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모파로2023-06-06 16:36:13
수이와 이경의 눈부신 성장 로맨스
한국 애니메이션 여성 퀴어 영화 그 여름
“우리는 마시고 내쉬는 숨 그 자체였다”
태생적인 갈색톤의 머리카락과 눈동자로 놀림을 당해 온 평범한 고등학생 이경이 우연하게 날아온 축구공에 맞아 안경이 부러지며 축구선수 수이와의 첫 만남이 시작된다. 미안한 마음에 수이가 매일 같이 이경을 찾아 딸기우유를 건네며 둘은 조금씩 가까워지고 묘한 사랑의 감정을 키워 나간다. 시간은 흘러 고3의 여름, 둘은 서로가 함께하는 미래를 꿈꾸지만 수이는 부상으로 인해 더 이상 축구 선수의 꿈을 이어나가지 못하고 이경은 평범한 대학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서울로 상경한 두 사람은 각자의 삶을 이어가며 사랑을 지속하지만 조금씩 어긋나고 뒤틀리는 관계에 이별을 맞이한다. 최은영 작가의 단편집 ‘내게 무해한 사람’에 수록된 동명 소설을 원작을 옮긴 한국 애니메이션 영화 그 여름은 수이와 이경이라는 두 여고생의 뜨거운 여름날에 시작된 반짝이는 청춘의 순간을 전한다. 조심스러우면서도 순수한 마음으로 시작된 사춘기 소녀의 첫사랑과 뒤이어 따르는 성장이라는 주제의 감정선을 섬세하게 따라가며 관객들의 정서적 공감을 이끄는 형식으로 강렬하기보단 천천히 젖어드는 작은 떨림이 존재했다.
애초에 애니메이션이라는 정보만을 인식한 채 시사회에 간 거라 예상치 않은 퀴어(LGBT) 장르가 한국, 그것도 애니메이션 극장판으로 나왔다는 것에 조금 놀랐지만, 앞서 언급한 잔잔한 여운이 남는 매력적인 이야기가 더 흥미로웠다. 사랑이라는 주제가 인종, 성별과 관계없이 대중들의 공감을 일으킨다는 건 이미 해외의 여러 수작들로 증명된 바이고 특히 첫사랑은 늘 설렘과 두근거림을 상기시켜주지 않는가? 묘한 눈빛과 감정, 소소한 손길이 닿는 베스트셀러 바탕의 흥미로운 이야기는 이러한 강점들을 잘 살리고 일본 애니메이션이 떠오를 만큼 인물, 시골과 서울 등을 묘사한 한국 애니메이터들의 발전된 그림체는 학창 시절부터 20대 초반을 지나치는 시간을 담은 빛바랜 사진첩처럼 추억을 선사하며 말랑말랑한 분위기를 더욱 그럴싸하게 꾸며준다. 여기에 메인 테마곡 정우의 ‘그 여름’, 선우정아의 ‘도망가자’, 브론즈 with 미노이의 ‘HARU’ 등의 노래들이 적절하게 배치되어 두 사람의 상황과 이어지는 감정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며 섬세한 작화만큼이나 감성적 터치로 관객에게 여운을 남긴다.
한국 애니메이션 영화 그 여름은 그렇게 성장과 첫사랑이라는 감정을 두 소녀의 풋풋한 감정을 시작으로 20대의 이별까지 그린다. 시종일관 담담한 기조는 격렬한 감정의 파고보다 한 방울로 시작된 호숫가의 잔잔한 물결처럼 다가온다. 누군가에게 평범했을지도 모르고, 혹자에게는 특별했을지도 모를 추억을 떠올려보라는 듯 말이다. 깔끔하고 담백한 연출과 누군가의 마음을 훔쳐본 듯한 스토리는 매력적이지만, 슬픔을 억누르고 상대방의 행복을 빌며 애써 웃음 짓는 이별의 순간도,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만큼 중요한 것이기에 60분가량의 짧은 분량에서 후반부 이별을 맞이하는 두 사람을 보여주는 데는 한계가 있어 보여 비싸진 티켓값에 관객이 선뜻 선택할지 의문이 남는다. 멋지게 표현된 한 편의 뮤직비디오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으테니 말이다.
“열여덟 여름에 처음 만났다”
갈색 눈동자를 가진 평범한 학생 '이경' 여름의 햇살을 닮은 고교 축구선수 '수이' 열여덟 살의 여름, 예기치 못한 사랑에 빠진 '이경'과 '수이'는 함께하는 미래를 그리며 스무 살을 맞이한다. 대학에 진학한 '이경'과 달리 '수이'는 바로 사회에 뛰어들고, 낯선 행복과 사소한 오해 속에서 둘은 새로운 계절을 마주하게 된다.
예고편│Trailer
원제: The Summer│감독: 한지원│원작: 최은영 작가의 동명 단편 소설
출연진: 윤아영, 송하림 외 多
장르: 애니메이션, 드라마, 멜로/로맨스│상영 시간: 61분
국가: 대한민국│등급: 12세 관람가
제작: (주)레드독컬처하우스│배급: 판씨네마(주)
평점: 평론가 7.0
개봉일: 2023년 6월 7일
한 줄 평 : 비로소 깨닫는 첫 사랑이 남긴 계절의 흔적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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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머지 99%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방금 카페에 들어와서 노트북을 켰다. 늘 먹던 딥초코라떼를 주문했다. 그리고 뚜벅뚜벅 다시 자리로 돌아와서 뭐라고 쓰지? 고민했다. 갑자기 지갑과 휴대전화가 어디 있지? 생각했다. 에어팟으로 음악은 나오는 거 보면 분명히 전화기는 근처에 있다. 주머니를 뒤졌다. 여긴 없다. 내가 지금 앉은 책상이 유리로 된 책상이 있고 아래에 투명한 공간이 있다. 이 공간에 손을 슬쩍 넣었다. 역시 없다. 뭐지? 갑자기 오싹해졌다. 가방에 있나? 가방에 손을 슬쩍 넣었더니 여기에도 없다. 순간 당황했다. 어쩌지. 근처의 가방을 다른 의자로 가져다 놓으려고 할 때 전화기와 지갑이 보였다. 노트북을 열어놨고, 그 기계에 가려져서 못 찾는 것이었다.
늘 있는 일인 것 같아 별로 놀랍지는 않지만 갑자기 상상에 빠졌다. 만약 누가 훔쳐간 거라면? 지금 앉아있는 자리 위치상 제일 구석에 있기 때문에 나를 굳이 찾아오는 게 아닌 한 내 걸 가져가기는 어렵다. 그래도 만약에 어린, 한 7살쯤 되는 애가 내 걸 훔쳐갔다고 하면 난 어떤 반응을 보일까? 예전 파리에 여행을 갔을 때 생각난다. 소매치기 같은 범죄가 어리다고 해서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그때 나는 '역시 나쁜 놈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있구먼'이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아마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난 경찰서에 가지 않을까? 그리고 어리다고 봐주고 이런 것 없이 처벌받게 했을 것 같다. 그게 그 애한테도 좋은 거고. 나 자신한테도 좋을 테니까. 당연하지. 나는 저 애의 도둑질에 직접적인 관련이 없으니까. 이런 나의 마음가짐은 평소에 뉴스를 볼 때에도 이어진다. 내가 강박장애가 있어도 돈을 훔치고 싶은 강박에 시달렸던 적은 없다. 비슷한 느낌으로 '저 사람을 칼로 찌르지 않으면 불안할 것 같다'라고 생각한 적 역시 없다. 난 다른 사람들과 별다를 바 없이 소년이라고 봐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소년원 제도가 그렇게 옳은지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도덕관념과 나이는 별개의 문제니까. 이런 나에게, 또 비슷한 생각을 가진 많은 이들에게 넷플릭스가 드라마 한 편을 가져왔다. 과연 소년범죄의 해답이 강한 처벌에만 있을까. 넷플릭스로 가보자.
1. 어떤 것에 대한 드라마인가요?
