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3-05-05 18:35:06
[JIFF 데일리] 단편영화의 맛
전주국제영화제 온라인 상영 단편 3편
코로나19가 우리에게 남긴 것이 하나 있다면, 극장에서 누군가와 부대끼지 않는 영화제도 가능하다는 확인이다. 완전히 축제 분위기를 되찾은 전주국제영화제지만, 주요 단편들은 온라인 상영을 열어두었다. 전주에서 돌아온 후 여운과 함께 즐길 수도 있고, 전주에 가기 전 예열하는 느낌으로 즐길 수도 있으며, 전주에 가지 못한 아쉬움을 달랠 수도 있다.
단편영화는 단편영화만의 맛이 있다. 온라인 상영으로 본 단편에 짧은 리뷰를 남겨 본다.

<나는 피아노를 버렸다> / 박건 감독
피아노와 꿈에 대해 속삭이는 목소리에 이어, 피아노를 버리기 위해 낑낑대는 주인공의 모습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압류 딱지 위로 붙인 스티커의 흔적만으로도 대강 유추가 가능한 상황 속에서, 주인공이 피아노를 버리느라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며 깨닫는다. 모든 것의 무게는 옆에 있을 때가 아니라, 버릴 때 알게 된다.
피아노를 버리고 도서관에서 일하는 주인공을, 카메라는 그의 삶처럼 불안불안 흔들리며 담는다. 주인공은 소리를 차단하고, 그 자리에 바코드 소리를 메우고, 현실과 타협하려 애쓰지만 그럴수록 버릴 수 없는 마음은 선명해진다. 피아노를 버리는 행위와, 결코 버릴 수 없는 어떤 마음들이 대조되어 빛난다.
다만 아쉬운 점은 꿈과 현실을 다룬 영화치고 '현실'이 너무 모호했다는 점이다. 꿈을 포기한 주인공이 일하는 곳이 도서관이라는 점에서. 정숙을 강요하는 자리에 키보드 커버조차 깔려 있지 않다는 점에서. 보통 도서관의 일자리는 좀처럼 나오지 않는 점을 생각할 때 더더욱. 차라리 도서관에서 공부를 한다면 이해가 되었을 만큼, 꿈을 포기한 주인공이 밟고 선 책도 누군가에겐 너무 꿈에 가까운 물질이어서.
그래도 꿈과 현실의 대비 그리고 음악과 침묵의 대조가 매력적이다.

<매달리기> / 박지인 감독
이 영화를 고른 이유는 딱 하나. 감독의 전작 <전학생>을 정말 좋아한다. 박수연 배우가 표현하는 인물의, 세상에서 유리된 듯한 상황에서 짓는 아슬아슬 불안한 미소가 인상 깊었고, 그에게 푸근한 얼굴로 인사하며 미소 짓는 이주영 배우의 얼굴은 또 왜 그렇게 안심이 되었던지. 그들의 출신을 생각할 때, 박지인 감독이 애정을 갖고 담는 인물이라면 앞으로도 궁금해질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번에는 자립 준비 아동이다. '보호 종료' 이후 자립을 준비해야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가. 그동안 워낙 사각지대에 놓였던 만큼 최근 국내 아동보호 관련하여 부쩍 화제가 되었던 단어이기도 하다. 영화 속 아이들도 불안하게 흩날리지만, 그 흩날리는 기분 속에서도 끝내 생에 매달리기를 계속한다.
짧은 러닝타임에도 깊게 스민다. 눈물 짓고, 조용히 웃고, 그러면서도 뒷모습을 응시하는 인물들의 감정이 마음에 오래 남는다. 박지인 감독의 다음도 기대된다. 어디든 가서 보겠어.

<늦은 산책> / 손지환,김병규 감독
이건 온라인이 아니라 극장에서 봤어야 했는데... 여백이 많은 영화라서, 온전히 극장에서 그 공기에 휩싸여 보았으면 참 좋았을 텐데 아쉬웠다. 하지만 이렇게 온라인으로 보아도, 아름다운 영화였다. 스틸 사진처럼 펼쳐지는 이미지, 울려 퍼지는 트로이메라이.
어긋나다, 라는 단어를 ㅇㅓㄱㅡㅅㄴㅏㄷㅏ라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펼쳐내어 보여주는 기분이었다. 대단한 사건 없이도 어긋나는 것들이 있다. 차라리 소리칠 수 있는 계기라도 있다면 편안할 텐데. 이런 느리고 진득한 어긋남이 더 답답하고 힘들지. 다 그대로일 수가 없다. "그걸 내가 일찍 알았다면 달라졌을까? 모르겠어."라는 대사가 어긋난다는 단어의 본질을 담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긋난다는 건 그런 것이다.
다만 아름답기에 더더욱, 서사와 사건의 과도한 여백이 아쉬웠다. 시작부터 유난히 힘이 없던 두 사람의 대사를 보며, 무엇이 남자를 저렇게 만들었는지, 두 사람 사이엔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아니 애초에 두 사람은 어떤 인물들인지...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뭔데, 왜 관객한테도 비밀인데. 모든 인물이 꼭 홍상수 영화 속 인물들처럼 말할 필요는 없다. 여백이 조금만 더 칠해졌더라면, 그래서 두 사람의 맞잡은 손에 좀더 공감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온라인 상영]
온피프엔: https://onfifn.com/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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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둘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엘리멘탈> 일일관객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하는데요 !! 역주행에 성공하며 300만 돌파를 한 엘리멘탈 !
유료시사회를 진행하면서 출격준비를 마친 <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 PART ONE> 까지
그 외에도 극장가를 꽉채운 해외 영화들 7월 2주차의 박스오피스 다함께 알아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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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내 주말 박스오피스
7월 둘째 주, 1위를 차지한 <엘리멘탈>! 엘리멘탈이 개봉 4주 차에 더욱 치솟은 관객수로 3주 연속 주말 박스오피스 1위를 달성했습니다. 4주 차에 들어섰음에도, 가장 높은 일일 관객수를 보여주고 있으며 꾸준한 역주행의 상승선을 그리고 있습니다 한편 <범죄도시 3>는 누적 관객수가 지난 1일 오전 8시를 기해 1000만 명을 넘었다고 발표했습니다. 역대 국내 개봉작 중에서는 30번째 1000만 돌파입니다.
