짱징2023-06-11 00:38:05
박스오피스 1위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4DX 후기
쿠키 있음
*본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23.04.26 개봉)
감독: 아론 호바스, 마이클 제레닉
더빙: 크리스 프랫, 안야 테일러 조이 등
드림, 짱구는 못말려 등을 뚫고서 박스오피스 1위를 달렸던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저는 닌텐도 유저도 아니었고... 슈퍼 마리오라곤 캐릭터 얼굴밖에 모르는 사람이라
이걸 굳이 돈 내고 영화관 가서 봐,,,?? 싶었었는데
주변 후기가 너무너무 좋길래~ 보러 갔어요
총평부터 말하자면 슈퍼 마리오는 무조건 4DX로 봐야 한다!
2D로 봤으면 재미가 반감 될 거 같거든요
내용도 재미있긴 하지만 4D가 진짜,,,
역대급으로 바람 불고 역대급으로 흔들리는 ㅋㅋㅋㅋㅋㅋㅋ
안전벨트 없으면 날아갈 것만 같은 (근데없음)
저 롯데월드 온 줄 알았잖아요
그만큼 신났다는 뜻입니다
저는 슈퍼 마리오 게임을 모르는 사람이라 알고 있던 사람들보다는 이해가 어렵더라고요
나오는 캐릭터들, 아이템들, 레이스들 모두 게임에 나온 거라던데
저는 사전 정보가 1도 없었거든요......
그래서 살짝 정신이 없기도 했고 스토리상 개연성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어요
처음엔 마리오와 루이지의 형제애를 메인 스토리로 잡고 가나 보다 싶었는데요
다크 세곈가,, 거기에 빠진 루이지를 구하기 위함이라기보단
그냥 버섯 세계에서의 일들을 보여 주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을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리오가 원탑으로 빌런을 무찌른 것도 아니고
공주와 키노피오를 포함하여 마리오를 돕는 인물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엔딩에서 루이지와의 우애를 강조하는 게 너무 뜬금없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오락성만 놓고 보자면 완벽했어요
쳐지는가 싶으면 바로 코믹 요소 작용하고 또 재미없어지는가 싶으면 바로 다음 레벨로 넘어가거든요
지루할 틈이 없다는 게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의 최대 장점 아닐까 싶어요!
그걸 4DX로 경험하면 더욱 더 배가 되는 거구요...
왜 자꾸 포디에 집착해 하시겠지만 이건 정말 4DX로 봐 주셔야 합니다 여러분 ㅠㅠ
*스토리: ★★☆
*연출: ★★★★★
*영상미: ★★★★★
*연기: ★★★★
*OST: ★★★★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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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 미제라블 (2019)
* 이 리뷰는 영화 <레 미제라블>의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영화 <레 미제라블> 정보
감독: 래지 리
출연: 다니엥 보나드, 알렉시스 마넨티, 제브릴 종가 등
장르: 범죄, 드라마
러닝타임: 104분
수상: 2019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상
개봉일: 2021.04.15 (한국 개봉일)
<LES MISERABLES>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을 영화 제목에 그대로 반영한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2019년에 개봉한 본 작품은 직접적으로 소설의 내용과 연관성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해당 소설과 일정 부분 연결고리를 갖는다. 우선 극의 배경이 되는 프랑스의 몽페르메유는 200년 전 '빅토르 위고'가 소설 <레 미제라블>을 쓰기 전 영감을 받은 곳이다. 그리고 이곳은 그가 꿈꾸었던 이상적인 모습과는 달리 여전히 작가의 소설 속 등장한 혁명의 모습처럼 분노와 폭력이 들끓고 긴장과 불안이 도사린다. 맥락은 다르지만, '장발장'을 대입시킬 수 있는 소년 캐릭터도 한 명 등장한다. 이 소년 역시 아주 사소한 것을 훔쳤다는 이유로 경찰의 과잉 대응과 폭력적 진압에 희생되며 훗날 혁명의 주동자가 된다는 점에서 소설 속 주인공과 어느 정도 닮아 있다. 그렇다면, 200년 전 소설 속 프랑스의 모습은 2018년의 시점에서 어떻게 다시 나타나게 된 것일까.
뿌리깊은 불신과 폭력, 터질 수밖에 없던 폭탄
영화는 프랑스가 최종 우승을 차지한 2018년 러시아 월드컵의 거리 응원을 하며 프랑스인들이 하나로 화합된 평화의 장면들을 그린다. 하지만, 곧바로 장면 전환이 이어지며 그 화합의 순간은 잠깐이었을 뿐 프랑스의 허상을 비춰주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월드컵 응원 시퀀스가 끝나고, 주인공 '스테판 루이즈'가 등장해 몽페르메유의 경찰서로 전입한다. 그는 '크리스'와 '그와다'가 이끄는 강력반에 합류하게 되는데, 흑인 하층민들을 상대로 강압 수사를 펼치고 함부로 대하는 두 명의 베테랑 강력반 형사들과는 성향이 딴판인 경찰이다. 세 사람은 함께 몽페르메유 구석구석을 순찰하는데, 서커스단을 이끄는 집시와 시장을 주름쥐고 있는 흑인들 간의 싸움을 목격한다. 누군가가 서커스단의 아기 사자를 훔쳐간 것. 아기사자를 훔쳐간 범인은 '이사'라는 동네 사고뭉치 소년이었는데, 아이를 쫓는 과정의 혼란 속에서 이성을 잃은 그와다가 이사의 얼굴에 고무탄을 쏴버린다. 이 상황이 '뷔즈'라는 소년의 드론에 찍히면서 갈등은 극화되고, 이 사건은 결국 관계의 깊은 골을 폭발시키는 촉매제가 되어버린다.
불친절한 전개, 외부인의 시점에서 방관
<레 미제라블>은 보통의 영화에 비해 극의 전개가 다소 불친절하다고 느낄 수 있다. 영화는 인물 개개인의 서사와 캐릭터 간의 관계를 조명하지 않고 관객이 철저하게 제 3자의 입장에서 극을 바라보게끔 한다. 여러 개의 파편처럼 나뉘어져 있는 스토리의 구조는 사건이 심화되고, 갈등이 극에 달할수록 빌드업이 되면서 필연적일 수밖에 없던 분쟁의 촉발을 이해시킨다. 전개상 주인공 위치에 놓인 '스테판 루이즈'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지만, 스테판을 일반적인 영화 속 주인공과 같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는 어디까지나 극중 배경에 갓 입성한 외부인이다. 외부인으로서 이 지역의 잔재된 뿌리깊은 갈등의 구조를 전혀 알지 못하는 그는 동일한 입장에 놓여 있는 관객을 대변한다.