한 판사가 있다. 이 판사는 소년범죄에서 일하는 판사다. 판사는 연화 지방법원이란 곳에 발령받는다. 판사는 자기의 후임을 확인한다. 마음 따뜻해 보이는 남자 판사와 아래 직원들이 있다. 근무 첫날. 소년범죄 전과자들과 함께 식사하러 간 자리에서 식당의 손님이 지갑을 분실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판사는 전부터 표현하고 있던 소년범죄자들에 대한 혐오를 분출하며, 일행이었던 한 여자아이에게 책임을 묻는다. 적당히 타이르고 이해해주고 이런 거 없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여자아이의 도둑질을 들춰내 망신을 준다. 주인공 심은석 판사는 그런 사람이다. 온정도, 따뜻함도 없는 그런 법관이다.
드라마는 이 심 판사에 대한 인물 제시를 베이스로 소년범죄자들에 대한 판결 과정을 보여준다. 드라마의 핵심 소재는 이 것이다. 토막살인사건, 고등학교 시험지 유출 사건, 집단성폭행 등을 다루면서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을 것 같은 소년범죄의 이면을 다룬다. 아. 드라마에서 다루는 세부 소재는 하나 더 있다. 바로 소년범들을 수용하는 소년범센터도 드라마에 담겨있다. 그러니까 소년범죄자들이 벌이는 범죄자가 얼마나 잔혹하냐가 소재가 아니라는 뜻이다(물론 폭력 수위 묘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부수적인 것일 뿐). 소년범죄가 어떻게 일어나고, 왜 노출될 수밖에 없으며 처분 이후 어떤 과정을 통해 사회로 나서는지도 묘사한다. 이 드라마는 그런 드라마다.
2. 어떤 드라마로 정의할 수 있을까요?
나 역시 소년범을 싫어한 것 같다. 강박장애가 있어도 사람을 죽이고 싶다는 마음이 든 적은 하나도 없었다. 이들이 정신질환이 있다는 묘사 하나만으로도 무슨 병이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게 만드는 살인귀가 된다는 식의 인식이 너무 싫었기 때문이다. 몇몇 병이 그런 폭력적인 수위로 분출될 수 있다는 건 알지만 그런 폭력성과 내면의 아픔이 무조건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다고 믿었다. 그래서 이들이 어리다고, 정신질환자라고 봐주고 이런 게 좀 맘에 안 들었다. 나 역시 화를 내는 사람이었다.
나는 이 드라마를 보고 생각이 어느 정도 바뀌었다. 가령 나 역시 '시험지 유출 범죄'에 노출될 뻔했던 사실이 대표적이다. 물론 이런 일은 공정을 해치는 일이라 절대적으로 일어나선 안 되는 게 맞고 피해자는 엄벌에 처해져야만 한다. 그런데, 나는 서울대를 위시한 명문대 지상주의를 만든 쪽에 기여한 사람일 수도 있다. 아이들의 범죄에 기여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내가 뭘 바꿀 수 있었을까 생각도 든다. 그런데 아쉽다. 나 역시 학벌에 지배당하고 있던 사람일까 봐. 그런 마음이 하나둘씩 쌓여서 지금의 10대가 고통받는 세상을 만든 건 아닐까 싶어서. 이런 미친 세상에 1인분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지를 강요한 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소년심판은 이런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그것에 대한 응당한 처벌만을 핵심 키워드로 삼지 않는다. 나름의 균형 있는 시각으로 이 드라마를 보고 있는 어른들을 두세 번 생각하게 만든다.
3. 소년법을 소재로 다뤘습니다. 소년범을 어떤 시선으로 보고 있나요?
폭력의 수위를 미화해 무조건 교화해야 할 대상으로 그리지 않았다. 오히려 적절한 처벌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드라마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소년범 센터를 다룬 에피소드가 있다. 에피소드 중간에 센터장과 10대 아이들의 진술이 엇갈리는 부분이 있다. 1) 아이들이 먼저 심한 말과 함께 밥을 안 먹겠다고 했다 2) 센터장의 폭언과 푸대접 때문에 먹지 않았다가 대립하는데, 이 경우를 둘 다 상황 극화시켜 제시한다. 난 이게 분명한 감독의 의도라고 생각한다. 첫 번째. 연출자가 일단 누군가의 편을 들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두 번째. 이 두 가지 논쟁에서 '어느 게 옳은가'를 강조되는 효과가 있다고 생각한다. 난 실제로 어느 쪽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를 알고 나서 좀 화가 났다. 이렇게 한쪽의 시선만을 제시하는 연출법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후반부에 집단성 범죄를 다루는 에피소드가 있다. 여기서 성범죄 용의자가 피해자 아버지와 대화하는 신이 있는데, 아이패드에다 침을 뱉고 싶었다. 그러니까 범죄자들의 악성을 묘사하는 데는 가감이 없었고 이들의 범죄행각에 처벌이 무조건적으로 따라가야 한다는 필연성을 제시했다는 뜻이다. 무조건 미화하는 듯한 태도를 걱정하시는 분들은 신경 쓰시지 않아도 된다.
4. 폭력의 수위는 어떠한가요?
성범죄 묘사가 있다. 또 학교폭력 묘사가 있다. 이 외에도 우리가 아는 10대 범죄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기 때문에 여기서 일어날 수 있는 범죄 묘사는 다 들어갔다고 볼 수 있다. 근데 쓸데없이 외설적이고 잔인하고 이러지는 않다. 적당히 화나고 적당히 거부감이 있다.
5. 이 드라마의 장점은 무엇일까요?
첫 번째. 3번에서 쓴 부분이 드라마의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균형감각이다. 드라마는 쉽게 편을 들지 않는다. 즉 무작정 소년들을 교화해야 할 대상으로 쓰지 않았다. 이와 반대급부로 무조건적인 처벌이 능사가 아니라고도 말한다. 왜 소년범죄가 일어나는지. 일어나고 난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지. 이들에게 과연 실질적으로 필요한 게 무엇인지. 교화의 효과가 어떤 긍정적인 방식으로 일어나는지를 섬세하게 녹아내리며 탄탄한 극본의 힘을 보여준다.
다른 장점은 떠나간 이들에 대한 예우다. 소년범죄로 인해 세상을 떠난 분들이 있을 수도 있다. 마음이 너무나도 아프고 이 드라마를 보고 나서도 화가 여전히 날만한 일이다. 이 드라마는 이 피해자들과 유족에 대해서 사려 깊은 묘사를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쓸데없이 잔인하지도 않고 외설적이지도 않다. 적당히 거부감이 들어 화가 나는 묘사였다고 생각한다. 또 떠난 이들에게 억지 신파를 주입시키지 않고도 감정이입을 하게 해 주니 난 이 정도면 좋은 시각으로 이들을 대했다고 생각한다.
세 번째는 입체적인 인물들이다. 주인공 심은석의 입체성은 어느 정도 생각하기 쉬웠지만 차태석-나근희-강원중 캐릭터는 이제까지 본 것과는 미묘하게 다른 인물들이라고 생각한다. 클리셰라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을 텐데, 이 분들도 뭐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단적으로 극을 위해 희생당하는 게 아니라 캐릭터의 존재 이유만으로도 청자들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있다.
이 외에도 배우들의 연기가 탁월하다. 속사정을 가지고 있는 심은석 역은 김혜수 배우가 아니면 불가능했을 것 같다. 또 입에 욕을 달지 않고 연기를 하는 김무열 배우도 연기가 좋았다고 생각한다. 신선했다. 또 이성민 배우는 찐 50대 가장의 잔소리 톤이 나와서 놀랐다. 그중 최고의 퍼포먼스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이정은 배우다. 이정은 배우는 연기를 한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그냥 그분의 다른 특성에 그런 모습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다른 조연진에 익숙한 얼굴들이 많이 나온다. 아마 한국 독립영화를 많이 보셨으면 알 염혜란-이상희-이석형-유재명-이봄-심 달기 등 짱짱한 배우들이 드라마의 재미를 덧붙인다.
6. 이해가 어려운 작품은 아닌가요?
