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DAY2023-04-29 18:00:36
[JIFF 데일리] 성스럽지만 종교적이지 않은 죽음
<막달라> 리뷰
막달라|Magdala
다미앙 매니블|Damien MANIVEL
France | 2022|78 min|DCP|Color|Fiction|15|Asian Premiere
시놉시스
예수의 죽음 이후 마리아 막달레나는 세상에서 자취를 감춘다. 마리아는 머리가 허옇게 센다. 열매를 따 먹고, 빗물을 마시고, 나무 사이에 누워 잠을 청한다. 그리고 숲 한가운데서 잃어버린 사랑을 떠올린다. 마리아는 그를 찾을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한다.
프로그램 노트
마리아 막달라는 예수의 죽음 후 동굴과 숲 속을 떠돌아다녔다고 한다. 이 영화는 은둔한 막달라의 마지막 순간을 감독의 상상력으로 재연했다. 연기자의 움직임을 담는 데 뛰어난 재능을 가진 다미앙 매니블 감독은 전작에서도 협업했던 배우이자 댄서인 엘사(Elsa Wolliaston)에게 인간 사회를 버리고 자연 속에서 홀로 된 막달라의 마음을 따라가게 했다. 영화는 어떤 극적인 이야기나 절망을 나타내기보다 매우 단순하게 막달라의 걸음을 함께하며 연기자가 진실되게 느끼는 공간의 에너지와 자연의 반응을 충실히 묘사한다. 유행을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빚는 젊은 작가 감독 다미앙 매니블은 이 영화로 다시 한번 자신의 재능을 입증한다. (문성경)
성녀(聖女) 막달라 이야기
마리아 막달라(막달레나). 그녀는 호칭이 많다. 예수의 제자. 기독교의 성인(聖人). 예수가 부활했을 때 빈 무덤을 처음으로 목격하고 다른 제자에게 알린 인물. 오해도 많다. 예수에게 향유를 부은 죄지은 여인. 회개한 창녀. 47년 간 광야에서 지낸 이집트의 성녀 마리아와 혼동되기도 했다. 필립보, 토마스, 마리아 복음서 등 몇몇 위경 내용에 근거해 그녀가 예수의 연인이었다는 근거 없는 주장도 널리 퍼졌다.
다미앙 매니블 감독의 <막달라>도 비슷하다. 위의 이미지가 전부 혼재한다. 막달라는 숲에서 고행 생활을 이어간다. 직접 만든 십자가를 놓지 않는 그녀는 환상 속에서 예수를 만난다. 십자가에 매달린 그의 발밑에서 우는 막달라. 예수와 몸을 섞는 막달라. 비가 오는 날 예수의 얼굴을 그리며 그리워하는 막달라. 스크린에 비친 그녀는 예수의 제자이자 연인이고 성녀(聖女)다.
인간 막달라의 죽음을 체험하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막달라의 외관이다. 일반적으로 막달라는 어리고, 환희에 찬 백인 여성이다. 교회가 만든 그림이나 조각 속 그녀는 같은 이미지에 갇혀 있다. 영화 속 막달라는 다르다. 그녀는 노년의 흑인 여성이다. 죽음이 임박한 걸 느낄 수 있을 정도다. 그래서일까? 영화는 통념에서 벗어난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이 든 막달라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살았는지를 전달한다.
물론 <막달라>는 자기 의도를 쉽게 보여주지 않는다. 영화는 느리다. 그녀가 이슬 한 방울을 마시는 순간을 10초가 넘도록 보여준다. 클로즈업도 극단적이다. 러닝타임 절반은 그녀 얼굴로 가득하다. 움직임도 거의 없다. 막달라가 한 걸음을 내딛기도 어려울 정도로 늙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덕분에 <막달라>는 전통적인 성녀 막달라의 이미지를 깰 수 있다. 답답할 정도로 정적인 영화는 관음적이다. 주인공 삶의 단편을 훔쳐본다는 영화의 본분에 충실하다. 실제로 관객은 의식주를 해결하는 막달라의 삶을 그저 따라갈 수밖에 없다. 그녀가 얼마나 예수를 그리워하고 사랑하는지 온전히 느낄 수 있다.
이 과정을 거치고 나면 막달라는 성녀가 아니다. 마지막 시퀀스가 대표적이다. 막달라는 동굴에 누워 죽음을 기다린다. 천사는 촛불을 든 채 그녀가 죽기를 기다린다. 카메라는 막달라, 천사, 촛불을 천천히 오간다. 초가 녹을수록 막달라의 숨은 약해진다. 긴 시간 동안 연인을 그리워하며 고행을 이어간 한 여성의 삶을 요약하듯이. 마지막 숨을 뱉은 그녀의 손에는 작은 십자가가 있다. 막달라는 사랑과 믿음을 지키기 위해 발버둥 친 인간일 뿐이다.
성스럽지만 종교적이지 않은 죽음
그래서 <막달라>는 이율배반적이다. 몇몇 요소는 '이 영화에 새로운 게 있나?' 싶은 의문을 자아낸다. 환상 속에 나타난 예수는 익숙하다. 다른 영화, 드라마, 그림 등에서 재현한 유대인 남성 그대로다. 임종을 지켜보는 천사도 마찬가지다. 기독교 전통에 충실하다. 순진한 얼굴을 가진 백인 소년. 성경 속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을 때 기대할 수 있는 모습대로다.
하지만 종교적인 인물을 묘사하되 결코 종교적이지 않다. 가톨릭 교회가 숨기려 하는 대목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신비주의적 묘사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예수와 행복한 한때를 보내는 젊은 막달라의 모습이 대표적이다. 그녀 얼굴은 희열로 가득하다. 그런데 신실한 성녀보다는 성적으로 흥분한 여성에 가깝다. 조각가 베르니니의 작품 "성녀 테레사의 법열(Ecstasy of St. Teresa)"처럼. 성적 오르가슴을 통해 종교적 신비경을 표현한다. 우연이 아니다. 신비주의적 전통에 따르면 신과 하나 되는 기쁨은 성적인 황홀경을 맛보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산 정상에 선 막달라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자기 심장을 도려내 하늘에 바치는 막달라. 예수가 죽은 뒤 한때 행복했던 기억만 간직한 채 숲 속을 헤매던 여성은 심장을 도려내는 고행 끝에 옛 연인을 만난다. 실제로 막달라는 죽은 뒤에야 예수를 만나러 승천할 수 있다. 즉, 영화는 한 번의 황홀경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한다. 신과 하나 되는 '합일' 경험을 다시 경험하려면 고통으로 가득한 수행을 견뎌야 하니까. 틀에서 벗어난 막달라의 죽음이 성스럽지만 종교적이지는 않은 이유다.
영화 <막달라> 상영시간표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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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국열차: beyondness
“제자리를 지키고 칸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그 모든 게 합쳐서 무엇이 되나? 열차야. 각기 있어야 할 자리를 엄격히 지키고 있는 사람들의 숫자를 합치면? 그게 인류야. 열차는 세계 우리는 인류야”
“이제 자네는 전 인류를 이끄는 성스러운 임무를 얻었어. 자네는 저들을 구원할 수 있어.”