이러한 관점은 극에서 인물들과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는 '뷔즈'의 등장 이유를 설명해준다. 뷔즈가 등장하는 초반부의 장면들은 영화의 내용과 굉장히 동떨어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는 드론을 사용하여 몽페르메유의 곳곳을 풀샷으로 조명해주는 역할을 한다. 뷔즈는 스테판과 달리 내부인이지만, 역할의 기능으로서는 외부인의 포지션에 놓여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물론 뷔즈와 스테판의 기능이 아예 동일하지는 않다. 뷔즈는 폭동의 주동자가 되는 '이사'를 비롯한 아이들과 같은 공동체에 속해 있지만, 함께 무자비한 공권력에 맞서 싸우거나 저항 의식을 표출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경찰의 편에 서서 사회의 정의를 추구하는 것도 아니다. 한마디로, 뷔즈는 폭력과 분노가 오가는 사회에 살아가고 있지만 모든 상황에 크게 관여하지 않고 한 발짝 뒤에서 지켜만 보는 방관인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즉, 관객은 외부인의 입장에서 사건을 방관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감상하게 되는 것이다.
터져버린 폭력의 씨앗, 누구의 잘못인가
<레 미제라블>을 보며 작년 미국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Black Lives Matter' 운동이 떠올랐다. 이 역시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흑인 '조지 플로이드'가 사망한 것으로 인해 혁명의 움직임이 발생했던 것이다. <레 미제라블>에서 10대 흑인 아이들이 분노한 것은 고작 새끼사자를 훔쳤다는 이유로 얼굴에 고무탄을 맞고, 폭력적인 행위와 겁박에 노출되었던 '이사'의 상황에 스스로를 대입시켰기 때문이다. 경찰들이 더 이상 이러한 사태를 일으키지 못하도록, 그리고 훗날 자신들이 이사처럼 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싸움을 벌인 것이다. 크리스를 비롯한 경찰들이 극중 시종일관 취하는 태도들을 보면, 지역 경찰에 대한 흑인들의 분노가 오랫동안 쌓여왔다는 것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과잉 진압한 경찰에게 무조건적인 잘못을 물을 수 있을까? 이 또한 무리가 있는 관점이다. 크리스의 비인간적인 태도와 그와다의 과잉 진압은 분명 잘못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이들은 무리 간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이사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흑인 아이들이 경찰에게 먼저 폭력을 행했기 때문에 경찰로서 진압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관객 개인의 입장에서도 크리스의 태도는 마음에 안 들지만, 경찰로서 꼭 해야만 하는 일을 수행하다가 벌어진 사고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세 명의 경찰은 이 사건을 계기로 흑인 아이들의 폭동에 무자비하게 공격당한다. 이사의 사건이 안타까운 건 맞지만, 경찰을 두고 집단 폭동을 일으키는 것을 용인할 수는 없다.
한마디로, 누구의 편을 들기도 어렵다. 흑인 사회와 공권력의 관계가 악화된 원인이 무엇이며, 이 모든 서스펜스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구체적인 이유를 우리는 알지 못한다. 원인은 알지 못하지만, 결과는 참혹하게 벌어지고 말았다. 극중 프랑스 사회 계층의 구조는 오랜 시간을 거쳐 형성되어 온 것이기 때문에 현 시점에서는 그 누구도 탓할 수가 없다. 극의 마지막 시퀀스에서 화약탄을 든 이사와 그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스테판이 대치한다. 그리고, 집 문을 열어 경찰들을 구할 수도 있지만 모든 것을 방관하고 있는 뷔즈의 시선도 함께 그려진다. 대치 상황의 결과를 보여주지는 않지만, 세 사람 중 누군가는 행동을 취했을 것이다. 안타까운 건, 그 어떠한 경우의 수에도 긍정적인 결말은 없다는 것. 영화는 그렇게 붕괴된 사회의 시스템을 생생하게 전달만 해준 채 갈 곳 잃은 관객의 사고에 찝찝한 불편함을 심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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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자 알아서 함께,<강변의 무코리타>
* 본 리뷰에는 영화의 자세한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강변의 무코리타 Riverside Mukolitta, 2021
일본 / 드라마 / 121분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
각자 알아서 함께, <강변의 무코리타>
출처: 영화 <강변의 무코리타> 스틸컷 (다음)
작은 어촌 마을에 있는 오징어 공장에 취직한 야마다의 목적은 오늘을 사는 것이다. 어제를 잊고 오늘을 무사히 넘겨 힘차게 내일을 맞이하고 싶단 희망적인 메시지로 읽을 수 있지만, 애석하게도 그의 '오늘' 안에는 다음 날을 향한 기쁨이나 설렘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삶의 여유는 물론이고 이를 찾으려는 의지도 없다. 그저 하루를 흘려보내고 싶은 마음뿐이다. 인생을 알차고 즐겁게 살겠다는 다짐과는 아주 먼, 무기력하면서도 음울한 그의 억지다짐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 야마다는 과거를 지우기 위해 도망쳤으나, 지울 수 없어 단순한 노동으로 몸을 혹사하지 않으면 정신이 미쳐버리는, 오늘 현재에 정체된 인물이다.
그에 대해 이렇게 장황하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인물을 특이한 방식으로 소개하는 영화의 특성 덕분이다. <강변의 무코리타>는 모든 인물의 서사를 순간 포착한 사진(이미지)들로 설명한다. 사진 안에는 인물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모두 담겨 있다. 인물을 둘러싼 환경, 인물의 말과 행동, 인물이 겪을 사건과, 이미 겪었던 사건까지 어마어마한 수의 픽셀로 이루어졌다. 나아가 한 인물에 대한 정보를 있는 그대로 투명하게 드러내고 있어, 보는 사람의 역량과 상관없이 누구나 영화의 이야기와 메시지를 파악할 수 있다. 주인공 야마다로 예를 들자면, 누가 툭 치면 바로 쓰러질 것처럼 아무 의욕 없이 마을에 들어서는 그의 걸음걸이와 반가움에 건넨 사장의 악수를 받지 못하고 삐걱대며 주춤거리는 그의 옆모습이 대표적이다. 두 장의 이미지는 이야기 초반에 등장해 야마다의 현재 상황을 명확하게 전달하고, 그의 이전을 짐작하게 하며, 이후의 모습까지 상상하게 만든다. 특히 한없이 무력한 두 눈과 한껏 말린 어깨는 막 오징어 공장에 떨어진 그의 현 상태를 가장 잘 나타낸다.
출처: 영화 <강변의 무코리타> 스틸컷 (다음)
공장 사장의 소개로 무코리타 연립주택에 입주한 야마다에게 막무가내 이웃, 시마다가 찾아온다. 얇은 벽 탓에 목욕을 방금 마친 걸 알고 있다며 뻔뻔하게 자신도 욕실을 쓰게 해 달라는 시마다. 야마다는 난처함을 표하며 그를 내쫓는다. 찰나의 순간, 시마다는 야마다에게서 자신과 같은 구멍을 발견한다. 분명 나와 다르지만, 내가 가진 것과 같은 구멍. 주택에 사는 사람들도 당연하게 품고 있고, 인간이라면 갖고 있을 수밖에 없는 그것.
