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3-06-05 11:50:04
6월 첫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6월 2일 - 6월 4일
안녕하세요! 영화/OTT 전문 큐레이션 웹 매거진 씨네랩입니다.
다들 즐거운 주말 보내셨나요?
오늘은 6월 넷째 주 주말 동안의 박스오피스 분석 결과를 공유해 드리겠습니다.
시작해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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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내 주말 박스오피스
6월 첫째 주 주말 관객수는 3,221,300명을 기록했습니다.
특히 <범죄도시 3>는 87.6%의 압도적인 좌석 점유율로 1위를 차지하며 극장가의 활기를 불러 일으켰고 지난 주말 3위였던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ume 3>는 2위를 6월 1일 개봉한 <극장판 포켓몬스터DP>가 3위를 차지했습니다. <분노의 질주: 라이드 오어 다이>, <인어공주>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는 각 4,5,6,위를 기록하며 전주 대비 하락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1. <범죄도시 3> (+)
개봉 동시 극장가 활기를 불러 일으키며 1위는 물론 압도적인 예매율과 관객 수로 고속 행진을 이어가고 있는 <범죄도시 3>. 개봉 5일 만에 누적 관객 수 450만 명을 넘어섰으며 압도적인 예매율로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
현재의 흥행 속도라면 현충일 연휴를 기점으로 600만 관객 돌파도 가능할 것이라 예상하며 또 한 번 1000만 영화의 탄생을 보여줄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습니다.
2.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ume 3> (+)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ume 3>는 는 2.9%의 좌석 점유율로 2위를 차지하며 지난 주말 대비 한 층 올라간 순위를 차지했습니다.
3. 극장판 포켓몬스터DP : 아르세우스 초극의 시공으로 (NEW)
<극장판 포켓몬스터DP : 아르세우스 초극의 시공으로>는 2.1% 점유율로 3위를 차지했습니다. 쟁쟁한 경쟁작들을 제치고 전체 상영작들 중에서도 예매율 3위를 기록하였으며 이번 작품은 지난 2009년 개봉했던 작품으로, 아르세우스 3부작으로 포켓몬스터 극장판 중 가장 인기가 많았던 작품을 리마스터링한 작품입니다.
4. <분노의 질주: 라이드 오어 다이> (-)
지난 주말 1위를 차지한 <분노의 질주: 라이드 오어 다이>가 6월 첫째 주 박스오피스 4위로 하락했습니다. 범죄도시3 개봉 동시, 열기에 밀려 좌석 점유율 2.1%를 차지하였고 현재 200만 관객을 넘을 수 있을지에 대한 귀추가 주목되고 있습니다.
5. <인어공주> (-)
<인어공주> 또한 하락세를 보이며 5위를 차지했고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남은 인생 10년>는 각 6,7위를 기록했습니다.
(2) 북미 주말 박스오피스
5월 넷째 주 북미 박스오피스는 북미 기준 6월 2일 개봉한 <스파이더맨:어크로스 더 유니버스>가 1위를 차지하였습니다. 인어공주를 제치고 주말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으며 <인어공주>는 전주대비 -57.5% 하락하며 2위를 <부기맨>은 3위,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Volume 3>와 ‘분노의 질주:라이드 오어 다이>가 각 4,5위를 차지했습니다. 북미 1위를 차지한 스파이더맨은 국내 6월 21일 공개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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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픽의 5월 넷째 주 박스오피스 분석 콘텐츠는 여기까지입니다.
이번 주도 건강한 한 주가 되기를 바라며 씨네픽은 다음 주 월요일 유익한 콘텐츠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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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고 일어났는데 코 끝이 시큰하다. (안녕, 나의 조제)
자고 일어났는데 코 끝이 시큰하다.
안녕, 나의 조제
울고 싶다.
이 영화는 전반적으로 어두컴컴한 분위기 속에서, 우리가 잘 보지 못하는 (혹은 알고 있지만 그저 스쳐 지나가기만 하는, 혹은 보고 싶지 않아하는) 사회의 이면들을 비추며 시작된다. 걸을 수 없는 빈민층의 조제가 추운 날 자신의 다리나 다름 없는 휠체어에서 넘어졌을 때, 주위에 아무도 도움 줄 사람이 없었을 때, 얼마나 세상은 그녀에게 차가웠을까. 아니 어쩌면, 차가울 거라고 느끼는 건 관객인 나의 몫일지도. 내가 겪어 본 적 없는 불행 아니던가. 그녀의 마음은 이미 혼자인 세상 속을 유영하고 책들에게서 나온 상상의 나래 속에서 충분히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그 견고한 유리 구슬 속 세상을 깬 것은 대학생 영석이다.
조제는 말한다. 누가 뒤에서 덥석 가슴을 만지려고 해서 피하다가 넘어졌다고. 장애인 여성을 범하려는 사람들은 추잡하지만, 사회적 약자를 건드리는 악인들은 어느 사회 뒷골목에나 존재할 터. 원작인 일본판에서의 조제는 영석 역의 츠네오를 연모하던 여대생에게 외친다. '이게 그 사람을 잡는 무기 같다면 너도 차라리 다리를 분질러 버려!' 라고. 한국의 조제는 조금 다르게 자신을 지킨다. 조금 더 삐뚤어진 듯한, 조금 더 어두컴컴한 세상 속에 갇힌 듯한, 조금 더 많이 현실 보다는 허구의 세상 속에 있는 그녀다. 신체가 자유롭지 않은 사람을 대하는 시선이란, 상상할 수도 없다. 정신적으로 아픈 사람들조차 '정신과 다녀'라는 손가락질로 대하는 사람들인데, 원치 않았던 이유로 걷지 못하는 정신이 말짱하고 건강한 사람은. 어느 쪽도 불행하겠지.
(우에노 주리가 연기한 카나에가, 수경을 연기한 배우보다 좋았던 건 순전히, 그 전 부터 그녀를 좋아했기 때문일 것이다. 건강하고 잔망미 넘치지만 사랑 앞에서는 한치의 양보도 없던 그녀의 모습이, 꼭 나의 20대 모습 같아서 좋았다. 곧 죽어도 직진하던 나는 어디에 있나)
이제와 생각해 보건데 내가 조제라는 영화를 참 좋아했던 이유는 지난 찬란한 사랑의 추억 속에서, 내가 온전히 나 자신이었던 순간들을 남기고서, 그 안에서 자유롭게 고요히 살아갈 '바다'를 발견한 조제의 마지막 미소 때문이었다. 영석 역의 츠네오는 다시 만나지 못하고 안지 못할 조제를 떠올리며 울음짓지만, 좀 더 안락하고 편안한 현실로 도피했다. 조제의 세상으로 들어오려고 했던 그의 사랑은 그러나 거짓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츠네오가 조금 더 명민한 사람이었다면, 사랑이라는 감정과 조제에의 호기심어린 마음에 취해 그녀와 오랜 시간 함께 보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니까. 서로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것이, 사랑에 어떻게 금을 그어버리는지, 서서히 어떻게 두 사람 사이에 틈이 생기는지 잔잔하게, 위트있게, 아름답게 그려낸 영화여서, 참 좋았다.
나는 그래서 한국판 '조제'에서도 그런 미소와 상큼한 이별을 기대했다. 러시아산 권총보다 글렌리벳 위스키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조제는, 좀 더 천천히 말하고, 좀 더 저온으로 사랑하는 듯한 절제된 모습을 보여주고, 영화의 전반에 걸쳐 호랑이와 물고기를 만나는 과정들은 천천히 아주 느리게 간다. 밤 늦은 시간 두 사람이 데이트하는 유원지에서, 관람차에 처음 올라타는 조제는 방금 전까지 남아프리카에서 열기구를 탔다는 허영은 온데간데없고, 난생 처음 올라와 보는 상공에서 미세하게 떨며 영석에게 의지한다. 그런 그녀를 업고 관람차에서 내리려는 찰나, 직원의 실수로 문은 열리지 않고 다시 관람차는 허공으로 솟아오르며, 조제를 업어올린 영석을 바라보는 직원의 얼굴이 클로즈업 되었다가 멀어져간다. 관객들은 영석과 조제를 바라본다.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그 직원처럼, 그랬을까. 아렸을까, 아니면 아련했을까.
(관람차를 바라보던 두 사람의 시선은 시작점 부터 좀 다르다. 출처 포토뉴스. 관람차 안에서 조제를 업은 영석의 사진은 찾을 수 없었다.)
