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혁2023-05-22 13:02:41
[집에서 봤던] 아주 NICE
<나이스 가이즈, 2016>
예전에 입에 달고 살던 말은 "재미와 흥행이 꼭 비례하지 않는다"라는 말이다.
흥행을 하더라도 맞지 않는 영화가 있듯이 자신이 꼭 직접 확인해 주길 바라는 마음에 했던 말인데, 이젠 옛말이 되는 느낌이다.
23년 1월에 개봉한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20주가 되었음에도 국내 박스오피스 10위권에 이름을 올리고 있으며, <스즈메의 문단속> 역시, "사전 시사 - 무대인사"까지 합친다면 14주가 지났음에도 거론되고 있다! - 이젠, 재미와 흥행은 비례한다.
영화 <나이스 가이즈>는 국내에서 2만명 남짓한 흥행 성적을 거뒀고, 북미에서도 큰 흥행을 거둔 작품은 아니다.
그럼에도, 평단과 관객의 반응들은 뜨거웠다. - 실제로, 이후 88년과 99년을 배경으로 3부작으로 기획되었으나 무산되었다.
영화는 사설탐정인 "힐리"와 "미치"가 포르노 스타 "미스티"의 죽음을 조사에 기업과 정부가 얽혀있음을 알게 되는데...
※ 넷플릭스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1,평범한 오락 영화로만 봤는데?
1977년을 배경으로 삼은 영화 <나이스 가이즈>는 생각보다 진입 장벽이 높은 작품이다.
'1977년'이라는 미국 당시 사회에 대한 이해가 준비되어야 하는 것도 있지만, "사설탐정"이라는 설정에서 "필름 누아르"라는 영화적 이해도 갖춰야 하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외부적으로 본다면 "청소년 관람불가"라는 연령가에 맞춰 야하고 잔인한 장면들이 나오는 성인 오락 영화로 비칠 수 있지만 그만큼 알면 알수록 재밌는 작품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이스 가이즈>는 몰라도 모르는 대로 재밌게 볼 수 있는 영화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에 크게 어렵지 않아 극과 극의 캐릭터들이 부딪히는 "버디 무비"의 재미를 놓치지 않는다.
무엇보다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라이언 고슬링"이 철저하게 망가지는 연기인데, 그는 어딘가 모자란 역할 "미치"를 맡았다.
극 중. 유리창을 깨다가 손목을 부여잡는다든지 나무에 기대어 담뱃불을 붙이다가 옆의 시체에 소리도 못 지르는 기존의 이미지를 뒤엎는 장면들이 이번에 개봉하는 <바비, 2023>를 기대케한다.
앞서 "라이언 고슬링"만을 언급했지만, "러셀 크로우" 역시 만만치 않는 매력을 선보이며 눈썰미가 좋은 팬들이라면 <LA 컨피덴셜>의 "킴 베이싱어"도 확인할 수 있다. - <스파이더맨>시리즈의 "앵거리 라이스"도 나온다!
이런 기라성과 같은 라인업을 갖추고도 평범한 팝콘 무비로 그친 건 아쉬운 점을 지울 수가 없다.
그럼에도, 재미가 보장된 것만으로도 '아주 NICE' 아닐까?
· tmi. 1 - 1977년 본편을 시작으로 1988년과 99년을 배경으로 3부작으로 기획되었으나 앞서 말한 흥행으로 무산되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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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월 두번째 주 극장 개봉 & 예정작 ?
안녕하세요!
영화/OTT 콘텐츠 큐레이션 웹 매거진 '씨네랩'입니다.
압도적인 스케일을 자랑하는 DC의 <플래시> 부터
현재 가장 기대되는 일본의 영화감독 미야케 쇼의 <너의 눈을 들여다 보면> 까지!
다채로운 이번주 개봉∙공개작들, 지금 바로 만나보시죠!
플래시
The Flash
©워너브라더스
개요: 액션 | 미국 | 144분
감독: 안드레스 무시에티
출연: 에즈라밀러, 마이클키튼, 사샤카에, 마이클 섀넌, 벤 에플렉
개봉: 2023.06.14
배급: 워너브라더스
시놉시스
시공간이 붕괴된 세계, 차원이 다른 히어로가 온다! 빛보다 빠른 스피드, 물체 투과, 전기 방출, 자체 회복, 천재적인 두뇌까지 갓벽한 능력을 자랑하지만 존재감은 제로, 저스티스 리그에서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히어로 ‘플래시’. 어느 날 자신에게 빛보다 빠른 속도로 달리면 시공간 이동 능력이 있음을 알게 된 그는 ‘브루스 웨인’의 만류를 무시한 채 끔찍한 상처로 얼룩진 과거를 바꾸기 위해 시간을 역행한다.
CINE PICK!
빛보다 빠른 히어로 ‘플래시’부터 원조 ‘배트맨’, 뉴페이스 ‘슈퍼걸’, 최강 빌런 ‘조드 장군’ 등 영화 팬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DC의 캐릭터들이 <플래시>에 대거 등장해 이목을 집중시킨다.
<플래시>는 스크린을 꽉 채우는 압도적 스케일과 스펙터클한 볼거리로 초광속 액션블록버스터의 탄생을 예고한다.
엘리멘탈
ElementalTransformers: Rise of the Beasts Little Mermaid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개요: 애니메이션 | 미국 | 109분
감독: 피터손
출연: 레아루이스, 마무두 아티
개봉: 2023.06.14
배급: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시놉시스
불, 물, 공기, 흙 4개의 원소들이 살고 있는 ‘엘리멘트 시티’ 재치 있고 불처럼 열정 넘치는 ‘앰버'는 어느 날 우연히 유쾌하고 감성적이며 물 흐르듯 사는 '웨이드'를 만나 특별한 우정을 쌓으며, 지금껏 믿어온 모든 것들이 흔들리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는데... 웰컴 투 ‘엘리멘트 시티’!
CINE PICK!
놀라운 상상력과 완성도 높은 비주얼, 독창적인 세계관으로 전 세계 팬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는 디즈니•픽사가 <업>, <인사이드 아웃>, <소울>을 이을 또 한편의 인생 영화 <엘리멘탈>을 선보인다.
너의 눈을 들여다 보면
Small, Slow, But SteadyThe Flash
ⓒ디오시네마
개요: 액션 | 일본 | 100분
감독: 미야케 쇼
출연: 키시이 유키노, 미우라 토모카즈
공개: 2023.06.14
배급: (주)디오시네마
시놉시스
선천적 청각장애로 양쪽 귀가 들리지 않는 프로 복서 케이코. 재개발이 진행되고 있는 도쿄 도심의 작은 복싱 체육관에서 훈련을 거듭하며 다음 시합을 준비한다. 끊이지 않는 고민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생각들이 마음에 쌓여만 가고, 체육관 회장에게 당분간 쉬고 싶다는 편지를 썼지만 끝내 보낼 수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케이코는 체육관이 문을 닫는다는 소식을 듣는다.
CINE PICK!
현재 활약이 가장 기대되는 일본의 영화감독 중 한 명인 미야케 쇼의 최신작이다. 오로지 복싱에만 도전하는 한 여성의 모습을 작은 마을의 체육관 회장과 의 관계성과 교차시켜 그려낸 이 작품은 다양한 영화적 장치로 가득 차 있다.
나의 사소한 슬픔
All My Punny Sorrows
ⓒ스튜디오 에이드
개요: 드라마 | 캐나다
감독: 마이클 맥고완
출연: 알리슨 필, 사라 가돈, 메어 위닝 햄
공개: 2023.06.14
배급: 스튜디오 에이드
시놉시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아빠에 이어 언니마저 잃을 수 없다며 어떻게든 언니를 살리려는 욜리. 그러나 내적으론 언니를 이해하려고 한다. 언니를 위해 스위스행도 고민한다.
CINE PICK!
