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작가2023-04-04 17:39:29
우리는 모두 같은 우주를 떠도는 우주비행사
원작소설 바탕 영화 [원더] 리뷰
원작 소설을 읽었던 터라 영화가 꼭 한 번 보고 싶었다. 소설과 영화의 내용이 다른 점 없이 거의 똑같아서 취향 따라 선택하라고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책 먼저 읽고 영화를 보는 것이 울림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글자가 주는 의미를 곱씹으며 인물들의 대사를 들으면 더욱 가슴에 와닿기 때문이다.
"어거스트는 태양이다.
엄마와 아빠와 나는 태양을 도는 행성이지만
난 동생을 사랑하고 이 우주에 익숙하다."
어기의 누나, 올리비아가 영화 초반에 곱씹는 이 말은 그저 관심을 빼앗겨 쓸쓸한 사춘기 여학생의 투정처럼 들리겠지만, 이 대사는 생각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주인공인 어기가 좋아하는 영화는 '스타워즈'고 어기가 가장 좋아하는 물건은 우주비행사 헬멧이다. 즉, 영화는 이 세상을 하나의 우주라고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비아의 대사 때문에 어기를 태양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속 다른 인물들은 물론 영화를 보고 있는 자기 자신마저 행성이 되어 어기 주변을 맴돌기만 할 뿐이다. 태양은 밝은 빛으로 다른 행성에게 에너지를 전달해 주지만, 결코 다른 행성과 맞닿을 수는 없다. 자신이 움직일 수도 없거니와, 다른 행성도 쉽사리 다가갈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가까이 가면 뜨거운 열에 타서 녹아버릴 거라는 두려움이 도사린다.
"과학 공부 필요하면 우리 집에 놀러 와."
어기는 시험 시간에 문제를 풀지 못하는 잭에게 답을 알려주는 나름의 친절을 베푼다. 그 덕분에 잭과 어기는 가까워진다. 움직이지 않을 것 같던 태양이, 가까이 다가오지 않을 것 같던 행성이, 서로를 슬그머니 잡아당긴다. 그렇게 두 사람은 집에도 놀러 가고, 점심시간에 함께 밥을 먹으며 친해진다. 하지만 어기가 가장 좋아하는 핼러윈 날에, 둘의 관계는 처참히 깨져 버린다. 잭이 자신을 흉보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된 어기. 침대에 드러누워서 모든 게 싫다고 소리를 지르는 어기에게 비아는 말한다.
"왜냐하면 학교는 거지 같으니까.
그리고 사람은 변하니까.
평범한 애가 되고 싶으면 그걸 알고 있어야 해."
원래 그런 거라고. 인간관계라는 것은, 삶이라는 것은 어쩔 수 없이 그런 것이라고. 어기에게만 특별히 가혹한 것 같지만, 사실 누구에게나 그렇다고. 이 말을 통해 비아는 어기가 태양이 아님을 상기시킨다. 어기를 위해 늘 같은 자리에서 변함없이 같은 모습으로 돌아주는 행성은 없다. 평생 자신을 위해 같은 위치를 지켰던 가족들과 달리, 사회는 냉정하리만큼 빨리 변해버린다. 어기는 그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로 한다.
"진정한 친구는 찾기 힘들다."
자신을 아무런 이유도 조건도 없이 사랑해 주었던 개, 데이지가 죽고 난 후 어기는 말 한다. 한 번에 눈에 탁, 띄어서 내 운명의 상대를 알아볼 수만 있다면 얼마나 편하고 좋을까. 하지만 인간은 여러 사고를 거치고 나서야 그 사람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기는 잭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받고 그와 화해하기로 한다.
"부인, 어기의 외모는 바꿀 수가 없어요. 그러니 우리의 시선을 바꿔야죠."
"투쉬맨 선생님. 정말 죄송해요."
한편 툭하면 어기를 괴롭히던 줄리안은 결국 부모님과 함께 교장 선생님 앞에 앉게 된다. 자신의 태도를 합당하게 여기던 줄리안은 투쉬맨의 말을 듣고 나서야 자신이 그동안 저지른 잘못이 어기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조금 더 일찍 그것을 깨달았다면, 그럴 기회가 있었다면 줄리안과 어기는 진정한 친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줄리안이 어기에게 가까이 다가가려고 할 때 그것을 막은 것은 부모이지만, 실은 이 사회의 시선이기도 하다.
"좋았어, 나 싸움도 했어."
"이겼니?"
"응, 그리고 있잖아. 7학년 형들이었어."
여전히 바뀌지 않는 시선에도, 어기의 싸움을 응원하고 돕는 사람들은 조금씩 늘어난다. 사회의 편견과 시선은 7학년 형들처럼 덩치도 크고 힘도 드세다. 연약한 어기로선 쉽사리 이길 수 없는 상대지만, 친구들과 힘을 합쳐 기꺼이 물리치고 손을 맞잡는다. 그렇게 그들은 조금 더 강해진다.
"힘겨운 싸움을 하는 모두에게 친절해라.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 알고 싶다면, 그저 바라보면 된다."
그래서 어기가 메달을 받는 장면은 뭉클하다. 정말 강인한 사람은 먼저 용기를 내어 다른 사람들이 용기를 낼 수 있도록 돕는다. 어기는 자신의 빛에 고개를 돌리고 돌아서는 이들 앞에서도 꿋꿋이 자신을 바라볼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때론 다가가기도 하였다. 마침내 용기를 낸 다른 학생들은 그의 내면을 바라보고 손을 잡고 나아간다.
수많은 아픔을 겪으면서도 끝끝내 이 멋진 우주를 비행하고자 했던 어기.
어기는 이제 자신이 태양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그의 비행은 이제 시작인 것이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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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소희 한 사람의 죽음이 드러낸 현실
?Rabbitgumi 입니다!
영화 다음 소희가 개봉했어요.
과거 전주에서 있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인데요.
가슴아픈 현실을 볼 수 있는 영화에요.
많은 분들이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콜센터 직원들의 노동 현실과 고등학교 현장 실습의 현실이 잘 표현되어 있어요.
누가 죽어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지금의 현실이 무척 답답하게 느껴지는 영화에요.
이 영화가 어땠을지 저의 간단한 리뷰를 영상에서 말씀드릴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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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다비전이 차려놓은 마블의 탄탄한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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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03. 16 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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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블쟁이 인스타그램: @marvel_jeng2* 영상에 사용된 모든 음악은 Epidemicsound 의 정식 라이센스 음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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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 마블의 미래?
00:46 화이트 비전
02:00 모니카 람보
03:11 캡틴마블2 & 시크릿 인베이젼
04:33 숙제타임!
06:03 닥터 스트레인지 & 스칼렛 위치
09:41 여러분 덕분에 많이 웃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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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숲의 비명:사라진 사람들> 예고편
방생한 반달곰을 추적하기 위해 강원도 깊은 산골로 들어가게 된
수의학과 학생들에게
느닷없이 음산한 기운이 드리워지는,
깊은 산으로 들어갈수록 반달곰 추적기는 같은 자리를 맴돌고,
서서히 공포가 밀려오는데...
산 속에서 벌어지는 사실 공포 스릴러
몸을 얼리는 리얼 공포 !
비명은 곧, 영화를 보는 당신이 지른다 !
진실을 알고 싶다면 실눈이라도 떠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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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캐리온> 티저 예고편
매년 크리스마스 연휴가 되면 수많은 여행객이 안심하고 비행기를 탄다. 이번 크리스마스는 사뭇 다르겠지만. 《캐리온》, 12월 13일 공개. 오직 넷플릭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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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답습하면서도 독특했던 5년만의 '봉준호스러운' 금의환향
예술은 자기만의 색깔 싸움이라고 생각한다. 노란색에도 개나리 노란색이 있고, 연노랑색이 있고, 진한 노란색이 있듯, 같은 계열처럼 보이지만 그 안의 디테일과 각종 포인트들을 통해서 각 분야의 예술과 그 안에서 예술을 행하는 예술가들은 자기만의 색깔을 찾고, 만들어나간다. 영화예술을 현 시대의 예술이 선사할 수 있는 최정점의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영화예술만큼 그 색깔이 진한 예술을 더 이상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디테일, 구도, 연결 이음새의 모양, 세트를 만들 때에나 CG처리를 통해 무언가를 표현하려 할 때 등 형언하기 힘들만큼 많은 부분들에서 영화예술가들, 특히 감독들은 자기만의 색깔을 연구하고, 탐구하고, 제작하여 이 점을 의식하든, 무의식적이었든, 본인이 만들어낸 예술품에 자연스레 녹여들게 한다. 그런 점에 있어서 현재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감독님 중 항상 1순위로 꼽히는 감독님 중 한 분이신 봉준호 감독님의 영화론, 감독론, 그만의 색깔은 결코 따라하기도, 흉내내기도 쉽지 않아 보이고, 감독님 스스로도 그게 본인의 무기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더군다나 이런 뚜렷하면서 미학적인 색깔에 새로운 터치를 가미하게 된다면 금상첨화이지 않을까?
영화 <미키 17>은 봉준호 감독님의 이전 작품들의 특장점들만을 모아 그만의 색깔을 표출해낸 작품이면서 동시에 그가 앞으로 어떤 작품들을 또다른 어떤 색깔을 통해 표현해내려 하는지, 또 그걸 통해 어떠한 이야기를 어떠한 식으로 풀어내려 하는지 예고편을 보여주는 것같기도 한 흥미로운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 구조와 "미키"의 물아일체(物我一體)
영화 <미키 17>은 기본적으로 소설 원작 '미키 7'을 기반으로 한 작품이다. 같은 이야기, 같은 등장인물들을 두고 있지만, 봉준호 감독님만의 색다른 이야기와 영화적으로 추가한 캐릭터들을 통해 감독 본인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추가한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어떠한 걸까? 죽는 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이러한 질문들을 지속적으로 영화 내에서 인물들의 입과 대사, 행동을 통해서도 표현하지만, 가장 특이한 점은 이를 영화적 구조, 연출적 방법을 통해서도 그러하다는 점이다. 영화는 시작함과 동시에 주인공인 "미키 17"이 크레바스로 떨어져 기절했다가 다시 깬 상황을 보여준다. 이윽고 "미키 17"을 구하러 와준 줄만 알았던 친구 "티모"가 화염방사기만 챙긴 후 '넌 다시 재생하면 되잖아'라는 말을 전한 후 버리고 떠나기 전 '죽는 것은 어떤 기분이야?'라고 질문한다. 인상적인 건, 이 지점부터 "미키 17"의 목소리가 나레이션, 보이스 오버되고, 영화적 구조는 루핑을 통해 그들의 이야기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어쩌다가 "미키 17"이 재생형 인간이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과거사로 돌아간다는 점이다. 이는 영화의 종반부, 버튼을 눌러 재생장치를 폭파시키 전 일종의 트라우마가 상기되듯 다시 한번 루핑되어 과거의 시간대로 돌아가 니플하임 총사령관 "마샬"의 아내 "일파"를 만나게 되는 씬에서 반복된다.