1. <엘리멘탈>
주말 관객수 80만 명을 넘기면서 전주보다 높은 주말 관객수를 기록하였고 첫 주 42만, 둘째 주 49만, 3주 차에는 68만을 기록하면서 역주행 성공신화를 그리며 300만 돌파에 성공했습니다. <엘리멘탈>의 연출을 맡은 손 감독은 한 해외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관객들이 엘리멘탈을 통해 감정이 어디에서 오는지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감정의 시적점에 대한 이해는 우리를 연결시키게 만들어 서로의 감정에 공감을 일으킨다”라고 밝혔습니다.
2. <범죄도시3>
영화 <범죄도시> 시리즈의 전체 누적 관객 수가 3천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한국 영화 시리즈 가운데 누적 관객 수가 3천만 명을 넘어선 건 <범죄도시>가 역대 처음입니다.
마동석은 이로써 5000만 배우 타이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3.<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 PART ONE>
<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은> PART ONE'이 오는 12일 개봉을 앞두고 유료 시사회를 진행하면서 개봉 전부터 주말 박스오피스 3위에 랭크되어 기대를 높이고 있습니다. 톰 크루즈 주연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는 인류를 위협할 새로운 무기가 못된 자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추적하던 에단 헌트와 (톰크루즈)와 IMF팀이 미스터리하고 강력한 적을 만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4. <인디아나 존스: 운명의 다이얼>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는 15년 만에 다시 한번 관객을 찾았습니다. 마케팅 비용을 빼고도 2억 9500만 달러를 쏟아부은 역대급 고 예산영화라는 걸 감안하면 전 세계 박스오피스 1억 3000만 달러는 대단한 성과는 아닙니다.
한국에서도 박스오피스 4 위대에 머무르며 아쉬운 성적을 보이고 있습니다.
5.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스파이더맨 주말 관객수 12만 명을 기록하며 점차 순위에서 밀려나는 추세로 현재까지 총 관객 80만 명을 기록했습니다.
(2) 북미 주말 박스오피스
북미 박스오피스 7월 둘째 주 <인시디어스: 빨간 문>이 <인디아나 존스: 운명의 다이얼>을 제치고 북미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습니다. 아동 성노예예와 구출 이야기를 다룬 <Sound of Freedom> 3위, <엘리멘탈>이 4위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가 5위를 기록했습니다. <인시디어스: 빨간 문>은 2012년 시작된 '인시디어스' 시리즈 5번째 작품으로 2013년에 나온 두 번째 영화 <인시디어스:두번째 집>에 이어 램버트 가족이 다시 한번 악몽을 겪는 이야기입니다. 한국은 7월 19일 개봉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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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픽의 7월 둘째 주 박스오피스 분석 콘텐츠는 여기까지입니다.
이번 주도 건강한 한 주가 되기를 바라며 씨네픽은 다음 주 월요일 유익한 콘텐츠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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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끼리 보기 좋은 영화 추천 '스위치' 스포일러 포함
스위치
(23.01.04 개봉)
감독: 마대윤
출연: 권상우, 오정세, 이민정 등
제목엔 추천이라고 써 놓았지만사실은 정말정말정말x100 비추천입니다 ;; 서프라이즈 쿠폰인가 그거로 2,000원에 봐서 망정이지 14,000원 제값 내고 봤으면 더 화딱지가 났을 거 같아요
저는 가볍게 웃으며 볼 수 있는 코미디 영화를 좋아하는데요 스위치 예고편... 딱 봐도 코미디잖아요??
그래서 사실은 아바타나 영웅보다 기대했던 영화기도 합니다. 그 두 영화 때문에 입소문을 못 탔나 내가 다 아쉽다 싶기도 했고요 ㅠㅠ 근데... 그 두 개 아니었어도 관객 못 받았을 영화 같아요
무작정 비판하면 안 되겠죠? 일단 스토리는 다들 익숙한 내용이실 거라고 생각해요. 시크릿 가든부터 폴링 포 크리스마스까지 영혼이 바뀌는 드라마 영화 굉장히 많잖아요. 물론 '스위치'는 영혼이 아니라 인생 자체가 바뀌긴 합니다. 인기 펑펑 누리며 살던 개차반 탑스타와 그 아래서 일하는 배우가 꿈이던 매니저의 삶이 바뀌는 건데요. 저는 사실 그렇게 바뀌게 되었기 때문에 매니저 조윤이 개차반 성격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개차반 연예인한테 당하며 과거의 자신을 후회하는...?? 근데 조윤은 박강이 배우 데뷔할 수 있도록 챙겨 주고 본인보다 더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아도 나름 축하해 주고 굉장히 착해요,, 반성할 기미가 없게 만들어 버리죠. 오히려 매니저로서의 박강이 갑이 된 상황이랄까요?