차이가 차별을 만들어내는 사회
온난화를 막기 위해 살포한 CW-7으로 인해 지구는 빙하기가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얼어붙은 세상을 17년 동안 달리는 긴 열차가 있죠. 쉬지 않고 달리는 열차에는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앞 칸과 꼬리 칸으로 나누어 살아갑니다. 앞 칸은 표를 구입해서 열차에 오른 사람들, 꼬리 칸은 혹독한 추위를 피해 표 없이 열차에 올라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의 격차는 17년 동안 크게 벌어졌습니다. 달리는 열차라는 사실만 빼면 얼어붙기 전 세상에서 살던 것과 다를 바 없이 살아가는 앞 칸 그리고 그런 앞 칸을 꿈꾸며 살아가는 꼬리 칸은 먹는 것부터 매우 차이가 납니다. 스시도 먹을 수 있는 앞 칸과 다르게 꼬리 칸은 무엇으로 만들었는지도 모르는 단백질 블록만을 먹고살죠.
꼬리 칸 사람들도 가만히 있던 건 아니었습니다. 7인의 반란, 맥그리거 폭동 등 밖으로 나가거나 앞 칸을 향해 나아간 사람들이 있었죠. 그들의 끊이지 않는 도전은 영화의 주인공 커티스에게까지 이어집니다. 이미 실패한 전례가 있기에 그들은 더욱 은밀하고 조심스럽게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앞 칸에서 그들을 돕는 정체불명의 조력자가 단백질 블록 안에 메시지를 써 보내주니 더욱 철저하게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경비병들의 총에 총알이 없다는 걸 알아챈 커티스가 반란의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반란은 시작되었고 반란이 혁명으로 번지기까지 촛불을 휘두르며 쉬지 않고 뛰어갔지만 그들이 가는 길에는 수많은 희생이 뒤따랐습니다. 급수 칸 앞에서 폭도 진압을 위해 모인 복면인들과의 전투는 매우 잔혹하고 그들의 죽음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어울려서 싸우는 동안 열차의 간부 메이슨은 히죽 거리며 마치 재미있는 스포츠 경기를 보는 것 마냥 구경하고 있었고 그 와중에 커티스를 잘 따르던 에드가도 죽었습니다.
곳곳에 뿌려지는 피와 날선 도끼에 맞아 눈을 부릅뜬 시체, 꼬치 꿰듯 꽂힌 꼬리 칸 사람들의 비명 없는 외침을 보며 그들의 전투가 잔혹하다는 걸 무척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한 생각이 들게 하죠. 서로 죽고 죽이는 이 싸움이 누굴 위한 것일까요?
그들은 자신들의 신념을 위해 싸울 뿐입니다. 자신들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꼬리 칸과 앞 칸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복면인들은 각자의 신념이 있지만 그 신념을 유발하는 ‘차이와 차별’에 대해 생각해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이 영화의 주제의식과 맞닿아 있기도 하고요.
질서를 지키려는 자와 무너뜨리려는 자
앞 칸의 주요 인물들은 질서(order)를 중요시합니다. 질서는 영화 속 영문 표기에도 나온 것처럼 order, 다른 의미로는 명령이며, 이 명령은 신성한 엔진을 수호해야 한다는 신념에서 나오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영화 초반 메이슨이 “앞 칸이 머리면, 꼬리 칸은 신발이다.”라며 신발을 가리키며 이건 ‘무질서’ 또는 ‘죽음’이라고 표현합니다. 반대로 말하면 질서는 ‘생명’이 되죠. 즉, 질서(명령)는 열차를 지키기 위한 것임을 명시하는 겁니다. 그런 메이슨의 신념은 앞 칸의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피아노를 치며 윌포드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며 황홀감에 눈을 부르르 떠는 교사와 그를 따라 노래를 부르며 ‘윌포드는 위대하다! 엔진은 영원하다!‘고 외치는 아이들의 모습은 어릴 때부터 광기 어린 ’절대적인 명령(질서)‘을 주입하는 독재자의 그 모습과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영화 속 절대적인 명령은 ‘열차가 달려야 한다.’는 명제입니다. 이 명제 안에서 누구나 역할이 바뀔 수 있습니다. 길리엄을 추억하던 윌포드의 모습은 자신도 길리엄도 열차를 수호하기 위한 같은 역할임을 말하는 듯합니다. 이는 그들의 역할이 열차를 위한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이죠. 윌포드가 자신의 자리를 커티스에게 물려주겠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윌포드 역시 열차를 달리도록 해야 하는 자신의 위치가 언제든지 바뀔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다만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요. 앞 칸 사람들 역시 자기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지만 그 자리가 차이와 차별을 만들고 차별로 꼬리 칸과 앞 칸의 대우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앞 칸 사람들은 단지 꼬리 칸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아이들을 멸종된 열차의 부품 대용으로 사용해버리죠.
부품을 대체하는 꼬리 칸의 모습은 우리가 사회를 구성하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회사에 자신이 없어도 누군가는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고 나이가 들고 쓸모가 없어지면 더욱 젊고 튼튼한 부품으로 바꿔 버립니다. 내가 그 자리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소위 말해 갈려나간다고 표현할 정도로 일을 해야 합니다. 이곳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겁니다. 앞 칸은 늘 권리를 누려왔고 꼬리 칸은 권리를 얻기 위해 늘 투쟁해야 했습니다. 그 온도 차이를 볼 수 있는데, 앞 칸 사람들은 생존이 아닌 보다 높은 삶의 질에 대해 고민(커티스와 일행이 열차를 지나가면서 보는 모든 장면들이 그렇습니다)하지만 꼬리 칸 사람들은 늘 단백질 블록 하나만을 먹으며 매 순간 생존을 위해 걱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꼬리 칸 사람들은 앞 칸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꿈꾸며 그들을 향해 반란의 횃불을 들게 되는 거죠.