"안심하세요, 사람은 누구나 다 죽는답니다."
인간의 죽음. 태어난 순간 당연하게 예정되는 마지막 순간. 영화는 인물들의 살아있음으로 우리의 끝을 이야기한다. 주택 입주민들의 감춰진 이야기는 야마다에게 도착한 연 끊은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시작으로 한 명씩 밝혀진다. 시마다는 자식을 잃었고, 미나미는 남편을 암으로 떠나보냈다. 미조구치는 아들과 함께 묘석 방문 판매를 하지만 반년째 집세를 내지 못하고 있다. 강변의 노숙자들은 여름 태풍이 올 때마다 친구를 잃고 있었다. 모두가 생의 끝자락에서 가족을 잃은 상실과 나를 찾지 못한 슬픔, 가치관을 바꾸지 않으면 살 수 없는 현실을 마주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무코리타 연립주택에 사는 이들에겐 우는 날보다 웃는 날이 더 많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으면서 묵묵히 내일을 생각하며 하루를 산다. 이웃의 이야기에 과도한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서도 눈과 귀로 담아내며 타인의 아픔에 소리 없이 공감한다. 세상으로 나와 어떻게 흘러가야 할지 몰라 밤마다 구구단을 거꾸로 세며 삶의 공포에서 도망가려는 야마다에게, 입주민들만의 방식은 좋은 본보기로 작용한다.
야마다는 마음을 열고 그들과 교류하면서 마침내 자신의 시곗바늘이 움직이는 것을 느낀다. 멈춰있던 그의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죽음과 이별, 상실을 품고 사는 그들만의 방식을 보고 들으면서 자신이 의도적으로 감췄던, 이미 커다랗게 뚫린 구멍을 들여다보고, 그 안에 숨은 상처받은 어린 나를 구출한다.
출처: 영화 <강변의 무코리타> 스틸컷 (다음)
텃밭을 가꾸는 시마다는 소소함에서 행복을 찾는 자칭 미니멀리스트다. 그는 자신의 가난을 타인에게 숨기지 않는다. 자신만이 줄 수 있는 소소한 답례로 타인에게 도움과 배려를 당당히 요구한다. 야마다의 욕실과 밥통과 선풍기까지 마음대로 쓰면서, 건네는 건 텃밭에서 난 채소뿐이다. 야마다는 그의 무례함에 대응하지 않는다. 시마다가 건넨 채소는 그를 굶주림에서 구해줬고, 더 나아가 아버지의 끝처럼 고독사로 죽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해 줬기 때문이다. 그는 시간이 갈수록 시마다를 무례한 이웃이 아닌, 좋은 밥 친구로 인식한다. 밉상으로 전락하기 쉬운 옆집 사람이 무코리타 주택에선 친근하고도 마음 따듯한 이웃이다. 자기 할 말만 하고 사라지는 주택 주인 미나미도, 반년 만에 묘석을 팔아 집세를 내는 대신 소고기 전골을 사 먹는 미조구치도, 말없이 눈빛만으로 사람을 제압하는 스님도, 골동품으로 쌓은 쓰레기 산 위에서 외계인의 연락을 기다리는 두 아이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모두 각자 자신만의 속도와 흐름으로 야마다를, 이웃을 살피고 자기 자신을 돕는다.
물론 그들도 자기가 만든 구멍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다. 야마다와 다른 점은 그들은 혼자가 아니라 같이, 함께 견디고 있다는 점이다. 자신을 옥죄는 고통을 아주 조금씩 일상에 녹여내며, 언제 다 녹여내고 뿌리 뽑을지 생각하지도 않는다. 초조함이나 조급함 없이 묵묵히 내일을 살아가려 시마다는 텃밭을 가꾸고, 미조구치는 아들과 함께 계속 고객의 문을 두드린다. 야마다도 오징어를 손질하듯 자신만의 속도로 아버지의 죽음을 아주 천천히 들여다보며 해체한다. 자기를 버렸던 엄마의 기억을 떠올리고, 계속 따라다니는 두려움과 분노의 실체를 입 밖으로 털어놓는다. 이미 뚫려버린 구멍을 메우기 위해선 그 깊이를 먼저 알아야 하니까.
출처: 영화 <강변의 무코리타> 스틸컷 (다음)
"누구든 다시 시작할 기회가 있는 법이야."
야마다의 사정을 알고 있던 공장 사장의 첫마디, 영화는 처음부터 친절했다. 야마다를 위해 준비된 위로와 사람들, 끝내 미소를 되찾는 그의 정해진 미래까지 무난하고 뻔한 전개 방식이지만, 이는 <강변의 무코리타>가 의도한 것이다. 영화는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아니라 이야기를 이끄는 인물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현실 속 우릴 대변하는 건 인물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간을 가장 두렵게 하고 움츠리게 하는 건 무엇일까. 영화는 죽음이 그 시작이라 봤다. 야마다와 이웃들을 통해 '인간이 죽는 건 당연하다'는 말속에 담긴 부정을 긍정으로 바꿔 가는데, 단순히 죽음을 좋고 친숙하게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삶과 죽음이 같은 선상에 있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고 오히려 마땅하다는 것을 얘기한다. <강변의 무코리타>의 강점은 이를 위해 우리의 생을 가장 먼저 찬미한다는 것이다.
죽음에 무게를 두고 있는 것 같지만, 영화의 추는 늘 살아감에 위치해 있다. 반드시 찾을 수 있는 행복과 희망, 그리고 용기. 야마다는 몰랐던 것뿐이다. 갓 지은 밥을 코로 먼저 맛보고 목욕 뒤 맥주 대신 우유를 마시는 일이 사실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소소한 버팀목이었고, 민달팽이를 보며 어머니를 떠올리고, 과거에 발목 잡혀 불면증에 시달리는 일은 ‘내’가 살아가고 있기에 겪는 과정이었단 진실을 말이다. 야마다는 이웃들과 똑같이 ‘종료되지 않는 치유 과정’에 들어가면서 생명의 전화를 거북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모두가 그랬듯, 깊은 위로로 받아들인다.
출처: 영화 <강변의 무코리타> 스틸컷 (다음)
<강변의 무코리타>가 세운 확실한 전제가 좋다. 연립주택에 사는 이들이 구멍을 없애려고 일부러 함께 모여 살고 계획적으로 이웃에게 관심을 주는 게 아니라는 것, 각자의 방식으로 나의 아픔을 헤아리면서 무작정 타인의 아픔을 위로하지 않는 것. 무엇보다 의도적이지 않은 관심과 크기를 재지 않는 진심, 실없이 터지는 무해한 웃음으로 자연스럽게 소통하며 서로를 보살피는 그들의 이야기는, 정말 위로와 힘을 주는 영화다웠다.
