이러한 반영웅적 면모와 하층민이라는 초라한 지위는 그가 외계인의 위협을 뚫고서라도 기필코 가닿고자 하는 전처의 세계, 즉 상류층의 세계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영화에서 레이와 전처가 같은 장면에 등장하는 대목은 마지막 장면을 제외하면 그녀가 레이의 집에 아이들을 데려다주는 장면뿐이다. 말하자면 상류층은 쉽게 하류층의 세계에 닿을 수 있지만, 하류층은 결코 상류층의 세계에 닿을 수 없다. 그 사이는 끔찍한 외계인과 그들이 타고 다니는 살상 기계, 그리고 정신 나간 사람들로 가득하다. 요컨대 <우주 전쟁>이 자아내는 실질적 위협은 외계인의 습격이 아니라 두 계층 사이의 끔찍한 불화다. 우리가 매력적이지 않은 비호감 캐릭터 레이에게 동정심을 느끼는 건 그의 계층적 무력감에 동화되었기 때문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계층적 무력감뿐만 아니라 아버지로서의 절망감이 표출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는 로비의 귀환을 통해 은밀히 암시된다. 그는 분명 외계인과 싸우겠다며 언덕을 뛰어가다 화염 속에 사라졌었다. 그런 그가 주검으로 발견되기는커녕 머나먼 보스턴 집에서 평온한 얼굴로 나타난다. 돌이켜보면 로비는 누구보다 레이를 혐오하여 줄곧 어머니와 살고 싶어 했던 인물이다. 그러니 느닷없는 로비의 귀환은 레이가 자기 대신 전처와 살려고 했던 로비의 바람을 끔찍한 상상을 통해 대리적으로 실현시켜주는 것이다. 조금 모자라긴 해도 레이는 작중 대사에서 언급되었듯 로비를 끔찍하게 사랑하는 아버지이다.
스펙타클의 윤리
레이는 하늘에 소용돌이가 생기고 같은 곳에 벼락이 계속 내려치는 광경을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아이처럼 해맑게 즐긴다. 문제의 심각성을 알아차리는 건 그 위력이 점차 강화되다 자신에게 위협이 될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이러한 구도는 교회 앞에서 트라이포드가 지반을 뚫고 올라올 때 다시 반복된다. 사람들은 생경한 미지의 기계가 산출하는 매혹 앞에서 넋을 잃는다. 그들은 일종의 황홀경을 경험하는 듯 무척 신이 나 있다. 그러다 잠시 후, 외계인이 조작하는 이 살상 기계가 그곳에 몰린 구경꾼들을 잔혹하게 죽이기 시작하면서 재난은 시작된다. 그러니까 이러한 공식이 성립된다. 스펙타클은 매혹적이지만 그것을 본 사람은 높은 확률로 죽는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보는 행위다.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숨어서 보거나, 눈을 가려야만 한다.
외계인이 타고 다니는 살상 기계 ‘트라이포드’는 그 명칭과 기능, 그리고 형태에서 유추할 수 있듯 삼각대와 카메라를 동시에 연상시킨다. 구분하자면 세 개짜리 다리는 삼각대를, 본체는 카메라를 떠올리게 한다. 또한, 트라이포드는 압도적인 매혹을 뽐내는 스펙타클 자체로서 기능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이 끔찍한 기계는 영화라는 매체의 은유이면서 동시에 그 자체로 스펙타클로 구동되는 복합 기계인 셈이다. 중요한 것은 이를 둘러싼 군중, 달리 말하면 관객이 트라이포드를 보는 순간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대개 보는 자는 권력을 쥔 자이고, 보이는 자는 그에 지배를 당하지만, <우주 전쟁>에서 이 시선의 권력 관계는 완전히 전복된다. 보는 자는 죽고, 보이는 자는 자신을 향한 시선을 파괴하며 시선의 독점권을 확보한다. 한마디로 스펙타클로서의 영화는 관객의 시선을 빼앗고 역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폭력의 주체가 된다.