영화는 루핑을 통해 영화 자체에 순환적 구조를 취하게 되는데, 이는 마치 주인공 "미키 17"이 죽음 이후 재생되는 삶, 반복되는 삶을 영화적으로도 구조화한 것처럼 보인다. 더불어, 그런 순환적인 구조를 영화의 극초반부와 극후반부에만 배치해두고, 정작 본 이야기에서 영화는 순환을 그리 사용하지 않는다. 어쩌면 영화는 "미키"의 죽음이 가볍게 처리되고, 소비되는 극초반부와 마지막이 될 수 있는 죽음을 맞닥뜨린 "미키"의 이야기를 다룬 본 이야기에 극명한 차이를 표현하기 위해 이를 구조적으로도 표출한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앞서 언급했듯, 또 하나 영화가 흥미로운 점은 바로 보이스 오버이다. 봉준호 감독님의 이전 필모그래피를 보게 되면 본 작품만큼 보이스 오버를 빈번히 사용한 작품이 또 없다. 이런 차이가 존재할 수 있는 데에는 표현하고자 하는 방향성에서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영화 <기생충>에서의 주인공인 '기택 가족'을 영화는 주로 비추고, 그들이 겪는 이야기를 통해서 서사를 풀어나가지만 결코 그들의 이야기가 오로지 영화의 메시지가 되지는 않는다. 그들의 이야기, 그들이 행하는 행동들, 겪게 된 순간들로 무언가 다른 메시지를 함축시키고, 관객들은 이를 통해 세 가족 간의 복잡한 관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함으로써 그 메시지를 찾을 수 있게끔 하는 것이 영화 <기생충>의 기본 틀이다. 영화 <미키 17>은 그와는 달리, 오로지 "미키"라는 인물이 그동안 겪어왔던 시련들과 아픔들을 비추고, 사건을 헤쳐나가면서 결국 성장하게 된 일련의 과정을 관객들에게 직접 보여줌으로써 보다 주관적이고, 1인칭 시점스러운 관점에서 인물에게 이입할 수 있는 틀을 가지고 있다. 그런 관점에서, 시시각각 이야기의 배경사를 알려주고, 본인의 과거 이야기를 관객에게 소개하듯 들려오는 보이스 오버는 관객을 인물에게 몰입시켜 "미키"리는 인물이 변하게 되는 과정을 온전히 느끼게 한다.
- '봉준호'식 블랙코미디로 사회를 꿰뚫다.
봉준호 감독님의 작품들을 좋아하는 이유를 솔직히 셀 수 없지만 그 중에서 지금 당장 생각나는 것 중 하나는 바로 '블랙 코미디'이다. 봉준호 감독님의 작품 세계를 보게 되면 한번쯤은 어느 포인트에서라도 웃게 하고, 특유의 재치와 유머를 통해 관객들을 즐겁게 하지만 동시에 그를 통해서 사회적 통념을 꿰뚫게 하고, 유머가 지속되다 순간 바뀌어버리는 상황 속에서 관객들을 놀라게 한다. 복합적이고, 입체적인 감정을 느낄 수 있게 하고, 이를 통해 스스로에게도 영화의 메시지와 질문을 반문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은 봉준호 감독님만의 영화적 센스라고 생각한다. 특히 이번 영화 <미키 17>은 이전 필모들과는 굉장히 다르게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는 작품이고, 또한 특유의 재치와 유머에 사랑스러움까지 입혀져 이전 작품들에선 느낄 수 없었던 행복의 감정까지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결코 이런 점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우리 사회를 직시하게 하고, 마치 현 상황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듯 지금 당장 우리가 겪고 있는 시대적 문제, 형언할 수 없는 혐오와 차별의 시대를 적나라하게 표현한 작품이 바로 이번 작품, 영화 <미키 17>이었다.
영화는 초반부와 중반부 심지어 후반부까지 "미키"에게 죽는 것은 어떠한 의미인지 물어보는 인물들을 마치 의도적으로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관객에게 이 질문에 대해 결코 잊지 말라는 듯하는 것처럼 들린다. 물론 그들 중에선 진심으로 그 감정이 궁금해서 일수도 있겠지만 영화는 대부분 이 점을 통해 "미키"를 비꼬기 위해 질문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생각해볼 점은 "미키"가 익스펜더블이라는 직업을 선택한 것은 맞지마 익스펜더블을 만든 사람은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지구에서의 상황이 채무로 인해 최악으로 치닫는 상황이었어서 다른 선택을 하기 힘들었기에 내린 결론이었지만, 남들이 기피했던 익스펜더블을 선택했고, 극한직업이라는 사실까지도 알았지만 결론적으로 다른 이들이 할 수 없는 일들을 먼저 해주는 개척자이면서 희생자이고, 영웅이기도 한 인물이 바로 "미키"이다. 그를 추대하고, 영웅처럼 모시지는 못할 망정 그들과는 다르다는 이유로, 어차피 다시 재생되기 때문에 처분해도 된다는 이유로 그를 무시하고, 매몰시키고, 버리는 행위들을 "미키"에게 일삼는 장면들이 빈번히 등장하는데, 이 점이 영화를 관람하는 중요한 지점이다. 새로운 곳을 개척하고, 이주 지역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어서 너무도 필요했기에 그 역할을 만들었지만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역할로서 따가운 시선을 받는 직업을 택한 사람마저 무시하고, 천대하고, 끝까지 실험용 쥐로서 사용하려는 영화 속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볼 수 있고, 이는 영화에서만 그치지 않고 우리 사회가 지금도 그러한 인식과 시선으로 인해 우리를 위해 험한 일까지 도맡아 고생해주는 이들에게 오히려 무시하고, 소홀히 하는 것은 아닌가 돌아보게끔 한다.
영화 <미키 17> 속 "미키"만큼이나 중요한 인물이 바로 니플하임 총사령관 "마샬"과 그의 아내 "일파"이다. 리더십도 없고, 본인의 자유의지로 무엇을 하려는 듯한 생각도 없어보이는 "마샬"과 그를 뒤에서 조종하고, "미키"와의 식사 중 고통에 몸부림칠 때에도 본인의 카펫의 보존만이 중요했던 "일파"는 어찌보면 니플하임 행성 개척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젯거리로 보인다. 쓸데없이 큰 돌을 가져와서 하는 거라곤 돌 안에 이름을 새겨 기념을 하자는 얼토당토않은 행사를 개최하고, 탐사 중 동료가 눈 앞에서 죽은 대원들에게, 특히 "미키"에게 '너가 죽었어야지.'라는 말을 일삼으며, 심지어 대원 중 한 명인 "카이"에게 끔찍한 제안까지 건네는 "마샬"은 감독이 보여주고자 하는 최악의 리더의 표본이면서 동시에 그런 그의 죽음은 그런 리더의 말로는 이러함을 의도적으로 보여주고자 한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어쩌면 작품 속 "마샬"보다도 "일파"가 더 중요해보인다. 그러한 데에는 그들이 대화를 하거나 "마샬"이 무언가 연설을 하던 와중에도 "일파"가 자료를 주거나 연설 내용을 바꾸고, 바꾸게 하기 때문이다.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바로 그녀가 '소스'에 극도로 집착한다는 사실이다. 그녀가 그토록 소스에 집착했던 이유, 이를 영화에 연출한 이유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영화 속에서 언급되는 것처럼 "일파"는 소스를 첨가하는 건 그 행위 자체로 본인들의 고결성을 더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도저히 사람이 먹는 것이라고 말하기 힘든 음식을 제공받아 먹는 대원들과 달리 신선한 과일, 신선한 육류로 만든 무언가를 먹으면서, 심지어 소스까지 더해먹는 본인들은 평범한 그들과는 다른 무언가의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한 건, 다른 무언가로 존재하고 싶고, 군림의 삶을 영위하고 싶어 소스를 첨가하는 이들이, 정말 남들과는 다른, 그래서 차별받고 무시받는 "미키"를 더 가세해서 무시하고, 멸시한다는 점이다. 또 다른 하나는 그녀 자체가 소스이기 때문이다. 물론 음식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맛을 결정하는 데에 있어서 신선한 원재료들로 만들어진 디쉬 위에 올려간 소스는 맛을 증폭시키고, 배하긴 하지만 그 자체로 음식이라고 표현하긴 힘들다고 생각한다. "일파"의 과거 이야기는 영화 속에서 등장하지 않았지만 사실 "일파"라는 인물은 남편인 "마샬"이 니플하임의 총사령관이 아니었다면, 혹은 "마샬"과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그녀가 그토록 무시하는 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보통의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마샬"을 뒤에서 조종하고, 종속시켜 스스로의 뜻을 풀어나가려 하지만 정작 구속되고, 종속되어있는 것은 본인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하는 "일파"는 원재료와 디쉬의 메인에서 벗어나지 못해 메인을 더 밝게 비춰줄 수 밖에 없는 소스에 불과하다.
니플하임에 이주하여 정착하게 된 지구에서 온 인간들. 맞닥뜨린 불명의 존재에게 그들은 '벌레'를 뜻하는 "크리퍼"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다. 마치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처음으로 도착하여 이미 정착해있던 원주민들에게 본인 마음대로 '인디언'이라고 명명한 것처럼 말이다. 인간을 해하려고도, 침범하려고도, 위해를 가하려하지도 않았던 "크리퍼"들은 미지의 존재에 그저 놀라 공포에 휩싸인 인간들에 의해 공격받아 한 마리가 죽게 된다. 이런 상황은 물론 영화적으로 연출된 상황이지만, 이런 일련의 과정들은 모두 우리가 역사적으로 꽤 반복해왔던 일들이다. 영화에서 언급되었던 것처럼 우리가 외계인인 상태에서 이미 정착해있던 원주민들, 토착민들에게 외계인이라는 별칭을 부여하게 되는 우리의 습관, 이는 인간의 오만함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이 인간의 오만함을 비판하려고 하는 것인지, "마샬"의 행동, 그가 내리는 어리석은 지령들, 사람들의 "크리퍼"에 대한 인식들에서만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대사 속에도 깨알같이 이를 녹여내 표현하고자 했다. 또한 재밌는 건 작중 시점이 2054년이라는 점 그리고 인간 재생장치가 개발된 시점이라는 걸 감안하고 본다면 우주선 내부나 니플하임 속 개발 상황이 굉장히 최첨단이고, 하이 테크놀로지스러운 분위기를 취할 수 있을텐데 그렇지 않고, 노출 콘크리트 카페와 같이 배관이 그대로 들어나고, 각종 가스들이 여러 군데에서 분출되는 배경을 보여주어어 스스로를 굉장히 우아하고, 고결하다고 생각하는 인간들의 그 오만함을 깨뜨리는 또 다른 독특한 방법이었다고 생각한다.
- 반복되는 죽음에서 벗어나 온전히 '나'가 되어 성장하다.
16번의 죽음을 맞은 "미키". 어느날 기계의 오류인지, 과학자들의 실수인지 살아있는 상태에서 또 하나의 본인이 복제되어 "미키 17"과 "미키 18"이 공존하게 되는 상황에 부딪히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카이"가 죽는 것은 어떤 느낌이냐고 물었을 때, 이에 대해 "미키 17"이 죽는 것이 아직도 두렵다고 말하는 장면이 굉장히 인상적이다. 시간이나 목숨이나, 삶이나, 죽음 등을 뒤바꿀 수 있는 여타 영화들에선 반복되는 상황 속에서 그 반복되는 상황을 또 한번 맞닥뜨리게 되는 것들에 대해 그리 두려움을 느끼지 않거나 두려움을 느껴도 내색하거나 표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번 영화 <미키 17>에서의 주인공 "미키"는 반복되는 죽음, 16번째의 죽음이 이어졌음에도 아직까지도 죽음이 두렵다고 말하는 장면은 마치 '죽는 건 어떤 기분이야?'라는 점에 대해 영화가 직접 답을 해주는 것만 같았다.