아니오. 이해가 어렵지는 않다.
7. 이 드라마를 보기 전에 알아야 할 사실이 있나요?
없다. 무난하게 볼 수 있다.
8. 왜 추천하고 싶나요?
드라마에서 이성민 배우가 맡은 강원중이 이런 대사를 한다. "중요한 건 법이 아냐. 시스템이지." 또 이정은 배우가 맡은 나근희 역이 이런 대사를 한다. "소년법은 스피드예요." 이 두 가지 대사는 상충한다. (드라마가 어떤 가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는 쓰지 않겠다) 법원이 범죄자들에게 사려 깊은 성찰 없이 교화 명령을 내리거나 강한 처벌을 했다고 해보자. 과연 그게 능사일까? 교화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생각은 사실 많은 것을 염두하지 않고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극 중 한 인물의 대사처럼 다른 나라에서의 예를 들며 소년범죄의 강한 처벌이 모든 해결책이 아니라는 게 사실일 수도 있으니까. 또 징역 15년 받고 다시 사회에 나온 전과자가 다른 범죄를 일으킨다는 보장이 있나? 아닐 것이다. 실제로 이것에 대한 예시가 첫 번째와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묘사되기도 한다. 또한 폭력의 대물림과 범죄자들에게 냉담한 시선이 또 다른 범죄를 야기시킬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내는 분노 이면에 깔려있는 사실일 것이다. 사실 소년범죄자는 가해자가 맞다. 그리고 피해자이기도 하다. 절대 상충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끔찍한 폭력을 일으켜 당연히 처벌받아야 할 범죄자이기도 하고, 어리기 때문에 더 나은 인간이 될 교화의 기회를 받지 못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평범하게 있는 부모님이 없다고, 돈이 없다고, 적절한 교육이 없다고 누구는 범죄 저지르기가 쉽다면 그게 100% 그들의 탓이라고 볼 수 있을까. 드라마는 이 두 가지의 처지가 절대 충돌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제시한다. 설득력 있게. 말과 글로는 이렇게나 쉽지만 시각이 트이는 건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 드라마는 탁월한 깊이로 관객들에게 도움을 준다.
뉴스로 접하는 강력범죄는 전체 소년 범죄 중 1% 정도라고 해요. 그런 나머지 99%에 대해 우리는 과연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드라마 제작 발표회에서,
심은석 역의 배우 김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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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 픽션보다 약간의 현실이 섞인 픽션이 더 재밌는 법
댓글부대 (Troll Factory, 2024)
100% 픽션보다 약간의 현실이 섞인 픽션이 더 재밌는 법
개봉일 : 2024.03.27.
관람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장르 : 범죄, 드라마, 스릴러, 블랙코미디
러닝타임 : 109분
감독 : 안국진
출연 : 손석구, 김성철, 김동휘, 홍경
개인적인 평점 : 3.5 / 5
쿠키 영상 : 없음
*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 짚고 갈 것은 <댓글부대>는 실화가 아니다. 영화의 도입부에 이건 실화고, 사실 적시 명예훼손을 피하기 위해 익명화했다는 상진의 나레이션이 나오는데, 이는 영화가 상진의 글과 생각을 중심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나오는 나레이션일 뿐이다. 영화의 크레딧을 보면 이는 허구라는 안내문이 추가로 나온다.
1980년대 중반, 개인 이용자 간 통신이 가능해진 일명 ‘PC 통신의 시기’가 시작된 이후 약 40년. 통신 기술은 나날이 발전하여 현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편하게 인터넷을 이용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 사이 같은 취미,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끼리 모이는 온라인 커뮤니티 기능은 폭발적으로 확장됐다. 온라인 커뮤니티는 ‘나와 뜻이 비슷한 사람들’을 한곳으로 모으거나 함께 소통하고, 어떠한 사회적 문제가 생겼을 때 함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힘이 되기도 하는 등의 순기능을 갖고 있지만 이것이 갖고 있는 단점 또한 무시할 수 없을 만큼 크다. 대표적인 단점으로는 익명화(본인 인증 후 가입을 한다 해도 실제 내 이름으로 활동하진 않으니까), 사실 확인이 불가능한 이야기의 확산(루머), 쉽게 형성되는 군중심리 등이 있다.
온라인상에 수많은 정보와 이야기가 범람하고 있는 시대. 항상 앞서 말한 것들을 경계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어봤을 것이다. 영화 <댓글부대>는 이 자주 들어봤을, 살짝 삐끗하면 뻔해질 위험이 큰 주제를 지루하지 않은 방식으로 풀어낸다.
동명의 소설 [댓글 부대]를 원작으로 한 영화 <댓글부대>는 한때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가끔은 조롱거리가 되기도 하는 ‘여론 조작 댓글 알바’의 세계를 깊이 파내려 가는 이야기다. 그냥 ‘이 회사 제품 좋아요~', ‘제가 써보니 좋아요~’ 하는 식의 속이 빤히 보이는 댓글 알 바가 아니라 군중 심리를 이용해 여론을 움직이는 댓글부대 청년 3명과 사회부 기자 임상진의 이야기다.
임상진은 모두가 피하는 대기업 ‘만전’의 비리 폭로 기사를 쓰지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로 오보 판명이 나며 정직을 당한다. 말이 정직이지 사실상 그 업계에서 매장된 거나 마찬가지고 비리를 제보한 피해자인 중소기업 사장은 죽은 상황. 사장의 장례식장을 찾아간 상진은 직원의 ‘경쟁사의 기술은 우리와 다른 것이며 사장님은 피해의식이 심했다’는 말을 듣고 오보 판정에 이어 두 번째 충격을 받는다. 갈 곳도, 할 일도 없어진 상진은 쇼파에 누워 자신에게 온 욕 메시지들을 천천히 넘겨본다. 그러다 “기자님 기사 오보 아니에요.”라고 말하는 한 언론학 교수의 메시지를 발견하고 그와 만나기로 한다. 하지만 상진의 앞에 나타난 건 나이 지긋한 언론학 교수가 아닌 자신이 온라인 여론 조작을 하는 댓글부대라 주장하는 한 청년이었다. 과연, 이 청년의 말은 진실일까, 거짓일까?
현실과 픽션의 적절한 조합, 흥미로운 주제와 높은 몰입도
김성철, 김동휘, 홍경. 젊은 세 배우의 훌륭한 합
극 중에서 이런 대사가 나온다.
"100% 진실보다 거짓이 섞인 진실이 더 진실 같다.”
100%의 진실, 100%의 거짓보다 약간의 거짓이 섞인 진실이 더 믿을만하고 재밌게 느껴지는 것처럼 이야기도 100%의 픽션, 100%의 현실보다 약간의 진실이 섞인 픽션이 더 재밌게 느껴지는 법이다. <댓글부대>가 딱 그런 영화다. 너무 비현실적이지도 너무 현실적이지도 않은. 픽션에 약간의 현실을 섞어놓은 느낌을 주는 영화다. <댓글부대>는 2017년에 있었던 촛불 시위, 대기업의 중소기업 기술 도둑질, 온라인에서 벌어지는 무분별한 마녀사냥과 신상 털이, 댓글 부대 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구성하고, 흔히 볼 수 있는 온라인 커뮤니티 속 글, 밈, 갑자기 터진 의문스러운 마약 스캔들, SNS 등을 하나의 장치로 사용하며 이야기의 현실감을 높인다.
그리고 그 현실감 위에 손석구, 김성철, 김동휘, 홍경 배우의 연기력이 얹히니 영화 자체의 몰입도가 훨씬 올라간다. 손석구 배우의 우직한 연기력이야 이제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 같고, 이번 영화에서 강조해서 언급하고 싶은 건 김성철, 김동휘, 홍경 배우다. 어울릴 거라 생각해 본 적 없는 이미지의 배우들인데, 셋 사이의 합이 정말 기대 이상으로 훌륭했고 각자 연기력도 딱히 흠잡을 곳이 없다고 느꼈다. 이 중에서도 특히 홍경 배우의 연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감정을 막 내뿜는 게 아닌 딱 적절한 수준까지만 끌어왔다 다시 꾹 눌러 담는 표현 방식이 정말 좋았다. <악귀>를 통해 홍경 배우의 연기를 처음 봤을 때, “이 사람.. 곧 내 마음에 들어오겠다..”싶었는데 <댓글부대>를 통해 확실해졌다.