스펙타클에 대한 위와 같은 경고는 조던 필이 <놉>에서 스펙타클을 다루는 방식과 같다. 그러나 영화가 개봉된 시기를 고려하면 <우주 전쟁>을 단순히 영화와 할리우드가 생산하는 스펙타클의 함정을 꼬집는 것으로 한정하기는 어렵다. 이것은 9‧11 테러 이후, 이 끔찍한 스펙타클을 보도하는 영상 매체에 대한 스필버그의 통렬한 성찰을 반영하는 것이다. 테러의 장면은 필연적으로 스펙타클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것의 매혹은 사람들의 시선을 불러일으키지만, 동시에 그들에게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심어 놓는다. 때문에 스필버그는 이 죽음에 대한 불안, 그리고 그것에 대한 전시를 보여주지 않는 방식으로 영화의 나머지 분량을 채운다. 그리고 그것을 볼 수 없도록 인물이 눈을 가리는 행위를 특정 대목마다 새겨넣는다. 딸이 강에 떠다니는 시체들을 보지 못하도록 레이가 그녀의 눈을 가리는 장면과 지하실에 은둔 중인 호전광을 살해하는 광경을 보지 못하도록 헝겊으로 딸의 눈을 가리는 장면이 그렇다. 이 논쟁에 관한 한 스필버그는 어느 때보다 단호하다. 테러라는 끔찍한 스펙타클을 보지 않는 것. 그것의 매혹을 참고 견디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첫 번째, 그리고 최선의 윤리적 행동이라는 것을 스필버그는 타협 없이 끝까지 관철시킨다. <우주 전쟁>은 스펙타클의 윤리학을 말할 때 끊임없이 소환될 수밖에 없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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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베 얀손> 사랑이라는 그림에 눌러 담은 예술가의 삶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참석한 영화 <토베 얀손>의 시사회 관람 후기입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핀란드의 명망 높은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나 자연히 예술가의 길을 걷게 된 '토베 얀손(알마 포이스티)'은 주관이 뚜렷한 예술세계로 인해 아버지와 세상의 인정을 이끌어내는 데 번번이 실패한다. 이에 예술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어려운 나날을 보내던 그녀는 틈틈이 만화 캐릭터인 '무민'을 그리면서, 또 유부남 국회의원이자 애인인 '아토스(샨티 로니)'와 만나면서 위로를 받는다. 그러던 어느 날 토베는 연극 연출가 '비비카(크리스타 코소넨)'로부터 삽화 의뢰를 받고, 두 예술가는 이내 강렬한 사랑에 빠진다. 비비카의 도움을 받아 시청 벽화를 그리며 인정받고 그녀와의 사랑 속에서 의도치 않게 무민의 세계관도 넓혀나가던 토베. 그러나 비비카가 돌연 파리로 떠나면서 안정을 찾은 듯 보였던 그녀의 사랑과 예술은 다시 흔들리기 시작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만화 캐릭터들 중 빼놓으면 섭섭한 캐릭터인 무민은 국내에서도 전시회가 열리거나 패션 브랜드와 컬래버레이션이 진행되는 등 꾸준히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러나 캐릭터의 유명세에 비해 북유럽 설화에 등장하는 트롤이 원형인 이 캐릭터가 어떻게 탄생되었고, 창작자인 토베 얀손이 왜 이들을 그렸는지, 그리고 그녀의 삶이 어떠했는지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올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개막작이었던 <토베 얀손>은 1966년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상을 수상했으며, 핀란드 최고 훈장을 받기도 했던 예술가 토베 얀손의 덜 알려진 이야기를 담담히, 다만 꾹꾹 눌러 담아 그려낸다.
자이다 베르그로트 감독은 토베 얀손을 두 개의 갈림길 사이에서 끝없이 고뇌하는 인물로 묘사한다. 우선 순수 예술과 상업 예술 사이에서 갈등하는 한 예술가의 인생에 주목한다. 핀란드에서 가장 뛰어난 조각가인 아버지 밑에서 예술가로 자라난 만큼 순수 회화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 토베는 그림에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남들이 보기에 그저 자연 풍광을 추상적으로 그린 듯 보이는 그림에는 상황과 때에 맞춰 달라지기도 하는 자신의 다양한 모습을 담는다. 여성의 흡연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던 시기에 자신이 담배 피우는 모습을 그린 자화상을 예술가 지원금 선정 여부가 달린 중요한 전시회에 출품하기도 한다.