영화 <미키 17>이 SF의 장르를 띄는 특징을 제외하고, 다른 어떤 장르를 차용했다고 생각하는지 묻는다면 필자는 주저 없이 '성장 영화'의 장르를 띄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물론 영화 해리포터 시리즈나 영화 <보이후드>처럼 성장 영화가 서사의 주를 잡고 있는 작품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작품을 전부 보고난 후면 영화가 성장 영화의 한 축을 서고 있음을, "미키"라는 인물이 성장했음을 그리고 최초에 영화가 타이틀을 보여줄 때 '미키 17~19'으로 넘어가는 장면이 종반부에서 '미키 반즈'로 변하는 과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결국 사고로 인해 "미키 17"과 "미키 18"은 공존하게 되었고, 이 둘은 '멀티플' 상태에 놓여지게 되었다. 신기하게도 "미키 17"의 온순하고, 착하면서 다소 멍청한 성격과는 달리 "미키 18"은 다혈질에 항상 화가 나있는 성격을 가졌다. 영화가 성장 영화적 특성을 지닌다는 특징은 "미키 17"과 "미키 18"의 성격 차이 그리고 그 성격 차이가 결국 서로 융화되어 변하게 되었다는 결론에서 드러난다. 항상 누군가를 '죽일 것이다.'라고 말하는 "미키 18"의 최초 살해 타겟은 바로 "미키 17"이었다. 당연히 멀티플 상황이 발생하면 누구 하나는 죽어야 둘 다 죽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때에 있어 "미키 17"은 늘 겪는 죽음이라 괴롭고, 공포스럽지만 이에 순응할 줄 알았으나 인상적인 대사 하나를 던지게 된다. '이번에 죽으면 정말 죽는 것만 같다.' 동일 인물이고, 두 인물 모두 하나의 몸에서 재생되어 서로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지만 "미키 17"이 죽는다면 "미키 17"으로서의 재생이 이루어지지 않고 현실에 남겨져 있는 "미키 18"이 그 삶을 이어나간다는 사실은 굉장히 복잡하면서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출된다.
서로를 죽이지 않는 상황이 이어지던 와중 "미키 17"이 "마샬"에게 받은 수모를 듣던 "미키 18"은 "마샬"을 죽이자는 결론에 도달하여 죽이려 다가가는데, 이 지점으로부터 영화의 변화가 시작된다. 계속해서 서로를 죽이려 하고, 서로의 존재를 탓하던 둘은 결국 서로에게 공감하고, 서로의 존재에 위안이 생겨 서로의 공통된 타겟인 "마샬"을 죽여야 되겠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는 이러한 인물의 관계의 변화뿐만 아니라 각 인물의 성격마저 변하여 결국 성장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미키 17"과 "미키 18"은 같은 사람이지만 다른 인물처럼 비춰지게 되고, 외양만 같지 사실은 다른 인물이라고 봐도 틀리지 않다. 그런 관점에서 "미키 17"의 고통을 다혈질적이고, 욱하는 성격의 "미키 18"이 공감하고, 위안하려는 모습, "미키 18"의 분노서린 성격을 억제하여 그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이 한 몸 바치려 하는 쭈굴이었던 "미키 17"의 변화가 이어진다. 이는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러 격발하게 된다. "마샬"은 급기야 "크리처"들과 전쟁을 펼치려 했고, 이를 저지하여 세상을 구하러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미키 17"과 "미키 18"은 밖으로 향한다. 각종 사투를 벌이다 스스로를 영웅 추대하러 나온 "마샬"을 죽이러 "미키 18"은 달려가 결단을 내리게 되는데, 그때 버튼 한 개만 누르면 "마샬"을 죽이는 동시에 본인도 함께 죽을 수 있는 상황과 부딪히다. 잠시 죽음에 망설이던 찰나, 그는 "미키 17"을 쳐다보고 버튼을 눌러 그를 희생해 세상을 구하게 된다. 늘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혈안되었던 "미키 18"이 결국엔 자신의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그 삶이 마무리되는 장면 은 "미키 18"이라는 인물의 변화를 보여주는 장면이면서 동시에 "미키 17"에게도 변화의 또 다른 밑거름이 되어준다.
"미키"의 여자친구이자 작중 가장 강단있고, 리더십이 있는 "나샤"가 위원장이 되어 더이상의 익스펜더블은 존재하지 않음을, "미키"도 익스펜더블로서의 무시와 멸시에서 벗어나 인간들을 구한 영웅임을 선포했다. 재생장치 폭파 버튼을 손에 쥐고 있던 "미키"는 빨간색 버튼을 보고 잠시 생각에 빠진다. 그는 어릴 적 본인이 빨간색 버튼을 잘못 눌러서 엄마가 사고로 죽었다고 생각한다. 사실 어느 누가 생각해도 억지라고 하겠지만 "미키"만큼은 너무도 이에 대해 진지해서 아직도 트라우마에 빠져있다. 생각에 잠긴 "미키"는 다시 과거 시간대로 돌아가 재생장치 앞에 서 있다. 그곳엔 소문으로 자살했다고 했던 "일파"가 있었고, 폭발로 사망한 "마셜"이 재생되고 있었다. "일파"는 그에게 너무도 심한 모욕서린 말들을 내뱉었고, 그녀의 손으로 붉은 피들이 모여 버튼의 형상을 띄게 되었다. 그녀는 본인의 특제 소스이니 한번 먹어보라고 전한다. 아마 그녀는 "미키"가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건 모두 "미키"가 그동안 살아오면서 겪었던 수많은 트라우마들이 모여 만들어진 허구의 세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키 18"을 만나 세상을 구하고, 희생을 배우고, 다름을 알아가며, 본인에게 주어진 마지막 삶에 기쁨을 알게 된 "미키"는 "미키 18"에게 배운 강단있는 모습을 보여주며 버튼을 눌러 재생장치를 폭파시킨다. 영화는 최종장에 이르러 "미키"라는 인물이 어떤 식으로 성장하게 되었는지, 성장하게 되어 어떤 선택을 하는지를 보여주면서 결론을 짓고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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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내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아이의 마음
끝내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아이의 마음
첫 장면부터 어딘가 외로워 보이는 프리다는 담담하면서도 위태한 표정으로 폭죽이 터지는 하늘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긴다. 이 영화의 대부분의 장면이 이렇다. 어딘가를 응시하는 프리다의 얼굴을 비추거나 프리다가 쳐다보는 대상을 비춘다. 가족 중 누구도 프리다가 외롭게 느낄만한 행동을 하지 않지만, 프리다는 그 속에서 왠지 모를 소외감을 느끼고 외로워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사랑받는 아이인지, 가족들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지 계속해서 확인하고 싶어 한다. 외숙모가 머리를 빗겨주는데 그 빗을 던져버리고, 일부러 신발끈을 못 매는 척 묶어달라고 하며 어른들의 눈치를 살피기도 하고, 아나가 가져온 배추를 자신이 가져온 것처럼 행동하기도 한다. 프리다의 이런 행동들은 아이의 사소한 장난 내지 투정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이런 프리다의 행동이 모두 웃어넘길 정도의 것은 아니다. 프리다는 아나를 숲에 놔두고 돌아와 모른 척하거나, 아나가 물에 빠지는 것을 보고만 있는 등 종종 선을 넘는 행동을 해 아슬아슬한 상황을 만들기도 한다.
그런 프리다를 미워할 만도 하지만, 아나는 프리다를 미워하지 않는다. 팔을 다치고도, 물에 빠진 후에도 오히려 계속해서 프리다의 곁에 있으려 하며 자신과 놀아달라고 말한다. 또한 아무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며 가출하려는 프리다에게 자신은 프리다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아나의 사랑과 관심이 프리다의 마음을 움직인 걸까, 한밤중의 가출을 계기로 가족들의 진심을 확인한 뒤, 프리다의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가 보이는 듯하다. 그런데 그렇게 가족들과 화목할 것 같던 프리다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린다. 이유를 묻는 가족들의 물음에 연신 모르겠다 답하며 서럽게 운다. 이 울음은 그렇게 확인하던 가족들의 사랑을 급작스레 깨닫게 되어 터진 울음으로도 보이지만, 그보다도 엄마의 죽음을 끝내 인정하고 받아들임고 동시에 터져 나온 울음으로 보인다. 외숙모가 생리통에 힘들어하자 불안해하고, 엄마가 어떻게 죽었는지 들으며 “안 아프실 거죠?”라며 재차 되묻던 프리다의 모습에서 외숙모는 엄마처럼 아프지 않다는 걸 확인하고 느끼는 안정감이 묻어났기 때문이다. 가족 중 가장 서먹해 보이던 외숙모와 프리다의 관계는 어쩌면 이때부터야 비로소 시작됐는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복잡한 상황을 이해하고 적응하는데 생각보다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는 감독의 말처럼, 영화는 한 아이가 ‘엄마의 죽음’이라는 상황을 이해하고 그것에 적응해가는 고정을 카메라에 섬세하게 담아냈다. 그렇기 때문에 <프리다의 그해 여름>은 아이의 마음에 폭 들어갔다 나온 것만 같은 인상을 준다. 불안한 시선으로 모든 것을 응시하던 프리다가 안정감 속에서 울음을 터뜨리기까지, 특별한 배경음악이나 인위적으로 감정을 자극하는 장면이 없음에도, 우리는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프리다의 마음에 공감하며 그 상황에 감정을 이입하게 된다. 이 영화가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배경에는 감독의 자전적 경험이 있다. 카를라 시몬 감독은 다른 사람들이 보고 비슷하게 느낄 순간을 영화화하고 싶었고, 자신의 1993년의 여름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실제로 영화의 배경이 된 카탈로니아의 가로트아 마을은 감독이 유년시절을 보낸 곳이며, 프리다가 가출했다 돌아오면서 “너무 깜깜해서 내일 갈 거예요”라고 말하는 장면의 경우, 감독의 경험을 그대로 살린 장면이다. 감독의 이런 자기 경험 투영은 영화의 사실감을 높였다.