죽고 싶어하는 언니와 살리고 싶어하는 동생의 이야기를 다룬 ‘나의 사소한 슬픔’은 리암 토우스의 2014년 베스트셀러 소설을 토대로 한 영화다. 영화는 캐나다 영화상 최우수 각본상, 최우수 여우주연상, 여우조연상, 밴쿠버 영화비평가협회 최고의 캐나다 영화상 등을 수상했다.
블랙워터 : 어비스
Black Water: Abyss
ⓒ(주)원더스튜디오
개요: 액션, 공포 | 오스트레일리아 | 98분
감독: 앤드류 트라우키
출연: 제시카 맥나미,루크미첼,아말리골든
개봉: 2023.06.14
배급: (주)원더스튜디오
시놉시스
호주의 깊은 숲 속, 외딴 동굴 탐험에 나선 제니퍼와 에릭, 그리고 친구들은 폭풍우로 인해 불어난 물로 동굴에 갇히게 된다. 제한된 식량과 시간 속에서 탈출구를 찾던 그들에게 불길한 그림자가 서서히 드리우는데... 미로처럼 뻗어 나가는 동굴 속 그들은 과연 살아서 동굴을 탈출할 수 있을까?
CINE PICK!
컬트 클래식 ‘블랙 워터’ 이후 16년 만에 속편으로 돌아온 ‘블랙 워터: 어비스’는 호주의 외딴 동굴 탐험 중 조난 당한 5명의 친구가 식인 악어에 맞서 살아남기 위한 사투를 벌이는 서스펜스 스릴러다.
‘블랙 워터: 어비스’는 앤드류 트라우키 감독이 전편에 이어 또 메가폰을 잡고 ‘47미터’ 제작진이 참여해 스릴과 공포를 선사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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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연적인 갈등’을 존엄한 것으로 만들려면
8★/10★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923년 아일랜드의 한적한 섬마을 이니셰린*. 파우릭과 콜름은 온 마을 사람이 다 아는 절친한 친구 사이다. 그들은 오랫동안 매일 같은 시간에 펍으로 향해 밤늦도록 대화를 나눠왔다. 둘이 함께하지 않으면 마을 사람들이 자연스레 다른 사람은 어디 갔느냐고 묻을 정도다. 어느 날과 다름없는 평범한 오후였던 그날처럼 말이다.
파우릭은 조금 당황한 상태다. 콜름과 함께 펍에 가기 위해 그의 집을 방문했는데, 콜름은 그를 철저히 무시한 채 아는 척도 하지 않는다. 조금 의아하고 걱정스럽지만 파우릭은 우선 홀로 펍에 간다. 콜름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거라면, 그가 곧 올라와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리라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콜름은 파우릭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는다. 파우릭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사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하고, 파우릭은 혹시 자신이 콜름에게 실수한 일이 없는지 곱씹어본다. 술에 취해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봐 주변 사람에게도 이유를 묻는다. 하지만 둘 사이가 지금까지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제는 콜름에게 직접 이유를 물어야만 한다.
“그냥 이제 자네가 싫어졌어.” 황당한 대답이 돌아온다. 그토록 오랜 시간을 가장 절친한 친구로 지냈는데, 별다른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그저 싫어졌다는 이유로 자신을 이토록 모질게 대하는 콜름을 파우릭은 이해하지 못한다. 이대로 물러 설 순 없다. 최소한 제대로 된 이유라도 알아야 수긍하든 싸우든 할 게 아닌가? 파우릭이 계속 캐묻자 콜름이 답한다. 콜름은 지금껏 파우릭과 나눈 대화가 지독히 지루하고 무의미했다고, 그 멍청한 대화에 질려버렸다고, 이것이 너와의 관계를 단절하는 이유라고 선언한다. 기껏해야 10여 년을 더 살 텐데, 남은 생을 그토록 하찮은 일에 쓸 수는 없다는 것이다. 대신 사색과 작곡에 몰두하며 지금까지의 ‘낭비’를 보상받겠다고도 덧붙인다.
파우릭은 큰 혼란에 빠진다. 그는 자타공인 마을에서 가장 ‘착한’** 사람이다. 아무도 이를 부정하지 않는다. 파우릭은 여기에 어느 정도 자긍심을 갖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콜름의 충격적인 선언은 지금껏 파우릭의 삶을 지탱해온 가치를 송두리째 뒤흔든다. ‘착함’이 ‘멍청함’의 다른 이름에 불과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때문에 ‘착한’ 네가 참으라는 가족과 마을 사람들의 위로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파우릭의 혼란을 더욱 부추길 뿐이다.
그러나 파우릭은 콜름과의 우정을 이대로 포기할 수 없다. 어쨌든 그들은 지금껏 (늘 그랬던 것은 아니더라도) 즐거운 시간을 보내왔다. 설령 지금까지의 우정에 불만이 있다면 둘 모두가 만족할 만한 새로운 방식으로 우정을 쌓아가면 된다. 그래서 여러 방식을 동원해 콜름의 마음을 돌리고자 한다. 그러나 콜름의 결단은 파우릭의 상상 이상으로 단단하다. 콜름은 결연한 표정으로 파우릭이 자신을 귀찮게 할 때마다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겠다고 말한다. 허울 좋은 협박이 아니다. 그는 실제로 자기 손가락을 잘라 파우릭 집 앞에 던져 놓는다.
파우릭의 혼란은 점점 더 커져만 간다. 늘 그의 곁을 지키던 여동생 시오반이 본토에서 도서관 사서 자리를 제안받아 마을을 떠나고***, 상심한 파우릭을 달래주던 소년은 실족사(혹은 학대하는 아버지를 피해 자살)하며, 파우릭이 사랑하는 당나귀 제니마저 콜름이 던져 놓은 손가락을 먹다가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소중한 모든 것을 잃은 파우릭은 ‘각성’한다. 자신의 ‘착함’을 버리고 콜름에게 그가 치러 마땅한 대가를 돌려주고자 결심하는 것이다.
영화의 종반부는 초지일관 단호한 콜름과 그를 향한 서슬 퍼른 복수심에 불타는 파우릭의 대결로 치닫는다. 콜름과 파우릭의 대치는 두 개인의 갈등인 동시에 내전 중이던 아일랜드의 은유이기도 하다. 당시 아일랜드는 영국의 자치권 부여 제안을 두고 급진파와 온건파가 나뉘어 전쟁 중이었다. 즉 급진파와 온건파는 어떤 것이 진정 아일랜드를 위한 길인지를 두고 다투었다. 섬마을인 이니셰린은 상대적으로 내전에 큰 영향을 받지는 않는다. 하지만 파우릭과 콜름의 갈등과 본토에서 울리는 포성이 교차하며 등장하는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듯, 두 사건은 완전히 떨어져 있지 않다. 본토의 내전이 무엇이 아일랜드를 위한 정답인지를 두고 벌이는 싸움이라면, 파우릭과 콜름의 갈등은 무엇이 좋은 삶‧우정인지를 묻는 두 개인의 치열한 고민의 결과다.
파우릭과 콜름의 갈등(그리고 무엇이 나라‧공동체를 위한 길인지에 관한 다툼)은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모든 존재가 필연적으로 마주하는 일이다. 〈이니셰린의 밴시〉는 이 일상적인 문제를 충격적이면서도 탄탄한 알레고리로 쌓아 올린다. 그러나 영화는 마냥 비관하지만은 않는다. 파우릭과 콜름은 갈등이 극에 달하는 순간에도 분명 서로를 존중한다. 콜름은 파우릭을 무시하는 경찰을 때려눕히고, 파우릭은 극단적인 복수의 순간에도 콜름의 반려견을 배려한다(심지어 콜름은 파우릭의 복수가 ‘마땅하다’고 여겨 이를 순순히 수용한다). 그러는 동안 본토의 포성도 조금은 잦아든다.
