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DAY2023-04-29 18:00:36
[JIFF 데일리] 성스럽지만 종교적이지 않은 죽음
<막달라> 리뷰
막달라|Magdala
다미앙 매니블|Damien MANIVEL
France | 2022|78 min|DCP|Color|Fiction|15|Asian Premiere
시놉시스
예수의 죽음 이후 마리아 막달레나는 세상에서 자취를 감춘다. 마리아는 머리가 허옇게 센다. 열매를 따 먹고, 빗물을 마시고, 나무 사이에 누워 잠을 청한다. 그리고 숲 한가운데서 잃어버린 사랑을 떠올린다. 마리아는 그를 찾을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한다.
프로그램 노트
마리아 막달라는 예수의 죽음 후 동굴과 숲 속을 떠돌아다녔다고 한다. 이 영화는 은둔한 막달라의 마지막 순간을 감독의 상상력으로 재연했다. 연기자의 움직임을 담는 데 뛰어난 재능을 가진 다미앙 매니블 감독은 전작에서도 협업했던 배우이자 댄서인 엘사(Elsa Wolliaston)에게 인간 사회를 버리고 자연 속에서 홀로 된 막달라의 마음을 따라가게 했다. 영화는 어떤 극적인 이야기나 절망을 나타내기보다 매우 단순하게 막달라의 걸음을 함께하며 연기자가 진실되게 느끼는 공간의 에너지와 자연의 반응을 충실히 묘사한다. 유행을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빚는 젊은 작가 감독 다미앙 매니블은 이 영화로 다시 한번 자신의 재능을 입증한다. (문성경)
성녀(聖女) 막달라 이야기
마리아 막달라(막달레나). 그녀는 호칭이 많다. 예수의 제자. 기독교의 성인(聖人). 예수가 부활했을 때 빈 무덤을 처음으로 목격하고 다른 제자에게 알린 인물. 오해도 많다. 예수에게 향유를 부은 죄지은 여인. 회개한 창녀. 47년 간 광야에서 지낸 이집트의 성녀 마리아와 혼동되기도 했다. 필립보, 토마스, 마리아 복음서 등 몇몇 위경 내용에 근거해 그녀가 예수의 연인이었다는 근거 없는 주장도 널리 퍼졌다.
다미앙 매니블 감독의 <막달라>도 비슷하다. 위의 이미지가 전부 혼재한다. 막달라는 숲에서 고행 생활을 이어간다. 직접 만든 십자가를 놓지 않는 그녀는 환상 속에서 예수를 만난다. 십자가에 매달린 그의 발밑에서 우는 막달라. 예수와 몸을 섞는 막달라. 비가 오는 날 예수의 얼굴을 그리며 그리워하는 막달라. 스크린에 비친 그녀는 예수의 제자이자 연인이고 성녀(聖女)다.
인간 막달라의 죽음을 체험하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막달라의 외관이다. 일반적으로 막달라는 어리고, 환희에 찬 백인 여성이다. 교회가 만든 그림이나 조각 속 그녀는 같은 이미지에 갇혀 있다. 영화 속 막달라는 다르다. 그녀는 노년의 흑인 여성이다. 죽음이 임박한 걸 느낄 수 있을 정도다. 그래서일까? 영화는 통념에서 벗어난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이 든 막달라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살았는지를 전달한다.
물론 <막달라>는 자기 의도를 쉽게 보여주지 않는다. 영화는 느리다. 그녀가 이슬 한 방울을 마시는 순간을 10초가 넘도록 보여준다. 클로즈업도 극단적이다. 러닝타임 절반은 그녀 얼굴로 가득하다. 움직임도 거의 없다. 막달라가 한 걸음을 내딛기도 어려울 정도로 늙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덕분에 <막달라>는 전통적인 성녀 막달라의 이미지를 깰 수 있다. 답답할 정도로 정적인 영화는 관음적이다. 주인공 삶의 단편을 훔쳐본다는 영화의 본분에 충실하다. 실제로 관객은 의식주를 해결하는 막달라의 삶을 그저 따라갈 수밖에 없다. 그녀가 얼마나 예수를 그리워하고 사랑하는지 온전히 느낄 수 있다.
이 과정을 거치고 나면 막달라는 성녀가 아니다. 마지막 시퀀스가 대표적이다. 막달라는 동굴에 누워 죽음을 기다린다. 천사는 촛불을 든 채 그녀가 죽기를 기다린다. 카메라는 막달라, 천사, 촛불을 천천히 오간다. 초가 녹을수록 막달라의 숨은 약해진다. 긴 시간 동안 연인을 그리워하며 고행을 이어간 한 여성의 삶을 요약하듯이. 마지막 숨을 뱉은 그녀의 손에는 작은 십자가가 있다. 막달라는 사랑과 믿음을 지키기 위해 발버둥 친 인간일 뿐이다.
성스럽지만 종교적이지 않은 죽음
그래서 <막달라>는 이율배반적이다. 몇몇 요소는 '이 영화에 새로운 게 있나?' 싶은 의문을 자아낸다. 환상 속에 나타난 예수는 익숙하다. 다른 영화, 드라마, 그림 등에서 재현한 유대인 남성 그대로다. 임종을 지켜보는 천사도 마찬가지다. 기독교 전통에 충실하다. 순진한 얼굴을 가진 백인 소년. 성경 속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을 때 기대할 수 있는 모습대로다.
하지만 종교적인 인물을 묘사하되 결코 종교적이지 않다. 가톨릭 교회가 숨기려 하는 대목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신비주의적 묘사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예수와 행복한 한때를 보내는 젊은 막달라의 모습이 대표적이다. 그녀 얼굴은 희열로 가득하다. 그런데 신실한 성녀보다는 성적으로 흥분한 여성에 가깝다. 조각가 베르니니의 작품 "성녀 테레사의 법열(Ecstasy of St. Teresa)"처럼. 성적 오르가슴을 통해 종교적 신비경을 표현한다. 우연이 아니다. 신비주의적 전통에 따르면 신과 하나 되는 기쁨은 성적인 황홀경을 맛보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산 정상에 선 막달라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자기 심장을 도려내 하늘에 바치는 막달라. 예수가 죽은 뒤 한때 행복했던 기억만 간직한 채 숲 속을 헤매던 여성은 심장을 도려내는 고행 끝에 옛 연인을 만난다. 실제로 막달라는 죽은 뒤에야 예수를 만나러 승천할 수 있다. 즉, 영화는 한 번의 황홀경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한다. 신과 하나 되는 '합일' 경험을 다시 경험하려면 고통으로 가득한 수행을 견뎌야 하니까. 틀에서 벗어난 막달라의 죽음이 성스럽지만 종교적이지는 않은 이유다.