물고기 대신 커다란 돌고래를 만나러 간 수족관에서 조제는 이별을 직관한듯 영석의 손을 잡고 '나는 괜찮아' 라는 말을 조용히 읊조린다. 둘의 대화는 많지 않다. 많을 필요가 없는 흐름이기 때문이다. 영석이 말하는 '어떻게 그래...'의 눈물은, 큰 울음보다 더 아프게 다가왔다. 한국 정서에서 더 당연하게 느껴지는, 결말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언제부터 한국 사회에 이렇게 냉소적이 되었을까? 나부터도 신체 부자유한 사람들에게 관심 조차 없지 않았나? 당연히 그들이 우리와 같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던 불친절한 내가 아니었나 싶다. 일본의 조제는 좀 더 생기발랄했다. 한국의 조제도 선방했다. 배우 한지민이 영석에게 말하는 대사 '독이라도 탔을까봐' 라는 말을 듣자니, 그녀가 영화를 위해 쌓아올린 그녀의 세상이 조금은 느껴졌다.
스코틀랜드에서 촬영한 듯한 상상씬은 진짜 그랬으면, 하고 바랄 정도로, 보기 좋았다. 그리고 한국판 조제의 당찬 마지막 모습도, 전혀 나쁘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 만의 방식대로 세상과 맞닥뜨리며, 영석을 만나기 전과 전혀 다른 조제의 마음으로 살아갈테니. 사랑과 성취의 경험이라는 건 그런 것 같다. 누군가를 많이 사랑했고 또 이해받고 행복했던 기억은, 내 마음 속에 고요히 작고 예쁜 성을 만들어 준다. 가끔 삶이 힘들고 지칠 때, 외로울 때, 슬며시 들여다 보고 추억할 수 있도록, 그렇게 힘을 주는 것 같다.
(한지민 인스타그램에서 나온 비하인드 컷이라고 한다. '때로는 너와 함께 아주 먼 곳까지 가고 싶었어'라던 조제의 대사가 귓가에 맴돈다.)
영화에 관한 글을 쓰는 건 거의 한 달 만인 것 같다. 그 한 달 동안 마음이 힘들었다. 내 마음을 자꾸 두드리는 사람이 있고, 나는 아직 지난 사랑과 이별이 만들어놓은 우울의 동굴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것만 같고. 오늘 두 시간 정도 요가를 하면서 여전히 가슴을 펴는 동작에서는 잔기침이 나고, 눈물이 날 것만 같은 욱하는 것들이 올라왔다. 비로소 내 안의 우울감 속에 편하게 오랫동안 있었구나, 이런 생각이 들더라. 나의 견고한 세계를 부수고 다시 사랑하고 싶다. 눈이 부시도록. 마음이 터지도록. 끝을 예상하며 도망치지 않으면서, 사랑하고 싶다.
* 본 콘텐츠는 블로거 아일린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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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행복을 찾아서(2007)> 리뷰
얼마 전 가브리엘 무치노 감독의 <행복을 찾아서(2007)>를 감상했다. 현재는 사업가이자 연설가로 부유한 삶을 누리는 크리스 가드너의 삶의 한 부분을 바탕으로 했다고 한다. 극적인 효과를 위해서일까. <행복을 찾아서>는 러닝 타임의 대부분을 주인공의 고달픈 시절에 집중한 후, 영화 말미에 이르러 간신히 행복한 마무리를 보여준다. 이렇듯 끝이 보이지 않는 고난과 역경을 겪으면서도 희망을 놓친 적 없는 이의 이야기는 욥기에서도 찾을 수 있을 만큼 인류에게 오래되고 익숙한 플롯이다. 필립 모슬리의 삶을 기반으로 삼았다는 영화 <빌리 엘리어트(2000)>나 존 카니 감독 본인의 이야기가 기본 뼈대였다는 <싱 스트리트(2016)> 등을 비롯한 영상 매체와 다양한 문학은 물론, 신문 기사에서도 심심치 않게 찾을 수 있다. 전형적이라 해도 뻔하진 않고, 감동과 교훈을 한 번에 선물하는 소위 ‘안전한’ 서사이다 보니 많은 이들이 <행복을 찾아서>를 가족과 함께 봐도 좋은 영화로 추천하는 듯하다.
그러나 내가 이 영화를 보고 리뷰를 남기는 이유는 따로 있다. 굳이 사회 고발을 목적으로 하지 않더라도, 심지어 한 개인을 영광스럽게 그려내고자 하는 의도가 다분할지라도, 이따금, 어떤 예술이 세상의 허점을 뚜렷하게 드러낼 수도 있다는 사실은 언제나 내 흥미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행복을 찾아서>를 보는 동안엔 여러 책이 머리를 스쳤다. 예컨대 대런 맥가비의 『가난 사파리』, 스테퍼니 랜드의 『조용한 희망』, 조문영의 『우리는 가난을 어떻게 외면해왔는가』 말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 영화는 내게 누구나 노력만 하면 성공할 수 있는 장밋빛 아메리칸드림 홍보영화로 다가오지 않았다.
간단히 <행복을 찾아서>의 시놉시스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크리스 가드너(윌 스미스)는 구식 스캐너를 파는 세일즈맨이다. 당장 매일의 생계가 걱정되는 상황이지만 불안이라는 파도를 가족과 함께 견뎌왔다. 그런데 세금, 집세, 어린 아들 크리스토퍼 가드너(제이든 스미스)의 어린이집 비용을 부담하는 것조차 힘들어진 순간 아내 린다(탠디 뉴튼)는 떠나겠다고 한다. 아들을 임신한 순간부터 모든 게 괜찮을 거라고 자신했던 크리스의 말이 오래도록 실현되지 않았음을 지적하는 그의 얼굴은 참담하리만큼 무표정하다. 이렇게 아내와 헤어진 크리스 가드너는 딘 위터 레이놀즈의 주식 중개인 인턴십 프로그램을 택한다. 우연히 추천받은 이 프로그램은 6개월 동안 지속되지만, 합격률은 단 5%에 불과하고, 심지어 그 동안 봉급은 전혀 주어지지 않는다. 린다는 그에게 묻는다. 그건 후퇴 아니야?
우리는 크리스 가드너가 결국 모든 기회를 쟁취하고 백만장자가 되었음을 알기에 린다를 향해 조금만 더 남편을 믿어주었으면 좋았으리라 말하기 쉽다. 하지만 냉정히 생각해보자. 당신이 린다의 상황이었더라면 어땠을까? 당장 생존의 위협이 다가왔다면 합리적인 사람들은 대개 결과를 보장받을 수 없는 꿈을 추구하는 대신, 매일의 삶을 연장할 방법을 찾을 것이다. 린다가 아들 크리스토퍼를 데리고 뉴욕으로 떠나 가족의 식당 일을 도우려 했듯.
그러나 크리스는 이 미치도록 적은 확률의 ‘가능성’을 선택했다. 이것이야말로 그를 타인과 다르게 만든 지점이고, 우리에게 귀감이 되는 모습이기도 하겠지만, 나는 생각한다. 개인을 저토록 궁지에 내모는 사회는 얼마나 취약하고 몰인정한가?
“결과적으로” 크리스 가드너는 노력 끝에 자수성가에 성공한 사람이 되었다지만, 만일 그가 인턴직 기회를 몰랐더라면? 도둑맞은 스캐너를 찾지 못했거나, 교통사고를 더욱 크게 당했더라면 어땠을까? 대런 맥가비는 자신의 책 『가난 사파리』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가난은 일자리 부족도 문제지만, 끊임없는 스트레스와 예측 불가능성 속에서 살아가면서 실수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는 게 문제이기도 하다.” 그의 말은 영화 곳곳에서 증명된다. 크리스 가드너는 끊임없이, 쉼 없이 달려야 한다. 페인트칠하다 경찰서에서 밤을 보내고 달려가 면접을 보는 그의 모습, 부유한 이들 앞에서 자신의 서러운 상황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애쓰는 장면, 당장 모텔을 전전할 돈조차 부족해 아들의 손을 잡고 교회의 자선사업에 의지하고 발을 구르거나 전철역의 화장실에서 밤을 지새워야 했던 삶의 편린은 너무도 절박하다. 일련의 상황과 조건이 크리스의 열정에 기름을 부었을 수 있겠지만, 이렇듯 성공하는 사람이 있으니 희박하기 짝이 없는 가능성에 기대어 살아야 한다고 보편적 대중에게 설파하는 건 지나치다. 복잡하기 짝이 없는 현대 사회는 단순히 한 개인의 열정과 노력, 희망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경우가 더욱 많다.