대형 스포일러 하나 하자면 이 둘의 인생을 바꿔 버린 장치인 택시 기사님이 바로 박강의 돌아가신 아빠였는데요 이건 좀 놀라긴 했어요. 그러나 또또 아쉬웠던 건 아빠와의 스토리가 깊게 나오지 않았던 것? 아빠와 사이가 안 좋았다는 거, 그리고 택시 기사의 꿈이 배우였다는 떡밥까지 뿌렸는데 과거 회상은 물론 둘의 대화도 더이상 나오지 않아요
아 사소하게 아쉬웠던 거 하나 말하자면, 박강과 수현의 자녀가 왜 하필 쌍둥이였는가? 쌍둥이라는 걸 쓸 수 있을 만한 내용도 딱히 없던 거 같고 한 명은 똘똘한 딸, 한 명은 순수한 아들 역할인데 그냥... 한 명만 해도 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무엇보다 '스위치'가 재미없다고 느낀 건 뻔하디 뻔한 대사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가끔은 한 번 더 꼬아 주고, 또 가끔은 한 번 더 농담으로 툭 던지고 하는 센스가 필요한데 무조건 직관적으로 말하고 누구나 예측할 수 있을 만한 정말 필요한 말만 하거든요. 웃기라고 만든 씬 같은데, 솔직히 권상우 배우 오버 액션 아니었으면 안 웃겼어요. 제작진의 센스가 없는 영화라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배우님들 연기가 다한 영화,,
어쨌든 너무 유연하게 흘러가는 스토리가 2시간 내내... 주인공 앞에 극한의 벽이 오는 게 재미있을 텐데 매니저로 일하면서도 탑스타가 되는 기회가 생기고 1년 내내 나름 행복한 결혼 생활을 즐기며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1도 안 하는 거 같고...
물론 절정은 택시 기사가 현재로 돌아가야 한다는! 그 부분인 거 같긴 합니다만 돌아가고 나서도 수현한테 다시 가서 결국은 해피 엔딩,,
차라리 현재의 조윤 아내가 수현이고 잘못 고른 한순간의 선택이 미래를 완전히 바꿔 버렸다 라는 식으로라도 가는 게 좋았을 듯해요. 박강에게 힘든 상황은 1도 없는 화...... ㅠㅠ
*스토리: ★
*연출: ★
*영상미: ★
*연기: ★★★★★
*OST: ★
*재관람의사: 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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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제된 악의 미학
영화사에서 가장 인상깊은 악역 캐릭터로 빠지지 않는 그 이름, 한니발 렉터.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강렬한 존재감을 뿜어내는 그는, 영화 속에서 신입 FBI 요원 클라리스 스털링과 팽팽한 긴장감을 형성하며 범죄 심리 스릴러의 정점을 찍으며 동시에, 둘 사이에 미묘하게 흐르는 애틋함은 이 영화를 더욱 깊이 있는 작품으로 만든다.
살아숨쉬는 캐릭터의 품격
주인공 클라리스 스털링은 FBI 연수생으로, 연쇄 살인범 ‘버팔로 빌’을 추적하는 임무를 맡는다. 하지만 그녀가 범죄자를 추적하던 중 자신의 과거와 겹쳐 보이게 되고, 한니발 렉터 박사에 의해 어린 시절 트라우마로 안겼던 사건을 꺼내기 시작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은 슬픔과, 자신이 지키지 못한 양들의 울음소리에 트라우마에 시달려온 그녀는 과거를 마주하고, 피해자를 구출함으로써 과거의 상처를 극복했다. 영화는 스털링의 내면을 세밀하게 조명하며, FBI와 범죄자의 세계에서 자신 내면과 싸우며 극복하고 한니발 렉터의 주도권을 서서히 잡아가며 성장하는 모습을 그리며 입체적인 캐릭터로 인상깊게 남는다.
한니발 렉터는 잔인한 식인 살인마이면서도 품격과 예의를 갖추었으며, 뛰어난 지적 능력까지 지닌 인물이다. 그의 대사는 단순한 대화가 아니라 상대의 심리를 꿰뚫는 면도날 같은 질문이며, 그를 마주한 순간 상대는 자신조차 알지 못했던 내면의 진실과 맞닥뜨리게 된다. 렉터는 등장하는 장면마다 압도적인 존재감을 발휘하며, <양들의 침묵>을 단순한 스릴러에서 심리적 탐구의 영역으로 끌어올린다.
이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연출 중 하나는 한니발과 스털링의 관계다. 렉터는 스털링을 처음 마주했을 때부터 그녀의 내면을 꿰뚫어보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그녀를 조롱하거나 협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스털링이 자신의 트라우마를 직면하고 성장하도록 유도한다. 두 사람은 감옥이라는 공간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며, 그 안에서 위험하면서도 은근한 신뢰가 싹튼다. 첫 만남은 신인 스털링을 한니발을 아래로 내려다봄으로써 상하관계가 형성되었지만, 스토리가 진행될수록 한니발과 클라리스는 수평적인 관계이자 클라리스가 주도권을 가진 관계로 발전한다. 스털링은 렉터를 경계하면서도 그의 조언을 따라 사건을 해결하는 단서를 얻으며, 렉터 역시 그녀에게 흥미를 느끼고 독특한 방식으로 돕는다. 이러한 긴장과 협력의 균형이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다.
웰메이드 범죄 스릴러
‘양들의 울음소리’는 그녀가 외면하고 싶었던 트라우마를 상징하며, 결국 그녀가 해결해야 할 가장 큰 문제는 외부의 범죄자가 아니라 내면의 상처라는 점을 암시한다. 그리고 한니발 렉터는 인간 내면의 가장 어두운 심연을 형상화한 존재다. 그는 살인마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버팔로 빌보다 훨씬 정제된 지성과 매력을 갖춘 인물로 그려진다. 이러한 대비는 악(惡)의 다양한 형태를 보여주며, 선과 악의 단순한 이분법을 허물어버린다.<양들의 침묵>은 공포와 긴장을 넘어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심리적 여정이다. 클라리스 스털링의 상처와 성장, 그리고 한니발 렉터라는 미스터리한 존재의 이중성은 매력적인 스토리로 살아숨쉰다.
변화를 원하는 것은 버팔로 빌뿐만 아니라 클라리스 스털링 그리고 한니발 렉터 또한 마찬가지다.