반대로 틈틈이 그려오던 무민 만화에는 자신의 모습이 담겨있지 않다고 여긴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에서 그녀의 고통은 싹을 틔운다. 가족, 친구, 심지어 애인들마저 그런 그녀의 재능은 정작 만화에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녀는 삶이 극적인 순간이나 전환점에 도달할 때마다 항상 무민을 그리기 때문이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는 숲으로 도망가는 무민을 그린다. 비비안과 사랑을 속삭이던 행복함은 늘 붙어 다니면서 둘만 알 수 있는 언어로 대화하는 토프슬란과 비프슬란이라는 캐릭터를 탄생시킨다. 한편 이별의 아픔과 사랑의 상처는 겉으로는 늘 친절하지만 내면은 흉터로 가득한 캐릭터의 원형이 된다. 이처럼 자신이 원하는 것, 높게 평가하는 것, 그리고 자신의 본모습을 가장 잘 담아내는 것이 모두 어긋나다 보니 한 명의 예술가로서 토베는 좀처럼 안정을 찾지 못한다.
이때 영화는 스스로 작가, 화가, 각본가, 만화가 중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그녀의 내적 혼란을 보다 다양한 층위로 구성한다. 토베의 내적 고민과 외적 갈등을 다룬 에피소드를 하나씩 넘나들며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과 현실이 좀처럼 일치하지 않는 불협화음을 그녀의 인간관계를 통해 외면화하며 그녀의 예술적 고뇌와 나머지 인생의 갈등을 같은 선상에 올려놓는다. 그 결과 자칫 난해하거나 낯설 수 있던 그녀의 아픔과 예술의 본질에 대한 고뇌는 가족, 친구, 애인들과의 갈등을 통해 익숙한 감정으로 치환되고 직관적으로 전달된다.
예를 들어 자신의 새로운 초상화에 만족해하며 아토스에게 그 의미를 열정적으로 설명하던 그녀는 다음날 아침에 월세를 독촉하는 집주인과 본처에게 전화를 받고 자신을 떠나야 하는 애인이라는 현실을 마주한다. 시청 벽화를 그리게 되어 마침내 화가로서 이름을 알리게 된 후에도 딸의 예술 세계를 못마땅해하던 아버지와의 관계는 악화된다. 카메라는 사인회를 열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둔 토베와 순수 미술가로 성공을 거둔 절친들을 한 앵글에 담기도 한다. 그 자리에서 토베는 자신에게 사인을 부탁하는 아이들이 작가인 자신보다 캐릭터들을 더 사랑한다고 자조하고, 동시에 파리에 열리는 전시회에 와달라는 친구의 초청에 불편함을 감추지 못한다.
이 과정에서 범성애 성향을 지녔던 토베가 남자 연인인 아토스, 그리고 여자 연인인 비비안과 함께하는 순간은 특히 눈에 띈다. 두 연인이 토베와의 관계를 대하는 상이한 태도는 토베의 마음을 뒤집어 밖으로 꺼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차이는 토베에게 결혼에 대해 이야기할 때 드러난다. 첫 번째 연인이었던 아토스는 결혼을 그 자체로 자신의 순수한 감정이 발산된 결과로 여기며, 그래서 그는 토베와의 결혼을 하나의 종착역으로 생각하고 언제나 신중하다. 반면에 비비안에게 결혼은 자신의 열정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발판에 불과하다. 그녀에게 결혼은 사회적 시선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개인의 삶을 살아가게 하는 방패막이고, 그래서 비비안은 토베와의 관계 역시 사랑의 흐름이 자유롭게 거쳐가는 간이역처럼 생각한다.