그러하기에 앞 칸은 더욱더 꼬리 칸을 강하게 억압합니다. 그리고 그 억압을 열차 내 무질서를 통제하기 위한 장치로 사용하죠. 윌포드는 늘 소요를 일으켰습니다. 그동안 실패했다던 7인의 반란, 맥그리거 폭동은 그들의 작품이었고, 영화의 주 내용이 되는 꼬리 칸의 반란 ‘커티스 대혁명’마저도 윌포드와 길리엄이 합작해서 만든 큰 계획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늘 변화는 사소한 것에서부터 생겨나는 겁니다. 윌포드와 길리엄 그 누구도 작은 변수들이 모여 질서를 어지럽히게 될 것이라곤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변수는 커티스 대혁명에서 조금씩 쌓여서 큰 결과를 만들어냈습니다. 횃불을 들고 싸우거나 니느웨를 구원한 인물과 같은 이름을 가진 요나의 신비한 능력, 내내 골칫거리였던 크로놀이 폭탄으로 사용된다거나 자신의 팔이 잘리는 걸 무서워했던 커티스가 아이를 구하기 위해 팔을 희생하는 행동 등 변칙적인 요소들이 묶여 기적을 만들어 냈습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우연 같았던 모든 변수들이 결코 우연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걸 꿈꾸었기에 변수들을 발생시킬 수 있었던 거죠. 예로 남궁민수는 감옥에 갇히기 전부터 열차 밖을 상상했습니다. 마약 하는 것처럼 하면서 크로놀을 챙겼고, 그중 좋은 질의 크로놀을 골라내 폭탄을 제조했죠. 그 결과 열차는 무너지고 비로소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열차 안 또는 열차 밖
윌포드는 열차를 세계라고 했지만 그 세계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대가 잉태되었습니다. 그들은 마치 아담과 이브처럼 아무것도 없는 하얀 열차 밖 세상으로 나오게 되었죠. 그들이 비교적 차별받는 황인과 흑인의 조합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생각일까요. 그들의 조합은 하나의 거대한 질서인 열차를 벗어나게 되었고 북극곰을 보며 열차 밖에도 사람이 생존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열차 밖의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우리의 삶을 생각해보면 좀 더 쉽게 유추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거대한 사회의 질서를 벗어나게 된다면, 거대한 흐름에서 튀어나간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열차 안의 삶과 열차 밖의 삶. 어떤 삶을 지향해야 할까요? 새하얀 설원에서 엔딩을 맞은 영화처럼 그 답은 스스로 내려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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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마블이 오답노트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최근 마블 스튜디오 성적이 부진했던 것, 특히 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 이후 개봉하는 작품들 거의 모두 마블을 좋아하는 팬들에게도, 영화를 좋아하는 씨네필들에게도, 평단에게도 실망감을 선사한 것은 통계적으로도 볼 수 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억지스러운 PC주의, PC주의가 들어간 영화는 무조건 실패한다.'와 같은 반응들이 나오고 있다. 물론 마블이 새로운 장을 열면서 전과는 또다른, 조금 더 깊 이야기를 하려다 보니 그 과정에서 PC주의를 영화 속에 넣은 것으로 추측되나, 의도가 어찌되었든 모든 이들에게 실망감을 사고 있다. 하지만 필자는 마블의 이러한 연이은 실패의 이유에 PC주의에 대한 무분별한 탓, 무조건적인 비난은 정답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마블이 지금처럼 부진한 성적을 받고 있는 데엔 '설득력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한다. 단순 우주에서 다중 우주로 뻗어져나가는 이야기의 흐름을 설득 못 시켜서, 세대 교체를 하는 과정에서 관객들에게 새로운 배우, 새로운 캐릭터가 필요했던 이유에 대해서 설득하지 못해서, 영화팬들에게 영화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OTT 서비스를 사용해서 자신들의 이야기 템포를 따라와줄 것을 설득시키지 못해서라고 생각한다.
영화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는 마치 마블의 지난 시간들을 반성하고, 오답노트를 작성하면서 본인들의 과오를 하나씩 수정해나가는 영화로 보인다. 설득력이 부족했다는 점에서 그 점을 보완하고, OTT 서비스를 무조건적으로 강요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앞으로의 행보를 기대하고 싶게 만드는, 마치 마블의 영광스러웠던 시대의 희망 의 뿌리를 보는 것 같은 작품이었다.
영화의 이야기는 물론 마블 시리즈의 한 작품이기 때문에 당연히 전작들의 이야기에서 이어지고, 디즈니 플러스 시리즈 작품들에서도 이어진다. 마블 스튜디오 또한 영화 <아이언맨1> 개봉 이후 18년이라는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그동안 쌓여왔던 작품들이 꽤 많고, 또 그만큼 이야기가 매우 깊어졌다. 이에 더해, 디즈니 플러스 시리즈가 가세해 마블 스튜디오의 전반적인 이야기에 살을 붙이고 있어 그 양은 갈 수록 비대해졌다. 그렇기에 최근 많은 이들이 마블 영화가 개봉한다고 하면 설레는 기대보다 "전작들 못 봤는데, 못 따라가면 어떡하지? 돈 낭비하는 거 아니야?"라는 우려 섞인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이 점을 과소평가했던 것인지, 실제로 최근 마블 스튜디오는 이런 점에서 날 선 비판을 받고 있었다. 이를 드디어 깨달은 것인지, 영화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는 작품 내에 전작들의 설정들을 친절하고, 설득력있게 제시했고, 전작들을 보지 않았던 관객들에게도, 전작들을 모두 섭렵한 관객들에게도 꽤나 만족스러운 작품을 제시했다. 또한 이전 작품들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매력까지도 불어 넣어, 이전 작품들에 대한 반성문만이 아닌 개선과 포부가 담긴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 액션 영화에 비법 양념을 더해 마블만의 맛을 내다.
장르가 액션인 영화에서 가장 실망스러울 때는 바로 액션마저 별로일 때이다. 액션 장르 영화에서 이야기가 아무리 엉망이어도 액션이 수준급이라면, 최악은 면할 수 있는 것이 액션 장르의 힘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전에 먹어봤던 맛있는 맛의 액션에 새로운 맛을 한 숟갈 더한다. 작품 속 등장하는 주인공 "캡틴 아메리카"는 이전 작품들의 "스티브 로저스"의 캡틴이 아니라 "팔콘"의 캡틴이기 때문에, 전작들의 시원하고 파워풀한 액션씬보다는 윙슈트를 이용한 화려한 곡예비행과 날개 및 기타 파츠들을 이용한 볼거리 많은 액션을 보여준다. 또한 빌런으로서 2008년 작품, 영화 <인크레더블 헐크>에 등장한 "사무엘 스턴스"와 "썬더볼트 로스"이자 "레드 헐크"를 등장시키는데, "캡틴 아메리카"의 아쉬운 파워풀한 액션을 "레드 헐크"가 채워준다는 데에서 빌런과 히어로이지만 작품의 깊이감을 위해 상보적인 존재로서 장면들을 만들어간다. 또한 '서펀트 소사이어티'라는 새로운 집단을 등장시키면서 "캡틴 아메리카"의 액션을 선보이기 위한 발사대로서 꽤 좋은 역할을 수행한다.
영화는 또한 영화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의 스파이물, 추리물과 같은 장르적 특징을 띄기도 한다.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고, 억울한 이의 누명을 벗겨주어야 한다는 "캡틴 아메리카"의 사명감과 친구와의 의리로 임무를 수행하는데, 여느 스파이 장르 영화가 그렇듯 정부와의 갈등을 보여주게 된다. 또한 단순 빌런과 입체적인 면을 지닌 빌런을 공존시키고, 빌런의 등장을 지속적으로 암시하면서 극의 긴장감을 더해갔다. 이 과정에서 "캡틴 아메리카"가 슈트를 입지 않은 채 맨몸 액션을 선보이는데, 별다른 초능력은 없지만, 영웅으로서 사명감과 책임감을 가지고 강력한 악당들에게 맡서는 한 인간의 의로운 모습을 영화는 강조한다.