영화 <막달라> 상영시간표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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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패 후 다시 잡는 리바운드
무언가에 실패한 이후 다시 기회를 잡으려 애쓰는 시기가 있다. 마치 농구 경기에서 골대를 맞고 튕겨져 나오는 공을 다시 잡으려는 행위인 리바운드를 하는 것이 그런 모습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수없이 골대에 맞고 튕겨져 나와도 다시 리바운드를 잡아내면 골대 근처에서 다시 한 번 더 골 넣을 기회를 만들어갈 수 있다. 리바운드로 잡은 기회는 그걸 못 잡은 것보다 시간이 덜 들고 덜 힘들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골을 넣기 위해 만들어왔던 주변 상황들을 그대로 다시 이용하면서 시도해 볼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다.
그렇게 우리는 인생에서 수많은 목표를 세우고 또 실패한다. 그 과정에서 크고 작은 리바운드를 잡아내고 또 필요하면 주변 동료에게 패스를 한다. 결과를 얻었든 얻지 못했든 그 치열한 과정에서 적어도 자신은 원했던 목표에 한 발짝 다가선다. 그만큼 내가 성장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수없이 반복되는 실패와 그것을 만회하려는 리바운드 같은 노력은 다음에 이어질 목표과 기회를 놓치지 않게 만드는 발판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실패를 집중해서 보고 있다가 그것을 최소화하려 노력한다. 어쩌면 그것을 인생의 리바운드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인생의 리바운드, 다시 잡은 기회
영화 <리바운드>는 2012년도에 전국 고교농구대회에서 준우승을 했던 부산 중앙고의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된 이야기다. 영화의 제목이 <리바운드>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영화 안에 등장하는 팀과 구성원들은 실패를 경험하고 그것을 극복하려 애쓴다. 기존에 부산 중앙고의 농구팀은 지원자가 없어 없어질 위기에 있었다. 그 상황에서 학교 운영진들은 최대한 적은 돈으로 구단을 운영하기 위해 학교에 공익근무요원으로 군무하던 양현(안재홍)을 감독으로 임명한다.
과거 부산 중앙고에서 선수 생활을 했던 경험이 있는 양현은 길거리 농구를 하던 학생과 기존의 선수들을 힘들게 모집해 구단으로서 인원을 겨우 맞춘다. 중학교에서 농구팀에 있었던 기범(이신영), 규혁(정진운)을 비롯해 순규(김택), 강호(정건주), 재윤(김민) 등의 선수는 전국대회에 나가 예선통과를 목표로 훈련을 시작한다.
이 이야기가 흥미로운 건, 이렇게 모이게 된 팀원들 대부분이 실제 공식적인 경기 경험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중학교 때 농구 팀에서 활약한 선수들은 있지만 큰 경기에서 무언가 결과를 만들어낸 선수들은 없었다. 그러니까 감독을 포함한 선수들 모두 농구라는 영역에서는 실패자라고 부를 수 있는 인물들이다. 또한 농구 초보라고 불러도 될 만큼 형편없는 실력을 가진 멤버들도 포함되어 있다. 감독 양현의 입장에서는 그런 모든 요소들이 만들어낸 구멍을 최대한 없애는 것이 시급히 해야할 일이었다.
실패자와 초보자들로 구성된 선수단
영화가 중반까지 보여주는 첫 전국대회에서 실패하는 과정은 충분히 예측가능한 결과다.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팀원들과 갑자기 이탈한 팀원 등 안 좋은 일들이 겹쳤던 경기는 부산 중앙고의 실패를 확실히 보여준다. 영화가 힘을 얻는 건 실패한 이들이 다시 ‘리바운드’ 즉 그 실패를 만회하려 힘을 모이기 시작하는 과정이 보이면서부터다.
실화의 힘을 무시할 수 없다. 조금만 검색해 보면 관련 기사와 팀의 이야기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총 등록선수가 6명이었고 그나마 한 명의 부상으로 모든 경기를 후보선수 없이 5명이 뛰어야 했던 부산 중앙고가 전국대회에서 어떤 결과를 얻었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세세한 과정은 알려져 있지 않다. 영화는 그런 경기의 모습에 가려진 인물들의 뒷모습을 잘 간추려 관객에게 전달한다.
영화 전체가 공을 던지고 튕겨져 나오는 공을 리바운드하는 과정처럼 보인다. 선수들보다는 감독 양현이 다시 기회를 잡아 목표를 이루려 하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선수들의 얼굴도 중요하게 등장하게 되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얼굴은 바로 경력없는 젊은 감독이라 무시당하던 양현이다. 이미 선수로서의 경력을 잃은 그는 농구로 자신의 내면에 있는 무언가를 보여주려 한다. 결국 그는 자신을 무시하던 이들 앞에서 멋지게 ‘리바운드’를 해낸다. 그래서 영화의 제목과 가지고 있는 이야기가 무척 잘 어울린다.
왜 좋은 팀이 되었는지를 설명하지 못하지만, 실감나게 촬영된 경기
아쉬움이 없진 않다. 부산 중앙고가 대단한 결과를 만들어낸 것은 사실이고, 영화 속에서 보여주는 경기의 모습도 꽤 생동감이 느껴진다. 하지만 부산 중앙고가 어떤 방법으로 결과를 얻어냈는지는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어떤 방식으로 훈련을 하고 어떤 작전을 써서 결승까지 올라가게 되었는지를 자세히 다루지 않는다. 영화가 강조하는 건 선수들의 투혼과 버티기다. 그런 디테일이 보이지 않는 건 아쉽다.
그래도 이 영화는 농구라는 스포츠가 가지는 역동성과 에너지를 놓치지 않고 있다. 경기 장면은 지체하지 않고 빠르게 진행되고 실제 대회의 경기에서 있었던 장면들을 그대로 재현하면서 진짜 관중석에서 대회를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느끼게 한다. 이 영화를 연출한 장항준 감독은 영화에 자신이 잘하는 유머러스한 장면을 살짝 넣으면서도 진중한 경기의 분위기를 놓치지 않았다.