또한 감독은 되도록 카메라를 한 장소에 두고 촬영하며, 배우들이 카메라의 시선을 모르게 영화를 찍었다고 한다. 이런 점은 이 영화의 자연스러움을 배가 되게 했다. 특히나 프리다와 아나의 역할놀이 장면은 영화에서 가장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장면 중 하나다. 여기서 프리다는 엄마를, 아나는 딸을 연기한다. 프리다가 연기하는 인물은 프리다의 엄마로 보인다. 엄마는 몸이 아프다며 딸과 놀아주지 않고 의자에 누워있는다. 이 장면은 프리다의 엄마가 어떤 사람이었을지 짐작하게 만들며, 둘의 역할놀이를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 장면을 포함한 영화의 모든 장면이 자연스럽다. 엄청난 사건이 일어나지 않음에도, 아이의 시선을 그대로 따라가며 섬세하게 표현함으로써 그것을 보고 듣는 관객에게 몰입감을 준다. 프리다의 감정을 그대로 따라가다 마지막 장면을 보며 그와 함께 느낀 감정은 아마도 기억에 오래 남을 듯하다. 이런 영화를 볼 때, 좋은 영화는 구태여 반복하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 느끼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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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질라 VS. 콩 - 훌륭한 메인 메뉴, 아쉬운 사이드 메뉴
한국에서 불모지에 가깝게 된 영화 장르 중에는 괴수물이 있다고 생각한다. 봉준호 감독의 "괴물"의 비평 및 상업적 성공으로 인해 주목받고 불타올랐지만, 이후 "7광구", "물괴"의 참패 이후 다시 사그라든지 오래다. 이렇게 한국에서 만든 영화 뿐만이 아니라 해외에서 제작한 영화도 그런 경향이 보이는데, 안노 히데아키의 "신 고질라"는 관객수 만 명도 못 모으고 퇴장하였고, 이번에 리뷰하는 고질라 VS. 콩이 포함된 몬스터버스의 전작 중 "고질라: 킹 오브 몬스터"도 관객수 350,000만명 대 정도밖에 흥행하지 못했다. 이렇게 한국에서는 괴수물이 해외에 비해 유난히 부진하기에, 이번 고질라 VS. 콩도 어느 정도 힘을 보일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었다. 하지만 예고편부터 조회수 7,600만회를 넘기는 등 많은 기대를 받는 것을 보아 대흥행까지는 어려워도 전작보다는 확실히 주목받겠다고 추측했는데, 지금 이 글을 쓰는 기준(21년 3월 30일)으로 이미 관객수 35만명을 달성함으로서 전작 고질라: 킹 오브 몬스터의 한국 관객수를 넘기는 것은 사실상 확정되었다. 본격적인 리뷰를 시작하기 전에 한마디 하자면, 고질라 VS. 콩은 괴수 매니아 뿐만 아니라 대중들에게도 충분한 재미를 선사하는 훌륭한 괴수물이다.
몬스터버스 작품들의 공통적인 비판점은 빈약한 인간들의 서사이다. 이러한 비판은 몬스터버스 작품 뿐만 아니라 타 괴수물에서도 대체적으로 보이는 비판점인데, 왜냐하면 괴수 영화의 알파이자 오메가, 즉 본질은 괴수가 도시를 때려부수는 장면이나 괴수간의 싸움씬이다. 이 장면들이 비율이 적거나 장면의 퀄리티가 빈약하다면 괴수물로서 탈락인 것이다. 그렇기에 괴수씬의 비율을 높이고 힘을 줄 수 밖에 없는데 그렇다보니 인간 파트가 줄어들고 줄어든만큼 표현이 줄어들 수 밖에 없다. 이번 영화에서도 여전히 인간은 괴수의 장소 이동 및 방관자, 도움, 그리고 응원(...) 정도 밖에 역할을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충분한 재미를 선사하는 훌륭한 괴수물이라 평한 이유는, 어찌됐던 간에 괴수 파트는 정말 잘 만들었기 때문이다. 본 작품은 몬스터 버스 유니버스의 사실상 마무리 같은 포지션이지만, 전작을 보지 않아도 충분히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왜냐하면 뒷배경을 몰라도 일단 괴수들이 싸우는 것은 재미있고 스케일이 엄청나기 때문이다. 괴수씬은 정말 버릴 장면이 하나도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모든 장면이 박진감 넘친다. 다만 이런 빠르고 화끈한 전개를 위해 개연성을 다수 버린 점은 정말 노골적으로 보이는 단점이다. 일부 장소의 이동이나 인물의 행동을 어찌저찌 해결되거나 우연, 에너지에 이끌렸다 식으로 해결하는 방법은 굉장히 안일하지만, 그대신 강력한 오락성을 얻었다고 볼 수 있다.
고질라 VS. 콩은 정말 괴수물로서의 본질을 훌륭하게 잡았다고 평할 수 있다. 괴수물의 주인공은 인간이 아닌 괴수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인지하고 선보였다. 다만 그렇기에 인간의 서사는 줄어든만큼 덜 지루하지만 여전히 빈약하다는 단점을 안고 가지만, 본질은 확실할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관객을 만족시킬 정도기에 덮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냥 화끈하게 두 괴수의 맞짱을 보고 싶다면 지금 바로 극장으로 달려가길 바란다. 코로나로 인해 썰렁해진 극장가에 "왜 영화를 영화관에 가서 봐야하느냐?" 라는 질문을 "이런 영화를 보려고." 라고 답할 수 있는 영화가 등장했다.
*이 글은 원글없이 새로 작성된 글이며, 출처란에는 작성자의 인스타그램 주소를 기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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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뮤지컬 영화 그 이상
8★/10★
뮤지컬 영화 그 이상을 본 것만 같다. 1964년에 제작되어 제17회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쉘부르의 우산〉 이야기다. 이 영화는 통상적인 뮤지컬 영화와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대사가 노래다. 지금까지도 여기저기서 들릴 정도로 인상적인 사운드트랙을 갖고 있기도 하다. 영화를 연출한 자크 드미 감독도 이 영화를 ‘시네 오페라’라고 부르며 음악성에 자신감을 표했다. 그러나 〈쉘부르의 우산〉의 장점은 음악성에서 그치지 않는다. 아름다운 음악과 어우러지는 드라마 역시 굉장히 강렬하다. 여러모로 〈쉘부르의 우산〉은 음악과 이야기에는 ‘진보’가 없음을 보여주는 영화다. 전자제품처럼 나중에 만들어졌다고 자연히 더 좋은 품질이 보장되지 않는 것이다.
영화의 주인공은 기와 쥬누비에브다. 둘은 모두 프랑스의 조그만 항구도시 쉘부르에 산다. 기는 자동차 정비공으로 일하고, 쥬느비에브는 어머니를 도와 우산 가게에서 일한다. 서로를 깊게 사랑하는 둘은 결혼을 약속한다. 하지만 그들 앞에는 여러 어려움이 있다. 우선 20살인 기는 아직 군대에 다녀오지 않았다. 더불어 16살의 쥬느비에브 역시 너무 어린 나이에 사랑만으로 결혼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는 어머니의 반대에 부딪힌다. 쥬느비에브의 가게 상황이 좋지 않은 것도 가난한 정비공 기와의 결혼을 가로막는 현실적인 이유다. 즉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한다는 것 말고는 그 무엇으로부터도 지원받지 못하는 상태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둘은 모든 고난을 극복할 각오가 되어 있지만 말이다.
상황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기에게 입영 영장에 날아오고, 둘은 급작스러운 이별을 맞이한다. 서로를 향한 둘의 마음은 여전히 굳건한데, 주변 상황은 자꾸 둘의 관계를 흔드는 상황도 반복된다. 부대 상황이 좋지 않아 자주 연락하지 못하는 기, 어머니의 설득과 핀잔에 점점 피로해져가는 쥬느비에브…. 그러나 결정적인 건 쥬느비에브의 임신이다. 임신으로 정신적‧신체적으로 취약한 상태에 놓인 쥬느비에브는 결국 카사르라는 남자와 결혼을 결심한다. 카사르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남자로 기의 아이를 임신한 쥬느비에브를 아내로 받아들이기를 결심할 만큼 쥬느비에브에게 진심이다. 쥬느비에브 역시 처음에는 내키지 않았으나 복잡한 상황과 불확실한 기와의 관계에 괴로워하기보다 자상한 카사르와 결혼하는 것이 더 좋겠다는 판단을 내린다.
알제리에서 돌아온 기는 뒤늦게 쥬느비에브의 소식을 듣고 좌절‧방황한다. 이제는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된 쥬느비에브의 우산 가게를 쓸쓸히 배회하고 술과 여자에 탐닉하기도 한다. 그러나 쥬느비에브가 카사르를 만나 위안을 얻었듯 기에게도 또 다른 여인, 사랑이 찾아온다. 기는 이제야 몸이 아픈 자신의 대모를 오래전부터 간호해온 마들렌의 존재가, 그리고 자신을 좋아하는 마들렌의 마음이 눈에 들어온다. 마들렌은 기가 쥬느비에브에게 실연당한 아픔을 자신에게서 보상받으려 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지만 기의 진심을 확인하고는 그와 결혼식을 올린다.
서로를 누구보다 사랑했던 두 연인은 얄궂게도 서로 다른 사람과 결혼해 서로를 잊은 듯 살아간다. 영화의 마지막은 기와 쥬느비에브의 우연한(혹은 의도된) 만남으로 마무리된다. 각자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는 둘은 짧은 몇 마디 말로 제대로 매듭짓지 못한 지난 세월을 아련히 회상한다. 더불어 누군가는 서로가 여전히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을 조심스레 내보이고, 다른 누군가는 그 가능성을 단호히 잘라낸다. 운명과 사랑의 엇갈림을 절묘하게 포착한 이 장면은 비극(기와 쥬느비에브의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과 희극(새로운 사랑을 만나 행복하게 살아가는 둘)이 동시에 공존하는 삶이라는 드라마의 가장 극적인 순간을 함축적으로 전달한다. 〈쉘부르의 우산〉은 사랑, 음악을 다루는 영화의 계보에 오래도록 기록될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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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조 로코퀸의 소소한 귀환
가수, 배우, 사업가로 여러 방면에서 활동하는 대표적인 멀티 엔터테이너이자, 가장 영향력 있는 히스패닉 셀레브리티 중 한 사람인 제니퍼 로페즈의 2023년 신작 영화 샷건 웨딩을 관람하고 왔습니다. 하나의 장르에 특화되었다고 말할 순 없지만, 성적으로 따지자면 ‘웨딩플래너’, ‘러브 인 맨하탄’, ‘퍼펙트 웨딩’ 등과 같은 상당수 로맨틱 코미디의 주연을 맡아 흥행과 대중의 사랑을 이끌었던 배우죠. 작년 ‘메리 미’도 그러했는데, 자신의 장점을 살릴 수 있는 맛깔나는 로코로 돌아왔습니다. 정말 웃기다곤 할 수 없지만, 봄맞이 가벼운 로코물을 찾으신다면 딱 알맞은 작품이 아닐까 생각되네요. 참고로, ‘데드풀’ 캐릭터로 최고의 만담꾼으로 자리 잡은 라이언 레이놀즈가 제작에 참여했고, ‘피치 퍼펙트’의 제이슨 무어 감독이 연출을 맡았습니다.
※ 최대한 자제하였으나 일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주의 부탁드립니다.
“뭔가 예감이 안 좋아”
‘달시’(제니퍼 로페즈)와 ‘톰’(조쉬 더하멜)의 결혼식 당일, 우여곡절 끝에 결혼식에 참석할 모두가 섬에 모인다. 모든 게 순조로워 보이던 그때! 갑자기 들이닥친 해적으로 인해 결혼식장의 모두가 인질이 되고, ‘달시’와 ‘톰’은 무사히 혼인서약을 마치기 위해 목숨을 건 버진 로드를 걷게 되는데...
예고편│Trailer
원제: Shotgun Wedding│감독: 제이슨 무어│각본: 마크 해머
출연진: 제니퍼 로페즈, 조쉬 더하멜, 제니퍼 쿨리지, 소냐 브라가 외 多
장르: 액션, 코미디, 멜로/로맨스│상영 시간: 100분
국가: 미국│등급: 15세 관람가
수입: (주)제이앤씨미디어그룹, 조이앤시네마│배급: 와이드 릴리즈(주), (주)제이앤씨미디어그룹
평점: 평론가 4.0, 로튼토마토 신선도 45% 팝콘 51%, IMDB 5.4, 메타 스코어 46점
개봉일: 2023년 3월 29일
“로코의 정석”
서로 다른 온도 차의 메리지 블루를 겪는 신부 달시와 신랑 톰이 결혼식 당일, 예식장을 습격한 해적들로 인해 엉망이 된 자신들의 결혼식을 수습하며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혼인서약을 무사히 마치려는 고군분투를 담은 코믹 액션입니다. 축하하러 온 하객들이 모두 인질이 되면서 두 남녀는 소중한 사람들도 지키고, 자신들의 결혼식도 지켜야 하는 목숨을 건 특별한 버진 로드를 걷게 되죠. 포스터부터 액션을 기대하게 하지만, 실상은 달콤한 로맨스와 미국식 생활 유머가 섞이고 가끔 화끈한 액션을 보여주는 하나로 형언할 수 없는 종합적 장르 되겠습니다. 적재적소에 배치된 액션, 재치만점의 유머가 고전적인 형태를 취하지만, 제니퍼 로페즈의 팬이라면 그녀의 원맨쇼에도 충분히 만족하실 듯합니다.