마블 시리즈 내에서 하늘을 날 수 있는 인물들은 많지만 실제로 하늘을 날아다니면서 액션을 펼치고, 임무를 수행했던 인물을 찾기란 쉽지 않다. 영화는 그동안 못했던 한을 푸는 것인지, 고공 액션을 굉장히 훌륭하게 선보이고, 그의 슈트를 최대한 활용한 액션씬을 선보였다는 점에서 마블의 창의력 또한 엿볼 수 있었다. 액션의 화려함, 그 창의성을 더욱 돋보이기 위해 중간 슬로우 모션을 활용하였는데, 이 또한 멋있으면서 재밌게 다가왔고, 이를 남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충분히 활용할 가치가 있었다 보여진다.
'팔콘'의 "캡틴 아메리카"는 디즈니 플러스 오리지널 시리즈 <팔콘과 윈터솔져>에서부터 비롯되었는데, 그때부터 그가 "캡틴 아메리카"가 된다는 소식은 많은 이들의 걱정거리였다. "갈수록 강력했지는 빌런들을 아무리 방패와 최첨단 윙슈트가 있다고 한들 한낱 인간에 불과한 영웅이 이길 수 있을까?" 영화는 이런 의문을 부정하거나 피하지 않고 정면에서 맞서 싸운다. 영화 속엔 '혈청 맞을걸'와 같은 대사가 빈번히 등장한다. 작품 내에서 "캡틴 아메리카"는 스스로도 자신의 한계를 너무나 잘 알아 그 한계에 아쉬움을 표하고, 영화 자체적으로도 그의 갈비뼈가 부려졌다는 대사를 빈번히 사용하거나, 팔에 깁스를 한 것을 보여주면서 히어로 영화에서 잘 볼 수 없었던 히어로의 신체적 아픔을 드러내는 장면들을 의도적으로 보여준다. 영화는 사람들의 우려와 걱정을 히어로에 대한 응원과 공감으로 승화시키고, 힘이 강력해서 영웅인게 아니라 마음과 정신이 영웅이기 때문에 영웅인 인물에게 그를 기대하게 한다.
- 마블이 생각했던 '영웅이란', 소를 잃은 후에야 설득의 시간을 가지다.
앞서 이야기 했듯 영화는 "캡틴 아메리카"를 강력한 영웅일 때에는 멋지고, 힘쎈 인물처럼 묘사하지만, 슈트나 방패가 없을 때엔 한낱 인간에 불과하다는 점을 굉장히 의도적이고, 사실적으로 드러낸다. 심지어 영화의 종반부 마지막 액션씬에선 "레드 헐크"에게 붙잡혀 날개를 뜯기는 "캡틴 아메리카"는 영웅에게 좀처럼 들기 힘든 감정인 '불쌍함'이 생각났다. 영화는 영웅의 어쩌면 나약해보일 수 있는 장면을 과감하게 보여주면서 단순히 힘이 세거나, 무술을 잘하거나, 최고의 기술력이 있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직접적으로 응한다. "스티브 로저스"의 캡틴 아메리카와 "팔콘"의 캡틴 아메리카를 비교하면서 앞선 이는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희망을 주었다면, 그는 사람들이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전한다는 대사를 통해, 본인들이 해석한 "캡틴 아메리카"를 관객들에게 설득시킨다. 또한 "캡틴 아메리카"의 불굴의 의지를 언급하면서 그가 영웅인 이유를 대사를 통해 설명하는데, 이 또한 관객들의 우려와 걱정을 아주 말끔하게 씻어내는 좋은 방법이었다고 생각한다. 마블은 앞선 작품들에서 관객들의 걱정과 우려를 어찌 보면 이해해줬으면 하는 식의 태도를 갖췄다고 생각한다. 자신들은 만들고 싶은 세계관을 만들테니 이를 그저 관객들이 이해하고, 따라만 와줬으면 하는 기대감에 부풀어서 말이다. 하지만 본 작품을 통해 관객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선 이해하는 게 아니라 관객들을 설득시키고, 그들의 손을 붙잡고 세계관을 안내시켜야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 같다.
영화는 또한 이야기의 단조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치의 플롯을 곁들였다. 영화 <이터널스> 이후 등장한 새로운 광물을 두고 세계 강국들이 이를 차지하기 위해 협의하고, 조약을 맺으려 하며, 광물 때문에 전쟁까지도 이어질 뻔했던 일련의 정치적 사건들을 제시하는데, 이는 실제 강국들의 석유와 석탄을 두고 경쟁했던 시기를 다루는 것 같아 서사의 깊이감이 더해졌다. 그 과정에서 미국과 일본의 눈치싸움, 비자금을 사용했다는 정황 등의 이야기들을 히어로 영화에 접목시켰으며, 이를 "캡틴 아메리카"가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직접 투입하여 몸을 던져 싸우기도 하면서 동시에 작중 빌런이자 누구보다 나라를 위해 헌신했던 인물의 입체적인 면을 덧붙여 이야기를 더욱 풍부하게 했다.
'캡틴 아메리카' 시리즈이 묘미는 단순히 나쁜 이가 세상을 어지럽히자 조국의 영웅이 무찔러 해결한다는 데에서 이야기가 끝나지 않고, 기본 바탕에 '친구', '가족', '스파이', '신념과 의지' 등을 붙인다는 데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본 작품은 "캡틴 아메리카"의 사이드킥을 통해 친구를, "썬더볼츠 로스"를 통해 가족과 최종 빌런의 묘략에도 조국에 대한 신념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표현했다는 점에서 좋은 작품이었다고 생각된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늦은 것이다. 빨리 시작하길 바란다."라는 개그맨 박명수의 명언 모음집 중 하나가 생각난다. 어쩌면 마블은 정말 늦은 것일지 모른다. 너무 많은 팬들이 등을 돌렸고, 팬 유망주들 또한 너무 높은 진입장벽으로 인해 나서지 못하고 있고, 평단마저 더이상 마블 영화를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 필자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라는 말을 달리 생각한다. 잃었더라도 똑같은 잘못을 하지 않기 위해 외양간을 고치는 점에 위안을 보낸다는 입장이다. 영화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가 완벽히 장점만을 지닌 작품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그 속도가 너무 빨랐고,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그 메시지들이 너무도 의도적이라 부담스러우면서 동시에 그 나머지 점들을 챙기지는 못했다는 장점이자 단점도 있었고, 영화의 종반부를 너무 성급하게 끝낸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도 들었다. 그럼에도 본 작품을 통해 그들이 드디어 외양간을 고치려는 의도를 볼 수 있었고, 스스로 오답노트를 작성하면서 곧 있을 최종장을 향해 열심히 해보겠다는 의지 또한 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또다시 필자는 마블에게 희망을 걸고, 그들의 행보에 기대를 걸어본다.