심지어 영화의 제목의 유래가 되었고, 크리스가 언급했던 문장조차 그다지 찬란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토머스 재퍼슨이 미국의 헌법에 명시했다는 “생명, 자유, 그리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Life, Liberty and the pursuit of Happiness)”라는 구절에 대해, 한나 아렌트는 자신의 저서 『혁명론』을 통해 이렇게 주장한다. 재퍼슨이 뜻한 바는, 우리가 관습적으로 생각하는 개인적 차원의 행복이 아니라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에서 비롯되는 일종의 공적 행복이었다고. 실제로 재퍼슨이 어떤 생각을 하며 해당 문구를 헌법에 넣었는지까지는 알 수 없지만, 간단히 미국이 영국 왕정의 핍박을 피해 온 이들이 세운 국가였다는 점, 당시 미국이 민주주의를 최초로 제도화한 근대적 국가인지라 많은 용어가 보편적이지 않았으리라는 점만이라도 고려한다면 아렌트의 주장은 퍽 설득력 있게 들린다. 진실로 재퍼슨이 헌법에 급작스레 철학적이고 예술적이기까지 한 ‘행복의 추구’를 포함한 이유가 개인의 사적 행복을 보장하기 위함이 아니었다면, 삶의 설움을 떨치기 위해 개인적으로 발버둥 친 크리스의 노력이 오해에서 비롯되었다는 생각에 가슴 한 켠이 허해지기까지 한다. 그가 가진 불굴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지만, 한 편으로는 그저 약간의 행운이 부족해 제2, 제3의 크리스 가드너가 되지 못했을 이들이 틀림없이 있으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물론 일방적으로 국가가 개인의 행복을 '일괄적으로’ 보장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진 않다. 그저 헬무트 슈미트(Helmut Schmidt)의 신념처럼, 자본주의라는 체제가 산 사람을 해치지 않을 방어 체제는 언제고 필요하며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필요하다면 인간의 기본 권리와 개인의 삶이 소외되지 않기를 고민했던 헤겔의 법철학을 가져와도 좋겠다. 현대에 오며 낡아버린 철학일지라도 그가 했던 고민의 뿌리는 작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루하루의 생존조차 살얼음판인 이에게 “행복은 환경을 비롯한 외부적 요소와 무관하며, 개인의 힘만으로 성취할 수 있다”고 말하는 건 공허하다 못해 잔인한데다가, 더 나은 사회를 고민할 수 없게 만들지 않는가.
잠시 『우리는 가난을 어떻게 외면해왔는가』의 내용을 인용해본다.
제도를 바꿀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썼더니,
한 친구가 이런 내용으로 답글을 달았어요.
"선생님 이야기처럼 제도를 바꿀 수 있는 사람들은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바꿔주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바꾸려고 하는 것이고,
우리가 그 당사자이기 때문에 그걸 바꿀 수 있는 힘은 우리에게 있다.
꼭 높은 사람이 되어야지만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한두 명의 예외적인 성취를 칭송하고 지금의 시스템에 만족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여전히, 우리에겐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일인분의 행복을 위해선 당신과 세상이 필요하므로 이것은 나를 위한 일이자 당신을 위한 일이며 사회를 향한 발돋움이다. 사다리를 걷어차지 않는 세상, 개인의 능력에 맞는 사다리를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세상을 상상해보라. 점차 세계가 어려워진다는 이야기가 이곳저곳에서 들리는 요즈음이지만, 나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민사회에 대해 낙관을 가져본다.
* 참고 문헌
조문영. 『우리는 가난을 어떻게 외면해왔는가』
김누리 .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대런 맥가비. (김영선 옮김) 『가난 사파리』
소병일.(2018).헤겔의 행복한 인간.철학사상,(68),129-153.
이재정. (2015). 행복의 공공성: 한나 아렌트의 관점에서. 철학연구, 133, 263-282
정원규. (2020). 아렌트 공적 행복 개념의 발전적 재구성을 위한 보충적 논제들. 사회와 철학, 40, 4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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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니, 태어난 이상 너희들은 다 '가여운 것들'
<가여운 것들>의 강력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벨라 벡스터(엠마 스톤)이다. 한 여자가 벼랑 끝에 서 있다. 아니 배 위에 있다. 삶의 희망을 잃은 여자. 그 배 아래로 뛰어내린다. 여자를 다시 살린 건 독거노인 과학자 갓윈 백스터(윌렘 대포)다. 얼굴이 기괴한 과학자 갓윈. 외모를 보고 성격을 판단하면 안 된다. 하지만 갓윈 박사는 어림없다. 성격마저 괴팍한 갓윈. 그에게 같이 사는 여자가 있다고 하면 누가 믿을까? 하지만 그건 진실이다. 다시 태어난 여자 벨라 벡스터는 뭔가 특별하다.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벨라. 벨라는 마치 남자 어린아이처럼 행동하고 있다. 그건 죽어가는 여자의 뇌에 그녀가 임신 중이었던 아이의 뇌를 이식해서 살려냈기 때문이다. 벨라는 아이의 뇌로 다시 태어났다. 이 말은 즉슨 벨라가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왕성하다는 의미와 통한다. 이런 벨라에게 남자 한 명이 접근한다. 남자는 갓윈의 제자 맥스(레미 유세프)다. 벨라를 짝사랑하는 남자 맥스. 소심하게 고백하지만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게 된다. 바로 소심하게 청혼을 건넸던 벨라와 바람둥이 변호사 던컨(마크 러팔로)이 여행을 떠난다는 소식이었다. 눈 뜨고 코 베인 맥스. 카메라는 벨라와 함께 리스본 찍고 여기저기 모험담을 펼친다.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기괴함이라는 정서에 있어 도가 튼 아티스트다. 스타일적으로 '뭔가 있어 보이기 위해'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 위해 일반적으로 '란티모스'하면 떠오르는 장면부터 이야기해 보자. 굳이 마이너 한 예술영화의 세계까지 파지 않더라도 <킬링 디어>에서 배리 키오건이 파스타를 먹는 장면 정도는 오며 가며 사람들이 봤을 클립이다. 키오건이 훌륭한 연기자라는 사실에는 여지가 없다. 연기를 잘하니까 임팩트를 남기는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할리우드를 주의 깊게 본 영화팬들이라면 '란티모스에게 이 장면만 있지 않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기괴함의 정점은 란티모스가 국제적으로 처음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영화 <송곳니>에서 확인할 수 있다. <송곳니>를 보면 신체 노출부터 시작해서 폭력묘사까지 이 세상 기괴함은 다 가져다 놨다. 갑자기 이 감독에서 봤던 그로테스크한 장면들이 더 떠오른다. <더 랍스터>에서 갑자기 총을 쏴서 직원을 죽이는 장면, <킬링 디어>에서 초반 심장 수술 장면, 니콜 키드먼이 맡은 안나가 길쭉하게 뻗어있는 모습이 그렇다. 이렇게 시각적으로 임팩트를 주는 방법을 아는 감독이기 때문에 그의 영화가 더 강렬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이면에 깔려있는 무언가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파스타를 징그럽게 먹는 것이나 <송곳니>에서의 가족에 대한 비유 같은 것들은 일상적인 것에서 조금 비틀어서 '인위적인 것'을 만든다는 것에 있다. 우리가 쉽게 다들 알고 있는 '불쾌한 골짜기'를 영화의 동력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최고작이라고 볼 수 있는 <킬링 디어>와 <더 랍스터>에서 영화 이야기의 형식과도 이어진다. <킬링 디어>에서 영화는 어떤 대상을 관객에게 이해시키려는 생각 자체가 없는 듯하다. 그냥 알고도 당하라는, 전지적인 목적을 가지고 인물들과 관객들을 괴롭힌다. 실제로 카메라는 마치 누군가를 위에서 지켜보는 것처럼 부감 숏(천장에서 바닥으로) 찍는 것 같고 사운드는 관객을 내내 불편하게 만든다. 그냥 일반적인 카메라와 사운드로도 이 영화가 가진 인간의 굴레를 묘사할 수 있는데 내내 이야기를 인위적으로 비튼다. <더 랍스터>도 사랑에 실패하면 동물이 된다는 설정은 곧 '사랑이 억지로 되는 일인가'라는 의구심을 들게 만든다. 이것 역시 인위적으로 이야기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영화가 인간이 어떻게 사랑에 빠질까?를 보여주기 위한 설정이다. '억지로' '근거를 들어서'사랑에 빠지지 않는 인간의 단면을 잘라서 제시하는 것이다. 이렇게 란티모스의 필모그래피를 종합해 보면 그는 인위적이라는 속성을 시각적으로, 또 플롯의 핵심으로, 장면 연출로 소화하는 아티스트라고 볼 수 있다. 이 <가여운 것들>은 그 모든 것들이 고농도로 함유되어 있는 영화다.