한니발과 클라리스는 서로가 서로를 만남으로써 애벌레에서 번데기로, 번데기에서 나방으로 변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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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 더럽게 안 좋은 한 킬러의 운수 좋은 날
운이 없더라. 만약 사회복무요원 복무지에 노트북을 놓고 오는 건 운이 안 좋은 편에 속할까? 그런 것도 운이 안 좋은 것에 해당하면 난 정말 옴 붙었다. 좀 재미있는 일 없을까? 아니면 갑작스러운 행운에 걱정 없이 살 순 없을까? 금세 길거리에서 시비 붙었던 어떤 사람의 말이 떠오른다. 착하게 생겨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날 건든다. 진짜 좀 짜증 난다. 나 좀 안 건들 수 없나?
하지만 불운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웃픈 일들은 보통 한꺼번에 몰려온다. 받아들이는 사람 속사정 같은 건 고려해주지 않는 부자비한 놈이다. 만인에게 평등한 불평등. 이 우연 같은 불평등을 만나 사람 인생이 종종 바뀌곤 한다. 긍정적인 사람이 부정적으로 변하는 게 인간 아니겠어? 이런 모티브는 수많은 영화에 공통적으로 자리 잡혀있다. 이번에는 브래드 피트가 운 없는 킬러로 돌아왔다. 또 <불릿 트레인>을 시사회에서 본 입장에서 이 정도의 글이 감상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운수 참 좋은 날
인생사의 많은 것들은 사실 설명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는지도 모른다. 유달리 운이 없는 이 남자는 방금 쓴 문장에 격하게 공감할 것 같다. 운이 없는 킬러 코드명 레이디버그. 갑자기 느닷없이 주위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건 일도 아닌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원래 임무를 하기로 했던 킬러가 아파서 불참한다는 건 그냥 무덤덤하게 넘기기로 한다. 아니 뭐 고등학생이야? 아파서 조퇴하게? 툴툴대는 레이디버그. 그런 레이디버그를 마리아가 격려한다. 임무를 전달하는 마리아. 오늘 레이디버그가 해야 할 일은 일본을 경유하는 기차에 찌그러져 져 이 가방 하나를 무사히 가져오는 것. 그게 임무야? 일본의 한 지하철에서 가방만 찾으면 되는 게? 왠지 이번 임무는 확실히 쉬운 것 같다.
이 가정은 현실로 드러났다. 굉장히 쉬운 임무였다. 손님들이 가방을 넣는 칸에 간 레이디버그. 어렵지 않게 돈이 들어있는 가방을 찾는 데 성공한다. 이게 이렇게 쉽다고? 근데 사실 일이 그렇게 쉬울 리가 없다. 같은 열차 안에 있는 손님 중 몇몇은 레이디 버그와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미 ‘백의 사신’에게 의뢰인의 아들을 엄호하고 돈가방을 챙기라는 지시를 들은 킬러 레몬과 탠저린이 있었다. 또 뭔가 아들과 관련한 사연이 있어 보이는 남자와 어려 보이는 여자도 기차에 탑승했다. 이 사람들은 평범한 인물들이 아니었다. 전부 킬러였다. 운도 더럽게 없는 레이디 버그. 이 사람들은 각자 목적과 계기를 가진 채로 열차에 탑승한 것이었다. 단순히 돈가방만 찾아서 빼돌리면 되는 미션인 줄 알았는데 오늘도 잘못 걸렸다. 지독한 불운을 무릅쓰고 레이디 버그는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까?
보는 재미는 있는 편
이 영화의 강점 중 하나는 보는 재미다. 이 영화의 보는 재미는 촘촘하게 잘 구성되어 있다. 일단 보는 재미 첫 번째. 액션이다. 액션 잘 뽑았다. 이야기의 배경과 설정 상 기차라는 속성은 극에서 중요한 지분을 차지한다. 기차는 한번 탑승하면 다음 역까지는 못 내린다. 또 승객끼리 서로 얼굴을 볼 수 있다는 점도 그 특징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넓게 탁 트이지는 않았다는 점이나 역이라는 게 있어 정류장 도착시간마다 서로를 만날 수 있다는 것도 비행기, 버스와는 다른 대중교통으로서의 차이점이다.
영화는 이 특징을 십분 활용한다. 일단 좁은 공간에서 액션 잘 활용했다. 예고에도 나오는데, 이 영화의 액션이 공간이 좁았다면 상상하기 어려웠을 지점이 몇 군데 있다. 예를 들어서 극후반부엔가 열차의 운전석쯤에서 액션신을 벌이는 장면이 있다. 열차를 운전해야 함 + 근데 그 좁은 곳에서 총, 칼을 맞을 것 같은 긴박감이 잘 조합돼서 시너지가 난다. 이런 식으로 영화 내부에서 맨몸액션을 하는 것도 지형지물을 활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게다가 이것 때문에 막 벽에 부딪힌다거나 하는 모습도 종종 보인다. 그리고 인물들끼리 숨는 것도 한계가 있다. 어차피 직선 쭉 돌아다니면 보이는 게 승객들 얼굴인지라 어디 숨고 이런 묘사가 나오지는 않는다. 이렇게 '좁다'라는 특징에서 오는 큼지막한 요소들을 잘 살린다. 또 공간이 좁고 따닥따닥 붙어 있으면 소리 전파가 잘 된다. 막 멀리 있고 이러면 소리가 잘 안 들리지 않나? 또 일반 대중들이 출퇴근하며 오고 가는 지하철의 특성상 사람들의 이목을 끌면 의심 사기 쉽다. 이 덕에 총소리를 줄이기 위해 잔머리를 굴리거나 주요 인물 암살을 가리려고 노력하는 등 초중반부까지는 영화의 강점이라고 볼 수 있게 잘 작동하는 편이다. 이 공간 활용은 반대 맥락에서도 작용한다. 지하철이 정차한다. 역에서 내린다. 그럼 그 하차하는 시간 동안 잠깐은 역에서 인물들이 대화할 수 있다. 이 넓은 공간에서 벌이는 액션신도 영화의 완급조절을 위해 잘 사용한 것 같다. 글쓴이 개인적으로는 좁은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보다 넓은 곳에서 일어나는 액션이 더 기억에 남았다.