어느날 친구가 필자에게 아직도 마블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냐고 물어본 적 있다. 이에 필자는 아직 머리를 밀봉하기 전이라고 대답했다. 아직 필자는 머리를 밀봉하고 싶지 않다. 마블의 그간 행보가 맘에 들어서도, 그들의 연이은 악수를 무조건 응원해서도 아니다. 그저 마블 스튜디오 작품엔 필자의 어린 시절이 담겨있고, 함께 성장해나갔다는 생각에 메타포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마블은 이 점을 알아줬으면 한다. 아직 필자와 같은 팬들이 남아있음을 알아줬으면 한다. 그리고 이 팬들을 더이상 실망시키지 않아줬으면 한다. 그들의 행보를 꾸준히, 계속해서, 아직까지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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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 4주 차, 최신 씨네 뉴스
'마약 혐의' 이선균 배우 숨진 채 발견.. 향년 48세
<노량> 개봉 6일 만에 누적관객수 200만 돌파
<노량: 죽음의 바다>가 개봉 6일만에 누적 관객수 200만 명을 넘겼습니다. 올해 부진한 한국 영화의 흐름을 <서울의 봄>과 <노량: 죽음의 바다>가 바꾸며 연말에 극장가를 달구고 있습니다. '노량'은 임진왜란 발발 후 7년, 조선에서 퇴각하려는 왜군을 완벽하게 섬멸하기 위한 이순신 장군의 최후의 전투를 그렸습니다.
god, 25주년 기념 첫 공연실황 영화 개봉
에이전시 아이오케이컴퍼니에 따르면, <지오디의 마스터 피스 더 무비>가 내년 1울 중 전국 CGV 50개관에 걸린다고 합니다. 전날 CGV 공식 SNS에 공연 실황 일부와 멤버들의 코멘터리가 담긴 스폿 영상이
공개됐습니다. 지오디 멤버들은 “인생의 반 이상을 지오디로 살아오면서 이 다섯 명은 죽을 때까지 안
헤어질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다섯 명이 함께 있을 때 제일 든든하다”고 밝혔습니다.
조니 뎁, 영화 출연료로 8400억 수입
배우 조니 뎁이 1999년부터 2016년까지 영화 출연료로 6억 5,000만 달러를 벌어 들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엡은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로 최고 흥행배우 반열에 올랐으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7,500만
달러를 벌어들여 단일 영화로는 최고 수입을 기록했습니다.
영화 <나 홀로 집에> 케빈 가족, 미국 상위 1% 부자
미국의 온라인 주택정보회사 리얼터닷컴에 따르면 영화에 나오는 집의 은색 외관은 미국에서 집값이 비싼
지역 중 하나인 시카고 북부 일리노이주 위네카의 링컨 애비뉴 671번지에 있는 실제 집과 똑같습니다.
경제학자들은 이 집을 1990년 기준 소득이 3억9천만원 이상이어야 해당 집에서 살 수 있었을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서울의 봄> 올해 전체 박스오피스 1위
<서울의 봄>이 누적관객수 천만명을 넘기면서 올해 전체 박스오피스 1위에 등극했습니다.
전날 올해 첫 1000만 영화인 <범죄도시>가 1068만 명, <서울의 봄>이 1073만 명을 넘어서면서
한국영화로는 22번째 천만영화를 기록하며 한동안 누적관객 기록 경신을 해나갈 것으로 보입니다.
배우 이선균 성북구 공원에서 숨진채 사망
마약투약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아온 배우 이선균 씨가 27일 성북구 공원 안 노상에서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당시 주차된 차량 안 운전석에서 의식이 없는 채로 혼자 발견됐는데, 앞서 경찰은 당일 오전 10시 12분쯤
매니저로부터 이선균씨가 실종됐다는 신고를 접수받았다고 밝혔습니다. 소속사측은 고인의 장례에 대해
“유가족 및 동료들이 참석한 가운데 조용하게 치러질 예정”이라고 덧붙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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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임루프를 통해 진화한 로맨스
소설과는 달리 시각적으로 관객을 즐겁게 할 수 있는 영화 매체에서 타임루프는 매력적인 소재다. 같은 하루가 반복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는 시각적인 묘사만한 게 없다. 두번 이상 반복되는 시간, 위치, 인물, 대사는 보는 즉시 관객에게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주는 동시에 코믹 요소로도 더할 나위 없다. 최근에는 액션 장르나 심지어 공포 장르에까지 타임루프 소재가 확산되었지만 타임루프를 가장 많이 사용해온 장르는 멜로 혹은 로맨틱 코미디다. 특히 한국인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이프 온리>는 반복되는 타임 루프는 아니지만 반복된 단 하루를 통해 진정한 사랑을 깨닫는 멜로를 선사하면서 관객의 눈물을 자극했다. 일반적으로 타임루프는 같은 시간(일반적으로 하루)이 영화 내에서 수십 수백번씩 반복되는데 이 반복 자체가 재미 요소가 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특히 매일 반복되는 단조로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반복 자체가 영화의 백미가 된다는 건 아이러니하다. 이는 반복되는 일상, 그날이 그날같은 하루라고 하지만 실제 관객은 매일 조금씩 다른 하루하루를 살아가기 때문이다. 즉 일반적인 관객이 겪는 반복은 실제로는 반복이 아닌 셈이다. 마치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매일 조금씩 다른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는 그 반복을 통해 달라지는 무언가를 성취하고 그 성취감으로 인생을 살아간다.
반면 타임루프에 갇힌 우리의 주인공들은 무언가를 성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루동안 무언가를 쌓아 놓는다고 해도 다음 날이면 리셋되기 때문이다. 이 리셋은 인간관계에도 적용된다. 단 한 명만 하루가 반복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의 인간관계는 얼마나 처참해질까. 타임루프라는 소재를 멜로와 섞어 인간관계에 대한 성찰을 그린 <팜 스프링스>는 멜로의 요소 또한 살짝 비튼다. 누군가와 친해지더라도 하루가 지나면 리셋, 그리고 타임루프에 말려들기 전 사이가 나빴던 누군가와는 영영 화해할 수 없다. 홀로 타임루프를 반복하며 살고 있었던 나일스(앤디 샘버그 분)의 삶은 이 타임루프에 또 다른 주인공 세라(크리스틴 밀리오티 분)가 끼어들며 달라진다. 매일이 리셋인 나일스에게 세라와의 관계는 유일하게 성취할 수 있는 무언가가 된다. 타임루프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나일스는 세라와의 관계에서 에너지를 얻고, 그저 하루하루를 즐겁게 사는 데 치중하지만 세라는 타임루프를 통해 삶에 대한 애정을 키운다. 반복되는 사람들의 행동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매일을 다르게 사는 나일스와 세라를 통해 웃음을 자아내던 서사는 여기서 로맨틱 코미디의 결을 달리한다. 나일스는 세라와 사랑에 빠지지만 세라는 삶과 사랑에 빠진다.