가령 이 영화의 미술에 대한 부분이 그렇다. 이 영화의 세트장과 조명, 의상 같은 시각적 요소들은 란티모스가 인위적으로 만든 것들이다. 영화는 란티모스가 구축한 거푸집 아래에 이야기를 전개한다. 영화의 핵심을 전달하기 위해 응당 당연하게 골라야만 했던 선택지다. 그럼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무엇일까 따지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글쓴이는 이 영화가 다루고 싶어 하는 핵심을 '시스템'이라고 본다. 영화는 벨라와 그녀를 둘러싼 세상을 다룬 것이다. 기득권이 지배하는 세상을 다루고 싶어 하는 영화가 그 안의 세상을 통제하지 못하면 나사가 빠졌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반대측면에서 질서를 깨는 인물들의 모습을 스크린 안으로 갖고 오기에도 용이할 것이다. 이 인위성에 대한 부분은 배우들이 연기하는 방식과도 이어진다. 글쓴이는 영화를 보면서 후반부를 제외하고 다들 인형의 집처럼 뚝딱거린다고 느꼈다. 이것은 전적으로 의도가 있다. 누군가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세상을 비판하는데 배우들이 자연스럽게 일상적인 문법으로 연기한다면 그 고지식함과 완고함이 체감이 안 될 수도 있다. 세계에 대한 인물의 대응을 자연스러움으로 표현해서 이질감을 키우는 선택지를 둔 것이다. 공간의 측면에서도 이 영화가 기괴한 동화로 연출한 이유가 분명하다. 왜 이 영화는 일종의 성에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을까? 영화가 이 영화의 세계를 좌지우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요르고스 란티모스가 연기의 톤으로 이 영화의 세계를 좌지우지한다는 걸 보여준 것처럼 공간과 미술로도 이 영화의 핵심을 드러낸 것이다. 이렇게 '세상을 움직이는 절대자의 속성이 전적으로 드러난다'는 측면에서 '뇌'가 직접적으로 등장하고, 섹스신이 적나라한 것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인간의 실존을 드러내는 두 소재라는 것 역시 중요하지만 굳이 보여주지 않아도 되는 것들을 인위적으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영화의 핵심에 닿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뇌와 섹스라는 소재는 이야기를 전개하는 데 있어 큰 차이가 느껴지는 부분이 아니다. 왜? '뇌'를 이식한 인간의 실험을 통해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은 새로운 생명체다. 매춘 그러니까 성관계를 통해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은 역시 생명체다. 마찬가지로 갓윈 박사의 실험체는 그 나름의 시스템을 만드는데 일조한다. 새로운 생명의 잉태는 내가 어떤 세상에 태어날지 고를 수 없다는 점에서 시스템에 일조하는 역할이 될 수도 있다. 두 소재가 이야기의 맥락에서 공통점을 가지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이 영화의 벨라는 두 인위적인 행위를 직접 겪는 개체이기도 하다. 영화도 이 구분선을 일부러 흐린 것이다.
영화의 기술적인 부분에서도 시스템에 대해 표현한 부분이 보인다. 이 영화의 사운드 중 몇 음악은 거의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시그니처라고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이런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서 광각렌즈를 활용한 촬영방식도 이 영화의 기괴하고 독특한 에너지만을 강조시키기 위한 것은 아니다. 시스템에 대항하는 영화가 기존의 영화 만들기 관습에 편승해서 제작된다면 뭔가 모순된 것이 아닐까? 하지만 촬영이나 사운드보다 이 영화에서 더 중요하게 시스템을 강조하는 것은 편집인 것 같다. 이 영화에서 섹스신이 들어가는 방식은 뭔가 이상하다. 구체적으로 흑백에서 컬러로 넘어갈 때 맥스가 "나는 벨라가 무사하길 바란다"라고 말하는 장면 바로 다음으로 덩컨과 벨라의 성관계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은 영화 나름대로 블랙코미디를 구사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다른 장면들과 비교했을 때 위 두 가지 사운드와 촬영을 활용한 것과 공통점이 있다고 봤다. 전형적인 연출 방식을 거부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후 전개에서 영화는 편집을 통해 섹스신을 느닷없이 보여주거나, "뜨거운 뜀박질"이 대사에 전면으로 나오더라도 보여주지 않는다. 기억나는 장면이 벨라가 어디 잠깐 나갔다가 들어온 후의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벨라가 덩컨에게 "우리 뜨거운 뜀박질을 해요!"라고 말한다. 그럼 이 <가여운 것들>이 이전에 수도 없는 섹스신을 보여줬기 때문에 이번에도 나오지 않을까? 싶지만 영화는 벨라가 신체를 노출하는 모습만 보여주고 이 부분을 생략해 버린다(편집에 대한 부분은 아니지만 이후 벨라가 매춘을 하는 장면에서도 벨라가 노숙자에게 "갑자기 들어가면 안 된다"식의 대사를 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 이것은 영화가 이야기의 리듬을 섹스신을 활용해 변화를 준 것으로 읽을 수 있다. 기존 영화들이 유지해 온 흐름을 사운드와 편집, 촬영으로 부정한 것이다.
이 인위적으로 무언가를 거부하는 형태는 곧 영화의 플롯과도 이어진다. 영화는 일부러 두 명의 흑인 캐릭터를 등장시켰다. 왜? 이야기에서 벨라의 내적 성장을 이끄는 인물들이기도 하지만 이 인물들이 보여주는 행보도 영화에서 어떤 것들을 반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첫째. 흑인 남자는 옆에 앉아있는 백인 아줌마에게 "섹스를 안 한 지 20년 됐다니 딱하네요"라고 대놓고 면박을 준다. 글쓴이는 이 대사가 가스라이팅이라고 느꼈다. 하지만 이후 이 흑인 남성 캐릭터가 하는 대사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코멘트를 보고 이 영화가 다루고 싶어 하는 틀이 넓다는 걸 느꼈다. 영화가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처럼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다루며 정체성에 대해 다루지만 사실 이 틀을 이루는 것이 얼마나 허상인가를 보여주는 건지를 암시하는 설정이라고 봤다. 이것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서 인물과 인물이 영화 안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가? 와도 관련이 있다. 영화를 보면서 생각난 건 '니체'에 대한 짧은 지식이었다. 니체가 인간의 몸을 조명했고 영화가 섹스를 다룸에도 이유가 있다. 하지만 가장 궁극적인 이유는 벨라 / 세상을 구분 짓는 구분선이 니체의 개체론이 연상됐기 때문이다. 이 세상을 구성하는 데 있어 정말 중요한 건 그 세계를 이루는 요소들이 내가 알고 있는 니체의 개체론이다. '신은 죽었다'라는 문장이 여기서 근거하지 않나? 다시 영화로 돌아와서 이 <가여운 것들>이 다루는 흑인 남성 캐릭터는 사실상 벨라의 세계를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타락에 대해 비판하면서 '섹스 20년 동안 못한 여성을 비웃는'것이 인간이고 이 세상인 것이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흑인 여성 캐릭터도 이 니체의 사상 하에 있는 캐릭터라고 생각했다. 흑인 여성 캐릭터는 벨라에게 공감한다. 바로 정서적인 유대를 나누는 듯하다. 하지만 이 인물 역시 벨라에게 성적 행동을 한다. 단순히 이 흑인 여성 캐릭터가 무슨 목적으로 벨라에게 접근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덩컨이나 매춘 노숙자들도 벨라와 성관계를 맺었다는 점에서 흑인 여성과 노숙자는 동격에 놓이는 듯하고, 이 흑인 여성 캐릭터 역시 이 영화의 세상을 이룬다고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흑인 남성 캐릭터가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같은 거시적인 개념을 건드렸다면 반대로 여성 캐릭터는 인간과 인간사이의 유대감과 기본적인 인간관계를 다룬 것이다. 이렇게 영화는 개체를 가지고 사회 시스템에 대해 다루는 과감한 시도를 보여줬다.