소설 원작과의 차이점
불쾌감은 줄이고 약간의 대중성을 더하다.
소설 [댓글 부대]는 국정원 여론조작 의혹 사건을 모티프로 시작되고, 영화 <댓글 부대>는 한 기업의 여론 조작 사건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영화 속 인물들은 소설에 비해 한결 부드럽게 정리되었고 여론 조작의 결과에 죄책감을 느끼고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소설에 나왔던 불쾌감을 주거나 논란이 될만한 부분들은 대부분 쳐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소설엔 숨길 수 없는 불쾌감이 둥둥 떠다니는데 영화에는 불쾌감이 아닌 의심과 경계심을 그 자리를 대신한다.
엔딩에 대한 호불호
직선이 아닌 돌고 돌아가는 이야기. 흥미롭지만 지루한 느낌도
<댓글 부대>는 진실과 거짓의 경계가 모호한 영화다. 어떤 게 진실이고 어떤 게 거짓인지 명확히 제시되지 않으며 사건을 직선적으로 풀어가기보단 사건의 조각들을 천천히 모으며 돌고 돌아가는 느낌이 강하다. 이러한 특징은 영화의 긴장감과 흥미를 유발하기도 하지만 약간의 지루함을 유발하기도 한다. 나는 영화 속 사건들과 비슷한 현실 속 사건들을 떠올리며 영화를 봤기에 개인적으론 크게 지루함을 느끼지 못했지만 빠르고 정확한 전개를 선호한다면 이 영화의 진행 속도가 다소 아쉽게 느껴질 수 있겠다.
그리고 <댓글 부대>의 큰 불호 포인트 중 하나, 엔딩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자면 .. 물론 나도 엔딩이 아쉽게 다가오긴 했다. 이런저런 조각들을 모아놓고 한순간에 파앗- 흩뿌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영화의 주제를 생각했을 때, 더 좋고 깔끔한 엔딩 아이디어로는 어떤 게 있겠냐고 묻는다면.. 그건 모르겠다. 이렇게 생각해 보니 이 영화의 엔딩은 꽤 괜찮은 편인 것 같다.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모이기 쉬운 만큼 흔들리기도 흩어지기도 쉬운 군중
인터넷 통신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우리는 예전에 비해 더욱 쉽고, 빠르고, 넓게 인터넷 통신과 그를 통한 소통을 이용하고 있다. 인터넷 통신이 활발하지 않았던 시절, 극중 인터넷 유료화 시위엔 큰 인원이 모이지 못했고 인터넷 통신이 활발해진 시대엔1600만 명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왔다. 이런 소통은 사회적 부당함을 무찌를 수 있게 사람들을 한곳에 모아주기도 하지만 반대로 한순간에 해체되거나 누군가를 해하기도 한다. 연예인 마녀사냥이나 일반인 신상 털이 사건, 스캔들이나 찌라시 글에 함께 달려들어 욕하다가도 "아니면 말고" 하며 뒤돌아서 흩어지는 익명의 아이디들. 이러한 것들을 생각해 보면 인터넷을 통한 소통과 여론 형성이 얼마나 중요하고 또 위험한 것인지 확 와닿을 것이다.
인터넷이라는 공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이다. 게다가 익명성까지 주어지니 이 안에 있을 동안 '나'를 내려놓는 사람들이 참 많다. 자극적인 것에 바로 반응하고 달려드는 사람들. 극 중 댓글부대인 팀알렙은 이들의 심리를 이용한다.
찻탓캇과 임상진이 1인 시위 사건을 이야기하는 장면, 찻탓캇은 1인 시위로 사실 적시 명예훼손죄 철폐를 주장하는 이용철의 시위를 막기 위해 그의 딸을 온라인 마녀사냥의 사냥감으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아버지가 사실 적시 명예훼손죄를 없애자고 주장하고 있는 한 그의 딸은 억울하게 욕을 먹는다 해도 명예훼손죄로 고소를 진행하지 못할 테니 아버지가 시위를 그만둘 것으로 예상했다고 말한다. 임상진은 '너희 사실 적시 명예훼손이랑 명예훼손이 다른 건 아냐'라고 묻는다. 찻탓캇은 당연히 알고 있다고 답한다. 그리고 뒤이어 '하지만 사람들은 사실적시인지 그냥 명예훼손인지 그런 거엔 관심이 없다.'라고 말한다. 찻탓캇의 이 말은 보통 이러한 자극적 여론 몰이에 달려드는 사람들은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중요한 게 무엇인지 딱히 고민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이들은 이런 사람들의 심리를 제대로 이용해 진실과 거짓을 섞어 여론을 조작한다.
가짜 이름의 믿을 수 없는 제보 / 사라진 루머의 유포자
"(제 이름은) 잊어버리기 쉬워요. 너무 평범해서."
찻탓캇은 상진과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지 않다가 마지막으로 신뢰의 한방을 날리듯 자신의 이름이 '이영준'이라고 말한다. 신분증같이 증명할 만한 것을 내밀진 않지만 지금껏 현실 같은 이야기를 들어온 상진은 영준의 말을 믿고 그의 이름과 번호를 휴대폰에 저장해둔다. 하지만 영준은 기사가 나온 뒤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웹 소설 카피 논란까지 생긴다. 이후, 이야기는 어떤 걸 믿어야 할지, 어디까지 진실이고 거짓인지 알 수 없는 혼란 속으로 말려들어간다.
인터넷에 떠도는 여러 글과 카더라들을 보면 대부분 최초 유포자를 찾기 어렵다. 누군가 피해를 보고 사회적인 파장이 일어나도 처음으로 그 글을 쓴 사람, 유포해선 안될 것을 유포한 사람을 찾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흔한 이름과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를 댓글부대에 제보만 남기고 사라진 찻탓캇은 하나의 카더라를 퍼트리고 사라진, 찾을 수 없는 최초 유포자와 비슷하게 느껴진다.
상진은 찻탓캇이 지어낸 그의 제보를 착실히 옮겼고, 그가 미리 써둔 대본(웹 소설)이 세상에 공개되자 순식간에 정의를 구현한 대기업 저격수가 아닌 망상증을 가진 기레기가 된다. 사람들은 상진이 쓴 글이 진실인지 거짓인지에 집중하지 않는다. 보이는 건 상진이 사라진 찻탓캇의 글을 카피했다는 것뿐이니까. 잊어버리기 쉬운 평범한 이름의 이영준(찻탓캇), 그는 잊어버리기 쉬운 자신의 이름 대신 더욱 강렬하게 각인될 카피라는 주제를 던져놓고 상진을 궁지에 몰아넣는다.
한 번에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진실
여러 개의 문, 복도가 있는 복잡한 댓글 부대 팀알렙의 집
찻탓캇이 처음 댓글부대에 대해 얘기하는 장면, 찻탓캇은 혼자 웹 소설을 쓰고 있고 다른 방에 있는 찡뻤킹과 팹택이 “빨리 와봐!” 하고 소리치며 다급하게 찻탓캇을 부른다. 찻탓캇은 책상에서 일어나 방을 통과하고 또 문을 열고, 긴 복도 같은 부엌을 지나 또 문을 연다. 댓글 부대의 집은 크기에 비해 꽤 복잡한 형태로 되어있고 찻탓캇을 부른 실체인 찡뻤킹과 팹택은 한 번에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댓글 부대>의 이야기 진행도 이런 형식이다. 사건에 숨겨진 실체와 진실은 한 번에 드러나지 않고 이야기는 돌고, 돌고, 또 돈다. 보는 이를 계속 헷갈리게 만들던 이야기는 결국 시원하게 결말을 제시하지 않는다.