영화 <리바운드>의 인물들은 여러 번의 리바운드를 하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손을 뻗는다. 비록 잡지 못해도 최선을 다해 다른 기회를 잡으려 애쓴다. 모든 인물들이 자신들이 가진 공통의 목표를 보면서 거기에 다가가기 위해 힘을 쏟는 모습은 보는 관객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든다. 어쩌면 부산 중앙고의 선수들에게는 가장 성공적인 ‘리바운드’였을 2012년 전국대회는 이제 많은 사람들에게 다시 ‘리바운드’를 할 힘을 전달할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따뜻하고 힘을 주는 이야기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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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과 이야기의 공명, 이야기로 묻고 삶으로 답하다
소통의 부재는 영혼의 부재
우리 집에는 네 명의 인간과 두 마리의 개가 함께 살고 있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같은 종의 동물이라도 각각 전혀 다른 소통방식을 구사한다. 이를테면, ‘네가 먹고 있는 것을 줘.’라고 표현하고 싶을 때도 “달라”라고 부탁하는 인간이 있고, 손으로 뺏어 먹는 인간이 있다. 개는 엎드려서 침을 흘리거나 양손(앞발)을 사람에게 올리기도 한다. 각각의 종은 서로 같은 언어 체계를 공유하지만, 같은 소통방식을 구사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손이 먼저 나가는 인간은 앞발을 올리는 개와 가까운 소통방식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개도 인간도 종과 언어를 막론하고 저마다 소통하는 방식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의 진정한 언어는 침묵일 수도 있고, 육체적 관계일 수도 있고, 운전 방식일 수도 있다. 어떻게 보면 한국어와 같은 언어 체계는 진정한 소통방식을 번역한 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언어를 뛰어넘어 소통하기 위해서 우리는 각자의 진정한 소통방식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히로시마 연극제의 상주 예술가에게 배정되는 운전사 와타리 미사키(미우라 토코)는 말수가 적지만 차와 상대를 세심하게 배려한다. 그가 밟는 액셀과 브레이크 역시 하나의 소통 수단이다. 미사키는 이를 통해 차 안의 공기와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미사키의 운전은 중력도, 운전하는 사람도 잊게 할 정도로 부드럽다. 이 무저항의 운전은 미사키의 고향 가미주니타키무라에 내리는 눈송이처럼 고요하다. 자신의 존재를 지우며 상대를 편안하게 해 준다. 미사키가 배워야만 했던 소통방식은 그런 것이었다.
배우이자 연극 연출가인 가후쿠(니시지마 히데토시)는 자신의 진짜 마음을 숨기는 방식으로 소통한다. 그의 언어는 침묵 또는 회피라고 할 수 있다. 가후쿠와 드라마 각본가 오토(키리시마 레이카)는 이상적인 부부처럼 보인다. 블라디보스톡 연극제의 항공권 예약이 미뤄져 집으로 돌아간 가후쿠는 아내 오토의 외도를 목격하고 아무 말도 없이 뒤돌아 나간다. 가후쿠가 외면한 진실은 아내의 외도만이 아니다. 그들의 결혼 관계는 사실상 끝났고, 두 사람은 함께할 수 없다는 진실을 그는 끝끝내 마주하지 않는다. 그리고 오토의 죽음으로 가후쿠는 자신의 마음과 진실이 마주할 기회를 영영 잃어버렸다.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에는 단 한 번의 식사 장면이 등장한다. 히로시마 연극제 담당자 윤수(진대연)가 마련한 저녁 식사 자리에는 유나(박유림), 가후쿠, 미사키 그리고 래브라도 리트리버 한 마리가 함께한다. 이 식사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는 대부분 번역된 말이다. 전혀 다른 언어들이 오가고 누군가의 입을 빌려 다시 변환되는 번거로운 과정을 거치지만, 영화의 어떤 장면보다도 따뜻하고, 안정적이며 소통과 공감이 느껴진다. 이 장면은 언어를 뛰어넘는 따뜻한 소통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우리가 소통의 부재를 겪는 것은 언어가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영혼이라 부르는 그것이 언어 안에 담겨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언어와 텍스트의 관계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언어와 텍스트는 닭과 달걀 같은 관계를 맺고 있다. 가후쿠 부부는 4살 딸을 폐렴으로 잃은 후로 관계를 통해 이야기를 잉태하기 시작한다. 오토의 음성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는 가후쿠의 번역을 거쳐 오토에게 전해진다. 다시 오토에게 돌아온 이야기의 잔상들은 각본, 즉 텍스트로 태어날 준비를 하게 된다. 이렇게 탄생한 이야기는 단순히 캐릭터와 플롯이 아니라 무의식과 욕망의 집합체와 같다. 오토의 음성과 그것을 양분 삼아 만들어진 이야기는 오토의 창조물이지만, 독립된 생명체처럼 타인에게 다른 모습으로 뿌리내리게 된다. 가후쿠에게 오토의 이야기는 진실이 드러나기 직전의 두려움과 불안의 기척을 품은 채 마무리되었지만, 다카츠키(오카다 마사키)에게 그 이야기는 불길한 고요함으로 가득 찬 세상의 모습이다.
각본으로 만들어진 텍스트는 결국 발화함으로써 완성된다. 그렇기에 오토는 자신의 이야기와 무의식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완성해줄 누군가를 찾았고, 그가 바로 다카츠키였다. 가후쿠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며 감동하고, 오토의 열렬한 팬인 다카츠키는 ‘바냐’라는 인물에는 쉽게 이입하지 못한다. 다카츠키는 체호프의 ‘바냐’보다 오토의 이야기 속 칠성장어의 전생을 가진 소녀를 닮은 인물이다. 그는 체호프의 성실하며 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세계보다 무의미한 기다림과 충동과 욕망의 세계에 끌린다. 불가해하고 불길한 무언가로 가득한 오토의 텍스트야말로 다카츠키의 삶을 담을 텍스트다. 그는 오토와 같은 언어, 즉 같은 소통 방식을 공유하고 있는 인물이다. 다카츠키는 오토의 텍스트를 완성했으나 바냐가 되어 체호프의 텍스트를 완성하는 데에는 실패한다.
이와 반대로 이성적이며 통제적인 가후쿠는 오토의 텍스트를 똑바로 마주할 수 없다. 가후쿠가 오토에게서 듣는 것은 오직 이야기뿐이다. 자기 안의 진실을 마주하지 못한 가후쿠는 이야기 안의 오토를 외면한다. 가후쿠가 오토의 목소리로 듣는 또 하나의 이야기는 녹음된 ‘바냐 아저씨’의 대본이다. “대사를 입에 올리면 나 자신이 끌려 나와” 오토의 음성으로 울리는 체호프의 텍스트는 가후쿠에게 계속해서 진실보다 깊은 것을 묻는다. 가후쿠는 체호프와 오토가 자신에게 걸어오는 말을 애써 피하고 있다.
오토의 죽음으로부터 2년이 지난 후 히로시마 연극제에 초대된 가후쿠는 체호프의 희곡 ‘바냐 아저씨’의 연출을 맡는다. 가후쿠의 연극은 일본어, 중국어, 한국어 그리고 한국 수어까지 서로 다른 언어가 한데 어우러진다. 이 특별한 공연을 준비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대본 리딩이다. 어떤 감정도 없이 아주 천천히 대본을 읽는 것이다. 배우들은 불완전한 언어를 뛰어넘어 소통하는 동시에 온몸으로 체호프의 텍스트를 체득해야 한다. 언뜻 이해하기 어렵고 지루한 이 과정을 가장 먼저 이해한 것은 수어를 사용하는 유나다. 자신의 언어가 타인에게 닿지 않는 것이 평범한 일인 그에게 보고 느끼며 공감함으로써 기능하는 연기는 몸에 잘 맞는 옷과 같다. “체호프의 글이 내 안에 들어와 움직이지 않던 몸을 움직이게 해 줘요” 체호프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유나와 소통하고 있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하루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졌지만, 영화의 영혼은 체호프의 텍스트에 담겨있는 것처럼 보인다. 체호프의 희곡 ‘바냐 아저씨’는 ‘바냐’가 한때 누이동생의 남편이자 존경하는 학자였던 교수 세레브랴코프를 원망하고, 교수의 두 번째 부인 옐레나를 사모하게 되며 겪는 갈등을 다룬다. 체호프는 우리가 갈등과 절망, 적의와 증오를 넘어서 계속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현재의 고난과 슬픔보다 미래의 희망과 기쁨을 꿈꾼다. 체호프의 텍스트는 하마구치 류스케가 선택한 많은 인생을 담을 수 있는 넓은 그릇과 같다.