관객들은 죽고 못사는 연애 서사에 오랫동안 시달려 왔다. 로맨틱 코미디의 90% 이상은 순정으로 마무리한다. 현실적인 연애를 그렸다는 <연애의 온도>도 결말은 순정이었고(연애 하이퍼 리얼리즘의 끝판왕은 오히려 레즈비언 연애를 그린 <연애담>쪽이다
감독병크는잠시무시) 로맨틱 코미디 장인이라 할 수 있는 낸시 마이어스 감독조차 서사에서 사랑을 쉽게 놓지 못한다. 환상을 믿는 관객에게는 안됐지만 누군가 없이 살 수 없는 삶은 심리적으로 건강한 삶이 아니다. 정말 서로 죽고 못사는 커플들도 있기야 하겠지만 대부분의 커플들은 적당히 만나서 적당히 연애하다가 결혼하고 적당히 살다가 죽는다. <이프 온리>가 한국 관객에게 소구했던 건 권태기가 온 커플에게 비현실적인 사랑 서사를 선사함으로써 개봉 당시 관객 지분율의 절대 다수를 차지했던 20대 여성들에게 스스로가 사랑받을 만한 존재라는 점을 일깨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은 흘렀고 현대 관객은 <섹스 앤 더 시티>를 보며 너보다 나를 더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사만다의 대사에 열광하는 주체적인 존재로 성장했다. 이제는 타임루프건 뭐건 지고지순한 로맨스 서사는 관객에게 더 이상 소구하지 못한다. <노트북>에 열광했던 관객은 인스타그램을 통해 조부모님의 이야기를 실제 모델로 영화를 만들었다는 감독이 이혼했다는 뒷이야기를 들으며 씁쓸해한다.<팜 스프링스>는 그래서 서사의 중심을 연애가 아닌 삶으로 옮겨온다. 세라와 나일스의 공통점은 타임루프에 말려들기 전에도 그닥 의미없어 보이는 삶을 살았다는 점이다. 나일스는 타임루프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이전의 삶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고 반복되는 하루에서 어떻게든 의미를 찾고 빠져나가려는 세라를 보며 고통은 진짜라고 설파하고 하루하루를 즐겁게 살면 되지 않겠냐고 말한다. 하지만 세라에게 반복되는 하루는 현실이 아니다. 반복되는 하루를 고통으로 시작해야 했던 세라는 더 이상 그 고통을 감내할 수 없다. 타임루프를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본 세라는 나일스와 사랑에 빠지지만 자신의 삶이 더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초반부 남성 캐릭터를 이성적으로, 여성 캐릭터를 감정적으로 그리는 것만 같던 <팜 스프링스>는 후반부에 이르러 이를 반전시킨다. 반복되는 삶에 안주한 나일스는 그냥 여기서 매일 재밌게 지내면 안되겠냐며 이제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세라를 붙잡지만 세라는 단호하게 나일스가 아닌 삶을 선택한다. 세라는 나일스와는 달리 삶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철저하게 준비하기 시작하며 하루하루를 방탕하게 사는 나일스와 대비된다.
<팜 스프링스>의 특이점은 하필 반복되는 하루가 세라의 동생 탈라(카밀라 멘데스 분)의 결혼식 날이라는 점이다.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결혼식은 세라에게는 모종의 이유로 떨떠름할 뿐이다. 한편 반복되는 결혼식에 지친 나일스는 이제 정장조차 입지 않고 참석한다. 그 자신이 의미없는 연애를 이어가고 있는 나일스 또한 결혼식이 허상일 뿐이라는 점을 짐작하고 있다. 연애라는 환상에 지친 나일스와 세라는 사랑을 믿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서로를 만나면서 사랑이 가진 의미를 깨닫는다. 나일스와 세라를 제외한 이들은 사랑이라는 환상에 매달리는 것처럼 보인다. 나일스의 여자친구 미스티(메레디스 하그너 분)는 나일스를 사랑하지 않지만 남자친구가 필요하기에 나일스와 헤어지지 못한다. 미스티에게는 타인의 결혼식조차도 한껏 꾸미고 나가야 하며 땀조차 나서는 안되는 중대 행사다. 아름다운 결혼식에 환장해 자기 자신을 꾸미는 데 집착하면서도 연애를 놓지 못하는 여성 캐릭터 자체는 시대착오적이지만 결혼식 이전에 연애조차도 어쩌면 크게 의미가 없을 수 있음을 미스티는 코믹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자신을 구해준 나일스에게 끌렸던 세라는 이제 자기 자신을 구하며 삶과 사랑에 빠진다.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나일스에게 당신 없이도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는 한 마디를 날리는 세라는 현대 로맨틱 코미디 사에 길이 남을 대사를 뱉은 셈이다. 죽고 못사는 연애만이 정답인 것처럼 그려지던 멜로와 로맨틱 코미디는 이제 남성 없이도 생존하는 여성을 당당하게 서사의 주체로 내세우며 스스로를 구원하는 구원자이자 구원받는 객체로 이원화한다. 세라는 타임루프 안에서든 밖에서든 삶을 영위할 것이며, 나일스와 함께이든 아니든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연애에 구속되지 않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탈라의 결혼에 의문을 품으면서도 축복을 빌어주는 세라는 결혼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세라를 고작 축사로부터 구해주고 생색을 냈던 나일스는 이제 세라를 믿고 따르는 객체로 변한다. 나일스의 서사인 것처럼 시작했던 <팜 스프링스>는 제목 그대로 손바닥 뒤집듯이 세라를 입체적인 존재로 그려내며 현대적인 연애 서사를 관객에게 보여준다. 이제 현대 관객들은 연애가 삶의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며 운명의 짝 같은 건 없을지라도 때로 삶의 동반자가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되지 않을까.
*이미지 출처는 모두 네이버영화입니다.
*본 리뷰는 씨네랩으로부터 시사회 초청을 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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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유하는 사람들
<타이페이 스토리>는 대만 뉴웨이브를 이끈 감독 에드워드 양 감독의 1985년 작입니다. 원제는 <청매죽마>로, <공포분자>,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과 더불어 에드워드 양 감독의 이름을 세계에 알린 타이페이 3부작 중 하나이자 그의 두 번째 장편영화죠. 캐스팅 목록에서 특이한 점이 눈에 띄는데, 에드워드 양과 함께 대만 뉴웨이브를 이끈 세계적 감독 허우샤오시엔이 주인공으로 분했습니다. 훌륭한 연기를 선보이는 것을 보면, 영화를 잘 찍는 감독은 영화에 잘 찍히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인물들의 한 손에는 언제나 담배 한 개비가 들려있습니다. 그들이 뿜어내는 담배 연기는 스크린 대부분을 채우죠. 어떤 프레임에선 담배 연기만 보여줄 때도 있습니다. 연기는 희미하게 허공으로 퍼져나가며 흩어집니다. 마치 80년대 대만의 과도기 속 오래된 연인 아룽(허우샤오시엔)과 수첸(채금)의 관계처럼 말이죠.
“저녁마다 창밖을 바라보며 야구를 하고 집에 돌아가는 아룽을 기다렸다.”는 수첸의 대사는 퍽 낭만적으로 들립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떨까요? 관계에는 연민만 남아 마음을 잃고 표류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불을 끄고 나서야 겨우 상대에게 진심을 꺼낼 수 있을 만큼 무기력해 보입니다. 그마저도 “우리 미국으로 가는 건 어때?”라는 제안은 “이민 가서 뭘 할지가 문제지.”라는 대답으로, “결혼하자.”라는 제안은 “결혼이 답이 아니다”라는 대답으로 겉돕니다. 상대가 진정 원하는 것을 바라볼 힘조차 상실해 버린 채 담배 연기처럼 부유하는 그들은 상대를 더욱 우울하게 하고 지치게 만듭니다. 에드워드 양 특유의 차가운 톤의 화면은 이런 무력감을 화면 곳곳으로 퍼지게 하죠.