어디까지가 진실, 어디까지가 거짓인가
영화의 엔딩, 결말 의미 해석, 관람차
조작 프로세스 글에 달린 조지 오엘의 댓글, 조지 오웰의 소설 [1984]
<댓글 부대>는 진실과 거짓을 명확히 구별해 주지 않는다. 엔딩도 그렇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데?"라는 의문이 들것이다. 이는 영화가 남긴 찝찝함을 가진 채 군중 심리, 진실과 거짓, 커뮤니티의 맹점, 각자의 해석 등을 계속 생각해 볼 수 있게 만들려는 제작자의 의도일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사이다처럼 범죄자, 대기업 때려잡기! 사회 정의 구현! 을 실현했다면 그건 또.. 멋이 없었을거다. 하지만 전혀 감이 오지 않고 답답함만 쌓여있는 상태라면, 다른 이들의 해석을 찾아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나는 상진이 주인공, 만전이 악당이라고 생각한다. 찻탓캇은 실제 만전의 댓글부대 중 한 명이고, 거짓으로 댓글 부대 제보 시나리오를 짠 다음에 그걸 웹 소설 사이트에 미리 올려둔 후, 상진을 자극해 다시 한번 기사를 쓰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를 카피 논란에 휩싸이게 만들어 사회적인 타격을 줬다고 생각한다. 상진은 처음 찻탓캇을 만났을 때, 찻탓캇의 얘기를 믿지 않기에 녹음기를 바로 켜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데, 찻탓캇은 그런 상진에게 신뢰감을 주기 위해 진지하게 이야기를 이어간다. 본인이 친구들과 함께 살고 있고, 누군가는 죄책감을 느꼈고, 감옥에 갈지도 모른다 느꼈다.. 하며 어리고 약한 부분을 이야기하고, 이름을 알려주는 것 모두 상진에게 신뢰감을 주기 위한 행위였고 상진은 결국 찻탓캇의 말을 믿었다 뒤통수를 맞는다.
찻탓캇이 말하는 팀알렙의 모습이 나올 때, 그들의 집 창가엔 커다란 관람차와 유원지가 보인다. 보통 이런 시끄러운 유원지 바로 앞에 가정집이 입주하는 경우는 흔치 않고, 반짝이는 관람차는 왠지 꿈같은 느낌을 준다. 그래서 나는 찻탓캇이 말하는 팀알렙의 이야기가 모두 꿈같은 허상, 거짓이라고 느껴졌다. 찡뻤킹이 납치를 당하고 관람차의 불이 꺼진 모습이 나온 후 찻탓캇의 이야기는 끝나는데, 그 이후 상진의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이 시작된다. 관람차의 불이 꺼졌다는 건 그의 거짓 이야기가 끝났고, 이제 현실의 사건이 이어질 것임을 암시한 느낌이다.
극 중에서 댓글부대 프로세스 글에 '조지 오엘’이라는 별명을 가진 사람이 ‘이거 올리고 살아계신가요?’라고 적은 댓글이 나온다. 이는 소설가 조지 오웰과 소설 [1984]를 떠오르게 만든다. [1984]는 1949년에 쓰인 오래된 이야기임에도 현대 사회의 문제를 정확히 짚어낸 소설로 정보 기술의 발달로 개개인의 사생활과 신상정보가 쉽게 노출되는 독재 국가에서 진실을 찾으려 노력하는 주인공의 윈스턴 스미스가 겪는 사건이 담겨있다. 모두가 국가의 감시를 받고 복종하는 사회에서 윈스턴 스미스는 감시를 피해 국가가 숨겨놓은 물건을 사고 그들의 통제를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을 키워간다.
<댓글 부대>의 이야기와 결은 다르지만 현대사회의 문제를 날카롭게 짚어낸 소설이기도 하고, 어떠한 통제(여론 조작/독재 국가) 안에서도 진실을 찾으려 하는 윈스턴 스미스의 모습이 영화 속 상진의 모습과 닮아있기도 하니 한 번쯤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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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통이란 무엇인가?
2019년 백상예술대상에서 영화부문 대상을 탄 정우성. 사실 수상 당시까지 영화를 보지 않고 무성히 들리는 소문으로만 영화를 판단하고 있어서 과연 받을만했는가? 의심을 했던 수상이었다. 하지만 보고나니 왜 대상을 받을 수밖에 없었는지, 영화 <증인>이 어떠한 주제의식을 함축하고 있는지 잘 느낄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영화 <증인> 시놉시스
목격자가 있어. 자폐아야
아저씨도 나를 이용할 겁니까?
마음을 여는 순간, 진실이 눈앞에 다가왔다
신념은 잠시 접어두고 현실을 위해 속물이 되기로 마음먹은 민변 출신의 대형 로펌 변호사 순호. 파트너 변호사로 승진할 수 있는 큰 기회가 걸린 사건의 변호사로 지목되자 살인 용의자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유일한 목격자인 자폐 소녀 지우를 증인으로 세우려 한다.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의사소통이 어려운 지우. 순호는 사건 당일 목격한 것을 묻기 위해 지우를 찾아가지만, 제대로 된 인사조차 나누지 못한다. 하지만 그날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지우에게 다가가려 노력하는 순호,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지우에 대해 이해하게 되지만 이제 두 사람은 법정에서 변호사와 증인으로 마주해야 합니다.*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증인>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연기력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영화 개봉 직후 김향기와 조승우의 자폐 연기를 비교하는 리뷰들이 많이 올라와서 김향기가 그렇게 연기를 못했을까? 하는 마음에 사실 보기 꺼려졌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를 정도로 김향기는 증인 속 지우의 캐릭터를 정말 매력적으로 잘 표현해냈다. 천재성을 띠고 있는 자폐아적 성향을, 비장애인인척 노력하려는 자폐아의 모습을 굉장히 잘 표현하고 있었다. 과연 이 지우라는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가 신과함께에 나온 월직차사라고는 매칭이 안될 정도로 거의 다른 사람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정우성의 연기 역시 담백하고 정말 좋았다. 후반부에 갑자기 민변에서 같이 활동했던 수인과 연결되는 지점에서 캐릭터 붕괴가 온 것만 빼고는 굉장히 담담하게 변호사의 역할을 수행했고, 정우성이 선굵은 연기 뿐 아니라 이런 역할도 잘 어울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작품이었다.
한 편의 소설처럼 마음에 와닿은 대사들
영화 <증인>을 보고 나서 들었던 감정은 영화를 봤다는 느낌보다 잔잔한 감동의 소설책을 읽었다는 감정이 들었다. 그 이유는 마음에 와닿은 대사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사실 영화를 보면 대사 한 마디보다는 배우들의 연기력이나 카메라 워팅, 특정 장면이 생각나기 마련이다. 예를 들면 영화 <아저씨>에서 원빈이 머리를 깎는 장면이라던가 영화 <사바하>에서 이재인이 허물을 벗고 등장하는 장면처럼 말이다. 그런게 뇌리에 박히기 마련인데 영화 <증인>은 특정한 장면보다는 대사들이 많이 떠올랐던 작품이었다.
지우 : 신혜는 웃는 얼굴로 나를 이용하고, 엄마는 화난 얼굴로 나를 사랑합니다.
순호 : 괴롭히는 사람은 친구 아니야.
로펌 대표 : 우리나라에서 성공하려면 적당히 때가 묻어 있어야 해.순수한 대사들도 많이 있었고, 한국 사회의 모습을 정말 잘 보여주는 대사들도 곳곳에 있어서 순수함에 힐링받다가 순수함 속에 있는 날카로운 송곳에 찔리는 듯한 느낌이 들다가 현실에 찌든 대사에 탄식이 나오기도 했었다.
다른 사람의 세계에 다가가다
영화 <증인>을 한 마디로 요약을 하자면 ‘어떻게 다가가야 하죠?’라고 물었던 인물이 ‘제가 직접 가면 되죠!’라고 대답하는 인물로 성장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지우를 법정에 증인으로 세우기 위한 목적으로 지우와 대화를 하기 위해 담당 검사에게 어떻게 자폐아ㅘ 대화를 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물어보는 순호. ‘어떻게 합니까?’하고 물어보던 순호는 지우에게 선물공세와 퀴즈풀기를 통해 점점 친해지고 지우와의 대화에 성공한다.