또한, 드라마 ‘화이트 로투스’에서 좋은 연기를 펼치며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한 배우 제니퍼 쿨리지가 톰의 엄마 캐롤로 등장해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하며, 지친 관객들에게 웃음을 선사합니다. 얄밉지만 미워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진 그녀와 달시의 엄마 레나타의 소냐 브라가가 없었다면 아주 심심할 뻔했죠. 단지 미국식 개그가 국내 관객에게 잘 먹힐지는 의문이 들고, 전체적으로 오프닝부터 엔딩까지 예상 가능한 범위 내의 올드한 연출이라는 점에서 요즘이 아닌 옛날 영화를 보는 기분에 상당히 호불호가 생길 수밖에 없을 합니다. 그래도 제니퍼 로페즈, 조쉬 더하멜의 케미는 장르적 즐거움을 잘 채워주고 있어 가벼운 로맨틱 코미디를 찾으셨다면 딱 알맞은 재미를 줄 것입니다. 자기 색깔을 잘 아는 배우의 연기만큼 눈을 즐겁게 해주는 것도 드무니까요. :)
ps. 53살임에도 불구하고 로페즈 언니 근육이..관리를 얼마나 하시는건지 -0-
한 줄 평 : 원조 로코퀸의 웨딩 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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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먹지 마세요! 그릇된 신념에 양보하세요!
“먹지 마세요! 저를 믿으세요!” 성장 시기인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하는 영양교사라니. 근데, 들어보면 일리가 있다. 한 끼를 거르면 기후변화, 식량난, 자연재해의 원인이 되는 환경오염을 줄일 수 있고, 체지방 감소에 따른 건강을 챙길 수 있으며, 자제력 향상에도 도움이 된다. 그렇다면 나도 한 번 동참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 정신 차려! 이건 환경보호, 체지방 감소, 자기 통제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오로지 이 가르침의 근원은 ‘믿음’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릇된 신념’. <클럽 제로>는 무한 경쟁과 소외감에 구멍 난 마음을 음식이 아닌 잘못된 믿음으로 채우려는 아이들, 그리고 이를 방조하거나 이용하는 어른들을 비판 어린 시각으로 바라보는 영화다.
한 엘리트 학교의 교실, 삼삼오오 아이들이 모인다. 영양교사로 부임한 미스 노백(미아 와시코브시카)은 건강을 유지하면서 학습 능력을 키우는 ‘의식적 식사법’을 가르친다. 뭔가 체계적이면서도 믿음이 가는 그녀의 말에 점점 빠져들어 식사량을 줄여가는 아이들. 급기야 야위어 가는 자신을 돌보지 않은 채 선생님과 함께 ‘클럽 제로’ 회원이 되기 위한 단계를 밟는다. 음식을 거부하는 아이들 때문에 걱정이 가득한 부모들은 이내 학부모 회의를 열고 미스 노백을 내쫒기로 결정한다.
미스 노백은 인간에게 그릇된 신념이 얼마나 무서운 일을 초래하는지 보여주는 영화다. ‘의식적 식사법’을 누가 믿고 따르겠냐 하겠지만, 아무나 그 타깃이 될 수 있다. JMS, 오대양 사건, 아가동산만 보더라도 이를 알 수 있지 않은가. 극 중 아이들은 환경보호, 건강 유지, 자제력 및 집중력 강화, 수업 성적 향상을 위해 이 수업을 듣지만, 어느 순간 초심을 잃고 그릇된 신념이란 늪에 빠진다.
이들을 잘못된 믿음으로 인도하는 가장 큰 요인은 바로 결핍이다. 아이들은 모두 결핍된 요소가 하나씩 있다. 가족의 사랑, 뭐든지 최고가 돼야 한다는 중압감, 가정 형편상 장학금을 받아야 하는 압박 등 어른들은 모르게 그들은 마음에 구멍이 생긴 채 살아간다. 이때 미스 노백의 따뜻한 말 한마디와 격려, 카리스마 넘치는 리딩이 그 구멍을 메워준다. 자신도, 가족도 해줄 수 없는 일을 그녀가 했기에 믿음과 신뢰가 쌓이고, 그때 옳고 그름의 경계는 허물어진다. 이로 인해 그것이 그릇된 신념이라 할지라도 그녀가 하는 일이라면 무조건 따르게 되는 것. 여기에 집단 커뮤니티에 그것도 남들은 참여하지 못하는 것에 속하길 바라는 아이들의 심리도 작용한다.
아이들만 결핍이 있는 건 아니다. 미스 노백도 마찬가지다. 극 중 미혼인 그녀는 인정 욕구와 내적 사랑의 대상을 아이들에게서 찾는다. 자신의 말을 따르고 심지어 복종하는 아이들의 믿음이 곧 그녀의 결핍을 충족하는 에너지원인 셈. 그 또한 결핍을 채우기 위한 잘못된 신념이 낳은 신낳괴(잘못된 신념이 낳은 괴물)였던 것이다.
잘못된 믿음으로 파생된 이 기묘한 사건을 다루는 영화는 거짓을 진실로 믿는 현대사회의 문제점을 바로 보게 한다. 미스 노백이 영양교사가 된 건 인터넷을 통해 그녀의 ‘의식적 식사법’을 알게 된 학부모의 추천 덕분이다. 방법에 대한 사실 확인 보다는 유명도와 트렌드가 더 중요한 시대. 학부모의 추천을 받아들인 교장은 아이들의 안위보단 최신 트렌드를 자신의 학교에서 펼칠 수 있다는 것 자체에 만족한다. 검증 따윈 안중에 없다. 부모들도 비슷한 양상이다. 특히 미스 노백을 추천한 부모들은 트렌드라면 꼭 해야 하는 현대인들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 진실이야 어떻든 최신의 것이라면 무조건 따르고 맹신하는 모습은 우리의 자화상처럼 느껴진다.
감독은 이런 주제를 색감과 음악으로 잘 표현해 낸다. 극 중 주된 컬러는 노란색이다. 학교, 학생(교복 등)을 명시하는 색인 동시에 후반부의 이야기를 관통하는 색이다. 노란색은 보통 행복, 기쁨 등의 긍정적 색상으로 지식, 지적 능력도 의미한다. 초반부에는 원래 뜻으로 색이 사용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신호등의 노란색 불처럼 경고, 주의의 의미가 도드라진다. 극 말미에 점점 말라가면서도 클럽 제로의 일원이 되는 것에 행복한 아이들, 이를 방관하거나 말릴 수 없는 어른들을 향한 경고처럼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노란색이 가진 색 의미, 지식, 지적능력을 오롯이 가져가는 건 장학금을 받으려 이 수업을 들은 벤의 엄마뿐이다. 어른들 중 그나마 자식을 걱정하고, 염려하며, 먹지 않는 행위에 강한 반기를 드는 유일한 사람으로 등장한다. 마지막까지도 그녀는 노란색 옷을 입는다.
음악의 쓰임새도 독특하다. 전위적인 음악으로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건 물론, 토속신앙에서 쓸법한 묘한 구음, 그리고 이 구음이 모여 후반부 그들 만의 찬가가 되는 결과물은 기묘하면서도 잘못된 신념이 하나로 뭉쳐지는 과정을 돋보이게 한다. 제36회 유럽 아카데미 음악상 수상, 제56회 시체스 영화제 음악상 수상만 보더라도 극 중 음악 활용도가 돋보였다는 걸 알 수 있다.
결핍은 성장의 동력도 되지만, 되려 성장하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된다. 마음속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던 그 과정을 겪었던 사람이라면 이 영화가 남달라 보일 것 같다. 약간의 다정함과 친절함, 그리고 자식을 향한 한없는 믿음으로 구멍을 메웠다면 아이들의 미래는 달라졌을까? 어른들의 미래도 달라졌을까? 거두절미하고 그릇된 신념에 양보하지 말고 일단 먹자, 먹어야 산다!
덧: 식욕 감퇴 장면이 있으니 유의해서 감상하시길~~
사진 출처: 판시네마 제공
평점: 3.5 / 5.0
한줄평: 그릇된 신념이 낳은 현대판 불행 우화!
*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참석 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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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소희 한 사람의 죽음이 드러낸 현실
?Rabbitgumi 입니다!
영화 다음 소희가 개봉했어요.
과거 전주에서 있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인데요.
가슴아픈 현실을 볼 수 있는 영화에요.
많은 분들이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콜센터 직원들의 노동 현실과 고등학교 현장 실습의 현실이 잘 표현되어 있어요.
누가 죽어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지금의 현실이 무척 답답하게 느껴지는 영화에요.
이 영화가 어땠을지 저의 간단한 리뷰를 영상에서 말씀드릴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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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다비전이 차려놓은 마블의 탄탄한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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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41 여러분 덕분에 많이 웃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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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숲의 비명:사라진 사람들> 예고편
방생한 반달곰을 추적하기 위해 강원도 깊은 산골로 들어가게 된
수의학과 학생들에게
느닷없이 음산한 기운이 드리워지는,
깊은 산으로 들어갈수록 반달곰 추적기는 같은 자리를 맴돌고,
서서히 공포가 밀려오는데...
산 속에서 벌어지는 사실 공포 스릴러
몸을 얼리는 리얼 공포 !
비명은 곧, 영화를 보는 당신이 지른다 !
진실을 알고 싶다면 실눈이라도 떠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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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캐리온> 티저 예고편
매년 크리스마스 연휴가 되면 수많은 여행객이 안심하고 비행기를 탄다. 이번 크리스마스는 사뭇 다르겠지만. 《캐리온》, 12월 13일 공개. 오직 넷플릭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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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답습하면서도 독특했던 5년만의 '봉준호스러운' 금의환향
예술은 자기만의 색깔 싸움이라고 생각한다. 노란색에도 개나리 노란색이 있고, 연노랑색이 있고, 진한 노란색이 있듯, 같은 계열처럼 보이지만 그 안의 디테일과 각종 포인트들을 통해서 각 분야의 예술과 그 안에서 예술을 행하는 예술가들은 자기만의 색깔을 찾고, 만들어나간다. 영화예술을 현 시대의 예술이 선사할 수 있는 최정점의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영화예술만큼 그 색깔이 진한 예술을 더 이상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디테일, 구도, 연결 이음새의 모양, 세트를 만들 때에나 CG처리를 통해 무언가를 표현하려 할 때 등 형언하기 힘들만큼 많은 부분들에서 영화예술가들, 특히 감독들은 자기만의 색깔을 연구하고, 탐구하고, 제작하여 이 점을 의식하든, 무의식적이었든, 본인이 만들어낸 예술품에 자연스레 녹여들게 한다. 그런 점에 있어서 현재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감독님 중 항상 1순위로 꼽히는 감독님 중 한 분이신 봉준호 감독님의 영화론, 감독론, 그만의 색깔은 결코 따라하기도, 흉내내기도 쉽지 않아 보이고, 감독님 스스로도 그게 본인의 무기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더군다나 이런 뚜렷하면서 미학적인 색깔에 새로운 터치를 가미하게 된다면 금상첨화이지 않을까?