또 다른 강점으로는 코미디 타율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이런 미국식 B급 유머가 살짝 식상해지고 있는 것 같다. 근데 그건 영화를 많이 본 글쓴이(나) 같은 분들의 입장일 것이다. 다른 일반 대중들이 보기엔 이런 유머가 충분히 먹힐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감독의 전작인 <데드풀 2>에서 봤던 라이언 레이놀즈의 입담이 이 영화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일례로 애니메이션 <토마스와 친구들>을 활용한 유머 난 솔직히 좀 재미있었다. 내가 이런 실없는 농담 좋아해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이 대사를 하는 캐릭터들이 그렇게 순수한 이야기를 하는 건 봐도 봐도 재미있다. 또 극 중에서 브래드 피트가 연기한 레이디버그의 대사를 듣고 중후반부쯤에 나를 제외한 다른 관객분들이 많이 웃는 걸 들었다. 이런 거 보면 코미디가 막 아예 재미없다고 말할 부분은 아닐 듯하다. 뭐 앞에서 쓴 부분 이외에도 'F' 단어가 많이 나오는 타란티노식 유머나 순간순간 임기응변으로 대처하는 인물들의 행동은 충분히 재미있다. 이런 맛은 익숙한데도 웃길 땐 웃긴다.
말이 너무 많아
그러나 이 영화의 치명적인 단점 두 가지가 있다. 일단 말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주인공 레이디 버그부터 시작해서 극후 반부 장면까지 말이 너~무 많아서 러닝타임 내내 늘어진다. 레이디버그도 자기 운 없다는 거 좀 적당히 좀 하지 초중반부까지 내내 말한다. 그리고 레몬, 텐저린 뭐 그리 말이 많은지 서로 쓸데없는 말을 지나치게 많이 해서 이야기 전개가 느려진다는 느낌까지 받는다. 또 모든 상황을 장황하게 설명하기까지 해서 지나치게 친절한 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드는 부분이기도 하다. 일례로 레몬, 텐저린 두 형제에게 어떤 사건이 일어난다. 이때 레몬, 텐저린이 대화하는 내용 1/2를 쳐도 사실 아무 문제없을 것 같다. 또 두 형제 중 한 명이 레이디 버그와 액션신을 벌이는 장면이 있다. 예고에도 나오는 장면이기도 한데, 이 때도 왜 굳이 싸우는데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점이 든다. 아니 그런 식으로 대화할 거면 청부살인 업을 왜 해? 진짜 그럴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 말을 하는 걸까? 이 말 많아서 짜증 나는 지점은 극후 반부에서 다시 한번 나타난다. 엔딩에서 누군가를 만나는 레이디 버그. 주절주절 말을 하는데 좀 영양가 없는 말이라서 몰입이 깨진다. 분명 중요하고 클라이맥스일 텐데 굳이? 싶은 것이다.
그리고 각본에 구멍이 있다. 이 부분을 전부 서술하기엔 살짝 스포일러가 될 수 있다. 대략적으로만 써보자면, 원작 소설을 읽어야 설명이 될 거라고 드는 지점이 있다. 일본에 있는 신칸센을 저렇게 관리한다고? 싶은 부분이다. 이에 대한 근거는 영화의 줄거리에서 찾을 수 있다. 사실 이 영화는 총 쏘고 뱀 왔다 갔다 돌아다니고 주먹으로 때리고 창가 깨지고 불타는데 실질적인 열차 관리에 대한 대응이 많이 부족한 편이다. 물론 감독이 이에 대한 대응을 하긴 했다. 이와 관련해서 후반부에 어떤 인물이 대사를 하긴 하는데 그 한 줄로 이 모든 설정의 오류가 해결될지는 미지수다. 뭐 그렇다고 아예 개연성이 붕괴되는 영화는 아니다. 반대 측면에서 각본에서 딱딱 맞아떨어지게 설정한 부분도 있다. 예를 들어 주인공이 왜 대타로 일을 하게 되었는가? 에 대한 부분이다. 또 어린 소녀의 개인 서사나 그 소녀와 함께하는 남자의 가족사까지 허술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부분을 타당한 전개로 잘 틀어막은 건 각본의 섬세함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그런데 이 외의 설정 몇 군데를 장르적으로 소비하기 위해 'ㅋㅋ 이래도 되겠지?' 하며 소비한 부분은 좀 아쉽다. 충분히 킬러들 간의 이야기를 밀도 있게 묘사했다면 이야기의 긴장감이 더 잘 나타났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방형 멋있어요
아무튼 뭐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지만 확실한 건 역시 브래드 피트는 멋있다. 이제 그의 얼굴에 주름살이 보이기 시작한다. 근데 이목구비를 따로따로 분리해서 보면 아직도 소년 같다. 그리고 액션 신도 깔끔하게 잘 소화한다. 굉장히 젊은 옷차림으로 나오기도 하는데, 이와 관련해서도 사람이 멋있으니 무리 없이 소화하는 연예인 아우라가 여지없이 드러난다. 이 영화가 괜찮다고 느끼는 큰 이유 중 하나는 브래드 피트의 스타 성일엔 텐데, 이 지점은 감독이 십분 이해해 잘 활용했다고 생각한다.
브래드 피트가 아니더라도 레몬/텐저린 역을 맡은 두 배우의 코미디 연기와 중반부 갑자기 튀어나오는 암살자, 또 조이 킹이 연기한 어린 소녀 캐릭터도 캐릭터 설정과 생동감을 잘 부여했다고 생각한다. 심각하게 많은 말에도 코미디에서 안타와 홈런을 펼칠 수 있었던 이유는 뭐 이런 것 때문이 아닐까 싶다. 후반부에 카메오 느낌으로 두 명이 나온다. 영화판에서 굉장히 알려진 슈퍼스타들이다. 그런데 우정출연 느낌으로 등장한 배우가 있다. 다른 영화에선 몰랐는데 이렇게 험한 조폭 포스도 잘 연기하는 것 같아서 신기했다. 약간 더 착하게 생긴 윌렘 더 포 느낌..