야마다 아버지의 유골함, 미니멀리스트 시마다의 거미줄 이야기, 허기진 배를 채우는 미조구치의 상상극, 생명의 전화와 하늘을 헤엄치는 금붕어, 연립주택 사장 미나미가 품은 남편의 뼛조각, 외계인의 연락을 받기 위해 쌓은 전화기 산, 강변 노숙자의 기타 연주… 다양한 형태와 질감 그 속에 똬리를 튼 생의 의미까지 <강변의 무코리타>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구멍을 파고 또 파면서 이미지를 순간 포착해 생산하고, 비로소 단 한 장의 사진(영화)을 찍어 낸다.
그들의 가족사진에서 하늘을 헤엄치는 금붕어가, 떠난 이들의 유영이 보이는 걸 보니 아무래도 강변에 노을빛을 뿜어내는 무코리타가 온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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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을 위한 안녕
- * 해당 리뷰는 ‘씨네랩’의 초청으로 4월 29일 CGV 용산아이파크몰에서 진행된 <해피엔드>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되었습니다.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일부 존재합니다.<해피엔드>의 배경은 가까운 미래의 일본 도쿄이다. 그리고 영화는 그 시간, 그 공간에서 생기는 그 순간을 포착한다. 그저 흘러갈 것처럼 보이는 자그마하고 의미 없어 보이는 순간들. 하지만 그 순간은 누군가에게는 특별했다. 적어도 ‘코우’와 ‘유타’, 두 사람에게 그 순간은 잊혀지지 않았다.흔들림을 따라영화 속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지진이다. 조그마한 흔들림과 지진경보에도 두려워하는 사람들. 하지만 단 한 사람, 코우만은 다른 생각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코우는 흔들림을 두려워하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지진을 두려워지 않으며 오히려 자신 앞에 놓인 책상을 계속해서 흔든다. 마치 지진이 일어나길 바라는 것처럼 말이다. 코우는 재일교포 4세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코우 본인은 분명 태어난 곳부터 시작하여,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까지 완벽한 일본인이지만 사회는 그를 일본인, 그리고 그들의 국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의 초반 디제잉 공연을 보러간 코우와 유타. 클럽에 경찰이 들어 닥치게 되고, 공연은 중단된다. 그리고 경찰들은 고등학생인 코우와 유타의 신원을 묻는다. 경찰은 일본인인 유타의 신원을 확인하고 나서 유타에게는 그냥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하지만, 코우에게는 휴대의무도 없는 체류 허가서를 요구한다. 분명 같은 자리에 있었고, 같은 감정을 느꼈던 사람이지만 코우와 유타는 외부인과 내부인으로 구분된다.재일조선인인 코우를 비롯하여 대만 혼혈인 밍, 그리고 흑인 혼혈인 톰까지 이들은 모두 그 사회에서 철저한 외부인이었다. 극우 정치인이 권력을 잡고, 총리의 권한을 집중시키는 해피엔드 속 사회, 그리고 그곳에서 철저하게 외면받는 사람들. 그들에게는 어느 순간 ‘비국민’이라는 경멸적인 호칭까지 붙게 되었다. 함께 음악 감상 동아리를 하고, 서로가 함께 있는 것만 해도 좋았던 친구들. 하지만 사회는 잔인했다. 권력은 자신들의 두려움과 위기를 돌리기 위해서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것들을 강조하기로 했다. 눈에 보이는 피부색과 종이에 적힌 출신성분. 그것들은 차별이라는 금을 조금씩 만들고, 금은 공고해 보였던 코우와 유타의 우정에 자리 잡았다. 그렇게 자리잡은 금을 보며, 코우와 유타는 흔들림에 대해 조금씩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된다.두가지 외로움어차피 망해버리는 세상에서 사랑하는 사람끼리 남은 시간을 즐기자고 말하는 유타, 그리고 망해버리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나서자는 코우. 세상이 망해버릴 것이라는 것에 대한 확신은 서로가 같지만 이를 받아들이는 방법은 너무나도 달랐다. 작품을 보면 유독 유타는 환하게 웃는 장면이, 코우는 무언가 생각하는 듯 무표정을 짓고 있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실제로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더라도, 유타는 환하고 넓으며 편안해 보이는 새하얀 아파트에 살고 있다. 이에 반해 코우는 땀냄새와 음식냄새, 그리고 낯선이들의 고성이 오가는 식당에 살고 있다. 이러한 그들의 개별적 삶이 보여주는 극단적인 차이는 우리가 잠시 놓친 것들을 다시 상기시켜준다. 그들이, 또는 우리가 아무리 누군가를 사랑하고 평생을 약속할 정도의 영원한 사랑과 우정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바꿀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바로 그것이 그들 개인의 삶에서 천천히 커져간 가치관과 생각들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들은 누군가가 아무리 노력해도 마음 속 끝에 남아, 결코 채워줄 수 없는 그들 개개인의 것이었다.영화의 초반부, 경찰이 오니까 클럽에서 나가자는 코우. 하지만 유타는 여기까지 왔으니 더 즐겨야겠다면서 음악에 몸을 맡긴다. 그러자 코우는 고민하는 듯 하지만 유타의 말을 따른다. 그렇게 작품 처음부터 유타는 굉장히 주도적이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고 싶어한다. 유타는 유독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인지 유타는 자신의 집에서 친구들을 자주 부른다. 이에 반해 코우는 친구들을 자신의 집에 부르지도 못하며, 엄마와 교장의 말을 따르는 모습을 보여준다. 과연 그들의 차이는 무엇일까. 바로 어떤 외로움을 가졌는지이다. 만약 코우가 느낀 것이 ‘사회 속 개인으로서의 외로움’이라면 유타가 느끼는 외로움은 ‘개인들 속 개인으로서의 외로움’인 것이다. 그들은 서로의 외로움을 이해하기 어려웠고 자신들의 외로움의 심연 속에 빠져들었다.뒤집어진 우리이미 조금씩 흔들리던 그들의 세상에 지진이라는 개념이 가시화되어 나타난 것은 뒤집혀진 무언가였다. 디제잉 공연을 보고 학교로 돌아온 유타와 코우, 그리고 친구들. 그들은 평소 수직적이고 권위적이었던 교장의 스포츠카에 장난을 친다. 그런데 그날 우연히도 지진이 일어나고, 교장의 차는 뒤집힌다. 