영화가 몇 소재를 인위성이라는 모티브와 함께 다뤘다는 것은 영화의 맥락과도 이어진다. 이 영화는 인위적으로 벨라의 분신을 만들어 여성 서사로서의 이야기도 포함하고 있다. 이 영화에는 벨라의 분신들이 여럿 등장한다. 동물과 동물을 이어 붙인 형태에 대한 부분이다. 개랑 닭을 이어 붙인 모습이나, 학과 얼룩말이 연결되어 있는 모습이 여러 장면에 등장했다. 이것은 벨라부터가 여성의 몸에 남자의 뇌를 결합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이런 분신들 중에 가장 중요한 건 펠리시티(마가렛 퀄리)다. 이 펠리시티가 이야기에서 큰 역할을 한다고 보긴 어렵다. 하지만 이 펠리시티는 영화의 핵심인 '시스템'을 보여주기 위해 중요하게 작동한다. 우선 돌연변이 동물들이나 펠리시티나 누가 만들었을까? 의 측면에서 그 근원을 따져야 한다. 이들을 만든 인물은 아마 갓윈으로 보인다. 갓윈은 영화 안에서 대놓고 '창조주'라 불리며 이 시스템을 만든 인물로 묘사된다. 남성 캐릭터가 세계관에서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었는데 그 생명체가 주인공이다라는 점은 이 영화가 '페미니즘 영화'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충분한 근거를 갖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 영화는 여성 영화이기도 하다. 벨라는 세상이 규정한 여성의 정의를 온몸으로 부수며 질주하는 캐릭터라는 점은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가여운 것들>이 인위성을 여성 영화로서의 맥락을 갖추기 위해서만 사용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이 영화에서 생명체를 만든 인물은 갓윈이고 남성이다. 그리고 영화에서 벨라는'상위 계층이 지켜야 할 윤리'에 전면으로 부딪히는 인물이다. 그럼 여성 해방 서사로 읽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성매매업자와 펠리시티, 그 옆의 하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성매매업자는 여성이다. 이 캐릭터는 벨라에게 "누구와 성매매를 할지 넌 고를 수 없다"라고 말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펠리시티와 하녀는 벨라에게 "몸 파는 여자"라며 극언을 입 밖에 낸다. 심지어 하녀는 벨라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성 안의 사람들에게 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상 이 둘은 여성의 주체성을 방해하는 인물인 것이다. 여성의 자유를 방해하는 3의 시선을 공고히 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내가 영화를 연출하는 사람이다. 여성을 둘러싼 고압적인 시스템을 묘사하고 싶다. 그렇다면 이런 요소들을 영화에 넣지 않을 것 같다.
이 페미니즘 영화의 틀을 반쯤 탈피한 것은 엔딩에서 더 크게 강조된다. 엔딩을 보면 블레싱턴 장군의 몸에 동물의 뇌가 이식된다. 뭐 여성에게 고압적이었던 인물이 응당 맞이해야 할 벌을 받았다고도 볼 수 있겠으나 글쓴이는 살짝 다르게 봤다. 사실상 블레싱턴 장군과 벨라는 동격이 된 것이다. 벨라가 빅토리아일 때의 이야기를 영화가 보여주지 않아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알 수 없어 벨라가 훨-씬 아까운 사람이다. 하지만 이 자체만을 보면 '다른 개체의 뇌'가 이식됐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여기에 더 나아가 벨라가 유사 아버지였던 갓윈의 직업을 물려받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벨라는 새로운 생명체를 재창조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갓윈처럼 세계의 기득권이 될 수 있다. 또 다른 버전의 <가여운 것들>이 블레싱턴을 주인공 삼아 만들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점에 비추어 볼 때 이 영화가 단순히 1차원적인 페미니즘 영화라고 볼 수 있을까? 글쓴이는 아니라고 본다. 영화가 남근주의적인 시대상만 조롱하는 것이 아닌 인류의 역사를 거슬러올라가 '기득권에 서는 것'이 얼마나 따분한 짓인지를 강조한 것이다. 이렇게 두 종류의 인간(남/녀)의 구분선을 흐린 선택은 벨라의 가장 기본적인 속성을 따져봐도 다시 읽을 수 있는 맥락이다. 벨라는 자신의 몸을 팔았던 것, 그러니까 욕망에 직설적이었던 사실을 전혀 부정하지 않는다. 인물에서 더 나아가 영화도 이런 벨라를 부정하지 않는다. 벨라가 빅토리아일 때 어떤 인물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연출부터 빅토리아보다 벨라의 편을 든 것이다. 이 연출에는 여성의 몸에 남성의 뇌가 이식된다 한들 이 사회를 이루는 시스템은 여전할 거라는 조소가 담겨있는 듯하다. 이는 가족이라는 소재로 당시 그리스의 기득권을 비판한 <송곳니>에서도 느껴졌던 서늘한 조롱이었고, '란티모스의 영화다!'라고 느낀 부분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영화에 단점처럼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다. 이 모든 이야기가 친절하지 않다는 점이다. 본인이 쓴 모든 글의 내용에 대해 '영화는 그런 게 아냐!'라고 비판하는 평자가 있다면 그 나름대로 맞는 말이다. 무슨 말이냐고? 홍상수의 영화들은 이 <가여운 것들>과 저 멀리 반대편에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자연스러운 것'을 우선순위로 두는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죄다 인위적인 것투성이다. 그리고 영화가 전면에 성적인 소재를 등장시키고 있어서 어떤 관점에 있어서는 '여성해방이 곧 모험이고 섹스냐'라는 비판도 합리적일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원작을 안 읽어서 이 문장에 확신을 담을 수는 없겠지만 후반부의 각색에 대해서는 원작 팬들이 할 말이 있을 것 같다. 이 광범위한 이야기를 펼친 것에 비해 후반부 문제를 해결하는 규모가 좀 작은 느낌이 있다.
하지만 글쓴이는 재밌었다. 이렇게 다층적이면서 선명하게 주제를 강조한 란티모스의 역량은 현재 최고의 폼을 구가하는 예술가 다웠다. 휘황찬란한 미장센에 눈이 즐겁고 기괴한 사운드에 청각적인 쾌감까지 느끼는데 이야기가 깊기까지 하니 보는 동안 '이 아침에 극장에 오길 잘했다' 싶었다. <추락의 해부>가 청각과 시각이라는 인지체계를 활용한 각본으로 우리에게 재미를 주고 <오펜하이머>에서 핵폭탄을 플롯처럼 만든 것 그리고 <바튼 아카데미>가 이야기를 고전적으로 만든 것처럼 연출과 이야기가 딱 맞아떨어지는 섹시한 영화가 탄생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각색상은 <오펜하이머> 여우주연은 <플라워 킬링 문>의 릴리 글래드스턴, 작품상은 <오펜하이머>가 받을 것 같다. 아마 상 받아도 미술상이나 의상상이 가능성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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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둘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마블 스튜디오의 신작 <썬더볼츠*>가 개봉 2주 차에도 1위의 왕좌를 지켰습니다.
북미 박스오피스 1위를 유지하며, 3,300만 달러를 벌어들여 누적 수익 1억 2,840만 달러를 기록하며
흥행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내 박스오피스에서는 누적 관객 수 80만 명으로 3위를 기록하며
다소 아쉬운 성적을 남기고 있습니다.
북미 박스오피스 2위에 오른 라이언 쿠글러 감독의 <씨네스: 죄인들>은
개봉 4주 차 주말에도 2,110만 달러를 벌어들이며 여전히 강한 흥행력을 보여주고 있으며,
오는 5월 15일부터 21일까지 IMAX 70mm 재상영이 확정되며, 추가적인 흥행 상승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한편, 국내 박스오피스에서는 누적 관객 수 300만 명 돌파를 목전에 앞둔 <야당>이 1위를 차지했습니다.
4주째 1위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야당>이 과연 봉준호 감독의 <미키 17>(누적 관객 수 약 301만 명)의 성적을 넘어서,
과연 올해 한국 영화 개봉작 중 최대 관객 수를 기록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습니다.