넷플릭스 오리지널 같다
이 영화를 보고 극장에서 나오면서 느낀 건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같다는 것이다. 그게 나쁜 건 아니다. 이 영화도 사실 마음 놓고 웃고 즐길 수 있는 오락영화로서 충분하게 기능한다. 아니 액션 코미디 영화에 주인공이 싸움 잘하고 웃기면 장땡이지. 이 부분에서는 나름 괜찮은 평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이 영화 극장에서 상영하는 영화다. 극장에서 돈 주고 상영관에 맞게 그 시간에 들어가서 영화를 본다. 이때 뭐 재밌고 이런 거 다 좋은데 우리가 알고 있던 액션 영화들, 특히 넷플릭스 오리지널같이 뭔가 미국 중심주의적인 작품을 보기엔 살짝 아쉽다. OTT가 오리지널 콘텐츠를 만드는 시대다. 이제 극장 가는 일이 많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그러면 OTT 영화들과는 다르게 더 밀도 있는 영화를 만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러질 못하니 넷플릭스로 봐도 충분한 느낌? 그냥 단순히 볼만한 영화 만들기엔 넷플릭스가 너무 잘 나가니 앞으로 영화 제작의 난이도가 올라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든다. 뭐 나름 재미있었다고 생각하는 이 영화지만 솔직히 주변 사람들이 극장에서 뭐 보면 되냐고 물었을 때 이 작품을 거론하긴 좀 힘들 것 같다. <헌트>보라고 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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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안하고, 흐리고, 타오르지 못한 청춘들
최근 스크린은 다시금 '청춘'이라는 키워드를 소환하고 있다. 네오 소라감독의 <해피엔드>부터 안소니 첸의 <브레이킹 아이스>, 그리고 <한국이 싫어서>에 이르기까지, 국적도 언어도 다르지만 이들 작품은 기묘한 공명으로 연결된다.
각기 다른 국적의 젊은 감독들이 포착한 동시대 청춘의 초상은 명확한 해답 없이 부유하는 시대의 공기 속에서 저마다의 불안과 혼란을 힘겹게 감내하는 얼굴들이다.
답답한 현실, 불투명한 미래, 그리고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존재론적 공포. 이들의 서사는 다르지만, 정서는 맞닿아 있다.어디론가 떠나고 싶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는 막막함. 어쩌면 지금 우리 시대 청춘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맥락에서, "청춘이라는 단어를 싫어한다"고 공언했던 이창동 감독의 <버닝>(2018)을 다시 보았다.
감독은 '푸른 봄'이라는 단어가 내포한 통속적인 낭만성을 일찌감치 거둬낸다.
영화 속 세 젊은이, 종수, 해미, 그리고 벤은 따스함이나 찬란함과는 거리가 먼, 미세먼지처럼 부옇고 쾌쾌한 현실 속에 위태롭게 존재한다.
이들의 삶은 무언가를 향한 갈망으로 채워져 있지만, 그 대상의 실체도, 방향 감각도 불분명한 욕망들 사이에서 위태롭게 휘청인다.<버닝>을 마주하는 경험은 종종 불쾌하고 껄끄럽다. 감독은 인물들 내면에 깊숙이 자리한, 차마 말할 수 없거나 혹은 말하고 싶지 않은 감정의 응어리들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특히 영화는 현실의 무게와 불가해한 세계 앞에서 무력한 개인의 모습을 선명하게 각인시킨다.
예컨대, 파주, 북한과 맞닿은 접경 지역의 노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해미의 춤 장면을 떠올려보자. 그녀는 아프리카 부시맨의 '그레이트 헝거' 춤을 추며 삶의 의미를 갈망하는 듯하지만, 그 몸짓은 공허한 하늘 아래 한없이 작고 위태로워 보인다.
카메라는 해질녘의 붉은 스산한 빛 속에서 반라의 몸으로 춤추는 해미의 모습을 무심한 듯 담아내며, 그녀의 존재가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덧없음, 혹은 이미 사라지고 있는 중임을 암시한다.
이 장면은 아름답지만 동시에 불안하며, 청춘의 열망이 실체 없는 허공을 향해 흩어지는 듯한 인상을 남기는 것 같다.벤이 종수에게 폐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자신의 은밀한 취미를 고백하는 장면 역시 마찬가지다.
물질적으로 모든 것을 가졌지만 정작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주기적으로 비닐하우스를 '태운다'는 벤의 말은, 종수에게는 해미의 실종과 연결되는 섬뜩한 암시로 다가온다.
여기서 비닐하우스는 사회적으로 무가치하다고 여겨지는 것들, 혹은 해미처럼 연고 없고 주목받지 못하는 존재들의 은유로 읽힌다.
벤에게는 그저 유희에 불과한 '태움'의 행위가, 누군가에게는 생존과 직결된 절박함일 수 있다는 자본주의 사회의 비정한 단면과 계급적 박탈감을 서늘하게 드러낸다.
카메라는 벤의 말에 동요하는 종수의 불안한 눈빛과 대비되는 벤의 무심하고 여유로운 표정을 교차시키며, 관객으로 하여금 현실의 부조리와 그 안에서 느끼는 개인의 무력감을 생생히 체험하게 한다.혜미는 질문도, 판단도 유보한 채 홀연히 사라진다.
그녀가 키우던 고양이 '보일'처럼, 존재했는지조차 불분명한 흔적만을 남긴 채. 종수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한 채, 혹은 알기를 거부한 채 살아간다.
그는 무언가를 간절히 바란 적도, 제대로 분노해 본 적도 없는 듯, 깊은 무기력에 잠식되어 있다.
결국 종수의 내면에서는 어떤 감정도 쉽사리 타오르지 못한다. 해미의 사라진 비닐하우스처럼, 청춘 또한 실체 없이 연기처럼 스러져가는 듯하다.지금의 청춘은 과연 '버닝'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그리고 누구를 향해 태워야 하는가.