이는 토베가 그림과 만화에 상반된 가치를 부여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토스가 항상 토베와의 관계에서 진지하고 그녀가 자신을 선택하지 않는 순간에도 일관된 애정을 표현한 것처럼 토베는 마지막 순간까지 순수미술, 순수 회화를 향한 로망을 숨기지 못한다. 반면에 비비안이 사랑을 쉽게 생각하듯이, 토베는 무민과 만화에 그리 큰 애정을 주지 않는다. 경제적인 이유로 시작한 일이었기 때문에 계약이 끝나자마자 만화 연재를 포기하고, 동생이 만화를 대신 이어가는 것도 불편해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아토스와 비비안 사이에서 방황하듯 내심 그림과 만화 사이에서 마지막까지 마음을 정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토록 복잡한 토베의 마음과 예술도 사랑도 뜻대로 되지 않는 그녀의 삶은 영리한 연출과 편집의 힘 덕분에 매우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영화가 유사한 춤 장면을 반복해서 선보이는 것이 대표적이다. 두 연인 사이에서 선택을 내린 순간 그녀는 혼자 춤춘다. 이때 카메라는 다른 무엇보다도 그녀의 어두운 얼굴에 주목하며 자신의 선택에 확신이 없는 모습을 포착한다. 흥미로운 것은 토베의 춤이 오프닝 장면에서 먼저 등장한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토베의 춤은 좁게 보면 사랑의 아픔을, 길게 보면 그전까지 계속해서 보여준 한 예술가의 인생을 동시에 함축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또한 엔딩 크레디트에서 행복과 기쁨이 가득한 모습으로 춤추는 실제 토베의 영상과 대조를 이루며 토베의 선택과 결단에 무게감을 더해주기도 한다.
더 나아가 선택과 집중이 확실한 편집은 토베 얀손의 삶에 녹아 있는 복합적이고 다양한 결의 감정을 세밀하게 그려낸다. 영화는 한 박자씩 느리게 화면을 전환시키면서 매 순간마다 짙은 여운을 남기는데, 그렇다고 해서 템포가 늘어지거나 지루해지지는 않는다. 그녀의 긴 생애 중 무민이 만들어지고 유명세를 얻게 되는 약 10년 간의 시간 안에서 여러 에피소드를 자유롭게 보여주는 만큼 시간의 흐름도 충분히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풍부하고 구체적인 감정 묘사는 후반부로 갈수록 시간 텀이 길어지는 에피소드들에게 통일성을 부여한다. 그 결과 <토베 얀손>은 결코 모든 장면이 유기적으로 유려하게 흘러가는 영화는 아니지만, 중간중간 끊어지는 둔탁한 지점의 매력이 그조차도 잊게 만드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스케치한 한 예술가, 더 나아가 한 인간의 삶과 고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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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FAN 데일리] 미쳐버린 소녀, 드래곤이 되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감독] 델 캐서린 바튼
출연] 줄리아 새비지 Julia SAVAGE, 사이먼 베이커 Simon BAKER, 야엘 스톤 Yael STONE
시놉시스
10대 소녀, 블레이즈는 한 여성이 당한 폭력 피해의 유일한 목격자로 사건 이후 정신 불안 증세를 겪는다. 그녀만의 도피처인 상상의 세계에서, 그녀는 오랜 친구이자 반짝이게 빛나는 마법의 용과 함께 내면의 분노를 표출하며 평온을 찾는다. 어린 시절의 충격적인 기억은 완전히 잊힐 수 없지만, 블레이즈는 마침내 두려움 없이 미래로 한 발짝씩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익숙함을 신선함으로
사실 <블레이즈>의 이야기는 그렇게 새롭지 않다. 그간 많은 여성 영화가 선택한 소재와 주제의 반복이다. 데이트 폭력을 비롯한 성폭력의 심각성을 일깨우고, 그로 인해 목숨을 잃는 여성들의 처지를 전달한다. 여성들이 연대해서 성폭력 가해자를 징벌해야 한다고 외친다. 예를 들면 <프라미싱 영 우먼> 같은 작품과 결이 비슷하다. 징벌의 방식이 법의 테두리 안이냐 밖이냐가 다를 뿐이다.