대본 리딩이 주를 이루는 연극 연습과 오토의 목소리로 녹음된 ‘바냐 아저씨’가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붉은색 사브 900을 오가며 영화는 체호프의 텍스트를 반복한다. 체호프의 텍스트는 대사뿐만 아니라 이야기로도 반복된다. 누이동생을 잃고, 존경하던 교수에게 실망을 거듭하며 바냐는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휩싸인다. 바냐가 교수를 위해 바쳤던 청춘은 이미 흘러갔고 옐레나에 대한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며 소냐의 사랑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모든 것은 여전히 엉망이지만 바냐와 소냐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일을 계속한다. 딸과 아내를 잃은 상처를 마주하게 되는 가후쿠 뿐만 아니라 아이를 잃은 상실을 견뎌내고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게 된 유나와 애정과 증오의 대상이었던 엄마를 잃은 미사키의 삶 역시 체호프 텍스트의 또 다른 변주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언어의 불완전함을 뛰어넘어 공명을 시도하는 이야기의 작동방식을 보여주는 영화다. 이는 일견 언어의 무용함을 말하는 듯 하나 각자의 언어와 이로 만들어진 텍스트는 호응하는 삶과 사람이 있다는 것에 가깝다. 감독은 언어의 가면을 쓴 이야기를 단지 텍스트가 아닌 독립된 생명체처럼 마주 보게 한다. 그렇게 언어와 텍스트는 계속해서 삶과 사람에게 호응을 시도하고 영화는 그 순간을 담아낸다.
삶과 사람을 담는 그릇
가후쿠와 미사키가 지나온 터널처럼 우리가 지나온 궤적을 이해하기 위한 이야기가 모두에게 필요하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이처럼 불완전한 언어와 불가해한 텍스트에 사람과 삶을 담음으로써 이야기에 힘을 불어넣는다. 언어와 텍스트가 사람과 삶을 만나는 순간 발생하는 에너지는 영화 안팎으로 퍼져나가 관객의 삶에도 영향을 미친다.
다카츠키와 가후쿠가 차의 뒷좌석에서 대화를 나누고 헤어진 후 가후쿠는 처음으로 미사키의 옆에 앉는다. 차 안에서 흡연을 피하던 가후쿠는 미사키에게도 담배를 권한다. 차 위를 향해 뻗은 두 사람의 손에서 담배 연기는 망자를 위한 향처럼 피어오른다. “넌 엄마를 죽였고, 난 아내를 죽였어” 오래된 죽음을 놓지 못하고 있던 두 사람은 도망치고 미뤄왔던 애도를 시작한다. 카메라는 나란히 피어오르는 연기에서 멀어져 익스트림 롱숏으로 이리저리 얽혀 있는 도로와 어찌 됐든 앞으로 나아가는 차들을 바라본다. 그 속에서 점처럼 작아진 사브 900도 앞으로 나아갈 거라고 믿으면서.
“바냐 아저씨, 우리 살아가도록 해요. 길고 긴 낮과 긴긴밤의 연속을 살아가는 거예요. 운명이 가져다주는 시련을 참고 견디며 마음의 평화가 없더라도,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이 든 후에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그리고 언젠가 마지막이 오면 얌전히 죽는 거예요. 그리고 저세상에 가서 이야기해요. 우린 고통받았다고, 울었다고, 괴로웠다고요. 그러면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어여삐 여기시겠지요. 그러면 우린 기쁨에 넘쳐서 미소를 지으며, 지금 우리의 불행을 돌아볼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우린 평온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소냐 역의 유나가 바냐 역의 가후쿠를 감싸 안고 수어로 전하는 연극의 마지막 장면은 연극을 보는 듯한 롱숏으로 길게 이어진다. 그리고 이를 응시하는 미사키의 곧은 정면 얼굴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체호프의 텍스트에 대답한다. 체호프의 텍스트와 유나의 언어 그리고 미사키의 삶이 만난 이 장면 하나로 <드라이브 마이 카>는 그 역할을 다한 것이다. 감독이 전작 <해피 아워>(2015)에서 사람들이 서로에게 무게를 기대며 중심을 맞추는 소통에 집중했다면,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는 사람과 텍스트가, 이야기와 이야기가 마주하는 소통에 집중한다.
가후쿠가 히로시마로 향하는 도로 위에서 시작했던 영화는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고 있는 미사키의 뒷모습을 보며 끝난다. 도망치듯 떠나왔던 가미주니타키무라를 뒤로 하고, 멈춰 설 수밖에 없었던 히로시마를 벗어나 새로운 땅에서 미사키는 앞으로 향한다. 사브 900을 타고 한국 부산의 도로를 달리는 미사키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며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드라이브를 즐긴다. 끝없이 이어진 도로처럼 삶은 계속 이어지고, 언제나 또 다른 슬픔이 기다리고 있을 테지만 멈추지 않는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마침내 텍스트와 언어에 담긴 사람과 삶은 “길고 긴 낮과 긴긴밤의 연속을” 살아가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음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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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을 이야기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왜 날 연기하고 싶어요?” “전 이해하기 어려운 캐릭터가 좋아요” 신문 1면을 장식하며 미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충격적인 로맨스의 주인공들인 ‘그레이시’(줄리안 무어)와 그보다 23살 어린 남편 ‘조’(찰스 멜튼). 20여 년이 흐른 어느 날, 영화에서 그레이시를 연기하게 된 인기 배우 ‘엘리자베스’(나탈리 포트만)가 캐릭터 연구를 위해 그들의 집에 머물게 된다. 부부의 일상과 사랑을 깊숙이 들여다보는 엘리자베스의 시선과 과거의 진실을 파헤치는 그의 잇따른 질문들이 세 사람 사이에 균열을 가져오는데...