때문에 〈이니셰린의 밴시〉의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관계든 국가‧공동체 간이든 갈등이 필연적이라면, 우리는 그 갈등을 존엄한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친구와 우정을 끊고 싶어도, 그가 존엄한 존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방법론에 차이가 있더라도, 급진파와 온건파는 모두 아일랜드를 사랑한다. 이를 분명히 한다면 우리는 절대적 고독과 압도적 혼란 속에서도 살아가기를 멈추지 않을 수 있다. 극단적 파괴와 복수를 다루는 영화 〈이니셰린의 밴시〉가 묘한 희망을 풍기는 건 이 때문이다.
*‘이니셰린’은 ‘아일랜드의 섬’이란 뜻으로 허구의 지명이다.
**원어는 ‘nice’다. 영화 자막은 이를 ‘다정함’으로 번역했지만 ‘착함’으로 해석하는 게 더 자연스러울 듯싶다.
***책을 많이 읽어 똑똑한 시오반은 파우릭이 지루하다고 생각하는 콜름과 마찬가지로 식자층이다. 하지만 그녀는 마을에서 콜름처럼 대우받지 못한다. 오히려 결혼하지 않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모욕당한다. 시오반은 콜름처럼 파우릭을 버리는 대신 오빠의 장점을 북돋아주기도 한다. 영화의 메시지와 인물 간 갈등과는 별개로, 콜름과 시오반을 각각 젠더화된 지식인의 표상으로 독해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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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억을 되새기고 현재로 나아가는 탑건 그리고 매버릭.
영화표 값이 많이 오른 터라 영화관에 가는 것이 망설여지는 요즘, 티켓값을 충분히 할 수 있는 영화를 보려고 하다 보니 내가 끌렸던 것을 다 보기엔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재미있게 보았거나 나의 예상 별점이 높은 것을 위주로 하게 되는 ‘신중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지만, 끊임없이 쏟아지는 호평에 영화관에서 <탑건: 매버릭>을 보기로 했다. 망설여 왔던 것이 무색하게 <탑건: 매버릭>은 극장에서 보지 않으면 후회될 정도의 굉장한 액션 블록버스터 영화였다. 이야기와 액션을 잘 버무려 추억이 가득한 영화를 만들어 내다니, 정말 놀라웠다. 12세 관람가임에도 유치하지 않고 매번 주인공 버프를 받으며 성공하는 장면이 나옴에도 재미가 있는 영화는 정말 오랜만이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을 경험하지 못했음에도 향수를 일으키며 26년 만에 찾아온 이 영화가 인기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곳곳에 담겨 있었다.
기계가 사람을 대체하는 시대에서 굳건히 서 있는 사람, 매버릭은 과거의 영광과 현재 영광의 중심에 있지만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매버릭은 언제나 그 모습으로 남아있고 싶었던 것인지 홀로 그 자리에 남아 26년 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영화 안에서 관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젠 놓아줄 때야.”라는 말이 들려오기 전까지 그는 비행기 안에 자신의 과거를 끊임없이 담고 있었다. 시간은 계속해서 흐르고 주변도 변하지만 늘 그 자리에 있고픈 그에게 찾아온 현재라는 이름은 잔인하기만 했다. 철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여전히 최고의 실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조직 생활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 괜스레 응원하게 된다. 진심으로 비행하는 것을 사랑하는 마음이 화면 밖으로도 새어 나와 내 마음을 욱하고 건드리기 때문이다. 주변의 시선과 분위기로 인해 말하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던 수많은 꿈이 소리 내 외치는 것 같다. 비행을 사랑하는 마음은 ‘무사 귀환’이라는 말을 통해 더 짙어진다. 잊을 수 없는 동료 ‘구스’라는 이름이 그의 마음에 깊게 새겨져 쉬이 떠나보내지 못한 마음이 ‘루스터’의 이름으로 덧씌워지며 믿음과 변화가 동시에 찾아온다. 그가 다져온 과거와 현재의 변화를 더한 성숙함으로 매버릭을 장식한다. 그가 방치한 자신도, 사랑도, 사람도 이제는 모두 끌어안을 수 있게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그의 귀환을 모두가 환영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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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드러운 거부로서의 애도,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
2015년 퓰리처 희곡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른 『Marjorie Prime』은 유족의 기억을 통해 망자의 정체성을 재현하는 인공지능 홀로그램, ‘프라임’을 중심으로 디지털 시대 죽음과 애도의 의미를 날카롭게 질문하는 작품이다. 동명의 희곡을 각색한 영화,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 Marjorie Prime> 또한 기억이라는 삶의 요소가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과 맞물려 다양한 애도의 방식으로 분화되는지 다룬다.
그러나 '디지털 부활'은 더이상 픽션의 영역이 아니다. 2016년, 러시아 기자였던 Eugenia Kuyda는 사랑하던 연인을 잃고 그와 나눈 메시지를 모두 모아 구글 기반의 신경 네트워크(neural network)를 활용하여 그를 챗봇으로 부활시켰다. 챗봇 버전의 연인은 정말 사람 같아서 Kuyda는 챗봇과 과거와 미래에 관한 얘기를 나누며 연인을 잃은 슬픔을 해소했고, 더 나아가 모든 사람이 쓸 수 있는 대화형 챗봇, ‘Replika’를 만들었다. 한국에서도 2020년부터 매년 사망한 가족을 딥페이크, VR, 인공지능 등의 기술을 활용하여 ‘부활’시키는 <VR휴먼다큐멘터리-너를 만났다> 프로그램이 방영되었다. 2025년 현재, 구글 플레이 스토어 기준 ‘Replika’의 다운로드 수는 천만 회를 넘어섰고, <너를 만났다> 프로그램 시즌 1 유튜브 클립 영상 조회 수는 3천 6백만 회를 기록하는 등, 디지털 부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인공지능을 활용하여 망자를 시청각적으로 재현하는 '디지털 부활'이 점점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고인이 된 이후에도 사랑하는 사람과 닿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디지털 기술을 통한 부활을 가속화하고 있다. 조형래는 “망자를 기리는 첨단의 기술적 방식이 막대한 규모의 사회적 정동의 재구성을 초래하고, 죽음에 대한 사회적 태도 및 문화적 관행 전반에 영향을 초래할 것임이 분명”하다면서, “이러한 초혼(招魂)의 테크놀로지가 프로이트적 의미의 애도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더 나아가 유족들에게 끊임없는 추모의 고통을 유발”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반면 디지털 시대 죽음의 의미를 연구하는 심리학자인 일레인 카스켓은 디지털 기술을 통한 애도가 지속적 결속(continuing bonds)의 한 종류라고 주장하면서, 고인과 유대 관계를 끊지 못하는 이들을 우울증 환자로 취급하는 경향을 문제시한다. 카스켓에 따르면, 고인과 유대 관계를 유지하려는 사람들은 사랑하던 고인과 맺은 심리적, 정서적 유대를 소중히 하거나 심지어 더 강화하고자 하는 오래된 충동에 따르는 것뿐이다.
영화는 마조리가 월터 프라임, 그러니까 15년 전 사망한 자신의 남편을 홀로그램으로 재현한 인공지능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월터 프라임은 자신이 청혼하던 날 함께 봤던 영화,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 얘기를 꺼내고, 치매에 걸린 마조리는 이를 기억하지 못한다. 중요한 기억을 잊어버린 자신을 원망하던 마조리는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 대신 “<카사 블랑카>를 보고 돌아온 날 청혼했다면?”이라고 묻고, “다음에 우리가 (청혼) 얘기를 나눌 때는 이게 사실이 되는 거야.”라고 말한다. 어차피 거짓된 기억을 말해도 치매로 인해 사실 여부를 제대로 판단할 수 없는 마조리는 이후로도 종종 월터 프라임에게 왜곡된 기억을 요청함으로써 망상적 위안을 얻는다.