다음날 뒤집혀진 차를 본 교장은 노발대발하며 학교에 인공지능을 이용한 감시 카메라 체계를 도입하게 된다. AI로 학생들을 감시하고, 벌점을 매기는 감시카메라. 이것이 학교에 도입이 되자, 학교와 사회를 나누던 얇은 벽마저 무너졌다. 학문을 위한 곳을 넘어서 사람이 되는 법을 배우는 곳인 학교. 하지만 이곳에 ‘안전’이라는 명목으로 감시 카메라가 설치된 순간 사람이 되는 법을 배운다는 학교의 가치는 희미해지게 된다. 누구나 실수하고, 싸우고, 무너지고 눈물 흘리면서 배우는 사람들. 그러한 과정들이 없었더라면 그들은 사람다운, 아니 사람다운 척조차도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안전이라는 고결해보이는 말로 그들의 모든 것을 감시하는 순간. 그들은 배움의 과정조차도 평가받고 제한된다.학교 밖에서는 수많은 시위가 발생하고, 정부와 국민이 충돌했다. 그러나 그러한 혼란 속에서 학교가 학생들을 보호해줬던 것은 그들이 결과보단 ‘성장’이라는 가치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이었다. ‘무너져도 괜찮아.’ 실수해도 괜찮아.’ ‘우린 더 나아질거야’라는 그 가치들. 그 가치들은 안전과 같이 편리를 위해 지어진 허황된 말과는 다르게 고귀했다. 그러나 감시가 시작되고 결국, 그들이 성장을 위해 무너지고 실수하는 과정들조차 모두 실패로 여겨지게 되었다. 성장이라는 말은 결국 뒤집혀졌고 실패라는 꼬리표가 매시간, 매분, 매초에 붙여졌다.조금씩 일어나는학교 안과 학교 밖, 인간이라는 존재의 가치에 상처내며 일어나는 불합리적인 일들. 어른들과 사회에게 들려오는 사회부적응자, 양아치, 꼴통, 불량아라는 말들. 그렇게 아이들은 그 어느 곳에서도 그 누군가에게도 위로 받을 수 없었다. 그들에게 힘이 되던 것은 같이 있던 그들, 그리고 우리였다. 학교에 어느날 한 자위대 청년이 찾아온다. 잘생긴 청년의 외모에 웅성거리던 그때,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안보교육을 해야 하니 일본 국적이 없는 이들은 교육을 들을 필요가 없다며 다른 교실로 이동하라고 말하며 아이들을 분리시킨다. 학교 밖에서만 일어났던 차별과 계급화. 그것이 학교로 들어온 순간. 아이들은 더이상 참을 수 없었다.시위에 참여했다며 원래 담임선생님이 교체되고, 징계를 받기도 했지만 참아왔던 아이들도 하나의 세대를 의미하는 하나의 반이 두 눈 앞에서 분리되는 순간을 견딜 수 없었다. 어쩌면 하나의 반의 분리가 결국, 우리 세대의 분리를 의미할 것이라는 사실을 눈치챈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아이들은 교장실에 찾아가 감시카메라 제도 철폐를 요구한다. 그러나, 교장은 안전이라는 이유로 거부한다. 하지만 점거시위까지 하면서 단호했던 아이들. 교장은 어차피 감시카메라가 철폐되어도 너희들이 졸업하고 나서 철폐된다고, 이럴수록 너희들만 손해라고 말한다. 교장의 회유는 배고픈 아이들에게 건네는 초밥을 통해 부각된다. 달콤하지 맛있어보이는 초밥. 그 값비싼 초밥이 갖는 의미는 명확했다. 그렇게 조금씩 무너지고 고민하는 아이들. 하지만 그 순간, 교장실로 오토바이 헬멧을 든 누군가가 나타난다. 김밥을 가지고 말이다.흔들리며 피어나“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흔들리며 피는 꽃>이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꽃은 흔들리며 핀다는 그 말, 그리고 흔들려야 꽃이 핀다는 그 말. 그 말을 아이들도 알고 있었을까. 아이들은 흔들리고 또 흔들려도, 그리고 너무나 흔들려 뒤집혀져 버렸을지라도 꽃 피우고자 했다. 김밥을 들고 오토바이 헬멧을 쓴 채로 나타난 사람은 코우였다. 그리고 그 김밥은 아이들에게 힘이 되어 결국 감시카메라 제도의 폐지를 이끌어낸다. 기득권층의 양심으로 요구가 관철되었다는 사실에 안타까워하는 후미. 하지만 이럴 때는 웃어도 된다고 말하는 코우. 그는 늘 웃던 유타처럼 웃었다.졸업식날, 교장은 감시카메라에 대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자신의 자동차를 뒤집은 범인이 나와야지 감시카메라 철폐를 검토해보겠다고 입장을 바꾼 것이다. 그러자, 후미와 코우를 비롯한 아이들은 반발한다. 그 순간 자신들은 안전을 위해 감시카메라 철폐를 반대한다고 말하는 아이들도 나타난다. 그 결과를 분명 어른들이 의도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감시카메라를 설치하고, 일본인과 외국인을 구분하고, 내부인과 외부인을 나눈 것이 만들어낼 당연한 결과는 졸업식장에서 일어난다. 그러자 자리에서 일어나는 누군가. 바로 유타였다. 그리고 유타는 자신이 교장의 자동차를 뒤집었다고 말한다. 시위와 감시 카메라 철폐 요구에 참여하지 않았던 유타. 망해버릴 이 사회에서 남은 삶이라도 즐기자는 유타. 하지만, 결국 세상을 바꾸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유타였다. 자신이 사랑하는 친구들을 위해, 그리고 결국 감시카메라를 없애고 이 사회를 바꾸는 것이 그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유토는 그 선택을 한다. 그리고 유타는 언제나처럼 웃는다.유타의 희생으로 아이들의 바램은 이루어진다. 하지만 유타는 퇴학당하고, 유타가 그렇게 두려워했던대로 친구들은 하나 둘씩 흩어지게 된다. 그리고 늘 헤어지던 그 육교 앞에 선 유타와 코우. 그들은 언제나처럼 작별한다. 누구보다 행복하게, 장난치고 또 웃으며. 영원히 서로를 사랑한다고 말하며, 그렇게 하나가 된 그들, 아니 우리는 ‘안녕’을 말한다.결국 해피엔드<해피엔드>는 네오 소라 감독의 첫번째 극영화이다. 자신의 아버지, 류이치 사카모토의 마지막 연주를 담은 영화 <류이치 사카모토: 오피스>를 통해 섬세한 연출과 시선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그의 극영화가 이렇게까지 좋은 작품일지 예측한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첫번째 극영화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작품의 음악이나 비주얼적 요소들 모두 탁월했다.그러나 결국 영화가 이토록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큰 의미를 지녔다고 평가받는데 가장 중요했던 것은 해피엔드만의 이야기였다. 영화를 만들 때, 감독은 자신이 살아가면서 본 여러가지 사건들을 반영했다고 말했다. 동일본대지진으로 인한 반원전 시위나 2016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 등이 그러했다. 또한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과 같은 역사들도 감독에게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사건과 역사를 통해 감독은 해피엔드를 만들었고, 과거에 대해 반성 하지 않는 일본의 미래를 그려냈다.