<메이 디셈버> 줄거리
그레이시는 과거를 돌아보지 않는다. 그는 그런 면모가 자신의 자아가 튼튼하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이는 진짜 튼튼해서 하는 말이 아닌 세뇌에 가깝다. 그레이시는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자신과 자신의 주변 인물들을 통제하려 한다. 딸의 졸업식 드레스를 칭찬인 것만 같은 말로 자신의 취향으로 바꾸게 만들고, 조의 스케줄을 직접 관리하는 등의 모습을 보인다. 또한 자신의 주변을 휘젓고 다니는 엘리자베스의 행동을 견디지 못해하고 케이크 주문이 취소되자 컨트롤되지 않는 상황에 대해 울분을 토해낸다. 이런 그레이시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그레이시가 얼마나 강박적으로 자신 주변의 환경들을 정적으로 만들려고 하는지 알 수 있는데, 자신과 조의 과거 역시 벗어날 수 없다. 온갖 것들을 견딜 수 없는 그레이시는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이 현재 가족들과 행복하다는 것에 충실하기 위해 주변과 자신을 본인이 컨트롤할 수 있는 범위 내에 존재하게끔 만든다. 그리고 이런 그레이시의 통제에 가장 영향을 많이 받는 인물은 바로 '조'이다.
20년 전 성인인 그레이시가 미성년자인 조와 사랑을 한 것은 분명 범죄이고 조는 피해자이다. 그렇지만 현재의 조는 자신의 선택으로 그레이시가 감옥에서 나올 때까지 기다려주고 그와 함께 아이들을 키우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듯 보인다. 하지만 조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딘가 이상하다. 그는 더이상 '그레이시'와 밀회를 나누던 중학생이 아니다. 그 사건 당시의 '그레이시'의 나이가 되었고, 세 아이들을 곧 독립시킬 예정인 아버지이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어른인 '그레이시'가 해야 하는 일을 하나하나 일러주고 허락해 줘야만 움직인다. 그레이스의 허락 내에서 살아가는 그는 아직까지도 중학생에 머물러 있는 걸까? 그런 그의 삶에 변화가 생긴다. 바로 자식들의 독립이다. 곧 세 아이들을 모두 떠나보내야 하는 그레이시와 둘만 함께하는 미래를 고민한다. 자신의 책임이라 생각했던 아이들이 떠나고 나서야 그때의 중학생에서 성인으로 성장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아직 그레이시라는 책임이 남아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후의 삶도 그레이시와 함께 이곳에서 보낼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엘리자베스가 오고 그와 계속 부딪히며 조는 과거를 다시 훑어보기 시작한다. 자신에게는 정말 선택권이 있었을까, 이전까지의 삶이 어땠지,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등등 진작했어야 할 고민들을 이제야 하며 멈춰있던 20년의 세월을 따라가기 시작한다.
삶의 변화로 인해 더이상 제 안에 가둬둘 수 없는 상황은 그간 억눌려왔던 것들을 다 뱉어내듯 요동친다. 그레이시와 대화를 시도하려는 조와 그레이시가 만들어둔 삶에서 벗어나 과거를 파헤치려 드는 조를 견딜 수 없는 그레이시는 부딪히고 균열된다. 그레이시가 꾸려낸 삶은 더이상 그레이시 본인조차도 연기인지 진짜인지 구분할 수 없기에 그레이시는 그것이 진짜라 믿고 조와 엘리자베스 등 외부에 존재하는 돌발 현상들에도 꿋꿋이 서있는다. 그리곤 비로소 자신이 맡을 역할인 그레이시를 전부 이해했다 여긴 엘리자베스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들었던 나의 이야기는 거짓이며 나의 자아는 튼튼하다고.엘리자베스는 자신이 맡은 역할을 완전히 이해하고 그 인물 자체가 되기 위해 작품에서 다루는 실제 사건의 인물들인 그레이시와 조를 관찰하러 간다. 그는 그들의 바로 옆에서 질문하고 경험하며 그레이시의 전부를 자신에게 빙의시키려 한다. 엘리자베스는 끊임없이 '그레이시'를 아는 사람들, '그레이시'가 자주 다녔던 장소들을 계속 들쑤시고 다니며 그레이시의 감정과 생각을 이해하려 한다. 그레이시가 자신의 삶에 지나치게 끼어들고 사건 외의 자신의 모든 삶을 알아내려는 엘리자베스를 경계하지만 엘리자베스는 기어코 조지에게서 그레이시의 행동에 대한 원인을 알아내고 자신이 비로소 그레이시를 완벽히 이해했다 여긴다. 하지만 떠나는 엘리자베스에게 그것은 거짓이라 말하며 엘리자베스가 그레이스의 속내와 실제 상태는 이러할 것이라 단정했던 모든 것들을 다시 의문에 빠지게 만든다.
촬영을 하며 계속해서 다시를 말하는 엘리자베스와 마찬가지로 <메이 디셈버>를 보던 관객들도 순식간에 의문에 빠진다. 방금 위에 쓴 글처럼 그레이시가 이러한 인물이라 결론 내렸는데, 이제는 의문투성이가 되어버린다. 여기서 왜 이 영화가 단순히 실화를 다시 재연하는 방식을 선택하지 않고 실화 속 인물들의 역할을 맡은 캐릭터가 그들을 관찰하고 따라가게 만들었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잠깐 본 그레이시를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와 단편적인 이야기만으로 이해했다 말하는 엘리자베스는 영화 속에서 단편적으로 보여준 그레이시를 전체인 양 해석하고 그의 모든 것을 재단해버린 관객들과 같다.
왜 우리는 쉽게 단정 지어버렸을까. 영화 내에서 조는 그레이시와 자신의 일을 이야기라 말하는 엘리자베스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건 이야기가 아니라고, 이건 우리들의 진짜 삶이라고. 남의 삶을 흥미로운 호기심이 드는 이야깃거리 취급해버렸기 때문에 엘리자베스는 주변인들의 이야기로 그레이시를 이해했다 여기고 관객들은 영화 속의 정보만으로 그레이시의 삶을 판단해 버린 것이다. 결국 엘리자베스의 연기는 그레이시의 범죄만으로 그의 삶을 떠들어대던 언론과 다를 바 없다. 짧은 글 하나로 전체를 판단하고 모든 삶이 이야기로 취급되는 사회에서 우리는 어떤 시선으로 다른 이의 삶을 대해야 할지 생각하게 만들어주는 영화였다.