영화 <미키 17>은 봉준호 감독님의 이전 작품들의 특장점들만을 모아 그만의 색깔을 표출해낸 작품이면서 동시에 그가 앞으로 어떤 작품들을 또다른 어떤 색깔을 통해 표현해내려 하는지, 또 그걸 통해 어떠한 이야기를 어떠한 식으로 풀어내려 하는지 예고편을 보여주는 것같기도 한 흥미로운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 구조와 "미키"의 물아일체(物我一體)
영화 <미키 17>은 기본적으로 소설 원작 '미키 7'을 기반으로 한 작품이다. 같은 이야기, 같은 등장인물들을 두고 있지만, 봉준호 감독님만의 색다른 이야기와 영화적으로 추가한 캐릭터들을 통해 감독 본인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추가한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어떠한 걸까? 죽는 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이러한 질문들을 지속적으로 영화 내에서 인물들의 입과 대사, 행동을 통해서도 표현하지만, 가장 특이한 점은 이를 영화적 구조, 연출적 방법을 통해서도 그러하다는 점이다. 영화는 시작함과 동시에 주인공인 "미키 17"이 크레바스로 떨어져 기절했다가 다시 깬 상황을 보여준다. 이윽고 "미키 17"을 구하러 와준 줄만 알았던 친구 "티모"가 화염방사기만 챙긴 후 '넌 다시 재생하면 되잖아'라는 말을 전한 후 버리고 떠나기 전 '죽는 것은 어떤 기분이야?'라고 질문한다. 인상적인 건, 이 지점부터 "미키 17"의 목소리가 나레이션, 보이스 오버되고, 영화적 구조는 루핑을 통해 그들의 이야기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어쩌다가 "미키 17"이 재생형 인간이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과거사로 돌아간다는 점이다. 이는 영화의 종반부, 버튼을 눌러 재생장치를 폭파시키 전 일종의 트라우마가 상기되듯 다시 한번 루핑되어 과거의 시간대로 돌아가 니플하임 총사령관 "마샬"의 아내 "일파"를 만나게 되는 씬에서 반복된다.
영화는 루핑을 통해 영화 자체에 순환적 구조를 취하게 되는데, 이는 마치 주인공 "미키 17"이 죽음 이후 재생되는 삶, 반복되는 삶을 영화적으로도 구조화한 것처럼 보인다. 더불어, 그런 순환적인 구조를 영화의 극초반부와 극후반부에만 배치해두고, 정작 본 이야기에서 영화는 순환을 그리 사용하지 않는다. 어쩌면 영화는 "미키"의 죽음이 가볍게 처리되고, 소비되는 극초반부와 마지막이 될 수 있는 죽음을 맞닥뜨린 "미키"의 이야기를 다룬 본 이야기에 극명한 차이를 표현하기 위해 이를 구조적으로도 표출한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앞서 언급했듯, 또 하나 영화가 흥미로운 점은 바로 보이스 오버이다. 봉준호 감독님의 이전 필모그래피를 보게 되면 본 작품만큼 보이스 오버를 빈번히 사용한 작품이 또 없다. 이런 차이가 존재할 수 있는 데에는 표현하고자 하는 방향성에서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영화 <기생충>에서의 주인공인 '기택 가족'을 영화는 주로 비추고, 그들이 겪는 이야기를 통해서 서사를 풀어나가지만 결코 그들의 이야기가 오로지 영화의 메시지가 되지는 않는다. 그들의 이야기, 그들이 행하는 행동들, 겪게 된 순간들로 무언가 다른 메시지를 함축시키고, 관객들은 이를 통해 세 가족 간의 복잡한 관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함으로써 그 메시지를 찾을 수 있게끔 하는 것이 영화 <기생충>의 기본 틀이다. 영화 <미키 17>은 그와는 달리, 오로지 "미키"라는 인물이 그동안 겪어왔던 시련들과 아픔들을 비추고, 사건을 헤쳐나가면서 결국 성장하게 된 일련의 과정을 관객들에게 직접 보여줌으로써 보다 주관적이고, 1인칭 시점스러운 관점에서 인물에게 이입할 수 있는 틀을 가지고 있다. 그런 관점에서, 시시각각 이야기의 배경사를 알려주고, 본인의 과거 이야기를 관객에게 소개하듯 들려오는 보이스 오버는 관객을 인물에게 몰입시켜 "미키"리는 인물이 변하게 되는 과정을 온전히 느끼게 한다.
- '봉준호'식 블랙코미디로 사회를 꿰뚫다.
봉준호 감독님의 작품들을 좋아하는 이유를 솔직히 셀 수 없지만 그 중에서 지금 당장 생각나는 것 중 하나는 바로 '블랙 코미디'이다. 봉준호 감독님의 작품 세계를 보게 되면 한번쯤은 어느 포인트에서라도 웃게 하고, 특유의 재치와 유머를 통해 관객들을 즐겁게 하지만 동시에 그를 통해서 사회적 통념을 꿰뚫게 하고, 유머가 지속되다 순간 바뀌어버리는 상황 속에서 관객들을 놀라게 한다. 복합적이고, 입체적인 감정을 느낄 수 있게 하고, 이를 통해 스스로에게도 영화의 메시지와 질문을 반문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은 봉준호 감독님만의 영화적 센스라고 생각한다. 특히 이번 영화 <미키 17>은 이전 필모들과는 굉장히 다르게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는 작품이고, 또한 특유의 재치와 유머에 사랑스러움까지 입혀져 이전 작품들에선 느낄 수 없었던 행복의 감정까지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결코 이런 점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우리 사회를 직시하게 하고, 마치 현 상황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듯 지금 당장 우리가 겪고 있는 시대적 문제, 형언할 수 없는 혐오와 차별의 시대를 적나라하게 표현한 작품이 바로 이번 작품, 영화 <미키 17>이었다.
영화는 초반부와 중반부 심지어 후반부까지 "미키"에게 죽는 것은 어떠한 의미인지 물어보는 인물들을 마치 의도적으로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관객에게 이 질문에 대해 결코 잊지 말라는 듯하는 것처럼 들린다. 물론 그들 중에선 진심으로 그 감정이 궁금해서 일수도 있겠지만 영화는 대부분 이 점을 통해 "미키"를 비꼬기 위해 질문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생각해볼 점은 "미키"가 익스펜더블이라는 직업을 선택한 것은 맞지마 익스펜더블을 만든 사람은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지구에서의 상황이 채무로 인해 최악으로 치닫는 상황이었어서 다른 선택을 하기 힘들었기에 내린 결론이었지만, 남들이 기피했던 익스펜더블을 선택했고, 극한직업이라는 사실까지도 알았지만 결론적으로 다른 이들이 할 수 없는 일들을 먼저 해주는 개척자이면서 희생자이고, 영웅이기도 한 인물이 바로 "미키"이다. 그를 추대하고, 영웅처럼 모시지는 못할 망정 그들과는 다르다는 이유로, 어차피 다시 재생되기 때문에 처분해도 된다는 이유로 그를 무시하고, 매몰시키고, 버리는 행위들을 "미키"에게 일삼는 장면들이 빈번히 등장하는데, 이 점이 영화를 관람하는 중요한 지점이다. 새로운 곳을 개척하고, 이주 지역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어서 너무도 필요했기에 그 역할을 만들었지만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역할로서 따가운 시선을 받는 직업을 택한 사람마저 무시하고, 천대하고, 끝까지 실험용 쥐로서 사용하려는 영화 속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볼 수 있고, 이는 영화에서만 그치지 않고 우리 사회가 지금도 그러한 인식과 시선으로 인해 우리를 위해 험한 일까지 도맡아 고생해주는 이들에게 오히려 무시하고, 소홀히 하는 것은 아닌가 돌아보게끔 한다.
영화 <미키 17> 속 "미키"만큼이나 중요한 인물이 바로 니플하임 총사령관 "마샬"과 그의 아내 "일파"이다. 리더십도 없고, 본인의 자유의지로 무엇을 하려는 듯한 생각도 없어보이는 "마샬"과 그를 뒤에서 조종하고, "미키"와의 식사 중 고통에 몸부림칠 때에도 본인의 카펫의 보존만이 중요했던 "일파"는 어찌보면 니플하임 행성 개척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젯거리로 보인다. 쓸데없이 큰 돌을 가져와서 하는 거라곤 돌 안에 이름을 새겨 기념을 하자는 얼토당토않은 행사를 개최하고, 탐사 중 동료가 눈 앞에서 죽은 대원들에게, 특히 "미키"에게 '너가 죽었어야지.'라는 말을 일삼으며, 심지어 대원 중 한 명인 "카이"에게 끔찍한 제안까지 건네는 "마샬"은 감독이 보여주고자 하는 최악의 리더의 표본이면서 동시에 그런 그의 죽음은 그런 리더의 말로는 이러함을 의도적으로 보여주고자 한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어쩌면 작품 속 "마샬"보다도 "일파"가 더 중요해보인다. 그러한 데에는 그들이 대화를 하거나 "마샬"이 무언가 연설을 하던 와중에도 "일파"가 자료를 주거나 연설 내용을 바꾸고, 바꾸게 하기 때문이다.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바로 그녀가 '소스'에 극도로 집착한다는 사실이다. 그녀가 그토록 소스에 집착했던 이유, 이를 영화에 연출한 이유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영화 속에서 언급되는 것처럼 "일파"는 소스를 첨가하는 건 그 행위 자체로 본인들의 고결성을 더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도저히 사람이 먹는 것이라고 말하기 힘든 음식을 제공받아 먹는 대원들과 달리 신선한 과일, 신선한 육류로 만든 무언가를 먹으면서, 심지어 소스까지 더해먹는 본인들은 평범한 그들과는 다른 무언가의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한 건, 다른 무언가로 존재하고 싶고, 군림의 삶을 영위하고 싶어 소스를 첨가하는 이들이, 정말 남들과는 다른, 그래서 차별받고 무시받는 "미키"를 더 가세해서 무시하고, 멸시한다는 점이다. 또 다른 하나는 그녀 자체가 소스이기 때문이다. 물론 음식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맛을 결정하는 데에 있어서 신선한 원재료들로 만들어진 디쉬 위에 올려간 소스는 맛을 증폭시키고, 배하긴 하지만 그 자체로 음식이라고 표현하긴 힘들다고 생각한다. "일파"의 과거 이야기는 영화 속에서 등장하지 않았지만 사실 "일파"라는 인물은 남편인 "마샬"이 니플하임의 총사령관이 아니었다면, 혹은 "마샬"과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그녀가 그토록 무시하는 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보통의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마샬"을 뒤에서 조종하고, 종속시켜 스스로의 뜻을 풀어나가려 하지만 정작 구속되고, 종속되어있는 것은 본인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하는 "일파"는 원재료와 디쉬의 메인에서 벗어나지 못해 메인을 더 밝게 비춰줄 수 밖에 없는 소스에 불과하다.