<해피엔드>는 미래를 그려냈다는 점에서 분명 SF 영화이지만 우리에게 익숙했던 SF 영화와는 다른 느낌을 준다. 가까운 미래를 그렸다는 점에서도 그러하지만, 영화 속 도시와 사람들의 모습은 지금의 일본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가끔씩 보이는 도시 전경에 섞인 사이버펑크적인 요소를 볼 때가 되어서야 이 영화가 SF 영화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만약 먼 미래를 그렸다면 감독의 상상력이 더욱 가미될 수 있었고, 영화의 가치와 철학에 대한 반박들에서조차도 훨씬 자유로웠을텐데 왜 감독은 가까운 미래를 영화의 시점으로 택한 것일까. 아마 그것은 영화가 다루고 싶었던 것은 결국 개인이었기 때문이다. 사회는 변하고 가치는 달라진다. 하지만 모든 것들이 변해도 바뀌지 않는 것은 바로, 모든 것들 안에 개인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영화가 원하는 것은 그 개인의 안녕, 그들만의 ‘해피엔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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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여기에 '있다', 그러나 완성도는 '없다'
3★/10★
누군가의 장기를 이식받은 사람이 공여자 성격의 일부까지 함께 전해 받는다면? 우리 삶을 깊이 있게 드러내거나 성찰케 하는 질문은 아니지만 장르 영화 한 편은 적당히 채울 수 있을 만한 물음이다.
〈나는 여기에 있다〉는 이 질문을 동력 삼아 나아가는 영화다. 폐 이식을 받은 ‘선두’와 심장을 이식받은 ‘규종’. 폐 이식 후 악화된 몸 상태로 위태롭게 형사 생활을 이어가던 선두는 어느 날 사건을 하나 맡는다. 평소에는 존재감도 없던 규종이 동료들과 술자리를 하던 중 갑자기 칼로 누군가를 찌른 사건이었다. 선두는 사건을 해결하려 할수록 점차 몸 상태가 악화되고, 규종의 악행은 점점 더 과감해진다. 그리고 두 남자가 사실은 같은 남자의 장기를 이식받았고, 그 남자는 선두가 검거한 살인자라는 사실도 밝혀진다. 영화는 같은 남자의 장기로 삶을 이어가는 선두와 규종의 필연적 대결과 그곳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좇는다.
그러나 연출이나 각본에 따라 흥미로울 수도 있었을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한 〈나는 여기에 있다〉의 시도는 철저히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개연성을 위해 억지로 끼워넣은 장면이 제법 보이고, 영화가 모성을 활용하는 방식과 규종의 범행 동기는 매우 작위적이다. 몇몇 조연 배우의 연기는 저들이 과연 전문 연기자인지(혹은 감독이 아무런 디렉팅을 하지 않았는지)를 의심케 한다. 배역과 상황에 맞지 않는 의상과 소품도 자주 눈에 띤다. 긴장감을 고조시켜야 할 장면에 바닷길 풍경과 갯벌 액션신을 반복해서 활용한 이유도 모르겠다. 예산의 문제일 수도, 감독의 취향을 수도 있으나 어떤 경우든 일부 삭제하는 게 좋았을 듯하다.
요컨대 〈나는 여기에 있다〉는 장르 영화가 취할 법한 그럴듯한 아이디어 빼고는 거의 아무것도 없는 영화다. 제목이 품은 선언적 야심은 그 어디에도 다다르지 못한 채 길을 잃었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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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길이네 곱창집> - '내일의 희망을 붙잡고 살아간다는 것'
용길이네 곱창집
(焼肉ドラゴン, Yakiniku Dragon)
개봉일 : 2020.03.12 (한국 기준)
감독 : 정의신
출연 : 김상호, 이정은, 마키 요코, 이노우에 마오, 오타니 료헤이, 오오이즈미 요
'내일의 희망을 붙잡고 살아간다는 것'
이 영화는 오늘 당장 손에 잡히는 희망이 없어 어쩌면 내일은 있을지 모르는, 내일의 희망을 잡고 살아가는 가족의 이야기다. 전쟁 직후 만신창이가 된 조국에서 쫓겨나듯 떠나온 용길과 영순은 낯선 땅에서 부부의 연을 맺는다. 용길과 영순과 함께 떠나온 시즈카, 리카, 미카는 한 자매가 되고, 막내 토키오가 세상에 나온다. 이들은 한국인이면서 일본인이고, 지금 밟고 있는 나라 땅에 살아가는 국민이면서 국민이 아닌 사람들이다. 경제는 매우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용길이네 곱창집이 있는 판자촌은 하루가 다르게 무너져내린다.
강한 태풍 한 번이면 날아갈 듯 연약해 보이는 작은 판잣집에서 함께 사계절을 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또 아껴가며 긴 세월을 버텨온 용길의 가족에게서 여러 발효 식품들의 냄새가 풍기는듯하다. 뜨거운 여름 햇살 아래 아주 진하게 묵어버린 된장과 고추장. 그런 것들의 냄새 말이다.
머리 위로 쉼 없이 비행기가 날아다니고 있건만 내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 탈 비행기는 없는 현실이 슬프다. 하지만 슬퍼하고 주저앉는다고 해서 해결될 일은 아무것도 없다. 무조건 부딪히고, 이겨내고, 살아남아야 한다. 용길은 그렇게 말한다. 그는 나를 위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낯선 땅에서 가족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힘을 쥐어짜본다. 나라를 위해 한쪽 팔을 바쳤건만, 돌아온 건 힘겨운 삶뿐이다.
다른 나라와 조금은 다른 시기이긴 하지만, 최근에 개봉한 영화 <미나리>를 보며 <용길이네 곱창집>을 떠올리기도 했다. 아직 씨조차 뿌리지 못한 단단하고 낯선 타국 땅 위에 나와 나의 가족들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가족의 모습이 서로 닮아있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미국이든 일본이든 어디든.. 타국살이라는 것이 참 눈물 나는 일이란 걸 이만큼 자라고 나서야 알았다. 아무튼, 지지 않고 꿋꿋이 뿌리를 뻗어내리고 있는 그들의 내일엔 아주 작은 희망이 움틀 수 있길 바랄 뿐이다.
용길이네 곱창집 시놉시스
1969년, 고도성장이 한창이던 일본 오사카 공항 근처의 판자촌 동네. 그곳에 전쟁을 겪고 일본으로 건너와 뿌리를 내려 살아가던 사람들이 있었다. 좁디좁은 ‘용길이네 곱창집’ 한 켠에 모여 술 한 잔에 시름을 털어내며 차별과 무시를 꿋꿋하게 버틴다. 가족이 있기에 오늘보다 나은 내일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69년 봄, 노란 잎을 가진 꽃이 만개하고 따스한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올 때. 우리는 용길이네 곱창집을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고도성장이라는 특급열차를 탄 사회 속에서 아직 그대로 머물러있는 판자촌. 구불구불 이어지는 골목의 한켠, 용길이네 곱창집이 있다. 머리 위로는 비행기가 지나고, 시끌시끌한 동네는 풍족하진 않지만 나름의 행복을 찾아가고 있는듯하다.