*이 글은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참석한 <메이 디셈버> 시사회에서 관람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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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WFF 데일리] '사람냄새'가 그 '사람냄새'일 줄이야
- 사람냄새 이효리Super Star Lee HyoriCast감독: 이옥섭출연: 이효리, 구교환, 홍시영, 심달기Synopsis슈퍼스타 이효리에게 삼 남매가 찾아온다. (출처: 서울국제여성영화제)Review티빙 리얼리티 '서울체크인' 프로젝트의 하나로 진행된 이효리의 스크린 데뷔작이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관객과 만났습니다. 모든 행보에 관심과 지지를 받는 이효리와 뜨는 영화 듀오 2X9(이옥섭, 구교환)의 만남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충분했죠. 과연 2X9는 ‘슈퍼스타 이효리'를 어떻게 그려냈을까요? 참으로 묘한 영화, <사람냄새 이효리>입니다.⊙ ⊙ ⊙그간의 이미지를 몽땅 깨부수는 새로운 ‘효리’의 탄생<사람냄새 이효리>는 불우한 삼 남매 ‘교환', ‘시영', ‘달기'와 슈퍼스타 ‘효리’의 이야기입니다. 코피가 멈추지 않는 질병을 가진 ‘교환'은 코피로 쓴 혈서를 판매하며 살아갑니다. 어느 날, 슈퍼스타 ‘효리'가 ‘교환'에게 혈서를 부탁하고, 삼 남매는 ‘효리’의 집을 방문하죠. 그리고 삼 남매와 ‘효리'가 맺었던 과거의 인연이 드러납니다.‘이효리' 하면 자연스럽게 몇몇 이미지들이 떠오릅니다. 모두가 사랑하는 셀러브리티, 대중에게 긍정적인 임팩트를 전달하는 영향력자, 동물을 사랑하는 동물애호가이자 채식주의자. 하지만 이옥섭 감독은 “관객의 기대를 완전히 벗어난 이효리를 보여주는 것"이 <사람냄새 이효리>의 연출 의도라고 말했습니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감독의 말을 이렇게 풀이했습니다. ‘그럼 슈퍼스타 이효리의 소탈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려나 보다. 그래서 제목도 <사람냄새 이효리>구나.’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효리는 방송에서 소탈한 면모를 가감 없이 드러내는 연예인이니까요.(※스포일러 주의) 발상의 전환은 언제나 신선한 충격을 선사합니다. 2X9는 동물권을 지키는 이효리에게, 이효리 자신을 연기하는 이효리에게, 식인하는 범죄자의 역할을 부여했습니다. 2X9가 ‘사람냄새난다'는 말에서 찾아낸 또 한 가지 의미, ‘효리'는 사람을 먹었기 때문에 입에서 (말 그대로) 사람냄새가 났던 겁니다. <사람냄새 이효리>라는 제목을 보고, 사람들은 지금까지 봐왔던 소탈한 이효리의 이미지를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이옥섭 감독은 정말로 관객의 기대를 완전히 벗어난 이효리를 그려냈죠. 남매의 원망을 받는 ‘효리', 살인을 합리화하는 ‘효리’, 혈서 대필을 요청하는 ‘효리’, 그릇된 방식으로 동물권을 지키는 ‘효리’. <사람냄새 이효리>의 ‘효리’는 이효리의 이미지를 몽땅 깨부숴 버리는 인물입니다.그런데 마음 한구석에서는 작은 생각 하나가 스멀스멀 피어올랐습니다. ‘‘효리’를 연기하는 이효리는 꽤 해방감을 느꼈겠는걸?’ 대중은 열띤 논쟁이 벌어지는 이슈에 대해 특정한 입장을 표명한 셀러브리티나 영향력자에게 더 예리한 잣대를 들이밉니다. “이효리, 채식주의자라더니 가죽 재킷 입었네?”, “이효리가 이렇게 해외에 오래 있으면, 강아지들은 누가 돌봐?” 같은 식이죠. (임의로 작성한 내용입니다. 실제라고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그러나 이효리는 언제나 자신의 입장에 부합하는 행보만을 보여왔습니다. 이는 달리 말하면, 어떤 순간에도 자기 자신과 타협한 적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멋지고 대단하지만, 알게 모르게 그녀는 꽤 많이 지치지 않았을까요? 세상이 기대하는 이미지와 반대되는 자신을 연기한 이효리가 영화를 촬영하는 동안만큼은 조금의 해방감을 느꼈길 바랍니다. 가끔은 행복한 척하는 것만으로도 진짜 행복해지기도 하니까요.⊙ ⊙ ⊙오묘하고, 기묘하고, 미묘하다<사람냄새 이효리>는 한 마디로 난해합니다. 코피로 혈서를 써서 판매하는 행위, 수십 마리의 햄스터에게 집을 빼앗겼다는 삼 남매의 이야기, 자꾸 트림하고 뜬금없이 요가 하는 슈퍼스타… 솔직히 말해 19분 내내 영화는 이상한 이야기만 늘어놓습니다. 러닝타임이 짧은 단편 영화는 함축과 생략이 많아 이해하기가 더 어렵기도 하고요. 만약 영화를 보고 난 직후에 누군가 제게 영화가 어땠냐고 물었다면, 저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을 겁니다. 무엇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거든요.하지만 모든 것이 난해한 이 영화에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사람냄새 이효리>를 보고 나면, 열이면 열, 거듭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유고걸(U-Go-Girl)’ 시절의 2008년 ‘효리'와 혈서 대필을 요청하는 2022년 ‘효리'의 차이에 대해, 햄스터를 갖고 싶다는 ‘달기'의 귀엽고 사랑스러운 소원을 전국 방송에 공개해버린 ‘효리'의 행동이 불러온 나비효과에 대해, 반려견을 잡아먹은 아저씨를 잡아먹을 만큼 동물에 진심인 ‘효리’가 삼 남매를 거리로 내쫓은 햄스터에 별 관심이 없는 이유에 대해 자꾸만 생각해보게 됩니다. 이것이 <사람냄새 이효리>의 오묘하고 기묘하고 미묘한 매력이죠.‘오묘하다'는 심오하고 미묘하다는 뜻입니다. ‘기묘하다'는 기이하고 신기하며 묘하다는 뜻이고요. ‘미묘하다’는 아름답고 교묘하다는 뜻이죠. <사람냄새 이효리>는 심오하고, 기이하고, 색다르고, 규정하기 어려우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재치 있고, 결국 아름다운 작품입니다.⊙ ⊙ ⊙생각거리가 많은 영화는 여러 번 반복해서 시청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사람냄새 이효리>는 2X9의 유튜브 채널에서도 무료로 감상할 수 있으니, 오묘하고 기묘하고 미묘한 이 영화의 매력을 양껏 느껴보시길 바랍니다.Schedule in SIWFF2022.08.26(금)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MX관 16:002022.08.28(일)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MX관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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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둑의 캐릭터를 다양화하다
최동훈 감독의 필모를 하나씩 살펴보고 있는 요즘, 그의 첫 천만관객 영화 여던 영화 <도둑들>을 봤다. 어렸을 적 봤던 기억은 있지만 앉아서 제대로 보진 않아서 이렇다할 기억이 별로 없었는데 왜 천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선택했는지 알 수 있었던 재미있는 작품이었다.
영화 <도둑들> 시놉시스
10인의 도둑, 1개의 다이아몬드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팀으로 활동 중인 한국의 도둑 뽀빠이와 예니콜, 씹던껌, 잠파노. 미술관을 터는데 멋지게 성공한 이들은 뽀빠이의 과거 파트너였던 마카오박이 제안한 홍콩에서의 새로운 계획을 듣게 된다. 여기에 마카오박이 초대하지 않은 손님, 감옥에서 막 출소한 금고털이 팹시가 합류하고 5명은 각자 인생 최고의 반전을 꿈꾸며 홍콩으로 향한다.