북미에서 큰 사랑을 받은 <A MINECRAFT MOVIE 마인크래프트 무비>는 누적 관객 수 123만 명을 기록하며 2위에 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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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로의 여정 속에서 찾는 '나'라는 존재
과거로의 여정 속에서 찾는 '나'라는 존재
영화의 제목 "이다(Ida)"는 안나의 본명이다. 안나는 서원식 전에 자신에게 혈육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유일한 혈육인 이모를 찾아간다. 그리고 이모에게 두 가지 사실을 듣게 된다. 자신의 실제 이름이 "이다(Ida)"라는 것과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것. 이모 또한 그녀와 마찬가지로 유대인이다. 쌀쌀맞은 이모의 태도와 그녀가 전하는 정보에 혼란스러우면서도 자신의 부모에 대해 알고 싶어진 안나는 이모와 함께 그 흔적을 찾아가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이 영화는 일종의 로드무비 형식을 취한다. "이다"라는 한 이름의 제목이 주는 강렬한 인상과는 다르게 이 영화의 주인공은 사실 이다(안나)와 완다 두 명이라 할 수 있다. 안나는 부모에 대해 알아가며 자신의 뿌리와 정체성에 대해 알게 되고, 그 진실들을 하나씩 마주한다. 그러나 안나가 부모에 대한 진실에 점점 다가갈수록 완다는 잊고 싶던 과거의 기억을 점차 떠올리며 그것에 잠식되어간다. 두 사람의 동행은 안나가 자신의 뿌리를 찾아가는 여정임과 동시에 그녀의 이모 완다가 자신의 과거 기억 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과정이다.
수녀원의 제한적인 정보와 환경 속에서 격리되다시피 살아오던 안나에게 바깥세상은 신기하기만 하다. 안나는 바깥세상에 대해 두려워하면서도 호기심을 가진다. 수녀원 측의 배려로 서원식을 앞두고 직접 완다를 찾아가지만 이모 완다는 그녀를 쌀쌀맞고 퉁명스럽게 대한다. 이모는 안나가 유대인이라는 것과 그녀의 실제 이름과 부모의 이름, 그리고 사진 한 장을 주고는 그녀를 수녀원으로 돌려보내려 한다. 첫 만남부터 비밀로 싸여있던 완다는 안나가 수녀원에서 그녀에 대해 아무 정보도 듣지 못했다는 것을 알자 안나에 대한 경계를 늦춘다. 판사인 완다는 법정 재판 중에 생각이 잠기더니 이다를 데리러 버스터미널로 가고, 이때부터 그녀의 태도는 상반되게 온화해진다. 이다를 보고 마주하기 힘들던 과거를 떠올려서일 수도, 자신의 부끄러운 행동들에 대한 죄책감이나 후회 때문일 수도, 혹은 온전히 이다에게 뿌리를 알려주기 위해서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계기가 어떻든 간에 그렇게 두 사람은 함께 다시 만나 서로의 과거로 여행을 떠나게 된다.
안나 가족의 죽음은 1941년 독일의 폴란드 점령 당시 폴란드 민간인들이 유대인 수백여 명을 죽였던 예드바브네 학살 사건을 배경으로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추측해보건대 안나의 부모와 함께 죽은 어린 남자아이는 아마도 그녀의 아들일 것이다. 과거의 비극에서 살아남은 두 사람은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죽은 가족들의 유골을 마주한다. 완다는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스탈린 정부 하의 폴란드 공산당원이 되어 살아남았고, 안나는 갓난아이라 유대인 티가 나지 않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들 가족을 죽인 남자는 무덤을 판 구멍에 앉아 죄의식을 보이긴 하지만 끝까지 이들에게 사과를 하지는 않는다. 자신들을 더이상 괴롭히지 않고 집에서 계속 살게 되는 조건으로 유골이 묻힌 곳을 알려주는 거래를 했을 뿐이다. 완다는 아들의 유골을 소중히 끌어안는다. 그녀는 자신이 판사로서의 권력을 휘두르며 저질렀던 과거의 행보를 되돌아보면서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히고, 결국에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반면 이다의 선택은 어떠한가. 이 영화의 엔딩씬을 그녀의 선택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의 엔딩씬은 무척 독특하다. 내내 정적이던 카메라는 엔딩씬에서 급작스럽게 흔들린다. 감독은 어딘가로 걸어가고 있는 이다의 모습을 핸드헬드로 잡는다. 핸드헬드 자체가 특별한 연출기법은 아니다. 다만 앞선 모든 장면에서 감독이 유지해오던 연출 방식과는 상반되게 끝나기 때문에 이 영화의 엔딩씬은 특별해진다. <이다>는 여백을 통해 스토리텔링하는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점은 파벨 포리코브스키 감독의 연출 특징이기도 하다. 차기작 <콜드 워>에서도 이어지는 1.33:1의 풀 프레임 화면비와 흑백의 이미지, 헤드룸을 많이 남기며 전통적인 미장센을 깨는 과감한 시도까지 그의 영화는 형식 자체가 의미하는 바가 크고, 그는 형식을 통해 많은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감독이다.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은 언제나 화면의 중심이 아닌 사이드에 위치하고 카메라는 여백이 많이 보이도록 대상을 비춘다. 그럼으로써 영화 속 인물들은 어딘가 위태롭고 불안해 보인다. 마치 세상의 구석으로 내몰린 느낌까지도 든다. 이 점을 <이다>에서 <콜드 워>까지 이어지는 그의 영화 속 시대 배경과 연결 지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시대와 운명이 반기지 않는 가운데, 세상으로부터 내쳐지는 인물들은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다시 엔딩씬으로 돌아와서, 내내 무표정하던 그녀의 표정이지만 그 순간 그녀의 표정에서는 어떠한 결연한 의지가 느껴진다. 그 의지의 분위기가 엔딩씬 전체를, 관객을 압도시킨다. 안나는 어쩌면 그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삶을 제대로 찾게 된 건지 모르겠다. 아니, 그 길을 비로소 시작하는 건지도. 지금까지 살아온 '안나'로서의 삶을 계속 살아가든, 새롭게 알게 된 '이다'로서의 삶을 살아가든 중요한 것은 그녀의 이름이 무엇인가와 같은 사소한 문제가 아닐 것이다. 어딘가로 묵묵히 걸어 나가는 그녀의 모습은 우리에게 그녀의 결연한 의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이제 어떤 선택을 하든 그녀의 선택은 오로지 그녀의 의지와 발길에 달렸다. 이다는 자신의 길을 계속해서 묵묵히 걸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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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이서의 페이스
<헤어질 결심>(2022, 박찬욱)
<사막의 왕>(2022)
<그녀의 취미생활>(2023, 하명미)
<살인자ㅇ난감>(2024)
* 위 작품들의 장면과 결말 포함.
3주 내리 <헤어질 결심>을 보러 극장으로 향하던 2022년, 나는 예감했다. 배우 정이서를 좋아하게 되리란 것을. 영화 속 하고많은 신스틸러 중 가장 눈에 밟혔던 이가 누구냐는 질문을 받았다면, 망설임 없이 ‘일하는 경찰 미지’, 정이서라고 답했을 것이다. 그는 입체적일 필요가 없는 기능적 조연이었다. 고경표처럼 적극적으로 캐릭터를 어필하지도 않았고, 김신영처럼 배우 자신의 이미지를 인물에게 그대로 덧씌우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미지의 개성은 톡톡히 빛났다. 정이서는 작품이 인물에게 부여한 테두리를 철저히 지켰다. 테두리를 철저히 지키는 자, 그게 미지다. 눈치 빠르고 칼 같이 선을 긋고 제 할 일을 다하며 불쾌를 숨기지 않는. 능숙하게 일하는 제스처, 찰나의 눈빛, 독특한 효과음만으로 캐릭터가 파악되었다. 미지처럼 야무진 연기였다. 자잘한 디테일이 살아 있었는데, 그 가장자리가 깔끔했다.
<헤어질 결심>은 서래와 해준의 이야기다. 주변 인물들의 사연에 관심이 없는 영화 속에서, 미지는 사연 따위 없어서 더 매력적이었다. 화면을 벗어난 그에게는 관심이 생기지 않았다. 그러나 화면에 잡히면, 해준을 뚫어져라 보면서도 곁눈질로 미지의 움직임을 붙들게 되는 것이었다. ‘오늘도 일하는 미지’ 초단편 외전 같은 것을 슬며시 그려보며, 스크린 속 정이서를 향한 갈망을 느꼈다. 유사하거나 색다른 톤의 조연도 고팠고, 제 1화자가 되어 내면을 모조리 꺼내는 역할을 맡아줬으면 싶기도 했다.