니플하임에 이주하여 정착하게 된 지구에서 온 인간들. 맞닥뜨린 불명의 존재에게 그들은 '벌레'를 뜻하는 "크리퍼"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다. 마치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처음으로 도착하여 이미 정착해있던 원주민들에게 본인 마음대로 '인디언'이라고 명명한 것처럼 말이다. 인간을 해하려고도, 침범하려고도, 위해를 가하려하지도 않았던 "크리퍼"들은 미지의 존재에 그저 놀라 공포에 휩싸인 인간들에 의해 공격받아 한 마리가 죽게 된다. 이런 상황은 물론 영화적으로 연출된 상황이지만, 이런 일련의 과정들은 모두 우리가 역사적으로 꽤 반복해왔던 일들이다. 영화에서 언급되었던 것처럼 우리가 외계인인 상태에서 이미 정착해있던 원주민들, 토착민들에게 외계인이라는 별칭을 부여하게 되는 우리의 습관, 이는 인간의 오만함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이 인간의 오만함을 비판하려고 하는 것인지, "마샬"의 행동, 그가 내리는 어리석은 지령들, 사람들의 "크리퍼"에 대한 인식들에서만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대사 속에도 깨알같이 이를 녹여내 표현하고자 했다. 또한 재밌는 건 작중 시점이 2054년이라는 점 그리고 인간 재생장치가 개발된 시점이라는 걸 감안하고 본다면 우주선 내부나 니플하임 속 개발 상황이 굉장히 최첨단이고, 하이 테크놀로지스러운 분위기를 취할 수 있을텐데 그렇지 않고, 노출 콘크리트 카페와 같이 배관이 그대로 들어나고, 각종 가스들이 여러 군데에서 분출되는 배경을 보여주어어 스스로를 굉장히 우아하고, 고결하다고 생각하는 인간들의 그 오만함을 깨뜨리는 또 다른 독특한 방법이었다고 생각한다.
- 반복되는 죽음에서 벗어나 온전히 '나'가 되어 성장하다.
16번의 죽음을 맞은 "미키". 어느날 기계의 오류인지, 과학자들의 실수인지 살아있는 상태에서 또 하나의 본인이 복제되어 "미키 17"과 "미키 18"이 공존하게 되는 상황에 부딪히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카이"가 죽는 것은 어떤 느낌이냐고 물었을 때, 이에 대해 "미키 17"이 죽는 것이 아직도 두렵다고 말하는 장면이 굉장히 인상적이다. 시간이나 목숨이나, 삶이나, 죽음 등을 뒤바꿀 수 있는 여타 영화들에선 반복되는 상황 속에서 그 반복되는 상황을 또 한번 맞닥뜨리게 되는 것들에 대해 그리 두려움을 느끼지 않거나 두려움을 느껴도 내색하거나 표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번 영화 <미키 17>에서의 주인공 "미키"는 반복되는 죽음, 16번째의 죽음이 이어졌음에도 아직까지도 죽음이 두렵다고 말하는 장면은 마치 '죽는 건 어떤 기분이야?'라는 점에 대해 영화가 직접 답을 해주는 것만 같았다.
영화 <미키 17>이 SF의 장르를 띄는 특징을 제외하고, 다른 어떤 장르를 차용했다고 생각하는지 묻는다면 필자는 주저 없이 '성장 영화'의 장르를 띄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물론 영화 해리포터 시리즈나 영화 <보이후드>처럼 성장 영화가 서사의 주를 잡고 있는 작품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작품을 전부 보고난 후면 영화가 성장 영화의 한 축을 서고 있음을, "미키"라는 인물이 성장했음을 그리고 최초에 영화가 타이틀을 보여줄 때 '미키 17~19'으로 넘어가는 장면이 종반부에서 '미키 반즈'로 변하는 과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결국 사고로 인해 "미키 17"과 "미키 18"은 공존하게 되었고, 이 둘은 '멀티플' 상태에 놓여지게 되었다. 신기하게도 "미키 17"의 온순하고, 착하면서 다소 멍청한 성격과는 달리 "미키 18"은 다혈질에 항상 화가 나있는 성격을 가졌다. 영화가 성장 영화적 특성을 지닌다는 특징은 "미키 17"과 "미키 18"의 성격 차이 그리고 그 성격 차이가 결국 서로 융화되어 변하게 되었다는 결론에서 드러난다. 항상 누군가를 '죽일 것이다.'라고 말하는 "미키 18"의 최초 살해 타겟은 바로 "미키 17"이었다. 당연히 멀티플 상황이 발생하면 누구 하나는 죽어야 둘 다 죽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때에 있어 "미키 17"은 늘 겪는 죽음이라 괴롭고, 공포스럽지만 이에 순응할 줄 알았으나 인상적인 대사 하나를 던지게 된다. '이번에 죽으면 정말 죽는 것만 같다.' 동일 인물이고, 두 인물 모두 하나의 몸에서 재생되어 서로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지만 "미키 17"이 죽는다면 "미키 17"으로서의 재생이 이루어지지 않고 현실에 남겨져 있는 "미키 18"이 그 삶을 이어나간다는 사실은 굉장히 복잡하면서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출된다.
서로를 죽이지 않는 상황이 이어지던 와중 "미키 17"이 "마샬"에게 받은 수모를 듣던 "미키 18"은 "마샬"을 죽이자는 결론에 도달하여 죽이려 다가가는데, 이 지점으로부터 영화의 변화가 시작된다. 계속해서 서로를 죽이려 하고, 서로의 존재를 탓하던 둘은 결국 서로에게 공감하고, 서로의 존재에 위안이 생겨 서로의 공통된 타겟인 "마샬"을 죽여야 되겠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는 이러한 인물의 관계의 변화뿐만 아니라 각 인물의 성격마저 변하여 결국 성장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미키 17"과 "미키 18"은 같은 사람이지만 다른 인물처럼 비춰지게 되고, 외양만 같지 사실은 다른 인물이라고 봐도 틀리지 않다. 그런 관점에서 "미키 17"의 고통을 다혈질적이고, 욱하는 성격의 "미키 18"이 공감하고, 위안하려는 모습, "미키 18"의 분노서린 성격을 억제하여 그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이 한 몸 바치려 하는 쭈굴이었던 "미키 17"의 변화가 이어진다. 이는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러 격발하게 된다. "마샬"은 급기야 "크리처"들과 전쟁을 펼치려 했고, 이를 저지하여 세상을 구하러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미키 17"과 "미키 18"은 밖으로 향한다. 각종 사투를 벌이다 스스로를 영웅 추대하러 나온 "마샬"을 죽이러 "미키 18"은 달려가 결단을 내리게 되는데, 그때 버튼 한 개만 누르면 "마샬"을 죽이는 동시에 본인도 함께 죽을 수 있는 상황과 부딪히다. 잠시 죽음에 망설이던 찰나, 그는 "미키 17"을 쳐다보고 버튼을 눌러 그를 희생해 세상을 구하게 된다. 늘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혈안되었던 "미키 18"이 결국엔 자신의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그 삶이 마무리되는 장면 은 "미키 18"이라는 인물의 변화를 보여주는 장면이면서 동시에 "미키 17"에게도 변화의 또 다른 밑거름이 되어준다.
"미키"의 여자친구이자 작중 가장 강단있고, 리더십이 있는 "나샤"가 위원장이 되어 더이상의 익스펜더블은 존재하지 않음을, "미키"도 익스펜더블로서의 무시와 멸시에서 벗어나 인간들을 구한 영웅임을 선포했다. 재생장치 폭파 버튼을 손에 쥐고 있던 "미키"는 빨간색 버튼을 보고 잠시 생각에 빠진다. 그는 어릴 적 본인이 빨간색 버튼을 잘못 눌러서 엄마가 사고로 죽었다고 생각한다. 사실 어느 누가 생각해도 억지라고 하겠지만 "미키"만큼은 너무도 이에 대해 진지해서 아직도 트라우마에 빠져있다. 생각에 잠긴 "미키"는 다시 과거 시간대로 돌아가 재생장치 앞에 서 있다. 그곳엔 소문으로 자살했다고 했던 "일파"가 있었고, 폭발로 사망한 "마셜"이 재생되고 있었다. "일파"는 그에게 너무도 심한 모욕서린 말들을 내뱉었고, 그녀의 손으로 붉은 피들이 모여 버튼의 형상을 띄게 되었다. 그녀는 본인의 특제 소스이니 한번 먹어보라고 전한다. 아마 그녀는 "미키"가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건 모두 "미키"가 그동안 살아오면서 겪었던 수많은 트라우마들이 모여 만들어진 허구의 세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키 18"을 만나 세상을 구하고, 희생을 배우고, 다름을 알아가며, 본인에게 주어진 마지막 삶에 기쁨을 알게 된 "미키"는 "미키 18"에게 배운 강단있는 모습을 보여주며 버튼을 눌러 재생장치를 폭파시킨다. 영화는 최종장에 이르러 "미키"라는 인물이 어떤 식으로 성장하게 되었는지, 성장하게 되어 어떤 선택을 하는지를 보여주면서 결론을 짓고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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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내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아이의 마음
끝내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아이의 마음
첫 장면부터 어딘가 외로워 보이는 프리다는 담담하면서도 위태한 표정으로 폭죽이 터지는 하늘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긴다. 이 영화의 대부분의 장면이 이렇다. 어딘가를 응시하는 프리다의 얼굴을 비추거나 프리다가 쳐다보는 대상을 비춘다. 가족 중 누구도 프리다가 외롭게 느낄만한 행동을 하지 않지만, 프리다는 그 속에서 왠지 모를 소외감을 느끼고 외로워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사랑받는 아이인지, 가족들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지 계속해서 확인하고 싶어 한다. 외숙모가 머리를 빗겨주는데 그 빗을 던져버리고, 일부러 신발끈을 못 매는 척 묶어달라고 하며 어른들의 눈치를 살피기도 하고, 아나가 가져온 배추를 자신이 가져온 것처럼 행동하기도 한다. 프리다의 이런 행동들은 아이의 사소한 장난 내지 투정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이런 프리다의 행동이 모두 웃어넘길 정도의 것은 아니다. 프리다는 아나를 숲에 놔두고 돌아와 모른 척하거나, 아나가 물에 빠지는 것을 보고만 있는 등 종종 선을 넘는 행동을 해 아슬아슬한 상황을 만들기도 한다.