홍콩에서 한국 도둑들을 기다리고 있는 4인조 중국도둑 첸, 앤드류, 쥴리, 조니. 최고의 전문가들이 세팅된 가운데 서로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는 한국과 중국의 도둑들. 팽팽히 흐르는 긴장감 속에 나타난 마카오박은 자신이 계획한 목표물을 밝힌다. 그것은 마카오 카지노에 숨겨진 희대의 다이아몬드 <태양의 눈물>.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위험천만한 계획이지만 2천만 달러의 달콤한 제안을 거부할 수 없는 이들은 태양의 눈물을 훔치기 위한 작업에 착수한다.
그러나 진짜 의도를 알 수 없는 비밀스런 마카오박과 그런 마카오박의 뒤통수를 노리는 뽀빠이, 마카오박에게 배신당한 과거의 기억을 잊지 못하는 팹시와 팀보다 눈 앞의 현찰을 먼저 챙기는 예니콜, 그리고 한국 도둑들을 믿지 않는 첸과 중국 도둑들까지. 훔치기 위해 모였지만 목적은 서로 다른 10인의 도둑들은 서서히 자신만의 플랜을 세우기 시작한다.* 해당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도둑들>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
캐릭터별 매력이 넘쳤던 작품최동훈 감독 작품의 매력포인트는 캐릭터가 굉장히 다채롭다는 점이다. 사실 투톱이든 타이틀이든 주연캐릭터 1,2명에 의존해 극을 이끌어 가는 경우가 많은 반면 최동훈 감독의 작품들에서는 굉장히 다양한 캐릭터들을 만나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많은 캐릭터들이 다른 한 캐릭터를 빛내주기 위해 있는 존재들이 아니라 다 나름 자신의 빛을 잃지 않고 영화 속에 녹아든다. 이러한 최동한 감독의 특징이 영화 <도둑들>에서 잘 드러난 것 같다. 마카오박, 펩시, 뽀빠이, 예니콜, 첸, 씹던껌, 앤드류, 잠파노까지 8명이라는 캐릭터가 물론 등장씬의 수는 다를지 모르더라도 그 각각의 캐릭터들이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관객의 머리 속에 잘 각이되게끔 캐릭터의 매력을 극대화한 작품이었다.
상업영화가 과연 나쁜 것일까?
영화 <도둑들> 리뷰를 쓰면서 다른 리뷰들도 함께 봤는데 영화 <도둑들>에 대한 혹형이 많았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좋게 봤다. 왜냐면 상업영화가 꼭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기 때문이다. 다만 스크린의 독과점이 나쁘다고 생각할 뿐이다. 영화 <도둑들>은 사실 대중들이 원하는 오락상업 영화의 문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일상생활에서 느끼기 힘든 짜릿함, 통쾌함을 대리 만족시켜주고 무언가를 훔친다는 범죄를 지켜보며서 어찌보면 일탈의 경험도 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자신이라면 하지 못할 행동들을 영화를 보면서 희열을 느끼고 그 감정과 충동을 희석시키는 오락영화로서 영화 <도둑들>은 충분히 그 역할을 해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천만이 넘는 사람들인 선택한 것인 아닐까? 단지 상업영화라고 해서, 오락영화라고 해서 따가운 눈초리를 보내는 것은 사실 조금 불편하다.
도둑은 도둑일 뿐이다
영화 <도둑들>을 보면서 좋았던 점은 도둑의 미화가 지나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다른 작품들을 보다보면 솔직히 도둑이 세상을 구한다던지, 구하지도 않았는데 약간 그저 본인들의 이익을 취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재물을 뺏어온 것인데 이 과정을 영웅화한다던지 이런 부분들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 <도둑들>에서는 도둑은 도둑이다. 라는 스텍스가 명확해서 액션신이나 다이아몬드를 훔치러가는 과정에서 보여지는 도둑들의 굉장한 능력들을 보면서도 마지막에는 결국 도둑일 뿐이라는 사실을 명시하면서 영웅화 하지 않았다는 점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솔직히 도둑은 범죄자다. 하지만 영화의 소재로서는 너무나도 매력적이다. 그렇기에 영화 속에서는 그들의 행위를 미화하고 정당화하며 영웅화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작품은 그렇지 않아서 만족스러웠다.
영화 <도둑들>은 두고두고 찾아볼 명작은 아니더라도 남는 시간에 재밌게 볼 수 있었던 즐거운 오락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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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름을 바라보는 이해의 시선, 그 끝은 ‘사랑’
레즈비언 딸, 그의 동성 연인과 함께 살게 된 50대 중년 여성의 소리 없는 외침이 스크린을 뚫고 나온다. <딸에 대하여>는 성소수자와 이를 바라보는 엄마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치매 노인 등 사회의 가장자리에 놓인 이들에게 시선이 옮겨지고, 이야기는 확장된다. 혐오와 배제의 세상 속에서 이 중년 여성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가! 그리고 그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가!
엄마(오민애)는 속이 뒤집힌다. 학창 시절 공부도 잘해 교수는 아니지만 대학 강사로 밥 벌어먹는 줄 알았던 하나밖에 없는 딸 그린(임세미)의 전화 한 통 때문이다. 살던 집을 빼야 하니 돈 좀 구할 수 있냐는 이야기였다. 애지중지 키운 딸의 미래를 위해 대출을 알아봤지만 쉽지 않다. 엄마는 하는 수 없이 그린에게 집으로 들어오라고 말한다. 그 말인즉, 딸과 동거 중인 동성 연인 레인(하윤경)도 함께 산다는 걸 허락한다는 말이다. 맞다. 딸은 레즈비언이다. 성소수자인 딸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은 굴뚝 같은 엄마지만 세상사 뜻대로 되는 게 어디있나. 그녀의 직장인 요양 보호 시설도 마찬가지다. 담당 치매 노인 제희(허진)를 잘 보살피기 위해 노력하지만, 시설 관리자는 사사건건 트집만 잡는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는 레인에게 동료 강사의 부당해고에 분노하며 생계는 뒷전이고 투쟁에 앞장서는 딸의 이야기를 듣는다.
<딸에 대하여>는 너무나 가까워서 다 알고 있는 것 같은 딸을 새롭게 알아가고 이해하는 과정을 그린다. 그것도 조심스럽고 섬세하게. 말을 뱉기보다 삼키는 엄마의 침묵은 생각의 여지를 만들고, 그녀의 시선은 이해라는 물꼬를 틔운다.