지우의 목격으로 인해 자신의 의뢰인이 실제 살인범이었음을 알게 되자 변호사자격을 걸고 재판에서 그 비밀을 폭로하며 지우의 증언이 재판에서 활용될 수 있게끔 한다. 그렇게 모든 재판이 끝나고 지우의 생일파티에 놀러 간 그는 방에서 나오지 않는 지우를 엄마가 부르려 하자 ‘아닙니다. 제가 가면 되죠.’라고 말한다. 이런 순호의 성장을 통해서 타인의 세계에 직접 다가가는 것이 소통의 첫걸음이라는 것을 잘 알려주고 있었다.
영화 <증인>은 잔잔한 감동으로 힐링을 주었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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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에게나 최악의 시절이 있다
해당 리뷰는 씨네랩의 초청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현대 사회는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런 시대에 청년들의 자아 찾기는 조금 늦은 시기에 찾아오기도 한다. 성취감 때문에 의대에 간 율리에(레나테 라인스베)는 자신이 육체보다는 생각이나 감정에 더 관심이 많다고 생각하고 심리학을 배우기 시작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시각에 예민하다는 것을 깨닫고 카메라를 구입한 뒤 서점 아르바이트와 사진 공부를 병행한다. 율리에는 여전히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하지만 마음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율리에의 마음은 또 강렬한 이끌림으로 만화가 ‘밥 캣’의 작가인 악셀(안데르스 다니엘슨 리)에게 향하고 두 사람은 연인이 되어 동거를 시작한다.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최악의 시절이 있다. 방황하며 자기를 찾아나가는 현대의 어른 아이 율리에는 누구보다도 자신의 마음에 솔직하고 쾌락과 자극을 좇으며 산다. 20대 후반의 나이에 40대인 악셀에게 끌렸던 것도 그가 주는 안정감에 매료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안정적인 집, 편안한 성격, 해박한 지식 등은 혼란스러운 20대 후반의 율리에에게 안정감을 준다. 하지만 세상에 다시 없을 연애의 그 한복판에서도 율리에는 외로웠다. 악셀의 신간 축하 파티에서도 홀로 먼 곳을 바라보는 율리에는 넓은 화면의 정중앙에서 꼿꼿이 서 있다. 외로워 보이는 동시에 내면에는 자기 자신으로 가득 차 있는 모습이다. 남들이 원하는 대로 살기도 싫고 내가 뭘 원하는지도 모르는, 자기애로 가득 찬 즉흥적인 삶은 여기저기로 튀며 최악의 모습 만을 내비치게 될지도 모른다.
남들이 보기에는 최악의 인간, 불안정한 인간일지라도 그 시절은 현재의 일부다. 감독은 율리에의 최악의 시절을 사랑스럽게 바라본다. 악셀이 따라주는 커피를 기다리며 파티에서 만났던 에이빈드(할버트 노르드룸)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알아챈 순간, 모든 시간은 멈춘다. 율리에의 마음은 멈춰버린 사람들과 공간을 내달려 에이빈드를 향해 뛰어간다. 이들은 날이 다시 밝을 때까지 키스를 하고 돌아서기를 아쉬워하다 집으로 돌아온다. 마음은 이미 에이빈드를 향해 달려갔고, 악셀은 여전히 율리에에게 커피를 따라주고 있다. 찰나에 불과한 감정을 감독은 오랜 시간을 할애해 아름답게 공들여 담아낸다. 이것이 배신이고 바람이면 어떤가 이 마음은 이렇게 사랑스럽고 순수한데. 최악의 인간이라 할지라도 그 순간의 감정은 눈부시게 아름답다. 그 형편없는 선택들과 진실한 마음 덕분에 율리에는 성장할 수 있었다. “모든 것엔 끝이 있”듯이 그 시절이 끝나면 우리는 조금 성장한다. 최악의 인간이었던 시절도 가치 있었다. 트리에 감독은 혼란스러운 시기를 지나고 있는 이들에게 “네가 얼마나 멋진지 깨닫게 해주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죽음을 앞둔 악셀의 입을 빌려 율리에에게, 관객에게 전한다.
어디에서도 안정감을 찾을 수 없었고 불안했던 율리에는 악셀과 에이빈드와 헤어지고 혼자가 된 뒤 비로소 안정감을 찾는다. 그 과정에서 악셀의 죽음은 율리에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마법의 버섯”을 먹고 보게 되는 환각 속에서 율리에는 그동안 자신이 만났던 남자들의 모습을 본다. 악셀은 율리에의 무의식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율리에 안의 여성 혐오적 모순과 성적 욕망 그리고 아기에 대한 부담감 혹은 저항감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언제나 “내 잘못”이라며 본인 탓을 하는 율리에는 자신이 때때로 지나치고 “괴짜”임을 알고 있다. 내면의 자기모순과 자기혐오에서 비롯된 관계의 삐걱임은 예견된 수순이었다.
과거에 모았던 책들과 만화책들, 음반들이 한 사람을 만들었다면 연인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율리에의 세계에는 악셀과 에이빈드가 그의 일부로 자리하고 있으며 한 사람의 세계는 그렇게 넓어진다. 영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그렇게 한 사람이 오롯이 “일인칭 단수”가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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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적 시간의 재구성
1.
<인셉션>(2010)은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세계 속 시간을 재정의한다. 이 영화는 내러티브의 도구인 시간을 스크린 위로 불러내서, 영상 언어로서의 시간을 구축한다. 각각의 꿈속에선 단계별로 다르게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이 편집 기법을 통해 시각화된다. <미행>(1998), <메멘토>(2000)에서 시작한 ‘플롯 게임’을 지탱하는 내러티브적 시간의 혼재된 배열이 <인셉션>에서는 다른 형태의 지위를 획득한 셈이다. 대놓고 시간 흐름의 상대성을 논하는 <인터스텔라>(2014)는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셉션>의 변주라고 할 수 있겠다. 이때 시간이라는 관념을 향한 놀란의 집착이 후속작에서도 이어진다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덩케르크>(2017)의 시간은 <메멘토>와도, <인셉션>과도 다르다. 이 영화는 잔교에서의 일주일, 민간 어선에서의 하루, 전투기에서의 한 시간이라는 서로 완벽하게 어긋나는 세 시공간대를 과감하게 교차한다. 그간 놀란이 구상해 온 비선형적 플롯 구조 가운데 <덩케르크>만큼이나 비정형적인 사례는 없다.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가한 <메멘토>의 플롯조차도 컬러의 역순행과 흑백의 순행이 섞이는 최소한의 규칙을 전제로 하지만, <덩케르크>는 플롯을 연결하는 관습적인 규칙마저도 최대한 느슨하게 구축한다. 더 나아가 <덩케르크>의 시간은 <인셉션>처럼 시각화된 물리량 변환이 아닌 다른 형태로 정의되길 바라는 듯 보인다. 이 영화는 물리적 길이가 다른 세 시간대를 교차하는데, 교차된 장면들 총합의 길이가 장편 영화 포맷의 러닝타임에 부합해야 하므로, 잔교의 일주일보다 민간 어선의 하루가, 어선의 하루보다 전투기의 한 시간이 영화상에 더 많이 노출되도록 편집될 수밖에 없다. 즉, 시간대 구간이 짧을수록 각 쇼트마다 더 많은 지속 시간을 할당받는다. 다시 말해 상대적 길이에 따라 재배치된 시간이 필름에 새겨진다. <덩케르크>는 수용자의 관습적인 지각 체계가 작동하기 힘든 영화이다. 관객은 마침내 편집을 통해 재구성한 비선형적 시간 개념을 인식한다. 몽타주로 피어나는 도상적인 운동감과 이미지 간의 리듬을 유도하는 새로운 시간적 개념 또한 동시에 정의된다.