그들의 무력감은 어디에서 기인한 걸까요? “이 건물들을 봐. 어떤 건물이 내가 디자인한 건지 모르겠어. 전부 똑같아 보여. 내가 있든 없든 점점 더 무의미해지는 것 같아.”라는 대사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자신들이 놓여있는 공간에 주목합니다. 마천루로 뒤덮인 공간과 아직 마천루가 되지 못한 공간들. 옥탑의 네온사인이 빛나는 공간에서 누군가는 도박에, 술에, 빚에 찌들어 갑니다. 더욱 빠르게 높아져만 가는 공간 속에서 80년대 대만 사람들은 더욱 빠르게 낮아져 가고 있죠.
영화 속 그들은 오래된 사람들입니다. 도시화의 과도기에 선 대만은 그들을 포용하지 않으려 하죠. 아룽 역시 야구를 그만둔 지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직 야구를 하던 당시의 자신을 버리지 못한 인물입니다. 다트 던지기를 하던 도중 ‘야구를 했다면서 왜 그렇게 못하냐’는 도발에 ‘네가 야구에 대해서 뭘 알아.’라며 히스테리를 부리는 걸 보면요. 그리고 그는 자신을 버리고 일본으로 건너가 결혼한 옛 연인의 곁을 여전히 맴돕니다. 그는 무언가를 바라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야구를 했던 당시의 자신을 떠올리려는 몸짓으로만 보일 뿐이죠. 이런 것을 보면, 그는 스스로 과거에 매몰되어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기억에 휩쓸리듯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자신의 위치를 잃어갑니다. 세상이 빠르게 변하는 만큼 아룽이 머물러 있는 과거는 더더욱 빠르게 뒤로 쳐져 가는 것이죠.
이 영화가 표면적으론 치정극이긴 하지만, 에드워드 양의 영화답게 별다른 감정의 고조는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스크린을 여러 상징과 단서들로 채워 해석을 요구하는 어려운 영화도 아닙니다. 단지 응시할 뿐이죠. 그런 점에서 지루하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지만, 당대의 정신적 공기를 드러내 주는 알맞은 리듬이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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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힘내라고 하면 힘낼 수 있나요
진짜 포기하고 싶다. 아니 포기해야겠다. 애초부터 불가능한 꿈을 꿨기 때문에 좌절감도 맛보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노력을 무지막지하게 들여도 안 되는 것이 있으니 삶이란 역시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하다못해 메이플스토리의 데미안과 스우를 잡는 것도 숙련도가 올라가면 쉬워지는데 삶은 그런 게 없어 잔인하다. 난 근본적으로 사랑받기엔 못돼 쳐 먹은 인간이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만하고 싶다. 죽고 싶은 건 아닌데 당분간 뭘 하고 싶다는 마음이 안 든다. 모든 것이 싫다. 무엇이든 할 맘이 안 든다는 뜻이다.
그래서 포기하면 뭐 어쩔 건데? 엄마, 아빠한테 내 정신적인 고통을 줄줄 늘어놓으면 어떤 지점이 달라지나? 사실 선생님에게 최근의 내 상태를 말한다고 해서 바뀌는 건 없었기에 이 선택이 내 인생을 바꿀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냥 똑같은 하루의 반복일 것이다. 몸이 고장 난 것도 바뀌지 않을 거고. 뭔갈 사고 싶은 강박은 아마 죽을 때까지 가지 않을까 싶다. 맞다. 나는 지친 것 같다. 유럽에 갔다 와도 지친 게 해소되지 않아 '이런 식으로 가다간 나의 정신적 탈진은 아마 영원할 것'이라고 설레발을 쳤던 때가 생각난다. 다시 생각해보면 1년 동안 지치는 타이밍이 한 번도 안 오는 게 더 이상하다. 어물쩡 넘긴 나 자신이 싫다. 쉬어야 할 때 제대로 쉬질 못했으니 지금 닳고 닳았다. 요즘 나는 삶의 동기부여가 단 1%도 남지 않았다. 난 남들에게 위로해주는 법은 알았지 나 자신에게 격려를 하는 법이라곤 단 조금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사람도 사랑도 다 무섭다. <굿 윌 헌팅>과 <그린 북>이 어쩐지 환상 속의 이야기처럼 들리는 요즘이다. 가끔은 내가 쓴 글이 사실이 아니길 바랄 때도 많은데 요즘은 반대의 기분을 느끼고 있다. 정말 내가 쓴 글이 맞는 말이란 말인가. 인간의 가장 좋은 친구가 돈이라기엔 난 경험해야 할 것들이 많지 않나. 상상과 희망도 재미가 없는 오늘 난 천천히 가는 버스에 기대 잡생각을 하고 있다.
<체리 향기>는 소소한 일상에 관한 영화다. 나의 인생영화 중 한 편으로 꼽는 작품이기도 하다. 트럭을 운전하는 주인공. 어쩐지 표정에서 사연이 많아 보인다. 이 사람은 갑자기 지나가는 남자 한 명을 태운다. 군인을 태운 주인공 바디. 바디는 군인에게 본인의 사연을 늘어놓는다. 그는 죽고 싶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이유를 찾지 못했다고 한다. 어디 땅굴에 묻힐 테니 그 조력자가 돼 달라는 부탁을 한다. 군인은 당연히 거절한다. 다음 손님으로 신학도를 태운 바디. 같은 부탁을 하지만 역시 거절한다. 죽는 것도 예삿일이 아니다. 바디는 세 번째 손님을 찾아 나선다.
세 번째 손님은 나비를 박제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아들의 치료비가 급해 바디의 제의를 받아들인 이 노인은 주인공과 차를 타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주제는 삶의 의미에 관한 이야기다. 나 역시 죽고 싶던 때가 있었어요. 내가 인생을 살아야 했던 이유는 코 끝에 스친 체리 향에서 왔죠. 소소한 삶의 가치에 대해 설명하는 노인. 바디는 귓등으로 듣는 둥 마는 둥 한다. 아예 말을 안 들은 것 같기도 하다. 사실 바디에게 변화가 있긴 했다. 노인을 다시 찾아간 바디. 내일 내가 살아있을지도 모르니 적극적으로 깨워달라는 요청이었다. 영화는 웃으며 바디의 근심 걱정 모든 것을 떠나보내지 않는다. 노인의 진정성이 통했다고 해서 바디의 우울함이 사라지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바디는 다시 무덤 아래에 누웠다. 생각이 바뀐 게 없는듯한 바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디의 요청에서 우리는 뭔가를 기억할 수 있다. 유의미한 차이는 있지만 이 무언가가 어떻게 표현되는지는 정의해주지 않은 채 영화는 그렇게 끝난다.