생의 끝자락, 기억을 왜곡해서라도 숨기고 싶은 과거는 월터 프라임이 예전에 키우던 강아 지인 토니 얘기를 꺼내면서 분명해진다. 월터 프라임은 마조리에게 ‘자식이 없던 한 연인이 토니라는 이름의 검은색 푸들을 키웠는데, 토니가 죽고 나서 낳은 딸-테스-도 검은색 푸들을 골랐다’라는 이야기를 해준다. 마조리가 두 번째 푸들에게 ‘토니 2세’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설명하자, 월터 프라임은 두 번째 푸들도 금방 ‘토니’라고 불렸다며, 두 강아지가 완전히 똑같지는 않았음에도 나중에는 토니와 토니 2세를 구분하는 의미가 없어졌다고 말한다. 여기서 토니는 -2막에서 등장하는 앵무새와 마찬가지로-망자와 망자를 재현한 프라임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첫 번째 토니를 죽이고 자살한 마조리의 아들, 데미안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월터 프라임이 토니의 죽음을 설명할 때 마조리가 흘리는 눈물은, 키우던 강아지에 대한 그리움이라기보다는 아들의 자살이라는 트라우마를 대면한 자의 눈물로 해석할 수 있다.
프로이트는 「애도(슬픔)와 우울 Trauer und Melancholie」에서 애도를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에 대한 반응”으로 규정하고, 여기에는 “사랑하던 사람을 대신할 새로운 사랑의 대상을 찾지 못하는 것, 그리고 사랑하던 이를 생각나게 하는 어떤 행동도 금하는 것, 등이 포함된다”라고 설명한다. 달리 말해, 상실을 경험한 사람은 ‘자아의 억제’를 통해 상실 그 자체 외에 다른 곳에는 관심을 둘 수 없는 상태가 된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슬픔(애도)이 “사랑하던 대상이 더는 존재하지 않음을 인식하고 그 대상에 부과되었던 리비도를 철회”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반발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러한 반발이 너무 강하게 되면 상실을 경험한 사람이 아예 “현실에 등을 돌리는 일이 일어나게 되고, 환각적인 소원 성취의 정신병을 매개로 예전의 그 대상에 집착”하게 된다. 프로이트는 이렇듯 정상적 애도에 실패한다면 상실이 자아를 잠식하고 이것이 자기 혐오적 우울증으로 이어진다고 설명하지만, 대상의 상실이 극단적인 트라우마인 마조리의 경우, 자기 혐오적 우울보다는 오히려 그 대상을 무의식적으로 격리하려는 억압(repression)에 가까운 행동을 보인다.
“정신적 트라우마 현상의 핵심은 기억(표상)과 정동”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트라우마를 유발한 사건에 대한 강한 정동적 반응이 있었는지다. 달리 말해, 외상적 사건이 유발한 정동을 언어, 또는 행동으로 수행하지 않으면 정동의 잔여가 정신적 트라우마를 유발하는 것이다. 따라서 히스테리 환자들은 주로 트라우마적 사건의 상기(회고)로 인해 고통을 겪는다. 데미안의 죽음이 마조리에게 트라우마를 유발한다면, 이는 데미안에 대한 애도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데미안이 사랑했고, 데미안이 죽인 토니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마조리는 강한 정동을 경험한다. 이러한 반복적인 표상(기억)의 회고는 마조리에게 고통을 줄 뿐이다. 그래서 마조리는 데미안을 충분히 애도하는 대신, 데미안의 죽음이라는 표상의 억압을 택한다.
마조리는 지난 50년 동안 데미안의 이름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고, 그와 관련된 모든 사진을 집에서 치운 채 살아왔다. 하지만 치매에 걸린 마조리는 데미안이 죽었다는 사실을 잊고 테스에게 “데미안은 지금 자?”라고 묻는다. 마조리가 치매를 앓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아무렇지도 않게 데미안의 행방을 물은 직후 월터와 공원 벤치에 앉아 사프란 색의 깃발을 바라보던 기억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마조리의 모습은 모순적이다. “(벤치에서) 일어나기 싫었어. 남은 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으니까”라는 마조리의 대사는 데미안의 죽음 이후에도 삶을 이어나가야 하는 마조리의 처참한 심정을 대변한다. 이것은 데미안의 죽음이라는 표상 (기억)이 사라진 이후에도 지속되는 정동의 잔여를 의미한다.
존은 마조리가 해준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월터 프라임에게 마조리가 사프란 깃발을 바라봤던 날의 추억을 전해주지만, 영화는 플래시백 장면을 통해 마조리가 사실 공원 벤치가 아닌, 거실 소파에 앉아 TV에 나온 장면을 봤던 것임을 밝힌다. 테스의 주장처럼, 마조리는 “원래의 모습이 아니라 마지막 기억을 기억하는 것이며” 따라서 기억은 “되풀이될수록 희미해지는 복사본”과 같은 것이 된다. 결국 프라임에게 주입되는 기억은 “실제 기억이라기보다는 마조리가 기억하거나, 기억하고 싶은 과거”이다. 이렇듯 마조리와 월터 프라임을 통해 재구성되는 기억은 특정 시선에 의해 오염된 기억이며, 따라서 데미안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을 방해한다.마조리에게 데미안의 죽음은 너무도 고통스러운 기억이기 때문에 마조리는 본능적으로 이를 억압하려 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억압이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 확연한 간극이 생길 때 발생”한다며, “억압의 본질은 자아를 위협하는 본능(충동)을 의식으로 진입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억압의 동기와 목적은 본능이 만들어낸 “불쾌를 피하는 것”이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트라우마가 해소되기 위해선 “억압의 극복과정을 통한 기억의 회복”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아들의 자살이라는 트라우마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치매에 걸린 마조리는 월터 프라임의 외형을 아들이 자살하기 전인 젊은 시절로 설정하면서 아들 죽음 이전의 과거로 회귀하고자 하는 충동을 보인다. 아들을 충분히 애도하지 못하고 오히려 아들의 죽음을 잊고자 하는 마조리의 태도는 현실 도피적 성향을 띤다는 점에서 월터 프라임이 제공하는 망상적 위안을 통해 유지된다.
월터 프라임을 비교적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마조리조차도 망자와 망자를 재현한 인공지능 사이의 간극이 촉발하는 ‘두려운 낯섦’을 겪는다. 두려운 낯섦은 “공포감(또는 기이한 불안)의 일종으로,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오래전부터 친숙했던 것에서 출발하는 감정”이다. 이정환은 프로이트가 말한 ‘두려운 낯섦’이라는 개념이 로봇 공학과 관련된 논의에서 흔히 들을수 있는 “불쾌한 골짜기”와 연관이 있다고 설명한다. 두려운 낯섦에 대한 프로이트의 주장 처럼, 불쾌한 골짜기에 대한 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비인간에 대한 인간의 무의식적 두려움”이 명백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프라임이라는 ‘기술’에 호의적이든, 그렇지 않든,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신이 사랑 하는 사람을 재현한 프라임과 마주했을 때, 프라임이 자신이 생각했던 망상적 위안을 충분히 제공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왜곡된 기억을 그대로 흡수하고, 젊었을 적 외형이 데미안의 죽음 이전을 상기하는 월터 프라임을 통해 데미안의 죽음이라는 트라우마적 사건을 억압 하는 마조리조차도, 월터 프라임이 월터 그 자체가 아니라는 사실에 불쾌감을 느낀다. 자신이 생각한 실재의 이미지를 프라임이 충분히 재현하지 못할 때, 프라임은 망자의 말을 의미 없이 반복하는 앵무새에 불과한 존재가 된다.