그런 프리다를 미워할 만도 하지만, 아나는 프리다를 미워하지 않는다. 팔을 다치고도, 물에 빠진 후에도 오히려 계속해서 프리다의 곁에 있으려 하며 자신과 놀아달라고 말한다. 또한 아무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며 가출하려는 프리다에게 자신은 프리다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아나의 사랑과 관심이 프리다의 마음을 움직인 걸까, 한밤중의 가출을 계기로 가족들의 진심을 확인한 뒤, 프리다의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가 보이는 듯하다. 그런데 그렇게 가족들과 화목할 것 같던 프리다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린다. 이유를 묻는 가족들의 물음에 연신 모르겠다 답하며 서럽게 운다. 이 울음은 그렇게 확인하던 가족들의 사랑을 급작스레 깨닫게 되어 터진 울음으로도 보이지만, 그보다도 엄마의 죽음을 끝내 인정하고 받아들임고 동시에 터져 나온 울음으로 보인다. 외숙모가 생리통에 힘들어하자 불안해하고, 엄마가 어떻게 죽었는지 들으며 “안 아프실 거죠?”라며 재차 되묻던 프리다의 모습에서 외숙모는 엄마처럼 아프지 않다는 걸 확인하고 느끼는 안정감이 묻어났기 때문이다. 가족 중 가장 서먹해 보이던 외숙모와 프리다의 관계는 어쩌면 이때부터야 비로소 시작됐는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복잡한 상황을 이해하고 적응하는데 생각보다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는 감독의 말처럼, 영화는 한 아이가 ‘엄마의 죽음’이라는 상황을 이해하고 그것에 적응해가는 고정을 카메라에 섬세하게 담아냈다. 그렇기 때문에 <프리다의 그해 여름>은 아이의 마음에 폭 들어갔다 나온 것만 같은 인상을 준다. 불안한 시선으로 모든 것을 응시하던 프리다가 안정감 속에서 울음을 터뜨리기까지, 특별한 배경음악이나 인위적으로 감정을 자극하는 장면이 없음에도, 우리는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프리다의 마음에 공감하며 그 상황에 감정을 이입하게 된다. 이 영화가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배경에는 감독의 자전적 경험이 있다. 카를라 시몬 감독은 다른 사람들이 보고 비슷하게 느낄 순간을 영화화하고 싶었고, 자신의 1993년의 여름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실제로 영화의 배경이 된 카탈로니아의 가로트아 마을은 감독이 유년시절을 보낸 곳이며, 프리다가 가출했다 돌아오면서 “너무 깜깜해서 내일 갈 거예요”라고 말하는 장면의 경우, 감독의 경험을 그대로 살린 장면이다. 감독의 이런 자기 경험 투영은 영화의 사실감을 높였다.
또한 감독은 되도록 카메라를 한 장소에 두고 촬영하며, 배우들이 카메라의 시선을 모르게 영화를 찍었다고 한다. 이런 점은 이 영화의 자연스러움을 배가 되게 했다. 특히나 프리다와 아나의 역할놀이 장면은 영화에서 가장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장면 중 하나다. 여기서 프리다는 엄마를, 아나는 딸을 연기한다. 프리다가 연기하는 인물은 프리다의 엄마로 보인다. 엄마는 몸이 아프다며 딸과 놀아주지 않고 의자에 누워있는다. 이 장면은 프리다의 엄마가 어떤 사람이었을지 짐작하게 만들며, 둘의 역할놀이를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 장면을 포함한 영화의 모든 장면이 자연스럽다. 엄청난 사건이 일어나지 않음에도, 아이의 시선을 그대로 따라가며 섬세하게 표현함으로써 그것을 보고 듣는 관객에게 몰입감을 준다. 프리다의 감정을 그대로 따라가다 마지막 장면을 보며 그와 함께 느낀 감정은 아마도 기억에 오래 남을 듯하다. 이런 영화를 볼 때, 좋은 영화는 구태여 반복하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 느끼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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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질라 VS. 콩 - 훌륭한 메인 메뉴, 아쉬운 사이드 메뉴
한국에서 불모지에 가깝게 된 영화 장르 중에는 괴수물이 있다고 생각한다. 봉준호 감독의 "괴물"의 비평 및 상업적 성공으로 인해 주목받고 불타올랐지만, 이후 "7광구", "물괴"의 참패 이후 다시 사그라든지 오래다. 이렇게 한국에서 만든 영화 뿐만이 아니라 해외에서 제작한 영화도 그런 경향이 보이는데, 안노 히데아키의 "신 고질라"는 관객수 만 명도 못 모으고 퇴장하였고, 이번에 리뷰하는 고질라 VS. 콩이 포함된 몬스터버스의 전작 중 "고질라: 킹 오브 몬스터"도 관객수 350,000만명 대 정도밖에 흥행하지 못했다. 이렇게 한국에서는 괴수물이 해외에 비해 유난히 부진하기에, 이번 고질라 VS. 콩도 어느 정도 힘을 보일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었다. 하지만 예고편부터 조회수 7,600만회를 넘기는 등 많은 기대를 받는 것을 보아 대흥행까지는 어려워도 전작보다는 확실히 주목받겠다고 추측했는데, 지금 이 글을 쓰는 기준(21년 3월 30일)으로 이미 관객수 35만명을 달성함으로서 전작 고질라: 킹 오브 몬스터의 한국 관객수를 넘기는 것은 사실상 확정되었다. 본격적인 리뷰를 시작하기 전에 한마디 하자면, 고질라 VS. 콩은 괴수 매니아 뿐만 아니라 대중들에게도 충분한 재미를 선사하는 훌륭한 괴수물이다.
몬스터버스 작품들의 공통적인 비판점은 빈약한 인간들의 서사이다. 이러한 비판은 몬스터버스 작품 뿐만 아니라 타 괴수물에서도 대체적으로 보이는 비판점인데, 왜냐하면 괴수 영화의 알파이자 오메가, 즉 본질은 괴수가 도시를 때려부수는 장면이나 괴수간의 싸움씬이다. 이 장면들이 비율이 적거나 장면의 퀄리티가 빈약하다면 괴수물로서 탈락인 것이다. 그렇기에 괴수씬의 비율을 높이고 힘을 줄 수 밖에 없는데 그렇다보니 인간 파트가 줄어들고 줄어든만큼 표현이 줄어들 수 밖에 없다. 이번 영화에서도 여전히 인간은 괴수의 장소 이동 및 방관자, 도움, 그리고 응원(...) 정도 밖에 역할을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충분한 재미를 선사하는 훌륭한 괴수물이라 평한 이유는, 어찌됐던 간에 괴수 파트는 정말 잘 만들었기 때문이다. 본 작품은 몬스터 버스 유니버스의 사실상 마무리 같은 포지션이지만, 전작을 보지 않아도 충분히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왜냐하면 뒷배경을 몰라도 일단 괴수들이 싸우는 것은 재미있고 스케일이 엄청나기 때문이다. 괴수씬은 정말 버릴 장면이 하나도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모든 장면이 박진감 넘친다. 다만 이런 빠르고 화끈한 전개를 위해 개연성을 다수 버린 점은 정말 노골적으로 보이는 단점이다. 일부 장소의 이동이나 인물의 행동을 어찌저찌 해결되거나 우연, 에너지에 이끌렸다 식으로 해결하는 방법은 굉장히 안일하지만, 그대신 강력한 오락성을 얻었다고 볼 수 있다.
고질라 VS. 콩은 정말 괴수물로서의 본질을 훌륭하게 잡았다고 평할 수 있다. 괴수물의 주인공은 인간이 아닌 괴수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인지하고 선보였다. 다만 그렇기에 인간의 서사는 줄어든만큼 덜 지루하지만 여전히 빈약하다는 단점을 안고 가지만, 본질은 확실할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관객을 만족시킬 정도기에 덮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냥 화끈하게 두 괴수의 맞짱을 보고 싶다면 지금 바로 극장으로 달려가길 바란다. 코로나로 인해 썰렁해진 극장가에 "왜 영화를 영화관에 가서 봐야하느냐?" 라는 질문을 "이런 영화를 보려고." 라고 답할 수 있는 영화가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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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뮤지컬 영화 그 이상
8★/10★
뮤지컬 영화 그 이상을 본 것만 같다. 1964년에 제작되어 제17회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쉘부르의 우산〉 이야기다. 이 영화는 통상적인 뮤지컬 영화와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대사가 노래다. 지금까지도 여기저기서 들릴 정도로 인상적인 사운드트랙을 갖고 있기도 하다. 영화를 연출한 자크 드미 감독도 이 영화를 ‘시네 오페라’라고 부르며 음악성에 자신감을 표했다. 그러나 〈쉘부르의 우산〉의 장점은 음악성에서 그치지 않는다. 아름다운 음악과 어우러지는 드라마 역시 굉장히 강렬하다. 여러모로 〈쉘부르의 우산〉은 음악과 이야기에는 ‘진보’가 없음을 보여주는 영화다. 전자제품처럼 나중에 만들어졌다고 자연히 더 좋은 품질이 보장되지 않는 것이다.
영화의 주인공은 기와 쥬누비에브다. 둘은 모두 프랑스의 조그만 항구도시 쉘부르에 산다. 기는 자동차 정비공으로 일하고, 쥬느비에브는 어머니를 도와 우산 가게에서 일한다. 서로를 깊게 사랑하는 둘은 결혼을 약속한다. 하지만 그들 앞에는 여러 어려움이 있다. 우선 20살인 기는 아직 군대에 다녀오지 않았다. 더불어 16살의 쥬느비에브 역시 너무 어린 나이에 사랑만으로 결혼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는 어머니의 반대에 부딪힌다. 쥬느비에브의 가게 상황이 좋지 않은 것도 가난한 정비공 기와의 결혼을 가로막는 현실적인 이유다. 즉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한다는 것 말고는 그 무엇으로부터도 지원받지 못하는 상태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둘은 모든 고난을 극복할 각오가 되어 있지만 말이다.
상황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기에게 입영 영장에 날아오고, 둘은 급작스러운 이별을 맞이한다. 서로를 향한 둘의 마음은 여전히 굳건한데, 주변 상황은 자꾸 둘의 관계를 흔드는 상황도 반복된다. 부대 상황이 좋지 않아 자주 연락하지 못하는 기, 어머니의 설득과 핀잔에 점점 피로해져가는 쥬느비에브…. 그러나 결정적인 건 쥬느비에브의 임신이다. 임신으로 정신적‧신체적으로 취약한 상태에 놓인 쥬느비에브는 결국 카사르라는 남자와 결혼을 결심한다. 카사르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남자로 기의 아이를 임신한 쥬느비에브를 아내로 받아들이기를 결심할 만큼 쥬느비에브에게 진심이다. 쥬느비에브 역시 처음에는 내키지 않았으나 복잡한 상황과 불확실한 기와의 관계에 괴로워하기보다 자상한 카사르와 결혼하는 것이 더 좋겠다는 판단을 내린다.
알제리에서 돌아온 기는 뒤늦게 쥬느비에브의 소식을 듣고 좌절‧방황한다. 이제는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된 쥬느비에브의 우산 가게를 쓸쓸히 배회하고 술과 여자에 탐닉하기도 한다. 그러나 쥬느비에브가 카사르를 만나 위안을 얻었듯 기에게도 또 다른 여인, 사랑이 찾아온다. 기는 이제야 몸이 아픈 자신의 대모를 오래전부터 간호해온 마들렌의 존재가, 그리고 자신을 좋아하는 마들렌의 마음이 눈에 들어온다. 마들렌은 기가 쥬느비에브에게 실연당한 아픔을 자신에게서 보상받으려 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지만 기의 진심을 확인하고는 그와 결혼식을 올린다.
서로를 누구보다 사랑했던 두 연인은 얄궂게도 서로 다른 사람과 결혼해 서로를 잊은 듯 살아간다. 영화의 마지막은 기와 쥬느비에브의 우연한(혹은 의도된) 만남으로 마무리된다. 각자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는 둘은 짧은 몇 마디 말로 제대로 매듭짓지 못한 지난 세월을 아련히 회상한다. 더불어 누군가는 서로가 여전히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을 조심스레 내보이고, 다른 누군가는 그 가능성을 단호히 잘라낸다. 운명과 사랑의 엇갈림을 절묘하게 포착한 이 장면은 비극(기와 쥬느비에브의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과 희극(새로운 사랑을 만나 행복하게 살아가는 둘)이 동시에 공존하는 삶이라는 드라마의 가장 극적인 순간을 함축적으로 전달한다. 〈쉘부르의 우산〉은 사랑, 음악을 다루는 영화의 계보에 오래도록 기록될 수작이다.