<버닝>의 마지막, 종수가 벤의 포르쉐와 자신의 옷가지를 불태우는 장면은 처절하지만 모호한 해답을 제시한다.
그것은 분노의 표출인가, 자기 파괴인가, 아니면 무력한 현실에 대한 절망적인 몸부림인가.어쩌면 지금의 청춘은, 이창동 감독이 포착한 것처럼, 붉고 노랗게 타오르다 이내 서늘하게 파래지며 스러지는 저녁 하늘처럼, 찬란하게 '타오르기'보다는 소리 없이 '사라지고 싶은' 쪽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마주한 시대의 가장 정직한 감각이자, <버닝>이 던지는 불편하지만 외면할 수 없는 질문의 무게일 것이다. 이 영화는 불안하고, 흐리고, 끝내 타오르지 못한 청춘들을 위한 쓸쓸한 진혼곡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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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워 오브 도그>서부극이라서 가능했던 강렬한 퀴어영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925년 미국 몬타나, 거대한 목장을 운영하는 '필(베너딕트 컴버배치)'은 막대한 재력은 물론 위압적이고 묘한 매력으로 사람들에게 공포와 경외를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어느 날, 그의 동생 '조지(제시 플리먼스)'는 '로즈(키얼스틴 던스트)'와 그녀의 아들 '피터(코디 스밋 맥피)'를 가족으로 맞이한다. 동생의 갑작스러운 결혼 소식에 분노한 필은 피터를 볼모로 삼아 그녀를 옭아매기 시작한다. 자신이 사랑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사랑이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자신에게 되돌아 올 것임을 깨닫지 못한 채.
서부극 하면 늘 떠오르는 몇몇 장면들이 있다. 석양을 배경으로 말을 타는 카우보이가 방랑자 내지는 보안관과 펼치는 결투. 서부를 개척하는 이주민들과 자신들의 터전을 지키려는 원주민의 대립과 갈등. 서부개척시대와 시대적 배경이 겹치거나 이어지는 남북전쟁이나 노예제와 같은 이슈의 등장 등등.
이러한 클리셰를 기대한다면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파워 오브 도그>는 실망스러울 것이다. 서부개척시대가 끝나가던 1925년을 배경으로 하기에 서부극다운 상징적인 클리셰는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79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작품상(드라마), 감독상,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제인 캠피온 감독의 작품이 여전히 뛰어나고 아름다운 서부극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익숙한 장면은 없어도 서부극의 본질을 놓치지 않으며, 퀴어영화의 요소를 더해 그 본질을 유려하면서도 색다르게 풀어나가기 때문이다.
서부극의 본질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 특히 이분법적 관점의 묘사라고 할 수 있다. 미국 동부의 이주민이 금광을 비롯한 자연을 개발하고 착취하며 원주민의 영역을 침범한 서부개척시대는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세계가 충돌하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당장 <파워 오브 도그> 속 배경만 봐도 그렇다. 마음껏 뛰놀아야 할 소들은 목장 안에 갇혀 있고, 들리지 않는 말굽소리는 자동차 엔진 소리가 대신하며, 평원에는 철도가 들어온다. 자연의 영역은 인간과 문명에게 잠식당하고, 광활한 서부에는 점차 안정적인 질서가 자리 잡는다. 그래서 서부극은 선과 악, 삶과 죽음, 자연과 문화, 무지함과 교육, 야만과 문명, 남성과 여성처럼 상이한 세게의 총체적 대립을 묘사하기에 용이하다.
<파워 오브 도그>에서 두 세계와 관점의 차이가 두드러지는 지점은 캐릭터들이다. 소를 몰고 가던 필이 평원에 누워있는 소 시체를 보고 탄저균이 옮을 수 있으니 절대 만지지 말라면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강조하는 것은 단적인 예시다. 로즈와 조지 부부가 조지의 부모님, 주지사 부부가 참석한 저녁 파티 장면처럼 대비되는 인물상을 통해 무지함과 교육, 야만과 문명의 경계선을 확실하게 그어버리기도 한다. 서부에서만 지내온 로즈는 교양 넘치는 대화에 전혀 끼어들지 못한다. 그녀는 피아노 연주를 부탁받지만 도시 출신 손님들 앞에서 지나치게 긴장해 연주를 망친다. 파티에 꼭 참석해달라는 조지의 부탁을 무시한 필은 씻지도 않고 연회복도 입지 않은 채 식사자리에 난입해 손님들을 당황시킨다.
이때 수많은 대립 구도 중 캠피온 감독이 유달리 관심을 기울이는 대목은 남성성과 여성성의 대립이다. 이는 필과 로즈, 필과 피터의 첫 만남에서부터 알 수 있다. 목장의 주인이자 카우보이의 리더로서 마초적 가치를 중시하는 필은 창백한 피부를 지닌 피터의 유약함을 조롱하면서 피터가 만든 종이꽃을 불태운다. 이를 목격한 로즈가 피터를 걱정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도 필은 남자애를 약하게 키우면 안 된다면서 자신의 강인함을 더욱 뽐내려고 한다. 로즈가 조지와 결혼해 한 집에서 살게 되자 필의 행동은 더욱 거칠어지고 조롱의 강도도 더해진다. 로즈는 필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한 피난처로 술을 선택하고, 피터도 필 앞에서는 제대로 걷지조차 못하다. 이렇게 영화는 남성성과 여성성 간의 일방적인 충돌 양상을 그려낸다.