이정환은 대상의 기억을 주입하면, 프라임을 통해 그 사람의 존재가 영원히 지속될 수 있지 만, 이 기억은 살아 있는 자의 욕망이 투영되어 있다는 점에서 실재 망자와는 다른 결핍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생전에 사랑했던, 친숙한 망자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망자와는 다른 프라임의 모습은 유령과도 같은 두려운 낯섦을 유발한다. 허구의 작품뿐만 아니라 현실속 디지털 부활 또한 두려운 낯섦을 유발하는 건 매한가지다. 조형래는 디지털 기술을 통한 망자의 재현은 늘 “고인에 대한 추모와 의미 부여를 둘러싼 다양한 상호작용을 거스르는 미묘한 위화감을 수반한다”라고 설명한다. 이렇듯 작품 안팎에 무관하게, 기술적 한계는 감각적인 측면에서도, 인지적인 측면에서도 대상을 완벽히 재현해낼 수 없다는 점에서 늘 기이한 불안, 두려운 낯섦, 즉 불쾌감을 유발한다.
테스에게도 데미안의 죽음은 평생의 트라우마이다. 마조리는 평생 데미안의 이름 한 번 꺼낸 적 없지만, 테스는 늘 데미안의 죽음으로 인해 마조리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정신적 외상은 테스의 자아에도 영향을 미쳐 영화 내내 테스는 “예민하고 성마른 성격의 소유자이자, 매사에 부정적인” 사람으로 묘사된다. 테스는 월터 프라임에게 질투를 느낄 정도로 프라임에 대해 부정적이지만, 결국 마조리가 사망하자 치유의 도구로서 마조리 프라임을 소환한다.
마조리 프라임은 테스에게 ‘토니 데리고 해변에 갔던 거 기억하니?’라고 묻는다. 테스는 기억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존이 개를 키우자고 제안했다면서, ‘카타훌라’를 고려하고 있다고 말한다. 생전 마조리는 ‘카타훌라’가 무엇인지 몰랐으므로, 마조리 프라임 또한 테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그러자 테스는 마조리에게 “‘카타훌라’를 검색해 보라”고 요청한다. 이는 프라임이 진정한 ‘대상’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의 환상이 필수적임을 의미한다. 달리 말해, 이것은 프라임의 ‘이용자’가 프라임이 환상에 불과함을 인지하고 있는 한, 프라임과의 대화가 어떠한 치유 효과도 산출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프라임이 환상에 불과하다면, 프라임과의 모든 상호작용 또한 결국 허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마조리 프라임은 테스의 요청에 따라 카타훌라 하운드의 사전적 지식을 로봇처럼 읊고, 테스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며 ‘(마조리 프라임이 이미지에 불과하다는 사실, 즉 진짜 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 모른 척을 더는 못하겠다’라고 말한다. 테스는 이어 ‘(마조리 프라임이) 정말 엄마 같다가도, 어떨 때는 (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이) 너무도 확연하다’라고 말한다. 이미 지와 실재의 간극은 이렇듯 과거가 아닌 현재의 기억으로 인해 명확해지며, 테스로 하여금 ‘엄마처럼 친숙하지만, 엄마가 아닌’ 두려운 낯섦을 느끼게 한다. 이어지는 장면은 이 두려운 낯섦으로 인해 프라임이 어떻게 치유의 실패로 이어지는지 묘사한다.
표면적으로 테스는 엄마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했다는 콤플렉스를 갖고 있지만, 그의 근원적인 트라우마는 마조리와 마찬가지로 데미안의 죽음이 원인이다. 마조리 프라임은 ‘진짜 엄마 같지 않다는’ 테스의 불만에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더 해달라고 말하고, 이는 자연스럽게 테스가 엄마의 기억을 회고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마조리 프라임은 테스에게 결정적인 질문을 던진다. 마조리 프라임이 ‘테스 말고 다른 자식이 있었냐’고 묻자, 테스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없었다’라고 대답한다. 생전 마조리가 평생 데미안을 언급하지 않았던 것처럼, 테스 또한 데미안에 대한 기억을 숨기면서 자신의 트라우마를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반드시 생생한 정동적 경험을 포함하여, 망각된 외상적 사건을 기억해 정확히 말로 표현”할 때야 비로소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트라우마의 심리적 치유를 위해선 단순한 외상적 사건의 재현을 넘어선 생생한 재경험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프라임은 얼마든지 남아있는 자들에 의해 왜곡된 기억만을 선별적으로 저장할수 있으므로, 치유의 ‘도구’로서 프라임은 제 기능을 다 할 수 없다. 기억의 선별과 왜곡된 기억이 유발하는 이미지와 실재의 간극, 즉 두려운 낯섦은 심리적 치유를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라깡은 “욕망의 중심에 놓여있는 결여”를 ‘'대상 a'’라고 지칭하면서, 상상계적 질서 속에서 이 대상은 어떤 욕구도 충족시키지 못한다고 설명한다. 테스는 마조리 프라임을 형성하기 이전부터 자신이 원하는 어떤 환상을 프라임에게 투사한다. 이 환상은 데미안의 죽음을 기억하지 못하는, 그래서 자신에게 늘 다정하고 충분한 사랑을 주는 엄마이다. 그러나 마조리 프라임이 정말 테스에게 인자하게 미소 지으며 다정한 말을 건네자, 테스는 ‘덜 웃어야 엄마 같아 보인다’라고 충고한다. 테스의 '대상 a'-엄마의 사랑이라는 욕망의 결여-를 충족하기 위해서 마조리 프라임은 테스에게 생전에 주지 못했던 사랑과 다정함을 주어야 하지만, 동시에 사랑을 주면 줄수록 ‘진짜’ 마조리와는 멀어진다는 점에서 테스의 환상은 결코 충족될 수 없다.
애증의 대상이자 환상 속 '대상 a'인 엄마의 상실은 테스를 우울로 이끈다. 프로이트는 우울과 슬픔의 차이를 ‘자애심의 추락’으로 설명한다. “우울증 환자는 대상과 관련된 상실감으로 고통을 겪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말을 들으면 그것이 자아와 관련된 상실감이라는 것이다.” 테스는 계속해서 마조리와 존의 입을 빌려 자기 자신을 ‘무너졌다’거나, ‘엄마를 사랑하게 만들 수 없었다’고 표현한다. 마조리에게 향해 있던 애증의 리비도가 마조리의 죽음 이후 갈 곳을 잃고 테스의 자아를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눈치라도 챈 듯 마조리 프라임은 테스에게 ‘자기 자신에게 너무 가혹하게 굴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나 마조리 프라임과 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애도의 실패-우울증은 결국 테스를 자살이라는 파괴 충동으로 이끈다.
프로이트가 정상적인 애도, 달리 말해 상실을 극복하고 애도를 마무리하는 ‘작업’을 중시했던 까닭은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이 자아를 좀먹고 파괴 충동으로 이끄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데리다는 정상적인 애도와 비정상적 애도를 구분하는 프로이트의 애도 이론을 비판하면서, 죽음이 타자를 잊는 여정의 시작이 아니라, 타자를 기억하는 여정의 시작이라고 주장한다. “데리다가 보기에 프로이트의 정상적인 애도가 갖는 문제는 타자의 타자성을 말살하려 한다는 데 있다. 성공적인 애도 작업을 통해 내면화가 가능해지면, 타자는 나의 일부가 되는데, 그렇게 되면 타자는 더는 타자가 아닌 것이 되기 때문이다.”