첫째 시즈카와 둘째 리카, 셋째 미카, 그리고 막내 토키오. 용길과 영순. 여러 복잡한 사연을 가진 이 여섯 명은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함께 살고 있으며, 느리고 뒤처진 걸음이지만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생을 살아간다.
시즈카는 다리를 절고, 리카는 사랑하지 않는 테츠오와 결혼을 하고, 미카는 유부남 하세가와와 사랑에 빠진다. 토키오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왕따를 당하고 그를 지켜보는 영순은 속이 터진다. 영순과 반대로 용길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소란 피우지 말라며 가족들을 토닥인다. “소란 피우지 마”, “난 한국 가련다!” 두 사람의 말다툼은 영순의 한마디와 함께 막을 내린다.
한국과 닮지 않은 듯 어딘가 닮은 나라. 일본. 혼인을 약속한 신랑의 발바닥을 때리고, 술에 거나하게 취해 닐리리아를 부르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이들이 한국인이라는 것을, 함께 있는 일본인들도 한국인들과 닮아있음을 느꼈다. 하지만 비슷한 나라라고 해도 어쨌든 타국은 타국이다.
전쟁의 참혹함을 피해 도망치듯 안착한 타국 땅. 용길은 가진 돈을 털어 땅을 사고 곱창집을 차린다. 그는 이렇게 하루하루 살아나가다 보면 언젠가 희망이 생길 거라 믿으며, 외롭게 남은 한 팔로 열심히 곱창을 굽는다. 그 땅이 국유지라는 것도 모른 채 말이다. 시간이 지나 사회는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그리고 이젠 나름 먹고살만해진 사람들을 위한 여유 공간의 건축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정부는 판자촌이 원래 국유지였다며 그곳에 공원을 지을 것이니 빠른 시일 내에 퇴거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내 돈을 주고 산 내 땅이지만 내 땅이 아닌 땅. 용길은 나도 돈을 주고 산 땅이라며 퇴거 명령에 불응한다.
가슴이 터져나갈 것만 같다. 당장이라도 비행기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고향으로 돌아갈 돈도, 다시 터를 잡을 돈도 없다. 비행기 활주로에서 가장 가까운 동네에 살고 있지만 비행기와 가장 먼 사람들. 용길은 막내 토키오를 손수레에 태우고 활주로 옆길을 달린다.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큰 소리를 지르면서 말이다.
가진 것 없는 무력한 이들이 할 수 있는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털썩 주저앉아 울거나, 소리를 지르는 것뿐이다. 영순은 가족들과 갈등을 겪을 때마다 큰소리로 윽박을 지르고, 시즈카, 리카, 미카 또한 자신을 갈등하게 만드는 인물인 테츠오와 하세가와 부인에 대적해 목소리를 낸다. 하지만 토키오와 용길은 그러지 못했다.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던 토키오는 아이들을 향해 제대로 된 말 한번 해보지 못하고 죽음을 선택한다. 현실을 이겨낼 무기가 없다면 마음껏 소리라도 질러봐야 하는데.. 그것조차 할 수 없었던 토키오의 마음이 얼마나 답답했을지.. 안타까웠다.
용길은 아들의 죽음과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앞에서 처음으로 큰소리를 토해낸다. “이 땅 가져가려면 내 팔 돌려줘.” 항상 담담하게 가족을 지켰던 아빠의 입에서 서러운 말들이 터져 나온다. 나도 모르게 마음이 울컥하는 순간이었다.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을 등지고 매일같이 치열하게 싸우며 살아남았다. 나라를 위해 전쟁에 나갔고 팔을 잃었다. 하지만 이 나라는 다시 잡은 삶의 희망조차 빼앗아가려고 한다. 내 땅, 내 가게, 내 생계. 원래부터 사고팔 수 있는 땅은 아니었다지만.. 그래도 엄연한 내 땅이었거늘. 용길에겐 이제 고향도, 새로운 희망도 보이지 않는듯하다.
“거기서 보는 풍경은 멋지냐?”
삶이 답답하고 팍팍하다. 토키오는 시끌벅적한 사람들의 소리를 피해 지붕에 올라간다. 용길은 그런 아들을 보며 “거기서 보는 풍경은 멋지냐?”라고 묻는다. 붉게 물드는 하늘은 굳이 말할 것 없이 아름다웠다. 아름다운 하늘 아래서 용길이 말한다. “기분 좋다. 이런 날은 내일을 믿을 수가 있지.” 희망이 보이지 않았던 오늘이 지나고 내일이 오면, 정말 희망이 찾아올까? 내일이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내일은 행복해질 수 있을까. 용길의 가족은 희망을 찾아 각자의 길로 떠난다.
용길이네 곱창집이 있던 판자촌은 철거 후 아름다운 공원으로 태어날 것이다.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아픔은 남김없이 쓸려나갈 것이고, 그 위엔 아주 깔끔하게 포장된 새것들의 냄새가 가득 차겠지. 흩어진 가족들은 각자의 터전을 구축하고 내일을 맞이하기 위해 열심히 살아갈 것이다. 가끔은 가족을 잊고, 또 가끔은 사무치게 그리워하면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사연 많은 한 가족의 추억이, 찢어지게 아팠던 순간들이 벚꽃잎 한 장 한 장에 담겨 휘날린다. 오늘을 살아가고 나면 내일은 희망이 있겠지. 당장은 보이지 않지만 언젠가 다가올 희망을 그리며 오늘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내일은 희망이 가득 쏟아져내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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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의자는 없습니다. 흥미로운 인물이 있을 뿐
* 범인 스포 없음
[그렇게 사건 현장이 되어 버렸다]는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한 최악의 선택이다.
시험을 일주일 앞두고 이걸 정주행하느라 이틀을 버렸다.
내가 많은 추리물을 본 것은 아니지만 최근 본 추리물 중에서는 가장 재밌는 추리물이다.
# 백악관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
백악관의 총 관리자였던 윈터가 살해된다. 그를 중심으로 두고 백악관의 직원, 대통령, 유명 인사들의 관계와 그들의 진술들을 풀어나간다. 누구는 그에게 약점을 잡혔었고, 누구는 그가 재수 없어서 싫고 등등. 여러 증거들이 다양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대통령의 친구나 대통령의 말썽쟁이 가족들, 백악관의 직원들이 이 드라마의 용의자와 목격자가 되어 주기에 미국 정치 풍자 드라마에서 흔히 보는 미국식 농담 개그들도 함께 이 추리물에 곁들어 있다. 사치와 패악을 부리는 낙하산 관리자들과 고통받는 직원들. 그들의 무능함이나 혹은 무례함을 보여주는 장면들이 웃음 포인트들이 된다.