그해 공개된 리미티드 시리즈 <사막의 왕>은 그 갈망을 어느 정도 충족시켜 주었다. 정이서의 넘치는 재치를 비격식적이고 입체적인 모양으로 만날 수 있는 작품이다. 이상한 회사에 떨어진 ‘앨리스’ '이서'. 그는 시청자가 픽션의 세계에 입장하도록 돕는 평범한 화자다. 면접관의 질문에 허허 웃으며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죠.”라고 답했기에 회사에 최종으로 합격했다. 멍하고 느린 표현법은 뒤에서 다룰 <그녀의 취미생활> 초반의 정인과 닮은 데가 있으나, 그 기반이 다르다. 정인은 살아남기 위해 연기로 무장했다. '이서'는 특수한 상황에 던져졌고, 진심으로 얼떨떨해 하는 중이다. 일시적인 상태가 아니다. 회사를 다니는 내내, 물음표는 크기를 달리하며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이서'는 연기를 잘 못하는 이다. ‘척’을 하면 다 티가 나고, 속마음도 대부분 읽힌다. 그것이 장면의 재미다. 알아들은 척 하는 함박웃음, 신나 날뛰는 실루엣. 은은하게 배어 있는 사투리가 맛깔나는 말투를 완성한다. 이름도 비슷한 ‘이서’는 작가가 점찍어 두고 쓰기라도 한 듯 정이서와 어울리는 캐릭터다.
납득하기 힘든 일을 반복하던 '이서'는, 팀장에게 언어폭력 섞인 질책을 듣는다. 그 순간 정이서의 신체 표현이 압권이다. ‘전혀 이해가 안 되는데 내 잘못인 것 같고, 억울한데 까닭을 모르겠고, 이 상황을 피하고 싶은데 내 의지로는 불가능하고, 뭐라고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말이 안 나오는’ 상태. 머리 꼭대기부터 혀, 발끝까지 얼어서는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움츠러들어 쭈뼛거린다. 정이서는 <사막의 왕>이 다크코미디임을 잊지 않는다. 속내를 겉으로 다 드러내면서도 감정에 지나치게 몰입하는 연기는 지양한다. 그 덕에, 월급 액수를 보고 필터없는 감탄사를 토하며 기뻐하는 씬이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때쯤 ‘이서’의 인물됨을 파악했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그는 ‘세계’에 혼입되어 안주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의미없는 일은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의미없음’의 정체를 깨달았다면, 참을 수 없다. 태도가 달라지니, 진정으로 정인이 겹쳐 보였다. 북받치는 분노와 모멸감을 다 터트리는 대신 꾹꾹 누르며 표출한다. 그의 결심이 ‘순진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이서'가 “사막”을 밟고 당당하게 오피스를 퇴장하며 1화가 끝나고, 각자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정이서는 작품의 장르를 잊지 않는다. 그러나 그래야 한다면, 연기 톤을 바꾸어 장르를 뒤집어 놓는 데에 한몫을 한다.
<사막의 왕>은 원톱 주인공을 둔 장편 시리즈보단 리미티드 연작에 가깝다. 라스트 에피소드에서 대놓고 말해주듯- (대부분) 돈을 둘러싸고 갈등하다 언젠가 엇갈렸던 자들의 이야기다. 개중 가장 평범해 보였던 ‘이서’는, 돈을 버린 자이기에 특별했다. 그는 3화의 엔딩 무렵 자그마한 회오리를 몰고 재등장한다. 쫓아오는 엄마를 피해 낯선 차에 덥석 올라 고개를 한껏 숙이고 ‘빨리 출발하라’고 하는 이 인간을 어찌할 것이냐. 그 다급함은 진심인 것을. 그의 꽁트 같은 끼어듦과 이후의 능청스러운 태도는 서은과 해일 사이 흐르던 불안한 코미디의 기운에 안정감(?)을 불어넣는다. 얼떨결에 ‘강원도로 일출을 보러 가는 핵가족’의 그림을 구성하게 된 젊은이 둘과 어린이 하나. 그 기이한 동행을 마지막으로 셋 모두 카메라에서 벗어난다. 어쩌면 서은과 닮아 있는 ‘이서’의 눈빛을 보며, 이번엔 그 사연이 궁금해졌다. <사막의 왕>을 통해 정이서의 꾸밈없고 다채로운 표정들을 목격했고, 거대한 가능성을 확신했다.
<사막의 왕>(2022)
이듬해, <그녀의 취미생활> 포스터를 본 나는 곧 극장으로 가야만 함을 깨달았다. 저리도 사연 많아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다니. 본격적으로 좋아할 준비는 되어 있었다. "<그녀의 취미생활>은 인물을 한계까지 몰아가 폭발을 유도해 관객을 빠르고 시원하게 만족시키지 않는다. 정인이 제 페이스대로, 즐기고, 생각하고, 결론을 내리고, 계획을 차근차근 실행하도록 돕는다." 당시 리뷰에 적었던 내용을 옮겼다. 정이서는 서두르거나 과시하지 않았다. 작품에 어울리는 저만의 페이스(face/pace)를 찾아 신중하게 자리 잡았다. 드라마틱한 ‘각성’ 연기가 요구되었다면 그또한 가능했을 터이나, 정인에게 안 맞는 옷이었을 것이다. 그것을 거부함으로써 작품과 배우는 클리셰의 울타리에서 탈출했다.
오프닝은 정인의 뒷모습이다. 커다란 가방을 짊어지고 곧 땅으로 꺼지기라도 할 것처럼 터덜터덜 밤길을 걷는다. 몸의 피로와 더불어 과거와 생의 무게가 어깨를 짓누른다. 걷는 방법을 고민해 결정한 최선의 결과물이라기보단 체화한 인물이 자연스레 발현된 걸음걸이일 테다. 정인에게 실려 있던 그늘의 무게는 날이 밝는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일상적인 질책과 조롱에 그저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반응하거나 들릴 듯 말 듯 ‘에’라고 답하는 정도로 존재감을 지우며 살아남았다. 조용해 보이는 그의 내면엔 톡 건드리면 터질 듯한 울분이 있고, 커다란 가위를 옆에 두고 선잠을 자다 비명을 지르며 깨어날 만큼의 불안과 공포가 있다. 그 원인은 그가 위치하는 공간과, 그곳을 채운 특정한 타인들이다.
홀로 풀숲에 숨거나 사람들 가운데 섞여 말없이 관찰하는 정인, 그의 응시는 자체로 그의 언어다. 흐엉에게 달라붙는 재순을 정인은 먼발치에서 노려본다. 입을 꾹 다물고 눈에 힘을 준다. 목표물에게 효과적으로 가닿는 감시와 경고의 응시다. 창수는 어떤가, ‘응시하지 못함’에 가깝다. 산속에서 그를 마주치자 정인은 필요 이상으로 놀란다. 상대가 몸을 기울이거나 손을 들 때마다 소스라치고, 극도로 움츠러들어 겨우 견딘다. 다음, 그다음 조우에서도 그렇다. 불투명한 창문을 사이에 두고도 고개를 똑바로 들지 못하고, 입보다 눈물샘이 먼저 열린다. 창수는 정인의 숨을 틀어막고 피를 굳히는 인간이라고, 정이서가 말해주고 있었다. 관객은 정인의 수많은 사연 중 하나가 거기 얽혀 있음을 직감하게 된다.
혜정에겐 자꾸 시선이 간다. 상대가 알아챘으면 하는 마음으로 훔쳐보는 듯하다. 눈을 맞추지 못하고 자꾸만 고개를 옆으로 돌리는 건 매한가지이나, 창수에게 보이던 두려움 대신 조심스러운 호의와 관심이 감지된다. 만남 후엔 여운을 돌이킨다. 순수한 호기심과 동경, 그리고 앞으로 풍부한 정서들로 채워질 빈칸이 느껴진다. 영영 벗어난 줄 알았던 고향에 붙들린 정인에게 혜정은, 지긋지긋한 공간에 신선한 공기를 끌고 온 존재다. 웃는 둥 마는 둥, 긍정을 하는 둥 마는 둥. 그건 익숙한 가면이다. 느릿하고 분명한 말투, 배시시 흩어지는 미소는 정인의 캐릭터다. 혜정과 함께 생계 외 삶에 있는 즐거움을 경험하며 정인의 얼굴에선 점점 그늘과 주저가 걷힌다.