제목 그대로 부당한 일에 참고 견디며 살아가는 게 미덕이라 여기는 엄마는 자신과 정반대의 길을 가는 딸에게 이렇다 할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딸의 가시 박힌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다. 대학교 측에 반기를 들지 말라는 말에 그린은 “엄마 같은 사람들이 못 하게 막고 있다고 생각은 안 해?”라는 말로 딱 잘라 말한다. 한 마디도 지지 않는 딸의 당당함에 엄마는 한숨과 침묵으로 일관하지만, 이런 부딪힘은 오히려 자신과 다른 딸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된다. 더불어 딸, 그리고 딸의 동성 연인 레인과 동거를 하면서 자의 반 타의 반 이들에게 향한 시선은 영화의 가장 중요한 이해의 첫 발걸음이 된다.
엄마의 행동은 가부장적인 사회 안에서 철저하게 교육된 바를 실행에 옮기는 것에 기인하지만, 그 안을 살펴보면 혼자서 살아가기엔 힘들고 벅찬 사회의 가장자리에 사는 걸 걱정하는 마음이 담겨있다. 누구나 어떤 대상이든 사랑은 할 수 있지만, 사회가 지정한 부부,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 그 제도 밖에 머물러야 하는 딸의 외로운 미래가 그녀의 눈엔 선하기 때문. 그런 의미에서 엄마는 딸과 레인의 관계를 ‘소꿉장난 같은 거’라고 표현한다.
극 중 엄마의 얼굴에 드리워진 피곤함은 딸을 향한 걱정뿐만이 아니다. 자신의 든든한 노후 보험쯤으로 생각했던 딸의 보살핌을 받지 못할 거라는 공포감도 한몫한다. 이 불안의 시작은 과거 좋은 일을 많이 하며 이름을 건 재단까지 설립했지만 가족 없이 늙음과 치매에 주저앉아 요양 병원 신세를 지는 제희다. 엄마는 혈연관계가 아님에도 지나칠 정도로 제희를 돌본다. 어찌 보면 그녀의 노력은 자신이 제희를 대하는 것만큼 사람들도 자신에게 그래 주길 바라는 보상 심리가 담겨있다. 이는 자신 또한 제희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공포를 잊기 위한 자기 합리화처럼 보인다.
조금 특별한 모녀간의 이야기는 뒤늦게 찾아온 엄마의 성장통 이후 혼자가 되는 게 무섭고 벌써 그런 상황에 놓인 이들, 힘도 능력도 없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이들에게 놓인 현실적 이야기로 확장한다. 영화는 누군가에게는 행복한 삶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고통과 불안한 삶이 될 수 있다는 역설, 사회 제도 반대편에 놓인 이들의 삶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고 이해해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을 전한다. 감독은 여기서 더 나아가 가족, 혈연 간에서 벗어나 같은 처지에 놓인 이들의 연대 중요성도 설파한다. (후반부 주요 네 인물들이 보여주는 모습을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영화는 한 개인의 고민으로 시작해 사회적 고민의 영역까지 생각하게 만들고 관객을 그 건강한 고민에 빠뜨린다. 이를 가능하게 한 건 이미랑 감독의 섬세한 연출력 덕분이다. 김혜진 작가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이 작품의 가장 큰 걸림돌은 일인칭 화자(엄마)의 내면 독백으로 구성된 부분을 어떻게 영상으로 표현할 것인가다. 텍스트로 표현된 이 부분을 감독은 엄마의 미세한 표정 변화와 행동, 이를 담아낸 카메라 구도와 조명 등으로 텍스트를 오롯이 영상으로 변환한다. 이를 잘 보여주는 장면 중 하나가 엄마와 레인이 식탁에서 대화로 포장한 기싸움을 벌이는 장면인데, 미세한 카메라 앵글로서 누가 이 대화의 우위를 점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표현한다. 봉테일 저리가라다.
이런 감독의 의도가 빛을 발하는 건 배우들의 연기다. 오민애, 허진, 임세미, 하윤경 등 주요 인물들은 자신이 맡은 역할을 표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느낌이다. 큰 사건보단 순간의 감정 동요에 따른 미세한 차이의 연기가 빛을 발한다. 그 중심에는 역시 작년 부산국제영화제 올해의 배우상을 수상한 오민애가 있다.
그녀는 1부터 10까지의 정수가 아닌 소수점 차이를 감정으로 보여주는 섬세한 연기를 펼친다. 집중하지 않으면 볼 수 없을 정도의 디테일을 잡아가며 엄마가 가진 복잡다단한 감정을 온몸으로 표현한다. 그동안 다수의 작품에서 오민애 배우의 연기를 봐왔던 관객들도 새로움을 느낄 정도. 심지어 부당하다고 느끼는 것에 대항하는 딸 그린의 완고함과 다른 엄마만의 완고함과 뚝심을 너무나 잘 표현한다. 이 밖에도 강애심, 이창훈, 장선 등 조연 배우들의 연기도 수려하다.
<딸에 대하여>는 대상과 시선에 따라 ‘성소수자에 대하여’, ‘치매 노인에 대하여’, ‘중년 여성에 대하여’라고 바꿔 부를 수 있다. 그만큼 이 영화는 한 개인과 가족만이 아닌 우리 모두의 이야기인 셈. 부디 이 작품을 통해 나와 다른 삶을 사는 이들을 이해하는 시간을 갖길 바란다. 그 작은 노력이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사랑의 씨앗이 될 거니까 말이다.
덧붙이는 말: 스포일러라서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오민애 배우의 마지막 엷은 미소는 내년 따뜻한 봄이 올 때까지 잊히지 않을 듯하다. 따뜻하고 열린 시선으로 바라보길 바란다.
사진 제공: 찬란
평점: 4.0 / 5.0
한줄평: 다름을 바라보는 이해의 시선, 그 끝은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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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노를 품은 배트맨, 새로운 고민을 가지고 돌아오다!
맷리브스 감독과 로버트 패틴슨이 주연을 맡은 새로운 배트맨이 돌아왔습니다.
다크나이트 시리즈 이후 배트맨 솔로 영화는 오랜만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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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 웨인, 배트맨의 고민을 잘 느낄 수 있죠.
분위기와 어울리는 영화 음악과 빌런 리들러의 존재가 배트맨의 생각을 바꾸는데 큰 영향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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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리뷰/결말포함]군필이라면 다 아는 그 영화 분대장 교육장에서 틀어주는 바로 그 영화
#군대영화#밀리터리영화#전쟁영화
영화 ' 위 워 솔저스 '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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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즈니+ <화인가 스캔들> 메인 예고편
누구를 믿을 것인가 그들의 모든 것이 우아하게 폭로된다 [화인가 스캔들] 7월 3일 디즈니+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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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범죄도시4> 인터내셔널 예고편
전 세계가 괴물형사를 주목해 #범죄도시4 Coming Soon #마동석 #김무열 #박지환 #이동휘 #DonLEE #KimMooYul #ParkJiHwan #LeeDongHw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