또 기득권층을 가득 채우는 백인 남성들에 대한 풍자 개그들도 더러 있다. 아무것도 못하고 여성 탐정을 닦달하는 FBI, 경찰, 고위 정치인들, 그리고 그들의 추리를 그냥 통째로 무시해버리는 세계 최고 탐정의 우아함이 드라마의 매력이다.
# 드라마의 연출
드라마의 연출이 상당히 신기하다. 추리물을 많이 본 편은 아니지만 보통 추리물은 탐정의 시선을 따라서 현재 탐정이 초점에 둔 사건 혹은 인물의 뒤를 캐면서 진행된다. 내가 보았던 나이브스 아웃이나 오리엔탈 특급 열차나 혹은 다른 추리물들도 비슷했다.
다만, 이 드라마는 마치 따지고 보면 미국 시트콤이나 혹은 다큐멘터리의 진행 방식과 닮았다.
어느 인물이 한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면, 그 사건에 관련 있는 모두가 사건에 대해 진술하는 방식이다. 탐정이 인터뷰나 조사를 어떻게 했는지를 타임라인으로 보기보다는 서로 다른 진술들을 퍼즐처럼 맞추어가는 형태다. 그렇기에 그전의 사건이 어땠는지를 시청자인 우리도 생각하며 보게 만든다.
또 이 드라마는 사건 현장인 백악관뿐만 아니라 청문회와도 번갈아가며 진행된다. 백악관에서는 탐정이, 청문회에서는 탐정에게 취조 받은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사건이 조금씩 해결되는데 탐정은 어디 있는지? 이 청문회 장면은 왜 나오는 건지? 이 또한 시청자들이 기다리고 볼 몫으로 남겨진다.
# 매력적인 탐정
코델리아 컵 탐정, 흑인 여성 탐정이고 위에서 말했듯 상당히 우아하다.
조류 관찰자? 탐색가?라서 탐조하는 것이 취미고, 수사 방식부터가 새들의 사냥 방식 혹은 생존방식에서 영감을 얻는다. 내가 추리물을 많이 안 보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보통 잘난 탐정이 서민들을 무시하며 우리도 모르는 사이 퍼즐을 맞춰놓고 이것도 몰랐냐? 이 바보야? 하고 농락하는 것 같이 느껴져서인데 이 작품은 그렇지 않다.
탐정이 누누이 말한다.
"용의자는 없습니다. 흥미로운 사건 혹은 인물이 있을 뿐이죠."
그 말처럼, 탐정의 수사 방식은 한 사람 혹은 증거에 꽂히는 것이 아니다. 탐정은 최대한 많이 듣고 많이 보고 많은 사람과 만나며 그들의 진술을 기억한다. 설사 그들의 진술이 도대체 이 사건과 무슨 상관이 있는 거지? 하는 것들도 많다. 예를 들면 피해자가 신중한 성격이어서 항상 문을 닫고 얘기를 했다든지, 대통령의 장모님이 술 중독이라든지, 그날 오기로 했던 가수가 안 왔다든지. 그러한 진술들을 자신의 노트에 차곡차곡 기록해둔다. 그들의 인상착의, 말하던 말투, 특기, 하다못해 방 안의 그림들까지.
팀장은 침착하고 그리고 우아하게 사람들을 심문한다. 탐정이 자주 쓰는 방식은 "침묵"인데 사람들 앞에서 침묵을 통해 그들이 찔려 하는 부분을 술술 불게 만든다. 반은 변명이고 반은 거짓말이지만 탐정은 그러한 거짓말 또한 차분히 들어주며 하나의 조각으로 삼는다.
맨 마지막에 가서야 처음에는 상관없어 보였던 모든 조각들이 모인다. 탐정은 그것을 천천히 맞춰나간다. 우리가 천 피스 퍼즐을 사서 바닥에 풀어놓으면 꼭 안 이어질 것 같은 퍼즐들이 난잡하게 되어있는 것처럼 말이다. 누군가는 그것이 조금 느리거나 지루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난 정석적인 추리처럼 느껴졌다.
# 추리물이란
나는 추리물에 대한 편견이 좀 있다. 어릴 때 봤던 코난도 그렇고 조금이지만 봤던 셜록도 그렇고 전혀 모르겠는데 그들은 나름의 "트릭"을 발견했다며 기가 막히게 사건을 해결한다. 꼭 "저기 창틀에 물방울이 하나 있는 것을 보았어요. 아마 어제 새벽에 비가 왔는데 그때 미처 재킷을 털지 못한 스미스 씨가 아침에도 그것을 입고 와서 바쁘게 일을 하느라 미처 못 닦았던 그 물방울이겠죠?" 식으로 진행되니 그다지 명석하지 못한 내 입장에서는 이게 뭔가 싶다.
다만 이 사건은 조금 친절하게 그리고 천천히 진술을 모으면서 진행된다. 또한 추리물보다 코미디인가 싶을 정도로 캐릭터들이 웃기고, 또 누구 하나를 용의자로 선택하지 않아서 오히려 덜 긴장한 상태로 보게 된다. 이 드라마의 흐름에 나를 맡기다 보면 어느새 퍼즐이 모아져 있다. 아마 추리물의 놀라운 트릭이나 그들의 명석함, 혹은 천재적임을 기대했다면 코델리아 컵 탐정의 천재력은 조금 아쉬울 수 있으나 함께 풀어나가는 문제 풀이식 추리물 + 코미디를 원했다면 상당히 좋은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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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이 시사회 후기 - 메마른 관계일수록 불은 빨리 붙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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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미스러운 일로 고향을 떠났던 `에런`은
친구 `루크`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20년 만에 고향을 찾는다
가족을 죽이고 자살한 것으로 보이는 `루크`
유가족의 요청으로 사건을 파헤치던 `에런`은
여자친구였던 `엘리`의 죽음에도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음을 알게 되는데...
묻혀있던 두 개의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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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맞는 장면이 너무 많은데 전부다 100% 리얼로 한 영화 ㅋㅋ
두번다시 안나올 레전드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2004) 재밌게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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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 속 친구가 눈 앞에 나타난다면? 믿어야만 보이는 세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 [이프: 상상의 친구] 1차 예고편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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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해적 : 도깨비 깃발> 30초 예고편
자칭 고려 제일검인 의적단 두목 '무치'와 바다를 평정한 해적선의 주인 '해랑'. 한 배에 운명을 함께하게 된 이들이지만 산과 바다,
태생부터 상극으로 사사건건 부딪히며 바람 잘 날 없는 항해를 이어간다.
그러던 어느 날, 왜구선을 소탕하던 이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왕실의 보물이 어딘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해적 인생에 다시없을 최대 규모의 보물을 찾아 위험천만한 모험에 나서기 시작한다.
하지만 사라진 보물을 노리는 건 이들뿐만이 아니었으니!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역적 ‘부흥수’(권상우) 또한
보물을 차지하기 위해 바다에 뛰어드는데...!
해적과 의적, 그리고 역적
사라진 보물! 찾는 자가 주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