자연히 <블레이즈>는 신선함을 담보할 수 없는 영화다. 소재와 주제가 그 중요도나 심각성과는 별개로 이미 익숙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한국 범죄 영화나 드라마에서 버닝썬 사건을 모티브로 삼은 장면이 클리셰처럼 등장하듯이.
대신 <블레이즈>는 이야기를 풀어내는 화법의 측면에서 예상치 못한 일격을 날린다. 영화는 사건과 관련된 수사와 가해자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사건의 목격자인 주인공이 마주한 내면의 공포와 사춘기를 겪어내는 10대의 여정에 초점을 맞춘다. 특히 그 여정의 핵심 키워드인 '여성의 광기'를 대사와 대화가 아닌 다채로운 이미지로 빚어낸다.
광기의 여러 모습
실제로 영화는 블레이즈 내면에 자리 잡은 여러 광기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처음에 광기는 트라우마를 이겨내기 위한 방어 기제로 등장한다. 드래곤이 대표적이다. 항상 블레이즈 방 한편에 자리 잡고 있는 용은 존재만으로도 그녀에게 심리적 안정을 가져다준다. 쌍을 이루는 수많은 인형도 또 하나의 도피처다. 그녀는 인형들과 함께 해변을 거닐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이내 광기는 점점 공격적인 성격을 드러낸다. 일례로 드래곤의 역할이 달라진다. 방에서 단순히 위로를 해주던 드래곤 대신 불을 내뿜는 다른 드래곤이 등장한다. 법정에서 사건의 피의자는 변호사를 내세워 무죄를 주장한다. 그 광경에 화가 난 블레이즈는 목격잔 진술 중에 피의자를 불태우는 상상을 한다.
더 많은 이미지가 뒤이어 등장한다. 블레이즈는 집의 뒤뜰 혹은 울창한 숲의 한가운데 같은 곳에서 시끄러운 록 음악에 몸을 맡긴 채 머리를 뒤흔든다. 앞뒤 사정을 모르더라도 이 장면만 보면 '미쳤다'라는 인상을 받기에 충분하다. 눈이 아플 정도로 색이 바뀌는 조명도 한몫한다.
블레이즈의 괴기한 내면은 하나의 이미지로 응축된다. 바로 달이다. 사다리를 타고 보름달 앞에 올라간 블레이즈. 그녀는 옷을 벗고 달을 껴안고, 그제야 편안함을 느낀다. 왜냐하면 늑대인간도 보름달빛을 받아 변신하듯이 서구권 전통에서 달과 광기는 한 몸이니까. 또 라틴어로 달은 Luna이고, Lunatic이라는 영어 단어는 정신이상자를 지칭한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이미지이지만 달과 블레이즈의 교감이 의미심장한 이유다.
광기는 단순히 미친 게 아니다
그러니 아버지 눈에 딸은 점점 미쳐가는 것처럼 보인다. 지나친 공격성과 폭력성으로 인해 블레이즈가 자해하자 아버지는 의사 말마따나 약물 치료를 시도하기도 한다. 하지만 딸이 약을 안 먹는 등 치료에 응하지 않자 합리적인 결정을 한다. 블레이즈를 정신병원에 보낸다. 현실과 상상을 분간하지 못해 자동차 사고까지 내는 판국이니, 최선의 선택처럼 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오랜 기간 언제나 광기, 그중에서도 특히 여성의 광기는 항상 이런 식으로 다뤄졌다는 점이다. 문화적, 역사적 맥락 안에서 광기는 비합리였고, 정신질환을 비과학이었다. 광기는 제거될 대상이고, 정신이상자는 사회에서 배척됐다. 특히 여성의 광기는 더 위험하다고 간주됐다. 유럽의 마녀 사냥이 대표적이다. 정통성 있는 권력(가톨릭)의 시점에서 여성들에게 주로 전수된 마법이나 주술 같은 전통은 제거 대상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블레이즈의, 곧 여성의 광기는 색다른 의미를 갖는다. 단순한 일탈이 아니다. 저항이다. 어리다는 이유로 보호하고, 나약하다는 이유로 목격자로서의 진술을 막아서는 사회와 어른을 향한. 트라우마를 정면으로 극복하는 대신 정신과 치료를 권유하며 보호하려고만 하는 어른에게. 자기를 미쳤다고 매도하면서 죗값을 치르지 않은 피의자를 감싸는 듯 보이는 시스템에. 블레이즈는 광기로서 저항한다.