영화에 엔딩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바디는 죽을 곳에 다시 누웠다. 그의 생각은 변화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당연하다. 난 인생을 얻는 동기부여의 힘이 갑자기 어느 날 번쩍하고 생기는 게 아니라고 본다. 한참을 어두운 터널 속에서 살 때 느낀 게 있다. '힘 내'는 너무 포괄적인 단어라는 것이다. 힘을 내? 힘을 낸다는 게 무슨 뜻이지? 힘 내면 내가 이 뭐 같은 일상을 이겨낼 수 있나? 당연히 이 반응이 '와닿지 않았다'란 말을 자격지심에 빠져 거칠게 하면 나오는 것이란 걸 모르지는 않는다. 말하는 이에게 상처 줄 생각 단 1도 없지만 큰 골자가 되는 생각은 아직도 변함이 없다. 앞서 쓴 바와 같이 그 말을 하는 이는 내가 다시 기운을 차렸으면 하는 마음에서 한 것일 테지. 난 살짝 다르다. (그렇다고 힘 내!라는 말을 하는 게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그런 말을 잘하지 않는다. 어차피 내가 겪는 비극은 나를 다시 공격할 것이고, 난 같은 방식으로 또 표류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바디는 모든 걸 웃어넘겨 행복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단 조금의 변화만 있었다.
그렇기에 영화는 사려 깊다. 바디의 인생이 무조건 다 잘 풀릴 거라고 묘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에서 부정적인 순간을 마주할 때를 생각해보자. 어느 순간을 극복했다고 해서 비슷한 불행이 찾아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나? 행복이 갑자기 뚝 떨어지나? 아닐 것이다. 삶은 같은 순간의 반복이다. 그래서 어느 것을 극복했다는 생각이야 말로 인간의 교만일 수도 있다. 큰 힘을 줘가며 삶의 순간을 지나가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다. 이 이유로 인생에 환기란 건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 같다. 환기가 안되기 때문에 상처는 누적될 수밖에 없다. 또 힘 내!라는 말에 힘을 내기엔 우리 인생은 너무 곪았다. 모두가 심하게 깊게 파여서 단순히 끌어올리는 게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다. 목표에 실패하기. 사랑하는 누군가가 떠나기. 영원한 이별. 이런 삶을 가로지르는 실패는 항상 우리 곁에 있다. 이에 대한 생각이라고 하는 건 우리 머릿속에서 통제할 수 있는 요소가 아니기 때문에 상처와 우울함은 천둥번개 치듯이 갑자기 사라지지 않는다. 이 때문에 우리는 필연적으로 삶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 과거를 지워버린다? 지울 수 있으면 인간이 아니지.
감독은 이런 관점에서 영화를 보는 우리에게 좀 특별한 시각을 보여준다. 간단하다. 인생을 사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 것이다. 그리고 그게 전부라고 말하는 것 같다. 영화는 극적인 성장을 보여주지 않는다. 생의 목적에서 진 인물이 다시 이겨내는 걸 제시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분명한 연출 의도라고 생각한다. 어차피 이 사람은 같은 곳에서 똑같은 실패를 경험할 것이다. 여러분은 예외인가? 아니다. 여러분이 사는 이유가 무엇이든 결과적으로 같은 곳에서 머무르는 건 매한가지일 것이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무언가를 위해 달려왔다고 생각해왔지만 나는 지금의 이 기분이 뭔지 모르겠다. 죽고 싶은 건 절대 아니다. 엄마 아빠가 나한테 못하냐? 그것도 아니다. 나는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기분이 뭔지 모르겠다.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외로움인지. 권태인지. 뭔가를 이겨내기 위해 그렇게 노력해왔지만 그게 정말 의미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또 언제는 사람들에게 기회를 열어주는 게 돈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그건 내가 나를 속였던 거짓말이었다. 나는 내 20대를 관통하는 동기부여보다 더 얻고 싶은 것을 마음속에 둔 인간이었고 그 관점에서는 사실 실패한 인생을 살고 있다. 이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이런 나를 보여주는 증거다.
근데 또 삶을 포기하라 한다면 아쉬울 것 같다. 아니 사실 지금 당장은 모든 걸 던져버리고 쉬은 게 맞긴 하다. 당장 이 세상을 뜨고 싶지는 않다. 나에겐 수많은 것들이 남아있다. 아직도 정산 못 받은 돈. 가지 못한 여행지. 공익근무지에 들어오는 바나나우유. 우리나라 아티스트가 나이키와 협업해서 나오는 새로운 스니커즈. 버림받았다는 상처가 왠지 모르게 사실이 아닐 거라는 기대감까지. 나는 아직도 바라는 것이 많다. 지금의 내가 이렇게나 무너져있다고 해서 앞으로의 시간이 기대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언제든 이 시간은 흘러가 있을 것이고, 나는 오랫동안 극복하지 못한 삶의 터널을 훌쩍 지나있을 것이다. 이 모든 걸 포기하기엔 나는 오랜 시간 동안 이 상태로 살아왔다. 행복하게 만드는 것들을 포기해야 한다. 그건 좀 많이 어렵다. 사랑받기 위해 이제까지 달려온 모든 시간들에 실패해 지금은 괴롭지만 내가 하루하루를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이런 소소한 재미들 덕이었다. 이를 위해 계속 같은 것만 하겠지. 지겹게. 그러나 삶은 원래 지겨운 것이 맞다. 근데 또 지겨워서 좋은 것이다. 실패한 인생을 살더라도 나를 일으켜주는 사소한 무언가가 있다면 하루를 버리기엔 너무 아쉽다. 그래. 사랑받는 인생 다 좋은데. 이것 역시 나에게 중요한 거 맞는데. 돈 많이 벌어서 나 좋은 거 엄마 아빠 멋있는 거 사는 거 다 좋은데. 사실 나는 어느 날 맡은 체리 향기와 같은 소소한 인생의 재미를 좇는 사람이었다. 그런 재미 하나 만드려고 일을 벌이고 돈을 벌고 하는 것이다. 난 감독이 삶의 이 지점에 대해 논한다고 생각한다. 이유를 찾지 못한 당신에게 묻는 것이다. 과연 당신의 삶의 이유가 그렇게 중요한가요? 아닐걸. 의외로 우리의 삶을 가로지르는 것은 사소한 무언가에서 나올지도 모른다. 그게 우리를 바뀌게 하고, 서서히 좋아지게 만들며, 또 살아 숨 쉬게 도와준다. 오늘 하루도 고생 많았다. 매일마다 감상이 다른 내 글을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함을 표한다. 다들 지겨울 것이다. 매일이 현타의 연속이고 우울감은 하루마다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너무 멀리 와버렸다. 그러니까 오래 살자. 힘은 되도록이면 내지 말자. 빨리 가지 말고 천천히,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들을 위해 살자. 그러려면 천천히 걸어야 할 것이고, 남들보다 늦을지도 모른다. 근데 그건 어차피 중요하지 않을수도 있다. 한번 사는 인생 과연 그 목표가 삶의 전부가 되더라도 우리는 그것보다 큰 가치를 지니고 있을테니 말이다. 고통받으며 살더라도 오래오래 살자. 언젠가 만날 체리 향기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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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도시의 사랑법](2024)에 대한 헐거운 리뷰
Chapter 1 발(foot)과 교회
Chapter 2 가치판단의 딜레마
00:00 대도시의 사랑법
00:20 박상영 작가
02:36 발(foot)
05:15 성경, 기독교
07:36 가치판단의 딜레마
10:36 별점 및 한 줄 평
10:53 다음 리뷰 예고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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