작품은 종종 혜정의 대사로 정인을 묘사한다. “다 알고 있는” 사람, “생각하고 움직이는” 사람. 혜정은 정인을 구하는 자 보다는 정인이 스스로를 구하도록 돕는 자다. 정인은 원래 품고 있던 강함을 꺼내는 법을 배운다. 혜정과 가까워지기 전 시작된 첫 번째 ‘행동’은 충동적이지만 계획적이기도 했다. 가위를 툭 떨어뜨리는 차분한 손놀림, 서늘하게 다물린 입과 내리깔린 눈꺼풀. 후에 일련의 복수를 실행하고 참을성 있게 지켜볼 때도 유지되는 온도다. 느닷없이 내려앉은 온도가 아니다. 마을 사람들이나 전남편 광재를 대하며, 정인은 무표정 아래 켜켜이 쌓인 응어리 사이로 차가운 혐오를 언뜻 내비치곤 했다.
정인의 응어리는 원인을 제공한 대상과 직접적으로 부딪히며 뜨겁게 터지기도 한다. 부녀회장이 집에 찾아왔을 때, 한계에 다다른 정인은 불덩이를 내뿜는다. 정이서는 인위적으로 발산하려 애쓰기보단, 최대한으로 눌러담아 저절로 폭발하도록 유도한다. 이후 정인은, 다시는 그렇게 터져 버리지 않는다. 창수와의 독대에서 다시금 분노를 표출하나, 이번 덩어리는 서릿발 같다. 오래된 가해자를 내려다보며 열 여섯 살에 느꼈던 그대로를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수 년 동안 압축된 무게를 얹어서. 모조리 쏟아내는 대신 저쪽이 알아들을 만큼만, 눈물이 흐르고 몸이 떨려도 무너지지는 않을 정도로. 그것은 상대를 겨냥한 독백, 복수의 마무리였다. 이와 같이 복수의 단계들은 대개 차갑고, 한 치의 어긋남이나 망설임도 없는 움직임은 우아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불안과 공포는 필연적이다. 혜정이 재순을 ‘실종’되게 만든 것이 그러했듯, 정인이 광재에게 독을 먹이고 총을 쏘는 행위는 적극적인 자기방어다. 작품과 정이서는 그역시 놓치지 않았다.
정인처럼 절제의 미학을 체화한 영화, ‘광재의 최후’는 그것을 가장 잘 담고 있는 장면 중 하나다. 정인은 공격적으로 죄다 발산하는 대신, 뿌리깊은 분노와 삶을 되찾으려는 의지를 총 끝에 단단히 드리운다. 광재는 엉망으로 망가지기보단, 그저 늘어져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된다. 정이서와 우지현, 대단한 집중력을 지닌 두 배우가 곤조 있는 연출과 만나 완성한 씬이다. 주연 배우의 무한한 잠재력을 가늠해보(지조차 못하)게 하는 작품- 우지현에게 <더스트맨>이 있다면 정이서에게는 <그녀의 취미생활>이 있다. 정이서는 능히 홀로 극을 이끌며 상대 배우와 화면을 나누거나 포커스를 적절히 넘겨주기도 했다. 거세게 덮쳐오는 파도가 되기도, 고요히 수면 위로 떠올랐다 흩어지는 물결이 되기도 했다.
<그녀의 취미생활>(2023)
싱그럽다. 티없이 활짝 웃는 정인을 보니 그 표현이 절로 적혔다. 비슷하게 씩 웃는데, 선여옥은 징그럽다. 한 번 더 우지현과 나란히 두어 보자. 우지현이 <그녀의 취미생활>을 통해 해냈듯, 정이서는 <살인자ㅇ난감>으로 ‘빌런력’을 증명한다. 빗물과 핏물로 범벅이 된 골목, 원피스를 입고 부드럽게 안내견을 이끄는 선여옥의 목소리는 이질적이다. 그를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 입체적이라기보단 반전을 숨긴 인물, 그의 꿍꿍이가 드러나며 정이서가 보였다. 출연진을 훑어보지 않고 시청한 내게 있어서는, 하상민의 첫등장과 더불어 일종의 서프라이즈적 모먼트였다. 선여옥은 단순히 이기적인 것을 넘어 선악에 무관심하다. 제 욕망에만 충실하며 타인을 도구삼는다. 뻔뻔하고 염치없고 눈치는 있다. 괜찮은 사람인 척할 생각도 없어서, 할 말을 잃게 만든다. 한쪽 입꼬리를 올리는 정이서 특유의 미소는 음흉하게 발현된다. 딜리셔스하고 분명한 말투는 주인공과 시청자의 신경을 긁는 방향으로 던져진다. 문장을 새되고 짧게 끊어 뱉으며 분리된 음절을 효과음처럼 사용하는 정이서. 다른 인물이었다면 매력포인트로 작용했을 디테일은 선여옥과 만나 비호감의 요소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기생충>에서 거리를 두고 화면을 공유했던 최우식과의 재회다. 최근 정이서의 필모그래피에서 ‘피자 사장’을 발견한 후 해당 클립을 검색했고, ‘아!’하고 감탄사를 뱉었다. 그게 당신이었구나. 여러 해가 지난 현재, 밀접한 긴장감을 주고받으며 훌륭한 다이내믹을 형성하는 두 배우를 보니 기분이 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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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쯤 나는 배우로서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나의 이상과 실제 내 그릇의 차이가 크게 느껴져 몹시 불안했다. 그럴 때 <그녀의 취미생활>이 내게 왔다. 정인으로 사는 동안 인식의 전환을 하게 됐다. 이렇게 한 인물에게 집중하다 보면 느릴지언정 조금씩 나갈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이 작품이 정말 소중하다.” - 정이서, [씨네21]
세 해에 걸쳐 있는 네 작품을 다루며 정이서의 일부를 담아보려고 시도했다. 정이서는 천연덕스럽고 능숙하다. 바른 중심 주위로 자잘한 디테일을 자아내, 군더더기 없는 짜임으로 완성한다. 모호하게 머물러야 한다면 그렇게 하며, 그 얼굴에 관객의 시선이 머무르게 한다. 이해력과 표현력이 뛰어난 배우인 그는, 매번 작품의 결을 찾아내 적절하게 녹아들거나 성공적으로 엇갈렸다. 그 개성을 발견했다고 생각했을 때, 그는 정 반대의 모습을 꺼내며 손끝에서 빠져나갔다. 그 잠재력을 엿보았다고 여기자마자, 아직 보지 못한 깊이가 어마어마함을 깨닫게 했다. 흰 원피스와 장총이 각각 또 함께 어울리는 정이서. 그는 마치 정인처럼, 자신의 페이스대로 신중하게, 범상치 않은 걸음을 떼는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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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아줬으면 해서, 알아줬으면 해서.
Call me by your name / 2017
:: BGM
Nick Gunner - Lucid Dreaming (feat. DNAKM)https://soundcloud.com/nickgunnermus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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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날 리뷰 - 아버지 부조금으로 장례식장을 노름판으로 만든 불효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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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전성기는 반드시 온다!
한때는 잘나가던 큰형님 `호성`(손현주).
8년 만에 출소해 보니 남보다 못한 동생 `종성`(박혁권)은 애물단지 취급이고,
결혼을 앞둔 맏딸 `은옥`(박소진)과 오랜만에 만난 아들 `동혁`(정지환)은
`호성`이 부끄럽기만 하다.
아는 인맥 다 끌어 모은 아버지 장례식에서
부조금을 밑천삼아 기상천외한 비즈니스를 계획하며 제2의 전성기를 꿈꾸는데…
그런데…! 하필이면 세력 다툼을 하는 두 조직이 이곳에 함께 있는 것이 아닌가!
때마침 눈치라고는 1도 없는 `호성`의 친구 `양희`(정석용)가
술에 취해 오지랖을 부리는데...
일촉즉발! 수습불가!
과연 X버릇 남 못 준 `호성`에게 봄날이 찾아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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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스토어웨이>
[2021년 4월 22일 넷플릭스 공개]
3인의 승무원을 싣고 화성을 향해 떠난 우주선.
우연히 그곳에 탑승한 불청객 때문에 생명 유지 장치가 심각한 손상을 입는다.
자원은 점점 떨어져 가고, 이제 치명적인 결과만이 기다리고 있다.
힘겨운 선택 앞에, 그들은 어떤 결단을 내려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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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메이의 새빨간 비밀> 메인 예고편
평범한 메이에게는 특별한 비밀이 있다 [인사이드 아웃] [인크레더블] 제작진의 새빨간맛 사춘기! [메이의 새빨간 비밀] 메인 예고편 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