<덩케르크>에서 정의된 영화적 시간은 그간 펼쳐왔던 놀란의 시간 게임 중에서 가장 독특한 존재감을 내뿜고 있었다. <테넷>(2020)이 공개되기 전까지 말이다. <테넷>의 시간 여행은 다른 영화에서 표현됐던 시간 이동에 관한 무의미한 기술적 반복이 아니다. <백 투 더 퓨처>(1985) 등이 불연속적 시간 이동을 서사적으로 활용한다면, <테넷>은 시간의 역전이 형상화되는 과정 자체를 표현하는 데 집중한다. 이 영화에는 <닥터 스트레인지>(2016) 등에 쓰인 단순한 되감기 기법과 차별화되는 지점이 존재한다. 놀란은 역방향 촬영과 더불어 배우들을 거꾸로 연기하도록 디렉팅했다. <메멘토>에선 되감기 기술을 활용했던 놀란은 이번에는 촬영된 영상을 되감을 뿐 아니라, 피사체(주로 인물)가 직접 거꾸로 행동해서 시간의 역행을 재현하는 장면을 많이 동원한다. <덩케르크>에서 재정의된 시간처럼 <테넷>도 관습적으로 감각하기 어려운, 새로운 형태의 시공간을 제시한다. 시간 순행과 역행이 공존하는 세상 말이다. 영화적 시간을 재정의하려는 많은 작품이 있지만, 감각 불가능한 시간의 역전 관계를 시각화하는 <테넷>의 실험만큼이나 생경한 사례는 지금까지 없었다. 놀란 본인이 단편 <두들버그>(1997)에서 각기 다른 시간 선후 관계에 놓인 세 명의 남자(the man)를 동일한 공간에 중첩해서 표현한 점은 <테넷>의 전조로 볼 수 있지만, <테넷>은 분명 영화적 시간을 재구성하는 방식에 있어 기존 영화들과 다른 양상을 띤다.
'테넷' 촬영 현장 스틸컷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주)
2.
문제는 놀란 영화에서 포착되는 시간의 변주나 재정의가 목표하는 지점이 불분명하다는 데 있다. 영화적 시간을 재구성해온 놀란의 세계는 매번 부산스럽게 규모를 늘려가며 존재감을 과시한다. 하지만 그 세계의 매혹적인 표층을 걷어내면, 근간에서 발견되는 건 지적 유희를 향한 감독의 개인적인 욕망뿐이다. 이토록 편집증적인 면모로 시간 재구성에 관한 영화를 생산하는 연출자가 누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물론 놀란이 기획한 영화적 시간의 특징적 표지를 읽어내는 순간에 촉발되는 매력 자체는 부인할 수 없다. 그의 영화가 머금은 지적 유희를 탐닉하려는 수용자의 몸부림이야말로 놀란 영화가 가치를 획득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놀란의 영화가 형식을 통한 영상적 구현의 극한을 추구하는 사례라면, 동시대 감독들 가운데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몇몇 영화들은 놀란의 다소 피상적인 결과물들이 가닿을 수 없는 깊이에 도달한다. <보이후드>(2014)는 기술 자본을 등에 업고 욕망을 구현하는 놀란의 영화에서 절대 성취될 수 없는 결과를 제시한다. 링클레이터는 이 영화를 12년 동안 연출했다. <보이후드>의 인물들이 실제로 성장하고 늙어가는 과정은 분장이나 특수효과로 구현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처한 삶의 순리가 그대로 반영된 결과다. 사실 태생적으로 영화는 편집을 통해 시간의 흐름을 가두기도 하고 확장하고, 제멋대로 주무를 수 있는 매체 수단이다. 그런 점에서 링클레이터의 기획은 현실과 영화의 시간적 경계를 무너뜨리고 삶의 재현 수단으로써 영화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작업이다. ‘비포 삼부작(<비포 선라이즈>(1995), <비포 선셋>(2004), <비포 미드나잇>(2013))’ 역시 주연 배우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의 노화 과정이 그대로 반영된 시간성이 필름에 각인된 사례다. 링클레이터의 영화적 시간은 곧 삶과 예술의 관계에 관한 작가의 견해처럼 보인다.
영화적 시간을 사유하는 또 다른 사례는 크리스티안 펫졸드의 영화에서 찾을 수 있다. 링클레이터의 영화가 현실과 영화 사이의 시간성을 탐구하고 있다면, 펫졸드의 <트랜짓>(2018)은 과거와 현재를 중첩하는 기묘한 설정을 통해 특정 시기에 구속된 시간 논리로부터의 탈피를 주장한다. 펫졸드는 그의 작품에서 주로 역사의 흔적을 응시한다. <트랜짓>은 시공간성의 해체가 현대 사회에 산재한 이슈(난민 문제 등)에 관한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 줄 수 있는지 사유하는 작업이다. 펫졸드의 사유는 시간의 재구성을 넘어, 시공간성이 반영된 역사에 관한 논점을 제공해 준다. 물론 <덩케르크>의 시간은 전쟁 현장에서 생존하려는 자들의 모습을 관객이 체험하게 한다는 점에서, 시공간성의 무화를 유도하는 <트랜짓>과 어느 정도 맞닿아 있다. 하지만 <테넷>에서의 과시적 유희는 그 깊이에 도달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게다가 <인셉션>은 <트랜짓>에 비해 시공간의 다층적인 관계가 매력적으로 구축된 작품이지만, 그 형식적인 틀이 <트랜짓>의 사례처럼 사회 문제나 현실 요소와 소통할 기회를 마련해 주지는 않는다.
3.
한편 형식적인 관점에서 왕가위의 시간과 놀란의 시간을 비교해보는 시도는 흥미로운 논점을 생산할 수 있다. 왕가위의 영화는 시공간을 필름에 붙잡아두려고 한다. 왕가위는 <중경상림>(1994), <타락천사>(1995) 등에서 스텝프린팅 기법을 적절히 응용하여 형식의 층위에서 그 점을 강조한다. 왕가위는 흘러간 시간과 그 흔적의 공허함, 질감 등을 매력적으로 시각화하는 데에도 탁월한 센스를 보인다. 왕가위의 영화에는 주로 어긋나는 관계와 실패하는 사랑의 순간들, 공간을 맴돌거나 홀연히 떠나는 인물들, 기억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왕가위가 주로 천착하는 소재들은 형식과 긴밀히 맞물려서 영화를 통해 다양한 형태로 가공된다. 왕가위의 영화는 형식을 통해 작가적인 관점을 구현하려는 좋은 사례처럼 보이지만, 놀란의 영화에서는 그 연결고리가 잘 느껴지지 않는다. 왕가위는 시간을 통해 자신을 표출하지만, 놀란은 시간을 통해 영화의 구조를 매혹적으로 만드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 건 아닌가.
다른 영화들도 유의미한 쟁점을 제공해 줄 수 있다. 샘 멘데스와 로저 디킨스는 <1917>(2019)의 의도된 롱테이크 촬영을 통해 영화적 시간을 현실로 전이시켜 관객에게 생생한 몰입의 기회를 제공하려고 했다. 하지만 <1917>의 기술적 성취만으로 서사 화법의 지위를 대체하기엔 설득력이 부족하다. 이는 놀란의 영화가 갖는 한계점과 유사하게, 채택된 기술의 당위성에 관한 논의를 만들어낸다. 되감기의 변주 등을 동원한 <테넷>의 시간 역행 묘사는 그 자체로 매력적인 형식적 산물이지만, 그 목적성을 따지기 시작할 때 영화는 급격히 동력을 잃는다. 서사적 측면에서 되감기 기법을 영리하게 활용한 이창동의 <박하사탕>(1999)은 <테넷>이 놓친 요소들을 알뜰하게 챙기면서 작품의 유기성을 강화하는 데 성공한 사례다. 이와 다르게 <테넷>에서는 작품 내적 요소 간의 호응보다는 기술의 발달을 통해 형상화한 감독 자신의 가공된 욕망과 자의식만이 느껴진다.
4.