그녀가 정신병원 상담사에게 던지는 질문은 이미지의 홍수 사이에 숨은 메시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녀의 질문은 근본적인 의문이다. 성폭력범, 살인자는 멀쩡히 살아가는데 왜 목격자와 피해자만 고통스러워야 하는지. 왜 사회는 가해자를 곧바로 단죄하지 않는지. 시스템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을 던진다. 그녀가 정신과 약을 숨기고 먹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이는 단순히 치료를 거부하는 정신병자의 행동이 아니다. 자기의 광기를 치료하기 이전에 올바른 심판을 통해 진짜 문제와 원인을 해결해야 한다는 의사표시다.
소녀, 드래곤이 되다
질문만 던지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영화는 답을 스스로 찾는다. 상상 속에 숨고 도망가는 것은 답이 될 수 없다. 광기를 공개적으로 표출하는 것도 사회와 시스템을 바꾸지는 못한다. 그러니 답은 하나다. 광기를 승화해 내적으로 단단해져야 한다. 분노, 충격, 공포에 휩쓸리지 않은 상태로 법정에서 당당히 진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블레이즈는 상상 속의 드래곤을 죽인다. 대신 스스로 자기를 보호할 드래곤이 된다.
<블레이즈>의 이 클라이맥스 역시 광기의 알레고리가 가득하다. 결말부에 블레이즈가 어두운 나무들 사이에서 춤추는 장면 사이로 일전에 블레이즈의 광기를 보여준 수많은 이미지가 스쳐 지나간다. 고막을 때리는 하드 한 록 음악과 정신없는 조명 속에서 컷들은 빠른 속도로 전환된다. 마치 디오니소스의 축제를 보는 듯하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특히 여성들이 디오니소스 축제 때 밤에 노래 부르고 춤추며 열광과 무아지경에 빠졌던 것처럼 블레이즈도 광기에 빠져든다. 그렇게 블레이즈는 광기 안에서 더 단단한 드래곤으로 거듭난다.
마지막으로 피의 이미지가 블레이즈의 성장과 변화에 담긴 연대의 의미를 강조한다. 정신병원에서 블레이즈는 첫 생리를 한다. 그녀의 상상 속에서는 폭포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피에 흠뻑 젖는다. 이 피의 이미지는 그녀가 드래곤을 죽이는 장면을 이어진다. 흰색 침대에 생리혈이 묻었듯이, 순백색 드래곤의 배를 가르고 피를 적신 채 그녀는 드래곤이 된다. 이렇게 영화는 모든 소녀가 여성으로, 드래곤으로 성장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성의 광기를 긍정하고, 저항적인 에너지로 승화시켜 함께 연대해야 한다고 외친다.
어찌 보면 <블레이즈> 다소 진부할 수 있는 페미니즘의 메시지를 표현함에 있어서 새로운 세련됨을 보여주는 영화라고 할 수도 있다. 자칫 혼란스러울 수 있는 이미지의 연속이 사실은 정교하게 계산된 조합이라는 걸 영화가 끝나갈 때 비로소 깨달을 수 있으니.
<블레이즈>는 부천 영화제에서 두 번 상영된다. 첫 상영은 이미 지났다. 하지만 다른 기회를 놓쳐도 크게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곧 극장에서 만날 수 있기 때문. <블레이즈>는 7월 12일에 개봉 예정이다.
2023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6/29~7/9) 중 상영일정
7월 2일 20:00 - 21:41 CGV소풍 10관 (상영코드 445)
7월 6일 19:30 - 21:11 CGV소풍 4관 (상영코드 834)
Acceptable 무난함
강렬한 광기로 새로 그려내는 여성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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