마조리에 대한 테스의 정동-상실감으로 인한 우울, 사랑, 증오-은 너무 강력해서 테스는 자신의 편협한 시선에서 기억하는 마조리의 모습-약간 허영심이 있고, 까칠하며, 자신에게 한번도 사랑한다고 해준 적이 없을 만큼 데미안을 사랑한-만을 회고한다. 마조리 프라임은 이렇듯 테스의 내면화된 타자를 온전히 재현할 수 없다는 점에서 테스에게 두려운 낯섦을 유발하고, 프로이트식의 ‘정상적인 애도’를 완수할 수 없게 만든다. 그러나 애도의 실패가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애도는 “가능성과 불가능성, 성공과 실패의 반복적 진동 속에서 수행 적으로 이루어지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테스의 자살 이후, 존 또한 테스 프라임 앞에서 두려운 낯섦을 느낀다. 평소에도 프라임에 호의적이었던 존은 테스 프라임을 더 진짜 테스처럼 만들기 위해 적어두었던 테스의 특징들을 테스 프라임에게 읊어준다. 하지만 존 또한 이내 ‘(프라임은) 반사판 (Backboard)에 불과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나는 지금) 혼잣말을 하고 있다’라고 말하며, 테스 프라임과의 대화에 회의를 느낀다. 그러나 데리다에 따르면, 이러한 ‘좌절된 내면화’는 “타자를 타자로서 존중하는 것, 즉 부드러운 거부의 자세”를 의미한다. 프라임에게 아무리 왜곡된 기억을 주입한다고 해도, 프라임이 환상 속 ‘대상 a’를 완벽하게 충족하는 것은 아니다. 남아있는 자는 필연적으로 이미지와 재현의 간극으로 인한 두려운 낯섦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려운 낯섦이 초래하는 애도의 실패는 동시에 ‘타자를 타자로서 받아들이는’ 애도의 시작이 된다.
데리다는 “기억을 통한 내면화”가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자아를 잠식하는 멜랑콜리아를 긍정하는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멜랑콜리아는 타자를 버려두고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일종의 나르시시즘적 퇴행 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데리다는 “애도의 가능성과 불가 능성이 만나는 지점, 애도의 성공과 실패가 같아지는 지점, 애도와 멜랑콜리아가 중첩되는 공간”에 주목한다. 즉, “애도는 타인의 세계가 끝날 때, 타인을 위해 그 끝을 내 안에 담는 것이며, 동시에 관념화, 내면화, 그리고 식민화에 저항”해야 한다. “타자를 관념화하는 내사 (introjection)가 망각의 시작 지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멜랑콜리아는 극복해야 할 질병이 아닌, 내사에 저항하는 힘이 된다.
존이 테스 프라임에게 느끼는 두려운 낯섦은 이러한 멜랑콜리아를, 자기혐오의 감정을 유발한다. 그러나 이 두려운 낯섦이야말로 테스 프라임을 ‘존의’ 테스로 만들려는 시도를 무화하고, “살아남은 자인 존에게 허락된 삶 자체”를 끊임없이 인식하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존의 삶 속에 공거(cohabitation)하는 테스 프라임은 “우리 안에 사는 ‘목격자’”이다. 존은 마조리처럼 죽음을 망각하는 망상적 위안에 의존하지도, 테스처럼 멜랑콜리아를 견디다 못해 자살에 이르지도 않는다. 대신, 그는 자신의 시선에서 바라본 테스를 내면화하고, 테스와의 기억을 회고하며, 동시에 프라임의 본질적인 두려운 낯섦을 인식하고 절망하기를 반복하면서 테스의 죽음을 애도한다.
데리다는 “타자가 타자성을 유지하면서 우리와 대화 관계에 있는 ‘생각하는 기억’을 애도의 본질”로 보았다. 따라서 데리다는 멜랑콜리아와 애도가 분리된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인식할 수 없는 것은 인식하려는 애도, 달리 말해 애도 가능성과 애도 불가능성 사이의 진동이 애도하는 텍스트의 직물을 짜고, 애도의 성공과 실패 사이의 아포리아가 길을 여는” 멜랑콜리한 애도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애도라고 주장한다. 인류 탄생 이래, 현실적으로 망자의 발언이 가능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최근 디지털 기술의 발전은 망자의 발언을, 망자의 부활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데리다가 만약 살아 있다면, 망자의 동의 없는 기계적인 디지털 부활을 경계했으리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한 디지털 부활은 오직 남아있는 자의 나르시시즘적 멜랑콜리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만 제작되고, 이용된다는 점에서, 기계적 디지털 부활은 너무도 쉽게 프로이트적 애도 작업의 완수를 위한 도구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앞서 프라임이 어떻게 “멜랑콜리아를 ‘극복’하는” 애도의 실패를 전제하는지 살펴보았다. 특히, 프라임은 남아있는 자가 주입한 ‘기억’과 새롭게 형성된 ‘지식’, 그러니까 다른 프라임과 대화하거나 인터넷에 검색함으로써 얻어낸 지식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애도의 실패와 성공을 오간다는 점에서, 데리다적 멜랑콜리한 애도를 체현한다. 존이 손녀를 테스 프라임에게 소개하는 장면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멜랑콜리한 애도를 예증하는 장면이다. 존이 테스 프라임에게 ‘손녀가 분류학을 공부하고 있다’라고 설명하자, 테스 프라임은 ‘이분법(Dichotomous)을 이용하지’라고 대답한다. 자연스럽게 분류학에 관한 대화를 이어 나가는 테스 프라임과 달리, 존은 테스 프라임이 분류학에 관한 지식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존의 시선에서 바라본 테스의 기억과 테스 프라임이 새롭게 얻은 지식의 혼합은 이전 에는 ‘말할 수 없던 것’, 즉 손녀와의 예측할 수 없는 상호작용을 존이 인식하게 한다. 존은 마치 어린아이 다루듯 테스 프라임에게 ‘입양이 무슨 뜻인지 알지?’라고 묻다가도, 이분법을 말하는 테스 프라임에게 놀라면서 애도의 성공과 실패를 경험한다. 테스 프라임은 그런 의미에서, 존의 내면에 식민화될 수 없는 테스의 이미지를 새기고, 테스의 죽음을 인식함과 동시에 존의 내면에 의해 식민화되지 않은 테스 그 자체를 기억하고, 애도하도록 돕는다.
데리다의 관점에서 프라임의 가장 큰 의미는 ‘내면화되지 않는 지속적 기억’에 있다. 프라임은 남겨진 자들의 기억에 의존하지만, 동시에 그 기억은 인간과 달리, 프라임의 내면에 잡아 먹히지 않고 영원히 그 상태를 유지한다. 인간의 기억은 꺼내면 꺼낼수록 희미해지거나 왜곡되지만, 프라임의 기억은 처음 상태 그대로 지속되며, 프라임 자신의 내면에 의해 오염될 가능성도 없다. 인간이 되고 싶은 욕구를 드러내긴 하지만, 프라임에게 인간과 같은 완전한 자아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러한 프라임의 기억을 영화에서 다양하게 변주되고 반복되는 ‘물’의 이미지를 통해 시각화한다.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은 희곡인 원작의 특성을 반영하여, 한정된 인물과 배경을 활용한, 절제된 미쟝센을 사용한다.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프라임 외에 다른 기술적인 특징은 눈에 띄지 않으며, 심지어는 기본적인 가구 이외의 소품조차 얼마 등장하지 않는 미니멀리즘적 미쟝센은 프라임과 인물들의 관계에 집중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미니멀리 즘적 집 내부와 대조적인 과잉 생산되는 물의 이미지는 영화의 주제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메타포다.
월터와 마조리의 집이자 테스와 존의 집인 영화의 주된 배경은 바닷가에 위치한다. 그래서 영화는 해변가를 걷는 테스와 존의 모습이라든가, 인물 없이 파도치는 장면이 종종 삽입하거나, 계단 옆에 걸린 파도 그림을 클로즈업하기도 한다. 토니가 해변가 달리기를 좋아했다는 마조리의 대사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데미안을 상징하는 토니가 사랑했던 바다는 영화 내내 ‘죽음’, 또는 일종의 상실을 상징한다. 마조리, 테스, 존이 사망한 이후 파도-또는 파도를 그린 그림-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죽음을 재현한 이미지인 프라임이 등장할 때는-집이 바닷가에 위치함에도- 어둡고 꽉 막힌 실내나, 또는 커튼 뒤로 희미하게 비치는 나무만이 등장한다. 하지만 세 프라임이 모인 마지막 장면에서는 거실 밖 커튼이 활짝 젖혀있 으며, 잔잔한 바닷가의 모습이 포커싱되도록 인물을 모두 같은 방향에서 촬영된 것을 알 수있다. 이는 궁극적인 영화의 주제인 죽음과 애도를 인간이 모두 사망한 뒤에도 프라임이 이어가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한 연출로 해석할 수 있다.