흥미로운 것은 남성성의 대변자인 필이 정작 동성애자이자 누구보다도 여성스러운 면모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동생이 자신의 곁을 떠나거나 자신에게 소홀하면 불안해하고, 종이꽃을 만들던 피터처럼 섬세하게 기타를 연주할 줄 안다. 그는 자신에게 승마를 알려주고 카우보이의 삶을 가르쳐준 브롱코 헨리를 사랑했고, 그 애정을 항상 간직해 왔다. 결국 필에게 카우보이들을 장악하는 강력한 카리스마와 마음 여린 동생을 향한 조롱, 지나치게 마초적이고 남성적이었던 그의 언행은 상실감을 가리지 위한 포장지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처럼 남성성과 여성성을 동시에 갖는 필의 성적 지향은 그를 모순적이고 양면적인 인물로 만들기도 한다. 영화가 묘사하는 또 다른 경계들까지 무너뜨리는 근간이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예일대학교에서 고전학을 전공한 필은 서양적 관점에서 볼 때 문명의 시작을 심도 있게 공부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정작 그는 문명과 거리가 먼 카우보이로서의 삶과 정체성을 누구보다도 강렬하게 추구한다. 그에게 말, 카우보이, 자연, 언덕과 그림자, 이 모든 자연은 브롱코 헨리를 떠올리게 하는 대상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은 문명과 도시 안에 안주하기보다는 루이지애나를 탐험하며 태평양까지 향했던 메리웨더 루이스와 윌리엄 클라크의 정신을 동경한다.
바로 이 대목에서 동성애적 성향을 지닌 필이라는 인물은 아이러니하게도 과거 서부극 속 영웅들인 존 웨인,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같은 전형적인 영웅처럼 느껴진다. 서부극의 영웅은 농장과 황야를 오가고 이주민과 원주민의 특성을 모두 가지면서 두 세계 사이의 경계를 오간다. 두 세계 사이의 긴장, 충돌, 모순을 보여주고 둘 사이를 매개한다. 브롱코와의 사랑의 흔적을 아무도 올 수 없는 내밀한 숲 속에 숨겨두는 이 남자도 마찬가지다. 그는 사랑을 매개로 자신이 발을 딛고 있는 두 세상을 그려낸다. 동성애자로서 자신과 닮은 이들을 조롱하고 탄압하고 짓밟아야 스스로의 존재를 유지할 수 있는 당시의 시대적 모순을 보여준다. 그저 총을 쏘지 않고 결투를 펼치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파워 오브 도그>는 서부극이기에 가능한 퀴어영화다.
이에 더해 <파워 오브 도그>는 전형적인 서부극의 영웅인 필의 파트너로 피터를 내세우면서 서부극의 서스펜스를 조성함과 동시에 퀴어영화적 요소를 심화시킨다. 창백한 피부를 지녔고, 테니스도 잘 못 칠 뿐 아니라 말 타는 법도 모르는 피터. 그러나 피터는 필요하면 언제든 눈 깜짝하지 않고 토끼를 죽이고 해부할 수 있는 담력을 지닌, 의외로 강인한 인물이다. 즉, 피터 역시 필처럼 서로 다른 세계 사이에 걸쳐 있는 인물이고, 그 모순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내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그는 필이 숨겨 왔던 가장 내밀한 공간을 찾아내 수 있고, 필만이 볼 수 있었던 개 모양의 그림자를 언덕 위에서 발견해낸다.
그런데 영화는 두 남성의 공통점으로부터 오히려 가장 큰 차이를 끄집어내며, 그 대조가 낳는 묘한 감정선을 통해 액션이나 결투 하나 없이 강렬한 서스펜스를 만들어낸다. 이 긴장감은 영화 제목으로부터 찾아볼 수 있다. '파워 오브 도그(Power of Dog)'는 "내 생명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Power of Dog)'으로부터 구하소서"라는 내용의 시편 22장 20절 속 표현이다. 이때 '나'를 필로 본다면, 그를 위협하는 개의 세력은 그의 동성애적 성향을 받아주지 않는 세상이며 그를 구할 수 있는 것은 그의 파트너가 되어줄 수 있는 피터의 존재다. 그래서 필은 피터를 강하게 밀어냄과 동시에 그를 눈여겨본다. 하지만 피터에게 개의 세력은 따로 있다. 어머니와 함께 필에게 모욕과 위협을 당해온 피터에게 칼과 개의 세력은 필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공격적인 태도 밑에 숨은 사랑과 열정의 감정으로 다가오는 필과 달리, 피터는 사랑을 가장한 냉철함을 유지한 채 필에게 다가간다. 필은 피터에게 승마를 알려주고 애정의 증표인 밧줄을 만들어 주지만, 피터에게 이 모든 것은 자신과 어머니를 구할 날카로운 칼날로 보인다. 즉, 둘의 접점은 선악의 경계마저도 불분명하기에 더욱 긴장되고 강렬한 것이다. 단적으로 보면 피터는 선이고 필은 악이다. 그러나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더 과장되게 포장해야 했고, 자신 본연의 모습과 정체성을 감춘 채 스스로를 잠그고 살아야 했던 것을 생각하면 필은 단순히 평면적인 악인으로 규정되지도 않느다. 그래서 둘이 함께 하는 장면은 정적이지만 도저히 눈을 뗄 수 없고, <파워 오브 도그>는 서부극이기에 강렬한 퀴어영화가 된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연명하던 서부극에 섬세하고 감성적인 새 숨결을 불어넣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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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킹스맨 : 퍼스트 에이전트> 30초 예고편
역사상 최악의 폭군들과 범죄자들이 모여
수백만 명의 생명을 위협할 전쟁을 모의하는 광기의 시대.
이들을 막으려는 한 사람과
그가 비밀리에 운영 중인 독립 정보기관,
‘킹스맨’의 최초 미션이 시작된다!
베일에 감춰졌던 킹스맨의 탄생을 목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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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즈니+ <한강> 티저 예고편
한!강! 디즈니+에 한강경찰대가 떴다!? 물 흐리는 놈은 우리가 잡는다! 안전한 한강을 위해 오늘도 출동? 권상우X김희원X이상이X배다빈X신현승 그리고 성동일! 막강 캐스팅 조합이 완성한 극강의 水펙터클 코믹액션 [한강] 9월 13일, 오직 디즈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