각각의 영화에서 다르게 표현되는 영화적 시간을 들여다보는 작업은 카메라로 시공간을 담아내는 영화예술의 태생적 근간과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분석이다. 영화적 시간을 재구성하는 놀란의 작품들은 관객의 흥미를 유발하는 텍스트로 기능한다. 그렇지만 그의 영화는 명확한 한계를 안고 있기도 하다. <인셉션>을 기점으로 구체화된 그의 욕망은 <덩케르크>에서 가장 흥미로운 논점을 만들어냈지만, <테넷>에서는 기존의 매력마저 잃어버린 듯 방황하는 면모를 드러냈다. <덩케르크>의 비선형적 시간 개념은 형식을 조작해서 관객의 지각 체계에 균열을 가한 뒤, 역사의 흔적과 영화와 현실을 매개하여 사유할 수 있게 하는 담론을 유도할 수 있다. 하지만 <테넷>은 국가적인 위기 상황을 전제한 채 다시 한번 조작된 시간을 들이밀지만, 어쩐지 표층에만 머무른 채 심도 있는 담론의 장을 제공하진 않는다.
놀란을 향한 상당수의 지적은 생각보다 가혹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그가 극복해야 할 숙명과도 같다. 놀란은 현대 영화 산업의 첨단에서 독특한 기질을 발휘하고 있는, 거칠게 말하면 포스트-스필버그처럼 보이는 보기 드문 유형의 창작자이다. 그에겐 16mm 필름 대신 아이맥스 필름이 있고, 열악한 로케이션 현장 대신 특별 제작된 회전 세트나 폭발해도 상관없는 비행기가 있다. 워너브라더스의 전폭적인 지원과 믿음을 토대로 자신만의 세계를 펼쳐내는 자본주의적 연출가 놀란에겐 고삐 풀린 창작욕의 구현과 대중성 기반의 안정적 수익 구조의 창출이 모두 요구된다. 놀란이 영화 산업의 자본 논리에 종속된 이상, 자의식 과잉과 상업성 확보 사이에서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영리한 줄타기를 선보여야 한다. <덩케르크>는 장르적 서사 코드를 마냥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메멘토> 이후 정체된 듯 보였던 그의 작가적 역량을 재입증한 사례였지만, <테넷>의 실험이 만들어낸 산물은 영화사와 감독, 대중과 평단 사이의 다층적인 이해관계에 반영된 기대치를 충족하지 못한 사례로 보인다. 놀란이 재구성하는 영화적 시간은 과연 <테넷> 이후 어떻게 변모할 것인가. 그가 시간 실험을 지속할지 집착하던 소재에서 손을 뗄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이 천재 감독의 다음 연출작을 기다리는 일이다.
'인셉션' 촬영 현장 스틸컷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주)
* 본 콘텐츠는 씨네리와인드에 게재 후 씨네랩에 업로드된 글입니다.* 브런치 드플레 님의 자료를 받아 작성하였으며,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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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순하게 살자. 로맨틱 코미디 영화처럼
* 이 글은 영화 시사회에 초대받은 후 작성되었으며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내용을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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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이 시끄럽다. 갑자기 떠오른 생각은 또 다른 생각을 낳는다. 학업부터 직장, 돈, 사람까지 신경 써야 할 일이 너무 많은 현대인에게 영화 '나의 흑역사 로맨티카'의 주인공 '마르타'가 말한다. 그렇게 많은 것을 고민하며 망설일 시간이 없다고.
영화 <나의 흑역사 로맨티카>
영화 <나의 흑역사 로맨티카, Out of My League, Sul più bello>는 희귀 유전병 '낭포성 섬유증'을 앓고 있는 '마르타(루도비카 프란체스코니)'의 우정과 사랑을 그린 로맨틱 코미디이다. 이탈리아 토리노를 배경으로 지역 랜드마크인 몰레 안토넬리아나(Mole Antonelliana)와 포 강(povor)을 아름답게 표현하여 유럽 특유의 낭만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영화는 개봉 당시 이탈리아에서 우수한 흥행 성적을 거두며 속편 제작이 확정되었다. 이어서 넷플릭스가 판권을 구매하며 유럽 전 지역에 공개되었고 세 번째 시리즈가 제작될 예정이다.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키싱부스> 등 인기 있는 로맨틱 코미디를 제작한 넷플릭스의 선택이니 앞으로의 이야기도 기대할 만하다.
영화 <나의 흑역사 로맨티카>를 1분 30초 만에 확인하기▼
영화의 구성은 주인공 '마르타'를 둘러싼 두 가지 이야기로 나눌 수 있다. 먼저 그녀의 소꿉친구 '페데리카(가야 마시알레)', '야코프(요체프 기우라)'와의 우정이다. 세 사람은 한 집에 살며 일상생활을 공유하고 서로의 편이 되어준다. 심지어 3살 때 부모님을 잃은 '마르타'의 가족을 만들어 주기 위해 '페데리카'와 '야코프'는 아이를 낳으려는 계획을 세운다. 두 번째는 '아르투로(주세페 마조)'와의 사랑 이야기다. 집안과 학벌, 외모 등 빠지는 부분 없이 완벽한 그는 마르타를 까칠하게 대하지만, 곧 그녀에게 빠져 세상에 둘도 없는 사랑꾼이 된다.
익숙한 로맨스 클리셰는 요즘 감성에 알맞은 연출과 영화 미술이 합쳐져서 톡톡 튀는 개성을 지닌다. 다채로운 카메라 구도와 편집으로 인물의 시선과 행동을 지루하지 않게 담아낸다.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세련된 영상미와 음악으로 젊은 세대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시몬스 침대의 광고와 비슷하다. 인물의 의상이나 소품은 강렬한 원색 계열이되 빈티지한 색감을 사용해서 감각적이다. '페데리카'가 화려한 빨간 머리에 대비된 초록색 재킷을 입어도 주변의 색감과 어우러져 홀로 튀거나 어색하지 않다.
또한 <나의 흑역사 로맨티카>는 일상과 밀접하면서 로맨스 코미디에서 흔하게 등장하지 않은 장소인 마트를 활용한다. 마트는 '마르타'가 할인 상품 안내 방송 아르바이트를 하는 장소로 그녀의 매력이 극대화되는 장소이다. 첫 데이트에서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아무도 없는 마트를 헤매는 '아르투로'의 모습은 새로운 느낌을 준다.
Q. 생각이 너무 많아 머릿속이 복잡한가요?
'아르투로'를 만난 순간부터 '마르타'의 행동은 거침없다. 그에 관한 모든 정보를 수집하고 학교와 조정 클럽을 따라다닌다.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 '아르투로'의 질문에 당당하게 '저녁 식사'를 외치며 데이트 신청을 한다. 그녀의 직진 본능은 스스로 인생을 선택한 적 없던 '아르투로'의 사랑을 얻는 결정적인 이유가 된다.
안타깝게도 '마르타'의 병세는 악화되고 그녀는 '아르투로'에게 부담이 되고 싶지 않아서 이별을 고민한다. 연애를 통해 달라진 '아르투로'는 사랑은 원래 수많은 헤어질 이유가 있으므로 지금 이 순간만 신경 쓰자며 그녀를 안심시킨다. 결국 그들은 현실적인 이유를 고민하기보다 서로의 마음이 시키는 대로 무한한 사랑을 약속한다.
단순하고 거침없는 그들의 사랑 이야기는 시종일관 해맑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행동할 용기를 준다. 그러니 영화가 끝난 후엔 복잡한 생각은 내려놓고 마음 가는 대로 단순하게 행동해보자. 영화 속 '마르타'와 '아르투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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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김없이 홀로 새해를 맞은 서른두 살 ‘브리짓’
그런 그녀에게 운명처럼 찾아온 정반대의 두 매력남.
내 여자에게만 다정한 스윗남 ‘마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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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다이어리는 행복한 상상으로 채워지는데…
‘브리짓 존스의 일기’ 첫 페이지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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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꾸고 싶어서, 바뀌고 싶어서 선거에 뛰어든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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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스틱 청.춘.박.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