두 번째로 중요한 메타포는 ‘비’인데, 영화에서 딱 두 번 등장하는 폭우는 영화의 두 번째 주요 키워드인 ‘인간의 기억’과 연관성이 있다. 희미해지는 인간의 기억처럼, 비는 끊임없이 흐르고, 또 쉽게 휘발되고 만다는 점에서 인간의 기억을 상징한다. 따라서 프라임 뒤에 켜켜이 쌓이는 포근한 눈의 이미지는 인간의 기억처럼 흘러가지 않고 차갑게 냉동되어 켜켜이 쌓이는 프라임의 기억을 시각화한 것이다. 이는 영화 속 첫 번째 폭우 장면에서 존과 테스가 기에 대해 나눈 이야기와도 일맥상통한다. “되풀이될수록 희미해지는 복사본”같은 인간의 기억과 달리, 프라임의 기억은 “뇌 안의 퇴적층”처럼, 모든 기억을 원본 그대로 냉동시켜 저장 한다는 점에서 눈과 닮았다.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에서 얼마가 흘렀는지조차 알 수 없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월터, 마조리, 테스 프라임은 한자리에 모여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그들 뒤 넓은 창에는 눈 내리는 바닷가의 풍경이 있다. 켜켜이 쌓이는 눈과 파도치는 바닷가가 보이는 통창 앞에서 프라임은 데미안의 죽음을 끄집어 낸다. 유일하게 데미안에 대한 기억을 들은 월터 프라임이 데미안의 죽음을 언급하고, 데미안에 대해 알지 못했던 테스와 마조리 프라임도 월터 프라임과의 대화를 통해 데미안을 추억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특히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니 얼마나 좋아’라는 마조리 프라임의 마지막 대사는 수 세기가 지난 뒤에도 바래지 않고 타자를 기억하는 애도의 자세를 체현한다. 그러므로 세 프라임 뒤로 펼쳐진 ‘눈 내리는 바닷가’는 테스, 월터, 마조리뿐만 아니라 데미안과 존까지 프라임이 모든 ‘타자’의 죽음을 인간과는 다른 방식으로 영원히 기억하고 있음을, 서정적인 이미지로 형상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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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월 1주 차 개봉예정작
안녕하세요, 씨네픽지기입니다 🐥
🎫 7월 1주차 개봉예정작 골라왔습니다!
아리애스터가 프로듀싱한 실험적인 작품
<사스콰치 선셋>부터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꼭 봐야할 <시네마 천국>까지
정말 다양한 작품들이 이번 주에 개봉하는데요!
역시 7월은 영화가 비처럼 쏟아져…
<쥬라기 월드: 새로운 시작>은 7월 1일 어제였죠!
내한하기도 했습니다.
인터뷰에서 스칼렛 요한슨은 10살 때
<쥬라기 공원>을 가족들과 함께 봤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며 ‘쥬라기’시리즈에
대한 애정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해외에서는 원작에 대한 존중을 담아냈다는
평과 함께 대체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하네요.
🎬 7월 4주차 PICK!
►<사스콰치 선셋>
►<시네마 천국>
►<쥬라기 월드: 새로운 시작>
►<순응자>
►<된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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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둘> - ‘우리를 지키기 위한 느리고 아름다운 몸짓’
우리, 둘 (Deux, Two of Us)
개봉일 : 2021.07.28 (한국 기준)
감독 : 필리포 메네게티
출연 :바바라 수코바, 마틴 슈발리에, 레아 드루케, 제롬 바랑프랭, 허브 소근
‘우리를 지키기 위한 느리고 아름다운 몸짓’
젊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늦었다고는 할 수 없는 인생의 한순간, 우리, 둘이 함께한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그 순간. 니나와 마도는 당신을, 나를, 우리를 사랑한다.
<우리, 둘>은 노년에 접어든 한 레즈비언 커플의 이야기다. 이 영화를 보며 올해 5월 개봉했던 <슈퍼노바>가 함께 떠올랐다. 모두가 찬란하다고 말하기엔 어색한 느낌이 드는 노년의 사랑. 모두가 아름답다고 말하기엔 어려운 동성 간의 사랑.
우리가 사랑하고, 너와 내가 있으면 충분하다고 말하지만 완전하게 무시하기엔 우리 앞에 놓인 것이 너무도 많기에, 우리를 가릴 수 있는 그늘막 밑으로 숨어들게 되는 사랑. ‘아름다운 우리’가 있지만 당당할 수 없었던 사랑. 늦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충분히 행복한 사랑. 자주 다뤄지지 않는 색을 띤 사랑이지만 이 또한 충분히 아름다운 사랑임은 틀림없다.
조금 방심한 채 상영관에 입장했는데, 영화를 보고 난후엔 꽤나 긴 여운에 사로잡혀 니나와 마도의 사랑에 대해 한참을 생각했다. 니나와 마도에겐 전부인 사랑이지만 누군가는 받아들일 수 없는 그 사랑에 대해. 이제 세상은 변했고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사랑에 큰 불만을 갖지 않는다!고 외치지만 여전히 짊어지기엔 버거운 사랑과 인생의 무게를 느끼며 니나와 마도의 눈빛에 스며드는 시간이었다.
흔들림 없이 행복하다기보단 불안하게만 느껴지는 순간들의 연속이지만 사랑하기에 지켜내야만 하는 우리, 둘. 천천히, 끊임없이 이어지는 니나와 마도의 사랑을 지키기 위한 몸짓이 그 무엇보다 아름다웠다. 니나와 마도의 사랑이 무한하다 한들 주어진 시간은 유한하기에, 이들이 사랑을 나누는 순간이 더욱 숭고하고 뭉클하게 다가온다.
우리, 둘 시놉시스
아파트 복도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맞은편에 살고 있는 니나와 마도. 마냥 가까운 이웃처럼 보이지만 사실 둘은 20년째 사랑을 이어온 연인이다. 은퇴도 했으니 여생은 로마에 가서 편하게 살자는 니나의 제안에 마도는 가족들에게 숨겨왔던 비밀을 털어놓기로 한다.
마도의 생일, 쉽지 않은 고백 과정에서 그녀는 결국 충격으로 쓰러진다. 그리고 니나는 가족으로부터 마도를 되찾을 플랜을 짜기 시작하는데…
온 세상을 떠나보내도 함께하고 싶은 두 여인이 만든 세상에 단 하나뿐인 사랑 이야기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니나와 마도는 서로를, 함께하는 우리를 사랑한다.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하며 20년이라는 세월을 보냈다. 하지만 니나와 마도를 제외한 세상은 둘을 ‘오래된 이웃’으로만 알고 있다. 마도는 가족들에게도 자신의 사랑을 숨겼고 프레드릭과 앤은 엄마가 진정 사랑하는 사람을 알지 못한다. 삶이 충분하다고 느껴질 만큼 사랑하는 우리, 둘. 하지만 다른 이들에게 말할 수 없는 우리, 둘의 사랑. 두 사람은 짧은 복도를 사이에 두고, 서로의 집을 드나들며 사랑을 속삭인다.
니나와 마도는 점점 빠르게 느껴지는 인생을 실감하며 이제 은퇴를 했으니 둘이 처음 만났던 로마로 떠날 계획을 세운다. 자녀를 두지 않은 니나는 다른 고민 없이 빠르게 집을 팔고 떠날 기대에 부풀어 있었고, 마도는 프레드릭과 앤에게 이사 계획을 밝히려고 하지만 결국 용기를 내지 못한다.
“할머니 정말 괜찮아요?”
마도의 생일날, 마도는 비밀을 털어놓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에 빠져있다. 할머니의 미묘한 불안감을 느낀 손자 테오가 이렇게 묻는다. “할머니 정말 괜찮아요?”
이 사랑은 불안하다. 사실 이 사랑은 언제 끝을 맞이할지 알 수 없다. 두 사람의 나이와 사회적 시선을 생각해 보면 두 사람은 내일 당장 갑자기 이별을 맞이해도 이상하지 않다.
똑딱똑딱 움직이는 마도 남편의 시계 소리, 브레몬트와 니나가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에서 점점 빠르게 들려오던 세탁기 소리, 프라이팬이 타들어가는 소리, 니나가 찻잔을 톡톡 때리는 소리, 마도가 없어진 날 주위에 들려오던 어지러운 사람들 소리가 주던 불안감. 행복하고 부드럽게 흐르기보단 긴장되고 초조하게 흐르던 순간들. 마도가 쓰러지던 날, 평온했던 두 사람의 시간은 잠시 멈췄다 이내 경직된 상태로 가쁘게 흐른다.
“미안해. 내가 한 말, 진심이 아니었어.”
마도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날, 니나는 마도를 발견하고 119에 신고하지만 다른 사람들 눈엔 친한 이웃일 뿐인 니나는 마도의 옆을 지키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니나의 집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하다. 오래 쓰지 않은 느낌의 침대, 텅 비어버린 냉장고, 깔끔하다 못해 허전한 느낌의 거실.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냈던 마도의 방과는 사뭇 다른 공기가 흐르는 방 안에서 니나는 여느 날보다 더 길고 느린 밤을 보낸다. 그렇게 긴 밤이 지나고 마도가 돌아왔음에도 니나는 마도를 가까이서 만나지 못한다. 니나는 현관문 구멍으로 간병인 뮤리엘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늦은 밤이 되어서야 몰래 들어가 겨우 마도의 손을 잡아본다. 마음을 무겁게 누르던 사과와 사랑한다는 말을 속삭여봐도 마도는 반응이 없다.
“기억 안 나? 우리야.”
가족들은 마도에게 간병인을 붙이지만 마도의 상태는 쉽게 좋아지지 않는다. 니나는 마도를 만나기 위해 매일 문을 두드린다. 마도가 산책 나가는 날, 타이밍 좋게 함께 집안에 들어간 니나는 뮤리엘에게 신발을 건네받아 마도에게 신겨준다. 애정이 가득한 정성스러운 손길에 신발은 부드럽게 마도의 발에 맞아들어간다.
뮤리엘에게 마도는 돌봐야 하는 환자고, 니나에게 마도는 사랑하는 연인이다. 뮤리엘이 아무리 오랜 경력의 간병인이라 해도 뮤리엘과 니나의 행동과 눈빛엔 각자 다른 마음이 담겨있다. 그 차이 때문일까, 마도는 니나의 보살핌을 받으며 조금씩 회복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제 스스로 걸음을 걸을 수 있을 만큼 회복된 마도. 두 사람에게도 어슴푸레 희망이 보이는듯했다.
“내가 마도의 유일한 사랑이죠”
앤은 엄마(마도)의 유일한 사랑이 오래전에 떠난 아빠일 것이라 생각했다. 아빠와 결혼을 했고, 아빠가 세상을 떠난 후 아무도 만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20년 만에 밝혀진 엄마의 비밀은 앤을 혼란스럽게 했고, 충격을 받아들이지 못한 앤은 마도를 호스피스에 보내기로 결정한다.
니나는 한순간에 마도를 빼앗긴다. 마도의 ‘진짜 유일한 사랑’은 니나인데.. 마도의 남편이 책장에 장식되어 있는 오래된 장식용 시계와 같은 인연이라면 니나는 그 시계를 대신할 모든 것인데, 앤과 프레드릭은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다.
노년의 나이,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거나, 사랑에 목숨을 걸고 영원을 맹세하기엔 늦은 순간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니나와 마도는 여전히 서로를 아끼고 사랑한다. 둘은 어떻게든 이 사랑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호스피스에 들어간 마도는 빙고판을 보며 니나의 번호를 정확히 떠올리고 전화를 건다. 겨우 호스피스 탈출에 성공한 두 사람은 집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문안엔 희망이 아닌 허망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박스 안에 들어있던 돈은 뮤리엘이 훔쳐 갔고 집안은 난장판이 되어있었다. 로마로 떠나기는커녕 당장 내일도 명확히 보이지 않는 상황. 니나와 마도는 절망적인 현실을 뒤로하고 서로의 손을 잡고 춤을 춘다. 20년 전과 같은 음악, 그때처럼 마주 잡은 손. 20년이란 시간에 맞춰 늙어버린 몸은 전보다 무거워졌지만 여전히 사랑하는 우리.
마도는 느린 걸음으로 현관으로 다가가 문을 닫는다. 앤이 선물했던 고양이가 복도로 쫓겨나고, 두 사람을 방해하는 현실의 흔적들이 모두 사라진다. 니나의 집안엔 이제 마도와 니나뿐이다. 희망도 탈출구도 보이지 않지만, 니나와 마도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있는 한 그저 서로를, 우리를 사랑할 것이다. 나의 유일한 사랑인 그녀가 내 남은 인생의 모든 것이자 의미니까.
우리는 연애를 하며 현실적 문제를 맞이했을 때 현실을 따라 사랑을 포기할 것인지, 조금 힘들어도 사랑을 붙잡을 것인지 수없이 고민한다. 내가 지금껏 보아온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장 먼저 ‘사랑’을 포기했다. 그리고 여러 가지 변명을 늘어놓은 끝에 결국엔 후회에 도달했다. 사랑을 지키는 힘은 젊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상대와 우리에 대한 사랑에서 나오는 것임을 <우리, 둘>을 보며 한 번 더 느꼈다.
나를 둘러싼 모든 세상을 내던져도 아깝지 않은 소중한 사랑,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눈빛만으로도 마음을 알 수 있는 사랑. 서로의 등을 감싸 안은 팔을 절대로 풀지 않을 사랑. 유한함을 마주한다 해도 포기하지 않을 무한한 사랑. 물리적 한계를 마주하기 전까진 이 아프고 아름다운 사랑이 멈추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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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빌 워: 분열의 시대] 끝장리뷰 | 정치적 태도 | 기자라는 직업윤리 | 로드무비 해석 | 가족의 붕괴 | 카메오 출연 이유
[시빌 워: 분열의 시대](2024)에 대한 헐거운 리뷰
Chapter 1 정치적 태도
Chapter 2 직업윤리, 가족의 붕괴
00:00 A24 최초?!
00:50 알렉스 가랜드
03:06 정치적 태도
05:40 카메오 출연 이유
07:44 직업 윤리
10:49 가족의 붕괴
11:55 별점 및 한 줄 평
12:13 다음 리뷰 예고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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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위 윌 락 유> 메인 예고편
크리스천 록이 열풍을 일으키던 1986년 여름
10대 소년 마이클과 친구들은 크리스천 메탈 밴드 3:16을 결성한다.
이들의 뛰어난 실력 덕분에 밴드는 금세 유명세를 얻게 되고, 유명 밴드 매니저 출신의 스킵이 지방 순회공연을 제안한다.
교회와 캠프를 중심으로 공연을 하며 점점 더 큰 인기를 누리게 된 친구들. 하지만, 새로운 멤버 영입 문제로 다툼이 발생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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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빙 <미드나이트> 메인 예고편
"소리를 들을 수 없는 목격자, 연쇄살인마의 타겟이 되다!"
청각장애를 가진 '경미'는 귀가하던 길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소정'을 목격하고,
그녀를 도와주려다 연쇄살인마 '도식'의 새로운 타겟이 된다.
살고 싶다는 의지로 미친듯이 도망치는 '경미' 하지만 살인마의 발소리조차 들을 수 없고,
'도식'은 또 다른 얼굴로 나타나 경미를 위협하는데...
한밤중, 서울 한복판에서 펼쳐지는 연쇄살인마와 그의 타겟이 된 '경미'의 멈출 수 없는 추격전!
극강의 음소거 추격 스릴러가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